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군사력 | |||||
대한민국 국군 | 조선인민군 | 중국 인민해방군 | |||
중화민국군 | 자위대* | 몽골군 | |||
* 자위대는 명목상 준군사조직이지만 사실상 군대로 취급된다. |
중화민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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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육군 | 중화민국 해군 | 중화민국 공군 |
중화민국 국군의 모병광고
중화민국 국군 中華民國 國軍 | |
Republic of China Armed Forces, ROC Armed Forces | |
세계 군사력 순위(GFP) | 19위 (2016년 7월) |
상비군 | 300,000명 |
예비군 | 1,675,000명 |
육군력 | |
전차 총합 | 2,005대 |
장갑차 (APCs/IFVs) | 4,350대 |
견인포 | 1,160문 |
자주포 | 482대 |
MLRS | 72대 |
공군력 | |
4세대 전투기 | 297기 |
3세대 전투기 | 23기 |
조기경보통제기 (E-2T/K) | 6기 |
헬리콥터 | 307기 |
해군력 | |
주력 수상함 | |
1만톤 미만 ~ 9천톤 이상 준이지스 구축함 | 4척 |
4천톤 이상 ~ 6천톤 미만 구축함 | 16척 |
3천톤 이상 ~ 4천톤 미만 구축함, 호위함 | 0척 |
2천톤 이상 ~ 2천5백톤 미만 호위함 | 0척 |
1천톤 이상 ~ 1천5백톤 미만 초계함 | 0척 |
5백톤 이상 ~ 6백톤 미만 초계함 | 1척 |
5백톤 이상 ~ 6백톤 미만 미사일 고속정 | 12척 |
2백톤 이상 ~ 3백톤 미만 미사일 고속정 | 0척 |
1백톤 이상 ~ 2백톤 미만 고속정 | 31척 |
잠수함 | |
2천7백톤 이상 ~ 2천8백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 2척 |
1천5백톤 이상 ~ 1천6백톤 미만 재래식 잠수함 | 2척 |
목차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대. 중화민국 국군(中華民國國軍)이라 한다. 2008년 국방비가 105억달러로 GDP의 2.5% 수준이었다. 중화민국 육군은 13만, 중화민국 해군은 3만8천명, 중화민국 공군은 3만5천명 수준이다.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Armed Forces라 하며 영어권에서도 중국군(Chinese Armed Forces)하면 보통은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로 받아들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너무 크기 때문에 중화민국의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보인다.
2016년 4월 기준 중화민국 국군의 세계 군사력 순위(GFP)는 19위다.
1.1 수뇌부
2015년 1월 20일 기준이다.
군 통수권자는 총통이며, 국방부장(국방장관)이 국방 관련 업무를 지휘하며, 참모총장을 두고 있다.
총통 | 국방부장 | 참모총장 |
차이잉원(蔡英文) | 펑스콴(馮世寬) | 옌더파(嚴德發) 육군상장[1] |
위의 가오광치는 대만 해군 상장(대장)으로 2009년 진급했고 2013년 8월 8일부터 2015년 1월 30일까지 중화민국 국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중화민국도 대한민국 못지 않게 문민통제 측면에서 평가가 좋지 못하다. 사실상 합참의장인 참모총장을 거친 인원들이 그대로 국방장관이 된다. 장제스 시절에는 공산국가처럼 현역 장성이 국방부장으로 재직하는 일이 계속되었고, 군 참모본부도 국방부가 아닌 군 통수권자인 총통의 직접 지휘를 받기까지 했다. 심지어 군 장성들 가운데는 집권 국민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여 국민당, 정부에서 공히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중화민국의 민주화가 본격화된 1990년대부터 수정이 시작되어 2002년 통과된 국방2법, 즉 <국방법>과 <국방부 조직법>에 따라 문민통제의 제도화,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명문화하면서 겨우 해소되었다. 다만 국방부장에 장성 출신이 주로 입각되는 관행은 여전히 남아있다. 1990년대 초중반에 리덩후이가 국립대만대학 총장, 경제부장 등의 순수 민간인을 국방부장에 임명하기도 했지만, 결국 장성 출신으로 회귀해야 했을 정도였다. 천수이볜 정권에서는 중화민국군 측이 차이잉원 당시 대륙위원회 주임(통일부 장관)에게 국방장관직을 제의한 적이 있었으나 차이잉원이 사양해서 무산된 적도 있다. 이 때 차이잉원이 국방장관직을 수락했으면 동양 최초의 여성 민간인 국방장관이 될 수도 있었던 대목.[2][3]
그 외에 각군 사령(참모총장)이 있다.
1.2 이름
정식 이름은 "중화민국 국군"으로 처음에는 "국민혁명군"이였으며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의 군대였기 때문에 줄여서 "국민당군", "국민군", "국부군(國府軍)"이라고도 불렸다. 1947년 1월 1일에 "중화민국 국군"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냉전 당시에는 정식 중국으로서 중화민국과 수교한 나라들에 한해서 "중국군"이라고 불렸고 반대로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에서는 "대만군"이라고 불렸으나 중화민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오늘날은 "대만군"이라 불리고 있다. 중화민국 안에서는 "국군"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화민국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언론 등에서 "타이완군"(台军, 타이쥔)이라고 하며, 대만 지역의 민병대나 의용군 내지는 한국의 독도경비대 같은 준군사조직으로 인식하고 있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나는 연세 많은 중국 본토인에 한해서 아직도 "국민당군"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2 역사
2.1 본토에서 놀던 때
중화민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할 때는 아시아에서 가장 공업화인 군대인 일본군을 이기고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군대이나 국공내전 패배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대륙을 지배하며 그 자리와 능력은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중화민국군은 손문(쑨원)에 의해 조직되기 시작하여, 장개석(장제스)에 의해 조직구조가 가다듬어졌는데, 이것이 '국민혁명군'이라 한다. 당시 중국을 자국편으로 끌어들여 제국주의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소련의 인적, 물적 지원으로 황포군관학교가 세워졌고 여기서 배출해 낸 장교들이 국민혁명군의 기둥이 된다. 장개석은 이런 자원을 가지고 북벌을 개시하였고, 북경을 지배하고 있던 군벌 세력을 정리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문제는 군벌세력들이 투항하면서 자신의 군대를 국민혁명군에 형식적으로 편입시켰으나 실제로는 투항한 군벌세력은 국민정부에 속한다는 것만 내세웠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국 각지를 할거하면서 자기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런 군벌군 소속을 합한 국민혁명군은 200-300만에 이르는 대병력이었으나, 실제로 중앙정부의 명령을 받는 장개석 직속의 부대는 약 30만명에 불과했다. 히틀러 집권 전까지 독일과 중국은 군사교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 직속부대는 최신식 독일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런 장개석 직속부대는 우월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장교들의 무능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 창강 유역 전투(난징, 상하이)에서 일본군과의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렇게 직속부대가 와해된 장개석은 아무것도 못하고 임시 수도인 중경(충칭)에 틀어박혀 군벌들에게 일본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군벌들은 자기병력이 분쇄되는걸 아까워해 대체로 일본군과 싸우는 걸 싫어했고, 국민혁명군에 형식상 편입되었던 염석산(옌지산) 같은 경우는 아예 일본군과 단독 강화를 맺을 정도였다.
이런 내막에다가 당시 부패가 이루 말할 수 없던 점, 군대가 마을을 습격해 강제로 남자들을 끌어다가 징집해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마을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해 군대를 물리치는(!) 지경이라 전투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힘들 정도. 더욱이 군벌을 중점으로 조직된 군대인지라 군벌들의 힘이 컸고 이로 인하여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는 나중에 중국군에서 복무한 몇몇 창군 초기 한국군 인사들에게서도 나타난 바 있는 문제였기도 했다.
의외로 장개석의 중앙군은 장비나 훈련 수준은 높은 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독일, 이탈리아 출신의 교관과 장비를 도입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소련, 미군으로부터 장비를 지원받았다. 그런가 하면 공군 훈련장은 동양 최대급으로, 일본군 조차도 탐내는 규모였다고...
숫적 우세와 장비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지지를 뿌리 끝까지 잃고 결국 패망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의 남베트남과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리하여 국공내전에서는 인민해방군에 휩쓸려 가다가, 결국 대만 섬으로 쫓겨가게 된다. 섬에 고립되는 선택을 함으로서 스스로 국민당군의 잔당들을 본토에 버려두게 되었고, 버려진 국민당군들은 나중에 미얀마 국경을 넘어가 밀림지역의 군벌 등으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2.2 대만섬으로 쫓겨간 뒤
본토의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선포하는 와중에도, 대만 섬에서 오늘내일 하고 있던 상황.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민병대로 이뤄진 상륙대를 진먼 섬에 한번 밀어넣어 봤다가, 중화민국군이 간신히 밀어내게 되었다. 심지어 진먼 섬에 물자 보급 임무를 수행하던 중화민국군의 상륙함이 물자 보급 외에 함장 및 승무원들의 필요에 의해 밀수(!!)를 하려고 출항 예정 시일을 넘겨 꾸물대다가, 부근 어민들에게 징발한 목선 따위를 타고 금문도에 상륙하려던 공산군을 발견하고는 탑재한 40mm 기관포로 개발살내버린 사례도 있다고 한다. 당시 중화민국군의 막장 상황과 상륙대라고 집어넣은 인민해방군의 한심한 수준을 비추어볼 수 있는 일화. 그리고 그 이후로 한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은 해군을 양성하고 전투력을 혁신하여 대만 섬 상륙을 준비하려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 부대가 한반도로 가는 바람에 대만 섬을 치지 못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가끔 분쟁이 일어났는데, 유명한 진먼 포격전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본격 대만 섬 상륙작전은 계속해서 뒤로 미루다가 지금까지 왔다. 양안의 대립이 심각했을 당시 공군이나 해군은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압도했고, 중화민국의 동맹국인 미국 해군 제7함대 규모나 오키나와/괌 등에 있는 수많은 미국 공군 전투력을 고려하면 함부로 대만 섬 상륙작전을 실행했다가는 인민해방군이 오히려 곤란해지니, 그렇게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은 불안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루머에 따르면 장제스는 1949년 7월에 한국 진해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했다고 한다. 당시 중국에서 대만으로 갓 후퇴했던 터라 중화민국 인구가 900만이 조금 안 되었는데 군대는 약 60만명 수준이었다. 장제스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니 중화민국군 해군을 한국에 주둔시켜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인들의 민족감정을 고려해 반대했다. 6.25 전쟁 당시에 장제스는 인민해방군에 맞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고 싶어했지만 확전을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한국화교 청년들이 한국군에 들어가 통역이나 심리전 요원으로 투입되어 인민해방군을 상대했으며, 드물게는 전투병으로 가기도 했다. 일부 전선에서는 중국인들끼리의 전투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화교 참전전우회 소속의 참전용사들이 거의 세상을 떠났고 화교들의 70% 가량이 북미나 중화민국으로 이주한 탓에 자료를 추산하기가 어렵다.[4] 한국 화교들은 HID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고 중화민국 장교들이 기초군사훈련을 담당했다. 그 후에 HID 소속의 SC지대에서 근무했는데 한국군 부대라서 중화민국군과는 관계가 없다. 중화민국군 장교들이 기초군사훈련을 한 정도이다.
1960년대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공조 아래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북한에 투입된 화교 출신 정보요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가 모두 이 문제에 무관심하고 한국 화교 인구가 적어 사회에서 반향 자체가 거의 없다.
3 현황
3.1 징병제
중화민국군은 한국처럼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군대 중에 하나인데, 중화민국의 병역자원 소집과 관리업무는 역정서에서 한다. 한국의 병무청이 국방부 소속의 관청이지만, 역정서는 내정부 소속 관청이다. 중화민국의 병역의무자가 징집이나 소집통지서를 받으면 타이중에 있는 성공령이라는 신병교육기관으로 입대를 하게 된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논산에 있는 육군훈련소로 가는것)
2014년부터 종전 1년에서 기초군사교육만 4개월 받는 것으로 줄어든다. 또한 21만명의 총병력으로 재구성된다. 2011년에 만 18세가 되는 병역자원부터 적용된다. 1년 늦게 태어난게 무슨 죄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어차피 복불복...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고..
"중화민국 여성들은 국방세를 내며 이를 불이행할 경우 공장에 끌려가서 강제노동한다"라는 말이 떠돌지만 거짓말이다. 어디서 퍼진 얘긴지 모르겠지만 공장 강제노동은 물론이고 국방세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근거자료 다만 대만 계엄령 시기에 진먼과 마쭈 열도 같은 최전방에서는 여성들에게도 민방위 의무를 부과했던 적이 있다.
종전 복무 기간은 한국보다 훨씬 짧은 1년이었다. 거기다 주말에는 집에도 갈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것이 그들의 휴가이며, 모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1년의 복무기간중에 한 번도 안나가고 버틴다면 1년 막바지에는 104일의 휴가를 받아 집에서 놀 수 있다. 작은 섬의 군대다 보니깐 가능한 일. 한국은 그렇지가 않으니 군인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직에 익숙해질만하면 전역하고 새 자원을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로 말이 많다고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투경찰순경, 사회복무요원, 산업기능요원이 있고, 예비군제도도 한국과 거의 같다. 중화민국의 사회복무요원은 신체등급이 낮은 경우 외에도 현역대상자도 요건을 갖춘 상태에서 신청을 하면 심사후에 문제가 없으면 편입된다고 한다. 단, 종교적인 이유로 편입된 경우(여호와의 증인 신자 등인 경우) 군사훈련 면제.
월급은 중화민국군 쪽이 좋다. 게다가 의무복무기간 1년이 지나고 연장근무하면 2012년 기준 이병 월급이 기본급 100만원정도. 월급은 둘째치고 (병)전역자에 대한 대우는 확실히 한국보다 훨씬 좋다.
2000년대 초까지만해도 부대 및 병과 배치를 무작위로 하였다. 인맥이나 권력을 이용해 복무 환경이 좋은 부대나 병과로 배치하는 관행을 막고자 형평성 있는 군 복무를 목적으로 본인이 희망하는 병과나 부대를 선택할 수 없게 만든 것. 다만, 현재도 그러는지는 추가바람.
그러나 90년대까지도 구타나 내무부조리등 한국군에 있던 악습과 비슷한 양상의 전개도 많았다. 특히 이런 문제는 한국군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고 이런 관행은 과거 국민당군의 부패문제와 결부해서나 기존의 중국의 군에 대한 전통적인 부정적 인식이 한몫을 했다. '좋은 쇠는 못으로 쓰지 않듯이 제대로 된 남자는 군에 가지 않는다'라는 기존의 중국 한족들의 특유의 병역기피현상 인식이 군에 대한 사회적인식 전반이 극단적으로 낮아진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군벌집합으로 시작된 군대이다보니 병사들 대우가 좋을래야 좋을수가 없는 현실의 전통이 나올수 밖에 없었다.
95년 황궈장(黃國章) 해군장병 의문사를 기점으로 현재는 '중화민국군의 군 인권 어머니' '황마마'라고 하는 천비어(陳碧娥)씨의 노력으로 중화민국군이 상당히 군내부문제와 내부문화가 변화하긴 했다. 이 분은 1995년 6월 군복무 중이던 황궈장(黃國章)의 어머니로, 아들이 우울증으로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군 당국의 설명과 달리 며칠 뒤 발견 된 아들의 시신이 상처투성이에다 머리엔 쇠못이 박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시신의 상황을 보아 살인 사건이었으나, 문제는 중화민국 국방부에서는 제대로 조사를 안하려 했던 것. 국방부의 책임 회피 등으로 분노한 천비어씨는 군 인권활동가로 전업하여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비어씨의 활동 이전까지만 해도 중화민국 국군 내부의 군 인권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상관의 학대와 복무부적응으로 자살한 군인에게 터무니없이 낮은 액수의 장례비만을 주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조사도 안한 것은 덤이다.
실제로 95년 이후부터 중화민국군의 군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 논쟁이 벌어지자 이 논쟁을 주도한 천비어씨는 중화민국 국방부로부터 미친 여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국방부에 가서 항의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인 노력을 통해서 현재는 중화민국 국방부 역시 그녀를 인정하고 있다. 천비어씨는 2007년 7월에 한국을 방문하여 군 의문사 유가족들이랑 군내 사고로 죽은 병사 유가족, 군 인권 활동가들과 만나 그들을 위로하며 활발한 토론을 햇다.
결국 2014년부터 4개월로 단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군복무 개혁안이 예고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라는 공룡만한 군대와 대치중임에도 불구하고 모병제를 계획한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이 대한민국의 병역의무와 비교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을 먹지 않는 대신 "하나의 중국만 잘 지켜주면 너네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던 절대 터치 안 함"이란 조건으로 중화민국을 건드리지 않기 때문에 중화민국 측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전쟁, 독립, 통일(중화민국의 주도로)을 하지 않는 한 북한마냥 흡수통일을 할 계획은 없고 또한 추진하더라도 상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중화민국군이 그 전에 준비할 시간이 있다. 이 상태로 전시 상황에서 징병을 제대로 할 수만 있다면 평시 모병제가 비현실적인 방안만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징병제가 아예 없어지는게 아니라 기본군사훈련만 받게 되는 형태라서 전시상황이 길어진다고 병력자원을 그냥 막무가내로 투입하지 않는 형태의 모병제라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국군의 경우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지상전을 수행해야함은 물론이거니와 휴전선에서 막는 것만이 아니라 북진을 해서 미수복지구라고 불리우는 북한지역을 수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입하는 것까지 고려해야하는 입장이다. 더욱이 통일 이후에도 기동방어가 가능해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상군이 쳐들어올 수 있는 형태의 안보상황이라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중화민국의 병역의무와 무조건 동일선상의 비교하는 것은 큰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원래 2015년에 완전히 모병제로 전환할 계획이었지만, 모병률이 미달 되면서 계획에 차질을 빚어 2017년까지 연장되었다. # 게다가 2013년 7월에는 부대에 휴대폰을 반입해서 군기교육대에 갔던 훙중추 상병이 제대를 앞두고 갑자기 의문사하는 사고가 터지면서 군대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들의 시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관련 영문위키
당시 상황.
위와 같은 이유로 아직은 완전한 모병제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징병제 폐지 계획 자체는 계속 진행중이다.
2014년 시점에서는 엄청난 희귀본인데 2002년경 대원을 통해 개같은 내 인생(원제:狗臉的歲月) 이라는 제목의 중화민국 만화가 한국에 정발된 적이 있다. 작가 개인의 자전적인 만화로 군대 시절을 소재로 삼았는데 한국의 병영만화들처럼 군대 찬양 혹은 그 시절 참 좋았지라는 시각이 아니라 ' 내 인생에서 가장 개같던 삶의 부분 ' 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려낸 만화다. 대충 주호민 <짬>의 암울한 버전 혹은 DP 개의 날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중화민국에서 이런 만화가 출판됐다는 게 참 후덜덜하지만 상술된 천비어 씨의 사회운동 덕분에 군의 악습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진 그 당시 사회분위기의 덕을 본 것도 있다. 관련 정보를 확인할수 있다.
3.2 주 임무
197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중화민국의 주요 정책중 하나가 본토 수복이었다. 그 때문에 1960~1970년대에는 거의 대한민국의 북파공작부대 삘의 '본토정찰대' 같은 부대가 있는가 하면, 해병대를 대량양성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중화민국 스스로가 UN에서 퇴출되다시피 스스로 탈퇴를 하면서 수세의 입장에 몰리게 되었고 80년대 중후반부터 본토 수복이라는 전략에 대해서 재검토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 90년대에 이제 본격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격차가 커지자 90년대부터 사실상 주 전략이 본토 수복 자체를 포기하고 타이완섬 방어라는 입장으로 선회를 하게 된다.[5]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사시 공격을 방어하는 체제로서, 공군과 해군의 비중이 기존의 지상군보다는 높아지면서, 해병대는 상륙지점에 대한 반격작전 및 수도방어의 기동전력으로 활용되는 체제로 개편되어가고 있다. 공군의 경우에는 냉전기부터 미국이 중국 내륙을 정찰할 때 U-2기를 중화민국 해군 소속으로 하고 중화민국군 조종사를 태웠다. 여담으로 사이드와인더 미사일이 구소련으로 가게 된 것도 중공-중화민국 공군의 공중전 중 불발된 미사일이 미그기에 꽂힌 채로 돌아가 노획(?)된 것이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본토수복이라는 전략의 폐기이후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타이완섬등의 중화민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의 도서방위가 최우선으로 목표로서의 신속대응군화와 해공군의 육성에 주력하고 있으며 중국의 군사력 성장에 의한 비대칭 전력 강화도 한몫을 하고 있다. 현재 실질적으로 타이완 섬 방어와 함께 중국의 A2/AD전략에 역전략을 중화민국이 전략으로 구사하기 위한 전략과 임무를 갖추고 있다.
3.3 해외 협력
싱가포르는 훈련장소의 부족으로 1975년에 군대를 보내서 중화민국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싱가포르군은 2005년 기준 대략 3000명 정도가 대만에서 훈련받고 있다. 싱가포르는 대만에 영구적인 군기지를 유지하는 유일한 해외국가이다. 싱가포르는 대만과 유사하게 주변이 대국으로 둘러싸인 섬나라이다. 그래서 대만에 군사기지를 두는 것이 훈련 적합도를 더하여 주지만 싱가포르와 중국 간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중국은 대만과의 관계를 끊고 하이난 섬에 새로운 군사훈련장소를 지원해 주는 것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였다.
3.4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박
중화인민공화국의 압박 때문에, 돈이 넘쳐나서 산다고 하는데도 아무도 무기를 팔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중화민국이 UN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베트남이 킬로급 잠수함을 살 때도 중국은 대놓고 딴지를 걸지는 못했지만 중화민국은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서방 국가들이나 러시아가 알아서 안 판다. 상호 경제적 이익문제를 비례해봤을때를 본다면 당연한 일이다. 비슷한 사례를 들면 현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반군에게 무기를 팔고 의용병을 보내는 게 서방측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나를 보면 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만해협에서의 전력은 중화민국군이 해군과 공군 모두 우세였으나 90년대 후반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제 성장과 냉전 종식이후 인민해방군은 러시아에게 최신 무기를 도입 할 수 있게 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어 2000년대 들어서 그 우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인민해방군의 성장과 달리 중화민국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고립과 중국의 압박으로 무기 도입선을 상실하게 되면서 신규 장비를 도입하지 못하게 되었고, 오로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1979년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동시에 중화민국과는 자동적으로 단교)하면서 중화민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제정한 대만관계법에 따라 "중화민국이 자체 방어를 위해 필요한 능력, 용역을 제공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
문제는 중화민국에 사실상 하나뿐인 무기 공급선인 미국조차 무기 판매에 있어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대만관계법>에는 미국이 대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무기를 '방어용'으로 명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만이 사고 싶다고 해서 뭐든지 파는 게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인 판단과 고려에 따라 해당 무기의 판매 여부를 결정한다는 의미. 이에 따르면 중국 본토 공격에 사용될 수 있는 장거리 타격무기(예: 탄도/순항미사일) 등은 제공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이 방어용 무기조차도 중화민국에 바가지를 씌워서 팔고 있다(...). 일례로 얼마 전 중화민국이 UH-60을 크게 비싼 옵션 없이 도입했는데도 그 가격이 대당 600억에 달했다. UH-60이 중형헬기 중에서는 가장 비싼 축에 속한다는 것을 감안해보더라도 저 가격은 크게 비싼 가격이다. 대형헬기인 AW-101조차도 저 가격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뭐 사실상 독점 사업인데다, 진짜로 무기를 파는 주체인 미국의 방산업체들은 미 정부와 달리 영리 추구 집단이므로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긴 하다.
이에 중화민국은 자체적으로 대부분의 무기를 마개조 수준으로 개조하고 국산개발을 통하여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유럽에서 무기를 사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수출국에게 직-간접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중화민국에게 군함과 무기체계를 팔았던 프랑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프랑스로 부터 수입 중단과 함께 공동무기 개발이라는 당근을 던져주어서 이탈을 시켰고. 영국과 독일은 중화민국에 무기를 안 팔아도 아쉬울게 없는 상황이니, 중화민국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다. 심지어 한국에도 선을 대본 듯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바로 니들이 무기 사는 건 주권국가니까 불편한 소리 하고 말겠지만 중화민국에 팔면 가만두지 않는다고 경고하면서 바로 발을 빼 버렸다. 심지어 80년대 중화민국의 1500톤급 호위함 16척 조달계획에서 가장 우세했던 게 울산급이었다. 이는 울산급의 저렴한 도입가와 함께 당시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의 돈독한 관계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후 대한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중화민국과 단교하면서 사업은 백지화되고 중화민국은 울산급 대신 더 배수량이 크고 성능도 더 좋은그리고 가격도 더 비싼 프랑스의 라파예트급 호위함을 캉딩급이란 이름으로 도입하게 된다.
개인 화기류는 거의가 수입산 내지 수입 무기 개량판으로 버티고 있다. 일반 병의 화기인 T시리즈는 거의가 AR-15와 AR-18의 개량판. 특수목적용 화기들은 그냥 수입해서 쓰고 있다. 그나마 중화인민공화국도 이건 막지는 않는 모양.
세상에 무서운 게 없던 조지 워커 부시 재임시기에는 키드급, 패트리어트 미사일등 50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의 무기 도입을 했었지만 이조차도 이지스 구축함인 알레이버크급을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발로 도입하는데 실패하여 키드급을 받게 된 것처럼 한계가 있었다. 정권이 오바마 행정부로 교체된 뒤에는 이전에 비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미국의 신중한 입장으로 인해 중화민국이 요청한 F-16 등의 신무기 도입들은 지연되고 있다. 즉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의 군사위협에 맞서기 위해 군사 역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미국에게 유리한 대한민국, 일본, 호주 등 다른 역내 동맹국들과는 달리, 중화민국에 대한 미국의 기대는 단지 '기본적 방위능력의 유지'에 그치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만 섬은 한반도, 남중국해와 더불어 해양세력인 미국이 중국 대륙 세력과 경쟁하는 대표적인 최전선 지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7대 군구 가운데 하나인 난징군구는 동중국해와 대만해협을 작전 구역으로 한다. 만약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점령되어 중국의 군사기지가 된다면, 그 동안 중화민국을 상대하느라 묶여있던 난징군구의 중국 육-해-공군력이 센카쿠 열도, 스프래틀리 제도 등에도 전략 예비전력으로 투입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과 동남아시아, 미국 등이 중국과의 해상분쟁에서 상대해야 할 전력의 규모가 현재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뜻[6]. 요컨대 대만의 군사력은 비록 중국에 역전되었을지라도, 아태 지역에서 중국 군사력의 분산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최근 미국의 중화민국에 대한 군사 지원이 소극적임을 보고 '이제 아태 지역에서 미국에게 중화민국의 군사적 가치는 있으나 마나'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말대로라면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할 때 진작 미국은 중화민국에 대한 미련을 끊었을 것이고, 굳이 대만관계법까지 제정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미국이 예전보다 중화민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있으며, 미국 내에서 대만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가끔씩 대두되고 있기 때문에 중화민국에서 이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해군의 경우 수상함 중 VLS를 장착한 함선이 존재하지 않고 단장미사일 발사기를 운용하는 함들로 구성되어 대응성이 부족하다. 그나마 4척 있는 키드급이 초기형 이지스함과 버금가는 능력을 갖고 있는 정도다. 기어링급을 2003년까지 운영하는 것도 그런데 그것도 수량이 부족하여 중고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을 추가적으로 도입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페리급은 성능상 한계로 중화인민공화국 해군을 상대로 생존을 보장 받기 힘들기에 도입시에 이지스 시스템을 장착하자는 주장도 꾸준히 내부에서 제시되고 있다. 실전배치된 이지스시스템 중 가장 작은 SPY-1F는 프리드요프 난센급에 장착된 레이더인데, 이 함선은 충무공 이순신급과 비슷한 체급이며 페리급보다는 당연히 한 체급 위다. 따라서 사실 저 계획도 사실은 무리수가 있는 셈. 대잠 전력도 빈약하여 대잠전을 위한 고정익기와 헬기가 부족하다. 예를 들어 대잠초계기의 주력은 S-2T 트래커가 주력인데 22대를 퇴역시키고 소수만을 운영 중이고 이를 대체할 P-3C는 2013~14년에나 인도 받을 수 있다.
가장 암담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분야는 잠수함 전력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막강한 공군 전력에 방해 받지 않고 적 잠수함 감시와 수상함, 상륙함 전력을 효과적으로 저지 할 수 있는 잠수함 전력은 2차 대전 시기 건조된 가피급 2척과 1982년 네덜란드에게 도입한 해룡급 2척 뿐이다. 해룡의 경우 총 6척을 도입할 예정이였으나 중국의 압력에 네덜란드가 굴복하면서 좌절되었다. 중화민국 역시 잠수함의 중요성을 알기에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으나 계속 좌절되던 중 2001년 4월에 미국이 8척의 디젤 잠수함을 판매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도입 가능성이 생겼다. 미국은 이미 디젤 잠수함을 포기한지 50년 가까이 되어 기술을 상실하였기에 미국이 건조하는 게 아니라 유럽에서 구매하여 중화민국에게 인도해야 하는데 디젤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는 유럽이 즉시 잠수함 판매 불가 선언을 함으로서 '언제든 중화민국이 필요하면 미국이 도와준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후 잠수함 도입에 있어 미국은 설계비로만 3억 달러를 요구하였고 그나마도 2010년 1월 미국 국방 안보 협력기구에서 의회에 제출한 중화민국에 수출할 무기 목록에서 잠수함과 F-16을 제외함으로 결국 2011년 현재까지도 미국은 잠수함을 확보하지 못하여 중화민국은 언제 잠수함을 가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상황이며 향후 국내 개발이든 미국을 통한 도입이든 전망도 밝지 않다. 설사 그렇게 중화민국에 잠수함을 팔겠다는 국가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일단 미국의 손을 한 번 거쳐야 하므로 대만이 또다시 바가지를 쓸 것임은 기정된 사실이다. 결국 중화민국은 상륙 거부 전략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원자력 잠수함을 중화민국에 수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우방국이라고 해도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전략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떄문이다. 애초에 미국은 맥마흔 법안에 의거하여 핵무기 및 핵기술의 이전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들인 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도, 사실상 해당 국가들의 독자 개발이었고 여기에 막을 수 없다는 게 명백해지자 그제서야 꼼수를 통해 미국이 간접적으로 기술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NATO에서 미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형태였으며[7], 그나마 가장 중요한 원잠 개발은 미국의 기술 지원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그럴 능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 중화민국이 원자력 잠수함을 개발-도입 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뜻과 같다.
결국 중화민국군은 2016년부터 국산 잠수함을 건조하기 위한 설계에 들어갔다. 이전에 잠수함을 팔았던 네덜란드로부터 설계 청사진을 얻고 미국 등에도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계획에 따르면 2019년까지 설계를 완료하고 건조를 시작하여 2024년에 취역할 계획이라고 한다. # 그러니까 그 전까지는 저 구닥다리 잠수함들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공군은 중화민국의 최우선 투자 분야로 F-16A/B 블럭 20 150대와 미라지 2000-5 58대가 주력이며 F-CK-1징궈 전투기 130대가 이를 보좌한다. 그외에 유사시을 대비하여 60대의 F-5E/F형을 보관 하고 있다. 또한 조기경보기 전력으로 E-2 호크아이를 운용하고 있다.
80년대 말 미국의 F-16판매 거부와 유력한 대안인 F-20의 잇따른 추락으로 노후화된 공군전력이 교체되지 못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미국의 판매와 프랑스와 접촉으로 미라지 2000을 확보하면서 전력 교체에 성공했다.
F-16A/B는 1990년대 초 대만이 F-16C/D을 요청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을 의식하여 F-16A/B형을 제공하였다. 성능 자체는 C/D 블록 50형에 비해 크게 떨어졌으나 1998년 암람을 포함한 다향한 무장을 판매하면서 준하는 수준까지는 성능이 향상되었다. 미라지 2000은 미라지-F1이 F-16에게 밀려나면서 패배한 뒤 안티 F-16을 외치며 절치부심해 만든 전투기로 본래 기반이 미라지-3로 부터 이어져오는 초음속에서 유용한 삼각날개 요격기계열의 설계를 기반으로 이런저런 개량을 해 다목적기로 만든 기체로 프랑스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악화 되었을때 접근하여 라파예트급 호위함과 같이 도입하였다. 미라지 2000은 우수한 전투기로 성능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미국의 무기만을 사용하던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를 운용하기 위하여 미카 미사일등 프랑스제 무장을 대규모로 도입해야만 했고 미국제가 아닌 이질적인 장비를 운영하면서 F-16에 비해 막대한 유지비가 들고 있다. 때문에 조기퇴역까지 검토했을 정도였지만 대체전력확보(F-16 추가도입)도 여의치 않고 성능(특히 공중전능력)도 아깝기 때문에 정비관련 추가예산을 신청했다고... 미라지 2000의 유지비용이 f-16 전투기의 유지비용보다 3~4배 비싸게 나오는 자료도 있다.
E-2T/K는 최신 성능 향상계획이였던 호크아이2000이 적용된 기체들이며 총 6대를 장비하고 있다.
중화민국의 공군 전력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아시아에서도 강한 편에 해당하는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단지 그 주변 공군들 중에 동남아시아의 약소국들과 북한을 빼면 중화민국보다 약한 공군력을 가진 나라가 하나도 없어서 존재감이 없는 것뿐(...) 또 주적인 인민해방군 공군의 J-11은 중화민국 공군에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문제에 대비해 중화민국은 격납고를 북한과 같이 지하에 건설하여 항공기를 보호하고 있고 큰 곳은 공군 전력의 절반이 들어갈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위협으로 부터 대항하기 위해 보관 중인 F-5E/F 대체 수단으로 F-16C/D 블록50형을 60여대 요구하고 있으며 기존의 F-16도 블록 50 수준으로 향상 시킬려 미국에 요청 중이나 미국은 신규 판매에 소극적이다. 미국의 경제가 더 안 좋아지면서 미국 국채를 대량 매입해둔 중화인민공화국을 여느 때보다도 더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이 기존의 F-16 성능 향상 사업에 그나마 긍정적인 반응늘 보이는것을 위안삼아야 할 지경이다.
중화민국의 F-16 성능 향상은 F-16의 최신계열인 F-16V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세부 내용으로는 보유하고 있는 145대의 전투기에 레이시온사의 RACR 또는 노스롭 그루먼사의 SABR AESA 능동형 레이더, 신형 GPS시스템과 관성 항법 장치 및 전자전 시스템, 록히드 마틴사의 스나이퍼 또는 노스롭 그루먼사의 라이트닝 목표조준 포드, AIM-9X 미사일, JDAM, GBU-24 페이브웨이 폭탄 장착 등을 할 예정으로 이 정도면 J-10이나 J-11에 대한 대응이 가능하겠지만 성능향상이 완료 되는 시점에서 J-20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기에 중국군에 대한 견제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성능 개량 사업은 결국 18억 5천만 달러에 록히드 마틴사가 선정되었다 경쟁회사인 BAE 시스템스가 크게 반발하였다. 이 회사는 현재 대한민국 공군의 F-16/KF-16 개량사업을 진행중인 회사이다. 당시 록히드마틴은 F-16V가 아닌 그보다 떨어지는 F-16CJ급을 목표 개량형으로 대한민국 공군에 제시했다가 탈락하기도 했다.
중화민국군 성능 개량사업은 선정자인 미 공군이 평가 후 선택에 따라 록히드 마틴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중화민국이 회사를 선정한게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중화민국이 미공군의 F-16 개량사업인 CAPES에 업혀가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CAPES 예산이 삭감되면서 중화민국은 또다시 안습해졌다. 어쩌면 그 대신 이미 확정된 대한민국 공군의 KF-16 개량사업에 끼어갈지도 모른다. 또한 개량사업을 할 때 레이더 테스트 비용을 중화민국이 지불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선택한 레이더가 차후 타국이 선택하여 장착할 때 처음에 비용을 지불한 국가는 테스트비용을 일부를 돌려 받게되는데 중화민국은 계약에 따라 돌려 받지 못한다. 이 정도면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 레이더는 아니지만 과거 대한민국 육군이 MD500 경헬기를 대량 도입할때 한국군의 요구로 토우 대전차미사일을 장비하는 대전차형을 개발(당연히 개발비는 한국에서 냈다.)했는데 이후 이스라엘이 MD500 대전차형 30대를 사갔을때 로열티 명목으로 대당 2만 달러씩 총 60만 달러를 돌려받았다고 한다.
굳이 공개적인 압박이 아니더라도, 중화민국에 무기가 넘어가기만 하면, 며칠 안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해당 무기의 제원은 물론 정비 기술까지 다 알아간다는 소문이 있다. 과장이 심한 내용이긴 하지만 실제로 국군내 북한 스파이에 대한 소문처럼 중화민국인들 사이에서 꽤나 말이 많은 일중 하나이며, 중화민국군 내에서 주기적으로 색출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어찌되었건 중화민국군의 정보 보안 자체가 의외로 취약한 건 사실로 보인다.
2011년에 현역 중화민국군 장성이 인민해방군에 기밀 정보를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 체포된 사건이 있었고#, 2014년에는 E-2K 조기 경보기의 정보를 공군 중령이 직접 중국 스파이에게 넘긴 행위로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반대로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측에 스파이 활동을 펼친 경우도 있다.#
의외로 최신무기에 속하는 AH-64E 아파치 가디언은 수월하게 도입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미 정부가 아파치 기술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공격헬기는 고성능만이 장땡이 아닌 물건이라 전차를 잘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만 만들면 되고, 이런 조건이라면 인민해방군도 쓸만한 물건들을 독자 개발하는 중이기 때문에 제공권 장악의 핵심인 전투기나 지상전 승리의 핵심인 전차보다는 중요도가 낮다고 판단한 듯하다. 제공권이 장악당한 상황이면 아파치가 아니라 아파치 할아버지가 와도 답이 없으니까.
2015년 4월에는 중화민국의 한 방송인이 아파치가 배치된 육군 부대에 방문해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기체 계기판 등 군 기밀사항의 누설 여부로 비판을 받아 관련 장교들이 문책을 받는 소동이 빚어졌다.
3.4.1 핵개발 시도
장제스 정부 시절 '신주(新竹) 계획'이라는 암호명으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 적이 있다.[8] 1965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캐나다에서 천연 우라늄과 연구용 핵반응기를 도입해 1980년대에는 농축 우라늄 추출 기술을 확보했다.
(중화민국의 핵개발을 폭로한 장셴이. 1988년 1월 미국에 망명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사망한 후 정국이 혼란해지고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면서 개발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총통도 일단 핵무기 개발 계획을 유지했지만, 1988년 1월 중산과학연구원 내 핵무기 연구센터 부소장이었던 장셴이(張憲義)가 미국으로 망명, 핵개발 의혹을 폭로하면서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의 감시 하에 공식적으로 핵개발을 중단했다.[9] 당시 중화민국군 참모총장이자 중산과학연구원 원장을 겸임했던 중화민국 군부의 원로 하오보춘은 2000년 출간된 회고록을 통해 "1986년에 단기간 내에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1970~80년대 중산과학연구원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중화민국의 핵물리학자 허리웨이(賀立維. 영어이름 David Ho)는 2015년에 출간된 저서 <대만제 핵무기>(원제: 核彈MIT: 一個尚未結束的故事)[10]에서 당시 중화민국군이 핵무기를 개발한 후 어떠한 투발수단(예: 항공기, 미사일)으로 실전에 사용할 지의 여부가 불분명한 상태였고,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할 경우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핵무기를 일종의 '대규모 자폭 무기'로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미국에 중화민국의 핵개발을 폭로한 장셴이는 '배신자'가 아닌, 중화민국의 재앙을 막은 '영웅'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
이후에도 몇 차례 극비리에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모두 부인하고 있다.[11] 하지만 아시아 국가 중 대한민국, 일본과 함께 높은 수준의 원자력 기술을 확보한 국가 중 하나라서, 핵 도미노 현상이 현실화할 경우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
3.4.2 중국군 vs 대만군?
중국군 vs 중화민국군항목 참조
3.5 군별
3.6 조직
중화민국군은 미군의 영향을 받아 육,해,공 3군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해병대에 해당하는 해군육전대가 해군 밑에 있다. 독특한 점은 헌병사령부가 각 군 사령부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점인데, 일단 전체 헌병병과는 육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헌병사령부는 국방부 직할 사령부로 육, 해, 공군 사령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고 있다. 이는 헌병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국가 헌병대처럼 민간인 대상 경찰업무까지 맡고 있는 특수성을 감안한 것.
- 참모본부(한국군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
- 육군사령부
- 해군사령부
- 해군육전대사령부
- 공군사령부
- 헌병사령부
- 후비사령부(후방지역 방어 담당, 한국 육군의 제2작전사령부에 해당.)
- 연합후근사령부(전 군의 지원병과를 통합. 중국군의 후근보장부와 유사함.)
3.7 계급
중화민국군/계급 참조.
계급 순위를 대/중/소가 아니라 상/중/소로 나누는 점과 영관급을 교관급이라고 부르는 점, 준위가 없는 점 등이 주적인 인민해방군과 똑같다. 다만 장교를 관교(官校)라 부르고 인민해방군에서 고급 부사관의 호칭인 '군사장' 대신 '사관장'이라는 호칭을 쓰는 차이 정도는 있다.
3.8 중화민국군의 장비 목록
3.8.1 육군
(T91소총)
- 85식 유탄발사기 - T86/96에 부착 사용.
- AUG - 특수부대 사용
- G36C - 특수부대 사용
- M14 - 해병대, 특수부대 사용. T57 보총으로 자체 생산한 수량도 존재.
- M16A1
- T75K1 권총
- T77 기관단총
- T75 기관총
- T74 기관총
- M60 기관총 - 제식명 T57
- M2 중기관총 - M2 QCB와 유사하게 개량한 90식 중기관총도 사용.
- T91 고속유탄기관총
- M48A3 전차[12] - 600대[13]
- M60A3 TTS 전차 - 460대
- M41D 경전차 - 50대
- M109A2/5 자주포 - 197/28문
- M110A2 자주포 - 75문
- M101A2 견인포 - 650문
- M59A1 견인포 - 390문
- 험비 - 2000~2500대
- AAVP7 장갑차 - 54대
- LVPT5A1 장갑차 - 84대
- CM-32 장륜 장갑차 - 652대
- M113 장갑차[14] - 1675대+
- V-150S장륜 장갑차 - 300대
- AH-1W 공격헬기 - 61대
- AH-64E 공격헬기 - 29대[15]
- CH-47SD - 8대
- UH-1H - 40대
- UH-60M -45대
- OH-58D 헬기 - 38대
- OH-6A 헬기
- M72 대전차 로켓
- FGM-148 재블린 대전차미사일 -360기/ 40개의 발사대
- TOW 대전차미사일 - 3100기+/163개의 발사대+
- 헬파이어 대전차미사일[16] - L형 1000기/ K3형 240기/ C형 684기
- 미스트랄
- 스팅거(지대공미사일) -173기[17]
- 호크 - 19개 포대
- 패트리어트PAC-2/3 - 3개 포대/ 7개 포대
- 어벤저 - 74대
3.8.2 해군
- 키드급 구축함(키룽급) - 4척
-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쳉공급) - 8척
- 캉딩급 호위함 - 6척
- 녹스급 호위함(지양급) - 6척[18]
- UH-60[19] - 19대
- 500MD - 9대
- P-3C 대잠초계기 - 4대
- S-2 대잠초계기 - 11대
- 슝펑 미사일
- 광화6 미사일 고속정 - 31척
- 타강급 초계함 - 1척
3.8.3 공군
- F-5E/F - 23대
- F-16A/B 블럭20[20] - 116대
- 미라지 2000-5 - 47대
- F-CK-1징궈 - 102대
- E-2T/K조기경보기 - 6대
- C-130H - 19대
- AT-3 자강
3.9 관련항목
3.9.1 관련 기관과 제도
3.9.2 미디어
- 영화
- 드라마
- ↑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에 상당한다.
- ↑ 참고로 아시아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이 된 인물은 2007년 7월 일본 방위대신에 취임했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다. 그러나 1개월만에 교체되었다.
- ↑ 펑스콴은 군 제대후 10년만에 장관이 된 사례.
- ↑ 출처: 구술사료선집5 한국 화교의 생활과 정체성, 2007, 국사편찬위원회, p.37
- ↑ 그 전에는 내부적으로 점진적으로 그 전략의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80년대부터 해병대인 해군육전대 규모가 대대적으로 감축되기 시작한다.
- ↑ 이럴 경우 필리핀의 미 해군기지와 괌의 활동 및 안전이 위협받게 된다. 실질적으로 남중국해에서의 제1도련선을 내주는 격이다.
- ↑ 실제로 영국의 경우 이 때문에 그냥 핵 포기하고 미국 밑으로 들어가자는 말도 심심찮게 나온다.
- ↑ 신주는 중화민국의 유력 제조업체, 과학기술 연구개발 시설이 다수 위치한 지역이며, 특히 미국에서 도입한 중화민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가 이곳의 국립칭화대학에 설치되어 있었다.
- ↑ 장셴이는 중화민국군 육군 대령 출신으로 미국 테네시 대학교에서 원자력 부문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미국 CIA에 포섭된 상태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장징궈 당시 총통이 타계했다. 일부에서는 핵개발 계획의 누설로 인한 충격 때문 아니냐는 주장도 하지만, 이미 장징궈는 수년 전부터 지병인 당뇨 등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 ↑ 책 제목의 MIT는 미국의 어느 지방 공대가 아니라 대만제(Made in Taiwan)의 머리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아니면 메이드 인 하버드, 칼텍으로 썼겠지 - ↑ 1995년 7월 독립주의자였던 리덩후이 당시 중화민국 총통은 중국이 자신의 미국 방문 직후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실시하자 "핵무기 개발 재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으나, 국내외적으로 파장이 커지자 부랴부랴 번복한 일이 있었다.
- ↑ CM-11/12 개량형 포함
- ↑ M48A3/H(CM-11) 450대, M48A3/H(CM-12) 100대, M48A3 50대
- ↑ CM-21 시리즈 포함
- ↑ 추가주문 30대
- ↑ L/K3/C형 운영
- ↑ 육군항공기용 기준
- ↑ 2015년 퇴역 예정
- ↑ S-70C급 민수형 개조형
- ↑ CCIP로 F-16V로 개량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