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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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 정실 부인

王妃
황제국에서는 황후(皇后)[1]

일단 어떤 왕국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자이기는 하지만, 여왕과는 다른 개념이다. 영어로는 똑같이 Queen이기 때문에 오역이 굉장히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사실 왕의 아내는 Queen Consort, 여왕은 Queen Regnant지만 대체로 줄여서 Queen이라고만 표기하는 탓에 일어나는 일이다.

특이하게도 오스만 제국에서는 16세기 초반까지 태후(Valide Sultan)는 있어도 왕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구도가 하렘을 중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송가이 제국 등 하렘을 둔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 이런 경향은 쉴레이만 1세휴렘 술탄과 정식으로 혼인하면서 바뀐다.

일단은 일부일처제였던 서양과 달리, 일처다첩제가 대부분이었던 동양에선 왕비와 들에 관한 일종의 위계질서 체제로 후궁 제도라는 게 있었다.

1.1 한국의 경우

한국 역사에서는 왕후(王后)란 명칭이 많이 쓰였다.

원래 군주의 정실부인이 받을 수 있는 칭호는 후(后)뿐이다. 황제국의 정실부인은 황후이고 외왕내제국(자주국)의 정실부인은 왕후. 비(妃)와 빈(嬪)은 후궁에게 내리는 칭호였다. 비(妃)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후궁은 귀비 엄씨, 현비 권씨. 빈(嬪)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후궁은 경빈 박씨, 희빈 장씨.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러한 개념을 모르고 정실부인의 칭호인 후(后)와 후궁의 칭호인 비(妃)를 동급으로 여겨 왕비 역시 임금의 정실부인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착오는 고려 후기 원나라 간섭기와 조선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나라 간섭기의 고려는 원나라의 제후국이었고, 조선은 명나라청나라의 제후국이었다. 제후국에서는 모든 칭호/관제에서 황제국과 외왕내제국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 때문에 황제(자주국왕) → 왕(군왕), 황후(왕후) → 왕비 등으로 강등되었다.

원나라 간섭기 이후부터 군주의 정실부인은 후궁 최고 작위였던 비(妃)를 칭호로 받게 받게 되었다. 황태후(왕태후) 칭호 역시 강등되어 왕대비가 되었다. 고려 후기에 군주의 정실 부인 중 '왕후' 칭호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점.

반면 비록 조선은 제후국이었으나 자주성을 암묵적으로 내세워 고려처럼 황제국과 외왕내제국의 군주에게만 사후 '조/종' 묘호를 준 것처럼, 왕비(중전)에게도 사후 '왕후'라 격상 추존하는 형식을 택했다. 그래서 조선 왕비의 시호에는 왕비란 단어가 없고 왕후란 단어가 있는 것이다.

1.1.1 고대

고구려백제, 가야, 발해 왕비들의 시호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신라의 왕비들은 왕후 대신 부인이라는 형식의 시호로 전해진다.

1.1.2 고려시대

초기 고려에서는 왕후(王后)와 부인(夫人)으로 나눠 전자를 정실로, 후자를 후궁으로 삼았다. 호족과 결혼을 할때는 '지역+(궁/원)부인'이였다. 왕건의 후궁들이 호족의 여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 부인들의 칭호 대다수가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역+(원)부인'이라고 불렸다. 예를 들면 광주지역의 대호족 왕규의 딸들은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성종 대까지 고려시대의 후궁제도는 비교적 단순하게 나뉘고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태조 왕건의 경우도 왕후가 6명이고 부인은 24명이었다. 그러나 6명의 왕후 중 정처였던 신혜왕후는 생전 하동군부인이라고 불리고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태후, 신정왕태후는 아들이나 손자가 왕이 되었다. 정덕왕후가 특이한 케이스인데 딸이 두 명이 추존 왕후가 되었고 외손자가 왕이 되었다. 신정왕태후가 명복궁대부인(明福宮大夫人)이라고 불리고, 다른 부인들이 ~부인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생전에는 왕후로 모두 불린 것같지 않다. 이때는 정처이거나 왕의 외할머니였던 사람을 왕후로 추존하고, 왕의 할머니나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했던 것같다. 다만 혜종의 어머니는 세력이 약했던 탓으로 왕후로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광종 이후 족내혼을 하면서 '건물이름+전/궁/원부인' 형태로 불렀다. 왕태후[2]>왕후[3]>궁부인>원부인>궁인 순으로 보인다.

성종 이후 문물정비가 이뤄짐에 따라 왕후 이하 내명부의 품계가 정해졌는데 전해지는 것은 정1품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왕후는 내명부 품계를 초월한 수장이며, 정1품으로 비(妃)가 있었으며 4개의 미칭(美稱)인 귀비(貴妃), 현비(賢妃), 숙비(淑妃), 덕비(德妃)중 하나가 주어졌다. 이는 당의 내명부 제도를 본 딴 것으로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뉘앙스를 슬슬 풍기는 근거 중 하나가 되는데 사실 정실부인을 후(后)로, 후궁을 비(妃)로 두는 것은 황제국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후국 즉, 조선의 경우에는 내명부 수장인 중궁의 품계가 왕비이니 사실 제후국의 수장은 황제국 최고 등급의 후궁과 동급이 된 것이다.

보통 중후기는 왕태후[4]>전주[5] 궁주(궁비)>원주(원비)[6]>궁인[7]순이었다.

고려 중기[8]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의 이름을 따라 ㅇㅇ궁주(宮主)(혹은 전주) ㅇㅇ원주 [9]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ㅇㅇ궁부인,ㅇㅇ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왕태후(왕의 어머니이거나 할머니)-왕후,왕비[10]-ㅇ비(귀비,덕비,현비,숙비)[11] 순으로 봉작을 내렸고[12] 왕후 ㅇㅇ궁주 귀비 ㅇㅇ원주, 덕비 ㅇㅇ궁주, 왕비 ㅇㅇ 전주 등으로 봉작되었다. 실생활에서는 궁주(전주)나 원주로 많이 불리었다. 생전 왕후[13]와 왕비는 보통 한 명씩 이었으며 칭호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전 왕후의 경우 몇 명 없고 기록이 미비하며 왕후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왕비의 경우 칭호가 기록에서 다수 발견되고 왕족이나 귀족출신이 되었다.

궁주가 원주보다 높았고, 전주가 궁주와 비슷하나 격이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인 후궁이 후궁인 궁주로 승진하거나[14] 궁주는 선왕의 후궁[15] , 왕비, 높은 후궁 등을 가르켰고 공주 역시 궁주(전주)로 봉작했다.[16] 전주는 후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칭호이며 좀 더 높은 신분이었다. 왕태후는 전주였고[17] 왕후, 왕비, 가끔 공주의 칭호에서 보인다.

다만 궁주나 원주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 여인이었고 일반적인 승은을 입은 경우에는 궁주와 원주가 되지 못하고 궁인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때는 신분의 차이가 엄격해 이런 궁인의 딸은 봉작받지도 못했다. 궁주(전주)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18] 왕의 왕후가 되거나 종친에게 시집갔는데 신분 때문에 신하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어야 했다.

고려사에서 가끔 원비(元妃)의 칭호가 가끔 나오는데 여기서 원비는 정실이 아닌 처음 맞은 아내를 일컫는다.[19] 고려는 위계 체계가 엄격하지 않아 왕비로 책봉되거나 왕후로 시호가 올라가지 않는 궁주라 하더라도 처음 맞으면 원비로 불렀다. 선종의 왕후인 왕비책봉까지 받은 사숙태후의 신위를 종묘에 모시려고 하자 예종이 적서의 예를 고려해야 한다며 미루는 모습을 모인다.

이때 유력 문벌귀족들의 딸들을 자매 단위로 들이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한꺼번에 많은 비들을 뽑은 뒤에 왕후나 왕비가 죽을 때마다 자리가 비면 정식 왕후로 봉했다. 이러다보니 고려 왕들의 정실부인 숫자들은 살아 생전에는 비록 상하관계도 죽은 뒤에 많이 추존이 되어 조선에 비해 많은데다가 왕의 부인들끼리 살아있는 동안에 동일한 반열의 자리에 있는 경우도 존재했다. 다만 왕과 함께 묻히거나 기록되는 순서에서 우대사항이 존재하기는 했다.

후반기 부터는 태후[20]>태비[21]>(몽골 공주>)궁주[22],비(妃)[23] >옹주[24]>택주[25] 순이었다.

원 간섭기 이후에는 이는 왕실 관제가 상당수 격하되고 내명부의 수장과 그 구성원 일부가 원나라 공주가 되면서 내명부 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이를테면 법제상 내명부의 수장이 제후국의 왕후로서 비(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궁들의 최고 품계는 제후국 군주의 첩인 빈(嬪)이 아니라 여전히 황제국의 첩인 비(妃)인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실 원나라가 고려의 관제와 왕실용어들을 격하시키기는 했지만 이 격하는 사실 눈에 띄는 주요부서들에게 주로 행해진 것이며고려의 관제 모두를 속속들이 격하시킨 것이 아니었다. 3성이 죄다 격하되었어도 그 안에 있는 관제들이 격하되지 않아 고려 행정의 위계성에 황제급과 제후급이 섞여 혼란이 생긴 것이다. 후궁제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선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정실이었다. 반드시 공주 출신이 아니었어도 원나라 출신이면 정실로 대우받았고 원나라에서 정실에 해당하는 공주로 시호로 내려주었다. 국왕의 정비는 원나라의 공주로 정해졌지만 여전히 국왕은 여러 부인을 둘 수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ㅇ비(妃) 형태로 책봉되었다. 당시 기록상으로는 비(妃)가 붙은 이[26]들은 모두 국왕의 왕비나 왕비에 가까운 후궁으로 간주했다. 미칭의 종류는 이때 더욱 다양해져 의비, 정비, 신비, 혜비, 순비 등 붙일 수 있는 칭호들은 대부분 붙여졌다. 그 이외에는 궁주나 옹주로 불렀다. 제후국 군주의 왕녀를 가리키는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후궁에게 처음 사용되기도 했다. [27]

조선시대에 비해 고려는 적서 차별[28]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다. 호칭상이나 명예상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고려 왕실을 뒤흔들었던 왕규의 난만해도 이 내명부 서열이라는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조선이었다면 위로 왕자들이 바글바글한데 16번째 왕비 소생인 광주원군을 보위에 올리겠다는 계획이 나올수는 없었다.[29] 조선시대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서자 그것도 한참 손 아래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꿈꾸는 것은 고려 당시 적서차별이 거의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개나 소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새로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간혹가다 과부도 후궁이나 왕후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제1비인 문덕왕후 유씨와 충렬왕,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김씨, 충선왕의 후궁인 순비 허씨[3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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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조선시대

조선에서는 태종이 내명부 체제를 개편하여 왕비가 한 명만 있을 수 있었다. 사회 전반에도 적서차별을 두어 제사를 받들 정실부인인 처(妻)는 오로지 한 명이고 그 외에 부인은 모두 첩(측실)로 제한했다. 태종이 처첩-적서차별을 강화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시대 때 일부다처제의 용인으로 아버지 이성계가 고향과 개경에 두 명의 정실부인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후처였으나 엄연히 경처였던 강씨가 왕후가 되는데 무리가 없었고, 왕권의 라이벌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무안대군의안대군이 늘었다. 결국 왕실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집안의 후계구도를 깔끔히 처리하겠다는 의도로 이어진 것.

왕비의 호칭은 사극을 통해 잘 알려진 중전. 왕비가 거처하는 중궁전(교태전)에서 따온 말로, 내전, 곤전, 곤궁 등의 호칭 역시 사용되었고, 존칭은 중전마마.

조선 후기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고려 초중기와 같이 자주적인 의미를 강화해 생존시 칭호가 '왕비'에서 '왕후'로 다시 격상되었다. 국내에서는 '중전(중궁전) 마마'라는 호칭으로 일관했으나, 외국인사들은 왕비 '전하'로 호칭하다가 격상된 이후엔 왕후 '폐하'라고 호칭했다. 또한 '왕세자빈'도 다시 '왕태자비'로 격상되었다. 이후 조선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후의 호칭 역시 '황후'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추존 황후가 아닌 현직에서 황후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순정효황후 한 사람, 그것도 단 4년 남짓 정도였다.

1.2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왕비들

1.2.1 실존 인물

황후, 왕후 포함.

1.2.2 가공 인물

황후, 황비 포함.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한 경우도 이곳에. 정실 부인이 아닌 경우에는 후궁 항목으로.

2 백설공주의 등장인물

원작에선 백설공주의 친모지만 아이들의 교육상 좋지 않단 이유로 새엄마(계모)로 바뀌었다.가장 유명한 이야기로는 마법의 거울과 독사과일듯하다.

"거울아, 거울아, 마법의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니?"

원문은 "Magic mirror on the wall, who is the fairest one of all?" 직역하면 "벽에 걸린 마법의 거울아,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니?"이다.

이 대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있는 마법의 거울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걸 이용해 가끔식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물어보는 것이 취미.

항상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듣지만 어느 날, 백설공주가 자신보다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사냥꾼에게 그녀를 죽이고 증거로 심장을 가져오라고 한다.

하지만 사냥꾼은 너무 어린 공주를 차마 죽이지 못했고,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준 뒤 멀리 도망가라고 하고 왕비에겐 돼지의 심장을 주었다. 백설공주가 살아서 일곱 난쟁이들과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낸 왕비는 사과장수로 변신해서 독사과를 만들어 그녀에게 먹인다. 그 전에도 빗 장수로 변신하거나 다른 방법을 써서 백설공주에게 접근한 얘기가 있는데 현재 이런 부분들은 거의 다 삭제됐다.

결국 백설공주는 왕자의 키스로 부활하고 다시 백설공주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낸 왕비는 그녀가 진짜로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장으로 간다.

하지만 공주는 왕비가 결혼식장에 오자마자 강제로 달군 쇠 신발을 신겨 죽여버린다. 이 때 왕비가 뜨거워서 춤을 추는듯한 행동을 하는데 모든 하객들이 그것을 지켜본다.(...)
이 장면이 너무 잔인해서인지 디즈니 영화에선 절벽에서 추락사시킨다. 왕비가 백설공주를 해코지한 것을 알게 된 난쟁이들이 급히 달려오자 벼랑 끝으로 달아나서는 거기에서 바위를 굴려 난쟁이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번개가 쳐서 벼랑이 무너지는 바람에 절벽에서 떨어지고 그 위로 자기가 굴리려던 바위가 떨어져내린다.

게다가 그때까지 왕비를 주시하던 독수리 두 마리가 그녀가 추락한 직후 날개를 펴고 그 위를 빙빙 돈다. 즉 시체가 독수리에게 뜯어먹힐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게 더 잔인한 것 같은데

그 외 다른 동화에선 쇠 신발을 신고 춤을 추다가 멀리 달아나는 식으로 순화하거나 그냥 아주 간단하게 "불타는 신발을 신고 죽었다"라고 하거나 아예 다르게 죽여버린다. 마녀로 변신해서 빗자루를 타고 검을 찬 상태로 백설공주를 죽이러 가다가 번개에 맞고 사망하거나 백설공주가 살아있단 말을 듣고 쇼크사하거나...

동화라서 그렇지 현실로 따지면 딴 나라 왕을 초대해서 사형시킨 꼴이 된다. 100% 전쟁 날 판.

몇몇 사람들은 '마법의 거울을 가지고 독사과 만들 줄 아는 평범한(...) 왕비'로 알고있는 사람이 있는데 일단 독사과를 만드는 것부터 '약 만드는 마녀'를 의미하고 마지막에 달군 쇠 신발을 신겨 화형시키는 건 '마녀사냥'을 의미한다. 애초에 원작에서 백설공주를 죽일 빗을 만들 때 '온갖 마법을 동원해'란 언급이 있었다. 디즈니 애니에선 대놓고 번개나 바람을 부르는 마법을 쓴다.

디즈니 만화영화의 시작인 백설공주(애니메이션)에선 당연히 출연, 성우는 원어판에서 Lucille La Verne, 한국어 더빙판에서는 이선영, 변신 후의 모습은 김성희. 이름도 생겼는데 그림하일드 왕비(Grimhilde queen)... 이라고는 하나 작중에서 딱히 언급되지도 않고 해서 어지간하면 그냥 사악한 여왕(Evil Queen. 영어 발음 그대로 '이블 퀸'이라고도 한다)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마법의 거울을 소환(?)할 때 그녀의 포스에 놀란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 카더라

원문: Sprit of the mirror...
Come from the farthest space...
Through wind and darkness, I summon thee...
Speak!
Let me see thy face.
번역[32]: 거울아 거울아 마술거울아
캄캄한 어둠과 바람속에서
내 너를 부르노니 나와 대답하라
어서!
내 한가지 물어볼것이 있다.


자세한 것은 그림하일드 항목을 참조.

3 괴혼의 등장인물

코스모의 King of King아바마마의 아내이자 왕자의 어머니다. 다른 명칭은 어마마마. 대체로 다들 어마마마로 알고 있다.

데굴데굴 쫀득쫀득 괴혼에서 아바마마와 만나게 된 경위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 점에서 볼 때 아바마마랑 만나기 전에는 조용한 시골 처녀였던 모양이다. 이후 삐뚤어진(...) 아바마마와 만나게 되면서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 나중에 아바마마가 할바마마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후 정식으로 왕비가 된다.

여담으로, 그 큰 몸에서 산통을 겪어가며 낳은 결과물이 어떻게 5cm도 안되는 왕자인지 정말 의문이다. 혹자는 아바마마보다 어마마마가 더 강할 것 같지 않냐고 말하기도 했다.

과거 괴혼 ~굴려라 왕자님~이 출시했을 때의 일본 공식 홈페이지에 있던 아바마마의 일상을 담은 블로그에 의하면 한국 드라마에 푹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당시의 홈페이지에 있던 기록들을 싸그리 갈아 엎어버렸다.

4 중국의 여가수영화배우

왕페이 참조
  1. 군주 부인의 급은 후-비-빈 순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러한 개념을 모르고 '후'와 '비'를 동급으로 여겨 '비' 역시 임금의 정실부인으로 생각하는데 '비'는 원래 황제국과 자주국 왕국의 가장 높은 후궁 작위이다. 이러한 오류는 원간섭기와 조선에서 비롯된 것인데 제후국에서는 황제국과 자주국보다 한단계 아래 등급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비'가 조선에서는 임금의 정실부인에게 주는 작위가 된것이다. 반면 원간섭기 이전 자주국 왕국이었던 고려에서는 '비'가 후궁에게 주는 작위였다. 비록 조선은 제후국이었으나 자주성을 암묵적으로 내세우며 왕에게 사후 '조/종' 묘호를 준 것 처럼 왕비(중전)에게도 사후 '왕후'라 추존하는 형식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황후/왕후'와 '왕비'는 다른 것이다..
  2. 왕의 할머니 혹은 어머니.
  3. 왕의 정처 자격. 혹은 왕의 외조모
  4.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5. 궁주보다는 약간 높다. 태후, 왕후, 왕비, 왕녀가 썼다. 일반 비에게서는 잘 불 수 없다.
  6. 궁주와 원주는 비 칭호를 주로 받았다. 그래서 고려 후기 비(妃)에 대입할 수 있다. 왕족 출신이나 귀족출신이었다.
  7. 신분이 낮아 궁주나 원주가 될 수 없는 자. 목종의 후비 중 요석댁 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보여 훗날 택주라는 명칭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8. 여기서는 보통 목종부터 원간섭기 이전인 원종까지 일컫는다.
  9. 궁비(宮妃)나 원비(院妃)가 사용되기도 한다.
  10. 왕후나 왕비가 중궁(中宮)이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와 달리 ㅇ비(妃)와 엄격한 차이가 있지 않았다.
  11. 주로 ㅇ비라고 봉작을 내리다가 죽은 뒤 귀비, 덕비, 현비, 순비 등으로 추증하였다.
  12. 정종의 왕후 용화 황후는 처음 혜비(惠妃)로 책봉됐고 후에 정신왕비(定信王妃)로 봉했다. 죽은뒤 용신왕후라고 추증했다.
  13. 생전 왕후는 현종의 왕후인 원정왕후(元貞王后), 덕종의 왕후인 경성왕후(敬成王后), 명종의 왕후 의정왕후(義靜王后) 등이 있다. 초기 고려를 제외하면 이들은 왕의 딸이거나 왕족이었다.
  14.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원성태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리다가 아들을 낳자 원(院)을 고쳐 궁(宮)으로 고쳤다."
  15.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흥성궁주와 경흥원주는 두 분 다 선왕의 비이니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는 예에 따라 두 분에 대한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0914&categoryId=49632&cid=49632
  16. 공주 역시 건물을 내려 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칭호를 정했다. 간혹 고려 초기 왕자나 왕족이 이렇게 불린 경우가 있다. 문원 대왕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나 정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예이다.
  17. 태후가 거주하는 곳의 건물이름은 주로 ㅇㅇ전이었다.
  18. 흔히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특히 공주의 경우 더 엄격해서 족내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이다.
  19. 고려의 적서 개념은 조선시대와 많이 달랐다. 고려시대때는 장유유서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20. 왕태비를 추증
  21. 원간섭기 이후. 왕태비 혹은 국태비.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왕태비는 왕태후의 격하된 버전이며 국태비는 주로 왕비가 아닌 왕의 어머니를 추증하는데 쓰였다.
  22. 후기로 갈수록 왕녀의 칭호로 정착
  23. 고려 중후기 궁주와 원주에 해당한다. 보통 왕족 혹은 귀족 출신 혹은 옹주에서 승격한 자.
  24. 고려 중후기부터 쓰였다. 세자 이외의 왕자의 처 봉작, 기생출신 후궁, 왕의 의붓딸 등에 쓰였다.
  25. 택주는 후궁칭호에는 잘 쓰이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널리 쓰여 왕족이 아닌 공신의 처, 왕실의 인척 여성이 쓰기도 했다. 목종 때 요석댁 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자주 보여 궁인의 칭호가 발전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26. 이들은 궁주이기도 하다.
  27.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고쳤으나... 정작 옹주는 궁주보다 낮게 사용되어 세자 이외의 왕자의 처, 왕의 의붓딸이나 출신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후궁에게서 보인다. 또한 남발되어 공양왕 3년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때 그대로 이어진다.
  28. 고려는 적서 차별의 개념이 달랐다. 먼저 태어나거나 먼저 들어온 부인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장남은 태자가 됐고 대신 신분의 차별이 엄격해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 비나 비의 소생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29. 단 광주원군을 보위로 올리려 했다는 부분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왕규 측이 패배자이기에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많이 받는다. 정황상 왕식렴의 난이라고 봐야한다는 말도 있고, 왕식렴에게 왕규, 박술희 등의 혜종파가 학살당하고 왕식렴의 거사의 명분을 위해서 왕규가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30. 심지어 이분은 전 남편과의 자녀가 8명이나 있었다.
  31. 원래는 황후의 곁붙이 노릇을 하던 후궁이었지만, 황후의 승하 후에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위험에 쳐하는 것을 보고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여 황후가 되었다.
  32. 더빙판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