중화민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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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69362242_82f7c601e2_b.jpg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의 총통 취임식 부속 행사로 치러진 공연에 등장한 대만 문화의 상징들.

대만의 문화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1 개요

대만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중국 각 지방에서 이주해온 서로 다른 중국인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다가 토착 원주민들의 문화, 남방 특유의 지리와 풍토, 또 무엇보다 현대 대만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정체성 문제가 혼합되어 분명 중국풍이지만 본토 중국과는 다른 문화가 만들어졌다.

대만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문화를 계승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본토인들이 문화대혁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병크를 저지를 때 대만인들은 그 반동으로 중화문명부흥운동(中華文化復興運動)이라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의 전통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때, 중화민국의 중국 전통 문화를 일찍이 중시하고 보존한 노력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 민남어와 객가어 등의 토착문화는 억압받았다는 흑역사도 있다(...)[1]

반면에 21세기 초반에 들어서 타이커(臺客)라는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샌들을 신고 빈랑 열매를 질겅거리는 전형적인 도시 대만인의 이미지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 된 것. 또 대만어(민남어)로 된 노래나 영화도 예전에 비해서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즉 대만 문화는 중국 전통문화의 보존으로 대표되는 '정통적인 중국'이고자 하는 노력과, 이제까지 빛을 발하지 못했던 '대만' 고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의 상충과 혼합이라고 볼 수 있다.

2 음식

중화 요리의 지역 계통적 분류
4대 요리광동 요리 · 산동 요리 · 사천 요리 · 강소 요리
8대 요리안휘 요리 · 복건 요리 · 절강 요리 · 호남 요리
그 외베이징 · 상하이 · 호북 · 운남 · 타이완 · 청진
해외의 중화요리한국식 · 미국식 · 일본식

식문화는 기본적으로 중국 각지에서 이주해온 중국인들의 식문화가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외성인들은 중국 본토에서도 높으신 분들, 엘리트가 많았기에 대만인들은 중국 요리가 대륙보다 대만에서 더 잘 이어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를 얻고있는 버블티를 최초로 개발한 나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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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값이 대한민국에 비해 엄청나게 싸다. 거의 갈비찜 수준으로 고기가 잔뜩 들어간 국수, 즉 니우러우미엔(牛肉麵. 우육면)이 한화로 2,500원,[2] 새우, 전복 등 비싼 해물이 엄청나게 들어간 국수가 2,000원이 안된다. 다만 이것은 집에서 거의 요리를 만들어 먹지 않는 습관 때문에 외식문화가 발달한 결과다.한국은 포장을 열심히 하느라 그만 게다가 중국산으로 단가를 맞추려 하면 못할 것도 없다. 직접적으로 비교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게다가 대만의 평균급여는 한국보다 훨씬 적은데,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임금동결로 2012년 현재 대학교 졸업 후 받는 초봉의 평균은 월 22624대만달러(약 월 80만원)# 그리고 평균 연봉은 연간 438768대만달러(약 1650만원)#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최하위, 대한민국의 40% 수준이므로 대만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저렴한' 값이 아니다. 중화민국/경제 참조.

음식에 따라 기름을 많이 사용해서 맛이 느끼하며 쯔란,샹차이(고수) 등의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들이 있어 한국인들의 입맛에는 더러 안맞는 경우가 있다. 사실 어느나라 음식이던 다른나라 사람끼리의 음식은 입맛에 적응하기가 어렵긴 하다. 기름이 들어가서 그런지 요리에는 항상 녹차가 나온다.

'빈랑'이라는 나무열매를 시도때도 없이 씹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습관성이 있는 이 열매는 일종의 씹는 담배로 각성효과가 있는데 주로 운전기사나 노동자들이 씹고 다닌다. 피 같은 벽돌색 침이 줄줄 나오는 부작용이 있다. 심지어 구강질환의 원인까지 되기도. 대만의 길바닥에 붉은 자국이 있다면 혈흔(!)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3] 빈랑 씹는 이들이 뱉어놓은 것일 뿐이다. 중독성이 있으니 호기심으로라도 씹어서는 안 된다.

남방 국가라서 과일이 다양하다. 냄새가 고약한 취두부도 유명한데 야시장에서는 어김없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여행 오는 사람들은 힘들어한다. 또한 중화민국뿐만 아니라 아시아권, 서양권에도 널리 퍼진 버블티를 최초로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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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리수(鳳梨酥)라는 과자가 유명하다. 파인애플(鳳梨)을 넣은 과자로 관광객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쉽게 이해하자면 천안 호두과자가 국가 대표급으로 만들어져 팔리는 셈. 다만 가게에 따라 진짜 파인애플이 들어가지 않고 파인애플"향"만 첨가된 잼을 넣어서 만든 것도 있으므로 평이 괜찮은 것을 알아보고 먹어야 한다.하지만 싸서 주변에 선물하기는 좋다. 싼만큼 맛은 그닥(...) 우리나라에서도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면 보인다.

3 예술

3.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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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에는 무협물 중심으로 홍콩과 거의 맞먹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현재는 허우샤오셴, 고 양덕창, 차이밍량 같은 유명한 예술 영화 감독이나 주걸륜, 계륜미 등의 배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 이안 감독은 헐리우드로 건너가 많은 히트작을 배출하여 헐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도 비록 홍콩 영화의 명성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가끔 대만 영화가 소개되곤 했다. 추억의 영화가 되어버린 <호소자> 시리즈가 꾸준히 한국에 개봉되면서 여기 나온 아역배우들이 나온 다른 영화까지 호소자 시리즈로 속여 한국에 개봉됐던 적도 있다. 그 밖에 90년대 위성방송 VJ로서 한국에서도 유명했던 오대유(吳大維)[4]가 나온 영화 <우리도 할 말은 있다>가 개봉된 바 있으며 쿵푸 덩크나 말할 수 없는 비밀같은 영화들이 꾸준히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자국 영화가 아주 작살났다. 상영하는 영화 중 헐리우드 영화가 90% 이상을 차지하며 자국 영화의 입지는 나날이 좁아지고 있다. 자국 영화시장도 큰 수익이 없거니와 엄청난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음악과 같이 영화 시장도 작살이 났기에 자국 영화 제작 편수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대중성 있는 영화들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니 제작 편수가 자연히 줄고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도 덩달아 피해를 보고 있는 중.

이런 가운데 2008년에 개봉된 대만어 영화 <해각7호 (海角七號)>가 초유의 대박을 치기도 했으며, 80년동안 잊혀졌던 항일 소수 원주민 시디그 족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시디그 베일>이 대만 역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5]로 만들어져 2011년 9월 개봉해 상당한 흥행을 기록했다.

2010년 이후 이러한 처지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강한 중국으로 영화 제작진들이 건너가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검열과 심의가 엄청난 중국에서 제대로 제작을 하기 어려워 되돌아왔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만에서조차도 영화 관련 일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인력들이 있어서 대만에서도 문제시되고 있다.

대만내의 사정과는 별개로 최근 한국에서 대만영화는 청춘, 로맨틱코미디, 멜로를 중심으로 은근히 인기를 끌고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시작으로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나의 소녀시대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대상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대만 영화 특유의 영상미가 어우러진 점이 인기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고 있는 점도 인기의 이유로 들 수 있다.

3.2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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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음악은 대부분 표준중국어[6]로 불린다. 다만 일부, 특히 음악이나 독립음악 등 비주류에 속하는 장르는 대만어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K-POP일본 음악영어가 많이 섞이듯, 노래 가사에 일본어가 자주 들어가기도 한다. 일본 문화에 익숙한 국가인지라 별로 어색한 일은 아니다.

70년대에는 가수 등려군이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특히 노래 '첨밀밀'은 당시 한국에서도 유행한 노래였다. 싱가포르 출신 싱어송라이터인 손연자(孫燕姿)가 대만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기를 얻기도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은 손연자를 대만인으로 착각할 정도. 사실 손연자 말고도 그동안 동남아 화교출신 가수지망생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대만이었다. '꽃보다 남자'의 대만버전 드라마 <유성화원>에 나온 F4는 유명세를 얻자 가요계에도 진출했다. 실제로, 나는 가수다의 중국판에서 대만의 가수들이 심심치않게 중국의 가수들을 쳐바르는 모습이 많이 나오기도 한다.

1990년대 대한민국이 1세대 아이돌 전성시대였을때, 대만의 가수들이 한국 노래를 많이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대만 가수는 서회옥.

대만의 대중가요계는 일본 가요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탄탄하고 저변이 넓다. 장르적으로도 댄스, 발라드, 록, 힙합 등 다양한 음악이 사랑받고 있고 10대 아이돌 가수부터 중장년 가수들까지 차트 상위권에 오른다. 한국 가요계가 아이돌 그룹이 주류라면 대만 가요계는 싱어송라이터가 주류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도철(陶喆), 왕리홍(王力宏)이 인기를 얻고 2000년대 초반 주걸륜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이른바 '3대 싱어송라이터 시대'가 시작됐다. 한국이 H.O.T 등 1세대 아이돌을 시작으로 아이돌이 대를 이으며 인기를 얻었듯, 대만에서는 이들의 뒤를 잇는 싱어송라이터가 줄줄이 쏟아지며 가요계를 주도하고 있다.

여성 솔로 가수로는 장혜매채의림 등이 중화권의 디바로 군림하고 있다. 록 음악도 주류 가요계에서 인기가 높으며 오월천(五月天)이라는 밴드는 십여년째 '국민 밴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이돌 그룹은 많지도 않거니와 인기도 그닥 없는 편이다. 그나마 2001년 데뷔한 3인조 걸그룹 S.H.E가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하며 레전드 아이돌이 됐다.

한국, 일본, 중국과는 달리 뮤직뱅크인기가요, 쇼! 음악중심같은 음악 공연 TV 프로그램이 거의 없다. 방송에서는 예능, 쇼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는 편. 때문에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 등에 출연해 자기 노래 한곡 부른 뒤 토크하는 경우가 많다. 대신에 오프라인 행사 공연이 많은 편이다. 새 앨범을 낼 때마다 簽唱會라고 하는, 거리 공연과 팬싸인회를 겸하는 행사를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연다. 줄만 잘 서면 주걸륜이나 채의림 같은 중화권 레전드 가수들의 공연을 공짜로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셈이다.

나무위키에 등재된 대만 가수 목록

3.3 아이돌 산업

상술했다시피 대만 가요계는 싱어송라이터가 주축으로, 한국과 같은 아이돌 그룹은 철저히 비주류다. 대만 내에서도 중화권을 공략하기 위한 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시스템이 없는 건 아니나, 대만과 중국 시장이 워낙 작고 인기도 없어서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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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현재는 "Dears"라는 걸그룹이 대만 내에서 인기를 많이 누리고 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돌 그룹은 인기가 매우 미미한 편.

3.4 만화

3.5 서브컬쳐

서브컬쳐 관련해서 가장 대우가 좋은 나라로서 웬만한 작품들은 거의 다 정발되고 있다.[8] 오죽하면 마이크로소프트 실버라이트의 각국 홍보 사이트 중에서 대만판 사이트만 특별히 일본판 사이트에도 없는 모에화 캐릭터[9]를 홍보용으로 내세울 정도다. 다만 이건 21세기부터의 일이고 1990년대까지는 서브컬쳐물에 대해 이미지가 썩 좋지는 못했다(...) 그래도 만화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2000년대부터는 괜찮은 편.

중국에 수입되는 일본 서브컬쳐들도 대부분 중화민국의 중국어 번역본들을 2차 수입해온 것들이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대만이 음성 더빙을 한 작품을 중국에서 정체자들을 간체화하고 제목이나 몇 가지 자잘한 것들만 대륙식으로 수정해 발매하는 것들이 많다.

대만의 오덕 수백명이 니코니코 조곡을 합창한 동영상이 뜨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그에 대한 답가까지 불러줬다. 정치인들도 일본 만화를 즐겨본다고 하며, 국민들도 일본어를 적극적으로 배워서 최근에는 가나 문자가 잡지 등에서 흔히 쓰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친일국가가 되고 있다. 쿠메타 코지는 대만에서 팬사인회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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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시 프론티어(開拓動漫祭(개척동만제))라는 동인 행사가 있으며, 중화민국(대만)의 최대 동인행사이자 일본 코믹 마켓 다음으로 세계에서 큰 동인행사이다. 흔히 FF로 줄여 부르며, 이 FF에는 정부지방자치단체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관심이 매우 뜨겁다. 일본은 서브컬쳐가 어느정도 사회 주류에서 왕따가 되는 편이지만 대만은 전혀 다르다. 정치인들이 당당하게 오타쿠 인증을 하는 곳이 바로 대만이다! 예를 들어, 2010년 중화민국 지방선거(신베이 시장)와 2016년 제14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일합을 겨뤘던 중국 국민당주리룬민주진보당차이잉원(2016년 당선된 총통) 둘다 오타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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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박넴이 보인다.


2016년 1월 30일 팬시 프론티어차이잉원 총통 당선인이 직접 방문하면서 오타쿠 인증을 찍었다.

3.6 비디오 게임

게임 제작 또한 많이 한다.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대만제 게임들로는 슈팅 게임 던 레이더, SRPG 용의 기사 2, 3D 롤플레잉 게임윈드 판타지 택틱스[10], 대전액션게임 삼국지 무장쟁패, 오락실 액션 게임 삼국전기 등이 있다. 대만제 게임들은 주로 패키지 게임이 흥했던 1990년대에 대거 들어와 한국 게이머들에게 인상을 남겼다. 덕분에 던 레이더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글화 정발로 발매될 수 있었다. 특히 삼국전기는 오락실 게임인데도 불구하고 국내에 한글화 정발되었다. 다만 한국 못지 않게 일본 게임의 아류가 많은 편이다.

FPS 게임에 약한 것으로 보인다. 카스건, 퀘이크건, 배틀필드 시리즈건, 날고 기는 한중일 플레이어들의 기량에 밀려 인간탑재 봇 노릇을 하는게 일상다반사다. 허나 AOS 게임에는 일가견이 있는지 대만 출신의 게임단 타이페이 어새신스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오락실도 꽤 있고 태고의 달인 같은 게임이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처럼 게임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시장규모가 제법 큰 몇 안 되는 나라이다. 그 일례로 코나미의 아케이드용 네트워크 시스템인 e-AMUSEMENT가 최초로 개통한 해외시장이 바로 이 대만시장.

Cytus, Deemo 등의 모바일 리듬게임으로 유명한 게임 제작사 Rayark 또한 대만 소재 개발사이다. 2011년 9월 설립된 신생회사지만 절륜한 퀄리티로 모바일 게임계의 신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중.

강철소녀라는 게임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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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도 은근 많이 만드는데, 위의 사진은 우항(雨港)이라는 별명이 있는 지룽항을 소재로 한 우항지룽(雨港基隆)이라는 미연시다.(...)

과거에는 인구라는 한계점으로 인해 수요가 기대 이하인 시장으로 여겨져 외면받던 경우도 있었으나 2014년 쯤을 전후로 대만에 번체중문화된 해외 게임이 정식 발매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대만 자체 내 수요보다 많은 수량이 유통되고 있다. 이는 각종 규제와 심의 문제로 중문 게임 출시가 안 되어 곤란해하던 중국 게이머들이 이런 면에서 자유로운 대만에서 출시되는 번체중문화 타이틀을 직구하거나 다운로드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우회 판매이다.

4 방송

1962년에 대만 최초의 TV 방송이 송출되었다(TTV). 이후 수십년 내내 대만 TV의 주요 채널에서는 각종 국내외의 영상 작품들이 방영되었고, 특히 1990년대 이래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대만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어 대만 청소년 중에 애니덕후가 급증하였다. 대만의 애니덕후들은 심지어 蔣中正到龍猫的取代(장제스토토로로 대체하자)라고까지 한다.[11]

한편, 당시 대만은 경제력이 한국보다 앞서있었던 관계로 TV방송 시작이 늦었음에도 TV가 한국보다는 일찍 보급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국영방송이 주류였음에도[12] 불구하고 과도한 광고[13], 국영독점다운 친정부 일색의 성향과 과도한 정부선전, 산악지형으로 인한 난시청지역이 많은 국토의 특성 등으로 인해 일찍이 본성인들을 중심으로 케이블TV가 보급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레코더가 널리 보급되면서 외국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을 녹화 방영하거나 자체제작 프로그램을 방영하기 시작한 케이블 방송도 등장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국민당 정부에선 케이블TV를 불법으로 지정하고 탄압에 나섰지만 케이블TV의 확산을 막을수 없었고 결국 리덩후이 정부하에서 케이블TV 양성화 정책과 채널수 확대[14] 정책을 폈다.

이 시기 방송에 대해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하면서 채널 수가 급속히 늘어나고 이에 따라 방송시장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지만 TV채널이 시장규모에 맞지않게 너무 과도하게 많아지는 바람에 채널당 분배되는 파이가 너무 적어지고 설상가상으로 국산TV 프로그램의 방영 쿼터제가 폐지되면서 케이블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외국의 TV프로그램을 잇따라 수입하면서 외국TV 프로그램에 의존하게 되었고, 기존의 자체 제작프로그램들은 광고수입이 크게 줄어듬에 따라 중국과 합작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방송사 재정기반의 부실화에 따라 자체제작 프로그램의 제작비도 급속히 줄어드는 바람에 프로그램의 저질화도 가속화되어 국민당 1당 독재시절과 다른 의미로 방송계는 막장이 되고 말았다. 어느정도의 수준이나면 지상파 채널이 15개에(물론 MMS시행으로 채널수가 15개인것이다.) 종합편성채널이 20개나 허용되어있고 24시간 보도채널이 한국은 2개정도인데 반해 대만은 9개씩이나 된다. 거기에다가 중국처럼 각 방송사에서 채널을 여러개 소유하고 있는 건 기본이다. 이러니 제살깎아먹기식으로 경쟁이 이루워질수밖에 없는것이다.[15]

애초에 인구가 한국의 반 수준에 불과하고 이미 기존의 광고규제도 느슨했었다보니,(이미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지상파TV에서도 중간광고가 허용되었던 레벨이다.) 아무리 규제 완화를 한다해도 한계치가 있는데 이런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방송 규제를 완화하면서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게 되었던것이다.. 물론 지상파 방송이 몰락한건 덤으로 5대 지상파 방송사 시청점유율을 합해도 전체 시청점유율의 1/5에 못미치는 수준이 되었다. 그나마 수입 프로그램에 대한 의존이 문제가 되면서 국산 프로그램 방영 쿼터제를 부활시키기는 했고, 이러한 쿼터제를 확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지만 그런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재정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기에 앞으로도 나아지기는 힘들듯 하다. 재정이 얼마나 막장화 되었냐면 명색이 지상파 방송국이라는데가 케이블 종편사에 얽혀살고 있는데도 있고, 부동산 수익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는 방송사들도 있으며 심지어 뉴스에도 PPL이 나올정도고 이런 PPL의 경우에는 일반뉴스와 구분도 되지않다보니 대만 언론의 질을 떨어트린다는 원인 중 하나라는 한탄이 나올정도다.

5 인형극

포대희 참조

6 스포츠

중화민국/스포츠

7 종교

대만의 종교는 전통적인 불교도교, 유교, 그리고 이 세 가지가 혼합된 민간종교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사원은 이름에 쓰이는 글자를 통해 구분할 수 있다. ‘사(寺)’자를 사용하는 불교의 대표적인 사원은 룽산쓰(龍山寺), ‘궁(宮)’자를 사용하는 도교의 대표적인 사원은 즈난궁(指南宮), ‘묘(廟)’자를 사용하는 유교의 대표적인 사원은 쿵쯔먀오(孔子廟)이다.

2005년의 자료에 의하면 대만 정부에 등록된 재단법인 혹은 사단법인의 종교는 불교, 도교,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이슬람, 일관도 등 16개가 있다. 2000년 내정부 통계에 의하면 대만 지역에 등록 사찰이 9,413개이고 전국적인 종교 재단법인은 145개, 사단법인은 300개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찰과 종교 단체가 일하고 있는 곳이 대만이다. 그러나 실상 寺, 宮, 廟 안에 들어가면 유교, 불교, 도교만 합쳐진 것이 아니라 민간 종교까지 혼합되어 있다.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이지만, 민간에 직접적으로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풍속과 인생관,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민간 신앙이다. 이는 민간신앙이 대만 사회의 주요한 문화현상이며 사람들의 정신을 안정되게 하는 문화 종교의 구실도 하는 이유에서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념만큼이나 사람마다 믿는 민간신앙의 종류는 신, 사람, 귀신 등으로 다양하기 때문에 민간신앙을 믿는 사람이나 종류를 쉽게 숫자로 파악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만 사람들은 민간 신앙이 불교, 도교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어 종종 자신이 믿는 종교가 민간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 종류를 파악하기도 힘들다. 신앙의 대상들은 천지, 일월성신, 인류, 사회, 국가, 민족에 중요한 공헌을 한 위인 각종 종족의 조상 이외에도 직능에 따라 개척 신, 토지 신, 향토 신 등으로 구분을 한다. 이는 도교가 후한 때 장도릉이 창건한 하나의 고대 정령 신앙이었고, 노자의 사상과 유가, 불교가 섞인 종교로서, 오랜 변천 과정을 거쳐 남방 도교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만의 민간 신앙은 도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도교의 색채가 짙고 민간 신앙과 도교를 혼동하는 이들도 적지 않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편의점이 잘 되고 가장 많은 나라가 대만이다. 먼저 실질적으로 편리해야만 뭐라도 된다. 우선 싸야 되고, 편리해야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 종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 대만인의 삶 속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시장이 사찰이나 궁 앞에서 시작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공을 들이면서 시장도 볼 수 있는 편리함을 위해서 이다. 이들은 현재의 생활과 삶에 직접적인 것을 이야기 할 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종교가 세상과 무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들은 종교와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리스도교는 대만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편한 종교이다. 그나마 널럴한 분위기인 개신교는 덜하지만, 가톨릭과 정교회의 경우 교회에서 정한 미사(성찬예배) 시간에 가야 하고, 당장 실생활에 그리 큰 유익을 주는 것 같지도 않고, 각종 신심 행위나 모임 등의 종교의식 등이 그들의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수준 높은 삶이라고 느낀다. 많은 선교사는 대만 복음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불교, 도교 등 전통 종교 뿐 아니라 조상의 위패, 재물신 등의 사당을 차려놓고 복을 구하는 다신교적 사상을 손꼽는다. 절대 다수의 대만인들은 자신이 모시는 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역시 여러 많은 신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즉 "당신이 믿는 신도 좋고, 내가 믿는 신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확산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같은 배경으로 인해 특별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배척이 없지만, 유일신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아울러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을 경우, 조상신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선뜻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온 집안 식구들이 수시로 사원을 찾아서 절을 하며 조상을 숭배하는데, 이를 거부하면 가족으로부터 모진 눈치와 핍박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대만 사회에서 그나마 가족간 공동체 의식을 형성해주는 중요한 매개체인 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배반이라는 생각이 이들의 사상에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실생활과 동떨어진 종교는 대만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대만의 그리스도교 현황은 이러한 상황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또한 성직자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아서 성인에 가까운 수준을 요구한다.

8 성 문화

의외로 국민당 일당독재 시절에 공창제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성매매가 합법이었고, 매춘이 불법화 된 건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으로 취임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면서 사창가를 쓸기 시작하고 여론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99년에 공창제 폐지법안이 통과되었고 2년 후인 2001년에 공창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그러나 공창제 폐지 이후에 매춘업소가 오히려 음지로 숨어드는 바람에 부작용이 속출하여 2011년에 매춘이 다시 합법화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성매매 특구가 지정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불법이었다가 타이중 일부 행정구역에서 허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다시 허가되었다. 대만의 매춘 항목 참조. 물론 그와 별개로 성매매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길가에서 외설스런 복장을 입고 뭔가를 파는 젊은 여성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절대로 매춘부들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 것. 빈랑에다가 향료 따위를 넣고 파는 빈랑소녀들이다. 다만 가끔 빈랑을 팔면서 가벼운 스킨쉽을 하는 여자들도 있고 빈랑을 팔면서 매춘이 이뤄지는 곳도 있다고는 한다.

동아시아 국가치고는 의외로 동성애자, 양성애자임을 공개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다. 2003년에 동성결혼 합법화를 검토한 적이 있었지만, 이 때는 민진당이 입법원에서 과반을 차지하고 있을 때도 아니고 상당히 보수적인 여론이 많았던 지라 무산되었다, 그래도 이때 당시에 많은 개혁이 이루워지기는 해서 동성애자에 대해 많이 관대해진 것도 사실. 그리고 2016년 대선에서 차이잉원이 총통 선거에서 압승하고 입법원에서도 민진당이 과반을 훌쩍 넘은 지라 적어도 2010년대 후반에는 동성결혼 합법화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Deep Dark Taiwan 대부분의 대만인 젊은 세대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있다. 2015년부터 타이베이, 타이중. 가오슝에서 동성커플을 공인하고 증명서를 발급하거나, 원한다면 호적에 기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2016년 2월 1일부터 신베이. 타이난에서도 가능해졌다. 물론 장노년층들은 동성애에 대해 썩 관용적인 편은 아니고, 사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 꽤 존재하기는 했다.

9 신문

대만은 같은 한족 국가인 어느 땅덩어리 큰 나라와는 달리 언론자유가 대한민국보다 높은 [16] 국가여서 그런지 신문의 발행이 자유로운 축에 속한다. 대만의 4대 일간지의 평균 발행부수는 50~100만 부 내외로 인구에 비하면 좀 많이 발행하는 편.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중국시보(中國時報), 연합보(聯合報), 자유시보(自由時報), 빈과일보(蘋果日報)[17]가 있다. 이중 중국시보와 연합보는 친 국민당 성향, 자유시보는 친 민진당 성향으로 분류되며 빈과일보는 정치적인 스탠스에 있어서 기존의 3대 신문사와는 다르게 정당에 구애받는 성향은 아니지만 반중성향을 강하게 띄고있다. 이외에도 1966년부터 2006년까지 발간된 중앙일보(中央日報)도 있었는데 중국국민당의 기관지이다. 한때는 1위 신문사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때도 있었지만 1980년대 후반-90년대의 민주화 바람으로 중국시보, 연합보는 물론이고 자유시보에게도 밀리는 처지가 되었고 2000년대에 적자가 누적되어 결국엔 2006년에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다만 인터넷 홈페이지는 계속 운영중이라 완전 폐간은 아니다.

대만의 신문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신문이 굉장히 알록달록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좋게 말해 알록달록이지 깔끔한 한국식, 혹은 일본이나 구미권 신문 편집에 익숙한 타국 사람들이 보면 거의 충공깽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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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중앙일간지의 모습. 절대 찌라시가 아니다! 전국 대상 중앙일간지다! 이정도면 대만에서도 약과(...)에 속한다.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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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과 공포의 대만 일간지 으어어.... 우리나라도 눈테러니 뭐니 인터넷에서 워낙 자주 써서 그렇지 종이신문이나마 이러지 않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자 [20] 스포츠신문이다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의 신문은 지금에 비하면 상대적일 지언정 꽤나 깔끔한 편이었다. 현재와 같이 신문이 난잡해진 것은 빈과일보의 대만 진출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빈과일보가 홍콩에서 창간되었을 때부터 전면 컬러 인쇄와 자극적인 제목 선정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신문의 노골적인 상업화와 연성화로 비판이 많았는데 대만의 빈과일보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고 첫 판매부수만 56만부를 찍는 등 대박을 치면서 2000년대 초반에 창간했음에도 수위권의 언론사에 등극했다. 반면에 지방언론사들이 속속 파산하고 메이저급 언론사들도 불황에 허덕이자 다른 일간지들도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자극적인 편집을 하게 된 것. 한때 대만 빈과일보에서 넥스트TV(壹電視)라는 보도채널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모 기업인 빈과일보로 인해 자극적인 BGM 남발과 온갖 현란한 자막 효과로 뉴스를 도배했고 이후 넥스트TV가 타 채널에 매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이 이미 모든 뉴스채널로 확산되어(...) 대만의 텔레비전 뉴스(지상파든 종편이든 전문채널이든)를 보면 굉장히 어지럽다. [21]

10 기타

현지인 대부분이 더치 페이에 엄청 신경 쓰는 편이다. 1원이나 10원 정도의 작은 돈도 다른 사람이 내주겠다고 하면 거절한다. 정말로 잔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내주는 경우에도 미안하다고 하면서 1원이라도 나올 때까지 온 짐을 뒤진다! 원래 중국인은 개인주의자들로 철저히 네 것은 네 것, 내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구화된 대만은 그 경향이 더 강하다. 홍콩이나 마카오,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상기 된 것과 다르게 사실 더치 페이를 엄청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다.친한 사이끼리는 서로 주거니 받기니 하기도 한다.

대만의 제헌절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22] 성탄절과 같은 12월 25일이 대만의 제헌절이라 한국,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레바논, 필리핀과 함께 아시아에서 성탄절이 공휴일인 나라였다. 지금은 교회 관련 기관•학교를 제외하고는 쉬지 않는다.

중국과 이래저래 연관이 많지만 일단은 사실상 다른 나라인지라 중국/대만 쪽으로 진출하는 기업은 항상 상표 등록, 사이트 제작 등 모든 부분을 중국 쪽과 대만 쪽으로 따로 신경써줘야 한다. 하다못해 게임 사이트나 서버조차도 따로 지정해 주어야 한다. 일례로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은 중국 웹사이트와 대만 웹사이트를 따로 제작했는데, 그것도 그냥 글자만 각자의 언어에 맞춰 바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별개의 디자인으로 생판 다른 사이트들을 만들어 놓았다! 이래저래 진출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귀찮은 상황. 스타크래프트2 서버통합 때의 헬게이트를 떠올려 보라

대만에서는 오토바이가 주 교통수단으로, 대만에 살고 있는 현지인에 의하면 바깥에서 잠시 돌아다녔을 뿐인데 집에 돌아와서 세수를 해보니 시커먼 먼지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길거리 주변을 걷다 보면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의외로 한류의 원조격인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가수 클론이 대만에서 크게 히트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대만 화교들은 한류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핸드폰이나 MP3에 한국 노래를 넣고서 듣고 다닌다. 한국 연예인에 전혀 관심 없는 한국인도 이들과 같이 있으면 자연스레 알게 될 정도.

11 관련 항목

  1. 다만 본성인들의 토착문화에 한하자면 푸젠성과는 큰 차이점이 없다. 본성인들 대부분이 푸젠성에서 온지 생각보다 오래지나지 않았기(1600-1700년대) 때문이다.
  2. 다만 제법 이름있는 식당에서 파는 것은 한화로 6,000~7,000원 안팎 정도쯤으로 비싸진다. 특히 타이베이에서도 맛집들이 모여있기로 유명한 둥먼(東門) 지하철역 근처의 식당들은 꽤 비싼 편. 물론 한국의 면 요리 맛집들과 비교하면 이것도 싼 편이긴 하다.
  3. 정도가 심했을 때는 공항에도(!) 핏자국 같은 찌꺼기들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놀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4. 호소자 4에서 발명가로 나왔다.
  5. 오우삼을 비롯한 홍콩 제작자들이 투자했다.
  6. 대만에서는 '국어'라고 한다.
  7. 보컬이 대만 자치권을 얻기 위한 정치운동도 하고 있다.
  8. 사실 한국만큼은 아니다. 일본서브컬쳐 작품의 한국 정발은 굉장히 문턱이 낮아서. 오죽하면 일본에서도 한국에 수출하는 정도로는 세계진출로 치지 않는 수준이다(....) 진정한 츤데레 국가들
  9. 아이자와 히카루라는 캐릭터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10. 무인편과 스페셜(SP)만 국내 정발되었다.
  11. 中正은 장제스의 본명
  12. 다만 운영형태상으로는 민영방송이었다. 실질적으로는 국영방송으로 운영되었지만 1980년대 당시 KBS와 MBC가 실질 운영형태는 국영방송이었음에도 공식적으로는 공영방송으로 운영되었던것과 비슷하다,
  13. [1]
  14. FTVPTS의 방송이 시작된 것도 이시기다.
  15. 여기에 대해서 참고할만한 보도내용이 있다.
  16. 2014년 기준 대만이 50위로 대한민국은 57위
  17. 홍콩에 있는 그 빈과일보가 맞다. 2003년 대만판 발행을 시작했다.
  18. 대만의 중국시보로 대만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 지상파인 중국 텔레비전을 보유하고 있으며, 쌀과자로 재벌 일군 왕왕그룹(旺旺) 계열이다. 좌측 상단에 자세히 보면 해당 기업의 마스코트가 보인다. 우리나라의 조선일보 뺨치는 보수 성향과 친중 성향은 덤(...)
  19. 사실 원래부터 이렇게 까지 친중성향은 아니었는데 창업주가 국민당원이었던 관계로 독재정권 시절에는 친 국민당 성향이기는 했지만 야당에게 그나마 유했던 측에 속했던 언론사였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으로 친다면 한국일보나 8-90년대 동아일보와 비슷한 스탠스의 신문사였다. 그러나 경쟁언론사가 속속등장한데다가 2002년에 창업주가 사망한 뒤, 여러가지 상황으로 경영이 어려워졌고 2008년에 왕왕그룹에 인수되면서 급속하게 친중스탠스의 언론사가 되었다.
  20. 빈과일보. 1995년 홍콩에서 창간되어 2003년 대만에서도 발행을 개시했다. 발행부수는 창간된 년도를 감안하면 꽤나 많은 50만 부 내외
  21. 게다가 대만은 스튜디오마저 그래픽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CG로 된 화면에 현란하게 돌아가는 CG를 양껏 선사받을 수 있다(...)
  22. 사실은 일부러 맞춘 거다. 장제스도 개신교 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