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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4일 (토) 14:56 기준 최신판
- 상위 항목: FC 바이에른 뮌헨
목차
1 창단과 시련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 체육 클럽(MTV 1879) 의 멤버들에 의해 1900년에 창단되었다. MTV 1879의 선수들이 1900년 2월 27일 집회에서, 축구부가 독일축구협회(DFB)에 가맹이 불가능해지자, 11명의 축구부 선수들이 MTV 1879에서 탈퇴하여 같은날 오후에 축구 클럽 바이에른 뮌헨(Fußball-Club Bayern München)을 창단하였다.
이후 바이에른은 지역 라이벌을 상대로 모두 대승을 거두었고, 1900-01 시즌 남독일 챔피언쉽 준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이어지는 후년에 바이에른은 남부 지역 여러 리그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1910-11 시즌, 바이에른은 새로 출범한 바이에른 주의 1부 리그 크라이슬리가(Kreisliga)에 편입된다. 바이에른 뮌헨은 첫 해에 크라이슬리가 우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몇년간 무관에 그쳤고,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전체의 축구 활동이 중지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은 1926년, 남독일 챔피언쉽이 출범하기 전까지 몇기의 지역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며, 28년에도 지역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바이에른이 공식 기록상 처음으로 획득한 우승 타이틀은 1932년의 리그 우승으로, 리카르트 "리틀 돔비" 콘(Richard "Little Dombi" Kohn)은 바이에른을 이끌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당시 독일 챔피언쉽 결승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일이 나치 휘하의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창단 멤버들에 유태인이 여럿 있기에, 1930년대 나치에게 구단 간부들이 강제로 해임당하기도 했다.(그런데 독일 및 여러 유럽 축구단에 유태인들이 연루되던 게 꽤 많다. 이를테면 2007년 분데스리가 우승한 슈투트가르트는 아주 초창기에 유태인 구단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구단 마크가 다윗의 별이 들어가기도 했으니) 이 조치에 구단은 저항했지만, 히틀러 나치즘은 바이에른을 '유대인 클럽'이라고 조롱하며 분쇄했다. 클럽의 간부진 및 서포터즈의 열혈 회원 중에서 유대인은 속속 빠져나갔다. 다행히 국경을 넘어간 사람도 있지만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남부리가를 호령했던, 강력했던 바이에른은 그렇게 추락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은 남부 오베르리가에 속해있었다. 당시에는 통합된 리그가 없는, 총 5개로 나눠진 각 지방 리그 체제였으며, 남부 오베르리가 또한 독일의 1부 리그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1945년에서 1963년까지 13명의 감독을 해임하며 암흑기를 보냈다. 1955년에는 2부 리가로 강등되었지만 1시즌만에 복귀했고, DFB-포칼 결승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1-0으로 꺾으며 창단 후 첫 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바이에른은 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결국 1950년대에는 부도 크리까지 맞는다. 롤란트 엔틀러(Roland Endler)는 재정 지원을 하였고, 4년간 구단의 회장직을 맡았다. 1963년, 독일의 오베르리가는 단일 1부 리그인 푸스발-분데스리가(Fußball-Bundesliga)로 통합되었다. 이때, 출범 멤버로 각 지역의 5개의 오베르리가 팀이 3~4팀씩 포함되는데, 바이에른은 남부 1부 리그 3위로 마쳤지만, 같은 뮌헨을 연고로 한 지역 라이벌인 TSV 1860 뮌헨이 오베르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독일 축구협회는 같은 연고지의 2팀을 1부 리그에 넣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1963년 분데스리가의 출범 멤버에 들지 못한다. 바이에른 뮌헨은 그로부터 2년 후에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2 첫 우승과 황금기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1970년대 전성기. 주축 선수들인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은 클럽뿐만 아니라 서독 대표팀도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바이에른은 서독의 통합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출범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1부리그 멤버로 초대받지 못했고, 2년 후에,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등을 앞세워 1부리그로 올라온다.[1] 분데스리가로 승격된 첫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리그 3위의 호성적을 거뒀고 DFB-포칼 우승을 가져갔다. 독일 컵 우승으로 인해서 UEFA 컵위너스컵 출전권을 획득했고, 레인저스와의 결승전에서 프란츠 로트의 극적인 추가 시간 골로 1 - 0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1967년, 바이에른 뮌헨은 다시 한번 DFB-포칼에서 우승했지만, 전반적인 과정이 실망스러웠고 즐라트코 차이코프스키 (Zlatko Čajkovski)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된 브란코 제베치 (Branko Zebec) 감독이 부임했다.[2] 브란코 제베치 감독은 공격적인 스타일의 축구를 선보였으며 1968-69 시즌,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DFB-포칼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최고의 수비수, 최고의 골키퍼가 함께.
1970년대 초중반에 들어와 분데스리가는 바야흐로 '바이에른 천하' 시대를 맞는다. 우도 라텍 감독이 부임했다. 우도 라텍은 첫 시즌에 DFB-포칼 우승을 이루어냈다. 1971 - 1972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는데, 이 우승이 결정지어진 경기는 샬케 04와의 경기였는데, 1972 뮌헨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펼쳐진 첫 경기임과 동시에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의 TV 중계가 이루어진 경기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5 - 1 로 승리하고 챔피언이 되었다. 이 시즌은 최다 승점 기록과 최다 골 기록을 세운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사상 첫 3연패(1971 - 1972 시즌, 1972 - 1973 시즌, 1973 - 1974 시즌)의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3년 연속 유로피언 컵[3] 우승을 차지하며 그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유러피언 컵 3연패 과정이 그리 순탄치 많은 않았다.
1973 - 1974 시즌 첫 번째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붙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경기가 펼쳐졌고, 경기가 종료되기 직전까지 0 - 1 로 끌려가고 있었으나, 한스-게오르그 슈바르첸벡의 극적인 동점골로 재경기를 가지게 된다. 이 경기에서는 게르트 뮐러와[4] 울리 회네스가 각각 2골씩 터뜨리며 4 - 0 으로 손쉽게 승리했다. 추후에 울리 회네스 같은 레전드들은 이 경기가 바이에른 뮌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1974 - 1975 시즌 도중인 1월에, 바이에른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자 구단주는 팀의 중흥을 가져온 우도 라텍 (Udo Lattek) 을 경질하고 데트마어 크라머(Dettmar Cramer)[5] 를 새로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시즌의 리가는 10위로 마무리하였으나 , 유러피언 컵에서는 지속적인 성공이 이어졌다. 1974 - 1975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와 붙었고, 프란츠 로트와 게르트 뮐러의 골로 승리했다. 빌리 브렘너를 중심으로 한 전성기의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으며 우승하였고, 그 다음 시즌의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확보하였다. 1975 - 1976 시즌의 리그 성적은 3위였으나, 이 시즌에도 유로피언 컵을 우승하였다.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홀로 세 골을 몰아친 게르트 뮐러의 활약으로 합계 3 - 1로 꺾었고, 햄든 파크에서의 결승전에서 AS 생테티엔을 '프리킥 스페셜리스트' 프란츠 로트의 결승골로 꺾으며 유로피언 컵 3연패에 성공한 바이에른 뮌헨은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6]
UEFA 챔피언스 리그(당시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자축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
3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 시대
1972년 5월 26일 개장한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은 1972 뮌헨 올림픽을 대비해 뮌헨 올림피아 파크 내에 건축된 경기장으로 6만 9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1972-73 시즌 분데스리가부터 2005년 여름 새로운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로 옮기기 전까지 33시즌동안 바이에른의 홈구장으로 쓰이며 고락을 함께 했다. 독일의 명건축가 귄터 베니쉬와 프라이 오토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사상 최초로 강철 케이블에 지탱되어 안정된 거대한 아크릴 유리 덮개를 설치한 신선하고 혁신적인 구조에 당시 최첨단 시설등을 갖춘 경기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한쪽 면은 완전히 개방된 형태라 겨울에 경기를 관람하게 매우 추웠고, 관중석 절반 정도는 아예 지붕으로 덮여있지 않아 비, 눈등의 악천후에 그대로 노출되는 등 여러 애로사항이 알록달록 꽃피어나기 시작했다. 안습. 또한 종합경기장이다보니 피치와의 거리가 너무 먼 것등이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 추후 알리안츠 아레나가 신규 건립되게 되는 원인이 된다.
4 침체기와 FC 브라이트니게(FC Breitnigge)
파일:Attachment/FC 바이에른 뮌헨/2222.jpg
좌측이 중원사령관 파울 브라이트너, 우측의 득점왕 트로피를 든 양반이 바이에른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자 현 바이에른 사장 칼 하인츠 루메니게다.
70년대말 구단은 적자의 늪에 허덕이며 졸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크라머를 경질한 구단은 헝가리의 로란트 줄러(Lóránt Gyula)를 감독으로 앉혔고, 역시 이는 분위기 반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76-77 시즌에는 리그를 7위로 마무리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분데스리가 성적인 12위를 기록하였다. 바이에른 수뇌부는 결국 로란트를 경질, 수석코치였던 체르너이 팔 (Csernai Pál) 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주전 선수들의 이탈도 이어졌다. 팀의 주장이자 상징 프란츠 베켄바워는 1977년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했고, 전설의 수문장 제프 마이어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은퇴한데다, 인대부상에 시달려오던 울리 회네스마저 회복에 실패하고 조기 은퇴를 결정한다. 거기다 팀의 득점을 책임지던 '폭격기' 게르트 뮐러마저 포트로더레일 스트라이커즈로 이적했다.
1980년대에 들어 팀은 재정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보드진의 다수가 교체됐다. 부상으로 인해 조기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울리 회네스 (Uli Hoeneß) 를 구단 보드진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울리 회네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마케팅 관련 공부를 했다. 그 이후 바이에른 뮌헨에 돌아와 미국의 스포츠 마케팅 방식을 적용하게 된다. 바이에른 뮌헨에 메가 스토어를 설치하고, 자국 내 기업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이 메가 스토어는 대단한 혁신이었는데, 머천다이징을 전문적으로 행한 첫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포터들의 구단' 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심어주어 이미지 형성에 노력하게 된다. 또한 바이에른 주에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많이 몰려있는데 그 기업들이 모두 바이에른 뮌헨의 파트너가 되는데 이 것도 울리 회네스가 주도했다. 결국 단은 기사 회생에 성공하였다. 그의 마케팅 방식은 여기에 나와있다.
이렇게 기사 회상한 바이에른 뮌헨은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독주하기 시작하고 10년간 7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유럽 무대에서의 성적은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1981 / 1982 시즌과 1986 / 1987시즌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랐으나 둘 다 준우승에 그쳤다. 1981 - 1982 시즌 결승전에는 아스톤 빌라와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경기 내내 압도하다가 뜬금포 한 방에 무너졌고 1986 - 1987 시즌 결승전에선 포르투에게 경기 내내 1골차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79분이랑 81분에 연속골을 얻어맞고 역전패했다.
또한 1980년대의 바이에른은 공격과 수비의 핵심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7] 에게 의존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의 바이에른은 'FC 브라이트니게 (FC Breitnigge)' 라고 불릴정도로 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5 FC 할리우드(FC Hollywood) 시절
1987년 부임한 유프 하인케스 체제 하의 바이에른은 리가 2연패를 성공하지만 1990년대 들어 노쇠한 주축 선수를 떠나보내며 전력이 약화되었고, 클럽은 위기를 맞았고 1990 - 1991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1991 – 1992 시즌에는 10위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이는 강등권과 승점이 겨우 5점차밖에 나지 않는 부진이었다. 유프 하인케스는 경질되었고, 1993-94 시즌 UEFA 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노리치 시티 FC에게 홈에서 덜미를 잡히며 조기 탈락의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란츠 베켄바워가 94년 1월에 임시감독을 맡음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화려하게 부활하며 다시금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기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란츠 베켄바우어 감독대행을 이어 새로 감독이 된 조반니 트라파토니와 오토 레하겔 감독은 당시5 벼락부자가 되어 막강한 선수를 쓸어담던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대결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패배했고, 각각 1시즌씩 무관으로 끝냈다.
1995 - 1996 시즌 막판에 팀의 부진을 보다 못한 베켄바워는 또다시 임시 감독직을 맡았고, 결승에서 지롱댕 보르도를 꺾고 팀의 UEFA 컵 우승을 이끌어냈다. 정말 이쯤되면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건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그리고 또다시 감독직이 조반니 트라파토니에게 넘어갔다. 그나마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1996 - 1997 시즌에 팀에게 3년만에 리그 우승을 선사했으나 같은 시즌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무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해버려서 복수하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도 않았다. 이 시즌 도르트문트는 유벤투스를 꺾고 챔스 우승을 했는데, 그 장소가 다름아닌 바이에른의 홈구장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이었다. 다음 시즌에는 승격팀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패배하는등 고전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때 카이저슬라우턴 감독은 바이에른에서의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던 오토 레하겔이다.
이 시기, 선수들은 형편없는 경기력에 반해 그라운드 밖에서 소란을 자주 피우는 등, 스포츠지보다 촌평지에 등장하며 FC 할리우드 (FC Hollywood)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획득하였다. 1998년 3월 10일, 선수들의 태도에 빡친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분노의 인터뷰를 하였다. 근데 문법이 이상하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사임하였다.
6 팀 히츠펠트(Ottmar Hitzfeld)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지휘봉은 라이벌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장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이 맡게 된다. 히츠펠트가 부임한 첫해,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랐고 DFB-포칼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음해 바이에른은 리그와 독일컵 타이틀을 차지하며 더블을 기록했고 2001년 다시금 리그를 제패, 분데스리가를 3년 연속으로 우승했다.
그동안 부진했던 유럽대항전에서도 기세가 엄청났다. 부임 첫 시즌 1998 - 1999시즌, 바이에른은 조별리그에서 FC 바르셀로나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침몰시킨데다 토너먼트에서 레알 마드리드까지 꺾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후에 '캄프 누의 비극'이라 명명된, 비극적인 패배를 당하며 준우승이 머무른다. 전반 6분만에 마리오 바슬러가 강력한 땅볼프리킥으로 피터 슈마이켈을 무너뜨리며 앞서간데다 경기 내내 메멧 숄을 필두로 맨유 수비진을 농락하며 골대만 3번 떄리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후반 91분과 93분 두번의 코너킥 상황에서 테디 셰링엄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실점해 4번째 빅이어를 눈앞에 두고 종료직전에 믿기지 않는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그라운드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주장 올리버 칸과 사무엘 쿠포르의 통한의 절규는 바이에른 뮌헨 팬들로서는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장면이자 기억하기도 싫은 장면이다.
그리고 2년 뒤의 2000 - 2001 시즌의 바이에른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바이에른은 '게르만의 혼' 로타어 마테우스가 은퇴했지만 주장인 '미친 호랑이'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거인' 올리버 칸을 중심으로 절치부심했다. 뿐만 아니라 비셴테 리사라수와 지오반니 에우베르의 부상 결장을 고려하더라도 결승전 선발 멤버 중 쿠포르를 제외한, 벤치 멤버 중 알리 다에이와 살리하미지치를 제외한 전원이 독일인으로 채워져 있었던 2년 전과는 달리 윌리 사뇰과 파울로 세르징요 등 거물 용병을 영입하고 오언 하그리브스등 유망주를 성장시키며 더욱 강해졌다. 바이에른은 조별 예선에서 아스날 FC을 1승 1무로 제압하며 기세를 과시했고, 8강에서 2년 전 통한의 아픔을 안겨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홈 / 원정에서 모두 털며 4강에 진출했다.[8] 4강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도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 산 시로에서 열린 결승전 상대는 작년에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신 발렌시아 CF였다. 에펜베르크와 멘디에타가 PK로 한 골씩 기록하며 1:1로 승부차기까지 간 이 접전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중 유일하게 PK로만 득점이 난 경기로 기록이 되어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가장 긴장감 넘치는 승부차기로 불리어지는 이 혈투에서 양팀 모두 7번째 키커까지 나온 끝에 끝에 PK를 3개나 선방해 낸 올리버 칸의 활약에 힘입어 PK 스코어 5:4로 25년만에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HEUTE IST EIN GUTER TAG UM GESCHICHTE ZU SCHREIBEN / 오늘은 역사를 쓰기 좋은 날 ![9] |
UEFA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가장 긴장감 넘치던 승부차기의 주인공이 된 올리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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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 리그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슈테판 에펜베르크
왼쪽부터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주역들인 올리버 칸 - 사무엘 쿠포르 - 슈테판 에펜베르크 - 메멧 숄 - 카르스텐 얀커 -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
그리고 2000 - 2001 분데스리가 에서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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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2001 시즌 분데스리가, 당시 33 라운드의 순위표이다. 1위 바이에른 뮌헨과 2위 샬케 04 간의 승점 차이는 3점이었다. 득실차는 샬케 04가 앞서고 있었다. 마지막 34 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함부르크 SV를 상대하고, 샬케 04는 SpVgg 운터하힝을 상대했다. 그리고 두 경기는 같은 시간에 진행되었다. 샬케의 경기가 먼저 끝났다. 샬케 04는 5 : 3 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뮌헨은 함부르크 SV와 0 : 0 으로 비기고 있었다. 경기 시간은 9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함부르크의 세르게이 바르바레즈가 선제 헤딩 골을 넣는다. 샬케 04 팬들은 환호하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왔고, 우승을 확정한 듯한 분위기였다. 반면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화난 표정을 지었고, 오트마르 히츠펠트는 고개를 가로 지었다. 울리 회네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주심은 4분의 추가 시간을 주었다. 바이에른 뮌헨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파울로 세르지오에게 공을 띄워 주었다. 하지만 파울로 세르지오의 마크맨이었던 토마스 우이팔루시는 골키퍼에게 백 패스를 했다. 그런데 골키퍼가 공을 잡았다! 바이에른의 벤치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반칙!" 간접 프리킥이 주어졌고, 이것은 바이에른 뮌헨의 마지막 찬스였다.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패트릭 안데르손이 프리킥 준비를 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도이처 마이스터는 샬케 04에게 돌아갈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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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패트릭 안데르손이 강력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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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우승, 도이처 마이스터는 바이에른 뮌헨에게로
2001 - 2002시즌 마이스터샬레는 마티아스 잠머가 이끄는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내줬고, 챔피언스리그도 1, 2차 조별리그 12경기에서 무패를 달렸으나 8강에서 지난 두 시즌 연속해서 승리했던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이번엔 바이에른이 떨어졌다. 1차전 홈경기는 이른 시간 선제골을 내주고도 82분에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동점골과 경기종료직전 클라우디오 피사로의 극적인 역전골로 승리했다. 그러나 원정에서는 명경기를 펼친 끝에 이반 엘게라와 구티에게 비슷한 패턴으로 골을 먹히며 패했다. 시즌 종료 후 주장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떡대 피지컬을 자랑했던 스트라이커 카르스텐 얀커가 떠났지만 미하엘 발락, 제바스티안 다이슬러, 클라우디오 피사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뉴페이스들이 대거 등장한 2002 - 2003시즌 다시 한번 국내 리그 / 컵 더블을 달성한데다 챔스 4강까지 진출하며 건재함을 알렸다. 이 정보는 잘못됐다. 02-03 시즌 바이에른은 데보르티보, 밀란, RC 랑스를 상대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2무 4패라는 충격적인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그 직전인 01-02 시즌에 챔스 4강을, 03-04 시즌에는 16강까지 진출했다. 이후 바이에른은 이때 자신들을 철저히 파괴했던 데보르티보의 공격수 로이 마카이를 영입해 지오반니 에우베르, 카르스텐 얀커를 대체한다.
2003 - 2004 시즌에는 포칼 16강에서 아헨에게 발목을 잡히는 등 부진이 이어졌고, 챔피언스리그도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는데 나쁘지 않은 경기력으로 홈에서 낙승을 따내나 싶더니 올리버 칸이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프리킥을 캐칭한것을 흘려 알까기 골을 내주는 수모를 당하며 무승부. 원정에서 1대0으로 패해 합계 2대1로 조기에 탈락하고 말았다. 이 시즌 토마스 샤프 감독이 이끄는 '닥공' 베르더 브레멘에게 우승을 내주었는데, 바이에른이 계속해서 추격했으나 후반기 맞대결에서 3대1로 충격적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국 바이에른은 시즌 종료 후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과 결별을 선언하며 그의 시대도 조용히 끝나고 말았다. 뒷모습이 쓸쓸했지만 몰락해가던 팀을 화려하게 부활시킨데다 다시 한번 바이에른을 유럽 대항전의 강호로 만든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지도력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바이에른 홈팬들도 그간의 우승행진과 영광스러웠던 업적을 칭송하며 34라운드 경기 시작전 치러진 고별식에서 기립박수와 히츠펠트를 지지하는 문구들로 그에게 화답했다. 지금까지도 오트마르 히츠펠트는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뽑힌다.
7 펠릭스 마가트의 집권과 역사스만 시대
오트마르 히츠펠트가 물러난 후 후임 감독은 '마가트 유치원' 스쿼드 구축으로 VfB 슈투트가르트의 리가 준우승을 이끈 펠릭스 마가트. 그는 바이에른 감독 부임 후 2004 - 2005, 2005 - 2006시즌을 연속해서 더블로 우승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독일 클럽 사상 최초의 연속 더블 우승이기도 하다.
마가트가 욕먹는 이유는 2006 - 2007시즌 워낙 죽을 쒀서 그렇지 처음부터 바이에른을 말아먹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2005 - 2006 시즌의 우승은 2011 - 2012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경신하기 전까진 최다 승점 우승이었다.[10][11] 하지만 독재자 타입의 감독인 데다 선수들에게 혹독한 체력 훈련을 감행했고, 워낙에 특이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선수단과 마찰도 많았고, 결과적으로 바이에른의 UEFA 컵행을 이끈 흑역사로 남았다. 실제로 마가트의 별명은 사담 마가트 (마가트+사담 후세인), 크밸릭스 (Quälix)[12] (이름 Felix와 괴롭히다 라는 뜻을 지닌 quälen의 합성어)였다.
또한 이 시기 유럽대항전에서의 활약은 매우 저조했는데, 이제 막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투자가 시작된 첼시를 만나 합계 5 - 6로 패한 것도 있고, 당시 바이에른의 천적인 AC 밀란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만나기도 한 게 원인이었지만, 어쨌든 바이에른의 위상과 맞지 않게 조기 탈락이 이어졌다. 2001 - 2002 시즌 4강 진출 이후 거의 10년간 8강 이상을 뚫지 못하는 부진이 이어졌다.
2005/06 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은 1972년부터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정든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을 떠나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도시 북쪽에 새로 준공한 66,000석의 알리안츠 아레나로 자리를 옮긴다 (추후 69,000석, 71,000석으로 좌석이 확대된다.). 최첨단 시설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기장 외벽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이 경기장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스포츠 경기장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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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피지컬과 조직력을 앞세워 2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던 바이에른의 주축들. 좌로부터 하산 살리하미지치, 미하엘 발락, 클라우디오 피사로, 로이 마카이, 그리고 뒤에 있는 제 호베르투.
그리고 이어진 2006 - 2007 시즌에는 슈투트가르트, 베르더 브레멘 등의 팀들한테 크게 패배하면서 순위는 두자리 수까지 크게 내려갔고, 결국 펠릭스 마가트는 2007년 1월 31일 경질되었다. 팀의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급히 부임해 온 후임으로 1999년부터 2003까지 바이에른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던 오트마르 히츠펠트가 부임했다.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바이에른 뮌헨은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라울 곤살레스, 데이비드 베컴, 뤼트 판 니스텔로이등이 포진하고 '우승 청부사'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피 말리는 혈투 끝에 홈에서 로이 마카이가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최단시간 골인 10.5초만에 골을 기록하며 원정 다득점으로 꺾고 올라가고, 8강에서 천적 AC 밀란을 만나 치룬 1차전 원정경기에서도 2-2 무승부를 기록하여 기대감이 높아져 갔으나 홈에서 2-0으로 떡실신하며 탈락했고, [13] 분데스리가에서도 결국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얻지 못하고 4위로 쳐지며 UEFA 컵에 나가게되는 수모를 겪게된다.
2007 - 2008 시즌 다시금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지휘 아래 슈투트가르트에게 뺏긴 우승컵을 되찾기 위해 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 프랑크 리베리등을 영입하는 분노의 영입 시즌 1을 보여주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분데스리가 / DFB - 포칼에서 더블을 기록하며 체면치레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통산 20회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차기 시즌부터 엠블럼 위에 별 4개를 달 자격이 생겼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 엠블럼 위의 별 4개는 이때부터 달기 시작했던 것이다.[14] 그러나 헤타페전 극장 경기 끝에 극적으로 4강에 진출했던 UEFA 컵에서도 4강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니 트레블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바이에른 뮌헨의 상징적인 선수들이던 주장 올리버 칸과 메멧 숄이 은퇴했다.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도 눈물의 은퇴식을 가지는 등 많은 정신적 지주들이 떠났다.
위르겐 클린스만이 지휘봉을 잡은 2008 - 2009 시즌에는 말 그대로 '역사스만 시대'라고 불리는 암흑기가 계속되었다. 그라피테 - 에딘 제코 - 미시모비치 삼각 편대를 앞세운 볼프스부르크에게 홈에서 5 - 1로 대패하는 등 철저히 밀리면서 시즌 내내 단 한번도 리가 선두를 달리지 못하는 부진의 연속이 이어졌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번번히 대기권으로 날아가는 공격진의 슈팅, 처참하게 실패한 유망주 수비진등 총체적 난국이 이어진데다, 올리버 칸 은퇴 후 생긴 골키퍼진의 구멍도 미하엘 렌징의 계속된 삽질이 반복되어 더욱 위태로워만 보였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 리그를 1위로 돌파한데다 16강에서는 스포르팅 리스본을 원정에서 5 - 0, 홈에서 7 - 1 로 대파하여 도합 12 - 1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격파하며 8강에 진출했으나, 주전 수비 3명이 부상당한채 렐 - 브레누 등 유망주와 하락세가 뚜렷하던 오또를 긴급 투입시켜 치른 8강에서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에게 원정에서 4 - 0 으로 대패하는 등 처참한 패배를 당하며 합계 5 - 1로 탈락한다.[15] 게다가 분데스리가에서도 UEFA 컵으로 떨어지는 4위로 쳐지자 결국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경질을 결정한다.
천만 다행으로 시즌 막판 후임으로 임시 감독에 부임한 유프 하인케스가 잔여 경기들에서 승리를 거둬주며 그나마 분데스리가 2위를 이끌며 차기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직행에 성공했지만 시즌은 무관으로 끝났다.
8 루이스 반 할 시대 (Louis Van Gaal)
8.1 2009-10시즌
루이스 반 할 감독이 부임한 2009 - 2010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볼프스부르크에게 빼앗긴 우승컵을 되찾아오기 위해 아르옌 로번, 마리오 고메스등을 대거로 지르는 등 2007 - 2008 시즌 때에 이어 분노의 영입 시즌 2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우승을 기록하고, 분데스리가와 DFB - 포칼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한다. 같은 더치 커넥션이었던 마르크 반 봄멜에게 주장완장을 맡길 정도로[16] 신임했던 루이스 반 할은 마르크 반 봄멜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 라인 구성에 로베리라 불리는 세계 최강의 황금 날개를 만들어냈고, 유스 출신인 토마스 뮐러의 1 - 2선을 오가는 활용의 극대화, 홀거 바트슈투버, 디에고 콘텐토등의 발굴을 통해 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애매함으로만 남았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앙미드필더로의 보직 변경은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황이 좋은건 아니었다. 시즌 초반엔 리그에서나 챔스에서나 인테르로 간 루시우,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이르다면 이른 나이에 은퇴한 윌리 사뇰 등의 공백으로 꽤 부진하여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샀으나 아르옌 로벤과 프랑크 리베리 없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4 - 1로 꺾는 쾌거를 올리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물론 우승 레이스를 펼치던 샬케 04와 베르더 브레멘이 바이에른 뮌헨이 진 라운드에서 함께 패해주는 등 운이 따라주기도 했으나, 결국 전반기를 4위로 마쳤음에도 역전에 성공하여 마지막 라운드에서 샬케 04를 승점 4점차로 제치고 22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했고, DFB-포칼 결승전에서도 베르더 브레멘을 4 - 0으로 누르며 더블에 성공했다.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아르옌 로벤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발리골.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승승장구 하는 것까진 아니었던게 ACF 피오렌티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는 말 그대로 탈락 직전까지 가는 위기 속에서 아르옌 로벤의 환상적인 두 방[17] 으로 원정 다득점으로 승리해 두 경기 다 4 - 4 무승부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4강에 진출했고, 4강에서 올림피크 리옹을 이비차 올리치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격파하고 2000 - 2001 시즌 이후 9년만에 결승에 진출하게된다.
비록 결승전에서는 인테르의 디에고 밀리토에게 멀티골을 헌납하며 2 - 0으로 완패했지만 불완전한 스쿼드로[18] 국내 리그 더블에 UEFA 챔피언스 리그까지 기록한 것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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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샬레를 들어올리는 주장 마크 반 봄멜
8.2 2010-11시즌
2010 - 2011 시즌 초반부에는 꽤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나마 차츰 마리오 고메즈의 좋은 활약과 돌아온 프랑크 리베리덕에 안정세를 되찾고 있지만, 리그 절반이 진행된 17 라운드에는 5위를 달성했다. 1위인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승점 차이는 14점이나 되기에... 루이스 반 할 감독은 잘해봐야 2위가 될 것 같다는 인터뷰까지 하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선수층이 굉장히 얇아서 샬케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바이에른 뮌헨이 충분히 우승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결국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승했다. 더불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선 전번 대회 결승에서 맞붙은 인테르와 16강전을 벌이게 되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호펜하임에서 미드필더 루이스 구스타부를 영입함으로서 미들진이 강화되었다.[19]그러나 가장 중요한 센터백과 풀백진은 여전히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필립 람을 빼면 수비진은 정말 처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영입을 못하는 이유는 루이스 반 할 감독이 본래 유스 출신 선수들을 많이 중용하는 성향이기에 그런 것도 있으며, 동시에 저번 시즌에 마리오 고메즈와 아르옌 로번을 사올 때의 지출이 커서도 있다.
어쨌건 당장 유명한 선수를 영입하기보다는 유망한 선수를 육성하는 것이 바이에른 뮌헨의 방침이다.
로베리 라인은 그야말로 가공한 파괴력을 보였으나 계속해서 수비진이 흔들리고 패배를 거듭하면서 루이스 반 할 감독은 시즌 종료와 동시에 계약 해지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후 안드리스 욘커 (Andries Jonker)가 임시 감독이 되었고, 시즌 종료 시 1980년대 말에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을 맡았던 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가 다시 감독이 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떨어질 줄 알았던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고 결국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전에서 원정 1차전에서 1 - 0으로 이겨놓고,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신나게 전반 내내 밀어붙이다가 2 - 1로 앞서던 후반 경미한 부상으로 이유로 아르옌 로번을 뺐다. 그리고 지친 프랑크 리베리를 빼지 않았다. 그러더니 동점 골과 역전 골을 허용하면서 2 - 3으로 역전패.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원정에서 이기고, 홈에서 져서 떨어진 팀이 되었다 교체 미스 및 수비진 붕괴를 두고 루이스 반 할 감독은 욕을 바가지로 먹는 중. 결국 올 시즌까지만 감독직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승점 줄타기하듯 위태 위태한 상황에서 한 때 3위를 탈환했으나 결국 다시 어이없이 패배하고 4위로 떨어지자, 결국 시즌 끝나고 결별하기로 한 방침보다 바로 경질하였다. 후임은 일단 수석 코치가 감독대항을 하는 것으로. 우승은 사실상 물 건너갔고, 관건은 UEFA 챔피언스 리그 티켓이 걸린 3위 자리를 탈환하는가가 되었다.
팀 부진의 원흉이 루이스 반 할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루이스 반 할이 짤리자마자 4월 16일 경기에서 리그 2위 바이어 레버쿠젠 상대로 5 - 1 완승을 거두었다. 일단 좀 동 떨어졌던 선수들의 기용과 포지션이 안정을 찾았다. 아르옌 로벤이 복귀하면 다시 벤치로 밀리겠지만 어쨌든 루이스 반 할 체제에서는 절대 나올 일 없던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선발로 복귀해 미로슬라프 클로제 - 마리오 고메즈 투 톱을 이루고, 제니트 우승 당시 월드 클래스 수미로 추앙받던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드디어 수비형 미드필더로 복귀해 펄펄 날았다. 골키퍼도 토마스 크라프트에서 한스 외르그 부트로 주전이 바뀌었다. 결국 UEFA 챔피언스 리그 티켓 (정확하게는 3차 예선) 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8.2.1 극과 극으로 갈리는 평가
루이스 반 할 감독 재임시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펠릭스 마가트 시절과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때의 말로처럼 마지막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잃을뻔 했고, 수비진 영입이나 수비전술 개선에는 전혀 노력하지 않고 아르옌 로벤과 프랑크 리베리의 파괴력에만 의존했다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많은 유스들의 포텐을 터지게 한데다 잉여 자원이 될뻔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재발견[20], 토털 풋볼의 재조명 등 많은 전술 변화를 시도하며 공격 루트를 개척해 이후 바이에른의 유럽 정상권으로의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특히 4 - 4 - 2, 4 - 1 - 3 - 2 위주의 투톱 전형에서 이후의 강력한 중원장악을 바탕으로 한 토털 풋볼과 포제션 풋볼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4 - 2 - 3 - 1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것은 반 할때였고, 이것을 유프 하인케스 감독을 거치면서 수비적인 부분에서의 안정화와 부분전술의 보완이 이루어졌다. 즉,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볼배급에서 나오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수 전환에 이은 강력한 양쪽 측면 (윙과 풀백) 을 이용한 공격 → 공격진의 받아먹기라는 매커니즘을 확립하며 추후 바이에른 전술의 밑바탕을 깔았던 것이다. 루이스 반 할 감독이 훈련할 때 패스 연습을 아주 중요시했는데, 심지어 수비수들에게 수비 연습을 시키지 않고 패스 연습만 시켜서 불만을 샀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결국은 후에 황금기를 맞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또한 토마스 뮐러, 홀거 바트슈투버, 디에고 콘텐토 등 유스 출신 스타들을 대거 발굴해낸것도 루이스 반 할이었다. 특히 토마스 뮐러의 발견은 향후 바이에른에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보물을 안겨준 것이나 다름 없는 업적이다. 토마스 크라프트, 브레누 같은 실패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토마스 뮐러와 홀거 바트슈투버의 발굴은 다른 실패 사례들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공이 있지만 과도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인 수비 부분을 살펴보자면, 루시우가 떠난 후 다니엘 반 바이텐과 마르틴 데미첼리스 라는 주력이 느린 센터백들을 기용했던 것은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에 큰 문제를 불러왔다.[21] 게다가 이들의 서브조차도 전무한 덕분에 거의 모든 경기를 출장했다는게 더 신기했지만,[22] 일단 2009 - 2010시즌에는 결과론적으로는 더블 우승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수비진이 구멍을 보이긴 했으나 준우승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어 일단 바로 물갈이는 면했다. 게다가 2009 - 2010 시즌의 마르틴 데미첼리스는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상대 공격수를 깔끔히 지워버리는 등 건재함을 보여줬고, 다니엘 반 바이텐은 2009 - 2010 한 시즌에만 무려 9골이나 기록했을 정도 의 뛰어난 세트피스 가담력을 보여주며 바이에른 뮌헨의 주요 득점 자원으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문제점은 2010 - 2011 시즌에는 한술 더 떠서 3골 먹히면 4골 넣어서 이긴다고 할 정도로 다른 부분에서의 보완은 이뤄졌지만 수비진은 루이스 구스타부의 영입 외에는 전혀 개선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9 팀 하인케스 (Jupp Heynckes)
준우승 콩트레블을 경험하고 바로 그 다음 시즌에 트레블을 이루다
암흑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2010 - 2011시즌 종료 직전,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돌풍을 이끌던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영입 확정 오피셜이 떴다. 이미 유프 하인케스는 1988년부터 4시즌 동안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며 2회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고, 2008 - 2009 시즌 팀이 다시한번 유로파 리그로 떨어질 위기에서 임시 감독으로 부임해 2위로 끌어올린 경험이 있는 명장이며, 바이에른 뮌헨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올리버 칸의 은퇴 후 고질적인 골키퍼 문제를 2010 - 2011 시즌 신들린 선방을 보여주던 마누엘 노이어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유럽 명문 구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영입하는데에 성공하면서 해결했고, 수비진의 잔혹사도 제롬 보아텡과 하피냐라는 검증된 자원의 영입으로 해결했다. 2011 - 2012 시즌부터 시작된 바이에른 뮌헨의 부활은 신입생들의 활약도 분명 한몫했다.
9.1 2011-12시즌
개막전이었던 8월 8일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한 홈 개막전에서 0 - 1로 패했다. 시종일관 두드려대다 뻥 걷어찬 공중볼을 신입생인 제롬 보아텡과 마누엘 노이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엉키며 한 골을 실점하고 패배한다. 참고로 묀헨글라트바흐가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바이에른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통산 3번도 안된다고 한다.
2라운드에선 추가시간에 터진 루이스 구스타부의 골로 1 - 0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3라운드에선 함부르크 SV를 상대로 5 - 0 완승을 거두며 프리 시즌 리가 토탈컵에서 패한 굴욕을 되갚았다.
그리고 2011 - 201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조 편성 추첨에선 맨체스터 시티와 비야레알, 나폴리와 맞붙게 되었다. 죽음의 조라며 말이 많았으나[23] 1, 2차전에서 비야레알과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각각 2 - 0 의 완승을 거두며 4득점 0실점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보여주었다.
리그에서는 더욱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막전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을 제외하면 11경기 무실점 행진을 이어나갔으며, 21득점 1실점이라는 굉장한 성적을 내고 있다. 마누엘 노이어는 무려 1000분 넘는 무실점 기록을 기록했다. 프랑크 리베리, 아르옌 로벤,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마리오 고메즈 등이 모두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득점했다. 수비진에서는 홀거 바트슈투버와 새로 영입한 제롬 보아텡, 필립 람, 마누엘 노이어 등이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나폴리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3번째 경기에서 결국 홀거 바트슈투버의 자책골을 먹으며 시즌 통틀어 2번째 실점을 당했다.
바로 다음 경기인 하노버와의 경기에서는 pk로 한 골을 먹고 퇴장까지 당한 상태에서 슛이 몇 번이나 골대를 막고 나오거나 골키퍼나 수비수의 선방에 막히는 등 10:11 상태에서도 대등한 경기를 하다 쐐기골을 먹고 2대1로 패배했다.[24] 다비드 알라바가 만회골까진 성공했지만 역전을 하지는 못했다.
전반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어느새 부활해서 돌아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맹추격을 받았지만 승점 3점을 앞선 상태에서 전반기를 끝냈다.
다득점 1위 최소실점 1위로 다득점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10점을 앞선 상태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에서 4위로 탈락하며 유로파 리그마저 출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하는 바이에른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맹추격을 받을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결국 시즌 후반기 첫 라운드에 패배를 당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 또 다시 패배하며 이것이 현실화 되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후반기 초반에 급 상승세를 이어간데 반해 바이에른 뮌헨은 삐끄덕거리며 UEFA 챔피언스 리그가 다시 시작하기 한참 전인 2월 5일에 함부르크 원정에서 1:1 무승부에 그치며 선두 자리를 내주어버렸다. 도르트문트가 연승을 달릴 때 뮌헨은 22라운드 프라이부르크 원정에서 0:0 무승부. 24라운드 레버쿠젠 원정에서 0:2로 패하며 도르트문트와 승점이 7점 차로 벌어져 도르트문트가 남은 10경기를 삽질하지 않는한 리그 우승도 힘든 상태까지 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여러 경기를 비기는 덕분에 28차전까지 승점 3점차로 크게 좁혀졌다. 골 득실에서 앞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면 리그 1위로 올라설 수 있었으나 0 - 1로 패하면서 6점차가 되었고 31차전 마인츠와의 안방 경기를 득점없이 비기면서 8점으로 벌어져서 리그 우승이 사실상 좌절되었다. 남은 3경기를 죄다 이기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3경기에서 도르트문트가 3경기 다 지던가 1무 2패를 거두면 극적인 역전 우승이 가능하지만 강등된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느긋한 경기를 남겨둔 도르트문트가 이제 1승만 거두면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리가 경쟁은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결국 분데스리가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승하면서 2위로 마치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FC 바젤 원정경기에선 0 - 1로 패배했다. 이 시기 여기저기 이길 경기인데 지거나 비기거나 하며 삐그덕거렸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전 바로 전 리그 경기인 호펜하임전에서 양 측면만 냅다 파는 전술을 중앙도 적극 활용하는 전술로 일신하며 7 - 0 대승을 거두었고, 2차전 안방 경기에선 바젤을 7 - 0으로 꺾으며[25] 8강에 진출했다.
8강 추첨 결과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가 뽑혔는데 1차전 원정경기에서 2 - 0 승리를 거둬서 4강 행에 청신호가 들어왔다. 경고가 한 장 붙어있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도 카드 세탁에 성공했따. 이어진 2차전 홈에서도 이비카 올리치의 멀티골에 힘입어 2 - 0 으로 이겨 4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4강 상대는 유럽 대항전 최대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와의 일전이었다. 1차전 홈경기에서 프랑크 리베리의 강력한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었으나 후반 초반 메수트 외질의 동점골로 1 - 1, 그 후 홈에서 승리를 따내려는 바이에른의 엄청난 파상공세를 마드리드가 어떻게든 틀어막는 양상으로 흘러갔고, 경기 막판 필립 람이 파비우 코엔트랑을 제치고 크로스를 올렸고 마리오 고메스가 극적인 결승골로 연결하며 2 - 1로 승리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서 극강[26] 인 모습을 이어 갔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킥을 막아내는 마누엘 노이어
승부차기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
마누엘 노이어, 홈에서의 결승행을 이끌다![27]
그리고 이케르 카시야스와 마누엘 노이어의 선방 대결이었던 2차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리뉴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면서 2010년 결승에서 주제 무리뉴가 이끌던 인테르에게 패하여 우승이 좌절된 설욕을 했다.[28] 합계 점수 3 - 3 동률인 상황에서 돌입한 승부차기에서 마누엘 노이어가 레알 마드리드의 두 발롱도르 수상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카카의 킥을 연달아 막아버리며 분위기를 올렸고, 이케르 카시야스 역시 토니 크로스와 필립 람의 슛을 쳐내며 과연 그의 클래스가 어느정도인지 보여줬으나 세르히오 라모스가 힘 조절에 실패하여 공을 골대 위로 크게 날려버리며 을 날리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고, 5번 키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결승행을 확정지었다! 이 승부차기로 마누엘 노이어는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한편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개최되기 일주일 전에 치러진 2012년 5월 12일 DFB - 포칼 결승에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2 - 5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그쳐야했다. 리가에 이어 포칼마저도 준우승. 적어도 빅 이어를 들어올려야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상대는 FC 바르셀로나를 극적으로 따돌리고 올라온 첼시 FC. 이 경기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30개가 넘는 슈팅을 퍼부으며 그야말로 경기를 압도했으나 마지막 결정력이 2% 부족했던데다 페트르 체흐의 선방쇼까지 겹치며 계속해서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83분, 토니 크로스의 크로스를 토마스 뮐러가 원 바운드 헤딩으로 연결해 선제골을 넣으며 우승이 눈앞에 다가온듯 했다. 그러나 5분 뒤 첼시에게 내 준 첫 번째 코너킥에서 디디에 드록바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경기는 연장전으로 갔다. 연장에서 프랑크 리베리가 만들어낸 페널티 킥을 만들어내어 마침내 우승하나 했지만... 아르옌 로벤이 실축했다.[29] 결국 승부차기로 돌입했고, 바이에른 뮌헨의 필립 람, 마리오 고메즈, 마누엘 노이어가 성공한 반면, 첼시는 1번 키커 후안 마타의 킥이 마누엘 노이어에게 막혔기에 양 팀의 3번 키커가 모두 찬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이 3 - 2 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비차 올리치가 실축하고 애쉴리 콜이 성공시키며 다시 원점으로 돌렸고, 5번 키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실축하며... 알리안츠 아레나는 고요해졌다. 결국 드록바가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하며 바이에른 뮌헨은 홈에서 주어진 절호의 우승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승부차기에서 패배한 이후 좌절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30]
이렇게 한 시즌에만 준우승을 3번하며 트리플 러너업에 등극하고 말았다. 이보다 10년전에는 바이어 04 레버쿠젠이 트리플 러너업을 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이 날 백업 골키퍼였던 한스 외르크 부트는 두차례 트리플 러너업을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마리오 고메즈는 소속팀 트리플 러너업에다가 분데스리가와 DFB - 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 2위로 한 시즌에 2위를 무려 6번이나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시즌이 끝나고 펼쳐진 유로 2012에서 독일이 4강에서 탈락해서 유로 준우승이 날라갔지만 페르난도 토레스가 결승전에서 1골 1도움을 하여 유로 2012에서까지 득점 2위가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마리오 고메즈는 2012년에 무려 7번의 2위를 경험했다.
그 러 나
9.2 2012-13시즌
파일:Attachment/FC 바이에른 뮌헨/Deutscher Meister.jpg
클럽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시즌
바이언 팬이고 아니고를 막론하고 누구나 하인케스 은퇴 직전의 뮌헨이 역대급 포스였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새 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은 여러 선수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꾸준히 활약해준 이비차 올리치를 자유 계약으로 떠나 보냈고, 한스 외르그 부트는 은퇴했다. 우사미 타카시와 브레누는 계약 만료로 결별했다.
그리고 유로 2012의 스타인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와 묀헨글라트바흐 돌풍의 일원인 센터백 단테를 영입했다. 또한 지난 시즌 이미 영입을 확정 지었던 세르단 샤키리가 합류했고 과거 바이에른 선수였던 클라우디오 피사로, 그밖에 90년생 이하의 여러 유망주를 영입했다. 이렇게 해서 팀의 1990년생 이하만 토니 크로스를 포함해 6명이 되었다.
시즌 개막전에 마리오 고메즈의 발목 부상이 발견되어 수술에 들어갔다. 꽤나 긴 기간을 결장하게 되어 팬들은 놀랐지만, 백업 역할로 마리오 만주키치를 영입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마리오 고메즈가 마리오 만주키치에게 완전히 주전 자리를 내줄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시즌 개막전 펼쳐진 DFL-슈퍼컵[31] 에서 있었던 데어 클라시커 더비에서 부상으로 결장하는 마리오 고메즈 대신 마리오 만주키치가 출전했는데, 1득점 1도움의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뤘다. 더군다나 이 경기는 세르단 샤키리, 단테 등 신입생들이 많이 출전한 경기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즌 대패를 면치 못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2 - 1로 승리했기 때문에 팬들의 기대감은 상당히 고조되었다.
그리고 분데스리가 개막. 1라운드는 비교적 손쉬운 승격팀인 퓌르트와의 경기. 예상 대로 토마스 뮐러 - 마리오 만주키치 - 아르옌 로벤의 연속 골로 3 - 0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여름 이적 시장 내내 이슈를 들여왔던 이적이 끝을 맺었다. 이적 시장이 종료되기 이틀 전인 8월 29일, 하비 마르티네스의 영입이 발표되었다. 이적료는 4000만 유로[32] 로, 바이에른 뮌헨 최고 이적료와 더불어 분데스리가 최고 이적료이다. 세르단 샤키리, 단테, 마리오 만주키치, 클라우디오 피사로에 하비 마르티네스까지 저번 시즌에 분노한 바이에른 뮌헨이 오랜만에 분노의 영입을 진행했다. 하비 마르티네스가 영입됨으로 인해서 부상 때문에 불안 불안하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걱정도 덜게 되었고 센터백도 볼수 있는 자원이기에[33] 제롬 보아텡의 기복있는 수비 역시 걱정 없게 되었다. 한 선수의 여러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2012 - 20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식에서는 발렌시아 C.F., 릴 OSC, 벨라루스의 바테 보리소프와 한 조가 되었다.
2라운드,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경기였다. 어렵지 않게 승리를 예측한 경기였으나 초반에 슈투트가르트 쪽에서 먼저 멋진 발리슛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 골은 바이에른의 부활을 알리는 축포가 되었으니... 그 뒤 바로 이어진 토마스 뮐러의 자기가 찬 공 다시 차 넣는(...) 골로 1 - 1, 1분 후 토니 크로스의 중거리 슛으로 2 - 1, 그 뒤 중원에서 누비던 루이스 구스타부가 자신의 인생 골로 기록될만한 중거리 감아차기로 3 - 1 을 만들었다. 후반에는 토마스 뮐러의 공을 마리오 만주키치가 받고 이어서 4 - 1, 골키퍼 손 맞고 뜬 공을 토마스 뮐러가 헤딩으로 밀어넣어 5 - 1 을 만들었고, 토마스 뮐러의 크로스를 받아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헤딩으로 연결해 최종 스코어 6 - 1을 기록하며 화려한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경기는 하비 마르티네스의 출전 여부에 상당히 관심이 주목되던 경기였는데, 후반 76분에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대신 교체 투입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리 뛰어난 활약은 없었다. 토마스 뮐러와 마리오 만주키치는 3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으며 토마스 뮐러는 3 골과 3 어시스트를 달리며 분데스리가 득점 순위와 도움 순위에서 모두 1위를 달렸다.
3라운드는 마인츠전. 선수 모두가 지난 시즌과는 달리 향상된 경기력을 뽐냈고 2분만에 토마스 뮐러의 택배 땅볼 크로스를 마리오 만주키치가 받아먹어 선제 골을 기록했다. 마리오 만주키치는 슈퍼 컵을 포함해 4경기 연속골을 달성하는 위엄을 세웠다. 그 후 홀거 바트슈투버의 왼발 크로스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헤딩으로 꽂아 넣어 추가골을 기록했으나, 후반 15분경 단테의 백 태클로 페널티킥이 선언되어 만회 골을 허락했다. 경기가 끝나갈때 쯤 세르단 샤키리 대신 하비 마르티네스가 출전했고 마리오 만주키치 대신 클라우디오 피사로가 출전했다. 허나 클라우디오 피사로는 많은 골 찬스를 날렸다. 결국 경기 끝나기 직전 하비 마르티네스의 크로스를 받은 토니 크로스가 환상적인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시키면서 한 골을 추가하여 3 - 1로 승리하였다. 하비 마르티네스는 첫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였다.
리그 경기가 끝나고 UEFA 챔피언스 리그가 개막하였는데 같은 조의 강력한 2위 후보라고 여겨지고 있는 발렌시아와 경기를 하게 되었다. 리그에서 푹 쉬었던 아르옌 로벤과 프랑크 리베리가 투입되었고 루이스 구스타부 대신 하비 마르티네스가 선발 출장했다. 언제나처럼 노련하게 경기를 진행하다가 프랑크 리베리 - 아르옌 로벤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로 이어지는 멋진 패스 플레이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첫 골이 터졌다. 후반전에도 역시 65 : 35의 점유율을 가져가며 홀거 바트슈투버의 패스를 받은 토니 크로스가 추가골을 넣으며 압승을 예고했으나, 세트피스 상황에서 터진 발데스의 헤딩골로 실점을 하고 말았다. 지난 시즌부터 여러번 지적되는 마누엘 노이어의 세트피스 상황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34] 경기 끝나기 전 경기 내내 불안 불안한 플레이를 보이던 클라우디오 피사로 대신 투입된 마리오 만주키치가 로벤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찼으나 실축했고, 최종 점수 2 - 1로 승리했다. 경기력에서 앞선 경기에 비해 뭔가 찜찜한 결과였다.
4라운드 FC 샬케 04 원정경기. 지난 시즌 전반기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함께 3파전을 이루던 샬케이기도 하고 이브라힘 아펠라이를 비롯해 네덜란드의 거물급 선수들이 포진된 샬케이기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포지션을 보자면 프랑크 리베리가 빠지고 토마스 뮐러가 선발로 들어왔다. 앞선 경기에서 큰 활약을 보인 마리오 만주키치가 이번에는 그닥 활약을 하지 못했고, 전반전에는 양 팀이 지극히 수비적인 운영을 보였다. 그러나 후반 10분, 토마스 뮐러의 센스 있는 스루 패스가 토니 크로스에게 이어져 능숙하게 바이에른이 첫 골을 뽑아냈다. 그 후 3분 후 토마스 뮐러가 환상적인 드리블 이후 골을 터트렸다. 프랑크 리베리의 빈 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경기 내용이었다. 그리고 후반 25분에 다소 부진한 마리오 만주키치 대신 하비 마르티네스가 들어가 토마스 뮐러가 원톱에 서고, 아르옌 로벤 - 하비 마르티네스 - 토니 크로스의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아틀레틱 빌바오에서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는 소화해본적이 그닥 해본적이 없기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스트라이커 바로 뒤의 뛰어난 수비력 (...) 을 뽐냈다. 그 후 지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대신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들어가며 경기 굳히기에 나섰고 클라스 얀 훈텔라르 등 선수들이 맹공격에 나섰지만 득점을 내지 못하고 2 - 0으로 종료되었다.. 토니 크로스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 포함 4경기 연속골 (분데스리가 3골, UEFA 챔피언스 리그 1골)을 달리고 있고, 토마스 뮐러는 현재 4경기 4골로 마리오 만주키치를 제치고 단독 득점 선두에 올라섰다.
그리고 경악스러운 10월 3일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전 바테 보리소프 원정 경기, 아무리 원정이지만 조 최약체로 평가되었던 바테에게 1 - 3으로 완패당했다! 바이에른은 마리오 만주키치, 프랑크 리베리,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하비 마르티네스, 단테, 필립 람 같은 핵심 선수들이 모두 선발 출격, 볼 소유권도 지배했다. 그러나 바테의 고르부노프 골키퍼의 선방을 넘지 못했으며 3골을 실점하는 굴욕 속에 추가 시간에서야 리베리가 1골을 만회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릴 OSC 원정에서 3 - 1 대승을 이끌 때 이변이라고 여기던 바테가 바이에른도 잡을 줄은 누가 예상했을까. 참고로 바테는 이전 챔피언스 리그에서 무승을 달리던 팀이었고 릴을 이긴 게 역사상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승리였던 팀이다.
이런 패배에 대한 설욕인지 8전 전승을 달렸으나 9차전 바이엘 레버쿠젠과의 안방경기에서 운도 지지리도 없는 경기끝에[35] 1 - 2로 패하며 시즌 첫 분데스리가 패배를 당했다. 그래도 10차전 쉽지않은 함부르크 원정에서 3 - 0으로 이기면서 승점 27점으로 계속해서 리가 1위 자리를 지켰다. 2위인 프랑크푸르트와 승점차는 7점을 유지했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 리그 4차전 릴과의 안방경기에서 필립 람의 3개 도움에 힘입어 6 - 1로 크게 이기면서 3승 1패로 역시 1위로 올라섰다.
11월 20일에 있었던 발렌시아 (3승 1패) 원정 경기에서 1 - 1 무승부를 거뒀으며, 12월 5일 안방 경기에서 바테 보리소프에 4 - 1로 승리를 거두면서 1위로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16강전 상대는 바로 아스날 FC.
11월 24일 13차전 하노버 96과의 홈경기에서 5 - 0 대승을 거뒀다. 13라운드까지 기준으로 11승 1무 1패 승점 34 점에 38득점과 5실점으로 득실이 33점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2위인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는 승점 9점 차이를 유지했다.
이후에 2승 2무를 보태며 전반기까지 13승 3무 1패 44득점 7실점이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2013년 2월 17일에는 분데스리가 2위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승점차는 15점으로 벌어졌다. 22경기 18승 3무 1패, 분데스리가에서 당당히 승점 100점을 향해 나아갔다[36] 게다가 11월 24일부터 2월 17일까지 약 석 달동안의 리그경기 10경기에서 겨우 2실점, 5경기 연속 무실점을 달성했다. 뿐만아니라 리그 25경기에서 10실점, 특히 원정 경기 10경기에 1실점을 기록중이다.
사실상 리가 우승을 확정 지었다. 26차전까지 치룬 2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승점 차가 무려 17점이라서 바이에른 뮌헨이 연패를 하지 않는한 역전은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25차전까지 겨우 1패 (21승 3무) 인 바이에른 뮌헨이 그럴 일은 없어 보였고, 실제로도 그런 일은 없었다.
2013년 2월 20일 아스날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1차전에서 아스날을 3 - 1 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이 경기는 아스날의 홈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벌어졌다. 전반에 토니 크로스의 환상적인 발리 슛과 토마스 뮐러의 코너킥 상황에서의 골로 일찌감치 앞서나갔으며 아스날은 슈팅 2개밖에 때리지 못할 정도로 부진했다. 그나마 후반에는 정신적으로 무장한 아스날이 맹공을 퍼붓고 바이에른 뮌헨이 조금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며 루카스 포돌스키에게 만회골을 먹혔지만 이 날 월드 클래스 풀백의 모습을 보여준 필립 람의 크로스를 받은 마리오 만주키치의 원더골[37] 로 3 - 1로 다시 차이를 벌리고 그대로 경기 종료. 후반전에 잠시 밀린 것은 아쉬웠지만 전체적으로 분데스리가 1위다운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크 리베리, 제롬 보아텡,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결장이 컸는지 2차전에선 홈에서 0 - 2로 패했지만 원정 다득점 규칙으로 8강에 진출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8강전 상대는 유벤투스.
DFB - 포칼 8강에서 성사된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데어 클라시커 더비 전인 전 경기 16강에서 구자철과의 충돌로 퇴장 징계를 받은 팀의 핵심 프랑크 리베리가 결장했음에도 시종일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몰아붙이며 아르옌 로번의 결승골로 승리한다.
4강에서 만난 VfL 볼프스부르크도 인정사정없는 경기력으로 6 - 1로 대파했다.
더욱이 이 경기에서는 후반 교체해 들어온 마리오 고메즈가 단 6분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진기한 기록도 나왔다.
결국 DFB-포칼은 1라운드부터 4강까지 15득점 1실점, 전승으로 결승진출에 성공했다.
3월 30일 리가 홈경기에서 함부르크 SV를 9 - 2 라는 흠좀무한 스코어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4월 6일, 프랑크푸르트 원정에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환상적인 백힐슛이 결승골로 이어지면서 1 - 0 승리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28라운드만에 확정지은 우승으로, 이는 역대 분데스리가 최단기간 우승기록이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홈에서 2 - 0, 원정에서 2 - 0으로 종합 스코어 4 - 0 완승을 거두며, 2년 연속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했다.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 아르투로 비달 - 안드레아 피를로의 MVP 편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건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 하비 마르티네즈의 중원에서의 콤비도 역할이 컸지만, 홈 / 원정 모두 마리오 만주키치가 엄청난 활동량으로 수비 가담까지 담당하며 안드레아 피를로를 완전히 묶음으로 인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야말로 최전방 수비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2차전 토리노 원정에서 2 어시스트를 기록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추첨으로 4강에서 만난 상대는 끝판왕 FC 바르셀로나. 전 세계 축구 팬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4월 22일, 라이벌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핵심 선수이자 독일 최고의 유망주인 마리오 괴체의 영입을 발표했다.
파일:Attachment/FC 바이에른 뮌헨/1000889-16250755-640-360.jpg
자비는 없다. 합계 점수에서 무려 6 - 0 으로 앞섰는데도 계속 공격을 하며 결국 7 - 0 을 만든 토마스 뮐러의 추가골에 기뻐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
4월 23일,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벌어진 4강 1차전에서 4 - 0 이라는 큰 스코어차를 기록하며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그야말로 압승을 거두었다. 4년전 2008 - 2009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 캄프 누에서 당했던 0 - 4 대패를 완벽히 갚아준 경기이다. 심판의 판정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38] 하지만, 그러한 논란이 나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내용상 압도적으로 FC 바르셀로나를 찍어눌렀다. 바르셀로나가 4골차로 참패한 경기는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는 팬들의 반응은 이 경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2차전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축구의 패권이 넘어가는 상징적인 경기라는 평까지 나왔다. 근 5년간 FC 바르셀로나의 포스가 어느정도였는지, 그리고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포스가 어느정도인지를 나타내는 평을 받았다. 다만 이것이 FC 바르셀로나가 단순히 최강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일 뿐인지, 바이에른 뮌헨이 정말로 유럽 축구의 패권을 거머쥐는 것인지는 향후 몇 년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특히 2013 - 2014 시즌에서 바이에른이 과연 UEFA 챔피언스 리그 사상 최초의 2연패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에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39]
5월 2일 벌어진 캄프 누 원정 경기에서도 3 - 0 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합산 스코어 7 - 0 으로, 믿기지 않는 수준의 스코어였다.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아르옌 로벤이 환상적인 왼발 슈팅으로 선제 골을 넣었다. FC 바르셀로나는 5골이나 넣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바이에른 뮌헨의 안정적인 수비 라인 때문에 결정적 기회를 만들어 내지를 못했고, 되레 헤라르드 피케가 자책골을 넣었다.[40] 1차전과 2차전 모두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라 적당히 뛰어도 될 법했지만, 경기가 완전히 기운 마당에도 한 골을 더 추가하려고 바이에른 선수들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결국 토마스 뮐러가 또 다시 한 골을 추가하면서 바이에른 뮌헨의 자비심 없는 모습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4강전이었다.
이로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영국 축구의 심장부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데어 클라시커 더비로 치러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승한지 12년된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정상을 차지할 수 있을지, 또한 2010년에 아쉽게 실패한 트레블을 이번에야 말로 달성할 수 있을지 팬들은 기대를 모았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2주 전에 있었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전초전이었던 분데스리가 32라운드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후반전 경기가 굉장히 과열된 상황에서 하피냐가 퇴장 당할 때 양 팀이 몸 싸움 직전까지 갔으며, 위르겐 클롭과 마티아스 잠머 바이에른 뮌헨 단장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공교롭게도 마티아스 잠머 단장은 1990년대 중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전성기를 이끌고 감독으로써도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이다.
33라운드, 시즌 마지막 홈경기였던 FC 아우크스부르크전 홈경기에서 3 - 0 낙승을 거두며 홈 팬들과 바이에른 뮌헨의 23인의 레전드들의 축하 속에서[41] 마이스터 샬레를 들어올렸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2시즌 연속 빼앗겼던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3년만에 되찾아오는데 성공한 것.
분데스리가 시즌 마지막 경기인 34라운드, 그 까다롭다는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에서는 전반 11분만에 3골을 내준 상황에서도 프랑크 리베리의 환상적인 논스톱 발리슛을 포함한 2골 1도움 맹활약을 앞세워 4 - 3으로 끝끝내 역전해버렸다. 이로써 승점 90점 돌파, 91점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우며 분데스리가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5월 26일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개최되었다. 중세 전쟁을 형상화한 거대한 스케일의 오프닝을 시작으로 킥 오프 휘슬이 울렸고, 전반전은 득점은 없었으나 양 팀 골키퍼 스페셜이라 할만큼 슈퍼 세이브가 많이 나왔다. 오히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세를 점하여 바이에른을 상대로 엄청난 전방 압박을 통해서 경기를 자신들의 스타일로 끌고 나갔다. 그러나 후반이 되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컨디션이 올라온 바이에른 뮌헨이 공세를 시작했다. 후반 14분, 마리오 만주키치가 페널티 지역 오른쪽을 돌파한 아르옌 로벤이 골문 앞으로 올린 땅볼 크로스를 왼발로 차 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후반 22분, 단테가 마르코 로이스에게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반칙을 하며 페널티 킥을 내주었고, 일카이 귄도간이 이를 성공시키면서 경기는 동점이 된다. 그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파상공세를 이어 갔으나 로만 바이덴펠러의 환상적인 선방이 이어졌고, 또 네벤 수보티치의 역사에 남을만한 세이브[42] 를 기록하며 계속해서 찬스가 무산되었다. 하지만 후반 43분, 제롬 보아텡이 전방으로 넣어준 공을 프랑크 리베리가 힐 패스로 연결했고, 아르옌 로벤이 수비수 사이를 단숨에 돌파하며 센스 있는 슈팅으로 극적인 결승 골을 터트렸다. 결국 바이에른 뮌헨이 2 - 1 승리를 거두며 12년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5회 우승이었다, 레알 마드리드 (10회)와 AC밀란 (7회) 에 이어 우승 횟수 세 번째로 올라섰으며, 오랜 숙원을 이루어 낸 선수들은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설움이 북받쳐오른듯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특히 저번 시즌 트리플 러너업을 경험했던 선수들은 더욱 벅찼을 것이다.
UND HEUTE IST WIEDER EIN GUTER TAG / 그리고, 다시 한 번 좋은 날 ![43] |
결승골의 순간
파일:Attachment/FC 바이에른 뮌헨/ccccc.jpg
12년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6월 2일,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있었던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DFB-포칼 결승전에서 후반 20분이 넘기도전에 3 - 0으로 멀찌감찌 달아나며 거의 우승했다 싶을 찰나에 마틴 하르닉의 투혼의 두 골로 3 - 2까지 추격했으나 남은 시간동안 노련하게 잘 막아내며 우승에 성공, 셀틱 FC, AFC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바르셀로나, 인터 밀란에 이어 7번째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유프 하인케스가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은퇴하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은 2012 - 2013 시즌 중반 이미 펩 과르디올라와의 계약을 발표한 바 있다. 유프 하인케스 감독은 2012 - 2013 시즌을 마지막으로 연세와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했다.[44]
2012 - 2013 시즌 바이에른 뮌헨이 달성한 기록들
분데스리가
- 최다 승 (29승)
- 최다 승점 (91점)
- 최소 패 (1패)[45]
- 개막전 이후 최다 연승 (8연승)
- 최다 원정승 (15승)
- 최다 원정승점 (47점)
- 최소 원정패 (0패)
- 최소 실점 (18실점)
- 최다 득실차 (+80)
- 최다 승점차 우승 (25점)
- 최단기간 우승 (28 라운드에서 우승 확정)
- 최단기간 전반기 마이스터 (14 라운드)
컵 대회 (DFB - 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
- DFB-포칼 사상 최다 득점 우승 (18골)
- 포칼 사상 최단시간 해트트릭 (마리오 고메스, vs VfL 볼프스부르크, 6분[46] )
전체 시즌을 통틀어 54경기에서 단 3패, 50여 경기를 치르는 동안 득점은 무려 153골 을 기록했다.[47] 실점은 불과 31실점.
2013년 UEFA 슈퍼컵과 FIFA 클럽 월드컵마저 우승하며 5관왕을 달성했다
2012 - 2013 시즌 바이에른 뮌헨의 시즌 승률은 94%이며,[48] 이는 구기 종목 역사상 가장 높은 시즌 승률이다.[49]
10 팀 과르디올라 (Pep Guardiola)
10.1 2013-14시즌
- FC 바이에른 뮌헨/2013-14시즌 항목 참조
10.2 2014-15시즌
- FC 바이에른 뮌헨/2014-15시즌 항목 참조
10.3 2015-16시즌
- FC 바이에른 뮌헨/2015-16시즌 항목 참조
11 팀 카를로 안첼로티 (Carlo Ancelotti)
11.1 2016-17시즌
- FC 바이에른 뮌헨/2016-17시즌 항목 참조
- ↑ 따라서 바이에른 뮌헨은 강등당한 적은 없지만 1부 리그 개근 팀이 아니다.
- ↑ 위의 두 감독 모두 구 유고연방 (현재의 크로아티아) 사람이다.
- ↑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 ↑ 이 중에는 환상적인 로빙 슛도 포함된다.
- ↑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지역예선 당시 대한민국의 U-23 대표팀 총감독을 맡았으나, 스파르타식 훈련을 중시하는 김삼락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2회 연속 본선진출에 성공하고도 경질된 비운의 명장이다.
- ↑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한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 (5회 우승 기준, 3회 연속 우승 기준 충족), AFC 아약스 (3회 연속 우승 기준 충족), 바이에른 뮌헨 (5회 우승 기준, 3회 연속 우승 기준 충족), 리버풀 FC (5회 우승 기준 충족), AC 밀란 (5회 우승 기준 충족), FC 바르셀로나 (5회 우승 기준 충족) 이렇게 단 6개. 이 중에서 5회 우승과 3회 연속 우승 기준을 모두 충족한 팀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 뿐이다.
- ↑ 도르트문트와의 12-13 챔스 결승에서 갑옷입고 트로피를 들고 나오신 그 노신사분이 이분이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에서 수석 스카우터직을 맡고 계신다.
- ↑ 이 복수극은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에게 엄청난 인기를 안겨 주었다.
- ↑ 2000 - 2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팬들이 준비한 카드 섹션.
- ↑ 물론 1년만에 유프 하인케스의 뮌헨이 기록을 따라잡았다.
- ↑ 2005 - 2006 시즌 바이에른 뮌헨 : 83점, 2011 - 2012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84점, 2012 - 2013 시즌 바이에른 뮌헨 : 91점)
- ↑ 독일어 q는 u와 만났을 때 ㅋ 발음이 아닌 ㅋㅂ (kv) 발음을 낸다. 그래서 쾔릭스가 아닌 크밸릭스로 발음해야 한다.
- ↑ 1차전에서 판 봄멀이 경고누적을 당해 2차전에 출전하지 못한 것과, 전체적으로 미드필드진이 붕괴한 상태였던 것이 크다. 결국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를 크리스티안 렐이라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은 유망주 윙백으로 땜빵해야 했다.
- ↑ 공식 기록상 21회 우승이지만 엠블럼 위에 별을 달 수 있는 자격은 1963년 통합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기록만 계산하기 때문에 1932년의 우승은 합산되지 않는다.
- ↑ 이 패배는 2012 - 20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되갚아주기까지 꽤 긴 시간 바이에른 뮌헨 팬들을 괴롭히게 된다. 이 경기 전까지 바이에른 뮌헨은 압도적인 대 FC 바르셀로나 상대전적을 자랑했으나 이 경기에서의 4 - 0으로 2012 - 2013 시즌까지 모든 상대 전적이 물거품 취급 당하게 된다. 이게 전력 승부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바이에른 뮌헨 입장에서는 최악의 부상 트러블이 발생하며 그저 허물어지기만 했던 경기였다. 프랑크 리베리는 부상에서 복귀한지 2번째 경기, 루카 토니와 하밀 알틴톱은 부상에서 복귀한 첫 경기였다. 이들 말고 본격적인 부상자들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스티븐 제라드와 득점 공동 선두였던 미로슬라프 클로제, 교체 1순위이던 보로프스키 (막 부상 복귀해서 교체 명단에는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비라인이 붕괴했다. 필립 람 (명단에는 있었다.), 루시우, 다니엘 반 바이텐이 한 번에 부상 당하면서 그냥 생각해도 아뜩한 수비 라인 유망주들 렐과 브레누로 리오넬 메시를 막으라는 꼴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FC 바르셀로나 팬들이 이 4 - 0을 언급하며 바이에른 뮌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호언할 때 팬들은 그저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 ↑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부터 주장이긴 했다. 참고로 마르크 반 봄멜은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가운데 최초로 비 독일인이 주장을 맡은 것이다.
- ↑ 특히 아르옌 로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터트린 발리 슛은 그야말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에 남을만한 골이다.
- ↑ 특히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진은 매우 끔찍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다투는 강팀의 전력이라 보기엔 수비진이 매우 가관이었을 수준. 그리고 결승 당일은 프랑크 리베리가 퇴장 징계로 출장을 못하는 비극까지 있었다.
- ↑ 루이스 구스타부를 파는 데에 강한 반대의사를 비친 호펜하임의 랄프 랑닉 감독이 루이스 구스타부가 팔리니 사임을 하였을 정도이다.
- ↑ 이때 중미로 포변을 안했다면 지금처럼 정상급 미드필더가 되지 못했을것이다.
- ↑ 사실 루시우가 있었대도 과연 좋아졌을지는 의문의 영역인 게, 뮌헨이 비교적 안 좋던 시절 루시우는 육체능력이야 두 말할 여지가 없었지만 나는 앞으로 나갈 테니 뒤를 부탁한다 식의 플레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수비적 마인드라도 확실한 두 사람이 서 있는 거와 비교했을 때 난형난제였을 수도 있다.
- ↑ 홀거 바트슈트버와 아나톨리 티모슈크로 메울 수 있긴 했다. 허나 홀거 바트슈트버는 안 그래도 얇은 수비진 구멍 메꾸기 바빴고, 아나톨리 티모슈크의 본업은 수비형 미드필더.
- ↑ 그래도 많은 전문가들은 챔스 경험이 많은 바이에른 뮌헨의 조 1위를 예상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 ↑ 그 쐐기골도 그냥 놔두면 마누엘 노이어가 쉽게 막을걸 루이스 구스타부의 발에 맞으며 방향이 완전이 꺾여 들어가고 말았다.
- ↑ UEFA 챔피언스 리그 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 기록을 경신했다.
- ↑ 10전 9승 1무. 그야말로 무패다! 다만 이 기록은 2013 - 2014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다시 만나 홈에서 0 - 4 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하며 깨지게 되었다.
- ↑ 2011 - 201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승부차기에서 마누엘 노이어가 낀 장갑은 바이에른 뮌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문구는 그 전시된 장갑에 붙어 있는 수식이다.
- ↑ 흥미롭게도 1997 - 1998 시즌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7번째 빅 이어를 가져다 준 감독이 유프 하인케스였는데, 라 리가 성적 부진에 책임을 물어 경질되었었다. 이 경기로 유프 하인케스는 그를 내팽겨친 친정 팀에 비수를 꽂았다.
- ↑ 아르옌 로벤은 분데스리가 우승이 걸려있던 30 라운드 데어 클라시커에서도 페널티킥을 실축했기에 이 시즌에 엄청난 비난을 들어대며 사실상 이적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물론 지금은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
- ↑ 프란츠 베켄바워는 경기 이후 '선수들이 모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츙격에 빠져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 ↑ 분데스리가 우승팀과 DFB - 포칼 우승팀이 펼치는 경기. 지난 시즌은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더블을 했기때문에 2010 - 2011 시즌 DFB - 포칼 우승팀인 바이에른 뮌헨이 상대했다.
- ↑ 원래 세금 포함 46m이었으나 라 리가에서 6m를 내주었다. 이를 두고 스페인 축구 협회는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했으며 바이에른 뮌헨 또한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하비 마르티네스가 자신의 연봉을 깎아 이적료에 보탰다는 사실마저 밝혀지며 그야말로 아틀레틱 빌바오와 하비 마르티네스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 이적 직전의 시즌에서는 한 시즌 동안 센터백으로 뛰어서 라 리가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저 소화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센터백으로도,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월드 클래스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이다.
- ↑ 물론 대부분의 골키퍼가 세트피스 상황에서 노려지는 슛을 막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마누엘 노이어는 대부분의 실점이 세트피스 상황이라는게 더 돋보이기에 들리는 말.
- ↑ 필립 람의 허무한 실수로 선제골 실점, 그냥 놔두면 아웃일 시드니 샘의 부정확한 헤딩이 하필 앞에 있는 제롬 보아텡의 안면에 맞고 들어가 결승골 허용
- ↑ 분데스리가는 34경기 밖에 없기 때문에 전승을 해도 102점이다.
- ↑ 뒷 발 맞고 공중에 붕 뜨다가 골대 안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골.
- ↑ 바이에른 뮌헨의 3번째 골은 토마스 뮐러가 호르디 알바를 밀친 것이 파울로 인정되지 않는 오심논란이 있었지만...
- ↑ 결국 실패했다.
- ↑ 게다가 이 포즈가 분데스리가의 마크에 있는 인물의 슈팅 포즈와 닮아서 한 동안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라르드 피케는 경기전 인터뷰에서 "4 - 0으로 이기는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기적을 만들어내고 싶다" 며 동료들과 팬들을 격려하기도 했었는데, 자책골 직후 굉장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뒤에 수비수를 따돌리고 들어온 마리오 만주키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안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즉, 자책골 아니었어도 어차피 99% 골이었던 상황이다.
- ↑ 23번째 우승을 축하하며 바이에른 뮌헨 구단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레전드 23인을 초청했다.
- ↑ http://sports.news.naver.com/videoCenter/index.nhn?uCategory=wfootball&category=champs&listType=game&date=20130526&gameId=201305255003624251&teamCode=&playerId=&keyword=&id=48925&page=1
- ↑ 2012 - 20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팬들이 준비한 카드 섹션. 2000 - 2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팬들이 준비했던 바로 그 카드 섹션 (오늘은 역사를 쓰기 좋은 날) 을 오마주하여 준비한 카드 섹션이다.
- ↑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은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보드진 합류를 원했으나 유프 하인케스는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는 고향의 자택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있다. 가끔씩 인터뷰를 통해 바이에른 뮌헨에게 따끔한 조언을 하며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 ↑ 9 라운드 바이어 04 레버쿠젠에게 홈에서 기록한 패배가 유일한 분데스리가 패배.
- ↑ 오타가 아니다. 경기는 바이에른이 6-1 승리
- ↑ 이게 왜 엄청난 수치냐면 분데스리가는 38라운드까지 진행되는 EPL, 라 리가 등의 여타 빅 리그와는 달리 34라운드밖에 없고, FA컵인 DFB-포칼도 라리가는 홈 & 어웨이로 치르고, EPL은 리그 컵까지 병행하지만 독일은 오직 포칼밖에 없는데다 그것마저 단판 승부로 치러 경기 수가 상당히 적다. 150골이면 실로 엄청난 기록이다.
- ↑ 무승부를 0.5승 / 0.5패로 계산할 경우.
- ↑ 모든 구기 종목을 통틀어서 가장 압도적인 팀이라고 볼 수 있는 1995 - 1996 시즌의 시카고 불스와 동급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타 종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력차의 변별도가 그리 높지 않은 축구에서 이런 승률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