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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이집트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000년 정도 전(약 B.C. 4000년, 기원전 40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1]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구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하였다.(...)[2]
B.C. 3200년 경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였다.다만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 (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여하간 이집트 사람들이 단군왕검처럼 믿고있는 것은 메네스이다.기원전 32세기 이후 널리 알려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3] 정말이지 유구한 역사로, 인류역사에서 최강의 자리를 가장 오래 차지하고 있던 나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성립 이후부터 역사를 계산할 경우 이집트가 인류 최강의 문명집단이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더 길다.[4][5] [6]
고대 이집트의 통일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B.C. 2200년 경까지의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이후부터 힉소스인에 의해 정복당할 때까지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 아시리아에 정복당할 때까지의 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나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1.1 선사시대 ~ 통일 이전
선사시대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급격히 오른 기온에 따라 오늘날 사하라 사막 지방의 기후는 변하기 시작했다. 1만년 전까지는 풀과 키 작은 관목으로 뒤덮혀 있던(!) 사하라 사바나가 지구 자전축 등의 변화로 급격한 사막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7] 그리고 이 사막화의 피난자들이 이집트와 오리엔트 문명의 건설자라는 설이 20세기 후반 이후 꽤 지지를 받고 있다.
이미 기원전 4400년경부터 나일계곡에서는 초기 문명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가령 대규모 원정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정복자의 기념물이라든가, 귀족의것 으로 보이는 화장용파레트, 무기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문화는 '나카다 문화'라고 부르는데, 4기까지 이르는 나카다 문화 끄트머리에서 이미 이집트 상형문자의 전신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기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게르제 문화(Gerzean), 나카다 제2기 - 기원전 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땅에는 통일 직전에는 크게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으며 왕국 안에는 30여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던것을 통합한것이 메네스, 혹은 '호르 아하'라고 부르는 인물로 그가 이집트를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이집트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기원전 3100년경의 일이다. 세계 최초의 문명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보다 빠른 셈이다.
1.2 고왕국 시대 (기원전 32~22세기/제1~6왕조)
통일 이후 약 천년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하며, 피라미드가 등장하지 않는 전기 500년의 제1, 제2왕조는 초기왕조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집트를 통일하고 고왕국을 세운 것은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인데, 스콜피온 킹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오늘날 이집트 역사가들에게 동일 인물로 거의 확정받고 있으나 나르메르와 메네스가 부자지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스콜피온 킹(혹은 카) - 나르메르 - 메네스(=호르아하) 이런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 혹은 스콜피온 킹 - 나르메르(=메네스) 이런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인데 현대 이집트 역사가들은 후자쪽을 더 신뢰하고 있다. 이후 1왕조의 마지막왕인 제트(Djet)가 구리확보를 위해 시나이반도로 원정을 떠나는 등 왕국의 체계를 갖춘다. 고왕국 시대에는 수도는 멤피스였으며, 상하 이집트를 모두 다스리는 왕은 신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며 여러 거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건설했다. 이는 제3왕조때 시작해 제4왕조에서 정점을 기록했다. 행정이나 예술 등의 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누비아 등에 군사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단군의 고조선 설립을 기념하는 개천절이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중에 가장 유명한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기원전 2550년 쯤에 지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집트에 있는 그 피라미드가 고조선보다 더 오래되었다. 참고로 개천절은 역사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이지만, 피라미드는 역사적 유적이다(...) [8]
1.3 제1중간기 (기원전 22~21세기/제7~10왕조)
제6왕조 시기에 이집트는 페피 1세와 페피 2세의 지나친 장수에 따라[9] 후계구도와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방의 총독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벌이는 급격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기근이 닥쳤다는 것이다. 근데 페피 자체가 하도 장수한 세월이 기신지라 이 시기를 제1중간기라고 부른다. 로마의 군인황제시대 저리가라로, 70일간 70명의 파라오[10], 146년간 27명의 파라오가 설쳤다. 제9, 제10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만을 지배했다.
1.4 중왕국 시대 (기원전 21~18세기/제11~12왕조)
약 140년간의 제1중간기의 혼란이 수습된 것은 제11왕조 시기로, 이 때부터를 중왕국으로 분류한다. 중왕국 시기의 수도는 멤피스보다 상당히 상류에 있는 테베(오늘날 룩소르Luxor)로[11], 이 시기에는 파라오는 아메넴헤트 1세 이후로는 세누스레트(Senusret)라는 이름을 물려 사용했으며(1세 ~ 3세)[12], 고왕국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졌으며 아몬라(아몬 + 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도 누비아나 시리아, 리비아 등에 대한 군사원정이 이루어졌으며, 또한 아시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도 했다. 미리 후계자를 파라오로 승격시켜 재위가 겹치는 공동통치를 구사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일본 헤이안 시대 인세이?
이 시대의 유물로는 어떤 남자와 그의 영혼의 대화가 있다.
1.5 제2중간기 (기원전 18~16세기/제13~17왕조)
기원전 17세기경 전차 기술을 가진 힉소스인[13]들에게 이집트가 정복되었는데 이 시기를 제2중간기라고 부른다.
비록 나일 하류의 삼각주(델타)가 정복당했다고 하더라도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건재했으며, 이들은 힉소스 지배층에게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반항하면서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 힉소스인은 파라오를 자칭하였다. 그래서 힉소스도 100여년 정도 존속한 15왕조로 인정된다. 15왕조는 테베에 있던 16왕조에 이어 17왕조와 혼인#을 맺기도 하였는데, 때문에 15, 16왕조의 둘, 혹은 넓게잡아 17왕조까지의 셋을 힉소스계열로 구분하는 시각도 있다. 결국 상이집트의 맹주 테베의 아흐모세가 힉소스인의 정권을 1세기 정도만에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신왕국을 건설한다. 그래서 제2중간기는 정복당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아시아에서 수레,청동기 등의 다양한 문물이 들어온 시기이기도 했다. [14]
1.6 신왕국 시대 (기원전 16~11세기/제18~20왕조)
이분이 연애를 시작한 시기
이후 17왕조의 대를 이은 제18왕조의 하트셉수트는 소말리아와의 무역로를 열었으며, 투트모세 3세는 메깃도 전투에서 아시아 각국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아시아(중동)의 시리아, 레바논 지역 등을 점령하여 신왕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제18왕조는 270년을 존속했으며, 특히 말기의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톤)는 아톤신이라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나 그의 죽음과 함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투탕카멘이 바로 아케나톤의 후계자. 그 이후 110년간 이어진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 때를 최전성기로 오리엔트의 양대강자로 히타이트와 투닥거리기도 했지만, 기원전 1180년 경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체 불명의 바다 민족들이 대규모로 등장하여 오리엔트 지역은 초토화되었고 이집트 또한 쇠퇴하였다.[15]
바다 민족은 리비아 인들을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의 메슈웨슈족, 베르베르 족, 이탈리아 반도, 발칸 반도, 소아시아에서 온 5개 해양민족이 중심으로 연맹한 집단이었으며, 가히 이런 민족 이동은 로마 제국과 켈트족,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비견할 수준이었다. 이집트는 람세스 3세 시기에 리비아 인들을 여러차례 격파했으나 리비아 인들의 인구 이동, 특히 서아시아의 영유문제는 막지 못했으며 누비아와 수단도 독립하면서 이집트 분열의 원인이 된다. 비록 기원전 10세기에 바다 민족의 리비아 인들이 파라오가 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람세스 3세가 아니었다면 이집트도 히타이트처럼 사실상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1.7 제3중간기와 고대 이집트의 종말(기원전 11세기~4세기, 제21~32왕조)
바다 민족 사태 종결 직후 이집트는 제21-22왕조의 하이집트와 제23왕조의 상이집트로 분열되었다. 이 혼란기에는 결국 바다 민족의 리비아와 누비아의 이민족 왕조가 들어섰다. 리비아 출신의 소센크 1세(제22왕조, 기원전 945~기원전 924년 재위)와 누비아 출신의 피예(제 23왕조, 기원전 747~기원전 716 재위), 사바코(기원전 716~기원전 702년 재위)가 대표적 인물로. 각각 하이집트와 상이집트 중심의 패권체제(+이집트 내의 주변 도시국가의 조공체제)를 일시적으로나마 유지시켰다.
누비아 흑인 출신의 쿠시왕조는 아시리아와 유대 지역의 패권 다툼에 나섰으나, 에사르핫돈 왕의 침공으로 수도 멤피스와 하이집트 전역이 지배당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원한건 직할이 아닌 이집트 도시 소국들의 조공이었으므로 얼마 안 가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쿠시 왕조는 멤피스의 회복을 꾀했으나 다시 빼앗기고 누비아의 나파타로 천도했고 이후 점차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후 기원전 7세기(664년)부터 말기왕조인 제26왕조(사이스 조, 상인왕조)로 약 140년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입김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시리아가 사라진 직후 기원전 525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완전히 복속(직할 통치)되었다. 이때 벌어진 그리스의 지원을 받은 반란도 실패로 돌아갔다. 페르시아에는 캄비세스 2세 같은 망나니도 있었고, 다리우스 대제와 크세르크세스 1세 휘하에서는 주요 영토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이집트는 영토와 종교가 존중받았다. 역시 관대하신 대왕님 그래서 이집트의 제27왕조와 31왕조는 아케메네스 왕가다.
이집트는 그리스의 성장과 페르시아의 쇠퇴에 따라 기원전 404~344년 아미르타이우스와 제28~30왕조가 짧은 독립기를 누리긴 했지만, 넥타네보 2세를 마지막으로 재병합 당했고, 그나마도 26년 뒤 다리우스 3세가 깡패 알렉산드로스 3세(31왕조)한테 망하면서 정복되어 헬레니즘 제국의 일부를 거쳐 마케도니아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 넘어갔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와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32왕조라고도 불린다.
2 그리스-로마 시대(이집트의 재번영)
2.1 헬레니즘 시대(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332 ~ 기원전 30년)
그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32왕조) 이집트와 그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다. 이 때 이집트는 그리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를 이집트의 2번째 전성기로 볼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분명 마케도니아인의 외부 왕조였으나 토착종교를 존중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왕의 후원 아래 성기를 주제로 삼은 축제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이집트는 상업이 활발하고, 여성의 상속권이 인정되며, 파로스 등대와 세계 최고의 박물관/도서관이 있는 당대 최고의 선진문명이었다. 헤로의 초보적 증기기관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발명되었다. (단 이는 서기 80년, 로마 제국 시대의 일이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어디까지나 무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한 외국인 왕조였고, 그들의 통치력의 근간은 강력한 군사력에 있었다. 이 점에서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은 이후의 정복자들(로마인들, 아랍인들, 튀르크인들)에 비해 훨씬 덜 성공적이었다. 톨레미 파라오들은 이집트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 밖에서 자주 전쟁을 벌였는데, 그 주적인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소수 그리스-마케도니아인들의 왕조였으므로 서로 제 살 깎아먹기식 전쟁을 반복하게 되었다. 결국 BC 2세기쯤 되어 군사력 유지에 한계가 찾아오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 후 자신의 생존을 동맹국 로마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 상태로 로마의 그늘 아래서 번영하던 이집트는 결국 카이사르 사후 로마 내전에서 줄을 잘못 섰다가(...) 그대로 아우구스투스의 돈주머니가 되고 말았다. 물론 정치/군사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당대 세계에서 이집트가 차지하는 경제, 문화적 중요성과 발달된 헬레니즘 문화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2.2 로마 제국 시대(기원후 641년까지)
로마 편입 이후에도 이집트는 동방의 중심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로서 중대한 위치를 유지했다. 몇차례의 알렉산드리아 방화와 폭동[16], 디오클레티아누스 말년까지 빈번하게 이뤄진 기독교 박해[17], 기독교 국교화 이후의 '이교도'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의 이집트는 헬레니즘 시대처럼 그리스 문화와 토착 문화, 기독교가 한데 섞인 매우 독특한 문화가 번영했다. 이집트는 언제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동로마 제국 시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공인 이후부터 이슬람 발흥 이전까지의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와 경쟁하는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마가(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추정)의 첫 전도 이후 총독까지 개종했을 정도였으니...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로 이집트는 동방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지방이었으나, 그 때문에 계속 분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분출구는 바로 종교였다. 흔히 알려진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립시킨 공로가 있는 지방이 이집트였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더욱 밀고나가 예수에게는 인간성이 없으며, 완전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단성론으로 발전시켰다. 5세기에 등장한 단성론은 그때부터 이집트와 시리아의 주된 신학 사상으로 자리잡았으며, 아직까지도 콥트 교회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18]
이집트의 이런 번영+위세 덕에 알렉산드리아는 항상 콘스탄티노플의 중앙 정부와 반목하는 거대 파벌의 지배 하에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앞서 말했듯 콥트가 가장 강했던 지역이었다는 특성 때문에 이슬람의 고작 4천 군사[19] 가 침입해오자 오히려 쌍수를 들며 별다른 저항 없이(...) 손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가히 제대로 타격을 입었다.. 여하간 같은 아프리카라도 무려 10만(?!) 대군으로 저항했던 키레나이카(오늘날의 리비아 중 지중해 연안), 카르타고, 튀니지와는 사뭇 달랐던게 이집트의 함락이었다.
3 이슬람 시대(641~1798)
이슬람 도립 이후 지역 문화와 역사의 흐름이 싹 바뀌었지만[20] 다만 변하지 않은 사실은 여전히 이집트는 해당 지역에서 가장 번영하고, 강성하며, 알토란 같은 핵심 지역이며 각 왕조 아래서 번영을 지속하였다는 점이다(...).
3.1 우마미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시대
이슬람 발흥 이후 640년경 아랍인의 침공을 받아 자진해서 아랍 치하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정부와 매우 사이가 나빴던 이집트였기에, 아랍에 자진해서 항복할 기미를 보이자 동로마 제국도 아랍인들에게 무조건 양도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로서 자신들의 독립 행보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후로 지금까지 이집트는 이슬람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점령 될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개종은 해야 한단다. 메카행 슬람바 신학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같은 기독교를 믿는 콘스탄티노플 정부와,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 정부가 같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지배 초기에 아랍인들은 인두세만 받는 선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이슬람 통치가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로부터는 관용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기독교도들에 대한 장기적이고 정책적인 박해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아랍의 지배 초기에는 이집트의 이슬람화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고, 콥트어를 금지하는 법령도 시행되지 않았기에 꽤나 오랜기간 동안 콥트어가 제2언어로 잘 쓰여왔다. 이집트가 이슬람 치하에 떨어진 것이 7세기 중엽인데, 이집트의 무슬림 인구가 기독교도 인구를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2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우선 물로 둘러싸여 이슬람과의 연결이 어려운 알렉산드리아 대신 멤피스 군교에 푸스타트라는 신도시가 세워져 이집트의 행정, 군사수도가 되었고(642년 건설), 이후 이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661~750), 아바스 왕조(터키 노예 출신 반독립왕조 툴룬 왕조(868~905년) 포함, 750~963년) 시대를 거쳤다. 이 시대의 주요 건축물로는 이븐 툴룬 모스크가 있다.
3.2 파티마 왕조(963~1169)와 아이유브 왕조(1169~1252), 그리고 십자군 전쟁
그 후 이집트는 10세기 초(963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통치기에 들어간다. 그 원인은 이크쉬드 조(총독)를 쇠퇴하게 한 대 기근이었다. 이집트를 점령한 뒤 신도시 카이로(알-카히라)를 수도(초기엔 궁성 겸 요새수도)로 번영을 누리던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 전쟁으로 쇠퇴하였다. 이 시대의 건축물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알-아즈하르 모스크와 그 휘하의 알-아즈하르 대학(972년 건립, 982년 설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고등교육 시설)이다.)이 있다. 직역하면 "가장 꽃이 만발한"이란 의미이다.
십자군 전쟁기 푸스타트와 카이로는 청야작전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전쟁을 기점으로 이집트의 이슬람 군주들은 기독교도들을 처형하거나 강제추방하였는 등 박해하며, 이도 저도 아니면 노예로 삼았다[21]. 유럽 기독교도들과 내통한다고 의심받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황폐화되었고 이 때부터 이집트의 기독교도의 수가 무슬림보다 적어지면서 이집트의 이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 후 십자군 전쟁에서 대활약한 재상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1169~1252)의 땅이 되었다. 이로서 이집트의 시아파 시대는 끝나고 순니파 시대가 돌아왔다. 십자군과의 전쟁은 아이유브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차례의 휴전와 개전을 거치며 진행되었다.[22]
3.3 맘루크 왕조(1250~1517)
그러다가 다시 1250년부터는 맘루크들의 쿠데타로 인해 맘루크 왕조(노예왕조[23], 1250~1517)가 들어섰다. 술탄 알 사히르의 후궁이었던 여성 명군인 샤자르 알-두르와 황태자 투란샤의 정쟁이 결국 맘루크의 부상을 불렀던 것이다. 샤자르 알-두르는 80일간 재위한 뒤 잇자 알-딘 아이벡과 결혼하고 아이벡이 술탄이 되었다.
아랍인들의 많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맘루크 왕조는 아인 잘루트 전투(1260년)에서 몽골의 훌라구의 일 칸국을 물리치고 다음 해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를 복원하며 세력을 떨쳤다. 맘루크의 분투로 이슬람 세계는 사라질 수 있는 대위기에서 구해진 것이다. 이후 맘루크 왕조는 실질적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24]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큰 번영을 누렸다.
맘루크는 1300년을 전후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 칸국과 시리아, 팔레스타인(특히 다마스커스 공성)을 놓고 여러차례 대결했으나 결국 맘루크가 승리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더욱 강성해지면서 오스만에 대항해 동로마 제국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순니 세력이 들어오면서 쇠퇴했던 알 아즈하르도 다시 순니의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고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제치고 이슬람 최고의 도시가 되었다. 십자군 잔당 역시 1291년을 기해 완전히 사라졌다.
1382년 터키족 중심의 바흐리 맘루크 조가 서카시아 인과 그리스계의 주축인 부르지 맘루크 족으로 왕족이 대체되었다. 그러나 부르지 맘루크 조는 티무르의 강성함에 다마스커스를 잃었으며, 티무르가 중국 원정을 기획하면서 점령만 면했다. 그러나 티무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맘루크는 다시 세력을 되찾았다. 맘루크는 멸망 직전까지 인도양과 지중해 전반에서 강성한 해군력을 자랑했다.
3.4 오스만 제국 하의 이집트
번영했던 맘루크 왕조도 15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중개무역에 크리티컬을 맞고 쇠약해졌고[25], 1517년 갓 동유럽과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돌아온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당했다. 이미 동로마 제국의 숨통을 끊은 무기인 대포와 머스킷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군에 기병 중심의 맘루크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26]
오스만 제국의 잘나가는 속주였던 이집트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도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면서 군벌(사라지지 않았던 맘루크)들이 득세하였고, 알리 '베이'(군사 지도자) 때는 독립을 선언하기도 하였다(1770년). 그러다가 1798년 6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걸려 군벌들과 친오스만 총독들이 함께 박살나면서 아주 잠깐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프랑스군은 1801년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1799년 로제타 석이 발견되면서 이집트 문화는 다시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4 근대 이집트
이분의 연애가 파탄난 시기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 것은 1805년 오스만 제국에서 내려온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 총독 자리에 오르면서였다.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지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렀다. 그리고 1832년에는 레반트와 헤자즈를 정복해버림으로서 오스만 제국과 완전히 갈라섰으며, 1839년 시리아 반란을 빌미로 침공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영국의 중재로 시리아를 반환하고 1841년 독립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독립"까지는 어폐가 있는 것이, 1922년 이전까지 이집트의 세속군주의 호칭은 '헤디브'(khedive)였다. 뜻은 옛 터키어로 '대리인', '총독'이라는 의미. 공식적으로 (사실상 독립상태지만) 이집트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적어도 '총독' 무함마드 알리까지는 꾸준히 이집트의 수입중 일부를 이스탄불의 술탄에게 보냈다. 이집트에 대한 터키의 권리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1922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공화국 대국민의회와 영국간에 체결된 로잔조약에서 터키가 이집트와 키프로스, 이라크 등 옛 오스만 제국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부터다.
이후의 이집트는 근대화를 통해 산업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남북전쟁 기간 동안 면화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으나 미국의 면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져나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져 결국 1881년 내부 반란을 영국군이 대신 진압해준 뒤로 영국의 보호령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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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당시 이집트 국기. 현 튀니지 국기와 비슷하며 오스만 제국-현재 터키의 월성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영국의 보호령이 되지만(표면적으론 국왕 푸에드 1세(1868~1936)가 있긴 했다) 전세계에 불어닥치던 민족자결주의 열풍과 함께 자유주의 정당인 와프트당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격렬해져 1936년 독립국이 되었다. 푸에드 1세가 그해 죽고 아들인 파루크가 제위했지만 겨우 16살 나이였고 영국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서 수에즈 운하에 주둔한 영국군이 계속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영국에 계속 끌려다녔기 때문에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누릴 수 없었다.
5 현대 이집트
5.1 가말 압델 나세르의 시대(1952[27](1954)[28]~1971)
그러던 중, 이스라엘 건국전쟁에서 패전하면서 나라가 시끄러워져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1)와 무함마드 나기브(1901~1984)를 중심으로 한 군 장교들의 쿠데타로 인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다. 하지만,축출당한 파루크 1세는 머리를 써서 엄청난 거액을 술상자에 넣고 술로 위장하여 한가득 챙겨서 여유롭게 해외로 망명했다.[29]
이후 나세르가 권력을 잡고 나기브를 축출한 다음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저 못돼먹은 놈 하면서 대대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제2차 중동전쟁, 혹은 수에즈 사태). 워낙 군사력이 부족해 패배를 눈앞에 뒀으나, 당시 제3세계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소련이 영국+프랑스에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며 겁을 주고 미국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냉담하게 대하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해 결과적으로 이집트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 당시 이집트와 나세르의 주가가 엄청나게 치솟아 인도와 함께 제3세계의 수장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선 거의 싸우는 족족 처발렸고, 한때 시리아와 함께 통일아랍 공화국을 만들어 전 이슬람 아랍세계의 통일을 꾀했으나 한때 그 꿈이 가까워 보였으나 시리아의 삽질로 다시 쪼개져 이집트 공화국으로 원상복귀했다.
5.2 안와르 사다트(1971~1981)와 호스니 무바라크의 시대(1981~2011)
나세르의 후계자로 안와르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탈중앙집중화와 족벌경제의 완화, 독재정치의 완화를 내걸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그나마 1973년에 각오 단단히 하고 소련 지원 속에 제대로 훈련하면서 이를 갈아오며 벌인 제4차 중동전쟁, 또는 10월 전쟁으로 부르는 전쟁으로 이스라엘에게 장난아닌 타격을 주었다. 이스라엘군 공식적 전사자만 해도 2500명이 넘는다.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 전사자가 총 2백명 수준이었던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
초반 전투에서 생긴 이 정도 전사자 수는 이스라엘을 아주 충공깽으로 몰아가고도 남았다. 물론 전쟁 자체는 이스라엘이 대반격전을 펼치는 바람에 수에즈 운하 방어선이 뚫리면서 대위기를 맞이하다가 종전되었으나, 일단 이스라엘에게 더 이상의 양면전쟁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주었기 때문에 평화협정을 미끼로 하여 이스라엘이 빼앗아간 시나이 반도를 협상으로 되찾고 이스라엘을 인정하게 된다.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을 실현한 사다트는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과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아랍세계에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서방세계에서 그의 인기는 올라갔으나 국내에서는 반대여론에 대한 탄압 등으로 인기가 추락했고, 그 후 중동평화회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추진하던 안와르 엘 사다트가 공식 행사 도중 이슬람 과격파에게 암살당한 뒤, 부통령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직에 올라 2011년까지 대통령직을 맡았다. 무바라크는 30년간 독재정치를 펴며 자식까지 세습하려는 계획에도 골몰했고 가장 탄탄한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5.3 이집트 혁명, 그리고 현재 진행형
그러나 2011년 튀니지에서 혁명으로 벤 알리 대통령이 쫓겨나면서(재스민 혁명)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고, 이집트에도 불씨가 튀어 민중혁명이 발생하였다. 이슬람권의 높은 출산율로 인구의 40% 이상이 20대 이하인 젊은층들이 혁명의 주축이 되었고, 인터넷의 보급으로 대규모 시위가 가능해진 것이 아랍권에 혁명 열풍이 불어오는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이집트 정부는 시위가 시작된 후 트위터를 차단했지만 이미 네티즌들의 결집을 막을 수 없었다. 정부는 강경진압을 계속하였으나 타오르는 혁명의 불길을 막을 수는 없었고, 무바라크는 끝까지 꼼수를 쓰며 자리보전을 노렸으나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2011 이집트 혁명 참조.
그리고 2011년 12월 하원 선거에서 70% 가까이를 이슬람 보수파가 차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군부까지도 비상이 걸렸으나 이걸 막을 명분이 없어 구경만 해야할 판국이다. 독재자를 몰아낸 민중혁명으로 이뤄진 선거를 막을 수도 없기에 군부는 부정선거의혹을 저질러 민중들의 분노를 이끌어 유혈사태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군부도 무력으로만 막을 수 없는데 리비아처럼 내전으로 벌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
이집트는 인구가 9천만이 넘어가고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데다 그 후에도 역사적 문화적 위치,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영토를 걸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수에즈 운하를 소유하는 등 여러 모로 아랍동맹에서 중요한 위치다. 통계에 의하면 아랍 미디어의 90% 이상이 이집트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드라마, 뉴스 기타등등) 튀니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혁명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도 위험하다는 분석도 나왔었다.
2012년 6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되었다. 1952년 파루크 왕을 몰아낸 뒤로 군부 정권이 60년동안 독식한 뒤로 첫 민주 정권이지만 군부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헌법재판소도 인정하지 않는 와중에 여론이 군부와 한패인 헌법재판소의 수작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무바라크의 부하였던 샤피크 후보를 지지하던 미국과 이스라엘은 똥씹은 반응.
결국 여론에 밀려서 무르시가 공식적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무르시가 추진하는 새 헌법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11월 22일 사법기관의 의회 해산권을 제한하고 샤리아와 이슬람 근본주의 색채를 지나치게 반영했으며, 대통령령과 선언문이 최종 효력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은 새 헌법 선언문을 발표해 논란을 일으켰다.이는 일명 파라오 헌법 파동이라고 불린다.
이를 두고 "네가 무슨 파라오냐? 이건 뭐 무바라크랑 차이가 뭔데?" 분노어린 반발을 받고 있고 2012년 12월 5일에는 카이로 한복판에서 무르시 반대파들과 지지자들이 충돌하여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야당에서 결사반대하고 있으며 군부도 야당과 손잡겠다면서 으름짱을 놓는 중이라 15일로 기획된 헌법 국민투표를 연기하고 해산권 제한을 없애기로 하며 대통령 권한을 의회랑 반반으로 하겠다고 물러서면서 다독이는 중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경제난과 증가하는 실업률, 그리고 무르시 대통령의 무슬림 형제단 중심의 인사[30]는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무르시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인 2013년 6월 30일에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이집트 전역에서 10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총기까지 동원한 친정부파와 반정부파 간의 유혈 충돌이 거듭되고 사회 혼란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7월 2일 군부가 대통령을 압박하여 조속한 결단을 촉구하며 최후통첩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7월 3일,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 대통령을 사실상 축출하고 과도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무바라크 축출 이후 일시적으로 정국을 장악한 군부가 물러나고 불과 1년 만에 다시 군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무르시 대통령의 이슬람주의 성향을 꺼리던 미국은 군부의 쿠데타를 대놓고 환영하진 못해도 상당히 기꺼워 하는 상황.
무슬림 형제단과 친하게 지내면서 마찬가지로 이슬람주의 정책을 쓰던 터키 에르도안 정권의 경우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민중들 반발을 우려해서인지 나중에는 물러서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무슬림 형제단이 무르시 축출에 반발해 시위를 일으키면서 다시금 이집트는 유혈의 폭풍속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군부는 실탄 사격까지 하면서 무르시 찬성 시위대를 해산시키려했고 결국 600여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집트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미국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이집트에 대한 원조 중단을 경고하고 나섰다. 무르시가 분명 파라오 헌법 등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린것은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군부를 다시 나서게 한것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많은 상황.
2013년 8월 19일에는 3일 동안 시위로 1300여 명에 육박하는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해졌다. 이 쯤 되면 리비아나 시리아 테크를 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무슬림 형제단 자체가 법적으로 해체되기 직전이며, 국민들도 외면하는 편인지라 사실상 무슬림형제단의 참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결국 무르시 정권의 기반이었던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 무슬림 형제단은 2013년 10월 9일 과도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당했다. 나아가 군부 주도의 과도정부는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정당 핵심 인물들과 관련자들의 자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과도정부는 무르시 전 대통령 시기의 지나친 이슬람 과격 정책들을 약화시키고 군부의 절대적 권한을 강화한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쿠데타의 주역인 압델 파타 엘 시시 원수가 과도정부를 이을 차기 선거의 대권주자로 유력시되었고 결국 이집트 새 대통령으로당선됐다.
혁명 3주년 기념일을 전후해서도 무슬림 형제단 지지 시위대와 친군부 시위대가 충돌해 수백명이 죽고 다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다.그외에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 의한 테러도 일어나곤 했지만 지금은 재집권한 군부의 권위주의적인 통치 아래서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듯 하다.
6 연표
고대 이집트
- 왕조 형성기 : 제1왕조 ~ 제2왕조 (3100 - 2686 BC)
- 고왕국 시대 : 제3왕조 ~ 제6왕조 (2686 - 2181 BC)
- 제1중간기 : 제7왕조 ~ 제11왕조 (2181 - 1991 BC)
- 중왕국 시대 : 제11왕조 ~ 제14왕조 (2134 - 1690 BC)
- 제2중간기 : 제15왕조 ~ 제17왕조 (1674 - 1549 BC)
- 신왕국 시대 : 제18왕조 ~ 제20왕조 (1549 - 1069 BC)
- 제3 중간기 : 제21왕조 ~ 제25왕조 (1069 - 653 BC)
- 아시리아의 지배 (671 - 659 BC)
- 제26왕조 (672 - 525 BC)
- 제27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1차 지배, 525 - 404 BC)
- 제28왕조 ~ 제30왕조 (404 - 343 BC)
- 제31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2차 지배, 343 - 332 BC)
- 헬레니즘 제국 (332 - 305 BC)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305 BC - 30 BC)
- 로마 제국의 지배 (30 BC - 641 AD)
무슬림 시대
- 정통 칼리파 시대의 지배 (639 - 661)
-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 (661 - 750)
- 아바스 왕조의 지배 (750 - 969)
- 파티마 왕조의 지배 (969 - 1171)
- 아이유브 왕조 (1171 - 1246)
- 바흐리 맘루크 왕조 (1250 - 1382)
- 부르지 맘루크 왕조 (1382 - 1517)
-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7 - 1798)
근대 이집트
- 나폴레옹의 정복 (1798 - 1801)
- 무함마드 알리 왕조 (1805 - 1952)
- - (1882년부터 영국의 보호령)
- - 헤디브 시대 (1867 - 1914)
- - 술탄 시대 (1914 - 1922)
- - 왕 시대 (1922 - 1952)
- 이집트 아랍 공화국 (1952 - 현재)
7 이집트 파라오 목록
- ↑ 여기서의 상하는 나일강의 상하류를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북쪽이 위로 가게 그리는 일반적인 지도에서는 지중해와 중동지역에 가까운 윗부분이 하이집트에 해당하고(지중해에서 지금의 카이로까지), 카이로 남쪽의 고왕국 당시의 수도인 멤피스 부터 지금의 아스완 댐 근처의 급류지역 (First Cataract 라고 불리는 지역)까지가 상이집트에 해당한다. 거기서부터 남쪽으로는 당시에는 이집트 본토로는 안처주었다고 한다.
- ↑ 사실 파라오라는 명칭이 대내외적으로 쓰인건 BC 1500년을 전후한 중왕조 시기인데, 고대 이집트의 지배자=파라오라는 생각이 널리 통용되는 터라 그렇게 쓴다. 하지만 매머드는 북극해의 섬 몇몇에서 기원전 1700여년 경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 ↑ 참고로 이 시대는 이집트 문명이 시작된지 이미 1,000여 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는 청동기에도 돌입하지 못한 시점이다. 앞서 당시 해수면이 낮았다 운운이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 가파르게 온난해진 기후는 신석기 기후 최적화시기(8000~6000년 전)에 정점을 찍어 지금보다 더 따듯한 적이 있었다가 다시 하강하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한반도 서해의 경우 오히려 평균 해수면이 6m 정도 상승했다가 점차 하강하는 시기로 당연히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거나 비슷한 수준이지 낮지는 않았다.
- ↑ 이집트가 최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시기를 마케도니아에게 점령당하는 시기로 상정할 경우.
- ↑ 참고로 인류 역사에서 이집트 다음으로 최강의 자리를 오래 차지한 곳은 이란과 중국이다.
- ↑ 이렇게 말해도 사실 이집트는 중세에도 전세계에서 독보적인 패자라 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주요 강국 중 하나였던 파티마 왕조, 맘루크 왕조를 비롯한 많은 무슬림 제국들의 핵심지였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중요한 땅이었으며, 근대에서도 중동에서는 가장 역량 있는 지역 강국 중 하나이다. 이집트를 차지하지 않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확립한 제국은 없다. 그나마 이렇게 핵심적인 지역 강국으로 남아 있는 것도 역사적으로 보면 엄청 위상이 추락한거니 그 인류사적 비중이 후덜덜할 뿐이다
- ↑ 독일의 포츠담기후연구소는 이 사막화가 기원전 4천년 경 300년간 급격히 진행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 사실 개천절의 기원전 2333년은 조선시대에 동국통감을 작성할 때 중국의 요임금이 개국한 2357년 보다 25년 이후로 본 것인데, 요임금의 개국시기도 불확실 하고 무엇보다 중국 정사에서도 요임금은 신화시대에 속한다. 고고학자들은 고조선의 개국이 빨라봐야 기원전 12세기-기원전 9세기 정도로 추측하며,, 기록상으론 7~8세기로 보고 있는데다가 그 이전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물론 이집트는 피라미드라는 유물이 있으므로 신화시대가 아니다.
- ↑ 각각 재위하기만 50년, 94년이었다. 페피2세는 특히 태조왕을 더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인물이다. 여섯살에 즉위해 '겨우' 99살에 죽었지만.. 여하간 존재자체가 웬만한 왕조보다 길다;; 하지만 다른 왕들의 재위가 하도 짧아 제6왕조의 기간은 160년 수준.
- ↑ 혹은 75일간 5명의 파라오.
하지만 하루나 한달이나 그게 그거지여기서 70은 정확한 숫자보다는 동양에서의 100과 마찬가지로 많다는 뜻을 의미하는 듯하다. 많은 자칭 파라오들이 난립했다는 것. - ↑ 애초에 11왕조를 열은 멘투호테프 1세가 테베의 총독이었다. 이 왕조는 재상 아메넴헤트 1세에 의해 찬탈당해 약 150여년 만에 망한다. (중왕국으로는 70년만.) 12왕조는 210년을 간다.
- ↑ 이것이 그리스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우스레트 여신의 남자"라는 의미라는 설도 있다.
- ↑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터키등지에 속하는 지역에 살던 다수의 유목민 집단으로 추정되며, 이집트인들과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성경의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내용에 근거하여 이들을 유태인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으나, 관련된 유물이 하나도 안나와서 아직은 말만 그럴싸한 떡밥수준. (출애굽의 타이밍은 힉소스의 침공 이전이란 의견, 힉소스의 침공이 곧 요셉의 도래라는 의견, 신왕국시대라는 의견 등으로 나뉘는데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참고로 힉소스의 어원은 외국 땅의 왕자(외지인)들이라는 "히카우 카슈트 Hikaw khasut"였는데, 이집트 사학자 마네토의 오류로 '양치기(목자, 유목민)의 우두머리'로 오역하면서 유목민으로서의 "힉소스 민족"이란 개념이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힉소스 민족이란 곧 셈족이다.
- ↑ 청동기 부분에서 "그럼 청동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집트인들은 뭐갖고 도구만들고 싸웠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집트의 경우 순동기 사용기간이 상당히 길다. 이집트에서 구리를 가공해서 무기나 도구를 만든 흔적은 선왕조시대 유물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청동가공법은 몰랐던것(...)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이집트내에서는 주석이 나질 않기 때문에 전량을 무역에 의존해야했다. 단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지방도 크게 다르진 않은 상황이라 후대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영국에까지 가서 주석을 가져오곤 했었다(...) 헌데 힉소스 이전까지 이집트의 교역범위는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일대정도로 극히 제한적이었다.
- ↑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지만, 이 시기 사막 지역이 건조화되어 국력이 쇠퇴했다거나 자연 재해가 겹쳤다거나 하는 설도 있다. 참고로 이 시기 이집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히타이트는 사실상 망했고, 그리스 지역의 문명 또한 대대적으로 쇠퇴하였다. 한편 이 시기 오리엔트 지역은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 ↑ 115년의 유대 폭동과 172년의 폭동이 유명하다. 두 폭동 사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알렉산드리아를 재건했으나 다시 황폐해졌다.
- ↑ 마지막 박해는 303~311년. 콥트 교회에서 이 시기를 기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한 284년을 박해의 시대인 순교력 원년으로 규정하고, 매해 순교의 기간을 정해놓았을 정도다.
- ↑ 이 떡밥은 심지어 비잔티움의 첩자 같은 대체역사물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질 정도이다.
- ↑ 얼마나 황당한 함락이었냐면, 우마르 칼리파나 메디나 원로들은 이집트 침공을 당장 원하지 않았다. 시리아도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 그러나 아무르 빈 알-아스가 막무가내로 침공을 간청하여 원로들의 만류도 씹고, 닥치고 전광석화로 이집트로 돌격해버렸다. 그렇게 이집트는 쉽게 무너졌지만 해군이 없던 이슬람으로서는 여전히 이집트는 오래 지배하기에 좋은 영토가 아니었다.
- ↑ 다만 소위 말하는 문화말살이라고하기는 힘들고, 사실 기존의 이집트 문화에 로마-그리스 문화-기독교가 혼재되어있던것이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페르시아 문화와 아랍 문화, 튀르크 문화가 한꺼번에 뒤섞여졌다는것이 타당하다. 즉, 잡탕(...) 당장 콥트어만 해도 이집트 정복 이후로는 세가 악화되었기는 했어도 1000년 뒤에까지 쓰이기는 했으니...
- ↑ 사실 이집트에서 최초의 박해가 시작된 것은 괴짜 군주로 유명한 알-하킴(996~1021, 파티마조 제6대 칼리프) 때의 일이다(1007년~1012년). 하지만 5년만에 박해는 취소되고 교회 재산을 돌려주었다니 그야말로 괴짜 군주의 변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재위는 홀연히 나귀를 타고 궁성을 나갔다가 며칠 후 피묻은 옷과 나귀만 발견된 채로 실종되면서 끝났다.
- ↑ 살라딘과 리처드 1세의 1192년 휴전, 프레드릭 2세와 알-카밀이 맺은 1229년의 휴전이 유명하다.
- ↑ 그러나 여러 기준에서 이 시대의 "노예"(슬라브의 어원이며, 터키인 들이 다수였다.)는 결혼, 사유재산,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고 심지어 공직의 참여가 허가되었으며 노예 해방도 권장되었다. 민족적 차이와 군인, 집사라는 직업적 특징에 더 가까웠던 것. 심지어 칼리프의 경우 여자 노예 소생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 ↑ 칼리프와 술탄과의 관계는 황제와 왕, 특히 덴노와 쇼군의 관계와 유사하다. 아바스 칼리파는 복원된 이래 어떠한 권력도 행사하지 못했으며 그저 맘루크 술탄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의전만이 가능했다.
- ↑ 맘루크는 당시 인도까지 해군의 세력을 떨쳤는데, 무역 주도권을 놓지 않기 위해 포르투갈 함대를 대포로 공격했다. 맘루크는 초기에는 승전했으나 포르투갈의 지원함대가 도착하면서 패전했다(1508~1509). 이후 홍해 무역이 급감하면서 세수가 줄은 맘루크는 위조화폐를 발행해야하는 처지에 놓였으나 이 때문에 국가 혼란의 악순환만 더 심해졌다.
- ↑ 맘루크는 해군력을 유지하는데도 오스만의 포를 구입해야 했던 처지였다. 페스트로 이미 맛이 가고 있었음에도 국가의 기강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던 맘루크는 술탄 투만베이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막을 내렸고, 투만베이는 3개월을 더 분전하다가 처형당했다.
- ↑ 쿠데타를 일으킨 해
- ↑ 대통령 취임
- ↑ 파루크 왕은 1965년 로마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엄청난 대식가 면모를 자랑하며 최고급 포도주 3병을 들이키며 즐겁게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찾아온 심장마비로 쓰러져 45살로 사망했다. 웃기게도 파루크 왕이 망명할때, 파루크 왕과 사돈이던 이란 팔라비 왕은 망명 요청을 거부했는데 그 팔라비 왕은 파리에 잠시 있다가 이집트로 망명하여 거기에서 죽었다...
- ↑ 무능한 낙하산들을 오로지 무슬림 형제단이라고 정부고위인사로 등용했으니 이 점으로도 많은 욕을 먹었다. 진보언론들이 그저 알라~알라~이러면 경제가 나아지냐? 라고 컬럼으로 깔 정도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