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삼국지)/생애

1 어린 시절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먼 후손으로, 황실과 같은 성을 쓰는 집안이다. 황족이라면 황족이지만, 후한은 전한 황실의 자손에게는 황족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승의 아들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으로 유정은 제사에 바칠 한무제에게 적게 올렸다가 파면되었다.[1] 거기다 유비는 유정의 직계가 아닌 방계 후손이었다.

유비의 집 뽕나무가 매우 커서 마치 황실의 수레덮개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으며, 탁군 사람 이정(李定)은 이 집에서 필시 귀인(貴人)이 나올 것이라 했다. 유비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거야.”라고 말하자 숙부 유자경이 “너는 허튼소리 말거라. 우리 가문을 망치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친 유홍을 어려서 잃어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를 짜고 신발을 팔면서 생계를 이었다. 유비는 15세에 비로소 학문을 배울 수 있게되었는데, 친척 유원기가 학비를 대줬다. 유비는 노식의 문하에서 공손찬, 유덕연 등과 함께 수학했다. 그런데 선주전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유비는 책 읽는 것은 아주 즐기지는 않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호걸들과 결의를 맺기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귀부했다고 한다. 즉 학문을 연마하기보단 여러 사람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수렵하길 좋아했다는 묘사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지 몇 년되지 않아 탁군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생각되며, 돌아온 후 무리들을 모은 뒤 그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촉서 선주전)

1.1 유비의 계보

삼국지연의에는 헌제가 종정을 시켜 가져 온 족보를 보고 유비를 황숙으로 인정하는데 사실 유비의 조상은 경제, 유승, 유정, 아버지 유홍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화려한 족보는 엄연히 연의에서 만든 조작이다.[2] 어쨌든 여기서는 김홍신 평역판에 있는 계보를 그대로 옮긴다. 한자는 생략. 혹시 문제가 있다면 원문은 놔두고 각주로 교정바람.

효경황제 → 7남 중산정왕 유승 → 육성정후 유정 → 패후 유앙 → 장후 유록 → 기수후 유연 → 흠양후 유영 → 안국후 유건 → 광릉후 유애 → 교수후 유헌 → 조읍후 유서 → 기양후 유의 → 원택후 유필 → 영천후 유달 → 풍령후 유불의 → 제천후 유혜 → 동군범령 유웅 → 실업자 유홍 → 유비

하지만 위나라의 중신 유엽의 족보가 유비보다는 더욱 황위계승서열이 높은 위치(그러니까 헌제 유협과 촌수상 더 가까운 위치)이기 때문에 유비가 황족인 것은 맞지만 일각에서의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 참고로 유엽은 후한 광무제 유수의 후손으로 유비에 비하면 직계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위치다.

참고로 헌제와의 관계도를 굳이 촌수로 따지자면 24촌이다(...) 그냥 400년전에 조상이 한명 같았을 뿐이다.

후한 때의 족보는 주금(酎金)이라는 제사 비용을 내는 것으로 인정받았는데 유정대에 주금을 내지 못해 실후(失侯)당하게 되고 봉토를 빼앗겨 사서의 계보가 끊어졌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비의 혈통이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후한 말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단순히 권위 있는 혈족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다고 혈족으로 인정받는것이 아니라[3] "아이고 우리 비 녀석이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이 놈 어찌 그리 지 아비 홍이랑 똑같이 생겼누 허허. 얘야 인사하거라 네 오촌 당숙이시다."하는 식의 씨족간의 안면식과 기억들이 기록문화보다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록을 조작함으로 계보를 조작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당연한 얘기지만 황실의 족보는 더 엄밀하게 관리 되었다.

실제로 당시대 유비의 정적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유비는 가짜 황족, 황족 사칭이라는 식의 공격은 받아본 적은 없다. 돗자리나 짜던 귀 큰 놈 하는식으로 가난한 몰락한 황족 출신임을 낮잡아보는 식이라면 모를까. 마등이나 동탁이 강족의 피가 섞인 반오랑캐라고 까이고, 원소가 종놈의 자식이라도 욕을 먹으며, 조조가 환관의 자식이라고 출신을 디스 당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최소 동시대인들은 유비가 황족 출신임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4]

이쯤에서 24촌이 얼마나 먼지 실감해보자. 친족으로 인정하는 것이 주로 8촌까지다. 유비는 헌제와 24촌이기 때문에 유비의 고조 할아버지와 헌제의 고조 할아버지가 16촌, 유비의 고조 할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와 헌제의 고조 할아버지의 고조 할아버지가 8촌이 되는 셈이다.

1.2 외아들?

삼국지연의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로 묘사되었고, 정사 삼국지에서는 외아들이라는 묘사는 없으나, 형제나 남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진짜 외아들이거나 아니면 일찍 형제 남매를 사별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진짜 외아들이라면 당시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케이스인 셈.[5] 대신 평생동안 신의를 지킨 의형제들이 있잖아

다만 숙부인 유자경(劉子敬)[6]이 있었기에 사촌 형제들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유자경 역시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이며 그의 자손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불확실하다.

2 황건적의 난

대상인 장세평소쌍 등은 재산이 천금에 달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유비를 보고는 범상치 않은 외모에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의 성품과 인격, 그리고 도탄에빠진 나라에 대한 생각을 듣고 유비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덕분에 유비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훗날 오호대장군이 되는 관우, 장비와 만나 거병하게 된다. 연의에서 이들과 의형제를 맺는 장면이 그 유명한 도원결의. 이후 유자평이라는 사람이 조정으로부터 황건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유비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그를 부른다. 따라서 유비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그에게 종군한다.

유비는 황건적의 난에서 추정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여러차례 공을 세우고 장거장순의 난에서도 공을 세워서 벼슬을 받았지만 그는 처음 받은 중산국 안휘현의 현위(縣尉)[7]직은 독우(삼국지평화에서의 이름은 최염.)를 구타하는 사건으로 인해 관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파견 나온 독우는 유비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또한 유비는 그가 부임하자마자 자신이 파직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독우가 유비를 만나주길 거부하자 유비는 그를 중산국과 탁군의 경계지점까지 끌고 가서 묶은 뒤 매질해 죽이려고 하였는데 독우가 '자기는 단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애원하자 마음을 바꿔 살려주기로 하고 매질만 한 뒤에 인수를 그의 목에 걸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군 경계선을 넘어 달아난다.[8]

2.1 유관장은 실제로도 의형제였나?

연의에서는 관우, 장비가 유비와 도원결의의형제를 맺었다고 전하는데 정사에서는 그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그들이 의형제를 맺었거나, 혹은 그에 준할만큼 매우 친밀한 관계임은 정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사 관우전에서는 장료와의 대화에서 관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조공께서 후히 대우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劉將軍-좌장군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함께 죽기로 맹세하는 것은 주로 의형제를 맺을 때 하는 것이고 또한 비시전에서 보면 관우에게 그들의 관계는 군신관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며, 또한 관우를 죽인 이후 여러 인사들이 유비가 관우를 위해 복수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발언을 하는 것을 보자면 유비와 관우는 실제로 의형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장비전에 따르면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는 잠을 잘 때에도 관우, 장비와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고 한다.

또한 의형제를 맺는 경우가 이미 여러 차례 있어왔으며, 위와 오에서도 이 셋의 두터운 신뢰관계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니 이 셋이 설령 진짜로 의형제는 아니었을지라도 굳건한 결속력을 지닌 사이었다는 건 알 수 있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만나게 된 시기를 황건적의 난이 발생한 184년 전후로 잡는다면, 219년과 221년에 두 형제를 잃을 때까지 서로 함께 한 시간이 35~37년이다. 당시 평균수명을 생각해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함께 한 시간은 왠만한 가정에서 자식이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보다도 길었으며, 오늘날에도 3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친우관계로 매양 함께 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더구나, 그냥 어울려다닌 정도가 아니라 유비 생애의 숱한 패배와 불운을 모두 함께하며 무수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서로 배신하지 않고, 끝끝내는 밑바닥 평민에서부터 각자 나라의 황제와 상장군이 될 때까지 그 인생역정을 모두 함께 한 사이니, 이 정도면 사실 도원결의가 실제로 있었네 없었네 따져볼 필요도 없이 사실상 가족, 형제와도 같았으리라고 쉽게 추측할만하다.

유관장 3인이 동아시아의 역사, 설화, 문학 속에서 수 천년 동안 매력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지며 의리의 대명사로써 싸나이의 로망 하나의 상징이 된 이유가 있는 다 있다.

2.2 유비가 독우를 매질한 이유는?

연의에서는 뇌물을 바라는 독우를 장비가 팬 것으로 되어있지만[9], 정사의 기록을 보면 유비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독우를 직접 100대 두들겨 팬 바가 있다. 갑자기 유비가 미치지 않고서야 힘들게 얻은 벼슬을 갑자기 독우를 패고 버릴 리가 없다.

이때 파견 나온 독우는 유비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또한 유비는 그가 부임하자마자 자신이 파직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아 원한이 있는 사람이 독우로 파견된 것은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혹은 공을 세워 관리가 된 자들은 중앙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아 독우를 보내 처리했는데, 이를 눈치챈 유비가 선수를 쳤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독우는 유비를 공적 없이 임명된 자로 간주하고 유비를 내쫓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유비가 이를 염려하여 독우를 만나려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이것을 독우가 단칼에 거절해 버리니, 즉 유비의 해명 자체를 들을 생각을 안해버리니 결국 "에헤라디야 어차피 빼앗길 놈의 관직, 화풀이라도 좀 하고 가자"라는 심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의견으로는 십상시 놈들이 관직장사를 해야겠는데 유비는 현위를 돈주고 산 게 아니라 장거와 장순의 난을 진압한 군공으로 얻었기 때문에 돈주고 관직을 사서 하는 사람들에 비해 쫓겨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장거와 장순을 상대로 전투하느라 죽을만큼 고생한 게 생각나서 울분을 못참고 독우를 팼다는 의견도 있다. 이 의견에 의하면 유주 전체에서 군공으로 관직을 얻은 게 유비가 유일했고 중국 전토로 따져봐도 군공으로 관직을 얻은 관리라는 게 유비 이외는 잘해봐야 황보숭, 주준, 손견정도에 불과할 정도이며 나머지는 모조리 매관매직으로 관직을 얻었다는 점이다. 다만 손견의 경우는 워낙 전국구인지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정확한 결론은 없다. 일단 독우랑 사이가 안 좋았던 건 확실하다.

3 반동탁연합

그 뒤엔 하진이 파견한 조정 관리의 모병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고 이로써 받은 관직인 하밀승은 그가 버렸고 그 뒤 임명된 고당현위직은 받아들인다. 그 뒤 얼마 안 있다 현령으로 승진하였는데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가 이때 경사(낙양)에 있다가 조조와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으며 영제 붕어 이후 천하 대란이 일어나자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고 한다.

이후 적(황건적의 잔당으로 추정)에게 격파되자 이로 인해 현령직을 버리고 노식 문하에서 안면이 있었던 공손찬에게로 달아난다. 참고로 유비는 하진이 파견한 조정 관리 모병에 응한 덕에 독우를 구타한 죄를 사면받기도 했다. 하진은 자신의 모병에 응한 자는 지위 고하와 죄질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준다고 선포했고 유비는 관직을 얻으려고 모병에 응한 게 아니라 독우를 팬 혐의를 씻기 위해 모병에 응했다.

4 공손찬 휘하

공손찬 밑에서 그는 주로 원소와 대결할 때 전선을 맡았었고 거듭된 전공으로 그는 평원령으로 승진한 뒤 얼마 안 있어 평원상이 된다.

유비가 평원상을 지냈을 때에 평소 유비를 깔보고 불쾌해 하던 군민 유평(劉平)이 유비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하지만 그 자객은 유비를 만나봤는데 유비가 심히 후대하자 유비를 찌를 수 없어 실토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위서(魏書)에는 이 시기의 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 인민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다.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사(士) 중의 아랫사람이라도 필히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었을 땐 원소가 기주목이 되었을 때였는데(공손찬전) 따라서 그는 원소를 최전방에서 견제하는 임무를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조운과 처음 만나지만 당시엔 그냥 면식 관계였다.

평원상이었을 땐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이 쌓였는지 북해태수 공융이 황건적의 침입을 받자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유비는 3천 명의 병력을 태사자에게 보내주어 구원을 해 주었다.(태사자전) 연의에서는 유비가 의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직접 구원을 간 것으로 묘사했다.

그 뒤 원술과 원소와 전쟁을 하였고(192년) 이에 조조유표가 원소에게 가담하고 도겸과 공손찬이 원술하고 연합하여 대규모 국지전을 벌였다. 유비는 이때 평원 고당현에서 이들 원소-조조 연합군과 싸웠으며 유비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무제기)

그 다음 해에(193년)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였으며 10여 개 성을 점령했고, 또 그 다음 해인(194년) 조조의 부친인 조숭이 도겸에게 카운터로 살해된다. 이에 조조는 서주를 공격하여 학살을 벌인다.(서주 대학살 참고) 이에 도겸은 동맹관계였던 공손찬 휘하의 청주자사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전해는 이에 응하여 서주로 내려온다. 유비는 전해와 함께 내려왔다.(선주전)

유비는 조표와 함께 조조와 맞서나 패배한다.(무제기) 그 뒤 여포가 조조의 배후를 급습하여 조조가 회군하자[10] 유비는 소패에 그대로 머문다. 도겸은 유비를 대단히 마음에 들어했던지 그에게 4천 병력을 떼어주고 표를 올려 그를 예주자사로 삼는다.(선주전)

5 서주에서

도겸은 그 해에 죽었는데(194년) 이때 유비에게 서주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전에 유비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북해상 공융은 유비를 지지했다. 유비는 그로 인해 서주의 주인이 되어 2년간 다스린다.

196년 조조에게 마침내 패배한 여포가 유비에게 의탁한다. 유비는 그를 받아주어 소패에 주둔하게 한 뒤 원술과 싸우러 간다. 그러나 후방에 남겨진 장비가 배반한 여포에게 패하자[11] 유비는 서주로 돌아갔지만 병사들이 바로 궤주하는 바람에 해서(선주전), 광릉(영웅기)에 주둔면서 군사를 수습하여 원술과 싸웠으나 패했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유비는 조조에게 헌제를 잃은 후 막장이 되어 떠돌아다니며 노략질 중이던 양봉한섬을 살해한다. 이때 유비는 양봉과 면담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그를 잡아 죽였고 한섬은 양봉을 잃자 병주로 달아나다 장선이라는 사람에게 살해된다.(동탁전)[12] 광릉의 식량 사정이 곤궁해지자 유비는 서주로 되돌아가 여포와 일단 화목하였고, 여포가 사로잡은 처자를 돌려 받았다. 유비군은 과거 자신들이 여포에게 호의로 내주었던 소패에 머무는 신세가 되고 만다.

유비가 소패에 머물자 1만 명의 병력이 유비 휘하에 모였는데 이때 미축이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고 또한 유비에게 자신의 여동생(미부인)을 주었다고 한다.(미축전) 이에 유비의 세력이 커진 것을 경계한 여포가 친히 유비를 공격한다.

결국 여포에게 성을 빼앗긴 유비는 조조에게로 달아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시기에 유안이 아내의 인육을 유비에게 먹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허구다.[13] 유비가 조조에게 도착하자 정욱이 유비를 죽일 것을 간언하나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고 패성에 머물게 한다.(무제기) 유비는 패성에 머물면서 흩어진 병사들을 어떻게든 거두려 하고 조조는 여기에 군사와 군량을 보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6 방랑 군주

이때가 198년 봄이었는데 영웅기에 따르면 유비군이 여포군의 군마를 약탈했다는 이유를 들어 여포가 먼저 선수를 쳐 장료고순을 보내 패성을 공격한다.(선주전) 이에 유비는 두번이나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가 수습한 병사들로 몇달 넘게 버텼지만 9월에 결국 격파되고 가족을 버리고 달아난다.[14] 조조가 유비에게 원군으로 하후돈을 보내지만 고순에게 패해 하후돈은 한쪽 눈까지 잃는다. 조조는 이 사태에 직접 출병하여 10월에 여포를 공격하고 유비는 조조군과 함께 종군하여 하비성을 공격한다. 여포는 격파되었고 유비는 처자를 되찾는다. 그 뒤 조조와 함께 허창으로 되돌아온다. 조조는 표를 올려 유비를 좌장군으로 삼고 예우를 매우 두텁게 하였는데 심지어 나갈 땐 유비와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평생의 라이벌을 알아본 것일지도.

이때 조조는 유비를 장패에게 사신으로 보내어 자신을 배신한 장수들을 인도할 것을 요구하는 임무를 주기도 하였다.(장패전) 그리고 유비와 술자리에서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밖에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15](선주전) 그러던 중 유비는 헌제를 만나 그의 밀명을 받들게 되고 이에 몰래 동승, 왕자복, 충집, 오자란 등과 조조를 죽일 것을 공모하게 된다.[16] 또한 사냥터에서 조조가 자신의 지지자를 알아보기 위하여 헌제의 활을 사용하는 무례를 범하자 관우가 조조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을 유비가 말리기도 한다.(관우전)

199년 세력이 쇠락하여 망해가던 원술원소에게로 가려하자 조조는 유비에게 5만 군사를 보내 원술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얼마후 이 소식을 들은 정욱곽가가 유비를 놓아주면 안된다고 진언하여 이제서야 실수를 알아챈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으나 이미 늦었으며 이것은 적벽대전과 더불어 조조의 일생일대 최악, 최흉의 실책이 되었다.[17](정욱전) 유비가 도착하기 전에 원술은 꿀물을 찾다 굶어 죽어 있었고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공격하여 죽이고 서주를 되찾는다. 유비가 도착하자 바로 서주의 군현 대다수가 배신하고 유비에게 붙었다. 유비는 손건을 보내 원소와 동맹을 맺었고 원소는 유비에게 기병을 보내주었다.(원소전) 조조는 유대왕충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으나 유비는 이들을 격파한다.

200년 동승, 왕자복 등과 계획했던 모반사건이 발각되어 동승이 처형된다.(의대조 사건) 조조는 동승의 여동생이었던 헌제의 후궁인 동귀비(당시 회태 5개월이었다고 한다)를 교살한 뒤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위서에 따르면 유비는 조조의 대장기만 보고 달아났다고 한다.(선주전)[18]

유비는 원소의 아들인 청주자사 원담에게 갔는데 원담은 유비에게 무재로 천거받은 적이 있었고, 유비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에 보기를 이끌고 나와 그를 맞이한다.(선주전) 원소는 자신의 도시 업에서 200리 밖까지 나와 유비를 직접 마중하며 헌제의 밀명에 대해 언급하며 유비를 한의 충신이라 부르며 맞이한다. 또한 원소의 진영에 머무를 때 유비는 마침내 조운을 얻는다.[19]

이후 원소와 조조는 관도에서 싸웠는데 유비는 문추와 함께 조조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문추는 목숨을 잃는다. 유비는 그 뒤 여남으로 보내져 유벽과 함께 허도를 공격한다. 그러나 조인이 이끄는 기병에게 패배하고(조인전) 유비는 원소에게로 되돌아간다.(선주전)

그 뒤 유비는 원소를 설득해 유표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설득한 뒤 다시 여남으로 되돌아 간다. 이번엔 공도와 함께 연합하여 수천의 병력을 구성한다. 조조는 채양을 보내 공격하나 전사하자 조조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패해 유표에게로 달아난다.

여기서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원소와 조조가 대치할 당시 조조 세력권 너머에 있는 여남군에 어떻게 갔으며, 그것도 두 번 씩이나 갔다는 점에서 설명하기가 난감하다. 본격 미션 임파서블 찍은 유비 유비 때문에 조조가 오관을 설치했나 근데 관우한테 다 썰림요 이거 연의잖아? 생존왕, 아니 생존황제 유비. 거지신세라 안잡았나보다.

7 유표 휘하로 가다

유표에게로 달아난 후 유표는 유비를 조조 세력과의 최전선에 위치한 신야에 주둔하게 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는 이때 비육지탄이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유비는 제갈량을 얻게 된다.(삼고초려) 이때 조조는 유비가 유표와 함께 배후를 칠까 매우 염려하였는데 곽가는 유비를 쓴다면 유표가 그를 제지하지 못할 것이고 그를 안 쓰면 쓸모없어질 것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안심시킨다.(곽가전)

그런데 조조가 업성을 공격하고 있을 때 유표의 명령으로 유비가 북침을 한 적이 있었다. 조조는 급히 하후돈이전을 보내 유비를 막게 하였는데 유비는 진채를 불태우고 달아나 하후돈을 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였고 그를 박망파에서 격파한다. 이전이 구원병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군은 철수한다.(이전전)

조조가 오환족과 싸울 때 유비는 유표에게 허도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나 유표는 듣지 않는다.

208년 조조는 형주를 공격하였고 때마침 유표가 죽고 유종이 뒤를 잇는다. 유종의 대신들(연의에선 채부인도 추가)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유종은 처음엔 거부한다. 이때 부손이 유비를 언급하며 설득한 과정이 볼만하다.(유표전)

부손은 유종더러 그와 유비가 누가 더 낫냐고 질문하고 유종은 내가 유비보다 못하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부손은 조조를 유비보고 막으라고 해도 힘든데 유종이 감당할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만일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면 형주는 유종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된다고 말한다. 이 대화를 통해 유표의 신하들이 유비에게 가진 경계심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유비가 형주 인심을 서서히 얻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런 경계가 나올만도 했다. 단적으로 유비가 신야에 있을때 많은 형주의 호걸들이 그에게 귀부해서 유비를 유표측에서 경계했다는 것도 그렇고 가만 봐두면 형주는 유비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인식은 유표측이나 다른 쪽에서도 은근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웅기에서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자사를 겸하게 했다는 기록이나 물론 신빙성은 없다고 배송지가 부인하긴 했으나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맡기겠다고 했다는 말이 퍼졌을 정도면 유비가 장차 형주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당시 형주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유비는 당시 평판이 괜찮았던 유기를 후원하며 채씨 일족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는데 유비에게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채씨 일족이 기습적으로 항복을 결의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대로 두었으면 형주의 인심은 유비에게 쏠렸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 당장 유비가 유종을 꾸짖고 강릉으로 떠날때 유종이 아무말도 못하고 유종 주의의 사람들이 유종을 버리고 유비에게로 귀부하는 장면은 조조가 타이밍 좋게 유표가 죽을 당시 바로 형주로 밀고오지 않았다면 형주의 상황이 장차 어떻게 되었을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일 수도 있다. 이후 손권에게 노숙이 형주에 은의를 베풀지 못하였으니 (형주 여론을 장악한) 유비를 방패로 삼자고 한 부분만 봐도 그렇다.

유종은 결국 조조에게 형주를 들어바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는데, 이 항복하겠다는 결정이 전선에서 조조와 대치하고 있던 유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가 남하하여 완성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유비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싸울 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0] 유비는 나중에야 유종이 항복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따라서 사람을 유종에게 보내 소문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유종은 항복한 사실을 송충을 통해 전했고 유비는 이런 소식에 크게 놀랐고 격분했는데 그 이유는 조조가 이미 코앞에 있고 조조에 항복한 형주와 조조 본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유비군은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분노하여 송충을 겨누며 '널 죽여야 마땅하나 널 죽이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외치며 부하들과 작전을 논의한다. 이들은 남쪽으로 가 형주의 관원들과 군사를 사로잡아 강릉으로 데려가 농성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유비는 자신을 받아주었던 유표의 은혜를 저버릴 수는 없다하여 거절한다.

최전방에서 고립된 유비는 달아나야 했는데 조조는 유비가 강릉을 점거하여 농성하는 것을 우려하여 기병 5천을 뽑아 호표기라 하여 하루만에 300리(한나라 시대 1리 = 415.8m 따라서 125km에 해당)를 달려 장판파까지 추격해 이르렀다. 이때 자발적으로 유비를 따라가는 백성들이 10만 명에 이르렀는데 하루에 10리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파견해 배 수백 척에 타게 하고, 강릉에서 모이게 했다.(선주전,관우전)[21] 이때 신하중 한 명이 병사들이 적어 조조를 막기 어려우니 이들을 버리고 도망가자 하였으나 유비는 이들을 딱하게 여겨 버리고 행군하는 것을 거부하였다고 한다.[22] 결국 이 기병의 추격이 이르자 애시당초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던 유비의 무리들은 사방팔방 흩어지거나 조조군에 사로잡혔다. 이 와중에 서서의 모친이 잡혀 서서는 유비군을 떠난다(제갈량전) 유비는 민간인 사이에 섞여있던 자신의 처자까지 버리고 달아나 간신히 측근들과 함께 목숨을 부지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된다. 호표기의 대장인 조순은 이런 과정에서 유비의 두 을 노획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는 강릉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한다.(조인전)

이 과정에서 유비의 가족은 흩어졌고 조운은 필마단기로 유비의 부인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온다. 그리고 이것은 조운의 일생일대 최악, 최흉의 실책이 되었다.[23] 장비장판파에서 만인지적의 위세로 조조의 대군을 막아낸다. 가족까지 잃은 유비는 필사적으로 강을 따라 도망가다 떠났던 관우의 배에 구원받아 면수를 건너고 강하태수 유기의 1만여 병력과 만나 함께 하구에 도착한다. 유비는 관우의 소속이 된 수군과 잔병을 합쳐 1만명을 모아 한숨 돌릴수 있었다.

7.1 백성들을 방패로 삼았다는 잘못된 비방

장판에서 백성들을 데리고 떠난 것을 보고 "백성을 방패로 삼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24] 혹은 책임지지도 못할 거 뭐하러 데려갔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데리고간 게 아니라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갔다는 게 더 정확하다. 당장 원서인 정사 삼국지와 연의 둘 다 형주 사람들이 스스로 가재를 정리해 따라붙었다고 적혀 있다.

유비는 10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억지로 끌고갈 병력도, 식량도 없었고, 행군엔 짐덩어리나 마찬가지인 백성들이 따라오지 않는게 유비군에겐 훨씬 더 유리했다.[25] 거기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추격군이 군과 백성을 가리지않고 밟아죽여가며 밤낮으로 쫒아오는 급박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엉겨붙어오는 백성들을 내팽겨치지 않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까놓고 유비로선 소수병력으로 중과부적인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추구하는 가치를 보고 백성들이 따라오는데 이것을 그저 버릴수는 없었을것이다.

유비가 '어떻게든' 백성들을 설득해 본래 살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합당하지 않다. 그 당시 유비는 조조의 대군에게 추격당하는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이대로 유비를 따라가는게 매우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들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 정도로 조조가 두렵고 싫다는 건데, 이런 강한 결의를 말 몇마디로 설득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설득할 시간도 방법도 없는데,[26] '어떻게든' 설득했어야 한다니. 유비가 그곳에서 죽었어야 한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방패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유비가 취한 행동은 터무니 없이 비효율적이다. 백성들을 방패로 삼으려면 먼저 자신의 가족들이나 신하들의 가솔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유비는 그러지 않았고 정반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가족들도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게 했고, 그 결과 딸들은 사로잡히고 가신인 서서의 모친도 잡혀 그를 떠나 보내야 했으며 부인과 아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덕분에 조운의 전설이 탄생했다 또한, 유비는 단순히 도망만 치는 대신 장비에게 명령을 내려 후방으로 보내 추격군을 막게 했다. 병사 20명도 간신히 붙여준 상황이라면 아무리 장비라도 오천이나 되는 조조군의 추격을 막는 게 불가능하고,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장비의 생존조차 불투명하다는 걸 알면서도.

사서들을 봐도 유비가 "처자"를 버린 기록은 있어도 "백성"마저 저버렸다는 구절은 없다. 조조가 주인공인 무제기에서도 이 사건이 '백성들을 버리거나 방패로 사용한 사건'이라는 내용은 전혀 없다. 오히려 습착치라는 역사학자가 이 사건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주석으로 들어가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간단하고 큰 이유인데, 유비가 만약 백성들을 버리고 강하로 달려갔으면 장판에서 조조에게 깨강정이 나도록 털릴 일 자체가 없다! 자신의 군대만 추려 유기가 있는 강하로 달려갔으면 조조군의 추격은 멀리 따돌리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다. 정사에서는 조조의 오천 정예군이 하루만에 삼백여 리를 달려 유비 무리를 따라잡았다고 하는데, 유비는 백성들 때문에 하루에 십여 리도 간신히 이동했다고 되어 있다. 백성들을 버리고 전속력으로 도망쳤을 경우에 비해 무려 30배 이상 늦어진 셈.

실제로 깨강정이 나서 지리멸렬하던 유비군을 도와준 것은 한진으로 이동하여 유비를 구원한 관우와 강하태수 유기였다. 만약 유비가 실익만을 따졌다면 당연히 백성을 방패로 삼으면서 천천히 가기보다 그냥 버릴 것 다 버리고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8 손오와의 동맹

이때 동오의 노숙이 사망한 유표의 조문을 핑계로 형주에 왔는데, 실은 내부 사정을 염탐하기 위해서였다.(노숙전) 이때는 조조가 공격하기 이전이었으므로 혹시 형주에 내분이 있다면 손권이 끼어들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이었다. 이런 말을 손권에게 하면서 노숙이 유비를 평하는 것이 흥미롭다. 노숙은 유비를 일컬어

“유비와 같은 천하의 영웅이 조조와 불화가 있어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그의 재능을 질시하여, 중용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북에서부터 항상 패배해서 쫒겨다니던 유비가 저멀리 중국의 남쪽 끝 오월에 있던 노숙에게까지 천하의 영웅으로 일컬어지게 된 것인데, 이는 유비에 대한 동시대 인물들의 시선을 알 수 있게 해준다.(노숙전)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숙은 돌아가는 길에 장판파 패주 후 하구[27]에 자리잡은 유비를 방문한다. 노숙은 손권과 힘을 합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유비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때 손권은 아직 조조와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유비와 손잡고 조조와 대항한다는 것은 노숙 혼자만의 구상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비는 노숙을 도와 손권을 설득할 인물로 제갈량을 선택해 노숙과 함께 오로 가게한다.(노숙전)

노숙이 되돌아간 뒤 오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벌였는데 유종의 대신들처럼 손권의 대신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손권은 불쾌해하였지만 신하 모두의 생각이었으므로 뭐라하지 못했다. 그가 잠시 옷을 갈아입으려고 몸을 일으키자 그동안 아무 말도 없었던 노숙이 뒤를 따라갔고 손권이 노숙에게 의견을 묻자 노숙은 조조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노숙전)

그 뒤 제갈량도 손권과 면담하게 되는데 그에게 `조조는 강성하니 항복할 수 밖에 없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자 손권은 `그럼 유비는 왜 항복을 안하는가?'라고 되물었고 제갈량은 `유비는 뛰어난 영웅인데 어찌 남의 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28]'라고 말을 한다. 이에 손권은 분노하였고 조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제갈량전)

이때 주전파인 주유는 파양에 있었으므로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노숙은 주유를 수도로 불러들였고 대신들과의 회의석상에서 주유는 이름난 무장답게 조조군의 약점을 지적하고(먼 거리를 와서 싸움, 유리하지 않은 지형에서 싸움, 단합이 안 됨, 겨울이라 말먹이 등 식량 조달에 곤란을 겪음) 오군의 강점을 지적하면서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며 항복론자를 제압한다.(주유전)

손권은 이에 주유, 정보에게 총 3만의 병력을 지휘하게 하고 노숙과 제갈량을 동행하게 한다. 유비는 주유와 만났고 유비에겐 2만여 병력이 있었으므로 이들과 병력을 합쳐 총 5만의 병력으로 적벽에서 조조군의 수십 만[29] 대군과 싸운다.(선주전) (적벽대전)

적벽에서 화공으로 대승을 한 뒤 주유와 유비는 힘을 합쳐 조조군을 맹추격한다. 조조는 화용도에서 진창을 풀로 메꿔가면서 길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한다. 주력은 대부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피해를 작게 보는 시각도 있긴 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무제기만을 본 서술. 조조는 이후 몇 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며, 남하 당시 획득한 형주 땅에서 조인이 1년여를 버티는 데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해 결국 상당수를 상실하고 만다. 남하하면서 획득했던 형주병들이 전부 흩어져버려 유비, 손권의 전력기반이 된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그냥 살려보내준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소설에만 나오는 완전한 창작이다. 화용도 항목 참조.

9 형주의 주인이 되다

이 후 조조군과 싸워 유비는 남군과 형남4군을 얻는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비가 아예 땅을 빌리지 않았다, 형남 4군 중 일부도 손권에게 받아 빌린 것이다 등 여러가지 설이 있고 꽤나 경과가 복잡하기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형주 공방전의 형주 정복 부분 참고.

그 뒤 손권이 촉을 취하려고 하였고 주유는 촉 정벌을 하기위해 강릉을 떠나 파구까지 가다가 도중에 죽었고 손유를 보내 익주를 취하려고 했으나, 유비는 친족인 유장을 공격할 수 없는 명분을 들어 결사반대해 이를 좌절시킨다.

10 유비의 입촉

211년 장송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해 한중을 합병하자고 간언한다. 유장은 이를 옳게 생각하고 장송을 유비에게 사신으로 보낸다. 그런데 앞서 부손은 유종에게 유비는 유종이 부하로 다룰만한 자가 아니며 조조를 막아내면 형주는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간언한 적이 있다.

이는 유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유장은 유비를 다룰 수 없을 뿐더러 유비가 장로를 합병하고 조조를 막는다면 촉은 유장의 것이 아닌 유비의 것이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손이 예측한 식으로 장송이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다. 장송은 아예 처음부터 유비를 불러들여 그를 촉의 주인으로 삼을 속셈으로 유장에게 이런 간언을 한 것 같다. 이것은 법정전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익주별가 장송(張松)이 법정과 서로 친했는데 유장이 함께 큰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 하며 늘 남몰래 탄식했다.”

라고 말한 것을 보아 장송과 법정은 유장에 대해 그다지 충성을 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송이 유비를 만난 뒤 보낸 사신은 다름아닌 법정이었다.

유비가 익주에 도착했을 때 유장이 군사를 늘려주었고 그 결과 그 병사는 3만이 되었다고 한다.[30] 유비는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선주전)

212년에 장송(자교)의 내통혐의가 발각되어 장송이 참수당하자 유비는 유장과 전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13년(자치통감에서는 214년)엔 유비군이 낙성을 포위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유비의 군사(軍師) 봉추(鳳雛) 방통(龐統)이 낙성 공격을 지휘하다 유시(어지러이 날아오는 화살, 눈 먼 화살)에 맞아 유비군 진중에서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유비는 낙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나서 성도를 포위할 무렵에 유비의 부수관 탈취와 동시에 형주에서 출병하여 익주 각지를 평정 중이었던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이 유비 본군(3만)과 합류한다. 214년엔 오호대장군(관장마황조)의 세 번째 장수인 서량의 마초가 서촉으로 도망 와 유비군에 합류하였고 뒤이어 유장이 항복하게 된다. 당시 유장은 3만의 정병과 성중의 사람들이 1년을 버틸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는데 유비는 이후 촉성 금고 안의 물품을 휘하군대가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촉성중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에게 공훈에 따라 금은을 나누어 주었으며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또 조운의 조언을 들어 과수원 뽕밭등 논밭과 집들을 모두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었다.

214년 유비는 인사를 골고루 배치하는데 그에게 원한이 있는 자이건 혹은 유장과 친척관계인 자건 간에 인재를 기용했으며 대체로 유장에게 소외된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혹여 반대파의 구심점이 될 지 모를 유장은 한지로 보내버린다.

유비는 익주에 입성한 뒤 토목사업을 벌인 것 같은데 진군이 "이전에 유비가 성도로부터 백수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많이 만들어 많은 인력을 소비하였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진군전) 이 때문인지 조조가 한중으로 진군해올 무렵까지 '하루 수십 번의 동요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유비가 촉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듣고 조조의 승상연인 조전은 유비가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겼으나 부간이 말하길 "유비는 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고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하며 제갈량은 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알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하며.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고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보좌하는 세 사람이 인걸(人傑)이니, 유비의 지략까지 더하면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했다.

11 유비의 수염 콤플렉스

처음 유비가 입촉하여 유장과 만난 자리에서 장유라는 사람이 종사였는데 유비는 장유가 수염이 많은 것을 보고

"과거 내가 탁현에 살고 있을 때 모(毛)성을 가진자가 특히 많아 동서남북 모두 `모`라는 집이 많았었소. 탁현의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사는구나!`라고 했소."

라며 놀린다.

여기서 여러 모씨(諸毛)란 중국식으로 저모(猪毛)와 발음이 같다. 그리고 탁(涿)이란 옛날식 발음이 돈(豚)과 가까운데, 『광아(廣雅)ㆍ석친(釋親)』에 의하면, ‘돈(豚)은 둔(臀), 볼기, 밑, 바닥’이라 했다. 장병린(章炳麟)은 이를 ‘둔(臀), 볼기’가 아니라 마땅히 ‘앞에 있는 구멍(前竅), 전규 즉 여자의 음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요컨대 돼지털이 엉덩이나 여자의 음부를 둘러싸고 있는 꼴이라고 비웃은 것이다.

그러자 장유가 대답을 하는데

"과거에 상당군 노현의 장이 되었다가 탁현의 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노현이라고 기록하면 탁현을 무시한는 일이 되고, 탁현이라고 기록하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위 말은 유비가 탁군 출신인 점을 들어 노탁군(수염이 없는 군주)이라는 것을 은근히 비꼰 것이었다. 노(潞)란 노(露)와 동음이고 탁(涿)의 고음이 둔(臀)과 같으니, 노탁군(潞涿君)이란 노둔군(露臀君), 즉 볼기짝을 드러낸 꼴의 군자란 뜻이 된다.

유비는 이를 잊지 않고 있다가 훗날 장유가 220년 조씨의 천하로 바뀌고 유비가 222년과 223년 사이에 익주를 잃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자 그를 참수한다.[31] 그런데 실제로 220년 조비가 찬탈하고 223년 유비가 사망하는 것을 보면 그 예언이 맞은 셈이다.

12 익양대치

같은 214년 헌제의 아내이자 황실의 황후였던 복황후가 조조에 의해 살해당했다. 조조가 212년 마침내 위공이 되어 황제인 헌제를 끌어내리고 마음대로 국상을 처리하기 시작하자 복황후와 그녀의 외척세력이 조조를 제거하여 황권을 다시 회복하려 하였고, 이에 조조는 화흠을 보내 복황후를 죽이고 복황후 소생의 두 황자도 독살하였다.[32] 외척들과 황제쪽에 붙어있던 인사 200여명을 죽인 후 조조는 자신의 딸 헌목황후를 헌제에게 보내 황후로 삼게 했다. 동귀비 이후 또 다시 벌어진 이러한 사태에 유비는 큰 분노를 내보였다.

215년엔 손권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 이때 사신으로는 제갈근이 파견되었고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전부 돌려주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오주전)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았는데 유비는 이에 대응하여 군사 5만을 이끌고 직접 유비가 형주에 있었을 때 근거지로 삼았던 공안으로 내려왔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하는 등 싸움을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선주전)

그런데 215년 그해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촉과 오는 위나라의 확장에 크게 긴장하게 된다. 이에 손유 양측은 다시 만나 합의를 거쳐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 후 조약을 맺고 일을 매듭짓는다. 즉 이 시점에서 형주 문제는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13 한중 공방전

유비 생애 최고의 리즈시절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우가 조조를 공격하고...

218년엔 유비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위나라에선 김의가 위의 수도인 허창에서 길본, 경기, 위황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헌제를 취한 뒤 유비를 불러들일 것을 계획하나 진압된다.(무제기)

219년엔 유비군이 전투에서 대승해 위의 장군 묘재 하후연이 (황충 또는 유비에 의해) 참수된다. 이에 조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당도하자 유비는 직접 군을 이끌고 지형을 기반해 맞서 조조에게서 한중을 수비한다. 그리고 헌제를 협박해 위왕의 위를 받고 만인지상의 자리를 차지한 조조에 맞서 한중왕(漢中王)을 칭하니 마침내 유비는 천하삼분을 완료한다.

13.1 한중왕이라고 칭한 이유는?

이때 유비가 자기 지배지의 중심 지역인 촉을 따서 촉왕이라고 하지 않고 한중왕이라고 한 이유가 있다. 한중 땅은 원래 유방이 한왕(漢王)으로서 대업을 시작한 땅이기 때문에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정통성을 주장하기 아주 적합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漢)은 이미 황조(皇朝)의 이름이 되어 있으니까 유방처럼 한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대로 칭하는 것은 피하고[33] 대신 지명을 그대로 따서 한중왕이라고 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리고 유비가 만약 단순히 위왕 조조와 칭호를 가지고 맞장을 뜨려고 했다면, 1자왕(一字王)[34]인 촉왕(또는 다른 1자왕)의 칭호를 사용했겠지만, 유비는 사람들에게 한나라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조조보다 한 단계 낮은 2자왕의 칭호를 쓰는 것을 감수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나라가 일어선 한중 땅의 왕을 주장함으로써 자신은 유방과 같은 존재라고 포장할 수 있고, 따라서 유비와 대립하는 조조에게는 자연히 항우의 이미지를 덧씌울 수도 있었다. 결국 이래저래 조조로서는 위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14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하지만 219년 관우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서황에게 패배하고, 이후 위와 밀약을 맺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침공한 손권의 오나라군에게 형주를 잃고 본인은 참수당하는 일이 생긴다. 관우의 죽음에 슬퍼하며 복수를 준비하던 장비 역시 부하인 장달범강에게 살해당한다. 유비는 크게 놀라 격분하며 울었다.(도원종언)

220년엔 조조의 아들 조비가 마침내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스스로 위나라의 황제를 칭하게되자 촉의 사람들은 헌제가 해를 입었다고 알게되고 유비는 상곡을 입고 통곡한다(밑에서 자세히 서술함.) 여러 신하들이 유비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것을 요청한다.

비시전에 따르면 비시만이 유비의 황제 즉위를 반대했고 화난 유비는 비시를 강등시켜버린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전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선포하였으며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물론 헌제는 멀쩡히 살아있었다.[35]

여담으로 평생 황실을 좌지우지하며 무시했던 조조는 죽을때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왕의 직위였고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지만 찬탈을 하지 않고 한의 신하로 죽었다. 반대로 한나라 황실의 존속과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유비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촉한의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둘의 삶을 생각해볼때 묘한 결과가 나왔다고 할수있다. 물론 조비가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어 조조를 무제로 추존하긴 했지만 조조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

14.1 헌제가 살아있음에도 죽었다고 한 이유는?

유비는 헌제가 시해당했다고 선포하고 시호를 올리는데 헌제는 살아있었다. 이는 당대의 유비가 가진 야심을 부정하기 힘든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다.

물론 선양 직후에는 유비와 그의 수하들이 정말로 헌제가 살해됐다고 오해했을 수 있지만 시간이 한참이 지난 나중에도 계속 착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헌제가 산양공이라는 작위를 가지고 여생을 보냈다는 사실은 위나라의 국가 기밀도 아니었다. 따라서 촉나라 수뇌부가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헌제가 선양을 한 것이 적법하다고 인정한다면 촉은 절대로 '한'의 정통 계승자가 될 수 없고, 선양이 사실상 강압적이었으니 선양이 무효라고 간주할 경우 유비 역시 황제(헌제)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비가 헌제의 유폐 사실을 알리고 헌제의 탈출이나 복위 등을 추진했다면 헌제의 목숨이 더 위험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조조 생전에도 허창의 반 조조세력이 헌제를 옹위하고 익주를 차지한 유비와 내통하려던 사건이 있었고 이때 수많은 이들이 살해당한걸 떠올려 보자.

조비의 칭제에도 유비가 계속 한중왕을 고집하고 헌제를 복위시키지고 않는 건 최악의 행동이다. 그건 조비의 칭제가 적법한 걸 인정하며 그의 신하가 되겠다는 표현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관직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을 관직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 보다 아래로 보았고,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 판단했다. 조위에 맞서 내실을 다지기 위해 동격의 칭제를 표하고 관원들의 관직을 높인 촉한의 방향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다. 정치적으로 보아도 한번 헌제가 죽었기에 황제를 칭했다가 이후에 황제가 살아있으니 그 스탠스를 수정한다는 건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다.

15 이릉대전

이의기는 촉군 사람으로, 도술이 있었다. 소열황제(유비)가 오를 정벌하고자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하게하여 그가 도착하자 길흉을 물었다. 의기는 답변을 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찾았는데, 병마·(병)기를 수십장 그리더니 문득 그를 한 장씩 찢어버렸다. 또 큰사람을 하나 그렸는데, 그를 땅에 묻어버리고는 떠나버렸다.[36]

222년엔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한다.[37]

형주를 다스렸던 유표와 그의 장남 유기의 뒤를 이은 유비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견때부터 오라면 이를 갈던 형주 각지에서는 이에 크게 호응한다. 또한 형남의 토착민족이던 무릉만족의 왕 사마가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유비에게 종군한다.[38] 유비는 이릉에서 육손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유비는 7백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를 엮은 뒤 군을 주둔시킨다.(문제기)

당시 위의 조비는 이 소식을 듣고 "유비는 병법을 모르는군. 7백 리에 이르는 군영을 세워 적을 막겠단 건가. 전쟁에 관한 손권의 상주가 곧 도착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릉대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혜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내용 참고.

사실 4만의 병력이 대략 300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의 길이에 주둔하는 것은 지나치게 넓게 퍼진 것이며 또한 나무 울타리를 엮은 것은 화공에 노출시킨 것으로 어느 정도는 조비가 맞는 소리를 한 것 같다. 고원, 습지, 험한 곳을 감싸고 진영을 구축했다는 말은 이 지형의 외각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것인데 그 말은 곧 배후에 험지와 고원 습지를 두고 진지를 구축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병력의 이동로는 한정되어 신속한 기동은 제약된다.

이렇게 기동이 제약될 경우 각 진영에 주둔하는 병력이 서로 지원하기 어렵고 따라서 적의 각개격파에 취약해지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육손은 각개격파로 나가 위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다. 그러나 험지에 진을 두고 방비를 한 덕분인지 초반 공세는 오히려 육손이 불리했다고 하는데 육손은 이에 기책인 화공을 사용하여 유비군 진영을 불사르는것에 성공한다.

육손전에 보면

"화공을 먼저 펼친 다음 동시에 함께 공격해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두로와 유녕은 달아날 곳이 없어 항복하였다. 그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번에 거의 소실되었다."

라는 언급을 토대로 유비가 패배당했을 때 화공 이후 진지가 와해되어 본영이 일격에 연쇄적으로 격파된 전황임을 추측할 수 있다.

유비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수습했다고 한다. 물론 위나라 때문에 육손이 깊게 추격하지 않은 것도 한 몫 하긴 했다. 이후 유비는 군사를 수습해서 백제성에 주둔한다.

15.1 유비가 이렇게 진을 구축한 이유는?

사실 역전의 용사인 유비가 이러한 진을 구축한 것은 납득이 잘 안 가는데 연의에선 유비가 무더위를 피하게 하기 위해 병사들을 옮겼다고 한다. 하지만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 이러한 각개격파의 위험이 높은 배치를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육손전의 다음 구절이 정사에서의 유비의 배치 의도를 추측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신은 처음에는 그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주전에 보면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이를 미루어 추측해 본다면 유비는 에 비해 빈약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릉은 장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이 수군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유비군이 강가에 배치되어있는 정황은 육손이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을 놓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대치되는 주장도 있다. 이 게시글과 지도를 본다면 유비군에겐 어복과 자귀에 이르는 보급로가 구축되어 있는데 이 보급로는 육손이 산길을 타고 급습하거나 장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등의 기습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때문에 유비가 길게 병력을 포진시켜 보급로를 수비하는 것은 조비의 말과는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배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넓게 퍼져 배치한 것이 패배의 요인이 아니고 다만 유비가 본영이 화공에 쉽게 노출되는 장소[39]에 주둔한 것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복에서 자귀까지 나가는 길은 외길이며, 장강의 흐름 때문에 형성된 골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경사가 있는 길이며 대군이 움직이는데 있어서, 좁은 오르막길을 장시간 행군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오군이 자귀 북쪽이나 장강 남변으로 돌아서 어복에서 자귀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끊기라도 하는 날엔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귀찮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일단 보급선에 병력을 뿌려서 보급로 차단을 방지하고 뿌려둔 병력을 압도할 만한 병력이 돌아 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병사를 갈랐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릉만이들을 이도쪽으로 동원하여 장강 남변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도록하고, 본군은 지강쪽으로 놓고, 황권의 분대는 위나라와 맞닿는 임저쪽으로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 세 갈래가 충실히 연계하고, 뿌려둔 병력들이 자기 위치만 지키면 보급선을 지키면서 공안까지 무리 없이 진격할 수 있는 구도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이 길을 이용한게 수번이나 되어 촉으로 들어가면서 한 번, 익양대치 때 공안으로 나오면서 한 번, 다시 들어가면서 한 번, 이릉전 하러 나오면서 한번, 조비는 물론, 육손이나 다른 오나라 장수들보다는 이 길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수백리 대영이라고는 하지만 영의 중심은 유비의 본영과 황권이 이끄는 분영, 두개에 집중 되어 있지, 뒤에 긴 꼬리는 그저 보급선을 지키기 위한 소규모 분대들이었을 거라는 것이며 전과를 보건데 불에 타고 격파된 것은 유비의 본영 뿐이었을 거라는 점 등을 보면, 유비의 실책은 본영을 잘못 잡았다는 것일테고, 길게 진영을 잡은 건 별로 영향을 못 줬을것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정말로 수백리에 걸쳐서 군사를 제대로 분산해 뒀다면, 불놀이를 해봐야 피해가 더 적었을 것이고 무슨 연의에서처럼 육손이 유비 몰래 기군들을 동원해서 수백리에 걸친 영을 다 태우려면 미친 기동력을 선보이지 않고서야 불가능 하다는 것. 일단 유비의 전략에 대해 이런 설도 있다고만 알아두자.

15.2 육손이 평가한 유비의 군재는?

육손은 '조조조차 두려워하는 적'이라고 말했으며 '실로 강한 적수가 우리 경내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비는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조조도 두려워하는 영웅이다. 오늘 그런 자가 우리의 국경을 위협하는데 국가의 은혜를 입은 장수들이 화목하긴커녕 서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라고 한 것으로, 휘하 장수들을 질타하고 적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주는 목적이 강하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황권의 조언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군대를 움직인 유비의 행동으로 미뤄보면 적에 대한 경계심 강화용일 뿐이고 이후 이릉대전 전개와 그 후일담을 생각하면 육손은 유비의 군재를 높게 보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유비가 오반을 시켜 소수의 병력을 보내 오군을 낚으려고 했는데, 이걸 보고 한당 등이 오반을 격파해서 아군의 사기를 올려야 한다고 간언하자, 육손은 반드시 음흉한 계책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부했고, 결국 유인책이 실패하자 유비는 8천 명이나 되는 복병을 이끌고 철수하는 모습을 보여 오나라 장수들은 육손의 선견지명에 놀랐다.

이후, 육손이 손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유비는 통상의 이치를 어기고 자신의 집을 지키지 않아 과감히 군대를 보냈는데 앞뒤로 군사의 운용을 살펴보면 실패는 많고 성공은 적었으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臣)은 처음에 유비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출할 것을 걱정했습니다만, 오늘날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드니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폐하(손권)께서는 안심하십시오."고 했다.

다만 이 편지의 경우 육손이 손권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실수가 아님에도 손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일 가능성이 높다. 수군에서 과연 촉한군이 오군을 이길 수 있을까? 장비마저 죽은 상황에서 말이다. 실제로 위에서도 언급했듯 유비는 수군 운용에 대해 오나라를 상대가 어렵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고 육손 역시 그를 지적했다. 그걸 황권이 알았기에 유비에게 자신이 선봉을 나서겠다고 했지만 유비는 황권에게 후방 및 혹시나 내려올 위나라를 견제하는 위치에 둘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유비는 화공 이후 격파 당하고 황권은 고립돼 버렸다.[40]

결국 유비는 이릉에서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다. 애초에 황권에게 선봉을 일임하고 그 역량으로 수군을 총괄했으면 피해가 최소화 되었겠지만 유비군에서 수군을 다룰만한 장수는 관우[41]장비 정도일 텐데 이 두 사람은 이미 없었다. 이를 간파한 육손은 장수들 앞에서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주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비가 그렇게 나왔으면 곤란했겠지만 실제로 그렇지를 못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셈인데, 말의 성격이나 앞 뒤 상황을 살펴보면, 오히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 유비에 대한 육손의 생각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거나 실제 이릉대전 초반부는 오의 장군들이 연이어 깨지면서 손오에 위기가 찾아 온 것은 사실이므로 결국 유비의 군재는 뛰어난 편으로 범용한 장수보다는 낫지만 육손이나 조조 같은 당대의 명장들에 비하면 부족하다.

16 붕어

백제성에 주둔하고 얼마 가지 않아 유비는 223년 백제성에서 죽는다. 관우장비의 죽음과 형주 상실, 이릉 전투 패배 등 잇따른 악재로 인한 홧병이란 설이 있다.

유비가 죽기 전

"짐이 처음에는 병이 다만 하리(下痢-이질)였는데 그 뒤 잡다한 병으로 옮겨 거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라는 것을 언급하는데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원수를 갚기는커녕 일생일대의 대패를 당한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게 아닐까. 손권이 유비가 백제성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주전에 '손권이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답례)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비가 오를 다시 치려고 했던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이에 촉오 관계는 두 나라의 어쩔 수 사정 때문에 다시 화평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촉한은 이릉대전 이후 내부적으로 여력이 없었고 손오는 촉을 막아내고 곧바로 이어진 위의 침공을 막기에도 버거웠다.

오록 : 유비는 위나라 군대가 대거 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그러자 육손은
‘단지 걱정되는 것은, 당신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만 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42]

223년 유비는 백제성에서 죽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유비는 후사를 제갈량이엄에게 부탁하는데 그로 인해 이엄은 유비 사후 제갈량에 이어 2인자에 가까운 역할을 하게 된다. 제갈량의 기산 정벌 때 이엄은 수송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유비가 싸울 땐 제갈량이 담당하였고 이엄이 면직된 뒤엔 제갈량의 후계자인 동윤이 맡은 매우 중대한 책무였다. 또한 이엄전을 보면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하자 승상부의 일까지 맡았다고 하는데 이는 내정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유비의 탁고대신이라는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볼 수 있는 예이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답게 유언도 유명하다, 제갈량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고굉지력(股肱之力-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손성은 이에 대해서 합당하지 않은 말이라 비판했지만 호삼성은 예로부터 탁고를 맡긴 군주 중에 소열제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죽기 전 유선에게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지 선주전에 분명히 있는 기록이고, 소학과 명심보감에 인용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장이다.

그 외, 입촉 당시 유비는 매사에 조조와 반대로 하여 성공하였다고 하였는데 조조나 유비나 다르지 않은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관우를 아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동오를 침공하였다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그 울분에 사망한다. 즉 실제로 조조와 똑같이 행동한 부분이 유비가 실패한 계기로 되었다.[43][44]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유비(삼국지)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한다. 그런데 전한 무제 때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은 이의 작위를 빼앗는데, 유비의 조상도 이때 걸린 것이다.
  2. 애초에 봉지 이름이 전한 이름으로 치면 고증 오류다.
  3. 우리나라도 이런 경향은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 후기에나 공고했던 신분제가 무너지며 나타났다. 흔희 알려진 족보 매입등의 신분세탁 행위가 바로 그것
  4. 심지어 같은 황실의 일원인 유표,유장도 인정했다.
  5. 나홀로 북벌로 유명한 강유도 외아들이다.
  6. 또는 유경(劉敬). 맹달이 피휘를 위해 자를 자경(子敬)에서 자도(子度)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7. 오늘날의 경찰서장대대장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해당 현(縣)의 치안과 국방을 담당했다.
  8. 연의에서는 독우가 은근히 뇌물을 바라면서 거만하게 굴고, 말단 관리에게 유비를 비방하는 탄핵문을 쓰라고 협박한다. 이것을 본 주민들이 장비에게 일러 화난 장비가 독우를 매질하는 것으로 바뀐다. 유비는 장비를 말리고, "독우를 매질하였으니 여기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탄식하며 독우의 목에 인수를 걸어주고 도망친다. 유비의 민심장악능력과 유비, 장비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매질한 사람을 바꾼 모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드럽고 민중들에게 인기많은 유비, 불의를 못 참고 과격한 행동을 많이 하는 열혈 장비의 이미지는 이 사건부터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9. 다른 미디어믹스에서도 장비가 패고 유비가 말리는 것으로 나온다. 특이케이스라면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애니판에선 인장을 버리고 그냥 가려는 유비에게 독우가 욕을 하자 유비도 빡쳐서 한방 먹이는 것. 여기선 관우도 한대 때린다.
  10. 연의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곽가가 "기왕 회군하는 거, 유비에게 글을 보내서 오늘은 이만 봐준다는 식으로 하시면 주공이 유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셈이 됩니다."라고 말한다.
  11. 연의에서는 장비가 그놈의 술주정(…) 때문에 조표와 마찰이 생겼고, 조표가 성을 빠져나가 여포와 공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사에서는 그 자리에서 조표를 죽였다. 이는 본래 하비를 차지하고자한 진궁의 계략으로, 조표는 하비의 호족이었는데 반유비세력이자 하비의 성문교위였다. 바로 조표는 소패의 진궁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고 여포군을 맞아들인 셈이다.
  12. 연의에서는 양봉, 한섬 모두 유비에게 결딴나며, 백성을 괴롭히는 그들을 처단하여 조조에게 잘보이기 위해서였다고 서술되고 있다.
  13. 유비군이 식인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영웅기에 의하면 광릉에서 원술에게 패한 후 보급이 어려워지자 대소관료들과 군사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14. 유비는 일평생 가족을 버리거나 잃은 적이 많았다. 여포와 조조에게 그렇게 되었는데 한두 번은 처자를 돌려받았지만 결국에는 돌려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특히 나중에 조조에게 장판에서 쫓길 때 두 딸이 조조군에게 사로잡혔는데 돌려받지 못했다. 일설에는 그들을 사로잡은 조순의 아들들의 후첩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기록이 없어 안습이다. 또 연의에서는 감부인이 정실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처자를 자주 잃은 유비의 가정을 첩이었던 감부인이 관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비의 정실은 누구인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건 유비의 황후는 감부인, 즉 소열황후 감씨와 나중에 마지막으로 들인 목황후 오씨 두 사람만 황후로 인정받았다.
  15. 연의에서는 유비가 동승 일행과 함께 공모한 이후 조조가 부른 것으로 묘사하여 유비의 위기감을 증폭시킨다. 또한 유비가 조조의 그 발언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트린 뒤, 마침 들려온 천둥 소리에 놀랐다고 둘러대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날씨가 유비를 살렸다. 여담이지만 조조는 여기서 당대의 군웅들을 한꺼번에 까는 위업을 선보인다.(조조 항목 참고)
  16. 이 부분에 관해서 실패할까봐 도망갔다고 하는데 '때마침 사명을 받아 실행하지 못 했다'라고 기록되어있고(선주전) 유비가 출정한 것은 199년 12월, 동승이 처형당한 것은 200년 정월로 약간이나마 시간차가 있다. 뭐, 애초에 유비는 그 명분을 이용할 생각이었을 생각이었을 것 같다. 애초에 조조를 죽일만한 힘도 없겠지만. 그리고 정말로 조조를 죽였다면, 유비는 분노한 조조 파들에게 죽었을 테고 헌제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원소나 유표는 헌제를 무시)까지 끼어들면서 다시 한번 난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17. 그토록 유비를 경계한 조조가 유비를 순순히 내보내준 것이 의외다. 연의에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넣는다. 연의에 나온 가장 유명한 이유가 바로 유비가 번개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조조가 과소평가하게 되었다는 것. 다만 이건 정사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영웅논담 문서 참고.
  18. 다만 사마광은 "유비가 필시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음을 헤아리니, 위서는 매우 터무니없다."라고 평가했다.그럴 거면 차주를 죽일 일도 없었겠지
  19. 이것은 조운별전에 따랐을 때의 합류 시기로, 조운전에서는 유비가 도겸에게 지원갔을 때 이미 합류 상태인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20. 선주는 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선주전)
  21. 일단 유비는 관우를 시켜 따르는 민간인 무리 일부를 싣고 대피케하려는 의도와 따로 관우를 통해 병사를 모으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이것 때문에 본인이 살아날지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22. 사람들이 믿기 힘들어하는 삼국지의 이야기 중 하나가 이 부분인데, 현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3. 조운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구출해온 아두가 바로 촉의 2대 황제 유선이며, 호부견자의 대명사가 된다. 그래서 이것 가지고 조운을 까는 농담이 꽤나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24. 예를 들어 창천항로에서 가후가 이걸 가지고 유비를 비판한다. 진삼국무쌍에서는 위군 루트로 장판파를 진행할 경우 이런 뉘앙스의 대사가 나온다.
  25. 연의에서는 아얘 부하 장수들이 버리고 가자고 하기까지 한다.
  26. 10만명을 다 모아놓고 연설을 하려고 해도 그 10만명을 수용할곳도 찾아야 하고 설령 1만명씩 한다 해도 10번이나 해야한다. 백성들 처지에 장졸이나 장군이 설득해서 들을 이들은 아닌만큼 결국 유비가 직접 다 얘기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도망이나 치는게 낫다.
  27. 강하가 아니다. 강하는 적벽대전 뒤 오의 땅으로 평생 유비의 땅이 되지 못했다.
  28. 즉 `손권은 장강을 끼고 많은 군대와 모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우리 주군인 유비는 천하의 영웅이므로 어찌 항복하겠소?'라며 은근히 깐 것.
  29. 오 약 3만, 유비군 약 2만으로 정사의 전기마다 병력 규모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는 손유동맹과는 달리 조조군은 20만에서 80만까지 정사의 전기마다 기록이 매우 다르다. 연의에서는 백만 노래를 불러대지만, 진짜 병력은 얼마 안 된다고 한다. 약 3~4세기 지나서도 쉽지 않았던 인원을 단 한 지역에서 동원한다는 건 뻥이거나 미친 짓이다. 정말로 그만한 인원을 들이고도 패배했으면, 조조의 시대도 끝났을 거다.
  30. 이때 손권은 유비를 활로(猾老: 교활한 늙은이)라고 욕하였다.
  31. 이때 제갈량이 만류하자 "향기나는 난초라도 문 앞에 나 있으면 베어낼 수밖에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32. 화흠이 문을 부수고 황후를 끌어내자 머리를 풀어헤친 채 산발을 하고 끌려가던 황후가 헌제에게 살려달라고 하자 헌제는 울며 "나도 언제까지 살지 모르오"라 대답하였다.
  33. 황조의 이름과 동일한 봉지명을 쓰는 제후가 있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주나라 때의 주공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후한 황제는 한왕에서 칭호를 높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왕이라고 칭할 경우 유비가 장차 헌제를 밀어내고 스스로 한나라의 황제가 되겠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었을 듯하다.
  34. 같은 제후왕이라도 봉지명이 한 글자인 1자왕(국왕 또는 친왕이라고도 함)이 2자왕(군왕(郡王)이라고도 함)보다 높은 지위이다.
  35. 촉서 선주전: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
  36. 유비가 죽은 후에 사람들은 대인을 그려서 묻은 것을 황제가 붕어하는 형상임을 알았다.
  37. 이릉전에서 대패한 것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는다. 당대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승산이 없지만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38. 대전이 오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형주인들과 무릉만족의 반오감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수차례에서 걸친 반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촉한서진에게 멸망하자 바로 서진에 종군한다.
  39. 당시의 중국은 전반적으로 한랭건조한 기후라 육손이 화공을 할만한 날씨를 노려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당시가 여름과 가을 사이이니 연의의 추측 역시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40. 결국 황권은 목숨이라도 부지해야겠으니까 어쩔 수 없이 위나라로 눈물을 머금고 귀순했다.
  41. 실제 형주에서 관우의 군사행동은 수군을 이용한 경우가 꽤 있으며 7군수몰이나 면수 장악만 봐도 수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42. 사실 해당년도인 222년 10월에 촉오가 화친했으므로 유비가 엄포했다기 보다는 그냥 내질러봤다고 보는게 매끄럽고 이에 육손도 잘 받아쳤다고 해석하는편이 매끄럽다. 허나 육손이 유비를 무시했다고 보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다분하므로 나무위키 본문에서의 '그러나 육손은 유비를 무시했다'라는 문장은 삭제하도록 한다. 알아서 판단하길 바란다.
  43. 더불어 조조 역시 조숭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서주를 침공한 적이 있으니 여기에서도 유비와 조조는 일치하였다.학살 빼고
  44. 그러나 조조는 후대까지 욕은 먹을지언정 조조 자신에게는 큰 타격이 아니었는데 이릉대전은 유비 자신에게는 뼈아픈 실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