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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 모터스 No.20 | ||
이동국 (李同國 / Lee Dong-Gook)[1][2] | ||
생년월일 | 1979년 4월 29일 | |
국적 | 대한민국 | |
출신지 | 경상북도 포항시 | |
출신학교 | 포항제철동초-포항제철중-포철공고-위덕대 |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
신체조건 | 185cm, 76kg, A형 | |
가족 | 아내, 슬하 1남4녀 | |
종교 | 불교 | |
등번호 | 20번 | |
프로입단 | 1998년 포항 스틸러스 | |
소속팀 | 포항 스틸러스 (1998~1999,2002) 베르더 브레멘 (2000~2001/임대) 광주 상무 불사조 (2003~2005) 포항 스틸러스 (2005~2007) 미들즈브러 FC (2007~2008) 성남 일화 천마 (2008) 전북 현대 모터스 (2009~) | |
한국프로성적 | 423경기 186득점 66도움[4] | |
국가대표 | 103경기(6237분 출장) / 33득점 | |
청소년대표 | 40경기 / 28득점 |
2009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데닐손 | ||||||||||
MF 최태욱 | MF 기성용 | MF 김정우 | MF 에닝요 | ||||||||
DF 김상식 | DF 김형일 | DF 황재원 | DF 최효진 | ||||||||
GK 신화용 | |||||||||||
2011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데얀 | ||||||||||
MF 염기훈 | MF 윤빛가람 | MF 하대성 | MF 에닝요 | ||||||||
DF 박원재 | DF 곽태휘 | DF 조성환 | DF 최철순 | ||||||||
GK 김영광 | |||||||||||
2012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데얀 | ||||||||||
MF 몰리나 | MF 하대성 | MF 황진성 | MF 이근호 | ||||||||
DF 아디 | DF 정인환 | DF 곽태휘 | DF 김창수 | ||||||||
GK 김용대 | |||||||||||
2014 K리그 클래식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산토스 | ||||||||||
MF 임상협 | MF 고명진 | MF 이승기 | MF 한교원 | ||||||||
DF 홍철 | DF 윌킨슨 | DF 김주영 | DF 차두리 | ||||||||
GK 권순태 | |||||||||||
2015 K리그 클래식 베스트 일레븐 | |||||||||||
FW 이동국 | FW 아드리아노 | ||||||||||
MF 염기훈 | MF 이재성 | MF 권창훈 | MF 송진형 | ||||||||
DF 홍철 | DF 요니치 | DF 김기희 | DF 차두리 | ||||||||
GK 권순태 |
1998년 K리그 신인상 | |||||
신진원(대전 시티즌) | → | 이동국(포항 스틸러스) | → | 이성재(부천 SK 코끼리) | |
2009년 K리그 MVP | |||||
이운재(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김은중(제주 유나이티드) | |
2011년 K리그 MVP | |||||
김은중(제주 유나이티드)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데얀 다미아노비치(FC 서울) | |
2014, 2015년 K리그 클래식 MVP | |||||
김신욱(울산 현대)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미정 | |
2009년 K리그 득점왕 | |||||
두두(성남 일화 천마)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유병수(인천 유나이티드) | |
2011년 K리그 도움상 | |||||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몰리나(FC 서울) | |
2009년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상 | |||||
상 제정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 |
2011년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상 | |||||
구자철(제주 유나이티드)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데얀 다미아노비치(FC 서울) | |
2014, 2015년 K리그 팬타스틱 플레이어상 | |||||
김신욱(울산 현대)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미정 | |
2011년 AFC 챔피언스 리그 MVP | |||||
사샤 오그네노브스키(성남 일화 천마)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이근호(울산 현대) | |
2011년 AFC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 |||||
조세 모타(수원 삼성 블루윙즈) | → | 이동국(전북 현대 모터스) | → | 리카르도 올리베이라(알자지라) |
목차
1 개요
2016년 9월 13일 현재
- 189골, K리그 통산 득점 1위
- 66도움, K리그 통산 도움 4위
- 255개, K리그 통산 공격포인트 1위.
- 32골, ACL 통산 득점 1위
- 최소 297골 이상,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5]
- 10골, 아시안컵 통산 득점 2위, 한국 선수로는 1위
- 33골, 대한민국 A매치 통산 득점 3위
- 103경기, 대한민국에서 13번째로 센츄리 클럽 가입
발리의 제왕
각종 사건사고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나, K리그 최고의 슈퍼스타[6][7]이자 한국 축구의 레전드.[8]
그러나 꿈의 무대 월드컵에서만큼은 비운의 선수[9]
그리고 현재는 대박이 아빠
2 상세
2남 1녀 중 막내. 한국 축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 과거에는 이승엽과 같은 라이온 킹이 별명이었으나, 미들즈브러에서 크게 삽을 푼 다음부터는 영국에서 품바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지어주었다. 요새 국내에서는 품바라고는 하지 않지만 라이온 킹도 잘 쓰지 않는 편. 리동궈라고 부르는 사람은 간간이 있다. [10]
이동국 논쟁은 현재 박주영, 정성룡의 국대 합류 건과 더불어 한국축구의 가장 큰 떡밥거리로 동빠와 동까가 만날 때마다 대규모의 키워가 벌어지며, 국가대표 발탁 그 자체도 찬반여론이 들끊는 부분이다. 이 논쟁은 단순히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커뮤니티 뿐만이 아니라 비교적 온순한(?) 아이러브사커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국대 발탁 찬성론자의 경우에는 그 만한 골 결정력을 가진 공격수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고 클럽에서의 활약도 상당히 준수하기 때문에 뽑아야 하는 입장이고, 반대론자의 경우에는 뽑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는 입장. 다만 반대론자의 경우 단순히 이동국의 안티만이 아니라 전북 현대의 팬들도 어느 정도는 그의 차출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는데, 최강희 감독처럼 국대에서 욕 먹고 오느니, 그냥 클럽에 집중하자는 의견이나 나이가 많으니 몸을 생각해 클럽에 집중하자는 의견을 내세워 국대 차출을 반대하기도 한다.
3 클럽 경력
항목이 너무 길어져 분리하였다. 이동국/클럽 경력 참고
4 국가대표 경력
4.1 1998년의 혹사
뽀삐뽀삐
우월한 피지컬과 기술을 앞세워서 어린 나이 때부터 청대에 선발된다. 이미 1997년부터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대 상비군에 포함되고, 프로 1년차 19살의 나이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황선홍과 최용수에 밀려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5:0으로 패한 네덜란드전에 후반 교체출전하여 상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중거리슛과 헤딩슛을 날렸다. 둘 다 노골이었지만 일방적인 슈팅과 실점을 당하면서 공격까지 막힌 대한민국 상황에서, 어린 선수가 슈팅 2개를 날려주니 그나마 체한것이 내려간 기분이었다. 이동국을 전혀 몰랐던 일반 대중에게 몇 십분만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기세를 바탕으로 이 해 10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U-20 대회에 소집된다. 김은중과 투톱을 결성한 이동국은 6경기 출전 5골을 뽑으며 득점왕을 차지한다. 중국과의 경기에서 1골, 이라크에게 2골, 일본에게 2경기에서 2골을 뽑았다. 일본과는 두 경기를 치렀는데, 예선 경기에서 김은중과 이동국이 골을 뽑으며 2:1 승리, 결승전에서도 김은중과 이동국이 골을 뽑으며 2:1 승리를 차지했다. 특히 결승전에서 이동국의 터닝슛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며, 월드컵에서의 슈팅과 이 결승골을 바탕으로 이동국은 일약 국민적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11월, 이동국은 올림픽 대표팀으로 소집, 허정무 감독의 첫 경기인 카리브해 올스타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넣으며 확실하게 눈도장을 박는다.그리고 12년에 걸친 애증의 시간이 시작된다. 22일 한중 정기전 상하이 원정에서도 올대 자격으로 참가하나 중국의 순지하이와 리웨이펑의 분투로 0:0 무승부.
같은 해 12월에 열린 방콕 아시안 게임 예선은 김병지, 최용수, 유상철, 윤정환 등 호화멤버. 대회 기간 동안 최용수가 아시아를 짓밟는 위엄을 과시했으나 이동국은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최용수의 파트너 자리를 김은중에 넘겼다.[11]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홈팀 태국과의 8강전에서 한국은 연장혈전 끝에 패배하고 만다. 태국은 2명이나 퇴장을 당하는 결사방위 끝에 승리를 사수한다.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흑역사. 누가 좀 최용수 감독에게 인터뷰 좀 했으면.
4.2 1999년의 혹사
1999년 1월, 이동국은 올대에 소집된다. 사실 이 즈음 올대 국대를 겸임하던 허정무 감독이 각급 축구대표팀을 상시 소집해서 훈련시켜 팀의 경기력을 높이자는 건의를 했고 축구협회에서 수리를 하였다. 국대는 한 달마다 한 번씩, 올림픽 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씩 훈련하자는 계획이 수립되어서 쓸데없이 몸만 바쁜 나날이 이어질 것은 안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 때 올림픽대표를 초청해 열릴 던힐컵이라는 대회 및 본게임인 시드니 올림픽에 대비, 호주 전지훈련에 나섰고 이동국은 평가전에서 4경기 3골을 집어넣으며 주전 낙점을 받았다 한다.
2월 베트남에서 열린 던힐컵 경기는 날씨가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등 한국과는 정반대의 날씨를 자랑했다. 이동국은 중국을 2골 1어시로 농락, 말레이시아는 김도균, 최철우와 함께 1골 씩 터트리며 3:0 승리, 어시스트는 박진섭. 불가리아는 5:1로 우주에 보내주며 이란과의 4차전에 돌입, 이동국과 설기현이 보란 듯 1골씩을 터트리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허나 이 시기 포항은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예선 기간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이 빠지는 통에 3위로 조별예선을 탈락하고 만다.
던힐컵 결승상대는 지난 대회 우승팀인 중국, 1차전에서 2골 1어시로 짓밟았던 이동국을 맞아 중국은 소림축구의 심후한 내공을 선보인다. 소림 무공의 손속이 지독히도 잔인함에 격분한 이동국은 후반 초반, 당시 소림 사커의 선봉장 리웨이펑성님과 쌍방 팔꿈치를 교환하고 심판의 앞에서 동반 레드카드로 합의, 퇴장을 당한다. 경기는 연장전 최철우의 골든골로 1:0 마무리.[12]
이후 이동국은 잠깐 소속팀으로 복귀, 아챔 알바를 뛰고 이번에는 호주에 있는 청대에 합류해 1달간의 전지훈련에 참가한다. 절친 김은중도 함께였는데 이동국이 좀 심하긴 했지만 비시즌 기간 이딴 거 없기는 마찬가지라 둘 다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조영증 감독은 특별 훈련을 통해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자신한다.
4월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아시아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다. 조의 구성은 포르투갈, 우루과이, 말리, 한국.[13] 포르투갈 전에서엘리트 FM 선플 선생 히카르도 소사가 1골, 시망 사브로사가 2골을 넣으며 김용대가 지키는 한국 골문을 유린, 한국은 3:1로 패배한다. 우루과이전에선 3분 경 들어간 1골을 넘지 못하고 패배한다.[14] 조영증 감독은 신나게 두들기고도 골이 안 들어간 경기에 격앙, 유명세로 축구하지 말라 운운하며 이동국을 닦달한 후 해이해진 정신력 문제 및 칼을 갈던 서브에게 기회라는 명목 아래 이동국을 선발에서 제외하고 나희근, 서기복 등을 투입한다.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한 말리와의 마지막 경기, 한국은 설기현의 2골과 나희근의 PK로 앞서가나 후반 55분이 지나 3분 만에 말리의 연속골이 터지며 아프리카 리듬이 살아나자 조감독은 서기복과 나희근을 바로 빼버리고 이동국과 우진석을 투입한다. 그리고 경기는 70분에 이동국의 1골로 마무리, 4:2.
한편 예선에서 준우승했던 일본은 뻥글과 같은 조에 소속, 뻥글이 살신성인 3전 전패를 헌납한 끝에 4팀 중에 3팀이나 토너먼트에 진출해 준우승까지 차지한다. 이 대회 우승국은 훗날 유로와 월드컵까지 제패할 스페인.
포항은 2월, 이동국이 올대에 차출된 기간 동안 치러진 아챔에서 탈락한 것에 분개, 이동국이 나이지리아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모로코행 비행기에 태워 아시아 챔스 우승팀과 아프리카 챔스 우승팀이 붙는 경기인 아프로 아시안 클럽 챔피언쉽에 참가시킨다. 저저번 대회에서 성남이 통합 5:0으로 가볍게 컵을 따냈지만 포항은 저번 대회 이집트의 자말렉에게 원정골 득실로 패배했고, 올해도 이동국이 청대 때문에 불참했던 4월 11일의 홈경기에서 2:2로 비겼기에 독이 올라 있었다. 그래봤자 4월 25일 경기에서 패배하고 말지만...
언론은 이때까지도 대표팀 지상주의라, 이동국의 혹사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긴 있었으나 오히려 그 초점이 어긋나 있어, 갖은 돌림빵을 당하며 주전 스트라이커를 써먹지도 못하는 포항에게 너희들이 양보하고 이동국에게 휴식을 준 다음에 올림픽 대표팀에 양보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아챔 탈락하고 아프로-아시안컵도 날린 포항은 무슨 죄여...
이동국은 리그와 아프로-아시안컵 등 잠깐 소속팀 알바를 뛰고 나서 허정무 감독의 올대에 합류한다. 5월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 이동국은 25일 스리랑카, 27일 대만, 29일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 출전해서 6골 1어시를 작렬하며 뛰어난 양학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6월 2일 SK와의 경기를 시작으로 다시 소속팀으로 복귀한다.
10월 다시 올림픽 대표에 소집되었으나 이동국은 몸이 좋지 못해 평가전과 중국과의 1차전을 소화하지 못했으나 18일 바레인 원정에 교체되어 들어오자마자 1:0 경기의 결승골을 터트리고 29일 중국과의 2차전 원정경기에서도 선제골을 성공시키며 경기는 1:1 무승부를 거둔다.
이미 본선진출을 확정지은 한국은 11월 13일 바레인과의 경기에서도 SES와 군악대, 코요태를 초청하고 이미 시대사의 영역 고종수와 이동국을 노리는 여학생들을 무료입장을 시키는 등 축제분위기였다. 경기는 역전승, 3승 1무로 올림픽 본선 진출. 이동국은 조별예선에서 총 8골을 넣는다. 훌륭한 양학능력 과시.
12월, 이동국은 작년에도 그랬듯이 올해 역시 휴식기 비슷한 것도 부여받지 못한 채 올림픽대표팀의 국내 전지훈련에 참가한다. 휴가랍시고 며칠 정도 놀고, 올림픽 대표팀 멤버를 모아 금강산 관광이나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언론은 어린 선수의 혹사에 관심을 쏟기 보다는 올림픽 대표팀, 휴가도 반납하고 태릉에서 구슬땀 따위의 기사나 내보내며 혹사를 도리어 부추겼다.어째 서울 소재 모 야구구단 냄새가 나는데...
4.3 2000년의 혹사
2000년 밝자마자 이동국은 올림픽대표팀 자격으로 호주 4개국 친선대회에 참가하러 출국한다. 9일 이집트와의 경기는 설기현과 이관우의 골로 2:0, 12일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이동국, 설기현, 최철우의 골로 3:0, 15일 호주와의 경기는 이동국과 설기현의 골로 호주를 잡았다. 박지성이 막내이자 뉴페이스로 참가했으며 아직도 허정무가 박지성을 발굴했다고 회자되는 계기. 올대는 전훈장소를 뉴질랜드로 옮겨 21일, 23일 뉴질랜드와도 연습경기를 가졌다.
2월은 성인대표팀의 멤버가 되었다. 한국은 북중미 골드컵에 참가, 캐나다와 코스타리카와 한 조에 속했다. 첫 경기인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0-0으로 비기고, 코스타리카와의 두 번째 경기에서 이동국의 선제골로 한국은 1:0으로 리드를 잡으나 완초페의 동점골이 터진다. 이후 이민성의 중거리가 작렬하며 본선진출이 코앞이었으나 동점골이... D조의 3팀은 모두 3무이고 특히 캐나다와 한국은 득실차뿐 아니라 득점과 실점까지 모두 같은 상황, 한국은 동전던지기에 의해 고배를 마시고 그냥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동국의 무릎은 이때부터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잇따른 강행군 앞에서는 인간의 무릎이 버틸 수가 없는 법이다. 1년 새에 국대, 청대, 올대, 주요 예선 본선이 아닌 전지훈련, 시범경기, 시시한 국제컵대회, 클럽, 리그, 컵, 올스타전, 아챔, 아프로아시안컵, 아프리카, 유럽, 오세아니아, 중동, 동남아, 북미, 추웠다, 더웠다, 추웠다, 더웠다... 호날두도 이러지는 않는다.
결국 골드컵 대회 중에서는 무릎에 붕대를 감고 뛰었고 대회 기간이 끝나자 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끝내는 선진의료의 혜택을 받기 위해 독일로 날아가 재활을 하게 된다.
2000년 전반기는 골드컵 출전을 제외하고는 독일에서 재활, 이탈리아에서 페루자의 오퍼를 받아 돌아다니며 통짜로 날렸고, 7월부터는 다시 프로 무대에서 모습을 보이며 올대와 국대에서도 친선 경기 등 잡다한 경기에 출전한다.
8월에 이르자 9월 올림픽을 대비한 평가전이 한창이었고, 9월에는 본격적인 올림픽 무대가 열렸다. 당시 멤버 중 굵직한 멤버만 해도 김용대, 홍명보, 김상식, 이영표, 박지성[15], 송종국, 고종수, 이천수, 김도훈, 이동국 등이고 다른 멤버들도 당시 컨디션이 좋았으며 본프레레의 나이지리아를 평가전에서 5:1로 뽀개는 등 분위기도 좋았다.
그러나 수비핵심 홍명보가 부상으로 이탈함에 인해 수비 라인에는 큰 혼란이 일었다. 첫 게임 스페인전, 마르체나와 알벨다, 사비의 중원 라인 앞에 이천수와 고종수, 김도균 등 한국의 미드필더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당시 밀란에서 뛰던 호세 마리와 유명한 공격수들인 라울 타무도와 앙굴로 등에게 안드로메다행 열차를 타며 벨라마잔, 호세 마리, 사비에게 거의 10분 터울로 전반에만 3골을 내줬고 경기 양상은 더 처먹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무릎에 붕대를 감았던 이동국은 이 경기 후반 20분께에 교체출전했고, 허정무는 그 경기력에 만족하여 필승의 의지를 다지며 모로코전에 선발출전시킨다. 경기는 한국이 일방적으로 빨대 꼽고 빨다가 김도훈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이천수가 차고, 골키퍼에 막힌 것을 다시 이천수가 재차 차넣으며 1:0 승리한다. 이동국은 리드를 잡자 교체되었다.
다음 상대는 스페인을 3:1로 이긴 칠레. 이천수가 넘어진 상대의 얼굴을 발로 까면서 경기 초반부터 퇴장당하나역시 밀레니엄 특급! 이동국이 어떻게든 골을 우겨넣었다. 한국은 이후 결사방위 태세로 들어가며 1:0 승리를 따냈고 이동국은 풀타임을 뛸 몸상태가 아니었던 탓에 경기 중반에 교체.
한국은 2승 1패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나 모로코가 3전 전패 조공을 바치는 바람에 득실차로 탈락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스페인전 이후 한국축구 헛물만 들었다, 말만 잘한다며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고 칠레전에 이긴 후에도 왜 스페인전에 이런 투지를 발휘 못했냐고 비난했지만...사비 축구 앞에 투혼 발휘해 봤자 당시 스페인이 에투의 카메룬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고 칠레마저 동메달을 땄던 걸 생각해 보면 홍명보의 공백이나 이천수의 퇴장이 아쉬웠던 대회.
이후 10월 이동국은 국가대표에 소집, 두바이에 날아가 LG컵 4개국 친선대회에 출전한다. 5일, 선발출전했으나 아랍에미리트와의 경기에서는 1:0으로 지던 경기를 이영표의 골로 간신히 따라잡았으나 승부차기 끝에 패배, 7일, 호주와의 경기에도 선발출전해 2:0으로 지다 4:2로 지던 경기에서 마지막 4번째 쐐기골 성공하며 준우승을 거두고 본격적인 아시안컵 무대를 위해 레바논으로 건너간다.
아시안컵을 앞두고, 올림픽 8강 탈락 때문에 국대마저 경질 위기에 놓였던 허정무는 사퇴를 선언하는 실갱이 끝에 유임, 올림픽 8강의 한을 반드시 아시안컵 우승으로 풀겠다고 언플을 풀어놓는다.
10월 13일에 열렸던 중국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 이영표와 노정윤의 골에도 불구하고 홍명보가 억울하게 퇴장하고 PK를 받는 등 사우디 주심의 오심과 중국의 만리장성 축구를 뚫지 못해 2:2로 무승부. 이어지는 쿠웨이트와의 16일 경기는 소나기 슈팅을 퍼부었으나 1:0 패. 이로서 한국은 벼랑 끝에 몰리나 19일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이동국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조 3위 와일드카드로 8강에 올라간다. 결과적으로는 비기기만 했어도 올라갔지만 당시 상황상, 국민정서상 다득점이 필요했기에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 3위의 대가는 8강에서 저번 아시안컵에서 6:2로 개처럼 털렸던 이란과의 만남. 언론들은 저번 대회 한국전에서 홀로 4골을 처넣으며 바이에른 뮌헨 진출까지 한 알리 다에이를 두려워했다. 팀이 1:0으로 후달리게 되자 무릎 때문에 벤치에 있던 이동국은 교체를 자청했고 허정무도 승인한다. 후반 45분, 코너킥 상황에서 이동국의 슈팅을 이란 골키퍼가 간신히 막아낸 걸 김상식이 주워먹으며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하고 연장 9분 노정윤의 땅볼 크로스를 받아먹으며 이동국은 이란을 털어버리는 결승골을 작렬한다.
26일 벌어질 4강은 전대회 준우승팀 그리고 이번대회도 준우승할 팀 사우디와의 일전. 팀은 2:1로 패배했다. 이동국은 선발로 출장,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와중에 어떻게 어떻게 한 골을 집어넣었다.
29일 벌어질 3, 4위전은 중국과의 일전. 이번에는 무승부 이런 것도 없는 외나무다리 승부였고 여기서 진다면 허정무의 지도자 생활은 불보듯 뻔했다. 허정무는 이동국을 선발 투입했고 이동국은 어김없이 보란듯이 골을 넣는다. 경기는 1:0으로 끝나고 3위로 마무리한 대회에서 이동국은 6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 허정무는 온갖 비난을 뒤집어쓰며 국대 감독에서 내려간다.
훗날 허정무와 이동국이 이 사건에 대해서 술회하기를 허정무는 이동국이 뛸 수 있다고 해서 내보냈다, 이동국은 감독님께 뛸 수 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뭐 그러나저러나 이제 이동국의 무릎은 맛이 갔고 떨어진 스피드는 평생 돌아오지 않는다.
4.4 혹사에 대한 세평과 언론
이동국 인생정리. 다 필요없고 이거 하나로 이동국의 잔혹사를 볼 수 있다.
1998년에서 2000년까지 이동국의 대표 경기를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은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시기 청대와 올대의 경기를 대략적으로나마 남겼다. 둘째, 후진적이던 한국 축구의 행태를 얘기해야 한다. 셋째, 혹사당하는 와중에서도 언론과 여론이 어린 선수에게 어떤 대접을 했는지 잊혀지지 않도록 소개하기 위해서다. 넷째, 도대체 이동국이 국가대표에서 해준 것이 없다는 비난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진적 행태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당장 시드니 올림픽 때 홍명보 대신 선출된 강철만 해도 청대 올대 국대 돌림빵의 산증인이다. 이후로 이천수가 2002년 직후 '개사기유닛'으로 통하다가 2006년 이후 폼이 뚝 떨어졌고, 최근엔 지동원이 맛이 가서 한팀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이 새기들아 작작 좀 해라 애들 다 죽는다
첫째 둘째를XX 솔까 처음 찾아보면서도 이 정도라곤 예상을 못했는데 뭔 양파도 아닌게 까고 또 까도 경기가 계속 나오는 게 너무 길지만 오히려 남기지 않을 수가 없네. 얘기했으니 언론과 여론에 대한 취급을 논하자면, 이동국이 스타 취급을 받았던 건 두말하면 입아픈 얘기지만 스타에 안티 없기도 어렵고 이동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9년 초인 U-20 대회 시절부터 따라붙은 상투적인 비난문구는 실재 이동국의 경기 스타일과[16] 무관한 낙인을 찍어버린다. 게으른 천재라고.[17]
골잡이란 스피드와 피지컬로 문전을 유린하는 것이란 고정관념은, 사실상 1990년대 초반 축구지능으로 대표팀 No.1 공격수 자리를 차지한 황선홍의 등장으로 깨진[18] 상태였다. 하지만 언론은 서서히 변해가는 축구계의 흐름을 대변하기보다, 당장 대중의 입맛에 맞는 희생양을 만들어내 조지는(...) 손쉬운 길을 택했다. 그리고 제버릇 개 못준다고 이 구태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고, 오늘도 찌라시는 매의 눈을 번뜩이며 마녀사냥을 나선다[19]
혹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 치료를 위해 독일에 체류할 때 비난이 그 절정을 맞이한다. 페루자 진출의 실패가 계기였다. 성사나 다름없던 상황이라는 보도와 이동국의 설레발성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무릎 상태와 포항과의 트러블로 이적이 실패하고 언론이 친국내리그적, 스타 유출 방지 언플을 시도하자 이동국은 슬슬 온갖 욕을 처먹기 시작한다.
레퍼토리는 10년이 지난 지금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청대 조영증 감독이 일갈했듯 건방지다, 스타 의식에 차 있다, 국내용이다, 중앙에서 처박혀서 움직이지 않고 게으르다, 열심히 뛰지 않는다, 몸싸움을 싫어한다, 후반으로 가면 급격히 체력이 저하된다, 반사신경이 느리다, 개발이다 등으로 10년은 온갖 욕을 처먹는다. 국대에 승선하려고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며 언플도 많이 겸손해지고 실력이 더욱 일신한 2009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건방지다는 욕 하나는 사라졌으나, 득점왕 이후 뜬금없이 패스 안 한다는 새로운 레퍼토리로 욕을 먹었다. 결국 11년 도움 신기록을 세워버리자 이번엔 국내용, 아시아용이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혹사의 최전방에 서 있을 때 비난과 칭찬은 마치 밤과 낮이 오가듯 찾아왔다 물러났다를 반복했다. 예컨대, 불같은 비난을 받던 시드니 올림픽 기간, 마지막 경기 때 숫적열세에도 딛고도 이동국의 선제 결승골을 바탕으로 팀 전체가 결사항전 태세를 보임으로 탈락에도 불구하고 사함을 받았으나, 아시안컵 조별리그 때 부진하자 볼 것도 없었다. 스타플레이어의 숙명이라면 숙명일 수도 있겠지만.
이동국이 일시적으로나마 게으른 천재라는 세평을 불식하는 데 성공한 것은 길고도 혹독한 혹사의 일정을 끝을 아시안컵과 대회 득점왕으로 끝마치고 나서였다. 국내용이라는 낙인 또한 벗어던졌다대신 아시아용이라는 낙인 대회 기간 동안 거의 내내 붕대를 감고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 언론은 투혼에 집중하기보단 헐... 일본이 우승했네 헐... 쟤네 막 청대도 우승하고 준우승하고 막 그러던데 우리 이렇게 성적이 나쁘면 2002년에 개망신당하는 거 아냐 헐... 이런 수준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일정 속에 무릎을 망가트린 어린 스트라이커의 투혼이나 부상, 혹사에 대한 동정 혹은 염려는 찾기 어려웠다. 쑥쑥 커라 정도가 좋은 반응이었고 이제야 그나마 열심히 뛰는구나, 하지만 여전히 둔하네 등의 반응도 넘쳐났다.
이동국이 리그라면 몰라도 대표팀에서 달성한 업적이 뭐가 있냐는 견지에서 본다면, 사실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제대로 뛰어본 적도 없고, 각종 세계대회에서도 우승이나 준우승은 커녕 토너먼트까지 올라본 적이 없으며, 기껏해야 아시안컵 3위와 득점왕 정도를 이뤘을 뿐이다.
또 혹평들 역시 그 당시에는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성격이 약간 소심하고 내성적인 편이었는데다 젊은 나이라 멋대로 일정을 바꾼다거나, 스타 의식 소리가 나올 만한 일도 있긴 있었다.[20] 게다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정말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중앙에 쿡 처박혀서 공 오기만을 기다리는 경기도 꽤 있었다. 또 경기장 내에서도 경기가 안 풀리면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21]
그러나 조금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가 참여한 모든 팀-청대.올대.국대를 예선을 통과시키고 본선까지는 올렸으며, 세계대회에서는 우루과이나 스페인 같은 강호를 상대로 득실차니 동전던지기니까지 하는 곳까진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탈락은 탈락이지만.
4.5 2001년부터 현재까지
이렇게 국가를 위해 몸바치고 그 능력도 아시아를 떨쳐 울렸으니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한민국 국가대표 명단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졌다. 그러나 허정무 호의 졸전을 본 축협은 축구계 대표인사를 긴급 소집하며 회의에 들어가고 거스 히딩크가 한국 감독으로 선임된다.
널리 알려졌듯 히딩크는 2년 동안 온갖 선수들을 다 실험해 보며 선수들의 조합을 고심하고, 이동국은 혹사에선 벗어나지만 냉혹한 주전경쟁 앞에 서게 된다. 2002 골드컵에서도 이동국은 교체멤버로 뛰는 등 마지막까지 경쟁했으나 팀 엔트리 밸런스[22]와 전방에서부터 압박을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이행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된다. 이후 거의 폐인처럼 술을 마시며 생활했다고 하는데 그럴 만도 하다. 그동안 각급 대표팀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어린 나이에도 부상의 악령에 시달렸는데, 한국인이었으면 정에 끌려서 안 넣기가 어려웠고 이동국 자신으로서도 당연한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나이도 어렸다. 그때당시 인터뷰(02년말에서03년으로 추정됀다) 월드컵 기간중에 아침에 일어나서 소주를 한병 부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으며 월드컵기간이 죄수 생활같았다고 한다. 김남일 이월드컵 끝나고 한잔하러 갔을때 길에서 나뒹구는
동국이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는걸 생각하면 안습일 따름이다.
어쨌든 월드컵이 끝나고 이동국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주장을 맡아 출전. 그러나 4강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로 패해 탈락하는 바람에 결국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 군복무를 해야했다. 이때 승부차기를 실축했던 선수는 이영표였다.[23]
네티즌들은 이영표가 이동국을 군대 보내버렸다고 했고, 패배 후 이동국이 우는 사진엔 '엉엉 군대가기 시러~'하는 댓글을 달았다.
2004년 중국 아시안컵에서도 출전했다. 안정환과 투톱을 이뤘으며, 대한민국은 8강에서 이란과 피를 토하는 혈투 끝에 4:3으로 분패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이란에게 합계 4골을 넣어 득점 3위에 올랐다.
2004년 12월 이동국은 국가대표로써 독일을 3:1로 완파하고 올리버 칸까지 꼼짝 못하게 하는 발리슛으로 국내축구팬들에게 국민들에게 괴력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참고로 이 경기에서 한국이 독일을 이긴 경기는 단순한 친선경기가 아니었다. 독일 축구협회에서 추진한 독일 국가대표팀의 투어 행사의 일환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일본, 한국, 태국 등 아시아 지역의 대표팀들과 경기를 가지면서, 곧 열릴 예정인 2006 독일 월드컵과 자국 국가대표팀의 홍보를 꾀했던 것.[24] 일본과의 경기는 시차 적응 문제도 있고 해서 후보 선수들을 대거 내보낸 2군으로 3-0의 대승을 거뒀고, 한국과의 경기에서 비로소 분데스리가 주전 멤버들로 구성된 사실상의 최정예 멤버들을 내보냈건만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에게 골을 내줘 1:3으로 패배. 그나마 미하엘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기록해서 독일이 영패는 면했으며, 한편으로는 발락의 페널티킥을 막아내 2년 전 패배의 아픔을 복수한 이운재의 선방과 올리버 칸을 일순간 허수아비로 만든 이동국의 발리골이 경기의 묘미.
2004년 12월 부산 경기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올리버 칸까지 출전한 독일을 이동국의 발리슛으로 3:1로 완파하며 클린스만 감독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지금봐도 이동국의 괴력을 보여준 경기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A매치 33경기에서 14골 4도움을 터뜨리며 대한민국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끄는 에이스 역할을 했지만, K리그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또 한번 월드컵 출전이 좌절되었다. 당시 대표팀의 원톱으로 이동국 대신 뛰었던 조재진은 한국의 16강 진출이 좌절 된 뒤 '동국이 형만 있어도 달랐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당시 KTF가 이동국을 내레이션으로 섭외해 월드컵 광고를 내보냈는데 이로 인해 많은 동빠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카더라.
미들즈브러에서 부진을 보이던 2007년 당시는 이렇다할 공격수가 없던[25][26]아시안컵 대표팀에 발탁되었지만, 대표팀이 6경기에서 고작 3골을 넣는 총체적인 부진 속에서 이동국은 무득점을 기록. 또한 대회기간 도중 이운재, 우성용, 김상식과 함께 무단으로 숙소를 이탈하여 룸살롱에서 술을 마신 것이 들통나 국가대표 자격정지 1년, 대한축구협회 주관 경기 출장정지 2년을 처벌 받았다.[27]당시 부인은 임신중..남편은 출장가 룸살롱에...지못미
2009년부터 이근호의 급격한 부진 등으로 출전 기회가 늘어나 국가대표에서 점점 폼을 되찾기 시작하며 A매치 4경기에서 3골을 기록한 끝에 주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2010년 3월 4일 코트디부아르전에서는 수비수의 머리에 맞고 방향이 바뀐 크로스를 특기인 발리슛으로 자신 있게 성공시켜 기선을 제압. 2010년 5월 16일 있었던 에콰도르와의 친선경기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그 경기에서 허벅지 부상을 당해, 2~3주간 아웃. 그러나 결국 이근호를 제치고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남아공 월드컵 B조 조별예선 2경기 아르헨티나전에서 이미 골은 골대로 다 먹고 다른 선수들은 지쳐 뛰지도 못하는 안습한 후반 상황에 교체로 출전했다. 그리고 본인도 짧은 시간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이래저래 아쉬운 월드컵 복귀전이 되었다.
허정무 감독은 이동국이 나이지리아를 위해 준비된 카드라며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 선발 출장시키겠다고 밝혔다. 예전 같았으면 동빠와 동까 사이에서 키배가 벌어질 주제였겠지만, 염기훈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워낙 삽질을 한지라 부디 오염라인만 좀 빼주세요...라는 의견이 지배적.
하지만, 패배라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네티즌과 달리 대표팀 전술상 이동국을 기용하는 것은 아주 큰 모험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대표팀은 그간 박주영-염기훈 투톱체제를 고수했지만 실제 운용은 박주영이 원톱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해주고 염기훈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미드필더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아시아팀과의 경기와는 달리 한국이 공격적으로 나갈수 있는 팀은 단 하나도 없는 월드컵 본선을 맞아 나온 전술로 여기에 킹으로 써야 효율이 나오는 이동국을 쓰기는 힘들다. 염기훈이나 김남일의 기용에 대한 비판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주장으로 그 자체로 큰 실수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김남일 교체의 경우 공세를 취하는 상황에서 교체로 경기의 맥을 끊고 나이지리아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줬다는 측면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16강 우루과이전에는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박주영과 김재성이 전방 투톱으로 나왔다. 이동국은 후반 15분경 김재성과 교체투입 되어 빈자리를 찾아들어가며 나름대로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줬으며 1-2로 뒤진 후반 42분경 박지성의 절묘한 스루패스로 결정적인 일대일 찬스를 잡아냈다. 그리고 이동국의 슛은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어갔다. 동점골을 넣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28]
그러나 골키퍼의 몸에 맞고 힘을 잃은 공은 축축하게 젖은 그라운드에 달라붙어서 속도가 아주 느려졌고, 그야말로 달팽이 같이 느린 속도로 골라인을 향해서 기어갔다. 골라인을 단 수십센티미터 남겨놓고 우루과이 수비수가 걷어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천금같은 동점골 기회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이 그토록 회자되는 이동국 물회오리 슛이다.(...)
그리고 경기종료와 함께 동국대 갤러리는 폭발했다(...). 당연하지만, 부인 이수진씨의 미니홈피는 이동국의 헛발질로 찬스를 날리는 순간 빛보다 빠른 속도로 폐쇄되었다. 새벽 2시 33분 현재 4만명이 넘는 분노를 품은 네티즌들이 헛발질을 하고 돌아갔다.
당시 경기장 잔디상태는 월드컵 경기장치고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29] 하지만 공격수가 패널트킥보다 더 가까운 지점에서 동점골을 뽑아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경기장에서 월드컵 베스트 골에 들어갈만한 골을 성공시킨 수아레스도 있다. 다만 최선의 환경이 아니었다는 거지 골을 넣는게 불가능한 상황이란 말은 절대 아니다
수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아가며 힘들게 출전한 월드컵이었으나 아무 것도 하지 못한채 쓸쓸히 끝마친 것. 한 국가에서 손꼽히는 스트라이커가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한 경기는커녕 합쳐서도 45분 이상을 출장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는지 궁금할 정도다.
참고로 이동국은 이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어 '가장 오랜 기간동안 월드컵에 불참했다가 다시 나온 선수'라는 이색적인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1998년 ~ 2010년이였으니 이동국의 공백기간은 장장 12년. 월드컵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아직은 월드컵 출전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2011년 이후로는 국가대표 재발탁에 관해서 '후배들에게 더 기회가 갈 것'이라는 미온적인 태도만 보여주었다.
결국, 클럽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조광래 감독은 그를 차출시켰는데 당연히 K리그 팬들은 불만스러워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었다. 이동국 본인의 도전 의지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기도 하였고, 전북의 최강희 감독은 "더 이상 동국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으면 한다." 라며 국가 대표팀에 뽑지 말아 줄 것을 개인적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2011년 폴란드와의 평가전에서 전반 45분을 소화, UAE와의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에서는 후반 종반 교체투입되어 10분 남짓을 소화했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봤을 때 이동국은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폴란드 전에서는 박주영-이동국-지동원의 3톱이 가동되었는데, 박주영과 지동원의 측면이 살아나지 못하여 이동국이 고립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30] UAE전에선 뭘 보여줄 시간조차 부족.[31]
허나 분위기를 보면 예전과는 달리 이동국이 까이기보다는 조광래 감독이 까이고 있다. 이동국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뽑아 놓고 그냥 원톱 자리에 박아 넣기만 했다는 것. 물론 이동국은 역시 안 된다, 하는 식의 시선도 아예 없지는 않다. 안 뽑으니까 최강희감독을 필두로 극딜했잖아...?
두 차례 국가대표팀 경기에 대하여 이동국 본인은 말을 아꼈다. "입을 열면 말실수를 하게 될까봐."라는 것이 이유다. 안습
국가대표팀에서 조광래 감독이 삿포로 참사로 인해 경질되고 월드컵 최종예선까지 사령탑을 최강희 감독이 맡게 되자, 누구보다 이동국을 잘 아는 최강희 감독이니만큼 이동국의 활용 여부도 역시 주목되었는데 12년 2월 2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평가전에서 2골, 2월 29일 쿠웨이트와 월드컵 3차 예선에서 전반전이 0-0으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자 은퇴하는 안정환에게 갈굼을 좀 먹고 난 뒤 후반전이 1골을 기록하면서 한국을 최종예선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포탈 댓글에는 역시 동까 지분이 더 높았다.
이어 최종예선 3차전 우즈베키스탄전에서 역전골을, 호주와의 평가전에서 선제골을 넣었지만, 두 경기 모두 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다. 안습.
카타르전에서는 특기인 발리슈팅으로 손흥민이 줏어먹기 극장골을 넣는데 도움을 줬고, 그전에도 인상적인 헤딩경합, 움직임등을 보여 주었다, 막판 손흥민이 극장골을 넣은 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의 짧은 시간동안 손흥민이 만들어준 기회를 하나 날렸다고 그동안 답답했던 대표팀의 경기를 뒤바꾼 활약(한 외신에서도 '이동국이 들어온 후 경기분위기를 가져왔다.'라는 인상적인 평을 남겼다. 실제로 이동국에게 높은 평점을 줬다.)은 사실상 없는 취급이 되었다.
레바논 전에서는 근래 들어 최악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김치우의 득점골 이전에 레바논의 수문장인 하산 골키퍼가 그야말로 체흐로 빙의해버렸고 수차례 찾아온 결정적인 득점 기회들을 모두 무산시켜 버렸다. 그 기회들 중 적어도 하나만 성공시켰어도 경기가 그렇게까지 어렵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움직임이 좋아도 골을 못 넣는 공격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만 이동국 외에 레바논전에 투입된 공격자원인 김보경, 김신욱, 이근호, 이청용, 손흥민 전원이 최소한 한 번 이상 키퍼와 단독으로 마주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도 단 한명도 이를 살리지 못하고 모조리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오죽했으면 당시 중계를 맡았던 허정무 해설위원이 '뭐에 씌인 것 같다'며 할말을 못찾았을 정도.
이란전에서는 상대선수와 몸싸움 경합하면서 코피까지 흘리며 4명의 공격수를 가동한 시스템하에서 연결고리를 맡고 헤딩을 따주는 등 여러모로 열심히 뛰었으나 슈팅기회조차 한 번 찾아오지 않으며 아쉽게 경기가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 3연전으로 이동국에 대한 비난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동국은 현재 대표팀 최고령 공격수이고 결정력으로 이름이 높은 만큼 결정을 지을 때 지어줘야 했으나 짓지 못했다. 또한 K리그 득점왕으로 리그의 명예라는 간판을 짊어지고 있는 점도 고려해야 하니 비난을 받을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에게 가해지는 비난이 부당한 건 사실이다. 세계 1류급 공격수조차도, 파투, 토레스, 즐라탄, 2010년 월드컵의 야쿠부처럼 우리집 할머니라도 넣을 것 같은 골을 놓칠 수 있다. 골을 놓친 것에 대한 비난은 그 장면으로 끝나야지 결코 그 장면 하나만으로 그 선수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승패는 병가지상사고, 경기는 또 다음이 있다. 물론 4년에 한 번씩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축구 보면 다음이 좀 멀긴 하겠지만 귀신처럼 첼시에서 골을 놓치던 토레스도 바르샤를 무너트리는 결승골을 작렬했고, 탐욕을 부리면서도 PK를 비롯한 결정적 기회를 여러 차례 놓치며 뮌헨과 네덜란드의 결승전 패퇴를 몇 차례 가져 왔던 로벤도 2012/2013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비록 이동국이 이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도 역시 기본적인 기량과 다음 경기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동국을 절대 다음 경기에서 보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그라운드에 출장해서 숨만 쉬거나 공만 잡아도 갖은 인격모독을 비롯한 비난이 도를 넘어선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단적으로, 주전급으로 출장한 대회에서 6경기 동안 1골이라는 기록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저조한 기록이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클러치 능력이 없다느니, 나이만 먹고 경기만 많이 뛰었지 국대에 기여한 게 없다느니 등으로 이어지는 게 정당한 비난은 아니다.다시 한번 말하면 3연전에서 넣었어야 할 기회를 마무리하지 못했으며, 국대의 고참으로 선수들의 구심점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등 아주 부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선수 본인도 받아드려야 마땅하나, 사실을 곡해하고 도를 넘어 이동국 선수의 친지들에게까지 인격적인 모욕을 퍼붓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이동국에게 향하는 비난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전 세대부터 이어왔고, 지금까지도 끊지 못한 이 악습을 이후로도 끊지 못한다면 손흥민과 같이 이동국보다 더 많은 다음 경기가 남아있는 젊은 선수들에게도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1994년 황선홍과 마찬가지로 그저 대한민국 대표팀 공격수란 까임의 최전방, 오직 씹히기 위해 존재하는 자리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중. 그리고 그 영광스런 자리는 6월 11일 우즈베키스탄전에 선발출전한 손흥민이 이어받았다(...)
다만 이동국 본인은 국가대표팀에서 느끼는 부담감이 상당한 듯 하다.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 2013년 6월 30일에 경남과의 경기에서 두경기 연속 멀티골을 작렬한 이후 인터뷰에서 국대와 전북에서의 활약이 다른 이유로 심리적인 부분을 꼽았을 만큼 국대에서는 부담을 상당히 느끼는듯 하다. 전북에서는 자기 말고도 해결해줄 사람이 많아 편안한데 비해 국가대표팀에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뛴다는 점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2013년 7월 쓸데없이 인생을 낭비하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한 선수의 뒷담화 파문이 일어나면서 그래도 이동국은 국대 마크의 무게감을 아는 마지막 세대다라는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2013년 7월 8일 인터뷰에서는 월드컵 예선 이후의 까임에 대해서 나는 원래 비난을 많이 받는 선수니까, 내가 방패막이가 되어서 동료들이 비난을 덜 받으면 더 좋은 것 아닌가?라고 답했다. 생불
홍명보호 출범 이후에는 김신욱, 김동섭, 조동건, 서동현 등 K리그의 젊은 공격수들이 우선 선발되며 국대와 멀어진 모양새다. 다만 김신욱 말고는 전부 다 욕만 먹었고 활약이 변변찮아서 국대에서 다시 보기 힘들거라는 의견이 많다.
결국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엔트리에서 짤렸다. 이로서 이동국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선수로 남게 되었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는 막내로 엔트리에 들어가서 네덜란드전에서만 활약했으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거스 히딩크의 눈 밖에 나서 엔트리에 포함되는 데에 실패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때는 엔트리엔 뽑혔지만 대회를 앞두고 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또다시 퇴출당했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때야 겨우 월드컵 비행기를 타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달랑 2경기 교체투입이 전부였다. 결국 이동국의 국가대표 출전시간 총합은 고작 51분에 불과했으며 이는 한경기 출장시간조차 되지 않는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가 개최될 때 이동국의 나이는 40살. 이미 끝났다.# 이는 운이 나쁘기로 악명높은 에르난 크레스포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이다. 적어도 크레스포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8강 독일전과 조별리그 네덜란드전 이외의 3경기에서 풀타임으로 그라운드를 누비기라도 했다. 또한 크레스포는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며 이로 인하여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는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뒤를 이어 실버슈를 수상하기까지 했다. 결국 2006년의 부상이 안타깝게 되었다.
2014년 8월 26일, 9월에 있을 평가전에 대비해 국대에 승선했다.
9월 5일 베네수엘라전, 후반 7분 김민우의 코너킥을 수비를 슬그머니 떼어놓은 뒤에 여유로운 위치에서 그대로 헤딩골을 연결하여 역전골을 만들고 후반 18분엔 이명주의 크로스가 수비머리에 맞고 떨어지자 마자 침착하게 오른발 슈팅으로 추가골까지 기록했다. 특히 두번째 골을 자세히 보면 크로스가 떠오를 때 수비 둘과 붙었다가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상대 골대로 몰리는 수비를 먼저 보내고 수비 머리 맞고 덜어진 공을 여느 공격수와는 다르게 낮은 바운드로 떨어질때 지체 없이 슈팅을 날려 골을 연결 하여 클래스를 보여줬다.
9월 8일 우루과이전에서는 당시 월드베스트 수비로 꼽히던 디에고 고딘에게 완전히 틀어막혔다. 전반전에 수비적으로 팀을 운영하자 스피드가 느린 이동국은 연계에 집중해야할 상황이 되었다. 본인 나름대로는 연계플레이를 했지만, 제대로 연결된 볼은 별로 없었다. 결국 이근호와 교체되며 역시 어느정도 이상 수준에서는 침묵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다만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이 내려오기 보다는 전방에서 싸워주는 플레이를 지시했다고 한다.
변함없는 리그에서의 맹활약으로 2015 아시안 컵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거라 예상되었다. 박주영은 새 팀에서도 여전히 부진한 데다, 김신욱마저도 아시안 게임에서 부상으로 시즌 아웃당해 아시안 컵 합류가 거의 불가능 이었기 때문에 뽑을 만한 공격수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시즌 말에 당한 부상 때문에 이동국도 아시안 컵 합류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졌고, 제주 전지 훈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 하더니 결국 아시안 컵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 했다. 게다가 슈틸리케 감독이 발탁한 이정협이 예상외의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이동국을 찾는 목소리도 많이 수그러들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호주 아시안컵이 마지막 메이저 대회라고 볼 수 있는데 그마저도 운이 안 따라줬다.
슈틸리케 감독이 2018년 월드컵을 대비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일부 고참만 남겨두고[32] 젊은 선수들 위주로 팀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기에 다음 월드컵때 40세가 되는 이동국의 국가대표 선발은 어려워 보인다.[33]
5 대표팀 공격수들과 호흡
많은 입축구 전문가들이 막연한 이미지만 갖고 원톱만 가능한 공격수 운운하지만, 이동국이 한참 대표팀 붙박이이이던 초창기 시절 대세는 당연히 투톱이었고 이동국도 소속팀에서나 국대에서나 투톱으로 뛰었다. 그렇다고 원톱을 아예 뛴 적이 없던 것 정도도 아니고 원톱으로 더 긴 세월을 뛰긴 뛰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동국의 플레이 특성상 적성 포지션은 처진 공격수지만 국제 대회에 데려갈만한 공격수 가운데 몸빵이 되고 짬이 쌓인 지금은 사실 원톱 전문이고 투톱도 가능함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황선홍 은퇴 이후 대표팀의 스트라이커를 꼽아보자면 제일 먼저 안정환이 있다.[34]이 시기는 코엘류와 본 프레레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축구의 혼란기였다. 또한 안정환 역시 최전방 바로 밑에 위치시켜야 진가가 나오는 공격수이다 보니 계속 동선이 겹처서 안정환-이동국 투톱은 본 프레레 시절 잠깐 시험해보고 금방 폐기해버렸다. 사실 이 때는 안정환과 이동국 선수 개인들의 부딪침도 있고 대표팀 상황 자체가 공격수에게 잘 보급해주지 못하는 개판이라서... "아유, 진짜..." 사실 이 때부터 조짐이 보였다.[35]
김은중과는 연령별 대표팀에서 많이 뛰었는데 서로가 몸싸움이 되며 센스도 좋았기에 서로를 잘 이용하였고, 이 투톱의 활약덕에 대한민국은 1998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다. 다만 이 때를 제외하면 공식적인 경기에서 서로 투톱을 서본 적이 거의 없기에 진정한 꿈의 투톱이다. 현재도 김은중과는 매우 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이마발이란 1979년생/1998년 청소년 대표 모임에선 이 둘이 항상 투톱을 본다.
박주영이 어린 시절에는 몇 경기 같이 뛰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맞는 듯했다. 당시 박주영은 몸빵이 전혀 되지 않는 전형적인 날카로운 움직임을 장기로 삼는 처진 공격수였고, 전방에서 몸빵으로 비벼줄 수 있는 이동국과 적당히 잘 맞았다.
최강희호에서는 박주영과 이동국 투톱이 줄곧 선보이고 있으나, 역시나 효과는 전무하다. 유럽진출 이후 박주영의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져서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뛰기도 애매해졌다. 거꾸로 이동국이 사이드로 빠지며 주변 선수와의 연계를 중시하는 선수로 바뀌어 이동국이 오히려 쉐도우 스트라이커에 적합해졌다.[36] 이렇게 애매해진 상황때문에 둘이 같이 경기를 뛸 때마다 한쪽이 침묵하거나 동반으로 침묵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특히 2013년 2월 6일 벌어진 크로아티아와 평가전에서는 그간 나쁜 여론을 인식한듯 지나치게 상대를 배려하는 플레이로 일관하며 각자 장점마저 내다버린 최악의 결과를 빚었다. 박주영은 지나치게 아래로 처져서 플레이를 하면서 공격에 가담할 기회 자체가 대폭 줄어버렸고, 이동국은 2선 공격수에게 패스 하느라 바빠 변변한 슛도 못날렸다(...) 이날 경기가 끝난 뒤 최강희 감독도 두명을 조합하는 것에 대해 실패했다고 인정했으며 앞으로 박주영-이동국 투톱은 국대에서 볼일이 없을 것이다.
한편 이근호와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동국의 오프사이드 라인 깨기, 패스 배급은 이근호의 활동량과 승부욕, 저돌적 돌파를 살리기에 부족한 점이 있었으며, 이근호도 울산에서 김신욱과 콤비를 맞출 때 보다 활동 반경이 좁아지고 파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신욱과는 선발 출장보다는 경기 중후반에 서로 함께하는 편인데 김신욱이 완급 조절과 좌우 연계에 능하고 헤딩 싸움도 가세해 줄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다른 공격진이 속도와 활동량으로 측면을 파괴해주지 않으면 답답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동시에 선발 출전했었던 이란전의 경우에도 둘 다 할 만큼은 했는데 좋지는 않았다. 김신욱은 헤딩 경합을 했고 이동국은 내려가거나 내주거나. 전술 자체가 1선이 이렇게 내주면 2선에서 해결해 주는 식이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이청용과는 같이 뛸 기회가 많지는 않았으나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그저그런 모습을 보여줬다. 박지성은 은퇴하고 박주영이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공격 파트너들이 이청용의 움직임에 맞춰서 볼을 보급해주는 공격수가 필요해졌는데, 여기서 이동국이 좋은 모습을보여주지 못했다.
손흥민과는 무척 적은 기회가 주어졌으나 한준희는 따르면 이제까지 써 본 적이 없는 조합인데 의외로 이동국이 받고 뿌리면 손흥민이 달리는 그림으로 괜찮은 조합이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평가했었다. 그리고 홍명보가 사퇴한 이후 처음으로 소집된 베네수엘라전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으며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줬다. 실제로 슈틸리케호에서 손흥민과의 조합은 흥민이한테 폐를 끼친다는 얼치기 팬들의 비난과는 달리 중앙에서 받으며 수비를 끌어당기고 측면으로 뿌려주는 이동국과 그 공을 측면에서 받으며 속도를 붙이는 손흥민으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이후 이동국이 없는 손흥민은 고립되며 무득점 행진을 이어가다 상대의 체력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생긴 공간에서 골을 넣는 등 둘은 잘 맞는 편이다.
5.1 전대륙 상대 A매치 득점자
2014년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면서 황선홍, 박주영에 이어 3번째로 전대륙 상대로 득점한 선수가 되었다. 박주영의 경우 호주가 OFC에서 AFC로 소속을 바꾼뒤 득점 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이동국의 경우 호주가 OFC 시절에 득점했다. 어찌보면 황선홍에 이어 2번째 전대륙 상대 득점자다. 현재 손흥민이 4번째 전대륙 상대 득점자가 되기 위해 바짝 추격 중. 아직까지 단 3명(황선홍, 이동국, 박주영)의 선수만이 이 기록을 갖고 있다. [37]
6 플레이 스타일
포항 시절과 외국 진출 시절에 잠깐 투톱으로 뛰긴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커리어를 원톱으로 뛰었다.
가장 특징적으로 발리 깎는 노인이라는 별명에 맞게 발리슛으로 대표되는 뛰어난 슈팅능력[38]과 타고난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왼발, 오른발, 헤더 가리지 않으며 거기다 본인이 어떤 자세에 있고 어떤 공이 오더라도 원투 터치 이내에 위협적인 슛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은 독보적인데 오프사이드를 뚫는 능력이나 등지고 있는 수비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쇄도하는 능력도 국내 선수로는 최상급이다.
어린 시절에는 묻지마 강슈터의 기질이 간혹 보였으나 나이를 먹으면서 개선되었다. 패싱의 정확도는 그냥저냥인 수준이지만 시야가 넓어 경기중 미드필더 존으로 내려와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동료에게 좋은 공을 연결하기도 하며, 짬이 안되던 2002년 이전에는 그의 패싱능력을 눈여겨 본 국내지도자들이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내려서 사용하곤 하였다.
포항 스틸러스에 파리아스 감독이 있던 시절에도 종종 투톱 밑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용하곤 했었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해 냈었다.
드리블이나 공 다루는 기술의 측면에선 약점을 가지고 있다. 팀의 최고참인 지금은 경험을 바탕으로 노련한 볼컨트롤을 보여주기도 하나 이제는 신체 능력 전반이 하락해서 역시 기술 종합치는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활동력의 부족 역시 지적받는데 이 자료를 보면 활동량이 적다고는 할 수 없다. + 최근 국가대표 경기나 리그에서의 모습을 보면 활동량 부족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지나간 얘기라 할 수 있다.[39]
심리적 압박에는 결코 강한 편이 아니다. 움직임 자체는 그래도 비교적 멀쩡하게 가져가는 편인데 슈팅이나 패스의 정확도같은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그것도 유명한 우루과이전 카페베네 슛처럼 판단 자체는 괜찮았고 차기도 적당히 찼는데 들어가기에는 아주 조금 모자란 그런 슛이 나오곤 한다. k리그 챔피언 결정전 때도 신나게 골대를 맞추다가 리드를 잡으니 그제야 득점을 터트린다던가 하는 등. 한마디로 큰 경기에 약한 선수. 어렸을 때는 오히려 국대 해결사였는데 비난을 이길 정도까진 아니었던 듯.
현재 기준으로서는 스피드나 템포를 상당히 늦추는 면이 있지만 젊었을 때는 우당탕탕 부딪히는 식의 선수였기에 쉐도우 스트라이커 비슷하게 변한 본인의 기질과 더불어 나이와 부상 탓이 크다.
6.1 이동국과 슈팅 템포
슈팅 동작이 느리고 그것 때문에 수준이 높아지면 통하지 않는다는 일부 팬들의 주장이 이 문서에 있었다. 괴벨스의 말처럼 한 문장으로 가능한 헛말도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길어지기 때문에, 서술이 문서의 정체성과 큰 관련이 없어졌지만 본의 아니게 하나의 단락으로 나눌 만한 분량이 되고 말았다.
이동국 슈팅 동작 느려 운운은 축구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의 억측이나 판타지에 가깝다. 반박자 빠른 슈팅을 잠기로 삼는 선수들도 있는데 특별히 슈팅 동작이 느린 선수가 왜 없냐고 말하지만 이건 사실 관계 구분을 잘 못하는 얘기다. 슈팅 동작의 물리적 빠르기는 초능력을 쓰는 게 아닌 이상 무조건적으로 다리 근력의 문제이다. 이동국 정도 되는 엘리트 선수들이나 일반인이나 인간으로서의 근력의 한계, 반사신경의 한계상 어느 정도의 선이 정해져 있다. 반면 슈팅 템포가 빠르고 느린 것은 타이밍의 문제나 기술적 문제에 가깝다. 몇몇 사람들은 이 둘을 혼동해서 이동국의 슈팅하는 동작 자체가 느린 것처럼 얘기한다. 주장하는 입장에서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이동국은 누가 뭐래도 국대 100경기 넘게 뛴 초엘리트 공격수이고, 이런 공격수가 슈팅 동작 빠르기에서 뭘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겪고 있다면있다는 게 우습지만 당연히 선천적인, 피지컬적인 문제로 귀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어떤 선수가 반박자 빠른 슈팅이 가능한 원인이 피지컬적인 우월함에서 기인한다면, 그 선수는 피지컬적으로 슈팅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도 엄청난 능력을 보여줘야 된다. 크로스도 반 박자 빨라야 되고 패스도 반 박자 빨라야 된다. 수비에 있어서도 반 박자 빠르고 헤딩 경합도 반 박자 빨라야 한다. 이게 말이 된다면 이런 선수들은 이런 선수들로 매치업하는 것 말고는 막을 수가 없는데, 이나즈마 일레븐이나 쥬라기 월드컵 같은 만화나 게임에서나 일어나는 것이다.[40] 또, 상식적으로 슈팅 템포가 피지컬적인 문제라면 테오 월콧은 빠르기는 엄청나게 빠른데 왜 슈팅 템포는 메시가 훨씬 빠른지도 설명이 필요하다.
만약 특이하게 빠른 선수는 없고 단지 이동국만 특이하게 피지컬적으로 느리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도 이상하다. 이동국은 K리그에서는 성공했고, 또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빅리그 선수 상대로도 성공한 바 있다. 일단 국가대표 경기를 특정한 예외라고 인정하는 관용적인 경우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특이하게 피지컬적으로 느린 이동국이 이상하게도 K리그에서는 성공하므로, K리그에서는 그 정도의 피지컬도 통용된다고 하는 주장이 된다. 그렇다면 그 주장은 인간의 반사신경에 있어서 특정한 층위가 존재하고 있으며, 축구에 있어서 이 특정한 층위는 동시에 리그의 상하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된다. 레벨업하는 순간 모든 능력치가 올라가는 게임이나 만화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지나치게 판타지 같은 이야기다. 혹은 이동국은 K리그까지만 간신히 통하는 특이한 피지컬적인 느림을 지닌 선수인가? 그렇다면 이동국의 K리그에서의 성공은 오랜 시간 동안 지나치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 이전에 길 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잡아놓은 것도 아니라, 엘리트 프로 공격수들의 슈팅 동작의 빠르고 느림에 있어서 인간의 반사신경에 유의미한 차이가 난다는 주장은 과연 말이 되는가? 만약 그 주장대로 특별한 빠르기를 지닌 선수들만이 특정 레벨 이상의 선수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근거가 요구된다. 왜냐면 이동국이건 리오넬 메시건 일반적인 물리계에서 인간의 활동일 것인데, 우리는 경험적으로 이론적으로 반사신경의 한계와 인간 신체의 한계에 대해 알고 있다. 축구에서 소위 말하는 유럽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은 엄청난 숫자이며, 챔피언스 리그나 유로파 리그 등을 통해 교류하며 득점과 실점을 반복하고 있다. 남미의 리그 수준도 만만치 않고 역시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며, 단지 슈팅에 성공하고 골을 넣느냐 하는 기준에선 중미 리그도 얕볼 수 없고 아프리카 축구는 항상 유망주가 쏟아져 나온다. 세상에 스포츠가 축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유럽과 남미 리그에 반사 신경이 특이하게 뛰어난 선수들로만 그득하다는 것이 인간 종족의 한계상 가능한 일인가?
슈팅 동작이 빠른 선수와 느린 선수 사이에 인간 반사신경상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한다면, 그래 봐야 엘리트 선수들이 다리를 들어올렸다 내리는 정도의 몸동작인데, 그건 가히 권총을 발사하려는 어깨나 손의 근육의 움직임을 반사신경으로 보고 반응해 피한다는 판타지 같은 얘기 아닌가?[41] 또, 우리는 인간의 육체능력이 20대 중반 이후로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여러 스포츠를 통해 알고 있다. 만약 이동국의 슈팅 동작이 느려서 최고 레벨 선수들의 비상한 반사신경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월드컵에서 37살의 클로제는 어떻게 골을 넣었는가? 비단 클로제뿐 아니라, 최고 레벨의 리그라 하더라도 40에 가까운 공격수들도 활동하며 골을 넣고 있는 현실은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 선수들은 뭔가 특이한 유전자를 타고 나서 슈팅 동작의 빠르기가 극도로 적게 감퇴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 엄청나게 빠른 선수들이라서 감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판이 좋아서 버티고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관대한 가설을 적용하고 또 적용함에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고, 극도로 엉성해 보인다.
둘째로 슈팅 템포가 빠르다는 것에 대해 이상한 판타지를 품고 있다. 빠른 템포의 슈팅은 사실 그냥 기술적인 문제고, 프로 직행하지 못한 대학생 선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믿기 어렵겠다면 풋살 경기장에 자주 들락거리면 충분히 선출이나 대학생 선수들과 매치업이 가능하다. 언제 들어갔는지 모르게 정신 차려 보면 골을 먹혀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이건 그냥 기술이나 선택의 문제다. 비단 이동국뿐 아니라 한국에서 프로에 들어간 공격수들이면 아마도 거의 전부 다 빠른 템포 슈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른 템포 슈팅이라고 뭉뚱그리지 말고 정확히 예시로 하나 들어보자면 이 계열의 대가인 인자기처럼 마치 달려가는 것 같은 발동작에서 이어지는 슈팅을 예시로 하나 들 수 있는데, 프로뿐 아니라 길거리 축구 선수들도 다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빠른 템포 슈팅이 아무나 익힐 수 없고 익히기만 하면 다 썰어버리는 무림 고수의 비급 같은 판타지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엘리트 선수들 입장에서 그냥 여러 스킬 중 하나이고, 그걸 자주 쓰는 선수들은 게임의 형식을 빌려 설명하자면 빠른 템포 슈팅을 합니다 하는 선호 플레이가 달려 있는 것에 가깝다. 말이 빠른 템포 슈팅이지, 건조하게 말하면 그냥 준비동작이 짧은, 그래서 상대가 대응하기 어렵지만 쏘는 사람도 파워와 정확도에 어려움을 겪는 슈팅 기술 중 하나에 불과한 것 아닌가?[42] 만약 이에 반감을 가지고 이동국이 어찌 됐든 빠른 템포 슈팅을 구사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빠른 템포 슈팅이 정확히 무슨 슈팅을 말하는 것인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43]
슈팅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슈팅 템포가 빠르건 늦건 발로 하건 등으로 하건 엉덩이로 하건 골대에 정확하게 보낼 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슈팅 템포가 아무리 빨라도 골대 안으로 못 가면 아무 소용 없다. 또, 빠른 템포로 골대 안으로 슈팅한다 해도 임팩트의 질이 보장되어 있어서 충분한 빠르기나 정확도가 보장되는가도 중요하다. 그리고 빅리그에서 이것들을 항시적으로 정확하게 구사하는 선수들은 그냥 엄청나게 잘하는 선수다. 그렇다고 해서 빠른 템포만 좋은 것도 아니다. 반 니스텔루이의 슈팅은 굳이 빠르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끽해야 반의 반의 반의 반 정도 빠르지만, 그냥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임팩트로 차도 잘 차니까 잘 넣는다. 반면 인자기의 경우 엄청나게 빠른 템포 슈팅을 한다.
이런 것들은 그냥 축구를 재밌게 해 주는 다양성, 선수 특성일 뿐이다. 인자기나 라울은 빠른 템포 슈팅에 있어서 엄청난 달인들이다. 하지만 그 선수들이 페널티 서클 바깥 지점에서 골대에서 등을 돌린 상태로 서 있다 날아오는 공을 보고 몸을 돌리며 바로 발리 슛을 갈긴다고 할 때, 뛰어난 파워와 정확도로 골대 안으로 보내는 것이 보장되는가? 그 선수들은 당연히 이동국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들이지만 그 슈팅에 있어서는 이동국만 못하다. 이동국의 경우 공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 그로 인한 높은 파워와 정밀도를 자랑하는 선수인데 당연히 이 부분을 많이 활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국의 슈팅 동작이 느리므로 문제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피지컬적으로 특이하게 느린 선수가 있는 만큼 특이하게 빠른 선수도 있다는 것이다. 피지컬적인 문제라면 당연히 이 선수들은 크로스도 패스도 막을 수 없이 빨라야 하므로, 이런 선수들끼리만 매치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구상임은 이미 논한 바 있다. 혹은 빠른 템포 슈팅 만능주의, 빠른 템포 슈팅은 강슛이나 정확한 슈팅보다 무조건 우월하다는 주의주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축구관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이동국 슈팅 동작 이상하게 느려 이론은 이동국의 슈팅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막힌다는 이론이므로 빠른 템포 슈팅 만능주의와는 다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인자기가 달려가는 동작인 듯 빠른 템포 슈팅을 하는 것과 달리 이동국의 슈팅은 마치 독수리슛처럼 다리를 뒤로 엄청나게 올리는 동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느린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동국의 둔탁함이 상상 이상이기 때문에 남들과 비슷한 각도로 발을 뒤로 들어올려도 임팩트까지의 순간이 의미 있을 정도로 남들보다 느린 것인가? 그렇다면 연봉을 몇 억씩 받는 K리그 선수들은 왜 이동국에게 골을 먹히는가? 혹은 세계적인 수비수들이 의미 있을 정도로 남들보다 빠르다면, 왜 FA컵에서 이따금 하부 리그의 반란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길거리 축구 공격수와 세계적인 골키퍼, 세계적인 수비수의 대결이라 할지라도 공격수가 슈팅 잘 하면 골이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 '이동국 슈팅 타이밍 이상하게 느려 이론'으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이동국 슈팅 타이밍이 이상하게 느린 것이면 왜 K리그에서는 득점하는가? 세계적 수비수들이 이상하게 빠른 것이면 K리그 공격수들보다 위계가 낮은 길거리 공격수가 세계적 수비수를 상대로 골을 넣을 확률은 절망적으로 낮아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왜 현실은 반대인가?
아무리 봐도 이동국 슈팅 타이밍 이상하게 느려 이론은 성립하기 어렵다. 애초에 임팩트의 타이밍이 정확하다고 할 때, 슈팅의 파워는 다리가 움직이는 속도에 비례한다. 물리적으로 당연하지 않은가? 다리를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강슛을 하는 것이 당연한 물리적인 상식인데, 이동국의 슈팅 파워가 여타 선수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마법이라도 부려서 다리를 느리게 움직이는 데도 불구하고 공에 강한 파워를 싣는다는 것인가? 내공의 힘인가?아무리 온갖 잡소리를 다하는 게 나무위키의 특성이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성립하는 얘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슈팅 템포에 대한 이상한 착각을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코치나 감독, 해설자, 유소년 지도자 등이 이따금 빠른 템포로 차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렇게 차라고 교육한다고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슈팅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트래핑 해서 더 안정적으로 만들 생각하지 말고 그냥 빠르게 슛하는 게 많은 경우 더 낫다는 얘기다. 결코 슈팅 기술에 있어서 빠른 템포로 쏘고 말고 하는 부분이 아니다.
7 해외진출 실패
정확히 말하면 클럽 경력으로 나눠진 부분에 속해야 하겠지만, 이 부분까지 끌어와서 플레이 스타일에 넣으려 하는 일부 축구팬들이 있고, 동시에 대단히 논쟁적이므로 특별히 두 번의 해외진출과 실패에 대해서도 논해 볼 만하다. 어떤 축구팬은 이동국이 3년 동안 2번의 해외 진출을 실패 했으므로 알 만하다고 주장하지만, 더 정확히 알아본다고 해서 아무 문제 될 것 없다.
먼저 3년 간 해외 진출을 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동국의 해외 진출은 독일의 브레멘이 한 번, 영국의 미들스보로가 한 번이다. 그런데 독일의 브레멘은 2000/2001 시즌의 1월달에 이적해서 반 시즌 있다가 다시 포항으로 돌아왔다. 역시 영국 진출도 1월에 진출해서는 1년 반을 보내다가 돌아왔다. 과연 3년인가? 약간 수학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반 년, 또 1년 반인데, 2년으로 교정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최신 수리철학에서는 더하기 빼기조차 이런저런 논의가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보편 상식적으로 0.5 + 1.5는 아무리 생각한들 2가 될 것이다.
그러면 순차적으로 먼저 진출한 독일 베르더 브레멘 시절에 대해 논해 볼 수 있다. 이 시기 이동국이 독일에 진출한 것은 맞으나, 무릎 부상을 안고 있었다. 이적 이후에는 당연히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차 명단에 포함되어 경기에 나오게 되었다. 이 시기 출전한 경기는 7경기로 모두 교체선수로 출장했다. 각각 81분, 79분, 87분, 62분, 57분, 61분, 82분에 출장해서 7경기 121분 출장,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다.
클럽경력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부상 이후 반 년 임대였고, 현장의 인터뷰 등을 볼 때 장기적 관점에서 영입한 유망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브레멘은 공격수 유망주들을 데려오길 좋아했고 연이은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으므로 아마도 사실과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미필 선수들의 해외진출은 2002년 자국에서의 월드컵을 대비해 한시적으로 허가가 났고, 2002년에서 성과를 거둔다면 대충 병역도 해결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브레멘은 정확한 사정을 모르고 영입했으나 이후 연봉협상이나 계약형태, 계약 기간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틀어졌다. 이후 페루자나 샬케 등에서 오퍼가 있었고, 페루자가 적극적인 태도라서 직접 가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았으나 여전히 무릎 부상의 후유증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페루자가 안정환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브레멘 시절을 놓고 보자면 실패와 성공을 꼬집어 얘기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121분 출장 무득점이긴 하지만 당시 독일 득점왕은 20골 수준에서 정해졌다. 36경기 10골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주전 공격수였다. 그러므로 부상 회복, 리그와 팀 적응, 문화 적응, 짧은 교체 출전시간 등을 생각해 보면 121분 출장 무득점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못한 것은 아니다. 36경기 10골이 준수한 템포라고 한다면 3.6경기당 한 골을 기록해야 하는데 산술적으로 2경기 출장 무득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적을 남기지 못했으므로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흔히 어떤 명제가 거짓이라고 증명된다면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성공한 명제라고 한다. 실패한 명제는 그것이 일정한 수준이나 형식을 만족하지 못했으므로 참이나 거짓조차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동국의 독일 진출은 그것에 가깝다. 이걸 두고 기량이나 활약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억측에 가깝다.
7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훈련장에서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심각한 무릎 부상에서 회복하는 중이었으므로 이런 선수가 후반 교체 출장부터 시작하는 것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또한 당시 팀의 공격수 자원이 분데스 역대급 용병 공격수 두 명에다가 K리그 팬들은 익히 아는 라데가 3번째 공격수로 뛰고 있었다. 멀티 포지션 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연성에 들어맞을 것이기 때문에 당시 브레멘 팀 차원에서 공격수는 넉넉한 편인데, 이동국은 이 상황에서 교체출장했으며 뒤지고 있는 경기에서 제법 이른 시간에도 출장했으므로 오히려 상당히 기대를 받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골을 못 넣었으니 실패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상술했듯 3.6경기 10골이면 상당히 준수한 공격수였으므로 리그 적응해야 하는 신입생이 2경기 무득점인 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재언하는 바지만 독일 진출을 두고 기량이나 활약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그냥 무리수다.
월드컵도 이와 같은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해외진출이라고 해 놓고 월드컵까지 언급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떤 축구팬들은 월드컵까지 엮어서 생각하므로 보속의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월드컵에서는 두 번 교체 출장해서 50분 가량을 활약했다. 공격수는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득점률이 높은데 두 번 다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출전했다. 한 번은 경기 운영 자체가 안 되고 있는 시합이었고, 다른 한 번은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의 교체 출전이었다. 산술적으로 판단해 볼 때 독일 진출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판단이 가능한 근거 자체가 되지 못한다.
물론 그 유명한 물회오리 슛을 남겼으므로 그를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는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반대측들이 지적하는 표본수의 부족이라는 문제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표본수의 부족이라는 지적에 대해 물회오리슛을 쐈으니 알 만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논점의 회피에 불과하다. 물회오리슛은 실패이긴 하지만, 어쨌든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이 가능한 부분을 만들어냈으므로, 그 부분에서는 성공이긴 하다. 이를 바탕으로, 산술적으로 판단해 볼 때 과연 충분한 출장시간이 보장될 때 이와 같은 슈팅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가? 과연 슈팅이 지속적으로 생산된다고 할 때 성공률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근본적으로 표본의 부족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동국을 옹호하건 비난하건 간에 이런 물음에는 전혀 대답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미들스보로 진출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실패임이 분명하지만, 같은 실패라고 해서 보다 더 정확하게 판단하려는 시도가 나쁠 것은 전혀 없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단 산술적인 과장이다. 이동국을 비난하는 측은 주장의 신빙성을 얻기 위해 2년 간의 진출이라고 주장하지만 앞서 말했듯 정확하게 얘기하면 1.5 시즌이므로 2와 1.5 사이에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
미들스보로 진출이 실패임은 분명하므로, 실패라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실력과 연관되는 부분을 더 정확히 살펴봐야 한다. 이동국을 비난하는 측에서는 실패를 과장하기 위해서 어느 팀에서도 오퍼가 없었으므로 아예 이동국의 유럽 진출은 천성적으로 무리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는 브레멘 시절 6개월 임대를 마치자 샬케와 페루자에서 오퍼가 왔고, 페루자에는 직접 가서 메디컬 테스트까지 받았으나 이 과정에서 무릎 부상과 연봉, 계약기간 협상 관련해서 실패해 돌아온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일단, 가장 이견이 없는 참에 가까운 서술은, 이동국이 보로 생활을 실패로 끝냈을 무렵 유럽에서 뛸 실력이 아니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왜냐면 다른 유럽 구단을 적극적으로 알아봤으나 오퍼가 없었고, K리그로 돌아와서도 성남 일화에서의 반 년간 크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이 이동국의 본래 실력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무리가 있다. 성남 일화에서의 실패 때문이다. 또한 그리고 전북 입단 후에도 폼이 형편 없었다는 일화도 시간적 연속성상 고려해야만 한다. 이동국은 포항, 상무, 전북까지 3구단에서 오랜 시간 성공적인 선수활동을 했으나 유독 성남 시절에만 실패했다. 성남 일화는 당시 K리그의 명장 김학범 감독이 재적하고 있었으며, K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호화구단 중 하나이므로 빠지지 않는 강팀이다. 이동국이 전술적으로 뭔가 성남에서 특별한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기에는 리그 내 최고의 전술가인 김학범의 존재,[44] 그리고 가장 전술적으로 어려운 구단이자 약팀인 상무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것이 설명되기 어렵다.
이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동국의 폼이 본래의 클래스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크게 떨어져 있으며, 이는 멘탈적으로 무너진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왜냐면 전북 입단 후 경남과의 첫 경기에서도 슈팅 한 번 때리지 못하는 졸전을 펼쳤지만, 최강희 감독이 무조건 개막후 10경기 선발이라고 밀어주자 살아났기 때문이다.
미들스보로 진출과 실력에 대해 논하기 위해 보로 시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일단 진출 자체가 몸상태나 준비, 겨울 이적 시장의 위험성, 이적료 대우 등을 볼 때 상당한 무리수였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동시에 이동국 본인의 소극적인 성격까지 포함해 많은 축구계 전문가들도 이동국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 꼽고 있다. 물론 축구 선수의 실력은 넓게 볼 때 사교관계나 적응까지 다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비난하는 측에서도 이와 같은 약점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지 않고 그라운드에서의 문제만으로 여기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비난하는 측에서는 이동국의 폼이 진출 직후가 가장 좋았지만 오히려 점차적으로 떨어진 것은 간과하고 있다. 축구선수의 실력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것은 재언하는 바지만, 비난하는 측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 없이 덮어놓고 그냥 그라운드에서의 실력적으로도 본래 급 자체가 다른 선수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같은 실패에 대한 설명이라도, 실패의 양상에 대해 섬세한 설명이 누락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출 직후의 폼이 가장 좋았고, 첫 반 시즌은 9경기에 출전했지만 다른 한 시즌은 11경기에 출장한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측의 설명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가장 일반인 설명을 찾아보자면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면서 본래의 실력과 자신감을 잃었다고 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비난하는 측의 논지와는 사실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동국이라는 특정한 선수에 대한 설명이므로, 특정 선수의 특정한 상황에 대한 고려 역시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이동국은 2006년 여름 월드컵 직전에 장기 부상을 입었다가 겨울에 미들스보로에 합류했다. 이 경우,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전의 전지훈련은 대단히 중요하다. 시즌 전체를 보낼 수 있는 체력, 감독의 전술, 팀 조직력, 팀원들과의 친목, 실력에 대한 신뢰를 이 시기에 쌓아놔야 한다. 이동국의 경우 2007년 여름에 열린 아시안컵에 참가했다. 팀에 적응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여러 차례 고사했으나 당시 수석 코치이던 홍명보가 여러 차례 찾아오며[45] 읍소한 까닭에 참가했다고 했다.
2007 아시안컵물론 룸싸롱도 갔다왔지만에서 이동국이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동국의 해외진출과 실력을 논하고자 한다면, 2007년 아시안컵은 해외진출 시기 중이므로 당연히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동국은 2000년 아시안컵에서는 무릎에 테이핑을 감고 뛰면서도 득점왕을 차지했던 선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동국을 비난하건 옹호하건 간에 어쨌든 아시아권에서는 훌륭한 공격수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2007년 아시안컵의 경기력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사정으로 본래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고 하는 설명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가? 이 부분은 핌 베어벡의 소위 말하는 늪축구 전술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동국이 이후 미들스보로에서의 부진했던 이유에서 국제대회 참가 또한 일정 부분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축구에 있어서 비시즌 간의 국제 대회 후유증은 상식과도 같다.
물론 많은 축구 선수들이 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뛴다. 그러므로 이동국의 1년 6개월간 해외 진출을 실력에서 기인한 실패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더라도, 그 선수에게 실력이 있다면 돌파했을 것이라는 것이 축구계에 통용되는 일종의 불문율이다.
이동국이 해외에서 가장 약점을 보였던 것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화적 적응 실패, 소극적인 친목 형성,[46] 공에 대한 적극성 부족, 주전으로 뛰지 못하는 사실 그리고 비난을 받으며 자신감이 움츠러드는 성향도 지적된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피지컬이다. 이 문제는 본인의 부상 후유증과 비시즌 훈련 참가가 주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이동국의 피지컬이 겉으로 보는 체격적으로 결격사항이 없어 보이긴 하나, 유럽에 진출한 많은 한국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더라도 추가적인 개인훈련과 단련이 필요하다. 이동국이 둔해서 안 됐다는 것은 입축에 가까운 소리고, 오히려 피지컬적인 단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앙에서 버티는 힘이 부족해서 공을 많이 못 잡고 튕겨나간 것이다. 유럽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문제이나 추가 단련이 없었거나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이동국의 해외 진출에 있어서 비교적 세부적인 부분까지 다뤄 봤다. 이를 실력과 연관짓는 부분은 사실 참과 거짓을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한 부분까지 이어진다. 어느 정도 각 개인의 성향에 좌우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가장 문제적인 부분은 월드컵, 독일 진출, 영국 진출을 각기 독립적인 항목으로 취급하느냐, 아니면 연결되는 것으로 취급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만약 월드컵, 독일 진출, 영국 진출이 독립시행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이동국의 실력이 옹호하는 측의 의견과는 달리 상당히 낮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저 세 가지 사항이 제각기 한 가지 한 가지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되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하나는 그렇다고 친다 하더라도, 세 가지 사항이 중첩된 경우이므로 당연히 이동국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사람의 성향으로 나눠 보자면, 인생에 있어서 결국 사람의 실력이나 필연성이 운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에 가깝다. 운수가 따르지 않은 실패가 아니라 결국 실력이라는 것.
월드컵과 독일 진출 표본이 부족해 판단 자체도 불가능한 사례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이들을 영국 진출이라는 사례와 연관되어 판단한다면 의미가 생긴다. 반면 월드컵, 독일 진출, 영국 진출을 독립시행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동국의 해외 진출 실패를 실력과 연관짓는 시도는 상당히 조심스러워져야 한다. 영국 진출 실패 역시 비난하는 측에서는 월드컵과 독일 진출과 연관시켜 더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영국 진출 하나만 살펴본다면, 영국 진출은 상당히 많은 예외 사항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사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 선수가 다른 리그나 팀으로 이적했을 경우 실패하는 사례는 워낙 축구계에 비일비재하다.[47] 이 둘, 그러니까 영국 진출 당시 이동국이 처했던 여러 예외적인 사항과 타 팀이나 리그 진출과 실력의 상관관계는 그렇게 필연적이지 않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영국 진출 실패로 실력의 우열을 아예 차원을 가르듯 단언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세 가지 사항이 독립적이라고 본다면, 인생을 살며 겪게 되는 사건들은 확률적인 운빨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고 보는 성향이다.
이를 독립시행으로 보느냐 아니냐는 사실 개개인의 성향에 달린 일이다. 혹은 이를 넘어서는 판단을 하고 싶다면, 이동국이 k리그나 국가대표에서 보여주는 기량을 객관적으로 파악했을 때 A나 B와 같은 장점, C나 D와 같은 단점이 있으므로 빅리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못한다와 같은 방향으로 전개해야 한다. 물론 독립시행으로 보는 축, 아닌 축 모두 반박하고 싶은 부분이 있겠지만, 최소한 유럽 무대와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기반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싶다면 이 부분을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고 나가는 이상 반대측과 아무리 논의를 거듭해 봐도 헛발질, 공회전에 불과하다.
8 슈퍼맨이 돌아왔다 출연
프로그램을 다시 되살린 최고의 수
오남매, 겹쌍둥이 아빠. 10만 분의 1확률ㄷㄷ 7월 26일에 예고편 형식으로 나왔고, 8월 2일 방영분부터 정식 합류 하였으며, 합류와 동시에 역대 출연자 중 최다 자녀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런데 아빠 나이는 한 때는 출연자 중 가장 어렸었다. 가장 연장자인 이범수(1970년생)과 이동국은 9살 차이였으나 80년생인 인교진이 들어오면서 더 이상 막내는 아니게 되었다.
자녀들 이름/년생
첫째 쌍둥이 이재시 (2007)
첫째 쌍둥이 이재아 (2007)
둘째 쌍둥이 이설아 (2013)
둘째 쌍둥이 이수아 (2013)
막내 아들 이시안(대박이)[48] (2014) 이 아이를 KBS사장님이 애정 애정 한다더라
방송은 송도 집/전주 집[49] 번갈아 가며 촬영 중.
당초 합류 기사가 떴을 땐 이동국이 현역 축구선수라는 점과 육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 삼둥이 하차를 대비하기 위한 합류일 거라는 추측으로 반응은 다소 회의적이였으며, 첫 방송 이후로도 이동국의 다소 어설픈 모습과 아이들이 너무 많아 산만하다는 이유로 크게 호응을 얻지는 못하는듯 했다. 무슨 인간극장이냐!! 라는 말이 있을 정도
사실 초반에 반응이 별로였을 수밖에 없는 게 처음으로 정식으로 나온 2015년 8월 2일 방송분에서는 이동국이 잠에서 깨 아이들 아침밥을 해주는 거 말고는 별 내용도 없었으며 갑자기 아이들이 우르르 나왔다가 거의 밥만 먹고 끝난 상황, 두 번째 출연분인 2015년 8월 9일 방송분에선 둘째 딸 재아의 테니스장을 방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재아를 훈육하는 모습이 비쳤으며 딸을 생각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육아프로와는 다소 맞지 않은 장면이었다. 이동국의 숨겨진 육아실력 또한 거의 나오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회차가 거듭될수록 점점 반응이 온 케이스로 최근 들어서는 이동국의 투입은 신의 한 수라는 반응이 있을 만큼 상당히 호응적. 기사 이동국 가족의 인기 상승 요인으로는 막내아들 대박이[50][51]의 공이 상당히 큰데 귀여운 외모와 순둥한 아기로서 주목을 끌었다. 또한 대박이와는 전혀 상반된 이미지의 '비글자매'[52]로 불리는 설아,수아 쌍둥이의 다소 장난스럽지만 귀여운 모습들이 예능적인 재미를 이끌어 주고 있으며, 여기에 첫째 쌍둥이 재시,재아의 초등학생 2학년 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모습과 동생들을 아끼고 챙기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훈훈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취지상 아이들 못지않게 아빠의 역할이 중요한데 이동국의 아빠로서의 모습은 우려와는 다르게 굉장히 긍정적으로 의외이다 라는 평이 많다. 대표적으로 설아,수아가 대박이 분유를 몰래 먹다가 침대 위에 엎지른다든지 방문에 로션을 덕지 덕지 발라 어지럽혀도 인상 한번 쓰지 않고 웃으며 뒤처리 했던 모습이 방송을 나간 뒤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의 모습이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이동국의 육아실력 또한 회차가 거듭될수록 반전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맘카페에서도 여기저기 칭찬이... 아이들이 낮잠을 못 자자 짐볼을 이용해 재운 다든지 대박이의 옹알이 하나하나에 응답해주는 모습, 아이가 다섯이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과정에서 평소에도 육아에 신경을 써왔다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딱 요리만 못하는 것 같다. 근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극복하고 미역국, 제육볶음을 뚝딱 해치운다; 또 하나 의외의 점이 아들 대박이에게의 관심이다. 딸 4명 아들 1명 그것도 첫 출연당시 대박이가 돌도 아직 안 지났기에 아들에게 너무 집중하다 혹여나 딸들에게 소홀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지만 오히려 설아,수아를 신경 쓰다가 대박이를 보행기에 혼자 둔다든지 이유식을 늦게 주는 모습이 종종 나왔다. 이 과정에서 '대박이에게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나?'[53] 라는 말도 있었지만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을 전혀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견이 더 많은 편이다.
'자상한 아빠이다', '성격이 순한 거 같다' 라는 긍정적인 의견과 더불어 '너무 아이들을 혼내지 않는 거 아니냐?' 하는 부정적인 반응도 다소 있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2015년 9월 20일 방송분에서 설아,수아가 아빠가 옷을 고르는 사이 아직 구매하지도 않은 장난감 몰래 뜯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동국은 설아,수아에게 주인아주머니께 사과하라고 시키긴 했지만 아이들을 혼내거나 훈육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손님들도 있는 가게에서 아이들을 혼내는 것 또한 민폐이고 훈육하는 장면은 방송상 충분히 편집될 수 있는 상황이라 크게 문제시되지는 않았다. 인터뷰에서 "평소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다 보니 화내기보단 최대한 재밌게 놀아주고 싶고 아이들이 사고를 쳐도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밝힌 바 있다.
방송을 보면 이동국이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같이 놀아주는 것에 능숙하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사실 과거 이동국 부인의 말에 의하면 아이를 가지기 전까진 어린아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2006년 11월 이동국이 깜짝 출연했던 KBS 인기 프로 '날아라 슛돌이' 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날 FC슛돌이 팀은 포항 스틸러스 유소년팀과 경기를 하기 위해 방문했고 당시 포항 스틸러스의 간판스타였던 이동국이 포항 유소년팀의 일일 코치로 나선 것. 그렇지만 이동국은 방송 내내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을 걸지도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기만 하였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동국 부인 역시 이동국이 과연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많이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재시, 재아가 태어난 뒤 180도 변한 모습을 보였고 육아 관련 도서를 직접 구매해서 읽을 만큼 육아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첫째 아이들이 태어난 해인 2007년은 이동국 축구 인생의 최대 암흑기인 미들즈브러 시절인 때. 이때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던 이동국[54]은 아이들에게 많이 의지하였고 아빠로서 책임감을 더욱 가졌다고 한다. [55]
현역 선수가 시즌 중에 예능을 고정 출연하는 것에 대해 비난이 다소 있는 편이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경기가 안 풀리는 날도 있을 수 있지만 이동국의 경우 부진한 모습을 조금만 보이면 ‘방송 탓’이라는 비난을 피하기가 어려운 게 현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구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슈퍼맨'출연 이후 더욱 트레이닝과 자기관리에 몰두하고 있다는 후문. 사실 '슈퍼맨' 출연 전과 후의 경기력 차이가 거의 없기에 팬들 사이에서는 '이쯤 되면 이동국의 경기력을 방송과 연계하지는 말자'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리고 실제로 2015시즌에도 득점랭킹 5등안에 들면서 좋은 성적을 보이고있다.
2015년 10월 11일 방송분에서 송일국과의 대화 중 "이전에 일반 사람들이 이름은 알지만 얼굴은 잘 모른다. 거의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프로선수 생활 18년보다 방송 1~2주 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 같다" 라는 말을 보아 인지도 측면에서도 득을 많이 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역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출연자들을 보면 사실 이동국의 인지도는 최상위급에 속하고 정말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축알못도 많이들 아는 이동국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안 되기에 다소 예의상으로 했던 말이 아니었나 싶다. 방송 때문에 친근해져서 사람들이 더 아는 척하고 반겨줘서 그렇게 느낀 거 일 수도...
이동국이 대박이를 부를 때 특유의 어투가 있는데 "대바그아~" 이게 슈돌팬들이나 전북팬들 사이에선 어째 유행어처럼 되어버려 이동국관련 기사나 글에서 '대박아~'라고 적힌 댓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임팩트가 생각보다 컸던지 최근 팬사인회나 시민들 만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대박아~한번 해주세요"라고;; 그 때문인지 최근 들어서는 방송에서 부르는 횟수가 조금 줄어들었다.
9월 12일 FC서울과의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5' 30라운드에서 선제골을 성공시킨 뒤 '슈퍼맨' 세리머니를 보였는데 이 세리머니는 한국 프로 축구 연맹이 뽑은 9월의 세리머니로 뽑히기도 했다. 세리머니 장면은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5년 9월 20일 방송분에도 잠깐 나온다. 이동국이 k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이기에 방송에서 k리그와 전북현대에 대해서 꽤 자주 언급하는 편.
재밌는 점이라면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다른 출연자들과 의외의 접점이 많다. 송일국과는 같은 송도에 살고[56] , 이휘재와는 14년 올스타전에서 만났으며 이 장면은 14년 8월 17일 방송분에서 나온다. 또한 엄태웅과는 과거 1박2일 '절친들과 함께한 혹한기 실전캠프' 특집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은지원의 동서로 출연... 하지만 은지원의 이혼으로 이젠 완전 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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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계에선 안티가 많은 선수지만 신기하게도 포털반응을 보면 슈퍼맨이 돌아왔다 출연진 중에서는 호감도가 높은 편이다. '이동국 다시 봤다.' '생긴 거랑 딴판이네' '자상하다' '아빠인데도 아직 설렌다' 등등 이전에 출연했던 힐링캠프나 1박2일도 반응이 괜찮았던 걸 보면 생각보다 방송이 잘 맞는 듯하다.
2016년 1월 24일 방영분 런닝맨에서 출연했는데 이 때 유재석이 아니. 옆 방송국 프로그램 이시간에 무슨일로!?[57]라면서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고 자막에 짤막하게 대박 아빠도 덧붙여져 있었다.
2016년 삼둥이 하차 이후로는 사실상 아들 이시안이 슈돌 시청률을 캐리하는 신세가 되었다.
한국 예능이 동남아에 인기가 많다 보니 이동국과 대박이의 동남아 인기도 많이 높아졌다고 한다. 애초에 이동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스타플레이어인데 최근엔 젊은 층과 여성층에도 이름을 톡톡히 알리게 된 것.
아들이 축구하는걸 반대하는 안정환과는 다르게 막내아들인 시안이가 축구를 하길 바라는 모습을 보인다.[58]
재밌는 점이 있다면 슈퍼맨 촬영팀이 전북경기를 촬영하러 전주에 오는 날에는 이동국의 골이 터지지 않는다. 16년 8월 21일 방송분을 포함하여 총 4번의 홈경기 촬영이 있었으나 아직 골을 넣은 적이 없다. 일종의 징크스라면 징크스
프로그램에서 이동국 가족의 인기가 많다보니 시청자 이탈 방지를 위해 다른 가족의 방송 중간에 미리 자막으로 예고를 한다. 도끼, 이정재등의 게스트들이 나올 때 다른가족들도 자막예고를 하기도 하지만 매주 빠짐없이 나오는건 이동국 가족뿐.
9 사건사고
9.1 아버지의 병역비리 청탁사건
이동국의 흑역사 1
이동국의 아버지가 1998년에 병무청 직원에게 뇌물을 전달하는 수법으로 아들의 병역비리를 청탁해 적발된 바 있다. 기사 이동국의 아버지 이남기 씨는 병역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져 최초 실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유치되었으며, 최종적으로 2천만원의 벌금형으로 판결 받았다. 이동국 아버지의 병역비리 사실을 밝혀낸 사람은 대선후보 이회창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를 최초 제기하였던 김대업이었다. 관련기사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동국 아버지는 아주 적극적으로 아들의 병역면제를 위해 비리, 불법, 청탁행위를 저질렀고 심지어 병역비리계의 대부였던 박노항과도 접촉을 시도했다고 한다. 상당히 악질적인 방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의 병역비리를 청탁했기에 초범에 전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 구속되고 나중엔 2천만이라는 거금의 벌금형까지 선고받았다. 이동국 본인은 연루가 없다고 했으나 특별한 상해나 질병이 없었음에도 몇차례나 아버지의 병역비리 행각에 재검으로 화답했다는 점에서 의혹을 떨치기만은 어렵다. 범죄의 정도에 비해 아는 사람이 적고 언급이 덜 되는 것은 이회창, 스티브 유 등의 한국 사회를 들썩거리게 한 병역비리 파문이 일어나기 직전 시기인데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어떻게든 국가대표 축구 선수를 구제해야 한다는 사회 및 언론계의 구제분위기 때문이었다. 실제 거의 대다수 축구인과 심지어 정몽준까지 이동국 아버지의 선처를 바란다며 검찰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대다수 언론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악질 범죄로 분류되는 병역비리를 저지른 이동국 아버지가 조기에 불구속으로 전환되어 풀려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선발에서 최종 탈락한 이동국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축구 대표팀에 선발되는데, 당시 논란이 매우 거셌다. 무엇보다 병역비리에 연루된 선수를 대표팀 선수로 선발하여 군면제 기회를 준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박주영이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을 때의 분위기와 비슷한데, 꼼수에 가까웠던 박주영과는 달리 이동국은 엄연히 실형을 선고받은 범죄와 연루되었기에 실제 법무부나 병무청의 분위기는 몹시도 험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홈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 축구 대표팀의 금메달을 위해서는 이동국이 꼭 필요하다는 축구계의 탄원이 이어졌고, 결국 군면제 될 수 있는 기회는 주되, 실패한다면 곧장 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59] 하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금메달 획득 실패로 끝났고, 병역비리에 연루된데다 군면제 기회까지 날려버린 이동국은 더 이상 입대를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여 거의 반강제적으로 입대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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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 팬들에 의해 무개념 안티의 걸개로 회자되었던 이 장면도 사실 이동국의 병역비리를 알고도 덮으며 그를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하려 했던 대한축구협회의 무책임한 태도와, 병역범죄에 연루되었음에도 군면제를 노리고 국가대표에 합류한 이동국의 뻔뻔함에 분노한 축구팬의 항의 퍼포먼스였다. 실제 이 두 사람은 해당 걸개를 걸기 전 PC통신 하이텔에 병역비리에 연루된 이동국은 대표팀 자격이 없는 선수였고, 그런 뻔뻔한 이가 결국 실패해 군입대하게 된 것은 정의로운 결과라며 항의 퍼포먼스를 펼치겠다고 공지했었다. 십 수년 전 당시에도 이동국의 병역비리 연루에 분노한 축구팬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증거다. 다섯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에도 이동국을 공격할때만 나오는 과거사 1이다.. 허나 그보다 더 대단한 사건이 아직 남아 있으니...
9.2 2007 아시안컵 숙소 무단이탈 및 룸살롱 출입사건
이동국의 흑역사 2
2007년도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아시안컵 대회 도중, 동료 국가대표 선수인 이운재, 김상식, 우성용과 함께 자정즈음 국가대표팀 숙소를 무단이탈해 룸살롱에서 밤늦게 술을 마신 사실이 들통나 커다란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실제 언론사 뉴시스의 현지취재에 따르면 이동국은 룸살롱에서 접대부과 함께 폭탄주를 마시고 새벽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2차'까지 나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해당 업소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성매매 유흥행위를 하는 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다 이동국 등을 접대한 현지 접대부들이 선수들을 직접 지목하며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한 사진까지 공개되며, 인도네시아 교민들은 선수들의 부적절한 성추문에 커다란 실망감과 분노감을 드러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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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널리 알려진 직후 이운재, 김상식, 우성용은 국민에게 사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나 이동국은 영국에 체류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에 불참하고 서면서과했다. 기사 했다. 이후 이동국은 국내 입국뒤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당시 룸살롱 출입사건에 대해 침묵하였고, 몇 년 뒤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에 자신은 룸살롱에 출입한 것이 아니라 지인이 운영하는 일반 술집에 출입한 것이며, 아시안컵 대회도중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해 룸살롱 접대부들과 맥주 한 잔 마신 것이 어떻게 큰 잘못이 될 수 있냐고 반문하며 당시 미들즈브러 동료들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대중을 비판하는 뉘앙스로 적시했다. 시간만이 약? 본인 입장에서는 업소에서 부적절한 행위가 없었다는 것을 강변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나. 해당 업소가 현지에서 워낙 널리 알려지며 관광객이 즐겨찾는 룸싸롱이라고 하기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맥주집에 불과하다는 이동국의 주장은 거짓말로 규정되어도 무방하다. 다만 성매매혐의에 대해서는 아직 아직 단정짓기는 이르다. 대한축구협회의 공식조사로는 선수들의 성매매는 없었다는 결론을 내놨지만.. 기사 진실은 저너머로.... 어찌되었든 성매매를 했든 하지 않았든.. 분명히 당시의 상황에서는 잘못된 처신이며 행동이었고, 그 뒷수습 또한 비겁했던 것은 사실이다. 동빠 및 전북빠의 옹호와 동까 및 전북 안티의 끊임없는 논란거리중 하나이다. 특히 이문서의 경우도 끊임없는 수정전쟁이 벌어졌다.
10 얘기거리
- 2005년에 미스코리아 출신 이수진과 결혼했다. 2007년에는 쌍둥이 자매를 득녀. 참고로 2010년 결혼한 은지원의 前 부인이 이동국 부인의 언니인지라 은지원은 동서지간이 되었다. 1박 2일에 출연했을때 자막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은지원이 2012년 경 이혼을 하면서 지금은 남남사이. 2013년 또 쌍둥이 자매를 득녀하며 4자매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힐링캠프 녹화분에서 최근 아내가 또 임신해서 자녀를 다섯 둔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고 밝혔고, 2014년 11월에 득남하게 되었다.
3 유효슈팅 5+골. 그런데 아내가 자식 욕심이 많은편이다(..) 이러다 축구팀 만들지도 모르겠다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가 끝난지 1~2년 정도 후 당대의 인기가수였던 김현정(롱다리)과 열애설이 퍼지기도 했다.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출전했으면서 현역으로 활동중인 유이한 대한민국 현역 선수였다. 전 세계적으로도 10명 이하인 타이틀. 또한 대한민국에서 최연소로 월드컵 경기에 출전해본 기록이 있는 선수이다. (만 19세 1개월 22일). 여담으로 프랑스 월드컵 출전 멤버인 다른 한 분은 워낙 나이 있으신 유명하신 그 분... 그러나 2016년 7월 19일 김병지의 은퇴선언으로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유일한 현역 선수가 되었다!
- 한상균의 사진으로 인해 가장 많이 웃음거리가 된 사람.
- MD5 배틀에서는 최약의 이름 중 하나.
- 포항 팬들에게는 애증의 존재. 까임은 받아도 자기 새끼라고 열심히 실드를 쳐줬지만 미들즈브러에서 실패하고 K리그 복귀할 때 자신들이 제시한 연봉보다 더 낮은 금액에 성남으로 가버려서 까로 돌아선 팬들이 많다. 이 웹툰을 참고하면 당시 반응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포항에서 먼저 계약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동국이 사인을 했으면 포항에 왔을 것이나 선수 본인이 거부하고 더 낮은 몸값으로 다른 팀과 계약을 맺었다. 윗 문서부터 계속 강조했지만 성남이 포항보다 더 적은 연봉을 제시했다. 차라리 성남이 더 많은 연봉을 줘서 떠난 것이면 대다수의 포항팬들이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동국 포항 시절부터의 포항 팬들은 이동국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구단에서 호의로 이적료 없이 영국에 보내줬고 더 많은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과 계약을 했으므로 사실상 구단에서는 섭섭하게 해 준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적료 없이 다른 팀으로 이적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더 적은 연봉으로...
- 그리고 국대혹사 때문이기는 한데 사실상 포항에서는 기여한게 없다. 우승이나 개인수상 관련해서는 포항에서 신인왕을 수상한게 전부이다. 심지어 포항소속으로는 득점랭킹 상위권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 괜히 국대 나가서 다치고 오고 이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리그 팀에서느 연봉을 받으면서 국대소속으로 뛰는 격이었고, 이에 포항은 이동국 대신에 실력도 경기감각도 애매한 비주전을 지속적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짜증나는 존재였다. 이 시기 국대 선수를 보유한 클럽이 다 그랬지만 이동국의 국대혹사는 독보적이기 때문에 더욱.[60]
- 반면 성남 팬들에게는 증밖에 없는 존재이다. 08년 여름에 우승권 경쟁을 하던 성남이 야심차게 꺼낸 카드지만, 그 카드 때문에 성남은 완벽히 붕괴하였고, 김학범 감독마저도 사퇴하게 만들었다.
- 2013년에는 성남과의 경기에서 성남에 부상자가 발생해 공을 걷어낸 후 이동국이 성남 쪽으로 공을 돌려주려 했는데[61] 너무 킥이 정확하게 들어가서(...) 골키퍼가 잡지 못해 졸지에 골이 들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잠시 분위기가 험악해졌으나 전북의 최은성이 자책골을 넣어주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괜히 고의로 슈팅을 했다면서 상대방 밀치고 퇴장당한 김태환만 나쁜 놈 되어 버렸다
- 전북 팬들에게는 이장님 다음으로 가장 사랑받는 존재이다. 조재진이 전북에도 스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선수라면 이동국은 전북에서 부활하고 현재까지 리그에서 손꼽히는 강호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최진철 전 전북 선수 이후로 선수로선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선수인지라, 국대가서 멘탈 깨어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국대로 보내지 말자, 나 국대 안볼래같은 입장을 보이는 팬들도 있다. 물론 반대로 최강희 감독이랑 이동국 때문에 국대를 본다는 팬들도 있었다. 어쨌든 현재 국대와 그 국대(만 보는)빠들을 향한 전북팬들의 증오에 최강희 감독과 함께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수원의 곽희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 한번은 곽희주vs이동국 스페셜 영상이 나온적도 있다. 곽희주 뿐 아니라, 경기내내 일대일로 들러붙고, 돌아서지 못하게 파울불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수비를 펼치는 유형과의 매칭에 상대적으로 약한데 심리적 견제에 약한 특유의 유리멘탈과 맞물린 것으로 보인다. K리그 경기를 보면, 대부분의 팀들이 전북과 붙을 때 이동국을 이런 방식으로 마크를 시키곤 한다. 문제는 전북은 리그 수위권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많이 포진한 팀이기때문에 이동국을 수비수 한명이 전담하다보면 공간이 나고 그 공간을 누군가가 파고 들어 골을 넣는다는 점이다.
- 1998 월드컵 이후 한동안 한국축구의 희망이자 아이콘으로 인식되어 미디어에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일이 많았다. 스피드왕 번개에서는 박찬호와 투톱을 이루고(...)
그래서 5-0으로 진 것 같다.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선 일장기를 달고 일본 대표로 나오는 모습이 나온다.
- 2013년 2월 말 이동국의 이야기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
- 피파 온라인 3에서도 능력치가 좋은 편이다. 아무래도 K리그의 대표 스트라이커인 것을 배려한 듯하다. 한국선수 중에는 전설급 선수들을 제외하면 골 결정력이 최고수준이며, 몸싸움, 발리 슛 등의 능력치도 수준급. 장신 버프를 받아 헤더능력도 좋고, 위치 선정까지 나쁘지 않다. 때문에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는 상당히 좋다. 오버롤은 70전후라서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닌데, 주요 능력치가 좋다보니 한국국적 케미를 쓰는 유저들에게 상당히 애용받는다. 하지만 발이 느리고, 개인기가 좋은 편은 아니기에 전천후형이나 크랙형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트위터 이용이 활발한 편은 아니지만 가끔씩 글이 올라오며, 자폭성 개그를 즐기는 듯하다(...)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 2014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의미를 잊지 말자는 글을 올렸는데 반성하는 의미라면서 자기 입대 사진을 올렸다(...)
- 독일과 브라질의 4강 경기 후 독일 승리에 걸었다가 만원을 딴 사실을 올렸는데, 해쉬태그에 "불법베팅" "만원벌기" "점쟁이동국"이 있다(...)
- 최근 대표팀에 발탁되면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40살이 되어서도 몸 상태가 좋으면 계속 뛰면서 골을 넣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센츄리 클럽 가입 기념으로 두골을 폭격했다.
- 최근의 인터뷰로 다시 멋진 멘탈을 증명해주셨다.
- 독일과 영국 무대에서 실패를 겪고 돌아왔지만, 몸값 때문에 K리그 보다 못한 리그에 가지는 않았다. K리그와 A매치에서의 활약 덕분에 왕서방네와 기름쟁이들의 열열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생까고 K리그를 묵묵히 수호하고 있다. 한창때 이동국과 같은 세대의 선수들이 '가자, J리그로~' 노래를 부르고, 후배들도 중동과 중국에서 몸값 비싸게 준다면 냉큼 이적하는 것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위에 언급된 힐링캠프에서도 관련 부분을 언급했는데, 그 쪽에서 제시한 급료가 말 그대로 빌딩이 왔다갔다하는 수준이라서 매우 고민이 많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동이나 중국으로 이적하는 선수들이 이동국에 비해 상도덕이 없다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다. 프로스포츠에서 선수들의 직업으로서의 수명은 다른 직업들보다 짧고, 지도자로서의 자리 또한 한정되어 있어 선수 생활 이후를 생각하기 쉽지 않다. 짧은 선수 생활에서 벌 수 있을 만큼 벌어두는 것이 선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프로스포츠에서 종사자들에게 돈을 뛰어넘는 가치를 강요하는 것은 일견 아름다워 보일지 모르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도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어디까지나 이동국이 은퇴후 진로가 어둡지 않고 돈이 크게 아쉽지 않은 리그 탑 플레이어라서 가능했던 일이다.
- 2014년 9월 4일 베네수엘라와의 평가전을 앞둔 전날 부천종합운동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오는중 사진을 찍어달라는 어린팬 엄마의 요청에 아이들에게 드루와를 시전했다.
- 등번호는 항상 20번을 고수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길, 자신이 포항에서 뛰던 시절 20번을 달던 선배를 존경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홍명보가 국가대표를 은퇴하자 공석이 된 20번을 이동국이 이어받았으며, 이동국이 나이가 너무 많아져 국대 차출이 불안해지자 '제 2의 홍명보'라는 평가를 받는 홍정호가 이어받았다.
- 2016년 5월, 소속팀인 전북 현대가 심판매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이동국의 축구 활로에 갑자기 제동이 걸리게 생겼다.
- 동년배 다른 선수들에 비해 sns을 꾸준히 하는 편이다. 이유는 sns 또한 팬서비스의 한 종류로 생각한다고...
그렇다고 업뎃이 자주 있는 편은 아니다. 많아야 1주에 한번꼴
- 동국대학교와는 이름이 같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종종 엮이곤 하는데,공교롭게도 개명 전 이름이 동국대학교의 한자 이름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東國이었고, 동국대학교가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대학인데 이동국 본인 역시 불교 신자라는 점에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동국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위덕대학교 출신인데, 동국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위덕대학교 역시 불교 종단 대학이다. 단 이쪽은 동국대학교를 운영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대학이 아닌 대한불교진각종 종단 대학이다.
- 국내 스포츠선수 중 3번째로 많은 인스타그램 팔로워수를 보유하고 있다. (2016년 8월 17일 기준 31.7만명)
11 이동국 마이너 갤러리
이동국 마이너 갤러리- ↑ 원래는 李東國(이름때문에 많이 엮이는 그 대학교의 한자이름도 바로 저것이다. 東國이라는 이름은 예전부터 동쪽의 나라라는 뜻으로 한반도를 지칭할 때 흔히 쓰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었는데 2007년에 개명했다. 원래 음을 그냥 내버려두고 한자만 개명하는 경우는 사주팔자에 의해서 개명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동국의 저 한자이름은 작명사주상 최악의 획인 26획(李(7획)+東(8획)+國(11획)=26획)이며 아마도 그 때문에 계속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했다고 판단해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개명한 同은 東보다 2획이 적은데 이러면 이동국의 한자 획수는 총 24획이 된다. 24획은 33획(참고로 모든 선거마다 당선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근혜가 33획(朴(6획)+槿(15획)惠(12획)=33획)이다.)만큼 극강의 획은 아니지만 나름 잘나가는 획수로 본다.
- ↑ 참고로 개명신청에서 음은 내버려두고 한자만 변경하는 개명신청은 호명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해준다.
- ↑ 참고로 겹 쌍둥이에 남동생이다.
3유효슈팅 5득점.이동국의 며느리가 될 사람은 네 명의 시누이 밑에서 살아야 한다. - ↑ 2016년 6월 5일 기준
- ↑ 2016년 5월 8일 기준, 관련기사 http://sports.news.naver.com/kleague/news/read.nhn?oid=139&aid=0002039313
- ↑ 물론 빅리그에선 크게 부진했고, 대표팀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그르친 적이 있었으며, 아시아권을 벗어나면 국제대회 기록도 일천하다. K리그에서도 성남 팬들에게는 좋은 기억이 없었다. 때문에 박지성, 이운재, 차범근, 홍명보, 안정환 같은 위상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 ↑ 다만 후술하겠지만 이동국은 1998년 유망주 시절부터 국가대표에서 엄청난 혹사를 당했고, 이것이 이동국의 폼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2002년의 국대 차출 실패와 빅리그에서의 실패는 1998년부터 이어져온 혹사의 영향이 크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 ↑ 일부 축구팬들이 이 문구에 대해서 딴지를 걸기도 했으나 이동국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뛴 역대 한국 선수들 가운데 3번째로 많은 A매치 득점을 기록했고, 대한민국에서 13명뿐인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며, 아시안컵에서도 통산 10골로 단연 한국 선수 최다 득점자인데다, K리그에서는 올타임 넘버원으로 꼽혀도 손색없을 커리어를 가진 선수다. 당장 나무위키만 보더라도 김기동, 신태용, 최은성 등 국대에서의 활약이 이동국보다 훨씬 낮다고 평가되는 선수들도 K리그 활약만으로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 호칭이 붙어 있고 여기에 아무런 반론이 제기되지 않는데, 유독 이동국만 물고 늘어질 이유는 없다.
- ↑ 1998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과 2010 남아공 월드컵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전을 합해서 겨우 51분 뛰었다.
- ↑ 중국 축구팬들이 중국을 상대로 할 때 활약한 그를 중국식 발음으로 부르던 것이 한국에서 놀림거리로 된 경우. 근데 시간이 흐르면서 빠도 까도 다들 동궈라고 부른다. 이승엽의 오푼, 홍진호의 콩과 같은 케이스. 심지어 축구계 후배들도 동궈형으로 부른다.
- ↑ 최용수와 투톱을 이뤄 선발출장한 첫 경기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2-3 뜬금패를 당하는 바람에...
- ↑ 훗날 리웨이펑이 k리그에 입성하고 이동국은 그 때뿐 아니라 번번이 중국을 괴롭혔다, 너무 미웠다, 그러나 지금은 좋은 친구일 뿐이다...라고 인터뷰했고 이동국 역시 리웨이펑은 내 오랜 친구라고 답변했다. 세월이란....
- ↑ 그 때는 포르투갈 ㅋ 우루과이 ㅋㅋ 말리 ㅋㅋㅋ 이런 분위기였지만...
- ↑ 골을 넣은 선수는 레체의 돌풍을 이끌며 모나코에서도 잘 나가다 세비야에서 훅 갔던 체반톤. 한 때 위닝 마스터리그에서 키웰, 체반톤, 이천수 유망주 트리오로 우승하던 시절이 있었다...
- ↑ 이 때가 박지성의 첫번째 국가대표 데뷔. 이름날린 유망주도 아니고 인맥으로 뽑혔니 마니 말이 많았지만 이 후 박지성은...
- ↑ 이동국은 타고난 체격과 달리 몸싸움을 싫어한다. 대신 공이 왔을 때 슛을 때릴지 패스를 돌려 공격작업을 계속 이어갈지 빠르게 결정하기 때문에,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활동할 때가 더 위협적이다. 청대 시절 공간 침투가 뛰어난 김은중과 투톱을 이뤘을 때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보인 점도 그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축구감각을 보고 쉐도우로 키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란 말도 있었지만 아시아 정상급 피지컬인 터라 걍 최전방에 박았다.
- ↑ 이런 인식이 생겨난 건 한국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천하의 개쌍놈조영증이라는 감독이 자신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회피하기 위해 이동국이 게으른 천재라고 언플한게 사실인양 퍼진 것이다. - ↑ 이 시기 리그에서는 이미 김도훈.김현석.노상래 등 피지컬과 스피드 외에 센스와 지능을 무기로 삼는 공격수들이 활약하며 독일식 축구의 헤게모니가 약해지고 있었다.
- ↑ 박태환이 잠시 부진했을 적에 건방져졌느니 싹수가 없느니 게으르니 레파토리마저 똑같은 걸 떠올려 보면 세월이 지나도 인걸은 유구한 듯 하다. 참고로 수영 박태환 선수는 약물 걸렸다.
- ↑ 간단한 사실을 적은 기사로부터 추측한 거긴 하지만, 본인이 원해서 성립된 행사가 아니었을 거 같긴 하다. 노래행사라든가 뭐 그런 거...
- ↑ 사실 한 팀의 주장 완장을 찬 지금도 국대에서 죽쓰거나 욕을 먹고 오면(사실 요즘엔 잘해도 욕먹는 처지이다...안습)리그에서도 폼이 폭망하고, 다시 리그에서
힐링폼을 끌어올리고 국대가면 다시 어떻게든 꼬투리가 잡혀 욕을 먹고 돌아와 축 쳐져있는 모습이나,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팀 경기가 잘 안풀리면 딱 봐도 심리적으로 압박을 엄청 받고 있다하고 써붙힌 듯한 모습을 보면 썩 활발하거나 낙천적인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끔 전북팬들에게도 멘탈이 유리장같다고 놀림아닌 놀림을 듣기도 한다. - ↑ 월드컵 엔트리가 23명이고, 그 중 골키퍼가 3명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 포지션에 두 명 꼴로 선발되는데, 이 때 히딩크호에 중앙 공격수는 세 명이 선발되었다. 황선홍, 안정환, 최용수. 황선홍이나 안정환은 말이 필요없고, 최용수 역시 당시 J리그에서 득점왕 경쟁을 하는 등 최고조에 달해있는 상태였다.
- ↑ 10년이 지나고 이영표는 군대가라 슛에 대해 사과를 했다. #
- ↑ 이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로 유명한 해운대 굴욕(?) 사건이 있다. 일본과의 경기 후 한국에 도착한 독일 선수들은 부산 해운대에서 산책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선수들이 길을 걷고 있는데도 시민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꽃게탕집 수족관 사진도 이때 생산된 것이다.
- ↑ 당시 아시안컵 대표팀의 공격진은 거의 붕괴되다시피한 상황이었다. 프리미어리거 3인방(박지성, 이영표, 설기현)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부상당하고 김남일도 타장 수술로 이탈하는 바람에 대표팀 구성에 난항을 겪어야했다. 중원을 지탱해줄 선수도, 찬스를 만들어줄 선수도, 측면수비를 책임져줄 선수도, 결정을 지을만한 선수도 모두 부상을 당해 쓰러져있었다.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을 거의 고스란히 쓸 수 있었던 2004년 대회보다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동국은 미들스브러에서 급격한 폼 저하를 겪으며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보내고 있었다.
- ↑ 이것도 이거지만 베어벡의 전술 자체가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 두고 중원에서 진흙탕 축구를 지향했다. 게다가 한국은 비겨도 아쉬울 게 없잖아? 이운재가 있는데.
- ↑ 술을 마시러 간 것 자체도 잘못인데, 거기가 또 여자 부르는 곳이었다.사실 정확히 말하연 여자를 불러 2차를 나가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 룸살롱이었다.... 본인들은 놀기보다는 고참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의견을 나눠 팀을 이끌어나갈 방향을 찾으려는 의도였다고 변명했다. 굉장히 이동국 편향적인 의견이긴 한데, 이동국이 또 이 고참들 중에서는 가장 막내고 나이터울이 꽤 된다. 즉, 먼저 가자고 했을 리는 없고, 가자고 했을 때 안 가겠다고 거절하기도 어려운 그런...물론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는 매우 이동국에 편향된 의견이고 대회 도중 2차를 통한 성매매를 주업으로 삼는 룸살롱을 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국가대표, 프로 선수로써 실격사항이다.
- ↑ 이 패러디 때문에 이 슛은 카페베네슛이라는 오명도 썼다.
- ↑ 경기장이 해안가 근처라 습한 상태에 잔디에 물을 뿌렸고 후반전에는 폭우가 쏟아져 흙이 단단하게 자리를 못잡고 뭉쳤다고 한다.
- ↑ 측면이 살아나지 못하였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오른쪽 측면에서 서정진이 활발하게 움직여주었고, 박주영도 좋은 움직임에 2골을 넣을 정도였다.
- ↑ 피파같이 포지션에 구애받지않는 게임에서 보면 최고겠지만 축구 좀 볼줄 아는 사람이면 이게 얼마나 뻘짓인지 잘 알텐데... 우선 박주영,지동원,이동국 모두 중앙공격수에 본인이 해결하려는 스타일이다. 아무리 이동국이 2선에 내려오는 플레이가 늘었다고 해도 전북 현대에서 보여준 모습은 전형적인 골잡이인데 이 셋이 무한 스위칭에 서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이에 스피드가 떨어지는 이동국은 당연히 급속도로 공기화...
- ↑ 수비진 리더 역할을 해주는 곽태휘와 골키퍼들 맏형 노릇하는 정성룡
- ↑ 2015시즌 리그를 씹어먹은 염기훈도 2015시즌 만 32이란 나이때문에 대표팀 선발에 상당한 고심을 했다고 밝힌 슈틸리케 감독인데 이동국은 염기훈보다 5살 위다.
- ↑ 사실 황선홍 이후 한국의 전통적인 대형공격수는 최용수였다. 실제로 황선홍 은퇴 이후 최용수가 원톱으로 나서기도 했고...그러나 2002년 월드컵 미국전 실수로 인해서 이미지가 안 좋았고 나이도 많았던지라 설기현과 조재진에 밀려났다.
- ↑ 이동국과 안정환이 트래핑 연습 도중, 안정환이 실수를 하자 이동국이 분노하면서 안정환에게 소리쳤다. 아이스크림 내기라도 했나?
- ↑ 그래서 이동국-박주영 투톱의 롤을 바꾸자는 의견도 좀 있었다.
- ↑ 전대륙 상대 득점 기록이 힘든 이유 중 하나가 오세아니아 국가를 상대로 득점하기가 어려워서다. 대륙도 다른데다 전체적인 실력도 떨어져 국제대회에도 만나기 힘들기 때문에 A매치에서 맞붙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란 없이 전대륙 상대 득점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는 이재성이다. 국가 대표 데뷔한지 얼마 안돼 뉴질랜드를 상대로 골을 기록했기 때문....
- ↑ 국대에서는 기대치가 높음 만큼 욕을 많이 먹었다. 그래도 발리슛 만큼은 칭찬 받았다. 전북이 리그 강호라는 것을 감안해보아도 리그 내에서 슈팅 당 골 비율이 가장 높은 순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는 건 대단한 것이다. 이동국이 개발이라면 리그 내 모든 용병들도 개발, 아시아에서 개발이 강을 메울 것이다. 다른 능력이 지적받아도 순수 결정력만큼은 절대 나쁘지 않다.
- ↑ 이제 와서는 활동량이 적다고 까는 사람은 그냥 국대조차 제대로 안 보는 사람으로 취급해도 될 정도다.
허정무는 이동국이 박혀 있으면 공격진의 활동량 부족을 지적하는데 막상 이동국이 내려오면 언급은 안 한다.이동국의 무릎을 작살낸 장본인이 그런 소리를 하면 쓰나전체적으로 어린 시절 묻지마 강슈터 기질과 그 둔해 보이는 움직임이 이런 편견에 기여한 바가 크다 - ↑ 안정환, 이을용의 청춘 FC에서 안정환이 슈팅 훈련할 때 반박자 빠른 슈팅을 가르친 바 있으니, 궁금한 사람들은 찾아 보면 된다. 어떤 축구팬이 주장한 것처럼 반박자 빠른 슈팅이 피지컬적인 문제라면, 안정환이 어떻게 반박자 빠른 슈팅을 K리그도 입성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모든 선수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가?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 다리를 들어올렸다 내리는 동작에는 인간이 당연히 반응하겠지만, 기술적으로 숙련되고 육체도 완성된 국가대표 100경기급 초엘리트 선수들끼리 다리를 들어올렸다 내리는 동작에 느리고 빠름이 있어서, 인간 반사신경으로 그 차이를 간파하는 것과 팔 근육의 움직임을 보고 총알을 피한다는 것은 상당히 비슷한 얘기 아닌가?
- ↑ 그래서 당연히 골키퍼가 빠른 템포 슈팅에 대응하기는 어렵지만 파워와 정확도 문제 때문에 대응이 느려도 충분히 따라가서 방어할 수 있다. 반면 제대로 차는 것도 역시 여러 여러움이 있지만 제대로 차기만 하면 골키퍼가 막아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축구계의 상식 아닌가? 물론, 이동국의 슈팅 타이밍이 이상하게 느려서 빠른 수비수가 막는다는 얘기를 하자면 그건 당연히 피지컬적인 주제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 ↑ 메시나 로벤, 호나우두나 오웬처럼 고속이동을 하면서 잔발이 좋아서 상대방이 템포를 못 잡게 하는 것은 그냥 슈팅의 문제를 떠나서 그 친구들이 축구신에 가까운 엄청난 선수들일 뿐이다. 박지성도 그렇게는 못하고 이동국도 당연히 그렇게 못한다. 빠른 템포 슈팅의 대가인 라울, 인자기도 그렇게는 못한다.
- ↑ 김학범은 이동국의 영입을 반대했다고 한다.
- ↑ 박지성도 박주영도 그렇고 홍명보는 이와 같은 막무가내 국가대표 지도자 활동에 일가견이 있다.
- ↑ 안정환은 이탈리아 선수들과 어울리기 위해 나이트도 클럽도 열심히 가고 차도 옷도 좋은 것을 입었다고 했지만, 이동국은 독일 시절에는 주로 집에서 음악을 들었다고 하며, 결혼 이후인 영국 시절에는 자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 ↑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면, 독립시행으로 볼 경우 박지성도 PSV에서 처음 1년은 부진하다 이겨냈다. 물론 적응기 같은 거 없는 선수도 많다.
- ↑ 시안이의 태명이며 이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
- ↑ 현재 이동국만 주로 전주에서 지내고 나머지 가족들은 송도에서 지낸다. 이동국이 전북에서 축구를 함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송도로 이사간 이유 둘째딸 재아가 초등부 테니스선수인데 송도에 이동국의 친구가 테니스장을 운영하기 때문.
- ↑ 대박이는 태명이고 본명은 이시안. 태명이 대박이인 이유는 이동국이 다섯째를 가졌다고 주위에 말하니 다들 반응이 '대박'이라고 해서 대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 ↑ 그 덕분에 대박이 전용 노래가 빅뱅의 대성의 대박이야이다.
- ↑ 활달하고 가끔씩 사고를 쳐서 비글자매라는 별명이 생겼지만 사실 방송에서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유별나지도 않다.
- ↑ 이동국 자신도 대박이에게 많은 관심을 못 주는게 미안한지 방송에서 대박이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이 종종 나왔다.
- ↑ 힐링캠프에서 이동국 스스로가 밝히길 지친 마음에 촛불을 바라보며 '너 여기 왜 온 거니?' 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 ↑ 그래서 그런지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자주 "첫째 아이들과는 추억이 많았다.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다."라고 자주 언급한다.
- ↑ 이 때문에 15년 10월 11일/18일 방송분에서 두가족의 합방이 이루어졌다.
애만 8명.아들아들아들아들딸딸딸딸 - ↑ 27분 53초
- ↑ 이동국은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엘리트 코스(포항 스틸러스의 유스 과정을 그대로 거쳤다.)를 밟으며 성장한 반면 안정환은 축구를 배우던 어린 시절 엄청 고생하며 살았다. 특히 심각한 생활고를 겪는 환경에서 선배들과 지도자들에게 맞아가면서 축구를 했기 때문에 아들에게는 그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축구를 반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 일반적으로 어떻게든 병역비리에 연루된 자는 절대로 어떤 사유로든 군입대를 연장할 수 없다. 기회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이동국은 원칙에 어긋나는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
- ↑ 그래서 S급이 아니라 애매하게 국대에 뽑힐 듯 말 듯한 A급 중 최상위 선수와 리그 씹는 용병을 보유한 성남이 잘 나가던 시기였다.
- ↑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축구에서의 불문율이다. 안 그러면 대차게 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