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표적 반달리즘(시대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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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 无产阶级文化大革命(Wúchǎn Jiējí Wénhuà Dàgémìng:우찬제지 원화따거밍) |
영어 | Great Proletarian Cultural |
별칭 |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無産階級 文化大革命,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
레드카드 마오쩌둥 어록집인 "소홍서"를 들고 있는 홍위병들[1]
목차
1 개요
※ 문화대혁명의 현장 그냥 린치 BGM도 암울하고 영상도 흑백이라 무섭기까지 하다.
진시황 원작, 마오쩌둥이 기획, 연출하고 홍위병이 주연을 맡은 사회 파괴 운동.
1966년부터 1976년, 고작 10년 동안 중국의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바닥까지 추락시켰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문화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 [舊思想] 낡은 문화, [舊文化] 낡은 풍속, [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여, 이타주의(利他主義)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새로운 사회주의적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역사적인 문화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시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되어버린 중국의 흑역사. 그것도 중국 역사상 정권이 스스로 저지른 일 중에 최대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하나 지적한다면, 현대 중국 문학작품에 많은 소재를 제공해주기는 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하는 건 아니다.
말은 많지만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라. 문화, 교육, 정치, 니들 부모까지도. 그야말로 탈권위를 하겠답시고 마오쩌둥이라는 새로운 권위를 따르다가, 새로운 병폐를 창조한 복잡한 병크. 제 아무리 마오주의자라도 정말 미치광이처럼 숭배하는 자가 아닌 이상, 대약진 운동과 함께 문혁만큼은 비판한다.
분서갱유나 카르타고의 최후처럼, 가끔씩 일어나는 승리국에 의한 패배국의 "문명 파괴"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문화대혁명의 모토는 "이제 경제/정치 분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그보다 상부구조인 문화를 혁명할 단계다"라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구(舊)체제(Ancien Régime)의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관료제, 위계질서를 파괴하고자 했다.
간단히 말해, 분서갱유, 문자의 옥의 현대판 데자뷔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이 문화대혁명이 중국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을 훨씬 능가한다.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은 적어도 자국의 식문화와 문화산업까지 파탄내진 않았다.
그야말로 경제와 문화 전반을 엄청나게 추락시킨 원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문화의 경우, 고전문화에서는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현대적 의미의 대중문화로 보자면 엄청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다만 여행객들이나 학생들 입장에선 의외로 이러한 대규모 반달리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에 고전문화가 상당량 보존되어있는 걸 보고 의아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일 문혁이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막장이었어도 그 《삼국지》조차 이 세상에서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사실 이 문화대혁명식 반달리즘의 진수는 문화재 파괴보다도 문화/예술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린치(…)에 있다. 주변에 문화/예술 쪽으로 종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쳐들어가서 "게으름뱅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때로는 두건도 뒤집어씌워 두들겨 팬 뒤, "현실 체험"이라면서 집단농장에 감금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이러니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제각기 대중문화를 발달시켜가던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대중문화는 그런 단계를 전혀 밟을 수가 없었다.[2]
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나름 "혁명"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실상은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대폭동 비슷하게 흘러간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뒷배경 자체가 처음부터 극히 불순했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의 중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을 마치 프랑스 혁명의 동양판쯤으로 선전했다. 서구 지식인들은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로 이렇게 믿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당시의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저지른 각종 실책으로 인해 권좌에서 스스로 내려올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자 전 국토에 거한 깽판을 쳐서라도 권좌에 끝까지 매달려있으려고 일으킨 졸속에 불과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이렇게 노욕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동안 중국의 국력은.....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직후의 중국은 그 꼬라지가 요즘 코드로 따지자면 거의 분노의 도로(...)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2 배경
마오쩌둥은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인민을 선동해 중국을 파탄지경에 몰아세웠다.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공식적으로 마오는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국가주석직을 사임했고, 후임으로 류사오치가 선임되었다. 마오쩌둥은 당 중앙위원회의 주석직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을 맡고 있었음에도 마오쩌둥은 계속 "주석"이라고 불렸다. 마오의 권위와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과는 반대로,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마오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을 붙인 게 펑더화이였다. 1959년, 장시 성 루산에서 열린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가 마오가 밀어붙인 삼면홍기(三面紅旗)[3]에 대해서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고 비판했다. 물론, 펑더화이는 나름대로 마오를 생각해서 한 충언이었으나, 초조해져 있던 마오에게 이 소리는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펑더화이의 비판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한통의 개인 편지였다. 단순히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우 상세한 설명과 예시를 들어가면서 칭찬과 부족한 점을 차분한 어조로 언급한다. 그 예로 "전 인민들의 철강생산 중에 수많은 흙으로 만든 용광로를 만들어 많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였다. 이는 당연히 커다란 국가적 손실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지질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를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관계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간부들도 이 운동기간 중 단련을 하였다는 점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와 같은 평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오가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았다는 것에서 너무 감정적인 사실 왜곡은 조심해야 한다.[4][5]
이에 마오는 펑더화이에게 "감히 주석에게 사임하라고 강요하다니!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야!" 라고 거의 폭언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냈고, 펑더화이는 깨갱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이로 인해 펑더화이는 실각하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인 린뱌오를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부장에 앉혔다.
게다가, 삼면홍기(三面紅旗)에 긍정적이었던 류사오치조차도 고향 후난 성을 시찰하면서,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야" 라고 할 정도로 마오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데, 강제적인 집단화 추진 정책이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일부 후퇴시키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 라는 말을 남기며, 실용적인 경제정책으로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대체하려 했다.
이런 경제개혁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일반 인민들은 물론, 중국 공산당 안의 고위 간부들에게까지 류사오치의 명망이 높아져갔다. 이렇게 되자, 류사오치는 마오의 권력을 점점 줄이고, 자신이 최고권력자가 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류사오치는 마오를 뒷방 늙은이, 즉 상징적인 존재로 남겨둘 계획을 세웠다. 다시 말해 실권은 없지만, 인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우상화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넘겨준 건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마오는 젊은 세대들에게 주목해, 젊은 세대들에게 마오주의 교육세뇌을 강화하면서 그들을 자신의 열렬한 지지층으로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이런 우상화 선전과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은 희대의 광인집단 홍위병을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3년, 마오는 소위 4청운동이라 하여,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사상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류사오치를 직접 겨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홍위병 자체는 단일조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마오이즘을 모토로 젊은이들끼리 만든 조직을 뜻하는 보통명사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지역마다 홍위병이 다 다르고, 조직마다 내세우는 모토도 조금씩 달랐다. 게다가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이었다. 무슨 동네 조기축구회도 아니고, 동네마다 세 개, 네 개씩 차라리 조축이었으면 지금쯤 중국에서는 11명의 메시가… 그렇기 때문에 조직 간의 연계도 불확실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저 마오라는 이름 아래 모여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하여 홍위병은 나중에는 문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팀킬을 벌이게 되고, 지방에서는 모토가 다른 홍위병 조직들이 갈등 끝에 정규군 병영을 습격하거나, 파벌로 나뉜 군지휘관들의 원조를 받아 서로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까지 있었다.
사실, 이런 교육과 선전이 잘 먹혀들고 전체주의적 추종이 나타난 배경에는, 한국에서 일제강점기의 반동으로 민족주의에 경도된 것처럼, 가까운 과거에 겪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동과, 급격한 체제, 문화적 변화로 인한 중국인들의 정신적 혼란에, 개인 간 불신의 풍토, 세대간의 갈등이 태동하는 것도 있었다.
2.1 중국 공산당 내부의 '보수파' 문제와 관료주의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이래, 그 내막을 살펴보면, 사실 완전히 피의 숙청으로 권좌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국공내전(國共內戰) 과정에서 이미 상당수의 중국 국민당 군벌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했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초기에는 미약한 숫자를 보이던 공산군이 후기로 갈수록 병력이 불어나고,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 많은 병력이 2~3년 새에 땅에서 솟아나왔을 리가 없으니, 대부분 상대 진영에서 전향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국공내전에서만 보인 게 아니라, 청조 붕괴 이후 내내 벌어지던 양상이었다. 대군벌들이란 휘하의 수많은 소군벌 연합체이므로, 청조 붕괴 이후, 어느 한쪽이 불리해진다 싶으면 순식간에 유리한 쪽으로 헤쳐 모여를 수없이 일삼던 집단들이었고, 장제스 자신도 보잘 것 없던 혁명가에서, 소련의 도움으로 기본적인 군사력을 갖춘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헤쳐 모여를 통해 소군벌들을 규합해가며 세력을 키웠고, 이후 대군벌 단위로 헤쳐 모여를 하면서 펑위샹, 옌시산, 장쉐량, 리쭝런, 바이충시 등을 국민당 아래에 복속시켜 중국 통일을 이뤄낸 것이었다. 이후 장제스 자신이 무리한 진격과 우유부단한 처리로 사지에 뛰어든 후, 펑더화이, 린뱌오 등의 지략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입기 시작하자, 장제스 휘하의 군벌들은 원래대로 헤쳐 모여 근성을 발휘한 것이었다. 장제스와 군벌들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도 이에 한몫했다. 예컨대 쓰촨 군벌 룽윈의 경우, 장제스가 룽윈의 부하들을 죄다 만주로 보낸 틈을 타서 룽윈을 숙청해버렸고, 당연히 룽윈의 부하들은 공산당에 붙어버렸다. 이러니 장제스가 궁지에 몰리자, 푸쭤이, 탕성즈를 비롯한 군벌들이 줄줄이 넘어가버렸고, 총통을 지낸 리쭝런도 미국 망명을 했다가 나중엔 공산당에 붙어버린다.
또한,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다보니까, 각 성의 주요 관직에는 과거부터 이미 존재하던 지역 토호나 유지들과 어느 정도 협상을 해서, 당의 지도 하에 각 성을 혁명화하는 구조로 권력이양이 진행되었다. 쉽게 말하면,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행정관료들이 공산당에 충성을 맹세하고, 해당 지역에 그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OS랄 수 있는 정치체제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재설치해야 하는데, 하드웨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에 알맞게 교체되지 않은 것이다. 학계에선 1950년대 후반까지도 공산당이 농촌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그 많은 인구의 거대한 나라를 단기간에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해서 통치한다는 건, 솔직히 신의 영역인데, 마오는 표면적인 수치들만으로도, 공산당 내부에서 족히 15년 이상 걸릴 것이라 보던 사회주의 개조 작업이 3년 만에 다 되었다고 혼자 착각해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계속적인 내부정화나 혁명화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주민들이 그때까지 해오던 관습이 있으니, 지역에 따라서는 아직도 지주가 남아있던 지역도 있었고, 완전히 인민공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도 생각 외로 많았다. 게다가 구체제의 관료들이 새로운 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온 폐해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못돼 먹고 편한 것만 배운다고, 이전 체제에서 하던 장부조작, 통계조작 같은 짓을 일삼는 자들도 생각 외로 많았다. 대약진 운동의 통계조작은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다.
이런 이들은 중국 사회의 보수파라고 불리며 점점 일반 기층 민중과의 갈등을 빚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파는 진짜 보수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에 보수적(반동적)인 입장과 방법으로 일관한 패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애초부터 마오주의는 기존의 공산주의가 가지고 있던 노선인 "노동자가 사회변혁의 주체"를 융통성 있게 수정하여 "농민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획기적인 선동문구로 중국의 민심을 얻은 바 있다. 이래서 마오주의를 농민들의 마르크스주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6]
그런데 이런 이상(理想)은 온데간데없이, 구닥다리 관료들과 기득권층들이 그대로 남아서 옷만 인민복으로 바꿔 입고 구태의연한 병크를 저지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결국,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이러한 보수파의 문제가 점점 지적되기 시작했고, 이는 공산당이 일반 민중들의 민심을 잃게 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국민당의 몰락에도 일찍이 기여한 바가 있는데, 공산당처럼 처음에 혁명정당으로 시작한 국민당이 왜 그리 부패하고 몰락했는가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청조 이래로 내려온 부패한 기득권과 군벌 층을 무리하게 흡수해가며 급속도로 규모를 키워놓다 보니까, 기존의 부정부패세력을 그대로 안고 가는 문제가 남고, 결국은 그들이 국민당의 뼈가 되고 살이 되면서, 그들을 쳐낼 수도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국민당을 몰아내었지만 쫓겨난 것은 장제스와 그 심복들 및 중앙군 50만, 그리고 세력을 다 잃은 옌시산, 바이충시 같은 군벌들이었고, 그들 밑에서 국민당 당적 가지고 잘만 활동하던 소군벌, 관리들은 고스란히 공산당이 승계했다.
게다가, 관료주의는 보수파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 중국 공산당은 오랜 내전을 거치며 지나치게 조직화가 되었고, 민주집중제보다 한술 더 뜬 주석제 하의 공산당으로 초권력적(超權力的)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은 상명하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민중이 주인이라던 공산당의 이상은 점점 훼손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서 보수파의 관료주의에 공산당 내부의 관료주의가 더해져서 2배의 관료주의가 된 것.
이에 반발하여, 마오주의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들,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다시 복원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물론 마오 역시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을 보고 부패와 싸우기 위해서 자유로운 비판을 허용했다. 이것을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판이 자신을 향하자 마오는 분노했고, 결국 반우파운동(1957)으로 비판자를 전원 숙청하거나 노동교화형을 내린다.
그러나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의 주장에 의하면, 비판이 너무 극단적인 수준으로 가서 "차라리 장제스가 나았다!"는 소리까지 나오자, 이에 놀라서 방향을 선회했다고 한다. 여기서 마오가 모든 직장과 기관에 10~20%의 우파가 숨어있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는 통에, 의무적으로 모든 기관이 직원의 10% 가량을 해고해야만 했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이미 중국은 내부에서 기아와 숙청, 내부정화 활동, 보수파의 약진, 노선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제 불만 당기면 펑하고 터질 상황이었다.
2.2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
그런 가운데 일은 엉뚱한 데서 터졌는데, 그것은 《해서파관》이라는 역사 연극에서 시작되었다. 1959년 당시 베이징 부시장 직에 있던, 명대(明代)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청화대학의 역사학 교수를 지내기도 한 사람인 우한(吳晗)[7]이 《해서파관》을 발표하는데, 이 연극은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폭군 황제에게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폭군 황제는 가정제를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가정제 항목 참조.
처음 연극이 발표되었을 때, 마오는 "이거 괜찮네" 라는 반응을 보였다. 연극을 발표하기 전부터 마오쩌둥은 해서를 높이 평가하며,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애초에 이 연극을 제작하도록 의뢰한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 본인이었다.
그러나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야오원위안이 1965년, 문회보에 "이거 우리 마오님 까는 물건이네염?" 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칭에 의하면, 해서는 펑더화이를 의미하며, 황제는 마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1959년, 루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빗대서 쓴 연극이라고 주장했다.[8]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을 것을 우려한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은 우한을 옹호하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일종의 연구 위원회인 '문화혁명오인소조(文化革命五人小組)'를 구성하여 학술적인 분야에 사태를 한정시켜 논란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자 장칭은 펑전과 우한을 싸잡아 비난했고, 여기에 마오도 직접 이 키배에 뛰어들어서,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통해 펑전을 비판했다. 여기에 마오 빠돌이 린뱌오가 "우리 마오님은 천재! 마오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아요!" 식의 일장연설을 했고,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엎자!" 라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한다. 조반유리는 말 그대로, "모든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홍위병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천하무적의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에 가득하다 - 조반유리"[9] |
마오는 젊은이들이 잘한다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라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결국은 만악의 근원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사건의 발단이 된 우한은, 문화대혁명 때 감옥에 갇혔다가 1969년, 옥사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4인방이 실각한 뒤 복권되었다.
3 전개
파일:Attachment/chi munhwa.jpg |
홍위병의 제트기 형벌. 비판 대상자의 상반신을 구부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옆에서 목덜미를 누르며 팔을 뒤로 꺾어 올리는 것 |
1966년 8월 8일, 마오의 논평에 맞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위 16개항을 발표한다.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지만, 그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자유롭게 기존의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고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마구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절, 사당,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과 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안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공안 수장 셰푸즈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사실, 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었다는 말도 있다. 강호와 관의 상호불가침은 거짓이 아니었던가?
마오쩌둥은 이런 사태를 보고받고도,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라는, 개념을 밥 말아 처먹은 발언을 지껄였다.
16개조에선 "무력 쓰지 말고 좋게 말로 하자", 정확하게 말하면, "투쟁수단은 무투(武鬪)보다는 문투(文鬪)가 좋다" 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지키는 홍위병 따위 없었다. 뭐 언어폭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봐선 말로 하기도 한 모양이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이른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다. 이후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가 복귀시켜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8월 22일,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9월 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 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다.
10월 10일에는 린뱌오가 완전히 동네북이 되어버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즈음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진다.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며, 이들은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점점 홍위병의 숫자가 불어나면서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홍위병에 가담하기 시작하고, 이들은 "무투(武鬪)보다 문투(文鬪)를 하라!"라는 모토 하에 하방(下放)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조반파(造反波)라고 한다. 조반파였던 사람들은 홍위병들의 패악질은 보수파들이 한 짓이고, 자신들은 그런 일에 별로 가담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들도 역시 다를 바가 없다. 홍위병 항목 참조.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린뱌오와 장칭은 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 홍위병과 언론 등을 통해 상하이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맹비난한 뒤 숙청했다. 사실상 상하이 지방정부의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1월의 폭풍이라고 한다.
베이징에선 4인방과 박자가 잘 맞은 캉성이 부총리 타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다. 이제 공산당 내에서는, 자신의 정적제거를 위해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다. 공산당 시망 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리싼 역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장칭은 문혁(文革)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만다.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다. 이미 사망한 뤄룽환과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펑더화이와 허룽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와 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허룽은 그 후유증으로 옥사했으며 펑더화이는 암으로 사망, 천이는 공장 노동자로 좌천당했다.
좌천까지는 아니었지만, 주더와 네룽전도 실각당한 뒤 몇 년 동안 찬밥 신세가 되었고, 그나마 별 피해를 입지 않은 원수(元帥)들은 이미 장님이 되어있었던 류보청, 고도의 처세술을 발휘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쉬상첸, 예젠잉 정도였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완전히 무력화되었고, 홍위병이 인민해방군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마오가 편을 들어주면서, 심지어는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한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자체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해 몇 개의 파벌로 갈라졌고, 각 파벌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키배라고 쓰고 온갖 병림픽을 벌였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동네북 류사오치는 그의 집에서 홍위병들의 침입을 받아 2시간 동안이나 폭행, 폭언을 당한 뒤 카이펑의 교도소에 수감된다.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간수들이 류사오치의 치료를 위해서 의사를 불렀으나, 의사가 "당신들 미쳤소? 인민의 적을 어떻게 치료한단 말이오?! 미친 소리!" 라며 치료를 거부했고, 류사오치는 그대로 카이펑에서 쓸쓸히 옥사(獄死)했다.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다. 이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마오의 권력까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 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다. 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하방(下放) 활동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 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였다. 마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좋다고 농촌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70년대 후반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다시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물론, 그 덕택에 농촌의 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니 무조건 까기는 애매하다는 양반들도 간혹 있는데, 굳이 이딴 걸로 농촌의 근대화를 해야 하나? 어떤 악행을 저지르건 반사효과로 좋은 효과가 전부 없기란 어렵다.
3.1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사라진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文革)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다. 참고로 린뱌오의 공식 칭호는 마오의 충실한 전우였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다. 사실 그럴 만한 게,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 때 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동네북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 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순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다. 하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했다.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8월 23일, 려산에서 열린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전체회의에서, 천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다.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징징댔기 때문.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린뱌오의 아들인 린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571 공정에 린뱌오가 얼마나 개입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린뱌오가 직접 지휘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린뱌오보다는 아들 린리궈가 더 주도적이었다는 말도 있다.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모는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기차로 순시 중이었는데, 일설에는 마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마오를 암살할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마오가 일정을 바꿔 암살을 피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 시점에 음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어떤 시도였든 간에 결국 실패했다.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린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도 불분명한데, 중국군이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설과, 연료부족 혹은 기기불량으로 추락했다는 설이 분분하다. 린뱌오 일행의 시체도 찾지 못했으며, 소련이 그들의 시체를 회수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는 총알이 뚫지 못하는 특전비행기라서 아주 강한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소문도 있으나, 물론 말이 안 된다. 비행기는 전차가 아니고, A-10 공격기처럼 장갑을 미친 듯이 두른 비행기마저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나도 좀 더 오래 날 수 있는 정도지 총알 튕겨내는 게 아니다. 물론, 튼튼하게 만들면 보병용 소총 총알이야 튕겨내겠지만, 비행기에 그딴 장갑은 쓸 데가 없다. 미사일도 규격화되어 생산되는 물품이지, 아주 강한 미사일을 따로 순식간에 뚝딱 제조해서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아주 강한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말이 특별히 아주강한 미사일을 특수제작했다는 말이 아니지않나...
최근에 밝혀진 사실로, 조종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기사
3.2 4인방의 등장과 몰락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왕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 나아갔다.
그런데 1973년,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관장해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그리고 왕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안티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한다. 이들은 언론과 미디어를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비림(批林)은 린뱌오[林彪] 안티, 비공(批孔)은 공자 안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 안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들은 4인방의 안티 운동에 질렸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은 목표를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년 12월, 덩샤오핑에게 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방광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다. 4월 5일이 청명절(淸明節)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다. 4월 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가 1차 천안문 사태이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다. 결국 4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가택연금되었다.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혹은 당신이 맡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편하오)[10] 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11]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궈펑은 4인방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날렸다. 그는 실각했지만 영향력이 있던 덩샤오핑과 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아, 10월 10일에 4인방을 전원 체포했고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문화대혁명의 내용
대약진 운동에 이은 2단 콤보 크리티컬 히트로 중국을 혼란과 충격과 공포에 밀어넣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인권? 그딴 거 없다. 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면,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한다.
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12]에 '더러운 자본주의의 개'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는다. 그리고는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둔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연못에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관직을 맡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말살당했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은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하여,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 동양의 칸트
그리고 영국, 인도 등 일부 국가의 외교 공관들도 '반제국주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사관을 불태우고 직원들을 끌고 다니며 두들겨팬 것.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訪中)한 북한의 오진우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소위 조반(造反)을 시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13]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개 10~20대의 학생들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들이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병크를 깨닫고 새 시대를 준비하다가, 개혁개방이 시행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간간이 반성을 하거나, 사과 글을 내는 홍위병들도 있긴 하다. 문화대혁명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먼저 홍위병으로 봉기했으며, 마오쩌둥에게 처음으로 홍위병이라는 완장을 받았던 칭화대 여학생 출신 쑹빈빈(宋彬彬)[14]이 있다. 마오쩌둥이 빈빈의 이름을 물어본 후, 이름이 봉건적이라며[15] 야오우(要武: '무장투쟁을 한다)로 개명하라고 한 적도 있다.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꿈에서 깨어났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MIT에서 공학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이 양반은 나중에 홍위병으로 행패를 부린 데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위병 대다수는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졌다.
뭐 홍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홍위병 중 초기 보수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후기의 조반파(造反波)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이 자산가와 지식인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인 셈.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앞당겼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긴 한다.
하지만 그 평등이 다 못 살고 다 못 배운 평등이라는 점이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뒷부분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을 참조할 것. 지금도 마오이즘이 위세를 떨치는 국가들치고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하지 않은 사회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무슨 고대, 중세 시대에 농경민족 침략해서 교회나 절을 불태우면서 좋아하는 타민족 야만인들도 아니고, 자기들 문화재와 지식인 전통문화 다 부수고, 향촌 공동체나 사회는 물론 심하면 자기들 가족도 말아먹고는 그때가 자기들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 회상한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심각하고 답도 없다.
권위타파와 만인평등이라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중국이 이 "모두가 평등해진" 하향평준화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엘리트 계층을 재건하는 데 얼마나 진땀을 뺐는가 생각해 보면, (결국, 현대 중국은 다시 "불평등"해졌고, 그 결과 마오쩌둥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현재 부정부패로 유명한 중국 공산당에 의해 통치되는 중국에 과연 권위주의가 타파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평등"이란 것도 허울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중국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봉건적 잔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완전히 뿌리 뽑혔다. 중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예절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유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2012년 현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과 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마오쩌둥도 책임이 크지만, "음모를 꾸민 반혁명분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게 대체적인 공식 결론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 근현대 중국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을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격하여 현재 공산당의 집권 정당성마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심한 분노와 권력욕을 느꼈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하고자,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린뱌오"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을 숙청한 덩샤오핑 등은 그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군중의 비난도 피하고자 죄과를 은근슬쩍 4인방에게만 물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 수뇌부를 비롯한 중국의 엘리트 중 이공계(理工界) 출신이 많은 것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있다. 문화대혁명 때 인문계 및 사회과학계에 대한 공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깔 거리가 적은 자연과학 및 공학 계열로 인재들이 몰렸다는 것.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이과 인재들도 고생했지만 문과 인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유력 파벌 중 중국 공산주의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의 경우,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이공계 인재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의 인문학/사회과학은 이 때 피해를 너무 크게 입은데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의 매우 심각한 검열로 인해 아직도 발전 속도가 느리다. 때문에 같은 중화권인 홍콩이나 타이완의 학계가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 나올 지경.
5 문화에 끼친 재앙
문화대혁명/악영향 문서로.
6 해외의 반응
문혁 당시만 해도 들어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권, 특히 진보 진영이나 좌파들 사이에서는 문혁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위협적이라 할 정도의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대국이 자멸해서 찬양하는 게 절대 아니다. 거기에 발맞추어 일본 신좌파들 중 일부 분파들은 문혁을 대단히 찬양했다.[16]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보다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아무도 이를 찬양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68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17] 심지어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도 게릴라 군대 답게 마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된 데는 당시 문혁의 기능 중 구습타파와 관료제 비판이라는 기능만 부각되어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당시 중국은 제 3세계의 일원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련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한 축으로 기능했다. 공산당의 영도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대중과 함께하는 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강한 인상을주었다. 당시는 소련과 코민포름의 패악질에 전 세계가 질려있던 터라,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도 일종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전공투의 도쿄대 점거 당시, 도쿄대에는 체 게바라와 모택동의 사진이 동시에 내걸렸고, 68운동 당시 소르본 대학교 정문에도 레닌과 모택동의 사진이 걸렸다.아시아와 유럽의 문화적 차이
비틀즈의 존 레넌은 혁명에 대한 회의를 담은 《혁명(Revolution)》이라는 노래에서, 문화대혁명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하지만 당신이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닌다면, 어떤 식으로든 누구와도 이뤄내지 못할 거야.}" 가사로 마오쩌둥 디스 한번 쩐다… 'Chairman Mao'가 마오쩌둥 말고 또 있을 리가 있나?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 인과의 대화》[18] 등을 지금 읽으면, 문혁 찬양 대목에서 정신이 우주로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리영희는 나중에 이를 두고, "당시에는 문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에 관한 자료를 가장 많이 열람한 사람이 리영희 교수였고, 조선일보 재직 시에도 동북아시아권 전문가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 바로 리영희였다는 점에서, 궁색한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19]
좀 더 개념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사실 유럽의 모더니즘과 문화대혁명은 사상적으로 뿌리가 같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은 물질에 지배되는 존재이며, 새로운 문물이 나온 것은 새로운 시대이므로, 그에 맞는 새로운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유럽은 과거와 단절하긴 했어도, 과거를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중국은 그저 과거만을 파괴했을 뿐이다. 인간이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무분별한 선동을 가려내지 못하면, 어떠한 비극이 발생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대혼란 속에서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중국의 발전을 수십 년 늦추는 데 일조하였다. 자업자득
또 이웃 북한은 겉으로는 중국의 문혁을 극좌주의라며 깠지만, 그 아이디어를 사실상 그대로 들여와 북한의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특히 김일성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문화 부문의 지도를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할 때,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문화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고[20] 거기에 주체사상으로 색을 입혀 독자적인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판이 진행되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고 있다. 현대 중국의 노년층들은 북한을 볼 때마다 문화대혁명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1960~70년대에 창작된 북한의 가극들이, 21세기에 와서도 중국에서 순회공연을 벌이며 흥행하고 있는 것도, 이 시대에 대한 추억팔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7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문화대혁명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기술한 책으로는,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이 책은 당시 문혁에 참가했던 젊은 홍위병의 후일담과도 같은데, "그래도 당시 당국에 의해 통제되던 언론/출판과 집회는 문혁 기간에 가장 자유로웠고 활발했으며, 권위주의와 관료제에 대한 타파도 활발히 논의되었다"는 논지다.
모든 마을에서 평등의식이 퍼져 나아가서, 대문을 열고 다녀도 도둑이 들지 않았고, 콩 한 쪽도 나눠 먹었으며, 공공 식당에서 점원을 하인 부리듯 하던 잔재가 사라졌으며, 학생은 교사의 권위에 눌릴 필요가 없었고, 더 이상 공무원들이 권위를 가지지 않았으며, 대학 입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백지답안 사건. 한 학생이 "나는 농촌에 살아서 일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많이 없기 때문에, 도시 학생들하고 동일한 시험을 치러 대학에 가기가 불가능하다"라는 항의 서한을 받은 모택동이 대학 입학시험을 없애버린다.
뭐, 이런 점만 본다면 이것도 제법 괜찮은 문화운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예를 들어 한비야의 여행기에 따르면,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인 나시족에 만연해 있던 남존여비 사상이 이때를 계기로 사라졌다고 한다. 거긴 여성들이 온갖 의무를 지고 돈까지 버는 반면, 남자들은 아편이나 빨고 빈둥거리기만 했는데,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공안들이 거기에 하도 딴죽을 걸고 해서[21] 그러한 악습이 상당수 사라질 뻔했는데,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갔다나.
8 그러나 현실은...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위의 미담도 당시 홍위병이었던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좋아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대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저 집은 뭔가 숨기는 게 있다"라고 판단하여 저 집은 해로운 집이다 홍위병들이 단체로 몰려가서, 세간 살림을 부수고 집주인을 붙잡아다 문초하고 구타를 하지 않나, 물자를 나눠 쓰지 않으면 이기주의라고 동네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매달아놓고 괴롭히다가, 싹싹 빌어야 겨우 풀어주던 게 현실이었다. 처음에 높으신 분들이 작살나는 걸 보고 좋아하던 일반 서민들조차 불과 수년 만에 너무한다고 외면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게다가 대학 입시가 폐지된 뒤, 대학 입학은 무조건 교사의 추천으로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교사의 판단을 어떻게 신뢰하는가? 객관적이지 못하다. 교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는 반론이 등장했다. 그럼 그냥 시험 보든가? 결국 대학을 일종의 평생교육기관처럼 만들어버려서 누구나 다니게 되었다.[22] 입학시험이 없어진 대학에 얼마나 많은 인파 ― 나쁘게 말하면 어중이떠중이 ― 가 몰려들었으며, 그 결과로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쳤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한 결과지만 시설은 급속히 노후하였고, 연구 성과는 미진하게 되었으며, 고등교육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 당시 중국인들 중에는, 한국에서 "나 어렸을 때 6.25 전쟁이 터져가지고 학교를 못 갔어!"라고 하는 어르신들이 계신 것처럼, "나 어렸을 때 문혁이 터져서 대학에 못 갔어!"라는 세대가 존재한다. 국가의 부당한 결정으로 인해 피해만 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만 할 턱이 없으니,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 세력이 되었고, 일부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더군다나 공공식당을 비롯한 각 점포에서 종업원을 노예처럼 부리는 굴욕적인 방식인 서빙을 금지하여, 일시적으로 모든 음식점이 셀프 서비스가 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러면 원래 있던 종업원들은 어떻게 됐냐고? 아무것도 안 시켰더니 진짜 아무것도 안 하더라는 결과가 나왔다. 자랑할 게 못 된다. 참고로 소련 등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다(...).[23]
막말로 대한민국도 6.25 전쟁 덕분에 남이고 북이고(특히 남한에서) 피난과 내부 분열과 숙청으로 지역 공동체가 죄다 박살나는 바람에, 전통적인 지주와 소작민 사이의 계급의식이 사라지고, 덕분에 토지 개혁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6.25 전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선 지금, 자본주의 체제를 본격적으로 들여온 중국은 동북아 제일의 빈부격차를 자랑한다. 과거에도 문제시 되었던 부정, 부패는 여전히 잘 남아있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도 없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심지어 대약진운동 같은 병크조차 실수한 거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적당히 쉴드 쳐주는 중국인들조차, 문화대혁명만큼은 절대로 실드를 쳐주지 않는다. 공칠과삼(功七過三)공삼과칠이 아니고?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나마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애쓰다 능력 부족으로 인한 실수였고, 실수에 대한 책임도 진 대약진 운동과는 달리, 문화대혁명은 마오 개인의 권력욕과 이상주의적 관점으로 말미암아,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순식간에+확실하게 날려먹은 것이고, 책임을 지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을뿐더러, 그 질이 더욱 나쁘다. 현 중국 공산당이 엄연히 마오쩌둥을 계승했고, 공칠과삼이라 하여 그를 적극 옹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혁만은 절대 쉴드를 쳐주지 않고, 오히려 잊을 만하면 적극적으로 까는 이유[24]가 바로 이것이다.
전술(前述)했듯, 문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엄청나다보니, 당연히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급증했다. 덕분에 마오 말기에는 마오는 물러나시오! 같은 구호가 일상적으로 터져 나왔고, 여기에서 제 1차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절대적인 계승권자였던 화궈펑이 이 때문에 몰락하고, 그 뒤를 덩샤오핑이 이은 건 덤.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으로 급성장해서 마오의 바로 뒤를 이은 케이스다. 집권하자마자 신속하게 4인방을 제압하는 등 지도력은 뛰어난 편이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얼마 못 가고 자리에서 내려온다. 지금도 중국에서 문혁으로 성장했다는 정치인은 별로 좋은 소리 못 듣는데, 마오는 물러가라는 구호가 대놓고 터져 나오던 저 시점에선 치명적 약점이었다. 실제로 중국공산당이 왜 1차 천안문은 2차와 달리 부정하지 않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문혁에 대한 반감이 엄청나다는 데에 있다. 거기에 당시에 홍위병이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가 그런 짓을 했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할 정도다.
역사학자 다니엘 벨은 이병한과의 인터뷰에서 문화대혁명이 참여 민주주의의 정점이라고 주장했다. 문혁이 파시스트적 대중운동의 논리적 연장으로부터 발원한다는 비판적 해석을 제기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그는 두 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설문에서 중국의 정치적 엘리트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정치 지도자 선출의 원칙으로서의 1인1표의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전력이 있는 학자이다.[25]
9 이야기
덩샤오핑의 아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덩샤오핑 눈앞에서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서, 이에 앙심을 품은 덩샤오핑이 이후에 야심찬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긴 한데, 그의 정책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아들이 내던져진 것은 사실이긴 하다.[26]
영화 《마지막 황제》의 후반부에서 문화대혁명 장면을 볼 수 있다. 만주국 황제에 올라 전범이 된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고, '교화'된 후 사회로 나와 정원사가 되었는데, 거리를 지나가다 만나게 된 반동분자가 바로 그때의 교도소장(조선족이었다고 한다)이었던 것. 선통제는 그에게 온갖 수모를 당했음에도, 비참한 꼴이 된 그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옹호하면서 선처를 호소했지만, 결국 외면당한다.
여담으로, 국공내전 때 중화민국(대만)이 타이완 섬으로 후퇴할 때, 미국에게 수송선 몇 척을 빌려, 북경의 유물들의 대다수를 가져갔다.[27] 그래서 대만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에서는, 3개월마다 유물을 순환해서 전시해야하며, 해당 박물관이 보유하는 유물을 몽땅 보려면 6~8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만약 이게 중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하지만 현재는 베이징의 고궁 박물관의 유물 양이 대만 고궁 박물원 유물들 다 합친 것보다 많다. 다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무튼 문화대혁명 때 무진장 까부쉈으면서도 이 정도라니 역시 대륙.
게다가 이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엄청난 중국 문화가 파괴된 반면에, 정작 중화민국에서는 '중화문명부흥운동'이라 하여 중국 문화를 연구,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에, 그 성과 등에 힘입어 스스로를 중국 문명의 종주국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중국의 국력이 넘사벽으로 커진 현재에도, 중화민국의 이러한 노력과 자부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또한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이 영국 대사관과 영국 대표부에 난입해서 기물을 파손하고 건물에 방화하고, 근무하는 여직원에 대해 심각한 성적 학대를 자행했다. 그리고 모택동은 오진우에게 "이게 다 국민당 잘못이다"라며 엉뚱하게 대만에 있는 장개석을 탓하는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도 잘했다고 안 한 게 어딘지도… 장제스 현실조작 능력자설
애꿎게도 개에 불과했던 차우차우도 이때 많이 학살당했다. 또한 다른 개들도 상당수 학살당했는데, 덩치만 크고 먹을 것만 탐낸다고 하여 쓸모없는 개들이라고 하여 덩달아 학살당했다. 우습게도 고양이가 쥐를 잡고 먹을 것도 적게 먹어서, 개(다만 군견 같은 개들을 제외)보다 훨씬 쓸모 있다 하여 고양이들이 우대받았다. 물론 중국 황실에서, 페키니즈 등의 애견을 호화롭게 기르는 일이 있곤 했던 역사의 영향도 있었을지 모른다.
이외 4인방의 영어 표기인 갱 오브 포에서 이름을 따온 영국 펑크 밴드가 1970년대에 결성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고(故) 장국영 주연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 후반부는 문화혁명을 다루고 있다. 홍위병들에게 붙잡혀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연기를 뛰어넘어 보기에 너무 안타까울 정도이다.
이 시기를 다룬 또 다른 영화로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 있다. 공리와 갈우 주연. 이쪽은 문혁만이 아니라 일본 침략 때부터 문혁까지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면, 사실 《패왕별희》 이상으로 볼만한 작품이다.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운동아쉽게도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안 나온다과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마오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시골 촌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마오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소소한 가족사와 엮어 그려냄으로써, 당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또한 삐삐 밴드 1집인 《문화혁명》이 문화대혁명에서 따왔을 거라 추측된다 카더라.
21세기에 와서는 중국홍객연맹이 추앙하고 미화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반정부 행위에 속한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이들의 능력이 아까운지 적당히 눈감아주는 분위기이지만.
다른 이야기로 베이징에 이 시기를 주제로 한 테마식당이 있다. 홍색경전주제찬청 참고.
문화대혁명은 끝났지만 중국은 지금까지도 엄격한 검열로 자국 대중 문화는 물론이고 외국 대중 문화까지 옥죄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이 세계적인 시장으로 급부상함에 따라 외국 드라마, 영화. 게임 제작자들이 중국 검열을 피하기 위해 자체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이고 중국의 검열에 맞춰 가위질 한 영화, 게임들을 자국 시장에 그대로 들여오는 바람에 외국인들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고 있다. 중국/문화 검열 항목 참조.
10 한국과 북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큰 이익을 봤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예를 들어 류사오치가 중심이 된 실용주의 정책은 외부 자본을 대거 유입하고 내부 경제도 활성화시켜, 이제야 겨우 경제 성장에 착수한 상황에서, 모든 기회가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 한강의 기적이 좌절되는 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마오쩌둥이 때맞춰 일을 저지르고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그런 사태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는 것이, 1960년대는 아직 냉전의 절정기였기에, 공산당 체제하의 중국에 대규모의 서방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게다가 서방이 중국"대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한국의 여건이 좋았다거나, 동아시아에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는 전제 자체에도, 당시 한국의 발전상황을 보았을 때 무리가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196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공표하는 등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규제가 심하고 정치적 불안과 외자유치 노력부족으로, 1960~1965년까지 단 한건의 외자도 유치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의 외자도입법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1970년 수출자유지역조치법 등 좀 더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결국 1970년대 초반에는 외국인 투자가 잠시 증가를 보였으나, 자본의 일본 편중이 심했고, 자본이 실제로 정부가 원하는 중공업에 투자되지도 않았던지라, 정부가 원하는 산업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해외차관이 훨씬 선호되며, 결국 1973년, 다시 규제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모든 면에서 크게 후퇴하여, 이로 인해 한국이 경쟁자가 사라져 한국이 반사이익을 봤다는 주장이라면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한국의 발전이 오로지 중국의 후퇴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 자체가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은 최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북한이 남한보다 더 잘 살았었다. 여기에 한국이란 나라 자체가 해외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당하거나, 그나마 알려진 이미지조차 6.25 전쟁을 연상할 만큼, 평가 역시 부정적이었다. 여기에 국토까지 분열된 상황이니, 세계의 투자자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문화혁명은 중국이라는 주자가 발목을 접질려 경주에서 이탈해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게 하여, 한국이 중국을 잠시나마 앞서게 만든 기회를 준 것이라는 점이지,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되지 않는다. 다만 이 사건으로 인해 소프트 파워가 뒤떨어져, 한류가 중국에서 흥하는 소소한 이득은 존재한다.
한편 북한의 경우는, 김일성이 이걸 계기로 중소 관계가 나빠진 틈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통해, 소련 입장에서의 대(對)중국 견제에 필요한 기반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바꾸고,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의 단독 전면전을 위한 군비증강과, 우리민족끼리 산업화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했고, 여기에 전제군주제를 전면 도입하여, 나라 전체를 문혁 시절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문혁시기를 보낸 중국인들은 북한을 보면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문화 대혁명으로 중국 영화계, 공연계가 쑥대밭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70, 80년대에는 북한 영화나 가극이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가 있다. 영화로 먼저 제작 되어 중국 전역을 돌며 상영될 당시 문화대혁명에 지친 중국인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암표가 5~10배 가량 비싼 값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2000년대 이후 북한 예술단이 중국의 극장에서 공연을 할때 중국인들이 공연을 구경하러 오는 이유가 중국 중, 장년층은 그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던 북한산 공연에 대한 향수가 있으며 당시 중국에서 상영하던 북한 영화, 가극에 등장하던 북한 배우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문화대혁명 덕분에 꿀빠는 북한영화
11 망각의 사건
현재 문화대혁명은 중국인 모두 잊고 싶어 하는 듯하며, 중국 내에서도 언급하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되어 있다. 학교에서도 문화대혁명이 발생했다는 것만 가르칠 뿐 세부사항은 전혀 가르치지 않고, 진지하게 문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일도 거의 금기시되어 있다. 중국에서 현대사는 공산당의 입맛에 맞는 사실들만 가르치지만, 문혁은 어떻게 해도 쉴드가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아예 금기시해버린 것. 다만 정권에 불편한 진실을 덮어 두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한 일이다. 현재 스페인에서 프랑코 치하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고, 보수정권이 들어섰을 때는, 정부차원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거론하는 것도 쑥 들어갔다. 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는 건 문제없겠지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기피되고 있다. 물론 다른 곳에서 했으니까 괜찮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무슨 초딩 논리도 아니고
중국의 공식언론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도 꼭 따옴표를 붙여서 "文革" 또는 "文化大革命"이라고 한다. 원래 공산당 입장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워낙 문혁은 흑역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따옴표를 치는 것.
또한 문혁에 관련된 공문서들은 대부분 비밀로 묶여 있다. 문혁을 겪은 사람들 누구도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거니와, 공산당의 입장도 매우 난처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이 때문에 문혁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서방에서 행해져 왔으나, 정보의 부족 때문에 여의치 않은 것이 현실.
중국 공산당의 자세가 전향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제대로 된 문혁에 대한 연구는 힘들 것 같다.
12 관련인물과 사건
13 만일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단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약진 운동 실패로 버로우 타고 있던 마오쩌둥은 그냥 상징적인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국가주석 류사오치나 당총서기 덩샤오핑이 계속 집권을 했을 것이고, 그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시행되던 실용주의적 개혁이 자리를 잡아, 10여년 먼저 개혁개방을 이끌었을 수도 있다. 현재 중국의 평가는 10년간 국가기능을 정지시켰고, 다른 나라들이 10년 앞서가는 동안 중국은 20년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교육이 마비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진학이나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은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육 수준에 머물렀다. 비슷하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이나, 북한의 고난의 행군 사건 때도 교육이 가장 타격을 입었다. 이 시기를 유아나 학생 때 겪은 사람들의 문맹률이 두 나라 모두 엄청나게 증가했다.
한편 문화대혁명의 참화로 인해 소실된 문화유산들이 온존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나 문화의 가치가 높여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학문연구와 콘텐츠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개방 후의 중국 경제에서 문화/관광산업이 새로운 축으로 부상했을 수도 있다. 전 세계 역덕들의 성지 중 하나가 됐을 것도 자명하다.
그러나 설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서브컬쳐 등의 대중문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국의 잠재력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가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엄청나게 깎아먹은 것은 자명하지만, 그 잠재력을 발휘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현실에서도 문화대혁명을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중국 대중문화를 번번히 좌절시키는 것은 무지막지한 검열로 대중문화를 압박하는 현 중국 정부다. 억압적인 환경에서는 뛰어난 문화력이 발휘되기 힘들다. 긴 역사를 가진 중화권 문화와 표현의 자유라는 두 날개를 모두 달았던 홍콩 대중문화가 엄청난 번영을 누리다가 왜 중국 반환 이후로 처참하게 추락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기 쉽다. 즉 문화대혁명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중국 공산당의 대중문화에 대한 억압적인 자세가 변하지 않는다면 중국 문화가 크게 꽃피는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 법. 문화대혁명이 아니었으면 중국의 발전이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고 음악이나 영화, 애니메이션도 현실보다 훨씬 발전했을 거라는 것은 자명하나 문화대혁명으로 이런것들이 물거품이 된 지금은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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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금단의 영역이지만, 예술적으로는 대부분의 중국 현대사 관련 작품에는 거의 늘 언급되거나 소재가 되는 사건이다. 전통 문화재를 엄청나게 파괴한 대신에, 문학작품에 엄청난 소재를 제공했다.
- 《마지막 황제》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나온다.
- 《5일의 마중》 - 영화가 처음 시작되는 장면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70년대 초 중국이 묘사된다.
- 《늑대 토템》(소설, 영화) - 문화대혁명 당시 내몽골에 유배된 한 지식청년의 이야기.
- 《패왕별희》 - 문화대혁명이 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모티브이다.
-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 모두 중국작가 위화(余華)의 작품으로, 《인생》은 위 영화 작품의 원작이며, 영화는 뒷부분을 생략해서 조금 뜬금없이 끝난다. 위화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문혁 시기 전후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 《부용진》 - 개혁개방 후 1세대 중국영화로, 문화대혁명의 잔상을 그리고 있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단순한 야설이 아니라 상관의 아내와 저지르는 불륜을 통해 시대상을 그리는 소설. 한국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번안되어 영화화되고 있다.
- 《사람아, 아 사람아》 - 주인공들 모두가 대학생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문화대혁명이 주인공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 류츠신의 SF 《삼체》는 문화대혁명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고 있다.
- 《레드바이올린》 - 중국 문화대혁명 시절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레드바이올린이 중국으로 왔는데, 문화대혁명으로 서양문화와 악기들이 탄압받자 이 레드바이올린을 숨긴다는 내용….
- 션판은 자신의 회고록, 《홍위병》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 인민들의 삶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 영화 《몽상가들》에서, 주인공들이 마오쩌둥과 문화 대혁명을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 《나비부인》을 비꼰 《M.Butterfly》에서도 작품 전반에 걸친 배경이 된다.
중국에서 문혁을 공개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지만, 홍위병 생활을 하거나 문혁참가자의 경험을 다룬 후일담 문학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10년 정도의 기간에 이렇게 전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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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패왕별희》 후반부에서, "서"가 혼자 큰 방 안에서 우희(優戲) 분장을 하고 있다가 홍위병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홍위병들도 손에 이 소홍서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 ↑ 다만 1980년대 이후로는 인적자원 문제는 딱히 문제가 아니기는 하다. 일단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시장규모도 성장하면서, 대중문화도 성장했기 때문. 문제는 아직도 문화검열이 상당부분 남아있다는 것과, 그 동안 대중문화의 발달이 미약하다보니, 미국이나 일본, 한국, 유럽 등지의 대중문화에게 상당량 먹혀버렸다는 것.
- ↑ 총노선(總路線), 대약진(大躍進) 운동, 인민공사(人民公社)를 가리킨다. 중국 경제를 말아먹은 마오쩌둥의 대표적 병크들. 사실 마오의 의도는 좋았다. 이념(즉, 정신력)으로 성장하는 경제를 더욱 빠르게 한 단계 도약시키려고 한 것. 하지만 워낙 공상적이고 허황된 목표였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다가 오히려 경제를 망쳤다.
- ↑ 김재선, 《모택동과 문화대혁명》
- ↑ 하지만 마오가 최고권력자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최소한 이 문서에 언급된 문면만 다뤄 보자면 칭찬은 한 톨도 없다. 전국의 지질조사나 전문가 경험치 획득 등은 그냥 사실만 쓰자니 잘못했다는 말밖에 없어서 집어넣은 공치사일 뿐이다. 그리고 마오가 이 정도를 못 알아들을 인물도 아니다.
- ↑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데는 마오쩌둥의 이러한 현실적인 공산주의 사상도 한몫했다. 러시아와는 달리 공업기반 자체가 없다시피 한 중국은 농업이 자국의 주요산업이었기에, 여기에 맞는 공산주의운동을 하여 공산주의 혁명이 부정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진 것.
- ↑ 이 사람은 명 황제, 만력제의 능 발굴을 주도하기도 했다.
- ↑ 현대의 연구에서 《해서파관》은 딱히 마오쩌둥을 직접 비판한다기보다는, 일반적인 수준의 정치 비판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 ↑ 天兵怒气冲霄汉은 마오쩌둥의 시구(詩句)에서 인용된 것이다.
- ↑ 장칭 평전의 번역.
- ↑ 중국문헌기록원에는 그런 거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화궈펑과 각을 세운 장칭 등도 그 문서의 존재를 인정했고 한동안 그 문서의 존재 자체가 기정사실화되었었다.
- ↑ 웃기게도 서양식 던스 캡(dunce cap)이다.
- ↑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도서출판 오름(2009), p.275
- ↑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쑹런충(宋任窮)의 딸
- ↑ 논어 옹야(雍也)편의 구절인 “문질빈빈, 연후군자(文質彬彬, 然後君子)"(겉의 꾸밈과 본질이 조화를 이룬 후에야 군자이다)에서 유래한 이름
- ↑ 일본 신좌파들 중 일부(일본공산당 혁명좌파, 게이힌 안보공투 등)는 아예 대놓고 마오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그리고 이들 중 게이힌 안보공투는 훗날 적군파와 통합하여 연합적군이 된다.
- ↑ 68혁명 당시 대중운동을 주도했던 가장 큰 계파가 바로 신좌파, 무정부주의, 마오주의였다.
- ↑ 사실 《8억인과의 대화》는 리영희가 직접 지은 서적은 아니고 번역서인데, 당시 기준으로는 중국에 대해 나름대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르포집이기는 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좀 거시기한 게 사실….
- ↑ 리영희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미제에 맞선다고 지지한 사르트르처럼,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비슷한 병크를 저질렀다.
- ↑ 가령 중국의 양판희를 모방해 혁명가극 창작 운동을 벌였고, 영화나 무용 등 나머지 장르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여 항일 빨치산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처럼 선전하고 다녔다.
- ↑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기 때문인지 의외로 남녀평등을 상당히 중시한다.
- ↑ 다만 대학의 평생교육기관 기능 자체는 선진국에서도 통용되는 거라, 누구나 다닌다고 무조건 까기는 좀 어렵다. 문혁 당시 중국 대학이 문제가 되는 건, 제대로 된 교육과 엄정한 심사조차 외면했기 때문.
- ↑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 편에서 과거 분단 시절 동독 식당에 간 관광객이 묘사하기를,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잡담하느라 주문을 받지도 않고 손님이 지칠 즈음에야 '아. 푹 쉬었으니 일 좀 해 볼까?' 하면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 마디로 잘릴 걱정이 없으니 굳이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어서 생겨난 결과.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하지만 소비자의 권리는 그런 거 없다 - ↑ 당장 보시라이 때려잡을 때도, 대외적으로는 제2의 문혁 방지를 내세웠다. 물론 실제 이유는 부정부패와 더불어 아내 관리를 아주 잘못한 것이었지만.
- ↑ He has put forward his views in favor of China’s political meritocracy and against one person one vote as a mode of selection for political leaders in two books, and in comments published in the New York Times, theFinancial Times, the Global Times (环球时报), and in regular columns published in theHuffington Post, in Project Syndicate, inthe Guardian, as well as the Chinese language periodical Nanfengchuang (南风窗, English: South Reviews) and a Chinese language blog site on Caijing(‘财经’).
- ↑ 정말 앙심을 품었다면, 마오쩌둥을 스탈린 꼴 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 ↑ 몽땅 가져갔다는 표현이 많은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유물을 선발해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것만 옮겨졌다. 그 엄선된 게 69만점에 달한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