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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3일 (금) 08:54 기준 최신판


조선의 대원군
덕흥대원군 이초정원대원군 이부전계대원군 이광흥선대원군 이하응
대한제국의 추존 친왕
헌의대원왕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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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추존 친왕
시호헌의(獻懿)
작위헌의대원
(獻懿大院)
군호흥선정(興宣正)
→흥선도정(興宣都正)
→흥선군(興宣君)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李)
하응(昰應)
생몰연도1820년[1] 12월 21일 ~ 1898년[2] 2월 22일
출생지한성 안국동
본관전주 이씨
사망지경기 공덕리 아소당
(현 서울 마포구 염리동)[3]
국적조선
종교불교

1 개관

흥선 대원군은 용맹하고 과감하며 번개처럼 빠르고 변통에 능했으니, 실로 정치사상 대혁명가라 할 수 있다.

-박은식-

조선 말기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李昰應).본관은 전주, 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남연군의 아들이며 고종아버지. 조선조에 대원군으로 기록된 인물이 총 4명인데,[4] 이중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대원군이 되었다. 게다가 대원군의 지위를 받은 사람 중에선 유일하게 섭정까지 했기 때문인지, 그냥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7년에 대원왕으로 추존되고 헌의(獻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래서 정식 시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다. 덩달아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부대부인 민씨도 함께 추숭되어, 부대부인 민씨의 정식 시호는 순목대원왕비(純穆大院王妃) 민씨. 섭정 당시에는 진짜 왕 못지 않은 권력을 누리셨다.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풍운아이자,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굉장히 엇갈리는 정치인들 중 한 명. 사실 평가가 엇갈리는 한국 역사 속 인물들의 대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도 섣불리 평가를 내리기 매우 복잡한 인물로 이 점은 아들도 마찬가지다. 이 항목에도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서술되어 있다. 엇갈리는 평가야 어쨌든 인생역정 자체는 대단히 파란만장한데다가, 세도정치 시대부터 대한제국의 성립기까지 조선 말기의 역사적 사건에 많이 관련되어 있는 만큼, 이런 의미로 보자면 조선 말엽 역사의 산 증인. 또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게 될 경우,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중요 역사인물이다. 흔히 위정척사파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위정척사파와는 거리가 멀다.

2 가족관계

본래 그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이기 때문에 직계 왕통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남연군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꽤 가까운 종친이 되었기에, 남연군과 그의 아들 흥인군, 흥선군 모두 명예직이나마 고위 벼슬을 지내며 조정의 예우를 받았다. 그런데 효종의 남자 후손들은 헌종이 즉위할 당시에 이미 많지 않았고,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사실상 왕위 계승에서 제외된 상태였기 때문에, 만약 직계 왕통이 단절된다면 남연군의 후손 중에서 왕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라 간혹 이 집안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흥선군의 장남은 흥친왕 이재면, 그 사이에 서자 이재선이 있고, 차남이 다름 아닌 고종이다.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군의 아들과 손자들은 왕의 인척인 덕분에 대부분이 출세했다. 대놓고 왕실만 뽑아주는 특별 과거를 열어서 다 합격시켜버렸고, 이 사람들은 당연히 흥선대원군 파로 활동했다.[5], 대원군이 훗날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언급된 이재면은 소극적 친일, 이준용은 적극적 친일파라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

다만 흥선군은 형제들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그 중에서 유독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과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6]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외가도 처가도 사돈도 모두 여흥 민씨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는 흥선 대원군의 어머니의 조카뻘이 되고(정확히는 13촌) 며느리, 즉 명성황후 민씨는 부대부인 민씨의 동생뻘(12촌)이며[7]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명성황후의 조카뻘(13촌) 된다.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 원장이 그의 외외증손자가 된다. 이종찬의 어머니인 조계진의 어머니가 바로 흥선대원군의 둘째 딸인 전주 이씨였기 때문.

3 생애

3.1 관직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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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관심의를 착용한 제갈량 대원군.
다른 여러 복장으로 그려진 그림

소년기 흥선군은 이름난 수재였다. 그는 김정희의 제자가 되는데, 김정희는 족보 촌수로 따지면 5촌 아저씨가 된다.[8] 그에게서 난초 치는 법과 서예, 그림, 글씨 등을 두루 배운다. 그러나 어머니와 맏형, 아버지가 연속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고아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하게 살아있는 형 이최응은 머리가 나빠서 수시로 그가 무시하고 경멸하는 처지였다.

1834년 흥선정(정3품 당하관)의 작위를 받고 흥선도정(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에, 흥선군으로 승진한다. 그밖에 종친부 유사당상, 비변사 당상, 오위도총부 도총관, 천장도감 대존관, 도총관 등을 지냈다. 다 3품 이상의 고위직으로 붉은 관복을 입는 엄연한 재상직이지만, 실제로는 하는 일이 별로 없는 명예직이다. 하지만 어차피 세조조의 영의정인 구성군 이준 이후로, 조선의 종친들은 실권이 있는 관직에 제수된 적이 없으니, 특별히 여길 이유도 없다. 위의 벼슬들의 역할도 왕실 종친들의 명단을 정리하거나 왕실의 장례 과정을 관리하는 정도의 한직이었다.

3.2 집권 준비 과정

철종이 아들도 없고 병약하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어리석은 행세를 하면서도 집권을 기획한다. 우선 사돈 이호준[9]을 통해 그의 본처 사위인 조성하, 조영하를 소개받았고, 그들을 통해 조성하, 조영하의 고모이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 조 대비에게 접근했다.

결국 그의 작전은 성공해, 철종이 사망한 후 1863년 조 대비와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12세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고, 이후 섭정의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익종의 양자로 들였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대행왕인 철종이 아니라 신정왕후의 남편인 익종의 후사로 삼아서, 왕실의 계보를 익종 계열로 잇게 하여 신정왕후를 흡족케 한 것이다. 과거 철종이 즉위할 때는 당시의 대행왕인 헌종이 아니라 순조의 아들로 삼아서 왕위를 잇게 하는 바람에, 익종계통은 후사가 끊어진 상황이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흥선군과 조 대비의 친정인 풍양 조씨가 (신)안동 김씨가 나서기 전에 선수를 친 걸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조 대비가 후계자를 정하는 것엔 철종의 의사도 약간 반영되어 있었다고 하며, (신)안동 김씨 측에서도 고종이 즉위하는 데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신)안동 김씨가 예전만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건 사실이지만, (신)안동 김씨의 일부 파벌[10]은 풍양 조씨와 함께 어느 정도 실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에도, (신)안동 김씨는 여전히 거대 파벌로 잔존했으며, 대원군 실각 후에도 고종에 의해서 조정의 중진들로 중용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뒤 신정왕후가 수렴첨정을 시행했으나 3년 만에 철회하고, 형식상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드라마 등의 이미지 때문에, 흥선 대원군이 매일 조정의 어전 회의에 직접 등장해서 전면에서 섭정을 시행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와는 다르다. 고종 즉위 후 3년 동안은, 앞서 말했듯이 공식적으로는 신정왕후의 수렴첨정 기간이므로, 대원군은 크게 중요한 국정 사안을 위한 회의 외에는 궁궐에 오지 않았다. 수렴첨정 기간 동안에는 막후에서 신정왕후와 국정을 논의하며, 최종 결정은 신정왕후가 내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형식상 고종의 친정이 시작한 뒤에는, 일단 안건을 고종과 조정 대신들이 논의한 뒤 이를 운현궁에 보내서 대원군이 안건 결과를 결정하고, 형식상 고종이 재가하는 막후 정치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흔히 알려진 흥선대원군이 '상갓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궁핍에 떨며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는 매우 과장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의 영향이 크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그는 흥선정과 흥선도정[11]을 거쳐 이미 24세에 군(君)작위를 받은 바 있다. 그 이후 수릉(익종릉)천장도감의 대존관(代奠官:종친2품)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종친부 유사당상(정3품 당상관)등의 관직을 지낸 바 있다. 녹봉이 있으나 마나한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파락호라 욕먹으며 다닐만한 수준으로 보기에는 어렵다.[12] 이른바 '천하장안'도 중인 신분이었지, '시정잡배'로 불릴 위인들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신)안동 김씨 일족에게 자신이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장사치 같은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리거나 체면을 떨어뜨리는 행세를 하는 등 어느 정도 쇼를 한 부분은 있다. 실제로 그가 빈곤하게 지낼 때 자주 돈이나 쌀을 꾸러다니는 모습을 보였는데, 당시 사회에서 양반(그것도 왕족)이 굶어 죽으면 죽었지 장사꾼들에게 구차하게 먹을 걸 꾸러다니는 것은 욕먹기 딱 좋은 행위였다. 그리고 권세가들을 찾아가 큰아들에게 벼슬자리를 줄 것을 구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철종의 큰아버지 풍계군의 양자인 이세보는 경평군에 봉작되었다가, 안동 김씨가 다 해먹는다고 비판을 했는데, '언어를 조심하지 않은 죄'로 논척되어 양자에서 파양되고 작위도 삭직당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의 뒷수습 과정에서 흥선군이 유사당상으로 복직되었으며, 그 후에 신정왕후의 눈에 들게 되었으니 고종의 즉위에 영향을 끼친 셈. 어쨌거나 나중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종친들에게 대거 벼슬을 내려, 엄청난 수의 종친들로 관직을 채웠다. 흥인군도 왕위 서열에 가까운 왕족 중에선 실로 오랜만에 호위대장 등을 겸하는 등 세도정치 시절보단 훨씬 잘 나갔고, 대원군 실각 이후에는 영의정 등 높은 벼슬을 하며 문호개방을 주도하기도 했다.

참고로 안동 김씨가 똑똑한 왕족을 견제해, 철종 13년 당시 명망 있는 왕족인 이하전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했고, 흥선대원군도 파락호 행세를 해야 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하전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의 후손이다. 이하전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죽기 전에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덕흥 대원군에게 헌종이 작헌례를 실시하면서 덕흥 대원군의 사손인 이하전을 불렀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이하전이 주목받은 것은 종법상 덕흥군의 장자 후손으로서, 도정궁 사손 및 돈녕부 도정직을 세습하면서 수백 년간 특별대우를 받은 가계(家系)였는지라, 왕통이 단절될 경우 소현세자의 자손들과 함께 물망에 오를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효묘 자손이 얼마 안 되어 왕손기근에 시달린데다, 종법이 중시된 조선 후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주변에 바보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해도 혹여 괄시하지 말고 잘 대해주도록 하자. 누가 알아? 나중에 면접 보러 갔는데 면접관이 그 친구일지?!

3.2.1 상갓집의 개?

지금껏 잘 알려진 야사들에 의하면 흥선군은 (신)안동 김씨 측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파락호, 상갓집 개라고 불리면서까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소위 '천하장안'[13]이라 불리는 심복들과 함께,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등 깨어있는 왕족으로 보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가 수모를 당했다는 야사 첫 번째. 그 유명한 화양서원 몰매사건(…).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신위가 있는 만동묘에 참배를 하러갔다가, 남루한 옷차림 덕에 하인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다. 이유는 大킹왕짱 명나라 황제폐하를 모신 곳에 웬 거렁뱅이가 들어와서 더럽히냐는 것. 이하응은 서원을 관장하는 변장의라는 사람에게 "감히 하인이 왕족을 때리다니 있을 수 있는 소리인가?"라며 조지라고 했으나, "하인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어떻게 벌을 줄 수 있나요?"라며 단칼에 거절당한다. 당시 이하응이 얼마나 같잖게(…) 보였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다.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었던 (신)안동 김씨 일파들도 다 살려준 대원군이었지만, 변장의는 이하응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놈은 내가 집권하면 반드시 죽인다"고 생각했는지, 고종이 즉위한 후에 왕족을 우습게 본 대가로 서울로 강제 압송되어 말 그대로 맞아죽었다고 한다.[14] 그리고 만동묘는 대원군이 당파싸움의 온상으로 지목해 강제 철거했다.

그러나 이 카테고리에서 계속 강조하듯 이건 야사일 뿐, 실제 역사는 아니다. 흥선 대원군 자체가 무슨 남루한 비렁뱅이 거지가 아니라, 명예직이나마 고위 관직을 지내면서 조정에서 모범 종친으로 칭송받는 어르신이어서 저딴 대접 받을 일이 없었고, 이미 최후의 당파인 벽파와 남인이 순조조에 전멸한 상황이라 당파 싸움이란 것이 있지도 않았다.[15] 실제 대원군이 만동묘를 철거한 이유는 서원 철폐 때문이고, 만동묘 제거는 그 준비단계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변장의란 사람은 나오지도 않는다. 다만 흥선군이 종친 시절에 만동묘를 찾았다가 모욕을 당한 사건 자체는 있었다고 한다. 만동묘 앞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아랫사람의 부액(부축)을 받았는데, 이를 본 만동묘 관리자 중 한명이 '이 곳은 주상전하께서도 부액을 받지 않고 오르는 곳인데 어딜 감히!'라며 모욕을 주었다는 이야기.

두 번째. (신)안동 김씨의 수장이자 김좌근의 아들인 김병기도 수시로 흥선대원군을 모욕 주었는데, 어느 잔칫집에 이하응이 나타나 잔칫상을 요구하자, 김병기는 "저런 거렁뱅이 상갓집 개한테 진수성찬도 호사다"라며 자기가 먹던 고기의 뼈다귀를 이하응에게 던져 주었다. 당시 이런 수모를 당한 이하응은 그냥 웃고 넘겼는데, 훗날 자신이 권세를 잡자 김병기의 잔치에 참여, 독이 들었다는 이유로 먹던 음식을 뱉었다. 대원군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탔다는 의심을 사게 된 김병기는 기지를 발휘해, 그 자리에서 대원군이 뱉은 음식을 주워 먹어 의심을 벗었지만, 이로써 대원군은 과거의 수모를 되갚았다는 이야기이다. 여담으로 이 기지에 감탄한 대원군은 훗날 아들을 낳으면 김병기 같이 낳아야 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하기야 자신의 친아들만 봐도…

하지만 역시나 이것도 야사이며,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흥선군은 유력 왕실 계승서열인 남연군 일가의 소속으로 조정으로부터 모범적인 종친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었고,[16] 종친 좌장으로 아버지 남연군, 형인 흥인군과 함께 예우 받았다. 아무리 안동 김씨 천하라고 해도 김병기가 함부로 모욕을 줄 상대는 아니다.

세 번째. 이하응이 과 그림을 그려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본 (신)안동 김씨 문중 식객 심의면이 이하응에게 궁도령이라고 조롱하고 비하했는데, 행사에 온 그에게 뭐 하러 이런 곳에 오느냐며 면박을 줬다고 한다. 뒤에 심의면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뒤 경기도 광주군수직에서 파면되고 벼슬에서 잘렸다고 한다. 뭐 심의면이 벼슬자리에서 잘린 건 사실이긴 한데, 단지 흥선대원군을 얕잡아 봤다고 괘씸죄로 당한 건 아니었다. 실록을 보면, 심의면은 그 아비 심이택이 자그마치 27만냥의 재물을 백성들로부터 갈취한 사건이 들키면서 세트로 처리된 것이다.[17]

3.3 집권

3.3.1 내정 개혁과 왕권 강화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유랑민이 늘었고, 빈농들의 경제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이에 민중들은 곳곳에서 들고 일어나고 있었고, 그런 경향은 1862년 최고조에 달했다.

흥선 대원군은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은결을 색출해 내는 것으로 전정을 개혁했다.[18] 또한 군정을 개혁하기 위해,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기준으로 하는 호포제를 실시한다. 이에 양반들은 반발했지만, 흥선 대원군은 의견을 관철시켰고, 이에 걷히는 세금이 확연히 늘어났다. 다만 양반들의 원성이 하도 높아, 체면을 고려해서 노복의 이름으로 거뒀다.

또한 이전까지 관에서 곡식을 빌려준다는 명목 하에, 수령과 아전들의 돈벌이 구실이 되었던 환곡제(還穀制)를 폐지하고, 지역의 덕망 있는 양반이 곡식을 빌려주게 하는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게 했다. 이 사창의 운영을 책임진 자를 사수(社首)라고 부르는데, 사수는 임명제가 아니라 지방의 추천제로 이루어졌다.[19] 이외에 검소한 생활을 권장하고 길거리의 부랑배들을 몰아내면서 국가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본래 조선시대의 국정 명령 집행 문서는 항상 '왕약왈(王若曰 : 왕은 이르노라)'로 시작했는데, 대원군 섭정기에는 모든 명령 집행 문서에 왕약왈 대신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 : 대원위가 명한다)'가 앞에 붙었다고 한다. 매천야록에는 이 무렵에 '대원위분부' 다섯 글자에 온 천하가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재정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고종 즉위년과 대원군이 물러난 고종 11년의 재정을 비교하면 조정이 보유한 황금은 51%, 쌀은 299%, 포는 255%, 목재가 258%, 은이 27%, 철이 673%로 늘었을 정도였다.[20] 치안도 대단히 진정되어 삼정의 문란으로 들불처럼 민란이 벌어졌던 세도정치 말엽과 대조하여 대원군 시절에는 민란이 격감했다.

흥선 대원군은 이전까지 집권하고 있던 세도정치가들도 몰아내야 했는데,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안동 김씨들은 수백 년을 내려온 비변사를 폐지하는 것은 애석하다고 은근슬쩍 반대를 하다가, 대원군과 조대비의 뜻이 확고하자 타협안을 내놓아, 의정부와 비변사에게 권력을 반반씩 나누되 대신 경국대전에도 없는 비기구인 비변사의 존재를 공식화하려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어림없는 소리!"를 외치면서, 그 타협안에서 불과 1년 후에 비변사를 혁파하고 비국(備局)의 인신(印信)을 녹여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의정부와 삼군부는 모두 왕과 직결되는 권력 기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은 강화되었고, 세도가문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는 또한 남인, 소론은 물론, 북인과 반역향이라고 소외된 영남 유림,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왕씨 등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 왕가의 종친 등을 끌어들여 세도가문의 위세를 꺾는 데 성공했다.[21] 또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펴면서 법제도 바로잡았다. 다만 안동김씨 자체에 대한 숙청은 최소한으로 끝났다. 아래에도 언급하겠지만 이는 대원군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안동 김씨와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한 것.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력을 어느 정도 살려서 또 다른 세도 가문인 풍양 조씨 가문의 지나친 성장을 막아야 했고, 안동 김씨 내의 유능한 인재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안동 김씨 일파는 실권은 크게 잃었지만 개인 재산이나 명예 등은 거의 잃지 않았다. 사실상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은 영의정에서 물러나서 명예직을 지내며 조정 내 원로로 잘 대접받다가 자연사했고, 김병기는 잠시 광주 유수 등의 외직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복귀해서 좌찬성 등의 요직을 맡았다. 김병학/병국 형제는 오히려 더욱 진급해서 흥선대원군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야사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으로 조정 대신들과 면담하는 공식 석상에서 한 말이 "나는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세도가문의 위세를 꺾고),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종친을 정계에 등용하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남인을 등용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시오?"인데 이 말을 들은 (신)안동 김씨의 김병기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는 것은 가능하겠습니다만,[22] 어찌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즉 "너님이 아무리 용 써봐야 우리 가문 위세를 꺾을 수 있겠음?" 정도의 의미다. 그러자 대원군은 "저 놈은 지 잘난 줄만 아는구만"이라고 핀잔만 주고 넘어갔고, 이후 (신)안동 김씨의 위세를 꺾는 작업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실록에는 별 얘기가 없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애초에 대원군은 어전회의에 나와서 이래라 저래라하는 형식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흥선 대원군은 또한 대규모로 서원을 철폐시켰다. 서원은 이전까지 제사 비용 등을 주변의 농민에게 물리는 등 문제를 일으켰고, 사액 서원들의 면세권을 이용해 주위의 양반들이 땅을 서원에 맡기고 세금을 내지 않는 등 폐단이 심했다. 이에 그는 600여 개의 서원(1,000여 개라는 말도 있다.)을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밀어버렸다. 야사에서는 이때 유생들이 반발하여 몇날며칠을 울고 불며 집단으로 시위를 벌였으나,[23]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된다면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유생들을 한강 남쪽으로 밀어내 버렸다고 하는데 근세조선정감에 기록되어 있다. 서원을 철폐할 때 대원군은 말이 서원이지 군역 기피, 중복 제사, 민폐 등을 지적하는 등 워낙 철폐의 명분을 든든히 축적하고 철거하여 유생들은 별 저항도 못했다. 그들의 꼼수라 해봐야 흥선 대원군의 조상을 모시는 서원을 만들고 중앙의 철거 명령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 고작이었는데, 대원군은 인평대군 서원부터 철거해버리고, 지속적인 독촉으로 서원 철폐를 관철해냈다. 복구 요구도 이항로, 기정진, 최익현을 비롯한 거물급을 제외하곤 없었고, 서원 복구 요구가 빗발같이 쏟아진 것은 대원군 실각 이후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후였다. 하지만 고종은 그런 요구들을 씹었다.

여러 성공에 고무된 흥선 대원군은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위상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 있던 경복궁을 새로 짓는 데 드는 비용[24]과 노동력[25]은 엄청났지만, 원납전을 모금 받고 국가 재정으로 충당하며 처음에는 별 탈 없이 지어갔다. 문제는 다 지어가는 도중에 화재로 싸그리 타버린 것이었다.[26] 다시 짓기에는 너무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27] 대원군은 당백전을 발행[28]하고 원납전을 강제로 거두며 문세를 걷는 등 재원을 마련하고, 농민들을 무보수로 대거 동원시켰다. 이 사업은 양반들은 물론 일반 백성에게까지도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그가 퇴진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이 경복궁 중건 무렵에 나온 것으로 전해지는 민요가 바로 《경복궁 타령》. "우리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짓는 데 다 들어간다", "조선 8도 유명한 돌은 모두 경복궁 짓는 주춧돌감이다"라는 구절이 당시 상황을 잘 알려준다.

후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게(대립한다고 해야 할지 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되는 명성황후도 흥선대원군이 직접 뽑은 케이스다. 가세가 빈곤하고 어쩌고 하면서 없는 집에서 데려온 것처럼 알려졌으나, 사실은 흥선대원군의 처가와 엮여있는 인척집안이다. 실제로 이 관계가 중간에 끊어지기 전까지 사이는 상당히 무난했던 축이었고. 외척득세를 견제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위 확립을 노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틀어졌으니 말짱 헛짓.

흥선 대원군은 훈련도감의 조총수를 늘리고, 만주에서 말을 수입하고, 일본에서 최신식 총을 수입하려고 노력했으며, 서양의 화포나 배 만드는 기술을 따라잡으려 노력하는 등 군사 기술에도 신경을 많이 썼지만, 실적은 시원찮았다. 군사력 확보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대한제국시기의 고종은 그나마 확보한 궁중재정으로 진행했는데도 반란진압에 예산이 부족했다. 경복궁 중건과 그 뒤처리가 블랙홀처럼 모든 재정을 빨아들이고 있던 대원군 집권 시의 조선의 재정으로는 어떤 것도 진행할 수 없다. 게다가 서양식 무기, 보급체계에 대해서 무지한 조선이 효율적인 근대적 군대를 갖추기란 어림없는 일이었다. 일본만 해도 명치유신이 성공한 다음에야 그럴듯한 군대를 갖출 수 있었지, 그 전에는 서양 군함 몇 척에 털리긴 일본이나 조선이나 매한가지였다.

어쨌거나 대원군은 신병기 개발을 위해서도 노력을 많이 했는데, 서양의 증기선을 모방해서 만든 화륜선[29] 등을 만들기도 했다.[30][31] 이때 세척의 철갑선을 만들어 전진 배치했다고 한다. 평민이라 하더라도 사격술만 좋으면 즉각 벼슬을 내려 병사들의 숙련도를 높이려고도 했다.

면제배갑이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딱히 근거를 찾기 힘든 말이다. 천을 많이 겹쳤다고 해서, 당시 서양의 후장식 소총의 관통력을 이겨낼 수 있을지 부터가 의문이다. 방탄 효과가 있었다고 해도 조선 측에서 시험해 볼 만한 물건은 조총뿐이니만큼(병인양요 당시 노획한 소총은 장전하는 방법도 모르고 탄약도 거의 없을 텐데 어떻게 시험할 건가?) 조총을 상대로 했을 때나 방탄 효과가 있겠지, 미제 스나이더 소총을 막아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장 그 정도로 방탄효과가 뛰어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선 측의 기록에도, 미군 측의 기록에도 매우 상세하게 적혀 있을 텐데, 면제배갑의 방탄력에 관련된 미군의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아무리 포격 및 총격이 계속 가해진 뒤 벌어진 전투라지만, 조선군과 미군 사이의 백병전에서 거의 학살 수준의 교환비가 나오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미군의 권총이니만큼, 면제배갑 방탄설은 낭설에 가깝다. 덤으로 너무 덥고 불편하여 사용하기에 애로사항이 꽃을 피우는 물건인데, 불이 워낙 잘 붙는 놈이라 미군이 포격을 가하자 조선군은 그야말로 개발살나고 말았다.

그 외에는 서양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식 포 주조술[32]로 만든 대포/중포/소포와 현대의 기뢰에 해당되는 수뢰포를 제작해 실전배치했다. 다만 실전 활용은 불분명하다.

흥선대원군이 만든 포 중 소포. 뒤에서 본 모습.

3.3.2 종교 탄압과 양요

1864년 흥선 대원군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를 물어 잡아 죽였다. 이 문제는 이후 1890년대 교조 신원 운동으로 동학 세력이 뭉쳐,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반면 천주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가족 중 아내, 큰딸, 고종의 유모까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이다.[33] 집권 이후 한동안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폈고,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34] 사도 요한과 직접 만나 향후 대책을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에 영향을 받은 유림 세력에서 천주교를 탄압하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다음부터 얘기가 갈린다. 일설에 의하면 대원군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그 계획에 프랑스 선교사들을 이용하려 했는데, 프랑스 선교사들이 흥선대원군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될 생각 없다고 답하자 유림의 요청을 받아들여 천주교를 쓸어버렸다는 것이다.[35] 조선왕조실록에선 천주교도들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대원군이 오히려 천주교 박해를 지시한 걸로 나온다.

안 그래도 천주교를 배척하던 여론은 흥선 대원군에게 선교사들을 잡아들이라고 부추겼고, 때마침 청나라가 서양 열강에 의해 좌지우지당하고 천주교를 박해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불안감을 느낀 그는 1866년 8,000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과 9명의 프랑스 사제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36] 이것이 그 무시무시했던 병인박해다.

이 난리 통에 살아난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37] 베이징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제독의 프랑스 극동 함대에 연락한다. 프랑스 극동 함대는 이를 구실로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며 출정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화성과 한성근이 지키던 문수산성을 개발살내고, 갑곶진, 광성진까지 함락하여 사실상 강화도를 장악한 후에 여유롭게 양헌수가 지키던 정족산성(삼랑성)을 점거하려 했다가, 매복한 조선군의 기습을 받은 뒤에는 사기가 꺾여서 그냥 곧바로 다음날에 조선 정벌을 포기하고 돌아가게 된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은 수십 권의 책과 은괴를 약탈당하고 불타게 되는데, 이때 프랑스군이 가져간 의궤들은 2011년에야 반환되기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사실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식민지를 확보하려고 할때 선교사들을 먼저 들여보내길 즐겨했는데, 병인박해 같은 상황이 연출되면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으로 보면 선교사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특히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오지[38]로 떠날 때엔 언제라도 하느님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순교할 위험에 처하면 이미 각오한 대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사의 자세라고 볼 수 있는데,[39]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처럼 도망쳐 군대를 이끌고 오는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우스운 일이다.[40][41]

1868년 독일계 유대인 상인이자 인류학자인 오페르트가 주도한 140여 명[42]은 조선과의 수교를 위해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시도[43][44]했다.

중국에서 출발한 이들은 프러시아 국기를 달고 일본에 가서 무기와 도굴장비를 구매한 다음, 충청남도에 상륙한다. 이후에 프러시아 군대를 자칭하면서 덕산 관아와 인근 민가를 습격해서 무기와 도굴장비를 다시 강탈했다. 하지만 구만포에서 남연군 묘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시간을 많이 소모해서, 결국 한밤중에 남연군 묘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전날 마을에서 깽판 부리고 간 탓에 금방 관군이 출동했고, 결국 그들은 관에 발라놓았던 석회[45]를 뚫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철수한다.

오페르트는 이후 "우리가 석회를 못 팠을 것 같냐? 파려고 하면 팔 수 있었음.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너네 백성이 불쌍해서 봐준 거야." 따위의 정신승리 쩌는 병맛 글[46]을 보내려 시도했다. 오페르트는 자신을 수군제독이라 일컬으며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를 영종 첨사 심효철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심효철이 "내용이 윤리에 어긋난다"고 전달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것이고, 사본이 조정에 올라가서 온 대신이 다 같이 보았다. 당연히 대원군도. 아버지 무덤이 파헤쳐진 대원군은 격노해서 통상금지정책을 강화했다. 자세한 것은 오페르트 도굴사건 참조.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이 오페르트에게 관과 부장품을 볼모로 조선정부와 교섭하라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주장이다. 조선에는 와 본 적도 없는 프랑스인 예수회 신부였던 쟝 밥티스트 뒤 알드(Jean Baptiste Du Halde, 1674-1743)가 풍문만 듣고 쓴 책 《조선왕국(Kingdom of Korea)》에 "조선은 왕족의 무덤에 부장품을 만땅으로 채워 넣어서 보물창고나 마찬가지"라는 글을 썼고, 이후 외국인들에게 도굴 붐이 일어났는데 오페르트도 그 중 하나란 것이다.# 다음으로 주도자가 오페르트이냐 아니면 젠킨스이냐도 문제다. 일반적으로는 오페르트가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식의 발굴 혹은 도굴 작업의 주도자는 경비를 대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바로 미국인 젠킨스였다. 그리고 이 사건이 국제문제가 되어서 벌어진 재판에 출석한 사람도 오페르트가 아니라 젠킨스. 오페르트의 경우는 일단 도굴단이 프로이센 국기를 달고 프로이센 군을 자칭했다는 점,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시도했다는 것, 무엇보다도 돌아가서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다. 오페르트가 남연군 시신을 통해서 조선정부와 협상하려고 했다는 것도 이 책에 나온다. 당연히 미국이라면 이를 갈고 있는 북한의 경우, 오페르트는 안중에도 없고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미국이 주도한 간악한 만행들 중 하나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월북화가 정현웅의 대표작이 바로 미제의 남연군묘 도굴일 정도. 한제국 건국사에서도 이 도굴사건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기본적인 얼개는 같지만, 대체역사소설이라서 실제와는 좀 다르다.</ref>

1869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지나서 조선에 수교를 청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이전의 관례에 어긋나는 내용이었던지라 거절당한다. 그 관례란 일본 왕이 '조선국왕 폐하'라고 존칭을 써서 보내는 것이었으나, 이때 일본은 '본국 천황이 조선국왕에게'란 제목으로 시작하는 국서를 써서 보내왔고, 대원군은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대원군 실각 이후, 1875년의 서계 문제가 터지면서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사실상 단절된다. 조선은 이전의 격식과 일본 전통 복장을 요구했고, 서양식 양복을 입고 서양식 화륜선을 타고 온 일본 외무성 관리들은 조선의 요구를 거절했다. 조정에서 일본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사이에,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병인양요 이전 1866년에 평양에 제너럴 셔먼호[47]라는 미국 배가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자 중군 이현익을 억류하고 기습사격을 가해 7명의 평양 군민을 살해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평양 군민들은 평안 감사 박규수의 지휘 하에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 사로잡은 서양인들과 중국인 선원들을 죽였다.[48]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삼아 1871년 로저스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쳐들어온 것. 이때 미국은 남북전쟁 때문에 상황이 좋지 않았고, 결국 5년만에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이다. 어재연 등이 광성보와 갑곶에서 대항했으나, 조선군은 정말이지 처참하게 참패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싸웠다고 한다.[49] 결국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미군은 더 싸워봐야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4월 28일에 철수한다. 조선에게 있어 실질적인 전투결과는 병인양요 때와 비슷하게 전술적 패배임과 동시에 전략적 승리였다.[50] 이에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그러나 10년 후에 한반도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국이 러시아 견제차 거문도와 인근섬들을 불법점령하였고, 냉전과 흡사한 기류가 한반도에 흘러 하마터면 한반도 자체가 위기에 처할 뻔했으나, 2~3년이 지난 후에 러시아의 남하정책 철회를 확신하고서는 그냥 뱉어냈다. 사실 두 나라 모두 한반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던 게 아니라[51]서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았겠지만, 만약에 영국이 한반도까지 식민지화한다면, 동북아 균형에 차질이 생겨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서구열강들이 영국을 압박하려고 준비하기는 했었다.

이 2차례의 양요가 단지 무모한 쇄국정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고종이 친정을 맡게 된 후에는 당백전의 여파로 재정이 완전 파탄 지경에 이르러서, 조선군 기강과 무장상태는 대원군 집권기와 비교해도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 결과 영종진에서 병인양요/신미양요 때보다 훨씬 적은 수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다만 개항을 한 것 자체는 조선 조정이 개항의 필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계기라고 보면 된다.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한 대신들은 "이거 상당히 이득될 듯합니다"란 결론을 내리고 있었고, 고종도 동의했다. 이후에도 고종은 병력 확충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나라의 무기를 마구잡이로 도입해 보급과 숙련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등 문제가 많았다.[52]

3.3.3 대원군 집권기의 평가

오늘날 흥선대원군이 개화를 이루지 않고 척화비 등으로 외세를 배척해서 조선의 발전이 늦어졌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평가는 그 당시 현실에 비추어 보면 헛소리에 가깝다. 흥선대원군 본인도 그 당시 국내에 유입되어 있던 가톨릭 신부들을 통하여 꾸준히 서구세력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서구열강은 좋은 먹잇감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 군인이 쓴 일기에는, 조선이 베트남보다 풍요로운 것 같은데, 베트남 말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고 기재된 내용도 있다. 신미양요 당시에도, 조선은 미국 함대 군인에게, 전쟁할 때 하더라도 일단 음식과 물을 보낼 테니 잘 먹으라고 하였으나, 미국 함대는 가볍게 씹고, 온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애초 베트남이 프랑스와 어설픈 접촉을 시도하다가 나라가 통째로 망한 걸 보면, 당시 흥선대원군의 정세판단은 정확했다고 평할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근대화로 식민지화를 막은 경우도 있는만큼(비록 소수의 나라이기는 하나) 이에 대해선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흥선대원군은 여타 위정척사파들처럼 사상적 도그마에 입각해 무조건적인 외세배척을 주창한 인물은 아니었고, 오히려 서양문물을 수용하려는 태도를 견지한 인물로, 청나라에서 서양식 대포 제조술을 도입하여 대포를 제작하기도 했었다. 병인박해가 왜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어떤지 나온다. 당시 서구 열강과 제휴나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고려한 인물 또한 대원군이다. 척화비 건립은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이양선 사건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반외세에 달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한 조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은 애초 네덜란드와 오랜 접촉이 있었고, 미국이 일본을 식민지 삼으려고 살짝 간보다가 남북전쟁을 전후로 한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실패하였으니, 일본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라 메이지이신(명치유신 : 明治維新)이 성공하였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당장 개항을 하고 싶어도 서양에서 요구하는 것은 철저한 불평등 조약에 기반한 반식민지였기 때문에, 개항을 하고 싶어도 할 대상이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설혹 평등조약을 맺으려 해도, 그러려면 서구열강이 얕보지 못할 무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무력을 갖출 무기를 팔아줄 교역대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설혹 있었다 해도 재정이 파탄 난 당시 조선에서 얼마나 가능했을지. 물론 개항 긍정파들의 주장도 강하긴 하다.* 이건 지나치게 결정론적인 시각이다. 태국과 에티오피아처럼 식민화를 면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 나라들이 예속을 면하게 된 이유가 따로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조선도 식민지가 되는 것을 피할 기회가 있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3.4 십년 섭정의 끝, 하야

청에 끌려간 대원군. 63세 때의 모습이다.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여론(특히 양반들)은 악화되어 있었다. 이미 최익현의 스승 이항로가 1866년에 두 차례나 상소를 올려 만동묘 복구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을 강하게 비판했고, 고종 5년 10월에는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서 경복궁 중건, 원납전, 당백전, 문세를 비판했다. 흔히 대원군이 이것 때문에 실각했다고들 하지만, 정작 고종 5년 최익현의 상소는 그다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상소를 올릴 거면 진즉에 올리지 공사 다 끝나가는 마당에 허둥지둥 올린 티가 다 난다고 조정에선 비웃기도 했다. 결국은 최익현이 용감히 말을 했다고 전보다 높은 동령부 도정에 제수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사대부의 여론은 좀 애매했는데, 만동묘와 서원의 철폐에 분노하는 여론도 있었지만, 남인, 북인, 소론을 비롯한 소외된 당파 출신들, 이인좌의 난 이후로 배제되었던 영남의 유림들같이 대원군 덕에 빛을 본 세력들이 대원군의 지지세력이 되었고, 척사(斥邪)의 분위기에 이항로, 기정진같이 대원군의 개혁에 반발하던 유림도 대원군의 쇄국 정책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고종 10년, 윤 6월, 광주 유생 이세우의 주장에 따라, 대원군은 송시열 이후로 조선왕조 역사상 두 번째로 대로(大老)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대원군의 권위가 한층 올라간 것이다. 근데 불과 넉 달이 지난 10월 25일, 유명한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온다.

“신은 몇 해 전에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벼슬의 반열에 나왔으나, 며칠도 못 가서 까닭 없이 견파(譴罷)당하였으니, 신의 변변치 못하고 사람답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벌써 환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때부터 시골로 물러가서 고생을 달게 받으며 낮은 벼슬자리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승지와 같은 훌륭한 벼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명을 듣고 나서 놀랍고 황송하여 더욱 죽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정변구장 政變舊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대신(大臣)과 육경(六卿)들은 아뢰는 의견이 없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는 비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가 마구 떠돌고 정당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이륜두상 彝倫斁喪) 선비의 기풍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고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사람은 버젓이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맥없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위에서는 천재(天災)가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지변(地變)이 일어나며, 비가 오고 날이 개이고 춥고 덥고 하는 기후 현상에서는 모두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노련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대와 신망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견제당하고 모순에 빠져 힘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신과 같이 본바탕이 어리석고 학식도 전혀 없는데다가, 외롭고 약하여 어찌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 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상소를 받은 고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최익현을 크게 칭찬했다.

“그대의 이 상소문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여 호조 참판(戶曹參判)[53]으로 제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하여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상소의 파급력은 엄청났는데, 좌의정과 우의정이 사직을 요청하고, 영돈령부사 홍순목과 승정원, 홍문관 등이 일제히 자신들의 죄를 자처하면서 인혐(引嫌)[54]하여 반성 분위기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형조 참의 안기영이 최익현이 대소신료들을 일망타진하려 했다고 최익현을 탄핵했다.

“방금 최익현(崔益鉉)의 상소 원본이 내려온 것을 보니, 겉으로는 언사(言事)를 칭탁했으나, 속으로는 자기의 정직을 판 것으로, 높고 낮은 관리들을 일망타진하고 꼬리를 숨기면서 몰래 음흉한 기도를 실현하려 하였습니다. 이륜두상(彝倫斁喪) 네 글자는 어느 책에 나타나 있으며 어떤 시대에 언급되었던 표현입니까? 성상께서 즉위한 이래로 일가친척들 간에 화목하게 하였고,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이끌었으며, 정당한 도리를 지켜 불순한 무리들을 배척한 결과, 위에서 인륜이 밝고 소민(小民)들이 아래에서 서로 화목하니, 곧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바이고 함께 칭송하는 바입니다. 도대체 그의 말이 이에 무슨 한 터럭만큼이라도 그럴 듯하게 비슷하게 맞는 것이 있기에, 그가 감히 이에 대해서 이처럼 어려워함이 없이 지적하여 탓한단 말입니까? 이 일을 엄하게 조사하고 철저히 해명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가지고 시비하는 자들이 장차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할 것이며, 뒷날에 가서 오늘을 보는 사람들도 장차 어떤 세계라고 말하겠습니까? 속히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여 기어코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소서.”

이에 고종은 안기영의 소를 뭔 소리인지 이해 못하겠다고 까면서 최익현의 주장을 공격하는 이들을 충신을 공격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안기영이 최익현의 소를 공격할 분위기를 만들자, 조정은 최익현이 까는 주체가 어디냐고 반격에 나섰다. 성균관 유생들이 권당으로 대응했고 신하들은 지금 온 조정을 버리고 익현 한 사람만을 믿는 것이냐고 고종에게 항의했다. 이에 고종은 안기영을 비롯하여 최익현 반대파들을 유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1월 3일, 이에 최익현이 새로 상소를 올렸다.

“신은 일소(馹召)를 받았을 때 외람되이 개인의 사정을 진달하여 전하의 이해를 받으려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방의 공식 인편을 통하여 봉해 올린 글이 길에서 지체되어 제때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소문을 지을 적에는 신중히 잘하지 못하여 꺼리는 문제들을 건드림으로써 명령에 대해 태만한 죄가 드러났으며, 가까이 있는 관리들과 높은 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행장을 갖추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하늘같이 큰 도량으로 포용하며 변변치 않은 말도 받아들이고 조그마한 질책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신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고 구부려 남 보기 부끄럽습니다. 참으로 뜻밖에도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요행 면하고, 이렇듯 몹시 외람되고 분수에 넘치게 벼슬에 임명되었습니다.

대저 작록이란 나라의 명기(名器)입니다. 만일 적임자를 등용하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의 정사에 오점을 가져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에 어긋나는 만큼, 그로 인하여 미치는 폐해는 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하가 물러가고 나아가고 하는 것으로 말하면, 풍속의 성쇠와 염치의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는 바가 이보다 더한 문제가 있는 데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러므로 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응당 벼슬에 나가야 할 것을 나가지 않아도 공손치 못한 것이 되고,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을 나가는 것도 역시 공손히 못한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오늘날 형편을 놓고 말하면, 신은 사실 어리석고 무식한 시골사람입니다. 설사 문을 지키고 야경을 서는 일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거늘, 하물며 호조(戶曹)의 관리라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곤궁을 겪고 있는 이때에, 신과 같은 사람은 결코 잠시라도 이 벼슬자리에 무턱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처하며, 부(富)를 사양하고 가난에 처하는 것은, 사양하고 받고 하는 데서 지켜야 할 큰 지조입니다. 신이 전날에 승지의 벼슬을 사양하였고, 오늘날 순차를 뛰어넘어서 발탁된 벼슬에 도리어 태연스럽게 나가 앉아 있다면, 참으로 이른바 만 냥은 사양하고 10만 냥을 차지하는 격이니, 장차 맹자(孟子)의 죄인이 되는 데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신이 연전에 망령되게 시정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삭(刊削)된 지 얼마 안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갔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지만 권종록(權鍾祿)의 상소에 대해서도 좋게 비답을 내리셨으니, 신의 죄에는 공경스럽지 못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해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하여 명예를 낚는다는 심한 무함이 신의 스승인 전 참판(參判) 이항로(李恒老)에게까지 미쳤으니, 이 어찌 몹시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명도 씻지 못하고 스승이 당한 호된 무함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한 몸만 단호하게 얼굴을 쳐들고 나갈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전날에 역말로 불렀을 때, 은혜와 총애를 탐내어 경솔하게 행동한 결과 염방(廉防)이 어그러지고 관리들에게 수치를 끼쳤으므로, 속으로 자신의 결함을 반성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넷째 이유입니다.

태평했던 조정에서는 신이 한번 올린 상소로 시비가 터져 나와 대신들이 연명차자(聯名箚子)를 올리고 삼사(三司)가 연합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며, 전직과 직무 없는 관리로 있던 신하들도 성토가 바야흐로 팽팽해져서 죄악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이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신이 형편상 안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가엾게 여겨, 이미 내린 명령을 속히 철회함으로써 공기(公器)를 중히 하시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이미 나가지도 않으면서 의견도 아뢰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역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전하의 성덕을 받들어 빛내는 도리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번 상소 가운데 이미 문제를 끌어내고는 말을 자세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의 의논을 보니, 정변구장이륜두상(政變舊章彝倫斁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칼자루로 삼고 있으니, 신은 거듭 다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아! 우리나라는 은사(殷師) 이래로 이미 오랑캐의 옛 풍속을 고쳤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 여러 열성(列聖)이 잇달아 나오고 뭇 어진 이들이 많이 나타나, 일세를 한 범위에 넣어 후손에게 넉넉함을 물려주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고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를 담당한 것이었으니, 세워도 어그러짐이 없고 후세에 가서도 의혹이 없으며, 이 세상을 마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후세의 임금이나 후세의 백성들이 혹 하나라도 이와 반대로 하면, 문물제도는 오랑캐와 같은 형편에 빠지고, 사람들은 짐승의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니, 하루도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書院)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몇 가지 조항들은 한 조각이 되어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져 더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목공사의 원납전(願納錢) 같은 것이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들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대 임금들의 전장을 변경하고 천하의 의리와 윤리가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에 신이 생각건대,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논한다면,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 죄명을 벗겨준 나라의 역적에 대해 추후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토목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한 시각이나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이른바 황묘를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명나라에 대하여 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왔고, 임진년(1592)에는 재조(再造)해 주었으니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은혜가 있으니, 만대를 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천지가 뒤바뀌고 상하가 도치된 것을 통탄스럽게 여기면서 무기를 갖추어놓고 밤낮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다렸습니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물고기와 물처럼 계합(契合)하여 빈틈없는 계책을 세워 물리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운수가 제한되어 효종이 승하하여 일은 성공을 보지 못하니, 온 나라의 신민이 원통한 마음을 드러내 보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칸의 초가집을 지어놓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것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의리로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으며, 먼 후세에 가서도 영원토록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의식 절차를 위에서 충분히 갖추어 거행하게 되어서는 이 제단을 설치하는 것으로도 크게 보답하지 못할 듯이 해야 하는데도, 번잡하고 중첩되는 혐의를 품는 일이 있습니다. 삼가 열성조의 분부를 상고하여 보면, 번잡하고 중첩되게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관심을 기울여 중시하면서 관청 토지를 떼어주어 제물을 공급하게 하였고, 친히 편액(扁額)을 써주어 드러내 빛내주는 뜻을 보였으며, 인정에 따라 원칙을 세움으로써 먼 후세에 가서도 의혹됨이 없게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황은의 혜택이 깃들어 있으니, 집집마다 시동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들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대 임금의 거룩한 뜻이, 어찌 그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것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의리에서만 나온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무너지기 쉬운 것은 인심입니다. 백성들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만일 지성으로 장려해서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떳떳한 의리를 배양할 수 없고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우(夏禹)의 사당(祠堂)이나 태백(泰伯)의 사당 같은 것을 놓고 미루어보아, 백성들이 슬픔에 잠겨 그러면서 백대를 내려가도 변함없는 것인 경우에는, 틀림없이 시골에서 사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여기에 더욱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에 나온 성인들은 응당 그를 준수하며 고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열성들이 의리를 바로잡아 전통을 드리운 것이 그와 같이 심원하였고 솔선 모범을 보이면서 조장 발전시켜준 수고가 그와 같이 빛나고 밝기 때문에, 온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충성과 의리에 의한 교화에 감화되고, 뼈 속에까지 깊이 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몇 해 전에 만동묘를 철폐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은 전하의 뜻이 오로지 공경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서러워하며 슬피 울었던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심정은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유신(儒臣)은 상소를 올려 의리를 진달하였고, 각 도의 유생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합문(閤門)에 나와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이로써 떳떳한 양심이 모두 같고 여러 열성(列聖)들이 배양하여 놓은 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천하의 일에는 어진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많은 선비들이 같은 계(啓)를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은 경우에 공론이 아닌 것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전하가 새롭게 정사를 총괄하면서 산만한 것을 정리하고 옳지 못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공론에 대해서는 더구나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용히 심사숙고하고 시원하게 생각을 바꾸어, 빨리 제사를 회복하자는 요청을 허락함으로써 위로는 조종의 유지를 따라 준수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해 주소서.

만일 난처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혹 말하기를, 중대한 예를 그만두었다가 갑자기 다시 설행한다면 성심으로 공경하는 것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주자는 태묘(太廟)의 예의 개정(改定)을 논하여 말하기를, ‘종묘의 예는 더없이 엄하고 중대한 일이니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오늘 황묘의 제사를 회복하는 것은 성덕에 더욱 빛을 드러낼 것이며 누(累)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비속한 말들이 어찌 전하의 용단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서원은 흥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의 교육은 집에는 숙(塾)을 두고 마을에는 상(庠)을 두며,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배움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로는 윤리가 밝아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냈다고 봅니다. 지금 아조(我朝)의 성균관(成均館)이 옛날의 국학이며, 향교(鄕校)도 옛날의 주서(州序)이고 서원은 옛날의 숙상(塾庠)입니다. 500가(家)에 한 개 ‘상’이 있은 뜻을 미루어 보면 만호나 되는 고을에 겨우 한두 개의 서원을 둔 것은 소략이 매우 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둔 기본 뜻은 학문을 강론하여 도를 밝히는 것이 사실 주된 것이며, 시골의 향선생(鄕先生)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려는 일은 그 나머지 일이었습니다.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널리 설치하게 되자, 겹쳐서 제사지내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여 이미 세운 것까지 함께 폐지하고, 천이나 백에 열이나 하나만 남겨둔다면, 학교에 관한 옛 제도와는 크게 어그러지며, 창건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게 될 것이니, 교육이 해이되고 풍속이 퇴폐해진 것을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명사(明史)》를 고찰하여 보면, 천하의 서원을 철폐한 것이 두 번 보이는데, 그에 따라서 왕실이 뒤집혔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길상(吉祥)의 일로써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미 내린 명을 환수하여 주소서. 다만 제사를 그만둔 서원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일생을 논하여 덕망도 공로도 없고 음사(淫祠)에 가까운 것은 모두 폐하되, 도덕이나 절의가 한 마을의 스승으로 될 만한 사람은 본향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며, 온 나라와 천하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은 주(州)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곳곳에서 높여 보답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대(金帶)가 많고 많으며 현송(絃誦)이 넘실거려서, 옛날의 번성하던 시기에 못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늘 오늘날의 서원은 실효는 없고 폐단만 있다고 하여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매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자공(子貢)이 희생으로 쓰는 양을 없애려고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의를 아낀다’ 하였습니다. 양이 남아 있으면 예도 회복될 가망이 있는 것이니, 서원을 철폐하면 어찌 학문이 영원히 폐지될 한탄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정사도 거행되는 것이니, 서원을 두면 실제 성과는 자연히 있게 될 것이고 폐단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른바 귀신의 우사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천륜(天倫)입니다. 그 낳아준 바를 버리고 남에게 후사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 변고입니다. 옛날에는 오직 종가(宗家)에 후사가 없어야 이렇게 남의 자식으로 대를 잇게 하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종가(宗家)고 방계고 먼 친척이고를 따지지 않고 뒤를 잇게 함으로써 그 길이 매우 넓어졌으니, 이미 주공(周公)의 뜻에 어긋납니다. 이렇게 널리 만연되다 보니, 신주에 후사를 세워주는 풍속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옛날의 예법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귀신의 도리로나 사람의 도리로 보아도 대단히 공손하지 못한 노릇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종친(宗親)들을 화목하게 대하고 어진 선비들을 내세워주며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지와 같이 사물을 살려 주시려는 심정에서 출발한 것이고, 화육(化育)을 도우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도리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마치 정조(正祖)가 고 판서(故判書) 유몽인(柳夢寅)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후손을 세워준 것처럼 한다면, 의로운 발기가 만대를 내려갈 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을 맡은 신하가 물어 보지도 않고 자신이 사적으로 아는 것에 빙자하,여 그릇된 규례를 답습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이익을 좇아 어버이는 잊고, 확상(矍相)의 활쏘기에서 쫓겨난 무리들이 때를 타서 부합하여 자기의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를 끌어대었으며, 나아가서는 9대 조상이나 10대 조상들까지 끌어다가 기꺼이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대수가 비게 되면, 각 갈래의 귀신들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어 그 대수를 채우고 자기의 조상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하늘의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정에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끊어진 대를 이어주려는 전하의 본의는 그처럼 훌륭하였지만, 봉행하는 신하가 잘 받들지 못하여, 마침내 금지옥엽과 같은 후예로 하여금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어서 못하는 짓이 없어 오랜 역사를 더럽히고 있으니,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는 소급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윤리는 천하의 대륜(大倫)이며, 이 천지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토벌하는 것은 만대의 공의(公儀)이므로, 한 번도 사람이 사사로운 뜻으로 옮겨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속된 무리들이 멋대로 하여 사설(邪說)이 횡행(橫行)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정(邪正)을 묻지 않고 충역(忠逆)도 살피지 않고는, 그저 죄명에 걸려든 모든 사람들을 다 같이 신설(伸雪)해 주고 화기를 인도하여 맞이하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저 화(和)를 말한다면, 공평(公平)한 것이며 바른 것입니다. 하늘을 놓고 말하면, 비 오고 개고 춥고 더운 것이 각각 때에 알맞은 다음에야 화기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말하면, 기뻐하고 성내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모두 절도(節度)에 알맞은 연후에야 화기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비 오고 개고하는 것이 때를 어기거나,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혹 항상 비가 오거나 기쁨에만 치우친다면, 사리에 몹시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화평하고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설해 주어야 할 것을 신설해 주었다면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설해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신설해 주어도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까? 응당 신설할 것을 신설해 주지 않으면 물론 화기를 손상시키게 되고, 벗겨주지 말아야 할 것을 벗겨주어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신설해 준 사람들 중에서 신설해 주어서는 안 될 자들은 특히 나라의 역적들이며, 이 나라의 역적들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혼조(昏朝)의 한효순(韓孝純)과 기사년(1569)의 이현일(李玄逸)과 목내선(睦來善)입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륜(大倫)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의사에 따라 천벌을 주는 공정한 원칙을 어긴다면, 떳떳한 윤리와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화기를 이끌어다가 성궁(聖躬)에 복을 돌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성조(聖朝)의 독단이 아니라, 속류들의 사설이 해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고 변별하여, 법과 의리로 재단하여 용서할 것은 용서하되, 마치 화기로운 바람에 단비가 내리듯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당 죄를 주어야 할 자들은, 죄를 주기를 드센 우레가 울고 된서리가 내리듯이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륜을 세워 화기를 가져올릴 것이며, 만물의 운명을 바로잡아 많은 복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더없이 다행하게 되고, 만대를 두고 더없이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호전(胡錢)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엄하게 구별하며 통분함을 참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효종(孝宗)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전해준 심법(心法)으로써, 그 공로는 공자(孔子)나 주자(朱子)의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정(先正)이 오랑캐들의 물건매매를 금지하였던 일로 보면, 호전을 쓰는 것은 역시 옛적 회계에서 신하 노릇하고 첩 노릇한 수치를 잊거나, 음양의 향배(向背)에 관한 구분에 어두운 것이니, 정사에 펴서 일에 폐해를 끼친 것이 이미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은 전날에 벌써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할 것을 청한 바 있는데, 오랑캐 돈의 폐해는 당백전보다도 심합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모든 물건들이 유통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 돈의 폐해는 모든 물건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마치 속이 결리고 아픈 증세와 같아서, 배를 씻어 내리는 약을 써서 내려가게 하면 전과 다름없이 나아지지만, 오랑캐 돈의 폐해는 설사증과 같아서 원기가 날로 빠지는데, 그것이 다 빠지면 죽어버리게 되니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도로 보아도 그렇고 이해관계를 보아도 또한 이러하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다시 쓰는 문제는 단 하루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 성헌(成憲)을 변란시키는 몇 가지 문제는 실로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니, 모두 전하 자신이 초래시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을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이되게 되었고 오늘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이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론과 사설에 이끌리지 말고, 가까이 돌거나 권세 있는 관리들에게 속지 말며, 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욕심을 깨끗이 다하여 하늘의 이치가 유행되게 할 것입니다. 정령(政令)을 내려 조치함에 있어서 응당 집행해야 할 것은 사나운 우레나 바람과 같이 드세게 시행하며 응당 제거하여야 할 것은 제거하고, 쇠를 끊듯이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명령을 내려 조신(朝臣)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의혹함이 없는 원칙을 세우고, 덕을 수양하는 책임은 어진 스승에게 맡기고, 관리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며,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책임은 정승들에게 맡기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책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맡길 것입니다. 임금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사고도 하며 임금을 바른말로 깨우쳐주는 책임은 유신들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선발하며 외적을 막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맡기고, 돈과 곡식의 출납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는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을 뽑으며 선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감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 《중용(中庸)》에서 아홉 가지 의리에 대한 교훈과, 직분에서 벗어나 정사를 논하는 데 대한 《논어(論語)》의 경계(警戒)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도록 하소서. 이미 썩은 윤리를 다시 펴고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안정시킨다면, 백성들은 태평세월을 즐기게 되고, 종묘와 사직은 만년의 향사(享祀)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가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같은 임금이 되면, 대소(大小)와 원근 할 것 없이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미미한 신이 비록 시휘(時諱)에 저촉되고 뭇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천만 번 죽더라도 구구한 광영이 가문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신은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최익현은 서원 철폐, 만동묘 철거, 원납전, 호전 유통, 당백전, 남인 신원 등을 정면으로 물고 늘어지면서, 대원군의 정책에 돌직구를 날린 것은 물론이고, 아예 대원군의 섭정 자체를 맹공격했다. 온 조정이 경악하여 이륜두상 운운한 최익현을 국문할 것을 청했다. 완전히 겁에 질린 조정은 최익현을 난신적자(亂臣賊子 :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라고 맹공하면서도, 최익현이 대원군의 섭정을 대놓고 공격한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고종은 이에 "최익현이 옳은 말을 했지만 상소가 날 핍박하려 하니 국문하겠다"란 엉뚱한 이유로 최익현을 국문했는데, 그에게 형신(刑訊)도 가하지 않고 국문을 순식간에 끝냈다. 말이 국문이지 최익현을 보호하려는 쇼였던 것이다. 그리고 최익현이 시골 사람이라 뭘 몰라서 헛소리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고 끝내버렸다. 대원군이 공격당한 부분 자체가 논의 대상에 오르지도 못한 것이다. 그 지위에 있지 않은 종친이 된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양주의 별장에 칩거했다. 그리고 그의 복귀를 청하는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고종이 조정을 장악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부사과 이휘림이 고종에게 대원군을 달래 돌아오게 해야 한단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이런 미친놈!’이란 반응을 보이며 이휘림을 고금도에 위리안치했고, 조정은 이휘림을 죽여야 한다고 들끓었다. 그렇게 대원군은 완전히 실각한다.

드디어 실세가 된 고종은 상당히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최익현을 방면했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대원군 반대파인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했으며, 동시에 오랜만에 명망 높은 안동 김씨들을 불러들여 조정을 안정시켰다. 만동묘를 복구했고, 문세, 호전을 혁파했으며, 남인인 목내선, 이현일의 사면을 취소하고, 홍상간, 홍지해 등은 신원(伸冤)했다. 하지만 호포제, 사창제는 고수했고, 서원 복구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만동묘도 제사를 관가에서 주관하게 하면서, 만동묘의 권위조차 조정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대원군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영남과 성균관의 유생들은 대원군의 복귀를 요구하며, 고종의 친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여러 차례 벌을 주어도 이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지 않자, 고종은 고종 12년 5월 17일에 "대원군은 쉬려고 집에 간 것뿐인데 내가 불효자인양 말을 하는 것들이 많다. 없는 말로 날 다시 희롱하면 죽는다?"라고 엄한 경고를 했다. 그럼에도 불과 4일 후에 대원군을 복귀시키란 소가 올라오자, 유생들을 모조리 참수하라는 초강경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최응을 비롯한 대신들이 며칠이나 간청한 후에야 위리안치로 벌을 감해주었고, 의외로 서슬 퍼런 고종의 위세에 대원군 복귀 요구는 재야에서도 완전히 사라진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승지와 종친을 보내며 문안하며 자신이 불효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고, 오히려 존호를 바치고 대소사를 대비를 찾아가 묻는 등 신정왕후를 찾아 극진히 모셨다. 그리고 사방에 가득한 대원군의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발탁된 세력이 명성황후의 일가인 여흥 민씨였다. 그 중에서도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 민겸호의 위세는 대단했고, 민승호는 과거 김좌근이 그랬던 것처럼 조정의 실세가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민승호는 1년 후에 누군가가 보낸 폭탄에 의해서 가족들과 함께 폭살 당한다. 하지만 민씨 세도 자체는 고종의 비호 아래에 유지된다.

3.5 복권 시도

그러나 이렇게 권력에서 물러난 흥선 대원군은 얌전히 앉아있지 않았다. 일단 당장 실권을 잃었다고는 해도 대원군이 집권한 기간만 10년이다. 대원군은 본래 중앙 정권에서 밀려나 있었던 왕실 종친, 남인 등의 노론 이외의 사색당파 잔당, 차별받는 신분이던 서얼, 중인 등을 골고루 등용하고 끌어들였으며, 그 때문에 대원군의 세력은 사회 각층에 뿌리 깊게 널리 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왕의 생부'라는 위치는 고종조차도 대원군 자신을 제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흥선 대원군은 집요하게 복권을 시도했는데, 사실상 흥선 대원군이 살아 있을 때 조선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정변에 크건 작건 운현궁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부자간의 대립을 틈타 , 러시아,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강화할 기회를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개국 초에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내면서 시작된 조선 왕조는, 마지막 순간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몰아내려 반란을 일으키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모두 아버지가 지고 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일단 아들 고종을 몰아내고 쿠데타를 기도한다. 그러나 1881년의 이재선 사건은 중간에 걸리면서 일망타진, 서자인 이재선과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만 사형당하고,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면책.

그 뒤에는 장남 이재면을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실패. 이때는 이재면도 고종의 친형이었으므로 모두 면책. 그 뒤엔 손자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고 기도한다. 손자 이준용은 아버지나 삼촌들과는 다르게 적극적이고 호탕한 성격이라 대원군과 죽이 잘 맞았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잠시 재집권해 개화 기구를 폐하고 군대 구조를 예전과 같이 돌리면서 권력 회복을 꾀했지만, 청에 영선사로 가있던 김윤식이 청에 연락하면서 들어온 청군이 그를 청으로 압송해간다.[55] 재집권 33일만의 일이었다. 임오군란 때 형 이최응은 시위대에게 맞아 죽는다.유배시 사진.[56]

1885년 러시아와 연결하려는 민씨 정권을 견제하기 위한 청의 의도로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민씨 정권의 견제 때문에 정권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1887년 청나라의 원세개와 공모,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면(흥친왕)을 또 다시 옹립하려다 실패했다. 여기까지 이미 쿠데타 시도만 3번째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고종과 대원군은 크게 척을 지게 되고, 고종은 왕족을 측근에서 배제한다. 이후에도 대원군 계파는 고종의 반대세력으로 움직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연계하여 정권을 잡으려다가 실패하였다.[57] 이와 관련해서 영선군을 추대하려다 실패, 이준용은 사형선고까지 나왔는데 흥선대원군이 필사적으로 구명활동을 벌여서 유배형으로 감형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제1차 갑오개혁 때 일본이 흥선 대원군을 집권시켰으나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그저 민중들의 반발을 조금이라도 막아보고자 얼굴마담으로 내세웠을 뿐, 이후 2차 내각이 구성되면서 흥선 대원군은 물러나게 된다.

3.6 을미사변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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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에 끌려간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말년의 초상. 부산광역시 동아대학교 소장.#
뒤에 보듯 베트남 관복 사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유길준의 주장에 의하면 1894년 흥선대원군영선군 이준용[58]은 함께 자주 비밀스럽게 일본 공사관에 출입하며 명성황후를 폐출하는 데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 공사는 거절. 1895년에도 흥선대원군영선군은 함께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의심되는 유길준 한 명의 주장에 근거한 것으로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 부분이다. 또한 당시 대원군은 장손 이준용이 유폐된 이후로는 공덕동의 별장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무튼 말이 씨가 된다고 일본은 명성황후 살해 계획을 세우고 일본에서 낭인[59]들을 불러온다.

한국 땅을 처음 밟는 일본 낭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회, 우범선[60], 이두황 등 3대대장과 전 군부차관 이진호 등이 협력하고, 개화파 거물 유길준까지 가세하면서 일본낭인들은 반나절도 안 돼 한성에 들어왔다.[61] 이들은 한성에서 일본 수비대와 합류하여 경복궁으로 침투하였고 그 과정에서 궁궐의 수비대를 살해한 뒤 명성황후도 살해했다.

흥선대원군은 1895년 을미사변 때 갑작스레 궁으로 끌려갔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을미사변이 있기 며칠 전에 일본 공사 오카모토가 칩거 중인 대원군의 집에 찾아가 을미사변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해 각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으로는 대원군과 고종이 궁중을 감독하지만, 내정에서는 내각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내용 등으로 인해 민씨 정권에 반대되는 세력인 흥선 대원군을 범인으로 몰아넣기 위한 일본의 음모라는 시각이 주가 되었으나 유길준은 그가 일본대사관에 수시로 찾아가서 며느리를 죽여 달라고 사주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박은식은 그가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조자로 지목하고, 감정이 인간의 양심을 가렸다며 비토하였다.[62] 유길준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명성황후 암살을 일본인과 상의한 건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유길준은 친구 윤치호에 의해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지목받았다. 이 때문에 대원군이 을미사변에 대해 묵인 혹은 이용당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나, 주동자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1898년 1월, 부인 민씨의 죽음[63]을 보고, 그도 2월에 사망. 을미사변의 일로 고종과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이라, 고종은 장례식에 참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64] 정확히는 고종의 형 흥친왕이 알리지 않았다고 하나, 알렸을 때의 후환이 두려워 안 알렸다고 하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운명하기 직전 대원군이 한 말은 "주상이 보고 싶구나. 아직도 오직 않았는가"였으며 그 때도 연신 고종을 찾았고 세상을 떠난 곳은 운현궁이 아니라 경기도 공덕리, 오늘날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었던 별장 아소당에서 향년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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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장례식

묘소는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당시는 양주군)에 있는데, 골목과 산길을 따라 들어가야 해서 찾기가 조금 어렵다. 대원군 묘는 이장을 자주 했는데, 처음에는 사망한 곳인 아소당 별장 뒤뜰에 묻혔다가, 다시 정식으로 양주군 시둔면으로 이장, 그 후 서울 공덕동, 1908년 파주로 이장했다가, 1966년에 그 자리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되어서 오늘날의 자리로 이장한 것. 총 4번의 이장을 거쳤다. 흥선대원군의 묘역을 '흥원(興園)'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대원군뿐만 아니라 흥친왕 이재면, 이준용 등 대원군의 다른 가족들 묘가 함께 있었다. 하지만 2005년경에 대원군 가족들의 묘를 이장하여 화장시켜 한 곳에 모아 놓았다.

그래서 흥원을 방문하면 무덤을 파낸 흔적이 남아 있는 묘터가 남아 있고, 온전히 남아 있는 무덤이 한 기 있는데, 온전한 이 무덤이 바로 흥선대원군의 묘이고, 다른 가족들의 납골묘는 이재면의 묘가 있던 자리에 함께 모셔 놓았다. 나머지 석물들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흥원을 가려면 경춘선 마석역에서 내리면 역 주변에 여기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다. 마석역에서 도보로 대략 15~20분 소요. 다만 가는 길이 은근히 복잡하니 주의할 것.

참고로 대원군 묘로 가다 보면 대원군 묘로 가는 숲길 중간에 길을 막고 있는 철문을 볼 수 있는데, 철문 옆으로 통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막아 놓았다거나 통행금지 구역이 아니니까 혹시 대원군 묘를 방문하는 위키러가 있다면 여기서 발길을 돌려서 허탕치지 않도록 하자.

4 개혁에 대한 평가

호포제와 서원 철폐는 이전부터 의견이 있었고, 사창제의 실시와 의정부, 삼군부의 설치는 과거에 있었던 제도를 다시 쓴 것뿐이기도 하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만의 개혁'은 없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시대적인 면이나 주위 국가와의 상황, 기득권층의 입장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당연해 보이는' 개혁들을 하지 못했던 것들이 세계 역사에서 하나 둘이 아니다. 흥선 대원군만의 개혁이 없다고 할지라도, 앞서서 나왔던 제도를 수렴하고 잘못된 관제를 바꾼다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강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특히 호포법과 서원 철폐[65]는 그와 관련된 폐해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음에도, 조선 후기 200여년간 세금 더 내기 싫어한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한 법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

그런 점이 아니더라도 그의 개혁은 과거 지향적인 면이 강했고, 근대 지향적이지 못한 왕권의 강화를 추진했다는 점 때문에 그를 비판하는 세력도 많다. 더군다나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쳐 외국과의 수교를 거부한 탓에, 결국 조선이 열강들에게 휘둘리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비판 의견도 강하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수교와 개방을 하기에는 너무 조선이 뒤쳐져 있어 쇄국정세를 유지하면서 발전을 꾀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오늘날 후진국들이 불안한 국내사정과 부족한 생산시설, 외부의 영향에 견디기에는 작은 시장 등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개방을 하다가, 식민지 시절과 다름없을 정도로 착취당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외국과 통상을 하려면 통상하다가 종속되어 먹혀버리지는 않을 정도의 준비는 있어야 한다는 것.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의 교류는 나라의 부가 빨려나가며 사다리 걷어차기에 당할 뿐이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이득이 없다면 끈질기게 통상을 요구했을 리도 없다. 물론 흥선 대원군이 그걸 노리고 쇄국정책을 고수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리고 통상수교를 거부한 것은 대원군이 꼭 수구꼴통이래서가 아니다. 통상하고자 하는 외국 세력이 부정적으로 무례한 행동을 도발하여 서양인들은 믿어서는 안 되는 종족이라는 생각이 대원군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 원래 이양선이 출몰했을 때 조선은 군자의 나라답게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이나 물품을 제공하여 돌려보냈다. 그러나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제네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등을 통해 그들이 먼저 도발하고 무례하게 행동하자 "서양인들은 예의도 없고 상종도 못하는 놈들" 이란 인식이 퍼진거였다.

하지만 세도정치를 종결시키고 정상적인 정치 제도와 조세 제도를 복원시켰다는 점만으로도 흥선 대원군은 나름대로 업적을 인정받을 만하다. 국제정세에 완전히 어둡지도 않았고 또한 여론에 상관 않는 소신 있는 추진력은 조선 왕조 내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이러한 점들로 인해 흥선 대원군을 좋게 보는 사람이 많다. 특히 호포법과 서원 철폐 등을 사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실현시킨 것을 통해, 근래 개혁군주라는 평을 받는 정조보다는 흥선대원군이 더 개혁적이 아니었냐고 하는 시각도 있다. 정작 정조가 실현시킨 개혁 정책은 별 거 없었으니

그리고 흔히 잘 알려진 집권 이후 (신)안동 김씨를 살려준 것은 그가 딱히 관대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신)안동 김씨와 정치적인 거래를 한 것도 있었고, (신)안동 김씨가 그나마 능력 위주로 집안을 관리했기 때문에,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행정에 능숙한 엘리트들도 많았다.

더욱이 대원군 자신부터가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천명했으므로, (신)안동 김씨를 싸그리 없애는 것은 자신의 명분도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신)안동 김씨의 행정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현실적, 정치적 안배가 들어있는 조치라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앞서 대원군의 집권과정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종의 즉위는 (신)안동김씨의 동의가 없으면 불가능하였고,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편에선 것이 병자 돌림의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안동 김씨를 완전히 몰아내면 조대비의 풍양 조씨가 다시 단독 최대 파벌로 떠오른다. 그야말로 풍양 조씨만 좋은 꼴이고, 조대비의 의도대로 (신)안동김씨 학살 + 고종의 왕비가 풍양 조씨가 되는 루트가 되었다면, 이건 풍양 조씨가 종친인 전주 이씨와 손잡고 세도정치를 재현하는 꼴이 될 뿐이다. 때문에 집권 직후 풍양 조씨의 대두를 막을 세력으로 (신)안동 김씨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신)안동 김씨가 그를 포함한 왕족들에게 그렇게까지 나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이하전의 사례는 (신)안동김씨가 악질이거나 그 시대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원래 조선시대 종친에 대한 전체적인 대우에 불과했다.

그리고 천주교 박해 당시에도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마라는 명을 내렸고 실제로 어린아이들은 사형당하지 않았으나[66] 하지만 부모 양쪽을 다 잃을 경우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했는데 왜냐하면 화를 입을까봐 두려워서 친척들이 외면했으므로.

4.1 경복궁 중건에 대한 평가

나라 바로세우기 및 왕권강화 차원에서 이뤄진. 경복궁 중건 사업은 후대에 있어선 분명한 업적으로 분류된다.

그 당시엔 모르겠지만 역사가 지나고 나서 봤을때 아주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것들이 있는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 바로 그런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진시황이 만든 만리장성 구스타프 에펠이 만든 에펠타워 전부 그당시엔 비판을 받았지만 역사가 흐른뒤엔 그 나라의 랜드마크로서 칭송을 받는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광화문과 경복궁 그리고 그 복원공사가 이뤄 질 수 있는 것 또한 흥선대원군때 이뤄진 경복궁 중건 덕분이다.
EBS 신병주교수님의 역사이야기 편 참조

중건하는 도중에 운이 없었는지 초기엔 신분차별없이 걷은 원납전을 통해 자금을 충족하고 부역도 신중하게 정한데다 위로금도 지급하여 순탄하게 건설되었으나 중건 시작후 1년쯤에 화재로 그동안 만들어놓은 전각과 왕릉에서 벌목해 쌓아놓은 목재가 전소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대원군이 총지휘자이었기에 완성을 위해 목재를 다시 구하고 자금을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까지 만들게된 원인이다.

4.2 비판

다만 이 모든 것은 문제 하나를 장점 하나로 상쇄한다는 식으로 해석했을 때 이야기다. 그리고 정치적 의미에만 집중한 것도 있다. 단적으로 대원군은 호포제를 개혁하고 서원을 철폐하는 등의 개혁을 했다. 하지만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의 왕권강화책도 사용하였다, 라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경복궁을 짓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 개혁으로 인한 백성들에 대한 플러스 수치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클까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연구가 없다.

각주들이 추가되기 전의 경복궁 중건에 대한 평가는 원납전당백전을 사용할 정도로 과하게 진행된 시대착오적 왕권강화책 정도가 고작이다. 국사 교과서에도 대충 이 정도로 적혀 있다. 하지만 각주에도 적힌 것처럼 경복궁 중건은 평시 조선조정 1년 예산의 12년치 분량의 자금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경복궁 타령》이 유행했을까…[67]

이 와중에 병인양요가 터졌지만, 이건 꾸준히 진행되었다. 건축에 집착하는 군주들은 대체로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갔는데 이런 식으로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군주는 우리나라보다는 중국 쪽에 특히 많다. 진시황, 수양제가 특히 유명하며, 삼국지에도 잠시 등장하는 손호도 이에 해당된다.

백성들 뿐 아니라 조선왕실도 정부고관들도 원납전이라는 형태로 돈을 내놔야 했고, 이걸로 부족해서 강제로 걷어야 했다. 호포제의 실시도 이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며, 결두전[68]을 포함해서 온갖 잡세가 다 등장했다.[69]

이걸로도 부족해서 생각해낸 것이 앞서 언급된 당백전과 청전의 발행이다. 당백전은 기존의 상평통보에 비해서 6/100 정도의 악화였는데도, 2년만에 1,600만냥의 가치의 돈이 풀렸다. 이로 인한 문제는? 당시는 실질화폐의 시대이다. 명목화폐를 사용하고 싶었다면, 조선정부가 당백전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야 실질적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이게 아니면 조선정부가 1,000만냥 이상을 조선 전체에서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원군은 당백전 유통을 위해 조정에 내는 세금도 당백전으로 내라고 명령했지만, 이게 이상하게 작용되어 지방 수령들은 상평통보나 아예 실물로만 세금을 받은 다음에, 명목가치에 해당하는 당백전으로 조정에 상납하여 수령들 배만 엄청나게 불렸다. 결과적으로 조선 조정이 양화인 상평통보를 빨아들이고, 악화인 당백전의 유통비율을 높인 것이다.

더구나 기존의 상평통보의 총액은 1,000만냥 정도에 불과했으니, 인플레이션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자연스럽게 상평통보는 창고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이다. 그리고 2년 만에 당백전은 폐지된다. 무려 1,600만냥이 폐지되었다. 폐지된 당백전은 유통이 불가능하고, 녹이기라도 하면 국법으로 처벌되었다. 당백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호구, 빵셔틀이 된 것. 이에 구제책으로 조선 조정은 당백전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교환비율은 당백전 1개로 상평통보 또는 청전 1냥. 그렇게 회수한 당백전은 녹였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애초에 당백전으로 돈놀이해서 번 돈이 사라지면 재정압박이 강해지지 않겠는가. 이걸 대비한 것이 앞서 언급된 청전(淸錢)이다. 애초에 청전은 각주에도 언급되었지만 밀수품이었다. 당백전이 워낙에 말도 안 되는 악화이다 보니, 그보다는 볼만한 돈으로 시선이 몰렸는데, 그것이 바로 청전이다. 청전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1/3. 이것도 악화란 소리다.

이러니 상평통보가 창고 밖으로 나올 일은 여전히 없다. 애초에 당백전에 비해서 양화(良貨)란 것이지, 어차피 상평통보 대비 악화인 청전은 비율이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유로 대원군 퇴임하는 그 시점까지 사용되었다. 이게 안정적으로 유통되었다는 소리도 하는데, 자기나라 돈의 화폐 유통 체계를 개판으로 만들고, 밀수된 외국 화폐를 정식 유통하는 것이 무슨 놈의 안정인지도 의문이지만, 이건 이것대로 문제이다. 청전의 유통도 400만냥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다시 시작되었고, 대원군의 돈놀이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청전은 경복궁 다 지은 이후에도 유통이 금지되지 않았다. 청전의 유통은 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런 화폐사기극과 그로 인한 초(超)인플레이션은 가혹한 조세수취보다도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정부시책을 따라서 당백전이나 청전을 사용하는 이들만 손해를 보고, 상평통보를 자기 창고에 쌓아두었던 이들은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관북지방과 영남지방에서는 앞서 언급된 것처럼 애초에 당백전이건 청전이건 사용하지 않았다. 정부시책이 안 먹힌 것이고, 부작용이 기호지방과 특히 한양에 몰빵이 될 것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연 실질가치의 1/3인 악화를 유통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금을 거둬들이는 쉬운 방법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빨아들인 최대의 블랙홀인 경복궁 중건에 시대착오적 왕권강화책이란 명분은 차라리 부차적일 정도이다. 정부의 재정적 한계와 국가의 경제적 화폐적 기반을 뒤흔들 정도의 뭔가를 진행했다면, 그게 왕권강화책이건 민주주의의 상징이건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재정문제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악화를 통한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화폐불신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국 악화를 폐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후폭풍은 악화를 폐지하는 시점에서 몰아치게 된다. 그게 바로 고종의 친정 초기이다. 황현은 자신의 일기 매천야록에서 대원군이 10년을 쌓아둔 재정을 고종명성황후가 1년만에 탕진했다고 기록하면서, 고종 부처를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면, 이미 파탄지경이었던 조선 재정상황에서, 모든 자금을 빨아들인 블랙홀 경복궁 중건을 거친 대원군이 도대체 무슨 수로 재정을 쌓았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되는데, 이 경우의 해답은 대원군이 치트키라도 입력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는 청전과 당백전 유통의 이익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결국 이 모든 환투기 수단을 폐지하고, 조선왕실이 스스로 불러온 인플레이션을 정면을 맞이하게 되는 고종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재정파탄으로 가게 된다.

우선 청전이 폐지되었으므로, 당연히 인플레이션은 정반대로 디플레이션으로 전환되게 되고, 이 여파가 더해지면서 조선 정부는 세수확보에 발악을 하게 된다. 그런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운요호 사건 시기이다. 대원군이 재정을 동원해서 강화했던 하지만 결국 발악에 가까운 응전이 떼몰살로 이어지긴 했었던 강화도 병력의 주 수입원이었던 경강수세마저 중앙정부 유지비용으로 들어가고, 강화도 병력들이 별다른 응전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황현과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대원군이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과정과 고종 초기에 적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이전 관념으로 상상해서 집어넣는 것이다[70]. 그러니 기존 관념을 가진 사대부나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대원군이 돈 많은 이유야 호포제 등을 실시해서 그럴 것이고, 고종이 돈 없는 이유야 사치를 통해서 돈을 많이 써서 그렇겠거니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전 세계 어느 지식인이라 해도, 극소수 경제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가끔 고종이 호포제를 폐지했단 말이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대원군의 호포제부터 양반과 평민의 세율에 차이를 둔 불안정한 것이었거니와,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린 고종이 그나마 안정적인 세원(稅源)인 호포법을 폐지할 리가 없다. 실제 완전 균등과세는 갑오개혁 시기에 완성되고, 그 이전은 대원군의 세수체제가 그대로 이어졌다.

대원군 실각 이후 호포제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가 빗발치긴 했는데, 고종은 미친 소리 말라며 다 씹었다. 서원 철폐와 사창제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박규수를 비롯한 대원군계 사람들도 중용되었다. 서원 복구 주장엔 "너네들은 서원 없으면 선현을 존경할 수 없을 정도의 놈들이니?"라고 비웃었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라고 대놓고 디스했다. 나중에는 승정원에 명령해서 개혁 철폐 관련 소는 아예 퇴짜를 놓게 했다. 고종이 대원군 반대 유림들의 말을 들어준 건 딱 하나 만동묘 복구인데, 그나마도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의식의 제관을 지방 수령에게 맡겨서 유림들이 손을 댈 여지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퇴위 이후의 활동은 흑역사에 가까운데, 정권을 다시 획득하기 위해서 꾸준히 쿠데타 시도를 하였다. 국왕의 생부라는 점에서 재집권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지만,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대리청정이 끝나게 된다면, 대원군은 물러나서 후견인으로만 존재하는 게 합당하다. 하지만 대원군은 세종 초기 태종처럼 상왕에 가까운 위치에서 집권하려고 하였으니, 국왕인 고종의 측근세력과 대립한 것은 당연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왕실내부의 문제는 외국 세력들이 꾸준하게 이용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더욱이 이때 대원군의 행보를 보면 정권 장악에 도움이 될것 같다면 그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는등, 원칙도 없고 극도로 기회주의적이었다. 강경하게 척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답지 않게 일본 세력과도 기꺼이 연계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혹심하게 탄압했던 천주교 쪽에 손을 내미는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결국 대원군과 고종의 대립과정에서 왕족은 분열되었고, 고종에 대립했던 대원군계파는 황당하게 이후 친일로 넘어가버린다.[71] 사실 고종의 친정 이후, 고종과 대원군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사실상 부자 관계는 남아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 원수가 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5 인물됨과 일화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평지로 만들고,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고자 하는데,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吾欲引千里爲咫尺, 吾欲剗泰山爲平地, 吾欲高南大門三層 於諸公何如?)

그 외에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거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용서할 수 없다." 두 발언이 유명하긴 하지만,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권력에서 물러난 후, 그가 거처한 궁이 바로 운현궁이다.

그를 부르는 호칭은 꽤 다양하다.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대원위합하(閤下)" 등. 말년에는 "국태공저하(國太公邸下)"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조선시대 백성들은 유명한 재상급 인사들을 부를 때 그가 사는 곳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운현대감(雲峴大監)'이라고도 불렸다.

노련한 정객답게 뛰어난 화술(話術)을 가졌으며, 음담패설의 달인으로 좌중을 자주 웃음바다로 만든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대원군 개인적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좋아했다고. 조선 후기를 풍미한 인물답게 그 재치나 언변과 관련한 많은 에피소드가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다만 본문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흥선대원군 일화는 거짓일화가 많다. 가장 큰 이유는 김동인의 소설 속 창작들이 실제 일화인 것처럼 퍼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 《국태공의 귀환》, 《젊은 그들》의 내용을 모아놓으면,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긍정적인 흥선대원군 상이 거의 정립될 정도로 흥선대원군 위인전 작가들이 복붙을 해댔다. 그리고 근대화도 싫고, 버젓이 왕이 있는데도 명성황후가 설치는 것도 싫고, 일본은 더 싫었던 당시 양반들이 그나마 긍정적으로 밀어준 것이 대원군이라서 이쪽 관련해서 미담들을 대원군과 연관시킨 것도 많다. 결국 재미로만 보고, 실제로 이 일화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야사의 한 떡밥을 여러 위인이 돌려 먹는 사례가 너무 많기도 하지만.

일화들 속에서는 대인이나 쿨가이로 등장하거나 벼슬셔틀 올려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 대원군이 젊었던 시절 기생 춘홍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옆자리의 군금별장 이장렴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이때 이장렴은 이하응의 뺨을 후려치면서 "한 나라의 종친이 창가(娼家)의 외상술이나 먹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72]. 뒷날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이장렴을 운현궁으로 불러, "아직도 내 싸닥션 한번 갈겨볼 테냐?"고 묻자 이장렴은 당당하게 "대원위께서 기생의 집에 드나들 때처럼 행동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원군은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며 술상을 차려 이장렴을 대접했다고. (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여봐라, 금위대장 오셨으니 술상 차려라!"라고 했다고도 한다.) 대원군도 대인배지만 이장렴도 꽤나 용자인 듯.[73]
  •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청의 사신은 조선의 경복궁을 둘러보고, 이거 짓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대원군에게 물었더니 대원군은 약 3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하자 청의 사신은 "이 정도 건물은 우리나라는 1년이면 뚝딱 지어낸다"며 어라? 요놈봐라? 대원군을 벙찌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보더니 청의 사신은 또 이 궁궐 짓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는데 대원군은 1년 정도 걸렸다고 대답했다. 이번에 사신이 또 "이 정도는 몇 달이면 다 짓는데 ㅋㅋㅋ"라며 이 새퀴가...또 대원군을 열받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숭례문에 다다르자 사신이 또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였는데 대원군은 이런 대답으로 사신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이 문은 오늘 아침에는 없었소이다!"[74]
  • 전라도 영광에 살던 한 선비가 대원군에게 벼슬자리를 청하고자 운현궁을 방문했는데, 선비는 대원군을 보고 절을 올렸다. 대원군은 그냥 선비 하나가 자신에게 인사나 드리러 온 줄 알고 대충대충 대했는데, 그러자 선비는 다시 한 번 대원군에게 절을 올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절을 두 번 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나 하는 일이다. 열받은 대원군은 "너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무슨 막돼먹은 행동이냐?"라고 화를 내자 선비는 천연덕스럽게 "처음 절은 인사를 올리는 절이었고, 두 번째 절은 이만 물러가겠다고 올린 절이었사옵니다"라고 받아쳤다.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대원군은 이 선비에게 한 자리를 내려준 이야기는 대원군의 일화 중 유명한 편.[75].
  • 어느 날 대원군에게 한 무관이 찾아왔는데, 때마침 조 대비(신정왕후)의 친척이 찾아와 청탁을 했다. 조 대비의 친척은 대원군에게 "마침 백천 군수 자리가 비었다니 그 자리에 저를 앉혀 주십시오"라고 했는데, 친척이 말한 황해도 '백천'은 한자로 白川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배천'이라고 읽었다.[76] 어이가 없어진 대원군이 기본도 모르는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도중 방 안에 방귀 소리가 났다. 그 방귀는 무관이 뀐 것이었는데, 무관은 자신이 뀐 줄도 모르고 친척에게 "어느 안전이라고 큰 방귀 소리를 내느냐"며 성을 냈다. 그런데 이 친척은 아무 변명도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와서 식사를 들게 했는데, 친척은 또 체면치레 하느라고 좀처럼 음식을 먹지 않았고 무관은 "제가 가난하게 살아서 이런 진수성찬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며 맛있게 음식을 다 먹었다. 그러고 대원군에게 "제게 늙으신 부모가 있는데, 집이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배천 군수 자리가 비었다고 들었는데 소인을 거기 보내주시면 열심히 일하며 부모님을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배짱 좋게 말했다. 대원군은 이 무관이 마음에 들었는지 즉석에서 그렇게 하도록 힘써 주겠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조 대비의 친척이 "대원위대감, 제가 먼저 부탁드렸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묻자 대원군은 이렇게 말했다. "제 밥그릇도 찾아먹지도 못하고, 방귀 뀌지 않고서도 방귀 뀐 것처럼 있었고, 자기가 원하는 곳의 이름도 모르고. 어찌 자네 같은 자를 군수로 쓸 수 있겠는가!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 하루는 대원군이 별장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는데, 별장 밖에서 어떤 노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무료했던 대원군이 그 노인과 함께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종자를 시켜 그 노인을 불러오고는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물었는데, "저 앞에 사는 장가이며 아직 환갑은 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대원군이 "심심한데 바둑이나 한판 두세. 바둑 둘 줄 아는가?"라고 묻자 그 노인은 둘 줄 모른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장기를 두자고 했는데도 이것도 둘 줄 모른다고 했다. 대원군이 "그렇다면 자네 고누놀이[77]는 할 줄 아는가?"라고 묻자 이 노인은 그것도 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고 만다. 싫증이 난 대원군은 결국 그 노인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이 이야기가 장안에 퍼지자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고 한다. "그 노인도 참 멍청하구만. 어떻게든 대원위대감의 무료함을 풀어드렸다면 무슨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었을 텐데 말이야"[78]
  • 어떤 선비가 대원군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운현궁을 찾았다. 그런데 이 선비가 좀 '아는 척, 잘난 척'을 했는지 대원군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원군이 문득 "자네 처가가 어디인가?"라고 묻자 선비는 또 있어 보이게 말하려고 문자를 써서 "황문(黃門)에 취처(娶妻)하였습니다(=황씨 문중에서 아내를 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대원군 왈, "항문[79]이라니. 자네는 똥구멍에 장가를 들었단 말인가?" 선비는 결국 데꿀멍하고 버로우.
  • 대원군이 되기 전 불우했던 시절에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그 집에 땔나무를 해다 준 한 나무꾼이 있었다. 이를 잊지 않던 그는 대원군이 된 후, 이 나무꾼을 운현궁 연회에 초대했는데, 조정의 고관들과 장안의 부호들까지 초대했고, 이 연회에서 자신이 상석에 앉고 자신의 바로 옆에 그 나무꾼을 앉혔다. 그리고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그간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면서 앞으로도 나무를 해다 줄 거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지 않을 거면 고개를 저으라고 하자 나무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뜬금없이 대원군이 귓속말로 나무꾼에게 "자네 어머니께 내 수청 좀 들게 하게"라고 말하자, 깜짝 놀란 나무꾼은 고개를 저으면서 안 된다고 했고 그래도 대원군이 계속 이 청을 하자 결국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연회장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대원군은 이 나무꾼을 버선발로 쫓아가며 청을 했으나 나무꾼은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다음날 이 나무꾼의 집에는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가져온 부호들이나 고관들의 하인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연회석에 있던 고관들이나 부호들이 '대원위께서 저리 간청하는데도 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저 사람은 분명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실력자거나 대원위의 측근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나무꾼에게 아부할 생각으로 재물들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즉 대원군은 자기 재물은 한 푼도 안 쓰고 그 나무꾼에게 보답을 한 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씁쓸한 에피소드다
  • '2대에 걸쳐 제왕이 나올 명당'에 자리 잡은 가야사를 불 지르고, 거기에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쓰기로 했는데, 이장하기 전 형제들 모두가 신인이 '내 본진 건드리다니 니네 다 끔살'하고 협박하는 꿈을 꿨다. 다른 형제들은 덜덜 떨었지만, 흥선군만은 '여기가 진짜 명당인가 보다! 까짓 거 한 번 죽고 말지!' 하고 흥분해 이장을 고집했다. 또한 무덤 자리에 돌이 깔려있어 도끼로 찍어도 불꽃이 튈 뿐 깨지지 않았는데, 흥선군이 하늘에 대고 "나라고 왜 임금의 아비가 되지 못 한단 말인가!"하고 외치고 도끼질을 하니 그제야 돌이 깨졌다고 한다. 패기 쩐다 하지만 이게 결국 화를 입게 되었는데, 명당이라고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다만 그 다음 이야기는(…)
  • 인왕산 인근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을 강탈(?)한 야사도 유명하다. 석파정은 본래 안동 김씨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의 별장이었는데, 이미 당대부터 수려한 경치와 건물로 유명했다. 이에 석파정을 가질 욕심을 가지게 된 대원군은 집권한 뒤 한 가지 묘수를 고안해 냈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을 석파정에서 하루 기거하게 한 것이었다. 조선의 관례에 따르면 임금이 하루라도 머문 장소는 일종의 불가침 장소가 되어서 신하가 머물 수 없었고, 결국 김흥근은 눈뜨고 대원군에게 석파정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별장의 이름 또한 대원군 자신의 호인 석파(石坡)를 따서 붙였다는 이야기.
  • 본인부터가 사군자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은 예술가이기도 했던 만큼 당대 문화, 예술의 애호가이자 스폰서후원자이기도 했다. 판소리를 대단히 좋아해서, 운현궁엔 전국의 내로라하는 소리꾼들이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현대의 판소리를 정립한 신재효와 그의 여제자인 진채선도 운현궁에서 소리를 기가 막히게 불러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고.

그 외 많은 화가들도 운현궁에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남사당패까지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이 당시 남사당패에 '바우덕이(한자로는 김암덕金巖德)'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유일한 남사당패 꼭두쇠(남사당패 대표쯤 된다)로 5세 때부터 남사당패에 들어가 뛰어난 기예로 유명했으며, 경복궁 증건 현장에서 공연한 후 흥선대원군이 당상관 벼슬의 인물들이 쓰는 관자[80]인 옥관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이후로도 1860년대에 전국을 돌며 리사이틀공연을 펼쳤으나, 불행하게도 1870년에 23세로 폐병으로 요절했다.

대원군으로 실권을 잡기 직전부터 '천하장안(천희연(千喜然), 하청일(河淸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必周)의 성을 딴 것)'이라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 것으로 유명하며, 대원군이 된 이후에도 흥선대원군의 심복으로 활약했다.

의정부 경전철 흥선역은 흥선대원군의 군호인 '흥선'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역 주변에 흥선광장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것은 역 주변에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직곡산장터가 있기 때문.

5.1 석파란(石坡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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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그린 묵란(墨蘭)

당대 명필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에게 직접 배운 을 잘 그렸다고 하며, 붓을 세 번 틀어 잎을 그리며 그 끝이 쥐꼬리처럼 튀는 특징이 유명하다. 흥선대원군이 친 난초를 따로 일컫는 말로 그의 호인 '석파'를 따서 '석파란'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동명의 소설도 있다. TV쇼 진품명품에도 가끔씩 나온다. 물론 위작으로 밝혀진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이걸 반영해서 '난을 치는 흥선대원군'은 사극이나 소설, 기타 창작물에 등장하는 대원군의 필수요소. 특히 심기가 불편하면 화로에다가 잘못된 난을 불태우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특히 실각 후 청나라에 잡혀가 있을 때 난을 치며 소일했기에 청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퍼져, 청나라 사람들도 석파란을 많이 받아갔다고 한다. 의외로 진품 석파란은 중국에 더 많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위조작이 많다고. 독립운동하시는 분들이 자금을 벌기 위해 일부러 그린 가짜(그런데 위조작 파는 화가들이 '독립운동' 운운할 수 있지 않을까?)도 있다고 한다.[81] 이때 석파란을 위조한 사람 중에는 오세창 같은 저명인사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오세창은 자신의 그림을 추사 김정희의 것으로 위장해서 판 적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오세창의 석파란 위조설은 이것과 관련해서 제기된 설이다. 오세창은 추사의 그림이나 글을 위조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고 알려졌는데, 흥선 대원군은 추사의 제자였기 때문에, 추사 그림의 특징을 잘 이해한 사람이라면 쉽사리 위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하도 난초 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귀찮아진 번거로워진 대원군이 자신과 함께 추사의 그림을 배운 사람들을 시켜 난초를 치게 하고, 낙관만 자기 것으로 찍어서 내준 적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석파란이라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조사 결과 추사의 그림과 글씨를 따른 화가들인 노천 방윤명(1827~1880)이나 소호 김응원(1855~1921) 등이 친 난초고, 낙관만 대원군 것으로 밝혀진 그림도 적지 않다.

특히 방윤명에 대해서는 《홍약루속회인시록(紅藥樓續懷人詩錄)》에도 "방윤명은 난초 외에 매화도 잘 그렸으며, 묵란화가 대원군의 화법과 유사하여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오세창 역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석파노인이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난초를 그려달라고 하면 노천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 노천이 그 필체를 꼭 닮아 세상에서 구별할 수 없었으니, 오늘날 석파란이라 유행하는 것은 이 사람이 그린 것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김응원의 경우는 출신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대원군의 종자였다는 설도 있다.

6 내외 유명인들의 평가

프랑스에서 그린 초상

인물은 인물이었는지, 당시 외국에서도 제법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선의 정치가였던 셈. 외국인들의 평가를 대충 종합해 보면, 과격, 완고, 보수적이지만, 투쟁적이고 카리스마를 갖추었으며 능력도 있었던 정치인 정도로 귀결된다.

한편 청의 실권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보고서는 임오군란(1882년)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악하다'고 했다가, 2년 뒤 갑신정변 직후에는 '조선인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만은 효웅(梟雄)이다'라거나 '그의 재기(才器)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극찬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나 외국 사신들의 기록에 의하면, 키는 작고 얼굴은 얽었으나 그 목소리나 품행이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평했다.

미국인 선교사로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흥선대원군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석파(대원군의 호)는 개성이 강하면서도 오만한 기질을 가진 남자였다. 백성들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항상 존경했다. 그는 아마도 한국의 정치 무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매사에 반항적이었으며,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관계없이 자신이 의도한 바를 관철해 나아가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대원군이 사망하자 당시 주한 미국공사였던 알렌은 국무장관에게 한 보고에서 대원군을 이렇게 평했다.

대원군은 잔인하고 배타적이었으나, 항상 자기 나라에 대해 정의와 진실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인들과 손잡고 왕비를 시해할 때까지 그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국민 대부분은 그가 다시 권좌에 오르기 바랐습니다. 최근에 그의 부인이 사망했는데, 이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898년 미국의 언론지인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서는 "강철 같은 의지와 확고한 목표를 가졌던 인물"이라고 했으며, 역시 미국의 언론지인 《보스턴선데이포스트(Boston Sunday Post)》지에서는 대원군을 가리켜 "철석(鐵石) 같은 인물(Bowels of iron and heart of stone)"라고 묘사하고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원군 이하응은 10년을 집권하는 동안 공과가 반반이었다. 갑술년 이후 명성황후와의 사이가 날로 악화되어 여러 차례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 10여 년간 두문불출하는 동안 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뭇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번번이 좌절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륜이 쌓여서 이름이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조야가 그를 대로(大老: 나라의 원로, 큰 어르신)로 의지했다. 그가 죽자 모든 사람들이 다 슬퍼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대원군을 대혁명가라고 매우 고평가했다.

확실히 여러 기록으로 미뤄 보면 당시 백성들에게 '운현대감'은 그야말로 애증이 교차하는 존재였던 듯하다.

7 창작물 속의 흥선대원군

한제국 건국사》에서는 쇄국정책을 한 실제 역사와는 달라져서, 권철상 등의 민국인들을 중용하여 신무기 등을 개발하고,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등한 조건으로 문호를 개방한다. 그리고 2부 말미에서는 고종 앞에서 방약하게 굴고, 권세를 강하게 내세우는데, 이는 스스로 권력을 넘겨주면 고종이 오히려 받아들이기 힘들까봐 고종 스스로 자신을 축출하도록 일부로 반감을 사는 행동을 하는 대인으로 나온다. 하지만 3부 예고를 보면 그 노력이 헛되이 될 듯 일단 3부가 나와야 말이지

드라마 《닥터 진》에서는 아들인 이명복과 함께 본명인 이하응으로 등장한다

도리화가에서는 김남길이 분해서 나왔다. 아쉽게도 흥행에선....좀..

고산자 대동여지도 김정호에선 유준상이 대원군으로 나온다.

찬란한 여명에선 변희봉이 대원군을 맡았다.

명성황후에선 유동근이 맡았다.

그외 대원군을 맡은 배우들은 아래를 참조하길 바란다.

7.1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크게 새로운 해석 없이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 해석하는 대원군으로 묘사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상갓집 개나 파락호로 불리며 경제 기반까지도 안습인 막장 생활을 한 것까지는 아니고, 오히려 경제 기반은 나쁘지 않은 정도였으며, 철종 때까지만 해도 신중히 처신하다가 집권기 직전인 철종 말년에 세도가에게 돈을 빌리거나, 관직을 청탁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과 어울리는 등 야심을 감추기 위해 체면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했던 정도로 설명한다.

집권 후에도 대원군을 묘사한 드라마 같은 여러 매체처럼, 전면에 나서 국무회의를 주도하는 식의 묘사가 아니라, 신정왕후와 고종의 배후에서 흑막스럽게 정국을 움직이며 개혁을 실행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의 개혁정책에 대해서는 왕정 시대의 정치 개혁가로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계도 설명하고 있고, 민심의 이반이나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어서 실각한 것이 아니라, 대원군 실각의 원인은 왕조 국가의 기본 명제인 '권력의 중심은 왕'이라는 명제를 너무 가벼이 봤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묘사되는 대원군은 전면에 나서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흑막형' 정치인.

마지막권인 제20권에서 박시백이 대원군에 대해서 내리는 총평은, 그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지도자였으며, 그랬기에 권력을 원했다. 실각 후의 각종 쿠데타 시도에 대한 비판 역시 하고 있지만, 아들이나 며느리에게 박시백이 내린 짠 평가와 비교해 보면 전체적으로 아주 훌륭한 찬사에 가깝다. 차라리 아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왕이 되었으면 좋았으리라라는 평가도 내린다.

네이버 웹툰 한섬세대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신)안동 김씨 세도정치기라서 파락호로 살고 있으면서, 주인공 한섬을 곤경에 빠뜨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섬에게 세상물정을 알려 주면서 결과적으로 한섬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인물. 갱생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한섬을 눈여겨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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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일본만화에도 등장한 전력이 있다. 바로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이야기》에서 등장.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조선이 제법 다뤄지고 있고, 그 속에서 대원군도 등장한다. 여기서 묘사되는 대원군은 왕권강화를 모토로 하긴 하지만, 카리스마 있고 성질 있으며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 하지만 번역은 오경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카츠 카이슈의 입을 빌어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일본 공사관 무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공작에도 무응답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지친 나머지 조선을 넘보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만다. 결국 역사대로 갑오개혁 주도를 위해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꼭두각시로 내세워진다.

7.2 소설

김동인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야담들을 바탕으로 《운현궁의 봄》이라는 전기적 역사소설을 쓰기도 했다(대체역사소설이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자.). 야담을 기본으로 쓴 소설이기 때문에 고증은 당연히 개판이다(하지만 김동인이 쓴 역사소설 중에는 그나마 읽을 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이 흥선대원군의 진짜 삶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흥선대원군 관련 책은 대부분 이 책의 내용을 따서 쓰고 있다. 《운현궁의 봄》에 등장하는 흥선대원군은 와신상담이 뭔지 보여주는 인물인데, 왕위를 되찾기 위해 견제 세력에게 숙청당하지 않도록 백수건달 행세를 하며, 양반들의 다리 밑으로 기어가는 등의 굴욕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채 하며 집에 와서는 굴욕의 쓴 눈물을 삼킨다. 그러다가도 불의를 못 참으면 위엄 넘치는 일갈 이노오오오옴!! 을 내리고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난봉꾼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카리스마 폭풍간지의 인물로 그려진다.

사실 듣보잡이나 흑역사에 가까워서 그렇지, 김동인은 《운현궁의 봄》 외에도 《교상(橋上)의 국태공》과 《젊은 그들》이라는 두 편의 흥선대원군 관련 소설을 썼다. 전자는 임오군란 직후를 다룬 작품이고, 후자는 청에 납치되는 대원군을 다룬 작품이다. 특히 《젊은 그들》의 일부 대목은 80년대까지 출판된 대원군 위인전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올 정도였다.[82]

대체역사소설에서 이 시기를 무대로 할 때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을 많이 한다.

한제국건국사에서도 등장하며 권철상 일행을 도와 조선 내부의 개혁등을 이끌며 대등한 개항을 준비한다. 물론 정치싸움도중에 어쩔수 없어서 제거하려고도 했지만....[83] 흥선대원군이 없었다면 권철상 일행이 큰 역할을 맡을수 없었을테니 이것도 참작이 되는 행동. 2부 말미에서는 일부로 권력을 내세우며 오만하게 구는데, 이는 자기가 스스로 물러나면 오히려 아들이 제대로 왕권을 행사 못할 것이니, 자신을 스스로 축출하여 왕의 권위를 세우라는 깊은 뜻. 그러나 3부에서 예정된 내용을 본다면 이는 큰 실책이 될 것이다.

<봉황의 비상>에서는 조기개항으로 부강해진 조선의 위치를 다지기 위해 1,2부에서 청나라일본을 상대로 차례로 전쟁을 벌인다. 2부에서는 서구 열강의 요구로 헌법을 준비 중인데, 당초 관선 의회를 설치하는 안에서 사실상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가는 안으로 선회하려 한다. 이는 섭정이 끝나고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들인 황제가 미덥지 않아서기도.(...)

7.3 사극

사극의 단골 등장인물들 중 하나. 흥선대원군 역은 선악의 구도를 떠나서 대부분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로 묘사되게 마련이다.

흥선대원군을 연기한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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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콧수염 뚱보 동탁 같다

  • 김승호 –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1964년작. 50~60년대 명배우 김승호(1917~1968)[84] 유일의 악역 작품이었다. # 관련 정보
  • 신영균(1928년생) - 영화 《대원군》- 신상옥 감독작. 1968년 작으로 여기서 대원군은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모델로 했다. 단 친정부 영화는 '절대 아니고' 당시 야권(민주화 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찬사를 보냈다는 평이 있다. #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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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는 흥선대원군 역을 연기 인생에서 제일 인상 깊은 배역이자 또 한 번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라고 회고한 바 있으며, 이 드라마 자체를 '양질의 드라마'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대원군이 공식 석상에서 스스로를 '여(余)'라고 칭한다.
# 영상. 눈빛이 강렬하다.

실제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외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베트남 관복 복장

최명길》과 《리턴매치

8 대원군에 관한 낭설이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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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삼일절에 양상현 교수가 공개한 '그리피스 컬렉션'에 실린 대원군 추정 사진.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찍은 사진이라고 하나, 그 신빙성은 의문시된다. 당시 시대 상황 상 당연히 조선인이 찍었을 리는 없고, 필히 서양인의 손을 빌려 찍었을 텐데,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인이 과연 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사진 속 인물의 흉배는 대원군이 사용한 기린 흉배가 아닌 쌍호 흉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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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의 주인공은 흥선 대원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관복이나 목에 걸린 훈장 등으로 보아 사실은 프랑스에 간 베트남의 관료 판 타인 잔(潘清簡, Phan Thanh Giản)의 사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베트남사 전공 최병욱 교수는 베트남 관복은 맞지만, 판 타인 잔은 확실히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비교적 근대의 인물이라 사진이나 초상화도 제법 남아 있는 편인데, 위 사진과 현존하는 대원군의 사진이나 초상화들을 비교해 보면 사뭇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해당 관복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1945년) 시기의 관복이다. 응우옌 왕조 시기 이전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1788년) 관복의 경우 명나라 관복을 토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 관복과 매우 흡사했지만, 19세기 들어 베트남의 관복은 사진과 같이 관복에 금실을 넣는 등 기존 관복에서 크게 변화하였기에, 조선의 관복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관복을 포함하여 1,000년 동안의 베트남 복식의 변천 과정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맨 오른쪽 위에서 두 번째에 흥선 대원군의 관복으로 잘못 알려진 문제의 그 관복이 있다.

하지만 저 옷이 왠지 위엄도 느껴지고 뽀대나 보이는 건지, 사극이나 개화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속 재연극 등에서 흥선대원군은 저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찬란한 여명》이나 EBS 다큐멘터리 《개항과 전쟁》에서도 그랬다.# 《명성황후》에서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 용이 수놓아진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저 위 사진에 나온 것처럼 익선관까지 쓰고 나온 적도 있다. 《닥터 진》에서도 명성황후와 비슷하게 검은 바탕에 황금 용을 수놓은 옷을 입고 등장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고 국가 기밀 유출이라며 판과 지도를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그 목판과 지도가 잘 남아있다. 고등학교 국사 책 표지에 있는 지도가 무엇인지 잘 한 번 살펴보자.

  1. 순조 20년
  2. 광무 2년
  3. 아소당은 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한 곳으로 지금의 서울디자인고등학교와 동도중학교 운동장 부지에 걸쳐 있었던 99칸의 대저택이었다.
  4. 최종적으로 왕으로 추존된 정원군은 제외하면 3명. 흥선 대원군도 대원왕으로 추존되긴 했지만 이 땐 황제국 체제였으니 정원군처럼 국가원수로서의 왕과 같은 반열이라고 할 순 없다.
  5. 특히 이재면의 아들로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은 실제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준용은 대원군이 수차례 일으킨 쿠데타 음모 중 마지막이자 가장 끈질기게 다음 보위를 노릴 대상자로 꼽혀서, 명성황후 등에게 여러 차례 목숨을 위협받았다. 해당항목들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고종과 그의 일족들의 관계는 정말 끝장나게 안 좋았다.
  6. 일찍 죽은 맏형 흥녕군은 제외다. 사실 둘째형 흥완군도 40살을 못 넘기고 일찍 죽었으니, 셋째형과의 악연이 제일 길었다. 대원군은 흥인군이 욕심 많고 무능해서 싫어한 듯.
  7. 거기다 부대부인 민씨의 동생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갔다.
  8. 양할아버지 은신군의 부인이 남양 홍씨로 홍담용의 딸이다. 참고로 홍담용은 홍대용의 사촌. 그녀의 여동생의 남편이 김노경으로, 김노경의 동생 김노영의 아들 김정희를 양자로 삼으면서 아버지 남연군의 사촌이 된다.
  9. 흥선 대원군이 첩에게서 낳은 딸을 이호준의 첩이 낳은 아들 이윤용에게 시집보냈다.
  10. 특히 김병국과 김병학이었다.
  11. 돈녕부와 종친부의 정과 도정이 아니라 작위이다.
  12. 물론 잘산다, 못산다는 것도 상대적인 기준이라 하루하루 끼니 걱정을 하는 빈민 급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 신분에 비해서 "체면치례", "품위유지"를 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3.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의 성을 따서 불린 이름
  14. 사실 대원군의 왕족 우대 정책에 의해 시범 케이스로 삼기 위해 그랬을수도 있다.
  15. 다만 노론의 핏줄을 이어받은 이들은 다수 포진해 있어서 고종이 친정을 할때 역적으로 낙인찍힌 노론계 신하들을 대거 사면한적도 있다.
  16. 심지어는 "종친들이 말썽 부리는데 고(故) 남연군과 흥인군, 흥선군 본을 받게 해야합니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17. 조선왕조의 1년 수입이 60만냥. 이건 뭐 반년치 국가수입을 갈취한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신정왕후는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 것이랑 똑같다고 분노했다. 그러고는 저잣거리에서 곤장 맞게했고 멀리 귀양보냈다.
  18.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양전 사업은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도 아니고, 그를 통해서 딱히 큰 효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양전사업이 이때만 실시된 것도 아니다.
  19. 이를 환곡의 개혁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리대인 것은 여전했고, 수령과 아전이 무조건 먹던 것을 지역 양반들이 먹을 수도 있게 한 정도의 효과밖에 없었다. 이 정책은 양반들의 불만을 달래는 효과와 이 과정에서 이자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둬가는 효과만 있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환곡을 백성의 손에서 주관하게 하니 효과가 매우 좋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는 등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20. 다만 이게 좋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나온다.
  21. 기존에는 종친은 4대에 걸쳐서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는데, 대원군은 이 제한을 2대로 줄였다. 그 결과 전주 이씨는 (신)안동김씨를 능가하는 최대 정파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것은 종친이 고종이 아니라 대원군을 따르게 되는 배경이 되었고, 반면 대원군과 대립해야 했던 고종은 친위세력을 종친이 아니라 다시 처가인 민씨에서 찾아야 했다.
  22. 그런데 이건 정말 파격적인 발언인게 원래 안동 김씨는 대게 시파계인데 시파도 사실 노론에게 갈라져 나왔고 노론은 타 정파에 상당히 배척적인데다가 남인이 숙종, 영조를 거치며 완전 역당 취급받던걸 생각하면...
  23. 근데 사실이라면 실록에 있어야 하는데 없다.
  24. 이 비용에 대해서 언급이 별로 없는데, 알고 보면 상식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조선왕조의 1년 평균 수입은 10만에서 50만전 정도로 추정되는데, 경복궁 중건 비용은 750만 전에 이르렀다. 잘나갈 때 기준으로 15년치, 당시 상황이 어렵던 조선의 기준으로는 약 60년치 이상의 국가 예산이 투여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왕실과 종친, 관료들이 내놓은 50만 전이나 당오전과 당백전(當百錢) 발행과정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도 포함될 것이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조선정부와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25. 경복궁은 중건 과정에서 2번이나 불이 났다. 처음 공사를 시작해서 공사가 사실상 끝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년 2개월. 태조 시기 경복궁을 처음 건축하는 데 걸린 기간은 10개월이었다. 또한 태조 시기 창건한 경복궁의 궁내 전각이 390칸이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중창한 경복궁은 5800칸.
  26.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을 천명한 것이 고종 2년인 1865년 4월이었다. 하지만 1866년 3월에 불이 나서 건물 800칸과 목재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7년 2월에 다시 불이 나서 건물이 불타버렸다.조선의 백성 여러분, 여러분들의 세금이 불타고 있습니다! 결국 완성된 것은 고종 5년 즈음인 1868년 6월이었다.
  27. 이 와중인 1866년에 병인양요가 터졌다.
  28. 당백전 발행은 조선 정부는 물론이고 조선 전체의 재앙이었다. 당백전이 발행된 지 6개월 만에 대표적인 물가 지표인 쌀값이 6배로 폭등하였고, 실질 화폐를 사용하던 당시에 당백전 같은 악화(惡貨)가 유통된 결과 조선의 화폐 경제는 박살났다. 이 당백전은 2년 만에 폐지되고, 이후 청나라 동전을 밀수한 청전(靑錢)의 유통을 합법화했는데, 이놈도 악화라서 조선에서는 화폐에 대한 불신 풍조마저 일어났다. 게다가 몇몇(사실상 거의 전부) 수령은 현물,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고, 정부엔 당백전으로 납부하는 기행까지 벌였다. 당연히 정부도 모를 리가 없었지만, 정부에서 발행한 화폐였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인플레이션은 덤. 친정을 한 고종은 참다못해(경복궁 중건에 너무 많은 돈을 퍼부었기 때문에, 청전이나 당백전을 유통하지 않으면 조선 정부는 재정 파산 지경이었다.) 청전의 유통을 폐지하는데, 그 결과는 당연히 디플레이션과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
  29. 흔히 대동강에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 호를 건져 올려 만들었다는 '근세조선정감'의 기록이 많이 퍼져 있으나, 실은 당시 청나라에서 유입된 책 '해국도지'에 화륜선을 비롯해 당시 한국에서 만든 서양식 신무기나 수뢰 등의 제작정보가 상당수 들어었었다. 다시 말해 건져 올린 파편들만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는 것. 철갑선 항목 참조.
  30. 하지만 기록(근세조선정감이라는 야사이기에 어느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에 의하면 성능은 엄청 안좋아서 한강에 띄웠는데 열자를 움직이고는 멈췄다고 한다.
  31. 이때 사용된 연료는 숯
  32. 기존에는 가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토모)를 사용하였는데, 대포를 주조할 때마다 일일이 흙으로 거푸집을 만들고, 나중에 거푸집을 부수고 포를 꺼내야만 했다. 그러나 해국도지를 통해 전래된 방식은 분리 조립식 철제 거푸집이라, 종래의 방법과는 달리, 거푸집을 부술 필요도 없었고, 쇳물을 부을 때 열과 압력으로 거푸집이 부서지거나 흙의 습기로 불량품이 나오는 일도 없었다.
  33. 훗날 흥선 대원군의 손자 의친왕영친왕, 그리고 그 부인들인 김덕수(金德修) 여사와 이방자 여사도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흥선 대원군이 일으켰던 병인박해의 무시무시함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묘해진다.
  34. 병인박해순교,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35. 황사영 백서 사건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용에서는 좀 멀어질 수 있으나, 국제정세를 이야기 하자면 프랑스는 러시아와 가까운 상태였다. 좋아서라기보다는, 영국을 사이에 두고 "적군의 적은 아군"이라는 식으로 이루어진 것에 가깝지만. 이러한 프레임이 지구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데, 프랑스와 영국은 서로 식민지 확보를 위해서 으르렁대고 있었던 시기다. 그런데 이때 러시아를 유난스레 견제한 쪽이 영국이었다. 이러한 견제가 계속되어 영국은 거문도 사건도 일으키게 되고, 후에 영일동맹 마저도 영국과 일본 양국이 '러시아를 향한 견제와 적대'라는 이해관계가 맞아지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어쨌거나 프랑스인 선교 사제들은 정치적 입장에서도 괜히 러시아를 적대로 돌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도 있다.
  36. 이때 8,000명의 신자들을 처음에는 무작정 처형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는 "천주교를 계속 믿겠다면 죽일 것이고, 더 이상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를 택했다. 이 신자들 중 어린아이들도 많았는데, 대원군은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말라"고 했다. 덕분에 병인박해 이후로 고아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37.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38. 당시 서양의 눈으로 보면 조선은 그말 그대로 오지다.
  39.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스테파노 부제가 왜 그토록 칭송받는지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40. 물론 그도 사람이니 두려워 도망쳤다 해도, 펠릭스 클레르 리델는 조선정벌을 강하게 주장하기까지 했다.
  41. 펠릭스 클레르 리델은 나중에 주교가 되어 조선교구 제6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선교활동을 위해 다시 조선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를 하다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주교를 죽이지는 않고 조선 밖으로 추방했다. 이후 리델 주교는 다시 조선에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선종했다. 자세한 것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항목을 참조.
  42. 이들은 그야말로 다국적이었다. 독일인 야코브 오페르트와 선장 뮐러, 미국인 물주인 리로이젠킨스, 길앞잡이를 한 프랑스인 페롱 신부, 조선인 최선일 외 2명, 대부분을 차지한 선원들은 중국인이었다.
  43. '조선인은 부모를 특히 각별히 여기니, 남연군의 시신을 들고 인질극을 펼치면 어쩔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이건 뭐… 현대인 입장에서 봐도 이건 인륜을 한참 벗어난 짓거리에, 정작 부모의 시신을 뺏긴 아들이 미치도록 분노할 거라는 건 생각도 안 해본, 순도 100% 바보 멍청이 짓이다.
  44. 이후 오페르트 일당들의 처벌은,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예부에 자문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상하이 주재 프러시아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 신부, 젠킨스 등은 프러시아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와 선원들은 전연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한편 상해 주재 함부르크 영사는 오페르트의 혐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그를 조사해서 본국 정부에 조회하여 응분의 처분을 하겠다고 해명했다. 이후 오페르트는 본국에서 실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했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조난선 구제 문제를 놓고 교섭함으로써 조선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측의 총영사 슈워드는 베이징 주재 미국 대리공사 윌리엄스와 상의한 후 젠킨스를 불법적이고 수치스러운 원정을 준비했다는 등 8개의 범죄 조항을 들어 주 상하이 미국영사재폰에 기소했다."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정책 연구>, 서울대출판부, 2003, pp.109-110
  45. 조선 시대 사대부를 중심으로 많이 퍼진 회곽묘는 요즘도 가끔 발굴된다. 그 구조를 쉽게 말하면, 조선 전기는 관 위에 석회(…)를 퍼부어 공구리질한 수준에 가까웠고, 조선 후기는 공구리로 만든 관 안에 나무 관을 넣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이걸 깨려면 굴착장비를 들고 와야 한다.
  46. 석회가 하도 두껍게 발라져 있어서 드릴도 제대로 안 들어갔었을 거라고 한다. 지금이야 손쉽게 부술 수 있지만, 그 당시라면 정말 중장비는 끌고 와야 부술 정도.
  47. 이 제네럴 셔먼호라는 배는 이른바 무장 상선이다. 그래서 일반적 상선과는 달리 상당한 무장이 되어 있었고, 미국은 이 배의 침몰 원인이 조선이라는 것에 전력을 오판하게 된다.
  48. 선원들 살해 자체는 박규수의 명령이 아닌 성난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일이다.
  49. 참전한 미군의 기록에 따르면, 무기를 놓친 사람은 아예 돌을 들고 달려들었으며, 패배가 확정되자 칼로 목을 찌르거나 바다에 투신해 자결하는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50. 조선군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프랑스도 미국도 조선과 통상을 맺지 못하고 물러났기 때문.
  51. 영국은 인도와 청나라만으로 충분했고, 러시아도 발칸반도를 못 삼킨 이후엔 중앙아시아로 머리를 돌렸다. 다만 발칸반도에 진출 못한 이유가 영국이었기에 같은 일을 반복하기는 싫어서 행동에 옮겼을 수도 있다.
  52. 제식소총만 해도 몇가지가 됐는데 모두 다른 탄을 사용했으니 보급이 원활할 리가...
  53. 재무차관에 해당한다. 상소 한방에 이렇게 승진한 것이다!
  54. 자기 허물을 깨달아 반성하는 일,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
  55. 임오군란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명성황후 민씨가 청군을 불러왔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56. 흥선대원군을 다룬 위인전을 보면 여기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57. 이 과정에도 대단히 논란이 많은데, 동학군 특히 전봉준이 재봉기하는 데 큰 영향을 준 대상이 고종이냐 대원군이냐에 대해서 논란이 많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이 시기의 대원군에게는 고종 밀서 위조혐의가 있다.
  58. 이전까지는 극도의 보수 반외세주의자였지만, 이 시점을 기점으로 친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거물급 친일파가 된다.
  59. 다만 도쿄대 출신 등 고학력자가 섞인 것으로 봤을 때, 일반적인 낭인은 아니었다.
  60. 아들이 그 유명한 우장춘박사다.
  61. 을미사변은 일개 조폭급인 낭인들이 일국의 국모를 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이 맛이 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는 한데, 그 배경에는 이와 같이 조선 조정 내 반 고종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공격에서 아관파천 사이의 기간은 왕권이 거의 바닥에 떨어진 시기였다고 보면 된다.
  62. 한국통사 제1권 제1장
  63. 부대부인 민씨는 죽기 전에 천주교식 세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이하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4. 그래도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65. 영조 때도 철폐한 적이 있으나 전체서원 중 일부에 불과했다.
  66.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한 반론으로 성 유대철 베드로의 경우를 들고 있으나,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67. 이보다도 더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저 760만냥이라는 돈이 경복궁에 들어간 돈의 총액이 아니라, 경복궁을 짓기 위해서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에서 발표한 원납전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성들과 양반들에게 거둬들인 돈이 720만냥, 왕실과 내하전에서 내놓은 것이 35만냥이었다. 이 760만냥이 어느 정도 거금인가 하면, 당백전을 발행하기 이전에 유통되던 조선의 공식화폐 상평통보의 총액이 약 1,000만냥이다. 상상이 가는가? 인플레이션 이전 유통화폐 총액의 3/4이 그다지 필요도 없는 랜드마크를 건립하는 토목공사에 투입되었다는 것이? 더구나 당백전과 청전으로 인한 이득, 노동력 강제동원, 무단벌채, 결두전이나 통행세 등은 모조리 제외다. 물론 이게 다 경복궁 중건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연간 세입의 규모가 현물+화폐로 60만냥 정도였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인 것이다.
  68. 토지에 붙는 추가적 세금이다. 토지 1결당 100문을 더 걷었다. 이건 그냥 증세다. 토지세가 결국 하층농민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고.
  69. 예를 들면 사대문 밖에서 출입세를 걷고 한강에서 선세를 걷었다. 이게 고종 재위시기라고 해서 고종의 악행으로 까이고 있다.
  70. 황현은 정부 관료도 아니고, 경제적 지식은 더더욱 없다. 있는 지식이라고는 대원군 집권기에는 정부에서 큰 공사도 벌이고 이것저것 했는데도 문제가 없더니, 고종이 친정하더니 돈 없다고 난리더라, 라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71. 분열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극히 일부의 근왕파를 제외하면 흥선대원군의 파벌이 되었다. 대원군 집권시기에 종친우대 정책을 펼쳤던 것이 그 이유다. 대원군의 장남 흥친왕과 장손 이준용으로 대표되는 흥선대원군계 친일파는 조선왕실=친일이라는 시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일부 근왕파를 제외한, 집권욕을 가진 왕족들이 일본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하다.
  72. 그런데 이장렴도 전주 이씨, 그러니까 흥선대원군처럼 왕족이라는 점, 비록 흥선대원군보다야 왕위 계승권이 한참이나 멀고 먼 인물이지만.
  73. 실제 역사에서 이장렴은 고종 즉위 직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강화도 유수, 진무사를 거쳐 형조판서와 금위대장(고종 6년)에 올랐고 종친직으로는 지종정령에 올랐으나 고종의 밤 행차 때 횃불을 갖추지 못한 이유로 고종 9년 파직되었다.
  74. 참고로 이 이야기는 원래 미국이나 유럽 쪽 유머이며 이게 대원군 일화로 알려져서 여기 적혔다는 것은 일화의 일부가 근대도 아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 더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75. 그런데 동일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선조와 이항복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76. 해당 지역은 당시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배천군'이라고 읽는 것이 맞다.
  77. 땅바닥에 판을 그려놓고 돌, 풀잎, 나뭇가지 등을 말로 삼아 승패를 내는 놀이. 일반적으로는 작은 돌로 많이 하는 민속놀이다. 만약 노인이 고누놀이를 할 줄 알았다면 조선의 섭정 흥선대원군이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작은 돌멩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78. 이와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가 또 있는데, 다만 대원군은 집주인으로, 노인은 나그네로 바뀌어 있다. 고누놀이를 할 줄 아냐고 묻는 것까지는 동일하고, 이후 답답해진 집주인이 "그럼 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요?"라고 묻자 나그네가 "밥은 먹을 줄 압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
  79. 황문을 항문으로 잘못 들은 척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똥구멍'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황문'이 되기도 한다.
  80. 망건에 달아서 당줄을 걸어넘기는 작은 고리. 사극 같은 데서 망건에서 관자놀이 부근을 보면 조그만 동그라미가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게 관자다. '관자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표현이다.
  81. 이 경우 가짜인줄 알면서도 독립운동자금을 대주기 위해 모른 척하며 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사기 당했는데 독립운동자금 대주느라 그랬다고 자기위로를 하는 걸 수도 있고.
  82. 대표적인게 금성출판사 《한국 위인전》
  83. 결과적으로 제거는 안했다.
  84. 광복 직후 데뷔했다. 《로맨스 빠빠》, 《시집가는 날》 등 출연. 원로배우 김희라의 부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