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606/14667613531b571e226cf14030abdf961c78f43239mn701294w600h325f57841__Ym201606.jpg
1997년 외환 위기 몇 달 전의 뉴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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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998년의 평범한 뉴스 그 와중 창사특집 뉴스데스크[1][2]
자고 일어나니까 이랬다. "부도... 부도... 부도... 이제 이 말도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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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듯한 환율 폭등으로 절망감에 빠진 외환딜러들의 모습.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
문민정부 최악의 실책
아래 본문에도 상당히 잘 설명되어 있긴 하지만, 그보다 전문적이고 세밀한 통계를 기반으로 한 분석을 보고 싶다면 여기를 참고하자.
2 상세
잘못을 했으면 계도를 할 것이지, 왜 죽도록 매를 때리는가?
우리는 지금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습니다.ㅡ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말 그대로 외환위기. 정확히 말하면 외채 상환은 해야 하는데, 당장 갚을 외화는 없어서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문민정부가 IMF에다 "돈 좀 빌려주세요. 곧 갚을게요."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흔히 그리스 등과 비교하는데 그 정도 급은 아니지만, 어쨌건 엄청나게 큰 사건인 것은 맞다.[4]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즉, 외환위기 사태 발생 전인 1996년[5]까지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고 불리던 리즈 시절을 누렸다.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결국 외환보유액 부족과 여러가지 경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면서 현대의 대한민국 경제의 크고 작은 악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면서 자랑했으나, 실상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7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국민들을 절망케 한 사건이다. 돈을 함부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 자세한 것은 이 기사를 참고.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다. 이 통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말한 300억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전이었다.
1997년 12월, IMF사태가 시작되기 직전의 국내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
[6]
그러나 98년 1월이 되자 실업률은 한달만에 무려 1.4%P나 폭등하여 4.5%까지 폭등하고 한달만에 무려 3300여개의 기업이 도산한다.[7]
[8]
다음해 2월이던 1999년 2월, 실업률은 무려 8.7%에 달해 단군 이래 최악의 IMF 위기상황을 실감케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취업난은 한국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이다.[9][10]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원에 달해 수많은 직장인과 근로자들이 임금도 못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준다.[11]
당장 경제위기 이전에 눈부신 성장을 이어가던 대한민국은 경제위기 이후 한동안 벼랑끝으로 추락했다. 단기간에 회복했긴 했지만, 막대한 사회적 후유증을 불렀다. 예를 들면 자살률의 급증, 가정의 붕괴와 이혼, 가족 해체, 출산율 저하, 양극화,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등의 암울한 그림자를 남겼다. 이 문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하나하나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현재진행형 문제들이다. 이렇게 한 국가의 미래를 한순간에 뒤바꿔버리고 그러한 상황을 현재까지 이어 가게해버린 사건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7년 외환위기가 거진 20년 가까이 지난 2016년 현재도 그 원인 규명에 대해서는 다분히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당시 가계저축률 감소 추세를 수치로 보면, 92년에는 17.5%였던 것이 97년 12.6%로 줄었다. 물론 가계저축률 12.6% 수준이 과소비라면 겨우 3% 대를 깔짝거리는 지금은 초 과소비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서민들은 '경기 침체'라는 단어 자체를 낯설어했으나, 현재는 경기침체는 물론이고 가계 소득이 악화되었으며 생필품 가격은 OECD에서도 탑클래스를 달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당시에는 웬만해선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저축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면 오히려 중산층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저축률이 3% 대로 떨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편 외환위기 이전의 가계저축은 실제로 감소했다기보다 사회보장부담의 증가에 따라 가계저축이 정부저축으로 이전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부저축률은 1982년에 5.5%를 달성한 이후 1997년에야 겨우 10%였다.
그리고 가계저축률 하락에 발을 맞추듯 총저축률 역시 감소추세에 들어가고 있던 시점이기도 하다.[12] 하지만 당시 부동산 상황을 보면서 부동산 광풍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 1996년도를 제외하면 주택가격이 그리 오르지 못했다.[13][14] 이는 1990년대 이후로 신도시 건설을 통해 주택이 대거 공급되면서 80년대 후반의 부동산 상승세가 진정되면서 주택가격이 안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단, 상승세가 진정된다고 높아진 가격수준이 낮아지고 물류비용이 감소하는건 아니다.) 부동산 광풍이 원인이라면 차라리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의 경제성황이 어려워졌어야 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임금 인상투쟁이 상당히 벌어졌고 그 덕분에 고용도 안정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정부와 언론사들은 파업에 대해 우호적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내수는 급속히 신장되긴 했다. 하지만 실상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 때문에 오히려 현재에도 별로 안 좋게 작용하는 것도 또한 많다.저소비랄지. 저투자랄지.
한편, 당시 IMF의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 즈음, "당시 무리한 경제처방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는 발언으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바 있다.
2.1 역사 및 일지[15]
- 아래 내용 중 부도 관련 내용은 모두 굵게 표시한다.
2.1.1 1997년
1997년 01월 23일 | 한보#s-2철강(현 현대제철) 부도 처리 확정 |
1997년 01월 30일 | 한보건설 및 재계 순위 14위 한보그룹 최종 부도 처리[16] |
1997년 03월 19일 | 재계 순위 26위 삼미그룹 부도 |
1997년 03월 21일 | 한보건설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04월 07일 | 한보 청문회 시작(4/7 ~ 4/25) |
1997년 04월 21일 | 진로그룹 부도, 진로그룹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채택 |
1997년 04월 27일 | 진로그룹 6개 계열사 부도유예협약의 첫번째 대상으로 지정 |
1997년 05월 02일 |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0% → 23%) |
1997년 05월 15일 | 국내 최대 제빵업체 삼립식품 부도, 수원지방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 |
1997년 05월 19일 | 대농그룹 부도유예협약 |
1997년 05월 30일 | 한신공영그룹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05월 31일 | 한신공영그룹 부도 |
1997년 07월 02일 | 태국 바트 화 폭락 |
1997년 07월 15일 | 재계 순위 8위[17] 기아그룹 부도유예협약 체결(사실상 부도),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 충격, 청와대 확대경제장관 회의 |
1997년 08월 14일 | 인도네시아 루피아 화 폭락 |
1997년 08월 15일 | 재경원 종금사에 외화자금 긴급지원 검토(3억$이상) |
1997년 08월 25일 | 금융시장 안정 및 대외신인도 제고 대책 |
1997년 08월 26일 | 대농그룹 4개사 가운데 미도파만 회생시키고 나머지는 매각, 대농그룹 사실상 공중분해 |
1997년 08월 27일 | 무역관련 자본자유화 폭 확대조치 시행 |
1997년 08월 30일 | 재경원 증시 안정대책 발표 |
1997년 09월 01일 | 무디스 방한 협의(9/1 ~ 9/5), 주식매매수수료 자율화 시행 |
1997년 09월 10일 | 산업은행 외환채권 발행(15억불) |
1997년 09월 19일 | ASEM 재무장관 회의 및 IMF/세계은행 총회 부총리 참석 |
1997년 09월 22일 | 진로그룹 6개사에 대한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09월 29일 |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인 964원까지 상승,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0월 15일 | 쌍방울그룹 부도 |
1997년 10월 16일 | 태일정밀 부도, IMF 조사단 한국방문 |
1997년 10월 17일 | 대만 외환방어 포기 |
1997년 10월 18일 | 외국환 관리규정 전면 개정안 발표(외자유입 관련 자유화 조치) |
1997년 10월 20일 | 당정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근로자주식저축 1년연장, 한통주상장연기, 3년이상 투자 배당 소득분리과세) |
1997년 10월 21일 | IBCA, 현행 국가신용등급 유지 발표 |
1997년 10월 22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10월 23일 | 홍콩 증시 폭락 |
1997년 10월 24일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 : AA- → A+ * 단기 : A1+ → A1 |
1997년 10월 27일 | 환율 1달러에 940원 돌파 |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 : A1 → A2 * 단기 : P1 → P2 | |
1997년 10월 28일 | 미국 다우 존스지수 하루 만에 7.2% 하락, 한국 종합주가지수 500선 붕괴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움 강경식 부총리는 한국은행에 외환시장 개입중단을 지시(재판에서는 불인정) |
1997년 10월 29일 | 정부 금융시장 안정대책 발표(연기금3조 규모 주식매입, 채권시장개방확대, 기업구조조정) |
1997년 10월 30일 | 외환시장 개장 8분만에 대미달러 환율이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또다시 폭등,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0월 31일 | 환율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전국 주유소 북새통 진풍경 연출 |
1997년 11월 01일 | 재계 순위 24위 해태그룹 부도, 유가 인상 |
1997년 11월 03일 | 해태그룹 화의절차개시신청,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23% → 26%) |
1997년 11월 04일 | 재계 순위 25위 뉴코아 그룹 부도[18] |
1997년 11월 05일 | 블룸버그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 보도 |
1997년 11월 06일 | 한국은행 실무진 한국은행 총재에게 IMF행 건의, 미쉘 캉드쉬 IMF 총재 "한국 금융시장은 동남아 국가와 같은 위기상황 아니다"라고 언급해 한국의 신용도가 회복된 걸로 예측 |
1997년 11월 07일 | 주가 사상 최대 폭락 |
1997년 11월 10일 | 원화 환율 달러당 1,000원 돌파 |
1997년 11월 14일 | 강경식 부총리 르네상스 호텔[19]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청와대 보고에서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고 설명, 김영삼 대통령 사실상 IMF로 갈 것을 지시 |
1997년 11월 16일 | 캉드쉬 IMF 총재 극비 방한해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도착 |
1997년 11월 17일 | AMF(아시아통화기금) 관련 차관회의(마닐라), 외국언론들 한국의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지원 검토 중이라 보도하나 재경원 '사실무근'이라며 부인 |
1997년 11월 18일 | 한국은행 정부에 IMF구제금융 요청 촉구 |
1997년 11월 19일 | 김영삼 대통령 오후 5시 기자회견에서 IMF구제금융 지원요청 발표를 재가받으려던 강경식 부총리, 김인호 경제수석을 전격 경질하고 통상산업부 장관 임창렬을 신임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으로 임명 |
임창렬 부총리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환율변동폭 확대, 부실채권정리기금 확충, 부실금융기관 조속한 정리, 채권시장 추가 개방) 발표하지만 IMF 언급하지 않고 이는 이후 IMF와의 협상에 난행 요소가 됨 | |
1997년 11월 20일 |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방한, 1일 환율변동폭이 2.25%에서 10%로 확대되나 환율은 다시 확대된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해 사실상 거래 중단 |
1997년 11월 21일 | 김영삼 대통령은 박태준 자유민주연합 총재,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 회담 |
오후10시, 임창렬 부총리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다 발표 | |
1997년 11월 22일 | 김영삼 대통령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 담화문 발표[20] |
1997년 11월 23일 | 재정경제원 IMF 협의단(단장 강만수 차관) 편성, IMF의 실무협의단 1진이 입국 |
1997년 11월 24일 | 일본 야마이치증권 창립 반세기만에 파산 선고 |
1997년 11월 25일 | IMF 실사단 공식활동개시, 국무회의 : 예금자 보호법 등 4개 법안 새행령 개정안 채결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 조정 * 장기(2단계) : A+ → A- * 단기(1단계) : A1 → A2 | |
1997년 11월 26일 | IMF 휴버트 나이스 대표단이 김포공항 도착, 금융시장 안정 및 기관투자가 주식매입 기반 확충 국내 최대 해외여행사인 온누리여행사 도산 |
1997년 11월 28일 | 임창렬 부총리 일본 방문해 미쓰즈카 대장상과 원조회담에 들어갔으나 "IMF로 가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라는 대답만 돌아옴 |
1997년 11월 29일 | 종합주가지수 400선 한때 붕괴 |
서울 힐튼호텔에서 한국 정부와 IMF간 지원 협상 사실상 합의 | |
1997년 12월 02일 | 재경경제원(현 기획재정부), 9개 종금사 영업정지 명령 |
1997년 12월 03일 |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도착한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정부중앙청사에서 임창렬 재경부장관과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해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IMF 한국에 555억 달러 지원 확정 |
1997년 12월 04일 | 대기성차관협약(Stand-By Arrangement) IMF 이사회 승인 총 210억달러 승인 : 대기성차관 75억 달러,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
1997년 12월 05일 | 고려증권 부도 |
1997년 12월 06일 | 재계 순위 12위 한라그룹 부도, IMF 1차 지원금 56억 달러 제공 |
1997년 12월 07일 | 대우그룹, 쌍용자동차 인수 최종 확정[21] |
1997년 12월 10일 | 환율이 3일 연속 1일 변동폭 상한선까지 폭등하여 외환시장 개장 40분만에 거래가 중단되고 기업어음(CP) 금리가 6일째 법정 상한선까지 치솟았으며 회사채 유통수익률은 법정 발행금리 상한선인 연 25%를 초과하는 등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 |
무디스 한국국가신용등급을 준 Junk 수준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 A3 → Baa2(준 Junk) * 단기(1단계) : P-3 → N∙P(투자부적격) | |
5개 종금사 추가 업무정지(대한∙나라∙신한∙중앙∙한화종금) 종금사 거래기업 및 개인예금자에 대한 지원 은행신탁계정의 CP 매입 한시적 허용 외국인 주식투자한도(50%) 12월 11일부터 적용 등 | |
1997년 12월 11일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 장기(3단계) : A- → BBB- |
자본시장 전면개방 외국인 투자한도(1인당 한도 50%로) 확대 : 개인당 7%, 종목당 26% 한도(12/10발표) 한국은행,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자금지원 발표 14개 종금사관련 지원 : 7조 3,000억 원(은행, 종금, 증권) 채권시장 개방확대 대기업 무보증, 보증회사채 개방(10% → 30%) 대기업 무보증 CB투자 한도 확대(30% → 50%) 중소기업 무보증회사채 및 CB 투자한도 폐지 | |
1997년 12월 12일 | 동서증권 영업정지, 법정관리 신청 |
1997년 12월 16일 | 정부 환율변동 제한폭 폐지(17일 시행), 제3차 경제대책회의 내용 발표 최고금리 확대 : 연 25% → 40%, 금융기관에 대한 외국인투자 대폭 허용 등 |
1997년 12월 18일 | 제15대 대통령 선거, 야당의 김대중 후보 당선, IMF 2차 인출 이사회 승인 |
1997년 12월 19일 | 세계은행 및 ADB 자금지원 협상 완료 |
1997년 12월 21일 | 무디스,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하향조정 * 장기(2단계) : Baa2 → Ba1(투자부적격) |
IMF 협의단 방한 | |
1997년 12월 22일 | 미국 립튼 재무부 장관 입국, 재무부 금융기관 외채만기 연장을 위한 정부지급보증 국회 동의 |
1997년 12월 23일 | 원화환율 사상 최고치 기록(1995원), 국공채시장 등 채권시장 전면개방 |
1997년 12월 24일 | 정부 IMF 구제금융 협상에 대한 신청 발표 |
1997년 12월 25일 | IMF 및 주요 선진국 자금 조기지원 발표, 1997년 12월말 및 1998년 1월말에 걸쳐 100억 달러 조기지원 약속 |
1997년 12월 27일 | 재계 순위 35위[22] 청구그룹 부도[23] |
1997년 12월 30일 | IMF 20억 달러 조기 지원(3차 지원) |
1997년 12월 31일 | 부실 종금사 처리를 위한 가교종금사(한아름종금)설립 완료 |
2.1.2 1998년
1998년 01월 03일 | 기업구조조정 5대 원칙 천명, 이론배당락지수 368.85, 실제 385.49(+9.18) |
1998년 01월 05일 | 노사정위원회 발족 |
1998년 01월 08일 | IMF는 한국정부 3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
1998년 01월 11일 |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재계 4대그룹 총수와 만나 재벌개혁 5개항 합의 |
1998년 01월 12일 | 미쉘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 극비 방한, 청와대가 접견내용 발표 |
1998년 01월 14일 | 나산그룹(현 인디에프) 부도 |
1998년 01월 16일 |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
1998년 01월 18일 | 재계 순위 31위 극동건설 부도 |
1998년 01월 21일 | 김용환 자민련 부총재를 수석대표로 전북지사, 강만수 부총리 등 2백50억달러 안팎의 단기외채를 장기외채로 전환하기 위해 국제채권단을 상대로 뉴욕 협상 시작 |
1998년 01월 25일 | 김용환 수석대표 귀국 |
1998년 01월 30일 | 재경원, 종금사 1차 폐쇄 대상 10개사 명단 발표(한화, 쌍용, 경남, 고려, 삼삼, 항도, 청솔, 신세계, 경일, 신한종금), 감사원 외환위기 특별감사 착수, 삼양식품 화의신청 |
1998년 02월 01일 | 파스퇴르 부도 |
1998년 02월 03일 | S&P,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조정 |
1998년 02월 06일 | 노사정 공동협약 체결 |
1998년 02월 08일 | 금융시장 안정 및 단기금융시장 개방계획 발표 |
1998년 02월 12일 |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신정부「100대 국정과제」발표, 청와대에서 IMF 외환위기 현장감사 실시 |
1998년 02월 15일 | 외국인에 대한 인수, 합병 제한 완화 |
1998년 02월 17일 | 10개 종금사 인가취소(첫 금융기관 퇴출), IMF 한국정부의 4차 의향서 승인(20억 달러 인출승인) |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3단계 상향 조정 - B+ → BB+ | |
1998년 02월 19일 | BIS 8%미달 12개 은행 경영 개선 조치 |
1998년 02월 24일 |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퇴임 |
1998년 02월 25일 |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
감사원은 이경식 전 한국은행총재, 강경식 전 재정경제부 총리, 김인호 전 경제수석에 대한 특별감사 착수 | |
1998년 03월 02일 | 주식가격제한폭 8% → 12% |
1998년 03월 06일 | 뉴욕에서 단기채권 외채의 만기 연장을 위한 설명회 개최 |
1998년 03월 07일 | 국내 대학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국대학교 부도 |
1998년 03월 11일 | 1차 경제대책 조정회의(IMF체제 극복의 목표와 과제) |
1998년 03월 12일 | 단기외채 2백 18억 달러 만기 연장 |
1998년 03월 18일 | 국내 1호 백화점 미도파 부도 |
1998년 03월 23일 | IMF 서울사무소 설치 |
1998년 03월 24일 | 세계은행 1차 구조조정차관 20억 달러 승인 |
1998년 03월 26일 | 무디스, 한국 장기신용등급 전망 상향조정 |
1998년 03월 27일 | IBRD 한국에 대한 1차 구조조정차관 승인 차관액 : 20억 달러 - 이자율 : 리보 +0.75% - 만기 : 15년(거치기간 5년포함) |
1998년 03월 30일 | 무디스, 한국장기신용등급(Bal) 전망 상향 조정 |
1998년 04월 01일 | 금융감독위원회 공식 출범 |
1998년 04월 03일 |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
1998년 04월 09일 | 외평채 40억 달러 발행 성공 |
1998년 04월 10일 | 감사원, 외환 특감결과 발표및 수사의뢰 : 강경식 김인호 출국 금지 |
1998년 04월 22일 | IMF에 한국은행 외화대출 벌칙성금리 인하 요청 |
1998년 04월 27일 |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 발표 |
1998년 05월 02일 |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서면 답변서 제출, IMF 6차 의향서 합의(금리정책에 대한 신축성 확보) |
1998년 05월 03일 | 5차 경제대책조정회의, 외국인 투자업종개방 추가확대, 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 촉진방안과 중기비전 |
1998년 05월 09일 | 법무부, 강경식 체포동의요구서 임시국회 제출 |
1998년 05월 12일 | 재계 순위 28위 거평그룹 부도 |
1998년 05월 14일 | 중기대출만기 연말까지 연장 |
1998년 05월 16일 | 법원, 강경식 영장실질심사 위한 구인장 발부,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폐지 |
1998년 05월 18일 | 검찰, 강경식, 김인호 직무유기 및 직권남용 혐의 구속 채권단 동아그룹 해체하고 동아건설만 남김 |
1998년 05월 20일 | 64조 원 규모의 금융 구조조정 재원(1차 공적자금) 조달 방안 마련 |
1998년 06월 05일 | 강경식, 김인호 구속 기소 및 환란 수사 결과 발표 |
1998년 06월 12일 | 5대그룹 간 빅딜 추진, 한국전력공사 등 9개 공기업 조기 민영화 확정 |
1998년 06월 15일 | 엔화 환율 8년 만에 최고치경신(1달러=146.85엔) |
1998년 06월 18일 | 금감위, 퇴출 대상 55개 기업 발표(5대 그룹 20개사, 6∼64대 그룹의 32개사, 비재벌 계열 3개사) |
1998년 06월 29일 | 금감위, 금융기관 구조개혁 조처(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 등 5개 시중은행 폐쇄 발표), 퇴출은행, 조건부 승인은행 발표 |
1998년 06월 30일 | 금융경색완화대책 발표 |
1998년 07월 01일 | 공기업 1차 민영화방안 발표, 재계 순위 32위[24] 한일그룹 부도 |
1998년 07월 03일 | 외환매입제한 폐지 |
1998년 07월 10일 | 개정 예금자보호법 시행, 환란 1차 공판을 발표 |
1998년 07월 11일 | 상업은행, 한일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07월 24일 | IMF 7차의향서 합의(재정적자 GDP 4% 확대) |
1998년 08월 12일 | 금감위, 20개 보험회사에 대해 경영 개선 조처 |
1998년 08월 17일 | 공기업 2차 민영화방안 발표 |
1998년 08월 19일 | 4개 보험사 영업정지 |
1998년 08월 25일 | 정부출연, 위탁기관 경영혁신 계획 발표 |
1998년 08월 28일 | 재경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및 기업교환(빅딜)에 대한 세제 지원 방안 마련 |
1998년 09월 04일 | 강경식, 김인호 보석 석방 |
1998년 09월 07일 | 재계, 사업구조조정 방안 발표 |
1998년 09월 10일 | 하나은행, 보람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09월 11일 | 국민은행, 한국장기신용은행 합병 발표 |
1998년 09월 20일 | 장은, 동방페레그린 증권 퇴출 |
1998년 09월 28일 | 대통령 경제기자회견 : 외환위기 재연 가능성은 없으며, 구조개혁은 지속추진 |
1998년 10월 07일 | 기아자동차, 현대에 낙찰 |
1998년 10월 19일 | 5대 재벌 계열 사업 구조조정 방안 발표 |
1998년 10월 28일 | 은행권,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 선정 |
1998년 12월 07일 | 정부·재계, 5대 재벌 구조조정안 합의 |
1998년 12월 17일 | 조흥은행이 현대종합금융, 강원은행과의 합병을 발표 |
1998년 12월 18일 | IMF 긴급보완금융(SRF) 18억불 IMF 자금 중 처음으로 상환 |
1998년 12월 19일 |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 상향조정 검토 발표 |
1998년 12월 30일 | IMF 긴급보완금융(SRF) 10억불 상환 |
1998년 12월 31일 | 제일은행, 뉴브리지 캐피탈에 매각(지분 51%)하기로 합의 |
2.1.3 1999년
1999년 01월 19일 |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조정 |
1999년 01월 25일 | 영국 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한국 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B+에서 BBB로) S&P, 한국 신용등급 투자적격 상향조정(BB+→BBB-), 국회에서 경제청문회 |
1999년 02월 12일 | 무디스, 한국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상향 조정(장기외화채권 등급을 Ba1에서 Baa3으로) |
1999년 03월 21일 | 금융감독원, 퇴출 및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 정리 |
1999년 04월 01일 |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
1999년 04월 14일 | 김대중 대통령, "구조조정 약속 안지키면 5대 그룹도 워크아웃" |
1999년 04월 19일 | 대우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대우중공업 조선 부문(현 대우조선해양) 매각, 김우중 회장 보유 주식 매각대금 3천억원 출연 등 구조혁신 방안) |
1999년 04월 21일 | 부실 5개 생보사(동아(현 KDB생명), 태평양(현 동양생명), 한덕, 조선, 두원) 공개 매각 절차 개시 |
1999년 04월 23일 | 현대그룹 구조조정 계획 발표 |
1999년 05월 06일 | 종합주가지수 800 돌파 |
1999년 05월 19일 | 미셸 캉드쉬가 방한해 롯데호텔에서 기자 회견 |
1999년 05월 20일 | 현대전자, 빅딜로 LG반도체를 인수 |
1999년 06월 21일 | 결심공판(26차공판), 검찰 강씨 징역 4년, 김씨 3년 구형 |
1999년 06월 30일 |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법정관리 신청으로 삼성자동차·대우전자 (현 동부대우전자) 빅딜 무산 |
1999년 07월 01일 | 정부, 긴급자원지급 40억 달러 조기 상환하기로 IMF와 합의 |
1999년 07월 19일 | 대우그룹의 12개 계열사에 대한 합의서로 워크아웃 공식 신청을 발표 |
1999년 07월 20일 |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 "김우중회장이 내놓은 담보는 처분대상" 발언 |
1999년 07월 23일 | 대우그룹 shock, 최대 하락폭 71.70포인트 |
1999년 08월 06일 | 대우그룹·GM 자동차 부문 전략적 제휴 양해각서 체결 |
1999년 08월 12일 |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 대책 마련(대우 구조조정 추진에 따른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없애기 위해 투신사 수익증권 환매에 대한 대응 방안 강구해 8월13일 시행) |
1999년 08월 20일 |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대한 선고공판(27차공판)에서 무죄 판결 |
1999년 08월 26일 | 대우그룹의 유동성 문제 해결과 구조조정 추진을 위한 (주)대우 등 12개 계열사 워크아웃(기업개선 작업) 돌입 |
1999년 09월 01일 | 현대전자 주가조작, 회장 이익치 shock |
1999년 09월 17일 | 제일은행, 뉴브리지캐피털과 매각을 위한 주요 조건에 합의하고 투자약정서 |
1999년 09월 18일 |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9개월 앞당겨 조기상환 완료 |
1999년 09월 19일 | 제일은행 투자약정서(TOI) 체결, 11월 금융대란설에 대비 금융시장안정대책 발표 채권시장 안정기금 설립키로 결정하고 1차로 다음달 초까지 10조 조성 대우채권 환매비율 19991110(80%), 20000208(95%)로 환매요구 폭주로 인한 대란 가능성 상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유럽, 아프리카 출국 |
1999년 10월 30일 ~12월 01일 | 대우그룹 12개 계열사에 대한 워크아웃 계획 확정 |
1999년 11월 01일 | 대우 회장 및 대우그룹 사장단 퇴진으로 대우그룹 사실상 해체 |
1999년 12월 24일 | 대기성 차관 잔액 15억 달러 추가인출 중단 |
2.1.4 2000년
2000년 02월 12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결정 |
2000년 02월 14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양해각서를 하고 결과 체결을 못한 합의서 |
2000년 02월 17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졸업 및 파업 |
2000년 02월 18일 |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및 화의 신청 종결 |
2000년 03월 14일 | 현대 정몽구 회장, 동생 정몽헌 회장의 해외출장 중에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 조치[25], 왕자의 난이라 불리는 현대그룹 경영권쟁탈전 시작 |
2000년 03월 24일 | 귀국한 정몽헌 회장,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 |
2000년 03월 27일 |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 |
2000년 04월 23일 | 투자신탁 회사 구조조정 공적자금 투입 결정 |
2000년 04월 24일 | IMF 협의단 채결 |
2000년 04월 25일 | 투자신탁에서 투자신탁증권 체제로 전환 |
2000년 05월 26일 | 현대투신 사태로 현대그룹 유동성 문제 표면화되자 채권단, 현대건설에 1000억원 긴급지원 |
2000년 05월 31일 |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등 3부자 동반퇴진 및 5조9000억원 유동성 확보 등 자구안 발표 |
2000년 06월 11일 | IMF 총재 호르스트 쾰러[26] 출국 |
2000년 06월 12일 | 최종 정책협의 종료 (동년 8월 IMF 이사회 승인), 프로그램 3년 동안 IMF와 정책협의 11회 실시 |
2000년 06월 13일 | 호르스트 쾰러 입국 |
2000년 07월 24일 | 한국기업평가, 현대건설 등 현대 8개 계열사 신용등급 하향조정 |
2000년 08월 06일 | 정부, 현대건설 워크아웃 돌입 경고 |
2000년 08월 13일 | 현대, 자동차·중공업 계열분리 및 1조5000억원 자금조달 등 추가 자구안 발표 |
2000년 09월 01일 | 현대자동차 등 자동차 계열사 현대그룹에서 분리 |
2000년 09월 07일 | 정부개혁추진위원회를 발족 |
2000년 09월 12일 | 정부, 공적자금 40조원 추가조성 결정 |
2000년 09월 20일 | IMF 대기성차관 60억달러 조기상환 방침 발표, 00년 IMF연차총회시(체코 프라하) 정부대표 기조연설 |
2000년 10월 18일 | 현대건설, 5810억원 유동성 확보 추가 자구안 발표 |
2000년 10월 30일 | 현대건설 1차 부도 |
2000년 11월 03일 | 2차 29개 퇴출 대상 기업 발표, 삼성자동차, 삼성상용차, 진로종합식품, 진로종합유통, 우성건설 등, 현대건설은 채권단으로부터 퇴출 대신 조건부 회생 판정 |
2000년 11월 06일 | 대우자동차 1차 부도 처리 |
2000년 11월 08일 | 대우자동차 최종 부도 처리, 현대채권단은 현대건설 채무 만기연장 결의 |
2000년 11월 10일 | 동아건설 부도 |
2000년 11월 20일 | 현대건설, 서산간척지(: 총 3,082만 평) 매각 등 1조2974억원 규모 자구안 발표 |
2000년 12월 03일 | 대기성차관협약 및 프로그램 종료 |
2000년 12월 04일 | 김대중 대통령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선언 |
2000년 12월 17일 | 예금보험공사, 5개 부실은행에 공정자금 1분 투입 결정 |
2.1.5 2001년
2001년 01월 08일 | 대기성 차관 조기상환 개시 |
2001년 01월 16일 | 산업은행, 회사채신속인수 대상에 현대건설 선정 |
2001년 03월 05일 | 현대건설, 출자전환 동의서 제출 |
2001년 03월 28일 | 채권단, 자본잠식 상태인 현대건설에 2조9000억원 출자전환 결정 |
2001년 05월 11일 |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파산이 확정되어 동아그룹 해체 |
2001년 05월 18일 | 현대건설, 임시주주총회 통해 5.99대 1 감자 결의 및 심현영 사장 선임 |
2001년 06월 00일 | 현대 채권단, 2조9000억원 출자전환 실시 |
2001년 08월 00일 | 현대건설,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
2001년 08월 10일 | 정부 IMF에 조기 상환 |
2001년 08월 22일 | 김대중 대통령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방문 |
2001년 08월 23일 | 한국은행,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해 당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 체제 종료 |
진짜 그야말로 집권할때 부터 끝날 때 까지 빚만 죽어라 갚았던 DJ
3 원인
국민의 과소비[27]
1997년 외환 위기는 정부와 한국은행이 외환 거래 자유화를 시행하고도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환율안정 정책을 과도하게 추구하여 일어났다. [28]
환율이 안정적인 상황에서 외환 거래 자유화로 종금사들은 환위험 없이 저리의 외화를 단기로 빌려와 국내 기업에게 장기 대출하였는데, 아시아 외환위기, 한보 삼성 및 기아의 파산으로 외국 금융회사로 부터 대환대출 및 만기연장을 받지 못하게 된 종금사들이 국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대량으로 매입하여 외화 대출을 갚는 과정에서 환율이 급등하게 되었다.
결국 정부의 정책실패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3.1 투자만능론
1990년대 초-중반은 한국 경제에 있어 매우 좋은 시기였다. 부동산 , 주식[29] 등 자산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긴 했지만 경제성장률은 7~9%를 찍으며 고공행진이었고 경기과열을 우려할 정도로 내수도 급신장하는 상황으로 정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실업률은 더이상 통계를 낼 필요가 있을까 싶을듯한 수준으로 낮았다. 거기에 1995년에는 GNI가 처음으로 1만 달러를 넘어서기도 했으며 그 기세로 1996년 10월 11일에는 일명 경제선진국가단체인 OECD에 가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가 바로 현 386세대다.
이 모든 활황세는 단 한 가지 동인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투자였다. 기업고정자본형성(고정투자)은 전년대비 약 30%라는 증가율을 보이며 불타올랐다. 이건 좀 과하지 않냐는 견해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렇다고 당장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뉘앙스는 전혀 아니었다. 한국경제에는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은 경기과열이 아니다라는 분위기가 만연했었다.
여기엔 얼핏 보면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 투자는 그 자체로 GDP의 구성요소이므로 투자증가는 경제성장률을 높인다는 것, 둘째로 투자는 단기적으로는 거시경제의 총수요를 구성하는 요인이지만 그로인해 자본량이 증가하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거시경제의 총공급이 증가하며, 투자증가가 일시적으로 수요견인 인플레이션을 가져온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공급증가가 뒤따라서 물가는 안정된다는 것, 그리고 투자는 단기적으로 기계류 수입을 증가시킬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본 증대에 따라 수출을 더 증가시킨다. 즉, 투자증가는 결국은 경상수지를 개선시킨다는 것이다.
즉 투자만능론에 의하면 소비증가에 의한 불건전한 경기확장과 투자 증가에 의한 건전한 경기확장은 마땅히 구분해야 하며, 투자증가의 모든 부작용은 일시적인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1996년 들어서도 투자증가율은 여전히 전년대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물가상승률을 5%에서 방어하겠다던 호언장담은 물건너 갔다. 경제성장률도 수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경제는 GDP의 5%를 넘는 아주 골치아픈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다. 위에서 말한 일시적인 부작용이 장기적인 부작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정부는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투자촉진을 위한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의 주장은 사치성 소비재 수입으로 경상수지가 악화되었으니 또 투자를 해서 수출을 늘려주면 된다는 것. 하지만 효과는 전무했고, 사태는 악화되기만 하였다.
기획재정부와 경제계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1997년 외환위기를 겪게 된 데는 일본이 1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일시에 인출한 것이 '결정타'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3.2 정경유착의 정점이었던 한보사태
한보사태 문서 참조.
한때 국내 재계 서열 14위였던 한보그룹은 1997년 초에 결국 부도를 냈는데, 부실 대출의 규모가 5조 7000억여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여서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이를 발단으로 이와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정태수(鄭泰守) 한보그룹 총회장과 관련하여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와 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면서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도 정태수와 비리 관계가 있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먼저 한보그룹은 1990년부터 5조 원 규모의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견제를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건설부가 부지매립 허가를 9개월 만에 내주었음은 물론, 통상산업부(지금의 산업자원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철강업계에서는 한보의 경영능력으로는 이 프로젝트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음에도 1조 원 규모의 코렉스 설비를 도입하여 계속 철강사업을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제철소의 투자비를 2조 2800억 원으로 책정하였으나, 2년 만에 5조 7000억 원으로 불어났고, 1995년에 1조 4300억 원, 1996년에 2조 원이 더 늘어났다. 이렇듯 대출금 규모가 늘어난 것은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한보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인데, 한보는 이 와중에도 18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계속해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었다.[30]
결국 은행들은 한보철강에 거액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금융계는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상세한 검토도 없이 외압에 따라 대출을 결정하였다고 주장하였고, 실제로도 3개의 시중은행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은행감독원 등 금융감독기관도 동일인 여신한도를 넘어선 한보철강에 대한 제일은행의 편법 지원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가벼운 문책만 함으로써 감사원의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갚을 능력도 확실하지 않은 의심스러운 사람에게 큰 돈을 마지못해 빌려주었다가 홀랑 다 떼이는 것과 비슷하다. 더 가관인것은 한보회장 정태수를 청문회하는 과정에서 정태수는 실어증 코스프레와 함께 모르쇠로 일관하였고, 몸통이니 깃털이니 하는 주옥같은 드립을 남겨서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31]
더구나 조사 결과 한보철강이 금융기관 대출금 가운데 유용한 자금이 2136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혀짐으로써 조사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은 물론, 한보 부도와 관련한 각종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쨌든 1997년 5월, 이 사건으로 인해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20~5년을 선고받았는데, 이 역시 빙산의 일각이라는 평가와 함께 시간 속에 묻혀버렸다.
이 사태가 발생하면서 제철소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부도 여파로 인해 171개의 영세업소와 외상 거래자들이 빈 손이 되었고, 국가 대외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해 국가 경제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또 금융계에도 여파가 크게 미쳐 시중은행장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되었으며, 이른바 '한보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사과상자가 뇌물의 상징으로 쓰인 것도 이때부터다. 정태수 회장이 '몸에 좋은 거니까 남 주지 말고 꼭 드셔보세요'라며 나눠줬다고.
3.3 내재적 취약성
한국의 고정투자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한국의 고정투자는 이자율에 대해 매우 비탄력적이다[32][33]
둘째, 한국의 수입은 원자재, 자본재, 소비재 각각 약 50%, 40%, 10%로 구성된다.
이런 경제에서 투자과잉의 효과는 우선 경상수지 적자 압력이 있다. 원자재와 소비재의 구성비율은 경기변동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허나 자본재는 그렇지 않다. 고정투자는 일단 기계류의 구입이다. 당시 정밀기계류의 구입은 거의 1대1의 비율로 일본에 대한 수입이었다.
또 1995년 하반기부터 1997년 상반기까지 세계 경제는 활력이 저하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에 의한 자본증대로 수출을 늘릴수 있을까? 일단 자본을 투입해 물건을 많이 찍어내서 수출물량은 늘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많이 찍어낸 물건이 전부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다시말해 수요와 공급 법칙에 의해 수출단가가 쪼그라들어서 수중에 얻는 건 거의 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한국이 상대적으로 소국으로 세계 교역조건에 특별한 영향을 미칠수 없으므로 밀어내기 수출에도 수출단가 하락은 피할수 있다고 한다.[34] 하지만 한국의 수출품목은 60, 70년대부터 정부 정책에 의해 특정 품목에만 집중적으로 개발된 형태다. 적어도 해당 품목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의 수출이 수출단가를 하락시킬수밖에 없다.
수출액은 거의 늘지 않고 수입액만 증가하면 경상수지는 악화된다. 당시 고정자본형성 증가율은 이미 30%에 달한 상태였고 위에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은 일본에서 기계를 왕창 수입하고 있었다. 결국 대규모 적자를 피할 방법은 달리 없었다.
다음으로 언급할 점은 기업 경상이익 악화다.
통상적으로 한국에서는 투자가 경기를 이끌 때, 소비는 내리막길인 경우가 많았다. 즉 한국 기업의 투자결정은 이자율보다 일단 소비의 추이에서 자극받는 전형적 동아시아 경기변동 사이클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기업의 영업이익은 감소한다. 나아가 많은 기업들이 투자에 나섰으므로 시중 이자율은 올라간다. 보통 이자율이 올라가면 투자가 뜸해져야 하는데, 한국 기업은 이자율에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이자율 상승에 따라 투자가 감소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앞의 영업이익 감소와 결합해 경상이익은 더욱 감소한다.
경상수지 적자는 자본유입으로 국제수지 균형을 맞춰 주어야 하고, 경상이익 악화는 유동성으로 메워야 한다. 즉, 나라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야 하고 기업은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야한다. 여기서 금융기관이 등장한다. 예컨대 당시의 종합금융회사들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외국에서 자금을 빌려, 그것을 다시 국내기업에게 빌려준다. 이는 김영삼 정부 초기부터 기획된 자본자유화에 의해 지원되었다. 1993년에 발표된 ‘3단계 금융자율화 및 시장개방계획’은 1997년까지 모든 금융 시장 규제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획기적으로 늘렸고, 채권시장을 개방했으며, 재벌들의 해외차입과 관련한 규제도 대폭 완화했다.
잘 굴러갈 때는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어디까지나 잘 굴러갈 때만...
사실 한국의 경제성장에는 이러한 '모험적'인 성장위주 정책이 있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각종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차체를 앏게 만들 후 오직 엔진만 고성능으로 만든다면 최소 비용으로 최고 빨리 달릴 수 있다. 덤으로 보험은 비용이 들어가니 들지 말고. 60~80년대 고도성장 시기 재벌총수들의 자서전 등을 보면 이런식의 무리한 사업진행을 운이 좋아 무사히 성공시킨 것을 자랑으로 늘어놓은 내용을 볼 수 있다.
3.4 개발독재 시절의 과잉투자
대한민국은 군사정권 시절 일부 대기업에게 일감과 특혜를 몰아주며 무리한 수출주도 정책을 핀 결과 제2차 오일 쇼크 파동과 8.3 부채 동결 사태 등에서 IMF와 유사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이 때 기업의 재정건전성보다는 중공업 투자를 위한 사채 확보를 강권하였고 대가 없는 수혈정책, 정치자금 확보를 위한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3저 호황이 지난 이후 본격적으로 고도 성장의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외환위기 사태의 한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박정희/평가 문서에 자세히 나온다.
4 IMF의 구제금융과 구조개혁 요구
대한민국의 미래를 말아먹은 IMF의 대삽질
결국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IMF는 1997년 12월 3일 21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승인했고 더불어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하여 총 350억 달러의 국제기관의 지원이 결정되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 긴급히 55억 달러가 공수되었다. 그리고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호주가 지원을 결정함으로 200억 달러가 추가로 지원되어 총 550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여기까진 '국제통화기금' 이라는 단체명에 걸맞는 아주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하지만 IMF의 구제금융 210억달러가 한국에 유입되는 조건이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고금리요, 다른 하나는 구조조정, 또 다른 하나는 공공재 영리화이었다.
첫째, 고금리
시중 은행의 금리를 연 29.5%까지 올려야 했다.
"고금리로 자본유입을 늘린다."는 명분은 그럴 듯 했지만, 실상은 "떨어져나갈 업체는 일찌감치 도태당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35] 결국 반기(6개월)를 버티지 못하고, 국내 금융기관을 외국에서 인수 가능하게끔 금융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재협상해 이율을 낮추는 "항복선언"을 하게 되었던 것. 고금리정책의 이론 상으로는 "경기과열로 인한 물가상승 방어" 혹은 "경상수지가 급격히 악화된 국가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약"이지만 복잡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확인사살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극약처방이기도 하다.[36] 또한 고금리 기조로 부채는 그 6개월간 오히려 더 늘었으며, 명예퇴직 후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개인사업자들은 높아진 이자를 갚기위해 차환기채[37]를 할 수밖에 없을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채권시장은 "미약하다"는 표현으로 설명이 어려울만큼 비활성화 되어있었으며, 여기에 투자자들의 자본 유출이 애초에 금리때문이 아닌, 동물적 감각에 의한 위험회피 목적임을 감안하면 현실성, 적절성 측면에서 비판이 나오는게 자연스러운 일.[38]
결정적으로 애초에 당시 죽을 쑤고 있던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극히 소소한 외환이 고금리로 채권시장에 유입된 양보다 많았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지...
둘째 , 구조조정
한국중공업, 한국통신, 한국전력,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굵직한 공기업들을 민영화 함과 동시에, 당시 공공부문 전체 인력의 20%인 14만 1천 명을 감원 하였다. 그리고 대기업에서도 구조조정의 이름을 내걸고 명예퇴직, 희망퇴직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이라는 단어가 나올만큼 한국이 정말 막대한 빚으로 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2008년 ~ 2015년 연간의 일부 유로존 국가들처럼 진짜 돈이 없는 경우와, 돈은 있는데 당장 상환할 외화만 부족했던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는 만큼, 그 적절성 여부를 놓고 오늘날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다소 성과가 있었던 부분은 해외 빚쟁이들채권자들, 특히 일본과의 채무조정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IMF가 한 역할은 미미하며, 포항제철 시절부터 대표적인 지일(知日) 인사인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협상에 나서서 이끌어낸 성과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금융가 어르신들의 탁상공론의 끝을 보여줬으며 차라리 채무재조정 외에 자금수혈. 만약 그것이 안되더라도 거시경제적으로 방임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돈 주고 너희 알아서 해결하고 돈 갚아라 하는게 상책이었다는 소리 고금리 정책이 아니었다면 비록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6.9%라는 재앙적 수준은 아니었을거다. 경제회복은 어차피 드라마틱하게 폭등해준 환율이 수출을 통해 이끌어 내주었을 것이고...
셋째, 공공재 영리화
이집트의 빵 보조금 폐지, 볼리비아 수도 영리화 등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전기, 가스, 수도, 의료, 철도 등의 공공재를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운영하도록 하였다.
5 기타
5.1 다른 원인들?
막말로 외환위기의 책임은 투자만능론에 눈이 멀어 대책 없이 투자를 싸갈겼던 민간경제에 더욱 막중하다. 단, 정부는 과거 자산동결조치처럼 기업의 채무조정이 필요할 때 정공법보다는 편법을 씀으로써 금융업을 사채업자들을[39] 박살내고 대기업들의 편을 들어 준 사례가 있다. 오죽하면 대우의 김우중 회장 등이 대마불사, 정부가 해주겠지 따위의 마인드를 가지고 안이하게 대처했다가 망했을까.
물론 투자만능론으로 불거지는 비정상적인 경제상황에 제동을 걸고 재단을 해야하는 정부가 사태 진압에 실패한 것은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부의 문제점은 위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남이 만들어놓은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는 방화범이 아니라 소방수일 뿐이다.
심지어는 투자만능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도 일부러 낮은 환율을 유지했다는 말도 돈다. 즉, 당시 한국이 OECD에 가입하기 위해 1인당 국민소득을 뻥튀기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 알다시피 1인당 국민소득은 달러로 표시되는데 환율이 낮으면 원화가치가 상대적으로 강한 것이 되기 때문에 같은 소득이라도 환율이 낮을 때 1인당 국민소득이 더 높게 측정된다. 그러니까 실질 환율은 상승해야 마땅한데 정부가 고의로 환율을 낮게 책정하면서 벌어진 사단도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환율의 상승압력을 막으려면 시중에 돌고 있는 원화를 매수하고 달러를 풀어야 한다. 이러면 외환보유고가 급속도로 떨어지는데 이러면서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외국에 원화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외환보유고가 없더라, 하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급격한 자본 유출을 한국은행이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원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환위기를 부채질했다는 주장이다.
이외 국내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책임론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특히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국면과 맞물린 정치공방의 혐의가 짙다. 실제로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행정부 관련 인사들이 DJ와 야당의 정리해고 같은 관련 법안 보이콧 때문에 초동대응 타이밍을 놓쳤다는 불만을 금융위기 전후 여러 경로로 표출한 바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1996년 12월 26일 정리해고안이 포함된 노동법을 여당인 신한국당 단독 표결로 7분만에 날치기 통과된 여파로, 굳이 야권에서 손을 쓰지(?) 않아도 국내 여론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던 측면이 더 강한 일이었다.[40]
전 미국 FRB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회고록 "격동의 시대"에서 2가지를 지적했는데,
첫째, 한국 정부가 튼튼해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외환보유고를 속이면서 대책을 대놓았다는 정책추진에 대한 문제.
둘째, 보유한 외환을 다시 민간에 빌려주는 돈놀이를 하다가 위기를 불러왔다는 외환관리의 문제가 그것.
우리가 외국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금융사업을 하는게 무슨 문제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만도 하지만, 이 외환보유고에는 종금사들이 일본 금융가에서 단기 자금으로 끌어들인 빚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동안은 동남아시아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고이자로 빌려주며 수익을 올리기도 했지만, 태국의 바트화 폭락사태, 인도네시아의 루피화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보사태, 기아자동차 사태[41] 후유증을 앓고 있던 우리나라에까지 불이 크게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1997년 말부터 종합금융사들이 대거 퇴출되면서 97년 위기 전 30개 회사가 8개로 급감될만큼, IMF 체제의 철퇴를 제일 먼저 맞게 되었다.
또한 유력 대선후보였던 DJ의 IMF 구제금융안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해외자본의 이탈을 가속화, 위기를 심화하는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금융비화② IMF 경제통치(1997~2000년)]의 내용을 보면, 전문가들이 4번째 문단부터 지적하고 있는건, 외채도입 급증과 당국관료들이 불확실성을 회피하는 정책을 추진했다는 내용이며, DJ 책임론을 제기하는건 당시 유력한 여권 대선주자였던 이회창[42] 한나라당 대표로, 같은 당 출신의 이인제 후보가 오히려 이를 중재하는 장면이 나온다.
5.2 펀더멘탈 타령?
경제 펀더멘탈 이라는 어구가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도 IMF 이후인데, 당시 아시아 금융위기 가운데 한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튼튼하다며 위기의 확산 가능성을 부인하려 하던 경제관료들의 레토릭이 언론을 타면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만수 장관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이렇다.[44]
경상수지 개선과 경제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 것은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있었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경제수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 (중략) …대외신인도의 유지를 위한 전략 측면에서는 외국금융기관들이 급속하게 자금회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중략) …내부에서도 펀터멘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간부를 불러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사정이 날로 어려워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 (중략)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고 비극이었다. |
다만 상술했다시피 해외 연구자들의 경우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한국은 산업구조가 튼튼하고 무역수지 흑자가 누적되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90년대 초중반의 연준의 금리정책의 연쇄효과에서 비롯된 변동 역내 외환시장 불안정에 금융부문의 문제가 터져나온 것이지 경제 전반의 부실의 문제는 아니었기에, 인도네시아 등 다른 주요 피해국들에 비해 해외악성채무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진단하는 것이 통설이다. 과도한 레버리지가 낳은 자본수지 왜곡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지만, (IMF 구제금융의 빠른 상환이 증명하듯) 단기적 유동성 악화의 초크포인트를 지나서라면 딱히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같은 신흥국으로 도매금으로 얻어맞은 측면이 있다는 것.
5.3 청년실업과 출산 기피 현상 그리고 해외 투자의 증가
인구계획에도 큰 영향을 끼쳐, 이후 우리나라는 인구 유지에 목숨걸게 된다. 보통 인구가 줄면 삶이 나아지겠지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구가 적은 국가는 그만큼 외부 투자유치가 안 되고 내수시장 유지도 힘들다. 게다가 고령화로 인한 노인 인구 부양까지 감안한다면... 그러나 1995년(1.63명)부터 점차 하락하고 있던 출산율(1996년 1.58명)이 더욱 낮아져 2005년에 1.08을 찍게 된다. 그리고 현재도 1.2 정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있어 이민이라도 받지 않는 이상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확실시된다.[45]
물론 출산율 급락의 원인에는 육아시설 부족, 과도한 사교육 열풍 등의 원인도 있으나, 당장에 청년실업이 주는 충격 하나만으로도 출산율 저하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임을 무시할 수 없다.[46] 여담으로 이 당시 취업시장에 뛰어들은 92학번들이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또한 저출산 고령화 때문에 인구는 줄고 저성장이 예견되는 상황이라[47]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노후 돈이 없으면 갈 곳이 없으니 절대 돈을 쓰지 않으며, 청년들은 돈이 없어서 못 쓴다. 이렇게 투자 가치가 높지 않은 시장인데다 일자리에 대한 수요는 공급을 한참 초과하고 있어 기업들은 인건비를 높여줄 필요성도 못 느끼고 있다. 장기적인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갖고 있는 자산도 중국이나 미국 등지로 돌려야 할 판이다.[48]
국내에는 최소한의 투자조차도 꺼리지만 반대로 중국이나 제3세계 신흥국들에는 대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기업은 장기적인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며 신흥국이라는 대안도 존재하기에 더욱 그렇다.
6 영향
6.1 경제적 영향
IMF 주도의 신자유주의 처방을 받으면서 혹독하게 경제체질이 바뀌었다. 문민정부는 '세계화'를 외치며 신자유주의를 따르자고 했지만, 정작 한국 내의 모든 경제주체는 아무 준비도 없이 정부주도 하에 무한경쟁하는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구조조정을 통해서 많은 기업들이 망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더욱 강해졌다. 이 시기의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저승사자"라 일컬어졌던 이헌재 금융감독원 위원장[49]이 악역을 맡아, LG반도체 정리, 삼성자동차 매각 등 대기업들이 "확실한 시행이 전제된" 자체 구조조정계획을 세우도록 강하게 압박, 30대 그룹 전원이 5일 만에 구조조정 계획수립 및 제출을 완료하였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계획을 다시 이헌재가 수장을 맡은 은행감독원에서 심사해 미비점을 보완하도록 독려(?)하였다
하지만, 공적자금 180조원이 투입되었는데[50] 그 중 70조원이 회수불가처리가 된 흑역사도 생겼다. 즉, 위기 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다 위기가 지나가자 뭔일이 있었냐는 듯 지원금을 꿀꺽해버렸다는 얘기.
현대에 이어 재계 2위였던 대우그룹은 1999년 최종부도로 그룹이 해체되어 망하였고 삼미그룹, 청구그룹, 해태그룹, 한라그룹, 한보그룹, 진로그룹 등 유명한 재벌기업들도 이 때를 계기로 모두 망하거나 해체되었다. 그리고 정주영의 현대그룹도 회사가 분할화되어 현대건설, 현대자동차, 현대산업개발, 현대해상화재보험, 현대백화점, 현대중공업 등으로 계열분리가 되어서 지금은 현대엘레베이터가 지주회사 역할을 맡고 있지만 현대자동차그룹에 아예 재계순위나 지위에서도 밀리는 편이다.[51] 그 밖에도 동화은행, 대동은행, 평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보람은행 등 여러 은행들도 모두 망했거나 다른 은행과 합병되어 사라지기도 하였다.
다만 살아남은 기업들에게는 뼈아픈 충고가 되었다. 정말 300%~400%라는 (2010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부채율[52]을 가진 건실한[53] 기업들은 부채율 감축에 온 역량을 퍼부어 현재는 건실한 기업치고 100%를 넘는 곳이 드물고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면역력과 긴축경영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잃은 것에 비하면 적은 소득이지만...[54][55]
6.2 정치적 영향
이로 인해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공약 당시 한국병을 반드시 고치겠다고 주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오히려 임기말에 한국병을 고치기는커녕 한국병을 부르게 한 원흉으로 전락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아가며 퇴임하였다. 대선을 앞두곤 신한국당 지지자들이 YS 화형식까지 펼치며 현직 대통령을 당에서 쫓아냈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김영삼의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결정타였던 것이다. 퇴임 이후에도 김포공항에서의 빨간물 계란투척 사건, 고려대학교 특강 무산[56]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97년의 이 참사는 15대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57]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국제적인 인지도를 통해 IMF를 비롯, 국제 외교로 경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부분과 자신이 이미 대중참여경제론 같은 경제학 책까지 집필한 전문가였다는 것을 어필했었다.[58]
그리고 국민의 정부 하에서 정리해고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 진행되었다. 1996년 연말 여당의 노동법 날치기로 도입된 유연화된 노동제도 원래대로라면 다시 재검토 되어야 했지만 이 위기로 인해 일시적 유예만 거치고 즉각 도입되었다.
정리해고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이전, 캉드쉬 IMF 총재가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해 97년 대선 유력 후보 3인(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모두에게 다음 대통령이 되면 IMF가 요구한 신자유주의적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놓았던 데다가, IMF의 구제금융을 무조건 받아야만 국가 신용이 유지되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당선되었더라도 정리해고 조치와 공공재 영리화를 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빚쟁이의 말로 국민투표 해놓고 유럽의회가서 무릎꿇은 치프라스를 봐라
6.3 사회적 영향
6.3.1 철도교통계
IMF 사태를 겪으면서 서울 3기 지하철 계획이 9호선과 3호선의 오금 연장을 제외하고 전부 폐지되었고, 부산 4호선[59]과 5호선, 대구 3호선, 대전·인천 2호선, 부산 3호선 반송선(이후 4호선으로 분리된 그것) 등 수많은 계획들이 지연 및 변경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이다.[60]
광주광역시같은 경우는 1호선을 추후 계획 노선들의 환승용 보조 노선으로 먼저 착공하였지만 IMF 발생으로 인하여, 추후 계획 2~5호선들이 모조리 싹 다 사망하므로 그 후 1호선만 제대로 추진되어서 공기수송하는데 재정 부담의 심각한 영향을 받고있다. 지금 광주광역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2호선이 개통되면 1호선 상황이 달라질수도..?
사실 국제통화기금이 전면적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의 도시철도 계획을 철폐한 것은 아니었다. 지자체들이 도시/광역철도를 계획할 때 민자사업을 유도하여 당시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구제하는 게 어떻냐 하는 제안을 했고[61],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시 민자사업을 할 수 있을 법한 수준의 기업들이 외환위기 과정에 줄줄이 쓸려 나갔으므로 추진 주체가 없어셔 무산된 것. 나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출자한 서울 지하철 9호선 정도만 부활하게 된다.
6.3.2 스포츠계
KBO 리그의 경우, 모기업이 직접 부도를 당한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는 선수를 팔아서(혹은 선수 임대)[62] 연명했고, 이 때문에 하위권을 전전했다. 해태는 2001년 시즌 중 현대자동차그룹에 인수되어 KIA 타이거즈로 재탄생했고, 쌍방울은 아예 팀이 해체되어 SK그룹이 자유계약이 된 쌍방울의 선수단 및 지명권을 인계하여 SK 와이번스로 재창단했다. 즉 절대로 SK그룹이 구단 자체를 인수한 게 아니다. 이 때문에 인천 야구의 정통성 논란이 터지게 되었다. 상세 내용은 삼청태 문서를 참고.
K리그의 경우 부산 대우 로얄즈가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됐다. 부산 아이파크는 대우 로얄즈 시절 축구광이던 대우 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안정환, 김주성등 스타플레이어를 앞세워 K리그 최고의 인기구단중 하나이자 강팀으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구단 해체 위기까지 갔다가 간신히 현대산업개발에 인수된 이후로는 기업구단답지 않은 투자로 점차 상위권에서 밀려나더니 끝내는 2015년 기업구단 최초로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됐다. 야구도시로 알려진 부산이지만, 롯데 자이언츠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90년대 대우 로얄즈를 생각해보면 그저 안습. 대전지역의 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창단했던 대전 시티즌도 계룡건설을 제외한 다른 구성 기업들의 도산으로 계룡건설의 후원으로 근근히 버티다 끝내 2006년 완전한 시민구단으로 전환했다. 시민구단화 이후 고질적인 재정난으로 역시 2부리그를 들락거리는 신세.
프로농구의 광주 나산 플라망스도 역시 모기업이 망해서 이후 골드뱅크-코리아텐더로 2단 변신 후 2003년 말 KT에 인수되게 된다. 한편, 여자농구의 경우 남자농구가 프로화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프로화에 의지가 없는 팀들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프로화를 준비했으나 IMF 이전에 13개 팀이었던게 5개 팀으로 반토막 이상이 나는 후유증을 겪게 된다.[63] 실업 리그였지만 거의 프로리그나 다름없었던 배구 역시 전설의 남자배구팀인 고려증권 배구단이 모기업의 부도로 1998년을 끝으로 해체됐고, 여자배구는 더욱 더 심한 상황이었던지라 9개 팀이 5개 팀으로 쪼그라드는[64] 암흑기를 맞았다.
6.3.3 문화계
문화계도 심한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 특히 환율에 영향을 받는 외국 뮤지션 공연의 경우 갑자기 뛰어오른 환율 때문에 공연기획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물론 1998년 메탈리카 내한 때처럼 기획사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개런티를 25만 달러나 깎아주는 대인배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분야는 투자자나 유통사들이 대거 발을 빼면서 기존의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특히 1998년에 방송된 국산 애니메이션 스피드왕 번개의 경우, 당초 반응이 좋으면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한 시즌 2 제작을 하기로 되어 있었고 흥행도 좋은 편이었으나 이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그대로 시즌 2의 계획이 엎어져버렸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점은, 나라종금 등등 일부 종금사들이 일본에서 끌어온 단기 차관을 연장시킬 방안으로 일본에 문화시장을 개방해야 했다는 것이다. 경제난으로 투자 활력이 떨어진 문화산업계였던만큼, 이 조치는 큰 폭탄과 다름없었다. 이 무렵에는, 만화 분야처럼 사실상 준개방 상태에 있는 분야가 적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저력을 대통령 및 정부 관계자들이 언급하곤 하였다. 빚쟁이인 일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조처가 몇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 믿을 것은 우리 국민들밖에 없다는 걸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만큼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인 흐름으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경제적 부흥에 힘업고 '신토불이' 등의 레토릭으로 서서히 강해지고 있던 일종의 국수주의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걸 들 수 있다. 개인주의를 서구의 퇴폐적 풍습으로 배척하려는 사회적 풍토가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도 적지않다. '한국적인 가치' 에 대한 선호가 완전히 발살나면서 자국혐오나 미국병도 심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를 비롯한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레전드였던 가요톱10이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IMF 외환위기(구제금융) 때 "국민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연예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워서 종영시켰다. 그 후 시청자들이 KBS에 전화를 하면서 항의를 하는 등, 후폭풍이 엄청나게 안 좋게 되자 KBS에서는 땜빵용으로 <브라보 신세대>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방송했지만 당연히 인기를 끌지 못했고, 다시 가요톱10의 뒤를 잇는 대중음악 순위 프로그램 뮤직뱅크가 신설되어서 1998년 6월 16일부터 현재까지도 방송을 하고 있다.
6.3.4 취업시장
취업에도 상당한 변화 정도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변경되었다. 기존에는 공무원은 대기업에 비해 급여가 적은 반면 업무강도가 쎄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으나[65][66] 외환위기로 인하여 대기업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직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오히려 봉급은 매우 짜지만 어지간해서는 해고하지 않는 9급 공무원마저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일례로 그 이전에는 너무 지원자가 없어서 지원 = 합격이었던 순경도 현재는 단지 해고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원자가 몰려서 25:1을 웃도는 경쟁율을 보였다. 이제는 할 거 없으면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이 대기업보다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2010년대에 국가직 9급공무원 지원자만 20만 명이 몰린다는 현상이 빙하기같은 취업시장의 모습을 방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직업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경찰관이라고 답변하면 엄청나게 부러워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실직자들은 자신이 애써 실직당했다는 것을 자신 혹은 주변에게 부정하고 싶어서 아침에 양복차림으로 출근하는 척 하고 산에서 지내다 다니던 직장 퇴근시간 될때쯤 귀가하는 이른바 등산출근 현상이 언론지상에 보도되기도 하였다.[67]
이 시기 이후로 대부분의 기업[68]이 45세 전후로 차장/부장까지 승진을 못하면 명예퇴직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6.3.5 물가
이 사태 이후로 과자 등의 식료품 가격이 크게 인상됐으며[69] 이는 훗날 과대포장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70] 실제로 식료품의 가격인상, 과대포장, 가격담합 등의 문제점들이 IMF 사태가 일어난 해부터 크게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시 말해 이 사태로 청년 실업이 크게 늘어났는데 식료품등의 가격도 덩달아 올라가버린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난 것이다.
요식업계에는 IMF국밥 등 IMF 수식어를 단 염가메뉴들이 생겨났고(대표적으로 롯데리아의 IMF버거), 지금 생각하면 웃지 못할 IMF 드립도 성행했다. 반대로 고가의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등 고급 식당들은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6.3.6 사회현상
현대 한국이 앞을 볼 수 없는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한 원인이자, IMF 사태 이후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이웃간의 정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71]
특히 가족해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황금만능주의의 심화 등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오히려 사회적으로 퇴화하게 만든 분기점이었다.
게다가 경제사회학적 시점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막장 커뮤니티들이 탄생하게된 원인이 바로 이 사태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 파장이 전세계로 퍼져나갈 줄을 아무도 몰랐다는 게 함정
그동안 가장들의 수입으로 가정경제를 꾸려가던 구조였으나, IMF를 기점으로 하여 주부들이 취업시장에 대거 뛰어들게 됐다. 그래서 IMF 이후에는 맞벌이가 이전 시대와는 달리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부모님이 돈을 벌러 나가게 되면서 아이들만 집에 남게 되는데,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이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게 엇나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심각한 경우는 가장의 경제적 무능이 큰 문제가 되어 부부간의 이혼이 늘어나 가족해체가 심심치않게 일어나기도 했다. 이 당시 10대 생활을 보냈던 1980년대 태생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본인의 가정에건, 주변에서건 IMF 때문에라는 이유로 여러 안 좋은 일을 겪거나 봤던 경험이 한 번쯤은 다들 있던걸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파급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진짜 막장이었던 사건들은 바로 자해를 한 뒤, 폭력범죄의 피해자인 것처럼 신고해서 보험금을 받으려다가 들통나버리는 사건도 많았다는 것이다. 한 택시 기사는 택시강도를 당한 뒤 범인들이 자신의 발을 기차선로 위에 고정시켜 놓고 도망가는 바람에 발이 잘렸다고 해서 뉴스에 실렸으나... 결국은 얼마 못가 자기가 보험금을 노리고 한 짓이었음을 자백하고 말았다.
또 어느 가정에서는 아빠와 어린 아들만 있던 집에 강도가 들었는데, 돈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협박하다가 그 집 아빠가 돈이 없다고 하자 진짜로 자르고 도망친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도 알고 보니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가 친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뒤 강도사건처럼 신고했다는 게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IMF에서 금융위기에 빠진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 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으로 이자율 상한선 폐지를 권고하자 이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고리 대금업이 성행하여 엎친데 덮친격으로 돈없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을 입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연 20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율이 나왔을 정도. #[72]
1998년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뱀발로 IMF 당시에는 농담조로 '나는 F학점이다'(I'm F(failed)), '나는 해고당했다'(I am Fired)라는 말이 유행했다. 심지어 'I'm Fucked'라는 버전도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치환하면 IMF의 별칭은 이런게 좋을 듯 싶다. 바로 International MotherFucker.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도 이 무렵에 회자되었다. 정확히는 "total crisis"라는 영어의 번역. 이것은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과 더불어, 언어의 마술사 박희태 전 대변인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 말을 그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며 그냥 이 무렵부터 유명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세기말과 엮여서 그런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라는 말도 자주 쓰이기도 했다. 사실 1997년의 외환 위기가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국가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한 무신경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후에 IMF를 가까스로 넘겼으나 오히려 사회적으로 비윤리적인 사건이 증가하게 되면서 '모럴 해저드'를 많이 언급하곤 했다.
관련된 루머로 통일교가 자신들을 인정해주는 댓가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단교하고 다시 자기네들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모두 갚아주겠다고 했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지만 모두 사실 무근이다.
파일:Attachment/1997년 외환 위기/과소비.jpg
이미 언급했지만 초등학교 교과서에 외환위기의 원인이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물론 초등학생의 수준으로 이 사건을 쉽게 이해시키려고 그런 표현을 썼다 감안하더라도, 이는 이 사건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 짤에는 소비가 늘어야 돈도 돌고 경제도 좋아진다는 진리가 쏙 빠져있다. 부실한 교과서(...) 이 항목을 쭉 읽으면 알겠지만, 1997년 외환위기는 국민 개개인의 과소비가 원인이 아니라, YS 정권의 '세계화' 정책의 대응 실패, 즉 시장개방에 따른 정부의 대응 미흡, 재벌들의 정경유착, 국가 경제체제의 구조적인 문제(펀더멘털)와 국제 투기자본의 자본 유동이 주 원인이라고 봐야 합당할 것이다. 그 덕분에 2010년도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수정이 되지 않았다.[73]
거기에 IMF 사태가 일어난 것을 노조가 노사분규를 일으키고 과도한 임금상승 등의 압력을 넣어 기업의 비용부담을 증가시킨 것이라는 식의 교육을 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남탓하기의 끝장을 보여주고 있다.
한보리스트의 중심인물이었던 정태수 회장이 뇌물을 돌릴 때 썼던 사과 상자가 뇌물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국민들 관심 밖이지만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전기, 가스, 의료, 수도, 철도를 비롯한 공공재의 영리화 진행으로 기업이 공공재를 관리하게 되면서 일본, 영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볼리비아 등 영리화를 겪은 국가들처럼 요금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여 서민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국민들이 공공재 영리화 저지에 관심을 가질 뿐.
7 세계경제계의 변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심한 구조조정 요구에 시달린 탓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통화기금 창설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통화기금 출범을 주창했을 정도. 그러나 IMF도 지역단위의 통화기금 체제가 들어서는 데에 딱히 찬성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어서 아시아만 통화기금기구 창설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2010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이 공동으로 조성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hiang Mai Initiative)라는 금융협정이 공식출범하게 되었다.[74] 총 기금 1200억 달러 중 중국, 일본이 각각 32%, 한국이 16% 그리고 동남아 10개 국가가 총 20%를 분담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라는 것이 아무 조건 없이 제공될 수는 없겠지만 대안이 존재하다 보니 그리스처럼 진짜 작정하고 막장짓만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필요한 수준 이상의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구조조정 요구나 IMF가 작정하고 해당국가를 파산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IMF의 해당 항목을 참고할 것.
좁게는 대한민국이 맞이한 외환위기였지만 넓게는 동아시아 전체에 불어닥친 외환위기[75]였을 만큼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이 외환위기로 IMF의 개혁요구를 충실히 따른 대한민국의 사례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국고를 풀어 내수진작에 힘을 쓴 말레이시아의 사례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든 간에 동아시아 각국은 외환보유고에 거의 노이로제 정도로 집착을 하게 되며, 2000년대 중후반 들어 전 세계의 달러화, 미국 국채 등을 거의 폭풍흡입하듯이 빨아들였다. 당장에 달러 보유고 상위 10위권 국가의 다수가 동아시아 국가다.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2000년대 들어 소위 BRICs라 불리는 신흥국들이 IMF의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기존에 유럽의 독식으로 덕좀 보는 체제였는데 신흥국이 경제강국이 되었으니 미국과 유럽이 독식하던 IMF와 IBRD의 총재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특히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前 IMF 총재가 성추행혐의로 자리를 비우자 유럽과 제3세계는 서로 총재자리를 차지하려고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2008년 이 사건보다 더욱 큰 부도 사태가 일어났었고, 그리스 발 유럽연합 위기로 서구권의 세계 통화 패권에 대해 더욱 더 불신이 깊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기존 기득권 층은 '지금 유럽에 IMF위기가 도래했으니 차기 총재도 유럽인이 해야 그리스 위기를 쉽게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76]도 나왔지만 이미 유럽이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신흥국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커져 있다.
결국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회의에서 지분의 6% 이상을 신흥국에 넘기고 유럽 이사 2명을 줄여 신흥국의 참여권을 확대하는 구조개편이 합의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최국인 대한민국의 역할이 매우 컸고, 대한민국 역시 IMF 쿼터에서 과소평과를 받았던지라 2010 G20 재무장관 회의를 통해 IMF 쿼터를 늘리게 됐다. 또한 2012년에는 그동안 관례적으로 미국이나 서유럽국가 출신이 맡아온 IMF 사무총장으로 중국 경제학자 린젠하이(林建海)를 임명했고, 뒤이어 세계은행 총재에 한국계 미국인인 김용(Jim Yong Kim) 전 다트머스 대학교 총장을 임명했다. 이젠 미국과 유럽도 신흥국가의 입김을 무시할 수는 없는 셈.
8 트리비아
- 2015년 7월, 그리스의 제3차 구제금융시 한국의 IMF 사태와 비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 1997년 정부가 IMF측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후 정확히 18년 되는 2015년 11월 22일, 공교롭게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저 세상에서 지금 한국을 보면서 어떤생각을 할까?
- 흔히 IMF 혹은 IMF 사태 라고 많이 이야기 하는데, 사실 IMF는 구제금융을 해준 기관인 것이지,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일단은... 이런 관계로 사람들이 이 사태를 항상 IMF 사태라고 부르며 IMF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IMF 관계자들은 "우리는 한국 경제를 구제해준 기관 인데 왜 IMF를 나쁜 것처럼 말하느냐?"라면서 싫어한다고(...) 그러나, 맨 윗 주석에서 설명했듯이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닐지언정 구제금융 이후의 처방은 말 그대로 인종차별 수준이었고[78] 고금리, 구조조정이라는 되도않는 처방을 내려서 대한민국을 완전히 말아먹을 뻔 했다. 그래서 이걸 마냥 구제해준 기관이라고 고마워하기는 좀...
- ↑ 출처는 1997년과 1998년의 MBC 뉴스데스크다. 출연자는 당시 평일 앵커인 이인용/김지은-정혜정, 주말 앵커인 권재홍/최율미.
- ↑ 대우그룹 부도는 1999년이다. 그 밖에 위의 스크린샷에서 언급된 기업들 가운데 일부는 외환위기 이후에 회생되었거나 부도를 당하지 않은 다른 기업에게 넘어가 이름까지 바뀌기도 하였다.
- ↑ 당시 IMF의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설 때 즈음, "당시 무리한 경제처방을 강요한 측면이 있었다."는 발언으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 바 있다.
- ↑ 그래서 지금의 그리스 경제위기와 달리 IMF가 까이는 것이다. 그냥 돈 좀 빌려주고, 제 때 이자쳐서 받으면 될 것을 괜히 긴축정책과 고금리정책을 강요했다가 나라 하나 결딴낼 뻔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IMF 사태 때문에 청년층 인생이 뭐같아진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들에게 시한폭탄을 선물로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 ↑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해이기도 한다.
- ↑ 지난달 실업률 3.1% 4년 반만에 최고, 실업률 3.1% 최악 수준
- ↑ 한달새 27만명 실직
- ↑ 3월 실업률 6.5% 폭등
- ↑ 실업률 8.7%... 사상최악
- ↑ 실업률 8.7%... 사상최악2
- ↑ 체불임금 6480억원
- ↑ 다만 상당수 대기업들이 호황기를 틈타 투자를 과도하게 했다가, 외환위기가 닥쳐온 후 (혹은 닥쳐오기 직전에) 망한사례는 꽤 많았다. 예: 기아그룹, 한보그룹, 대우그룹, 뉴코아그룹, 해태그룹, 나산그룹, 쌍방울그룹 등등.
- ↑ 1988년~1996년 신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주택이 대거 건설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안정화 된 영향.
- ↑ 하지만 자금력도 안 되면서 아파트를 무리하게 건설하고 방만한 경영을 하던 중견 건설업체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1995년 4월 유원건설, 1995년 10월 삼익건설, 1995년 12월 우성건설, 1996년 8월 건영건설이 도미노처럼 부도났다.
- ↑ 위키백과 중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 항목을 기반으로 일부 수정 및 보완을 하였다.
- ↑ 이 한보그룹의 부도가 IMF 사태의 시발점으로 불린다. IMF 대신 한보 사태라 말해도 몸서리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한보 사태는 충격이었다. 한보그룹은 그 유명한 대치동 은마아파트 신화를 만든 회사로, 은마아파트의 초대박이 터지면서 건설업 외에 철강 등의 사업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철소를 짓는답시고 돈을 마구 끌어쓰고 뇌물을 뿌려서 5조 원대 제철소 건설을 했지만 결국 부도가 났고, 이것이 IMF 사태의 예고편이었다. 한보의 부실경영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부실경영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이었고 결국 한보의 부도처럼 부실경영을 하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이때 직원들의 증언을 꼬투리 잡아 "머슴들이 뭘 알아"라고 한 대사는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리고 사과상자를 뇌물로 사용한 것도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으로 사과상자를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사과상자가 국민들에게 알려진건 전두환의 비자금을 은닉한 쌍용그룹의 회장 자택에서 사과상자 61억 원 어치가 나온 것이 시초.
그 상자 안의 사과들은 어떻게 했을까.갈아마셨겠지.상자만 사도 된다. - ↑ 위의 이미지에서는 4위라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8위였다.
- ↑ 뉴코아는 한신공영그룹의 사위가 회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한신코아백화점도 있었다. 뉴코아의 마트인 킴스클럽도 당시 회장의 성씨가 김씨였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부도 이후 한신코아는 사라졌고 뉴코아는 이랜드그룹에 인수되었다.
- ↑ 1988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93년 르네상스 호텔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2016년 1월1일부로 벨레상스 호텔로 다시 이름을 바뀌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이 먹방을 찍은 곳이 이 호텔 4층의 가빈 중식당이다.
- ↑ 정확히 18년 후 같은 날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했다.
- ↑ 이 일을 계기로 대우그룹은 삼성그룹을 뛰어넘고 재계 2위가 된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 ↑ 1996년 기준.
- ↑ 다른 부도 기업의 직원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청구그룹의 직원들은 특히나 고통을 당해야 했다. 회사에서 직권들의 명의로 14억의 대출을 받고서는 부도가 나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회사가 감당해야할 빚을 직원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회사빚 떠안은 청구직원들, 푼돈 거래해 종일 은행업무 마비 (MBC) 청구직원 140명『회사빚 왜 직원이 갚나』집단訴 (동아) 이후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아는 분은 추가 바람. 참고로 이후 청구는 다시 부활하여 다원이라는 철거 전문 업체에 인수되는데 말이 인수지 실제로는 단물만 먹고 뱉은 격이라, 2013년 당시엔 짓던 아파트는 전부 완공 실패에 본사는 폐업한 피아노 학원이라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청산됐다.
- ↑ 1996년도에 우성그룹을 인수했을 때는 17위까지 올라갔던 기업이다.
- ↑ 현대의 자동차 부분을 맡고 있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자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격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한다.
- ↑ 독일의 정치인으로 2000년부터 2004년 3월까지 국제 통화 기금의 총재직을 역임했으며 2004년 7월 1일부터 독일연방공화국의 제9대 대통령에 재임했으나 2010년 5월 31일 중도 사임했다.
- ↑ 몇몇 교과서(대표적인 예로 제 7차 교육과정 초5 사회교과서)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정말 터무니 없는 소리로 이 문서를 읽어보면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교과서에 "IMF가 일어난 이유는 오직 국민의 과소비 때문이다" 라고 쓰여있는 걸로 오해하기 딱 좋게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교과서에는 정부, 기업, 국민으로 나누어서 각각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이나 사람들은 마치 국민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한 것인양 잘못된 사실을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IMF는 과소비 탓 교과서> 트윗에 대한 오해와 해명 애초에 7차 교육과정 교과서는 2002년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당시 대통령이 누군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국민에 대한 과소비 책임론은 명백히 잘못된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실과 다른 내용을 덧붙여서 잘못 이상의 비판을 가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 출처 '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1' 김광수경제연구소 김광수 소장 저
- ↑ 1994년 11월 8일 1138P로 고점을 찍은 뒤 오르락 내리락 했긴 했어도 98년 6월 277P로 저점을 찍을때까지 전체적으로 하락세하는 추세였다.
- ↑ 이후 한보제철을 인수한 현대제철은 훨씬 오른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더 적은 금액인 고로 1기당 4조원 안팎의 자금으로 고로와 부대설비를 포함한 일관제철소 건설에 성공했다(...)
- ↑ 깃털 드립은 정태수가 아니라 홍인길 의원의 발언이다.
- ↑ 이건 이자율에 대한 투자의 일반적 비탄력성만 말하는게 아니다. 국제비교상으로도 비탄력적이다.
- ↑ 우리나라 기업이 이자율에 얼마나 신경쓰는데 무슨 소리냐고 생각한다면 지금 말하는건 투자결정이지 자금조달이 아님을 상기할 것. 즉 한국기업은 투자를 결정할 때 주로 이자율이 아닌 내수 시장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그 자금을 조달할 때만 저금리를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 ↑ 한국의 경제규모와 수출물량이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았던 60~80년대에는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한국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비슷한 수출구조를 가진 라이벌 국가들이 많이 생긴 90년대까지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물이 가득 찬 종이컵에 물 한방울 떨어뜨린다고 넘치지는 않지만 물 한수저를 떨어뜨리면 넘친다.
- ↑ 그도 그럴 것이 금리가 인상되면 시중의 화폐유통이 경색되어 단기적으로 경기가 악화된다. 가뜩이나 경제위기 상황에서 작은 유동성 흐름에도 민감한 중소기업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대기업들조차 타격을 꽤 입었다.
- ↑ 이론에 매우 충실한 처방이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경제교과서를 보고 처방 내렸느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 ↑ 돌려막기
- ↑ 아무리 고금리를 주더라도 곧 부도날 국가의 채권을 사 줄 은행은 없으며 고금리를 유지했다는건 부채도 막대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 ↑ 사채 이자에 시달리는 기업인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추진됐던 조치였기 때문에, 자영업자들의 성원을 받기도 했다.
- ↑ YS "IMF 맞은 책임의 65%는 DJ에게 있다"
- ↑ 기아차 임원 출신인 이신행 전 의원이 쓴 "이씨춘추"에 사건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만, 모 대기업을 유력한 용의자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이 기업에 기아차를 선물로 안겨주려 했다는 음모론은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부분인만큼, "이런 견해도 있다."는 참고 정도로 읽을 것을 권함.
- ↑ 인망높은 법조인이자, 여론조사에서 정치경력 40년이 넘는 DJ와 막판까지 오차범위 내에서 1, 2위를 다툰 거물. 기자들 사이에서 "이회창 후보의 말은 조금만 수정하면 기사송고가 가능하다."고 했을 만큼 언변에도 재능을 발휘했던 정치인으로, 역시 달변이었던 김대중, 노무현 두 대선후보와 토론하는 모습은 역대 대선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한 토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 ↑ 이런 성격의 대외보고서들은, 금융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성되기 때문에, 의외로 잡지 읽듯이 재미있게 읽힌다.
- ↑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저 - pp.438-439를 참고
- ↑ 통계청은 아예 2100년 기준 인구가 현재 수준의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예측까지 하기도 했다.하지만 무작정 이민자만 받다가는 큰일난다. 당장 다문화를 추진한 나라들이 어떤지 보자.
- ↑ 1996년까지만 해도 초혼연령은 남성 28세, 여성 25세 전후였다. 2014년 현재 남성 33세 여성 30세. 초산연령은 더 올라가서 1993년 26세였던 것이 2014년 32세로 수직상승했다.
- ↑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성장이 덜할 뿐이다.
- ↑ 실제로 한국의 해외 도피 자산은 세계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러시아 다음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는 경제 스케일이 큰 것도 고려해야 하니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막장인 러시아 다음이라고 보는 게 맞다.
- ↑ 김용환 부총재가 경제구원투수로 대통령 당선자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수험 5개월 만에 행정고시(6회)에 합격한 수재로 30대 중반에 행시 1회 출신들과 동일한 직위로 일할만큼 초고속 승진을 했지만, 1979년 율산그룹 해체 당시, 주무 담당자로써 책임을 지고 공직을 떠났다가, 20년 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온 것.
- ↑ 이중 대우그룹의 부실로 투입된 공적자금이 29조 8천억원,
- ↑ 다만, 현대그룹의 분할은 IMF의 후폭풍이라기보다 정주영 회장 사후 2세들의 경영권 승계에서 발생한 다툼, 즉 왕자의 난이 원인인게 더 정확하다.
- ↑ 이 정도의 부채율은 상업은행의 부채율과 맞먹는다. 상업은행은 예금을 모조리 부채로 잡기 때문에 부채가 저렇게 될 수밖에 없는 회사다. 그런데 일반 기업이 저러고 앉았다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나?
- ↑ 1996년 말 30대 그룹 평균 부채율이 387%였다. 1998년 5월 부도난 30대 기업 거평 그룹이 부도 6개월 전까지 부채율 347%인 자사는 양호한 수준(두 번째 장, "부도 리스트~~~" 참조)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던 것.
- ↑ 물론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제는 조금만 경제상황이 안좋을것 같으면 긴축경영이다 위기상황이다 하여 신규채용억제, 인원감축, 아웃소싱, 비정규직 이용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지나칠 정도로 고용을 줄여 실업이 늘고 고용상황이 안좋아지는 부작용도 있다. 솔직히 1997년 이전 당시 대학만 졸업하면 기업에서 모셔간다는 것이 사실이었던 것은 결국에는 그 과잉투자 때문이었으니까.
- ↑ 말하자면 신입 100명이 필요한 기업이 외환위기 이전에는 향후 성장할 것을 대비, 입도선매 차원에서 정규직 120명을 채용했다면 지금은 향후 나빠질 것을 대비 40명만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40명은 비정규직, 아웃소싱 등으로 채용, 총원 80명을 가지고 100명분의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면 된다.
- ↑ 그 당시 고려대학교에서 김영삼을 특강자로 초청하였는데 이에 고대생들이 반발하는 뜻으로 김영삼이 탄 차가 학교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바람에 김영삼은 차안에서 수시간 밀봉된 상태로 있었으며 꼼짝없이 차안에 갇힌탓에 분유통에 소변을 봤다는 그야말로 굴욕을 당했다. 결국 김영삼은 강연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고대생 한 명이 김영삼에 손가락질을 하여 김영삼 개XX라고 욕까지 하는 바람에 민주산악회 회원들로부터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다. 결국 그로 인해 고려대 총장이 학생들을 대신해서 김영삼에게 사과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김영삼과 동행했다가 곤욕을 치른 인물중 하나로 당시 동아일보 회장이었던 故 김병관이 있다.
- ↑ 어느 나라를 봐도 나라가 부도가 난 때에 여당인 쪽이 차기 선거에선 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선 경선 결과에 불복하여 독자 출마한 이인제 후보가 여당표 500만 표를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김대중 후보의 당선은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 ↑ DJP 연합으로 인한 충청권 유권자들의 가세와 앞선 각주에 쓰여져 있듯 이인제 후보로 인한 득표 분산 등이 더 컸다는 분석도 많다. 자세한 건 15대 대선 문서를 참조.
- ↑ 부산 앞바다에 인공섬 해상신도시를 매립해 연결하는 노선으로, 이후 2011년 3월 30일에 개통한 부산 도시철도 4호선(반송선)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다. 서울의 3기 지하철 계획이나 부산 도시철도 5호선처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로 백지화되었던 다른 노선들은 대부분 경전철로 대체되어 재추진 중이지만, 이 경우 노선의 핵심인 부산 앞바다 인공섬 계획 자체가 무산되면서 부활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 ↑ 많은 비용이 드는 당시 대부분의 지하 유인 운전 중전철 계획들은 현재 지상 무인 운전 경전철(모노레일 포함) 계획으로 대체되어 각지에서 건설되거나 운행되고 있다.
신남역같은 막장환승역이 생기게 된 건 이거 때문이다 - ↑ 계획상 보면 알겠지만 3기 지하철 계획이나 각 지방들의 철도 사업은 지금 추진하려 해도 각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을 엄청나게 압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100% 세수만으로는 불가능했고, 처음에는 민자사업을 다들 고민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등 일부는 민자사업으로 사업이 성사된 것.
- ↑ 주니치에 입단한 선동열과 이종범.
- ↑
물론 구단을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데도 팀을 해체시켜버린 천하의 개쌍놈스런 기업도 있긴 했지만여자농구팀을 운영했던 다수의 팀들이 은행권 팀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는 상당히 큰 타격을 입었음이 분명하다. - ↑ 후지필름, 효성, 한일합섬, SK케미칼이 해체됐다.
- ↑ 실제로 외환위기 이전의 90년대 초반에 왠만큼 제대로된 대학을 다닌 학번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시기에는 취업준비생한테 공무원이나하라는게 오히려 모욕이었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 시기엔 공무원은 정말 갈데가 없을때나 가는 분야였다는것.
- ↑ SKY급 상위권 대학교에서는 행정고시(5급 공채)나 일부 학생들이 지망했으며, 7급은 대기업 입사보다 더 아래로 보는 시선이 강했지만 2010년대에 청년 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이들 대학교에서도 과거에는 거뜰여보지도 않았을 7급, 9급에 입문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 ↑ 여기서 '등산'을 '오락실'로 바꾸면 한스밴드의 히트넘버 '오락실'의 가사내용이 된다.
- ↑ 주요 대기업들은 1995-96년 연공서열제 폐지와 능력별 진급제 도입 이후.
- ↑ IMF 사태가 스태그플레이션의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이기 때문에 안그래도 높은 실업률 때문에 개고생인데 물가까지 덩달아 올라가버리니 대한민국 경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아닐 수가 없다.
- ↑ 특히 빅파이가 대표적인 예. IMF 이후로 같은 가격에 크기는 더욱 작아졌다가, 다시 커졌을 때는 가격까지 덩달아 올라가면서 식감이 푸석푸석해지고 맛도 오히려 퇴보해버렸다.
- ↑ 사실 정확히는 예전 같이 경제 발전이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론이 이제는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고 보는 편이 맞다. 2000년 대 초반에는 다시 회복되는 징조가 보이기는 했었으니까...
- ↑ 이 시기를 전후해서 러시앤캐시나 산와머니 같은 일본계 사채업체가 한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그동안 일본에서는 사채업이 잘 안 돼서 사채업이 자유로운 한국에 온 거 같다. - ↑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말 처럼 90년대 중반에 국민들의 과소비 문제가 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은 외환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외환위기의 원인인 과잉투자로 인한 일부산업의 호황으로 인해 일부에서 과소비가 일어난 것.
- ↑ 처음 협정이 체결된것은 2000년 ASEAN+3 재무장관회의 때였다.
- ↑ 사실은 한국보다 태국에서 몇개월 먼저 발생했고 동아시아 각국으로 번졌다.
- ↑ 유럽에 IMF 위기가 도래한 시기가 유럽인이 총재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것을 감안하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 ↑ "6.25 때부터 누적되어 온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내가 어떻게 해결하느냐?"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 ↑ 멀리 갈 것도 없이 저 위의 태국 관료 발언, 그리고 한국에게 내린 조치와 유로존 사태 초기 그리스에게 내린 처방
보약을 비교해 보라. 덧붙여 임창열 당시 부총리가 취임 기자회견에서 IMF 구제금융 지원을 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것도 컸다. 이미 정부와 IMF 사이에는 구제금융 지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의 회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