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 전쟁 관련 정보
이릉대전 | ||
날짜 | ||
221년 7월 ~ 222년 8월 | ||
장소 | ||
중국 후베이 성 이창 시 이링 구, 샤오팅 구 충칭 시 우산 구, 펑제 구 | ||
촉한 | 동오 | |
지휘관 | 유비 | 손권 |
참전 장수 | 풍습† 오반 상총 진식 보광 장남† 정기† 마량† 왕보† 부융† 사마가† 두로↓ 유녕↓ 황권↓ 사합↓ 방림↓ 습진† 번주† | 육손 반장 주연 한당 서성 손환 낙통 송겸 선우단 이이 유아 장일 보즐 반준 |
병력 | 7~8만 (최대 10만) | 5만[1]~6만[2] |
피해 규모 | 수만명[3] ~ 8만명 사망[4], 수만명 항복[5], 모든 물자 손실 | 불명 |
결과 | ||
동오의 승리 | ||
기타 | ||
촉한과 동오 간의 국경선 최종확정 유비 백제성에서 병사(病死). |
목차
1 개요
夷陵大戰
중국 삼국시대의 주요 전투 중 하나.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했다.
적벽대전, 관도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대전으로 꼽히는 전투이자 제갈량이 말했던 융중대(천하삼분지계)[6]의 붕괴를 선고한 전투.
도원종언의 결말을 맺는, 촉빠들을 울게 만드는 전투.
2 전개
2.1 개전 준비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가 형주 공방전 중에 오군의 공격에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고 형주를 잃게되자, 분노한 유비는 수 년 후에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그러나 많은 신하들이 이에 대해 간언했으며[7], 진밀은 천시로 보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운은 위를 쳐야한다며 말렸다. 호삼성은 이런 조운의 말에 대해 일에 있어서 앞에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안다고 칭찬하지만 유비는 듣지 않고 조운은 강주를 지키게 하고 진밀은 간했다가 하옥되어 유폐된다.
또한 초청한 이의기에게 길흉을 묻자 이의기는 답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구하고서 병마, 병기와 의장을 수십 장을 그린 다음 하나하나 손으로 찢고는, 다시 대인大人 한 명을 그려, 땅을 파 이를 묻고는, 곧바로 떠나며 불행을 예견한다.
거기다가 그 와중에 221년 장비가 범강과 장달에 의해 죽고 마는 등 불안한 조짐이 보였으나 유비는 제갈량을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둔 뒤 오로 진군한다. 제갈량하고 조운 떼고 대체 뭘믿고
7월 유비군이 백제에 도착하니 오나라에서는 제갈근이 편지를 보내 같은 원수라면 더 큰 원수인 조비를 치라는 조운과 같은 이론을 앞세워 화해를 청한다. 호삼성은 위에서 봤듯 이를 칭찬했으나 배송지는 여기에 주를 달아 "이건 레알 개소리. 글자가 아깝다."라고 평했다.[8] 유비는 이를 거절하고 오나라를 공격하고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2.2 위나라에 칭신하는 손권
2.2.1 그 동안 위나라에서는
한편, 조비쪽에서는 그 누구도 유비가 손권을 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부분 신하들의 의견은 촉은 관우가 죽었으니 공격할 여력이 없다였지만 유엽만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예상했는데 첫째는 위신을 세우고 촉이 약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관우와의 개인적인 관계였다.
221년 8월 손권은 스스로 번국을 청해오며 관우를 물리치며 얻은 우금을 돌려보낸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지만 이번에도 이때 유엽과 조비와의 대화는 자치통감에 길게 소개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넘어가도록 하자.
- (유엽) : 이건 유비가 공격을 하려고 하니까 손권이 그 동안 우리가 공격할 것이 두려워서 이러는 것이죠. 그러니까 촉에게 오의 반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음 오를 공격하면 오는 곧 망하고 촉도 곧 망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2. (조비) : 항복한 자를 어찌 치겠는가? 차라리 촉을 치는게 낫다.
- 3. (유엽) : 촉을 공격한다면 촉은 그냥 군사를 되돌리면 됩니다. 하지만 유비는 지금 화나 있어서 우리가 손을 잡고 공격한다면 기뻐하며 뒷일 생각 안 하고 따를 것입니다.
- 4. (조비) : 아놔, 시끄러. 얼라 저기 우금이 있네. 저 쉐리나 죽여야지. 우금 분사. 사마광은 여기에 평을 달아 임금답지 못하다고 깐다.
- 5. (호주) : 조비님, 손권은 진심으로 항복할 것이고 인질로 아들도 보내올 것입니다. 제 가족 100명을 걸고 자신합니다!
- 7. (유엽) : 헐, 손권이 겨우 남창후라서 애들이 우리를 무서워하는데요? 장군의 칭호를 올려주거나 10만 호의 후로 책봉하는 건 몰라도 왕은 무립니다. 손권은 분명히 촉 물리치면 바로 무례한 행동 들어갑니다.[9]
- 8. (조비) : 아오, 시끄러. 얘들아 오나라는 우리 적 아니니까 맘 좀 편히 놔라!
- 9. (하후상) : 헐, 님 그건 좀 아닌 듯. 얼라 뭐야? 나 빼고는 이미 다 널널하게 놀고 있잖아!
2.2.2 오나라의 반응
그 동안 형정은 오나라에 도착한다. 사람들은 왕이라는 직책 따위 받지 말고 상장군이나 구주백[10]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지만 손권은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형정의 무례에 장소가 일갈하고 서성은 주위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분해하니 형정은 오나라가 오래 밑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쨌든 손권은 조자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한다. 거기서 조자는 끝내주게 손권을 띄워주는데 말을 너무 잘하니[11] 조비가 조자에게 자신에게 귀순할걸 권하고 조자는 그동안 오를 치켜세운건 다 어디갔는지 덥썩 수락해 위의 조정에 임관한다. 손권도 조비에게 신하가 되겠다 자청한 마당이라 자기가 조비를 섬긴다고 나쁠건 없다는 심보였을듯...
그리고 조비는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작두향과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 공작, 비취, 싸움 오리, 장명계 등을 오에 요구한다. 이런 말도 안되는 사치품의 요구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기겁하며 사치품의 요구양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지만 손권은 여기서 조비는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라 예의를 가지고 드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과 함께 조비가 요구한 모든 것을 갖추어서 보내준다.
그후 조비는 손권의 아들 손등을 만호후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며 편지를 올려 받지를 않고 단지 심형을 파견해서 감사의 뜻을 밝히며 방물을 바친다. 심형을 만나본 조비는 그가 훌륭하다고 여기고 일단은 이 문제를 덮어둔다.[12]
2.3 유비의 공격
촉군의 처음 기세는 매세웠다. 육손, 이이, 유아는 무현과 자귀현을 주둔해 있었는데, 촉군의 선봉인 오반과 풍습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하고 자귀에 주둔한다. 거기에 마량의 회유로 사마가를 비롯한 무릉의 오계만이까지 촉군에 합세한다.
거기다가 영릉과 계양마저 습진을 필두로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따로 보즐을 파견한다. 보즐은 습진을 반준과 함께 격파하고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니 결국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이릉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비군에 호응하지 못하고 전투가 끝난 후에 토벌되고 만다.
이때 황권이 선봉장을 자청하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사를 감독하라고 보내버렸다.
222년이 되자 송겸이 촉의 진채 다섯 곳을 함락시키고 주연이 촉군의 선봉대를 격파하였으나 유비는 다시 공세로 나가 이도에서 혼자 공을 세우겠다고 앞서 나선 손환을 격파해 포위한다. 그러나 육손은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간다. 이에 손책 시절부터 섬겨왔던 노장들과 손권의 친척들도 합세하여 육손에게 싸울 것을 청하나 육손은 칼을 들고 그들을 복종하게 할뿐 나서지 않는다. 또 이릉성에서 포위당한 손환이 도움을 요청하자 육손은 그것을 거부하고 왜 손권의 동족을 구원하지 않는냐는 장수들의 말도 무시하며 수비로 일관한다. 이에 오군은 고릉군에서 패배한 데다 이릉까지 밀리게 된다.
유비는 이런 육손에게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고 유인하니 다른 장수들은 모두 공격하자고 할 때 육손은 오히려 산골짜기에 유비가 복병을 둔 것을 알고 그들을 말리니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버티기만 한 육손에게 반격의 때가 온다.
2.4 칠백 리를 태운 불꽃
육손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그의 전략에 의하여 오의 영토내로 5, 6백리를 들어온 유비군은 양자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리나 되는 긴 전선이 형성되게 된다.
이 사실을 들은 조비마저 "유비는 병법을 모르니 손권이 곧 이겼다고 문자 보내겠구만" 이라고 말할 정도로 병법에서 금기하는 일이었으니 육손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제가 이겼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행동을 취한다.
육손이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니 다른 장수들은 유비를 이기려면 처음부터 싸웠어야 하지 어째서 본토에 5,6 백리나 들어온 지금에서야 들어오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적의 영채 한 곳을 공격하게 하며, 온갖 자뻑을 하며 공격하지만 근데 거기서 패배. 장수들이 헛되이 병사들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으나 육손의 계책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길 방법을 알고 있다.
라고 하고는 촉군의 수군과 육군의 연계체계가 취약하다는 것을 이용해 양자강을 거슬러 진군하여 촉군을 화공과 기습으로 공격하니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라[13] 덕분에 화공이 크게 성공하여 촉한군은 마침내 대파되었다. 이릉성에 갇혀있던 손환의 애움도 알아서 풀리니 손환 또한 참전 이릉성을 포위하고 있던 풍습, 장남이 사망하고 무릉만왕 사마가도 죽으니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와 유녕은 항복해버린다.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다시 군대를 포진시켰으나 다시 한 번 오군에 대패하고 자귀에서의 패배로 왕보도 죽는다. 결국 유비는 손환과 육손에 대한 푸념을 외친 다음에 백제성으로 들어서니 그런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역을 관리하는 자가 스스로 꽹가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후에야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14]
하지만 이렇게 유비를 구하기 위해 후전[15]을 맡은 부융의 군대는 거의 다 죽어버린다. 부융의 기세는 사그러들지 않았으나 오나라 사람이 타이르며 항복하라고 하자 오나라의 개들이라며 욕하다가 결국 부융도 사망. 종사좨주 정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퇴하는데 여러 가삼들이 뒤에서 추격하는 사람들이 곧 올것이라며 배를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가라고 하자
나는 군대에 있으면서 적 때문에 도망하는 것을 아직 익히지 못했다.
라고 하고는 죽었다. 이걸 보고 호삼성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적에게 다가서는 것은 진실로 죽으려고 가는 것이지 아직은 도망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촉의 군사들이 모조리 죽고 있던 와중에 상총의 진채만이 온전했다고 한다(…) 이렇듯 수십 리에 거친 진지가 함락되어 퇴로가 끊긴 황권과 사합은 결국 222년 8월, 위나라에 항복한다. 한편, 무릉만에 가있던 마량 또한 오계만에서 사망한다.[16]
한바탕 전투가 끝난후 육손에 의해 목숨이 살아난 손환은 육손을 만나 육손에게 감사한다. 손권은 육손이 부하장수들이 말을 듣지 않음에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 사실을 왜 알리지 않냐고 물어보고 육손의 설명을 들은 다음 크게 기뻐하며 육손을 승진시켜준다.
패퇴 후 유비가 백제성에 도착하자 서성, 반장, 송겸은 그를 쫓자고 주장하였으나 육손과 주연, 낙통은 조비의 남하가 있을 것이므로 그를 대비하여야 한다고 하니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다시 화친을 제의하고,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10월에 화친이 이뤄지고 이릉대전은 끝난다. 한편 당시 조비는 유비와 손권이 싸워서 둘이 힘을 빼게 한 뒤 둘 다 먹을 속셈이었고, 육손의 예상대로 이릉대전 후에 오나라로 밀고 들어온다.
한편 조비가 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가 육손에게 한 번 편지를 보내본다.
유비 :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육손 : 단지 걱정되는 것은, 당신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만 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유비 : 한번 더 붙으실? 육손 : 한번 더 박살나실?
사실 해당년도에 촉오가 이미 화친했으므로 유비가 정말로 재공격하려고 엄포했다기 보다는 그냥 내질러봤다고 보는게 매끄럽고 이에 육손도 잘 받아쳤다고 해석하는편이 매끄럽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나서 또 공격할만 한 암군도 아니고.
3 결과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사망 플래그대로 70만에서 75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나가서 쫄딱 망하는 정도로 설명되나 실제로는 유비군 본대 4만 가량에 마량이 끌어들인 다수의 무릉만이들과 선봉으로 나선 오반과 진식의 수군, 북쪽에서 위를 견제하며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 할 황권의 부대에 육손이 8만을 죽였다는 유엽전 기록까지 감안하면 대략 7~8만 가량으로 추산할 수 있다. 유비군의 총 전력이 4만 명이었다는 설은 위서에 기록된 유비군 본대에 대한 기록만 참조하면서 생긴 오류인 듯 하다. 하지만 정사에 기록된 병력 숫자 자체도 대군임이 확실한데다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패가 맞다고 할 지경이다.
일단 전력상으로 유비는 약 8만 명 정도의 병력에 조운, 위연[17], 오의, 이엄, 진도 등 1세대 명장들을 제외한 2세대 중진 장군들이 대거 투입 되었다.
보다 상세히 서술하자면, 풍습은 장비 대신 촉군 대도독을 맡을 정도였다. 장남은 형주 시절부터 종군하였으며 풍습과 함께 손환을 깨트릴 정도의 인물이였다. 정기는 유장 시절 일어난 반란에서 아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의 직무를 행하던 사람이었다. 부융은 한(漢)나라 장군으로 항복하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싸우다 전사한 맹장이었다. 두로와 유녕은 자세한 내용이 없다.
여기서 1세대 명장들이 투입되지 못한 것을 보고 2선급 전력으로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데, 사실은 이와 달라서 하필 전쟁 직전에 관우와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명장 장비까지 갑자기 죽어버린 이유로 나가고 싶어도 못나간 것이다. 장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도독 자리가 장비에서 풍습으로 교체되는데 아무래도 능력의 차이가(…). 차라리 조운을 데려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관우와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촉 본진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경험 많은 장군 역할을 할 사람은 실력으로나 위상으로나 조운이 적임이었고 또 이릉대전을 반대한 인물이라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시킬 명분도 없었기에 강주에서 후방지원용으로 놓아둔다. 또 조운의 포지션 자체가 일군을 이끄는 장군, 도독보단 내부 군정에 더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기에 만약 이릉에서 잘못되었을 경우 후방을 책임질 사람으로 놓아두는 것도 필요했다. 실제로 이릉에서의 패배 이후 조운은 백제성으로 신속히 군을 이동시켜 후퇴하는 유비를 맞이한다.
물론 촉이 대오전에 동원한 병력 자체가 완전히 전멸했다고 볼 순 없다. 오 역시 1년 동안 싸움으로 이도까지 밀렸다가 촉군에 무릉만이들이 대거 가세하여 군율과 전선이 흐트러지고 늘어난 것을 이용해서 화공 및 유비본대의 연쇄적인 격파로 기세를 몰아나가 이긴 싸움이었기에 쉽게 이기지만은 못한 싸움이었고 유비가 영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손권이 유비와의 교류를 복원시키는 등, 그 이후 촉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록 조비와의 항쟁이 있다 하더라도, 촉이 하다못해 위와 오 사이의 허라도 찌를 정도의 힘이 없을정도였다면 손권이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형주를 침공하면서 불어난 현지의 힘은 전멸되었다고 봐도 되겠지만, 적어도 이 당시 촉은 내부반란을 수습하고 기회를 엿볼만한 힘은 남아 있었다, 다만 인적자원면에서 손실이 컸다는 것.
오의 경우도 사실상 국가의 존망을 두고서 전력을 쏟아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전 초기 손권은 유비에게 화친을 청하고 위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여 협공을 피하는 한편, 위의 도움요청은 거절해서 유리한 위치를 확실하게 잡은 뒤에야 상대하는 등, 이때 보인 외교적 균형은 그의 리즈시절이라 부르기 손색이 없을 정도.
제갈량의 불참도 유비의 패배 중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본디 유비 생전에 제갈량은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지휘한 적이 없었고[18], 1인자와 2인자가 모두 자리를 비우면 국정을 돌보고 병참을 지원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유비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갈량은 이를 제압해야 했다. 얼핏 보면 한순간에 이루어진 전투로 보이나, 거의 반 년에 걸친 대결전이었다.
촉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마량, 황권 등의 핵심 참모들이 죽거나 투항하고 풍습, 장남, 정기, 부융, 두로, 유녕 등 군부를 이끌어가야 할 2세대 장수진들이 거의 붕괴되었다. 황권과 함께 위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 무려 318명인데 그 중에 열후로 봉해진 사람만 해도 42명이고 장군 낭장으로 봉해진 것이 100명이니 말 그대로 촉한의 후기 인재가 통째로 날아간 형태였다.
촉을 도와 참전했던 무릉만이 역시 사마가가 죽은 것을 비롯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무릉만이의 반오감정은 사그라들기는 커녕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 이후로 몇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고 오나라가 5만 명이나 동원한 대규모 정벌에도 불구하고 복속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후에 촉한이 진나라에게 멸망하자 바로 진나라 편을 들었다.
이러한 인재부족은 후에 제갈량의 1차 북벌때 경험많은 장수들이 부족해 군경력이 일천한 마속과 인격 문제로 좌천되어 있었던 양의를 기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마속에게 해줄 건 다 해주고 후에 장합을 격파하기도 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왕평까지 부장으로 보내주었지만... 이에 대해 몇몇 촉빠들은 차라리 오의를 마속 대신 넣거나 왕평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서 싸웠으면 결과가 저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한탄한다. 그리고 양의는 애초부터 유파와 갈등을 빚는 등 철저하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위인이였기 때문에 유비가 실각시킨 인물이였으나 이러한 인재 부족 때문에 제갈량이 눈물을 씹으며 어쩔 수 없이 기용했고 그 결과 양의는 제갈량 사후 반목하던 위연과 그의 일족을 제멋대로 죽인 뒤 자기가 승상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씨를 따랐어야 했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시전한 끝에 숙청당했다.
위나라는 조조가 죽고 조비가 후계를 잇고 황제에 오르면서 생긴 불만과 반란, 손권의 공격을 유비 덕택에 정리할 수 있었고, 오히려 상용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으며 양국의 국력 약화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때 조운은 황실복원이라는 절대적 명분으로 주적인 위를 정벌해야한다고 했고 위가 망하면 자연스럽게 오나라도 망하게할수 있다며 말렸지만 유비는 조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비가 죽고 4년이 지난 시점인 제갈량의 1차 북벌때도 천수, 남안, 안정 3군이 일시에 위를 배반하고 촉에 붙었는데 유비가 직접 북벌을 지휘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하다못해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었을때 전쟁을 멈추고 군대를 돌렸으면 물자 소모는 막대했을지언정 인력의 손실은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나라는 촉이 가지고 있던 형주 땅을 얻었으나, 이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 기껏 뺏은 양양도 위략의 표문의 말마따나 포기하듯 다시 위로 넘기고 위에 임시 항복을 해야했으며, 수많은 사신들을 위와의 관계를 위해 갈아넣고, 전쟁에서 이긴 직후에도 유비를 견제, 이민족의 토벌과 동시에 조비의 3로 군대를 막아야하는 위급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더구나 오나라 또한 유능한 장수들을 많이 잃어버렸고 전쟁도 오나라 국토안에서 벌어진 만큼 막대한 피해를 보는 등 상처투성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불가피했던 점도 상당부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둘 다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지만 막상 지나고보니 둘 모두에게 아쉬움이 남게 된 것이다. 강력한 위를 두고 동맹국끼리 서로 싸우는 바람에 1강 2약의 구도를 만들어 버렸고 이는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결국 촉이나 오나 큰 상흔을 입고 양국의 최대의 적인 위만 이득을 얻은 전쟁이었다.[19] 정리하자면 이릉대전 덕분에 촉한과 오는 모두 건국 초기로 상황으로 돌아가고 기껏 기회를 얻은 조비마저 오를 공략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릉대전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이를 위, 촉, 오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4 평가
4.1 이릉대전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서 앞뒤 안가리고 일으킨 전쟁인것처럼 묘사되는데다가, 정사에서도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고, 무엇보다 결과가 대패로 끝난 전쟁이다 보니 라이트한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는 이릉대전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릉대전의 격발 원인은 단순히 관우의 전사와 형주를 빼앗긴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나라는 단순히 동맹관계를 깨고 형주를 취한 뒤 관우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권은 익주의 후방을 흔들기 위해서 교주의 사섭을 통해 옹개를 친오파로 포섭하고 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는 한편, 형주를 장악한 이후 공안에 머물던 유장과 그 일가가 오에 항복하자,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아 남군 자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유장이 죽자 아들인 유천을 익주자사로 삼아서 교주와 남중의 경계에 머물게 했다. 촉의 민심을 뒤흔들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유수독으로 있던 주태를 한중 태수 분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능양후로 봉했다. 익주와 한중은 촉의 영역이었다. 쉽게 말해서 오는 촉을 멸망시키고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는 의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촉나라 입장에서는 가만히 맞고 있을 수만은 없고, 어떻게든 반발하는 제스처를 보여야만 했다. 그리고 유비가 선택한 제스처는 바로 전쟁이었다.
유비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정사나 연의에서나 관우의 복수지만 정사의 경우 유엽의 말에서 보듯 가장 큰 목적인 관우의 복수 뿐만이 아니라 아직 오에 복속된 지 얼마 안 된 형주의 재탈환과 촉의 국력 과시 등의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촉한 장수들의 기둥들이라 할 수 있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은 물론 동화, 법정, 미축, 이적, 유파 등의 문신들까지 여러 공신들이 불길하게도 무슨 해마다 연이어서 죽어가니 위축된 군사들의 사기고양을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정작 이릉대전에서 격파당한건 이런 군대의 주축이 되어야 할 장군들과 모사들이 연이어 사라지고 2세대가 아직 덜 성장한 탓도 있었던게 아니러니. 그리고 기실 근본적으로 오나라 진영에서 육손을 제외한 다른 장수들은 유비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어느정도는 있었고 육손 역시 초전에 자귀현에서 여타 오나라 장수들이 패배할때 같이 물러난 적이 있었으며 이릉에서 공격할 당시에도 유리한 상황에서 시작하진 않았다. 어찌보면 오나라는 육손의 기책과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셈.
결론적으로 이릉대전은 아예 일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전쟁은 아니었고 이득을 취할 가능성도 있었다.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고 멈춰야 했을 전쟁이 수개월에 걸쳐서 질질 늘어지고, 끝내는 수습하기 힘들 정도의 대패로 끝났다는게 문제였다.
4.2 이릉대전의 전과에 대해
애시당초 유비 자신이 이끄는 본영 40영의 병사들은 4만명인데 부자의 기록에는 8만명이나 되는 촉군이 전사했다고 하지만 촉한이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병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 패배를 당했으면 촉한 자체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다. 물론 촉군이 대패를 당한건 사실이긴 한데 여기에는 유비가 현지에서 호응한 병력, 무릉만이를 회유해 불어난 병력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고 본영 40영의 병사들이 격파될때 이들의 비중이 만만치 않았을것이라는 것이다. 유비는 본군이 격파되고 이를 수습하여 백제성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며 오군을 계속 견제하고 있었고 육손 역시 위나라의 침공을 우려해 더 이상 처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후 오나라 측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먼저 저자세로 유비에게 화친을 청하는데 만약 유비의 주력이 전멸했다면 유비에게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올 이유는 없었다는 것. 물론 이후 촉이 전력 재건을 위해 쩔쩔 맨 것은 사실이기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700리 전선 문제에 대해서도 조비의 견해와 다른 이설도 있다. 사실 유비가 지형의 한계로 700리를 이어서 병력을 분산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전선을 늘인것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유비의 본대와 장수들이 선봉에서 이끈 병력도 만만치 않았으며 분산된 병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오히려 이 덕분에 유비는 오나라 땅에 장기간 주둔하고도 보급에 문제가 없었고 육손과 오나라 장수들은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유비군이 강릉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방치해야만 하였다. 즉 유비는 공격해 들어오면서 수세에 몰렸을때를 대비해 각 진영을 험지에 둠으로서 육손이 틈을 찾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이릉전 초기에 육손이 기습하면서 오히려 불리했던 이유이라는 것이다. 즉 유비가 패한것은 육손이 예상치 못한 화공을 동원함으로서 완벽히 허를 찔러 촉군이 와해되게 만든거 자체가 문제였지 전선을 늘인것은 오히려 유비가 어떻게든 간신히 후퇴하고 후방의 남은 각지의 소수 병력을 추스릴 수 있도록 도와준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비의 역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임기응변으로 유비의 후퇴를 도운 기록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5 창작물에서
5.1 삼국지연의
삼국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를 중심으로 하던 1세대가 거의 대부분 사라지는 1부 완결.
이 때문에 번안하는 작가들에겐 지옥같은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가 위/오/촉 어디에 비중을 두던 간에 이 이릉대전을 전후로 명장들이 극히 일부만 남고 죽어버리기 때문에 이 이후로는 제갈량을 따라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촉나라는 유관장 삼형제는 기본에 황충, 마초 등이 사망하며, 위나라 또한 조조, 하후돈, 장료, 우금, 조인 등도 다 죽어버리고, 오나라도 감녕, 여몽, 장흠 등이 죽어버린다. 즉 스타급 주연은 거의 다 몰살당하고 독자들이 처음부터 봐왔던 얼굴들 다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로지 위와 촉에 중심을 둬야 되고, 오나라는 이 이릉대전에서 조운을 통해 주연을 죽인 탓에 조중정벌 쪽이 다 날아가버려 합비에서 꼴아박기만 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만들기가 힘들다. 제갈량도 삼국지가 다 끝나기 전에 죽어버린다(…). 2부 완결.
또한 제갈량 사후의 에피소드[20]는 위오촉의 1강 2약 체제가 유지되는데다 삼국이 정립되어 전쟁이 없는 대치기간이 이어지는데, 그에 따라 극 진행이 매우 지루해지며 주연으로 띄워줄 만한 인물조차도 드물어져 자세히 묘사되지도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21] 제갈량 사후의 주요 사건이라 해도 공손연의 난, 고평릉 사변, 제갈탄의 난, 관구검/문흠의 난, 이궁의 변 등 세력 내 다툼이 주가 되지 무용담과는 어딘가 거리가 있는 이야기 정도가 고작이며, 그나마 주요 전투로 꼽을 수 있는 낙곡대전[22]은 나관중이 연의에서 누락시켜 버린 데다가 249년부터 262년까지 이어진 강유의 북벌 역시 옹양주를 얻고 관중을 흡수한다는 대전략이 실패했고 제갈량 시대보다 규모도 작아서 더더욱 재밌게 그려내기가 힘들다.[23] 그리고 263년 촉 멸망, 265년 위 멸망/서진 건국, 280년 오 멸망/서진 천하 통일로 삼국연의 완결.[24]
별개지만 이릉대전 종전 후 250년에 위나라가 오나라의 강릉을 침공할 때 왕기[25]는 이릉에서 보협이 이끄는 군대과 싸웠는데, 보협은 농성을 해서 이릉을 지켰지만 왕기는 이릉성 주변의 식량창고를 공격하여 식량을 얻고 이릉의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왕기에게 투항하여 또 하나의 이릉성을 세웠다. 즉 이릉성을 지키는데에 성공하지만 이릉 그 자체를 빼앗긴 꼴이었다.(...) 그리고 보협의 똥별은 나헌에서 계속되고...
5.2 삼국지 영걸전
게임 《삼국지 영걸전》에서는 촉한건국 시나리오에서 선택을 하는 것에 따라서 이 쪽으로 빠질 수 있는데, 플레이어가 유비군인데다가 원작에서 촉이 패한 전투라서 상당히 어렵다. 초반에 불 때문에 아군의 병력이 1/4만 남고 사기가 절반으로 줄어버린데다가 가운데의 강 때문에 위쪽 장수들과 아래쪽 장수들이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래도 레벨 노가다를 하지 않아도 클리어는 할 수 있는데 발석차를 이용하면 편해진다. 튼튼한 병과로 입구를 막고 수송대나 주술사로 치료받고 발석차로 오나라 군을 퇴각시키다가 보면 육손이 오게 되는데 이때 육손을 퇴각시키면 전투가 끝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사마가와 주태가 붙을 시에 일기토로 사마가가 죽으니 이릉대전 루트를 탔고 사마가를 쓴다면 주태랑 붙이지 말것. 이것이 삼국지 영걸전 게임 내에서 유일하게 일기토 패배로 인한 아군 사망이다.[26] 하지만 원작과는 달리 사마가와 감녕의 일기토는 없다.
여기서 이기면 결국 유비는 육손을 우습게 본 게 실수였다고 하면서 오와 화친을 하면서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고, 여기서 지면 연의 원작대로 유비가 백제성에서 죽게 되고 결국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했다는 식의 원작엔딩이 나온다.
이 전투를 보면 손자병법서나 오자병법서는 얻을 수 없고 4장에서 감녕과 능통도 아군으로 합류하지 않는다.[27] 게임 내 육손의 명대사(?)인 "지금이야말로 승리의 찬스다!" 가 나오는 곳이 바로 이릉대전.
[[파일:육손(삼국지)기타 창작물chance.png]]
5.3 삼국지 공명전
1장의 마지막 전투로 나온다. 제갈량이 개판 5분 전인 촉군의 700리 진형도를 보고 위급하다고 판단하여 조운을 비롯한 촉 원군을 보냈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며, 시작과 동시에 촉 진영에 불길이 번지고 강 건너에서 오군이 밀려온다. 그런데 영걸전과는 달리 공명전에서는 불이 나도 아군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게다가 유비군 쪽은 유비까지 포함해도 달랑 5개 부대가 나와 있다. 75만 대군이니까 한 유닛당 15만 추격하는 육손 쪽 군세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우군이긴 하지만 관흥, 장포의 일기토 이벤트까지 있어서 굉장히 쉽게 클리어할 수 있다. 관흥이고 장포고 나발이고 현실은 조운무쌍
5.4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0에서 PK 추가 시나리오인 이릉전투를 시작하면 일어나게 되며, 촉이나 오의 장수로 게임을 플레이하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 촉군의 경우, 제갈양, 조운을 선택할 경우 자동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게 되며, 장비로 시작하는 경우는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외의 경우는 대개 전투 참가여부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릉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장비는 암살당해 죽는다.
- 촉의 입장에서
- 유비가 성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이릉에서 맞서는데, 사마가의 만족병이 원군으로 등장한다. 아군무장은 관흥, 장포, 황충, 황권으로 편성되며 이벤트가 일어나기 전에 착실히 군사를 늘리고 훈련을 완료했다면 이릉전투에서 이길 수도 있다! 초기 배치된 해상의 아군을 모두 육상으로 빼내고 (오군의 투함은 그냥 상대할 수 없다), 육손 하나를 일점사하여 이기면 황충과 유비의 사망 플래그가 분쇄되며 형남 4군 전체가 촉의 영토로 바뀐다. 플레이어가 유비를 선택하지 않은 경우, 이릉전투에서 패배 후 황충은 전사하고 황권은 위에 투항하며, 유비는 백제성(영안)에 틀어박히고 곧 사망하는 등 역사대로 이벤트가 흘러간다.
5.5 진삼국무쌍 시리즈
관우의 죽음을 보고 받고 분노한 유비가 다른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촉 세력 시나리오에서는 관우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관우의 복수를 위한 중요 전투중 하나이고, 오 세력 시나리오에서는 육손을 띄워줄 수 있는 최고의 전투이기 때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투가 끝나면 보통 촉은 관우의 복수는 했지만 관우의 빈자리는 채울 수 없다는 식으로 끝나고, 오는 촉을 털어버렸으니 이제 조조의 위만 털어버리면 된다는 식으로 마무리 된다.
진삼국무쌍2에서는 촉군 최고난이도 전투. 후대 시나리오인 오장원, 가정보다 이 전투가 훨씬 어렵다. 실제와는 달리 전투를 시작한 시점부터 왕창 불리한 상태로 아군고전 메시지가 계속 뜨면서 아군 부대가 족족 패퇴해 나가며, 만약 주연의 화계를 저지하지 못했다면 본진을 제외한 맵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어있는 광경을 어렵잖게 보게 될 것이다. 정말 플레이어가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녀야 하는 시나리오. 오측 역시 미칠 듯한 촉군의 맹공에 아군 부대가 털려나가는 건 비슷하지만 주연만 원호해주면 화계로 아군 사기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좀 낫다. 그런데 관우전을 한번 하고나면 이후에 마초 대신 관우가 아군출전무장이 된다. 게다가 남만전투전 동영상엔 떡하니 장비가 있다.. 누구의 복수를 위한 이릉전투인가?
진삼국무쌍3에서는 반대로 매우 쉬운데, 육손의 화공이벤트가 일어나도 아군이 크게 열세가 되지 않으며 유비는 순식간에 본진으로 물러나 죽을 일도 없고 제갈량이 원군으로 등장하며 배로 적 본진 뒷쪽으로 다리를 놓아 기습할 수 있게 되므로 오히려 전황이 유리해진다(…).그런데 만약 플레이어가 오군의 화계를 저지하는데 성공하면 말그대로 화계만 방지되고 화계가 발생했을때 튀어나오는 적의 원군이 사기 수치도 별8개의 최대치 상태로 나와버리는 바람에 화계 방지로 인해서 퇴각하지 않는, 초기 위치에 있는 총대장(유비)이 위험해진다. 무쌍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개입해서 막아내면 손해보는 싸움이다.
진삼국무쌍4에서는 육손이 계곡 사이에 다리를 설치한 뒤 기습적으로 주연과 호위의 감녕, 능통을 보내서 화공을 시도한다. 그런데 주연이 전혀 주위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계 장소로 일직선으로 달려가는데다가 감녕, 능통은 안 그래도 날쌘 놈들이 강화된 채로 방해하므로 화계를 막기가 무척 힘들다. 화계 이벤트를 굳이 막지 않아도 크게 불리해지지는 않으므로 그냥 무시하고 감녕과 능통만 잡는 것도 한 방책. 주변에서 화살을 구해와 (100개정도) 가교차 작동 전에 능통 부대와 친위대가 가교차 근처에 오는 순간 쏴서 잡는 방법도 있다. 능통만 잡고나면 감녕, 주연만 막으면 되니 쉬워진다.
화계 이벤트가 일어났다면 아군 무장들의 사기가 꺾여 금방 전멸하고, 육손은 전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고 본진에 있던 유비는 제갈량이 준비해놓은 석병팔진을 통해 뒷쪽에 있는 장소로 후퇴한다. 촉 세력 캐릭터라면 감녕과 능통만 주의한다면 큰 무리 없이 끝낼 수 있는 전투지만, 오 세력 캐릭터라면 꼬여있는 석병팔진에 들어간 순간 맵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헤매는 경우가 있어 좀 번거로울수 있다. 다만 CPU들은 길을 헤매지 않기 때문에 CPU를 잘 따라가면 헤맬 일 없이 도착 할 수 있다.
진삼국무쌍5에서도 초반 공방 이후 육손의 지시로 화계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번 작은 전작보다 길이 더 심하게 꼬여있다. 입구가 4개에 지형의 고저차도 적용되어 있어서 처음 접하게 되면 헤맬 수 밖에 없다. 이번 작에서도 CPU들이 석병팔진에서 헤매는 일은 없지만, 부활해서 밖으로 나오는 무장과 가는 길에 만나 싸우는 일이 있기 때문에 CPU만 따라 가면 진행이 더디게 되니 길을 외우는 편이 좋다.
5편부터 촉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화계가 벌어지면서 동쪽 아군의 사기가 대폭 하락하고 데미지를 입는데, 때마침 감녕을 위시한 오군 기습부대까지 출몰하여 이들을 공격하므로 기습부대를 격퇴시킨 후, 석병팔진을 노리는 남쪽의 육손[28] 부대 및 다른 부대들을 잡고, 서쪽에서 공격해오는 능통 일행을 격파하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은 남은 적 부대들을 소탕하면 되는 것.
오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화계 이벤트가 벌어진 뒤, 유비 역시 후퇴하기 시작하고 제갈량은 석병팔진을 발동 시키는데 석병팔진 중앙에 체력 회복 장치가 있어서 촉 무장을 잡았더라도 그 무장이 중앙에서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온다. 장치를 전부 파괴[29]하기 전까지 부활이 계속 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있다가는 계속 부활하는 무장들 때문에 거점이 털리고 사기가 떨어진다. 석병팔진을 와해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
진삼국무쌍6에서도 화계 이벤트가 있다. 촉 스토리모드로 진행하면 두 파트로 나눠지는데, 화계 전에는 조운으로 유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유비를 무사히 후퇴시키는 것이고, 이후에는 제갈량으로 잔여 아군의 후퇴를 돕는 것이다. 조운으로 유비를 발견하고 전편을 클리어하면 유비는 도망가자는 조운의 진언을 쌩까고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는데, 조운이 어쩔 수 없이 유비의 명치를 쳐서(…) 기절시키고 병사들을 시켜서 강제로 퇴각하게 만드는 당황스러운 이벤트 무비를 감상할 수 있다.[30]
오 스토리모드로 진행하면 전반 후반 모두 육손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역사상으로 오군이 대승리하는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촉 스토리모드에 비교해서 오 스토리모드의 이릉대전이 훨씬 어렵다(…). 화계 성공이 목표인 전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후편에서는 육손으로 석병팔진을 뚫고 유비를 잡아야 하는데, 석병팔진에 노포 함정과 환영병이 세팅되어 있는데다가 중간쯤 가면 본작에서 가장 짜증나는(…) 대규모의 연노를 동반한 월영이 진군을 가로막는다.
거기다가 월영을 상대하다 보면 석병팔진에 쓸데없이 진입한 손권이 석병팔진에 갇혀서 마량과 환영병들에게 개털려 SOS를 보내는데 한시라도 지체했다간 바로 게임오버. 문제는 화살공격이 매우 치명적인 이 게임에서 노포 함정 앞에 있는 마량을 그대로 상대했다가는 손권보다 플레이어가 먼저 눕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권이 SOS 신호를 보내면 석병팔진의 동쪽에 있는 마속을 먼저 잡아서 석병팔진을 정지시킨 이후에 또 뛰어가서 마량을 잡고 손권을 구출해야 한다.[31]
석병팔진을 정지시키고 나면 백제성 쪽으로 전진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조운을 비롯한 대규모 촉군이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를 가로막는다. 역시 여기도 짜증나는 궁병이 쫙 깔려 있다. 천신만고 끝에 유비 앞에 가면 유비는 버프를 쓴다(…). 그리고 유비마저 잡으면 전투는 끝나고, 이후 이벤트에서 손상향을 생각하여 유비를 살려 주는 손권의 이벤트 무비를 감상할 수 있다. 여러 모로 진삼6의 손권은 대인배.
진삼국무쌍7에서는 촉과 오 모두 사실모드일 경우 나온다. 오는 전작들과 실제 역사에서처럼 화공을 통해 촉을 격파. 촉은 장포가 플레이어 캐릭터로서 사실모드에 첫 등장하는 데뷔전[32]. 번성 전투에 첫 등장한 관흥도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로 나온다. 전작에서 관색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안달났다면 이번에는 관흥이 그것을 이어간다. 장포는 실전경험이 부족한 관흥을 걱정하다가 발끈한 관흥과 한바탕 겨룬다. 그 모습을 본 조운이 대선배로서 둘에게 한마디 해준 뒤 본격적으로 이릉 전투 시작. 전투가 시작하면 유비는 이성을 잃고 닥돌하며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조운은 관흥과 장포는 남쪽으로 진군하라 해놓고 유비 수색에 돌입. 수색 중 한당이 갑툭튀해서 방화를 시도하고, 한편 동쪽 거점에서 유비가 육손과 맞붙고 있는 것이 나온다. 실력이 된다면 재빨리 한당을 잡고 유비에게 가서 화계를 막고 이길 수 있지만, 한당을 막으려다 총대장 패배가 뜰 수 있으니 웬만하면 그냥 유비를 구하자. 이후 한당이 불지르면 아군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짐과 동시에 오군이 돌격해오고, 아군 무장들이 속속히 패주해간다. 유비를 호위하며 맵 서쪽 끝까지 가면 전투 종료. 전투가 끝난 뒤 전작처럼 유비는 뒷일을 부탁하며 병들어 사망. 화계를 막아 손권을 패배시켜도 결과는 같다.
한편 오 쪽은 그냥 평범하게 버티다 불지르고 석병팔진 뚫고 유비를 잡으면 끝난다.
진삼국무쌍7 맹장전에서도 이름은 달라도 이릉대전을 무대로 한 전투가 촉과 오 시나리오에 등장. 오는 주연이 클론무장에서 정식무장으로 승격되면서 주연이 활약하는 '이릉 추격전'이 생겼다. 본가의 이릉대전과 딱히 다를 건 없다. 단지 정식무장이 된 주연이 불지른다는 것 정도.
한편 촉은 법정이 이릉대전까지 살아서 오의 화공을 역으로 노린 복병 책략으로 오를 이기는 '이릉 복수전'. 심지어 전투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략이 더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법정의 말이 일품.
시작하면 병력을 분산시켜놓은 것을 본 법정이 한탄하며 시작. 왠지는 모르지만(...) 오군이 점령하고 있는 석병팔진을 뚫으면 육손이 화계를 시도하려한다. 이때 오의 본진에서 Y자 모양에 길에서 공작병이 둘로 갈라지는데, 육손이 화계대사를 말하면 플레이어는 하던 짓을 그만두고 재빨리 말타고 달려 Y자 길에 가서 공작병이 둘로 갈라지기 전에 격파해야 한다. 1인 플레이라면 공작병이 갈라지면 잡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화계를 막으면 법정의 계략에 따라 맵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장포,관은병과 조운,관흥을 매복시킨다. 문제는 여기인데, 장포와 관은병은 알아서 잘가는데 조운과 관흥은 적병 하나하나 신경써가며(...) 가서 매복시키기 참 힘들다. 이 맵에서 법정,마대 등의 비장무기를 얻을 수 있는데, 조건이 제한시간 내에 법정 계략 발동인지라 조운과 관흥이 안 가서 실패하면 속 터질 지경. 무쌍난무를 쓰던 각성난무를 쓰던 최대한 빨리 남서쪽을 쓸어버리자. 매복에 성공했으면 주연과 육손이 한번더 화계를 시도하려하는데, 이 때 둘 중 한명을 촉 진영까지 유인시켜 불지르게 하면 된다. 둘 중 한명이 불을 지르면 촉병이 국어책 읽기로(...) 유비님이 돌아가셨다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들은 오는 닥돌. 이후 매복시켰던 병력과 후퇴시켰던 병력이 힘을 합쳐 닥돌해오는 오군을 역으로 털어주면 마무리.
- ↑ 육손전
- ↑ 보즐의 1만을 따로둘시
- ↑ 삼국지 육손전
- ↑ 부자 - 삼국지 유엽전의 배송지주에서 인용
- ↑ 오주전
- ↑ 물론 천하삼분은 자체는 유지되었지만 형주와 익주를 아우르고 중원으로 진출한다는 전략은 붕괴되었다. 이 때문에 촉한은 대대적인 전략 수정에 들어갈수 밖에 없었다.
- ↑ 화양국지 유선주지.
- ↑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글자가 아깝다고 평했다.
- ↑ 실제로 촉을 물리친 다음에는 바로 무례한 행위를 시작한다.
- ↑ 9개의 주를 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 마디로 천자의 직책이랑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 ↑ 자세한 내용은 조자 참고
- ↑ 자세한 내용은 심형 참고.
- ↑ 연의에서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촉한의 군세가 지쳤다고는 하는데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지만 당시 중국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한랭건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육손은 기후를 살펴보아 마침 건조한 날씨를 기다려 화공을 했을 공산이 있다.
- ↑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다.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상 국역 자치통감에 달려 있는 주석.
- ↑ 후퇴할 때 추격하는 군사를 막아 전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후방에 있는 부대를 말한다.
- ↑ 전쟁이 지자 화난 무릉만이에게 죽었는지 오나라가 그 먼곳까지 군대를 보내 죽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마량이 있던 곳과 가장 가까운 군대가 익양의 보즐이다.
- ↑ 입촉부터 공을 세우기 시작했고 주된 활약도 북벌시기이므로 2세대에 가깝다.
- ↑ 유비 생전에 유비군에서 제갈량은 조조군의 순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본진을 지키며 세력 전체의 전략을 짜는 책사였던 것.
- ↑ 하지만 조비도 유엽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기껏 얻은 찬스를 낭비했다. 유엽이 조언한대로 촉을 도와 오를 무찌르고 촉을 먹었다면 정말 순식간에 끝났을 것을... 괜히 뒤늦게 혼자 오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오히려 관광당했다.
- ↑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제갈량의 사망은 반환점에 해당되는데 120회본인 모종강본 기준으로 이 부분은 105회까지다. 나머지 절반의 세월을 15회 동안에 몰아넣은 것. 결국에는 한 번에 10년을 건너뛰기까지 할 정도다.
그런데 이문열은 이것마저 틀리게 계산했다. -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후반부 장수에게 능력치가 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능력을 가진 장수가 있었다 한들 활약할 기회가 드물었으니... 그로 인해 갈수록 후반기 비중을 줄이면서 10PK까지 간간히 등장했던 제갈량 사후 시나리오도 11부터는 아예 등장하지 않고 있다.
- ↑ 오군이 압승한 이릉대전은 연의에서 규모가 좀 더 뻥튀기된 규모가 있어 대전이라 부르기엔 조금 미묘하다. 정사상 전투 규모와 후반 이야기까지 생각한다면 사실 3대 대전엔 이릉대전이 아닌 낙곡대전이 들어가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 그나마 나관중이 연의에서 강유의 북벌 횟수를 아홉번으로 늘렸는데도 한권 반 분량 정도다. 이건 낙곡대전 같은 사건을 안 넣은 나관중에게도 책임이 있다만...
- ↑ 길게 보자면 서진이 전조(한나라)에게 멸망하는 316년까지지만 이때는 삼국지가 아니고 사실상 서진 시대다. 그리고 서진이 전조에게 멸망한 직후에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했다.
- ↑ 자는 백여. 공여라는 자를 쓰는, 고구려를 침략한 왕기와는 동명이인
- ↑ 와구관 전투에서는 뇌동과 장합이 붙어서 뇌동이 패배, 한수 전투에서는 오란 vs 조창 일기토에서 오란이 패배하지만 연의와는 달리 둘 다 퇴각만 하고 사망처리는 되지 않는다.
- ↑ 대신 서성과 정봉은 더 높은 레벨로 합류한다.
- ↑ 특히 육손은 내버려두면 석병팔진에 들어갈 때 석병팔진 조사를 개시하여 효과를 약화시키므로 우선적으로 잡아야 한다.
- ↑ 중앙의 무장상 8개를 전부 파괴해야 한다.
- ↑ 삼국지연의 본작을 비롯하여 연의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이릉전투에서는 유비가 화공을 당한 직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부하들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 ↑ 보통 이 부분에서 시간이 굉장히 모자란다. 마속을 열심히 잡고 있으면 손권이 마량에게 당하는 경우가 10에 3, 4 정도. 그렇다고 마량부터 잡으러 갔다간 지옥을 맛본다.
- ↑ 가상모드로 가면 동영상에서 성채와 같이 처음 등장하고, 육구 전투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로 첫 등장.
- ↑ 6편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