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 ||||||
관우 | 장비 | 마초 | 황충 | 조운 |
關羽
(? ~ 219)
관우, 장비는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 칭해진 당세의 호신(虎臣)이었다. - 진수
천추의기(千秋義氣) 만고충심(萬古忠心) - 서울 동관왕묘 현판
목차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비 휘하의 무장. 자는 운장(雲長), 본래 자는 장생(長生). 하동군 해현 사람.
그의 남다른 무용이나 충의심은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후세에도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2 정사
2.1 초기 생애
관후조묘비기에 따르면 청나라 시대 강희제 제위 기간 중 어떤 사람이 관우의 고향인 해주에서 우물을 파다가, 관우 할아버지의 묘비를 발견했다. 거기에 관우의 집안 내력이 기재되어 있었다. 160년 6월 24일에 관우가 태어났다.[1] 관우는 성장하여 호씨(호금정)와 혼인하였고 178년 5월 13일에 그의 첫 아들 관평을 얻었다.[2]
관우전에 따르면 망명하여 탁군으로 달아났다.[3]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당시 소금의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소금은 주요 수입원이자 세금원이었기 때문에, 염호는 마을 제일의 재산이었다. 탐관오리의 횡포를 막고 소금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결과 의리가 중요했고, 이러한 환경이 관우 성격에 영향을 미쳤다. 19세의 관우가 악덕 지주를 죽이자 관리들은 본보기로 삼기 위해 관씨 성을 가진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관씨 성 사람들은 살기위해 하나 둘 마을을 떠났지만 힘든 피난길을 가기에 관우 부모는 너무 연로했다. 결국 아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운 노부부는 집 앞마당에 있던 우물에 몸을 던졌다. 이후 관우 사당이 조성되며 관우를 향한 마음은 그 부모에게까지 닿았고 당시 우물이 있던 자리에 탑이 세워져서 현존하고 있다.
산시성의 민간 전승에 따르면 관우는 폭리를 탐한 소금 상인을 죽여 관리에 의해 쫓겨나 유주로 달아났다.
- 관우가 어떤 마을에서 숨어있던 가운데 성문을 지키던 보초병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했다.
- 그러자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관우에게 옆에 있는 연못에서 세수를 하라고 권했다. 관우가 노인의 권고에 응했더니 그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그러자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관우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우더니 이를 냅다 두들겼다(!) 그 때문에 관우는 코피가 터져 그 피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이 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얼굴을 보더니 "이 사람은 우리가 찾는 인물이 아니네~"라고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관우라는 이름을 자칭했다.
- 관우가 어느 도성의 관문을 지나가야 할 때였다. 그 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체격을 보고 의심하여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관우는 급한 김에 자신이 지나려고 하는 관문을 보고 "성은 관(關)이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시간을 끌던 가운데 관문 위를 날던 새에서 깃털이 떨어지기에 "이름은 우(羽)요."라고 둘러댔다. 그가 하늘을 보자 긴 구름이 둥둥 떠다니기에 "자는 운장(雲長)이오."라고 대답했다.
관우가 고향을 떠난 뒤 호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중조산에 올라 약초를 캐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후 호씨는 마을에서 이름난 명의가 되었고, 장성한 두 아들이 고향을 떠나 관우와 재회할 때도 호씨는 중조산에 남았다.
장비전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관우가 몇 년 연장이어서 장비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유비가 향리에서 사람의 무리를 모으니 관우는 장비와 함께 그를 위해 적을 막아냈다. 유비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부곡(部曲)을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자며 같은 침상을 썼고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종일토록 시립했고, 유비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고난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관우의 초창기 행적이 부실한 것은 그와 관련된 군사적인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부터 장수에 대한 고평가를 공공연히 들었으니 관우에게는 무척이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촉한의 개국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들의 초창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이 불가하다.
2.2 서주에서
명제기 주석 헌제전에 따르면 진의록이 여포의 사자로 원술에게 갔을 때, 한나라 종실의 여자를 배필로 얻었다. 그의 전처 두씨는 하비에 남았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때, 관우는 두씨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조조에게 여러 차례 청하자, 조조는 두씨가 얼마나 미인인지 관심이 생겼다. 그러나 여포 토벌 후, 두씨가 미인임을 알게 된 조조는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촉기와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조가 유비와 함께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다. 관우가 조조에게 여쭈길, 여포가 진의록을 시켜 구원을 청했다하며 그의 처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니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 여포가 막 격파되려 할 때 또 여러 번 청하자 조조는 그녀가 남다른 미색이리라 의심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맞아들여 확인했다. 그리하여 그녀를 머물게 하니 관우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촉기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허도에 있을 때 조조와 함께 사냥한 적이 있는데, 사냥 중에 무리가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조를 죽이도록 권했으나 유비가 따르지 않았다.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습격해 죽이고, 관우에게 하비성을 지키며 태수의 일을 행하도록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200년, 조조가 동쪽을 치자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조조는 관우를 사로잡고 돌아와 편장군에 임명하고 매우 두텁게 예우했다.
2.3 관도대전
당초 조조는 관우의 사람됨을 크게 여겼으나 그의 심신(心神)에 오래 머물 뜻이 없음을 살피고는 장료에게 말했다.
경이 시험 삼아 그의 뜻을 물어보시오.
그 뒤 장료가 관우에게 묻자 관우가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조공(조조)께서 후히 대우 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유장군(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기로 맹세했으니 이를 저버릴 수는 없소. 나는 여기 끝까지 머물 수는 없으나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이오.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이를 의롭게 여겼다.
부자에 따르면 장료는 조조에게 고하려니 조조가 관우를 죽일까 두려웠고, 고하지 않으려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공(조조)은 군부(君夫)이고 관우는 형제로다!
결국 조조에게 이를 고했다. 조조가 말했다.
주인을 섬김에 그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천하의 의사(義士)로다. 언제 떠날 것 같소?
장료가 말했다.
관우가 공의 은혜를 입었으니, 필시 공을 세워 공께 보답한 뒤에 떠날 것입니다.
순유전에 따르면 순유의 견해를 받아들인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했다. 순유는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자 조조는 경기병을 파견하여 백마를 습격하고 안량을 죽였다.
원소가 대장 안량을 보내 동군태수 유연을 백마에서 공격하자, 조조는 장료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들 중 당해 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관우가 안량을 죽이게 되자 조조는 관우가 필시 떠날 것임을 알고 포상을 더욱 무겁게 베풀었다. 관우는 하사받은 것을 모두 봉해 놓고 작별을 고하는 서신을 올린 후 원소군에 있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좌우(左右)에서 이를 추격하려 하자 조조가 말했다.
그는 각기 자신의 주인을 위한 것이니 뒤쫓지 말라.
2.4 삼고초려
관우전에 따르면 유비를 따라 유표에게로 나아갔다.
제갈량전에 따르면 유비가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2.5 장판파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를 평정하니, 유비는 번성으로부터 장차 남쪽으로 가 장강을 건너려 하며,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타고 가게 해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조가 추격하여 당양 장판에 이르렀고, 유비는 한진으로 비스듬히 나아가다 때마침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어 함께 하구에 도착했다.
촉기에 따르면 하구(夏口)에 있으며 강가를 전전함에 이르자 관우가 화를 내며 말했다.
지난날 사냥 중에 만약 저 관우의 말을 따랐다면 가히 오늘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그때는 또한 국가를 위해 그를 아꼈을 뿐이다. 만약 천도(天道)가 보정된다면 이것이 복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느냐!
2.6 적벽대전
선주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유비는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겼으나 내심 반드시 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의 계책으로 삼았다.
2.7 남군 공방전
이통전에 따르면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서황전에 따르면 서황은 또한 만총과 함께 한진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에서 주유를 쳤다.
문빙전에 따르면 문빙은 악진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를 격퇴하고 또한 관우의 치중을 한수에서 공격, 그 배를 형성에서 불태웠다.
악진전에 따르면 악진은 관우, 소비(蘇非) 등을 모두 패주시켰고, 남군 일대 산과 계곡에서 거주하던 만이(蠻夷)들이 악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또한 유비를 쳐서 임저장 두보, 정양장 양대를 모두 대파했다.
유비는 강남의 여러 군을 거두어들이고는 으뜸 되는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을 봉배하니 관우를 양양태수 탕구장군으로 삼아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전 주석 헌제춘추에 따르면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2.8 청니 대치
선주전에 따르면 212년, 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조가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양의전에 따르면 양의는 부군(傅群)을 저버리고 양양태수 관우에게 나아갔다. 관우가 명하여 공조(功曹)로 삼고, 양의를 사자로 보내 서쪽으로 유비에게 나아가게 했다.
2.9 유비의 입촉
유비가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할 때 관우를 동독형주사로 임명했다.
계한보신찬 주석에 따르면 유비는 촉으로 들어올 때, 반준을 형주치중(荊州治中)으로 임명하여 남아 지키면서 주의 행정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역시 관우와 화목하지 못했다.
선주전에 따르면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 강주, 강양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관우는 마초가 항복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예전부터 친분, 내왕이 있는 이가 아니기에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사람됨과 재주가 누구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었다. 제갈량은 관우의 호승심이 강함을 알았으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맹기(마초)는 문무를 겸비하고 웅렬이 남보다 뛰어난 일세의 호걸로 응당 익덕(장비)과 말머리를 나란히 해 달리며 선두를 다툴 수는 있으나 염(髥) 그대의 절륜 일군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으니 이 때문에 제갈량이 관우를 일컬어 염(髥)이라 한 것이다. 관우는 이 서신을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초전 주석 산양공재기에 따르면 마초는 유비가 후대하는 것을 보고 유비와 더불어 말하며 늘 유비의 자(字)를 부르니 관우가 노하여 그를 죽일 것을 청했다. 유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궁박해져 내게로 귀의했소. 그런데 경 등이 분노하며 내 자(字)를 불렀다하여 죽이자 하니, 천하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이겠소!
장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응당 예(禮)를 보여야지요.
다음 날, 크게 모이며 마초를 청했는데, 관우, 장비가 함께 칼을 쥐고 곧게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보았을 때 관우, 장비를 보지 못했다가 그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니 마침내 다시는 유비의 자(字)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이제야 패망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의 자(字)를 부르다 하마터면 관우,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구나.
이후로 유비를 존중하며 섬겼다.
배송지는 당시 관우는 형주에 있었는데 왜 유비, 장비랑 같이 익주에 있냐고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였다.
2.10 익양대치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는 좌씨전(춘추좌씨전)을 좋아하여, 이를 암송하면 거의 모든 구절이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오주전에 따르면 214년, 유비가 촉을 평정했다.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손에 넣었으므로 제갈근을 시켜 형주의 여러 군을 돌려주도록 요구했다. 이에 유비는 허락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취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이는 빌렸으면서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공허한 말로 시간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세 군(장사, 영릉, 계양)의 태수를 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이들을 모두 내쫓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며 즉시 여몽을 파견해 선우단, 서충, 손규 등의 병사 2만 명을 지휘하여 장사, 영릉, 계양 세 군을 취하도록 하고, 노숙으로 하여금 1만 명을 인솔하여 파구에서 주둔하며 관우를 방어하도록 했다. 손권은 육구에 머물면서 여러 군대를 총지휘했다. 여몽이 도착하자, 장사와 계양 두 군은 모두 복종했는데, 오직 영릉태수 학보만이 투항하지 않았다.
마침 유비가 공안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병사 3만 명을 이끌고 익양까지 가도록 했다. 그래서 손권은 곧 여몽 등을 불러 돌아가서 노숙을 원조하도록 했다. 여몽이 사자를 보내 학보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자, 학보는 투항했다. 이렇게 하여 세 군의 장수와 태수를 모두 손에 넣었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손교, 반장 및 노숙의 병사들과 함께 전진하여 익양에서 관우에게 저항했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長) 오탕과 중랑장 원룡 등이 관우와 결탁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다. 오탕은 유현을 점거하고 있었고, 원룡은 예릉에 있었다. 손권은 횡강장군 노숙을 파견하여 유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탕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여대는 예릉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룡을 붙잡아 참수시켰다.
감녕전에 따르면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이라 칭하고, 직접 정예 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 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 오늘날 이것을 관우뢰(關羽瀨)라고 부른다.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은 관우에게 서로 만날 것을 요청하여 각각 병마를 백보 밖으로 주둔시키고, 단지 장군들만이 단도를 갖고 함께 만났다.
노숙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노숙이 관우와 회담하려고 하던 때, 제장은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주의를 다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노숙이 답해 말했다.
오늘과 같은 사태에 있어서는 서로 뱃속을 드러내 보이고 대화치 않으면 아니 되오. 유비는 국사를 짊어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시비를 바로 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또한 관우가 더불어 명령에 거스를 수 있겠소!
그리고는 관우를 만나러 나갔다.
노숙전에 따르면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여 말했다.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한사람이 말했다.
영토란 덕있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일 뿐. 어찌하여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
노숙은 벽력같은 소리를 질러 질타했는데 언사와 안색이 매우 절절했다. 관우는 칼을 잡고 일어나서 말했다.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눈빛으로 떠나가도록 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마침 조조가 한중으로 들어갔다. 유비는 익주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손권과 화해하도록 했다. 손권은 제갈근에게 유비에게 가서 응답하도록 하여 다시 동맹을 맺었다. 그래서 형주를 나누어 장사, 강하, 계양 동쪽 지역을 손권에게 돌려주고, 남군, 영릉, 무릉 서쪽 지역을 유비에게 귀속시켰다.
호소전에 따르면 손랑(孫狼) 등은 남쪽으로 관우에게 귀속되었고, 관우는 그에게 관인을 주고 군병을 주어 돌아가서 적이 되도록 했다.
2.11 한중 공방전
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관우를 전장군, 가절월로 삼았다.
황충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어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하니 제갈량이 유비를 설득하며 말했다.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 마초와 동등하지 않았는데 이제 곧바로 동렬에 두려 하십니다. 마초, 장비는 가까이에서 그의 공을 직접 보았으므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들으면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내가 직접 이해시키겠소.
그리고는 마침내 관우 등과 더불어 나란한 지위에 두고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비시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비시를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관직을 받을 수 없었다. 비시가 관우에게 말했다.
지금 한왕(유비)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 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은 비유컨데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의 마음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2.12 번성 공방전
여몽전에 따르면 여몽이 노숙을 대신하게 되어 처음으로 육구에 이르러서, 겉으로는 은혜와 후의를 더욱 닦아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이전에 손권이 사자를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관우의 딸(관은병)을 청한 일이 있는데, 관우가 그 사자를 모욕하며 혼인을 허락지 않으니 손권이 대노했었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
무제기 주석 조만전에 따르면 남양인들이 요역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이 태수 동리곤을 붙잡고 관원,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하고 관우와 연합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219년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관우가 군사를 이끌고 번성에서 조인을 공격했다. 조조가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게 했다.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전에 따르면 후에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는데, 병사를 남겨 장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도록 했다. 여몽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며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필히 제가 뒤에서 도모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병이 있으니, 병사를 나눠 건업으로 돌아가 병 치료를 명목으로 하고자 합니다. 관우가 이를 들으면, 반드시 수비병을 철수시켜, 다 양양으로 보낼 것입니다.
과연 병을 칭탁하니, 손권은 여몽을 소환해 들이라는 격문을 노출시키고, 은밀히 같이 계획을 도모하였다. 관우가 과연 믿고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육손전에 따르면 관우는 육손의 편지를 살펴보고 그가 겸손하게 몸을 낮춰 스스로 의탁하려는 뜻이 있고, 매우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다시 경계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촉기에 따르면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방덕전에 따르면 번성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방유)이 한중에 있었으므로 이를 의심하였다. 방덕은 거듭 말했다.
나는 국은을 입은 몸이니, 죽음으로 의를 다하겠소. 내가 직접 나서서 관우를 치고자 생각하고 있소. 올해 안에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관우의 손에 죽겠소.
이후 직접 관우와 교전하여 관우를 노리고 화살을 날려 그 이마에 적중시켰다. 그 무렵,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으니, 관우의 군중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모두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 당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비록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 의원이 말했다.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 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다.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대야에 가득 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
우금전에 따르면 가을, 큰 장맛비가 내렸다. 한수(漢水)가 범람해 평지에 물이 차올라 수 장(丈)에 이르렀고 우금 등의 칠군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이 제장들과 함께 고지에 올라 물을 바라보니 회피할 길이 없었고,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우금 등을 공격하자 마침내 우금은 투항하고, 오직 방덕만이 절의를 굽히지 않고 죽었다.
방덕전에 따르면 전복한 배에 매달려 물 속에 있던 중에 관우의 포로가 되었으나, 당당히 서있었다. 관우가 말했다.
경의 형은 한중에 있소. 나는 경을 장수로 세우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찌 빨리 항복하지 않았소?
이에 방덕은 관우를 질책하며 말했다.
꼬마야, 어찌 항복 따위를 논하느냐! 위왕께는 정병 백만이 있으며, 위의를 천하에 떨치고 계신다. 네 유비 따위는 범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대적이나 가능할 줄 아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될 생각이니, 적의 장수 따위가 되지는 않을 셈이다.
결국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다.
서황전에 따르면 다시 서황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치게 하여 완에 주둔했다. 때마침 한수가 크게 범람하여 우금 등이 물에 잠겼다. 관우가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또한 양양에서 장군 여상을 포위했다. 서황이 이끌던 병사들은 다수가 신병이었기에 관우와 창끝으로 싸워 다투기 어렵다고 여겨 양릉피로 나아가 주둔했다.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했고, 관우는 또 장군 방덕을 참수했다. 예주 양국, 영천군 겹현, 홍농군 육혼현의 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중국)를 진동했다. 조조가 허도를 옮겨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의논했는데, 사마의와 장제가 말했다.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따랐다.
전략에 따르면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보내 그를 돕기를 청했는데 명을 내려 속히 나아가지 않도록 하고는 또 주부(主簿)를 먼저 보내 관우에게 명을 전하도록 했다. 관우는 그의 지체하고 늦음에 분노하고 또한 스스로 이미 우금 등을 붙잡았으므로 이에 욕하며 말했다.
오소리 새끼가 감히 이처럼 구는구나. 번성이 함락되고 나면 내가 네놈들을 멸하지 못하겠느냐!
손권이 이를 듣고 관우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알고는, 거짓으로 손수 서신을 써서 관우에게 사죄하고 몸소 갈 것을 허락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관우는 수군을 이용하여 우금 등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전부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 단지 양양성만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봉전에 따르면 관우는 번성, 양양을 포위한 이후부터 유봉과 맹달을 여러 차례 불러 병사를 일으켜 자신을 돕도록 했다. 유봉과 맹달은 산속의 군이 막 종속되기 시작하여 동요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 관우의 명령을 수락하지 않았다.
여몽전에 따르면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손권이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4]
여몽전에 따르면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동소전에 따르면 관우가 조인을 번성에서 포위하자, 손권은 사자를 파견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저는 군대를 보내어 몰래 관우를 습격하려고 합니다. 이 일은 비밀을 구하니 장군께서는 누설하여 관우가 방비를 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모든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나 동소는 말했다.
마땅히 손권에게는 비밀로써 호응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누설해야 합니다. 관우가 손권이 온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돌려 스스로를 보호하게 된다면, 번성의 포위는 속히 제거 될 것이므로, 오나라와 촉나라 두 적이 서로 대치하게 하여 앉아서 피폐함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즉시 칙령을 내려 번성을 구할 장수 서황에게 손권의 서신을 포위된 번성과 관우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로 쏘게 하였다. 포위된 조조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사기가 백배가 되었다. 관우는 과연 마음속으로 주저주저하면서 퇴각하지 않았다. 손권의 군대가 도착하여 그 두 성을 취해 버리자, 관우는 곧 산산이 무너졌다.
오주전에 따르면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서황전에 따르면 조조가 다시 돌아와 장군 서상, 여건 등을 서황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병마가 집결하기를 기다려 함께 전진하라.
적은 언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황이 도착하여 속임수로 참호를 파며 적의 배후를 끊으려 하는 것처럼 과시하자 적이 둔영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서황이 언성을 점령하고 양면으로 진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3장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공격하기 전에 조조가 그 앞뒤로 은서, 주개 등 모두 12진영을 서황에게 보냈다.
촉기에 따르면 관우는 서황과 더불어 예전부터 서로 경애했다. 멀찍이서 함께 대화했는데 다만 평소의 일만 말할 뿐 군사(軍事)는 언급하지 않았다. 잠시 뒤 서황이 말에서 내리며 영을 내렸다.
관운장의 머리를 얻어 오는 자는 금 1천근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관우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서황에게 말했다.
대형(大兄), 이 무슨 말이오!
서황이 말했다.
이는 나라의 일이오.
서황전에 따르면 적은 위두에 둔이 있고 또한 별도로 사총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황은 위두의 둔영을 공격하는 것처럼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는 은밀히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사총이 곧 무너지려 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5천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서황이 이를 들이쳐 패주시키고, 포위망 안까지 깊숙이 추격하여 격파하니 적군들은 스스로 면수에 투신해 죽기도 했다.
조엄전에 따르면 관우의 군사가 물러난 후, 촉나라의 배가 면수를 점거하여 양양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손권이 관우의 치중(輜重)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퇴각하여 남쪽으로 돌아갔다.
여몽전에 따르면 관우가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오주전에 따르면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우번전에 따르면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오주전에 따르면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촉기에 따르면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았다.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를 참수했다.
오력에 따르면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내고 제후의 예로 그 시신을 장사지냈다.
2.13 사후
장남 관평은 관우와 같이 죽었기 때문에 차남 관흥이 관우의 후사를 이어 작위를 계승했고 약관의 나이에 시중, 군감군이 되었지만 일찍 죽었다. 관흥의 적자 관통이 후사를 이었지만 또 요절하고 관통이 후사가 없어서 관흥의 서자 관이가 후사를 이었다.
후주전에 따르면 260년 가을 9월,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죽고나서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가 내려진 것인데 관우의 시호는 장무후(壯繆侯)라고 했다. 시법에서 장(壯)은 뛰어난 무장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목(繆)의 의미가 좀 나쁜데 명분과 실리가 없다는 의미이다. 명나라 학자 정민정은 목(繆)이 곧 화목할 목(穆)과 의미가 통하고 옛 시호에서 둘을 혼용한 예가 많으니 화목할 목(穆)의 시법인 덕을 펴고 의로움을 지켰다는 뜻으로 보았다.
촉기에 따르면 방덕의 아들 방회는 종회, 등애를 따라 촉을 정벌했고, 촉이 격파되자 관씨 일가를 모두 멸족시켰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로 관월을 낳았다.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지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오나라에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후 서진의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이어져왔다.
당나라 시대의 익주명화록에 따르면 촉왕이 조충의에게 명하여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2001년,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이 나타났다. 그가 가지고 있는 족보에 따르면 관중진은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이다. 익주에 있던 차남 관흥의 자손들은 방회에 의해서 몰살되었지만 형주에 남아있던 관평의 자손들은 계속 대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호북성 공안현에 관우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 족보는 내용이 충실해서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된 흔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무예와 충의를 표현하는 장면이 여럿 추가되어 활약은 더욱 화려해졌다. 그에 비해 정사에서 관우가 굴욕을 당하는 장면들은 대부분 연의에서 삭제, 또는 변경되었다.
연의에서 관우는 신장 9척에 수염 길이가 2자였으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슬,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외모로 묘사된다. 그러나 정사에서 관우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아름다운 수염말고는 없었다. 경극에서 관우는 충의를 상징하는 붉은 얼굴로 표현되는데 경극의 설정을 가져온 것 뿐이다.
관우가 고을의 악덕 지주를 살해했기 때문에 해현에서 추방되어 탁군으로 왔다는 설정인데 마침 만난 유비, 장비와 뜻이 맞아서 도원결의를 맺어 의형제가 된다. 정사에서 그들이 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실제로 의형제 수준으로 가까운 사이였긴 했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162년에 태어났다는 설정이라서 나이 순으로 유비가 맏이, 관우가 둘째, 장비가 셋째가 된다. 그런데 정사에서 관우는 사실 유비보다 1살 더 많았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많지만 유비가 황족이고 인덕도 커서 큰형 자리를 양보한 것으로 나오는 판본도 있다.
유비 삼형제가 동네 대장간(...)에서 각자 병기를 만드는데 유비는 쌍고검, 장비는 장팔사모, 관우는 무게 82근의 청룡언월도를 주문해서 전용 무기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월도 자체는 삼국지 시대에 없었으니 청룡언월도는 연의의 창작이다.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유비 삼형제는 공손찬의 부장 격으로 참전한다. 화웅에게 다른 장수들이 줄줄이 당하자 관우가 나선다. 원소는 무명의 마궁수 주제에 나서냐며 관우를 나무라지만 조조의 허락을 받아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죽이는 장면이 묘사 된다. 관우가 화웅을 베어 온 이야기는 연의의 창작일 뿐이다. 정사에서 화웅은 호진 휘하의 부장에 불과한 장수였고 그나마 손견에게 죽었다는 기록 한줄이 전부이다.
호뢰관에서는 연합군의 여러 장수들을 쓰러트린 여포와 맞선다. 유비, 관우, 장비가 서로 힘을 합하여 적토마를 탄 여포를 후퇴시킨 이 싸움은 삼영전여포라 불리우며 연의 내에서도 가장 인기높은 장면 중 하나로 독자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정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연의의 창작이다. 애초에 유비가 반동탁 연합에 참가했다는 기록 자체가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 영웅기에만 짧게 언급되는 실정이라 당시 유비 일행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알수가 없다.
공융이 황건적 관해에게 성이 포위되자 태사자가 직접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관우와 관해가 90여합의 일기토 끝에 관해를 죽이고 공융을 구출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유비가 공융에게 구원군을 보낸 것은 사실이나 유비 삼형제가 직접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관해가 관우와 창칼을 들고 직접 맞선다는 장면도 허구이다. 덕분에 관해의 무예는 과평가되어 삼국지연의의 수혜자가 되었다.
조조군과 유비군이 합쳐서 여포를 공격할 때 정사에는 관우가 남의 여자 두씨를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관중은 남의 여자를 달라고 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좋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관우에게 고고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두씨에 대한 부분을 삭제했다.
유비가 조조 밑에 있을 때 허도에서 조조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 조조가 헌제의 활을 빌려 사슴을 맞추는데, 헌제의 화살을 보고 모두 헌제에게 만세를 부르는 순간 조조가 헌제 앞을 가로막으며 환호를 받는다. 격분한 관우가 무례한 조조를 살해하려 하지만 유비가 말린다. 실제로도 정사에서 한창 사냥을 하던 도중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관우는 유비에게 조조를 살해하라고 권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헌제 대신 만세를 받던 조조의 모습에 분개하여 암살하자고 권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정사에는 조조가 사냥 도중 헌제 대신 만세를 받았었다는 언급이 없다.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한 후 서주를 장악하고 관우는 하비성을 지켰는데 조조군에 관우의 하비성이 포위되자 조조는 장료를 보내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시킨다. 장료는 관우에게 항복하지 않고 죽기를 고집한다면 이는 세 가지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설득한다. 도원결의를 저버리는 것이 첫째, 유비가 자기의 가솔들을 부탁했는데 이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 둘째, 유용한 능력을 버리게 되는 것이 셋째라고 했다. 그러자 관우는 장료에게 세 가지 조건을 걸고 항복을 약속한다. 즉 첫째는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유비의 두 부인을 잘 보호하여 범하지 않게 함으로서 두 사람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것, 셋째는 유비의 거처가 알려지면 지체없이 자신과 유비의 식솔들을 풀어줄 것이었다. 조조는 관우가 항복하겠다면서 군사를 물리라고 청하자 조조는 그 조건들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정말로 군사를 물렸는데, 이에 조조의 부하들이 이틈을 타 관우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반발하자, 조조는 "그럴 사람이라면 도망가라고 해라, 붙잡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세 가지 죄니, 세 가지 약속이니 그딴건 없고 그냥 사로잡혀 투항한거다.
모종강본에서 추가된 장면이 있는데 조조가 관우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관우, 감부인, 미부인을 한 방에서 재우려고 하자, 관우가 촛불을 들고 문 밖에 나가 서서 한 숨도 자지 않고 아침까지 두 부인을 지켜, 조조를 감탄시켰다. 그러나 이는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조조가 관우와 함께 헌제를 알현하였다. 당시 겨울이라서 조조가 관우에게 수염 주머니를 선물했는데, 헌제의 요구에 응하여 관우가 주머니의 매듭을 풀어 수염을 보이자 관우의 아름다운 수염에 감탄한 헌제는 관우를 미염공(美髥公)이라고 칭했다. 이 장면은 창작이지만 그래도 정사에서 제갈량이 수염이 아름다운 관우를 염(髥)이라고 부르긴 했다.
조조는 관우에게 금은보화와 미녀 열명, 좋은 저택, 높은 관직, 그리고 적토마를 준다. 관우는 금은보화는 봉인해두고 미녀는 형수님들을 위한 시녀로 일하게 하며, 적토마는 형님에게 돌아갈 때 편하겠다며 기뻐한다. 그러나 이는 허구이다. 정사에서 여포는 적토마를 탔지만 관우는 적토마를 타지 않았다.
관도대전에 참전한 관우는 조조를 위해 원소군의 장수인 안량(顔良)을 벤다. 이는 정사에서도 등장하는 사실이다.
다만 정사에서는 관우와 장료가 선봉에 나섰을때 관우가 안량을 멀리서 발견하고 적진을 뚫고 안량을 벤 것인데, 연의에서는 관우가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조조의 구원요청을 받고 출전하여 안량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어서 관우는 문추(文醜)도 베는 공을 세운다. 하지만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안량만 베었을뿐, 문추까지 벤것은 아니다. 즉, 관우가 안량을 참한 것은 사실이나 문추를 무찌르는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다.
관우가 안량과 문추를 베는 공을 세우자 조조가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에 봉한다. 원본에서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수정되어 나온다. 조조가 처음에 관우를 수정후(壽亭侯)에 봉했으나 관우는 사양했다. 그래서 조조가 한(漢)+수정후(壽亭侯)로 작위의 문구를 바꾸니 그제서야 관우가 받았다.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에 항복했음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도 잘못 알려졌지만 사실 정사에서 관우가 봉해진 한수정후는 한수(漢壽)+정후(亭侯)이다. 한수는 그냥 지명이고 지금의 호남성 상덕현 지방이다.[5] 또한 정후는 관내후 가운데 최하 등급이다.[6]
이후 원소의 신하인 진진을 통하여 하북에 있는 유비의 소식을 듣게 되자, 관우는 당초에 약속한 대로 조조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떠나려고 한다. 하지만 조조는 피객패를 걸어서 접객을 피하려 했다.[7] 장료 역시 병을 핑계로 관우를 만나주지 않는다. 이에 관우는 조조로부터 받은 물건을 모두 집에 보관한 뒤, 조조에게 투항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개인적인 물건들만 챙겨서 두 부인과 함께 하북을 향해 출발한다. 조조의 부하들은 관우를 죽여버리겠다고 하지만 조조는 어쩔 수 없다며 늦게나마 그를 전송하기 위해서 관우를 쫓아간다. 조조는 노자로 쓰라면서 황금을 선물하였으나, 관우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내 조조는 다시 전포를 선물하였다. 조조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거절할 수 없었던 관우는 전포를 받았으나, 만약을 위해 말 위에서 청룡언월도 끝에 전포를 걸쳐 받고 떠났다. 선물을 칼끝으로 받은 관우의 버릇없는 태도에 조조의 부하들은 불평을 내뱉었지만, 조조는 혼자인 관우가 다수인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부하 장수들을 달랬다.
연의에서는 관우가 감부인, 미부인과 함께 유비에게 돌아갔다고 하지만 정사에서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정사에서도 유비의 처자가 관우와 함께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미부인은 이후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다만 감부인은 형주까지 유비를 따라왔으니 감부인만은 데려왔을 공산은 크다.
조조가 관우가 이별을 고하지 못하도록 여러 날을 두고 고의로 관우를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관우는 미처 통행증을 받지 못했다. 관우는 조조를 떠나 하북의 유비를 찾아서 필마단기로 천리 길을 떠나는데 다섯 관문을 지나면서 여섯 장수를 참한다.
- 동령관 - 공수 : 명예로운(?) 첫 피해자. 통행증이 없는 관우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하자 관우에게 끔살당했다.
- 낙양 - 한복, 맹탄 : 공수의 죽음 소식을 듣고 2인 작전을 펼치나 관우의 적토마가 너무 빨라서 실패했다.
- 사수관 - 변희 : 관우와 동향인 보정 스님이 변희의 계략을 관우에게 누설했다.
- 형양 - 왕식 : 호반이 자신의 아버지인 호화와 관우가 아는 사이인 것을 알게 되어 관우에게 왕식의 계략을 누설했다.
- 동군 - 유연 : 안량과 문추가 쳐들어 왔을 때 관우에게 구원받은 적이 있었기에 관우를 막거나 위협을 주지 않아서 목숨을 건졌다.
- 활주 - 진기 : 하후돈의 부장이자 채양의 조카로 황하 나루터를 지키고 있었다.
쿨가이 관우
그러나 이 오관육참 에피소드는 정사에서 보이지 않는 허구이다. 민담 등 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부터 등장한 창작 장면인데 천리행 노선도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게 구불구불하고 아무 필요도 없는 길을 간 것이며 관우에게 죽은 장수들도 전부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 장수들이다.
관우가 여남에서 장비와 만나는데 장비는 관우가 의리를 저버리고 조조를 섬겼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장비의 오해를 풀기위해 관우는 장비가 북을 세 번 치기 전에 마침 추격해 온 채양의 목을 벤다. 사실 정사에서의 채양은 유비에게 격파당해 죽은 장수일 뿐이다.
오관육참 후 황건적의 잔당이었지만 관우를 경모하던 주창이 관우의 심복이 된다. 그러나 주창은 가공인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또 관정이 자신의 차남 관평을 관우의 양자로 삼는 것을 제안했고 유비도 관우가 아들이 없다고 거들자 관우가 이를 수락하여 관평이 관우의 양자가 되어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정사에서 관평은 관우의 친아들이었다.
관우, 장비가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박망파에서 제갈량의 지휘를 가볍게 보는 묘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정사에 있는 수어지교 일화를 부풀린 것으로 삼고초려에 관우와 장비가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고 박망파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도 제갈량이 아니라 유비였다.
연의의 창작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화용도이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조운, 장비에게 패퇴하는 조조의 길목을 차단하라고 명을 내리나 관우에게는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이에 관우가 불만을 표시하자 제갈량은 관우에게 명을 어겼을 경우 죽음으로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군령장을 쓰게 한 뒤에야 화용도로 보낸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조조가 죽지 않을 운세이니 관우가 과거의 은의를 갚으라고 화용도로 보냈다고 말한다. 관우는 화용도에서 조조와 만나나 오관육참에서 자신을 용서해준 조조를 생각했고 군령과 정의 사이에서 번민하며 괴로워하다가 결국 조조를 보내주었다.
중국소설사략에서 루쉰은 이 부분을 매우 칭찬하였고, 중국 고전 소설을 철저하게 평가한 학자 왕궈웨이도 삼국지연의는 순문학이 될 수 없지만, 화용도의 구절만은 대문학자가 아니고는 쓸 수 없다며 극찬하였다. 그러나 이는 허구이다. 정사에서 화용도 에피소드는 없다.
정사에서 남군 공방전은 주유군과 유비군이 연합하여 함께 싸워 남군을 점령하고 주유가 유비에게 땅을 빌려준 것이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주유군이 열심히 싸워 놓은 것을 유비군이 집어 먹은 것으로 변경되었다. 그 때문에 정사에서 관우가 악진, 문빙에게 패퇴당하고 이통에게 포위망을 돌파당하는 등의 굴욕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유비가 형주 남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관우도 활약한다. 장사성에서 관우가 황충과 일기토하는 도중 황충의 말을 베어 황충을 떨어트리지만 죽이지 않고 정정당당히 승부하자 말하고 돌아간다. 다음 날, 둘은 또 일기토를 하는데 황충이 화살이 없는 상태에서 화살을 쏘는 척을 한 뒤 이에 관우가 피하는 동작을 취하자 그때 화살을 쏘아 관우의 투구를 맞추어 어제의 은혜를 갚는다. 이 장면은 연의에서의 창작이지만 이후 정사에서 관우가 자신과 동렬에 임명된 황충을 인정하지 않는 장면이 연의에서도 그대로 나와서 모순이 된다.
형주를 점령한 유비는 입촉하고 관우는 형주에 진수한다. 정사에서 관우는 반준과 불화했지만 연의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정사에서 관우는 유비에게 투항한 마초에게 호승심을 느꼈고 마초와 비교해서 자신을 띄워주는 제갈량의 편지를 받고 기뻐하여 손님들에게 보여주기까지한다. 그러나 연의에서는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익양대치 사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질 않는다. 따라서 이 당시 관우가 감녕의 별동대에 막혀 도강에 실패한 일화 역시
연의에서 보이질 않는다. 또 단도부회가 관우를 암살하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변경되었는데 주창의 연기와 관우의 술주정을 빙자한 인질극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노숙 안습(...)의 길을 다시금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허구이다. 정사에서는 오히려 관우가 노숙의 말빨에 굴욕을 당했다.
손권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키자며 사자를 보내오자 관우의 대답은 "호랑이의 새끼를 개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였다. 손권은 술처먹으면 개가 되니까 옳은 말이긴 하다. 이는 관우빠인 모종강조차도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번성 공방전에서 관우가 양성을 공격하다가 오른쪽 어깨에 독화살을 맞게 된다. 명의 화타가 스스로 찾아와서 관우를 치료하는데, 바둑을 두며 담소하는 가운데 팔을 내민 관우는 화타에게 자신의 팔을 맡긴다. 관우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바둑에만 열중했다.
이 장면은 정사에도 등장하는 사실이긴 하나 양성을 공격하다 화살에 맞은 부상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예전에 맞은 화살 때문에 통증이 가시질 않아 치료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의원 역시 화타가 아니였으며 관우는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에 부상을 입었었다.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는 데는 주로 오른팔을 사용하므로 관우를 부각시키기 위해 변경한 것으로 여겨진다.
번성 공방전에서 계속 관우가 문무를 갖춘 지장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많다. 그러다가 마침 비가 내리자 관우는 수공을 계획하여 번성을 수몰시킨다. 정사에서는 관우의 수공이 아니라 그냥 수재(水災)였다. 다만 정사 방덕전에 살펴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다. 따라서 관우가 가만히 있다가 이득을 본 것이 아니라, 큰 비가 와서 범람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이에 따른 준비를 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정사에서는 관우가 손권이 고의로 자신에게 지원을 늦게 보내자 이에 격분하여 손권을 오소리라고 모욕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연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관우가 우금과 포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손권의 영토였던 상관 지역의 군량고를 약탈했었다는 기록도 연의에서는 삭제되어 나오지 않는다.
오나라측에서 배신을 때리고 관우도 서황에게 패퇴하자 관우 등은 맥성에 고립된다. 유봉과 맹달에게 요화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관우 등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결의를 다진다. 사실 정사에서 관우는 거짓 항복을 한 뒤 몰래 도망친 것이다.
나관중본에서는 맥성에서 도주하다가 궁지에 몰린 관우와 관평이 이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하늘이 부르는 소리에 맞춰 승천한다. 관우 신앙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모종강본부터는 관우 부자가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정상적인 장면으로 변경되었다. 관우의 적토마는 마충에게 하사되었으나 풀과 물을 먹지 않고 스스로 굶어서 죽었다. 당연하지만 정사에서 관우는 적토마를 타지 않았으니 그냥 문학적 연출이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유령이 유비의 꿈에 나오는 등 죽고도 유령으로 계속 등장하는데 당연하지만 모두 허구이다. 우선 죽은 관우의 유령이 당양의 옥천산에 나타나서 예전 오관육참에서 도움을 받았던 보정 선사와 만난다. 보정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 크게 깨달은 관우는 사라진다. 이 부분은 익주명화록에서 관장군이 옥천사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창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관우의 유령이 여몽에게 빙의하여 손권을 꾸짖는다. 놀란 손권이 장수들을 거느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 절을 올린다. 그러자 여몽은 칠공분혈로 죽어버렸다. 사실 정사에서 여몽은 병으로 죽었다. 이 장면은 의로운 관우의 인상에 맞지 않고, 또한 비현실적이라는 점 등에서 최근에는 삭제하고 있는 판본도 많다. 손권의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내고 조조가 상자에 담긴 관우의 목에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관우가 입을 열고 눈을 움직이면서 수염과 머리카락을 모두 곤두세운다. 조조는 아연실색하여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만다. 그 의를 조조가 높게 평가하여 손권이 보내준 목에 나무를 깎아 직접 몸을 만들어 붙여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관우의 차남 관흥은 정사에서 요절했지만 연의에서는 요절하지 않고 장포와 함께 이릉대전에 참전한다. 관우는 이릉대전 도중 유령으로 나타나 아들 관흥에게 도움을 주어 관흥은 아버지의 유품인 청룡언월도를 되찾게 된다. 제갈량의 북벌 도중 월길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처한 관흥을 구출하고 장포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또 유령으로 등장한다.
4 가족 관계
- 관평 - 관우의 장남.
- 관흥 - 관우의 차남.
- 관색 -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삼남.
- 관은병 - 민간 전승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딸.
- 관통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적자.
- 관이 - 관우의 손자, 관흥의 서자.
- 관승 - 수호전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후손.
- 호금정 - 화관색전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아내.
- 조씨 - 강릉현지에서 등장하는 관우의 며느리, 관평의 아내, 조운의 딸.
5 평가
5.1 위인
어느나라 못지 않게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 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되어질 만큼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유명한 위인 중 한명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전한 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관공이라고 높히며 매우 존경한다. 사후 약 2천 년인 오늘날에도 관우는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그리고 만화 등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도 상당히 많다.
5.2 통솔
관우와 땅을 나눠 접경하고 있었는데,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데다 (후략) - 여몽전
관우는 용맹하여 전쟁을 잘하므로, 승기를 잡아 진군해 오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입니다. - 온회전
(전략) 관우와 장비는 삼군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후략) - 유엽전
촉나라는 작은 나라일 뿐이며, 명장으로는 오직 관우만 있었습니다. - 유엽전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유비를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웁니다. - 곽가전
(전략)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들을 잃게 된 것입니다. - 요립전
동시대인들이 관우에 대해 남긴 평가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무서운 장수라는 이야기들 뿐이다. 무엇보다 그가 받은 만인지적이라는 칭호 자체가 단순히 무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본래 용맹과 병법에 있어서 뛰어난 장수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보여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명장이라고 꼽히는 다른 장수들 중에도 전적면에서 논란이 될만한 여지를 가진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수가 매우 많다. 관우도 마찬가지다. 관우의 명성에 비해서 정사에서 관우의 패배가 많이 보인다는 점 때문에 관우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 하비의 수비를 맡았다가 조조에게 항복한다.
- 조조 휘하에서 원소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장료와 동행하여 안량을 참살하고 원소의 제장들이 아무도 관우를 상대하지 못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안량을 참살한 것은 그의 공이지만 사령관이라기보다는 돌격대장으로서의 전공에 가깝다.
- 당양 장판파에서 패한 유비를 구원했다.
- 주유가 남군을 공격할 때 문빙, 악진에게 깨지고 조인의 퇴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이통이 포위망을 뚫고 조인을 구출한다. 사실 그 당시 뛰어난 장수들인 문빙, 악진, 서황, 만총, 이통 등과 싸워야 했으니 별 수 없이 패했다는 견해도 있다.
- 사람보는 눈 하나만큼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유비가 다름아닌 형주를 관우에게 맡긴 것에서부터 유비군 내에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8]
- 익양대치에서 관우는 도강을 시도했으나 감녕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단념하고 관우뢰를 설치한다. 이에 대해 강을 건너 공격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부담이 큰 작전이므로 관우가 신중하게 행동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9] 다른 관점으로는 관우가 결국에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으니 실패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그가 유일하게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번성 전투는 홍수의 덕을 보았다. 그러나 전장의 지형지물과 기후를 잘 이용하고 대비하는 것은 지휘관의 필수적인 덕목이다. 게다가 정사 방덕전을 살펴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다는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관우가 어느 정도 물난리를 예상하고 그에 따른 대비를 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 번성에서 수해에 빠진 7군을 궤멸시켜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참살했다. 번성 공방전 당시 조조가 천도를 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기록까지 있는데, 그만큼 당시 관우군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관우가 번성에서 싸운 장수는 번성에 주둔 중이던 조인과 만총, 여기다가 투입된 장수가 각종 네임드들인 방덕, 우금, 서황, 여몽, 육손, 주연 등이다.[10] 여기에 장료도 투입 예정이었고, 조조 자신도 증원하려고 했다. 반면 관우 쪽 네임드 장수는 관우말고 없었고 상용에 요청했던 원군도 유봉에게 거절당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관우의 위상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수 있고 또한 그만큼 홀로 어려운 싸움을 수행해야 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당시 관우가 향했던 진격 루트만 봐도 그의 공격이 위나라의 수도에 인접하여 조조가 천도를 논할 정도로 위협을 가했고 그의 공격에 위나라 내부에서 소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관우가 아니더라도 위나라로서는 네임드를 보내서라도 막아야 되는 면이 역시 존재한다.
- 오랜만에 관우가 서황과 대면하여 사담을 나누는데 갑자기 서황이 관우 공격을 명하자 관우는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서황과 번성 내부의 협공에 밀려 번성 공략에 실패했다.
- 동시에 여몽의 심리전으로 군대가 와해되어 맥성에 고립, 거짓 항복 후 탈출을 시도하다 생포되어 처형된다.
- 요립은 관우의 용병 능력에 대해 개인의 용맹만 믿으며 군사를 부리는 법도가 없다고 평했다. 관우와 동시대 사람이자 같은 세력 소속의 사람이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발언은 관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기보다는 문맥상 자신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웬만한 인물들은 다 까고 보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과해서 판단해야 한다. 유비가 자신을 요직에 배치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상황에서 이소와 장완이 찾아오자 작심하고 유비를 포함한 여러 인재들을 다 까고 있을때 나온 평가였던 것.[11]
5.3 무력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중략)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유전
관우는 실로 곰과 범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 여몽전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중략)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 육손전
(전략) 관우와 장비는 모두 1만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후략) - 정욱전
당초 장비의 웅장위맹(雄壯威猛)은 관우에 버금갔으므로 위의 모신 정욱 등이 모두 관우와 장비를 칭하길 만인지적이라 했다. - 장비전
관우와 장비는 무용이 뛰어나며 (중략) 기세는 호랑이처럼 장렬하였다. - 계한보신찬
정사에서도 관우의 무공은 최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에 보듯이 삼국지 정사 내에서도 무력과 용맹에 관해서는 관우 만한 평가를 받은 장수가 없었다.
연의에서는 많은 일기토 장면들이 그려져 있으나, 정사에서는 일기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연의에서 주인공급 캐릭터인 관우도 일기토 장면이 여럿 추가되었지만 안량을 베는 것 말고는 모두 창작이다. 그러나 정사에서 몇 안되는 일기토 기록 중 관우가 안량을 베는 장면은 그 중에서 최고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을 베는 장면은 창작이다.
- 연의에서 삼영전여포 장면에서 여포가 유비 삼형제와 일기토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포를 무력 최강으로 만들기 위한 창작 장면이다.
- 연의에서 황건적 관해와의 일기토가 경합으로 묘사되는데 이것도 창작이다.
- 정사에서 관우는 장료와 함께 선봉에 서서 적진 한가운데 있는 상장 안량을 참했다. 이후 원소의 수많은 장수들 가운데 아무도 관우를 당할 자가 없어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는 대목을 보면 관우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무공을 지녔던 장수였는지를 알 수 있다.
- 연의에서 관우가 문추를 죽인 것도 허구이다.
- 연의에서 오관육참 후 관우와 하후돈이 경합으로 일기토를 겨루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도 창작이다. 오히려 연의를 통해 제대로 무예 버프를 받은 것은 하후돈이다.
- 연의에서 번성 공방전에서 방덕, 서황과의 일기토가 경합으로 묘사되는데 정사에는 없는 창작 장면이다.
- 정사에서 방덕이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추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관우는 죽지 않았다. 또 정사에 따르면 관우는 화살에 맞은 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피가 넘쳐 흐름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 했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관우의 강인함을 증명한다.
이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삼국지 연의에서 창작된 몇몇 일기토 장면 덕분에 관우의 무예가 오히려 저평가 받게 되는 결과가 나왔다는 점이다.
일기토란 것이 정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싸움 방식인데 연의에서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여러 장면들을 창작해서 넣는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관우의 일기토 활약 또한 엄청나게 늘어났긴 했지만 위의 사례들 같은 창작되어진 경합 장면들 역시 들어가면서 무력 면에서 저평가를 받게 되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5.4 지력
관우는 워낙 출중하기도 하거니와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는데 (중략)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후략) - 강표전
관우의 전체적인 모습은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명장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당시에 난립하던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하는 문맹 장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장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였다.
- 정사에서 관우가 학문을 좋아하고 춘추좌씨전을 외운다고 나와있다. 관우는 옛일의 사례들을 참고할 목적으로 춘추를 읽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연의에서 관우가 단도부회에서 지략을 쓰고 빠져 나온 것은 허구이다.
- 정사에서 여몽이 병을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고 대타로 온 육손이 편지를 보내자 이에 속아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했다. 단 여몽, 육손은 오에서 손꼽히는 지략가이다.
- 연의에서 관우가 번성에서 수공을 쓰는 지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그냥 수재(水災)였고 관우의 수공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다만 정사 방덕전에 따르면 관우가 배를 타고 공격했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가만히 있다가 이득을 본 것 같지는 않고, 나름 예상을
- 하고 준비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5.5 정치
(전략)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후략) - 육손전
군사 지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행정관으로서의 관우를 본다면 어떨까? 여러가지 면을 놓고 본다면 위정자로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주기 어렵다.
- 유비가 인정한 능력있는 인재 반준과 화목하지 못했다.
- 노숙과의 회담에서는 오히려 노숙의 말빨에 밀렸다.
- 외교 관계를 다루는 것은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상대국의 군주인 손권을 대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보였다.
- 미방과 사인 등 다른 부하들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다.
-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거나 봉수대나 성채를 쌓으며 대비한 것을 보면 군정의 사령관으로써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 같다.
- 번성 전투에서 물자 부족 현상을 겪었다. 단 이 문제는 군수물자를 대는 미방과 사인 두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 여몽이 점령군의 군기를 엄정히 단속하여 고향 사람을 죽여서가면까지 후히 베푸는 정치를 하자 여몽의 통치에 백성들이 쉽게 관우로부터 이탈했다.
미방과 사인이 엄히 다스려야 할 실책을 범했다고는 하지만 그 둘을 본거지에 내버려 뒀으면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협을 가한 점은 결과적으로 최종책임자이자 관리자로서는 좋지 못한 모습이었다. 손권을 모욕한 점 역시 문제였다. 아무리 동오가 속으로는 형주를 호시탐탐 노렸다고는 하지만 손권은 공식적으로는 동맹관계인 우방국의 최고 수장이었다. 무례는 둘째치고 상대국에게 침략 빌미를 줄수도 있었던 위험한 행동이었던 것. 따라서 관리자 혹은 정치인으로서의 관우는 그의 오만한 성격과 대인관계에서 보이는 문제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볼수 있다.
5.6 충의
관우와 유비는 도의상으로는 군신(君臣) 관계지만, 은혜는 마치 부자(父子)의 관계입니다. - 유엽전
관우는 조조에게 힘써 보답하고 (중략)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 진수
인의지사 유비를 제치고 관우가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된 데에는 그의 용맹 뿐만 아니라 충의와 신의로 대표되는 그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관우가 신격화된 것이 따지고 보면 그의 충의지사의 모습 때문이다.
- 관우는 유비와 같은 침상을 쓰고 은혜가 형제와 같을 정도로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어 평생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 조조 밑에서 원소군의 최고 장수 중 하나인 안량을 베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받은 관직, 보화를 모두 내놓은 채, 유비를 찾아 길을 나섰다. 당시 유비는 근거지로 삼았던 서주를 잃고 원소의 객장 신분으로 잔여 세력을 추스리고 있을 뿐, 헌제의 밀서를 받았다는 정치적 입지를 제외하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유비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주군의 부하가 된다는 것이었으나 관우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옛 주인에게 돌아갔다.
- 연의에서 유비와 떨어져 있는 동안 형수님들을 잘 돌봐준 것은 창작이다. 정사에서는 형수님들을 유비에게 같이 데려갔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 연의에서 여섯 장수를 베며 오관을 돌파하며 천리길을 달려 유비에게 향하는 장면도 창작이다.
- 연의에서 화용도에서 조조를 보내주는 장면은 관우의 의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나관중의 창작이다.
- 유비는 관우의 충의에 보답하고자 관우가 죽은 일로 인하여 위에 대한 북벌을 미루고, 그 병력으로 오히려 오를 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5.7 오만
그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 강표전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시작하자마자 큰공을 세워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 육손전
관우는 병졸들은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에게는 교만했고, 장비는 군자는 경애했지만 소인은 돌보지 않았다. - 장비전
사람들과 교제하거나 대응함에 있어서는 무례하고, 아울러 흉악한 일을 초래하게 되었다. - 계한보신찬
관우는 굳세고 자부심이 강하고 장비는 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아서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도리와 이치의 상례로다. - 진수
동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관우를 굳세고 자부심이 강한 오만한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를 형처럼 따랐던 장비와 가장 대비되는 점인데 장비가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예우하고 소인에겐 가혹했다면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겐 관용을 베풀었지만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트러블을 일으킨다.
- 제갈량으로부터 마초보다 관우가 낫다는 답장을 읽어보고는 아주 기뻐하여 주변의 빈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 황충이 자신과 동렬에 놓이자 황충을 모욕했다.
- 손권이 정략혼을 하러 권하러 오자 그 사신을 모욕하며 쫓아냈다. 아무리 손권에게 악감정이 있다고 하더라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 지역을 진수하는 사령관으로써의 자질이 떨어진다.
- 관우가 평소 미방을 업신여겼다는 서술이 분명히 있다. 단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다.
- 동맹국 군주 손권에게 오소리 새끼라고 비방하는 등 함부로 대했다. 단 손권이 관우에 대한 개인 감정 때문에 형주를 침공한 것보다는 애초부터 손권군에서 관우를 치자는 여론이 팽배했다.
- 소인에게는 온화했던지라 관우는 우금과 3만의 포로들을 살려두었고 이들도 먹여살리려고 했다. 이는 군량과 포로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포로들을 집단 학살했던 다른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에 비춰보면 확실히 관용적인 태도였긴 했지만, 그 해결책이 동맹국이었던 오나라의 군량을 탈취하는 것이었고 덕분에 오나라에게 형주를 침공할 아주 적절한 빌미를 제공했다.
6 인기
6.1 중국
형주의 초거대 군신 관우 동상 |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관우를 존경하여 관공(關公), 관노야(關老爺)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원나라 시대 초기 판본인 삼국지통속연의에서는 아예 도원결의 때부터 유비는 현덕, 관우는 관공, 장비는 그냥 이름으로(...) 불려진다. 이런식의 삼형제의 호칭은 황제로 즉위한 유비의 호칭이 선주로 바뀌는 것만 제외하면 세 명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여러 시대를 거치며 관우는 급이 승격된다.
- 북송 1 : 충혜공(忠惠公)
- 북송 2 : 무안왕(武安王)
- 남송 :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
- 명나라 1 : 협천호국충의관성대제(協天護国忠義關聖大帝)
- 명나라 2 :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威遠震天尊關聖帝君)
- 청나라 1 : 충의신무관성대제(忠義神武關聖大帝)
- 청나라 2 : 충의신무령우인용위현개성대제(忠義神武霊佑仁勇威顕開聖大帝)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신급의 엄청난 무예에 신령이 돕고 인자하며 용맹스럽고 위엄이 당당하신 관씨 성을 가지신 성스러운 대황제 폐하'이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거창한 칭호. 칭호가 너무 길어서 줄여서는 관성대제(關聖大帝), 관제(關帝)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칭호를 올린다는 것이 관우에 대한 옛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베이징에 위치한 역대제왕묘에는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와 공신의 위패가 모셔졌는데, 관우의 경우 신하의 신분이지만 황제의 칭호를 받은지라 지위가 애매했던 모양인지 공신 위패 중에서 관우만 따로 건물을 지어 위패를 모셨다.
관우의 무덤 관림 |
중국은 성인의 무덤을 일컬어 림(林)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무덤에 수풀 림(林)을 붙이는 경우는 딱 두 사람에게 한정된다. 하나는 공자의 묘인 공림이고, 또 하나가 바로 관우의 묘인 관림이다.
근세에 관우는 언제나 나라의 공적인 차원에서 강조한 바로 호국신의 이미지가 컸다. 소금 상인 전설로부터 나온 재물신의 성격도 띄고 있어서 상인들이 섬기기도 했다. 현대에는 중국에서 군인으로부터 경찰 등 무(武)와 관련된 직종은 물론, 상인,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만능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간층에서 폭넓게 사랑받는 신이다.
덤으로 함께 처형된 맏아들 관평도 '알충왕(謁忠王)'이었다가 청나라 시대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라는 호칭으로 덩달아 신격화가 되었으며, 가공인물인 심복 주창도 항상 관평과 함께 좌우를 시위하는 형태로 '위령우용공(威靈愚勇公)'이라 불리고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군신(軍神)을 제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한나라는 치우를 군신으로 섬겼고 당나라는 강태공을 군신으로 섬겼다. 어느덧 민간에서 관우가 산서성 해지에서 치우를 무찔렀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원나라에서는 마침내 관우가 치우와 강태공을 앞질러 군신의 자리에 올랐다.
요재지이에 등장하는 설화가 하나 있다. 요괴가 매우 날뛰는데 관성제군은 대체 뭐한다고 안 도와주냐고 욕하던 한 서생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검은 얼굴의 무시무시한 신장이 내려와 요괴를 해치우고는 자신이 주창이라는 것을 밝힌 뒤 관성제군은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며 관성제군을 욕했던 서생을 혼냈다. 그 서생은 이후로 다시는 관성제군을 욕하지 않고 열렬히 제사를 지냈다. 이 외에도 관우의 인기에 힘입어 나온 설화도 무지막지하게 많다. 주판을 관우가 발명했다는 민간 설화도 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마을이 변방이든, 마을이 궁핍하든 지나가는 모든 마을에 관제묘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관우 신앙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작게는 가게 안이나 마을에, 크게는 각 도시별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제묘(關帝廟)가 존재한다. 또한 관우의 무덤도 중국 내에 다섯 개 이상된다. 참수되어 조조에게 보내진 관우의 수급이 묻힌 낙양 관림(關林)과 머리없는 관우의 몸을 묻은 당양의 관릉(關陵)은 물론이고 관우 옷 무덤, 관우 공적 무덤 등등 확장판이 널려 있다.
중국 연합 준비은행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한 10원 짜리 지폐에 관우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6.2 한국
동관왕묘 정전 내부 |
한국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지어지는 등 명군에 의해 관우 신앙이 한국에도 전파되었다. 이 당시에 관우가 전장에서 나타나 왜군을 베었다...는 이야기도 꽤 퍼졌는데, 아무래도 언월도 들고 설친 명군을 보고 설레발을 친 듯 하다.
임진록에서는 관우 신령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꿈에 나타나 만력제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의 선조는 장비의 환생(...)이니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기담짐인 임방이 지은 천예록에서도 관우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관우의 신령이 한강을 건너던 한 선비의 꿈에 나타나서, "잠시 후면 어떤 나무 상자를 들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그들에게 내가 그대 손에 그려준 문양을 보여주고, 나무 상자는 절대 열어보지 말고 불에 태워버려라."라고 말했는데, 놀라서 깨어난 선비가 자기 손을 보니 과연 관우가 써준 문양이 있었다. 이후 정말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무 상자를 나루터에 내리려 들 때, 선비가 그들에게 문양을 보여주니 놀라서 혼비백산하다가 전부 물에 달려가서 빠져 죽었다(...). 이후 선비는 근처 관청에 자기 얘기를 들려주고, 놀라 달려온 관헌들과 함께 불에 상자를 태워 없앴는데, 타면서 드러난 상자의 안에는 나무로 된 군사와 군마의 모형들이 가득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 모형들로 모종의 사악한 주술을 걸려는 세력이 있었던 모양.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관우 신앙은 더욱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조선 19대 국왕 숙종은 본격 관우 빠돌이로 신하들에게 관우 신앙을 강요했다. 관왕묘에 지내는 제사를 정례화하여 국가 차원으로 관우를 섬겼고 자신의 뜻대로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정기적으로 향축을 하도록 명하게 된다. 당시 좌의정 서종태는 숙종에게 관우 신앙을 자제하라고 했으나 숙종은 듣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고종 황제도 관우 신앙에 마음이 많이 기울었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관우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로 추존했다.
관우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무당 진령군이 명성황후의 앞일을 몇개 기똥차게 맞추자 명성황후는 그녀를 거의 숭배자 수준으로 믿게 되어 황실의 돈을 엄청나게 탕진했다. 해방 전후의 정치인 여운형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당시 명성황후 가 아꼈던 무당 진령군이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 쓰는 집안이라고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안 그래도 정계에서 멀어진 여씨 집안은 출세길이 아주 막혀버려 정치 문제에 신경이 크게 곤두서버리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퍼져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들락날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을미사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당 진령군도 죽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사람인 증산 강일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주문 운장주에서는 관우를 정의로운 신격으로 인정하여 요사한 것들을 쫓아달라고 청하는데, 증산교계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운장주 때문에 증산교인들에게 관우는 중요한 신격되었고 관우 신앙이 사그라든 현재 국내에서 전해지는 관우 신앙은 대부분이 증산 계열 종교인들이 유지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도 관우를 모시는 관제묘가 다른 곳도 아닌 서울특별시 한복판에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 지하철 6호선 환승역인 동묘앞역 인근에 있는 동묘가 바로 관제묘. 임진왜란을 거친 뒤에 만들었으며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가 소요 비용과 친필 현판을 보내줬다고 한다.동묘에는 고종이 추증한 관우의 시호인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가 현판에 적혀 있다. 동관왕묘는 보물 14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전쟁 이후에 명나라와 조선에서 우호를 다지면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어졌기 떄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재이다.
서울 남산에도 관우를 모신 곳이 있다. 남산공원길 북측 순환로를 걷다 보면 와룡묘(臥龍廟)란 곳이 있다. 서울 지방 문화재 5호로 지정된 곳인데 그 이름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신격을 모신 사당이다. 안에 들어가보면 처음 눈에 띄는 건물이 역시 '와룡묘'인데, 와룡묘 안에는 제갈공명 소상이 오른쪽, 관우의 소상이 왼쪽에 안치됐다. 일제 강점기에 동묘의 지부를 자처하며 관우의 소상을 모셨다 하니,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관우에 대한 민간 신앙이 꽤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와룡묘를 기도처로 삼아 찾아오는 무당들이 제법 있다.
6.3 일본
대영박물관 소장 네쓰케 |
에도 시대에 삼국지가 인기가 있었는데 각종 전통 예술 작품의 소재로 인기가 많았다.
일본 전국시대의 츠가루번 다이묘 츠가루 타메노부가 관우를 좋아했다. 특히 관우의 길고도 아름다운 수염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부키의 여러 공연 중에서도 관우극이 있다.
일본에서는 요코하마 중화가의 관제묘와 고베(神戸) 난킨마치(南京町)의 관제묘가 저명하다.
7 미디어 믹스
- 관우/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
8 관련 문서
- ↑ 유비는 161년생이니 관우는 유비보다 1살 더 많았던 것이다.
- ↑ 그러나 관후조묘비기는 너무 후세의 책이라서 신빙성이 낮다.
- ↑ 관우의 고향은 중국 최대의 염호인 해지(解池) 근처이기 때문에 소금의 밀매에 관련되어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 ↑ 학자 조일청의 연구에서 상관은 양측이 경계로 삼은 상수 바로 위에 세워진 관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관우가 국경 지대의 쌀을 마음대로 취하니 명분을 가지게 된 오나라 군대는 지체없이 나선 것이다.
- ↑ 여기가 고향인 사람이 대표적으로 반준이 있다.
- ↑ 후는 등급에 따라 현후, 향후, 정후가 있었는데 정후가 그 중에서 최하 등급이다.
- ↑ 피객패는 손님의 문 두드림을 거절한다는 내용으로 이것이 문에 걸려 있으면 손님은 조용히 돌아가는 것이 예의였다.
- ↑ 유비는 입촉 후 한중을 수비하는 중책을 장비를 제치고 상대적으로 신참인 위연에게 맡기는 등 파격적인 인사를 보였기 때문에 단순히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관우에게 중책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 ↑ 조인도 주환을 상대로 무리한 도강 작전을 펼치다가 크게 패배한다.
- ↑ 당시에 오나라에서 주연, 육손은 네임드가 아니었지만 각각 군주인 손권과 오의 군권을 쥐고 있던 여몽의 신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 ↑ 이 사실이 제갈량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요립은 귀양을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