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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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17일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이름난징대학살 문서
Documents of Nanjing Massacre /
Les documents du massacre de Nanjing
국가·소장Central Archives of China
The Second Historical Archives of China
Liaoning Provincial Archives, China
Jilin Provincial Archives, China
Shanghai Municipal Archives, China
Nanjing Municipal Archives, China
The Memorial Hall of the Victims in Nanjing Massacre by Japanese Invaders
등재유형기록유산
등재연도2015년
제작시기1937년~1938년
1945년~1947년
1952년~1956년
언어별 명칭
한국어난징 대학살, 남경 대학살, 남경 대도살[1]
중국어南京大屠殺(난징 대도살)[2] 혹은 南京大屠殺(난징 대도살)[3]
독일어Massaker von Nanking
네덜란드어Bloedbad van Nanking
러시아어Нанкинская резня
스페인어Masacre de Nankín
영어Nanking Massacre(난징 대학살) (혹은 The Rape of Nanking)
이탈리아어Massacro di Nanchino
아랍어مذبحة نانجنغ
일본어난징 대학살(南京大虐殺, なんきんだいぎゃくさつ 혹은 난징 사건(南京事件, なんきんじけん)[4][5]
태국어การสังหารหมู่นานกิง
포르투갈어Massacre de Nanquim
프랑스어Massacre de Nankin
베트남어Thảm sát Nam Kinh
필리핀어Masaker sa Nanking
인도네시아어Pembantaian Nanking
말레이어Pembunuhan Beramai-ramai Nanking
폴란드어Masakra nankińska
"어느 누구도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처사를 당해서는 안 된다." -세계 인권 선언
"인간창조한 뒤 병사들이 어린아이를 공중에 던지고는 웃으며 총검 끝으로 꿰어 받아내고 그것을 즐기는 모습을 오늘에야 처음 보았다." -린위탕[6]

1 소개

인류광기에 빠졌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최악의 대학살[7]
현재 중국 내의 혐일 감정이 심한 이유 중 하나.

일본군은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국 국민당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학살의 정확한 규모는 불명확하지만, 전후에 일부 유골 매립지를 근거로 든 연구 결과가 수만명 단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적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최소가 12만 명[8]이며 최대 추정숫자는 약 35만 정도이다. 일본 학계에선 10-20만명 정도가 중론이며 프랑스에선 약 9만명정도가 학자의 의견이다. 다만 여기서 9-20만명은 난징과 주변 변두리 정도에 한정한 것이며 주변 도시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20~30만 명은 난징 시내 학살 숫자가 아닌 난징 근교와 진격 도중 숫자도 포함한 것이며 당연히 난징 한곳에서 저렇게 나오기는 힘들다. 나중에 넷 우익에게 당할 수 있으니 명심하자.

2 명칭 문제

중국에서는 난징 대도살, 영어로는 Nanking Massacre. 일본에서는 '학살'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않고 '난징 사건'으로 불렸었다. 물론 축소, 은폐하려는 의도였다.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근래에는 일본의 교과서에서도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의 상세일본사(詳説日本史)와 도쿄서적에서는 여전히 난징 사건(南京事件)이라고 부르지만, 데이코쿠서원은 난징 대학살, 기요미즈서원은 난징대학살사건, 야마가와 출판사에서는 상세세계사(詳説世界史)와 일본문화출판에서는 난징학살사건 이라고 부르는 등이다. 또한, 2006년의 중일수뇌회담의 결과로 진행된 '일중역사공통연구'의 논문의 일어판에서도 '난징학살사건'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내에서도 정직한 인간들이 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언론에서 맨날 어그로꾼들만 보도해줘서 그렇지...

3 배경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뉴스. 그걸 또 보관해놓고 있었다니...[9]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는 베이징상하이에서 시작해 빠른 시일 안에 주요 대도시를 점령하고 중국 국민당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속전속결이 기본방침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가 국민당군의 거센 저항으로 예상보다 길어지고 결국 오송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서야 승리를 거두게 되자(중일전쟁 항목 참조), 눈이 뒤집힐 대로 뒤집힌 일본군은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진군했다.

1937년 10월 9일 상하이가 함락된 후 국민당 수뇌 멤버들은 난징을 전략,전력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이 때 유일하게 탕성즈 한 사람만이 "난징을 필사적으로 지켜 생사를 함께하겠다."고 방어전을 주장해 난징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남는다. 11월 15일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10]으로 옮겨 철퇴하고, 12월 10일 난징에 남아있는 중화민국군은 일본군의 최후통첩을 무시, 이에 일본군은 난징 점령작전을 개시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난징 방어군 사령관 탕성즈는 전투 개시 직전에 더럭 겁을 먹고 장제스에게 퇴각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당연히 씹었고 이에 탕성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12월 12일까지 중국군은 난징을 그런대로 잘 방어했지만 탕성즈가 처음부터 난징 외곽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방어할 수 있는 여러 요충지역들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방어 전략을 잘못 수립했는데다가 화력과 병력의 질적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장기적인 사수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결국 12월 12일 일본군은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고 탕성즈는 그날 오후 8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 다음에 참모들과 함께 우한으로 달아났다. 사령관이 사라진 난징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난징에 남아 계속 싸우거나, 난징을 어떻게든 벗어나는 등 완전히 와해된다. 양쯔강에는 수십만 난징 시민들과 중국군이 살기 위해 아수라장을 이루었고 일본군은 그곳을 집중 공격함으로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다. 12월 13일 오전 4시에 난징의 정부 청사가 함락됨으로 난징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난징에는 아직 50~60만에 달하는 패잔병들과 시민들이 남아있었다.

4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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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

그 어떤 단어로도 난징의 참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손쉽게 난징을 손에 넣은 일본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한 국민당군은 물론,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넣었다. 이들 중 과연 몇이나 패잔병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시당초 그 시대에 손에 굳은살이 안 박힌 남자가 많기나 할까 싶다. 물론 패잔병이 맞다고 쳐도 전투의지를 잃은 사람을 학살하는 것도 크나큰 전쟁범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야만적이나, 나중에는 총알이 아까워서 칼로 난도질하거나 생매장까지 했다고 한다. 전후에 학살에 참가한 한 군인의 일기가 발굴되었는데,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난징 대학살에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 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 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중국의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제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일부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7천에서 8천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시체를 소각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군에게는 그럴만한 충분한 양의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어 무푸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시체를 태우려고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에 연료가 바닥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결국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애초에 학살을 안했으면 이런 걸로 고생하지도, 연료를 낭비하지도 않았을것이다.

시아크완으로 끌려 온 중국인 포로들이 강을 따라 한 줄로 정렬해 있는 것을 목격한 종군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탕! 탕! 탕!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외에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쏘아 불을 붙이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연못에 밀어 넣어 얼어죽게 만들고 일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기도 했으며, 이유없이 어린아이를 전깃줄에 목을 매달았다, 또한 장작더미위의 나무 기둥에 묶고 사람이 완전히 익을 정도까지 불로 태웠으며 소년에게 염산을 부어서 죽여버리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어 가지고 놀았으며, 100여명의 사람을 묶고 코와 귀를 잘라내었다는 증언들이 쏟아진다

난징 밖에 있는 연못은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컬러 사진으로 찍었으면 더욱 섬뜩했을 것이다. 포로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하고, 포로는 그 구덩이 앞에 꿇어앉아 머리가 잘리었다. 많은 일본군은 칼 솜씨가 아주 좋아 칼이 내리치는 순간 머리가 떨어지고 몸은 저절로 구덩이로 떨어진다. 상해에서 난징까지의 도처에서 여자 음부대나무 작대기를 쑤셔 넣은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상관은 우리에게 여자를 강간한 후 죽여야 한다. 되도록 때려 죽여라. 총과 총검으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 일본 종군 사진기자의 증언

주씨 할아버지 집에 일본군이 들이닥쳐 40세의 주씨 며느리를 강간했다. 그녀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이 끝난 후 일본군은 60여세의 주씨에게 며느리를 강간하라 했다. 주씨 할아버지는 며느리 몸에 엎드려 그 짓을 하는 체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를 마구 때리며 진짜로 하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자기 며느리를 강간했다. 다음, 그들은 17세 된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라 명령했다. 아들도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 박옥상, '남경대학살'

임신 6개월의 19세 임산부 리슈잉은 일본군에게 배를 찔려 유산하고 얼굴에 18차례 칼을 맞았으며 37곳을 봉합했다. 이 일을 일본 사령관에게 항의 했지만 '어쩔 수 없다'라는 말만 들었고, 아사히 신문기자조차 '피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방임했다.

- 난징 대학병원 외과의사 로버트 윌슨이 환자 '리슈잉'에 대해 아내에게 쓴 편지

참고로 리슈잉은 천만다행으로 생존해서 난징대학살의 증언자로 활동했으며 일본 우익작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2004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국내기사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나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총검술 연습이나 목베기 시합에 사용된 것. 여기서 일본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가 10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다시말해 100인 참수 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다. 이런 천하의 개쌍놈들. 더 기가 막힌 건,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무슨 스포츠 시합 중계하듯 이 베기 시합을 대서특필했다는 것. 심지어 이를 통해 진검으로 베는 기술을 연마한 잡것들도 있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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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실제 기사↔ 100인 베기 초기록(엄청난 기록), 무카이 106 노다 105, 양소위 거기에 연장전. 벤 놈이나 기사로 쓴 놈이나 보통 미친 놈들이 아니다.전범재판때 벤 놈 뿐만아니라 이거 기사화 시킨 새끼도 미군이 기관총으로 날려버렸어야 하는데 그러나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전쟁중에 군인을 벤 기록인 줄 알았단다 항목의 상세 묘사를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14]

당연한 이야기지만 적 전투원과 싸우다 목을 벤 것이 아니면 100% 전쟁 범죄니 두 장교 모두 당연히 전후에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당했는데, 사형이 확정되기 직전까지 무죄를 주장했다고 한다. 웃기게도 당시 기사를 펼치며 자랑하던 이들이었지만 이 기사가 증거가 되어 자신들을 사형시키게 되자 왜곡이라고 발버둥쳤다고 한다.

이외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田中軍吉)라는 범죄자도 있었다. 역시 전후 붙잡혔고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문에 실릴 때는 아주 자랑스럽게 큰소리 치던 이 인간도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왜곡이라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무카이, 노다와 같은 날 총살당했다.[15]

여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아니, 더 심한 꼴을 당했다. 전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도 상당수가 저런 식의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반항의 기미가 보인다거나,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성병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죽음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특별히 이유가 없이도 학살당했다고 한다.

전후재판에 따르면 약 2,000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16] 현재는 8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숫자만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산채로 창자를 꺼내거나 유방을 도려내거나 벽에 못박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지옥이자 쇼크 사이트에서도 보지 못할 풍경. 이것도 모자라 상기했다시피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다고도 한다.

관련 증언에 따르면, 아무 집이나 찾아가 어머니를 강간한 다음 울부짖는 딸과 함께 우물 속에 던져버리고 그 안에 수류탄을 던진다음 우물문을 막았다는 천하의 개쌍놈이정도면 가히 is 쌈싸먹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 아니 이 쓰레기들과 악마를 비교한다는 것이 악마에게 큰 실례다. 소리가 나올 정도의 악행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여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들도 닥치는대로 강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이 중국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에도 일본군들이 민가에 들이닥쳐 소년을 집단강간하는 묘사가 등장한다.

당시 난징에 있던 서양인들의 기록과 제보에도 처참할정도로 강간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난징 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1971년 벵골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이 저지른 조직적인 강간[17]과 2차대전 중 독일 국방군과 SS가 소련에서 저지른 집단강간을[18] 제외하곤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에 대한 보스니아의 통계 자료가 정확하지 않아서 비교하기가 힘들지만 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집단 강간보다 난징 대학살에서 저질러진 강간은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추정한다. 임신 중인 여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임신 중이거나 막 출산한 여성도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 9개월의 한 여성은 강간을 당한 후 건강은 물론 정신마저도 이상해졌으며, 임신을 한 여성을 발로 걷어차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 임신한 여성을 강간한 후 재미로 그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 육군의 교범 자체가 민간인은 죽이고 그 지역은 모두 초토화하고 물자는 약탈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고 집단강간을 대놓고 방조하기도 했다. 교범에다가 저런 소리를 한 학살에 참가한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물론 같은 이야기를 다른 장교들도 태연히 떠들고 다니던 것이 당시 일본육군 내의 분위기였으니, 중국에 대한 멸시감+누적된 전쟁피로+교범에도 쓰여있는 학살과 약탈의 공인 및 전근대적인 군복무로 인한 사병들의 억압된 불만이 한꺼번에 결합하면서 폭발한 것이 난징 대학살이다.

4.1 난징 안전지대

당시 독일 나치스 당원이자 지멘스의 사원이었던 욘 라베(John Rabe)가 주도해 난징에 남아있던 외국인 선교사, 기업가, 소수의 조계지 경비대 소속 독일 국방군, 외교관들과 같이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한 것이다. 이는 난징 전투에 앞서 있었던 상하이 전투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상하이 안전구'를 본딴 것으로, 난징 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시내 한가운데에 위치해 약 2~30만 명의 중국인들을 일본군의 만행에서 보호하는 피난처 역할을 했다.

자세한 것은 욘 라베 항목 참조.
안타깝게도, 나치 부역 혐의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욘 라베 외에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 중 상당수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진링 여자대학에서 여성들을 지키고 기록을 남긴 미국인 윌 헬미나 보트린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쳤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끝내 194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일한 외과의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한 로버트 윌슨은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평생 시력 저하와 발작, 악몽을 겪었다. 그 외의 사람들 중에도 발작 및 일시적인 기억 상실 등 정신질환 증상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흑역사에 가깝지만 냉전으로 서방 국가와 대립할 당시, 중국에선 욘 라베를 제외한 서방 국가 인물들의 공로를 무시하고 오히려 미국인들이 난징 학살을 묵인, 방조했다는 등의 반서방 프로파간다를 퍼뜨리기도 했다. 다행히 냉전이 끝나고, 아이리스 장 등 난징 학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들의 공로가 알려져서 현대에는 중국에서도 안전지대를 지킨 외국인들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5 그 후

이런 광란의 6주간이 지나고, 1938년 봄에야 대학살은 종결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생체실험같은 일들은 있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모택동은 호기롭게 "우린 승전국이니 배상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장중정이 이겨놓은 것을 자신의 공으로 당시 일본에선 중국에 배상금으로 최소 500억 달러는 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총리가 중국에 방문하고 배상금 문제까지 땡처리했단 뉴스를 들은 온 중국이 경악에 휩싸였고, 특히 난징은 온 도시가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찬 울음바다가 되어, 급기야 난징에서는 난징 대학살 때 피해를 입었던 시민들이 시위 단체를 만들어 이들은 하나되어 모택동의 실책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하다가 모택동이 난징에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 단체를 강제로 진압하며 학살을 일으킬 정도로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그러나 일부 일본인들은 "우리가 중국놈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다니 수치스럽다."는 격분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당연히 중국에서 영화화가 많이 되었는데 웬만한 걸작도 일반인이 보기 힘들 정도의 묘사가 있으니 주의하자. 한국에서 난징 학살 기록 사진은 대부분 중국 영화 화면을 가져온 게 많다.

뉴트 깅그리치의 대체역사물 진주만[19]에서 난징 학살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역시 욘 라베가 잠시 나온다.

중국계 미국인 2세인 아이리스 장《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20](원제: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1997)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매우 적나라하게 까발렸다.[21] 이 책은 서구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말빨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 대사를 생방송으로 캐박살내며 미국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한국어/영문 할 것 없이 위키백과 항목의 상당수와 나무위키의 바로 이 항목의 많은 부분도 이 책을 인용한 것.

그러나 일본의 이런 왜곡 등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였던 아이리스 장은 그 후 일본 극우의 표적이 되었으며 상당한 협박위협에 시달렸다. 이후 후속타로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각종 막장 사례와 잔학한 실태 때문에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2004년 11월 9일 자살했다. 한편 일본 극우들은 "아이리스 장의 유서에는 일본 우익(극우)에 관한 기술은 없다"면서, 장이 자살한 건 자신들의 협박 때문이 아니라며 우기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장이 거짓말을 꾸며낸 데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했다"고 우기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족속들처럼 행동하고 있다. 물론 일본 극우들 때문에 자살했다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일본 극우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를 심을 수 있다는 반론도 있긴 하다. 그래도 일본 극우와 관련된 원인임은 변함 없다

2010년 중국 난징에서 난징대학살 73주년을 맞이하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통곡의 벽'이라는 대규모 추모식을 열었다. 홀로코스트만큼 중국인들에게 매우 가슴아픈 사건이기 때문에 바이두 백과의 "南京大屠杀"(난징대학살) 문서에 들어가면 페이지 전체가 흑백으로 되어있고[22] 중국친일파중국어를 할 줄 아는 넷우익들의 반달을 우려해 일반 회원이 편집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2014년 중국정부는 1월에 난징 대학살 관련 기밀 문서를 공개하였고 6월에는 위안부 관련 자료와 더불어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하였다.

2015년 10월 10일,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 학계의 해석

6.1 총 희생자수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수가 얼마냐는 것에는 학자에 따라 여러의견이 있다. 일본학자들은 중국정부보단 낮게 주장한다. 근데 이게 오히려 유럽권 학자들보단 높다는 주장이 있다. 예로 Tomio Hora 는 일본인인데 20만명을 주장한다. 근데 Jean-Louis Margolin는 프랑스 사람인데 5-9만명을 주장한다. 오히려 일본인 학자가 11-15만명은 많게 주장하는 것이다.

난징대학살 희생자수
주장총합시민 희생자수군인 희생자수군인 희생자의 기준희생자 공간범위희생자 시간범위출처
중국정부30만난징시[23]
Tomio Hora200,00080,000 - 100,000100,000-120,000모두난징시와 그 주변도시1937년 12월 초부터 1938년1월말까지[24]
Tokushi Kasahara160,000-170,00080,000-90,00080,000포로들, 저항하지 않은 군인들난징시, 난징 시 변두리, 난징을 둘러 싼 여섯 도시1937년 12월 1일부터 1938년 3월 사이[25]
Yutaka Yoshida최소 10만이상(30만까지 가능)시민 희생자수군인 희생자수포로들, 저항하지 않은 군인들1937년 12월 1일부터 1938년 3월 사이1937년 12월 1일부터 1938년 3월 사이[26]
Jean-Louis Margolin50,000-90,00030,00030,000-60,000포로들, 저항하지 않은 군인들난징시, 난징시 변두리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 까지[27]

7 일본에서

일본에서 난징 대학살을 대하는 자세는 3가지로 나뉜다. 대규모 학살을 인정하는 대학살파(大虐殺派), 학살을 아예 부정하는 부정파(不定派) 혹은 환상파(まぼろし派), 그리고 이 중간에 있는, 학살은 있었으나 사상자의 규모가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는 중간파(中間派)가 있다.

이제까지의 일본 여론에서는 대학살파가 주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 극우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서 불행히도 중간파와 부정파가 그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말이 있다.[28]

7.1 대학살파

7.1.1 학계

일본 내에서 주류. 최근에는 극우 세력의 깽판이 점점 심해지면서 이들이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그래도 제대로된 역사를 인식하고 알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개념인들.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비정부단체라고 무시만 할 것은 아닌 게, 이 단체가 발촉한 지 얼마 안 되어 난징대학살을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다.

당연히 일본학계에서도 난징대학살이 정설이다. 이건 중국에서도 알고 있다. 난징대학살을 소설이라 하는 책이 나오자 많은 일본 학자들이 반박하고 이건 중국논문에도 설명되어 있다. [29] 난징대학살의 대표적인 학자는 호라 토미오, 후지와라 아키라가 있으며 후지와라 아키라는 실제 일본군 장교를 복무한 학자로서 치밀한 실증연구로 부정파는 물론 중간파까지 이기고 대학살을 학계로 중론으로 만든 것으로 명성이 높다. [30]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장 朱成山 연구원도 후지와라 아키라를 전문적인 역사지식을 갖춘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라고 평가했다.[31] 마찬가지로 난징대학살 기념관 관장 朱成 山 관장은 후지와아 아키라와 호라 토미오 같은 학자들의 글을 우월한 일등급 저서 라고 평가했다.[32]

당연하지만 일본 난징대학살 논쟁의 승자는 후지와라 아키라와 호라 토미오 세력이다. 난징대학살이 현재 일본학계의 정설이고 이 학자들은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7.1.2 문화

모토미야 히로시의《나라가 불탄다》의 경우는 이 사건을 넣었더니만, 항의를 받아 작가가 실의에 빠져 연재를 빨리 끝내버렸다. 이 만화가 일본의 순수한 범아시아주의와 일본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의 대립과 좌절을 그려서 한국인들에게는 고까운 장면이 많음에도 이런 곤욕을 치른다.[33]

그나마 테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는 그 실태에 대해 꽤나 자세히 언급된다. 하지만 만화 자체가 실제 역사보단 픽션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구성이라 작중 나오는 '히틀러 유대인 음모론'처럼 학살 부분도 테즈카가 각색한 픽션으로 알고 있는 일본 독자가 많다.

7.1.3 대학살파인 하는 자들

하지만 난징 대학살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과거의 사례[34]를 들어 일본의 잘못을 희석시키려는 부류도 있다는데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부정파에 가깝다. 이런 자들은 부정파에 서술하길 권함.

7.2 부정파

비율상으로는 일본 내에서도 소수이지만, 허구헌날 깽판 부리며 온갖 어그로를 끌다보니 가장 주목받는건 이놈들이다.(...) 설명이 필요없는 천하의 개쌍놈들.일본의 넷상에서는 얘들이 주류이니 관련 일본 사이트에는 안 가는걸 추천.

당시 난징의 참상을 찍은 일본 기자들의 사진중 상당수가 검열로 전쟁 후에야 나오게 된다(흔히 접하는 사진의 원판들 옆에는 빨간 도장으로 검열이 찍혀 있다). 기자 하나는 관련 기사 및 소설을 쓰다가 고등계에 끌려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5]

전범 재판에서도 중요 증거로 인정받았고, 심지어는 일본의 역사학자들조차도 이 사건을 실제 사건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우익세력은 아직도 이걸 부정하고 있다. 아예 부정하는 견공자제분들은 학살 자체가 없었다는게 기본 입장이다.[36] 사망자는 대부분 전쟁에 휘말려 죽은 민간인, 탈출하다가 배가 전복된 군인들이라는 것. 혹은 더 나아가서 중국군이 시민들을 학살해놓고 일본군이 죽였다고 누명을 씌운다고 주장하는 바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셔야 할 분들도 존재한다.[37]

이 난징대학살 부정파論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 現 아세아 대학 교수가 있다. 이 사람은 대표적인 극우파로 대표 저작이 <난징 사건 증거사진을 검증한다.>이다. 이 책의 내용 구성을 보면 대부분이 사진에 나와있는 것들을 분석하고 '이래서 날조' 이런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는 '중국인이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다닌 것.' 혹은 '장제스의 국민정부의 날조극' 이라고 쓴 것. 물론 그게 근거가 될 턱이 없었고, 결국 이 작자는 난징대학살 생존자한테 제대로 걸려서 중국 난징 대법원에 법정소송에 강제로 끌려가 패소당했다.#

이런 데도 일본 넷우익, 극우파들은 지금도 '학살은 없었다'고 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들면 다음과 같다.

  •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
  • 반론: 난징 시내의 인구문제의 경우는 그 범위상의 문제이고 가장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적십자 사및 안전지대의 자료를 보면 학살 자체가 없기 보다는 숫자의 차이에 불과하다. 몇만이라도 학살당하거나 강간당하는 것과 인구문제는 무관한 문제이다. 사실 이 기준이라는게 '학살의 지역이 난징 시내인가? 난징을 포함한 주변 지역인가?'로 달라진다. 일반적인 일본의 시각으로 나오는 도시의 규모를 보면 사망자 수십만은 어렵다[38]는게 이런 논지이다. 실제로 난징 학살은 덴노가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터. 일반적으로 이런 시각을 가진 쪽은 난징 시내에서의 학살만 규정한다. 중국 정부의 입장은 그 주변지역도 같이 보는 셈.[39] 말도 안되는 과장이 아니면 어차피 주변에서 벌어진 학살이라면 포함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몇십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한 것. 더불어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날의 남경시의 범위와 그 당시의 남경직할시의 범위는 10배가 넘어갈 정도로 차이가 난다.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559.28km2만, 오늘날의 남경시는 6,582.31km2다. 둘 중 어디의 기준을 적용할지에 따라 그만큼 수치도 달리 나올 수 있다. 참고로 중화민국 시절의 남경시는 양쯔강 유역을 포함하지 않으나 오늘날의 남경시는 우리나라의 서울 한강처럼 양쯔강 일대를 포함한다. 비슷하게 흔히 600만으로 통칭되는 홀로코스트의 유대인 희생자들 역시 수용소에서 가스학살로 죽은 사람들만 세어서는 나오지 않지만 어디 홀로코스트도 없었다고 해보시지? 정작 일본의 극우와 넷우익들은 오늘도 히틀러와 나치를 열심히 까면서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덮어보려 발악하고 있다(...).
  •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참수효수가 금지되었다는 점, 그래서 남아 있는 잔혹 사진은 모두 중국 내전 때 벌인 사진이라는 것.
    • 반론: 2번째로 제시하는 참수 및 효수의 문제도 몇몇 잔혹사진은 일본인 기자들이 찍어서 본국에서 검열당한 도장도 있는 문제다. 당시 난징에서 벌어진 효수 장면을 중국인들이 했다면 굳이 일본에서 검열할 이유가 있었을까? 예를 들어 한국은 갑오개혁 이후로 참수가 금지되었고, 남한과 북한 모두 고문이 헌법에서 금지되었다. 부정파의 논지라면 한국전쟁 때 쌍방이 벌인 그 많은 학살도 다 거짓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 미국과 중국이 제시하는 사진은 대부분 조작이거나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복식 등이 다르다는 점.
    • 반론: 3번째는 전형적인 말장난인데 일부 사진은 충칭 폭격이나 상해 사변 사진을 난징 학살로 몰아붙인 것도 분명히 있다. 약간의 연출을 가미한 사진도 있지만 일본에서 검열삭제된 사진의 문제는 설명하지 않는다. 복식의 문제도[40] 문제지만 심지어 참수장면이나 대검찌르기 장면의 자세가 어설프다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는 이유[41]중국인이 일본군 복장을 노획해서 죽인 사진이다라는건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42]
  • 여러 증언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전혀 그런 사건이 없었다는 점.
    • 반론: 당장 위의《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부터 읽어보자.
  • 한도 가즈토시[43]의 의견: 당시 부대의 상황이나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보면 난징 진입때 남쪽으로 진입했던 부대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 반론: 그러나 참전증언자로서는 자신이 겪은 일만 본다면 얼마든지 다른 주장이 가능하다. 오히려 참전 증언자로서 학살을 증언하는 사람도 대단히 많고 중립적인 입장인[44] 외국인들이 본 일본군의 학살 증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극우세력들은 외국인 안전구역내에서 참살된 민간인만 피학살자 수에 넣는다. 심지어는 중국군이 민간인 복장으로 도망가다 죽었고, 민간인들은 그 옷을 주워입다가 중국군에게 참살되었다.는 논리로 사진에서 볼 수 있는 피학살 시체 대부분은 중국인이 죽이고 죄를 일본에 덮어 씌웠다.는 날조를 하는 주장을 펼친다.

일본 2ch넷우익들은 난징대학살은 한국인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이를 중국 웹에 퍼트려 한국과 중국을 상대로 이간질을 시도하기도 했다.[45] 그런데 이것이 중국인들에 의해서 "개구라"로 드러나자 2ch 넷 우익들이 의식했는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 말을 바꿔버렸다.[46]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혼란 상태에 빠진 난징 시민들이 한간(漢奸, 중국에서 매국노로 지칭) 색출 사냥 과정에서 일본군이 난징성에 입성해 치안유지 등에 힘을 기울였다.'는 식으로 기술해 학살만행을 전면 부정 하는 등 오히려 미화하고 있어서 문제.# 문서내용이 쓰레기 수준으로 낮다.[47] 사실 일본어 위키피디아 자체가 이 사건에 대해 적은 게 아니라도 일본에 불리한 내용은 적당히 미화하거나 왜곡한 게 많다. 따라서 위키피디아에 있는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를 읽고 싶으면 일본어 외에 다른 나라 언어 버전인 중국어나 영어 등으로 읽도록 하자. 당연히 중국인들은 이를 절대로 믿지 않으며 중국 정부 차원에서 미국, 유럽 등 서양 국가들에게도 난징 대학살이 명백히 있었던 일이라고 강력하게 로비를 하기 때문에 안심할 만하다.

일본 아마존 유저들은 난징 대학살을 다룬 <난징의 강간>을 날조라며 부정하고 모욕하고 있다. 중국 아마존 유저들과 강하게 충돌하는 것은 덤. 일본 아마존 평가.

그러나 정말 다행인 점은, 일본의 교과서 검정에서 난징 대학살 부정파의 의견은 당연히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다. 과거사를 미화하려고 혈안이 된 일본의 보수 우익들도 난징대학살은 워낙 팩트가 명확해서 무시할래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일부 개념없는 와패니즈들 중에서도 난징 대학살은 일본을 국제적으로 망신주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답이 없는 부류가 존재한다. 물론 이런 부류의 종자들은 당연히 한국에도 존재한다. [48]

난징 대학설 날조설에서 더 나아가 중국군 민간인 학살설까지 주장하는 글(번역문) 링크의 블로그 게시글 원문(원번역문)은 번역자 본인도 뒤늦게 정신 차린 건지 비공개 상태이다. 해당 블로거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우리(한국인)가 아르메니아 학살 사건에 대해 알아볼 때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터키측, 아르메니아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보듯 남경 대학살 사건에 있어서도 과거의 역사로 인한 감정은 접어두고[49] 정확한 판단을 위해 일본측, 중국측 모두의 입장을 들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게시한 것은 일본의 극우 인사들도 넘쳐나는 반박 사료들로 인해 내세우지 못하는 '난징 대학살 날조설'에 '중국 병사 민간인 학살설'까지 펼치는 인터넷 게시글 번역문 뿐이다. 2차 게시자인 블로거 본인은 일본측의 것이든 중국측의 것이든 주장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지적되어야 한다며 나름 이성적인 태도를 보이려 한 것 같으나, 애초에 본인이 저 번역문을 게시하면서 내세운 주장의 근거부터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매우.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희생자는 아르메니아인들 뿐만이 아니었으며 가해자인 오스만 제국의 후손인 터키 측에서도 해당 사건에 대해 날조된 것이라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경 대학살의 희생자 또한 중국인들만 있었던 게 아니며 가해자인 일본극우파 인사들도 근거를 갖춘 반박이 불가능해 '과장된 것이다' 정도의 주장만 하고있다. 이미 가해자는 누구였고, 피해자는 누구였고, 피해상황의 규모와 정도[50], 정황까지 다 결론이 난 참사를 다시 '양쪽의 입장' 운운하며 끌고와 정작 근거라고 올리는 건 일본(정확히 말하면 극우)측 만의 입장이 담겨있는 인터넷 게시글 번역문(심지어 블로거 본인이 번역한 것도 아니다. ) 뿐이니 저 블로그 게시글은 양비론적 입장에 입각하여 써진 것이라 할 수도 없다. 링크의 댓글들('덕분에 잘못된 지식을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오… 그렇군요. 민간인 학살은 일본군이 아닌 중국군이 저질렀군요…' 등)이 저 내용만 쓸데없이 긴 글의 의도와 수준을 보여주는 셈이다. 결국 참혹하게 죽어간 난징 대학살 희생자들(중국군 포함)에 대한 능욕으로 가득찬 글일 뿐이다. 아무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까지 '잠깐 뒤로 밀어'둔 것 같다.

7.3 중간파

일본 극우의 "그런 사건 없었다, 중상모략이다."라는 주장과 별개로, 지금에 와서는 "중국 국내에서도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았고, 중국 정부의 선전 활동으로 내용이 과장되어 있다."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긴 있다. 30만은 오버고 실제로는 5~8만 정도가 아닌가? 라는 내용들이다. 그것도 퍽이나 적은 숫자겠냐만 일본의 극우언론사 산케이신문도 2015년 2월 16일자 기사에서,[51] 30만 명 설은 학술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학살 사실보다는, 중국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고 언급한다. 학살 사실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난징군사법정과 도쿄재판에서의 보고서와 판결문 내용 등에서 희생자 수효가 제각각이라는 점을 내세워 '30만 명 설'은 왜곡된 주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중국의 기록을 100% 신뢰하는 쪽으로 난징뿐 아니라 주변 도시 지역에서의 학살범위를 포함하는 학파[52] 실제의 인구조사및 남경 안전지대의 인구수와 증언을 분석해서 난징 시내에서 학살당한 피해자만 계산해 8만에서 10만 정도로 보는 파가 있다. 이 두 학파의 공통점은 피학살자의 수에는 관계 없이 일본이 벌인 학살이라서 일본의 100% 잘못이고 양측의 공동조사및 일본의 사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53]

실제로 전후에 실질적인 통계가 이루어지지않아 대략적인 추산치만 존재할 뿐이기에 중국측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수용하지않고 8만 안팎으로 보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위에서 말하는 '부정파와 똑같은 사람들'은 틀렸다고 할수있다. 바로 위에서 '8~10만'으로 보는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이중에서 '당시 중국군이 도심지를 방어선으로 사용하고 시가전을 할뿐더러 간첩등으로 일본에 대한 테러등으로 시가전 상황시 일본군이 군인으로 오해해 민간인을 죽였거나 실제로 밀정(스파이) 역할을 하던 민간인들을 색출하는 작업에서 오인해서 학살하는' 이러한 논리도 있지만 이것은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기에 하는소리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자. 이들이 말하는것은 '인구 통계치가 명확하지 않고 중국측의 자료에 신빙성이 결여될수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감가상각해서 봐야한다' 는 것이다. 다만 '따라서 일본이 아니라 중국측에도 어느정도 잘못이있다'고 하는건 틀림없는 매국노니까 욕해도 된다. (물론 여기서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위의 학파와 마찬가지로 '난징 시내'로 해석한것이고 똑같은 논리라고 보면된다. 즉 난징 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것이지 매국노는 아닌셈)

난징 사건 자체도 비극이지만[54] 더 비극은 학살 피해자의 후손들은 아직도 중국 정부에 의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듯.[55]

8 기타 국가에서

8.1 미국, 유럽

미국 같으면 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과 같이 연합하여 일본과 싸워 마침내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국가이다. 때문에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미국의 노년층들은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 중에는 종군 기자로 활동하며 중국인들과 연합하여 난징의 상황을 취재하여 일본군이 저질렀던 만행들을 증거 자료로 보관하기까지 했으니.

유럽 국가들 역시 미국과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특히 독일의 경우는 욘 라베가 중국인들을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이 학살된 것에 대해서 매우 유감을 표명하기도 한다.

러시아소련 시절부터 대학살파 의견이었고 최근에는 아예 맹목적으로 반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중국을 밀어주면서 빼도 박도 못한 대학살파 측이다. 러시아의 경우도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민간인 학살을 겪었고 시베리아일본군이 출병한 적백내전 당시에도 민간인 학살을 연해주에서 여러 차례 겪었으며, 나중에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는 소련군이 역으로 일본 민간인을 만주북한에서 복수로 강간 및 학살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8.2 한국, 아시아

한국의 경우 노태우 정권 이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지 않아 일본 편을 들었단 낭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일본 극우파의 모함이다. 중화민국은 1990년까지 한국의 맹방이었고, 그 중화민국 정부가 바로 이 학살의 피해자이다! 1988년 나온 먼나라 이웃나라에도 난징 대학살이 "남경대학살"이라고 짧게 다루어진다. 위키니트들이 자꾸 중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잘못 생각하는데 중화민국이 1980년대까지 한국에선 "중국"을 뜻 했고 오히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공"이라 불렀다. 물론 이념 대립과 별개로 중국의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모두 제대로 다루었다. 애초 똑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인 한국 정부가 일본 편을 든 적은 한번도 없고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의 입장은 줄곧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해왔고, 같은 일제 침략의 피해국가로서 파렴치한 짓이라고 여겨왔으며 최근 반일 정서의 대두로 더욱이 빼도박도 못한 대학살파 입장이 되고 있다. 물론 이 학살을 날조라 주장하는 정신나간 일부 일빠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

한국 외의 아시아 국가들 역시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는 편. 다만 반중 감정이 일본만큼이나 심각한 부탄의 경우는 부정파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한다. 싱가포르는 중국계 화교가 대다수인데다가 자신들도 일본 점령하 창이 학살 등을 당했기 때문에 대학살파 의견을 따른다.

그외에 난징 대학살의 만행 사진과 조선인에 대한 만행사진과 햇갈리게 퍼트리는 경우가 많다. 예로 시체들이 옆쪽으로 쌓아두고 걸어가는 일본인이나 참수 장면을 그렇게 소개한다. 그 외에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벌인 민간인이나 포로학살을 조선인 학살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학술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독일군이 동유럽에서 제일 범죄가 심해던 것처럼, 일본군이 중국지역에서 제일 범죄가 심했다는 건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측에서도 동의하는 정설이다. 미국같은 국가의 입장에선 왜곡으로 해석할 만한 것들이다.

웬 일본군 장교들이 수천명을 구한 성자 라는 유언비어도 퍼졌다. 이누즈카 고레시게 와 히구치 기이치로 라는 사람들이 그들인데 위키게시판에서 이 문제가 논의돼서 확인작업을 거친 결과 영어판이나 다른나라 언어로도 난징 대학살 관련 언급이 없었다. 날조이자 반달이라고 결론이 났다. # 여담이지만, 이들이 사람들을 살리려고 한 적은 있다. 중국인이 아니라 유태인들이지만.

8.3 그 외

아프리카, 남미, 오세아니아 등 전반적으로 난징 대학살 사건에 대해서 대학살파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한때 반중감정이 심했던 아프리카에서는 부정파 의견을 따른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 2010년대에는 대학살파 의견을 따르기는 하지만.

9 중국과의 마찰

일본이 그리도 애쓰는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절대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 문제이다.

상임이사국인 중국이 이 문제와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분쟁을 들먹이며 결사반대하기 때문인데, 이스라엘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에 별로 반대하지 않은 것과 대조적.[56] 전후 독일의 태도 자체가 일본과는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데에 크게 기인하고 있다고 보인다. 독일은 최소한 사회적 차원에서 진실규명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없으므로.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 관련 일본 측 사료들을 모두 모은 자료집을 발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측이 원 사료의 사진촬영이나 복사를 거부하는 통에 연구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꼈다고 한다. 문제는 일본의 우익들은 "필사"했다는 점을 핑계로 삼아서 자료집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까댈 게 뻔하다는 것. 왜냐하면 현대 역사학에서는 유일자료가 아닌 한 필사된 자료의 신빙성은 상당히 낮게 본다. 필사과정에서 필사자의 주관적 관점이 개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게 맞다면 일본이 지금도 원본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2012년 2월 20일 난징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나고야 시장이란 놈이 "난징 대학살은 없었던 일이다."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그것도 대충 뱉은 말도 아니라 난징시 시장을 나고야까지 초대한 자리에서 망언을 해서 중일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결국 난징시 시장은 나고야와의 자매결연을 맺는 것을 취소하기로 조치했다. # 다행히 일본 정부 측에서는 이에 대해 중국 정부에 사죄하고 난징 대학살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라는 종래의 의견을 확고히 했다.#

심지어, 친일국가라고 일본에서 좋아한다는 대만에서조차도 난징 대학살 사건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57] 애초에 대만을 지배하는 중화민국 정부가 대학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당시 난징은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그래서 악질적인 일빠같이 매수당한 이들이나 동참하는 수준이다. 아무리 현실의 적역사적인 적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해도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한국인 지일파들조차도 일본 제국 시대의 만행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는 상황과 같은 격이다.

2014년 6월 일본 정부는 중국의 위안부 및 난징 대학살 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철회를 요구하였지만 당연히 중국 정부는 강하게 거부한 상태이다. 2015년 10월에 해당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극도의 유감을 표하였다. 카와무라 야스히사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10일 담화를 발표하고 “난징대학살을 둘러싸고 중·일 간에 견해 차가 있고 이 문건은 중국의 일방적 주장에 따라 신청된 것으로 완전성이나 진정성에서 문제가 있다”며 “중립·공정해야 할 국제기구로서 문제가 되는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하시마 섬 등재될 땐 싱글벙글 하더니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네스코의 지원금을 끊을 수도 있다[58]며 협박하는 등 뒤끝이 작렬하고 있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 세계인의 반응도 매우 좋지않다.

결국 일본이 퉁저우사건을 내걸었다.#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기습공격한 걸 학살이라고 왜곡했다. 이뭐병.

9.1 관련 미디어물

  • 흑태양 시리즈 - 국내에서는 1편이 "마루타"라는 명칭으로 개봉되었다. 본 시리즈의 4편(1995년작)이 남경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 황시 - 2008년작.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독일의 합작이다. 어거스트 러쉬에 등장한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주인공 '조지 호그'로, 주윤발이 조력자 '잭'으로 등장한다. 영국인 종군기자인 조지는 중국에 들어와 일본이 벌인 난징대학살을 보고 충격받고 경악하며 이것을 세상에 고발하고자 하나, 일본군에게 덜미를 잡혀 참수되려는 순간 잭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일본군들을 몰살시키고, 정말 중국인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60명의 고아가 모인 '황시' 로 가 보라는 조언을 던지며, 조지는 황시 고아들을 돌보던 여자 리 피어슨과 함께 고아들을 전쟁의 참혹함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한다. 영화 크레딧에 실화의 주인공인 중국인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그 영국인 종군기자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었다고.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은 초반에만 등장하는, 사건의 발단부 같은 역할이고 황시로 가게 된 후부터는 고아들과의 일상과,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 강제 징집 등의, 중국과의 마찰 등을 다룬다.
  • 욘 라베 - 2009년작. 독일인 플로리안 갈렌베르거 감독 작품이고, 독일/프랑스/중국 합작 영화이다. 위의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한 욘 라베에 대한 작품이다.
  • 난징! 난징! (南京! 南京!) - 2009년작. 영어 제목은 City of Life and Death(삶과 죽음의 도시). 중화인민공화국의 루 추안 감독이 만들었다.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93% 스코어를 받았다. 다른 난징 영화와 달리 서구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 욘 라베가 나온다.
  • 금릉십삼채 (金陵十三釵) - 2011년작. 진링의 13소녀라는 뜻이며[59], 영어 제목은 The Flowers Of War. 배트맨으로 유명한 영국 영화 배우 크리스찬 베일이 주연을 맡았다.[60] 중화인민공화국의 감독 장예모가 감독을 맡았다. 영상미는 뛰어나나,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는 별로 없는 중화 애국주의 프로파간다 영화. 남경 외국인 구역으로 간신히 탈출한 중국군 부상병과 기생들이 크리스찬 베일의 보호로 여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 점령군 장교는 자신들의 승전 기념 연회에 초빙할 여학교 합창단원을 모집하게 되고[61] 결국 기생들이 여학생들을 대신해서 여학생으로 분장해서[62] 점령군에게 간다는 무슨 일이 났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스토리. 2년전에 나온 루 추안 감독의 난징! 난징!의 비해 서구 평론가의 평가는 좋지 않다. 일본군이야 당연히 답이 없는 악마집단이었지만 중국군경우엔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다. 심지어 단체로 자폭공격하는 장면에선 '당시 중국인들은 애국심이 있어서 당연히 그렇게 했다'는게 직접 내레이션으로 나온다. 본격 카미카제 특공 정당화 옛날 우리나라 반공영화같다 2009년작 난징! 난징!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고 프로파간다색채가 강하다. 그나마 장예모의 전작에서 보여주는 미적인 아름다움이나 웅장한 화면구성은 꽤 볼만하다. 문제는 그런 미적인 아름다움을 즐길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점.
  • 49일·제 (四十九日·祭) - 2014년작 후난 위성TV에서 제작한 드라마.

9.2 그외 매체

모토미야 히로시의 "나라가 불탄다"는 난징 대학살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우익의 항의를 받아 연재중단되었다.

그린호넷의 파트너인 케이토는 <그린 호넷: 오리진>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일본군에 입대했지만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보고 빡쳐서 자신의 부대와 부대장을 살해한뒤 일본군의 군수공장 등을 사보타지하다가 부상입은걸 그린 호넷이 도와줘서 미국으로 피신했다는 설정이다. 케이토는 원래 일본인으로 설정되었지만 40년대에는 한국인이나 필리핀인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난징 대학살 등으로 일본인의 이미지가 안좋아져서 그렇게 되었다.

9.3 참고문헌

  • 아이리스 장, 난징 대학살
  • Jean-Louis Margolin, e réévaluation du massacre de Nankin[63]
  • 니시노 루미코, 731부대 이야기

9.4 참고

  • 학살
  • 버마 대학살 - 희생자수로는 난징 이상이다. 무려 100만명 정도 학살당했다.
  • 마닐라 대학살 - 이쪽도 난징 대학살에 묻혀서 그렇지, 사상자 숫자는 난징 대학살에 비해서도 결코 적지 않다. 다만 마닐라 대학살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벌인 것이지만 난징 대학살은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을 때 벌인 것이란 점에선 난징대학살이 훨씬 엽기적인 점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난징 대학살이 다른 일본군의 범죄보다 관심 받는 이유는 이게 전쟁에서 이기고 있을 때라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
  • 100인 참수 경쟁
  • 욘 라베 - 난징에 남겨진 50~60만명 중에서 20~30만명만 죽고 반수가량 살아남은건 순전히 그의 공. 항목 참조.
  • 사카이 사부로 - 위안부 피해자들을 비하함과 동시에 난징 대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는 발언을 했다.
  • 간도 참변 -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1. 이 두개는 한자를 우리말로 읽을 때
  2. 밑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이 중국어 위키백과 문서가 매우 정확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학술 연구 시 큰 도움이 된다.
  3. 바이두 백과의 문서인데 맨 위에 중국군2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에 임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고 문서 전체가 암울한 분위기의 흑백으로 처리되어있다.
  4. 밑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이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는 상당히 잘못된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다. 어느 쪽이 명백히 잘못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한가?
  5. 다만 난징사건이란 명칭자체는 난징대학살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이들도 같이 사용한다. 이경우는 4.3 사건같은 맥락으로 쓰는거지 학살 부정은 아니다. 구분이 필요함.
  6. 중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
  7. 이보다 더 많이 죽인 사건은 바로 버마 대학살 이란 주장이 있다. 이 학살은 최소가 80만명이고 최대 추정 숫자는 무려 300만명이고, 심지어 양곤만(심지어 주변 변두리까지 제외한 숫자로) 최소 추정치 40만명이라는 이유라는건데 이렇게 국가단위로 치면 중국은 더 넘사벽이다. 난징의 경우 발단이 참모장의 독단이라든지, 사령관 대리의 왜곡된 명령인지가 불분명하지만 미얀마 대학살은 버마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가 직접 학살명령을 하달했다는 이유, 다만 난징대학살도 엄연히 학살 명령이 존재한다. 다른 학살 소개하려고 난징대학살의 반인륜성을 저하해야할 이유는 없다.
  8. 출처 링크1, 출처 링크2
  9. 물론 영상에는 학살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더더욱 무서운 점은, 대부분의 전시 선전영화는 부대의 위민활동이나 대민지원 장면을 삽입해서 해당 지역을 해방시킨 해방군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상에는 민간인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무섭고 끔찍하다.
  10. 중국 삼국시대 때 파, 영안으로 알려진 그 곳
  11. 두번째 사진의 검을 든 병사 오른쪽의 병사는 자세히 보면 환하게 웃고있다.
  12. 두번째로 나오는 사진은 선배 병사가 후배 병사에 참수를 명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며 이외에도 후배병사로 추정되는 병사가 참수된 희생자의 목을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있다.
  13. 그래서 나중에 난징사령부에서 근무했던 다키히토가 "자네들 이 전쟁 끝나면 살고 싶거든. 이 아시아를 뜨게나... 만약 이곳 동아시아에 있다면 말도 못할 정도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지 모르겠네만...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적중했다.
  14. 여담이지만, 사진에서 저 두 쓰레기들이 들고 폼잡고 있는 칼은 94식 전도이다.
  15. 원래는 총살형을 할땐 권총 5발을 쏘는게 원칙이지만 이놈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M2 중기관총으로 갈겨버린 끝에 말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돼버렸다. 물론 이걸로 희생자들의 한을 전부 달랠 순 없겠지만...
  16. 참고로 8세 이상부터 당했다고 한다.
  17. 벵골 지역에서의 반란 실패 후 방글라데시에 살던 20만∼40만 명 가량의 여성이 9개월 동안 강간당했다
  18. 독일 통계에서만 1천만 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고 그 결과로 750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나온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가해자인 독일 측 보고서에 나오는 통계이다.
  19. 일본 항공대가 진주만에서 3차 공격으로 진주만을 박살내고 이어 내습한 항모 전단과 싸운다는 내용, 현재 2부까지 나왔다.
  20. 이후 2006년에 내용이 더 보강되어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 난징의 강간, 그 진실의 기록》(현재 절판)이라는 책이 나왔다. 만약 읽고 싶다면 읽기 전에 마음을 한번 가라앉히고 읽자.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참혹한 내용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그 수준은 홀로코스트, 독소전쟁을 저지른 나치 독일과 버금가는 수준이다. 2014년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난징 대학살, 그 야만적 진실의 기록》이 다시 재판되어 나왔다.
  21. 다만 지나치게 까발림과 감정적인 쪽으로 흐른 면이 없지는 않으며 전문 학자가 아니다 보니 교차검증에서 여러 약점이 드러나 우익들이 이를 근거로 난징 대학살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 난징 대학살을 긍정하는 일본 학자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이후 아이리스 장의 후속작들은 성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였는데
  22. 원래 바이두중국에서 가슴아픈 사건에 관한 검색을 하면 페이지 전체가 흑백으로 되도록 되어있다.
  23. Reiji Yoshida and Jun Hongo (December 13, 2007). http://www.japantimes.co.jp/news/2007/12/13/national/history/nanjing-massacre-certitude-toll-will-elude/#.VKoEyvQow-k The Japan Times. Retrieved December 6, 2014.
  24. Takashi Yoshida, The Making of the "Rape of Nanking"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60~64
  25. Daqing Yang, "A Sino-Japanese Controversy: The Nanjing Atrocity As History," Sino-Japanese Studies, November 1990, 18, 22-24.; "永久保存版 - 三派合同 大アンケート," Shokun!, February 2001, 197.; Tokushi Kasahara, "Massacres Outside Nanking City," in The Nanking Atrocity, 1937-38: Complicating the Picture, ed. Bob Tadashi Wakabayashi (New York: Berghahn Books, 2008), 59.
  26. Masahiro Yamamoto, Nanking: Anatomy of an Atrocity (Westport, Connecticut: Praeger, 2000), 115, 147-148, 157.; "永久保存版 - 三派合同 大アンケート," Shokun!, February 2001, 202.
  27. Jean-Louis Margolin (February 2006). http://chinaperspectives.revues.org/571 . China Perspectives. Retrieved December 6, 2014.
  28. http://sankei.jp.msn.com/life/news/120701/edc12070118000000-n1.htm
  29. "这些论调都遭到日本洞富雄教授、藤原彰 教授、本多胜一记者等正直学者的驳斥" - 高兴祖, 驳“虚构”论者对南京大屠杀事件的新攻击. 호라 토미오, 후지와라 아키라 같은 정직한 학자들이 반박을 했다는 내용이다
  30. 그 예로 일본군 측 기록에 대한 치밀한 편집이 있다. 李一杰 吴绍沅, �日军士兵战场日记译者序
  31. 肯定派又被称为“东京审判派”,其学者主要以洞富雄、藤原彰和笠原十九司等具有历史学专业背景,理性和学术性较强的学者组成的“南京事件研究调查会”为代表。"中日邦交正常化对南京大屠杀史学研究与传播的影响与展望, 朱成山
  32. 在中国研究南京大屠杀方面还是空 白的时候 日本有不少人都已经出了有关南京大屠杀 的书籍 。如洞 富雄 、藤原彰 、本多胜一等 ,他们认为南京大屠 杀是肯定发生过 的事。但是 ,由于 日本战后教育的 误导,日本现在不少人 ,包括 日本政要对南京大屠杀 的认知是十分糟糕 的。- http://cul.cssn.cn/sjs/sjs_sjxds/201506/W020150611361659760718.pdf
  33. 그러나 실제로 아시아의 대단결을 주장했던 안중근 의사처럼, 당시의 아시아 지식인에게 일본 등의 선진화된 국가가 주도해 단결된 아시아가 서구 열강에 맞선다는 순수한 범아시아주의는 분명 이상적인 청사진이었다. ...일본이 미친 침략자의 마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래서 무작정 비판하기도 힘들다. 이 만화에는 일본군이 마구 침략자의 본성을 드러내어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실적인 묘사와, 일본인이 부당하게 배외(排外) 감정의 대상이 되는 것 같은 편향된 묘사가 혼재하는 등, 일본인에게 욕먹지 않으면서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려 한 작가의 고심이 역력히 배어있으므로 일부만 보고 무턱대고 비판하지 않기를 권한다.
  34.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항하던 도시나 국가를 아예 지워버리던 경우가 많긴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국제법이 존재했었고, 포로 및 민간인 처우에 관한 내용이 이미 구비된 뒤였다. 자기 나라가 중세잽랜드라는거 인정한다는 거네
  35. 집행유예로 석방은 되었다.
  36. 이들이 제시하는 숫자는 미군 진주 때 죽은 일본 민간인보다 적다고 한다.
  37. 극우계 에로게 제작사인 앨리스 소프트에서 제작, 판매한 대제국에서는 이 설을 채용하고 있다. 괜히 쿠소게로 분류되는게 아니다...
  38. 히로카네 겐지의 만화 "정치 9단"의 주인공의 시각이 이렇다.
  39. 굳이 예를 든다면 서울에서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 벌어졌는데 그 범위를 종로구까지 하는지, 양천구까지 하는지의 문제이다. 아니면 아예 광명시부평구 쪽에서 학살당한 인원도 넣는지의 문제.
  40. 아예 말도 안되는 복식이 아니라 칼라가 이상하다는 식의.
  41. 오히려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게 맞다. 일본군의 진검술인 군도의 조법은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만 가르쳤고, 모든 장교부사관이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진검술이 전군에 배포된 것은 1942년이다. 즉 난징대학살 때는 모든 군인이 진검술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설픈 자세는 오히려 신빙성을 크게 강화시켜주는 근거가 된다.
  42. 다만 인정할 것은 흑태양 731의 사진이나 진짜 군벌 사진을 실제 사진으로 소개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20년전 꽤 유명한 작두처형 사진이 그런 좋은 예인데, 공부를 하지 않으면 혐한에게 까인다는 건 잊어서는 안될 일.
  43. 다만 이분이 난징 대학살 자체는 인정하며 국가 차원에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억하자
  44. 심지어 욘 라베처럼 동맹국 소속의 나치당원도 있다.
  45. 2ch 넷우익들이 퍼뜨린 '조선인 학살자 명단'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부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군, 경찰 부분에 있는 이름들 그대로 퍼온것들. 참고로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한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전세가 불리해질 무렵인 1943년부터다. 지원병제는 1938년.
  46. 난징대학살을 한국인이 했다는 루머가 중국 웹에서 크게 퍼져서 난징대학살 재난동포기념관 주청산 관장이 직접 한국인은 없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다행히 중국인들은 이를 믿고 오히려 일본인들을 더 가루가 되도록 까댔지만.
  47. 위키미디어 설립자인 지미 웨일스도 처음에는 일본어 위키백과 내용에 적힌 내용을 굳게 믿고 이 잘못된 내용을 수정하려는 중국인 유저들을 일본어 위키백과 관리자들과 합세하여 이들을 모조리 영구차단 조치를 내리는 등 중국을 비난했었지만, 이 일본어 위키피디아가 역사적으로 매우 왜곡된 부분이 많고 중국어 위키백과 유저들이 지미 웨일스에게 강력히 로비를 벌인 덕분에 지금은 오해를 풀고 중국을 옹호하고 있다. 다만 지미 웨일스는 위키미디어 총괄 관리자인데도 아직도 일본어 위키백과의 난징 사건 문서를 난징 대학살로 수정하라고 지시를 내리지 못한 상태. (사실 지미 웨일스가 와패니즈라기보다는 일본 우익들의 보복으로 타격이 클 것 같아 아직 그런 조치를 못 내리는 듯.)
  48. 참고로 저 블로그 운영자, 마루마루 운영자로 추정되는 사람이다
  49.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 같지 않은가?
  50. 심지어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실제 희생자 수가 집계된 수보다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51. 산케이신문에서 연재중인 역사전쟁9부. http://www.sankei.com/politics/news/150216/plt1502160004-n1.html
  52. 그럼에도 30만은 과장이고 최대 20만, 최소 10만 정도로 본다.
  53. 피학살자의 숫자가 중국이 제시하는 수보다 적다고 일빠로 몰지 말자. 난징대학살의 규모를 난징 시내로 해석한 거지, 그 외의 지역에서 학살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54. 그런데 전후 민간단체에 의해 수습된 가매장된 시체만 하더라도 11만이 넘는다. 양쯔강에 던져버린 상당수의 시체 등은 제외하고도. 양쯔강에 던져버린 시체들까지 합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55. 중국 정부는 일본과 수교할 때, "우리는 전쟁의 승자다. 승리했는데 뭐하러 무슨 보상금을 받냐?"는 마오쩌둥이 이런 호기로운 발언을 했고 배상을 포기했다. 다만 이런 뻘호기 때문만은 아니고 이미 타이완의 중화민국 역시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채제선전을 위해서 불가피한 면모가 있기도 하다.
  56. 그러나 폴란드, 네덜란드, 체코,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스, 불가리아제2차 세계대전독일에게 전쟁 피해를 입었던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1차세계대전 이전에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 문제와 관련해 독일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정에 반대하고 있다. 당장에 이들 나라들을 제외하더라도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4 독일에게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거나 전쟁을 경험한 국가들이기도 하고. 반면 중국은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찬성하는 편이다.
  57. 하지만 그건 엄연히 선주민족과 내성인한테만 해당하며, 정착 중화민국을 후퇴시킨 외성인은 당연히 선주민과 내성인과는 반대였다. 오히려 대륙인들 죽었다고 좋아하지나 않으면 양반이고 이에 대해 추모하는 연예인들을 상대로도 "중국인들 추모하지 말고 2.28 사건이나 추모해라"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58. "Chief Cabinet Secretary Yoshihide Suga said Monday the government will consider stopping financial contributions to UNESCO or reducing the amount, given the U.N. body’s decision to add Chinese documents on the Nanjing Massacre to the “Memory of the World” program" (Suga says Japan may pull plug on financial contributions to UNESCO, 2015).
  59.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12명의 소녀와 1명의 소년이며, 고전소설인 홍루몽의 등장 인물들인 금릉십이채에서 이름을 따왔다.
  60. 예고편 스틸사진때문에 베일이 성직자로 나온다거나, 건 카타를 쓴다거나 욘 라베를 모델로 한 성직자라고 알려졌는데. 페이크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성ㅓ직자 행세를 하게 된 시체화장해주는 사람.
  61. 물론 일본군이 이 여자들을 데리고 단지 노래만 부르고 여흥만 즐긴후 온건하게 보내줄거라고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조차도 믿지 않는다.
  62. 이 과정에서 어른의 사정으로 1명이 모자라게 되자, 이전에 있던 신부의 양자인 소년이 여장을 하고 가담한다.
  63. http://perspectiveschinoises.revues.org/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