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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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미국
민족한족
이름李小龍(리샤오룽, 이소룡), Bruce Lee(브루스 리)
본명李振藩(리전판, 이진번)
생몰년1940년 11월 27일~1973년 7월 20일
신체170cm, 62kg,O형
성좌,십이지사수자리,용띠
학력워싱턴 대학교 연극학부[1] 중퇴[2]
부모아버지: 이해천(李海泉)
어머니: 하애유(何愛瑜)
배우자린다 에머리(Linda Emery)
자녀아들 브랜든 리(이국호李國豪)
딸 섀넌 리(이향응李香凝)[3]
직업배우,무도가
무술 스타일영춘권, 절권도

파일:/image/mtentertain/2008/11/30/2008113013345346809 1.jpg
영화계 변방이던 70년대 홍콩을 세계 액션영화판의 메카로 만든 전설적인 액션배우
TIME이 선정한 20세기 100大 아이콘 중 한 명

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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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스크림 쿠로오비 스타 디스트로이어 아니, 나초가 더 정확할지도

1.1 어린 시절

이소룡은 중국계 미국인 영화배우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으며,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4]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5]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

아버지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6]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이소룡이란 예명은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이해천이라면 진번은 소룡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약해서,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洪家拳)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詠春拳)을 엽문에게 배웠으며[7], 그 외 같은 남권계열로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이었던 채리불권(蔡李佛拳)을 익혔다. 원래 남권 유파들은 예부터 가족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풍속이 있던 분위기라서, 영춘권과 가까웠던 채리불권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이소룡의 하단 공격기술들은 영춘권이 아니라 채리불권의 초식에 가깝다는 말도 있었다.

다만 쿵푸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무술을 깊이,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오래한 무술은 영춘권 정도였다고 한다. 근시라서 접근전에 유용한 무술을 찾다보니 영춘권을 택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막무가내에 가까웠고, 중고등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불량아로,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질은 더욱 심해졌고,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8] 그래서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단돈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 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李秋鳳, Agnes Lee)에게 보냈다고 한다.[9] 그런데 이소룡의 어머니는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의 본처가 아닌, 첩 같은 것이었다가 이후 본처가 되었다는 도 있는데, 그가 불량아가 된 것엔 이런 이유도 작용한 건 아닐까? 그리고 미국으로 보낸 것엔,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이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미국 시민권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1.2 도미(渡美) 후

이후 샌 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로 옮겨가 고등학교 과정을 계속했고, 그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충침(李忠琛)의 아내가 운영하는 식당, Ruby Chow에서 일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 고교과정을 마치고, 1961년, 워싱턴 대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간다. 출처 이때부터 이후 알려진 독서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는지, 철학,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영춘권을 비교적 오래 수련했을 뿐, 다른 무술들은 금방 싫증을 내곤 했던 어릴 때와는 좀 다르게 좀 더 본격적으로 복싱, 유도, 사바트, 태권도, 가라테, 말레이시아 권법 등 여러 무술을 접해 나아갔다.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고, 좋게 말하면 한 곳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면이 특정 무술의 형태나 한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특성이나 스타일에 맞는 프리 스타일 파이팅을 추구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고, 나중에 절권도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부터, Jun Fan Gung Fu(振藩功夫)라는 이름을 내걸고, 무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근 가필드 고등학교에 쿵푸[功夫]시범 차 갔는데, 그때 이 학교 여고생들 중 린다 C. 에머리(Linda C. Emery, 1945~)가 있었다. 그녀는 이소룡의 쿵푸 제자가 되었고, 교사가 되려고 이소룡과 같은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64년 8월 17일에 그와 결혼하면서, 졸업까지 몇 학점만 남겨둔 채로 대학을 그만두게 된다.출처 그리고 1998년, 탐 블리커와 재혼했다가 1990년에 이혼, 1991년에는 브루스 캐드웰(Bruce Cadwell)과 결혼,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이름은 린다 리 캐드웰(Linda Lee Cadwell)이다.

이소룡의 20대 초반 시절, 진번쿵푸의 주요 골격은 영춘권을 기반으로 채리불권, 홍가권 등등의 남권에 기반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 다양한 무술에 비해 건설적인 변화와 발전이 부족했던 중국의 남파권법을 크게 개신(改新)한 인물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어 기존의 체계를 없애버리고 새로 절권도를 만들 때는, 펜싱과 복싱, 레슬링을 조합한 뼈대를 바탕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한다.

1.3 배우가 되려고 애쓰다

이소룡은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었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연극을 택할 정도로 배우를 꿈꾸었다. 그러나 1959~1964년까지 열심히 노력했으나, 끼니를 걱정하게 될 정도로 난항을 거듭하여, 1964년에는 마침내 포기하고 무술에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자신의 무술을 홍보하려 인맥을 동원해 롱 비치 가라데 선수권대회에 시범자로 초청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무술시범을 본 윌리엄 도지어(William McElroy Dozier)가 1964년, 그의 기획 《Number One Son》의 배역에 오디션을 보게 해준다. 이는 불발되었으나, 밴 윌리엄스(Van Willams)와 함께 TV 시리즈,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의 케이토(Kato, 加藤)[10] 역 오디션을 볼 기회를 잡아 배역을 따낸다. 이는 1966~1967년까지 단 한 시즌만 방영되었으나, 《배트맨》과의 크로스오버 에피소드에 몇 번 더 출연할 수 있었고, 이후 TV의 《아이언사이드(Ironside)》(1967), 《신부들이 온다(Here Come the Brides)》(1969), 《블론디(Blondie)》(1969)의 찬조출연(guest appearance)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당시 이소룡의 제자들 중 할리우드 각본가, 스털링 실리펀트(Stirling Silliphant)와 배우 제임스 코번(James Coburn)이 있었는데, 이 둘은 이소룡과 함께 1969년, 《소리 없는 피리(The Silent Flute)》 각본을 쓰고, 인도로 촬영지 답사를 가기도 했다. 이 각본은 무산됐지만, 1978년, 데이빗 캐러딘 주연의 《서클 오브 아이언(Circle of Iron)》에서 활용되었다. 1969년, 이소룡은 스털링이 각본에 참여한 덕에 《말로우(Marlowe)》[11]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이소룡 팬들은 이를 이소룡의 흑역사로 평하기도 한다. 주인공 필립 말로우(제임스 가너 분)을 협박하기 위해 고용된 부하 역을 맡은 이소룡이 주인공을 상대로 깽판 치다가 결국 주인공의 꾐에 빠져 죽는다는 내용인데…

안습한 최후를 맞이하기 전 깽판 치는 장면에서, 영화감독은 이소룡의 재량에 맡겨 적당히 깽판을 부려달라고 주문했고, 이소룡은 방 안에 있는 기물들을 온갖 몸놀림으로 박살내며 놀라울 정도로 그 역할을 수행해냈다. 이때 감독, 촬영 스탭, 배우들 등등 모두는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아스트랄하게 과격하게 때려 부수는 모습에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Enter the office

그리고 딘 마틴, 샤론 테이트 주연에, 척 노리스도 잠시 나오는 《The Wrecking Crew》에서, 실리펀트의 도움으로 무술지도를 맡을 수 있었고, 역시 실리펀트가 각본을 쓴 덕에, 잉그리드 버그먼, 안소니 퀸(Anthony Quinn) 주연의 《봄비 속을(A Walk in the Spring Rain)》(1970)의 격투장면 연출도 맡을 수 있었다. 1971년, TV 시리즈 《롱 스트리트(Long Street)》에서, 주연 마이크 롱스트리트(제임스 프랜시스커스 분)의 무술교사로 얼굴을 내밀었다. 제자인 실리펀트가 각본을 맡았기에,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철학을 일부나마 자신의 대사로 넣을 수 있었다.

이소룡이나 린다 리 캐드웰에 의하면, 1971년, 이소룡은 《전사(The Warrior)》라는 제목의 TV 시리즈를 구상했고, 이는 워너 브라더스도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1971년 12월 9일,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의 주장에 의하면, 파라마운트워너 브라더스는, 서구적인 부분이 결여되었으니, 그런 면을 더 넣어서 현대적으로 다듬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소룡의 그 구상은 이후 다듬어져 《쿵푸(Kung-Fu)》로 개명되었지만, 워너 브라더스는 이소룡에게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너 측의 말은 공식 입장은 이와 다른데, ‘그들이 우리 작품과 동일한 컨셉을 잠시 구상했기는 했지만, 우리 작품은 다른 각본가들과 제작자들, 즉 에드 스파일먼(Ed Spielman)과 하워드 프리들랜더(Howard Friedlander)에 의해 창작된 것이다’.

여러 증언들과 증거들을 검토해보면, 이소룡이 캐스팅되지 못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가 동아시아인이라는 것도 있긴 했겠지만, 주된 원인은 그의 투박한 영어발음 때문이라는 것에 가깝다.[12] 그래서 서부시대의 소림승 역할은 데이빗 캐러딘에게 돌아갔다는 것. 《The Pierre Berton Show》에서 이소룡은, 워너 브라더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며, 사업에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 자신은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만약 미국인 스타가 홍콩으로 왔고 그가 제작비를 대는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그런 걱정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렇듯 이소룡(李小龍)은 인맥을 동원하고 각본을 쓰는 등 여러 가지로 애썼지만, 조연이나 찬조출연이 다였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작자 프레드 웨인트라웁(Fred Weintraub)이 이소룡에게 충고한다. 홍콩으로 돌아가서 여기 할리우드 제작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편 극영화를 찍어보라고. 결국 홍콩에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소룡은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1.4 홍콩으로 돌아와 대성공하다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예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다.[13]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소씨제편창邵氏製片廠)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가화오락유한공사(嘉禾娛樂有限公司), 즉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를 세운 추문회(鄒文懷)였다. 이소룡은 골든 하베스트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한다.[14]

그리고 이소룡은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대스타가 되었다. 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다시 갱신한다. 골든 하베스트와의 계약을 마무리한 이소룡은 협화전영공사(協和電影公司, Concord Production Inc.)를 설립하고,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까지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운다.

1972년, 골든 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한다. 그때 워너 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를 골든 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당시 이소룡은 스타시스(Starseas) 영화사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 때문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 소기린[15]이 주연한 영화로, 이소룡은 무술지도를 도와주기로 슬쩍 동의만 해주었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제작사가 마치 이소룡 주연인 것처럼 홍보한 것. 소기린 역시 이에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용쟁호투》 촬영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 7월 26일 개봉을 6일 앞둔 1973년 7월 20일, 그의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했던 여배우 정패(丁珮 Betty Ting Pei)의 집의 침대 위에서 만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해, 진통제를 주었는데, 이소룡은 그걸 먹은 후 잠들었고, 그 후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고 그녀는 진술했다.

2 죽음과 그에 얽힌 소문

그의 갑작스런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복용 약품 부작용이지만, 부검의나 다른 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는 등 상당히 논란이 많았기 때문에, 복상사라느니 마약중독사라느니 등등 각종 소문이 무지하게 많다.

  • 중국 무술계 또는 삼합회에서 보낸 암살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 쌍절곤 연습 중 중요 부위(…)를 맞아서 사망했다.
  • 복상사(…)이다.[16]
  • 이소룡 가문의 저주다.[17]
  • 이소룡의 친구였던 이준구는 누군가[18]가 그를 죽인 거라고 주장했다.
  • 쇼 브라더스에 스카우트되었다가 나중에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한 정창화 감독은, 이소룡을 붙잡아 두기 위해 제작자 레이몬드 초우가 미인계와 마약까지 사용하다 부작용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 아시아인이 할리우드에서 주연으로 성공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할리우드 백인우월주의자가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맥락의 얘기는 《고르고13》에서도 나온다.

상당히 신화적인 인물이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려서 허황된 음모론들이 양산된 것.

이소룡이 자신이 오래가지 않아 죽을 것을 예상했다는 주장도 있다. 《용쟁호투》 기획 이전부터 심한 두통을 호소하곤 했고, 기절하여 몇 시간씩 정신을 못 차린 적도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용쟁호투》 출연 당시 악당 두목 한을 맡은 석견에게, "아저씨(석견은 이소룡 아버지와 친구였음), 아무래도 제가 아저씨보다 먼저 죽을 것 같아요" 라고 했다고 한다.[19]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죽기 몇 달 전에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었고, 아내에게는, 내가 죽으면 프랭크 시내트라의 《My Way》, 블러드, 스웻&티어스의 《And When I Die》[20] 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장례식 때 틀어달라고 했다. 실제 장례식 때 그가 좋아하던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2006년, 의학계 일각에서, '돌발성 간질로 인한 급사'(SUDEP)를 그의 사인으로 내세운 적도 있다. SUDEP는 그가 쓰러진 지 22년 뒤인 1995년 의학계에 처음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사망 당시에는 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는 미스테리도 없고 환상도 없다. 상술했듯, 그는 무리한 훈련으로 허리에 큰 부상을 입어 오랜 기간 병상에 있었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에도 만성적인 통증은 계속되었고, 이를 견디기 위해 진통제를 남용하다가 화를 입은 것. 실제 WWE 프로레슬러들 중에도 진통제 남용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워낙 프로레슬링이 험하고 시합이 많아서 자주 출전하다보니 여기저기 잔부상이 많아서, 진통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한때 WWE에서 마쵸맨과 숀마이클의 악역 여자 매니저로 유명했던 퀸 셰리는 허리디스크로 고생했었는데, 역시 진통제 남용으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궁금해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기억하고 싶다.(People still wonder about the way he died. I prefer to remember the way he lived)"[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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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이소룡의 무덤. 묘비명은 절권도의 창시자(Founder of Jeet Kune Do). 오른쪽은 그의 아들 브랜든 리의 무덤.

3 주요 출연작

  • 그린호넷(The Green Hornet)》(1966) - TV 드라마로 명탐정 그린 호넷의 조수이자 운전수인 케이토(Kato) 역으로 출연. 당시 이소룡이 처음으로 맡은 큰 역할로 작중 내 비중도 높았으나[22] 대부분 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녀야 했기에,[23] 얼굴이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을 꽤나 억울해 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린 호넷》이 유명한 작품으로 남은 것은 이소룡의 열연 덕분이나 다름없었다는 말도 있고, 《Kato's Revenge: featuring Green Hornet》이라는 색칠공부책이 나올 정도로 주/조연 전도가 심했다는 주장도 있다.[24] 극을 휘어잡는 이소룡의 카리스마는 이미 이때부터 끼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조연인데 너무 튄다고 발차기를 못하게 윗분들이 제제를 가했다는 말도 있다. 이때 제작자가 이소룡을 하인 취급[25]해서 같이 있던 여배우가 괜찮냐고 묻자, "겨우 저 정도에 열 받으면 내가 Bruce Lee가 아니죠"라고 대답했다 카더라.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후 이소룡이 대스타가 된 이후 재평가된 덕이 크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상기(上記)했듯 최초 방영 당시, 이소룡이 케이토 역으로 나온 시리즈는 한 시즌 방영으로 그쳤을 뿐이다.[26]
  •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1971) - 이소룡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한 첫 번째 작품. 당시 홍콩에서 역대 흥행 1위이던 《사운드 오브 뮤직》을 제치며 319만 홍콩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소룡 작품치고 상당히 잔인한 묘사가 많고 이해가 안 되는 장면, 코믹스런 장면, 짧지만 이소룡의 베드 신도 있을 정도로 이소룡 작품들 중 희귀한 작품이랄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데, 그의 최초 주연작이었기에 그의 영향력이 클 수가 없었다. 감독은 무술영화를 많이 감독한 유명 감독, 라유(羅維)였는데, 그는 당시부터 촬영 도중 경마중계(…)를 듣는 등 태업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이소룡과도, 이후 성룡과도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1973) - 이소룡이라는 배우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으로 워너브라더스사에서 배급. 85만 달러라는 저렴한 제작비[28]를 들여, 홍콩에서 330만 홍콩달러, 미국에서 2,5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9,000만 달러라는 제작비 대비 100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흥행기록을 수립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성룡엑스트라로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하며, 이소룡은 이 영화를 통해서 성룡을 발굴해냈다고도 전해진다.[29] 싱하형이 탄생한 영화로도 나름 유명.
  • 사망유희(死亡遊戱, Game of Death)》(1973) - 무술고수들과 탑에서 벌이는 마지막 결전이 인상적인 작품. 사망한 이소룡의 대역을 했던 사람은 당룡이며, 원표도 참여하였다.

4 절권도(截拳道, Jeet Kune Do)

절권도는 무술이라기보다는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소룡은 이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심지어는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이라 부르려 했다. 개념 자체는 다분히 실전 격투기인데, 문제는 수련 체계가 제대로 잡히고 제자들이 어느 정도 실력에 다다르기 이전에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현재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정을 갖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소룡은 어느 날 자신이 가르치던 도장에 온 도전자와 싸우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비(非)중국인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이소룡을 못마땅하게 여겨 도전자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때문에 이때도 대수롭지 않게 승부에 임했지만,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것에 3분이나 걸렸다는 것에 이소룡은 충격을 받고,[30] 금방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최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 웨이트 트레이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절권도 개발에 힘썼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모 다큐멘터리에서의 이소룡의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소룡은 금방 싸움을 끝내지 못한 것은 절권도의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전면 개편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소룡의 아내, 린다 리의 증언도 때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그녀의 문제인지, 그녀의 말을 전달하는 매체의 문제인지는 교차검증되지 않았음도 덧붙여둔다.

그러나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척추를 다쳐[31] 이후 무술 스타일을 변화시킨 것도 포함된다.

수련한 무술들과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동적인 방어보다 능동적인 공격으로 우선권을 잡고 최대한 빨리 상대를 쓰러트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이소룡은, 곡선보다 직선, 복잡함보다 단순함을 강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간단한 예를 들면, 손목이 잡혔을 때에 팔을 비틀어 꺾거나 몸을 움직여 빠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발을 밟거나 낭심을 차버리는 식으로 간략하고 경제적인 움직임을 선호한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웬 아랍인이 내래 아랍의 검술을 보여주갔어하다가, 뭐야, 이거? 하는 표정의 해리슨 포드의 권총에 맞는 식… 이랄까? 간단의 미학

4.1 영화 속 격투모습

영화 속 모습이 워낙 강렬했던지라, 절권도 수련생들은 영화 속 이소룡의 동작과 자세를 따라하면 절권도 고수가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소리를 생전 이소룡이 들었다면 한 대 쥐어박으며 사망화를 낼지도 모를 터무니없는 소리다. 영화 속 퍼포먼스와 캐릭터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위한 것이다. 《정무문》의 드래곤 킥이나 《용쟁호투》에서 나왔던 서머솔트 킥, 공중회전으로 스님들을 뛰어넘는 장면 등은 영화니까 시각적인 연출을 위해 넣은 것이다. 또한 공중회전 장면은 이소룡이 아니라, 원화라는 대역이 했다. 본래 이소룡이 직접 해당 장면을 촬영하려 하였으나, 이소룡은 이전부터 고질적이었던 등과 허리의 부상으로 늘 통증에 시달려 진통제를 상시 복용하고 있었고, 어릴 때 이후로는[32] 공중회전 같은 아크로바틱한 동작의 연습을 한 적도 별로 없었다. 나는 실전기술을 하는 무술가이지 광대가 아니라고 이소룡이 거부하여 원화가 대신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신뢰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런 말을 하려면, 강한 고수처럼 보이게 해주는 영화가 아니라, 진짜 치고받는 무술대회에 나가서 자신이 무술가임을 증명하는 게 맞다. 그런데 왜 영화를 바탕으로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올까? 어디에나 무개념 초딩들은 있는 법이니 너그러이 넘어가자.

이렇게 무술적인 면 외에, 영화적인 측면에서 이소룡의 특징격투액션물에 후까시를 넣는 걸 유행시키는 데 있어 최초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 영화들에 없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주인공이 적을 상대로 검을 휘두른 뒤, 멋진 자세를 잡고 가만히 있다가, 검을 검집에 탁 넣고 나면, 그때서야 악당이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든지 하며 소위 후까시를 넣는 연출은, 1960년대의 무협영화 등에서도 그리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33] 다만 이소룡이 한 것은, 바로 그 이소룡이 했고, 그것이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일 뿐이다.

과묵하고 정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괴조음[34]과 함께 강력하고 재빠른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이소룡의 모습은 수많은 남자들을 열광시켰다. 거기다가 적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먹이고 짓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표정 또한 트레이드마크. 싱하형 짤방으로 유명하다. 이소룡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을 표현하기 위해 연기했다고 한다. 드라마 《쿵후》의 시대배경을 서부시대로 설정한 것도, 상대적으로 치안이 부실해서 살인을 해도 쉽게 잡히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그 외에 이소룡이 유행시킨 쌍절곤 등의 무기는 동양무술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알려지기까지 했고, 몸에 난 상처의 피를 찍어 맛보는 제스쳐 등은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어 여러 매체에서 패러디되었다.

현대에도 ‘이소룡’ 하면 생각나는 스타일리쉬함이 아직도 그 멋을 유지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매력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이소룡이 입는 노란 쫄쫄이는 그 자체가 멋있는 게 아니라 이소룡이 입었기 때문에 멋지게 보이는 거라고 하는데, 사실 맞는 말이다. 사람의 인지체계의 초입만 봐도 간단명료해진다.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누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목소리로 말하느냐 등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머리를 깎는 모습을, 일반인이 흉내 내어 촬영해 유튜브 등에 올리면 무슨 말을 들을 것 같은가? 옹박》으로 유명해진 토니 쟈의 시연을 보고, 그가 무지무지하게 강한 무에타이 고수라거나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은, 그 시연을 이소룡이 아닌 토니 자가 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소룡이 액션 영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아니, 컸었다. 다만 지금의 액션 영화는 또 많이 달라졌다. 이전까지의 중국무술영화는 주로 투로(套路)[35]와 같이 화려한 움직임은 보여주지만, 그리 실감나지는 않는 액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소룡 이후에는 정말로 서로 두들겨 패는 듯한 느낌을 살린 액션이 주류(主流)가 되었다. 덕분에 배우들이 엄청나게 고생하게 됐지만.(…) 중국 무술 영화에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소룡 이전의 영화들을 보고 《당산대형》을 보면 어렵지 않게 구분된다. 그러나 이는 고전무협영화나 무술영화들이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한 경우가 많았기에, 소설의 재현을 위해 여러 특수효과를 사용하며,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경우가 많아서 그랬던 면도 있다.

중국 영화뿐 아니라 서구 영화 쪽에서도 맨손 격투 장면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다.[36]. 사실 서구 영화의 맨손 액션(총이나 무기를 쓰지 않는 경우)은 별다른 "기술"이 없는, 아마추어적인 드잡이질이거나, 서로 마구 주먹질을 하는 "막싸움"인 게 보통이었다. 애초에 싸우기 전에 총으로 쏴버리는 게 전부였으니.

이소룡의 영화와 동시대에 나온 영화계의 끝판왕 《대부만 해도 《대부1》에서 소니(산티노 꼴레오레)가 매제를 폭행할 때의 합을 보면, 영화의 명성에 비교하면 상당히 엉성하다. 이 영화의 유일한 옥의 티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 이렇듯 서구영화에서는 맨손격투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던 게 현실이었다.

중국무술영화는 이소룡 이전에는 아무래도 무협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 많다 보니, 소설을 영상으로 구현하기 위해 와이어 액션과 특수효과가 주를 이루었지만, 이소룡은 현실적으로 보이는 액션을 추구했다. 물론 연속 발차기나 섬머솔트가 사실적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과거 무협영화의 칼 들고 날아다니거나, 장풍을 쏘는 거에 비하면, 특수효과 없이, 실제로 가능한 기술이니 현실적인 건 맞다. 그리고 이소룡 이전에도 이미 강대위, 적룡 등이 현실적인 액션을 선보인 사례는 있었다.

여기엔 이소룡을 영입한 골든 하베스트사의 영세함도 작용했다. 당시에는 쇼 브라더스가 주축이 된, 무협소설이 원작이거나 무협소설작가가 각본을 쓴,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시대극이 인기였다. 쇼 브라더스사는 든든한 자본과 함께 자체 스튜디오[37]대형 세트장이 있었다. 그러나 의상, 분장, 배경세트, 말, 마차, 무기 등의 조달은 신생 영화사였던 골든 하베스트로서는 무리였다. 그러니 돈이 훨씬 덜 드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맨손 격투물을 택한 건 어찌 보면 어쩔 수 없었던 것. 《당산대형》도 극의 배경에 맞춰 태국에 가서 찍었다기보다, 제작비와 인건비 등이 저렴했기에 태국에서 촬영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이소룡을 보지 말고, 《당산대형》의 분위기와 배경에 주목해서 보면, 어떻게든 돈을 적게 들이려고 한 티가 난다. 하지만 그게 대박이 났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비를 들이고도 이득은 더 크게 냈으니. 그리고 때마침 왕우의 《용호투》의 대성공 이후 변화한 영화계 트렌드도 호재(好材)였다.

이후 절권도는 더욱 발전해 나아갔으며, 《용쟁호투》 등에서는 이소룡의 캐릭터가 관절기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를 다룬 어떤 다큐멘터리에선, "사람들이 암바가 뭔지도 몰랐을 때 이미 이소룡은 암바를 쓰고 있었다" 라고 한다. 다만 절대 오해는 금물. 암바 기술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지만(예: 유도의 십자굳히기, 팔 가로누워 꺾기 등), 무술에 대해서 모르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암바라는 기술을 처음 본 건, 이소룡이 영화에서 쓰는 걸 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이전 영화들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기술들이 나왔다. 금나술(擒拿術)이라 하여, 관절을 꺾어 상대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무기를 빼앗는다든지, MMA에서 초우크(choke)라 하는 기술로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장면 등은 고전영화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온다. 다만 조르고 꺾고 하는 것보다는, 호쾌하게 때리고 차고 칼로 베는 게 관객들 보기에 더 시원하니 자주 안 나오는 게 당연했다. 다만 이소룡은 유명세와 인기가 있으니, 《정무문》에서부터는 어느 정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유 감독과 결별한 후, 골든 하베스트와 공동으로 하긴 했지만, 자신이 세운 영화사인 콩코드 프로덕션(Concord Productions, Inc.)에서 만든 《맹룡과강》부터는 감독이 자신이었으니, 아예 자기 맘대로 연출할 수 있었다. 또 이소룡은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아주 그럴 듯하게 연출하기도 했고, 또 이소룡이 해서 유명해진 거라는 게 보다 공정하고 올바른 평가이다. 《사망유희》에서 카림 압둘 자바와의 싸움을 끝낸 것도 목조르기였다.

현대 액션 영화에 나오는, 현실적으로 치고 박는 액션의 시초도 사실상 이소룡이라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정무문》 때부터 매 작품마다 백인 고수와의 대결이 나오는데, 《정무문》에서 페트로프(Petrov) 역을 맡은 로버트 베이커(Robert Baker)는 이소룡의 제자로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시사회에서 반응이 좋자 이소룡과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고 하며, 《맹룡과강》의 척 노리스도 이소룡과 친구, 《용쟁호투》의 오하라 역인 밥 월도 이소룡의 친구였으며, 카림 압둘 자바는 《사망유희》 때 이소룡의 부탁으로 시즌 도중에 시간을 내서 몰래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이설(異說)도 있다. 자바가 이소룡 집에 놀러 온 것을 기회로 영화를 찍었다는 것. 그리고 이는 흥행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청나라 말기 구미(歐美)인들의 열병기에 무너졌었던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중화사상을 고려하면, 백인이나 서구인들이 중국인 주인공에게 무술로 박살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는 전후(戰後) 일본에서 역도산이 백인 레슬러들을 쓰러뜨리는 프로레슬링 흥행으로, 일본인들에게 숭배에 가까운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낸 것과도 통한다.

영화배우 에디 그리핀이 처음 본 이소룡 영화는 《정무문》이었는데, 그가 영화관에 갔을 때 반대편에 포르노(…) 상영관이 있었는데, 정무문을 상영하는 극장은 꽉 찬 반면, 포르노 영화관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교차검증을 통해 증명된 건 아니지만, 충분히 그럴 만도 한 게, 이소룡은 당시 메인스트림(main stream: 주류(主流))에서 최초의 아시안 히어로였기에,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나 백인이 아닌, 이소룡이 활약하는 것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 물론 그전에도 메인 스트림에서 비백인 남성 영화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3년에 흑인으로서 처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시드니 포이티어나, 인기를 끌던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아버진 흑인, 어머니는 중남미계)가 있었다. 또한 아랍인(이집트)으로서 1965년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오마 샤리프, 히스패닉계로 1952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안소니 퀸 등은 당시에도 대스타였고, 백인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었다. 또한 중국계 탐정인 찰리 챈이 주인공인 TV, 영화 등도 인기가 있었지만, 백인이나 혼혈인을 중국인스럽게 분장시킨 경우가 많았다.

랩퍼인 LL Cool J[38]는 백인만이 히어로인 게 당연하던 시절, 동양인 이소룡이 대활약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중화주의적인 면이 자주 나오고, 백인에 맞서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백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이에 대해선 작중 그가 맡은 역이 대개 Underdog[39]이라 불리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의 캐릭터였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운동경기에서, 특정 선수나 팀의 지지자가 아니라면, 지고 있는 선수나 팀을 저절로 응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도 통한다 할 것이다.

일본에선 그가 출연한 영화를 자국에서 개봉할 때, 전부 제목에 "드래곤"을 넣었다. 다른 무술 영화제목에도 일본에서는 드래곤이 많이 쓰인다. 《당산대형》은 "드래곤 위기일발", 《정무문》은 "드래곤 분노의 철권", 《맹룡과강》은 "드래곤의 길"[40], 《용쟁호투》는 "불타라 드래곤". 게다가 순서도 오락가락이었는데, 이는 제일 처음 《용쟁호투》가 수입 개봉되어 빅히트를 치자, 급히 이소룡의 다른 작품들을 수배해 개봉했기 때문. 일본에서는 이소룡이 죽은 뒤에 모든 작품이 개봉되었고, 극성팬들이 생기면서 이소룡 관련 상품이나 잡지, 서적도 많이 나왔다.[41]

반일(反日)정서가 농후한 《정무문》은 일본 개봉 때 걱정이 많았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대히트했다. 사실 중국인 vs 일본인이라는 구도만 빼면,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모습은, 일본인의 정서에 잘 부합하는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보다 이전에 대성공했던 왕우의 《용호투(龍虎鬪)》 역시, 중국무술이 일본인, 일본무술가를 꺾는다는 내용인데도 일본에서 대성공했다.

《엠파이어》 지에서 뽑은 최고의 영웅들 중에 이소룡이 《용쟁호투》에서 맡은 "리"가 20위에 올랐다. 사실 이런 무술가 캐릭터들의 원조 격이 이소룡이고, 현재까지 이소룡의 캐릭터에 비견될 만큼 인상 깊은 캐릭터는 지금도 많지 않다.

이소룡의 캐릭터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 속에서 나온 기믹이나 설정 등도 이후 많이 오마쥬되었다. 모탈 컴뱃 1편은 《용쟁호투》의 컨셉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으며, Dead Or Alive 5편의 스테이지 중 하나는 《사망유희》에 나온 탑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5 현실적인 평가

그가 영화인으로서 보여준 모습은 지금도 회자되고, 철학적 면모는 물론, 웨이트 트레이닝을 무술에 도입한 선구자라는 말도 있다. 그의 실제 무술실력은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떡밥이다. 그리고 철학적 면모라는 것도 냉정하게 검토하면 그리 개운하지는 않으며,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해서는 선후가 뒤바뀌거나, 왜곡 혹은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영화 속의 인상적인 모습과 각종 대중매체에서 비롯한 유명세 때문인지, 그는 최강자 논쟁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소룡 vs'로 검색해보면 그 떡밥의 위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키보드 워리어라는 말이 이소룡 최강론을 주장하던 사람들 때문에 나왔다고 할 정도이다. 항목 참조.

5.1 철학가

그의 철학은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생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행동이 있어야 한다[42]라는 말처럼, 능동적인 삶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물이 되십시오#와 같은 말을 미국의 방송에서 언급하며, 유연한 사고와 행동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후술(後述)하겠지만, 그의 사후에 재조명된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양철학, 특히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도 하는 도가(道家)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그렇게 이소룡의 입을 통해 북미에 전파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학자들이나 전문가, 명상 수련자, 독서가 등에게는 이전부터 도가사상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관련서적들도 여러 선진국들에는 이미 많이 출판되어 있었다.[43] 다만 이소룡이 영화배우로 인지도가 높았던 덕에, 이소룡을 통해 북미(北美)의 일반대중들에게도 도가사상이 알려졌다는 게 맞다. 이에 이소룡은 철학가/철학자라는 주장도 나오는데, 그는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자신의 무술에 맞게 인용하거나 각색했을 뿐, 새로운 해석을 하거나, 새로운 철학을 정립했다거나, 철학적 연구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다. 학원가의 유명 과학강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공인된 연구 성과가 없으면 그를 과학자라고 하긴 곤란하듯, 그를 철학가라고 칭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아마추어) 무술가나 영화배우로서는 드물게도 철학적인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거나, 무술 철학가라고 하는 게 좀 더 공정한 평가일 듯. 그의 저서사후(死後) 출판된 책들을 읽어보면, 동양철학을 새롭게 해석했거나 정리한 것과는 거리가 있으며, 자신의 이상, 주장, 기술에 맞는 동양철학의 경구(警句)나 구절들을 인용하거나 짜 맞춘 정도이다.[44]

동양철학 전공자나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1960~80년대 동북아(東北亞)권에서 정규교육을 받았거나, 그 방면에 좀 관심 있는 사람들, 그리고 북미, 북유럽 지역에서도 전문연구가나 독서가, 명상 수련자 등에게는, 이소룡이 말하는 철학적 경구(警句)들은, 대부분 다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이미 아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북미(北美) 대중들에게는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철학적 면모가 조명된 것은, 이소룡의 죽음 이후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소룡 이전부터 시작된 동양무술 열풍에 이어,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의 등장 덕에 부쩍 더 커진 무술시장이지만, 죽은 이소룡이 신작(新作)을 낼 수는 없기에, 각계의 반응은 크게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소룡 사후(死後) 각 분야의 반응
방향주체결과(물)
1새로운 스타 발굴, 육성홍콩의 여러 영화사, 나유 감독, 골든하베스트성룡
2브루스플로이테이션미국, 홍콩, 대만, 한국 등지의 영화사들하종도, 당룡, 여러 이소룡 짝퉁 영화들
3관련 자료 발굴, 재포장 판매출판사, 영화사 등 + 이소룡의 유족(遺族)이소룡 관련 서적들, VHS, DVD 등 관련 상품들
4이소룡 흉내미국 등지의 (사이비) 무술인들과 무술 꿈나무(…)들왜곡된 절권도, 이소룡 비전무술 등
5동양무술 신비화영화사, 사이비 무술인 등신비의 무술, 닌자무술[45], 기공무술 등

3번은 긍정적인 면도 있다. 이소룡 본인이 기록, 정리에 꼼꼼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상업주의로 인해 이소룡 관련 자료, 사진, 영상 발굴이 이어져, 관련 동영상과 사진이 넘쳐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니까.[46] 최고 전성기에 급사(急死)한 동양의 무술영화배우라는 소재는, 특히 서구권의 대중들에게는, 동양적이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워 홍보전략으로도 삼기에도 안성맞춤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 북미에서는 대형 소매 체인점 등의 등장과 함께, 이전까지 사치품 취급 받았던 카메라, 컬러TV 등이 1960년대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던 호재[47]도 있었기에, 이소룡 관련 영상물, 출판물, 잡지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소룡의 대표적인 저서(著書)라는 《절권도의 도(Tao of Jeet Kune Do》의 첫 출판은 1975년(이소룡의 죽음은 1973년)이란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동양무술 + 이소룡 + 오리엔탈리즘 + 북미 절대다수 대중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을 동양철학 = 좋은 신상”이었을 거라는 게 상식적이다. 그리고 이는 미국 등에서 일어난,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동양의 정신문화와 동양철학을 배우자는 움직임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최근까지도 이러니까.

이는 이소룡 유족(遺族)의 이해(利害)와도 부합되는 면이 있었다. 그의 부인이었던 린다는 아이가 둘인 미망인의 처지에서 돈이 되면서도, 남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일을 굳이 사양할 이유도 없으니 남편의 유산(遺産) 및 재산관리에서 자신이 손을 떼던 2001년까지 이소룡의 절권도를 홍보하는 데 열심이었고, 지금은 그녀의 딸 섀넌 리가 그 재산을 관리하면서, 그녀의 남편 키슬러(Keasler)와 함께 비영리단체인 이소룡 재단(Bruce Lee Foundation)을 운영하며, 무술에 대한 이소룡의 철학과 철학에 대한 그의 정리노트 등을 홍보, 보급하는 데에 열심이다.

각자의 사정과 이해타산(利害打算) 등이 서로 어우러져 만개(滿開)한 이소룡 사후(死後)의 상업주의는 북미에서 이소룡 신격화, 영웅화를 불렀고, 한국 등에서 인터넷 시대가 열려 이런 정보가 들어오면서, “(저 대단한) 서양 백인들이 이소룡을 이리 높게 평가하네?! 이소룡은 정말 대단한 무술가이자 철학자였구나” 하는 일부 심리에, 이종격투기가 인기를 끌던 시류와 합쳐지면서, 북미에 비하면 한참 뒤늦게, 우리나라에서 이소룡 신격화 열풍이 일기도 했었다. 그리고 아직도 일부 현재진행형이다.(…)

그 발단과 과정은 어쨌든 간에, 그 결과, 이소룡은 여러 분야에 영감(靈感)을 준 셈이 되었다. 무술인은 물론, 배우, 영화감독, 음악가, 프리러닝 선수들까지 "나는 이소룡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48] 북미권에서는 액션스타는 물론 정신적인 스승으로도 인식되기도 한다. 한 예로, 기타리스트인 잭 와일드가 기타 잡지에서 "이소룡이 말하길, '자주 쓸 동작이 아니면 잊어버려라'라고 했다" 라며 인용[49]하는 등 이소룡의 문화적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2005년에는 보스니아에서 내부의 민족 갈등을 치유할 상징적 인물로 이소룡을 선정하여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조선일보 기사보기 그러나 하루 만에 훼손당했고, 그 뒤로도 총격을 당하기도 하고 낙서와 오물이 버려지면서 동상을 철거해야 했다고 한다. 사실 상관도 없는 동양인 동상은 왜 만드냐는 반발이 엄청나게 거셌다. 세운 사람이 이소룡 빠였던가?

또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로서 추앙되기도 했다. 실제로 어록 중에 적극적인 삶이나 자신에 대한 구속을 푸는 자유 등을 중시하는 말이 많은데, 이는 특히 북미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말이 많기에 영감(靈感)의 보고(寶庫)로 여겨지기도 한다. 최소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무술 철학가로서는 공이 크다. 그러나 다른 무술 철학가들은 없었고, 있었다 해도 이소룡보다 수준미달이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수준이 더 뛰어난 다른 이들도 있었지만, 이소룡은 베스트셀러였고, 다른 이들은 망했어요 수준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5.2 최강의 무술가?

무술적인 면을 보면, 그는 가라데 대회에서 공연시간[50]을 얻어 두 손가락만으로 한팔 팔굽혀펴기를 하거나, 유명한 원인치 펀치시전한 것이 유명하다. 당시 롱 비치 무술대회 등에서의 시범영상이나 사진 등을 보면 두 손가락으로 하고 있다. 다만 개인수련 등에서 두 팔로 할 경우는 한손가락만으로 하기도 했다. 참고로 극진 가라데 등의 실력자들 중에서는 헤비급 체중인데도, 한팔, 한손가락만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연예인 장혁도 방송에서 한팔 엄지로만 팔굽혀펴기를 한 적이 있다. 1분 30초부터 보자.

그리고 이소룡 대련 영상이나 영화를 보면, 상대의 공격을 물처럼 자연스레 받아넘기는 그의 실력을 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승부를 가리는 대련이나 시합이 아닌, 시범/시연(試演)으로 실제 기량을 판단하는 건 좀 곤란하다.[51] 또한 《다이 하드》 시리즈가 브루스 윌리스의 실전능력(?)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이소룡의 영화를 근거로 사용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는 특히 육체적 능력을 가꾸는 데 열심이었고,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항상 굴신운동(屈伸運動)을 멈추지 않아 강박증 환자로 보일 정도였으며, 가족끼리 TV를 볼 때도 아령을 들고 있었다고도 한다.[52] 아예 친구에게 부탁해서 악력을 기를 도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또한 전통을 배제하고 철저히 실전 기술을 강조했으며, 동작도 자신에게 맞고 효과적인 것만 남기고 모두 버려라 라고 할 정도로 실질주의를 강조했다. 그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53]

머리도 좋고 건강한 사내였지만, 아내의 말로는 심각한 기계치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때문에 징병검사를 받을 때, 공군이나 해군으로 배속될까 아내가 걱정했다고. 하지만 럭비선수 한 명과 함께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전문적인 운동선수 등은 지나친 훈련이나 혹사로 인해, 시합에 필요한 특정부위를 제외하면 여기저기 안 좋아서, 군의 신체검사를 통과 못할 정도인 경우가 많다. 군대에서 원하는 것은 강함이 아니라 표준적인 건강함이다. 그래서 시합에서 펄펄 날아다니던 프로야구선수가 징병검사에서는 면제판정을 받곤 하는 것도, 대중들의 상식과는 달리, 경험 많은 전문의들의 시각에서는 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잘 안 알려졌을 뿐, 프로야구선수들 중에서는 팔꿈치나 어깨 문제로 세수도 한 손으로 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정리하자면, 이소룡은 싸움을 굉장히 잘하던 사람이 맞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인과 비교해서이다. 확실히 그가 싸움을 잘했던 사람인 건 맞다. 매일 규칙적으로 시행하던 실전적인 연습, 몸을 학대하는 것에 가까운 웨이트 트레이닝 등은 그가 잘 훈련된 파이터라는 것을 보여준다. 각본대로 카메라 앞에서 체조하는 액션배우는 아니었으니, 일반인이 이소룡 앞에서 깝쳤다면 개발살났을 게 당연하다. 실제로 이소룡 주변 인물들로부터 이와 비슷한 사건이 간간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증명이 가능한 건 딱 거기까지다. 이 이상으로 그가 현대에서 가장 강한 파이터라느니, 프로 파이터를 이길 수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이소룡의 강함을 증명하려고 하면, 무엇보다 증거자료가 부족하다 못해 없다고 해도 된다.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는, 이소룡의 지인들에게서 나온, “이소룡이 누구와 싸우는 것을 봤는데 대단하더라” 식의 카더라에 불과하고, 그의 영상 역시 기술 시연(試演: 시범, 공연, performance)일 뿐이다.[54] 심지어 영화 속의 모습을 예로 들면서 이소룡의 강함을 주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소룡이 활동하던 60년대엔, 이미 많은 격투기가 체계를 잡아가거나 체계를 완성한 시점으로, 근대 격투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복싱은, 20년대부터 라이트급(이소룡의 체급) 세계 챔피언전을 치를 정도였다.[55] 레슬링도 20세기 초부터 체계적으로 전해져왔다. 복싱과 레슬링은 19세기부터 프로대회는 모두 기록되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일본에도 미후네 코죠나 사이고 시로, 기무라 마사히코 등의 유도 영웅들이 있었고, 1961년에는 최영의가 자신만의 가라데를 완성하여 극진회관을 설립했으며, 그 이전부터 마에다 미츠요를 비롯한 많은 무술가들이 세계각지에서 본인의 무술을 홍보하거나, 실제 시합으로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려 해왔다. 태국 같은 동남아에서는, 소년 시절부터 무에타이렛웨이, 프레달 세레이 등을 익혀 온 선수들이 목숨을 걸고 치고받고 있었고, 브라질에선 그레이시 가문이 타 무술 선수들을 박살내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선 발리 투도의 초석을 쌓고 있던 시대였다. 이렇듯, 격투기를 업으로 삼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며, 피 튀기는 실전과 시합을 하던 무술가, 격투가들이 이미 즐비하던 시대에, 사실상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공식 전적(戰績)은 없는 이소룡을 최강자라 칭송하는 것은 다른 진짜 격투가, 무술가들에 대한 모욕이다.

이소룡과 교류가 깊었다는 미국의 무술가, 조 루이스(Joe Lewis, 1944~2012)를 이소룡이 가르쳤다든지, 미국의 많은 가라데인들과 교류할 때 그들은 이소룡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든지 하는 말도 전해진다.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이소룡이 교류한 사람들은 진짜배기 실력자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최영의의 초인적 활약 이후 동양무술 열풍이 불었지만, 그때만 해도 최영의가 실제 북미의 실력자들과 교류를 가진적은 거의 없었다.

이후 교습도 받으며 미국식 킥복싱 선수로 일류 수준에 오르기도 했던 조 루이스는 사실상 독학으로 무술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단 22개월의 수련만으로, 1966년, 제1회 전미(全美) 대회에서 우승했고, 1966~1969년, 미국 챔피언이었다. 척 노리스를 이긴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척 노리스는 조 루이스를 꺾고, 빅터 무어, 스티브 샌더스 등 당시 유명 무술가들을 패배시키며, 조시학(S. Henry Cho, 1934~2012)이 주최한 무술대회(All American Open Tae Kwon Do/ Karate/ Kung Fu Championship)에서 2회 연속 우승하기도 했다. 이소룡은 거기에서 처음 척 노리스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척 노리스는 한국에서의 군복무 시절, 태권도(당시에는 당수)를 2년 남짓 배운 것에 불과했고, 당시 척 노리스는 이소룡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되었다. 그런 조 루이스, 그리고 그보다 실력이 낮은 무술가들에게는 이소룡이 고수로 보였을 테니, 절로 고개를 숙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는 극진공수도 미국 지부장으로 조일삼(오오야마 시게루大山茂, 1936~2016)이나 나카무라 타다시(中村忠, 1942~) 등의 일류 가라데가들이 있었으나, 이소룡이 그들과 교류한 흔적은 없다.

물론 UFC 헤비급 챔피언 출신, 바스 루텐은 인터뷰에서, 이소룡이 UFC에 데뷔하면 처음에는 당연히 패배하겠지만, 시간을 주어 현대식 훈련을 한다면 경량급에서 꽤 영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얘기한 바영상 링크 있는데, 《용쟁호투》에서 초반에 보여준 암바는 정확히는 암바가 아니었고, 그런 부분을 보강하면 잘 싸울 것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생전 이소룡은 스스로 강함을 추구했고, 자신의 근육이나 기술 등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자랑하는 걸 즐겼다는 증언이 많은데, 정작 진짜 격투에서의 강함을 증명하는 실제적인 행위, 즉 대회 출전, 공식 시합 등을 단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그런 걸 하려고 한 적도 없었다.[56]

이소룡은 여러 격투기를 혼합하여 자신만의 격투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상을 통해 현대 격투의 토대를, 자신의 배우로서의 유명세 덕에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인식시킨 결과가 되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지, 이소룡 자신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토대를 만든 게 이소룡이 최초라거나, 이소룡 한 명뿐인 것도 아니다. 이소룡이 배우로서 유명해져 다른 격투가들보다 인지도가 높았을 뿐이다.

이소룡의 유명세와 그의 관련 콘텐츠를 팔아먹으려는 상업주의의 합작으로, 그의 저서나 작업 등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 그보다 더더욱 앞서거나, 더 뛰어난 토대를 구축했던 무술가들이 즐비했던 것 또한 현실이다. 다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소룡이 아닌, 그런 선구자들이 구축한 토대 위에서 현대 격투기가 꽃을 피웠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 격투와 실전을 치르며, 실제 무술가와 무술, 격투계에 여러 영향을 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소룡과 그들은 대중적인 인지도에서 달랐을 뿐이다. 물론 이소룡이 그들 중 몇몇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런 주장의 큰 근거는 데이나 화이트 같은 UFC 관련 인물들이 이소룡을 현대격투기의 아버지라고 간간히 코멘트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북미(北美) 등지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홍보효과를 위해 그를 언급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UFC 등이 주류에 남기 위해 벌이는 악전고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이소룡이 그 모든 토대를 만든 건 아니지만, 이소룡 덕분에 일반인들이 그런 격투기를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으므로 그 공이 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좀 있다. K-1이나 프라이드, UFC 등이 방송 등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이다. 근데 이소룡이 죽은 것은 1973년이다. 20년도 더 지난 후에 그의 업적이 꽃을 피웠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방송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전술(前述)했듯, 현대 이종격투기와 비슷한 경기나 대회 등은 이소룡 이전에도 세계 곳곳에 있었다.

이소룡의 무술철학이 고전의 틀을 벗어난 부분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소룡 '개인'만이 그런 사상과 현대 격투기에 영향력을 끼친 것은 아니다.

5.3 웨이트 트레이닝의 선구자

1960년대 당시 일반 대중들에게는 미지의 분야였던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소룡이 무술 훈련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적어도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소룡의 몸은 아직까지도 남자들이 선망하는 멋진 몸의 좋은 예로 꼽히며, 보디빌더 들 중 이소룡의 몸에 감명 받아 보디빌딩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널리 퍼진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는 이소룡을 띄워주려다보니 왜곡된 게 많다. 단적인 예로, 현대 보디빌딩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유진 샌도우(Eugen Sandow: 1867~1925)가 중량을 이용한 훈련을 정립하여 보급한 것이 1880~90년대였다. 항목 참조. 당시 ‘유진 샌도우의 아령 교범’ 같은 팸플릿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당시 많은 청년이 이 교재를 보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었다는 기록이 많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독일(당시 프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초빙되어 간 그는 엄청난 인기를 끌어, 수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에게 선망과 흠모의 대상이 된 때가 1890년대이다. 여성들에게는 현대의 팝스타나 영화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인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회사를 차리고 체육관도 만들었다. 그리고 보디빌딩 잡지까지 만든 것이 1898년이다. 1901년, 런던에서 그는 보디빌딩 대회를 주최했으며, 그 대회의 심사위원으로는 코난 도일까지 초청되었다. 1911년에는 영국 국왕의 체육 특별코치로 위촉될 정도의 명성을 누렸다. 세계 최고 권위의 프로보디빌딩 대회라는 ‘미스터 올림피아’ 수상트로피가 그의 모습을 형상화했을 정도이다. 참고 그리고 그의 저술 일부는 아직까지 출판되고 있다.

그리고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발굴했고, 미스터 올림피아 대회를 출범시켰으며, 《머슬 앤드 피트니스 앤드 플렉스》 등 보디빌딩 관련 출판물도 다수 창간했던 조 와이더(혹은 웨이더 Joe Weider 1920~2013)가 국제보디빌딩연맹을 창설한 것이 1946년이다.

이소룡은 기교와 형식에 빠져 기본적인 신체단련을 게을리 하는 전통무술가들에게 몸을 가꾸라며 질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소룡을 띄워주려다 보니 지나치게 왜곡된 면이 있다. 사실 근육과 단단한 골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체를 단련한 사람들의 필수요소였고, 엉터리들을 제외한, 정통의 무술문파 대부분에는 석쇄공(石鎖功), 천근력(千斤力), 석련공(石練功/石鍊功), 석단공(石担功) 등등 이름은 문파마다 다르지만, 3~40kg 정도 되는 역기를 한 팔로 들고 이리저리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기본 단계에서 통과해야만 하거나, 각종 웨이트 트레이닝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훈련법을 정말 지독하게 반복해야만 했다. 예를 들어 현대 웨이트 트레이닝에서 피스톨이라고도 하는 훈련법은 단각굴신(單脚屈伸) 등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동양무술의 필수 수련법이었다. 또한 현대의 코어 트레이닝 어쩌고 하는 훈련법들은, 거의 모든 전통의 무술문파들에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정이었던 경우가 많다.

실제 정통의 제대로 된 문파에서는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술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57] 다만 동양무술 열풍에 편승한 사이비들과, 편하게 강해지려고 하는 수련생들이 결합되어 이런 단련법이 누락되어 전해지는 등 크게 왜곡된 탓이다.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 이미 실제 시합에서의 강함으로 전 세계에 유명했던 최영의는 벤치 프레스나 스쿼트(squat)[58] 등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근육단련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실제 극진가라데에서는 승단 심사에서 100~120kg 벤치 프레스가 포함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은 데 비해, 이소룡은 영화배우로 워낙 유명해졌기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접목한 그의 훈련법을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사실 현대에도 근육이 있으면 몸이 둔해져서 싸움을 못한다는 개드립을 치는 무술가가 적지 않은 판이다.

근육이 많으면 많을수록 몸은 둔해지기는커녕 더 빨라진다.[59] 애초에 인체의 속도라는 개념 자체가 '근력으로 몸을 움직이는 속도'이다. 물론 아놀드 슈워제네거처럼 등 뒤의 검집에서 칼도 못 뽑을 정도로 근육량이 많으면 좀 곤란하겠지만, 그런 경우에서조차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약간의 유연성 희생이지 속도가 아니다. 실제 《코만도》 영화를 찍을 때, 겉보기와 달리 매우 빠른 아놀드의 움직임을 보고 스탭들이 다들 놀랐다 한다. 그리고 무술가라고 하기에는, 근육은커녕 지방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아 보이는데도 유연하고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준, '날아다니는 돈까스'의 원조 홍금보나,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듯한 보디빌더형 근육으로, '중국의 헤라클레스'라는 영화 제목 겸 별명까지 얻은 볼로 영(Bolo Yeung: 양사楊斯)같은 무술가들이 좋은 예이다.

물론 근육이 많을수록 빨라진다면, UFC헤비급이 가장 빠르고 플라이급이 가장 느리다는 말이 된다. 달리기도 힘들 비리비리한 몸보다는 적당한 근육을 붙여주는 게 속도가 빨라지지만, 그게 어느 한도를 넘어가버리면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격투가가 상위체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증량(增量)을 할 때, 속도 손실을 최소화하고 증량하면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만 수준에 오른 격투가들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와 기술에 적합하게 근육이 짜여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증량한다면 아무래도 속도 손실이 좀 있는 건 당연하다. 물론 위력은 증가한다. 근육이 붙으면 몸이 둔해진다는 말은 아무래도 격투가들이 증량하면 속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한 보디빌더처럼 둔해 보이는 근육덩어리들을 보고 나온 얘기인 듯한데, 이건 어디까지나 이미 적당한 근육이 있는 파이터들의 예니까 그런 것이지, 비실한 일반인 입장에선 적당하고 탄탄한 근육을 갖게 되면 속도가 증가한다.[60]

이소룡은 근력을 키우기 위해 당시로서는 꽤나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한 모양. 당시에는 단백질 가루나 비타민제 같은 게 거의 없어서, 일일이 여러 가지 재료를 먹어보며 그 효과를 실험했다고 한다. 그의 중국인 친구들은, 그가 집에서 생고기와 계란 등을 갈아서 먹는 걸 보고 기겁했다고.(…) 과일이나 한의학에서 쓰는 약초 등을 섞기도 했다고 하는데, 린다 부인은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서 입에 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근육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전기충격을 가하는 방법도 썼다고 하는데, 이는 후에 북미에서 손상된 근육을 회복시키는 치료법으로 쓰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소룡 이전에도 비슷한 방법이 있었고, 이소룡 역시 의료계에서 논의되고 사용되던 방법 등을 보고, 이를 응용하여 자신의 몸에 실험해본 것이다. 이를 거꾸로 뒤집어서 주장하면 곤란하다. 여하간 자신의 육체능력 향상을 위해, 당시 보통 사람은 잘 안하는 방법을 이것저것 시도해본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꽤 겪었다고도 한다.

이소룡은 몸집을 불리기보단, 자신의 몸무게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한도에서 근육의 강함을 키워 몸매를 가꾸는 방법을 연구했고, 속도와 힘이 가장 조화를 이룬 몸무게라고 스스로 판단한 61Kg 정도의 몸무게를 항상 유지했고, 등근육이나 팔목 근육 등을 중점적으로 강화시켰다.

그렇지만 근육에 대한 그의 이론이나 주장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이소룡도 그걸 믿었다기보다 실험삼아 행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그는 체육학에도, 생리학에도, 의학에도 문외한이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당시 조 웨이더 등을 비롯한 선구자들이 웨이트 트레이닝의 방법론을 정립시켰던 때였지만, 아직 체육생리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도들 중에 의미 있었던 것도 있지만, 틀린 것과 터무니없는 것들이 많다. 당연하다. 그는 생물학자도 의학자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영화 속 모습에서 감명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이소룡에 대한 왜곡된 환상으로 치달은 결과, '실전근육', '압축근육' 같은 떡밥이 탄생했다. 이소룡은 보통 사람 몇 배나 되는 밀도의 압축근육을 가진 사람이라는 주장 자체가 의학적, 생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유사과학이다.[61]

동일한 크기의 근육에서 더 큰 힘을 낼 수 있을까? 문제 자체는 고찰 가치가 있다. 역도 경기에서는 두 선수가 같은 무게를 들어 올리면, 체중이 단 1kg이라도 가벼운 사람에게 메달이 돌아간다. 체중은 격투기에서도 민감한 문제이다. 권투는 플라이급(48kg이상~51kg미만)이면 플라이급끼리만 경기를 하지, 51kg만 넘어도 밴텀급이 되어 플라이급과는 경기를 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정말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체중 2~3kg차이가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된다. 그런데 이소룡과 관련해서 압축근육이라는 말이 나오면, 위와 같은 고찰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이소룡 광신도들의 작품이라는 게 맞다. 이소룡의 근육은 압축근육이기 때문에, 60kg의 체구로도 100kg 이상의 효도르 같은 격투가를 이길 수 있다는 그들의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게 정확하다.[62] 물론 격투에 있어서 중요한건 정확한 일격이니까 60kg의 격투가라도 주먹만 정확히 날린다면 100kg대의 사람의 턱을 정통으로 맞춰 넉다운시키는게 불가능한일은 아니지만 이건 격투 기술에 해당되는것이고, 60kg 체급의 근육에서 나오는 힘을 약점에 적중시켜서 승리를 따내는것 뿐이지 근육세포 본연의 한계를 넘는것은 아니므로 압축근육같은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현실은 이렇다. 상술(上述)했듯, 이소룡 이전에도 보디빌더는 존재했고, 이미 웨이트 트레이닝도 대단히 체계화되어 있었다. 이소룡이 최초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도입했다거나 크게 발전시켰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동양무술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질적으로 보던 북미지역의 대중에게, 그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닌, 상호조화적인 관계라는 것이, 이소룡의 유명세로 인해 비교적 잘 알려졌다는 것이 맞다.

여러 선구자들에 의해, 웨이트 트레이닝이 꽤나 알려진 이후에도,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힘과 근육을 키운다는 게, 무슨 속임수 같은 것으로 여겨지던 시대나 문화권도 일부 있었지만, 사실 2,500년 전 이집트에서는 청년들 사이에 무거운 중량을 드는 운동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6세기 무렵, 육체단련이 미덕이던 그리스에서는 송아지를 어미 소가 될 때까지 매일 어깨에 짊어지는 훈련의 중요성과 효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렇듯 고대, 중세를 막론하고, 무력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역기와 비슷한 형태의 도구나 여러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옮기거나 하는 훈련이 있었다.

그리고 경험과 시행착오 등을 거쳐 정립된 것들이 각국의 전통무술의 단련법 등에 많이 녹아있다. 저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제대로 된 전통무술문파, 유파들은 어떤 형태로든 웨이트 트레이닝과 연관된 훈련을 강조하지 않는 곳이 드물다. 이소룡 시대에 북미 등지에 범람했던 독학파나 사이비들이 아닌,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 심지어는 출생 이전에 실전이나 시합을 통해 검증된 진짜 무술가들이나 운동선수들의 단련법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사이비나 엉터리들은 이런 것들을 모르기도 했고, 스스로도 하기 싫어했을 터이며, 힘든 수련을 기피하게 마련인 수련생들로부터 돈을 우려내기 위해 이런 것들을 필요 없다고 하거나, 신비주의 등을 활용해 왜곡한 결과물이, 당시 동양무술 불모지(不毛地)였었던 북미나 유럽 등지에 널리 퍼졌을 뿐이다. 실제 극진공수도최영의 총재라는 불세출의 고수의 초인적인 활약을 통해, 미국 등지에서 동양무술 열풍이 분 것은 이소룡이 유명세를 타기 이전이다. 최영의 총재 이후 미국 대륙으로 건너간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무술가들 중 실제 격투나 시합을 통해 강함을 입증한 고수들도 있었기에, 동양무술에 대한 열광은 더 커졌다. 단적인 예로, 당시 영화 등을 통해 유명해진 철포삼(鐵布衫)을 가르쳐준다는 한 중국무술인에게, 5만 달러라는 수련비를 가져온 백인 수련생이 있었을 정도다.[64] 당연히 돈이 되기에 수많은 엉터리들이 난립한다. 최영의 총재도 이런 엉터리, 사이비, 사기꾼들에 대해 여러 차례 개탄한 바 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실력을 신비주의와 페쇄주의로 눈가림하곤 했다. 이런 것이 60~70년대 미국의 상황이었고, 이 엉터리들로 인해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것도 당연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홍콩무술, 무협영화의 인기와 함께 중국무술이 일본에 널리 보급될 때는, 중국의 북파무술은 근육단련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일각에서 나올 정도였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된, 일본인 무술연구가 마츠다 류우치(松田隆智, 1938~2013)와 오오야나기 마사루(大柳勝)가 저술한 칠성당랑권 관련 무술서적에서도 비판적으로 평할 정도로 심했다.

요즘도 영화, 만화 등에서 종종 나오는데, '악역'인 격투가나 운동선수는 뭔가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훈련"을 하고, 주인공은 대자연 속에서 통나무를 톱질하고 도끼로 장작을 패는 등의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적이지만 환경친화적(?)인 훈련을 한 주인공은, 온갖 인공적이고 비자연적인 훈련을 한 악역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각종 스포츠에 과학적 분석이 도입되었고, 이는 스포츠의학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스포츠의학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신체조건의 중요성은 모든 격투기, 무술 등에서 실제 시합을 통해 입증된 지 오래다. 오늘날 어떤 무술, 어떤 격투스포츠도 '전통적인 방식'만을 고수하진 않는다. 그 효과가 입증된 전통적인 훈련, 단련 방법들도, 의학과 과학을 통해 개량되거나 보완되었다. 그러나 실제 격투시합 등이 목적이 아니라, 전통문화 등으로 전수되는 유파, 단체 등의 경우에는 전통을 고수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전수가 목적인 단체이니까. 다만 그런 곳에서도 스포츠의학 등의 검증을 거치는 추세이다.

오늘날 체계화된 훈련, 단련 방법은, 시합 등을 뛰며 부족한 것들을 찾으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을 해야 할까 고심하여 다시 훈련한 후, 다음 시합이나 대회에서 피땀 흘려가며 검증하고, 부상이나 부작용 등의 문제가 있다 싶으면 의학 전문가 등을 찾아 상담하고, 그들의 조언, 지식 등을 적극 차용하고 상호 의논하는 등의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검증되고 확실한 지식과 정보를 하나둘 쌓아가며 서로 나눈 실제 전문 운동선수들, 무술가들, 격투가들의 피와 땀으로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고가 일반대중에게 알려질 일은 그리 없지만, 이소룡은 한창 뜨던 때에 갑작스레 죽었기에, 새로운 상품이 없어서 안달하던 관련 매체들에 의해 그의 사소한 것들까지 널리, 심지어 과장, 왜곡되기까지 하며 알려진 것에 차이가 있다. 그러니 일반인들 중 이소룡의 숭배자들에 의해 기존 훈련, 단련 방법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도입하는 데에 이소룡이 선구자 역할을 했다거나, 초기 스포츠의학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단련법이 체계화되기 시작하고, 스포츠의학 등이 태동하여 자리잡아가고 있을 때, 이소룡도 그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훈련법에 도입하며 여러 가지를 실험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상술(上述)했듯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극 차용한 훈련법에 대한 서적이나 논문은 이소룡 출생 이전에도 많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웨이트 트레이닝과 과학적 훈련법을 도입한 무술가, 운동선수, 격투가들은 이소룡 이전에도 이미 많았다. 그중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한 사람은 최배달이 대표적이다. 최영의 선생은 승단자라든지 해외로 파견 보내려는 제자들을 뽑을 때는, 적어도 벤치 프레스로 100~120kg 이상 들어야만 합격시켰을 정도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조했었다. 간단히 요약한다면;

이소룡 이전에 이미 무술가나 격투가, 운동선수들 중 웨이트 트레이닝을 적극 차용한 사람들은 많았다. 다만 이소룡의 유명세로 인해, 일반 대중들에게 무술과 웨이트 트레이닝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특히 북미 등지에) 비교적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

상식을 가진 위키러라면,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현혹되거나 하여 앞뒤를 바꾸어서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 등을 하지는 말자.

5.4 무술의 대중화에 끼친 영향

그가 영화를 통해 무술의 대중화를 촉진시킨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용쟁호투》 이후 무술 도장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영화 등이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왕우(王羽)의 《용호투(龍虎鬪)》(1970)가 대박을 터뜨렸을 때,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왕우가 영화 속에서 사용한 단련도구들과 비슷한 것들이 불티나게 팔렸고, 무술도장에 입문문의가 쇄도했었다. 성룡의 《취권(醉拳)》(1978)이 그야말로 기록적인 대박을 기록했을 때는 한국,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 성룡, 황정리 등이 영화를 위해 만든 것이기에 실존(實存)하지도 않는 취권을 배우겠다며 중국무술도장이 북새통이 되었었고, 한국에서는 성룡에게 취권을 가르친 고수라고 알려진 대만의 무술가, 장극치(張克治)를 초빙, 시범공연을 하여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용비운(龍飛雲, 1955-2007)[65]이라는 무술가가 취권을 내세워 돈을 벌고,[66] 무술서적도 출판했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었다.

이소룡을 몇 가지 부분에서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그의 무술실력 덕분이라고 하기엔 무리다. 사실 그는 영화를 본격적으로 찍기 전부터 TV 영화, 드라마 제작사 등과 접촉하며 무술을 내세워 자기홍보에 적극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을 배우로 써달라고 홍보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말하길, 미국에 있을 때는 연줄을 만들고 여러 곳에서 무술실력을 내세워 홍보하며, 할리우드 영화, TV 등에 출연하려고 여러 가지로 애썼다고 술회한 바 있다.

노력 끝에 만든 연줄을 통해, 《그린 호넷》뿐 아니라 TV 토크쇼나 드라마의 게스트 출연 등의 기회를 잡고 무술 철학에 대해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소룡은 무술을 통해 단순히 강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소룡의 업적을 따질 때 그의 강함이 아니라[67] 철학적 깊이를 따져야 되는 게 이런 이유이다.

반론도 있다. 이소룡이 실전에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고 누차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그 무술을 익혀 강해지느냐 아니냐를 따져야지, 철학적 깊이를 따진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술이건 다른 운동종목이건, 그런 걸 수련하고 연습하는 데 있어서 중심철학이 없으면 결코 어느 수준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많은 숙련자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생각을 하며 하는 축구와 그냥 무조건 열심히 뛰고 차는 축구를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통할 듯.

그 전까진 중국무술 등이 너무나 신비화되었고 폐쇄적이었던 데 비해[68], 이소룡은 절권도를 처음에 과학적인 길거리 싸움으로 부르려 했을 정도로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먼 노선이었다. 한편으론 복싱 등의 서구 무술은 불한당들이 깡패 짓하면서 쓴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지만, 그가 30대 넘어서 가장 중요시 생각하던 무술은 공교롭게도 복싱이었다. 이런 와중에, 이소룡은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무술 체계를 제기하여 무술이 대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가 영화배우로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 크게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그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간, 그렇고 그런 액션배우였다면, 그의 저서나 철학 등이 오늘날까지 이리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의 철학과 그의 인격이나 윤리성을 혼동하지는 말자. 그의 철학은 무술과 자기단련 등에 집중된 경향이 있고, 인격수양이나 윤리성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그의 생존 당시, 린다 부인은 유명해진 이소룡의 여성행각을 단속하고 싸우기도 하다가 결국 지쳐서, '결코 다른 여자들을 (우리) 집 안에는 데려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이소룡에게 받아내는 것을 끝으로 그의 여자문제에 대해서는 포기해버렸다고 술회했었던 적이 있다. 거참, 부인이 성인군자일세그려. 그리고 이소룡이 죽은 곳도, 자신의 집이 아닌, 정패(丁珮 Betty Ting Pei)라는 여배우의 집이었다. 역시 영웅호색이라며 옹호해주려나?

사실 이소룡은 전통적 무술이 난장판이 되기 쉬운 길거리 싸움에는 불리하다는 의견이었기에, 그런 혼잡한 상황에서도 쓰일 수 있는 무술 체계를 원했고, 그 결과가 절권도라고 전해진다. 시각에 따라선 이소룡의 궁극적 목표는 자기가 최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무술이 전파되어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깡패나 불한당이 그런 기술을 익힌다면 어쩌고?

여하간 이렇게 이소룡이 영상매체에서 무술가를 Bad Ass한 히어로로 만들자, 《용쟁호투》 이후 무술 도장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는 등 가시적인 효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절권도 철학은 이종 격투기의 철학과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기에, UFC데이나 화이트 등은 이소룡을 이종 격투기의 아버지라고 극찬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홍보 효과 등의 맥락으로 하던 말일 가능성이 크다. 데이나 화이트는 UFC 자체를 이종 격투기와는 다른 종합격투기로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니깐.

즉, 자신이 최강이 되는 것보다 모두가 최강이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함으로써 불멸로 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중국에서도 그를 진정한 무술가로 칭송하는 이들도 많아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주의에 눈을 뜬 중국인들이, 돈 될 만한 것이면 뭐든지 가져다 써먹다가 이소룡까지 써먹기에 이르렀다는 게 더 정확하다. 중국에서 이소룡은 마약중독의 불량배 정도로 백안시(白眼視)된 적도 있었고, 문화대혁명으로 무술과 무술가들을 완전히 개발살냈으면서도, 지금 중국은, 이전에는 검열과 경멸의 대상이었던 무협소설과 무협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술문파로서의 무당파(武當派), 화산파(華山派), 아미파(蛾眉派) 등등을 만들어 무술 흉내를 내는 사람들을 배치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수련지망생 등을 대상으로 무슨 무슨 코스 해서 제자로(?) 받거나 하며 돈을 버는 게 현실이다. 일부 기업이나 무술인들이 하는 짓이 아니라, 중국정부, 혹은 정부가 내세운 기업들이 뒤에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돈벌이의 원조는 밥 짓던 스님과 늙어서 어디 갈 데도 없는 스님들까지 포함해 단 4명만 남았고, 건물은 다 무너졌던 소림사(少林寺)를 중국정부—당시는 중화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즉 중공—가 눈독을 들여 모조리 개축한 후, 은퇴한 우슈 선수, 이연걸을 주연으로 《소림사》(1982)를 만들어 짭짤한 재미[69]를 본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실제 소림사의 방장(方丈) 석영신(釋永信)은 초기에 자신과 중국정부의 연줄을 이용, 소림사 주변에서 그 이전까지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돈을 벌던 무술관, 기념품, 서적 판매상 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자신이 허가해준 것 외에는 자리 잡지 못하게 했었다. 그리고 소림사는 다양한 수련과정, 체험코스 등에 많은 외국인들과 수련생들을 끌어들여 많은 돈을 벌었다.[70]

6 그 외

본디 《사망유희》는 이소룡의 무술철학을 집결시킨 작품이 될 예정이었으나, 일부 격투장면[71]만 촬영한 상태에서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반쯤 미완으로 제작되었다.

여기서 이소룡이 입는 노란 체육복은 이소룡의 캐릭터가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캐릭터임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이소룡의 움직임을 캐치하기 쉽게 하려고, 튀어보이는 노란색을 썼다고 한다. 그의 움직임을 찍은 영상들을 보면 재생 속도를 줄여도 캐치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꾸준히 나온다. 다만 오해는 말자. 당시 촬영기자재 등의 한계나 움직이는 물체 등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의 경험과 기술 등의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 실제 이소룡과 비슷한 시기에 촬영된 다른 무술가들의 시범이나, 공식 시합 등을 보면, 이소룡보다 더 빨라 보이는 영상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1990년대 영화인 《데몰리션 맨》 촬영 때도, 주연이자 가라데 유단자인 웨슬리 스나입스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감독과 카메라맨 등이 천천히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항목 참조. 네이버에서 이소룡 속도 무예동 등으로 검색해보자. 꽤나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한 듯한 상당히 과학적인분석 자료를 볼 수 있다. 이소룡을 추앙하는 사람이라면실망이 클 수도 있으므로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일 듯.

쌍절곤과 단봉을 가지고 싸우는 댄 이노산토는 고난에 대처하기 위한 유연함, 합기도의 지한재는 실수에서의 깨달음, 그리고 마지막의 카림 압둘 자바는 무형의 강한 고난을 상징한다고 한다.

문제는 대역 배우[72]와 이소룡의 외모가 상당히 차이가 나서, 이를 처리하려다 보니 곳곳에서 다소 괴작스러운 부분이 보인다는 것….

《사망유희》의 원래 배경은 한국 법주사 팔상전 5층탑[73]이었으나, 이소룡 사후에는 홍콩의 유명 음식점인 남북루(南北樓 The Red Pepper Restaurant)가 되었다.

참고로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은 격투장면 일부를 제외하면, 노란 체육복(혹은 바이커복)을 거의 입지 않았으며, 그의 사망 후에는 대역이 노란 체육복을 입고 헬멧을 쓴 채 스턴트 연기를 했다. 즉 《사망유희》에서의 모습은 대역이 많다. 잘 보면 대역의 얼굴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

중국인으로써 유명하긴 했으나 실제로 표준중국어를 구사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6.1 이소룡의 패러디, 오마주 또는 영향을 받은 캐릭터

이들 중 켄시로는 스탠딩 포즈부터 시작해서 특유의 괴조음과, 상처가 나면 그 부위를 손가락으로 슥 문지른 뒤 한 번 피를 맛보는 등 아예 대놓고 이소룡화 되었다.[82]

또한, 《드래곤볼》의 손오공마저도 이미지는 이소룡에서 빌려온 게 많다고 한다. 스탠 리는 무술을 쓰는 캐릭터는 다 이소룡의 영향을 받는다고 얘기하기까지 했다.

이소룡을 모르는 한국의 수많은 초딩들은 그의 사진을 보면 싱하횽인 줄 아는 애들이 상당수. 지금은 초딩이 아니라 고딩이나 대학생일듯 그저 지못미.

7 트리비아

어느 기자가 최영의에게 '당신과 이소룡 중 누가 더 강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살기를 뿜으며, "지금 날 영화배우랑 비교하는 겁니까?"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최영의가 이소룡과의 비교를 불쾌해 했다는 것은 국내 출간된 가라데 교범에 있는 이야기다. 혹은 "이소룡은 체중을 더 불려야 한다"는 간단한 말로 대답했다는 얘기도 있다.[83] 물론 어느 쪽이든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당연한 얘기로, 둘의 절정기 체중 차이가 30kg 이상이다. 절정기 이소룡은 체중이 70kg를 넘은 적이 없고, 대개 63kg 내외를 유지했으며[84], 절정기 최영의는 100kg 정도의 체중이었던 적도 있고, 80kg 아래로 체중이 떨어진 적이 없다. 복싱체급으로 따지면 최영의는 헤비급, 이소룡은 평소 체중으로 라이트급 정도. 사실 이 정도로 체급에서 차이가 나면 "승패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위와 관련하여,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 190화에서 간접적으로 최영의와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는데, 댓글들을 보면 이소룡이 그가 살아있을 적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국내 청소년들에게 어느 정도로 신격화 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 이에 대해 현실적인 비유를 해보면, 새로 태권도 도장을 연 헤비급(84kg 초과) 국가대표 출신의 관장에게, 기존에 있던 동네 태권도장의 에이스로 추앙받던 웰터급(61~65kg: 중학생 선수 기준)의 중학생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깝죽거리며 도전하는 거와 비슷하다.

《용쟁호투》 촬영 때 웬 엑스트라가 와서 자기랑 싸우자고 시비를 걸었고, 이소룡은 귀찮아하면서 그러자고 했었다. 몇 분 후 이소룡은 영화촬영을 시작했고, 그 상대는 쓰러져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인 린다와 친구인 밥 월의 증언이 엇갈리는데, 린다는 이소룡이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제압했다고 하고, 밥 월은 이소룡이 상대를 개 패듯이(…) 팼다고 한다. 참고로 《용쟁호투》 촬영 때 엑스트라들은 모두 진짜 길거리 깡패들을 불러온 것이었고, 이들은 이 격투 이후 모두 이소룡에게 존경을 표시하기도 했다 카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반론도 있다. 단역배우가 주연배우에게 싸움을 걸고 그로 인해 촬영이 멈추기라도 하면, 하루에 깨지는 돈이 얼마나 될까? 저런 상황을 주변에서 놔둘 리가 없으므로 비현실적이라는 것. 영화판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수긍한다. 목격자라고 전해지는 사람들의 얘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런 얘기가 카더라에 불과하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이겠지만, 《용쟁호투》 엑스트라들이 주변에서 모은 길거리 깡패나 양아치들이었다는 얘기는 당시에는 나오지 않았던, 즉 저런 반론에 대항하기 위해 뒤늦게 나온 얘기라는 것이 반론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반론에도 적지 않은 근거가 있는데, 홍콩영화에 일가견이 있고 눈썰미 좋은 사람은 《용쟁호투》 곳곳에서 단역으로 나온 원표(元彪), 화성(火星: 성룡의 스턴트 팀, 성가반의 일원이기도 하다. 《용쟁호투》에서는 야간경비 실책으로 볼로(양사 분)에게 처형당한다), 임정영, 종발(鍾發: 역시 볼로에게 안겨서(?) 처형당하는 역할), 원화 등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고, 샅샅이 뒤져보면 여기저기에서 더 나온다. 물론 반론 측에서도 반대근거를 완전히 댈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이는 카더라 류의 얘기가 겪어야만 하는 숙명 같은 것이리라. 그리고 반론하는 측은, 이런 종류의 얘기엔 결정적인 증거가 없거나, 분명 있었는데 없어졌다는 식의 변명이 따라 붙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반론은 정말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말과 딱 맞아떨어진다. 《용쟁호투》의 감독이 이소룡과 이 단역배우의 결투를 촬영했었지만, 감독의 보관 부주의, 혹은 별로 필요 없겠다 싶어서 촬영된 필름을 파기했기에 증거가 없어졌다는 식의 얘기가 있는 것이다. 어찌됐든 결국 증거는 없는 셈이다. 그리고 원래 주장의 입증책임은 주장한 쪽이 지는 것이기에, 주장한 측이 제대로 증명하지 못한 이상 반론자 측이 일부 반대근거라도 대면 그건 반론 성공이다.

상술(上述)한 대로,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촬영하다 중단되었기 때문에, 대역이나 뱅크필름을 이용하여 짜깁기처럼 만들어진 영화. 그 때문에 편집에 시간이 많이 걸려 짝퉁영화인 《신사망유희》가 오리지널보다 먼저 개봉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인터넷에 이소룡 어록이라 하여 이소룡이 한 말들이라며 돌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나는 내가 1인자라고 하지 않지만, 2인자라고 인정하지도 않겠다[85]였다. 이를 보면 다소 호전적인 성격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싸울 때는 적극적인 공격을 권장하는 동시에, 평상시에는 성격을 다스려야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86]

유명해지기 전 아역이나 단역으로 다수 출연하였다. 가장 유명한 역은 전술한 《그린 호넷》의 가토 역. 이 《그린 호넷》에서 꽤나 인기를 끌었다며, 간혹 그를 아메리칸 드림으로 엮는 경우가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전술했듯,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씁쓸하게 포기하고 홍콩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미국으로 쫓겨나듯 후닥닥 가서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별별 일을 해가면서 살다가, 아내인 린다와 만나 결혼할 당시, 아내의 안경이 깨졌을 때도 고칠 돈조차 없어 아내가 깨진 안경을 쓴 채로 지내야 했다. 참다못해 어느 정도 알던 사이인 재미교포 태권도 사범 이준구에게 부탁해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준구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밥을 얻어먹으러 자주 찾아왔다고….

그러다가 홍콩으로 돌아가서 성공한 후 다시 할리웃에서 스스로를 홍보해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과, 할리우드에서 평생 허수아비 같은 조연에 매달리느니, 홍콩으로 가서 이름을 알리자는 지인들의 설득으로, 홍콩으로 돌아가서 비로소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것.

이렇듯 이소룡이 미국에서 크게 이름을 알렸고, 그를 알아본 홍콩영화계가 지인들을 동원해 돌아오라고 계속 설득했다는 일부 억지주장은 사실무근이다. 《용쟁호투》는 이소룡을 할리우드에서도 크게 대접한 증거라는 반박도 있지만, 단적인 예로, 85만 달러라는 제작비[87]만 봐도, 저예산 영화로서, 결코 제작사가 야심차게 투자한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대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소룡이 살아있었다면, 영화사가 후속편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높다.

영화상에서 척 노리스를 이긴 유일한 남자다. 하지만 이 싸움의 후유증으로 얼마 안 가 죽고 만다. 덕분에 인터넷상에선 누가 더 강한가 도토리 키재기 키배도 활발하다. 척 노리스는 주한미군 시절에 길어야 2~3년 정도 태권도를 배운 인물이다. 그러고도 미국의 가라데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를 통해 당시 미국 무술계 수준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前述)했듯, 무술대회에 구경 간 이소룡이 척 노리스와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척 노리스의 몸놀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 이소룡이 이후 《맹룡과강》에 출연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실제 척 노리스가 영화계에 기웃댄 건 이전부터였지만, 이 영화에서 호평을 받은 척 노리스는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들게 되었다고도 한다. 원래 이 배역은 조 루이스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이소룡과 조 루이스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척 노리스가 대신 들어왔다고도 한다.

명언으로는 "당신이 그 어떤 삶을 산다고 해도 당신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결코 인생의 그 어떤 달콤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나 "나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죽음이 두렵지는 않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갈 것이고 멈추지 않을 것이며 전진할 것이다. 비록 내가 품은 모든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언젠가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모든 성의와 능력을 다 바쳐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등이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도 있는데, 저주설을 중심에 집어넣은, 수준 이하의 영화에 가깝다. 다만 숱하게 쏟아진 이소룡 관련 전기 영화들 중에는 그나마 이 작품이 제일 완성도가 높다. 2010년에 또 이소룡의 삶을 다룬 영화가 나왔는데, 《드래곤》의 경우는 볼만한 영화였다는 평도 일부 있었지만, 이번 작은 좀 별로라는 듯. 2011년엔 그의 일대기를 드라마화한 《이소룡의 전설》이라는 TV 시리즈도 나왔다. 《소림축구》의 골키퍼 진국곤이 이소룡 역할을 맡았다. 이 TV 시리즈에서 눈에 띄는 건 이삼각(李三脚)이다.

그러나 이소룡이 유명해지기 이전에도, 청도관, 무덕관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태권도 유파들 대부분에는, 유급자 과정의 기본 발차기들 중에, 앞후려차기(이소룡 식으로는 스윕 킥 Sweep Kick)→앞돌려차기(훅 킥 Hook Kick)→뒤돌려차기(스피닝 훅 킥 Spinning Hook Kick) 같은 식으로 연속하는 발차기가 있었다. 이를 이소룡이 도입해 《당산대형》에서 활용했는데, 이런 발차기를 처음 보고 놀란 당시 홍콩의 관객들이 붙인 이름이 이삼각(李三脚)이었다. 이 TV 시리즈에서는 이런 이삼각을 무슨 무협영화스러운 기술로 묘사했다. 예비동작이 없는 낮고 빠른 앞차기에 가까운 무영각(無影脚)이 이연걸의 《황비홍》에서 공중을 날아가며 여러 번 차는 발차기로 왜곡과장된 것과 비슷하다. 영화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영화와 현실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상술했듯, 이소룡의 소꿉친구인 소기린 주연의 《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에서, 이소룡이 무술 연기를 도운 적 있는데, 멋대로 감독이 그 장면을 촬영하여 영화에 삽입했다. 이소룡 측의 소송제기로 개봉판에선 삭제했으나, 이소룡이 죽은 후, 그 잘린 장면도 빛을 봤다고. 이런 식으로 필름에 이소룡의 얼굴만 찍혀 있으면, 마구잡이로 여기 저기 영화에 무단 삽입하는 일이 홍콩에선 자주 있었다.

딴지일보에서 이소룡 대 김두한의 대결을 가상으로 예상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싱하형김두한

케니 스타일스 주연으로 그를 패러디한 포르노(…)가 2011년에 발매될 예정이었지만, 취소된 듯하다. 북미에서 동양인 남성의 위치가 좋지 못하다 보니, 이 뉴스는 미묘한 반응을 얻었다.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배우인 케니 스타일스가 영국 출신이라 북미에서의 인종간의 알력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다보니,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룡은 이소룡이 발굴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상기(上記)했듯,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발차기에 날아가는 스즈키 관장의 대역을 성룡이 했다. 《용쟁호투》에서는 한의 경비원 중 한 명으로 나왔다. 성룡은 맨 마지막으로 이소룡에게 공격을 당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촬영 전에 맞춘 합이 어긋나, 실제로 이소룡이 성룡을 호되게 때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이소룡은 성룡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며, 《용쟁호투》를 촬영하는 틈틈이 성룡을 여기저기에 출연시켜줬다. 그리고 이소룡은 성룡에게 《용쟁호투》 후속작에서는 자신과 공동 주연을 시켜주겠다고까지 약속했다고 하나, 《용쟁호투》를 촬영하면서 이소룡이 사망하는 바람에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룡의 무술솜씨를 눈여겨보았던 라유 감독이 《신 정무문》에 그를 주연으로 캐스팅하는 등 제 2의 이소룡으로 키우려는 시도를 거듭했다. 하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고, 결국 대성공을 거둔 《취권》 이후로 이소룡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성룡은 이소룡의 공백을 너끈히 메울 정도로 대성공했다.

훗날 성룡은 이소룡이 너무 많이 도와줘서 자신의 평생 가장 큰 은인이라고 말했다. 이견(異見)도 있다. 이소룡 전성기 시절의 그를 알던 이들이 이소룡에 대해 방송매체 앞에서 하는 증언과, 개인적으로 그들끼리 하는 얘기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걸 취재한 홍콩 신문 등을 통해 몇 번 논란이 된 적도 있긴 했다.

킬 빌》을 "백인들에 대한 이소룡의 복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우선 주인공인 우마 서먼이 입은 이소룡 복장은, 생전에 이소룡 본인이 원해서 입은 것인데 비해, 1부에서 나온 적들의 의상은 이소룡이 백인의 부하인 케이토(Kato, 카토오, 가토) 역을 맡았을 때의 복장이며, 최종보스인 빌은 이소룡이 주연으로 나오려던 자리를 빼앗은 셈이 된 데이빗 캐러딘이다. 결국 킬 빌에서 이소룡의 복장을 입고 그의 철학을 이은 키도가, 백인들이 이소룡에게 뒤집어씌운 이미지(케이토)와 이소룡의 자리를 빼앗아 간 백인(빌)을 죽이는 셈이니, 졸지에 타란티노가 이소룡의 복수를 대신 해준 셈이 되었다는 것.(…) 1970~80년대 홍콩 시네마키드였던 타란티노의 마니아 기질이 발휘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본인이 독일계 쿼터라 홍콩에선 영춘권을 배울 때 불이익을 당했고, 미국에선 황화론이 여전했기에, TV/영화계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인종차별에 대해 상당히 민감했고, 인종을 가리지 않고 교류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비(非)중국인에게 무술을 가르치지 말라는 중국 무술계와 갈등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상술(上述)한 대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무술 영화 각본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설마 《북두의 권》은 아니겠지? 이를 바탕으로 영화가 하나 나올 예정이라고.

EA의 PS4용 타이틀 UFC 2014에서 이소룡이 등장한다. 그것도 DLC가 아닌 ULC로. 언락 조건은 예판 특전으로 언락하거나 커리어모드(난이도 프로 이상)을 클리어하면 추가된다. 사용 가능한 체급은 플라이급, 밴텀급, 페더급, 라이트급. 다만 그의 능력치가 실제 능력보다는 그의 이름값에 맞춰서 측정돼서 논란이 있기는 했다.

한국에서는 외화 더빙에서 배한성이 많이 담당했으나 2014년, KBS에서 방영된 《맹룡과강》 더빙판에서는 양석정이 이소룡 목소리 연기를 했다. 양석정과 배한성 둘 다 베테랑 성우답게 외화 더빙에서 이소룡 연기들을 잘했지만, 이소룡 본래의 목소리를 살린 건 배한성이라는 평가가 더 많다.

홍콩 샤틴의 홍콩문화박물관에서 2018년까지 이소룡 관련 전시를 한다고 하니, 이소룡 팬들이라면 홍콩에 갔을 때 한번 들러보자.
  1. U. of Washington alumni records". Washington.edu. Retrieved January 22, 2010.
  2. 철학은 부전공이거나 개인적인 관심이었다고 한다.
  3. 미국에서 결혼하여 딸이 있다. 설령 그녀가 죽어도 이소룡의 모친인 하애유가 이소룡 말고도 몇 명을 더 낳았고, 이소룡 계열 가족들의 나머지 구성원들은 모두 잘 살고 있으니 직계 자손만 끊어질 뿐, 이소룡과 관련된 핏줄이 끊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4. 이 때문에 영춘권을 배울 때 선배나 스승들이 한동안 못 배우게 했다고 하기도 한다.
  5. 나머지 세 곳은 나문금(羅文錦), 고가녕(高可寧), 이희신(利希慎) or 부노용(傅老榕). 이중 하동가족이 제일 세가 크다. 여기서 하동가족은 하계동(何啟東)이라 불리기도 한다.
  6. 그것도 여자애 역으로!
  7. 엽문에게 배운 적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상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친 것은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黃淳樑)이었다. 그리고 이소룡을 영춘권에 입문시킨 사람은 황순량의 사제(師弟)인 장탁경(張卓慶)이었다. 다만 황순량이 이소룡보다 5살 연상이었기에, 노사(老師)라기보다는 사형(師兄)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8. Bruce Lee: the immortal Dragon, January 29, 2002, A&E Television Networks
  9. 영화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에선 무도회장서 난동 부리던 영국 해군을 두들겨 팬 것으로 나오지만, 이 영화 자체가 이소룡 가문의 저주가 어쩌고 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뒤섞인 오락영화일 뿐,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0. 일본이름이니 가토, 가토오, 카토오 등이 맞겠지만, 북미(北美)에선 알파벳 표기인 Kato를 그들 방식으로 케이토라고 읽어서 다들 케이토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오만한, 혹은 자신감 충만한 미국중심주의??
  11. 하드보일드 류의 전설이 된 《필립 말로우(Philip Marlowe)》 시리즈가 영화화된 것들 중 하나.
  12. 견자단이 조선인으로 출연한 《칠검(七劍)》(2005)의 경우, 그의 한국어 발음 때문에 수입사는 견자단의 한국어 대사를 더빙 처리했다. 원판으로 보면 정말 깬다.(…)
  13. 홍콩의 비공식 제목 아시는 분 추가바람
  14. 이후 쇼 브라더스는 성룡에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성룡을 붙잡아 적극 후원한 것도 추문회였다. 쇼 브라더스는 두 마리 용을 다 놓치고, 추문회는 두 마리 용을 다 붙잡은 셈이다. 여배우 정패에 대해서도 좀 더 알 수 있다.
  15. 《맹룡과강》에서, 이소룡을 처음에는 못마땅해 하며 얕보던 식당 종업원으로 나온다.
  16. 이소룡의 정부(情婦)로 소문난 정패의 집에서, 그것도 침대 위에서 죽었기에, 이런 소문이 돌았었고, 정패는 이소룡의 팬들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17. 아들인 이국호, 즉 브랜든 리가 영화 《크로우》 촬영 중 총기 오발 사고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영화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의 캐릭터가 사경을 헤맨 것과 같은 방식이라서, 저주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18. 예를 들어 그의 출연으로 인기가 떨어진 홍콩배우가 독살했다든지, 경쟁 영화사가 죽였다든지 등의 주장이다. 다만 이준구 선생은 암살의 주체를 누군가로 딱 집어서 지칭한 적은 없다고 한다.
  19. 아내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20. 이 제목도 암시적이다
  21. 이소룡의 전기 영화를 표방한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오류나 왜곡이 많지만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아내 린다의 독백이다. 린다가 실제로도 이런 말을 했는지, 아니면 영화에만 나오는 대사인지는 확인 요망.
  22. 《그린 호넷》이 당시 방영하던 《배트맨》의 안티테제(anti-thesis: 정반대, 반(反))적인 면이 있어, 사실상 짐 덩어리였던 로빈에 비교, 싸움도 잘하고 유능한 인물이 되었다는 평도 있다.
  23. 가끔 가면이 없던 때도 있었다.
  24. 주연인 그린 호넷이 겨우 featuring밖에 안 되었다는 걸 주목하라는 논지이다. 그러나 반론이 있다. 잘 검색해보면, 원제는 《The Green Hornet Coloring Book – “Kato’s Revenge” (featuring Van Williams and Bruce Lee)》이다. 비중이 큰 배역의 배우를 먼저 내세우는 게 할리우드의 전통적 관습이다. 이소룡이 너무 뛰어나서 주/조연 전도가 심했다기보다는, 케이토의 복수를 다루는 에피소드를 색칠공부책으로 출판했을 뿐이라는 게 반론의 내용. 반론이 더 객관적 아닌가?
  25. 다른 여배우를 차로 태워오라고 명령했다. 같이 있던 여배우는 황당해서 이 사람은 배우라고 하자, 그 제작자는 "그게 뭐 어쨌다고?"하는 식으로 씹고 갔다고.
  26. 편집되어 극장에 걸리긴 했으나, 이소룡 사후(死後)인 1974년의 일이다.
  27. 사족으로, 스즈키 관장 역의 배우는 프로야구선수 출신의 일본인으로, 《대마신(大魔神)》(1966)의 수트 액션을 하기도 했던 하시모토 리키(橋本力).
  28. IMDB. 150만 달러가 제작비라는 출처불명의 이설(異說)도 있다.
  29. 성룡을 정식 발굴한 건 《당산대형》, 《정무문》을 감독했던 라유 감독이다. 이소룡 사후(死後) 그의 후계자를 찾던 라유 감독은, 《소림문(少林門: Hand of Death)》(1975)에서 무술지도를 하기도 했고 실력이 인상적이었던 성룡(당시 예명 진원룡陳元龍)을 그의 아내가 추천하자, 바로 그를 불러 이소룡의 뒤를 잇는 용으로 성공하라며 성룡이란 예명까지 지어주고는, 그를 주연으로 《신(新)정무문》을 만드는 등 성룡을 키우려고 이소룡 흉내를 내게 하거나 진지한 연기를 시켜서 이후의 영화들도 줄줄이 실패하긴 했지만 무척 애를 썼다. 즉 이소룡이 한 건 성룡이 영화계로 뛰어드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고, 이소룡이 그랬던 것처럼, 성룡도 다른 영화사로 가긴 하지만 성룡을 본격적으로 키운 건 라유 감독이며, 성공시킨 건 성룡을 라유에게서 빌려와 《사형조수(蛇形刁手)》, 《취권》을 제작하여 대박을 낸 오사원 감독일 것이다. 이 와중에 성룡을 놓고 흑사회까지 얽힌 다툼이 벌어지고, 단순히 성룡을 데리고 라유 감독이 외국으로 달아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성룡납치사건이라 불렸던 사건까지 일어난다. 이때 끼어들어 다툼을 중재해서 성룡이 골든 하베스트에 자리 잡게 해준 것이 외팔이 검객으로 유명했던 천황거성(天皇巨星) 왕우(王羽)이다. 왕우는 무술실력도 실력이지만, 삼합회(三合會) 죽련방(竹聯幫)의 간부라는 얘기가 정설로 통할 정도로 암흑가와의 연관 소문이 많은 인물이다. 그리고 이후 《사제출마》의 기록적인 대성공으로 시작해, 성룡이 세계적인 대스타가 되게 후원한 건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이라고 보는 게 보다 정확할 듯하다.
  30. 이때 상대는 겁을 먹은 상태라 소극적으로 싸웠다 카더라.
  31. 과도한 중량으로 굿모닝 리프트 운동을 하다가 척추기립근에 심각한 손상이 왔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장기간 입원하는 등 고통을 겪었고, 주위에 그 운동의 위험성을 열성으로 전파했다고.(…)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자칫하다가는 허리가 뽀각날 수 있을 위험성이 데드리프트보다 높은 운동이니 함부로 하지 말자. 디시인사이드 헬스갤러리에 떠도는 말로는 100kg(…)으로 굿모닝을 하다 부상을 입었다 카더라.
  32. 아역 때 덤블링 등을 하는 연기를 한 적 있다.
  33. 이는 일본의 가부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34. 와다아~ 라든지 아뵤오우오우오우~~, 일본에서는 아쵸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싸움닭이 우는 소리 같다고도 하는 사람들도 있다.
  35. 투로(鬪路)가 아니다. 여러 기술들을 호흡과 힘의 흐름 등을 고려해 한 벌(套: 투)로 짜 맞추어, 길(路: 로)을 걷듯 반복 수련할 수 있게 해놓은 것이라 하여, 투로(套路)라 한다. 양판소 등에서 자주 보이는 오류들 중의 하나이다.
  36. History Special: How Bruce Lee Changed the World
  37. 이 건물은 그 중 일부로서, 사실상 영화사는 거의 망하다시피 한 지금도 이 정도다.
  38. 상어가 나오는 호러영화 《딥 블루 씨》에서 흑인 주방장으로 나오던 배우이다. 그 밖에 《할로윈》 7편, 《H20》에서도 흑인 수위로 나와 살아남는다.
  39. 생존 경쟁 등에서 낙오한 자, 패배한 자, 싸움에 진 개 등으로 보면 되는데, 굳이 비유를 들자면 런닝맨이광수 씨가 그나마 비슷하달까?
  40. 영어 제목은 《The Way of the Dragon》
  41. 우스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일본에서의 이소룡 상품화, 우상화는, 일본의 배우였던 하마무라 쥰(浜村純) 등이 작명했다는 이소룡의 필살기, 직각급강하삼단차기, 필살비연일문자오단차기, 신변번개팔꿈치치기4단회전 등등에서도 잘 드러나며, 일본의 인터넷에서는, 이소룡의 진정한 팬들만이 아는 거라며 아직 통용되는 경우도 일부 보일 정도. 국내에도 다이나믹콩콩코믹스를 통해 해적출판된 적 있는 《투혼의 권법자 이소룡 대백과》에서도 유사한 기술이름들이 나오며, “상대는 타격 당해 쓰러진 후에야 그의 팔꿈치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고 할 정도의 무서운 기술”이라는 해설도 있었다.(…)
  42. 이소룡 이전 미야모토 무사시최영의도 이미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다만 그 두 사람은 이소룡처럼 인기 영화배우가 아니었기에 널리 퍼지지 못했다.
  43. 노자(老子)장자(莊子) 관련 서적만 해도, 출판시기가 1842년, 18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절대다수 일반인들은 모르는 것도 당연했던 것이, 미국의 경우, 베트남전 때만 해도, 가독성을 높이려는 것도 있었지만, 미군들 중에 문맹이 많아 M-16 설명서를 만화형식으로 배포한 적도 있었고, 미국의 경찰공무원들 중에서도 자기 이름만 겨우 쓰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당시 미국 일반 대중들의 지적수준은 생각보다 낮았다.
  44. 당연하다. 이소룡 본인의 저술(著述)도 아닌, 이소룡 사후(死後), 이소룡 생전의 발언들을 수집하고, 그의 유품 등에서 나온 정리노트 등을 짜깁기한 것이고, 검색해보면, 필진(筆陣)들 중 동양철학 전문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45. 다만 닌자의 상품화, 과장 등은 이소룡 이전부터 있었다. 항목참조
  46. 자주 언급되는 롱 비치(Long Beach) 국제 가라테 대회에서의 이소룡 관련자료 역시, 이소룡 사후, 할리우드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47. 신기혁, 신인섭, 2012, 《미국 광고사(A History of Advertising in America)》, 한국학술정보(주), pp.163~164
  48. History Special: How Bruce Lee changed the World
  49. 기사가 “기타를 잘 연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50. 선수로 참가하여 우승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소룡은 시범자로서 참가하여 대련시범과 원 인치 펀치, 여러 기술 등을 공연한 것이지, 실제 시합을 한 것이 아니다.
  51. 중국에서는 서로 합(合)을 맞춰 영화의 격투처럼 짜 맞춘 것도 대련이라고 하는 것에 주의. 물론 용어 개정(ex》 품세(品勢)→(순우리말)품새) 이전의 태권도에도 약속대련이란 말이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약속대련과 (승부를 내는) 대련은 구별하였다. 반면 중국은 승부를 가르는 겨루기는 예전에는 비무(比武), 비새(比賽)도 썼지만, 무술을 모조리 쓸어버린 후로는 산타(散打)로 굳어지는 추세이다 중국의 우슈 대회에서는 마치 영화처럼, 얼마나 멋있고 그럴 듯하게 연출했냐를 평가하여, 10점 만점에 몇 점 하는 식으로 채점하는 경기를 대련(对练/對練, sparring set, sparring form)이라고 한다.
  52. 서림출판사에서 출판한 《절권도》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다만 절대로 따라하지는 말자. 몸이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이런 심한 훈련은 몸을 망가뜨릴 뿐이라는 게 현대의학에서 증명되었다.
  53. 이전 버전에서는 중국무술계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이질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 지금도 북미 등지에서 골치인 신비주의, 사이비 무술유파들이나 그러할 뿐이다. 1900년대 초중반, 민국 초기(1912년 건국)에 출판된 무술교본만 봐도, 팔굽혀펴기나 역기 들기, 역기 얹고 쪼그려 앉기 등을 강조한 중국무술교본들이 있다. 관련 자료 참고
  54. 시연만으로 따지자면, 이소룡보다 더 멋있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 검색만 해도 꽤 나온다.
  55. 60년대 유명 헤비급 챔피언은 무하마드 알리.
  56. 고교시절 이소룡은 홍콩의 출신고교배(...) 복싱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소룡이 최강, 혹은 그에 준한다는 억지주장의 근거가 되진 않는다. 만약 그게 근거가 된다면, 대한민국 체육 전공자들 중 투기종목 전공자들의 10% 정도는, 최소한 이소룡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소룡은 1950년대의 홍콩에서도 지역 고등학생간의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고, 대한민국 투기종목 전공자들 중 10%는, 5천만 이상이 사는 대한민국의 전국규모의 대회에서 한 번 정도는 우승한 사람들이니까.
  57. 1970~80년대 국내의 쿵푸도장에서 수련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리가 앞뒤, 좌우로 완전히 벌어지고, 팔굽혀펴기 100개, 턱걸이 20개, 윗몸일으키기 100개 정도를 해내지 못하면, 기술을 전혀 가르쳐주려고도 않는 도장이 흔했다고 한다. 승급자, 승단 심사에서도 체력심사는 필수였다고.
  58. 북미식 영어발음은 스쿠앗 혹은 스콰앗에 더 가까우나, 한국에 잘못 퍼진 스쿼트로 일단 표기
  59. 근육의 구성에 따라 조금 차이는 있을 수도 있다. 근비대 위주 훈련으로 근형질이 커지고 근원섬유의 발달이 적다면 상대적으로 좀 둔해진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안 했을 때보다는 빨라진다.
  60. 실제 벌크업을 통한 증량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속도보다는 지구력, 흔히 말하는 체력, 혹은 스테미너다.
  61. 의학적, 생물학적으로 근형질과 근원섬유의 발달은 구분되므로, 일반인 대비 근원섬유 밀도가 높은 사람은 존재한다. 근력은 근육 크기가 아니라 근원섬유와 근신경의 발달에 비례한다. 그리고 근밀도, 골밀도 등은 당연히 개인차가 있다. 하지만 오늘내일하는 병자(病者)와의 비교가 아닌 이상, 절대근육 어쩌고 할 정도로 크게 차이가 날 수는 없다.
  62. 이소룡의 근원섬유 밀도가 일반인보다는 아주, 취미로 운동하거나 무술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높았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사실 파워리프터나 그리퍼, 스트롱맨, 역도선수 등이 행하는 근력 위주의 훈련은 근형질보다 근원섬유와 근신경을 발달시키므로, 근비대 위주의 보디빌더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더 작은 크기의 근육으로도 더 강한 근력을 낸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최상급의 선수들은 보디빌더보다 더한 근비대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다만 육체미를 고려 않는, 근력 위주로 단련한 몸이기에 겉보기엔 흉해 보일 정도가 많다. 즉 근밀도가 어느 정도 더 높다 해도, 인간의 생체구조상, 겉보기에 날씬해 보이지만,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하는 엄청난 파괴력이나 괴력을 뿜어내는 사람이 이소룡이었다는 판타지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만 증명될 뿐이다.
  63. 최영의 총재에게 산중 수련을 권한 인물이기도 하다.
  64. 당시는 1970년대 즈음이었다. 2016년 기준으로도 5,000만원이 넘는 거액이다. 이는 중국무술과 동양무술 전문가나 수련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박종관 선생의 저서에서도 언급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다.
  65. 본명 후지타 토쿠아키(藤田徳明). 용비운은 일종의 링네임 같은 개념. 정룡회중국권법도장(精龍會中國拳法道場)의 지도자로서, 실전무술을 모토로 일본 내의 중국권법 보급에 힘썼다. 51세의 나이로 신장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기공(氣功), 사권(蛇拳), 비종권(秘宗拳), 취팔선권(酔八仙拳), 양식태극권(楊式太極拳), 병장기술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투룡비새(闘龍比賽)라는 이른바 풀 컨택트 쿵푸대회를 장기간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었다. 일본 내의 중국권법 저변 확대에 대한 공헌은 상당했지만, 정작 실력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 예로, 《링의 혼(リングの魂)》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마련한 용비운의 문하생 3명과 극진가라데 선수 3명의 대결은 0:3으로 용비운 측의 참패였다. 다만, 대결이 극진 룰로 개최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영상 보기
  66. 취팔선권(醉八仙拳)을 표방하고 있는데, 성룡의 취권을 도입한 동작이 많이 보인다. 이는 본인이 정식으로 수련한 권법도 있지만 책만 보고 연구한 권법도 많고, 부족한 부분을 각종 미디어를 통해 보완한 것 때문에 생기는 일로, 사권의 경우에는 자료가 적어서 크리스티의 움직임까지 도입했다(…)고 한다.
  67. 강함에 대한 신뢰할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는 게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시범이나 길거리 시비에서의 승리 등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는데, 참고로 프로 격투기 선수들은 설혹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다 해도, 그런 걸 수치로 여기면 여겼지, 자랑거리로 삼는 경우는 없다는 걸 참고하자.
  68. 실제 이소룡은 비(非)중국인에게 무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중국무술가들에게 도전받았다고 한다.
  69. 추정제작비 120만 위안, 중국 내 흥행 1억 3,600만 위안, 홍콩에서는 1,615만 홍콩달러를 벌어, 성룡의 《사제출마》가 갖고 있던 흥행최고기록, 1,102만 홍콩달러를 갱신했다.
  70. 이런 과정 같은 게 궁금한 분들은 SBS에서 방영한 《주먹쥐고 소림사》를 참조하자. 남소림사 역시 이런 과정에서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71. 원래는 탑에서 카림 압둘 자바를 쓰러뜨리고, 뒤에 무술 대회가 나오는 시나리오였다고도 한다.
  72. 당시 고(故) 김태정원표 등의 배우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73. 추위를 많이 타던 이소룡이 홍콩, 대만 등에 비해 무척 추운 한국에서의 촬영을, 계절이 바뀌면 하자면서 계속 미루었다는 얘기도 있다.
  74. 용의 권 리 신 스킨 한정
  75. 파이팅 스타일은 절권도에 이소룡 특유의 기합을 내지르며 싸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이 이소룡의 원인치 펀치(촌경)와 똑같은 자세의 펀치를 날린 것.
  76. 쿵푸영화를 좋아하는 격투소녀라는 설정으로, 전투 대사 중에 불타라 드래곤!!!이라는 대사가 있고, 기술도 드래곤 킥(추격기술), 드래곤 허슬(최종각성기) 등 이소룡을 떠올리게 하는 기술이 많다. 일상복도 트레이닝복, 다만 색깔은 초록
  77. 파일럿인 히비키 카미시로가 절권도 실력자란 설정 때문인지 기술 연출에 이소룡의 오마쥬가 많이 들어가 있는 편. 특히 제니온 가이의 최종기술인 니벨룽 어나일레이션은 대놓고 이소룡의 오마쥬다.
  78. 본편에선 잘 드러나지 않고, DLC에서 이소룡의 오마쥬임이 많이 부각되는 편.
  79. 이소룡과 실베스타 스탤론을 적절히 섞은 캐릭터.
  80. 특이하게도 영화배우로서의 이소룡을 모티브로 삼았다.
  81. 초반~중반까지 영삼의 누나 윤영의 선물로 이소룡의 노란색 쫄쫄이를 항상 입고 다녔다. 나중에는 본인이 질려서 버리지만.
  82.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실베스터 스탤론(헤어스타일, 벌크업 된 근육질 몸매) + 이소룡(특유의 기합소리와 괴성)이라고 한다. 켄시로는 작중에서 쌍절곤을 쓰기도 한다.
  83. 그의 아들 3형제가 쓴 평전 《This is 최배달》에 이 내용이 나온다
  84. 처음 보디빌딩을 시작했을 땐 72kg 정도였었다고 한다. 나중에 불필요한 지방을 운동으로 전부 없앴다고 전해진다.
  85. 이는 이소룡 최강자론을 우기는 주장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는 시합이나 대회 등에 출전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거기 나가서 못 이긴다고 인정하지도 않겠다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반박의 요지이다.
  86. 그런데 본인 스스로는 성격을 잘 다스리지 못 하는 듯했다. 인터뷰에서 스스로 "제가 살면서 확실히 깨달은 한 가지는 제가 성격이 안 좋다는 겁니다."(웃음) 라고 말하거나, 그의 친구 댄 이노센트가 "이소룡은 영화가 아닌 실제로도 화를 곧잘 냈죠." 라고 한 적도 있다. 또한 이소룡은 유명해진 후로는, 자신을 찍으려는 기자의 카메라를 부수거나, 기자가 피하면 쫓아가서 발차기로 카메라를 깨기도 하고, 아예 기자를 폭행하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유명해지는 것에 비례해 악당 이미지가 잡혀가고 있었을 정도. 그러나 그의 돌연사로 이런 일들은 묻혔다.
  87. 1973년 제작 인기작들의 제작비: 《007 Live and Let Die》(700만 달러), 《빠삐용》(1,200만 달러), 《스팅》(550만 달러), 《로빈 훗》(1,500만 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