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의 추존 황제 | |||||
고조 선황제 사마의 | 세종 경황제 사마사 | 태조 문황제 사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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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고조(高祖) |
시호 | 선황제(宣皇帝) |
성 | 사마(司馬) |
휘 | 의(懿) |
자 | 중달(仲達) |
생몰기간 | 179년 ~ 251년 9월 7일 |
목차
- 1 개요
- 2 정사
- 2.1 초기 생애
- 2.2 조조에게 임관
- 2.3 장로 정벌
- 2.4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 2.5 조조 휘하
- 2.6 번성 공방전
- 2.7 조비 휘하
- 2.8 조비의 2차 남정
- 2.9 조비의 3차 남정
- 2.10 조예 휘하
- 2.11 맹달의 난
- 2.12 제갈량의 1차 북벌
- 2.13 석정 전투
- 2.14 제갈량의 3.5차 북벌
- 2.15 제갈량의 4차 북벌
- 2.16 제갈량의 5차 북벌
- 2.17 조예 휘하
- 2.18 공손연의 난
- 2.19 조예 휘하
- 2.20 조방 휘하
- 2.21 작피의 역
- 2.22 조방 휘하
- 2.23 낙곡대전
- 2.24 조방 휘하
- 2.25 2차 조중 정벌
- 2.26 고평릉 사변
- 2.27 왕릉의 난
- 2.28 사후
- 3 연의
- 4 가족 관계
- 5 평가
- 6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하내군 온현 효경리 사람. 사마방의 차남. 진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사마염이지만 손자 사마염에 의해 실질적으로 진나라 시조로 추앙받는다. 진왕에 오른 아들 사마소는 사마의를 선왕으로 추존했고 손자 사마염이 황제가 된 후에는 묘호를 더해 고조 선황제로 추존했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어려서부터 빼어난 절조을 갖추고 총명하며 많은 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교를 가슴에 간직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억울하고 원통하여 몹시 분해하며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
같은 군(郡) 사람인 남양태수 양준이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했는데 약관(20세)의 나이에 이르기 전인 사마의를 만나보고는 비상한 그릇이라 말했다.
청하 사람인 상서 최염은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과 서로 친했는데 또한 사마랑에게 말했다.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
2.2 조조에게 임관
201년, 군(郡)에서 상계연으로 천거했다.
당시 조조는 사공이었는데 그에 관해 듣고는 사마의를 벽소하려 했다. 사마의는 한나라의 명운이 바야흐로 쇠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씨에게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하니 관절통 때문에 기거할 수 없다며 이를 사양했다. 조조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사마의를 엿보게 했는데 사마의는 꼿꼿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선목장황후열전에 따르면 사마의가 처음에 조조의 조명을 거절했을 때 중풍이 있다고 핑계 댔는데 일찍이 책을 말리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서 자기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손수 거둬들인 적이 있었다. 집안의 여종 한명이 이 광경을 목격했는데 황후(장춘화)는 이 일이 누설되어 화를 불러들일까봐 마침내 그 여종을 죽여서 입을 막은 다음 친히 집안일을 돌봤다. 사마의는 이로 인하여 황후를 무겁게 여겼다.
조조가 승상이 되자 다시 벽소해 문학연으로 삼고는 명을 받들어 떠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만약 다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곧바로 잡아 가두도록 하라.
사마의가 두려워하며 그 직에 취임했다.
사마의는 내심 꺼리는 바가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고, 시기심이 있고 임기응변이 많았다. 조조는 사마의에게 웅대하고 호방한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에게 낭고상(狼顧相)이 있음을 듣고는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1] 이에 그를 불러 오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게 하니 얼굴은 곧바로 뒤를 향하는데 몸은 움직임이 없었다. 샤프트 각도
또한 일찍이 세 마리 말이 한 구유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고는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2] 그래서 태자 조비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필시 너희 집안일에 관여할 것이다.
태자가 평소 사마의와 친하여 늘 서로 비호했는데 이 때문에 총행을 잃게 되었다. 이에 사마의는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이르러 이를 모두 직접 챙기니 이로 말미암아 조조가 마침내 그에 관해 안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마의로 하여금 늘 태자(조비)와 함께 교제하게 하였고, 황문시랑으로 올렸다가 의랑, 승상 동조속으로 전임시키고 뒤이어 주부(主簿)로 전임시켰다.
2.3 장로 정벌
장로 정벌에 종군했을 때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유장을 붙잡아 촉인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는데 멀리서 강릉을 다투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말했다.
사람의 고통은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더니, 이미 농우를 얻었는데 또 다시 촉을 얻기를 바라는구나!
그리고 그 말에 끝내 따르지 않았다.
2.4 216년 ~ 217년 유수구 전투
그 뒤 손권 토벌에 종군하여 이를 격파했다.
군이 돌아오자 손권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표를 올려 신하를 칭하고 천명(天命)에 관해 진술했다. 조조가 말했다.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
사마의가 대답했다.
한 나라의 운수가 거의 끝나 전하께서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여 천자를 섬기고 있습니다. 손권이 신하를 칭한 것은 하늘과 사람의 뜻입니다.
2.5 조조 휘하
위국이 세워진 뒤 태자 중서자로 승진했다.
늘 중대한 모의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을 내어놓아 태자(조비)에게 중한 신임을 얻으니, 진군, 오질, 주삭과 함께 4우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가 되자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에 농사짓지 않는 자가 대략 20여 만 명에 이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방책이 아닙니다. 비록 전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의당 스스로 농사지으며 둔수해야 합니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이니 이로써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해 나라의 소용이 넉넉해졌다.
2.6 번성 공방전
사마의가 또 말했다.
형주자사 호수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 부방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조조가 이를 살피지 않았다.
촉장 관우가 번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 등 7군이 모두 패몰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관우전에 따르면 조조가 허도를 옮겨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의논했는데, 사마의와 장제가 말했다.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따랐다.
손권은 과연 장수 여몽을 서쪽으로 보내 공안을 기습하여 함락했고 관우는 마침내 여몽에게 붙잡혔다.
조조는 형주의 남은 백성과 한천에서 둔전하던 자들이 남쪽 도적(오나라)에 매우 가까이 닥쳤다 하여 이들을 모두 옮기려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형초 사람들은 경박하여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관우가 이제 막 격파되어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은 몸을 숨기고 관망하고 있는데, 이제 착한 이들을 옮긴다면 그들의 뜻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떠난 자들이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따랐다. 그 후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2.7 조비 휘하
조조가 낙양에서 죽자 조야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사마의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임금의 관을 받들고 업으로 돌아왔다.
조비가 즉위하자 하진정후에 봉해지고 승상 장사로 전임되었다.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 양양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 양양)을 불태운 후 버렸는데 손권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조비가 이를 후회했다.
당초 촉장 맹달이 항복하자 위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매우 후대했었다. 사마의는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누차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맹달을 영(領) 신성태수로 삼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했다.
위가 한나라의 선양을 받자 사마의는 상서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독군, 어사중승으로 전임되고 안국향후에 봉해졌다.
221년, 독군의 관직을 파하고 시중, 상서우복야로 올렸다.
2.8 조비의 2차 남정
224년, 천자가 남쪽을 순행해 오와의 국경 지방에서 군대의 위세를 보였다. 사마의는 허창에 남아 진수했는데, 상향후로 고쳐 봉해지고 무군, 가절로 전임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급사중, 녹상서사의 직이 더해졌다. 사마의가 굳게 사양하자 천자(조비)가 말했다.
내가 제반 정무를 보며 밤낮으로 이어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소. 이는 그대에게 영예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오.
2.9 조비의 3차 남정
225년, 천자가 다시 수군을 크게 일으켜 오를 정벌했는데, 다시 사마의에게 명하길 머물며 지키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진무하고 밖으로는 군수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출발할 무렵 조서를 내렸다.
내가 후방의 일을 깊이 걱정하니 이 때문에 이를 경에게 맡기노라. 나로 하여금 서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게 하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천자가 광릉으로부터 낙양으로 돌아오며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렸다.
내가 동쪽에 있을 때는 무군(사마의)은 응당 서쪽의 일을 총괄하고, 내가 서쪽에 있을 때는 무군은 응당 동쪽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라.
이에 사마의는 허창에 머물며 진수했다.
천자(조비)의 병이 깊어지자 사마의는 조진, 진군 등과 더불어 숭화전의 남당에서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라는 임금의 유언을 함께 받았다. 태자(조예)에게 조령을 내렸다.
이 세 명의 공들과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
2.10 조예 휘하
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로 고쳐 봉해졌다.
손권이 강하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 장패(張覇)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사마의가 제군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표기장군으로 승진했다.
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사마의를 완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의 직을 더했다.
2.11 맹달의 난
그리하여 맹달은 오와 연결하고 촉과 관계를 공고히 해 은밀히 중국(위나라)을 도모하려 했다.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은 그가 언행을 이리저리 고치는 것을 증오하고 또한 그가 화를 일으킬까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태수 신의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제갈량은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자 하여 곽모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신의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누설시켰다.
전략에 따르면 227년,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에게 거짓 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태수 신의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이고, 직성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소합향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는 말입니다.
맹달은 그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거병하려 했다. 사마의는 맹달이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효유했다.
장군이 지난 날 유비를 버리고 국가에 몸을 의탁하자 국가에서는 장군에게 변경의 중임을 맡겨 촉을 도모하도록 했으니 촉인들은 장군을 이를 갈며 증오하지 않는 자가 없소. 제갈량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하고 싶었으나 오직 방법이 없어 고심할 뿐이었소. 곽모가 한 말이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누설되게 했겠소.
맹달은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거병을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마의가 은밀히 군을 일으켜 공격했다. 제장들은 맹달이 두 적과 결탁되어 있으므로 의당 관망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맹달은 믿음과 의리가 없고 지금은 그들이 서로 의심하는 때이니, 응당 결단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속히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는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8일 만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오와 촉이 각기 그들의 장수를 보내 서성 안교와 목란새로 향하게 하여 맹달을 구원하자 사마의는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이를 막았다.
당초 맹달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완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내가 있는 곳과는 1,200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거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천자에게 표를 올리며 서로 왕복해야 하니 한 달은 걸릴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은 깊고 험한 곳이라 사마의가 필시 직접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하자 맹달이 또 제갈량에게 고했다.
내가 거사한 지 8일 만에 군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니 어찌 그토록 신속할 수 있습니까!
상용성의 3면은 물에 의지했는데 맹달은 성 바깥에 목책을 세워 스스로 굳게 방비했다.
사마의는 물을 건너 그 목책을 깨뜨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여덟 갈래 길로 성을 공격하여 16일 만에 맹달의 생질인 등현과 장수 이보 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맹달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거두어 개선하여 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금하니 남쪽 사람들이 기뻐하며 귀부했다.
당초 신의는 오랫동안 위흥에 있으면서 변경 지역에서 전횡하며 번번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인장을 새겨 많이 황제 명의로써 대신해 수여하였었다. 맹달이 주살되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군수들이 사마의가 새로 승리했다 하여 예물을 바치며 축하하자 이를 모두 받았다. 사마의는 사람을 시켜 신의에게 하례하러 직접 오도록 권유하고, 신의가 도착하자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한 정황을 심문하고는 그를 체포해 수도로 송환했다. 또한 맹달의 남은 무리 7천여 가를 유주로 옮겼다. 촉장 요정(姚靜), 정타(鄭他) 등이 그 부속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2.12 제갈량의 1차 북벌
제갈량전 주석 곽충3사에 따르면 제갈량은 양평에 주둔하고, 위연과 제군을 보내 군사들을 아울러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고는, 제갈량은 단지 만 명을 남겨 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마의가 20만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을 막았는데, 위연 군과 서로 길이 엇갈리고, 곧바로 도착해 제갈량으로부터 60리 앞에 이르렀다. 척후병이 사마의에게 보고하길, 제갈량이 성 안에 있으며 군사가 적고 역량이 미약하다고 했다.
제갈량 또한 사마의가 거의 당도하여 서로 가까운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위연 군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종적을 뒤쫓아도 미치지 못하니 장졸들이 놀라 얼굴빛이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갈량의 의기는 태연자약하며, 군중에 명해 모두 깃발을 눕히고 북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함부로 군막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영을 내려 네 성문을 활짝 열고 땅을 쓸며 물을 뿌리게 했다. 사마의는 늘 제갈량이 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갈량이 함부로 약세를 보여주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이에 군을 이끌고 북쪽 산으로 향했다. 다음날 밥 먹을 때, 제갈량이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며 막료들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필시 내가 겁쟁이라 생각하고 장차 강한 복병이 있을 것이라 예상해 산을 따라 달아났을 것이다.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니 과연 제갈량이 말한 대로였다. 사마의가 뒤에 이를 알고 심히 한스러워했다.
2.13 석정 전투
이 무렵 변군이 새로 귀부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호구가 많으니 위 조정에서 실태 조사를 하려 했다. 사마의를 수도로 오도록 하여 천자가 이 일에 관해 사마의에게 자문을 구하자 사마의가 대답했다.
적이 엄격한 법률로 아랫사람들을 속박하니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그를 저버린 것입니다. 의당 너그러이 다스리면 자연히 안거하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또한 두 적을 의당 토벌해야 하는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사마의가 대답했다.
오는 중국(위나라)이 수전에 익숙지 못하다 여겨 감히 유수구 일대 관문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구, 동관이 바로 적의 심장과 목구멍입니다. 만약 육군을 환성으로 향하게 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한 뒤 수전군을 하구로 향하게 해 그들의 허점을 틈타 공격한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천자가 이를 모두 옳게 여겼고, 다시 사마의에게 명해 완에 머물도록 했다.
2.14 제갈량의 3.5차 북벌
230년,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대도독, 가황월이 더해지고 조진과 함께 촉을 정벌했다. 사마의는 서성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에 도착하고 신풍현을 함락했다. 군이 단구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
2.15 제갈량의 4차 북벌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선비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 석성에 이르러 제갈량에 호응했다. 이때 위 대사마 조진이 병이 들어, 사마의가 형주에서 와서 입조했다.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이끌게 했다.
사마의은 비요,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천수군 상규현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방의 군대가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초의 3군이 경포(영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에서 사마의를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사마의와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사마의가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 위평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 하평(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철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했다.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왕평전에 따르면 231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다.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주었다.
이 무렵 군사 두습, 독군 설제가 모두 말하길, 내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에서일 것이고 농서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이에 표를 올려 기주의 농부를 옮겨 상규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 천수, 남안의 대장장이 감독을 흥성하게 했다.
2.16 제갈량의 5차 북벌
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의 농지에 물을 대니 나라가 충실해졌다.
234년, 제갈량이 다시 군사 10여 만을 이끌고 야곡을 나와 미 땅의 위수 남쪽 평원에 영루를 세웠다. 천자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 진랑을 보내 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다.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도다!
제장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물을 뒤로 한 채 영루를 세웠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에 오른다면 제군이 무사할 것이오.
제갈량은 과연 오장원에 오르고 장차 북쪽으로 위수를 건너려 했는데, 사마의는 장군 주당(周當)을 보내 양수에 주둔케 하여 적을 유인했다. 며칠 동안 제갈량이 움직이지 않으니 사마의가 말했다.
제갈량이 평원을 다투고 싶어 하면서도 양수로 향하지 않으니 이 뜻을 가히 알만하오.
장군 호준, 옹주자사 곽회를 보내 함께 양수를 방비하게 하니 적석에서 제갈량과 조우했다. 평원에서 싸웠는데 제갈량이 진격할 수 없자 오장원으로 되돌아갔다. 때마침 혜성이 제갈량의 영루로 떨어지자 사마의는 제갈량이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고 기습군을 보내 제갈량의 후방을 앞뒤에서 적을 몰아쳐 오백여 급을 참수하고 포로 천여 명을 붙잡았으며 항복한 자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곽회전에 따르면 234년, 제갈량이 사곡에서 공격하여 나왔고, 아울러 난항에서 둔전을 하였다. 당시 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을 다툴 것이므로 응당 먼저 그곳을 점거해야 된다고 계획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이르렀으므로, 곽회는 맞아서 그들을 공격했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 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공략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외지에 거주하게 하며 멀리 침범했으니 제갈량의 입장에선 급히 싸우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 사마의에게 늘 명하길 몸가짐을 정중히 하며 그들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제갈량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의가 출전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부녀자들이 쓰던 두건과 머리 장식과 부인들이 쓰는 장신구를 보냈다. 사마의가 노하여 표를 올려 결전할 것을 청하자 천자가 불허하고는 강직한 신하 위위 신비를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군사가 되어 이를 제지하게 했다. 그 뒤 제갈량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자 사마의가 장차 출전하여 이에 응하려 했는데,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에 서서 막으니 사마의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촉장 강유는 신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말했다.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당도했으니 적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그는 본래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데 천자에게 결전을 굳게 청한 이유는 그의 군사들에게 무(武)를 과시하자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저들이 우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굳이 결전을 청하겠소!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가 서신을 보내 군사에 관해 물었다. 사마의가 답장을 보내 말했다.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사마의가 물었다.
제갈량의 일상 생활이 어떠하고 음식은 얼마나 드시오?
사자가 대답했다.
3~4 되를 드십니다.
이어 정사에 관해 물으니 대답했다.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그 뒤 사마의가 다른 이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그와 더불어 대치한지 백여 일 만에 때마침 제갈량이 병으로 죽자 촉의 제장들이 둔영을 불태우고 달아났고, 백성들이 급히 달려와 알려주니 사마의가 출병해 이를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 양의가 군기를 되돌리고 북을 치니 마치 사마의와 맞서려는 듯 했다. 사마의는 궁지에 몰린 적은 핍박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니 이에 양의는 진을 친 채 떠났다.
다음 날, 제갈량의 군영의 보루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와 양곡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 사마의는 그가 필시 죽었음을 알아채고는 말했다.
천하의 기재로구나!
신비는 제갈량이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사마의가 말했다.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대의 문서, 비밀한 꾀, 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중요한 것을 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관중에 남가새가 많다는 말을 듣고 사마의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기병과 보병이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에 도착한 뒤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이 이에 관해 속어를 지어 말했다.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사마의가 이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제갈량의 부장인 양의와 위연이 권력을 다투니 양의가 위연을 참수하고 그의 군사를 아울렀다. 사마의가 이를 틈타 진격하고자 했으나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2.17 조예 휘하
235년, 태위로 올리고 봉읍을 더욱 늘려주었다. 촉장 마대가 침범하니, 사마의가 장군 우금(牛金)을 보내 이를 공격해 패주시키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도 저족의 왕 부쌍, 강단이 그들의 부속 6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관동에 기근이 들어 사마의는 장안의 곡식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냈다.
236년, 흰 사슴을 잡아 헌상했다. 천자가 말했다.
옛날 주공단이 주성왕을 보좌할 때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이제 그대가 섬서에서 대임을 맡아 흰 사슴을 헌상하니, 충성이 서로 부합하여 천년이 한 마음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으로 어찌 길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2.18 공손연의 난
당초 문의(공손연)은 숙부인 공손공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 가범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간절히 간언하니 문의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요동태수 공손문의(공손연)가 모반하자 사마의를 수도로 불렀다. 천자가 말했다.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요수에 의지해 대군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만약 앉아서 양평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말했다.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현명한 자만이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말했다.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당시 궁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전쟁이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사마의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238년, 우금, 호준 등과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수도를 출발했다. 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 아들 사마사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 전농 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노인과 옛 친구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사마의는 탄식하고 몹시 서운하고 섭섭해하다 감흥이 일자 노래를 읊었다.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 리를 깨끗이 하고 온 세상을 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 무양에서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겠노라.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당초 사마의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말했다.
내 얼굴을 보시오.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문의(공손연)는 과연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보내 요수에 의지해 벽을 튼튼히 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사마의에게 맞섰다.
사마의가 대군을 결집해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이 정예병을 다하여 이를 향해 나아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 적을 내버려두고 양평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적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은 사마의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사마의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당초 문의(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하고 문의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의는 용병에 능하고 변화가 신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 홍수가 나 물이 평지에서도 수 척에 이르자 전체의 군대가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사마의가 군중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을 공격할 때는 8부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굶주리고 곤궁해도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천자가 말했다.
사마의는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방패, 전차, 사다리, 충차를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이무렵 색이 희고 빛나는 갈기털이 있는 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공손연)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 왕건, 어사대부 유보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라 청했다. 사마의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에게 고했다.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가 다시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사마의가 위연에게 말했다.
군사의 대체의 요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 뿐이다. 너희는 항복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내 무얼 어찌하겠단 말인가?
문의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갑자기 쑥 나오자 사마의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 가의 장성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새 것과 헌 것을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인골을 쌓은 전승 기념비를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 30여 만 구를 거두었다.
이에 사마의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 등의 묘를 흙더미를 쌓아 북돋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 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에게 연루되어 그르쳐진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를 청했으나 사마의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청의 소유인 물품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예주 영천군 곤양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2.19 조예 휘하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이 천 개에 달했다.
당초 사마의에게 조령을 내려 지름길로 가서 관중을 진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백옥에 이르렀을 때 사마의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사마의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빠른 거마를 타고 밤낮으로 쉴 시간이나 쉬지 않을 시간이나 가리지 않고 계속 일하여 백옥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 침실 안으로 인도되어 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사마의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가 사마의의 손을 잡고 제왕(조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과 함께 임금의 유언을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2.20 조방 휘하
제왕(조방)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 지절, 도독중외제군, 녹상서사로 올라 조상과 함께 각기 군사 3천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은 상서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사마의를 대사마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사마의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로 삼았다.
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고, 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고, 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도록 하니 한나라 때 소하의 전례와 같았다. 혼인과 장례 비용은 관에서 대어주었고, 세자 사마사를 산기상시로 삼고 자제(아들) 세 명을 열후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로 삼았다. 사마의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
240년 봄 정월, 동쪽 왜국이 여러 나라 말을 거쳐 거듭 통역하며 공물을 바치고 언기(카라샤르), 위수의 여러 나라들과 약수 이남의 선비 명왕이 모두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자는 이를 재상의 공으로 돌려 다시 사마의의 봉읍을 늘려주었다.
당초 위명제(조예)는 궁실 수축을 좋아하고 규격, 양식이 화려해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모두 파하도록 상주하고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니 천하가 기뻐하며 의지했다.
2.21 작피의 역
241년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약탈하자 사마의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6월, 그리하여 제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을 나와 전송했다. 사마의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선박, 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 천자가 시중상시를 보내 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2.22 조방 휘하
가을 7월, 봉읍을 늘려 언, 임영을 내리니 예전과 합쳐 모두 4개 현에 식읍이 1만 호가 되었고, 자제 11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사마의의 훈덕이 날로 높아졌으나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게 처신했다. 향읍의 덕망 있는 원로인 태상 상림은 그들이 매번 벼슬을 받는 것을 보고는, 늘 자제들을 타이르며 말했다.
가득 찬 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사시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
242년 봄, 천자가 돌아간 아버지 경조윤(사마방)을 죽은 뒤에 봉해 무양성후의 시호를 내렸다.
3월, 주청하여 광조거(廣漕渠)를 뚫고 하수의 물을 끌어 변수로 유입시키고 동남쪽 저수지들에 물을 대니 비로소 회수 이북에서 크게 농사지었다.
당초 오나라가 장수 제갈각을 보내 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케 하여 변경 지역에 이에 괴로움을 받으니 사마의가 몸소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 여럿이 말했다.
적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위나라 군대를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다.
사마의가 말했다.
적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그들의 성을 공격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수전)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육전)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243년 가을 9월, 사마의가 제군을 이끌고 제갈각을 공격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을 나와 전송했다. 군이 여강군 서현에 당도하자 제갈각은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사마의는 적을 멸하는 요체는 군량을 비축하는 데 있다고 여기니 이에 군영을 지킴을 크게 일으키고 회양, 백척의 두 수로를 널리 열고 또한 영수의 남북에 있는 저수지들을 수리하여 밭에 물을 댐이 만 여 경에 이르렀다. 이 이후로 회북에 쌀 창고가 도처에 많게 되었고 수춘에서 수도에 이르기까지 농관, 둔전병이 서로 잇달았다.
2.23 낙곡대전
244년 정월, 사마의가 회남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사자에게 절(節)을 들여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상서 등양, 이승 등은 조상이 공적과 명예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촉을 정벌하도록 권했다. 사마의가 이를 반대했으나 막을 수 없었는데 조상은 과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2.24 조방 휘하
245년 가을 8월, 조상이 중루중견영을 없애고 그 군사들을 자신의 동생인 중령군 조희에게 속하게 했다. 사마의는 전대 황제 때부터의 오랜 제도라 하여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겨울 12월, 천자가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조회할 때 수레를 타고 어전에 오르도록 했다.
2.25 2차 조중 정벌
246년 봄 정월, 오나라가 조중을 침범하자 이민족과 중국인 만여 가가 침범을 피해 북쪽으로 면수를 건넜다. 사마의는 면수 이남이 적과 가까우므로 만약 백성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필시 침범받을 것이므로 의당 임시로 백성을 면수 이북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상이 말했다.
지금 면수 이남을 잘 닦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머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사마의가 말했다.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 이남의 제군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조중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소?
조상이 이에 따르지 않고 끝내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과연 적이 조중을 습격해 격파하니 희생당한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2.26 고평릉 사변
247년 4월, 부인 장씨(장춘화)가 죽었다.
조상이 하안, 등양, 정밀의 모책을 써서 태후(명원황후)를 영녕궁으로 옮기고 조정을 전횡하니 형제가 함께 금병(친위군)을 관장하고 가까운 무리를 많이 심어놓고 제도를 여러 차례 고쳤다. 사마의가 이를 제지할 수 없었고 이에 조상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다.
5월, 사마의는 병들었다 칭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에 관해 노래했다.
하(하안), 등(등양), 정(정밀)이 도읍의 성을 어지럽히는구나.
248년 봄 3월, 황문 장당이 사사로이 비빈과 궁녀들의 거처의 재인(才人) 석영(石英) 등 11명을 뽑아 조상에게 바쳐 가녀로 삼게 했다. 조상과 하안은 사마의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으니 장당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다. 사마의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의 무리들도 사마의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
때마침 하남윤 이승이 형주에 부임하게 되자 사마의에게 와서 동태를 살폈다. 사마의가 병이 깊은 것처럼 속이니 2명의 계집종에게 시중들게 하고 옷을 잡고 있었으나 옷자락이 땅에 끌렸다. 입을 가리키며 목이 마르다고 하니 계집중이 죽을 올렸는데 사마의는 죽그릇을 잡지 못했고 죽이 모두 흘러 가슴자락을 적셨다.
이승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명공(明公)께서 예전 풍(중풍)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몸이 이 지경일 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사마의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코앞에 닥쳤소. 그대가 병주에 가게 되었구려. 병주는 흉노와 가까우니 잘 방비하도록 하시오.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아들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부탁하오.
이승이 말했다.
송구하게도 본주(형주)로 돌아가게 된 것이지 병주가 아닙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이를 혼동하며 말했다.
이제 막 병주에 도착했다고?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하게도 형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내가 늙고 기운이 쇠해 그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소. 이제 본주로 돌아간다니 크고 훌륭한 덕으로 장렬히 공훈을 잘 세우도록 하시오!
이승이 물러나와 조상에게 고했다.
사마의는 시체와 다름없어 기운이 겨우 남아 있고 육체와 정신이 이미 분리되었으니 족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뒷날 또 말했다.
태부(사마의)가 다시 회복되기 어려우니 가히 애처로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조상 등은 다시 사마의를 방비하지 않았다.
249년 봄 정월 6일, 천자가 고평릉을 참배하자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갔다. 이날 금성이 달을 범했다. 이에 사마의는 영녕궁의 태후(명원황후)에게 상주해 조상 형제를 파면하도록 했다.
당시 사마사는 중호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문에 주둔했다. 사마의는 궐 아래에서 포진하고 조상의 문을 지나려 했다. 조상의 장하독 엄세가 문루에 올라 노를 당겨 사마의를 쏘려 하니 손겸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사태가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소.
화살을 시위에 세 번 얹었으나 세 번을 말리며 매번 그의 팔꿈치를 당기니 발사하지 못했다.
대사농 환범이 성문을 나가 조상에게로 나아가자 장제가 사마의에게 말했다.
꾀주머니가 갔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이오.
그리고는 사도 고유에게 부절을 내려 대장군의 사무를 대행하여 조상의 진영을 거느리게 하며 말했다.
그대가 바로 주발이오.
태복 왕관에게 명해 중령군의 직을 대행하며 조희의 진영을 관장하도록 했다.
사마의가 친히 태위 장제 등을 거느리고 군대를 지휘해 천자를 영접하기 위해 출군하고 낙수 부교에 주둔한 뒤 다음과 같이 상주했다.
모두 이르길 조상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지녔고 그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며 숙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황태후께 상주하니 시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조상, 조희, 조훈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기 원래 관직과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게 하고, 만약 황제의 수레를 계속 억류시킨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조상이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지 않고 황제의 수레를 이수 남쪽에서 유숙하게 하고는 나무를 베어 녹각을 만들고 둔전병 수천 명을 징발해 수비했다. 환범은 과연 천자를 모시고 허창으로 행차해 격문을 돌려 천하의 군사를 부르도록 조상에게 권했으나 조상이 이 계책을 쓰지 않고, 밤중에 시중 허윤, 상서 진태를 사마의에게 보내 사마의의 의중을 살폈다. 사마의가 그의 과실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에 관한 처벌은 관리의 직책에서 면직시는데 그친다고 했다. 진태가 돌아와 조상에게 보고하고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도록 권했다.
사마의는 또 조상이 신임하던 전중교위 윤대목을 보내 조상을 효유하게 하여 낙수를 가리키며 맹세하니 조상이 이를 믿었다. 환범 등이 고금의 사례를 인용하며 백방으로 간언하고 설득했으나 끝내 따르지 않고 말했다.
사마의는 정히 내 권력을 뺏고자 할 뿐이오. 내가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간다면 부잣집의 늙은 주인의 지위를 잃지는 않을 것이오.
환범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경에 연루되어 내 일족이 멸해지게 되었소!
마침내 사마의의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렸다. 얼마 후 담당 관원이 황문 장당의 죄상을 아뢰고 아울러 조상이 하안 등과 함께 모반을 꾸민 일을 발고하니 이에 조상 형제와 그 일당인 하안, 정밀, 등양, 필궤, 이승, 환범 등을 체포하고 모두 주살했다. 장제가 말했다.
조상의 부친인 조진의 공훈을 볼 때 제사를 잇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들어주지 않았다.
당초 조상의 사마 노지, 주부 양종이 궐문의 군사를 베고 조상에게로 달아났었다. 조상이 장차 죄를 받으려 하자 노지, 양종이 울며 간언했다.
공이 대임을 맡아 천자를 끼고 천위에 의지하는데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버리고 처형장으로 나아가려 하시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당 관원이 주청하여 노지, 양종을 체포해 죄를 결정하라 하자 사마의가 이들을 용서하며 말했다.
이는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권하기 위함이오.
2월, 천자가 사마의를 승상으로 삼고 영천군의 번창, 언릉, 신급, 부성을 봉읍으로 더해 예전과 합쳐 모두 8개 현에 2만 호가 되었고, 상주할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게 했다. 승상 직은 굳게 사양했다.
겨울 12월, 구석의 예를 더하고 조회할 때 절하지 않게 했다. 구석은 굳게 사양했다.
250년 봄 정월, 천자가 사마의에게 명해 낙양에 종묘를 세우도록 하고, 좌우 장사를 두고, 관속을 늘리고, 귀족의 측근이나 시종은 10명을 채우고, 매년 관청 등에서 업무를 돕는 하급 관리 중에서 천거해 어사, 수재 각기 1명씩을 임명하고, 관기 1백 명과 고취악대 14명을 늘리고, 사마의의 아들 사마융을 평락정후에, 사마륜을 안락정후에 봉했다.
사마의가 오랜 병으로 황제를 배알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사마의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
2.27 왕릉의 난
연주자사 영호우, 태위 왕릉이 사마의를 배반하고 초왕 조표를 옹립할 계책을 꾸몄다.
251년 봄 정월, 왕릉이 오나라가 도수를 막았다고 속이며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사마의가 비밀히 그 계책을 알아채고 들어주지 않았다.
여름 4월, 사마의가 친히 중군을 통수하며 배를 띄워 물을 따라 내려가 9일 만에 감성에 도착했다. 왕릉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무구에서 사마의를 영접했는데 물가에서 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인 채로 말했다.
저 왕릉에게 죄가 있으면 공이 서신을 보내 저를 부르면 되지 어찌하여 몸소 오셨습니까!
사마의가 말했다.
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리고는 왕릉을 수도로 송환했다. 도중에 가규의 묘를 지나자 왕릉이 외쳤다.
가양도(가규)! 나 왕릉이 대(大) 위나라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러 짐독을 먹고 죽었다. 그의 남은 일당을 체포해 모두 삼족을 멸하고 아울러 조표를 죽였다. 위나라의 여러 왕공들을 모두 붙잡아 업에 두고는, 담당 관리에게 명해 이들을 감찰하여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천자가 시중 위탄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오지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사마의가 감성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또 겸대홍려, 태복 유의를 보내 절을 주면서, 사마의에게 책명을 내려 상국으로 임명하고 안평군공에 봉하고 사마의의 손자와 형의 아들 각기 1명을 열후로 삼았으며, 그 앞뒤로 식읍이 5만 호, 후로 봉해진 자가 19명에 달했다. 상국, 안평군공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6월, 사마의가 병으로 앓아누워 가규, 왕릉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미리 장례에 관한 유언을 지어 수양산에 흙을 파서 매장하고 분묘를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 유언 3편을 지었는데, 평상복으로 염하고 부장품을 두지 말고 뒤에 죽는 자를 자신의 묘에 합장하지 말라고 했다.
가을 8월 5일, 수도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73세였다.
2.28 사후
천자가 소복을 입고 조문하고 장사 지내는 일의 예법은 한나라 곽광의 전례에 의거하고 상국, 군공을 추증했다. 동생인 사마부가 표를 올려 고인의 뜻을 진술하며 군공과 상여를 사양했다.
9월 17일, 하음에 매장하고 시호를 내려 무양문후라 하고 뒤에 무양선문후로 고쳤다.
진국(서진)이 처음 세워지고 선왕으로 추존되었다. 사마염이 위나라의 선양을 받자 존호를 올려 선황제라 하고 무덤을 고원이라 하고 묘호를 고조라 칭했다.
진명제 때 왕도가 모시고 배석했다. 진명제가 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사마의가 창업을 시작한 일을 진술했다.
- 공손문의(공손연)를 평정하자 대거 살륙을 행했다.
- 조상을 주살할 때는 그의 일파들 모두 삼족을 멸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고모 등 출가한 여자들까지 모두 죽였다.
- 그 뒤 위나라의 왕권을 옮기기에 이르렀다.
- 더불어 사마소 말년의 고귀향공(조모)에 관한 일을 진술했다.
진명제가 얼굴을 평상에 묻으며 말했다,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서진)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라이벌로 나온다. 삼국지 초반부가 조조와 유비의 대결이라면 삼국지 후반부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이 주가 된다.
등장이 늦은데 사마의는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고 나서야 처음 등장하여 조조에게 이 기세로 익주까지 정벌하라고 진언하나 조조는 듣지 않는다. 관우가 번성을 수몰시키자 또 등장해서 장제와 함께 조조에게 손권을 끌어 들이라고 건의한다.
일찍이 조조가 세 마리의 말이 한 구유통에서 구유를 먹는 꿈을 꾸었을 때 조조는 이를 마등 삼부자로 여겼다. 그런데 조조가 죽기 직전 똑같은 꿈을 꾸자 가후에게 해몽을 부탁하자 가후는 이를 록마로 해석하여 길조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사마씨의 득세를 뜻했다.
사마의는 조비에게 건의하여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촉한을 협공하게 한다. 그러나 재빨리 방도를 강구한 제갈량은 군사들을 각기 파견하고 등지로 하여금 오와 동맹을 다시 맺게 하여 5로 대군을 물리쳤다. 이 5로 대군 이야기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사마의가 제갈량 라이벌로서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조비 사후 조예가 그 뒤를 잇는 과정에서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의 경비를 맡았을 때, 제갈량은 마속과 이야기하다가 그 사실을 듣고 매우 놀라면서 "위나라의 진정한 장수라면 사마의 한 사람 뿐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말하기까지 하면서 사마의를 띄워준다. 제갈량은 지략이 뛰어난 사마의가 군을 지휘한다면 북벌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고 마속은 조비가 죽은 틈을 타서 유언비어로 사마의를 실각시키고 제갈량에게 더 큰 신임을 받는다. 정사에서 마속이 이런 책략을 쓰는 장면은 없고 사마의가 실각되지도 않았다.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지휘관 조진이 계속 패하자 조예는 다시 사마의를 기용한다. 사마의는 신속히 제갈량과 내통 중인 맹달을 평정하고 장합을 파견해 가정의 마속을 패배시킨다. 가정에서 마속이 패하자 사마의는 군을 이끌고 곧바로 서성으로 진군한다. 성에 군사가 없었던 제갈량은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에 올라 악기를 연주했다. 사마의는 의심이 많아서 제갈량이 복병을 숨겨놓았을 것이라 의심하고 퇴각한다. 정사에서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활약한 것은 조진, 장합 등이었고 사마의는 당시 완성에 주둔 중이었으니 여기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정사에서도 제갈량이 성을 비우자 복병을 의심한 사마의가 군을 물린 일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배송지는 이 일화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정사에서 제갈량의 북벌은 5차례이지만 연의에서는 위의 진격에 대한 반격인 3.5차 북벌까지 한 차례 북벌로 추가되어 육출기산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제갈량의 4차, 5차 북벌이 5차, 6차 북벌이라고 표기되는 경우가 있으니 혼동에 주의하도록 한다. 위군은 진창에서 궂은 날씨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실패하고 말아서 다시 장안으로 퇴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위나라 조정에서 퇴각하라는 전서를 보냈는데, 전서가 도착한 시점이 궂은 날씨 다 버텨내고 맑아져서 진군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반드시 치고나올 것이라 예견한 반면, 조진은 그럴 일이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자 사마의가 조진에게 제갈량이 기습을 해오지 않으면 얼굴에 분을 바르고 치마를 두른 채 조진에게 절을 하는 벌칙을 받겠다고 한다. 크로스드레서 이에 조진은 자신이 틀리면 조예께서 내리신 말 한 필을 선물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마의의 예상이 옳았고 조진은 적의 기습을 제대로 당하나 겨우 사마의에게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3] 이에 조진은 상심하고 부끄러워 병이 재발하던 중 제갈량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받고 열받아 죽어버린다.
제갈량의 4차 북벌에서 군량 문제로 제갈량이 퇴각하자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합은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한다. 정사에서는 장합이 만류하는데도 사마의가 억지로 장합에게 추격을 명해서 괜히 장합을 죽게 만든 것이다. 연의에서는 그 반대로 사마의를 띄워주기 위하여 사마의가 만류했던 것으로 바뀌었다.
제갈량의 5차 북벌에서 제갈량이 꾀를 쓴다. 위연은 사마의와 일기토 겨루다가 거짓으로 후퇴하여 사마의를 상방곡으로 유인한다. 여기서 문관인 사마의와 촉나라의 무력 본좌 위연이 일기토를 벌이는 창작 장면이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덕분에 사마의는 태사자와 칼싸움을 벌인 왕랑처럼 문관계의 양대 무력 본좌가 되었다(...). 제갈량은 상방곡 안으로 들어온 사마의를 화공을 이용하여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하늘은 사마의의 손을 들어 줘 마침 내린 비 때문에 사마의는 무사히 빠져나왔다. 제갈량은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며 크게 한탄했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이런 장면이 없다. 사마의가 상방곡에서 화공을 당한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며 정사에서는 제갈량이 영채를 불태우고 달아나서 골짜기로 들어갔다는 기록 밖에 없다.
사마의는 상방곡에서 당한 뒤 싸우지 않고 진채를 지켰고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여자 옷과 관을 보내 상례를 치르느라 집에만 처박혀 있는 아녀자에 비유하여 모욕한다. 사마의는 격분하지만 일시적인 개인적 분노를 참고 최후의 승리를 도모했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각색으로 정사에서는 이러한 도발에 넘어가 빡친 사마의가 출진하려고 했으나 신비가 말려서 넘어간 것이다.
제갈량이 보낸 사자로부터 공명이 식사는 적게 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한다는 말을 듣고 식소사번이니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했다. 사공명주생중달이라는 관용구는 정사에서도 나오는 대목이지만 연의에서는 이 일화가 각색되었다. 제갈량이 죽자 사마의는 진격하는데 제갈량이 죽기 직전 명령으로 만들어진 목상을 보고 그가 살아있다 착각하여 깜짝 놀라 퇴각을 명령했다. 이후 사마의의 대사 "내 머리가 아직 붙어 있느냐?"가 압권이다. 이후 진짜로 제갈량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탄식하며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정사 부분과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정사에서는 그냥 제갈량이 죽자 강유와 양의가 대처를 잘해서 사마의가 물러나자 생긴 속어이다.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을 평정하는데 여기서 명대사를 읊는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우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고, 달아날 수 없을 때는 항복하고, 항복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한다." 정사에서도 나오는 명대사지만 정사와 비교해보면 미묘하게 변경되었다.
조예가 죽은 뒤, 조상의 음모로 인하여 실권을 빼앗기지만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서 다시 정권을 탈환한다. 왕릉의 난과 죽음 장면은 묘사되어있지 않아서 그냥 어느 순간 사라진다.
4 가족 관계
초한쟁패기 시대의 은왕 사마앙의 후손들은 주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진나라로 간 사마씨들은 역사가 사마천의 분파가 되었고, 조나라로 간 사마씨들은 사마의의 분파가 되었다. 한나라 시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사마씨도 온현 일대의 거족으로 청류파의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다. 사마방의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리었다.
- 사마랑 - 사마방의 장남.
- 사마의 - 사마방의 차남.
- 사마부 - 사마방의 삼남.
- 사마욱 - 사마방의 사남.
- 사마순 - 사마방의 오남.
- 사마진 - 사마방의 육남.
- 사마통 - 사마방의 칠남.
- 사마민 - 사마방의 팔남.
천하의 사마의도 두려워 하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장춘화 여사이시다. 다시 말해 공처가였다는 얘기다. 사마씨 가문은 전체가 천재가 가득했고 사마의의 아내 장춘화도 똑똑했는데 어째서 그 후손들 가운데 금치산자가 많았나 아주 의아하다. 특히 사마충이나 사마덕종은 손에 꼽는 바보였다.
- 장춘화 - 사마의의 아내, 사마사, 사마소, 사마간, 남양공주의 어머니.
- 복귀비 - 사마의의 아내, 사마량, 사마주, 사마경, 사마준의 어머니.
- 장부인 - 사마의의 아내, 사마융의 어머니.
- 백부인 - 사마의의 아내, 사마륜의 어머니.
- 사마사 - 사마의의 장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소 - 사마의의 차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량 - 사마의의 삼남, 복귀비의 아들.
- 사마주 - 사마의의 사남, 복귀비의 아들.
- 사마경 - 사마의의 오남?, 복귀비의 아들.
- 사마준 - 사마의의 육남?, 복귀비의 아들.
- 사마간 - 사마의의 칠남?, 장춘화의 아들.
- 사마융 - 사마의의 팔남, 장부인의 아들.
- 사마륜 - 사마의의 구남, 백부인의 아들.
- 남양공주 - 사마의의 장녀, 장춘화의 딸.
- 고육공주 - 사마의의 차녀, 두예의 아내.
5 평가
5.1 제갈량의 라이벌?
227년,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했지만 제갈량이 꾀를 써서 일부러 성을 비우고 성문을 열어놓자 복병을 의심한 사마의가 군을 물렸다. 그러나 이 기록은 배송지가 당시 사마의는 완성에 있었으니 거짓이라고 반박했으니 신빙성이 낮다. 이 일화를 거짓으로 본다면 실질적으로 사마의와 제갈량이 맞붙은 전투는 다음 나오는 두 차례 뿐이다.
231년, 제갈량의 4차 북벌인 노성 전투는 진서에는 사마의가 제갈량군에게 만 명이 넘는 피해를 주어 압승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는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패했다고 적혀있다. 사마의가 이겼다고 적은 기록은 진서 하나 뿐이고 진서는 그 편찬 과정과 신뢰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서이다. 자치통감을 편찬한 사마광도 교차검증을 통해서 제갈량의 승리로 적었다.
234년, 제갈량의 5차 북벌인 오장원 전투에서는 거점을 만드는 촉군에게 선제 공격을 했지만 이 또한 패했다. 사마의가 지구전을 펼친 건 5차 북벌 딱 한 번 뿐이다. 위나라 조정은 당시 상황 상 싸우지 않고 버티기만 해도 위군에게 유리하게 간다고 판단하여 사마의에게 지구전을 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제갈량이 여성 의류를 보내 사마의를 도발하자 이 도발에 넘어간 사마의가 자꾸 제갈량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신비가 말려서 넘어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도발에 차분하게 대응한 것은 연의의 창작일 뿐이다.
지휘관의 능력을 살펴본다면 사서에 기록된 사마의와 제갈량의 직접적인 전투는 언제나 사마의가 패했다. 그래도 조예의 정치적 지원 아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고 성공적으로 북벌을 저지했다. 군사적 재능은 제갈량과 비견될 만 하다.
정치력을 비교해본다면 어떨까? 촉한의 제갈량은 한 국가 전체를 책임지는 재상이었다. 반면 사마의는 국정 운영의 부분들에서 뛰어났고 정치적 요직도 두루 거쳤지만 재상적인 관위에는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
사마의는 제갈량에 비해 훨씬 건강하여 제갈량보다 17년이나 더 살았고, 제갈량은 무능한 군주를 성실히 보좌하는 충신의 역이라면, 사마의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여차하면 주인도 쳐버릴 수 있는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대비된다. 제갈량은 유선을 충분히 이용하여 실권을 쥐거나 찬탈까지 가능할 재주를 지녔지만 끝까지 충성을 바친 데 반해 사마의는 조예가 죽자마자 조상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방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 제위를 찬탈하는 초석을 만들었다. 그의 아들들이 새 왕조를 열어 결과적으로 삼국지의 승리자가 되었다.
5.2 충의
사마의의 충성심에 대해서 이래저래 말이 많다. 해석하기에 따라 그 자신은 순수하게 위에 충성했다고 볼 수도 있고 희대의 역적으로 볼 수도 있는 신기한 인물.
그가 조위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영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석을 받고 왕위에 올라 황실의 권위를 흔든 조조와 달리 그는 죽을 때까지 왕은 고사하고 구석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조처럼 승상이 되어 1인 독재를 한것도 아니고 3공의 한 사람인 태위에서 멈췄다. 말년에는 잠깐이나마 태부직을 받아들여 실권을 내놓기도 했다. 조상 파벌 내에서도 말이 나올 정도로 조상 일파의 국정 운영이 혼란스러웠으니 만년에 일으킨 고평릉 사변도 조상 일파의 실정이란 명분이 있었다. 또한 군사적 업적으로 쌓은 엄청난 권위를 내세워 하후현 등 친황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지 않고 남겨뒀다. 즉, 아들들이야 어찌되었든 그는 위의 충신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아직 위나라가 건재하던 234년에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가 이미 딴 마음을 품고 이를 눈치챈 아내 하후휘를 독살했는데 사마씨 일파는 이미 다른 본심을 품고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예 때 군권과 재정이 사마씨의 수중에 들어왔고, 구품관인법으로 관맥이 형성되었고,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사마씨에게 조정 대권이 집중되고, 종실 왕공들은 왕릉의 난을 계기로 사마의가 싹 유폐시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왕조의 레일은 충실하게 깔아주었고 사마의 사후 그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손자 사마염은 기어이 조씨로부터 황위를 찬탈했다.
만약 사마염이 세운 서진이 통일 제국으로서 제대로 움직였다면 선대들의 행각에 대하여 비판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진의 초대 황제인 사마염부터 온갖 실정을 일삼았고 후한 이래로 축적되었던 사회적인 모순이 폭발해 몰락해가다가 50여년 만에 완전히 망해버렸으며, 그 다음에 이어진 시대가 5호 16국이라는 난세였다. 한 개인이 감당해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 서진의 시조인 3부자에 대한 평은 자연스럽게 더욱 박해졌고 사마의는 후대에도 망탁조의 중 한명으로 꼽히며 역적으로 간주되었다.
6 미디어 믹스
- 사마의/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