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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4일 (토) 11:16 기준 최신판
- 상위 문서: 김두한
1 일제강점기
1918년 김좌진의 서자로 출생. 출생과 부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따로 다룬다.
이하의 문서들은 김두한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 서술이 많으니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볼 것을 권고한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930년 13살이 되던 해 집안 사정이 어려워 홀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거지패에 잡혔다거나, 교동보통학교에 다녔으나 제대로 끝마치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졸업을 간신히 했다거나 원씨 노인[1]이라는 사람이 데려가 운동만 시켰다거나... 등의 잡다한 내용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사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연구자 또한 없으므로(..) 앞으로도 밝혀내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매우 어렸을 때부터 종로와 파고다공원 근방에서 싸움 실력 하나만으로 입지를 다졌으며, 18세가 되던 1935년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극장이었던 우미관 일대를 제패하여 서울의 깡패들 중 가장 악명 높은 한 사람이 되었다. 1940년 종로 2가의 다방을 거점으로 깽판(..)을 쳐오던 김두한이 검거된 사건
나중에 본인 및 본인을 따르던 이들, 친지들 그리고 삼류 조폭물을 만드는 창작자들 은 일제강점기 시절 종로 일대에서 일본 야쿠자의 침입에 맞서 대항했던 민족적인 주먹패라고 선전했다. 심지어 일부 창작물에서는 일제의 무기고를 폭파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어쨌든 가장 주요한 행적은 조선인 상인을 "보호"했다는 것. 그런데 이 "보호"라는 것에는 당연히 "보호비"가 따라오기 마련. 즉, 결국 김두한은 단순한 건달패거리의 우두머리로, 그저 자신의 구역을 관리한 것일 뿐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런데 사실 김두한 본인은 '보호'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한적이 없다. 보호 운운은 후대의 창작자들이 자기네들 물건 팔아먹기 위해 핑계거리로 댄 것에 불과. 김두한 본인은 대놓고 '세금 받았다'는 표현을 썼으며, 자기가 조선인 상인을 위해 벌인 활동에 대해 특별히 이야기 한 내용도 없다. 참고로, 김두한이 활약하던 시기에는 깡패나 조폭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긴 하였다.물론 행적은 깡패나 조폭과 동일하다.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당시에 어깨나 건달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협객이라는 표현은 이보다 한단계 높은(?) 것으로 일본 야쿠자의 극도(極道)와 동격의 표현이었다나..
일단 김두한이 동년배 중에서 싸움실력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것은 분명하다. 또, 김두한의 회고에서 사실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대일 대결인 구마적, 신마적과의 대결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장군의 아들에서 묘사된 김동회와의 대결은 불명확한 편인데, 김두한과 김동회의 관계는 김동회가 주장한 내용 외에는 별다른 증거나 기록이 없다. 김동회 본인은 김두한과 친분을 강조하긴 하였으나 대결이 있었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김동회는 김두한을 팔아 자신의 이름을 알린 일종의 사기꾼이라는 견해도 있다. 야인시대의 경우, 송사에 휘말릴 우려 + 김두한의 회고에 빠져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동회라는 인물 자체를 아예 등장시키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김두한이 윗세대 거물들을 차례대로 꺾어 주먹계의 지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의 영역이라는 것.
무엇보다도 구마적이니 신마적이니 하는 사람들 자체가 사실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로 그저 전형적인 유흥가 건달들이지 기업형 범죄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때는 1930년대 말에서 40년대.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시기. 때문에 1940년대가 되자 대부분의 건달, 깡패들은 일제의 집중 단속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저 위의 신문기사도 그 결과물이었던 것. 결국 김두한의 윗세대들은 김두한에게 져서 밀려난게 아니라 시대가 어수선해지자 자연스럽게 생업에 복귀하거나, 군대에 끌려가거나, 그냥 나이가 차서 정신을 차렸다는 식(..)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두한은 별다른 생업도 없었고(..) 징용 문제도 어영부영 해결되어 남들 다 정신 차리고 사라지거나 군대로 끌려가는 판에 끝까지 서울에 남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야쿠자 등 일본 폭력 조직과 갈등이 있었다는 부분도 애매한 것은 마찬가지. 김두한에 따르면 일본인 조직과 몇 차례 분쟁이 있었던 뒤, 양쪽이 조정하여 화해했다고 한다. 형식상으로는 김두한이 하야시를 형님으로 대접하고, 실제로는 하야시 쪽에서 김두한에게 돈을 줬다는 것. 김두한이 일본인 밑으로 들어갔다 어쨌다는 이야기가 꾸준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데, 솔직히 일본인 - 조선인 문제를 떠나서 그냥 전형적인 조폭 간의 갈등 조정 방식이다.
그리고 각종 창작물에서도 등장한 헌병대와의 트러블은, 실제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술 마시다 시비가 붙은 사건'에 불과하며 지나지 않는다.
한편으로 김두한은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당시 사건에 쓰인 폭약이 자기 쪽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일제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가능성은 제로 수준.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항목에서도 나와있지만, 이 사건은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벌어진 대형 사건으로, 김두한이 리얼타임으로 목격한 항일 의거는 이것이 유일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해방 20일 전에 벌어진 사건인 탓에 일제가 제대로 된 수사결과를 내거나 법정 기록을 남길 여유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시간이 지난 뒤 김두한이 유명한 항일 의거에 슬쩍 숟가락을 얹은 것이다. 김두한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지 "나도 그 폭탄을 거기에 쓸 줄은 전혀 몰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했다.
그외에 김두한이 일본 헌병대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둥, 학도의용군 참모장을 맡아 일본에 대항했다는 둥의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무식으로 팝콘 튀기는 소리이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내용은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에 자신이 관여했었다는 김두한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항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 해방 이후 행적에서 다룬다.
어쨌든 결론은 김두한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하는 역사가가 전무하긴 하다만 창작물에서 묘사된 김두한의 행적은 상당히 미화되고 과장되었다는 것. 일단 하야시라는 인물조차 실존 인물은 선우영빈이라는 조선인이라는 것이 현재 반쯤 정설로 굳혀진 상태이다.
참고로 성인이 된 김두한의 키는 182cm로 당시에는 키가 매우 큰 편이었다.
1.1 친일 의혹
그러나 위의 내용, 즉 깡패짓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1943년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하였다는 친일 의혹.
이 단체는 군대 보내기도 뭐하고 가만 놔두기도 뭐한 전국의 골치거리 깡패들을 적당히 처리하기 위해 조선경시청이 만들고 지원한 어용단체였으며, 거기에 더해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한 상당한 선전효과까지 고려하여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당연하지만 이 문제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걸려들었다. 김두한은 아니지만, 전직 헌병이자 전직 대구 경찰서 고등계경찰로서 이 단체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던 장명원[2] 은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반민특위의 장명원에 대한 조사 자료. 참고로 장명원은 여기서 매우 쌈빡한 주장을 하는데, 헌병이 된 것은 일제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거나, 경찰이 된 것은 일제의 내막을 탐지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 당연히 믿으면 골룸.
일단 장명원의 변명에 따르면, 이 단체는 미와 경부 등이 당시 골칫거리였고 어차피 군대 보내기도 뭐했던 깡패, 불량배를 조직하여 뭔가 쓸모 있는 짓을 해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장명원 자신은 낙하산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장명원은 "명칭상 정신대였을 뿐 실상은 깡패들에 대한 감화운동이었고, 의료비나 피복비 외에 비밀활동자금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관련자 전원이 철도 건설 작업에 참여한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은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장명원은, 이 단체가 결성된 것은 다음과 같은 내막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두한, 구마적[3], 김기환, 이정재[4]깡패가 등이 "일본이 깡패, 불량배들을 태평양에 빠뜨리거나 군대로 보내버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렇게 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다니자 이를 심상찮게 여긴 경찰 관계자들이 이들과 자리를 주선하여 몇 개월 간 합의를 거친 뒤 단체를 결성했다는 것. 덧붙여서 장명원은, 김두한이 수만 명을 모을 수 있다고 해서 가봤더니 백 명도 채 안되더라(..)고 증언했다. 참고로 김두한은 나중에도 이때 수만 명을 모았다며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김두한의 허풍과 허세는 일제시대에도 여전했다는 증거.
어쨌거나 장명원의 주장은 자기들끼리 입을 맞춘 듯 다른 관련자들이 주장한 것과 대체로 일치하며,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김두한의 회고록과도 거의 내용이 일치한다. 한편 여기에 더해 김두한은, "전장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총독부를 속여 만든 것이다."라고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러나 한편 이 조직은, 비록 확실한 조사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당시 빼도박도 못할 친일단체였던 일진회, 시천교와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웃긴 건,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할 때 이들이 일진회와 시천교의 건물을 강제로 빼앗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 다른 친일단체와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왜 이런 엉뚱한 부분에 초점을 맞췄는지는 이해불가.
참고로 장명원은, 일진회나 시천교와의 연결은 경찰 쪽이 아닌 김두한 측에서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징역, 징용기피자들을 구타 고문, 심지어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었는고, 깨알같이 총독부에서 자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 용도로 착복한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의혹들에 대해 장명원은 전부 부인하였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 역시 발견되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장명원을 조사하는 과정 중에 불려나온 증인들은 모두 이 단체 관련자들이었다. 즉, 반대 증언이 전무하다는 것. 그리고 김두한은 훗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당시 반민특위의 검사들은 장명원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린다. 당시 기소유예 결정서. 단체장인 장명원이 불기소였으니 김두한 등의 관련자도 당연히 자동적으로 무혐의 처리. 기소유예를 내린 이유는, "명칭상 정신대일 뿐, 실상은 불량배를 교화하여 선량한 청년으로 육성하려고 한 것이며, 징용기피처가 되어 일제에게 주목 받은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었다. 또한 불법 감금, 고문 등에 대한 증거가 없다." 는 것. 여기 속해 있던 작자들의 이후 행적을 보면 별로 교화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함정.
특히 '징용 기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라는 쉴드가 핵심적인데, 그렇다면 총독부, 경시청과 붙어 먹지 못해서 군대로 끌려간 다른 사람들은 대체 뭐가 되냐? 이런 식으로 친일 행위를 쉴드치자면, 모든 친일행위가 사실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당시 조사위원들 역시 이 병맛 돋는 기소유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당시 불기소 반대 의견서. 반대 의견이 문제로 삼은 내용은, 첫째, 경시청과 붙어먹고 돈까지 받았다는 점. 둘째, 고문과 학대, 어쩌면 살인 행위까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데, 반민특위 조사위원들 역시 뭔가 핀트 자체를 잘못 맞춘 감도 있고, 몇가지 사항을 놓친 감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돈 문제. 장명원에 따르면, 단원 가입은 부장인 김남산, 김기환, 김원옥 등에게 전권을 가졌다는데, 이들 깡패 우두머리들이 과연 순수한 선의만으로 단원을 모집했을지? 당연히 단원을 모집하고 추가인원을 받는 과정 중에 금품 수수, 권력 남용 등의 행위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단체가 조직된 시점이 1943년임을 주목해야 하는데, 조선에서 본격적인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바로 다음해인 1944년이며, 이 사실은 1942년에 이미 결정된 내용이었다. 이 시점에 깡패들이 반도의용정신대를 결성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이런 이유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뒤늦게 이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인지? 그리고 단체의 간부들이 가입자들을 걸러내기 위해 어떠한 기준을 적용했을지? 뇌물이겠지. 또한 이 단체는 민간업자에 기탁하여 철도 공사에 투입되었다는데, 순수한 봉사정신만으로 땅을 팠을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업자 및 작업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됐으며, 공사대금이나 임금은 어떻게 처리되었을지? 김두한이도 떡고물 좀 챙겼을 듯.
또한 조사위원들은 '경시청의 비밀자금'에 집착하고 있는데, 비밀이건 나발이건 간에 경시청에서 돈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장명원도 피복비 등의 명목으로 만원을 받았다는 점은 순순하게 인정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만원이면, 발로 계산해서 현재 시세 1억 5천만 원 정도의 거액이다. 비밀 자금 여부를 떠나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거리가 된다. 또한 후세 연구에 따르면, 이 단체는 총독부의 협조를 얻어 금속 회수 운동, 즉 일제의 공출제도에 참가하였고 수집한 대금을 헌납하는데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정재의 행적을 통해서도 몇가지 미심쩍은 점을 추론해낼 수 있다. 이정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정재는 이 단체에 가입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경찰에 투신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곧, 이는 당시 깡패 - 경찰 간에 뭔가 불투명한 유착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깡패, 불량배 교화시켜주다가 경찰 채용까지 시켜주는 참교육. 게다가 이정재는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의자 심문서에서 분명 이정재 이름이 거론되는데, 정작 당사자인 이정재는 반민특위에 참여 중이었다는 기가 막힌 아이러니가 성립된다. 그런데 과연 이정재 이외에 이 단체에 연루된 다른 경찰은 없었을까?
마지막으로 이 단체는 이후의 역사에 상당히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 이 단체에 참여했던 깡패들이 이때 완장질에 맛을 들여 해방 이후 이런저런 정치단체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 인해 정치깡패 문제를 연구할 때 반도의용정신대는 반드시 그 기원으로서 언급된다.
문제는 확실히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실상 밝혀진 것은 깡패들이 핑계대고 모여 빈둥거리며 건설현장에서 삽질한 것 뿐. 이들에게 당했다는 피해자도 특별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이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이미 군대로 끌려가버려 전사했거나, 살아있더라도 여전히 거리를 활보중인 김두한과 깡패들에게 또 걸려들까 두려워 나서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민특위에서 조사한 증인들은 전원 이 단체 가입자였거나 이권에 관련된 인물이었는데, 당연히 모든 증인이 이 단체에 유리하게 증언하였다. 그나마 불리한 증언조차 단체의 지도부장이었던 김남산이 장명원과 경찰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행한 카더라 수준의 증언 뿐. 그리고 이 조사가 1949년에 이뤄졌다는 점도 주목해야 하는데, 이 시점에 이미 김두한과 깡패들은 정부와 경찰의 주도 하에 신나게 각목을 휘두르며 이런저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든든한 빽을 바탕으로 건드릴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당시 이들과 관련된 반민특위 조사에 각종 태클과 방해, 로비 활동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을 경우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은 작자들이 이 단체를 결성한 것을 핑계로 대체 어떤 위세와 지위를 누렸을지는... 더 이상의 끔찍한 상상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따위 단체를 조직한 장본인 및 그 간부들에게 불기소 처분이라는 해괴한 결정을 내려 아예 법정 근처도 안 가게 배려해주신 당시 반민특위 검사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더 불행한 사실은, 이후 이 단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얌전하고 점잖은 역사학자들이 깡패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는게 몹시 부담스러웠던 듯 게다가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탓에 관련 자료들도 모두 소실된 상태. 이로 인해 이 단체는 사람들에게 잊혀지다시피 했으며, 김두한이 변명한 내용, 즉 '징용기피를 위한 단체'였다는 내용에서 더 연구되거나 알려진 바도 없게 되었다. 때문에 각종 친일파 명단 등에도 오르지 못했다.
2 해방 이후 ~ 한국전쟁 이전
사실, 말하자면 주먹깡패 시절보다는 8.15 광복 직후가 바로 김두한의 진짜 리즈 시절이다.
단지 위의 내용 뿐이라면 별다른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 인물도 아니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 위키러가 보고 있는 이 문서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대신 내가 고자라니가 너무 흥해서 존재했겠지
그냥 깡패에서 정치깡패로 진화(?)했다. 그리고 김두한이라는 인물이 나름 거물로 성장하여 역사에 이름 석자나마 남길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그가 벌인 행적 때문이다.
어쨌든 해방 직후 복잡한 정국 하에 이런저런 단체를 오가다가 활동하였다. 본인에 따르면,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건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이 단체는 여운형이 대표로 나선 중도적 단체[5] 덧붙여서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무리들이 훗날 "김두한이 일제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를 떠벌였는데, 김두한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정리하면, "해방 직후, 건준에 소속된 김두한이, 건준이 일제의 무기를 접수받는 일에 참여하였다." 정도가 된다. 일단 건준의 성격상 이야기 자체는 그럴듯하다. 단지 김두한이 주변에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자기 이야기로 바꿨을 가능성이 높을 뿐. 어쨌거나 결론은 김두한이 무기고를 습격한 항일 영웅은 절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극우로 전향, 극우 테러 활동의 대표적인 기수가 되었다. 일단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극우 활동을 한 이유에 대해 자신의 부친 김좌진 장군이 좌익계열에게 암살당한 일의 자세한 속사정을 그 때 알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김두한은 사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에 개성에 있을 때 동네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청국에 있는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사회주의자이다. 나도 열 네 살만 되면 아버지를 따라가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곤 했다고 이야기가 있다. 사실 시대 정황상 일반 대중에게 사회주의란 '뭔가 위험하지만 정의롭다' 정도의 이미지였으므로, 어린 김두한으로서도 충분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법하다. 게다가 앞에서 설명했듯이 건준에 참여한 전적 또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두한이 우익 쪽으로 전향한 까닭은, 사상이나 뚜렷한 복수심보다는 그저 인맥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일단 김두한 본인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이규갑과 윤치성이 자신을 적극 설득한 결과라고 하는데, 이규갑은 김좌진과 같은 충남 사람이기는 하지만 김좌진의 사망 당시 조선에 있었고, 심지어 윤치성은 1936년에 사망한 사람(..)이므로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단, 김두한은 '윤치영의 형님이었는데 아마 윤치성이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윤치영에게는 형이 다섯이나 있었으므로(..) 헷갈렸다고 해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뒷부분에서는 또, 자신을 설득한 것은 장덕수와 김구라며 딴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럴듯한 명분의 문제일 뿐 진실이 무엇인지고 누가 그것을 말해주었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던 것.
오늘날 대부분의 설명은, 이범석 혹은 이범석 쪽 인물과의 인맥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단 이범석과 김좌진의 관계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당연히 김두한은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이범석 및 그쪽 계열의 사람들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범석이 나치를 대놓고 찬양할 정도의 극우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이범석 계로서도 김두한은 그야말로 땡큐땡큐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김두한에게는 10여년간의 건달, 깡패 생활을 통해 그를 따르는 힘께나 쓰는 무리들이 제법 존재하였다는 점이었다. 당시 이범석 계는 조선민족청년당, '족청'계라는 이름으로 당대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는데, 반공 + 민족주의를 앞세워 다른 여러 세력의 인물들을 흡수해가며 성장하던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전향한 좌익 인사들도 상당수 족청계로 흡수되었다. 족청계는 파시즘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대중을 동원하여 세를 불리는 동시에 반대 세력을 사보타주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니 해방 이후 한참 완장질에 빠져 있던 김두한의 존재는 그야말로 완소 그 자체.
결국 이범석 계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앞세워 김두한을 추켜세워주며 적극적인 스카우트에 나섰고, 김두한 역시 아버지 친구들 + 좋은 일이라는 명분 + 완장을 찼다는 허영심이 휘리릭짬뽕되어 이런 결과를 낳게 된 것. 야구로 치면, 염가봉사로 이팀 저팀 떠돌던 유망주에게 고향팀이 거액의 돈 + 4번 타자 자리를 보장하는 FA계약을 제의한 것이다(..).
다만, 김두한의 행적을 보다 파고들면, 단순히 이범석 계, 족청 계라고 꼭 집어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김두한과 그의 단체인 대한민청은 이승만, 이범석 중 어느 한쪽에 집어넣기가 애매한 조직. 굳이 당시의 우익청년단 계보를 정리하자면, 이범석의 족청계 vs 이승만의 대한독립청년단(독청계) vs 서북청년단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대한민청은 이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별개의 존재였다. 실제로 김두한 본인은 이범석에 대해 특별한 언급도 한 적이 없다. 그저 지나가는 제 3자 정도로 이야기한 것이 전부. 또한, 나중에 자유당에서 숙청당한 이범석 계가 자기들끼리 재차 분열되는 과정에서도, 김두한은 이범석 계가 아닌 비 이범석 계와 함께 따로 갈라져 나왔다. 그러니 '김두한 = 이범석 족청계'라는 단순도식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김두한의 행적은 이범석과 이범석의 족청계를 빼버리면 논리적인 설명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함정. 실제로 김두한은 자신이 백의사와 매우 가까웠다는 주장을 했는데, 백의사는 빼도박도 못하는 이범석 쪽 조직이다. 또한 김두한은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출마했을 때 연설 도중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을 재건했다는 드립을 쳤다는데, 이것은 사실상 이범석 계열의 주장을 복붙한 것. 김두한은 신나게 썰을 늘어놓다가 "부산에서 이범석과 자유당을 만들었다"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얼핏 흘린 적이 있다.
사실 당시 정치인들의 계파 문제는, 내로라하는 역사가들조차 피똥을 쌀 정도로 워낙 복잡하므로(..) 극우단체를 통틀어 이범석 계나 족청계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 편의상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에 불과. 일일이 따지고 들면 온갖 세부 계파 및 군소단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논하는 것 자체가 금기에 가까운 한 우익 계파가 있다. 그 계파는 바로.. 따라서 김두한 본인으로서는 당시에 딱히 자신이 이범석 계, 족청 계라는 자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김두한과 그의 조직을 장택상의 별동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것 역시 상당한 부분에서 설명이 들어맞긴 하나, 또 한편으론 들어맞지 않는 점도 있다. 김구의 별동대로 볼 수도 있으나 이것 역시 맞는 부분과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 결국은 보기 나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그런데 아주 간단하고 쉬운 설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과 권력.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대의 부자들이나 일제시절 관료 출신들의 대부분은 우파 단체를 지원했다. 이로 인해 콩고물을 노리고 수많은 우파단체들이 난립하였는데, 워낙 이름도 비슷한 별의별 정체불명의 우파 단체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내로라하는 역사가들조차 피똥을 쌀 지경(..). 특히 군소 단체들의 경우, 특정 정치인의 계파에 속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조직을 꾸려 운영하며 그때그때 들어오는 일을 맡는, 일종의 용병단체로서 존재하였다. 김두한의 조직 역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김두한 본인부터가 자서전이나 회고록에서 자신에게 지시를 내린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물론, 김두한 스스로가 자신이 다른 역사적 인물과 맞먹는 수준의 중요 인물이라고 허세를 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오명을 자기 혼자서 뒤집어 쓰겠다는 의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가 용병집단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김두한 본인으로서도 딱히 '누구의 지시'라고 특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봐야한다. 실제로 신영균, 박용직 등은 훗날 인터뷰를 통해 "일단 김두한과 조직을 만든 뒤, 낙하산으로 유진산을 회장으로 앉혔다."라고 증언하였다.
김두한에 대한 본격적인 후대의 연구가 이상할 정도로 적은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까지 우익행동대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특히 족청계와 서북청년단 쪽에 집중되어 있는데, 김두한과 그가 초기에 속해있던 단체는 족청, 서북청년단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개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구 내용에서 누락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어쨌거나 1946년 우익청년단체라고 쓰고 우익테러단체라고 읽는다인 대한민청의 주요 인사가 된다. 대한민청은 고문 신익희, 회장 유진산, 명예 회장 김구, 이승만, 김규식이라는 식으로 명망가들이란 명망가들로 온통 도배를 해놓았지만, 결국 실질적인 영수는 이범석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신익희였거나 이범석 계는 아닌 제3의 인물 유진산이었을 것이고, 신익희나 유진산 등이 직접 테러 활동을 벌이고 다닐 것은 아니기에(..) 결국 이 조직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김두한이었던 것.
한편으로 김두한은 이범석, 신익희의 비밀 조직인 백의사와도 상당한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백의사 자체가 비밀 조직이라 행적이 불문명하고(..) 이미 백의사 단장은 염동진이라는 신비의 거물이 별도로 존재하던 상태로, 나이도 어리고 나중에 끼어든 처지인 김두한이 어떻게 비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김두한이 백의사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김두한의 대한민청 등의 청년단체가 좀더 표면화된 활동백주 대낮에 몰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패기을 했다면, 염동진의 백의사는 좀더 비밀스러운 활동암살을 한 것으로, 양자는 마치 우익테러의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훗날 김두한이 똥인지 된장인지 가리지 못하고 제법 이런저런 내용들을 회고록에 남겼다는 것. 그의 증언만 참고하여도 제법 활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신탁통치 찬성대회를 사보타지한 것, 남로당 전당대회 습격, 박헌영 암살 미수, 신불출 암살 미수, 심영 암살 미수, 여운형 암살 미수[6],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규식을 살해 협박, 좌우합작을 이유로 김원봉을 살해 협박... 등이 있다. 위의 인물들 면면을 보면 알겠지만 김두한의 대상은 박헌영과 남로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좌우합작에 대한 사보타주와 테러 또한 상당히 비중이 높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리 김두한이라 해도 최소한 양심의 가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합작은 좌익에 대해 오염되었다는 주장을 열심히 전제로 깔았으며,[7] 김규식에 대해서는 '아버지 친구인데 좌우합작에 속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였고, 여운형에 대해서는 '내가 볼때 여운형은 완전한 좌익은 아니었는데, 좌익에게 둘러싸여 제대로 운신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변명을 하였다. 또한, 여운형을 협박하는 과정 중에 '내가 선생을 존경하고 있는데, 좌우합작은 잘못되었으니 좌우합작을 탈퇴하지 않으면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김두한이라도 김규식, 여운형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존경심 내지 조심스러움 정도는 있었다는 증거.그러나 바로 그 뒤에 여운형 암살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패기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참여했음이 확실하고, 본인도 자랑스러워했던 일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활동을 방해한 것. 특히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맹활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한마디로 파업 현장에 쳐들어가 노동자들을 두드려 패는 일을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김두한은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인 대한노총의 간부가 되어 활약이라 쓰고 몽둥이로 사람들 두드려패기라고 읽는다했는데, 대한노총은 원래 사회주의 계열의 노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족청계에 포함된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이 브레인이 되었고, 힘쓰는 역할은 김두한 및 김두한과 비슷한 정치깡패들이 맡았다.
또, 형무소 수감 중에 대구 10.1사건이 일어나자자 높으신 분들이 직접 명령하여 풀려나,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행동대를 조직하여 참여했다고 주장했다.박정희가 싫어할 이유가 있었네
다만, 김두한의 증언들은 깡패 특유의 허세탓으로 자신에 대한 미화와 과장이 매우 심하다. 김두한의 이야기에는 적이 10만명이었다느니 100만명이었다느니 하는 표현이 허다하며, 기관총을 갈기는데 우랴돌격을 해 군중 수백명을 죽였다는 등, 수류탄이 오고갔다는 등의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충분히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데, 아무리 당시 상황이 막장이라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내전, 시가전 수준의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9월 30일, 경찰과 경찰 끄나풀들이 노동자들의 농성 현장을 급습하여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장택상은 7~8명의 경관과 수천 명의 노동자가 부상당했다고 기자들에게 발언했다. 대체로 수천까지는 아니라도 수십, 수백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두한의 증언은 바로 이 사건에 자신도 동참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두한은 대체 뭐가 자랑인지 이 사건에서 노조 간부 8명을 불법 체포, 살해했다고 주장했는데,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어쨌든, 김두한과 그의 세력들이 한 일은 대체로 집회나 파업 현장에 들어가 몽둥이나 칼 따위를 휘둘러 방해하기, 노조원들을 찾아가 협박하기 등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인 용역깡패의 그것 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야인시대에 나오는 총격전 따위는 실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극작가의 정신 상태가 의심이 될 정도로 매우 심하게 왜곡된 내용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야인시대 이전부터 더 정신이 나간 영화들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김두한/창작물 항목을 참고할 것.
또한, 국군준비대 관련 김두한의 증언은 너무 허풍이 심하다. 국군준비대 해체 당시 김두한은 아직 제대로 된 조직조차 결성하지 못한 채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으며, 국군준비대가 해체된 진짜 이유는 극우 쪽에서 미군정에게 고자질을 해서(..)이다. 문제는, 김두한이 국군준비대 내지 관련 학병 단체를 습격해서 시가전을 벌였다는 개뻥을 침으로써 후대에 이걸 진실로 믿는 병신들이 넋나간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심지어 야인시대의 경우 여기서 한층 더 나가 국군준비대가 박헌영과 관련되어 있다는 상상을 초월한 왜곡을 벌이는데, 국군준비대는 좌익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기는 하나, 근본적으로 여운형 및 그의 조선인민공화국과 관련된 단체로 안재홍이나 김구 같은 우익 인사들까지 이 단체에 축사를 보냈다. 이러한 점은 김두한조차도 빨갱이가 침투했다고 주장은 하지만'여운형에게 모여든 사람들'이라고 확실하게 증언하였다.
한편, 김두한의 회고 중에는 민간인에 대한 학살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 동두천 인근의 한 부락을 습격했는데, '김두한의 부하들이 '부녀자들까지 죽이는 사태가 벌어져, 젖을 빨던 아이가 엄마 품에서 숨져 있는 것을 본 김두한이 열을 받아 부하들을 광에 가두고 불을 지르고 직접 총살했다'는 것. 가해자는 무용담이라 생각해서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며 증언하였고, 피해자는 아무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 허풍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우익청년단들이 학생, 노동 조직 뿐만 아니라 일개 평범한 부락 자체를 습격하는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입증이 되어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가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저지른 짓들이다. 물론 김두한이 서북청년단 쪽에서 흘러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것인양 꾸며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워낙 똥과 된장을 구분할 줄 몰랐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구역질 나는 이야기를 무용담 쯤으로 여겼을 확률이 있기 때문. 덧붙여서, 아무리 후대의 김두한 찬양자, 조폭 미화물 제작자들이라도 이 일화만은 결코 영상물에 등장시키는 용자짓은 하지 않았다만..........<야인시대>의 작가인 이환경이 이 이야기를 구역질 나는 방식으로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왜곡하여 써먹었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김두한/창작물에서 볼 것.
한편으로 김두한은 박헌영, 여운형, 김규식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자기가 직접 암살을 시도했다거나 협박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근본적으로 이는 '자기도 이들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걸러들어야 할 부분이 상당하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여운형이 암살 당할 때 자기가 암살범에게 직접 총을 건네줬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는데, 역사가 한홍구에 따르면 여운형이 암살 당하던 시점에 김두한은 감방에 있었으므로 성립 자체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장택상의 딸인 역사가 장병혜 역시 김두한의 이야기 속에 자기 아버지 장택상이 관련되어 있다고 은근히 암시되어 있어선지 김두한의 이야기가 그의 전형적인 허풍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당시 유명 정치인을 암살하겠다고 정체불명의 괴한이 수류탄을 투척하는 일 정도(..)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긴 하였다. 당시 테러리스트들, 정치 깡패들의 대부분이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김두한만이 그걸 자랑거리 쯤으로 여겨 관련 증언을 남겼을 뿐이다.
또한, 김두한은 김구가 암살당하던 당시 암살 세력들이 김두한이 방해될 것을 우려해 감방에 집어넣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당시 우익청년단체는 지들끼리도 서로 치고 박고 싸웠으므로 김두한이 이런 주장을 할 만한 이유는 있었다. 다만, 그래서 김구를 죽인 것이 과연 누구이며 누가 김두한을 감방에 집어넣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 역시 전형적인 김두한의 허풍, 허세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는, 백의사였다는 설도 있었으나, 한때 서북청년단 소속이었다는 것만이 확인된 상태이다. 어쨌거나 우파 청년단 지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저지른 짓으로 보인다.
김두한의 과장이 어느 정도냐면, 당시 대한민청에 참여했던 인물들조차 "과장되었다"라는 증언을 남겼을 정도. 야인시대에도 등장하는 신영균, 박용직 등이 1987년 경향신문에서 주간 연재된 <청년운동반세기>라는 기획 기사에서 이와 관련된 증언을 남겼다. 참고로 이 인터뷰에서 신영균, 박용직이 미군정 때 시작한 완장질을 아득바득 예순 살이 넘은 1987년 신군부 시절까지도 하면서, 청년단체의 부회장이니 위원이니 하는 칭호를 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조 가스통 할배 자신들의 행동을 여전히 반공으로 포장하고 있으나, 제법 내용이 상세하고 개연성 또한 그럴듯한 편으로, 김두한의 허풍과 허세보다는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당시의 경향신문은 정수장학회가 소유한 관계로 대표적인 친정권 보수 성향 언론이었다. 경향신문의 흑역사
이렇게 우익테러의 선봉대장이 되어 맹활약(?)하던 김두한이 미군정에 의해 체포당해 사형까지 선고받는 일이 벌어진다. 1947년 바로 그 유명한 정진룡 살해 사건이 벌어진 것. 당시 기사 훗날 몇몇 창작물들에서 이 인물을 정진영이라고 하였으나, 진짜 이름은 정진룡이며 재판 기록과 신문 기사로 명확히 남아있다. 이 인물이 곧 야인시대 정진영(야인시대)인데, 야인시대의 내용은 김두한의 자기 변명 + 극작가의 미화가 반영된 것으로 사실상 불쏘시개 수준이므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일단 이름조차 재판 기록의 정진룡이 아닌 잘못 알려진 정진영으로 한 것에서부터, 극작가가 어떤 집필 과정을 거쳤을지는 뻔할 뻔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래 정진룡은 일제시대부터 김두한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오른 깡패로, 김두한과 마찬가지로 해방 초기 완장질을 하기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나 사회주의 단체 등을 기웃거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김두한은 정진룡에 대해 '수표교 아래에서 어머니를 모시던 거지를 부하로 거둬들였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정진룡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김두한급의 깡패였으며, 반도의용정신대에서도 김두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급이지만 간부급 직책을 맡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김두한이 우익계로 전향하는 과정에 갈라섰고,[8] 상당한 분쟁과 갈등이 벌어졌으며, 결국 김두한이 수하들에게 명령해 정진룡과 그의 부하들을 납치해 끌고온 뒤 두드려패 살해했다는 것. 간단히 말하면 정치깡패 두 명이 이쪽저쪽으로 나뉘어서 완장질을 해대다가 열받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패죽여버렸다는, 사상 문제만 빼면 아주 전형적인 조폭 사건이다. 단지 훗날의 김두한으로서는 운좋게도 죽은 정진룡이 좌파 쪽 깡패였을 뿐.
한편, 김두한은 1970년 라디오 방송에서 회고할 때, 진행자가 '친구 정씨에 대한 사건'에 대해 계속 질문함에도 불구, 대충 죽이고 파묻었다는 식으로 자세한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고 전혀 딴소리를 하며 이 사건이 아닌 다른 사건으로 재판정에 섰다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자신이 사형선고 받은 까닭은 "영등포에 10만명의 좌파가 운집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목숨을 걸고 17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쳐들어가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수백명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 좌파 1개 야전군이 모여 있는데 부하 1개 여단을 끌고가 전투를 벌였다는 말인가 이 이야기는 원래부터가 위에 적힌 9월 총파업 중 일어난 사건을 살해사건과 교묘하게 바꿔치기하여 설명한 것으로, 김두한이 체포되고 사형까지 받게 된 것은 정진룡 살해사건 때문이지 그 전의 농성자 습격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당시 미군정이 빨갱이 콤플렉스로 인해 파업 현장에 대한 습격을 고의적으로 묵인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후 수사와 재판 과정 중에 여러 우익인사들이 대놓고 개입하였는데, 그럼에도 족청계의 병크에 잔뜩 열 받아있던 존 하지가 강경하게 나와 결국 김두한은 사형이 확정됐었다. 그리고 이때 존 하지에게 원한이 생겼는지 회고록에서는 줄곧 존 하지가 좌익에게 편향적이었다고 주장. 그러나 존 하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근대사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존 하지는 전형적인 반공주의자 미국인(..)이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한편 김두한은 재판 도중에 통조림 깡통 뚜껑으로 할복을 시도했다. 사실 말이 할복이지 전형적인 깡패들의 자해 쇼. 그런데 김두한으로서는 다행인 것이,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김두한의 형 집행 문제는 자동적으로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고, 김두한은 1948년 9월 경 얼렁뚱땅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김두한이 자기 입으로 직접 얘기한 내용만 봐도 구라까기일 가능성이 높다만 그가 벌인 상해 및 살해 사건이 수두룩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독 이 정진룡 사건으로 김두한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되고 후세에도 널리 알려진 까닭은, 김두한이 살해 현장에서 직접 체포되었기 때문. 즉, 빼도박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현행범이라는 것. 또한 이 사건의 결과로 대한민청은 해체되었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오키나와 형무소에서 흑인 주먹들과 붙었다는 둥, 위에 적힌 1947년 발생한 여운형 암살사건에 개입했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지껄였는데, 당연히 신뢰성은 제로이고, 아무리 김두한을 미화시켜 돈을 버는 극작가들이라 해도 이정도까지 허무맹랑한 내용을 창작물에 반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참고로 영상물 가운데 이 이야기를 '우정을 간직한 두 친구가 사상적으로 갈라서 결국 한쪽이 죽음으로 다다른 비극'이라는 식으로 미화한 정신나간 작품은 야인시대가 유일무이한데, 사실 그런 설정 자체가 기존의 다른 김두한 소설, <인생극장>에서 표절한 것이다.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은 김두한/창작물에서 다룬다.
한편, 한국어 위키백과의 김두한 항목을 비롯 각종 백과사전이나 인명사전에서도, 정진룡 살해 사건 자체는 아예 언급조차 안되며, 그나마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대한민청 관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얼버무리듯 서술되어 있다. 왜냐고? 작성자들이 베꼈을 노변야화나 김두한 자서전에선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았거든
어쨌든 1948년 대한청년단이 창단되는데, 이 단체는 당시 우후죽순으로 존재하던 이런저런 우익청년단체라고 쓰고 우익테러단체라고 읽는다들이 이승만과 이범석의 합작으로 하나로 통합된 단체로서, 김두한 역시 대한청년단으로 흡수되면서 이 단체의 건설부장 겸 감찰부국장이 되었다. 단장은 당시 귀국한지 막 한달이 지난 낙하산 신성모. 이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이승만계와 이범석계가 사실상 대한민국 정부 그 자체가 됨으로서, 사실상 대한청년단은 이승만 정부의 어용단체가 된다.김두한 덕분에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해방 이후 역사, 정당사를 또다시 배워본다.
어쨌든 이 당시 김두한의 활동에 대해서 본인이나 그의 측근들, 몇몇 후세 사람들이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한 애국심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분명한 사실은 김두한이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자신의 특기였던 폭력을 바탕으로 테러 활동에 앞장서, 상당한 세력을 쌓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다졌다는 점이다. 또한, 그 당시나 이후에나 김두한과 유사한 행각을 벌인 정치깡패들이 몇몇 있었고, 이중에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부와 명성을 거머쥔 작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김두한만큼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쌓고 명예로운 자리까지 차지했으며 대중의 화제가 되어 영화까지 만들어진 인물은, 대한민국 역사상 김두한 뿐이다.
참고로, 김두한이 당시 벌이고 다닌 짓에 대해서는 그의 측근들도 열심히 삭제만 하고 다닐 뿐반박이 거의 불가능한데, 훗날 김두한 본인이 직접 이러한 내용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두한 본인 입으로, 이승만이 "사람 좀 그만 죽이고 다니게"라고 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혔을 정도.
3 한국전쟁 ~ 국회 초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서울에 남아있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본인은 피난 도중 수원시, 포항시에서 전투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관련 기록은 전무하다. 다만, 당시에 우익청년단체원 중 일부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역사상 기록에 남아있는 사실이긴 하다. 단지 김두한 본인이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일 뿐. 어쨌거나 김두한 본인이 라디오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태어나 처음으로 전쟁의 공포에 마주친 상태에서 똥오줌을 갈기며(..) 몇날 며칠 동안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김두한이 늘어놓은 거짓말이 워낙 다채롭고 양 또한 많은 탓에 이 이야기 역시 진실인지 허풍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일단 본인은 '무서워서라기보다 '놀라서 똥오줌을 갈겼다'라고 하긴 하였는데, 본인 말에 따르면 6.25 이전부터 기관총과 수류탄을 동원한 준 시가전 수준의 투쟁에 참가했던 사람이 대체 뭐때문에 놀랐다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 야인시대 에 나오는 총격전 같은 건 다 뻥이야 본인 역시 이 에피소드를 늘어놓던 중에 이런 모순을 알아차렸는지 '이전에 공산당과 싸울 때는 습격을 통해 죽였던 것인데, 정면으로 전쟁에 나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며 '그래도 난 간댕이가 커서 드립다 몇날 며칠 동안 싸울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뭐 똥오줌 싼 에피소드가 재미는 있다. 대충 넘어가주자
이후 부산으로 건너갔으며 뚜렷한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김두한 본인에 따르면, 이승만이 내무부장관직을 제의했었다고 주장했으나, 이승만이 아무리 망령난 사람이라도 김두한에게 이런 제의를 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허풍. 또한 그 유명한 부산정치파동에 대해서는 치질을 앓는다는 핑계로(..) 자신은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부산정치파동 항목을 가보면 알겠지만, 이 사건은 이승만이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억류하고 기습적으로 헌법을 개정한 사건. 즉, 김두한은 이때 일을 벌인 깡패들은 본인이나 본인 세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이며 이때 동원된 깡패들이 이정재 세력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두한이 정말로 참가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디오 회고를 통해 '안 걸린 게 나 하나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이정재 세력이 지옥으로 영구이주할 때, 본인은 이정재와 관련성이 없어 이 영구이주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4.19나 5.16 이후에 부산정치파동사건에 김두한이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면, 아마 김두한은 이정재와 사이좋게 손잡고 지옥관광을 떠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부산에서 일어난 철도 파업, 항만 파업을 선동했다는 아리송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역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나 김두한은 알고보면 노동자 편이라는 주장인 셈. 그때까지 김두한에게 두들겨 맞았던 노동자들이 이런 얘기를 퍽이나 믿겠다. 일단 당시 파업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어쨌든 전쟁이 끝난 직후 서울에 돌아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다. 덧붙여서 미디어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때의 나이는 겨우 36세에 불과. 이 시점에서 김두한은 한마디로 인생의 승리자. 참고로 김두한과 유사하게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했던 인물 중 상당한 수가 2대,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김두한의 국회 의원 시절 행적은 단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명물. 이는 단순히 주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1950~60년대 언론에서 김두한을 일컬은 말이다. 젊은 나이에 좌충우돌하는 국회위원 "김두한 군(君)"의 기사는 소위 신문 박스 기사의 단골 소재거리. 굳이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강호동이 국회의원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강호동은 김두한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어째 반 자유당파의 기수가 되었다? 이에 대해 김두한의 측근 및 몇몇 정신나간 후세의 사람들은 김두한이 이승만이 독재화 움직임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진실은, 자유당의 공천을 못 받자 깽판을 쳐서 자유당에서 제명됐다는 것(..). 이는 김두한조차 깽판 쳤다는 얘기는 빼버렸지만 쿨하게 인정한 사실이다. 특히 자유당 창당 과정 중에 이범석 및 족청계의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이들을 자유당에서 대거 숙청하였는데, 이 과정 중에 김두한 역시 토사구팽 1순위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에 김두한 본인 스스로가 먼저 판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나온 것.
재미있는 사실은 자유당 안에서 깽판을 치는 중에 김두한이 조봉암을 찬양하며 어그로를 끌었다는 점. 사실 조봉암은 사회주의에서 전향하여 족청에 가담한 전적이 있긴 하나, 반공주의와는 거리가 있고 순수한 중립 민족 화합 노선을 취하여 결국 갈라섰었다. 즉, 어쨌거나 이전에 김두한과 어느 정도 인연이 있긴 있었다는 것. 참고로 조봉암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치깡패들의 방해를 받아 후보 등록을 못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 정치깡패들은 이기붕의 지시를 받은 이정재 계통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자유당 항목과 제3대 국회의원 선거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때는 자유당이 창당된 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 즉, 선거 이전에 자유당의 공천을 받느냐가 못 받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로, 자유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돈보따리를 싸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상황이니 자유당에서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상황. 김두한 대신 선거에 내보낼 사람이 잔뜩 대기 중이었다. 또한 김두한은 본인부터가 테러로 악명이 높고 나이까지 상당히 어렸으며, 배운 것도 하나 없는 건달 출신. 게다가 각종 범죄 및 깡패들과 엮인 관계가 현재진행중인 상황. 자유당이 김두한 공천이라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김두한은 당선 직후 선거법 위반 의혹에 김관철 살해미수 혐의 사건까지 연루되었다(..).
이후 이범석과 족청계 그리고 함께 자유당에서 떨궈져 나온 겉절이들는 새로운 야당을 만들어 선거에 나설 계획을 세웠으나, 이범석이 부통령 출마를 고집하여 분열하였다. 이로 인해 비족청계가 이탈하며 당이 깨지게 되는데, 이때 김두한 역시 비족청계와 함께 딸려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제1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은 이범석의 족청계를 포함, 우익청년단체 출신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일체 거부했다는 것. 사실상 신익희, 조병옥이 야당인사로 신분 세탁(...)하면서 옛 동료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결국 김두한은 자유당이든 민주당이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태가 된 셈.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유당과 이기붕을 싫어하는 것이 투표를 통해 밝혀졌다. 자유당이 과반 이상의 의석 수를 차지하긴 하였으나, 노골적으로 자행된 선거부정에 비하면 결과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서울에서는 16개 의석 중 5개만 차지했으니 사실상 서울에서는 판정패한 셈. 자유당의 공천을 못 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한 상황에서 당선된 사람들의 수가 무려 67명에 이르렀다. 김두한 역시 반자유당 정서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더해 김두한은 말빨이 장난이 아니었다.. 김두한이 육성으로 남긴 내용만 보아도, 물론 원고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게 보통학교도 못 나온 사람인지 의심이 들 정도의 달변이며 그럴 듯한 고급 어휘도 상당수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김두한은 구마적과의 대결을 이야기할 때, 제대로 된 용어를 쓰지는 못 했지만, 작용 반작용의 개념을 들어 설명했다. 정치권을 떠돌며 남들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적당히 짬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보기와 달리 남에게 들은 것을 잘 기억해뒀다가 자기 것으로 써먹는 것 자체가 상당히 능력을 요하는 일이다. 김두한이 해방공간이라는 이전투구의 수라장을 헤치고 살아남아 일자무식의 학력으로 국회의원까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또한, 이때까지도 종로 유흥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 기자는 김두한이 유세장에서 "이 동네 기생년들이 한 표씩만 줘도 내가 뽑히게 되어 있다."고 큰소리 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결국 여러가지 요인이 겹쳐, 종로구 을 선거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2위와 1.5 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당선. 참고로 2위는 북에서 월남한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민주당에서 출마한 '한근조'라는 법조계 거물. 자유당 후보는 이들과 큰 차이로 3위 낙선. 참고로, 국회가 열린 첫날 국회의장 및 부의장 선거가 있었는데, 부의장 선거에서 김두한에게 한 표가 나왔다(..). 김두한이 생각 없이 자기 이름 적어넣었을 확률이 높다. 집에 와서 이불킥 좀 했을 듯.
뻔한 이야기지만, 선거 직후 무소속 당선자들의 상당수는 자유당에 재입당. 이는 김두한 역시 마찬가지였긴 한데...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 개헌에 반대하며 깽판을 쳤다는 이유로 또다시 제명 처리(..) 김두한은 이 과정 중에 자유당의 브레인이었던 장경근의 옥수수를 몇 대 털어냈다고(..) 주장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덧붙여서 김두한은, 자유당 세력의 방해로 투표에 불참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불참한 덕분에 한표 차이로 개헌을 일단 막을 수 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사사오입 개헌이 처음에 실패했던 까닭은 찬성표가 하나 모자랐기 때문이지, 누가 불참하고 말고는 상관이 없었다. 이게 아예 터무니 없는 소리인게 당시 신문 기사만으로 김두한이 회의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김두한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던 민관식 역시, 훗날 인터뷰를 통해 당시 김두한과 함께 투표에 참석하여 반대표를 던졌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김두한의 허풍 클래스는 남의 눈 따위 의식하지 않는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김두한이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한 이유. 김두한이 개헌 몇 달 전부터 개헌에 반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도 자유당 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직접적으로 개헌을 반대한 사람은 김두한과 민관식 단 두 명 뿐.[9] 이에 대해 훗날 김두한은 이승만의 독재를 막기 위해 어쩌구... 라는 주장을 했으며, 후세의 사람들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지만, 영 애매하긴 하다. 사실 사사오입 개헌 전에 김두한은, "개헌안 중 경제조항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뚱딴지 같은 이유를 댔다.
대통령 3선 문제를 제외했을 때, 사사오입 개헌의 중점은 경제 관련 조항들이긴 하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통제경제 조항들을 삭제하거나 완화하여 자유경제 쪽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는데, 문제는 자유당이 경제 관련 조항 개헌 도중 갑작스럽게 국무총리 폐지와 이승만의 삼선이라는 내용을 끼워 넣으며, 경제 조항 문제는 쌈 싸먹는 수준의 퐈이야가 일어나버렸다는 것. 그 예시로 나무위키의 사사오입 개헌 항목에는 대통령 삼선에 대한 설명만 있고 경제 조항의 변화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다. 어쨌거나 김두한이 사사오입 개헌을 반대한 이유가 이승만의 독재에 반대해서였는지, 그냥 꼬장의 연장성(..)이었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김두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고, 반대한 의원의 대표주자였다는 것. 김두한 인생에서 유일하게 까는 게 불가능한 행동.
어쨌든 사사오입 개헌 이후 자유당 쪽에 완전히 밉보인 김두한은, 남은 회기를 무소속으로 보내며 매일같이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쏟아내는 무소속 계의 행동대장이자 아이돌 같은 존재(..)가 되었다. 다만, 이때의 무소속은 아웃사이더 완전히 혼자 노는 무소속은 아니고, 훗날 민주당(1955년)으로 발전하는 호헌동지회라는 교섭단체에 소속인 무소속. 또한 김두한은 사사오입 개헌 이후 호헌동지회의 다른 의원 15인과 합쳐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게 실제로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 그냥 이기붕 엿 한번 먹어보라고 시위한 셈. 사실 김두한이 이런 식으로 반자유당 반이기붕 입장에 선 것은, 그저 '자기들을 내쫓은 이기붕이 싫어서'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한마디로 으리. 또,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것 역시, 뭔가 대단한 정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개헌 자체가 선거 이전부터 이승만, 이기붕 일파의 지상최대 목표였기 때문에, 단순히 '이기붕 엿 먹이기'였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사실 김두한의 의정활동은 이승만 까기와 이기붕 까기를 제외한 다른 활동은 딱히 대단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쨌거나 훗날 자유당이 온갖 병스러운 짓을 자행한 끝에 몰락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김두한은 역으로 정의의 투사 포지션(?) 쯤에 자리잡게 된 셈이고, 이는 훗날 김두한 지지자들이 '김두한은 알고보면 독재에 저항하는 정의감 있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일제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있던 불교계가 정화운동을 할 때 여기에 개입, 조계종의 출범에 한 역할을 하였다. 조계종이 탄생한 일은 불교 및 조계사 항목을 참고. 이로 인해 21세기까지도 불교계 일부에는 김두한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신 나간 인사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 일은 좀 더 파고들어가보면 그렇게 밝고 건전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불교계에서 난장판이 일어난 까닭은, 어느날 갑자기 이승만이 '승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면 이상하잖아? 그거 일제 잔재임 ㅇㅇ'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벌인 각종 병크 중에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한글 간소화 파동이 있다. 나무위키에는 한글 맞춤법#s-2에 간단하게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러한 행위가 얼마나 사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명분 자체는 대체로 비구승 쪽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대처승 가운데에는 친일 인사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날 갑자기 국가 권력이 종교 문제에 개입했다는 것 그 자체. 한편 조계종 일부에서는, 알고보면 당시 법원, 행정부 등은 중립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승만의 행동에 대해서는 쉴드를 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노망이라도 난 듯 마치 임금이라도 된 양, 매일같이 '대처 쪽이 옳거든!ㅇㅅㅇ'이라며 '종교의 자유'와는 영 거리가 먼 발언들을 쏟아냈다는 것.
그리고 이 문제에는 상당한 이권[10]이 얽혀 있었다. 김두한이 이미 갈라선 이승만 쪽을 따라 비구승 쪽을 편든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이때 상당수의 깡패들이 불교계와 관련을 맺었는데, 일부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됨으로써 이후 불교계의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불교계 일부에서 김두한을 높이고 천도제까지 지내는 것은 조직의 선배라서 다 이유가 있는 것. 덧붙여서 예전에 불교계에서 허구헌 날 갈등이 발생하고, 머리를 빡빡 깎고 덩치가 좋은 승려(?)들이 짱돌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는 광경이 TV를 탔던 것은 바로 이 때문. 이런 불교계의 깡패 관련 문제는 2015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어쨌거나 김두한은 이를 자랑거리로 여겼던 듯하다. 또한 다음 선거에서 떨어진 까닭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개신교 신자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믿는 사람이 바보 수준의 이야기. 더욱 특이한 점은, 이 무렵부터 김두한의 행적이 왠지 진보 쪽과 얽힌다?!뭐? 그 우파 깡패 김두한이?
일단 국회의원이던 1956년에 김두한은 조봉암의 진보당에 입당했다. 헐 대박 그런데 이는 내막이 있다. 사실 김두한은 그 해 공화당이라는 정당에 입당한 상태였는데, 이 당은 사실 이범석과 그의 족청계가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범석이 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고집을 피워 이범석 직계가 아닌 사람들, 특히 장택상 쪽 사람들이 이 당을 파토내게 되었고, 김두한도 장택상 계와 함께 떨어져 나온 것. 이 과정 중에 이범석과도 원한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때마침 창당중이던 진보당에 가입하며 창당에 힘을 실어 주는데, 진보당은 원래 출발 당시 야당연합운동으로 시작했기 때문.
그러나 진보당이 야당연합이 아닌 진보주의 정당으로 정체성이 굳어져가자 김두한이 본격적으로 동참할 가능성은 전무. 이로 인해 입당한지 겨우 한달 만에 탈당한다. 참고로 김두한이 탈당하던 시점에 진보당은 정식 당명도 정해지지 않았던 상태. 여기에 대해 조봉암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자기 마음이니 말릴 수 없다"는 식의 냉소적인 논평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덧붙여서 김두한은 이런 경력을 흑역사로 생각했는지 회고록에서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후대의 김두한 지지자들이 "알고보면 김두한도 진보적인 면이 있다"고 포장하는데 쓰일 뿐..
이후 김두한은 노농당에 가입한다. 이 당도 어째 이름부터가 왠지 진보 냄새가 폴폴 나지 않는가? 사실 노농당 당수이자 창당인인 전진한부터가 포지션이 범상치 않은데, 전진한은 일제시대 일본 유학 중 협동주의(코포라티즘) 사상에 감화되어 독립운동과 사상투쟁에 나선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초대 사회부 장관을 거친데다 국회 5선의원, 국제노동운동에도 참여한 인물이며,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청빈하고 소탈하여 주변과 언론인들의 평가가 좋았고, 1972년 별세할 때까지 민주주의와 노동자 문제, 평화통일 문제에 앞장선 인물. 사상적으로는 조합주의(협동조합주의. 코포라티즘)[11] 내지 생디칼리즘 주의자였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반공주의자였다. 즉, 중도 우파 내지는 사회적 자유주의자가 극우 반공 이범석 계로 흡수된 전형적인 사례.
사실 조합주의가 이쪽으로 가면 사회주의 내지 사민주의가 되고, 저쪽으로 가면 파시즘이 된다는 야릇한 특성이 있긴 하다만, 전진한의 행적을 놓고 볼땐 진보적인 성향이 매우 농후한 편. 일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제정된 노동법이나 헌법의 노동 관련 조항들은 오늘날 기준으로도 꽤 진보적인데, 이렇게 된 데에는 전진한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제헌 헌법 제18조 2항은 전진한이 우겨넣다시피 해서 만들어졌다는 연구가 있다. 제헌 헌법 제 18조 2항은 다음과 같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 어?사회주의?? 덧붙여서 현행 헌법에는 이런 위엄 넘치는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한편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전신인 대한노총을 세우고 관변단체화(..)한데다가 김두한까지 앞세운 인물이라는 야릇한 일면까지 있다. 그러니 결국 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지금 기준으로는 생경한 인물로, 이 때문인지 후대에는 잊혀진 인물이 되다시피 한 것.[12]
또한 유진산과 김두한의 인연은 후대의 창작물을 통해서도 제법 알려져 있는데, 사실 유진산은 전진한의 와세다 대학 직속 후배로 전진한을 따르던 인물이므로 '유진산 - 전진한 - 김두한'의 인간관계로 봐야 한다. 어차피 해방 직후에 유진산과 김두한은 전진한의 휘하로 대한노총에서 함께 구르던 처지였다. 또한 김성수나 송진우도 일본 유학을 통해 전진한과 상당히 친분을 맺은 관계였으므로 전진한을 통해 이들의 관계도 설명된다.
어쨌거나 덕분에 김두한은 한동안 이쪽 계열(..)의 행보를 보이며, 이는 훗날 김두한의 관련자들이 그가 나름대로 진보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밑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서독에서와 같이 반공을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해 줘야한다는(!) 나름 비범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거나, 보좌관들을 "동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등의 내용. 심지어 김두한은 죽기 몇해 전,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행한 까닭은, 독점자본주의로 인한 노동력의 착취를 해소하기 위해 스웨덴 등의 북유럽 국가식 배분 정책을 도입한 것인데, 이같은 정책이 한국에서도 필요하다"는 위엄 돋는(!) 열변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라디오에서 직접 발언한 것이다. 누군가 원고를 써줬을 가능성이 높긴하다. 이때 김두한이 덴마크니 일본 공산당이니 노동정책이니 사회보장제도니.. 하는 위험천만한 단어들을 나열하며 열변을 토하자, 사회자가 황급히 화제를 돌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엿들을 수 있다. 뭐, 사실 해방 이후 김두한은 노동자들을 후드려 패는 것이 주된 일이긴 했으나 명목상으로는 노동 운동을 했기 때문에, 노동자 문제와 거리가 영 멀었던 것도 아니다.
이렇게 후대의 사람들이 보면 기괴하다시피 한 김두한의 당시 진보에 가까운(?) 행적은, 딱히 김두한이 뒤늦게 뉘우쳤다거나 정의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곳저곳 정치계를 기웃거리다 주워들은 내용 + 전진한을 대표로 하는 이범석 계에 포함된 전향한 좌파의 기조사상 + 1960년대 이후 접한 학생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김두한 입장에서는, 그 사람들 얘기가 뭔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좋아보이니 흉내는 몇번 내봤다는 것. 그러나 그의 이전 행적이 행적인지라.. 이와 동시에 여전히 반공을 외치며 빨갱이를 때려잡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지극히 모순된 일면 역시 여전히 존재. 그러니 결국 김두한에게 딱히 별다른 사상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좋아보이는 것을 휘리릭 짬뽕하여 자기 딴에는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남들이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뭐 김두한의 정치 인생이 이 정도 수준이었다면 사람들이 그런가보다 납득했을 것이고, 본인의 앞날도 창창하게 잘 풀렸을 것이지만...
문제는 김두한은 김두한이었다는 것. 한 마디로 온갖 곳에서 트러블이 일어났다. 말실수 같은 것 쯤이야 거의 매일같이 일어났고 웃어 넘길 수준 이라고 치기엔 국회 안에서 누군가를 패버리겠다는 식의 협박을 한게 한두번이 아니긴 하지만 이었다고 치겠지만, 부정선거 혐의에 부동산 불법 매매 혐의가 있었으며, 특히 깡패 동료였던 김관철에 대한 살해미수 의혹까지 있었다.
김관철 살해미수 사건은 밀가루와 설탕 입찰, 즉 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국회 선거 한달 전인 1954년 4월에 발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김관철 항목 참조.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김두한이 열받았다고 권총으로 김관철에게 위협사격을 한 사건이다. 참고로 김두한은 대질심문 중에서조차 또한차례 김관철을 패버렸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당선되자 마자 감방으로 직행했으나 도주 우려가 없다며 불구속 기소하여 일단 풀려났다. 이후 김관철 은 김두한에게 협박을 더 받았는지 돈을 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고소를 취하했다. 그러나 특수협박은 친고죄가 아니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법정에서 기묘할 정도로 시간을 질질 끌었고, 결국 1956년 김두한이 유죄를 받긴 받는데..... 병맛스럽게도 선고유예. 참고로 현재 선고유예 기준을 적용하면 김두한은 절대로 선고유예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김관철 사건 선고유예가 나온지 한달도 안 된 시점에 이정재가 국회 회관까지 찾아와 김두한에게 맞짱을 뜨자고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국회 안에서 깡패들끼리 치고 받을 뻔했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탓에 언론에서 기사화될 정도로 제법 크게 알려졌다. 다만 이 사건은 이정재의 맞짱 요구에 김두한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대체적인 여론은 '김두한이도 철이 좀 들었나보다...' 정도. 사건의 원인은 역시 이기붕 세력과의 불화. 이것이 원인이라는 것은 김두한 본인 역시 훗날 인정하였다. 단지 여기에 더해 주먹질하는 사람들 특유의 허세가 겹치다 보니 이런 요란한 사건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인데... 어쨌거나 이 둘이 정확히 어떻게 붙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김두한 본인은, '이정재는 원래 사랑하는 내 동생이었다'는 둥, '권총을 든 이정재를 점잖게 타일렀다'는 둥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지금까지 보았듯이 김두한의 허풍은 한두 개 수준이 아니므로.. 진실은 저 너머에.
뭐 여기까지는 김두한의 주장대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한 김두한을 자유당, 이기붕, 이정재가 담가버리려고 한 일이라고 넘어가준다 쳐도, 다음 선거 1년 전인 1957년 정치인으로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국회의원을 몰라본다며 사세청장을 폭행한 것. 당시 기사 사세청은 오늘날의 국세청. 즉, 현직 국회의원이 현직 국세청장을 두드려패버린(..) 것이다. 당시 정황상 김두한이 청장을 방문했음에도 청장이 일하는 척하며 무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두한은 정권 실세인 이기붕에게 대놓고 대드는데다가 나이도 어리고 거친 일자무식의 건달 출신. 애초에 사세청장을 방문한 이유부터가 꼬장피우기나 청탁, 협박 별로 밝고 명랑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어쨌든 김두한이 청장을 패긴 팼다. 당시는 자유당의 전성기 시절인 탓에 오히려 속 시원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고, 시대가 시대인지라 남자들이 주먹질하고 술 마시는 것에도 다소 관대한 분위기였다. 이로 인해 언론에서도 1면이 아닌 2면, 3면에서 반쯤 우스개소리로 다뤘을 정도. 참고로 이 사건은 김두한 본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쏙 빼버린 탓에 후대인들에겐 잊혀졌다.아무리 김두한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이라도 이런 사건은 아마 이 문서에서 처음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 실제로 당시 동아일보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잘 팼다고 하더라"라면서도 "백주에 \[\[테러\]\]하는 것은 테러가 아니라던데?"라며 자유당과 김두한 둘 다 까버렸다. 후자의 드립에 링크된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으로 가서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 드립은 정권 비판을 실은 언론사에 정치깡패가 테러한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정권의 하수인인 경찰 서장이 '백주 대낮에 한 것이니 이건 테러가 아니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한 것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이 개드립을 코멘트로 활용한 것 자체가 정치깡패 김두한과 이승만 정권의 막장성을 동시에 까버리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4 재야인사
결국 다음 선거인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해버렸다. 당시 야권은 반 자유당 기치를 내건 민주당(1955년)으로 재편되는 상황이었는데, 민주당 쪽에서도 트러블메이커이자 이범석 계, 족청 계의 아이콘이나 마찬가지였던 우파 깡패 김두한을 불러줄리가 만무. 결국 김두한은 위에서 설명한 노농당이라는 듣보잡군소 정당의 후보로 나설 수 밖에 없었고, 민주당 한근조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이로 2위 낙선. 덧붙여서 김두한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세청장 폭행 사건과 선거법 위반으로 감방으로 직행하는데(..) 훈훈하게도 경쟁자였던 민주당 당선자가 면회를 갔다고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졌으니 야인 신세. 따라서 1958년부터 65년까지 7년 동안 김두한은 그냥 재야인사 비슷한 그 무엇인 상태. 이 시기동안 선거에 나왔다 떨어지는 과정 중에 상당한 재산을 까먹었을 듯하다.[13]
물론, 당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뒤늦게 개나소나 나선 것은 분명히 있었던 일이긴 하다. 게다가 4.19로 이승만이 쫓겨나고 이기붕이 죽는 것을 보면서 김두한이 야! 신난다! 했을 가능성도 높고.. 한편 몇년뒤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사건에는 4.19 혁명에 참여했던 운동가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뭔가 미심쩍긴 하다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그냥 학생들이 찾아오니 돈 좀 집어준 듯? 한편, 김두한은 4.19혁명 세력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은, 자유당의 남은 세력이 위해를 가할까봐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말은 참 그럴듯하게 잘한다. 김두한이가...
어쨌든 4.19 직후 치뤄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자유당의 몰락으로 사실상 민주당이 제1당이 되버린 가운데, 수많은 군소정당들이 난립한다. 노농당의 경우, 이미 창당인인 전진한 스스로가 탈당한 지경인지라(..) 김두한은 그냥 무소속으로 출마. 종로구에서 출마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던지 아버지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 중에 "김두한이 서울에서 주먹들을 데리고 왔다더라"는 소문이 퍼져[14] 근소한 차이로 2위 낙선. 훗날 본인은 이때 역시 불교 정화 과정 중에 생겨난 개신교 신자들이 안티 김두한 운동을 펼쳐 낙선했다고 주장했다.일찌감치 개신교까의 심리를 이용해 먹으려했던 선구자
이후 장면 정권이 성립하자 장면의 일제시대 행적이 애매하다는 이유로 국회 방청석에서 난동을 부린다. 아니, 이 정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국민연합전선"이라는 정치조직을 만들어 장면이 친일파라며 찌라시를 돌리고 시위를 벌였음을 훗날 쿨하게 인정했다. 아버지 때문에 친일파가 싫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아무래도 총리의 친일 의혹을 부추겨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둔 자신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 했던 행위로 보인다.
덕분에 장면은 친일 의혹 꼬리표가 붙어 고인이 된 이후까지도 그야말로 개고생(..). 장면의 친일 행적 의혹의 핵심은, 그가 신사참배 참여를 독려했다는 것.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어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장면의 행동을 '소극적인 친일'로 볼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볼지는 결국 각자의 판단. 다만, 장면의 행적을 친일로 본다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이라는 조선총독부의 어용 준군사단체를 조직했던 김두한의 행적은 과연 무엇으로 봐야할까?
5 국회 재선
1965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의 재보궐선거에서 용산구에 한국독립당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이로써 생애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어 8년 만에 국회 재입성. 보궐이 아닌 본래의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자체에 출마했는지는 불명확하다. 김두한 측근이 상당 부분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조금이라도 김두한한테 유리한건 다 김두한 측근이 작성한거냐....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출마했던 것으로 나와있으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때 나이 47세로 아직까지는 한창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김두한의 소속과 그의 상태.
때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지 3년 뒤로, 정계는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vs 윤보선의 민정당을 중심으로 재편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제3의 세력으로 옛 민주당(1955)년에서 갈려져 나온 민주당 계의 꼬마 정당들이 있었다. 문제는, 어느 쪽이건 간에 모두 김두한을 꺼렸다. 당시 군부 세력이 들어서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정치깡패들을 지옥으로 귀가조치 시킨 것이었다. 사실 정황상 집권세력인 군부가 정치깡패의 대명사였던 김두한 역시 함께 보내버리고 싶어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김두한이 조폭계에서 우두머리였던 이후 김두한을 대신하는 조폭계의 대명사가 된 이정재(깡패)나 임화수 등은 김두한과 확실하게 대립관계에 있었으므로[15], 엮을 꺼리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치깡패의 대명사 그 자체였던 김두한을 받아들이는 것은, 명분에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 시점의 김두한은 그야말로 괴상하기 짝이 없는 상태. 입만 열면 우익 정치깡패시절 빨갱이 잡은 이야기와 반공을 주장하며 허풍과 자랑을 늘어놓다가, 어느 샌가 화제를 노동자, 빈민으로 돌려 사회보장이니 복지니 하는 이야기를 주워섬겼다. 그러는 한편으론 여전히 주먹계 후배들과 어울리며 광산업 쪽에서 큰손으로 활동한다는, 그야말로 모순 그 자체인 상황.
그가 소속되어 출마한 한국독립당 자체가... 어떻게 설명하기도 묘할 지경이다. 원래 한국독립당은 김구, 이범석계가 1920년대에 만든 우익 정당이었는데, 김구가 사망한 이후 자연소멸된 상태였다가,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인 1962년 옛 한독당 소속 인물이었던 김홍일 등을 중심으로 다시 재건된 것이다. 즉, '선거용으로 향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름만 끌어와 급조한 정당'이었던 것. 아무리 1960년대라도 이런게 먹힐리가 만무하니 결국 한독당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사람도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나중에 보궐선거에서 김두한 한 명만이 간신히 당선했다. 신기하게도 이 당에는 4.19혁명에 참가했던 학생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어느샌가 사실상 당의 핵심은 이들이 되었더란 것(?!)[16] 그 덕에 김두한의 포지션도 자연스럽게 진보계로 또다시 연결(..). 당시 김두한의 선전부장이었던 모세원의 이야기 그리고 깨알같은 부정선거 고백 그런데 김두한은 당선되자마자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 수감되어 버린다. 이 사건은 아주 전형적인 국가보안법 용공 조작 사건의 초창기 버전이긴한데, 주범으로 김두한이 껴있다는(..)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김두한의 비서가 된 모세원의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깨알같이 김두한이 선거로 돈 다 날렸다는 증언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한 젊은 운동가들[17]과, 말실수라면 일등 가는데다(..)[18] 오랫동안 광산업을 해서 폭약, 화약을 입수하기 쉬웠던데다[19] 어쩐지 이 당시 김종필에게 접근을 시작한 김두한을 엮어 버린 것. 그러고서 "알고보니 김두한이 자금이랑 폭탄까지 주면서 불순분자 운동가들에게 내란 일으키라고 했나네요? 데헷."이라고 만들어낸 것. 참 쉽죠? 집권 세력인 군부 입장에선 운동가들도 정리하고 정치깡패도 정리한다는,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 덧붙여서 이 사건은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수사 사건 이전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죄에 연루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천하의 김두한이 빨갱이라고 잡혀가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일이지. 그리고 생배가 갈렸다고 한다.
어쨌거나 워낙 스토리가 어처구니 없었던데다, 당시는 유신 이전으로 야당 세력이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았고 여당 쪽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상태. 거기다 간신히 10년 만에 보궐 선거로 당선되어 회기가 1년 정도 남은 상태에서 당선되자마자 감방행(..)이라는 사실이 동정표를 끌어 곧바로 국회에서 석방동의안이 가결되어 풀려난다. 또한 재판정에서도 이 사건으로 최종적으로 기소된 10명 전원 무죄 판결.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에는 단순한 광산업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지옥 문턱까지 갔다온 셈. 한편 이 사건이 종결된 뒤 기소된 10명 가운데 한 명은 경찰이 심은 프락치임이 밝혀졌으며(..), 무죄 확정에 따른 형사보상금은 김 모씨가 일괄수령해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뭐 여기까지라면 그럭저럭 훈훈한 마무리겠으나...
6 국회 오물 투척사건
1966년, 그 유명한 국회 오물 투척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 이 사건은 그야말로 김두한이 국회의원 시절 일으켰던 온갖 좌충우돌의 결정판으로, 이후 영원히 국회의원 김두한의 이미지로 남았다.
김두한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사실 복잡한 이유같은 게 불필요. 바로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선거 직후 내란음모죄로 감방행이라는 불쾌한 사태를 겪었고, 원래 성격부터가 단순하고 거친 사람이었으니 속에서 끌어오르는 무언가(..)를 참지 못했던 듯하다. 실제로 이 사건은 한독당내란음모 사건의 항소심이 마무리된 지 불과 5일 후에 발생하였다.
이로써 김두한은 한독당 사건으로 감방에서 풀려난지 겨우 1년, 의정활동을 한지 8개월 만에 국회의원에서 물러나[20] 곧바로 감방으로 직행했다.. 그러나 똥 뿌린 것(..) 말고는 별로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1년 뒤 고혈압으로 인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한편 수감 중에 할복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행위는 미군정 당시 정진용 살인 사건 재판 때도 벌인 짓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나빠진 이미지를 반전시키기 위해 김두한을 거세게 몰아 붙였으나, 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두한이 잘했다고 여겼다. 실제로, 방법은 좋지 않았으나 의도는 좋았다고 봐도 된다.
7 사망
감방에서 풀려난 2년 뒤인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에 신민당(1967년) 후보로 출마한다. 국회 오물 투척사건의 결과로 이미지가 개선(?)되었고, 한독당 출신 운동가들이 신민당에 들어가는 과정 중에 김두한도 깍두기로 함께 영입이 된 것. 여담이지만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두한과 함께 법정에 선 인물 중에서만 국회의원이 세 명씩이나 나왔다. 드디어 그 오랜 세월 끝에 그럴듯한 정당의 소속이 된 것. 이 신민당은 바로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정치계의 거목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몸담고 활동한 진보정당이었기에, 우익 깡패 전적이 있던 김두한의 행보와 생애를 사람들이 조사하는 데에 더욱 꼬이고 꼬이게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약간의 차이로 낙방. 국회 오물 투척사건이 아무리 속시원하다해도 국회의원으로 뽑아주는 것은 또 별개였던 듯하다. 게다가 유세 도중 연설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후세의 김두한 찬양자들은 이 사건을 이유로 김두한이 박정희 정권에게 탄압 받은 민주 투사 쯤으로 위장하려 드는데, 사실 이때 김두한은 투표소 관리위원을 협박 모욕하는 사건도 저지른 상태였다. 즉, 이 두 사건을 함께 적용되어 수감된 것. 어쨌거나 이번에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2년 뒤인 1972년 11월 21일. 주먹계의 후배[21] 를 만난 이후 뇌출혈로 쓰러졌다. 신원미상의 인물들이 병원까지 옮겨다주었으나 의식을 찾지 못하고 며칠 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김두한의 죽음에 대해 주먹계의 후배 및 김두한의 아들은 타살설을 주장했다. 사실 김두한이 쓰러진 장소는 센츄럴 호텔 객실이라고 알려졌는데, 그가 이곳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쓰러진 김두한을 병원에 데려단 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 이로 인해 유족 및 친지들은 훗날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 혹은 그 사주를 받은 자에게 타살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들이 왜 이딴 이런 주장을 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들의 주장이 헛소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 몸집만 딱 봐도 알 수 있듯 김두한은 원래부터 고혈압 문제가 있었다. 김두한이 병보석을 받았던 것도 전부 고혈압 문제 때문이었으며, 사망 4개월 전에는 고혈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김두한을 진료한 의사들 역시 전형적인 뇌출혈에 의한 쇼크상태로 판정하였으며, 사망 당시 그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인물이나 언론은 전무하다. 방귀께나 뀌난 정치계 인사들이 조문하였으며, 각 언론들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의리가 있었다'는 둥 '반공투쟁을 하였다'는 둥 대체적으로 빨아대는 분위기긴 했지만 정작 타살설에 관해서는 아무도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냥 고혈압인데 깡패후배들과 어울려 술처먹다 죽은 거 향년 54세. 사인은 뇌출혈.
어찌되었든 워낙 혼란하고 괴상한 인생 속에서 야당 세력과도 자주 엮였다. 김영삼과 같이 야구경기를 한 후 찍은 사진도 있고, YS 역시 훗날에 김두한에 관련된 짧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묘사되었듯이 부하들 밥 사주겠다고 김영삼에게 돈을 꿔간 일이 꽤 있었다고.. 그 외에도 이만섭 국회의장은 김두한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다. 김대중의 경우엔 박정희 정권의 사카린 밀수로 인한 오물투척 사건 때 김두한보다 앞서 연설을 하며 현장에 있었고 신민당으로서 같은 당원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8 요약
-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이 만주로 떠난 이후, 그의 첩이었던 김계월에게서 1918년 출생하였다.
- 김두한은 김좌진의 사망 직후인 1930년 신문지상을 통해 소개되었다. 그의 신분이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런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 어머니 김계숙이 일찌감치 집을 나가버림으로써 김두한은 불우하게 자랐으며, 결국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사이 서울에서 이름 있는 깡패로 성장하였다.
- 1943년 김두한은 조선경치청과 협력하여 다른 깡패들과 함께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라는 지원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는 친일행위로 볼 수도 있으나 징용기피가 1차적인 목표였다는 이유로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후로도 이 단체에 제대로 연구된 바가 없어 결국 김두한의 이름은 각종 친일부역자 명단에 등재되지는 않았다.
-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에 참가하였다고 본인이 주장하였다.
- 그러나 그 이후 아버지의 옛 동료들의 회유로 우파로 전향하였다. 대체적으로 김두한은 이범석의 족청계 인물로 분류되지만, 확실하게 족청계로 분류하기엔 애매하다. 어쨌든 우파청년단체의 한 갈래에서 활동하였다.
- 김두한은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등의 좌파 및 중도 인사들의 테러, 암살 시도에 참가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 김두한의 확실한 행적은 우익 노조인 대한노총의 간부였다는 것. 이 직책을 통해 당시 활발했던 각종 파업을 사보타주하고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9월 총파업 당시 김두한이 상당한 활동을 하였음은 거의 확실해 보이며, 본인은 대구 10.1사건에도 참가하여 시위자들을 진압했다고 주장했다.
- 위의 활동들과 아버지의 명성, 본인의 말솜씨와 싸움 실력을 더하여 우익청년단체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 6.25 전쟁이 끝난 이후 이승만이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하는 과정 중에 김두한 역시 자유당을 탈당하였다. 그러나 1956년 무소속으로 종로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는데 성공한다.
- 이 과정 중에 이승만 및 이기붕과 등을 돌려 반자유당 인사가 되었으며, 그의 의정 활동은 반자유당 반이기붕 운동에 집중되었다.
- 그러는 한편 선거부정, 김관철 살해 미수, 이정재와의 대결 사건, 사세청장 폭행 사건 등을 저질렀다.
- 결국 1958년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이후 1965년까지 야인 신세가 되었다.
- 재야인사 시절, 이런저런 군소정당을 기웃거리는 과정 중에 진보계 및 학생 운동계와 다소 인연을 맺게 된다. 그 자신에게는 특별한 사상이 없었지만, 이런 과정 중에 진보 및 학생 운동 쪽의 이론 약간을 습득하여 그의 행적이나 연설 등에 이러한 것들이 다소 반영되게 되었다.
- 그러는 한편으로 여전히 깡패, 건달들과의 접촉은 끊기지 않았으며, 이들을 동원한 부정 선거, 시위 주도, 사조직 결성 등의 행위도 여전하였다.
- 1965년 보궐 선거를 통해 두번째로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그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젊은 학생 운동가들과 악명 높은 정치깡패였던 김두한을 엮은 특이한 형태의 박정희 정부의 조작사건으로, 김두한은 체포 직후 국회의 석방 동의안 가결로 풀려났으며, 재판에서도 관련자 전원이 무죄로 판명되었다.
- 그러나 풀려난 직후인 1967년 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사실상 국회에서 제명 처리되었으며, 수감되었다. 이는 김두한의 마지막 국회 활동이다.
- 이후 1970년 다시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하였으며, 2년 뒤 1972년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 현재까지 김두한에 대한 연구는, 반공콤플렉스 및 김두한보다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인물, 사건이 상당한 탓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김두한이 직접 남긴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허위, 과장, 왜곡, 축소, 은폐된 부분이 상당하여 어려움을 한층 더하고 있다.
- ↑ 김두한의 말에 따르면, 김좌진이 형평운동 중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제일 가능성은 적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저 아래 친자 논란 항목에서 논한다.
- ↑ 웃긴 얘기지만, 장명원은 해방이 되자 황급히 김두한과 조선청년전위대를 만들어 신분세탁을 꾀하기도 하였다.
- ↑ 대체로 구마적은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하여 김두한에게 패배한 이후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인데, 장명원의 기록에 따르면 1943년에도 깡패로서 활동했다는 얘기가 된다.
- ↑ 보통 이정재는 반도의용정신대에서 김두한과 인연을 맺었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격적인 깡패 활동은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명원에 다르면 이미 이전부터 깡패로 활동하였으며 어느 정도 '급'이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 ↑ 서울 지역 경우는 9월초 무렵들어서면서 조선공산당 재건파가 좌경화 시키면서 문제가 생겼기는 했지만, 지방 건준위로 보면 우익적인 사람들도 다수 참가했었다. 당장이라도 이북지역에 평남 건준위만해도 초창기 조만식을 비롯한 개신교 우익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었던 시기였으니..
- ↑ 여운형 항목에도 간단하게 나와있지만 그의 자택에 수류탄이 투척된 사건이다.
- ↑ 이러한 주장은 당시 극우 쪽의 전형적인 주장이었다. 당연히 극좌 쪽은 반대의 주장을 하였다.
- ↑ 이에 대해서는, 정진룡과 불화로 인해 김두한이 우익으로 돌아섰다는 주장도 있다. 즉, 인과관계가 반대라는 것.
- ↑ 다만, 이전부터 은근하게 거부 의사를 간간히 내비친 의원들도 있었고, 실제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도 있었으며 투표가 끝난 이후에야 돌아선 의원들도 존재한다. 단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반대한 것은 김두한과 민관식 뿐이라는 것.
- ↑ 국가 보조금, 사찰 소유권, 종단 운영자금 등등
- ↑ 노동자와 자본가와 정부가 잘 협의하여 국가 운영을 조율해야 한다는 사상. 한국의 노사정위원회가 이 사상과 흡사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좌파나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계급투쟁을 무시하는 우익사상이라고 까인다.
- ↑ 애초부터 협동주의는 계급투쟁을 주된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끼리 알아서 잘" 상부상조하며 사는것을 목표로 하는 온건파도 많다. 전진한은 일제시대에 유학생 시절부터 학생 생협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당시 스탈린주의나 공산주의가 횡행했던것을 생각해보면 좌파 사상과는 거의 인연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지금에야 노조가 굉장히 강성한 느낌이지만 당시에는 온건 조합주의자들이 많았다.
좌파 노동운동가들은 전부 월북하고 없었거든그리고 이런 일들은 해방 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아나코 생디칼리즘)나 생디칼리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사회부 장관이 노조를 겸직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폭풍까임을 당하게 된다(...). - ↑ 이때문에 김을동이 개고생하며 컸다는 직접간접 증언들이 존재하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병은 이래서 위험하다! - ↑ 물론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김두한이 죽는 날까지 그의 주변에는 그를 형님으로 모시며 콩고물 좀 얻어보려는 건달, 깡패 패거리들이 늘 기웃거리고 있었다.
- ↑ 실제로 수사과정 중에 이정재의 암살 대상자 명단에 김두한이 끼어 있었다.
- ↑ 십중팔구 김구 향수에 낚여 가입한 젊은 운동가들이 역으로 당을 접수해버린(..) 것이다.
- ↑ 이중 핵심적인 인물이 당시 서울대생 김중태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학생운동의 핵심인사로 이후로도 인민혁명당 사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었다.
- ↑ 선거 중 "수 틀리면 청와대를 부수겠다"고 했다. 뭐 김두한이 이런 식의 말실수를 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니 집어내기도 쉬었을 것이다.
- ↑ 김두한 본인부터가 입만 열면 해방 직후 모모 사건에 폭탄을 제공했다는 따위의 얘기를 늘어놓았으므로, 군부 입장에선 그저 차려진 밥상에 숟갈 얹기에 불과.
- ↑ 당연히 제명처리 감이다. 제명처리안이 통과하기 직전에 본인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 ↑ 이 후배라는 사람이 바로 조 모씨이다. 이 사람은 이후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에 항의하며 손가락을 절단한 것을 시작으로, 틈만 나면 일본에 항의한답시고 손가락을 절단해대는 통에 일반 대중에게도 유명세를 탔다. 덧붙여 감방 후배 조양은의 중매를 서줄 때 조양은을 29만원에게 탄압받은 민주투사(...)로 속여 백만 민주화 운동가들을 엿먹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