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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일 (목) 19:07 기준 최신판


조선의 역대 국왕
2대 정종 이경3대 태종 이방원4대 세종 이도
태종의 서명. 이름인 방원(芳遠)을 갈겨 쓴 것으로 보인다.
묘호태종(太宗)
시호조선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공정(恭定)
본관전주(全州)
능묘헌릉(獻陵)
이방원(李芳遠)
유덕(遺德)
출생지고려 함흥 함흥본궁
사망지조선 한성 연화방 수강궁 별전
배우자원경왕후(元敬王后)
아버지조선 태조
어머니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생몰기간음력1367년 5월 16일 ~ 1422년 5월 10일
양력1367년 6월 13일 ~ 1422년 6월 11일 (54년 11개월 28일, 2만 86일.)
재위
기간
음력1400년 11월 13일 ~ 1418년 8월 10일
양력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17년 9개월 11일, 6494일.)
태상왕[1]음력1418년 8월 10일 ~ 1422년 5월 10일
양력1418년 9월 9일 ~ 1422년 6월 11일 (3년 9개월 2일, 1371일.)

틀:조선의 태상왕

조선의 역대 왕세자
정종 이경태종 이방원양녕대군 이제

1 개요

여말선초라고 불리는 정치적 격동기의 최후의 승리자이자, 조선왕조 500년의 기반을 단단히 마련한 강성 군주.
공신 세력을 숙청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수립하여 그의 아들인 세종대왕에게 강력한 왕권을 물려준 철혈 군주.

조선의 3대 국왕. 태조 이성계의 5남이자 세종대왕의 아버지. 휘는 방원, 자는 유덕(遺德)으로 '덕을 남기다'라는 뜻으로 본인 스스로는 덕과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았으나 후계자(세종)를 잘 두었다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적절한 자라고 볼 수도 있다.

왕이 되면 피휘 때문에 보통은 이름을 바꾸는데 태종은 죽을 때까지 방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2]. 사실 피휘라고 해도 두 글자 이름인 경우에는 각 글자 하나만 쓰는 것은 관계 없다. 그래도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방원이 특이한 케이스인 것은 사실이다. 어쨌든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사의 많은 임금들 중 본명이 대중에게 매우 친숙한 임금 중 하나.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작위 호칭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대군이라는 호칭은 태종이 고려시대의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등장시킨 것으로 태종 즉위 후의 일이다. 즉 태종은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다. 따라서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은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은,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호칭. 따라서 당대 기록인 실록에는 당연히 정안대군이라는 표현이 없고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쓴다. 정안대군이라는 표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사극이나 소설의 영향[3].

도덕적으로는 패륜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명군이기도한 이중적인 인물이다[4]. 전에 폭군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던 적도 있는데 우선 태종 이방원은 절대 폭군이 아니다. 우선 그가 행한 숙청이 단순히 그에게 거슬려서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왕정국가에서 중요한 왕권이 자리잡기 위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부작용도 최소화했다는 점, 무엇보다 정치적 능력은 완전히 만렙이었고 숙청을 통해서 정치를 잘 해냈다는 점에서 분명 폭군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5] 하지만 손에 너무도 많은 피를 묻힌 나머지 성군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본인도 말년인 상왕시절 최측근과 술자리를 할때면 "과인은 덕이 없으므로..." 라고 자조하며 수다를 떨었다 한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성군이 될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준 군왕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세종의 권력 기반은 사실 부왕인 태종이 다 다져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연산군 같은 진짜 폭군은 그야말로 내키는 대로 살았던 것이고, 태종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조선이라는 국가를 위해 숙청을 도구로[6] 사용했던 것에 가깝다. 그래서 후대의 평가는 잔혹하고 살벌하지만 능력만큼은 확실히 뛰어난 명군.

역대 조선 왕들 중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왕 중 하나. 신병주 교수의 표현을 따르자면 최고의 킬러 본능(…)을 가진 사람. 사실상 숙청의 인생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숙청을 많이 했다. 정몽주를 죽여 조선 창업에 이바지했고, 정도전, 심효생, 자신의 형제들을 죽여 왕이 되었고, 처남들인 민씨 형제를 죽여 외척을 쳐냈고, 갖은 구실로 아들 세종의 장인인 심온까지 죽여 아들조차 외척에 휘둘리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 세종이 그렇게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세종이 걸어갈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분명 신생 왕조로서 불안정할 수 있는 정국을 확실히 잡고, 세종이 잡혀 휘둘릴 만한 세력들을 다 제거해서 세종은 정국 안정에 덜 신경쓸 수 있게 한 것을 보았을 때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7]

2 고려 시절

조선 왕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인하고 야성미 넘치는 왕이기 때문에 야성적, 무인적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으나 사실 과거에 급제한 지적인 엘리트다. 오히려 조용하고 유약한 이미지로 박혀 있는 형 이방과야말로 실은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고려말의 숱한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8]

이방원의 문과 급제 사령장을 받았을 때, 이성계는 너무 기뻐서 그 사령장을 몇 번이고 읽게 했다고 한다. '군인 집안'이라는 열등감을 확 씻어준 아들에 대한 이성계의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과거 합격 후 이방원은 개경에서 활동하면서 문신으로서 주로 인사교류에 활동하며 이성계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직접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선 국왕은 굳이 과거 응시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태종은 조선 왕조 유일의 과거(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 합격과 공무원 근무경력 둘 다를 가진 국왕이다.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오른 적이 있지만 과거는 치르지 않았다. 이후 왕족 종친이 벼슬에 임하는 제도는 성종대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공양왕 4년 이성계가 황해도에서 머무르다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정 내에서 정몽주를 중심으로 반 이성계 세력이 득세하고 정도전 등 이성계의 부하들을 귀양 보낸뒤 귀양지에서 암살계획을 세우는 등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이방원은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사망으로 3년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자 곧장 황해도로 내려가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와 전세를 다시 이성계 쪽으로 역전시키고 이성계를 몰락 위기에서 구한다.

이후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인 정몽주를 아버지의 동의도 없이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이 살해 계획을 변중량을 통해서 들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집에 문병을 오자 조영규를 시켜 대낮에 선지교 길바닥에서 철퇴로 죽인다. 이성계 본인은 정몽주 암살에 동의한 적이 없었으며, 정몽주를 자의로 때려 죽이고 보고했을 때 이성계가 무섭게 화를 냈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둘이 같이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고 후에 손자 손녀끼리 결혼할만큼 꽤 친분이 돈독했다. 여론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냉혹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을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면서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일설(강전섭 저, 단심가와 하여가의 소원적 연구, 동방학지, 1983&박규형 저, 단가 정형의 발생기 재고, 한민족어문학, 1988)에는 이 시조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하여가의 만수산이라는 산은 그 시절에는 없었던 산이라는 것. 그러나 당시의 사서들에 하여가와 단심가가 등장하는 등 당대에 이미 인정받은 것으로, 이를 창작이라 하는데는 무리가 있으며 한국 역사에 정사로서 기록된 일화임은 알아두자. 단, 현존하는 하여가와 단심가의 '형태'가 그때와 달랐을 가능성은 높다. 한편, 이 내용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작품들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이방원은 한씨 소생의 실질적인 막내였다. 밑으로 이방연이 있었으나, 태조 2년 환조의 비를 세울 당시 이미 “조몰(早歿)”하여 원윤(元尹)으로 증직(贈職)하였다는 내용이 보여 개국 이전에 어려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조의 회군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이방원은 전리정랑(典理正郞)에 머물러 있었다. 태조실록 총서의 위화도 회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태조의 회군으로 정국이 불안해지자 방우와 방과는 태조의 진영으로 가서 지원에 나섰고, 이방원은 태조의 두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고향으로 피신시키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천에 머물다가 사태가 수습된 것을 듣고 돌아왔다.

이러한 경위를 보면 방원은 회군하는 이성계와 함께 정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반면 이미 장성하였고 혼인을 통해 중앙 정계에 자리를 잡고 있던 방우와 방과 등은 회군한 이성계와 합류하여 적극적으로 정변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공양왕 즉위 후 방우가 정치적으로 배제되면서 방과가 정치적인 측면은 물론 군사적 측면에서 실질적인 장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방석의 세자 책봉 직전 친위군이 개편되고 방우 사후 그가 가지고 있던 병력이 방우의 장자 이복근이 아니라 이원계의 아들 이조에게 넘어간 것으로 구체화된다.[9] 방우는 맏이로서 대우를 받았지만 그 뿐. 그의 자손들은 맏이로서의 위상이 전해져 내려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또한, 정몽주 암살을 정말 이방원이 주도했는지, 이방원만의 공적인지도 확실치 않다. 태조실록의 정몽주 암살을 다룬 부분을 보면 공양왕 즉위 후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자 한 정몽주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방과, 이화, 이제와 휘하 부하들을 보내 공양왕에게 계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후 암살모의가 벌어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한 이방원, 이지란, 이방과, 이화, 이제, 조영무 중에서 가장 실권에서 멀었고 공적이 적었던 사람이 방원이다. 특히 정몽주 암살 이후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 측 인사들을 쳐낸 사람이 방과인데 그런 그들을 가장 입지가 약한 이방원이 전부 끌고 갔다는 공식이 도출된다. 지위와 연배를 고려하면 방원은 실행조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방원이 독단적으로 정몽주 암살을 주도한 것이 아니라, 정몽주를 제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자 총대를 메고 나섬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향상시키려 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일차적으로 반대파의 구심점을 백주대낮 길 한복판에서 때려죽인다는 과격한 방식으로 제거하면서 공포를 심어 주었고,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도 성공했으며, 위의 주장대로 '이방원이 홀로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을 테니 필시 배후가 있을 것이다' 라는 인식을 유도해 최종 책임은 태조를 비롯한 조선 건국 세력 전체에 교묘하게 분산시켰다는 것. 즉,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판을 짜서 최대한의 이득을 봤다는 것인데, 이후 이방원의 범상찮은 정치력을 보면 나름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3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3.1 1차 왕자의 난

정작 조선 왕조가 세워지자 첫째 형둘째 형도 아닌, 장조카인 이복근보다도 새파랗게 어린 막내 이복아우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는데, 적장자 대신 후처에서 얻은 막내를 편애해 나라를 흔드는 전형적인 창업군주의 병크였다는 주장과[10] 이성계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방석이었다는 주장이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11]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고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그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에 이르면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12]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왕씨들을 대거 학살하고 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천도를 하면서까지 구 왕조의 자취를 지우고자 했던 태조 입장에서, 구 왕조와의 온전한 결별을 위해서는 이때까지 혼인하지 않았던 방석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 게다가 방석은 현 왕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내려 어느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13]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14] 태조 입장에선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적어도 신덕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과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권위에 흠이 없었고 흠결없는 후계자는 곧 태조 자신의 권위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태조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결정이었지,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당연히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또 동서고금 막론하고 왕조 국가에서, 막내가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이 없는데다 장성한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 때 그 다음 할 일이란 뻔하다.

결정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정통성에 큰 흠결이 생겼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릉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해가며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지만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15]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혁파와 요동정벌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종친, 사병혁파 등 정도전의 급격한 개혁에 반발한 구 세력들이 모의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성계를 추대한 중신들인 정도전남은을 살해하고, 이복 형제였던 이방번, 이방석을 제거한다. 귀양을 보냈는데 이거이가 손을 써서 죽였다는 것은 실록의 기록이고 사실은 쿠데타 당일에 그냥 쳐 죽였다.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군부 중진이었던 이제도 살해당했다. 물론 실록에는 "나는 죽이라고 안 했는데 아랫 사람들이 멋대로 그런 거야!"라고 나와 있지만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1차 왕자의 난 관련 기록은 전반적으로 곡필이 심한 편이다. 예를 들면 방원 측의 병력은 무기 수도 모자라서 부러뜨려 둘로 나눈 몽둥이와 창자루 든 군사 몇십 명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그냥 발라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방석)가 친위대를 이끌고(조선의 왕궁 친위대 대장은 세자가 맡는 관습이 있었다.) 반란을 진압하나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횃불이 가득 차 있어서 두려워했다는 서술이 있다. 즉,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어낸 말이고 동원된 군사가 수천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16]

또한,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과 남은이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정도전 본인은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의 실행 당일에 판만 짜 놓고 천하태평으로 남은의 첩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여하튼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부분 투성이니 이때의 실록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오늘날 알려진 것만큼 이방원을 경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극이나 영상물을 보면 조선 개국 후 대놓고 이방원과 정도전이 대립하고 부딪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태조 초기부터 실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조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방과가 아직 살아있던 방우를 제치고 방번, 이제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싣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척할 수는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17][18] 방원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방원은 처음에는 동북면의 가별초를 받았으나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19] 방번에게 동북면 가별초를 넘겨주고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경계했다면 방우가 배제된 이후 장남의 위치를 차지했고 이성계가 일개 무신일 때부터 보좌하여 공도 크며 중앙군권을 쥔 실력자인 방과를 더 위협적으로 여겼으면 여겼지 방원을 집중 경계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정도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권신이 아니라 국왕 태조의 비호 아래 모든 일을 추진한 총신인 바[20] 사극에 나오는 것마냥 종실 인사들과 대놓고 척을 질 주는 없었다. 쿠데타 발생 석 달 전까지 저서(이때 완성한 것이 불씨잡변.)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보면 쿠데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태조가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와병 중이었다는 주장 역시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걸핏하면 골골대며 드러눕는 말년의 태조라면 모를까 당시 태조의 행보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 죽기 직전에 딸까지 얻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태종의 반란군들이 제일 처음으로 들이친 곳은 정도전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술집이 아닌 태조가 있던 경복궁이었고 태조는 태종의 반란군들에 의해 체포, 구금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이를 두고 와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고 중병은 아니어도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을 앓고 있어서 그 때문에 경계가 흐트러졌을 수도 있다.

3.2 2차 왕자의 난

이후 적자가 없던 정종의 후사를 둘러싸고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과 권력 투쟁을 벌인다. 방간이 박포와 손을 잡고 자신을 죽이려 하자 이들마저 가차 없이 진압하는 무자비함을 보이며 자신의 권력을 지켜냈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인데 앞선 1차 왕자의 난이 소수정예병에 의한 궁궐 점거 쿠데타였음에 비해 이쪽은 거의 개성 도심 시가전의 양상이었던 듯하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수도는 한양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것 때문에 잠깐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오가는 양측의 교전이 있었고 여기에 밀린 방간이 패했다. 결과는 물론 이방원의 압승. 다만 역시 방번, 방석과는 달리 동복 형제를 죽이기는 싫었던지 박포만 나쁜 놈으로 몰아 죽이고(우리 형제를 이간질한 역적놈!) 방간은 유배만 보내는 대인배적 면모(?)를 과시한다. 이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측에서 눈엣가시였던 방간이 '반란을 일으켜 알아서 자멸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동복형제라는 덕을 봤는지 방간 자신은 유배되어서도 세종 연간까지 그럭저럭 잘 살다 죽었으나 그 자손은 종친 대우는 거의 받지 못했다.

세자였던 형 방과가 즉위한 후 이방원 본인은 세자가 되었다.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세제'가 맞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씹는다. 정종 본인도 "오늘부터 동생으로 아들 삼으면 되지 뭐 그런 걸 갖고."라며 씹었다(…).[21]

조선왕조실록의 실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아우 정안공을 책립하여 왕세자로 삼아 군국의 중사를 맡게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때에 대신으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정종실록 권제3, 9장 뒤쪽~10장 앞쪽, 정종 2년 2월 4일(기해))

사실 정종과 태종의 나이 차이는 겨우 10살(…)이다. 참고로 현행 민법에서는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동생을 양자로 들이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 그리고 일본의 다이묘들도 자식이 없어서 동생을 양자로 들이는 사례는 흔했다. 결국 방원이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된다. 아마 형인 정종은 그냥 끼어든 겉절이(!)에 불과하고 자신이야말로 태조의 '세자'임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있지 않아 정종은 세자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버린다. 사실 더 버티고 있었으면 본인의 안위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후 살아있는 동안 정종은 상왕으로서 비교적 제대로 대접받았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는 둘이서 명절날마다 장난도 치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보다 큰 문제가 되는 것이, 태종이 '세제'가 아닌 '세자'로서 책봉을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태종과 정종 사후 태종을 종묘에 모시니까 엄연히 태종의 아버지인 태조가 계신데 왕세자의 아버지로서의 정종이 종묘에 같이 모셔지는 족보가 꼬인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세종은 정종의 신주를 태묘인 정전에서 빼서 따로 영녕전을 지어 그곳에 모시고 태묘에는 태조-태종만 모시게끔 만들었다. 이 영녕전은 문종, 단종, 예종, 경종처럼 재위기간이 짧거나 이렇다할 특별한 업적이 없거나 사도세자처럼 왕위에 올랐어야 했지만 못 오른 사람들을 모시는 곳으로 자리잡았다.

4 왕조의 반석을 다지다

4.1 사병 혁파

우선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싹 없애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했다. 바로 본인이 이 사병을 이용해서 왕 자리까지 해먹었기 때문에 사병만큼은 아주 얄짤없이 철저하게 분쇄하고 인원을 흡수하여 모조리 국가 중앙정부 소속 군대로 만들어 버린다.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다 역관광으로 죽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다. 이거이는 태조와 사돈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시기 사병혁파에 반대하다가 처벌받아서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의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뒤에 그곳에서 죽게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죽을때까지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 사실 정도전은 혁신적인 사상가이자 이념가였으나 정치 방면으로 수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4.2 관제 정비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오늘날의 언론 기관에 해당하는 대간과 사관 등의 정부 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으며, 전제 개혁도 이 시절에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사실 태조는 능력이 철철 흘러넘치는데다 코드까지 환상적으로 들어맞는 소울메이트 정도전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의외로 제도적 면으로는 정비된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이후 군약신강에 틀이 되는 재상중심의 정치 이론(군신공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재상중심의 정치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이 바로 태종이다. 이 때문에 집권 과정의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고려 시절의 보수적인(=정치적 성향이 그다지 맞지 않는)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해 가면서 정국을 꾸렸음에도 정책을 보면 상당히 과감한 개혁안들이 많다. 고려시대의 도평의사사비로소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치 되는 등 국가 운영 방식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고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물론 정도전을 떄려잡은 태종답게 의정부에 자문기능 만을 부여하고 실무관청인 육조를 국왕이 직접 관할하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했다.

중국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려고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결과는 대실패. 당시 조선은 교역경제가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고 물물교환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화폐개혁은 아들인 세종대왕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대실패. 이 화폐개혁은 많은 시도를 거친 후 조선후기 경제가 활발해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로 꽃피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비록 화폐개혁은 실패했으나 단군 이래로 오늘날까지 국가 재정이 꾸준히 흑자를 기록한 것은 태종 때가 유일하다. 때문에 다음 왕인 세종이 대규모 사업이나 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기본 재력을 마련한 것도 어떻게 보면 태종이다. 게다가 계유정난 당시 단종김종서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쉽게 무너진 이유도 세종 때 대규모 사업을 많이 벌여서 국가재정이 다 떨어져 단종의 왕권이 약해진 까닭이라는 분석도 있다.

4.3 계모와의 악연, 그리고 외척의 척살

태종은 공신들은 주로 죽이기보다 적당히 귀양을 보내놓고 잊어버리거나(…) 강등시키는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외척에 대해선 용서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싸그리 다 죽이고, 나중엔 후계자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개박살을 내버린다. 외척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는 두 번째 아내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해서 능도 서울 도성 안에 조성했다. 사실 왕릉은 도성 안에 조성할 수 없는 것이 조선왕조의 법이지만 태조가 너무 강씨를 사랑한 탓에 법률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무덤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기는 걸로도 모자라 그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특히 하륜이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능이 있던 자리에 공신들의 집들이 지어지는 것을 보곤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뒀지만, 태종 대에 지금의 위치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당시 정릉동은 양주목 관할이었다. 여기가 영화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그 정릉이다.

또한, 태종은 신덕왕후 무덤의 격식을 후궁의 무덤으로 낮췄다.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분명한 정식 부인이었고, 정식 책봉을 받아 왕후가 되었다. 명백히 태종의 개인적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술 더 떠서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한 김에 광교를 세워서 석재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나중엔 신덕왕후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도 파하지 않고 태조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내기까지 했다. 그래서 광교를 잘 보면 석물에 새겨진 문양이 뭔가 화려한 걸 볼 수 있다. 그녀의 무덤은 현종대에 가서야 송시열의 건의로 복권되고 다시 능으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덕왕후가 대체 의붓아들들과 첫 번째 부인에게 무슨 지독한 짓을 했나 싶은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씨 부인과 의붓아들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정도전과 손을 잡고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올리는 과정에서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이 아버지 태조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를 도울 때 태종 본인은 도성에서 아버지의 정적들을 견제및 제거해가며 나라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개국 일등공신이다. 만약 태조가 세자로 장남 이방우나 차남 이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아무리 야심이 강한 태종 이방원이라 해도 도저히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이 없었다. 이방우는 처음부터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적장자였고, 이방과는 이방우가 일찍 죽은 후 실질적인 적장자의 위치를 가졌으며 군사적인 전공 면에선 이방원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형들도 자기 자신도 아닌, 정작 아무것도 한 게 없는 핏덩이 막내가 계모의 치맛바람으로 냉큼 세자 자리를 꿰찼고 이후에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빌미로 첫째 부인의 아들들을 제거하려고 드니 그 적개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신덕왕후의 일을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릉(貞陵)이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었다. 내가 어머니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 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쉽게 풀어쓰면 자신은 신덕왕후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지만, 아버지 얼굴을 봐서 제사나 지내주겠다는 소리.

다만, 태조가 어째서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았는 지에 대한 책임을 태조가 아니라 그녀와 정도전 일파에게 몰기 위해 태종이 일부러 저리 한 거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원한도 원한이지만 정통성의 문제도 걸려 있는데, 신덕왕후를 정부인으로 인정하면 의안대군은 적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는 태종과 그 후손들의 정통성 확립에 좋을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면 의안대군은 후궁의 자식이 되므로 신의왕후의 자손들이 전부 죽지 않는 이상은 정통성도 없이 세자가 된 것이 된다. 정통성 문제가 엮여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사적인 원한이라고만 확정짓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다.

한편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설도 있다. 양녕대군 이전에 태어난 자식들이 요절한 까닭에 원경왕후 민씨가 "이번엔 아이를 외가에서 기르면 괜찮지 않을까" 하여 친정에서 양녕대군을 자라게 하였다고 하는데, 일각에선 이 때문에 진작부터 양녕대군은 외가인 민씨 집안의 입김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태종이 민씨 일문을 숙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양녕대군은 외숙부들이 숙청될 때... 자세한 건 해당 항목 참조. 결국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물러나고 세종대왕이 뒤를 이었으니 어찌보면 억울하게 숙청당했다고 볼 수도. 양녕대군이 좀더 일찍 세자에서 물러났다면 굳이 민씨 일족은 숙청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양녕대군이 혼인을 할 때, 즉 첫 번째 세자빈을 고를 때도 태종은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는 태종 본인의 과거시험 동기인 김한로였다.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를 한 인재이긴 했지만 조선 건국에 딱히 세운 공도 없고, 하륜이나 정도전과는 달리 정치 싸움이나 세력 규합 등에는 젬병인 순수 관료형 타입이었다. 태종은 그가 훗날 국구(임금의 장인) 자리에 오른다 해도 딱히 권세를 휘두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다만 김한로 역시 외척 숙청의 칼날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폐서인되어 고향으로 쫒겨났는데, 이 쪽은 양녕대군에게 여자를 소개해 주는 등 비행을 방조한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 가문의 외척 중에서 태종의 숙청 칼날을 피한 것은, 왕위 계승과는 전혀 상관없던 효령대군성녕대군, 그리고 서자들의 처가 정도.

그리고 양녕대군의 혼인과 관련해서 민씨 일족이 본의 아니게 태종에게 위기감을 조성한 사례가 있다. 양녕대군이 혼인하기 직전 명나라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한 검토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 사신과의 논의가 영 진전이 되지 않자 흐지부지되는 듯 했고 태종도 이를 포기한 채 위에 언급한 김한로의 딸과 혼인을 진행했다. 그런데 공부, 이현 등이 민제를 찾아가서 명 공주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때 민제는 태종의 압력에 못이겨 사직한 상태라서 자신이 감히 주상에게 아뢸 일이 아니며, 민제의 아들들도 말할 자신이 없다며 논의 자체에서 빠지려 했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은 사사롭게 국가의 큰 일에 관여하려 했다며 공부와 이현을 처벌하였다. 겉으로는 단순한 소동이었지만 이는 태종에겐 민씨 가문의 위세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 사건이었다. 왕세자의 혼인이라는 중요한 국정 문제를 국왕이나 현직 대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씨 가문에서 논의하려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위치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엔 측근인 강상인까지 이용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집안을 숙청했다. 당시 병조 참판이었던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가 상왕 태종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 후 관노로 삼았는데, 이후 다시 강상인을 고문해서 태종과 세종을 이간질시키려 했으며 여기에 심온이 동조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심온을 체포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심온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는데 이들은 태종이 사망한 뒤에 복권되었다. 복권할 당시 세종은 "사실 이 복권은 아바마마께서도 내심 원하신 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못한 것"이라고 변명했다.[22]

4.4 공신 숙청

비슷한 방법으로 집권한 손자 세조보다는 오늘날 훨씬 욕을 덜 들어먹는 편인데, 바로 철저한 공신 숙청 덕분이다. 의리의 싸나이(?)인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에게 토지와 관직을 듬뿍듬뿍 내려 주고 비호하였고, 이는 결국 이른바 훈구파라 불리는 집단을 무더기로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23] 역사서에서 말하는 훈구파는 조선 건국 세력까지 포함하는,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다. 다만 시기상으로 대립되는 사림이 등장할 때는 상황이 좀 엉망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이와 반대로 태종은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을 싹 숙청해 버린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과 자신의 처갓집, 사돈집마저 사정없이 개박살 내버렸다. 이숙번은 왕자의 난의 1등공신으로 시작해 조사의의 난에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정권의 성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권세 높다고 잘라버린거다. 다만 초창기엔 좀 많이 감싸주긴 했다. 결국 이숙번은 마지막까지 복권이 안되었고, 세종 때 태종실록의 일부 기록을 보완하기위해 도우미 역으로 한양에 잠깐 불렀다가 완성되고 다시 유배지로 원상복귀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나마 민씨가 4형제만 빼면 죽이지는 않고 대부분 목숨 보전은 시켜준 게 다행인가?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자는 하륜조영무 등 아주 소수의 인물 정도이다. 이중 조영무는 처신을 잘해서 피한 것이었고 하륜의 경우엔 나이가 많은 점이 작용한 게 크다. 또한 그밖에 다른 공신들도 나이 등을 이유로 품계는 높아보이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보내거나 하는 등 요즘으로 따진다면 따진다면 명예퇴직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24].

태종이 많은 사람을 죽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태종으로서는 이러한 인식이 억울할 법도 하다. 조선 왕조 동안 각종 사화, 반정 등을 통해 여러 신하들이 죽어 나간 일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태종과 동시대를 살았던 명나라 태조 홍무제나 영락제가 수 만명의 공신과 그 가족들을 죽인 것에 비하면 태종의 처사는 대단히 온건(?)하다.

명나라 태조인 홍무제나 그의 아들 영락제의 사례와 비교할 땐 태종의 숙청은 대단히 온건한 편이었다. 애초에 태종이 이들의 숙청을 보고 참고했을 가능성도 크다. 홍무제는 중원을 통일한 이후 호남의 옥을 필두로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1등 공신 이선장을 비롯한 수많은 공신과 그 가족들을 죽였는데, 최대 9만명 정도가 처형되거나 연좌되어 유배 혹은 관노로 떨어지거나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문자옥을 일으켜 온갖 구실로 문사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며 재상을 폐지하고 황제가 기분 내키는대로 시행하는 태형인 정장을 불문법화하는 등 황제독재에 걸리적거린다 싶어 제거한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덕분에 명은 유례없이 강력한 황제독재 체제를 성립시켰지만 그 후유증은 바로 다음 대에부터 나타났고 명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살생을 해도 제거해야할 사람을 최소한으로 한정시키고, 스스로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간언과 사관의 언론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지켜준 태종과는 근본적으로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다. 대신들이 '흠, 전하도 얘네 귀찮아 하겠지?'하고 대신들이 탄핵을 받아도 확정되기 전까지는 업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만 처벌하는 편이었기에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학살이나 피의 숙청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사람을 죽인 숫자는 연산군, 선조, 광해군, 숙종 때가 태종 때보다 훨씬 많다.

당대는 왕정 시대이고 지금처럼 민주적인 선거를 거쳐 밀리면 낙향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음을 잊지 말자. 민씨형제의 경우 "세자 이외의 왕자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기에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게 공식 입장.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9월 4일 1번째 기사.) 다만 이 죄목의 근거라고는 "세자 외에는 영특한 아들이 없는 게 낫다"는 말 뿐이라 그다지 신빙성은 없다. 정황상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조선에선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황제 자리를 놓고 내전까지 벌어져 명색이 초대 황제의 적장손인 건문제가 실종되기까지 했다. 이러니 세자 외의 아들은 미래의 국왕인 세자의 자리를 위협할 뿐인 위험 요소라는 인식이 강해질 법하다.

조선의 통치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이 사실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진 훈구들 좀 잡아보겠다고 사림 불러들였다가 역으로 사림에게 쥐락펴락 당하며 매 한 마리 마음대로 못 날리는 신세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이는 아들 세종의 치세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다만 성종의 이런 모습은 권력게임에서 졌다기보다 성종 본인이 '좋은 군주는 대간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또 역대 임금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관대한 임금이었기 때문이다.[25][26]

4.5 명과의 우호관계

애초에 고려 시절 제1차 요동정벌에 참여하여 명을 침략할뻔하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태조 시기 2차 요동정벌을 계획하던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던만큼 명은 이방원을 친명파라 여겨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전부터 태종 스스로가 왕이 되기 전 명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적이 있고[27]홍무제, 영락제도 모두 접견해본 적이 있다. 심지어 영락제랑은 서로 군주가 되기 전 보위 계승자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만나 서로 환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훗날 영락제)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이렇게 궁합이 좋았던 두 사람의 통치기간이 겹친 시기였던만큼 조선과 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사대주의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설왕설래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명의 여진족 직할통치 드립처럼 조선의 주권을 위협할만한 요소들은 홍무제대의 증거까지 들이대며 철저히 막았다. 명 주도 질서에 앞서 참여하고 영락제와의 개인적 친분도 작용했는지 조공무역을 1년에 3회로 늘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게 된다.[28]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 외에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벌이던 시기는 명도 한창 혼란스러운 시기라서, 정도전의 발안대로라면 요동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태종이 권력욕에 내전을 벌여서 좌절되었다는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긴 하다.

5 인물됨과 일화

과거 급제 출신의 짬밥에서 나오는 정치 9단의 군주[29]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이 뛰어났고 산전수전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던만큼 신하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던듯하다. 종종 깜짝 양위 쇼를 벌였다. 조선시대 국왕이 손쉽게 일으킬수 있는 왕권강화 이벤트가 양위소동이었다. 이 경우 세자부터 신하들까지 전부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모드가 되기 때문에 왕권은 하늘을 찌른다. 문제는 이를 남발할 경우 반대로 세자의 기반이 약해진다는 것으로, 이런 점의 최악의 본보기가 이를 자주 왕권강화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선조(광해군), 영조(사도세자)이다. 이런 정치적 이벤트는 왕권 강화책의 일환이자 신하들의 충성도 테스트였을 확률이 높지만, 이런 방식으로 허구헌날 대전 밖에서 "양위는 아니 되옵니다!"나 "역적 누구를 벌하소서!"를 외치는 신하들을 보며 나름의 희열도 느꼈던 듯하다. 물론 신하들은 대단히 피곤했을 것이다. 다만 충녕이 후계자로 확정된 후엔 진짜로 양위를 했다.

신하들 머리 꼭대기에서 놀며 각종 권모술수로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으로는 조선 임금 중에선 최강자. 신하들 갈구기로 악명(?)높은 세종대왕도 이점만은 태종에 미치지 못할 지경이다[30]

5.1 심술쟁이 군주

태종하면 무인 이미지를 더 많이 떠올리지만 실제 그는 고려시대 과거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다. 이방원이 무장으로 전투에 출전한 적은 없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에 무장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는 오히려 정종 이방과였다. 이런 점에서 유추해볼 때 태종의 성리학 수준은 적어도 신료들과 비등했다 볼 수 있으며 이런 지식과 말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 게다가 잠저 시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정계의 여러가지 역학관계를 모조리 꿰뚫어 보는 능력, 거기에다 이라는 직업빨까지 더해지면 신하들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신하들 놀리는 일화는 실록에도 많이 전하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계속 거절하는데도 간언이 또 올라오자 옛말엔 세 번 간언해서 왕이 안 들으면 짐싸서 나간다던데[31] 넌 왜 아직도 나오냐? 얼렁 짐싸서 다른 나라로 가렴 훠이 훠이 같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32] 별궁 짓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하자 뭐 그럼 지금 집도 절도 없는데 나더러 길바닥에서 이슬맞고 자라는 거임??? 이라고 버럭 했더니 신하들이 쫄아서 우리 전하가 성군되긴 다 글렀다며 엉엉 통곡을 하자(!) 그냥 화 좀 내 봤다 님들 쫄지마셈ㅋ라며 넘어간 적도 있다. 참고로 결국 별궁은 자기가 짓고 싶었던 대로 지었다(…).
  • 창덕궁에 새로운 정자를 지어 놓고 당시 도승지였던 황희를 통해 신하들에게 "이번에 새로 지은 정자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고 권근하고 의논했는데, 근이는 '청녕'이란 이름을 올렸음. 근데 난 이거보다는 '해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어. 너님들 생각은 어떰?"이라고 묻자 신하들은 "우왕ㅋ굳ㅋ 우리 전하 좀 촹인 듯"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태종 가라사대, "임금이 뭔 말만 하면 신하들은 빨기 바쁘구만(하여간 아부하는데에는 도들이 텄다니까.). 권근이랑 다시 의논해서 결정해 ㅋㅋㅋ"라고 받아쳤다. 결국 권근도 여기에 동의해서 정자 이름은 자기 뜻대로 해온이라고 지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태종실록 1406년 4월 9일자 기록.
  • 박자청이라는 신하는 대형 공사의 책임을 자주 맡아 태종의 신임을 받았는데, 어느 날 일꾼들과 현장에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이중위가 자기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자 건방지다며 그를 붙잡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중위는 형조에 고발하여 형조에서는 박자청을 벌할 것을 청했다. 박자청은 태종에게 폭행사실을 부인했고 태종도 박자청을 신임했기에 벌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 "그 친구 나한테 폭행한 사실 없다고 맹세까지 했거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중위도 맞은게 분명하다고 맹세했는뎁쇼?"라고 말하자 태종 왈, "이래서 맹세는 믿을 수 없다니깐?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죄를 주면 백성들이 안심하겠냐? 사직과 관련된 게 아니면 용서해야지!" 참고로 사헌부에서도 박자청을 죄줄 걸 청했지만 박자청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어물쩍 넘어가 버린 모양.
  • 상왕이 된 후 이랑 강원도 평강에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을 불러 "나 평강에 놀러갔다 오고 싶음. 수행원 쵸큼만 데려갈 건데 안됨?"이라고 묻자 유정현은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 수행원이 적어도 임금이 두 분이나 가시면 곤란할 듯."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고 박은은 가도 좋다고 말했다. 태종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해서 박은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의정의 말은 내가 새겨 듣겠음. 근데 좌의정의 말인들 어찌 망령된 신하라고 하겠는가?(좌의정은 말 하나는 남 비위 맞춰주는데엔 선수야.)" 출처는 세종실록의 1422년 5월 9일 박은의 졸기. 박은은 태종의 의중을 잘 읽어서 태종의 비위 맞추기 선수였다. 태종도 박은에게 힘을 실어 줘서 박은의 라이벌 격인 세종의 장인 심온 집안을 박살냈지만, 태종의 말은 박은의 아부를 돌려서 깐 것. 세종 역시 박은을 두고 "아부밖에 모르는 신하"라고 깠다. 그 덕분에 박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 유능했어도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
  • 역시 상왕이 된 후에 태종이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신하들이 수강궁(壽康宮. 오늘날의 창경궁)이라고 지어 올렸다. 목숨 수편안할 강을 쓴 좋은 의미의 궁궐 이름이었는데 이 궁 이름을 듣고 박은 등을 불러서 "수강궁이라면 옛날 나라 광종이 6년간 유폐되었다가 죽은 궁 이름이잖아. 그런 이름을 왜 내 궁에 붙이는 건데?(유폐되서 죽은 왕이 살던 곳의 이름을 내 궁궐에다 붙이겠다니 니들 돌았냐?) 이거 <송감>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야"라고 면박을 주었다. 신하들은 데꿀멍하며 궁 이름을 다시 지어 올리겠다고 용서를 빌자 대인배였던 태종은 쿨하게 넘어 갔다.(세종실록 5권, 1년 9월 28일 기사). 아버지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까이고 그 아들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쌍으로 까인 조선 초기 신료들이 이쯤 되면 불쌍할 지경. 여기서 송감은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중국의 기본 역사서들인 '정사 24사' 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송나라 때의 역사서로는 <송사>가 들어간다) 왕이 서연에서 공부해야 하는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
  • 목인해라는 인물이 공신의 자손이자 왕실 인척이었던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조대림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 그는 당시 종친 중에서 유일하게 군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태종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조대림을 군부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목인해의 고변 이전에 정보망으로 이미 무고사건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었다가 역모 고변이 일어나는 시점에 조대림을 본인이 역모로 몰아 구금시킨 다음 맹사성 등에게 암묵적으로 지시를 내려서 조대림에게 곤장을 때리게 했다. 그 다음에 조대림이 무고하다는 걸 본인이 직접 밝힌 다음에 맹사성을 종친을 억울하게 때려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재빨리 가두고 사형선고 까지 내렸다.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 중신들의 사정 끝에 맹사성을 살려주는 결정을 내리는데 이 고약한 왕은 맹사성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면 결정을 내려서 망나니 칼이 목에 닿기 직전에 맹사성을 살려줬다고 한다. 조대림 사건 참고.
  • 즉흥적인 면모도 있었다. 출중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세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 중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사전에 검사한 시험관들은 셋 모두 수준이 거의 비슷하나 하나는 아주 약간 모자라고, 나머지 둘의 수준이 비등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태종은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집는 게 장원이야!"라며 한 장을 집어 장원급제를 시켰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다.
  • 다른 즉흥적인 면모를 보이는 예로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당시 도성을 다시 바꿀지에 대해서 논의가 오갔는데, 기존의 한양과 하륜이 주장한 무악(현대의 신촌)이 후보로 올랐는데, 이에 대해 태종은 동전으로 점을 쳐보겠다고 했고, 종묘에서 점을 친 결과 한양을 도성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다만 이에 대해선 어차피 태종은 한양에 대해 마음이 가 있었으므로, 점을 쳐서 결과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한양으로 밀고 나갔을게 뻔하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5.2 사냥 애호가

정쟁政爭에서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몇 년이고 참아가며 끈덕진 자제력을 발휘했던 주제에 자기 취미에 관해서는 자제심이 거의 없었던 모양으로 "전하께선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라고 간한 기사가 자주 나온다. 상왕이 되고 나서도 사냥을 가려고 은근슬쩍 아들인 세종대왕이 살이 너무 쪘으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며 아들까지 끌어들여서 핑계를 댈 정도. 마치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바가지 긇히는 남편이 살찐 아들 운동 핑계대고 아내의 만류를 씹고 아들데리고 운동 나가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왕조시대 왕의 사냥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했다. 왕을 수행할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사냥 가는 지역 수령은 임금이 자기 관내에 들어오니 당연히 초긴장 상태.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왕의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어 몰이꾼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를 싹 갈아엎느라 한해 농사를 망치는 것은 기본.

하여튼 이런 간언에 응수하는 것도 정말 고단수이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과거에는 붙었어도 원래 무인 집안 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고"는 핑계를 대고, 어떤 때에는 "내가 원래 대궐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데, 매 사냥은 잠저에서 살 때부터 즐겨하던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사간 대부 윤사영이 "3일 전에 우박도 내리고 분위기도 안좋아서 반성부터 하셔야 되는데 전하는 왜 사냥으로 즐거움만 추구하시느냐"고 따지자, 태종은 "그래도 한 번 해볼건데 늬들이 날 강제로 못하게 할거냐"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33] 그런가 하면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는데 왜 지X이셈?"이라고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결국 실컷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34]

그런데 이와 반대로 일반 행정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자기가 좀 배운 사람이라는 티를 낼 때에는 "내가 무인 집안이긴 해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라서…."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도저히 말로는 이겨먹을 수가 없다.어지간한 인물들보다 계급있고, 경력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어거지 쓰는데 어찌하리오...

다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을 두려워하여 사냥을 가도 "지금 나 사냥 온 거 사관들이 아냐 모르냐?"고 끊임없이 물어봤다고.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쪽팔리는 것이 더 신경쓰였는지 "사관한테 나 낙마했단 얘기 하지 마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라고 실록에 적혀있다.

즉 낙마한 사실과 그 얘기 하지 말랬단 사실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까지 편찬된 것이다. 그야말로 철혈군주의 굴욕. 이 기록은 결국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2월 8일자 기사# 에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사관의 위대함을 언급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

비록 간언하는 간관들이나 사관을 귀찮아했고 틈만 나면 때려잡으려고도 했지만 조선의 기틀을 이루는 유교정치의 근간인 이들의 존재 가치는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태조 시절에는 거의 준 내관 취급이었던 사관의 대우를 츤츤대며격상시켜 준 것도 태종이다.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 자제 좀 시키자고 하자, "걔네들이 없으면 사악한 놈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거야?"라며 이 의견을 씹어버리기도 했다. 우선 본인부터가 이런 간관들의 비판이나 사관들을 대단히 귀찮아했음에도 이렇게까지 두둔해 가면서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을 보면 걸물은 걸물. 실제로 조선시대 삼사가 확립된 것은 태종 대이다. 관리 감찰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기관으로 만들어서 간쟁 기능을 담당시킨 것이 또 태종이기 때문이다.

야사중에는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며 대성일갈을 내지르며[35] 먹어버렸고 그후 메뚜기떼가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당태종도 같은 일화가 있다.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던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손인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과 관련하여 비슷한 일화가 있다.

용재총화의 저자인 성현은 태종을 문관으로 패업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다만 크롬웰은 기반을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지만.

5.3 여성 편력

이미 즉위 다음달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아내의 투기를 피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경연청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종실록》 권6 2년 12월 19일 기유 3번째 기사. [4][36]

여자에 관해서는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잘 나타나지만 한 번은 두 무관이 한 기생을 두고 싸우는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이 둘을 벌줬는데 그래놓고 그 기생은 자기가 데려갔다(...) 이것과 비슷한 일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도 나온다. 다만 거기서는 그게 화가 되어 신하들이 역모를 꾸며 결국 나라가 망한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인물이었던 만큼 사냥과 여자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1위가 태종. 슬하에 세종을 포함하여 12남 17녀(29명). 참고로 2위가 성종의 16남 12녀(28명), 다음이 선조의 14남 11녀(25명), 4위로 정종의 15남 8녀(23명)이다. 정종과 태종 두 형제의 소생 수만 해도 50명을 넘는다. 흠좀무.

덕분에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즉위 초기부터 원경왕후 민씨와 피터지는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남편이란 작자가 젊은 궁녀들을 처소로 끌어들였으니 보통의 내명부 여인이라면 참고 견뎠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활동력 강하고 다혈질 성향인 왕비로서 2차 왕자의 난 때 홀로 집으로 들어온 말을 보고 창을 들고 직접 나가 싸우겠다며 달려나가려 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민씨는 태종에게 바가지를 긁고, 태종 역시 그에 못지않는 성격이라서 똑같이 화내다보니 부부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참다못한 원경왕후가 태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벌주자 대노한 태종이 교태전 소속 궁녀와 내관들을 모두 궐 밖으로 내친 일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궁녀와 내관들을 내친 것이지만 원경왕후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이다.

태종은 그 이후에도 여자문제로 원경왕후와 박터지게 싸웠다. 원경왕후는 남편의 외도에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태종은 보란듯이 신하들에게 후궁의 법제화를 논의케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고사를 들며 가례색까지 설치해 9명의 후궁을 들였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에도 마찰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배려인지 후궁과의 성대한 혼인식만은 취소하고 단순히 궁궐로 들이는 것만 행했다.

유명한 예가 야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효빈 김씨와 관련된 이야기다. 효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였는데, 미모가 상당해서 태종이 그녀와 동침해 아이를 임신했다.[37] 그러자 원경왕후는 친정에게 일러 김씨를 학대하게 했다. 실록의 표현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를 문바깥에 방치하고, 아기를 낳은 뒤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 방치했다. 몇몇 노비가 동정심에 이불 등을 가져다 줘서 김씨는 간신히 아기를 낳아 살릴 수 있었다. 이 아기가 태종의 서장자인 경녕군 이비이다. 태종은 차마 왕비가 투기 때문에 이런 짓을 직접 저질렀다고 공표하기는 곤란해서, 민무휼과 민무회가 이런 학대를 멋대로 행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물론 이에 대해 원경왕후가 항의한 것은 뻔하다.

계속되는 마누라의 바가지에 지친(...) 태종은 침소를 경연하는 곳으로 옮겨버리고 원경왕후 대신 궐 안의 살림을 대신할 규수를 찾아보라고 명을 내린다. 내명부를 다스리는 권한을 원경왕후에게서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고 태종의 결정엔 절대로 간섭하지 않던 형인 상왕 정종마저 나서서 나는 아들이 없어도 젊은 날의 정으로 삽니다.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 합니까이방과 : 네 자식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냐? 이방원 : 형님이 그러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하며 만류했다.[38] 결국 가례색까지 설치했던 이 일은 정종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태종은 여자문제로 정처인 원경왕후의 속을 꽤나 썩였다..

하지만 이렇게 투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원경왕후와의 자식이 4남 4녀(+4명[39])으로 결코 적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해로한 것을 보면, 이 부부의 애증 관계는 참으로 지독했을 것이 틀림없다. 자세한 사항은 태종(조선)/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5.4 아들 사랑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 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또한 충녕 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3일

이러한 철혈 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매우 약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록이 의외로 꽤 많다. 양녕대군의 수없는 망나니 짓도 끝까지 참으려고 했으며, 결국 양녕을 폐세자 시킨 후에도 당시 태종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중전의 핑계를 대며 양녕을 자신의 곁에 두며 가능한 보호하려고 했었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양녕을 폐하고도 목이 메도록 울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시킨 것에서는 자식의 목숨도 포기하는 냉혈 군주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수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새나라를 건국한 입장에서는 종묘사직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정몽주나 정도전을 죽일 때처럼 폐세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태종이 죽은 후 세종이 양녕대군을 제거하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종대에 양녕대군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수 없이 이어졌다.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인 태조의 속을 문드러지게 한 장본인이 결국 자신도 자식의 일로 이렇게 속을 썩은 것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본인이 한 짓이 있기에 왕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가 밀려난 양녕이 사사될까봐 두려워했었지만, 오히려 세종대왕에 해를 끼친 것은 엉뚱한 쪽이었다. 다만 양녕이 종묘 사직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결국엔 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양녕이 사라졌지만 돌아왔을 때 양녕을 꾸짖는 모습은 냉혹한 철혈 군주였던 그 역시 평범한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양녕이 어둘 녘에 성안에 들어와 스스로 부끄러워서 옷소매로 낯을 가리고 수강궁에 나아가니, 상왕은 보고 슬픔과 기쁨에 잠겨 순순히 훈계하며, 또 이르기를, "네가 도망했을 적에, 주상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며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년(1419) 2월 1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방탕한 아들 보고 '이놈아. 언제까지 그따위로 살래. 니 동생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 이 애비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내가 니 아빠니까 이렇게 걱정해주는 거야.'라고 탄식하는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래 놓고 이 말을 한 이틀 뒤에 양녕에게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양녕이 세자 시절, 기생 봉지련과 정을 통하는게 들통나서 봉지련이 쫓겨나자 식음을 전폐한 일이 있다. 잘못을 하고도 오히려 떼를 쓰니 혼을 내야하지만 아들에게 한없이 약한 태종은 봉지련도 풀어주고 비단과 고기까지 내려가며 아들을 달래기도 했다.

면피용이나 다름없던 양녕의 반성을 알면서도 매번 믿으려 애썼고, 하도 공부를 안 하려는 양녕을 대전 옆에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감시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그러면 오히려 부자간의 사이만 나빠진다며 끝까지 아들을 배려해주었다.

거기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던 충녕대군이 큰아버지인 상왕 정종의 상중에 고기를 잠시 끊자 "주상이 고기반찬 없이 식사를 하시다니!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유언으로 '내 상중에는 고기 반찬 드시게 해라' 말까지 남길 정도. 그 뿐만 아니고 한창 신덕왕후의 압박으로 입지가 위태로울 때 위의 세 아들은 잃고 넷째 양녕은 외가에 보내고 다섯째 효녕은 다른 집에 맡기고 슬하에 남은 거라곤 갓 태어난 충녕대군 뿐이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고 한다.

형제들과 꽤 터울을 두고 태어난 막내인 성녕대군의 경우는 몸이 약한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결혼한 왕자는 모두 궁궐을 나가서 살아야한다는 법도를 깨고 결혼시킨 후에도 옆에서 끼고 살았다. 결국 병약했던 이 아들이 병을 앓다가 14살에 요절했을 때는 그야말로 낙심천만이었던 듯. 참고로 양녕대군은 막내동생이 요절해서 부모형제가 모두 슬퍼할 때 사냥하고 놀러다니고 술을 마셔댔다. 여기에는 태종도 인내심이 바닥나서 노발대발해 양녕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라고 했고 앙녕의 스승까지 "부모도 못 가르치는 걸 스승이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벌하지 않을 수도 없다."라고 책임을 물어 벌했다.

태종은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하면서 심지어는 1차 왕자의 난때 죽은 자식을 애도하기 위해 태조가 드리는 불공에 대해서도 뭐라고 한 마디 할 정도로 불교를 싫어했는데 정작 성녕대군이 죽은 뒤에는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한양 안에다가 절을 지으려 했다!!![40] 태종은 이 대자사를 대군의 무덤을 살피는 원찰로 삼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부지와 절에 딸린 전답이 수만평이었고 그 규모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조선 최대규모였다고 할 정도. 아직도 그 사적지에는 당시 토기 파편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죽은 성녕대군의 부인에게도 변한국대부인이라는 작호를 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다른 대군부인이 부부인 작호를 받은 것과 차이가 있다.

이후에도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슬퍼했고 거처를 옮기려고 했을 때도 지나가는 길에 성녕대군의 집이 있어서 울까봐 못가겠다고 중지한 적도 있다.죽을 때도 세종에게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덕에 태종과 세종 시절에 그 집안 사람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는 14살에 죽은 성녕대군이 제삿밥 못 먹을 것을 걱정해서 양자를 들여서 후사를 이으려고 시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전례가 없었기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지만 결국 세종대왕이 후에 자신의 아들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이 셋이 더 있었는데 모두 어린 시절에 죽어버렸던 기억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무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태종 자신이 형제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왕자의 난 중심에 있었기에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러한 형제간의 피바람이 없기를 기원했기에 이런 태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양녕을 폐세자 하는데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은 더더욱. 첫째인 양녕을 폐세자 시켜버리고 셋째를 국본으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한다면? 필시 양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태종이니 만큼 필히 이 부분에 걱정을 했을 듯.

아들에게 극진했던 것 때문이었는지 이후 세종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때도 태종 시기의 예를 들고 아버지께선 이랬을 것인가 하는 대목도 많이 보이고, 실록이 완성되었을때는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려 2번이나 태종실록을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둘 다 주변의 반대로 보는 것을 단념하게 된다. 두 번째 시도 이후 이틀만에 갑자기 태종이 태조실록을 본 적이 있는지를 주변에 묻고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선례가 있으면 자신도 태종실록을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으로 여겼거나 그냥 보고싶은 미련이 남아 한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연산군사례와 함께 실록을 왕이 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선례(물론 후자는 반면교사)로 남게 되어 조선왕조실록 편찬이 왕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원인이 되어준다.

충녕을 위하여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날때쯤, 충녕이 정책을 펼칠때 반대세력이 될만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즉, 자신이 아들을 위해 아들이 져야 할 모든짐을 다 지고 간 셈. 정말 극진한 부성애다. 세종대왕이 한국사 최고의 왕이라고 불리는데는 아마 태종의 희생도 많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세종도 태종의 이런 점을 물려 받아서 그런지 막내인 영응대군을 늘 아꼈다고 한다.

5.5 부엉이 트라우마

냉혹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강한 태종이지만 의외로 부엉이를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는 두려워 하기까지 했다.

태종 6년 8월 5일에 부엉이가 경복궁의 누각과 침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며칠뒤인 8월 13일에는 부엉이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울었고, 그 다음날인 8월 14일에는 경복궁 침전에서 울었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침전과 근정전에서 울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8월 18일에는 창덕궁 서쪽 액정에서, 8월 19일에는 전농시의 제기고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연달아 부엉이가 나타나자 태종은 대단히 불안해했는데 9월 1일에 양녕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쳐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양위 소동은 태종의 술수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부엉이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던건 분명한듯 하다. 부엉이 때문에 성밖으로 이어하려고{이주, 혹은 이사} 하자 대간에서 상소를 올려서 이를 반대했는데 태종은 이 상소에 대해서 이런 비답을 내렸다.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는 것이 비록 고론(高論)은 되지만, 내가 옛글을 보았더니 이어(移御)하였다는 글도 없지 않았다. 오늘날 야조(野鳥)가 집으로 들어오고, 또 지붕 위에서 우니,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다른 곳으로 피하여야 합니다.’하고, 또 근일에 태백성(太白星)이 대낮에 나타나고, 다시 헌원성(軒轅星)을 범(犯)하게 되어, 내 마지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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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를 논할정도로 부엉이가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9월 3일에도 부엉이가 근정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부엉이에 노이로제에 걸릴지경이 된 태종은 여기저기로 이어를 하기도 하고 궁궐 수비대에게 잡귀를 쫓는 방상씨탈을 쓰고 경계근무를 서게 했는가 하면 부엉이를 쫓으려고 한밤중에 궁 전체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엉이는 불길한 새로 여겨지긴 했지만 태종의 반응은 거의 트라우마 수준인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났다고 여겨서 부엉이를 질색하고 무서워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부엉이를 정도전의 환생으로 여겨 태종이 질색했다고 묘사되었다. 삼보옹~ 삼부엉~ 정도전이 태종의 최대 걸림돌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부각시키는 극중장치로 보인다.

5.6 의외의 관대한 모습

외척이나 공신들을 냉정하게 때려잡던 모습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철저하게 왕권에 위협이 될 자들만 숙청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쿨한 모습을 보인다.

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기사

요약하자면, 애들이 길거리에서 공에다 주상, 효령군, 충녕군 등의 이름을 붙이고 차면서 놀다 잡혀온 일이다. 일반인 이름 가지고 저래도 욕먹을 일인데, 저 시절은 왕정 시대에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피휘도 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태종은 쿨시크하게 '애들이 그런거 가지고 뭐' 하며 그냥 넘어갔고,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말라' 며 뒷말이 나올 여지도 차단했다.

여담으로 무시무시한 철혈 군주는 아버지큰 형과는 다르게 개명이고 뭐고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과 멀 원자를 이름으로 계속해서 썼다.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이름이 두 글자인 경우에는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휘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권장사항이고 아버지가 이성계 에서 이단으로, 둘째 형 이방과가 이경으로 개명한대서 알 수 있듯 왕실에서 강하게 적용시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방원이 특이 사례인 것은 맞다.

태종 17권, 9년(1409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기사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을 봤는데, 난생 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 감탄하여 멋도 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며 어떻게 들어왔지?? 숙위병들은 죄다 얼차려행 구경하다 광연루에서 붙잡혔다. 순금사에서는 장 80 대를 선고했는데, 장 80 대면 사실상 때려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모르고 한 일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방면했다.

그리고 앞서 '조서[41]'라는 관리가 친구를 궐에 데려와 숙직실에서 같이 잔 일이 있는데, 친구가 아침에 나가려다 길을 잃고 헤메던 중 태종의 침전에 들어가 버렸다. 고관대작이라도 왕의 침전에 허락없이 들어가는건 매우 무례한 일이고, 암살의 위험도 있기에 큰 벌을 받을만한 일이다. 뜬금없는 외부인에 궁인들이 기겁하고, 그 친구도 당황하여 '나가려 했다'고 변명했는데, 태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괜찮다' 라고 하고, '남들이 알면 법대로 처벌하자고 할테니 이 일은 알리지 말고, 넌 빨리 가라.' 하며 내보냈다. 이 일이 전해진 것을 보면 거기에 사관이 있었거나[42] 궁인들이나 태종 본인이 알리기는 한듯.

6 말년과 죽음

어쨌든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양위의 뜻을 내비치면서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말은 그렇게 해 놓고 그놈의 호랑이를 4년이나 더 즐겨 타다 가셨다 물론 아들에게 넘겨주기 전에 그 호랑이를 확실하게 길들이기 위해서이기는 했지만.... 참고로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양위한 사람은 태종이 유일하다. 그런데 군권만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세종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그 집안을 박살냈는데 이 때문에 그 당시 심온의 가문인 청송 심씨에서는 박은과 그의 가문을 열렬히 까는 편이었다. 태종을 대놓고 깔 순 없으므로 대신 심온 숙청을 주도한 박은을 깐 것. 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상왕이 되어서도 조선의 안정과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놀러 다니려고 각지에 정자를 짓고 좋아하는 사냥을 다니는 등 신나게 살았지만 그와 별도로 할 일은 꾸준히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세종대왕의 뛰어난 자질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명나라 사신들도 세종대왕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도 했다.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누리다가 1422년 5월 초10일, 한성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남동 주변)의 이궁에서 향년 56세로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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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다. 애증의 관계였을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능역 근처에 23대 국왕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데, 이를 묶어서 흔히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두 봉분을 이어주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 왕릉 중 헌릉만이 유일하게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사이가 안 좋았던 부왕과 모후가 돌아가신 뒤에라도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 세종의 뜻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효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

7 기타

  • 방원이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죽이고, 형과 싸웠는데 천하의 이성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태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상왕으로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이성계는 본래 자신의 토착적 기반이었던 함흥 지역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실록에는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조사의라는 사람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라 하며 봉기의 명분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개경 권문 출신으로 함흥에는 평생 가볼 일도 거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 조사의의 난 막후 조종자는 이성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 조사의의 난은 정치적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태상왕의 존재+강력한 함흥의 군세를 바탕으로 꽤나 맹위를 떨쳤다. 결국 태종은 한양 수비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친아버지를 상대로 친정(親征)에 나서는 조선왕조 최초이자 최후의 막장 행각을 벌이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리고 이 전투는 조선 국왕이 '친정'한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이후 조선 국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개창자이기 이전에 평생 출전한 전투에서 진 적이 없었던 불패의 명장이었으나, 이 때 아들 이방원과 벌인 부자간 전투에서만은 이기지 못했다. 그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마 이성계 인생의 최초이자 마지막이며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물론 이성계든 이방원이든 부자사이 싸움에서 누가 이겼더라도 뒷맛이 좋았을 리는 없지만.

사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성계는 사실상 지지를 잃고 아들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동정 여론도 알아서 거둬졌다. 그래도 태종이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오는 건 차마 할 수 없어서 계속 설득을 하고, 이성계는 체면상 안 가겠다고 좀 튕겨 보는데 이 때를 배경으로 나온 이야기가 함흥차사다. 현실에서는 생떼같은 아들,사위,동지 다 쳐죽인 후레자식 아들놈에게 너죽고 나죽자고 덤볐다가 그나마도 개털리고 완전 안습한 신세였던 이성계가 함흥차사 이야기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인 것이 흥미롭다. 함흥차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에 있으니 참고.

이런 면에서 묘하게 당태종과 겹친다. 실제로 태종과 당태종 둘 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고 도덕적으로는 패륜아라고 욕을 먹지만 둘 다 유능해서 나라의 기초를 단단히 하며 당대의 백성들한테 최고의 성군이라고 칭송 받았으며, 어진 인재들이 재야에서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었다. 또한 창업 군주와 수성 군주의 사이에 낀 애매한 위치이며 묘호조차 같다. 심지어는 자기처럼 자식들이 싸울까봐 성격 좋은 자식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까지 공통점이 많다. 차이점이라면 있다면 태종은 젊었을 때 문관인데 비해 당태종은 젊었을 때 무관의 기질이 더 우세했다. 또한 태종의 후계자는 너무나 유능해서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왕이지만[43] 당태종의 후계자는 전쟁을 많이 벌여 성공했긴 했으나 부인에게 권력을 쥐어주어 사후 왕조를 찬탈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방원은 아버지를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이세민은 그냥 자기 아버지를 즉위시켰다.

방송에서 사용된 장면태조 어진
  • 무한도전 TV특강에서 태종 이방원을 소개하면서 태조 이성계어진을 등장시켰다.(...) 어진 모퉁이에 "대왕어진(大王御眞)"이라고 적혀있는데 원본에는 "태조대왕어진(太祖大王御眞)"이라고 적혀있다.
  •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 일족을 보호하기 시작한 무렵도 태종부터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인물이었던 듯.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는데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어서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그를 살려주었다. 이후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무마했지만, 이건 아버지를 차마 대놓고 나쁜 사람 취급할 수가 없어서 적당히 돌려말한 거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태종실록 13년 11월 26일자 기사

이후에 왕씨의 후손을 주살하라는 대신들의 벌떼같은 청이 있었는데 태종은 "혁명(革命)한 뒤에도 오히려 전대의 후예(後裔)가 살아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서 유종(遺種)을 없애는 것은, 용렬한 군주(君主)가 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경 등은 나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구는가? 왕씨(王氏)의 유종(遺種)은 죄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진언(進言)하지 말라"라고 씹었다. 시대를 앞선 명언.태종실록 13년 12월 1일자 기사 실제 태종의 예상은 틀리지 않아, 결국 천명을 받아 일어난 자는 없어도 조선왕조는 후일 망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쪽은 민주 공화국으로, 북쪽은 김씨로 교체되었다.

7.1 세조와의 비교

집권 방식이 비슷한(...) 것만 빼고 닮은 것 없다. 애초에 태종 이방원은 후세에 명군으로 평가받는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군왕이다.

태조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결국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가 첫째 부인의 장성한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모양새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당시에도 잡음이 많았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구설수에 오르는데 하물며 유교적 가치를 건국 이념으로 세운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심지어 당시는 건국 초기라 정통성 면에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도 모자랄 때였다. 이 때문에 적어도 명분면에서는 납득할 만하다는 평이 많다.[44] 1차 왕자의 난 당시 민중들은 이성계가 죄없는 왕씨를 죽여서 천벌을 받는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와는 별개로 이방석 자체에 대한 동정 여론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두말할 여지가 없는 정통성을 가진 단종과 달리 이방석의 정통성은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졌던 것.

그에 비해 세조는 정통성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던 친조카 단종을 강압으로 퇴위시키고 즉위했으며 그나마 친형 이방간은 건드리지 않았던 태종과는 달리 친형인 문종의 무덤을 파헤져 함께 묻혀 있던 현덕왕후의 관을 내다 버리는 현대 기준으로도 유교적 가치관으로도 막장이라 할 만한 패륜을 저질렀다.

왕이 된 다음의 행보에서도 세조는 공신을 키우고, 사관의 언론활동을 제제하는 등 부지런한 암군이라 할정도로 국가 대계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이 없었다. 반면 태종은 과거시험을 패스한 엘리트 인텔리답게 평소에 사관을 혐오하는 성향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언론활동을 통한 대신견제가 국가의 대계에 필요함을 알고 사관들을 인정하고 대신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이쯤되면 세조랑 판박이라는 말은 강아지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손자인 세조보다는 앞선 고려의 대표적 강성군주였던 광종과 오히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태종이 왕권의 강화를 위해 자신의 이복형제는 물론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아들 세종의 처가였던 청송 심씨 등의 외척세력이나 공신들을 숙청했던 것처럼 광종 역시 그 당시의 대표적 세력 집단이자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호족들과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선왕의 아들들 다시말해 자신의 조카들까지 모두 숙청시켰다. 그리고 왕이 되기 전의 정치적 입지도 비슷한데, 태종이 왕자의 난을 통해 자신의 둘째 형을 왕으로 옹립시켰던 것처럼 광종 역시 혜종과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형이었던 정종을 지지하여 왕위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만, 태종은 광종과는 달리 숙청으로 인해 생긴 증오가 후대를 괴롭히도록 만들진 않았는데, 광종의 경우 지나친 숙청으로 친아들인 경종까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광종 사후 경종 대에 전무후무한 악법인 복수법이 한동안 시행되어 다시한번 살상이 벌어지는 등 후유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왕 때부터의 독립세력에서 출발한 호족을 정적으로 둔 광종과, 공신이 아예 자기사람이었던 태종의 차이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다만 아들까지도 죽이려 들었을 정도로 미칠듯한 의심증 환자였던 광종에 비해 태종은 상술했듯이 가족에게는 따뜻했던 남자...

7.2 태종우

야사에 의하면 태종이 죽은 날인 매년 음력 5월 초열흘날(10일)에 비가 내려 이를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고 한다. '용의 눈물'이 이걸 가리킨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서 내외의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상이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상이 승하하고 이어서 경기 일원에 큰비가 와서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매년 이날에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임하필기.출처:한국고전종합DB

조선 전기의 문신 이행(李荇:1478~1534)(성종대의 사람)의 시문집인 용재집에 이미 "태종우를 갈망한 지도 오래건만 / 久望太宗雨"이라는 문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전설로 보인다. 인조때의 기재잡기(박동량의 책)에도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 하는데, 이백 년 동안에 금년에 처음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하였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리고 이 때의 연도가 태종이 세상을 떠난지 172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정유년 일기 음력 5월 10일)에도 '오늘은 태종의 기일이다. 이 날에는 날마다 비가 내린다고 하던데...'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비를 '태종우'라는 명칭으로 인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는 않다.

경종, 영조 때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우 전설이 나오고, 영조 40년 갑신(1764) 5월 10일에 비가 내리자 영조가 "이는 선조들이 주신 것이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왕실에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된 듯 하다.

고종 때는 태조우(太祖雨)까지 생겨났다.

“지난해 오늘 과연 단비가 쏟아졌었다. 5월 24일(이성계의 기일) 에 내리는 비를 ‘태조우(太祖雨)’라고 하고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한다. 이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하늘을 오르내리시는 성조(聖祖)의 영령들께서 백성들의 일을 안타까이 염려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저승에서 감응하는 것이다.”승정원일기, 고종 10년 계유(1873, 동치 12) 5월24일 (신축)

출처:한국고전종합DB

사극 용의 눈물 마지막 장면에서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는 장면은 바로 이 태종우 전설을 토대로 각색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매년 음력 5월 초열흘 즈음이 되면 인터넷 뉴스 등지에서 꼭 태종우 관련 뉴스나 칼럼 등이 올라온다.

그런데 실제로는 태종이 죽을 때쯤, 1422년의 기록을 뒤져보면 다른 해에 비해서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KBS <과학의 향기> 2005년 11월 19일에 방송한 태종의 비와 세종이 햇무리를 참고하라. 관련 기사

기상청 자료를 토대로 1960년부터 2015년까지 음력 5월 10일의 강수 여부를 조사한 결과, 총 56년 중 비가 온 날은 30번[45]뿐(??)이다. 대한민국의 6월 평균강수일수는 10일[46] 이므로, 기댓값인 18.7번보다는 11번이나 비가 더 온 셈이지만... 그저 전설은 전설일 뿐이니 웃고 넘기자.[47] 연도별 음력 5월 10일 강수 현황은 다음과 같다.

  • 재밌는 것은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날에 항상 비가 온다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흑룡강을 다스리는 흑룡이 있는데 이 용은 원래 산동성 지방에 나고 자랐기 때문에 흑룡강을 건너는 사람이 산동성 사람이면 절대 침몰시키지 않았고 매년 음력 5월 13일이면 산동성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묘에 참배를 하였기 때문에 산동성에는 이날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산동성이 한국과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뭔가 지역적인 기후현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출처 : 도교의 신들, 마노 다카야 저, 들녁, p.214)

7.3 사극의 태종 이방원

여말선초라는 시대적 격변기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라 사극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특히 여말선초 중 조선 건국 편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확률이 높고 조연이더라도 비중이 상당한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태종을 가장 잘 표현한 드라마로는 1996년부터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이 연기한 이방원(용의 눈물)이 꼽히고 있다. 사실 용의 눈물 자체가 원작[48]에서 태종 부분을 들어내서 만든 것이니 진주인공이다. 애초에 용의 눈물 자체가 위에서 언급된 태종우를 말하는 것이다. 故 김무생이 연기한 첫 부분 주인공인 이성계 파트부터 조용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잘 표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후반부에 와서는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고증에 정말 많은 신경을 써서, 아버지 이성계와의 갈등은 정말이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였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사의의 난에서 패배한 후 궁으로 돌아오자 그 앞에서 "아바마마!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라며 어린애처럼 춤을 추다가 아버지 품에 안기며 화해하는 장면은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링크 이후 이성계가 죽자 아버지를 떠올리며 용상 앞에서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라고 하며 오열한 연기도 일품이다. 또한 "모든 악업을 내가 지고 갈 터이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라는 불후의 명대사를 남겼는데 이것이 태종의 성격과 군주관을 잘 나타내는 폭풍간지 명언이 되고 있다.링크 이 말은 실제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신왕으로 즉위한 세종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집권기의 내용 또한 볼만하다. 이숙번을 쥐락펴락하는 모습, 지켜보다가 양위소동을 일으켜 민씨 형제를 촘촘한 그물망 속으로 빠뜨리는 모습 등에서는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정확히 반영한 노회한 책략가의 모습 그 자체. 이숙번이 민씨 형제를 경계하라고 진언하니 되려 이숙번더러 '사람이 변했다, 제 몸보신을 위해 남을 헐뜯는 법도 배웠는가'라며 힐난하곤 듣는 척도 안하더니, 그 이후엔 아주 천연덕스럽게 민씨 형제를 장남과 차남, 그 뒤에는 삼남과 사남까지 사지로 밀어넣는다. 이 과정에서 원경왕후 민씨와 엄청난 갈등을 벌이면서도 태연하게 이숙번을 방패로 내세우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지경. 정작 이숙번은 민씨 형제의 세력을 가볍게 견제하고 위축시킬 생각이었을 뿐인데 태종이 막상 강경하게 박살을 내려고 하자 당황한다. 그래서 이숙번은 민씨 형제를 추궁하라는 태종의 명을 사양하는데, 태종은 그런 그를 보며 또 사람이 변했다면서 핀잔을 준다. 표적이 된 자들은 철저히 몰아부치는 것도 모자라서 그 반대편에 있는 신하들조차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모습이 백미.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양녕의 페세자 이후 새로 세자로 책봉된 충녕대군에게 정말로 양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표면적으로는 군왕의 자리에 앉혀두고 태종 자신은 군권만 쥔 채로 군왕의 수업을 직접 시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설득시킨다. 정작 양위 전날에는 군권을 쥔 상태로 왕실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남아있는 인척이 또 누가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충녕대군의 장인인 심온과 그 파벌을 지목한다. 그리고 보위를 넘겨준 직후에 바로 그 일파를 깡그리 소탕하는 기염을 선보인다. 작중 원경왕후는 '야차나 귀신 그 자체다'라는 폭언을 퍼부을 정도.

대왕 세종에서는 김영철이 배역을 맡았는데, 이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세종이었으므로 용의 눈물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포스가 비교적 누그러지고 '세종의 아버지'라는 쪽에 초점을 맞춰 그려졌다. 그 때문에 신하들을 머리 위에서 농락하던 태종의 포스가 많이 사라졌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하들을 찍어누르기는 고사하고 상왕 정종에게도 기고 원경왕후에게 치이고 조선의 국체를 부정하는 아들에게 까이고 실록에선 태종에게 꼼짝도 못하던 하륜을 위시한 신하들은 태종을 기망하고... 그나마 외롭게 지존의 자리를 지켜가는 군왕의 모습 자체는 잘 표현되었다.

뿌리깊은 나무에선 백윤식씨가 태종을 맡았는데 초반부터 세종과 다른 정치노선으로 대립하는 포지션을 취한다. 태종과 세종간의 관계에 주목한 점이 특이점. 세종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세종에게 군주로서의 도를 가르치는 '세종의 스승'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한 편. 죽기 직전에 자신과는 다른 왕도를 걸으려는 세종에게 "이놈, 해내거라! 해내! 그래야 너를 왕위에 올린 것이 나의 제일 큰 업적으로 남을 것이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대풍수에서는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첫 등장이 좀 꼴사나운데 주인공 지상이 건물을 짓지 말라고 했던 곳에 무리하게 공사를 한 데다가 인부 하나 다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로 나오다가 지상에게 싸닥션을 맞는다. 그러다가 지상에게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찌질대다가 결국 뒤에서 나타난 아버지에게 펀치를 맞는 것이 첫 등장. 흔히 노회하고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의 모습으로 조명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풍수에서의 등장은 이례적인 등장이다. 이 철없는 청년이 뒷날 위 드라마들에 등장한 무시무시한 철혈군주가 된다고 생각하면 위화감이 심하다. 그래도 명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어도 담대한 모습을 보였고 이성계의 부장과도 팔씨름을 이길 때까지 해서 왼손으로 해서라도 이겨버리며, 이성계도 무학대사를 불러 아들들 중 처음으로 방원의 관상을 보게 하는 것을 보면 이성계가 아끼는 비범한 아들이긴 하다. 계모 강씨부인과의 미묘한 알력도 묘사되고 있다.

정도전에서는 안재모가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용의 눈물에서 안재모가 세종 역을 맡아 태종 역의 유동근과 부자지간을 연기한 것을 감안할 때, 정도전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유동근과 함께 가히 최강의 배우개그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야인시대에서 안재모의 미래 모습을 연기한 김영철이 대왕 세종에서 태종 역을 맡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태종이 김두한으로 환생한다는 배우개그도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이방원(정도전) 항목 참고. 역시 우리나라 사극은 배우개그가 제 맛

2015년 개봉한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는 장혁이 분했다.

2015년 10월 5일부터 SBS에서 방영중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유아인이 맡았다. 자세한 것은 이방원(육룡이 나르샤) 항목 참조. [49]

2016년 1월에 방영한 장영실에서는 대왕 세종에서 태종을 맡았던 김영철이 다시 태종을 맡게 됨으로서, 김영철은 처음으로 두 번이나 태종을 맡게 된 배우가 되었다. [50] 대왕 세종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조선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힘쓰는 카리스마 철혈 군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 세종 12년에야 태상왕으로의 존숭을 허락했다.
  2. 사실 이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레전드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나라 방'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나라라는 말을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나라 국' 자가 대신 쓰이게 되었다. 그 전까지 원래 나라를 가리키는 말은 유방의 '방' 자였다.
  3. 마찬가지로, 정종 역시 영안대군으로 불렸던 적은 한번도 없다.
  4. 신문왕, 광종, 연산군, 영조와 함께 한국사의 대표적인 숙청왕.
  5.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그의 치세에서 백성들이 학대당한 적이 있었는가?
  6. 희대의 패륜아라고 일컫어지는 세조에 비해서도 못지않은 숙청을 저질렀지만 세조와 태종과 그 다음 인사 능력을 보면 얼마나 이 사람이 능력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세조가 낮게 평가되는 것도 패륜도 패륜이지만 태종보다는 정치적 능력 자체가 몇 수 아래였기 때문. 후대에 봐서도 조금 과한 느낌은 없지 않지만 숙청의 필요성이 없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폭군들이 내키는 대로 숙청한 것과 달리 정치적 이익 계산이 철저히 뒷받침되어 있었다. 거기다 그 숙청 뒤를 잘 마무리지었다는 것만으로 이 사람의 정치적 능력을 엿볼 수 있다.
  7. 여기에 더해 이덕일처럼 "태종의 제1 업적은 세종"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종이라는 희대의 성군이 제 뜻을 펼칠 환경을 완벽히 조성해놓았다는 점에서 그의 난폭한 치적까지 묻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
  8. 아무래도 같은 태종인데다 이미지도 매우 겹치는 당태종 이세민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9. 윤정, 2013, 정종의 즉위과정과 명분.
  10. 이는 태종이 만들어 놓은 사관을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과 태종은 정당화 과정에서 이러한 견해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이것이 수백 년 동안 국론으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설이 되었다. 여말선초의 복잡한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역사에 사례가 많은 이런 설명이 직관적으로 잘 와닿았을 것이다.
  11.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 것은 야사에 불과하며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고 맏이로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하면서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12.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
  13.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
  14. 후대에 정식 왕비인 인목왕후 소생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가볍게 제친 서자 광해군의 케이스가 있지만, 광해군은 이미 10년 넘게 세자 경력을 쌓고 전란 당시 공적이 많아, 당파를 막론하고 고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영창대군의 경우 적자이긴 하지만 나이가 겨우 2살 밖에 안된데다 모후인 인목왕후가 오히려 광해군을 지지하여 보호를 호소한 케이스라 상황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국초와 조선 중기의 종법해석도 다르니 직접 비교하기도 애매하다.
  15.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버리고 석물을 청계천에 거꾸로 처박아 버린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6.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 두 가지 기록을 모두 반영했는데, 전자의 경우 이숙번이 이끄는 나무몽둥이를 든 병사 수십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무기고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후자의 경우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 이끄는 병력이 이숙번의 원군으로 등장하여 숙위병들을 무찌르고 삼군부를 장악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17.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
  18.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19.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
  20. 이성계와 정도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비슷해서 정도전이 힘을 얻은 것이지 정도전이 주도해서 국가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 의견이 갈릴 경우 태조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했다. 세자책봉, 공신책봉, 천도, 불교정책을 전부 자기 뜻대로 한 임금이 왕권이 약할 리가.
  21. 그리고 먼 훗날 경종 때 이복동생인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가 경종 사후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다.
  22. 민씨형제를 숙청한 일이나 이숙번같은 공신들을 처리한 것은 그나마 위의 인물들은 위험분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 심온숙청 만큼은 너무했던 것이, 심온은 그저 과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전형적인 관료였지 주변세력을 결집시켜 세력을 이루려는 권신의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자신의 딸이 충녕대군과 맺어지자 다소 탐탁지 않아 하였을 정도...그나마 이 때는 세자가 아니니 위안을 삼았었지만 양녕이 폐출되고 덜컥 자기 사위가 세자가 되고..
  23. 능력있는 쿠데타지도자 : 성공하고도 동조세력보다 우위 / 능력없는 쿠데타지도자 : 성공 후 동조세력에 잡아먹힘
  24. 대표적으로 태종 때 공신이였던 이천우, 조온 등이 이런 식으로 명예직을 받고 물러나 사실상 권력에서 이탈했다.
  25. 물론 언제나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우동의 사형은 간통의 원인이 강간인데다 강상죄 등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료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성종이 밀어붙였으며, 정 처형할 거면 강간에 가담한 자도 색출해 처형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26. 즉,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건 어디까지나 취존(...)인게 더 크고 어차피 훈구는 견제할 필요가 충분히 있었다. 성종이 기본적으로 명군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27. 한번은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간 적도 있었다.
  28. 천조 입장에서 변방국인 일본은 조공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10년에 1회(...)가 최대였다. 명나라는 이후로도 조공 좀 그만하라고 조선을 갈궜지만 조공무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이득을 조선이 포기했을 리가...
  29. 태종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지만 조선 역대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붙어 관리 일을 했던 사람이다. 세조영의정을 역임한 적이 있긴 하나 이건 찬탈에 가까워서 비교가 안 된다. 이성계 가문에서도 최초의 급제자라서 이성계가 엄청나게 좋아했을 정도로 굉장히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30. 부연설명을 덧붙이자면, 세종의 경우는 압도적인 공부량을 기반으로 지식을 이용해 상대를 논파하는 지식인의 갈구기다. 반면 태종은 워낙에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기에 신하들의 행동 반경을 아주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빌미가 잡히면 숙청시키는 책략가의 갈구기다.
  31.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부모가 잘못할 때와 군주가 잘못할 때를 구분해서(즉 군사부일체 이딴 거 아님) 논하는 구절인데, 부모에게는 간하고 듣지 않으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도리지만 군주에게는 세 번 말한 걸로 군신간의 의리는 다 지켰으니까 에너지 낭비 그만하라는 얘기(사실 계속 떽떽거리다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도리와 목숨을 모두 챙기려는 타협책에 가깝다). 문제는 예기가 쓰였던 고대 중국에서는 관직에서 물러나 다른 나라 가는 게 일종의 동종업계 이직처럼 제법 가벼운 개념이었지만(풍습도 비슷하고, '나라'의 크기도 작고 수는 많고)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이 달라진다. 애초에 조선시대 쯤 되면 물러나서 갈 다른 나라가 언어도 풍습도 너무 다른 명나라 아니면 일본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진짜 신하들 불쌍하게 만드는 말인 게, 예기는 해당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한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집대성된 방대한 양의 경전이다. 사서 중 대학이나 중용이 예기의 '일부'다. 비유하면 정치학 교과서 전질 같은 건데, 그 중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한 구절 가져와서 꼬투리잡는 거다. 기억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는 그런 구절을.
  32. 《태종실록》 권31 16년 6월 4일 갑자 2번째 기사. [1]
  33. 《태종실록》 권12 6년 9월 25일 신사 1번째 기사. [2]
  34. 《태종실록》 권6 3년 10월 1일 을사 1번째 기사. [3]
  35.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곤충이라 곡식외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한다.
  36. 이전 판까지 이 내용은 정종 항목에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 실록 편찬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편집자의 오류이다. 비록 정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어도, 그 해 11월에 태종이 즉위했기 때문에 12월에 중궁이라 불리는 사람은 원경왕후가 맞다. 태조실록 등 조선 초에는 새 임금이 즉위한 해 12월 기록까지 선왕의 실록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37. 서모인 신덕왕후가 살아있을때 그녀의 여종을 겁탈했다고도 하니 말 다했다.
  38. 조선국왕 자녀순위 2위라고 위에 써놨으면서 왜 아들 없냐고 하냐고 묻는 위키러를 위해 설명하자면, 저기 나오는 아들은 정실 부인이 낳은 아들, 즉 적자를 말하는 거다. 정종은 정실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없고 전부 다 첩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 즉 서자뿐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정종이 태종에게 국정에 관해 발언한 유일한(!) 사건이라고 한다.
  39. 태종실록 12년 6월 중궁이 해산을 했고 약 덕분에 난산을 하지 않았다며 상을 내린 기록이 있다. 이 때 원경왕후의 나이는 무려 47살...
  40. 정확히는 한양 내에 있는 성녕대군의 집(훗날 나이가 차면 나가서 살 집)을 절로 개축하자고 한것이지만 당연히 신하들은 반대했고 대신에 성녕대군 묘 근처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명복을 빌어주자고 제안한 것을 태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41. 개국공신이면서 태종의 최측근 무신인 조영무의 장남. 무신인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세종실록의 졸기를 보면 사관들에게도 꽤 사람 좋고 능력도 좋은 관료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42. 태종 시대의 사관 민인생이 좀 역대급으로 중증 스토커였기도 하다.
  43. 사실 세종대왕은 태종이 세운 틀에다가 벽체를 쌓고, 내부 정리를 하여 전성기 조선이라는 멋진 집을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44. 단,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단순한 두 번째 부인이 아니라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된 당시 살아있던 국모였다.
  45. 1960,1964,1967,1971,1972,1976,1978,1979,1981,1982,1983,1984,1985,1986,1987,1992,1993,1994,1998,1999,2001,2002,2005,2007,2009,2010,2011,2012,2013,2015. 날씨정보는 기상청 서울 지상관측자료, 음양력변환은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을 참조함.
  46. http://www.kma.go.kr/weather/climate/average_30years.jsp?yy_st=2001&stn=108&norm=M&x=21&y=15&obs=RD_01
  47. 이러한 야사는 사실인지 아닌지보다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태종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추정하는 자료로 봐야 한다.
  48.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
  49. 여기서도 배우개그가 생기니. 바로 유아인이 드라마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숙종을, 2년 후 영화 사도(영화)에서 사도세자로 분하는데, 이방원과 먼 후손이 두명이나 같은 얼굴이라는 배우개그가 된다.
  50. 김상경 또한 대왕 세종에서 세종을 맡았는데 장영실에서 또 세종을 맡게 됨으로서, 그도 세종을 두 번 맡게 된 배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