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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6일 (월) 21:58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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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 문서 : 조선
목차
1 의의
서울대학교와 국정교과서가 받아들였던 시대구분에 따르면 조선은 멀게는 통일신라부터 고려 시대까지 시작되었던 중세를 끝내고, 근세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한반도라는 국토와 한민족이라는 민족문화, 민족의식을 완성시켰다. 그 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양인의 수와 지위의 향상(양천제), 그리고 신분제도의 점진적인 폐지(자세한 것은 아래의 인권 항목 참조).
2. 왕권과 신권의 조화(의정부서사제)와 성문법치국가.
3. 문벌귀족 사회에서 문무양반 사회로.
4. 효율적인 중앙집권화: 모든 군현에 지방관 파견.
5. 향촌자치강조와 농민통제책(호패, 오가작통법).
2 문치주의: 관료제와 기록문화
조선은 신진 사대부층으로 대표되는 사상가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로, 중국에서 먼저 만들어진 성리학을 국가 통치에 맞게 이상적으로 정비하여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국가의 틀을 완성했다. 때문에 대당율과 관습법에 의존했던 고려조와는 달리 경국대전으로 대표되는 성문법 체계가 완비될 수 있었고, 철저히 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권한도 중국에 비하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명청대 중국 황제의 권력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킹왕짱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왕조차 법 아래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입헌군주제의 설명과 일치할 정도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서양 학문의 정의 그대로는 정말로 그렇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의 왕이 진짜 성문법 체계에 강하게 구속받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일단 입헌군주제라고 한다면 군주의 통치가 헌법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조선의 정치제도 구성에 대한 법률이나 관습법 등을 광의의 헌법이라고 전제하더라도 왕이 구속되는 그 헌법 혹은 법률은 왕의 통치범위에서 벗어난 주체가 만든 법률에 제약되어야 한다. 즉, 아무리 프로이센형 같은 외견적 입헌국가라도 외견적이나마 의회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런 독일제국 자체도 법실증주의에 의거해서 비록 왕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의회지만 그 의회에서 만든 법률자체는 군주의 권한 남용 방지에 기여했다는 의의가 헌법학의 의견이니만큼, 단지 왕이 법률로 제약받는다는 가능성이나 제약받아야 한다는 유교적 개념을 입헌군주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때문에 조선이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귀족정치였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조선의 왕 역시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귀신도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이었다. 하지만 관습법에 더해 성문법 체계를 체택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신하들이 '선왕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위반하시면 아니 되옵니다!"하고 대항하면 왕도 이를 감안해가며 움직이긴 했다.
몇몇 학자들은 의상학과 관련하여 조선의 의복이 귀족부터 평민까지 그 형태가 동일함에 주목하기도 한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에 따른 옷의 구조의 차이는 보편적이고 전세계적인 것인데 조선왕조는 그런 면에서 매우 특이하다는 것. 실제 조선의 옷은 새부적인 문양이나 색 등의 차이를 제외하면 임금부터 백정까지 그 구조는 동일하다. 물론 한복 항목을 보면 알지만 저고리나 바지가 보편적일뿐 왕이나 사대부의 경우 곤룡포와 도포같은 옷을 입은 반면 아래 백성의 경우 경제적 여력과 가사 규제 때문에 저고리와 바지 외엔 입지도 못했다.
세종실록에서는 "우리는 옛날(삼국시대)에 사람을 순장하는 것을 없앴는데, 쟤들은 (명나라) 아직도 하는 걸 보면 존경할 수만은 없는 듯."하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명나라를 디스한 바가 있었다.
기록 문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었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방대한 역사 기록을 남겼다는 점. 조선왕조실록의 작성 체계 및 사관들의 프로 정신. 프로 정신과 열정이 넘쳐나 이런 일례가 있다. 어느 날 태종이 말을 타다가 떨어졌는데 태종은 부끄러워 "사관에게는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관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적었다.
행정 부분에서는, 조선은 치안 전담 기구와 소방 전담 기구를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치안은 포도청, 소방 전담 기구는 금화도감이라는 기관이 있었다.[1]
영조, 정조 때 청나라에서 책 사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음에도, 당시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사신으로 오면서 유리창(당시 북경의 서점가)의 책을 쓸어담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입된 청과 서양의 문명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정조 시대의 학문적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3 조선의 과학
과학 기술의 발전은 15세기 중반 세종, 문종 시대에 한 차례 큰 발전이 있었으며, 이후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에 다시 상대적으로 가시적인 진전이 있었다.
세종 ~ 문종 시대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당시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와 같은 기구들을 많이 만들었던 사람으로 이천, 장영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칠정산으로 당시 정확한 역법에 도달했으며, 화차와 화포, 총통기, 오연자포와 십연자포 등 화포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기술은 총통위가 폐지된 성종 이후 크게 쇠퇴했으나[2], 양란을 거친 다음 군사 기술은 지속적으로 발달했다. 거북선은 최초의 철갑선까진 아니라지만 최초의 장갑함이라 할 만한 선진적인 군함이었다. 또한 적군이 기병들의 눈에 석회 등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정을 갈아서 고글인 풍안경을 만들었을 정도이며 한번 장전으로 2~3연발 연사가 가능한 조총도 제조했다. 그리고 수통은 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군관인 정평구가 '비차(飛車)'라는 비행기[3]를 만들어 큰 활약을 했다고도 하나, 기록만 있을 뿐 실체가 전해지지 않아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연산군 대에는 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추출하는 첨단 회취법인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으나 은본위 경제체제가 발달되어 있지 않은 조선에서 그리 유용하게 사용되지는 못했고 오히려 이후 일본으로 퍼져 일본의 은 대량생산에 영향을 주었다.
산학과 역법은 베이징의 선교사들의 역법을 받아들이면서 17세기까지 일본에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은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이 에도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역전되었다. 조선 통신사에 대한 대접도 점점 더 하락하여 순조 11년인 1811년에는 더 이상 통신사가 가지 않게 되었다[4].
정조 시대는 조선 과학의 마지막 정점이었다. 수원화성은 당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동양 성곽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 했으며, 그 기록 역시 상세하게 남겨져있다. 다만 화성은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지는 못했으며, 서양 과학기술의 도입 역시 매우 느려터졌다. 북학파인 홍대용이 1766년 의산문답(醫山問答)으로 자전을 주장한 것은 최소한 200년 늦고, 실학자 최한기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중역으로)받아들인건 발견 300년 후였으며[5],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과 윌리엄 허셜의 근대 천문학을 (역시 중역으로)받아들인 것은 발견 180년 뒤(1867년의 '성기운화(星氣運化)')였다. 이는 유럽보다 250년 이상 뒤쳐진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기학을 통한 독자적인 해석에 기반하였다. 최한기는 근대 의학 역시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년)을 통해서 소개했으나 이것 역시 막 서양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중국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실패한 개화와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 교육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의 과학은 한국전쟁까지 사실상 전무하다 싶은 정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단 역법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서양 천문학을 서서히 학습해 나갔기 때문에 일반인들 모르지만 조선은 서양과학에 그리 무지하진 않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양천문학이 계속 갱신되었기 때문에 19세기에 불완전한지식에서 완전한 지식을 얻었다가 맞다.(열린연단 문중양 참조)
4 인권
조선의 인권이 시궁창이었다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 당시 시대상의 일반적인 인권의 비참한 실상을 고려하지 않고 한 말들이다. 조선 인권을 논하기 전에는 14~18세기의 당시 시대상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인권을 현대의 인권 개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비교하기는 어렵다. 당시의 인간존중 개념은 유교에서 찾는게 좋다. 인권, 즉 Human rights라는 개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현대의 인권개념으로 당시를 해석하는 것은 현대의 인권개념이 어떤식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는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이게 아니면 대부분 아전인수이다.
세종실록에서는 당시 음악을 정비했던 박연이 맹인 악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세상에 버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간지폭풍의 명언을 남긴 바 있다.[6] 조선에서는 장애를 하나의 질병·장애라는 말 그대로 몸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로 인식했으며 기형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을 사회 차원에서 매몰차게 내버리지는 않았다. 사회 인식은 오히려 20세기 한국보다 더 나았던 셈. 장애가 심한 자들에게는 세금과 군역을 면제하거나, 시각장애인 같은 경우 손재주가 우수한 사람을 뽑아, 따로 전문직으로 고용하는 등의 일거리를 주게 했다. 즉, 지금의 한국에서 실시되는 시각장애인 안마사 제도와 비슷한 목적의 정책을 그 시절부터 실시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얼마든지 출세가 가능했다. 각 부 장관급인 판서는 물론, 왕 다음가는 의정 급까지 올라간 자들이 있다. 척추장애인 허조, 간질장애인 권균, 지체장애인 심희수같이 의정급에 올라간 인물이며, 채제공은 사시를 숨기지 않고 오롯이 초상화에 담았고, 청각장애인 이덕수는 대제학과, 형조판서까지 오르는 등, 일단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중에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출세할 수 있었다.
조선은 범죄의 수사에 있어 꽤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였음을 <신주무원록>등의 저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신주무원록의 과학성을 엿볼 수 있는 글.
검시 체계도 초검과 복검, 삼검에 걸쳐 검시해 초검과 복검의 결과가 일치해야만 사건을 종결하였고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삼검도 불사했다. 또한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임금에게 장계가 올라가 허락이 떨어져야 사형을 집행하는 등 생사람을 잡지 않도록 고심한 노력이 돋보인다. 영조 이래 잔인한 형벌(압슬, 문신)을 금지한 것도 발전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런 조선의 법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조선시대 최고의 스캔들였던 어우동 사건인데, 이때에도 왕과 신하들이 철저한 법리 공방을 벌인 후 법에 따라서 처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왕이 판결까지 겸하는게 좋은게 아니다. 현대로 지향해가는 서구와는 정 반대의 전통이고 서구의 발전은 시대상을 고려한 끊임없는 변화에 있으며 자유민으로서의 민족관념에서 출발한다.19세기 영국노동자가 비참하게 살았다고한들 기근으로 매년 굶어죽는 조선인들보단 나았다.그리고 19세기 노동자란건 조선처럼 오랫동안 생활수준이 개선되지 않던 계급이 아니다. 의회 입법과 서구 철학의 전통이 없는 사회를 애써 동시대 타국 운운하며 비교하지말자
4.1 노비의 인권
노비의 비율이 주변 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으며, 그 인신예속적 성격 때문에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많다.[7] 또한 노비는 국제법상 'Slave'에 대한 정의에 부합하는데, 인권적인 문제나 실제 처해있는 상황 및 처우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다면 그 사람/제도는 노예의 뜻에 부합한다. 즉 위의 정의대로 보자면 노비는 노예가 맞다.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이러한 성리학적 입장에서 노비제 폐지를 주장했지만 같은 혁명세력의 반대로 접어야 했고 이후 유형원또한 노비제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대부들은 중요한 재산인 노비를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이것은 신분제가 완화되는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같은 인물도 노비제의 폐지를 반대했던데다 소수의 실학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노비제를 옹호했다. 노비가 농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사고 팔리는 물건이였던 존재다. 과거의 인권 수준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 또한 안되지만 지나치게 고평가나 미화해도 안 될 것이다.[8]
다만 세간에서 노비를 평가하는 대로 노예를 현대에 재창조된 편견으로만 정의한다면 굉장한 왜곡이 일어난다는 게 문제. 각 시대, 각 나라마다 노예에 대한 처우는 달랐고 심지어 같은 노예들 사이에서도 처우가 달랐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아는 노예의 이미지는 16~17세기 미국의 노예+서브컬처에서 그려지는 노예의 이미지가 결합한 것에 가까우며, 당장 로마의 가정 노예를 보면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일반 평민으로 살 수 있었다. 야만적이라는 인식이 있는 아즈텍 제국에서도 노예 계층인 탈르코틴(또는 마예케)이 똑같은 노예민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개인생활에서는 거의 제약을 받지 않았고, 주인이 자신을 학대한다고 느끼면 특정 신전으로 도망쳐서 해방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전장에서 공을 세우면 독수리 전사, 재규어 전사로 불리는 자유민 장교로 계급 상승되어 좋은 취급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노예 취급받는 중세의 농노들도 도시로 도망가서 1년 버티면 자유민으로 인정받았다. 유럽을 포함한 여타 지역에서 노비와 비슷한 위치인 하층 계급민들의 실제 처지는 노비보다 비참한 경우도 있었고, 인간 대접을 못받는 경우 또한 있었다. 물론 개항기의 서구인들이 '서구화되지 않은 모든 국가'를 미개국으로 인식해 버리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실제 노예의 삶이 어땠는지는 그 당시의 시대상과 그 노예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사회상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노비는 어디까지나 사고 팔리던 존재였지만 조선은 이들을 사람으로 어느정도 대우를 해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9]
가장 대표적 오해로 대명률을 예로 들며 주인이 어떤 차별을 가해도 노비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국가에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대명률은 조선의 기본법이 아니다. 경국대전을 만들때 대명률을 참조하였다지만 말 그대로 참고용. 대명률이 실제로 적용되는 경우는 경국대전 같은 조선의 기본 법에 나오지 않는 사례가 있을 시 거기에 의거해서 참고하는 정도이며 실제로는 그조차도 왕의 수교에 따라 처벌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대명률에는 도적질을 하는 사람에게는 살을 지지고 얼굴에 죄명을 적는 이른바 자자형(실록에는 경면(黥面)이라고 되어있다.)을 실시하도록 되어있는데 중종 20년의 기록을 보면 이 형을 받은 사람은 오로지 두 명 뿐이다. 게다가 영조 때에 와서는 아예 자자형을 금지했을 뿐더러 실록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미 옛날부터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니 중종 때부터 이미 사문화되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기본적으로 조선은 법치주의가 아니라 덕치주의 사회였다.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기본적으로 법보다 자신들의 관용과 교화, 즉 덕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리기를 중시했으며 요즘 우리가 흔히 분쟁이 발생했을때 하는 말인 '법대로 하자'란 말은 그 당시 사대부들에겐 절대로 통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동아시아, 특히 유교권에서 법이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덕적 기준의 선'이었고 이를 정해진 대로만 이행하는 것은 융통성이 없는 소인, 심하면 학정으로까지 인식되었다. 이 때문에 주로 노비를 소유하고 있는 양반들은 폭력과 권력보단 포용력으로서 노비를 다스리는 것을 선호했고 또한,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 심지어 노비에게 직접 약까지 지어다주는 주인도 있었을 정도.
사실 덕치주의라는 점을 감안해도 노비의 인권에 대한 법적 조치는 약한 편이 아니었다. 노비의 재산은 법적으로 보호받았으며 만약 주인이 이를 강제로 뺏을 경우 장소(狀訴)를 할 수 있었다. 또 외거노비에 한해서는 신공만 제대로 내면 거주지를 옮길 수 있는 자유도 있었다. 단 주인에게 보고는 해야 했지만. 배경이야기 클릭. 공노비공무원만 받았다는 한계는 있긴했지만 여성노비가 출산하면 100일간의 출산 휴가를 주었고 남성 노비[10]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
- 양반한테 예의 좀 차리라고 딴지를 놓는 백정 상길이.[11] 또한, 상전인 이몽룡을 뻔질나게 놀려대고 빨아먹으며 아예 국문학 이론에 "방자형 인물"이라고 자기 이름까지 올려놓은 몸종 방자.
- 그리고 봉산탈춤에서 양반 3형제를 모시는 척 하면서 대놓고 비웃는 말뚝이 등등...[12]
고려와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고려가 조선과 비교해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많으나 하층 계급민은 조선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13] 고려는 노비 외에도 양수척, 항, 소, 부곡민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하급 계층이 존재했고 이들에 대한 대우는 하나같이 비참했다. 오히려 조선시대에 들어 이들 하층계급민들이 노비라는 계층으로 흡수 통합되고 이들에 대해 '인간'으로 대접해 주면서 인권 측면에서 상향된 모습을 보였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있어서도 결혼이나 연애, 상거래 등에 있어서 독립적 행동을 보장 받을 뿐 조선의 양반과 다른 고려의 귀족문화 내에서는 완벽한 약자였다. 즉 계급적 관점에서 인권을 논한다면 고려보다 조선이 확실히 앞선다. 대표적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 정초부(鄭樵夫)는 노비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에게서 문인으로 인정받고 심지어는 마원, 제갈량 등의 인물들과 함께 초목필지와 같은 당대의 교육 서적에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노예제니 만큼 인권에 제한이 심했는데 조선시대의 노비연구에 대해서 이영훈교수의 강연에서는 적어도 조선시대 초기의 노비는 법인격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21분부터 즉 주인에게 죽거나 맞아도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이영훈교수가 설명하는 조선시대 초기의 노비는 조선사회의 막연한 정서때문에 인간으로 대우받은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가정이 통제하기에는 너무 많은 노비를 가지고 있는 조선사회 특유의 상황에서 통제할수 없는 노비들의 집단 범죄로부터 고용인과 피고용인들의 암묵적 딜을 통해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갔을 가능성이 더 현실성 있어 보인다. 예를들어 소수의 노비를 거느린 집안들의 기록에서는 주인이랑 술먹다 말싸움한 노비를 패죽인것을 자랑스럽게 가문기록에 적은 집안도 있었으며 그와 반대로 경국대전에선 노비를 20인 이하로 부려야 주인이 안전할것이라는 경고가 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전쟁을 통한 외국인의 인신매매를 포기하고 건국초부터 16세기까지 자국인의 30~40%에 해당하는 인구를 사고파는 재산으로 만들었고, 노비의 법인격 역시 노비의 종류에 따라서 차등이 있을뿐 기본적으로는 주인의 폭력과 성적 학대를 방어할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인조시기, 한 장수의 여자관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여자관노역시 장수가 쉬고가는 주막이나 관청에서 매우 쉽게 성접대대상으로서 내어지는 기록도있다.[14]
4.2 여성의 인권
그 후퇴했다는 여성 인권도 남성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종속물 취급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대우해 주긴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은 여성의 호주권을 고려처럼 토성의 형태로 땅에 묶인 호주로 취급하지 않았고, 독립된 형태로 존속할 수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을 가르치는 여성인 현처가 등장했으며 임윤지당, 강정일당처럼 성리학을 자기화하는 여성성리학자들이 나타났고[15], 이들은 남성 양반들에게서도 자신들과 대등한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것으로 대접받았다. 또한 "출가외인", "칠거지악"이라는 예학적 제도들은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며, 그나마도 노론 출신의 양반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육 면에서도 여성도 집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고 일단은 언문정도는 쓸 정도는 가르쳤으며 왕족의 경우 인수대비, 문정대비, 명성황후[16]의 경우에는 한문을 알다못해 유교 경전에도 나름 통달했다. 게다가 인수대비는 여성 전용 유교 교과서 격인 내훈의 저자이기까지 하다. 공주, 옹주등의 경우에도 일단 언문정도는 썼다.[17] 여성이 남성보다는 교육 면에서는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잘 못 배웠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법적인 부분에서가 아닌 사회적, 생활사적인 면에서의 가시적인 여성 인권 하락은 분명히 심했다. 고려에서와 같은 여성 단독의 상거래가 자유롭지 않았으며 연애 결혼이라는 것은 양반가에서는 쉽사리 나오기 힘든 이야기였다. 또한, 일반적인 사회진출을 제외하고는 고려나 조선 초기까지는 호적에서의 기록 순서에서도 조선 초기 이후와 달리 남녀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했던 점, 조선시대에 부계로 제한했던 음서 상속권 또한 고려시대까지는 외손자까지 똑같이 가능했던 점,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으나 조선시대에 법으로 금지된 점, 기타 포상 보장등의 제도적 제사나 상례 등도 모두 여성이 주재 가능했다는 점, 경제생활이나 가정생활 등이 모두 남성과 어느 정도 대등한 수준이었던 고려나 조선 초반을 감안하면 적어도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여성의 인권 하락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 시기 성립된 교조적 성리학 지배질서가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확산되고 200여년간 유지되면서 점진적으로 세계적인 여성인권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어[18] 대한민국의 법제상으로까지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인권하락 현상은 조선후기에 들어서 급격히 진전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비단 조선 후기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으며 여성 인권의 영역에서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조선후기의 인권하락과 별도로 이미 조선 전기에 성리학 질서의 성립을 위해 조선 초기인 태종 시기부터 첩의 자손인 서얼을 문과는 물론 생원이나 진사과에도 응시하지 못하게 한 "서얼 차대법"이 제정된 바 있으며 역시 같은 시기의 "삼가 금지법"을 통해 실질적으로 국가가 과부의 재가, 혼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명백히 소수자의 인권을 법적으로 하락시킨 이런 법률들은 그 당대에만 실시된 것이 아니고 그 후 조선의 법제로 명시적으로 제도화된다. 위의 삼가 금지법만 하더라도 성종 때에 이르러 "재가 금지법"으로 성문법으로 확정되어 공포되었으며, 양반의 정처를 대상으로 관리하여 국가가 명부를 만들어 통제하였다. 예를 들면 세번 이상 시집간 여성의 경우는 별도로 공식 명부인 "자녀안"에 기록하고 통제했다. 다만 서민들이 재가를 많이 시행했다는 말을 생각하면 사문화된 듯.
5 일반인들의 조선에 대한 이미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대중이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역사에 가지는 이미지는 그냥 좋지 않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최악이다.
특히 19세기 조선이나 당쟁은 예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원죄 수준의 처절한 비난을 받는다. 학술적 평가야 어찌되었건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는 그 끝이 영 좋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수능만을 초점에 맞춘 입시 위주의 교육 아래[19], 학생들이 보는 조선사는 거세 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사극의 탈을 쓴 쓰레기들과 역사 교양서의 탈을 쓴 소설들의 범람 속에, 학생 이상 성인 등 일반 대중들이 보는 조선사 또한 개판인 건 마찬가지. 이러한 경향은 특히 온라인 상에서 더욱 심각하게 두드러지며, 대형 사이트들에서는 조선에 뭔가 우호적인 의견이 나타난다면 그 의견이 사실이라 해도 국뽕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나오는 형국이다. 그쯤 가면 거기가 한국 사이트인지, 아니면 일본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의 극우 사이트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 물론 그렇게 열심히 까는 사람들이라 해서 뭘 알고나 까는 거냐면, 딱히 그렇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전근대사 위주의 아마추어 역덕들을 중심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바탕으로 과도한 친조선빠 시각을 가진 글들이 자주 올라오기도 했다. 단순히 굳이 전대의 왕조들과 비교하여 조선을 띄워주며 고대~중세의 한국 왕조들을 지나치게 비난하고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조선이 "당대 세계 최고의 정치 시스템을 가진 국가"라던지 "산업혁명 이전에는 유럽보다 발전된 국가", "국왕의 왕권이 크게 제약되는 원시적인 민주주의 체계를 가진 국가" 등의 근거없는 극단적인 조선 찬양과 이에 대한 지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다시 조선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해지기도 했다.[20]
이렇듯 워낙 대중적인 인식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조선사다보니 조선을 평가하려면 정확한 역사적 근거와 사실, 그리고 세계의 보편적 역사 학계에서 인정하는 내용을 토대로 논하는 것이 더욱 요구되는 바이다. 즉, 현재 학계의 연구와 대중의 인식 사이에는 당사자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 이상의 심각한 괴리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며, 이는 시급히 개선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70년대 이전의 국사 교육은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라는 질문과 스트레오 타입적인 답변이 있었다. 붕당(분열), 신분차별, 유교, 사대주의, 문치주의였다. 지금은 조금 생소해 보이는 문답이지만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당시 국사교육은 기성세대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편견은 80년대 사극 등의 대중매체에 의해 강화되었던 측면이 있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이씨 조선의 잔재가 없어졌다고 좋아하는 환빠들만큼은 아니라도,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가지는 조선, 즉 '이조'의 이미지는 분명 좋은 편은 아니다. 대중들이 보통 가지는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 성리학과 붕당 정치 등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 이익 싸움만 한 지배층.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및 모화사상 일관.
- 일본에게 뒤쳐지게 된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왕조.
- 앞의 항과 같은 이유로 35년(햇수로는 36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살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음.
이는 비단 식민사관의 영향만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도 한몫한다.
- 과도하게 만주, 정복, 넓은 영토만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사관의 영향으로 고구려, 발해 띄우기.[21]와 대조되는 과도한 폄하[2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알 수 있듯 북한과 관련된 좋지 않은 어감.
- 전근대 사회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 부족.
- 외세(특히 일본)에 당한 굴욕.
"조선이 왜 500년만에 망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조선이 500년을 견디어 냈는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도 있다.[23] 조선과 동시기에 있던 이웃국가들인 명, 청,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가 삼백 년도 못 가기는 했지만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인구가 적고 땅이 좁아 오래 가는데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전 서술에는 나라가 오래 간 게 무조건 자랑거리인 것만은 아니라며 오스만 투르크는 조선보다 더 국력도 강성했으면서도 긴 국가 수명을 유지했지만 이유로 세계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빠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확실히 무조건 나라가 오래 간 게 자랑이라고만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오스만 투르크는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내부의 교체를 통해 터키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차라리 적절한 개혁을 통해 나라가 발전하거나 혹은 나라 자체를 뒤집어엎고 바꾸어서라도 발전해야한다는 논리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단순히 고인 물이 썩는다고 발전이 더뎌 세계화에 한참 뒤쳐진 나라라고 무작정 조선을 까는 논거로 비교하기에는 대상이 부적절하다.
또 동시기 서유럽의 국가들이 대항해시대를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한 시대였다며, 아무리 사방이 막혔다고 해도 바다가 막힌적은 없고, 이 바다로의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은것은 현대인들이 조선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인 사대주의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조선을 까는 이유라고는 하지만 이는 당시 서유럽이 왜 대항해시대를 시작했는지 그 배경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수박 겉핥기라고밖에 볼 수 없다. 물론 바다가 열려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근거리에 중국과 일본이 있는 이상 그들의 시선이나 주의를 끌 수 밖에 없으며 더군다나 연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을 주요 항로로 선택하던 당시로서는 쉽게 눈에 뜨일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거기다 당시 선박이나 항해기술을 생각하면 장거리의 원양 항해는 굉장히 힘든 시대였는데 그 대항해시대를 연 서양조차도 네덜란드의 경우만 해도 선원이 되었다가 살아 돌아가는 사람이 3분의 1에 불과했으며 이는 일본에서도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거기다 애초에 사대주의하고 바다로 안 나간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작 시행한 명나라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은 해금령을 천자국이 행하니 소중화인 조선도 당연히 따라야한다며 몰락을 자초한 역사를 보면 도대체 어느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 매국적 논리로 한반도에 주저앉아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조선시대다. 저 좋은 시대에 배 1척 안띄우고 코딱지만한 권력다툼이나 하다가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마지막 시간과 기회를 좋게 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조선을 까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그 중국하고 일본도 지들이 먼저 서양까지 항해해서 서양과 접촉한 게 아니라 서양인들이 그들에게로 항해하여 찾아온 것인데 당연하지만 서양인들 입장에서 보면 조선까지 가는 건 중국이나 일본까지 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벨테브레나 하멜이 표류하여 조선에 온 걸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명나라 자신도 해금령을 안 지켰다지만 이는 워낙에 넓고 많은 중국 대륙과 그 해안선, 인구 때문에 제대로 다 단속을 못한 것이라고 봐야지 안 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 정화의 함대 원정만 봐도 아프리카까지는 갔을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이후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그에 관한 기록을 삭제한 마당이었다.
거기다 엄밀히 따지면 조선이 배 1척 안 띄웠다는 말도 틀린 말인 게 조선시대 사람들 기록에도 유구나 북해도, 혹은 안남 등에 가보았다는 기록을 남겼으며-물론 개인 자격으로 보고 들은 것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표류나 혹은 임란 직후 일본 상인의 노예로서 끌려가 본 것들이 많기는 하지만-조선 초기만 해도 그들의 사신들이 경복궁에 와서 조공을 드렸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이다.
80년대 이후 진행된 "자본주의 맹아론"을 위시한 전근대 민족주의 역사관에 다시 반기를 들며, 식민지 근대화론으로서 근대화의 측면에서 조선시대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으며, 다시 이에 대해서 "조선의 힘"을 주장하며 근대를 넘어선 탈근대, 오래된 미래를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세도정치 시기 이래 조선은 국가의 모든 기강이 붕괴하였고, 철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대규모 민란으로 왕조는 껍데기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24] 결국 조선의 멸망은 "망할 때가 되어서"+"(지배층이) 개혁과 개화에 실패해서"+"일본이 쳐들어와서" 의 세 가지가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왕조에서 기록을 풍부하게 남겼기 때문에 다른 왕조들에 비해 실상이 너무 잘 알려졌으며 윤색이나 미화 또는 허황된 신화적 요소를 끼워넣기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 왕조 이미지가 안 좋아지는데 한 몫 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위의 사진에서는 여고에서 골든벨이 진행되었을 때 여학생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한 예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남녀의 구분이 얼마나 큰지는 증명된 것이 없지만 통념상 일반적으로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조선을 좀 더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유는 조선 시대 당시의 여성 인권, 가부장제 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다. 조선 이전 시대에서 찾아본다면 신라에서는 세 차례 여왕이 즉위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고[25] 고려시대까지는 무조건 남성(남편)의 성만 따라야 한다는 법도 없었던데다가 재산 상속에 있어서도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부모의 제사를 지내고 부모로부터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받고 음서도 똑같이 손자, 외손자까지 가능했다거나 친족의 범위도 조선부터 현대까지 부계 8촌, 모계 4촌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고려까지는 부계와 모계 모두 8촌까지 친족으로 보았단 점, 꼭 여성이 시집간 뒤에 남편의 집안에 묶여있어야 하는 분위기도 없었던 등 비교적 남녀평등 사회구조가 강했다.[26] 하지만 조선시대는 그 망할 놈의[27] 유교 사상이 고려의 불교 사상을 밀어내고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사회적 대우와 권리를 받지 못하고 차별당했으며, 조선시대 신사임당의 대표적인 브랜드 이미지인 "현모양처"로써 마치 여성들은 찍소리 말고 남편과 남편의 집안에게 복종이나 해야 하고 남편을 잘 모셔야 하는 하인 같은 느낌을 주는 사회였다. 그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쉽게 말해 여자들이 싫어하는 "꼴마초" 사상의 근본 배경이 조선시대에서 비롯되어져 현대까지 내려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때 근현대 우리나라의 좋지 않은 관념으로 남았었던 "남아선호"사상도 남녀차별적인 유교사상을 가진 조선시대에서 비롯됐다라는 주장도 있다.[28]
남녀간 인터넷에서의 진흙탕 싸움은 현재진행형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 갈등이 대립되는 커뮤니티나 네이트, 다음,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 댓글란에는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와 원인으로 지목되는 유교사상,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 유교 사상을 창시한 공자도 까이고 욕먹는 것을 간혹 볼 수 있었다. '공자와 유교가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라거나...
조선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역시 식민사관의 영향도 클 것이다. 기록도 풍부한데다가 일본에게 망했으니 일제 입장에서는 제일 왜곡하고 폄하하기 만만했을테니 말이다.
5.1 성리학과 붕당
5.2 사대 혹은 사대주의, 그리고 조공
국내에선 일반적으로 조선의 대중국 사대주의 외교를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드넓은 땅과 헤아릴 수 없는 인구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세계 최첨단(最尖端)을 달리는 당대 최강의 선진국이였다. 대략 현재의 미국 취급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사대외교는 조선 이전에도 빈번히 시행해 왔던 외교정책이었는데 유독 조선만 비난하는 행태는 바람직하지 않다.[29] 소위 '중화'나 '소중화'의 의미 역시 과거에 사용하던 뜻은 지금과 달랐다.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국제질서를 따르는 문명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재의 친서방 국가와 유사한 의미다. 또한 사대"주의"라는 표현 자체가 일본이 창안해낸 단어로 한반도와 일본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쓰이지도 않는다.
심지어 중국의 사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조공을 받는 중국보다 조공을 바치는 쪽이 이득을 받는 구조였다. 애초에 중국 자체가 조선시대 당시에 세계에서 단일국가로 최고라 단언할수 있었던 나라인데, 조선같이 작은 나라에 조공을 받아받자 얼마나 받겠는가? 사대주의로 조공을 받는 목적은 중국이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부터 위에 있음을 인정받는 조치였을 뿐이다. 실제로 조공으로 바치는 양보다 조공을 간 이후 중국에서 선물 명목으로 지급하는 선물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국의 비단같은 뛰어난 문물들을 잔뜩 받게되니, 조공을 바치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중국이 우위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실제로도 우위에 있다 선물을 잔뜩 받아 돌아가는셈. 실제로 일본같은 경우에도 중국에 조공을 바치길 스스로 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이 미개한 나라에겐 조공을 안받겠다고 거절하였고, 중국의 뛰어난 문물을 받아올 길이 없어지게 되자 직접 얻기위해서 왜구가되어 중국의 해안을 침범하였다.
즉, 우리가 중국에 조공을 바친건 부끄러운 역사가 아닌, 그 대단한 중국에게 스스로 복종할것을 요청받을 정도의 국가는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러한 긍정적인 의견이 100% 옳은것은 절대 아니다. 희사품이 조공품보다 총합적으로 가치가 높았다고 하지만, 그 조공품 목록에 처녀[30]가 들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이다.
또한 조선은 항상 명나라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던 것은 아니였다. 천자만이 할 수 있던 원구단에서의 제사를 지냈으며[31] 세종대왕 시절에는 상왕 태종에게 태상'황'이라는 칭호를 올리기도 하고 황제국에서만 쓸 수 있던 묘호, 능호(황제의 무덤의 이름), 황제의 아내의 시호인 후(后) 등을 사용하는 등 많은 왕실 예법들을 제후국이라고 자칭하면서도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쓴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조선조 초기에는 조선에서 요동을 공격하겠다는 등 자주 명과 트러블을 일으켰고, 소위말하는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32]
사대외교는 동아시아 당시의 기본적인 국제외교의 전통이었고, 당시 국력이 약했던 조선이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외교 전략이었다.
인터넷에 퍼져 있는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에도 조선이 이를 통해 취하는 이득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명이 3년에 1번 오라는 걸 굳이 1년에 3번 오겠다고 했고, 이 때문에 국교가 일시 단절될 정도였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명이 3년에 1번 오라고 한 것은 맞으나, 운송과정에서의 비용이 과다할 터이니 그것을 아끼기 위해 모아서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쉽게 말해 배송비 많이 들 터이니 묶음 배송 하라는 것(…). 정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문사(奏聞使) 남재(南在)가 중국 서울로부터 돌아와서 아뢰었다.“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고 또 명령하기를, ‘너희 나라 사신의 행차가 왕래하는데 길이 멀어서 비용이 많이 드니, 지금부터는 3년 만에 한 번 조회하라.’ 하였습니다(甲辰/奏聞使南在回自京師曰: “帝厚待之, 且命曰: ‘爾國使臣行李往來, 道遠費煩, 自今三年一朝).
(태조 4권, 2년(1393 계유/명 홍무(洪武) 26년) 9월 2일(갑진) 1번째 기사, 링크.)
다만 이는 황제가 대놓고 '선물을 주기 부담스러우니 조금만 왔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하기에는 중화사상의 자존심이 상하기에, 다른 변명을 찾아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주장 역시 강하다. 자세한 내용은 조공 부분을 참조.
이런 형식의 "사대외교"는 단지 세력강약이 바뀌었을 뿐 길게 보면 북송 때부터 시작된 체제였고, 크게 보면 춘추 시대 주나라가 종주국인 셈 치고 진 초 한 등의 열국이 조공하는 것까지 사대외교로 치는 것도 있다. 또한 명나라가 주위 이민족을 대하는 정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토목의 변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관찰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문제다. 또한 명나라와 비슷한 시기 유목민 세력을 몰아내며 세워진 조선은 몽골제국으로 인한 반동으로 이전 왕조들과는 비교될정도로 중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워졌으면서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깊게 들어갔다.[33] 더욱이 원나라 이후 중국의 통일 제국은 요동 반도를 거머쥐고 거의 사분오열 하지 않으며 주변 국가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했다. 고구려나 고려 또한 당나라와 몽골 제국과 대놓고 대적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과거처럼 중국이 분열된 틈을 타서 뭔가를 도모해 볼 만한 기회 자체가 조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34]
물론 조선이 언제나 조공으로 이득만을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들어 희사품이 조공품보다 총합적으로 가치가 높았다고 하지만 조공품 목록에 처녀[35]가 들어가 있었으며 이 탓에 세종 때 명에 공녀로 끌려간[36] 한씨 성을 가진 여성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영락제가 죽자 같이 순장되는 비극을 맞이했다.[37] 그 외에도 조선 초기, 조선을 믿지 못한 홍무제나 한창 팽창주의에 열을 올리던 영락제, 사냥을 좋아한 선덕제 등은 엄청난 양의 조공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조선은 크게 고생을 했다. 이런 과도한 조공은 선덕제가 죽은 이후에 사라지고 역사에 흔히 알려진 외교 형태의 조공무역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은 엄연히 육지와 한참 떨어져 있는 외딴 섬나라였고 공군과 공중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외침과는 관련이 없는, 안전한 지역이었다. 유라시아를 휩쓴 몽골족도 바다와 생전 처음보는 이 지옥같은 태풍라는 자연의 장벽에 막혀 일본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일본은 명나라에 조공을 하고 싶어 유구국을 점령하는 꼼수까지 부렸다.
여진족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왜란으로 사정이 말이 아니었던 조선과 전성기를 달리던 후금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조선이 건국 초기 최고의 국력을 떨치고 있을 때 여진은 그저 심심하면 조선에게 얻어터지고[38], 심지어 가장 강성한 추장 이만주가 일가족과 함께 몰살당하던 상황인 것을 기억하자. 또한 청나라 이후로는 한족에 흡수당해 사라진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전 고려에게 상국으로 군림했던 금나라와 요나라도 처음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다.[39] 한때의 부모의 나라를 공격하는 무슨 이런 여포 같은 패륜이... 아서스 메네실
아무튼 조선과 명의 특수한 관계를 오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로 인식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도 당대의 입지와 힘에 따라서 상이했던 것은 바로 전 시대인 고려와 송나라(북송)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란을 제어하는데 큰 전력이 되던 고려에 송나라는 웬만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 밖에 없었는데,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조공차 가서 예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송의 보물들을 이것저것 뒤져서 하사품을 이거줘 저거줘하며 직접 요구하고 송나라는 그걸 진짜로 다 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후로도 조선의 힘이 강하면 반발하고[40] 명의 힘이 강하면 조선이 몸을 숙이는 생존전략이었을 뿐 조공을 마치 신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때로는 단점도 있고 크기도 하고 당시 중국왕조보다 국력이 약했던 우리나라의 왕조들이 생존수단으로서 사대외교를 통해 조공을 주는 것이 조선왕조 중기에 성리학자들이 굉장히 폐쇄적으로 변질되면서 필요 이상으로 명나라에 감화되고 빠돌이 증상을 나타내면서 아래 단락의 소중화주의나 모화사상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변질이 바로 조선왕조가 현 시대에 와서 유난히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위에서 상술된 여러 이유와 시대상황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대외교가 그 뜻이 변질되었다 해도 무작정 조선을 중국의 시다바리로 보는 것은 상당히 잘못된 일이다.
5.3 소중화주의와 모화사상, 그리고 국학
조선은 건국초부터 모화주의에 매우 심취했다.그 대표적인 증거가 국토에 대한 중국식 지명붙이기다. 일례로 호남이라는 단어는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명이었다.호남 호서를 일컫는 단어의 기준이 되는 거대한 호수역시 전라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제 벽골제를 마치 상상속의 호수로 가정하고 중국의 호남을 따와서 호남이라고 지은것으로 보여진다.호남이란 지역명칭은 조선초에만 갑자기 등장한다. 마치 미국이 대세니 전라도를 콜로라도라고 이름붙인것과 같은이치이다.민족주의인사들의 사대주의비판이 없엇다면 오늘날에도 위와같은 사례가 나타났으리라 본다.
조선 후기의 정치 체제가 취했던 소중화주의, 교조적 성리학이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이론이 모화사상 같은 비뚤어진 사상에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폐쇄성은 기존의 중화숭배 사상을 비틀어 자국문화만을 제일로 여기는 사상을 낳아 외부의 발전된 문물이 들어오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사실 당시는 병자호란과 명의 패망으로 이미 서구열강이 들어오기 이전에 중화질서의 파괴를 한번 겪었고, 조선 후기까지 그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유교와 중화에 집착하는 일종의 중국화와 정체성 혼란을 겪은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이 원래부터 이상했던 것도 아니라는 것.[41]
당시 문체반정을 주창한 정조마저도 신하들과의 사사로운 서편에서는 고문을 내팽겨치고 써버렸으니…
만약 청에서의 서적 수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조선말 오경석, 박규수 등의 개화사상파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경석같은 경우에는 역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에서 수많은 신(新)사상을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친 이들과 청국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진 이들이 혼재되었던 시대라는 것. 한편으로는 당시 조선의 후진적이라고 생각되는 문물을 버리고 청국의 진보된 사상과 문물을 받아 들이자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언어 문학사용론, 한국적 진경산수화등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것이다. 다만, 이 북학사상파 역시 따지고 본다면 송시열, 이이명 등 선대의 노론 유학자들에 그 기원이 연연한다. 그리고 북학사상파들은 주로 노론 경화사족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보수파들은 충청도 등 시골 지역에 많았다. 아니 애초에 중농학파건 북학파건 실학 연구가 흥한 동네가 오늘날 서울, 경기권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기존 지식을 버리고 새로운 지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나라는 많지 않다. 또한 그렇게 마구 받아들이고 완전히 자신의 색을 잃은 나라도 적지 않다. 애시당초 제국주의의 물결 앞에서 제대로 설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 대표적인 예이며 왜 조선은 그렇게 못했냐는 것은 너무 크게 기대를 품는 것이다.
이 시기 조선에는 소중화주의와 같은 자뻑에 이어서 모화사상 같은 정신승리 사상까지 융성하게 된다. 모화사상을 통한 정신승리는 명 황제에 제사를 지내면서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예시가 이미 명나라가 망한 지 오래인 시점에 세워진, 명나라 황제 만력제와 숭정제를 모시는 사당 만동묘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힘의 차이 때문에 드러내놓고 반발을 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나마 소극적인 태도로 반발을 하겠다는 것. 또 하나는 명이 멸망하였으니 이제 중화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 계승하겠다는 소중화 의식으로 설명된다. 외왕내제 형식으로 황제국을 자처했던 베트남도 명 황제에게 제사를 지낸 전례가 있다. 사실상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조선이 강제적으로 사대를 한 나라였으므로 이러한 반발이 나오게 되는 것. 또한 중국은 한반도보다 더 선진적이었기에 이러한 문화적 동경심이 모화사상의 바탕이었다.
극단적인 예시가 1937년의 만동묘 제사. 그야말로 답이 없다. 바로 이 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명나라는 물론이요, 조선마저 망하고, 교조주의자들의 원수이던 청마저 망한 지 25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게다가 이 시점이라면 한국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역사관도 크게 바뀌어 있을 시점이다. 허생전 항목에서 박지원의 허생전과 채만식의 허생전의 역사관을 비교해보자. 이 때 신채호같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어린 학생들을 교육시키며 자주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있었다. 이건 일제에 대한 저항감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변호만으로는 납득이 힘든 부분이 많으며, 오히려 조선시대 지배층이었던 세력의 일부는 이때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있었다는 해석이 더 적절할 것이다.
명나라 황제가 임진왜란에 군대를 보내주어 도와줬다는 인식 자체가 수백년이 지나도록 유자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었다곤 하지만 이 의식은 임진왜란 때 명이 원조를 해 주기도 했지만 반대로 일본군보다 심한 약탈을 해서 조선 백성들을 고통받게 했다는 사실을 배제한 편협한 역사관이기도 하다. 게다가 모문룡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병자호란과 함께 교조화된 모화사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묘호란 때 명군은 도움은커녕 민페만 잔뜩 끼쳤다.[42][43]
아래 글에서도 보듯이 1980년대의 학자 최완수는 조선이 중화라고 여겼던 당대의 인식을 조선중화사상으로 구분지었으며, 이것을 조선후기를 이끌어간 시대정신으로 규정했다. [1].
결론적으로, 분명 처음에는 생존 수단으로만 이용할 뿐이었던 대명 사대가 결국 시대착오적인 모화 사상으로 변질되어 정체성마저 그에 묶여버린 것은 분명 후기 지배층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조선 초기까지 싸잡아서 비판할 만한 요소가 되기는 힘들며, 따라서 "조선=자주의식도 없는 사대의 나라"라는 도식은 일면적인 평가이자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5.4 개화기의 "사대"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을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 이 시기 조선이라는 정체의 업이긴 하다. 스스로가 사대를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이용해 먹어 자승자박을 해버린 게 문제.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전쟁공신들의 역할을 깎아내리고자 명나라 군대의 전공을 드높이고 자국 군대의 공적을 깎아내린 선조의 병크가 크다. 이후 재조지은이라면서 명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은혜가 없었으면 우리는 망했을거야라는 생각이 뿌리내려버렸고 기존의 실리적인 사대 대신 맹목적인 사대가 나타났다. 광해군 때는 신하들이 중국 핑계를 대며 왕의 명에 항거하는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개화기에는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상 스스로 만천하에 자신들의 사대주의를 홍보한 셈. 오히려 청나라에서 조선이 외교와 국방에선 자주권을 누려왔다고 해명했다. 사실 조선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더불어서 "우리를 건들면 중국이 가만있지 않을걸?"하는 나름대로의 경고(?)를 겸해서. 그러나 서양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거문도 사건.
그러나 개화기의 지식인들도 비슷한 '사대'를 강하게 비판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갑신정변에서도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독립협회에서도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우는 등 '사대'에 대해 비판적이다 못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 "개화기 지식인들이 서양인의 관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도 있다. 일각에서는 개화기 지식인들이 조선 스스로의 '사대'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서양인들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배웠을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 지식인들의 지능 수준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물론 당시 지식인들의 지능 수준을 무작정 무시하는 것도 지양해야겠지만 현대에도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 문물이면 무조건 하악거리는 사람들이 상류층이나 지식인들 사이에도 상당히 존재함을 생각하면 당시라고 그런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당장 일본만 해도 비록 논란은 많지만 지식인이라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어떤 태도와 사상을 보였는지 생각해보자.
물론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심지어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하자는 주장까지 하면서 더 강하게 속박한 기간이 있었으므로 그 영향도 있었겠지만, 개화기 지식인들이 '사대'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갑신정변 이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므로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라가 망하기 전 각국에 열강들에게 이권을 내주다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 역시 두고두고 까여야 할 대목이 아닐수 없다.
개화기의 조선에 대한 옹호론에서 그 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정말 국가를 바로 세울 능력자들이 한 가운데 뭉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끌 정도로 초월적으로 능력있는 정치가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저 평범하게 능력있는 고종, 명성황후에게는 너무 거대한 시련이었다는 것. 쇄국이니 뭐니 해도 데지마에서 수백년간 유럽과 교류한 일본과 기껏헤야 하멜, 벨테브레이, 러시아 군인 몇명과 조우한 조선 왕조는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였고 그것은 이미 지도자 몇 명이서 힘낸다고 메꿀 수도 없을 정도의 격차였다.(이전 서술에서 이 부분은 고종에 대한 옹호론은 될 수 있어도 조선에 대한 옹호론은 될 수 없다며 오랫동안 나라의 문을 닫고 사대만을 해 와서 유럽의 문명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였다고 말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사대는 절대 문을 닫아 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 부분은 조선의 소중화주의를 비판해야 옳다.)
솔직히 그 당시 일본을 제외하고 비유럽권 국가 중에 자기네가 잘나서 식민지 안 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에티오피아와 태국 등의 예도 있지만 이들은 그들이 가진 지리적 이점-서로 적대하거나 대립하던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으로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국가를 보존한 것에 가까운 상황이었다.(태국의 경우는 서쪽은 영국, 동쪽은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다.) 심지어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남아메리카의 마푸체 역시 오랫동안 스페인에 맞서 독립을 지켜냈다며 조선을 까는 경우도 있지만 스페인과 남아메리카는 거리가 조선과 일본의 거리보다 훨씬 더 먼 데다 당시는 아직 서구권이 다른 지역들을 압도하기 전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마푸체도 결국 19세기에 들어서는 그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정복당해 거의 식민지인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으며 현재도 그저 소수민족으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는 상황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또 식민지가 된 나라들도 마이소르 왕국처럼 치열한 항쟁 끝에 점령당한 경우가 많고, 조선처럼 우리의 독립을 유지시켜 달라고 외국에 편지를 보내는 게 '저항'의 전부였던 경우는 드물다지만 조선도 나름대로 저항은 했다. 물론 그 저항이 국가나 왕조 차원의 저항이라기보단 민중의 저항에 가깝긴 했지만 일본 역시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삼기 전에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의병 세력을 쓸어버리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다만 이 부분은 왕조가 '사대'에 익숙해져서 독립과 외교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선 내부의 갈등이 심해져서 대외적인 항쟁이 어려웠다거나 하는 등등의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기는 하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형식적으로 조선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고 그것을 근거로 근대에 속국이라고 주장되었지만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고 외교와 내정에 대한 중국의 간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주국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모든 시기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선도 명나라 초기나 청나라 초기에는 거의 뜯기다시피 조공을 바쳐야 했다. 명과 청이 안정되면서 점차 조공은 오히려 조공을 '바치는' 쪽이 이익인 형태로 변해가기는 했지만, 그러한 변화는 명과 청의 국제정책 변화로 인한 것이었지 조선이 힘이 강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19세기에는 청이 간섭을 심하게 해서 그 이전보다 심하게 예속될 뻔한 시기였다. 이 때는 내정간섭까지 받는 완전 속국이 될 뻔했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대'는 이 정도의 예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는 청나라가 서구의 식민지 개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열강들이 눈여겨보는 주변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도 이제 식민지있는 제국이라고 해야될텐데 마침 조공국들이 있네?'라는 일종의 왜곡 시도였다.
그런데 청의 예속이 절정을 달리던 1894년조차 청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개혁에 공동착수하자는 제의를 하자 조선의 개혁은 조선인들의 몫인데 헛소리 말라고 거부했고 이홍장은 선교사들이 당신네 속국인 조선의 카톨릭 합법화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자 조선은 자주적으로 정치를 해왔다고 못한다고 대답했다면서 이 때도 예속이 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항목의 두 번째 문단을 다시 읽어보자. 조선이 대외적으로 '사대'를 공표한 것은 순전히 개항 요구를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고 하면서 이홍장의 대답은 전적으로 사실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편파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5.5 군사력에 집중하지 않은 이유
이전 왕조들이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나당전쟁, 여요전쟁 등 극적인 승리를 몇 번씩 경험했던 것에 비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한 듯 한 모습 때문에 만날 앉아서 글만 읽고 군사력은 안 기른 나라라는 인식도 아주 흔하다. 심지어 한반도 왕조중 최약체였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군사력에서 조선은 과도하게 편파당한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비격진천뢰, 화차 등의 무기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을 생각해보면 조선이 결코 군사력에 소홀히 한 것만은 아니다. 분명 화포 기술도 수준급이었고, 심심하면 여진족들을 털어먹던 초기에는 백병전을 중시하여 대규모 근접 보병과 중기병 전력도 착실히 갖추어 놓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 많았다.조선 전기 보병의 오위 병종 중 하나인 팽배수를 생각하면 답 나온다. 조선 기병대는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창기병과 궁기병 5:5 비율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세조 즉위 이후 무관의 인사고과가 활쏘기에 치우치면서 기교를 배우기 어려운 창기병은 급속히 도퇴된다.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기병대가 왜군에게 전멸당한 이유가 바로 조선 기병대 대부분이 궁기병이 되어 근접전과 충격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군사력은 결국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비용이고,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낭비가 되어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삼국시대와 달리 전쟁 수행으로 생기는 전리품을 통해 군사력을 유지하는 방법도, 마땅히 정복할 곳이 없이[44] 그냥 국방만을 위해 군사를 유지했던 조선에게는 불가능했기에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필요한 만큼만을 투자하는 균형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전기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군사력의 필요성은 정말 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에 중국만 해도 단일 왕조로 통일되어 안정되었을 때 군사력이 갈수록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도 막 고려에서 왕조가 교체된 초창기에는 요동을 정벌해야한다는 의견이 있는 등, 상당히 군사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애초에 조선 자체가 무관이었던 이성계가 쿠데타를 통해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 뒤 기반을 건설한 나라니만큼, 조선의 상층부는 그 누구보다도 칼 쥔 무관세력의 힘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45] 더욱이 왕자의 난으로 큰 혼란을 겪은 후에는 군사력(특히 사병)의 과도한 증가를 억제하고 남는 여력을 문치에 쓰게 된 것이 조선이다.[46] 또, 전반기 조선은 함경도 일대 및 남쪽 해안 지역 등 일부 위험한 국경지역을 제외하면 외적인 방위 부담이 상장히 적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 대비가 너무 열악했다고 디스 당하는데, 당시 선조 정권도 일본의 침공 예정을 파악은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예상한 것 이상의 대규모였을 뿐. 왜란 이전 최대 규모의 왜구였던 고려말 왜구들을 가정한다 해도 수 만여 명 정도이지 임진왜란처럼 20만에 육박하는 규모는 아니었다. 명나라 북로남왜의 화를 기준으로 삼아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조선은 세종 때 이종무의 대마도정벌 이후에는 왜변도 비교적 드물었다.[48]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규모는 그 이전의 경험으로 예측한 것의 몇 배에 달했던 것. 거기다 진포 해전, 황산 대첩과 대마도 원정 이후 왜구들은 한반도보다는 중국 해안선을 주요 타겟으로 삼았고[49] 그나마도 무로마치 막부의 안정화로 더더욱 감소하였기에 조선이 체감하는 일본의 위협은 크게 줄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공언한 건 아직 일본 내 정리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50] 이런 상황에서 히데요시가 그런 미친 짓을 할거라고 예측해낸다면 그 사람은 제갈량에 준하는 인재로 평가 받았을 것이다. 이율곡이 예상했다. 그 이율곡도 일본보다는 여진족에 대해 대비를 강화하자는 걸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설이 있다.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할 것이다'라는 정보를 소련에 넘겼을 때 당시 소련 서기장 스탈린이 현실적으로 독일은 이미 영국과 전쟁 중이기에 그런 미친짓은 벌이지 않을 것이라 보고 많이 대비하지 않았다가 독소전쟁이 터진 것처럼 이런 사례는 역사속에 많다. 어쨌든 미친 짓은 맞는지라 결국 히세요시 가문의 파멸을 불러오긴 했다.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인 조선 후기에는 군사력 증대와 관련된 실록 기사가 급증하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조선시대 군사 시설 유적들은 대부분 이때 완비된 것이다. 대표적인게 남한산성(광해군 대에 축조, 인조 대에 대대적으로 보강), 북한산성(숙종 때 축조), 강화도 일대의 수많은 포대들[51]이 있다.
또한 인조~숙종 시절 이어진 5군영의 설치는 조선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최대의 군영이었던 훈련도감의 경우[52] 1년에 5~8만석 정도의 경비가 들어갈 때도 있었는데, 호조의 재정규모가 11~12만석 내외라는 점을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규모. 물론 조선은 재정의 근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국가고[53] 호조의 재정은 조선 후기 전체 국가재정의 약 1/5 정도에 불과했으나, 어찌되었든 이러한 군사비는 무시할 수 없는 국가 재정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비변사로 대표되는 군부의 세력 강화도 부담인 것은 마찬가지.[54]
삼정의 문란의 군포 부분도 이러한 군사비의 증가가 어느정도 한몫을 했다. 물론 삼정의 문란이 국가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 된 것은 세도정치 때문이지만.
군사력은 또한 내부 치안도 담당한다. 그런데 조선은 이 점에 있어서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무뢰배, 검계 등 폭력집단도 있었고, 도적떼가 사라졌던 적도 없는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이런 집단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은 근대 이전엔 힘들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실록상 나타나는 이런 집단들은 그 규모가 잘해야 수십여 명 선을 넘지 않는데, 이는 인구 규모와 면적, 산이 많은 한반도 지형을 고려할때 상당히 안정된 편이다. 대신 그 자리를 호환이 차지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55][56]
도적떼, 해적떼의 존재에 대해 조선을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비교하여 좋지 못했느니 흉흉했다느니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일 것이다. 시대적인 평균치를 놓고 따진다면 조선은 한반도 역대 왕조 중, 그리고 동 시기의 동서양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평화로웠던 국가가 맞을 것이다. 당장 신라는 장보고가 하도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리다 보니 당에서 벼슬하다 돌아올 정도고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초창기부터 왜구의 대규모 공격을 받는다. 중국 대륙과 맞닿은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랑 신라에 끼인 백제도 뭐... 고려는 거란, 몽골, 홍건적, 왜구 등이 정말 미친 듯이 날뛰었다.
애초에 "조선이 500년 내내 왜구한테 시달렸다"와 같은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세종 이후에는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리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세종시대부터 임진왜란까지 대략 160년 정도인데 그 기간동안 일어난 왜변은 고작 3~4번이 전부다. 조선시대의 왜구침입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 규모나 빈도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 측면에서 보면 고려 말 침입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조선시대에도 왜구침입은 있었으나 그 사이에 보통 길게는 100년 짧게는 2~30년의 간격이 있었지만[57] 고려 말 왜구침입은 무려 40년 내내 거의 1년의 소강기조차도 거의 없었다. 일단 늦어도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왜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왜구의 침입이 없었다.
그 외 무관 천시 하면 조선시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으나, 정작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무관에 대한 대우가 엄청나게 좋아진 편이었다. 과거제도에서 무과가 안정적으로 정착했을 뿐더러, 무관도 급은 좀 떨어지만 문관처럼 집권층 대우를 받게 되었다. 무관이 문관을 위해 수박놀이나 하고, 문관이 무관의 수염을 불태웠는데도 처벌도 안한 나머지 쿠데타가 벌어져서 착실하게 나라를 말아먹은 일이 벌어지던 고려시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대우가 좋아진 셈.
그렇지만 정작 외침을 받았을 때는 좋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여서 조선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시궁창이다. 막상 적이 쳐들어 왔을 때 너무 무난하게 나라가 털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58][59] 대중에게 무능하다는 편견을 심어주었다. 사실 조선군이 당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고 이전 왕조인 고구려나 고려도 강력한 적군에 발린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외침이 있을 때마다 조선 조정이 벌인 병크들이 워낙 많다보니 이상할 정도로 그때마다 정부 스스로 자국 군대를 병신으로 만들어 두는 사례가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1. 왜란
편견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열심히 했다. 하지만 몽진 과정에서 보여준 선조의 무책임한 행태[60]는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래도 여기까지였으면 이순신 장군을 발탁한 공이 있기 때문에 선조가 욕을 덜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되지도 않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만들어 칠천량 해전에서 막강한 수군을 완전히 말아먹은 뒤 불멸의 까임권을 얻었다[61]. 그리고 전후처리에 있어서 자기나라 장수들의 공을 원균 빼고 다 깎아내리고 명나라 지원군의 공을 더 높이면서[62] 조선 후기 교조적 명나라 숭배에 대한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병크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2. 호란
총체적 난국의 시대.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펼치며 최대한 침략을 피하려고 했지만-다만 요즘 학계에서는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라는 건 감안하자-신하들은 호응하지 않았고 정작 본인도 망국적 궁궐병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신하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이괄의 난이 터졌고 조선의 북쪽 국경은 자동문이 되었다.[63] 여기에 원균과 자웅을 겨루는 김경징의 활약으로 천연 요새인 강화도도 순식간에 함락.[64] 왜란 당시의 교훈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를 이 한심한 전쟁 수행 능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속터지게 만든다.(다만 당시 조선이 호란을 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물론 제대로 대비나 경계를 하지 않고 소홀히 한 건 까여도 할 말이 없겠지만)
또한, 모문룡에게 벌벌 기고[65], 나라가 망해도 명에 대한 은혜는 갚아야 한다는 논리가 팽배[66]해서[67] 조선=사대주의라는 편견을 고정시키는 등등 온갖 추태를 보이면서, 조선에 대한 인식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데 가장 크게 일조한 시기. 사실 병자호란 때도 광교산 전투, 김화 전투같이 승리한 전투도 있지만 대중들에게 묻혔다. 안습.
3. 개화기~대한제국
국가 막장 테크를 착실하게 밟고 있어 조선의 군대가 유명무실해진 시기. 세도정치기의 막장운영,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고종과 명성왕후의 낭비로 가뜩이나 빈약한 나라의 재정은 박살나서 광해군: 너도?, 군대의 근대화는커녕 구식 군대조차 제대로 운용할 돈이 없었다. 여기에 개항 이후로 벌어지는 삽질의 향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국토 조공 선조: 지원군 요청도 잘 해야하는 법이지.,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68] 인조: 나 때는 그래도 뻔히 질 줄 알면서도 남의 나라를 위해 결사항쟁하는 기상이라도 있었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굴욕까지 더해져 조선=한반도 역대 왕조 중 최약체라는 편견을 형성해 버렸다.
여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군이 폄하된 점도 없잖아 있다. 반미 감정이 팽배했을 때 주한미군이나 전작권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 자주국방에 대한 열망이 고조된 적이 있었고 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 호란 당시 모문룡, 청일전쟁의 외세 개입 같은 것이 안 좋은 쪽으로 부각되기도 했다.[69]
결론을 말하자면 조선군은 전반적으로 중박 이상은 하는 편이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아 역량만큼 활약을 못했던 비운의 군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상황이 처참한 말기의 조선도 군사 부문에 나름 열성적으로 투자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의 흐름이 너무 거칠었다. 중국엔 혁명이 일어나고 군벌들이 궐기했으며, 일본이 적극적인 개화를 바탕으로 급부상하고 서구 열강이 동양 쪽으로 야금야금 세를 확대하던 시기였다. 최후의 한족 통일왕조였던 명나라가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일본도 아직 아오안이던 초중기까지만해도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분명 괜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년간의 평화기를 지내고 양란을 거치며 사회 모순이 쌓이고 쌓이면서 조선은 이전의 건강함을 잃어버렸고,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에 마수를 뻗쳤을 때 상대적으로 국토도 좁고, 인구도 적고[70], 열강의 환심을 살 만한 값비싼 자원이나 전략적 가치도 없는 나라로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만 서양 열강들은 계산적으로 자기들 이득되는 것만 도와줬다. 양심적인 서양'인'들이면 모를까.
- ↑ 조선시대는 세종대왕으로 요약이 가능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세종때 만들어진 제도를 조선 후기까지 죽어라고 우려먹었다(…). 나중에 이것 저것 제도가 개정되고 추가된 것은 기존의 제도로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헬게이트가 되어버려서다(…).
역시 깨우친 임금.단, 인권과 같은 문제는 유교 및 성리학의 가르침에 경도되었던 정도전과 같은 집권층의 기본 사상적 경향이 가장 중요했으며, 세종대왕에 이르러 개국 초기의 어수선함을 극복하고 제반 제도를 안정화시킨 것이다. - ↑ 실제 총통위가 폐지되고 궁시 위주의 군제로
개악개편된 시기는 세조 치세이나 그러나 군사력 약화가 부각되기 시작하는 시기는 성종대부터다. - ↑ 일각에서는 최초의 비행기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작동 원리를 보면 비행기가 아니라 행글라이더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 ↑ 다만 이것은 일본이 서서히 국가 막장 테크를 타던 것도 한몫을 했다.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을 조달하려다가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지경이니,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접대하는 수준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나올 판이었다. 당장 조선 통신사가 중단된지 불과 50년만에 일본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는 지를 보자. 그리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된 지 불과 12년만에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사무라이가 에도 막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죽는 사태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되기 약 30년 전인 1783년에는 일본사 최악의 대기근 사건인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사신에게 접대하는 수준을 호화롭게 한다면 나라 재정이 버틸 수가 없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 ↑ 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 중국보다 15년 늦었다. 다만 세종 시대 때 이순지가 막연하게 지동설을 주장한 적은 있었다.
- ↑ 다만, 박연의 성품이 훌륭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박연은 음악적인 재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실록에 남겨진 그의 인성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재능에 비해 인성이 아주 바르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문제. 그는 궁의 악공들을 데리고 사사롭게 영업 행위를 하는가 하면, 누이가 죽은 뒤에 바쁘다는 핑계로 유산만 챙겨서 얼른 돌아오는 등의 행동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즉, 저 발언은 성격이 개차반인 박연조차도 장애인들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을 정도로 사회통념상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좋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 대표적인 예시가 제임스 팔레. 하지만 제임스 팔레는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규정했지 고대 사회라고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팔레는 노예제 사회가 고대 사회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고, 시민혁명 이전 남부 미국도 노예제 사회로 규정한다. 팔레교수의 조선 노예제 사회설
- ↑ 더 나아갈것도 없이 사약 역시 신체발부 수지부모 사상에서 나온 독특한 사형제도라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핑계에 불과하고 실상은 "천한 망나니 따위가 고귀한 양반님의 몸에 손대는게 말이나 되냐?"가 근본적인 이유다. 결국 앞에서 말한 평등한 인간이라는 결론도 탁상공론에 불과한 실속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한 셈. 애초에 인간평등 사상 자체도 그 뿌리는 고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오래된 사상이다. 조선만이 유일하고 특별했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조선의 성리학적 인간 평등은 세계사에 흔히 있었던 탁상공론 중 하나일 뿐이다.
- ↑ 노비를 가축과 같이 생구(生口)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가축과 같은 취급을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가축이나 노비만이 아니라 같은 집에 살고 있으나 가족이 아닌 사람, 예컨대 식객 등도 생구라고 불렀다.
오히려 가축을 사람처럼 여겼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실제로 왕이 우유로 만든 타락죽을 즐겨 먹자 대간들이 어찌 불쌍한 송아지의 젖을 훔쳐 드시옵나이까!라며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대간이 조금 지나치게 나간 면도 있지만. - ↑ 즉, 남편에게도 출산 휴가를 준 것이다.
- ↑ 박상길이란 이름의 백정에게 양반 둘이 고기 한 근씩을 사러 왔는데, 똑같이 한 근을 주문했는데도 두 양반이 받은 고기의 양이 다른 것이다. 적게 받은 양반이 어이가 없어서 따졌더니, 박상길 曰 "크게 자른 고기는 '박 서방'이 자른 고기고, 작게 자른 고기는 '상길이 놈'이 자른 고기입죠." 큰 고기를 받은 양반은 아무리 천한 백정이어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처자식도 있는 입장이라 예의를 갖춰 대했는데, 작은 고기를 받은 양반은 새파랗게 어린 양반이 "상길아 고기 한 근 줘라."라면서 하대를 했다는 것이다
- ↑ 그러나 이런 식의 지배층의 대한 희화화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므로 이런 몇몇 풍자의 사례로 조선의 인권을 평등 사회였다, 혹은 하층민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충분하였다는 식으로 비약하는건 근거가 매우 부족한 이야기다.
- ↑ 조선 여성의 사회활동이 위축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가 되어서다.
- ↑ 박취문 부북일기, 동침녀 상황 정리표
- ↑ [2] 참조.
- ↑ 앞의 두 명과는 달리 조선 후기 사람이다!
- ↑ 양반 이상은 남자는 한문을 사용했지만 여성은 언문을 사용했다. 여성들도 일단 한문은 아니더라도 문자를 배우기는 했다는 말이 된다.
- ↑ 근대 이후의 전반적인 세계 여성 인권은 "세계 인권 사상사" 참고.
- ↑ 6차 교육과정 이후의 학생들이 정말 수능과 교과서 때문에 조선사를 부정적으로 인지하는 지는 의문이다. 교과서는 식민사학 비판과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을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특히 수능에서는 한국사의 장점에 대한 출제 비율이 매우 높다. 그래서 정답을 맞추려면 조선의 장점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한다. 이를테면 조선의 붕당정치를 당파성론으로 보는 것은 오답이며 영정조기의 발전양상을 제대로 고르는 것은 정답이다. 왜 환빠들이 자학사관 운운하면 현대 한국 학계가 식민사관 탈피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며 비웃는지 생각해보자. 다만 정작 대다수의 환빠들에게 소위 "학계를 잠식한 자학사관"이란 자기들 관점에선 중국에게 빌빌대다 망한 조선에게만은 해당사항 없는 일이니 핀트가 좀 안맞긴 하다.
- ↑ 본문에서도 관련 내용이 많이 보인다.
- ↑ 심지어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찬양으로 인한 제국주의도 목격된다.
- ↑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조선도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는 고구려, 발해 다음으로 넓은 편이었다. 고려가 요동을 점령했던 적도 있긴 했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너무 짧았으니 제외.
- ↑ 다만 양란 때가 고인 물을 뒤집고 나라가 바뀔 시기였는데 그 상태 그대로 500년이나 지속돼서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 입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조선 동시대 중국과 일본은 양란에 가까운 시기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사회가 크게 변화하였다. 그래도 양란 이후 대동법이 실시되고 몰락 양반과 부유한 상민이 증가하는 등 발전과 변화가 없진 않았다.
- ↑ 그나마 한 세대 뒤인 동학농민운동 때처럼 수령을 죽이지 않고 다른 고을로 번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중앙통제권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양란을 마주한 조선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이 두 전쟁을 거치고도 망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 ↑ 물론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했던 19세기 당시 여권이 높았던 것은 아니었듯이 여왕이 있었다고 여권이 높았다고 볼 수는 없다. 여성의 관작 상속권에 대한 일례 정도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여왕 즉위는 골품제의 특수성에 기반하지 여성 인권과는 아무련 상관이 없다.
- ↑ 조선도 고려의 기풍이 아직 적지 않게 남아있었던 초기까지는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가 후기에 들어서 불가능해졌다.
- ↑ 이것이 성리학에 대한 한국의 여성들의 대체적인 인식이다.
- ↑ 다만 이에 대한 반박으로 어디까지나 조선에 비해서 남녀평등적 성격이 강했던 것이지 고려도 엄연히 남성 중심 국가였고 여자는 관직에 진출이 불가능했다거나 당대에도 조선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당시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였으며 오히려 동아시아에서는 전족이 있는 중국보다는 조선이 그나마 여권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 다만 외왕내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른 왕조들에 비해 조선의 사대주의 성향이 강해지긴 했다.
- ↑ 간혹 처녀조공을 원나라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실제로는 명나라 시대에도 여러번 처녀 조공이 요구 및 이행되었으며 이는 청나라 시대까지도 계속되었다. 위안부는 조선이 망한, 일제강점기 시대에 벌어진 일이니 여기에 비유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 ↑ 태조 이래로 원단이라는 이름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지내왔지만 세조 대부터 원구단으로 고치고 대놓고 지냈다.
- ↑ 애시당초 ~조, ~종 등의 묘호는 오로지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었다. 문무왕이 태종 무열왕에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가 당나라에서 한 소리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고(물론 신라는 묘호 못 고친다고 답했다.), 조선시대 성종 역시 "우리는 제후국인데 묘호를 붙이는 것은 참람한 일이다."라고 발빼던 적이 있었다.
- ↑ 유목에 근간한 원나라 시기 고려가 바치는 조공은 한족 국가에 바치는 조공에 비해 가혹했으며, 일본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근간도 유목왕조였기 때문에 호란 이후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전까지는 조선에게 막대한 공물을 뜯어갔으며 이것도 조선으로는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 ↑ 사실 청의 베이징 접수 이후 남명으로 어느 정도 가능할 뻔 했지만 남명이 망했다.
- ↑ 간혹 처녀조공을 원나라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실제로는 명나라 시대에도 여러번 처녀 조공이 요구 및 이행되었으며 이는 청나라 시대까지도 계속되었다. 위안부는 조선이 망한 후의 일이다.
- ↑ 이때 사람들은 명에 공녀로 가기 싫어서 심사장에서 미친 척에 병신 흉내에 난리가 아니였다. 이를 보고 사신이 '원나라 때 고려에서는 서로 여자를 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새는 왜 이럼?'이라고 한탄하는 기록도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려 시대때 죄다 원나라로 가길 원한 것은 아니었고, 고려 시대에 비해 조선시대 때 상대적으로 더 가기 싫어했을 뿐, 고려 시대 때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강제로 낮선 타지에 끌려간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 ↑ 순장이라는 악습은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없어졌다. 이러한 악습은 중국 내에서도 사라져야 할 풍습 취급을 받았지만 유목민족들은 이를 꾸준히 유지했고, 중국의 황제가 죽었을 때 함께 순장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이민족들이 종종 나타났다. 요나라 같은 경우에는 순장의 여부가 주요 정쟁의 소재가 될 정도다. 대표적으로 황후보고 같이 황제 가는 길에 따라가라는 신하들과 신하들이 먼저 순장되라는 황후의 대립은 의외로 빈번했다. 속내는 정치적 투쟁이었겠지만 여진인이 주류인 금나라는 좀 덜했지만, 몽골인이 세운 나라인 원나라 전후로 대대적인 순장이 다시 나타났다가 명나라 초중기에나 없어졌다.
- ↑ 일례로 조선은 여진이 강성해질 기미가 보이면 명나라의 화해 주선도 거진 씹고 예방 전쟁을 행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명의 경제적 손실과 조선의 심각한 전국토 황폐화로 명의 견제와 조선의 예방 전쟁을 받지 않아 누르하치가 후금을 크게 키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누르하치 하의 떠오르는 후금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후대의 청나라로 발전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이 여진을 상대로 행하던 예방 전쟁의 수준은 말이 예방 전쟁이지 정벌이라고 부를 정도로 장난이 아니었다(…).
- ↑ 고려도 예방 전쟁이라면 조선보다는 못했지만 꽤 하는 수준이었다. 예로 박위의 대마도 정벌이라던가.
- ↑ 세조 시절에 명 사신의 요구를 함경도 관찰사가 알아서 무시하던 일도 있었다. 앞서 말한 원구단 제사나 명의 화해 주선을 씹었다는 사례 중 하나도 세조 시기. 후대의 교조적 사대주의나 현대의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으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 다만 단순히 하늘에 대한 제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소격서를 유교가 아닌 도교식 제사라며 폐지하자고 주장을 한 조광조 같은 인물도 있던 것을 보면 이런 교조적인 성리학 사상이 이전에도 이전에도 없던 건 아닌 듯 하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중종을 제후왕으로 깎아내리는 사대주의적 발언까지 했을 정도로 조광조는 교조적이었다. 물론 조광조는 지나친 교조주의와 이 발언을 포함하여 왕에게 무례한 발언으로 결국 중종에게 사사된다.
- ↑ 비단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대의 조선 인근의 명나라 잔당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는데, 조선인 양민들을 걸핏하면 죽여대고 그 목을 청군이라 속여 조정에 보내기도 하고 수시로 문제를 일으켜 보다 못한 청나라 군대가 이들을 쫓아내줬을 정도였다.
- ↑ 다만 조선의 보급 실패로 인해 약탈이 심했다 뿐이지 확실히 도움은 크게 되었다. 사실상 대신 전쟁을 치뤄주는 격이니. 단편적인 시각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약탈한게 잘했다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도와준답시고 왔으면서 당시 일본군에게 당했던 것 못지않게 약탈을 해댔으니 당대 조선인들이 반감을 가진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 ↑ 중국 대륙은 삼국시대와 같은 분열기가 아니라 명이라는 단일 왕조가 자리잡고 있었고 여진의 만주 고원은 정복해봤자 농업이 어려우며 이것은 쓰시마도 마찬가지이다. 그 너머(일본 열도)에는 비옥한 토지가 있다지만 거기까지 정복하기 위해 따로 더 많은 군사를 파견하고 관리와 백성을 이주시키는 것은 장기적으로 봐도 무리수다. 왜 제갈량이 남만을 굳이 칠종칠금까지 해가면서 정복한 게 아니라 복속을 시켰는지,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긴 뒤 한사군을 설치하여 한반도 유민들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는지 생각해보자.
- ↑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도 군사력을 중심으로 정변을 일으켜 세워진 나라는 초반에 군권을 확실히 제약해 둘 필요를 겪었다.
- ↑ 비슷하게 군사력을 버리고 용병으로 대체한 고대의 상업 국가들은 문치 대신 상업에 힘을 투자한 차이점이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이나 고대 유명 상업 국가들이나 군사력을 버린 이유는 쿠데타 위험 때문이다. 다만, 상업 국가들은 쇼미더머니의 힘으로 용병을 고용하면 된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유교적 관점에서 1:1의 대등한 관점으로 용병 계약을 맺는 건 상상도 못할 일. 무엇보다 그 용병들한테 멸망한 나라가 바로 북송이다!
- ↑ 국경지역에는 여진족의 잦은 출몰로 대비가 잘 돼 있었다. 니탕개의 난 때 여진족이 신립에게 버로우 탄 걸 보면 알 수 있다.
- ↑ 1555년 명종 치세 당시 일어난 을묘왜변 당시 왜구들은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을 깨부수며 승승장구하다가 막상 육상에 올라오자 조선 육군의 화살세례를 받고 순식간에 퇴갤당했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정이 수군보다 육군을 신뢰했던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 대마도 원정이 조선측 피해만 컸고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사비율 자체로만 따지면 조선 측이 의외의 피해를 입은 격이긴 하나 대마도 원정 이후 왜구가 직접적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사례는 성종 때까지 크게 감소한다. 효과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수준.
- ↑ 국내 정세가 안정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외부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히 미친 짓이다. 내부가 불안하니 일본에서도 히데요시가 죽기가 무섭게 정권이 바뀌었고 일본 내부의 국력을 집중시키지 못해 조선도 전쟁 초기에나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밀렸지 이후 중후반에는 내부 정비를 통해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즉, 그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전쟁을 벌인 히데요시의 판단은 완벽한 삽질이었다는 것. 사실 히데요시의 전쟁 후반의 명령은 일본 내부의 학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정도니 이때부터 이미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 인조대부터 꾸준히 축조되어 현종조에 지금의 수준까지 올라왔다.
- ↑ 북벌론이 한창일 때는 훈련도감 5천+훈련별대 1만 3천까지 증가했었다.
- ↑ 근대적 재정의 주요 개념 중 하나가 '재정의 일원화'이다. 반대로 말해 근대 이전엔 재정부처 한곳에서 국가의 모든 재정을 총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근대 이전 유럽도 그렇다.
- ↑ 사실 비변사는 군부가 성장했다기 보다는 그냥 세도가문이 비변사를 이용해 왕권과 의정부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 ↑ 사실 이것도 군사력이나 무기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갈수록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간이 호랑이의 영역이었던 곳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증가한 경우이다. 거기다 호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살생을 제한하는 불교를 기반으로 하는 고려에 비해 거기에 대한 터부같은 것이 없어졌고 오히려 인간 중심적이었던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에서는 호랑이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호랑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된 것이다.
- ↑ 사실 호환이 많았던 강원도에는 호랑이 사냥을 위해서 훈련도감 포수가 상주하기도 했었다.
- ↑ 앞서 말했듯이 세종때부터 60년간 이렇다할 왜구침입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16세기 왜변들도 대부분 각각 2~30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 ↑ 임진왜란의 경우 하도 빨리 처발려서 명나라에선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기만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론 이순신 휘하의 수군들과 의병들이 맹활약하고 관군들도 점점 반격태세를 갖추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기 나라의 역량을 못 믿은
암군선조는 요동으로 튀기 위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징징댔다. 물론 초반에 조선군이 털린건 100년간 전국이었던 일본과 달리 조선이 200년간 평화로웠다는걸 감안해야한다. 병자호란 때는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지 못해 왕이 강화도로 도망도 제대로 못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차선책으로 택한 게 남한산성인데, 이것도 최명길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가서 시간을 벌었다. 물론 병자호란때도 역시 사르후 전투, 이괄의 난으로 정예군이 날아간 상황이라는걸 감안해야 한다. - ↑ 다만, 초반 충격이 먹힌 건 개전 2~3개월이고, 이후엔 명군도 참전하고 조선군도 치열하게 싸워서 1년만에 일본군의 약 40%를 괴멸시켰다.게다가 의병들은 정규군으로 편입되어 전투를 지속했다. 하지만 안습하게도 이런 선방도 전쟁 후반기에 육전의 주도권이 명군에게 넘어가고, 조선군이 명군의 보급 셔틀로 전락하면서 대중에게 많이 무시당한다.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왕과 대신들이 명 장수들에게 온갖 아양을 떨고,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강화회담을 명과 일본이 하는 모습은
40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후손들로서는 보기 유쾌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그래도 200년간 대규모 전쟁없이 소규모 여진족이나 왜구들과 비정규전만 해본 조선이 명나라의 지원이 있었다지만 100년간의 전국을 겪은 일본과 싸워서 거의 절반 정도를 괴멸시키는 전과를 낸 것도 대단하다.(명군이 주력이라면서?) 그리고 명군이 주력이 된 정유재란 때도 조선군이 활약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 ↑ 몽진 자체는 현실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며 고구려, 고려 때도 자주 몽진을 했다. 문제는 선조가 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튀려고 했다는 것. 이건 도저히 실드를 쳐주고 싶어도 쳐줄 수가 없다. 신하들이 기를 쓰고 반대한 것도 이유가 있다.
- ↑ 다행히 충무공께서 희대의 사기캐이신 덕분에 정유재란 당시 육군은 명군의 보급셔틀로 전락한 와중에도 이순신이 수습한 수군만은 주도권을 쥐고 빛나는 활약을 했다. 성질 더럽다는 진린을 다루는 충무공의 세련된 용인술을 보면 이분이 진정으로 완전체임을 알 수 있다.
- ↑ 단, 실제로도 명군의 활약은 꽤 컸다. 일부 군대의 문란한 기강과 낙후된 조선의 경제체제에 의한 보급의 어려움이 계기가 되어 극심한 약탈로 악명을 떨쳤지만 만력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기네 나라에서 고려황제라며 욕 먹을 정도로 성심성의껏 조선을 지원했고, 명군은 정유재란 때 11만에 달하는 규모로 투입되며 육상의 주전력으로 활약한다. 당시 상황을 보면 내란과 후금군, 몽골군의 침략으로 어떻게든 발을 빼고 싶은 명군을 조선 조정이 바지를 붙잡고 매달리는 형국이다.
- ↑ 당시 이괄이 지휘하던 1만 7000명의 기병대가 조선 최정예 부대였기 때문이다.
- ↑ 여진족 따위가 강화해협을 건널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문제는 당시 청군에는 항복한 명나라의 수군도 있었다는 것…….
- ↑ 조선 조정이 모문룡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정묘호란 이후 명과의 국교가 일시 중단되자 군대를 보내 가도에 있던 명군을 전멸시킨다. 생존자 왈 그냥 후금에게 털릴 게 나았을 것…….
- ↑ 꼭 그렇지도 않았다. 명나라 유민들을 받아준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인구가 줄어서고.
- ↑ 다만 이 재조지은은 광해군 때 사르후 전투에 조선군 조총병 부대를 파견하면서 끝난다. 문제는 이 사르후 전투가 말그대로 대패라서 당시 조선 팔도에서 이름난 명포수들이 만주에서 녹아내렸다. 이는 조선의 국방력 약화에 원인이 된다.
- ↑ 외세의 침투에 대항하여 동학군이나 의병들이 궐기하긴 했지만 결과는 미약했고, 이들을 진압한 주체는 정부가 보낸 관군이었다. 정권이 붕괴되는 것이 두려워 정부 주도로 무력적 대응을 시도한 적은 없다.
- ↑ 박시백 화백도 수작이라 평가받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 편에서 이런 우를 범했다.
- ↑ 1910년 기준으로 조선의 인구는 1700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