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사

< 조선(태정태세문단세에서 넘어옴)
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대조선국 국왕의 상징인 '금수오조원용보흉배'.
보통 곤룡포의 양 어깨와 가슴 중앙에 붙여져있다.

1 조선의 왕들

순서묘호시호휘(이름)군호[1]재위기간생몰년도능호
추존목조인문성목대왕
(仁文聖穆大王)
이안사
(李安社)
-추존?년
1274년
덕릉
(德陵)
추존익조강혜성익대왕
(康惠聖翼大王)
이행리
(李行里)
-추존?년
?년
지릉
(智陵)
추존도조공의성도대왕
(恭毅聖度大王)
이춘
(李椿)
-추존?년
1342년
의릉
(義陵)
추존환조연무성환대왕
(淵武聖桓大王)
이자춘
(李子春)
-추존1315년
1361년
정릉
(定陵)
01태조강헌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康獻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2]
이성계
(李成桂)

이단(李旦)[3]
-1392년 8월 4일
1398년 10월 14일
1335년 11월 4일
1408년 6월 18일
건원릉
(健元陵)
02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이방과
(李芳果)

이경(李曔)[4]
영안(대)군1398년 9월 5일
1400년 11월 28일
1357년 7월 26일
1419년 10월 15일
후릉
(厚陵)
03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이방원
(李芳遠)[5]
정안(대)군1400년 11월 28일
1418년 9월 9일
1367년 6월 21일
1422년 6월 11일
헌릉
(獻陵)
04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이도
(李祹)
충녕대군1418년 9월 9일
1450년 3월 30일
1397년 5월 7일
1450년 3월 30일
영릉
(英陵)
05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이향
(李珦)
-1450년 3월 30일
1452년 6월 1일
1414년 11월 15일
1452년 6월 1일
현릉
(顯陵)
06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
이홍위
(李弘暐)[6]
노산군[7]1452년 6월 1일
1455년 6월 25일
1441년 8월 9일
1458년 1월 9일
장릉
(莊陵)
07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이유
(李瑈)
수양대군[8]1455년 6월25일
1468년 9월 22일
1417년 11월 2일
1468년 9월 23일
광릉
(光陵)
08예종양도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이황
(李晄)
해양대군1468년 9월 22일
1469년 12월 31일
1450년 1월 14일
1469년 12월 31일
창릉
(昌陵)
추존덕종의경(懿敬)
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이숭(李崇)
이장(李暲)
도원군추존1438년
1457년
선릉
(宣陵)
09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이혈
(李娎)
잘산군[9]1469년 11월 28일
1494년 12월 24일
1457년 8월 19일
1495년 1월 20일
선릉
(宣陵)
10--[10]이융
(李㦕)
연산군[11]1494년
1506년 9월 2일
1476년 11월 22일
1506년 11월 20일
연산군묘
(燕山君墓)
11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이역
(李懌)
진성대군1506년 9월 2일
1544년 11월 15일
1488년 4월 16일
1544년 11월 29일
정릉
(靖陵)
12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이호
(李峼)
-1544년
1545년 8월 7일
1515년 3월 10일
1545년 8월 7일
효릉
(孝陵)
13명종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이환
(李峘)
경원대군1545년
1567년 6월 28일
1534년 7월 3일
1567년 8월 7일
강릉
(康陵)
14선종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이균(李鈞)
이연(李昖)[12]
하성군1567년
1608년 3월 12일
1552년 4월 26일
1641년 7월 1일
목릉
(穆陵)
선조
15--[13]이혼
(李琿)
광해군[14]1608년 3월 16일
1623년 4월 11일
1575년 6월 4일
1641년 8월 7일
광해군묘
(光海君墓)
추존원종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이부
(李琈)
정원(대원)군추존1580년
1619년
장릉
16열조장목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莊穆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이종
(李倧)
능양(대)군1623년 3월 13일
1649년 5월 8일
1595년 11월 17일
1649년 5월 8일
장릉
(長陵)
인조
17효종충선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忠宣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이호
(李淏)
봉림대군1649년 5월 13일
1659년 5월 4일
1619년 5월 22일
1659년 5월 4일
영릉
(寧陵)
18현종장각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莊恪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이연
(李棩)
-1659년 5월 9일
1674년 8월 18일
1641년 2월 4일
1674년 8월 18일
숭릉
(崇陵)
19숙종희순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僖順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이순
(李焞)[15]
-1674년 8월 23일
1720년 6월 8일
1661년 8월 15일
1720년 6월 8일
명릉
(明陵)
20경종각공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恪恭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이윤
(李昀)
-1720년 6월 13일
1724년 8월 25일
1688년 10월 28일
1724년 8월 25일
의릉
(懿陵)
21영종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이금
(李昑)
연잉군1724년 8월 30일
1776년 3월 5일
1694년 9월13일
1776년 3월 5일
원릉
(元陵)
영조
추존진종소황제(昭皇帝)
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
이행
(李緈)
효장세자/경의군추존1719년 11월 16일
1728년
영릉
(.陵)
추존장종의황제(懿皇帝)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이선
(李愃)
사도(장헌)세자[16]추존1735년
1762년
융릉
(隆陵)
장조
22정종공선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
(恭宣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이산
(李祘)
-1776년 3월 10일
1800년 6월 28일
1752년 9월 22일
1800년 6월 28일
건릉
(健陵)
정조
23순종선각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宣恪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이공
(李玜)
-1800년 7월 4일
1834년 11월 13일
1790년 6월 18일
1834년 11월 13일
인릉
(仁陵)
순조
추존익종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이영
(李旲)
효명세자추존1809년
1830년
수릉
(綏陵)
문조
24헌종장숙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莊肅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이환
(李烉)
--1834년
1849년 6월 6일
1827년 7월 18일
1849년 6월 6일
경릉
(景陵)
25철종충경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忠敬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이원범
(李元範)

이변(李昪)[17]
덕완군[18]1849년 6월 9일
1863년 12월 8일
1831년 6월 17일
1863년 12월 8일
예릉
(睿陵)
26고종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이재황(李載晃)
이희(李熙)[19][20]
익성군[18]1864년 1월 21일
1907년 7월 20일
1852년 9월 8일
1919년 1월 21일
홍릉
(洪陵)
27
[21]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이척
(李坧)
-1907년 7월 20일
1910년 8월 29일
1874년 3월 25일
1926년 4월 25일
유릉
(裕陵)
  • 인조 때부터는 조선 국왕의 시호를 내려주는 주체가 에서 으로 바뀌었다. 조선 조정은 청에서 내려준 시호를 받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 대한제국 수립 후 고종은 자신으로부터 4대 위의 왕들과 개국시조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정조, 순조, 헌종, 철종과 왕으로 추존되었던 효장세자, 사도세자, 효명세자 그리고 개국시조인 태조가 황제로 추존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이 내려준 추존황제들의 시호는 폐지되었다. 시호 앞부분 두 글자가 명과 청에서 내려준 시호다.

어느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조선의 왕명을 이어놓은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 알려져 있긴 한데 근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정태세문단세까지밖에 모른다. 이나마 "태태세문단세" 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많다.

2 대한제국의 역대 황제

대수묘호연호이름재위기간즉위전 지위/군호능호
1대고종(高宗)개국, 건양, 광무이희(李熙)1897 ~ 1907익성군홍릉
2대순종(純宗)융희이척(李坧)1907 ~ 1910(왕세자 -> 황태자)유릉

3 대한제국의 작위 친왕(親王, 王)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군(君)의 작위가 친왕(親王)으로 격상되었는데, 이 항목은 친왕, 왕의 작위를 받은 황족을 다룬다

군호
[22]
작위휘(이름)재위기간생몰년도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
(獻懿大院王)
이하응
(李昰應)
(왕 작위 추증)1820
1898
완화군완친왕
(完親王)
이선
(李墡)
(친왕 작위 추증)1868
1880
의화군의친왕
(義親王)

이강
(李岡)
1900년 8월 17일 ~ 1910년 8월 29일1877
1955
-영친왕
(英親王)
이은
(李垠)
1900년 8월 17일 ~ 1907년 8월 7일1897
1970

왕가는 전주 이씨다.

3.1 계보도

  • 즉위한 뒤 피휘를 위해 이름을 바꾸었으면 빗금 뒤에 이름만을 적습니다.
  •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특정 사건을 위해 문서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기재된 인물은 해당 사건으로 연결합니다.
  • 양자로 들어간 관계면 친자관계에서는 취소선을 긋고, 양자관계에서는 바탕색을 깔지 않습니다. 그 자녀관계는 양자관계 하에 편입합니다.
  • 적자인 경우에는 진한 색으로, 서자인 경우에는 연한 색으로 차이를 두어 표시합니다.
이안사
이행리
이춘
이자춘
1.이성계/단이원계이화
이방우2.이방과/경이방의이방간3.이방원이방번이방석
이복근 이제이보4.이도이종이여이유
이흔[23]이채[24]5.이향7.이유이용이여이유
 이순[25]6.이홍위이장8.이황
 이윤인[26]9.이혈
 이윤의10.이융11.이역
 이귀달이황12.이호13.이환이초
이진[27]이부14.이균/연이균/연
이순신[28]
14.이균/연
이진15.이혼이부이제이의
 16.이종이전[29]
 이왕17.이호이요이곤[30]이요
 이석견18.이연 이유[31]
 이혼[32]19.이순 이혁
 이탄20.이윤21.이금 이숙[33]
 이행이선 이진익
 22.이산이정이산이인이진이찬이병원
 23.이공이해동/광이채중/구이당[34]이채중/구
이영25.이원범/변이원범/변이최응이하응
24.이환26.이재황/희 이재긍이희하이재선이재면이재황/희

3.1.1 대한제국 이후

이채중/구
이창응이정응이최응이하응
이재원이재원이재완이재긍이희하이재면26 / 1.이재황/희
 이지용이지용이준용이선(27) / 2.이척이강이은
 이우 이건이우이갑이진이구
 이원이원[35]

3.2 묘호가 추증된 왕

공정왕 → 정종숙종 때
노산군 → 노산대군 → 단종숙종 때
선종 → 선조광해군 때 [36]
열조烈祖 → 인조효종 때(*)[37]
순종 → 순조 [38]철종 때
영종영조고종 때 [39]
정종정조고종 때(**)[40]
(장종장조)고종 때(**)[40]
(익종문조)고종 때(**)[40]

이전 버전까지는 신종에서 세조로 추존된 예도 적혀 있었으나, 세조의 경우는 신종으로 확정하기 전에 예종이 세조로 하자고 뒤집은 것으로, 신종은 신숙주 등이 의견을 올린 선에서 끝난다. 따라서 추증의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원칙은 '덕이 있으면 종, 나라를 세우거나 중흥하는 등의 공을 세우면 조'이다. 즉, 종<조에 가깝다. 물론 조선왕조의 경우엔 '조'가 붙은 왕들의 업적이 '종'들보다 더 형편 없는 경우가 많은데, 정통성 강화 같은 후대의 필요에 따라 멋대로 추숭했기 때문이다.

다른 왕조들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조'를 남발했다. 다른 왕조에서는 '~조'는 기껏 1~3명의 진짜 진짜 업적이 높은 왕에게나 붙는 묘호이며, 조선처럼 '~조'가 많은 왕조는 베트남의 쩐 왕조 등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41]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한국사에서는 앞의 왕조인 고려에선 추존왕 제외하고 실제로 왕을 했던 사람 중에서는 오직 태조 왕건 한 사람만 '~조'가 붙으며,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몽골 제국)는 두 명[42], 심지어 당나라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간간히 "정통이면 종, 방계면 조"라는 말이 있는데 딱 조선왕조의 상황에만 대입해보면 우연히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낭설이다. 게다가 혜경궁 홍씨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인 정조나 세종의 적자인 세조 등 맞지 않는 분류도 있다.

인터넷 상이나 신문지상에서도 '조와 종의 차이가 뭐냐'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원칙대로라면 위에 나온 '조공종덕'이 맞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사실상 별 의미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냥 '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름 조, 종의 차이를 구분하겠답시고 온갖 해괴한 분류가 나와 오히려 원래 구분과는 반대로 "조는 영 못한 왕에게 주는 호다. 세조- 계유정난, 선조 - 임진왜란, 영조 - 사도세자 죽임 등등..."으로 합리화하는 경우도 보인다. 당연히 개구라니 믿지 말자.

3.3 추존된 왕

묘호시호휘(이름)생몰년도능호추존한 국왕비고
목조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이안사
(李安社)
? ~ 1274년덕릉(德陵)태종태조의 직계 조상.
이들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용비어천가가 지어짐.
익조강혜성익대왕(康惠聖翼大王)이행리
(李行里)
? ~ ?지릉(智陵)
도조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이춘
(李椿)
? ~ 1342년의릉(義陵)
환조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이자춘
(李子春)
1315년 ~ 1361년정릉(定陵)
덕종회간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이장
(李暲)
1438년 ~
1457년 9월 20일
경릉(敬陵)성종의경세자로서 알려져 있다.
세조의 장남이며 성종의 부친.
원종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이부
(李琈)
1580년 6월 22일 ~
1619년 12월 29일
장릉(章陵)인조선조의 5남 정원군
인조의 부친.
진종효장(孝章)
소황제(昭皇帝)
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
이행
(李緈)
1719년 ~ 1728년영릉(永陵)정조
순종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
사도세자 사후 정조가 양자가 되어 그 명목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때 다시 추존되었다.
장조
장종(莊宗)
사도(思悼)
장헌(莊獻)
의황제(懿皇帝)
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이선
(李愃)
1735년 1월 21일 ~
1762년 5월 21일
융릉(隆陵)고종사도세자로 알려져 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세자로 추존
대한제국 때 장종(1899)으로 추존되었다가 얼마 뒤 장조의황제(1901)로 추존
문조
익종(翼宗)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체원찬화석극정명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體元贊化錫極定命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이영
(李旲)
1809년 8월 9일 ~
1830년 5월 6일
수릉(綏陵)헌종
고종
효명세자로 알려져 있다.
헌종 때 익종으로 추증되었으며 대한제국 때 고종에 의해 문조 익황제로 다시 추증.

4 왕실 문화

4.1 궁중 용어

  • 궁중에서는 거센소리된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 통기(방귀), 비수(콧물), 이부(귀) 등 한자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따로 궁중 전용으로 정해지지 않으면 한문식 표현으로 말하면 될 정도.
  • 마마 : 왕, 왕비, 대비, 상왕, 세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극존칭.
  • 마노라 : 원래 마마와 동급의 존칭이었으나 이후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사용되다 세자빈에게만 붙이는 존칭으로 격하되었다.
  • 자가 : 공주, 옹주, 정일품 빈에게 붙이는 존칭. 세자의 딸인 군주와 현주 역시 자가로 불렸을 확률이 높다.
  • 마마님 : 상궁에게 붙이는 존칭. 빈 이하의 후궁들도 이에 해당된다.
  • 매화 : 왕의 변. 매우라고도 한다.
  • 성체, 옥체 : 왕의 몸
  • 용안, 옥안 : 왕의 얼굴
  • 어수 : 왕의 손
  • 면부 : 왕 이외 왕족의 얼굴
  • 옥루, 용루 : 왕의 눈물
  • 안수 : 왕 이외 왕족의 눈물
  • 옥음 : 왕의 목소리
  • 수라 : 왕의 밥
  • 상후 미령하시다 : 왕/중전께서 편찮으시다
  • 아뢰다 : 말씀드리다
  • 두굿겁다 : 기쁘다
  • 송송이 : 깍두기
  • 대루리 : 다리미
  • 적계, 산계 :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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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궁중 예법

  • 후궁은 자신의 자식에게 무조건 존대를 해야만 하며, ‘너’라고 함부로 칭해서도 안된다.[43] 왕의 자식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품이지만 후궁들은 가장 높아봤자 정일품으로, 자식보다 품계가 낮았다.
  • 마마는 왕, 왕비, 대비, 세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극존칭이다. 세자빈조차 마마라 할 수 없었다.
  • 혼인하지 않은 왕의 자식들은 아기씨라 한다. 혼인을 하거나 관례를 치르면 대군이나 군은 대감, 공주옹주자가라 불렀다.
  • 왕의 자식들은 후궁 소생이라 해도 중전이 공식적인 어머니다. 그렇기에 후궁 소생의 왕자가 왕위에 올라도 대비를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한 예로, 덕혜옹주가 어릴 때 누군가 그녀에게 외가가 어디냐 물었더니 생모인 복녕당 양씨의 고향이 아닌 명성황후의 고향인 안국동이라 대답한 일화가 있다. 즉, 왕의 자식은 생모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어마마마'=중전이다. 사극에서 후궁에게 '어마마마'라 하는 것은 여러모로 고증 오류인 셈이다.
  • 후궁들은 세자나 세자빈 등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 세자빈은 무품 빈이지만 후궁 빈은 정일품이다. 또한 세자빈은 세자의 정실부인이자 왕의 공식적인 며느리이므로 세자빈이 더 높다.
  • 상궁의 존칭은 '마마님'이다. 빈 이하의 후궁 역시 마찬가지로 마마님이라 해야 한다. 정일품 빈의 존칭은 왕녀와 마찬가지로 '자가'다.
  • 자신이 일하거나 머무는 구역 이외로 함부로 갈 수 없다. 예를 들어 세답방 나인이 마음대로 수라간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수라간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갈 수 있다. 이는 왕자와 왕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후궁 소생의 군이 궁에 왔다고 하여 아무데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강녕전과 교태전, 생모인 후궁의 처소 등으로 제한된다. 자신의 구역이 있다는 얘기.
  • 나비 모양 떨잠은 왕비, 대비 등 정비는 똑바로 달 수 있다. 하지만 후궁은 정일품 빈만이 거꾸로 뒤집어서 착용한다.
  • 봉황문양과 봉잠을 후궁이나 일개 왕족이 사용할 수 없다. 왕비와 대비, 세자빈에게만 허락된다.
  • 왕족 이외의 사람은 궁 안에서 죽을 수 없었다. 궁녀의 임종이 임박할 경우 사가로 내보내졌다.
  • 대감은 정2품 이상의 당상관에게 사용하는 경칭이며, 영감은 종2품, 정3품의 당상관에게 사용한다. 나리는 지체 높은 사람이나 당하관에 대한 존칭이다. 즉, 공주부마는 종1품이므로 대감, 옹주의 부마는 종2품이므로 영감이라 불렸다. 군주의 남편(부위)은 정3품 당상관이므로 '영감'이라 부른다. 은 시대에 따라 다르나, 조선조에는 왕이 2품 이상의 신하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 합방/승은 관련
    • 일식월식, 동지하지에는 합방을 하지 않았다. 일식은 태양의 양기가 막히고 월식은 달의 음기가 막히며, 동지는 밤이 길어 음기가 지나치고 하지는 낮이 길어 양지가 지나쳐 이때 임신하게 되면 음양의 부조화로 산모와 아이가 고생하고 아이는 평생 병이 많은 등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고 여겼다.
    • 기상이 비정상적일 때에 합방하지 않았다. 비, 뇌우, 바람, 천둥, 폭풍우 등. 역시 음양이 균형을 이루지 않아 고생하게 된다고 여겼다.
    • 초하루와 그믐, 상현달과 하현달이 뜰 때에는 달의 음기가 지나치거나 모자라 합방하지 않았다.
    • 후궁의 합방과 달리 중전의 합방은 국가 지대사로 여겨졌다. 관상감과 제조상궁이 협의하여 길일을 잡았는데, 금기가 워낙 많아 실제로 합방이 가능한 날은 1년에 며칠도 되지 않았다.
      • 합궁일은 왕비의 생리 후 닷새가 지난 날로 한다.
      • 일진에 사(巳)가 들어가는 뱀날, 인(寅)이 들어가는 호랑이날과 앞에 나온 사례에 해당하는 날은 합궁할 수 없었다.
      • 각종 질병이 있을 때는 합방할 수 없었다.
      • 객지에서는 합방할 수 없었다.
      •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합방할 수 없었다.
      • 회임한 후부터 해산한 뒤 첫 생리혈이 비칠 때까지 합방할 수 없었다.
      • 중전과 합방을 위한 길일이 정해지면 대전상궁들의 지휘 하에 모기장, 이부자리, 물수건, 타구(침 뱉는 그릇), 촛불 5개 등 합방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 보통 자정에 시작하여 첫 닭이 울 때(오전 5시 경) 끝내야 했다.
      • 강녕전에는 방이 9개 있는데, 우물 정(井)자로 이루어진 형태다. 가운데에 왕이 머물고 각 방마다 숙직상궁이 1명씩 들어가 있는데, 왕이 힘이 부족하거나 복상사의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을 들고 대기했다. 닭의 목을 따 피를 마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44] 합궁할 때 이 상궁들이 이리저리 하라고 지시했는데, 과하다 싶으면 자중하라고까지 했다
      • 이부자리가 정돈되면 숙직상궁들이 촛불 5개를 켜고 나가면 왕과 왕비가 들어왔다. 숙직상궁을 제외한 모든 궁녀는 철수하는데, 침전 주위에 머물 수 있는 숙직궁녀는 보통 60~70대 이상이었다. 이보다 젊으면 무조건 철수해야 했다.
      • 침전의 불을 꺼서 중전이 왕의 몸을 볼 수 없어야 했다. 왕이 오른쪽, 왕비는 왼쪽에 누워야 했다.
      • 왕비는 절대 합궁 중 눈을 뜨거나, 소리를 내거나, 옥체에 손을 대거나, 스스로 몸을 떨고 흔드는 등 움직이거나, 옥체 위에 올라가서는 안 되었다. 그냥 눈 감고 움직이거나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다. 약 5시간 동안.
    • 궁녀가 승은을 입게 될 경우, 목욕재계 후 손발톱을 모두 깎고 옷을 모두 벗겨 위해가 될만한 것이 없는지 검사한 뒤 그 상태 그대로 들여보내졌는데, 합방 후 왕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그대로 나와야 했다.
    • 궁녀들은 허공에 홍시를 매달아놓고 혀로 핥아먹는 연습을 했는데, 이는 승은을 입게 되었을 경우 왕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 태교와 해산 관련
    • 왕비가 회임하면 산실청을, 후궁이 회임하면 호산청을 설치해 태교와 해산을 도왔다. 어의와 의녀, 조정의 대신이 배속되었다. 약방에 세 명[45]의 제조(提調)가 돌아가면서 숙직했다. 이들이 숙직할 때에는 산실청이 설치됐을 때랑 왕이 아플 때 뿐이다.
    • 예정일 한두 달 전에 산실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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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트리비아

5.1 이런저런 기네스

  • 최장기 재위는 21대 영조(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이고 2위는 19대 숙종(1674년 8월~1720년 6월, 45년 10개월), 3위는 26대 고종(1863년 12월~1907년 7월, 43년 7개월) 순이다. 그외에 40년 넘게 재위한 왕은 4위 선조(1567.7~1608.2, 40년 7개월 가량)고 그 다음은 5위 중종(1506년 9월~1544년 12월, 38년 2개월)이다.
  • 최단 재위는 12대 인종(1544년 11월~1545년 7월, 약 9개월), 2위는 8대 예종(1468년 9월~1469년 11월, 1년 2개월), 3위는 2대 정종(1398년 9월 5일 ~ 1400년 11월 13일, 2년 46일) 4위는 5대 문종(1450년 2월~1452년 5월, 2년 3개월) 순.
  • 최고령 즉위는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이고, 뒤이어 2대 정종(42세), 7대 세조(39세), 5대 문종(37세)가 따른다. 최연소 즉위는 24대 헌종(8세). 2위는 순조(11세). 단종은 명종과 함께 공동 3위(12세)이다. 4위는 성종으로 13세, 5위는 숙종으로 14세다.
  • 수명이 제일 길었던 왕은 역시 제일 오래 재위한 21대 영조(83세)이고 2위는 태조 이성계(74세), 3위는 26대 고종(68세) 순이며, 가장 단명한 왕은 6대 단종(17세), 8대 예종(20세), 24대 헌종(23세) 순이다. 단 단종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가장 수명이 짧았던 왕은 예종이다. 한가지 웃긴 것은 쫓겨난 광해군이 67세까지 살아서 역대 4위의 기록이다. 시골이방 만큼의 권력도 없던 정종도 62세까지 장수했다. 그외에 60을 넘긴 왕으로는 딱 환갑을 맞이했던 숙종이 있다.
  • 가장 아들이 많았던 왕은 세종으로 총 18남을 두었고, 가장 딸이 많았던 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17녀를 두었다. 정실과 후궁을 모두 합쳐서 자녀 수가 제일 많았던 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총 12남 17녀를 두었다. 또한 세종은 정실(소헌왕후)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총 8남 2녀로 태조와 태종(둘다 7남 4녀. 단 태조는 신덕왕후신의왕후 2명)에 이어 2번째이며 총 자녀 수도 18남 4녀로 역대 조선 국왕 중 5번째다.호부 밑에 견자 없다 반면 자식이 아예 없던 국왕으로는 단종, 인종, 경종, 순종이 있다.
  • 가장 많은 부인(왕후와 빈, 자녀를 두었으나 첩지를 받지 못한 여인까지 모두 포함)을 둔 왕은 3대 태종과 9대 성종으로 각각 12명.
  • 세자를 가장 오래 지냈던 왕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 1875년 세자에 책봉된 후 1907년까지 32년을 세자 자리에 있었다. 1895년에 왕태자, 대한제국이 성립되는 1897년부터는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2번째로 세자 자리를 가장 오래 지킨 왕은 20대 경종(30년) 3번째는 5대 문종(29년).
  • 최고령으로 세자가 된 인물은 2대 정종(42세). 최연소로 세자가 된 인물은 27대 순종(2세).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까지 따지면 최연소 원자(출생 하자마자)-세자(돌)는 사도세자다.
  • 후궁이 아닌 정실 왕후를 가장 많이 둔[46]국왕은 각각 3명씩 둔 중종(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과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이다. [47]. 반면 문종은 세자 시절에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문종이 즉위한 뒤 추존)가 사망한 후 새로 왕후를 들이지 않아서 재위 기간 동안 왕후가 없던 유일한 국왕이다.

5.2 기타

  • 3대 태종 이방원은 역대 조선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물론 태조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인 고려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그것도 17세에 최연소로 급제하였다.
  • 18대 현종은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다. 부왕 효종이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 외 조선 건국 이후 출생한 국왕 중 도성 한양 밖에서 태어난 왕은 16대 인조(황해도 해주). 반대로 최초로 도성 한양에서 태어난 왕은 4대 세종이고, 최초로 궁궐 내에서 태어난 왕은 6대 단종.
  • 한양에서 즉위하지 않은 왕은 초대 태조 이성계와 3대 태종 이방원. 둘 다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했다.
  • 조선 국경을 넘어 외국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국왕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 순종이다. 태조는 애초에 출신이 동북면[48]에 공민왕 때 요동 지방을 크게 들쑤시고 온 적도 있고, 태종과 세조는 왕자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효종은 상술되었듯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왔고,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볼모로 있던 시절에 태어난 국왕이다. 순종은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일본을 방문했던 왕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인 1917년에 일본을 방문해 약 20여일 정도 있었다. 하마터면 선조도 조선 국경을 넘어갈 뻔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효종의 경우에는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망하는 순간과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하는 광경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베이징에서도 수개월 체류했으니 가장 인상깊은 경험을 했다 할수있을 것이다.
  • 임금이나 세자의 자식이 아닌데 왕위를 이은 왕은 선조, 인조, 철종, 고종이다. 인조는 자기가 왕이 된 후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증해서 임금의 자식이 되었고,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으며 고종은 익종(뒷날의 문조)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므로 이들 모두 어쨌든 임금의 자식이 되긴 했다. 선조와 철종의 아버지는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지만 왕으로 추존되지는 않았다. 세자의 자식으로 왕이 된 케이스는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있다.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고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양부 효장세자는 진종으로, 생부 사도세자는 훗날 고종에 의해 장조로 추존되었다.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 상왕이 되었던 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49], 고종이 있다. 이중에서 태조, 태종, 세조를 빼고는 전부 다 외압으로 상왕이 되었다. 양위 드립을 쳤던 왕으로는 위의 왕을 빼고도 다음과 같다.
    • 세종 - 끝내 대리청정으로 합의를 봤다. 세종 24년부터 세자가 섭정을 했다. 따라서 세종 24년 이후의 업적은 실질적으로 아들인 문종의 업적으로 봐야 한다.
    • 중종 - 죽기 직전에 인종에게 왕위 물려줄까?하고 한번 해보았으나 조정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었고 어차피 얼마 안가서 죽었는지라...
    • 선조 - 세자인 광해군을 아주 가지고 놀았다. 광해군이 적장자로서 세자에 책봉된 것도 아니고, 장남 임해군이나 적자 영창대군이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세자가 된지라 광해군은 선조가 양위드립을 칠때마다 불충으로 몰리지 않으려 죽을 똥을 쌌다.
    • 영조 - 두세 차례 선위 파동을 일으켜서 세자가 통곡하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기절까지 했다.
  • 왕이 되기 전에 대리청정을 해본 왕으로는 태종, 문종, 예종(세조가 아팠을때 잠깐), 광해군, 경종, 정조 등이 있다. 태종은 세자 시절부터 군사권을 지휘하는 등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사도세자,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은 했으되 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광해군의 경우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를 이끈 경험이 있고 소현세자는 정묘호란 때 분조를 이끌었으나 왕이 되기 전에 죽었다.
  • 조선 왕들은 즉위할 때 평균 만 23세였으며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 평균 수명은 46세였다. 만 24세에 즉위해 24년 재위하고 48세에 죽은 정조가 가장 평균에 가까운 임금이다.
  • 영조와 정종, 광해군, 고종, 순종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임금이 종기를 앓았으며, 문종, 세조, 성종, 효종, 정조가 종기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조선 임금의 생활 습관이 종기에 걸리기 딱 좋기 때문. 정무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와 피로, 지나치게 많은 식사량과 운동 부족은 종기가 발생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 조선 왕의 하루 끼니는 총 5끼였다. 초조반으로 죽과 미음, 동치미, 마른 반찬 조합으로 나온 것이 오전 7시 쯤 나온 상이었고, 아침상이 오전 10시쯤 나왔는데 12첩 반상을 먹었으며, 점심 간식을 '낮것상'이라 하여 국수나 장국, 다과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은 오후 5시쯤 나와 12첩 반상을 먹었고 야참으로 약과나 수정과, 식혜, 국수 등이 나왔다고. 즉, 정식 식사는 '조석(朝夕) 끼니'라는 단어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오전 10시 경의 아침상과 오후 5시쯤의 저녁상 2끼였으며, 나머지는 중간중간의 간식이었던 셈.
점심이 정식 식사가 된 역사는 의외로 짧다. 사실 '점심(點心)'이라는 말 자체가 '아침 먹고 나서 꽤 시간이 흘러 해이해진 마음[心]을 다시 점화(點火)시킬 정도로 간단히 먹는 식사'라는 뜻이기도 하고... 본래는 조석 끼니 사이의 간식 취급이었다.
왠지 '대식가'의 이미지가 강한 세종대왕은 하루 4끼를 먹었다고 하며, 영조가 5끼의 식사를 3끼로 줄였다. 두 사람은 식성 자체도 정반대였는데, 세종은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 안 먹는다고 부왕 태종이 걱정할 정도였던 반면, 영조는 채소 반찬 서너가지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좋아했다.
  • 영조는 술을 매우 꺼려해서 본인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주령을 내려 술을 금지시켰다. 사실 술을 만드려면 대량의 곡식이 필요해서 이를 절약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린 사례는 영조 이전 및 이후에도 있었지만 일시적이고 단기간이었던 반면, 영조는 거의 재위 기간 내내 금주령을 유지시켰다. 금주령을 어긴 관료를 처형하도록 하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처형장에 직접 올 정도.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금주령을 유지한 것은 영조 대가 유일하다. 아이러니한게, 그 다음 대이자 손자인 정조는 술을 즐겨서 즉위 직후 금주령을 폐지하였고 평소 술 버릇도 '남에게 강제로 술먹이기'였다.
  • 자기 자식을 죽였던 왕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한 중종과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영조가 있다.[50]
  • 형제를 죽인 왕들은 은근히 많은데 이복형제인 이방석, 이방번을 베어 죽인 태종 이방원부터 동복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인 세조, 이복형제들을 쳐죽인 연산군, 이복형제 진성군을 사사한 중종, 이복형제 은전군을 사사한 정조 등이 있다.
  • 즉위하기 전 실무 관료 생활을 해본 국왕으로는 고려의 무관 출신인 태조와 정종, 위에서 나왔듯이 유일한 과거 급제자 출신인 태종, 수양대군 시절 잠시 영의정 자리를 맡아서 실권을 장악한 세조가 있다. 이후 성종 때에 종친사환금지법이라고 해서 왕실 종친들은 명예직 외에는 관직 진출을 금지해 버렸다.
  • '친정(親征)', 즉 국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실전에 참가한 형태는 조사의의 난 때 친정한 태종이 유일하다. 임진왜란 때 세자 시절의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참여한 적이 있으나 친정과는 거리가 있다.

5.3 조선의 장자 수난?

조선 왕조는 장자들이 수난을 당한 걸로 유명한데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문종, 단종이지만 그외에도 찾아보면 엄청 많다.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1354~1393)
태종의 장자 (앙녕대군 이전에 죽은 아들들이 여럿 있다.)
세종의 장자 문종(1414~1452)
문종의 장자 단종(1441~1457)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1438~1457)
의경세자의 장자 월산대군(1454~1488)
예종의 장자 인성대군(1461~1463)
성종의 장자 연산군(1476~1506)
연산군의 장자 폐세자 이황(1498?, 1499?~1506)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1509~1533)과 적장자 인종(1515~1545)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1551~1563)
선조의 서장자 임해군(1574~1609), 적장자 영창대군[51](1606~1614).
광해군의 장자 폐세자 이지(1598~1623)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1612~1645)
소현세자의 장자 이석철(1636~1648)
효종의 장자 현종(1641~1674)
숙종의 장자 경종(1688~1724)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1719~1728)
사도세자의 장자 의소세손(1750~1752)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1782~1786)
순조의 장자 효명세자(1809~1830)
효명세자의 장자 헌종(1827~1849)
철종의 장자(1858~1859)
고종의 서장자 완화군(1868~1880), 적장자(태어나서 사흘만에 사망)
영친왕의 장자 이진(1921~1922)
...

너무 많다. 40넘긴 양반이 숙종말고 없다. 아무리 의학기술이나 위생의 개념이 부족했던 시대라지만 뭐... 게다가 이 중 병사가 아니라 정치적 숙청 등으로 살해당한 장자도 여럿 있다. 단종 외에도 폐세자 이황, 복성군, 임해군 등이 있다. 소현세자도 살해당했다는 음모론이 있을 지경.
  1. 즉위 전, 시호 포함
  2. 대한제국 수립 후 태조고황제로 높이면서 명에서 받은 시호 강헌을 폐지했다.
  3. 피휘 때문에 지은 이름이며, 본명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계(成桂)'였다.
  4. 피휘 때문에 지은 이름이며, 본명은 '방과(芳果)'였다.
  5. 선대왕인 자신의 과 다르게 피휘하기 위해 개명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나 기록이 있거든 수정 바람.
  6. 증조부인 태종과 더불어 훙서 시점까지 유이하게 2자 이름을 가진 왕. 실록에 따르면, 단종이 태어나기 전, 이미 문종의 두 아들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에 오래 살라는 의미로 세종이 2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7. 즉위 전엔 원손으로 태어났기에 군호가 없었고, 퇴위 후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 숙종 때 노산대군을 거쳐 추존되었다.
  8. 진평대군, 진양대군을 거쳐 바뀌었다.
  9. 자을산군이라고도 한다.
  10. 재위 당시에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란 존호를 받았다.
  11. 원자로 태어났기에 군호가 없었으나 폐위 후에 강봉되며 생김.
  12. 본명은 균(鈞)이였으나 명종의 세자 순회세자와 같은 항렬자를 따르기 위해 연(昖)으로 개명.
  13. 재위 당시에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이라는 존호를 받은 적이 있다.
  14. 이쪽은 노산군(단종), 연산군과 달리 서2남으로 태어났기에 왕자군을 거쳐 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재위 기간에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증한 적이 있다. 물론 인조반정 이후 취소.
  15. 본명은 '광(爌)'이었으나 대사헌 조복양이 수양제의 휘(양광)와 음이 같다고 지적해서 공모를 통해 바꿨다고 한다.
  16. 정조 때 장헌세자로 고쳐짐
  17. 피휘 때문에 지은 이름이며, 본명은 원범(元範)이었다.
  18. 18.0 18.1 즉위 직전에 군호를 받았다.
  19. 피휘 때문에 지은 이름이며, 본명은 재황(載晃)이었다. 피휘 논란 부분은 항목 참고
  20. 이름에 대한것은 이쪽을 참조
  21. 즉위 이전 아버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22. 이전 작위도 포함
  23. 장평도정
  24. 의성군
  25. 부림령
  26. 수주정
  27. 완원군
  28. 무의공 이순신
  29. 능창대군
  30. 용성대군
  31. 복녕군. 참고로 동생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경신환국의 일환인 '삼복의 옥'에 휘말려서 모두 사사당했다.
  32. 임창군
  33. 안흥군
  34. 풍계군
  35. 황사손
  36. 두번의 왜란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고하여 격상되었다.
  37. 효종때 신하들이 촉 소열제도 열조를 시호를 쓰므로 상당히 좋은거다. 라고 했는데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서 죽은 남량의 초대 군주독발오고의 시호도 열조인데 우리아빠보고 열조를 쓰라고?'식으로 우겨서 가장 좋은 시호로 꼽히는 인조로 바꾸었다.
  38. 사악한 학문인 천주교로부터 나라를 지켰다고 하여 격상되었다.
  39. 긴 시간동안 나라를 안정시켰다하여 격상되었다.
  40. 40.0 40.1 40.2 대한제국 선포를 계기로 바뀜.
  41. 묘호가 있는 왕 중에서 종이 없고, 전부 조 밖에 없다.
  42.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 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43. 효종의 후궁안빈 이씨가 딸 숙녕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격분한 것을 중전이 중재해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
  44. 혹은 바늘을 들고 대기했다라는 설도 있다. 왕이 위급할 때 침을 놓으려고...
  45. 영의정, 도승지, 예조판서
  46. 조선시대엔 정실 부인은 1명만 둘 수 있으므로 여기서 '많이' 두었다는 것은 왕후가 자주 바뀌었음을 의미함
  47. 희빈 장씨는 폐비 후 복권되지 못했으므로 예외. 단경왕후중종반정 이전 대군부인 신분으로 들어왔다가 반정 이후 반정 세력의 압력으로 쫒겨났고, 이후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되었다.
  48. 현재 함흥으로 추정,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었다.
  49. 딱 하루 상왕 하고는 죽었다. 최단 재위 상왕.
  50. 다만 중종은 김안로의 압력때문이 그랬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종은 도승지 양연을 통해 김안로를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
  51. 사실 서자를 포함하면 막내 of 막내인지라 적장자란 표현이 다소 난감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