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오스만투르크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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Η ΙΣΤΟΡΊΑ ΤΟΥ ΑΝΑΤΌΛΙ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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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오스만 국
دَوْلَتِ عَلِيّهٔ عُثمَانِیّه
Devlet-i Aliye-yi Osmâniye[1]
150px
국기[2]국장[3]

[4]
1299~1922
표어دولت ابد مدت
(불멸의 제국[5])
국가(아래 국가 항목 참조.)
위치서아시아, 동유럽,
남유럽, 북아프리카
수도쇠위트[6] → 부르사[7]
부르사, 에디르네[8]
코스탄티니예
정치체제군주제[9]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10]
국가원수베이[11]술탄황제[12]
언어오스만 터키어(공용어)[13]
민족오스만인[14]
종교이슬람, 정교회, 유대교[15]
주요사건1299년 건국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1529년 1차 빈 포위
1683년 2차 빈 포위
1839년 탄지마트 개혁
1876년 헌법 제정
1908년 2차 헌법 제정
1915년 갈리폴리 전투
1919-1923년 터키 독립전쟁
1922년 해체
통화악체 → 쿠루쉬 → 리라[16]
성립 이전룸 술탄국, 그 외 여러 국가들[17]
멸망 이후터키, 그 외 여러 국가들[18]

1 개요

지중해의 세번째 주인
시대가 선택한 나라

터키 공화국의 전신.[19] 최후의 이슬람 제국이다.

오스만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오스만 튀르크 제국, 터키 제국 등등 부르는 명칭이 가지가지다.[20] 영어로는 오토만(Ottoman)이라고 쓰기 때문에 오토만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초대 파디샤(Padişah)인[21]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22]의 이름에서 따왔다.

유럽과 동아시아 위주인 한국 세계사 과목의 특성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은 역대 이슬람 제국들 중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었다. 한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냈다 하면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으며,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간지나는 명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거의 찬란할 정도. 유럽사에서 어찌보면 악의 축이나 마왕같은 이미지로, 서로 미친듯이 으르렁거리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이 상대라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연합군을 편성하는 일도 빈번했다[23].

잘 나가던 시절에는 터키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24], 서아시아[25], 카프카스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한창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16세기 후반~ 17세기 초중반에는 헝가리,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직접적인 대결 뿐만 아니라 저어어 멀리 있는 현대 인도네시아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게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저어어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의 물주 노릇을 했을 정도로 본격적인 세계 제국으로서의 국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로마 제국 이후 본격 두번째 3대륙 장악국가.[26] 뿐만 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27]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17세기 제국 인구가 대략 3천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300만명 정도, 동시기 프랑스 인구가 2천만을 넘었다.[28] 프랑스와 오스만 간 영토 크기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제국 동부 역시 오스만 제국보다 작다. 그나마 3천만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 때의 인구로, 말기인 1914년에는 2500만에 불과했다. 로마 동부(동로마 제국)의 인구와 농토가 로마 시대에 정점을 찍은 뒤 끊임없는 전란과 사막화로 인구와 농토가 지속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이미 풍요롭던 옥토의 상당수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버렸고, 살만한 땅도 끊임없는 전쟁과 간헐적인 학살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도 역대 이슬람 제국중 가장 많은 인구라는 점이다.[29]

참고로 상당한 장수왕조 중 하나인데 600여년간이나 존속하였다. 왠만한 이슬람 왕조는 단명하는 사례가 많지만 오스만 왕조는 600년이나 갔다.

2 역사

2.1 초기 역사


오스만 제국의 복식. 복식을 보면 우리가 아는 이슬람의 복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수 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고 그 군세를 대파한[30] 알프 아르슬란 이후 셀주크 제국 본가에서 떨어져 나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소아시아를 호령하던 룸 셀주크십자군 전쟁 크리를 맞은 이후로 심심하면 형제간 반목질과 반란으로 비실대면서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 이후 덩달아 비실대던 동로마 제국과 같이 아웅다웅하고 있었는데, 1243년 몽골이 아나톨리아를 침입해 룸 셀주크를 조공국으로 만들어버리고 50여년에 걸쳐 역사에서 증발될 때까지[31] 룸 셀주크는 분열을 거듭한다.

이 와중에 생겨난 몇몇 튀르크 소국들중 하나가 바로 오스만 조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 샤로 원래 이란 서부와 중앙아시아쪽에 있던 튀르크멘(Türkmen) 유목민의 부족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고향을 버리고 아나톨리아로 도피하여 룸 술탄국의 보호를 받았다. 몽골의 침입이 좀 잦아든 뒤에는 돌아가려 했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다 익사해버렸고[32] 그 후 그의 아들인 에르투으룰 가지는 그대로 정착하여 룸 술탄국편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수행해 공을 인정받아 오늘날 앙카라인근에 봉토를 받고 베이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오스만 제국의 창업주인 오스만 1세이며 그는 룸 술탄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33]하여 당대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 잔존 세력을 격파하고 2대 술탄 오르한 가지는 남동유럽에 교두보까지 구축하여 오스만 제국의 포스를 떨치고 일백년후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을 기반을 닦았다.

이후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소국들을 복속시켜가며 소아시아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한편, 팔레올로고스 황가 밑에서 이전보다 배이상 비실대던 동로마 제국[34][35]과 전성기를 막 지나 기울어가고 있었던 세르비아불가리아를 속국으로 삼으며 위엄을 떨치며 남동유럽를 뒤흔들고 우위를 다지며 역사책에 기술될 내용을 약간 더 앞당기는 듯 싶었으나, 동쪽에서 티무르라는 듣보잡이 나타나 칭기스 칸 가문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아나톨리아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방에 할거하던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을 병합해나가는데, 이로 인해 쫓겨난 군주들이 티무르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티무르가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 참고로,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를 점령할 당시 그 유명한 '코소보 전투'가 있었다. 세르비아의 입장에선 비록 코소보 전투에서 패했으나 전투의 무대가 된 코소보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성지로 여겨졌는데, 코소보가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알바니아계 민족이 하나 둘 뿌리를 박아 알바니아인들의 땅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이는 먼 훗날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단초가 된다.

남동유럽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이 연합한 십자군에게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대승하면서 싸움에는 자신있었던 당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트 1세는 이 듣보잡이 칭기즈 칸의 뭐라든 알 바가 아니었으나, 자기 동네를 건드리는 작자에게는 손봐줄 이유가 있었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호령하던 무시무시한 튀르크 군대를 직접 이끌고 출발했지만 더 무시무시한 중앙 아시아의 전투민족조차 굴복시킨 티무르에게 말 그대로 개털렸다. 바예지트 1세의 별명이 이을드름(Yıldırım), 터키어뇌제(雷帝)였다는 걸 생각하면 티무르의 무서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36]. 다만 이때 오스만군은 티무르군에게 정면 승부에서 박살난 것이 아니라, 티무르의 책략에 휘말린 것. 티무르는 전투 도중 양군 모두의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던 쿠북 강의 흐름을 인위로 바꾸어 오스만군이 식수로 활용할 수 없게 했다. 더군다나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오스만군으로 강제 편제된 튀르크계 소국 출신 병사들은 불만이 가득했기에 일제히 오스만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티무르군에게 가담했으니, 참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세르비아 등 당시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으로서 참전했던 기독교도 병사들 가운데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37].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히고 황후가 능욕까지 당하는 꼴을 보게 된 술탄은 굴욕을 이기지 못해 자살(또는 병사)하고 제국은 바예지트의 네 아들들 사이의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또한 이전까지 정복했던 튀르크계 소국들도 모조리 독립을 되찾아, 오스만 제국은 약 십여년간의 암울한 전간기를 맞으며 혼돈에 빠진다. 흡사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동로마 제국을 보는 듯한 이 전간기를 끝낸 것이 메흐메트 1세로, 제위 경쟁자였던 형제들을 모두 주살하고 아나톨리아와 유럽의 영토를 어느 정도 규합하는 데 성공한다[38].

이 시기(정확하게 적자면 1300년부터 1453년 즈음까지)의 오스만 지도층은 이슬람의 세력을 확장하고 방어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기는 가지(Gazi)들[39]과, 성직자, 학자 등 지식인 계층인 일미예(İlmiye)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튀르크계였는데, 동쪽에서 몽골이 맹위를 떨치자 서쪽으로 피신하다가 나름 훌륭한 지휘관인데다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오스만에게 주목하게 된 것. 이후 그들은 오스만 제국의 개국공신 세력으로서 군사와 행정 양쪽에 걸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지만, 그로 인해 술탄은 전제군주라기보다 가지와 일미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때때로 타협을 하는 등 제1인자에 불과하게 된다[40].

2.2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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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의 팽창기는 '14xx년 어디 정복'의 단순한 나열에 불과하게 된다.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군은 악마의 가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 정도로 취급받았다[41]. 또한 제국의 황제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스스로를 '로마황제(룸 카이세리)',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칭하였고 튀르크인들은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임을 자처했다[42].

'서로마'와 '동로마(비잔티움)'를 별개의 국가로 생각하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당대의 인식으로 따지든 정치적 · 역사적 정통성으로 따지든 여러모로 봐도 동로마는 로마로부터 떨어져 나온 별개의 제국이 아닌 로마 제국 그 자체였으니 로마 제국을 쓰러뜨린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로마 황제를 자처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주장을 두 가지 근거로 뒷받침했는데, 먼저 비잔티움 제국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를 수도로 하고 있는 제국의 군주라는 것. 그리고 선대 술탄인 오르한이 동로마 황녀와 정략결혼한 적이 있으므로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유럽 입장에서는 그런 거 알 게 뭐야 라는 태도로 나왔지만,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입장에서는 조금 거슬렸던 모양. 이후 쉴레이만 대제 시대에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체결한 조약에서, 쉴레이만은 '황제' 로 표기된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는 황제 칭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스페인 왕' 으로만 표기되었다.

물론 로마 황제는 대 유럽용, 술탄 내지는 파디샤는 이슬람 세계 전용 명칭이고 대내적으로는 튀르크인의 전통적인 군주 칭호인 칸이라고 통칭했다. 아타튀르크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망하자 칸 역시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 뿐만 아니라 라이벌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사파비 왕조들도 비슷하게 전근대 다민족, 다종교 제국들은 각기 다른 신민들에게 다른 직함과 명분을 내걸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러니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부터는 저런 다민족 제국들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해체되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만 하더라도 자국의 유럽계 신하들과 주변국들에게는 이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아랍계가 주도하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아라비아~이집트 일대는 정통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게서 양위 받은 칼리파로서의 권위를, 아나톨리아와 카프카스, 타타르족이 지배하는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에서는 칭기스 칸을 계승한 카간으로서의 권위를 강조했다. 이 중에서도 로마 제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유산은 종교적 차이를 떠나서 지중해권 전체의 아랍인들과 이집트 등지에도 강렬한 문화적 자취를 남긴 가장 힘이 센 직함에 속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특히 "대제"로까지 칭송받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는 오스만 제국의 최대 번영기로, 당시 카를 5세 치하의 서유럽 제국신성 로마 제국을 상대로 1차 빈 포위가 있었고, (결국은 물러나긴 했지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은 사치와 부의 극을 달렸으며 수많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오스만 제국 멸망 8년 뒤인 1930년에 무스타파 케말의 명으로 우편법 개혁이 단행되면서 공식화되었고, 그 이전까지는 콘스탄티노플의 아랍식 표기인 알 쿠스탄티니야(al-Qusṭanṭīniyya)의 터키식 발음인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로 불렸다. 다만 여기에서는 널리 알려진 바에 따라 이스탄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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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에 비견되기까지 하는 오스만 제국 최대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Mimar Sinan),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평가받는 푸즐리(Fuzûlî), '시인들의 술탄' 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키(Bâkî) 등이 모두 쉴레이만의 후원을 받으며 활약했다. 또한 쉴레이만 본인도 무히비(Muhibbi, '연인' 이라는 뜻)라는 필명으로 시를 남겼으며, 제국 각지에 수많은 모스크를 짓는 한편 메카와 예루살렘의 모스크를 수리했다.

1530년대에는 에게 해의 제노바인들과 베네치아인들의 거점이 남김없이 오스만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며 오스만 군대가 이탈리아에까지 상륙했고 로마 함락이 멀지 않은 듯 싶었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고위 관료와 야전군사령관들은 이에 치열하게 논박했지만, 이 관계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으로 극적으로 변한다. 이 정복으로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가끔 독립적인 행보를 했던 거물급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부와 권력을 빼앗았다[43]. 또한 이런 흐름은 데브시르메 출신자들에 의해 크게 강화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메흐메트 2세는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술탄은 이론적이긴 하나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고, 신료들에 대해 생사 여탈권마저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데브시르메란 예니체리 양성제도를 뜻하지만, 비단 예니체리뿐만이 아니라 기술자나 예술가, 종교인, 정치가 등도 양성했다. 징집한 소년들의 자질을 검사한 뒤, 군인 체질이다 싶으면 아제미 오을란(Acemi oğlan)이라는 과정을 이수시켜 예니체리로 만들고. 군인으로 만들어도 좋지만 그러기에는 영특함이 아깝다고 생각될 경우 이츠 오을란(İç oğlan) 과정을 가르쳐 관료로 만들었다. 또한 예니체리로 만든 뒤에도 건축이나 기타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난 재능을 보일 경우 그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정리하면, '데브시르메 = 예니체리 징집제도' 가 아니라는 말. 바로 위에 나오는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집권화를 확립' 이라는 말도, 사실 '예니체리' 가 아니라 '데브시르메 출신자' 로 바꾸어야 옳다.

2.3 몰락의 시작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오스만 제국의 쇠퇴 기점으로 만든다. 왜냐면 연이은 정복으로 인해 비대해진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쉴레이만 1세는 사법 제도의 정립과 예니체리의 확대 등 여러 관료주의적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것은 먼저 관료제의 비대화를 불러오게 된다. 또한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을 도와 개국공신으로 활약했던 가지와 일미예 세력이, 이 시대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했다.

메흐메트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치세 초기까지는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여당, 옛 개국공신 세력이 야당으로서 서로 정치적으로 견제하며 황제에 대한 충성을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데브시르메 징집자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두 세력을 서로 견제시키면서 전제군주로 군림해 온 황제의 입지가 굉장히 애매해지게 된다. 한편 예니체리의 엘리트 군사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이 붕괴되고 군벌화가 촉진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예니체리들의 전투력 쇠퇴로 생긴 공백은 크림 칸국의 군사력이 대신했다.[44] 또한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동안 하렘 출신 황후의 정치적 위상이 격상되었는데[45] 쉴레이만 사후 무능한 술탄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태후들이나 황후가 실질적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르면서 종전의 절대군주적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술탄들이 무능한데다 그저 하렘의 후궁들이랑 향락에 빠져사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46]

황후와 태후들, 거기에 황녀들의 힘[47]이 강해져 이들이 나랏일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휘렘 술탄이 황후로 책봉된 1534년부터 투르한 하티제 술탄(Turhan Hatice Sultan)의 권력이 쾨프륄뤼(Köprülü)[48] 가문으로 넘어간 1656년까지의 기간을 여인들의 왕조(Kadınlar Saltanatı)[49]라고 부른다.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엘리트 군제의 또다른 축이었던 티마르 제도와 시파히 또한 붕괴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제도들은 정복지의 부족으로 인해 붕괴가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 기병대였던 시파히는 티마르 제도를 통해 정복지를 봉토로 하사받았는데,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한계에 이르자 더 이상의 봉토가 나올리가 없었고 티마르 제도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티마르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시파히 또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 군사력의 양익이 모두 쉴레이만 1세의 치세 도중 무너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적 쇠퇴기에 들어가던 17, 18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튤립 시대(Lâle Devri)'라 불리며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 튤립 시대에 관한 글은 해당 링크 참조.

한편 쉴레이만 1세가 정복한 영토들도 모두 시원치않았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획득했던 영토들 중 타브리즈를 비롯한 상당한 부분은 결국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그냥 돌려줬고[50], 그나마 획득한 영토도 유지를 못했고 영토를 되찾으려는 페르시아와의 끝없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특히 동유럽 식민지들은 가혹한 세금과 통치를 일삼는 오스만 제국을 증오하여 틈만나면 반란을 일으켰다. 헝가리는 수탈과 전쟁으로 인해 수백년 동안 풍요로웠던 옥토가 졸지에 황무지로 변해버리면서 오스만 제국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달마시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에서 넘어오는 약탈자들과 해적들에 의해 피폐해졌다.

사실, 오스만 제국의 수탈로 헝가리의 경제가 막장이 되었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먼저 유독 헝가리에 대해서만 폭정을 자행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농민들이 숲과 늪으로 숨어든 것도 오스만의 폭정을 피해서라기보다 그 주변이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쟁터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다, 비록 헝가리 일부에 불과하지만 낙농업과 포도주 제조업이 활성화하여 수십만 마리의 소를 수출하고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으로 포도주를 수출하기도 했다. 즉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헝가리의 상황이 막장이 되었다고 하면 옳지만, 오스만의 폭정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쉴레이만 1세 사후, 베네치아와의 길고 긴 물량전과[51] 레판토 해전의 패전,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정체기에 들어간다.[52] 특히 1683년 시도한 2차 빈 포위는 침체하는 오스만 제국의 위신을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일발역전시킬 기회였지만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역관광당한다. 그래서 이 패배를 만회하려고 무스타파 2세가 친정한 젠타 전투는 더 참담했는데 8만의 병력으로 5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했것만 결과는 망했어요. 그야말로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53][54] 이 젠타 전투로 인해 유럽의 군세가 오스만을 능가한다는 것이 드러났고 더 이상의 대유럽 정복전쟁은 불가능해졌다. 이후 오스만은 유럽 정복을 포기하고 영토 유지에만 들어가게 된다.

이 와중에 스페인에서 시작된 물가 혁명이 오스만 제국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이미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폐화된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더이상 가중되는 부담을 버틸 수가 없었다. 정복지의 지주 계급으로서 군비의 약 절반 가까이를 지탱해주던 시파히들이 감당을 못하고 몰락하자 시파히들이 부담하던 군비까지 중앙에서 전부 떠안아야 했다. 따라서 끝없이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재정적 출혈은 이제 오스만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55]. 결국 1585년 오스만 제국은 태후 사피예 술탄과 관료들의 주도로 공용 화폐였던 "악체(Akçe)화"의 평가절하를 결정했으며[56] 이후 100년 동안 끔찍한 인플레이션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쉴레이만 1세 사후 20년 만에 오스만 제국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한편 이 위기는 쉴레이만 1세의 정책으로 막강한 정치 권력을 손에 쥔 이후 경제권까지 넘보기 시작하던 예니체리 계급의 세력 확장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예니체리들은 떨어진 수입만큼[57]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력으로 토지를 강탈하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해댔는데, 오스만 제국의 세수는 대부분 이런 농토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특권층인 예니체리들이 토지를 집어먹는만큼 가뜩이나 좋지못한 오스만 제국의 재정 위기는 심화되어 계속 악체화의 평가절하만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나라의 땅이란 땅은 다 집어먹은 예니체리들은 오스만 제국을 일종의 폴란드식 귀족 공화국으로 만들어 술탄을 쥐고 흔들며 입맛에 맞게 갈아치우기 시작했다. 이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개혁 시도를 무력으로 중단시켰던 폴란드의 귀족들처럼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악체는 오스만 시절의 화폐로 1악체는 1.154그램으로 만들어졌으며, 3악체가 1파라(para)의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평가절하를 한 방식이 전근대 화폐들이 다 그렇지만, 은에다 다른 금속(주로 주석이나 아연)을 섞는 식이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의 시대배경이 바로 이 시기라, 악체화의 평가절하가 소개되는데, 여기서는 예니체리들이 급료로 받은 악체화를 바다에 던져봤더니 그것이 물위에 뜨는 것을(...) 보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있다. 악체화의 무게는 굉장히 가벼운 편이라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된 오스만 제국은 결국 1687년에 쿠루쉬(Kuruş)를 도입했다. 이 쿠루쉬화는 120악체=40파라=1쿠루쉬의 가치를 가졌으며, 이후 1843년 1월 5일, 100쿠루쉬(=400파라=1200악체)의 가치를 가진 금화인 터키 리라화가 도입될 때까지 법정 최고액통화였다.

더욱이 18세기부터 서구화된 군사제도를 도입한 러시아가 계속 팽창하였고, 부동항을 얻는 것을 지상 과제로 내세운 러시아는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하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흑해와 지중해로의 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과 한판 벌이겠다는 말과도 같았고, 결국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과 계속해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벌이며 제국의 영토를 많이 빼앗아 축소시킨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흑해와 카스피해, 카프카즈 방면의 영토를 상당수 상실했으며, 동유럽의 식민지들도 유럽과 러시아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켜 죄다 독립하는 바람에 인구와 영토가 크게 약화된다. 게다가 유럽 국가들에게 항상 어찌못해서 유럽인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던 한 시대의 강자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며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1808년에 제위에 오른 술탄 마흐무트 2세는 사촌형이었던 셀림 3세가 니자므 제디드 개혁을 통해 왕권을 농단하는 예니체리들을 박살내려다가 도리어 암살당한 것을 잊지 않고 예니체리들을 안심시키면서 민심을 얻고 최신 병기와 새 편제를 도입해 친위대를 양성했다. 뒤늦게 조짐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아챈 예니체리들은 술탄을 쫓아내기 위해 평소 밥먹듯이 하던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마흐무트 2세는 몰래 양성한 친위군을 직접 지휘하여 예니체리를 개발살냈다. 이때 유럽에서 들여온 대포 15문의 30분에 걸친 포격에 예니체리 만여명이 믹서기 갈듯 갈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일생 일대이자 전 오스만 가문의 원수였던 예니체리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아직 진통이 남아있었다.

이 무렵의 권력 구조 양상을 보면, 이미 쉴레이만 1세 재위 기간 중 권력은 군주 개인에서 그의 해방 노예, 피후원자라 할 수 있는 데브시르메 출신자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데브시르메 관료들은 그 이전부터 통제받지 않는 특권 집단으로 자리잡은 예니체리 계급이나 태후, 황후와 결탁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장악했는데, 이는 북쪽으로는 헝가리와 크림 반도, 남쪽으로는 수단, 서쪽으로는 알제리, 동쪽으로는 코카서스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비대해진 제국을 술탄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해진 까닭에 영토를 다스리고 유지할 행정 관료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브시르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친히 군사 원정을 벌이거나 통치를 하는 황제는 필요가 없어지고 관료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황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이 시기에 즉위한 황제 가운데 대다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나 나이가 어려 태후의 섭정이 필요했다. 결국 오스만 2세무라트 4세의 경우를 제외하면 19세기의 마흐무트 2세와 압뒬하미트 2세가 통치하기 전까지 잠시동안이라도 문자 그대로의 전제군주로 군림했던 황제는 없었다.

국가의 권력은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재상과 파샤 가문으로 넘어갔다. 술탄의 권력이 있던 곳에는 예니체리 군벌을 등에 업은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의 자리는 새로운 관례들이 차지했다. 데브시르메에 의한 관료 등용은 지배 계급의 권력 세습으로 대체되었다. "아직까지는" 이스탄불의 중앙 정부가 실제로 통치권을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실권을 지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2.4 메흐메트 알리[58]

전통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방 총독의 권세가 대단히 강력했다.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 한해서지만 군사권과 행정권, 경찰권을 보유했으며, 제국의 중앙정부가 파견한 법관의 판결만 떨어진다면 법을 집행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다보니 무늬만 중앙집권이지 실질적으론 봉건제에다 지방자치나 다름없었다. 특히 황제의 명을 받고 총독으로 내려왔을 터인 이들은 제국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중앙정부가 파견한 법관을 우습게 보는것도 모자라 점차 독립적인 성향을 띄기 시작했고, 19세기가 되면 현 터키 국경 밖의 영토는 전부 준독립화했다. 당대 이집트도 실제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총독 통치 하에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59]. 본래 알바니아 출신이었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의 현대화를 추구하여 서구식 조병창을 건설하고 유럽식 교육을 도입하는 등 기세등등하고 있던 중에 그리스 독립전쟁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개털리는 걸 보자 겁도 없이 전쟁에 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보려는 수작을 부리다가 술탄이 거부하는 바람에 수틀려서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이집트군은 연이은 전쟁의 충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뒤 곧장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개혁이 완료되지도 않았고 예니체리가 남긴 상처가 여러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어처구니 없는 졸전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알리의 이집트군을 막을 힘이 없다보니 유럽 열강의 도움으로 제위와 팔레스타인 영토는 보존했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시리아를 통째로 무함마드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외교권에 치명타를 주어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을 더욱 깔보게된다.

분통이 터진 마흐무트 2세는 개혁을 가속하면서 무함마드 알리를 손봐줄 그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무함마드 알리가 시리아를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곧바로 8만 대군으로 시리아를 침공했다가 4만여명의 이집트군의 반격에 의해 개털렸으며 덤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전 오스만 제국 해군이 무함마드 알리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흐무트 2세는 홧병으로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을 보면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형편없고 약해졌는가를 알수 있다.

황당해진 유럽 열강들은 이집트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프랑스가 이집트를 후원하고 있었으므로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가 알아서 해주리라고 여기고 가볍게 씹어버렸다. 결국 영국이 함대를 파견하고 침공 위협을 해보이자 그때서야 침공을 중단하고 전 시리아를 도로 돌려주고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알리는 최초의 목적인 이집트와 수단의 세습을 확립했고, 이후 195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를 설립하게 된다.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총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권력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무함마드 알리의 후손들은 1914년부터 술탄을 자처하였으며, 1922년 영국의 보호국이 됨과 동시에 영국이 이집트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왕이라는 칭호를 쓴게 된다. 이로서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다만 당시 기록을 보면 이때 이집트에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중 가장 돈이 많이 들어오는 지역이 남동유럽 다음으로 바로 이집트였다.(...) 그래서 이집트가 완벽하게 독립했을때는 오스만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2.5 민족주의와 제국의 해체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이후 전 유럽을 휩쓴 민족주의사상은 오스만 제국에도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남동유럽지역의 그리스인(아직까지는 그리스인이라기보단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지만)들은 한때 오스만 제국의 다수 민족을 차지하고 있었고, 비록 즘미라는 이름으로 무슬림보다 못한 대우를 받기는 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사업과 무역을 통해 부를 이루고,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가문들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파나리오테스(Φαναριώτες)라고 불리는 이 가문들은 오늘날 이스탄불의 페네르(Fener, 오늘날에도 그리스인이 많이 사는 동네)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파나리오테스의 발생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이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탄생한 신흥 부르주아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파나리오테스 다수가 그리스인이지만, 훗날의 루마니아인과 알바니아인을 포함하는 이들 기독교인들은 16세기 후반에 서서히 출현하기 시작해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남동유럽 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점차 부를 축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늘날도 페네르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성당 근처에 저택을 짓고 모여 살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에 따라 제국내 모든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세속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선출에 개입하는 등 점차 큰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과 서구의 정치, 외교적 교류가 증대하기 시작하는 18세기초부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서방교류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인 드라고만(Dragoman)을 세습, 독점하기 시작하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이에 대한 대가로 도나우 공국의 대공이 되어 정치적 권력을 키워나갔다. 이로서 18세기 내내 그리스인의 영향력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나날이 높아져만 갔으며, 이 시기 그리스인들의 힘을 억압하기 위해 이슬람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특정 복장의 제한, 말 사용의 제한, 거주지의 제한, 가옥 크기의 제한 등등 제약을 가하려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당연히 기득권을 획득한 파나리오테스들은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되는 오스만 제국에 충성했으며, 오스만 제국도 서구와의 외교, 협상, 무역을 위해서 이들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호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은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유입하는 19세기 초에 깨어지기 시작한다.

파나리오테스 가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빨리 서구문명을 접할 수 있었으며, 거상, 드라고만, 전문통역사 등으로 관직에 진출한 파나리오테스들은 자식들을 서구식으로 교육시켰다. 그리고 서구식 교육에서 고대 그리스 고전, 문학, 법 등을 통해 그리스적 정체성을 굳건히 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 안에서 고대 그리스의 판헬레니즘적 마인드를 갖춘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14년 에데사에서 파나리오테스들이 주축이 되어 성립한 비밀결사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 필리키 에테리아)는 그리스 민족의 독립을 목적으로 꾸려졌으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당시 파나리오테스 가문이 통치하던 도나우 공국에서 독립된 그리스민족의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오스만 제국 또한 이를 알고있었으며, 민족주의의 위험성 또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인에 대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정교회를 믿는 것은 기존대로 허락하되, 그리스 역사교육을 금지시키고 그리스어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가기 시작하는 독립주의자들은 성당을 중심으로 '비밀학교'를 열어 교육을 계속했으며, 그리스인의 민족의식을 각성시키는데 주력했다. 이렇게 해서 1821년 3월 6일, 친우회가 주축이 되어 도나우 공국에서 반 오스만 봉기가 일어났다. 이 반란은 곧 오스만 제국에게 제압되었으나, 이에 자극받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들이 3월 17일 반란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10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θεόδωρος κολοκοτρώνης)가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도시내의 터키인 3만 6천명을 학살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반란의 불길은 크레타, 마케도니아, 중부 그리스에서도 이어졌으나 결과적으로 성공한 반란은 펠로폰네소스에서의 반란이었으며, 이 와중에 키오스섬 의 학살, 유럽의 개입, 나바리노 해전 등이 이어져 1832년 그리스 왕국이 건국되었다.

Theodoros_Kolokotronis.jpg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의 초상

한편 그리스 독립전쟁은 이전까지 간혹 그리스인들이 벌여온 반란과 본질적으로 배경 및 내용이 달랐다. 이전까지의 그리스인들의 항쟁은 어디까지나 반 이슬람,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명분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 독립전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 정교를 바탕으로 민족적인 자긍심과 민족성에 호소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 민족주의를 토대로 그리스인이 왜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해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야 하는지, 그리고 그리스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민족주의사상을 통해 세웠다는 점이다. 민족주의 이전까지 단순히 로마인(Rumlar, Ρωμαίοι)이라고 불린 - 그나마도 그리스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모든 민족들을 이렇게 불렀다. -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엘리네스(Έλληνες, Hellenes)라고 부르고 자신들의 민족적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찾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의 독립 이후 민족주의는 들불처럼 오스만 제국에 번지기 시작했으며, 곧 남동유럽지역의 보스니아인, 알바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의 민족들도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며 하나둘 봉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루마니아인의 경우 파나리오테스가 다스린 도나우 공국에 속해있으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상류층들은 그리스어로 의사소통하고 그리스어로 예배를 보는 등 철저히 그리스화되어 있었지만 차츰 오늘날의 루마니아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각의 민족집단들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고대 일리리아, 고대 불가르족, 고대 로마인 등등 스스로 민족사를 이데올로기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등 대규모 주작 재해석, 언어순화운동이 펼쳐지지만 이건 이 항목과는 해당사항이 없으니 생략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서는 제국 내 민족들의 독립시도를 저지하고,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일치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839년 탄지마트 개혁은 즘미와 무슬림의 차이를 없애고, 이전까지 무슬림에게만 부과되었던 의무병역을 즘미에게도 부과하되 즘미에게만 부과되던 종교세를 면제하는 식으로 오스만 제국내 모든 신민들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하지만 즘미들은 군대가기를 싫어해서 병역의무의 부과에 대해 "차라리 세금을 내겠다!"며 반발하고, 무슬림들은 무슬림 나름대로 비무슬림과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는 것에 반발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안습한 전쟁 승률을 보면 누구든 군대가고 싶어하지 않았겠다 탄지마트 개혁은 이 뿐만 아니라 유럽열강의 간섭, 제국내 반동세력의 반발 등도 원인이었지만 이로서 실패로 끝나고, 그 대신 나타난 압뒬하미트 2세(II. Abdülhamit)는 탄지마트 시대의 중앙집권 강화는 유지하되 오스만 제국의 구심력을 칼리파로 대표되는 범 이슬람주의로 상정했다. 심지어 제국내 공용어를 아랍어로 하려 하는 등 이 시기에는 남동유럽지역과 중동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을 기독교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개입하려는 러시아프랑스에 맞서 이슬람을 중심으로 뭉치려 했다. 오스만 제국사 전체에 걸쳐 기독교, 소수종교, 알레비파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했던 시기도 이때의 일이다. 그리스의 독립이후 드라고만에 채용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박해와 이에 맞선 독립요구도 이 시기에 불거진 문제이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은 찢어지기 시작했다.

2.6 멸망과 새로운 시작

비록 오스만 제국의 중근동 영토의 정세가 일시적으로 안정되기는 하였으나, 반대편 유럽 영토는 1821년부터 1827년 사이에 발발한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는 등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탄지마트(Tanzimat) 개혁을 통해 근대식의 의회제도와 헌법을 도입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내 보수세력의 반발과 속셈을 알아차린 열강의 간섭으로 인해 좌절한다. 1853년 러시아와의 사이에서 발발한 크림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유럽연합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하였으나 제국의 피폐화를 가속시켰으며, 승리도 부질없이 20년 후 다시 쳐들어온 러시아에게 결국 참패했다.(제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렇게 동유럽에 영향력을 잃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형국의 유지를 위하여 범 이슬람 주의,범 튀르크 주의를 제창하고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일으키는등 국내의 소수민족 및 불만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독일에게 접근[60]하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0월 29일 동맹국 측에 참전을 결정[61],망했어요 결국 패전국이 되어 민족자결주의에 의해 나라가 갈기갈기 찢겨나가게 된다. 거기다 이 틈을 노려 그리스까지 고토수복을 외치며 쳐들어온다.

그리고 이때 일어난 사람이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아타튀르크였다. 그는 본래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으로 아나톨리아 내륙을 장악한 독립분자들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1919년 삼순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독립군에 가담하고는 연합군에 항복한 술탄 정부를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같은해 시바스에서 대국민의회(Türkiye Büyük Milli Meclisi, TBMM)[62]를 열고, 군대를 모아 아나톨리아 앙카라를 거점으로 3년에 이르는 터키 독립전쟁을 펼친 끝에, 그리스군을 쳐부순 후 술탄을 폐위시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그다음엔 그리스군을 격퇴하였고 연합군과 새로운 협상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서 오스만 제국은 1922년 부로 멸망하고, 터키 공화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도도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이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멸망으로 그나마 뭉쳐 있던 이슬람 세계는 57개의 국가로 분열했고 더이상 뭉치는 일이 없다. 뭉치더라도 그저 이득에 따라 할뿐이지 나중에는 이슬람 국가들끼리 배신하거나 협조도 하지 않으니 제대로 뭉치지 않는다. 오스만 제국의 멸망과 이슬람권의 분열은 국제 무대에서 이슬람권의 추락을 의미했다. 그나마 아랍 연맹과 APEC, 이슬람 협력기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 기구들은 그저 이득을 위해서 뭉친 연맹에 불과해서 진정한 연합은 아니다.[63] 이후 이슬람권은 지금까지도 서구에 정치, 경제, 기술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터키에서는 서구에 대한 반감과 열등감이 굉장히 커서 유럽이 두려워하던 오스만 제국을 동경하는 이들이 많다. 터키 역사학계에서도 오스만 제국을 많이 띄워주고 있다. 터키 정부도 국가의 자존심을 세울때 항상 내세우는 것이 오스만 제국이다.이거 말고는 자랑할게 없으니까 물론 아랍 나라들은 개소리 작작하라고 이를 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인들 입지는 되려 기독교 믿던 그리스나 불가리아같은 민족보다 하등하게 취급되었으니까.

3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은 크게 1867년 이전과 그 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 해 1월 21일을 기하여, 최상위 지방행정구역이 에얄레트(Eyalet)에서 빌라예트(Vilayet)로 변화하기 때문.

먼저 1867년 이전까지 지방의 최상위행정구역이었던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일릭(Beylerbeylik)또는 파샬륵(Paşaıik)라고 했는데, 1365년 무렵에 오스만 제국령 남동유럽를 통째로 '루멜리 에얄레트(Rumeli Eyalet)' 로 묶은 것이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남동유럽로 세력을 확장하고는 있었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와의 사이에 동로마 제국 영토가 놓여 있어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었는데[64], 이에 루멜리 전체를 지방행정구역으로 묶어 관리하려던 것. 이후 바예지트 1세가 루멜리로 군사 원정을 떠나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도 아나돌루 에얄레트(Anadolu Eyalet)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이게 되었고, 1468년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튀르크계 공국이었던 카라만 공국을 멸하고 그 땅에 카라만 에얄레트(Karaman Eyalet)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15, 16세기까지 셀림 1세, 쉴레이만 1세 등이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이면서 에얄레트가 계속해서 설치되게 된다. 각 에얄레트는 베일레르베이(Beylerbey)[65]라 불리는 총독이 관할했으며, 하위단위인 산작(Sancak)으로 나누어졌지만 일부는 시파히들에게 하사하는 영지로 편성되기도 했다. '메흐메트 알리' 문단에 소개된 것처럼, 베일레르베이들은 각자가 담당한 에얄레트 내에서는 군사권, 행정권, 경찰권 등 폭넓은 권한을 보유하며 그 지방 내에서는 황제와 거의 유사한 권한을 행사했다.

각 에얄레트 아래에는, 산작이라 불리는 하위행정구역이 있었다. 각 산작은 산작베이(Sancakbey)라 불리는 지방관이 관할했으며, 에얄레트의 하위단위인데다 그만큼 관할 범위도 좁다는 것을 제외하면 에얄레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다만 처음 생겨난 것은 이쪽이 조금 더 일러서,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40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또한 각 산작 아래에는 카자(Kaza)라 불리는 최하위 행정구역이 있었는데, 이쯤 되면 향촌 단위로 카디(kadi)라 불리는 법관이 통치하거나[66]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기 이전에 유력한 부족이나 귀족이 통치하고 있던 경우 자치를 인정해주었다. 특히 아나톨리아 동부의 쿠르드족과 남동부의 아랍인들은 동쪽에 위치한 강력한 적인 사파비 왕조에 맞서기 위해 이들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화국시기 직전까지도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에얄레트와 산작은 지방행정단위이기도 했지만, 그 동시에 군대 편제이기도 했다. 먼저 베일레르베이와 산작베이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각자 맡은 구역에 대한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산작베이는 각자가 맡은 산작이 속한 에얄레트를 다스리는 베일레르베이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각 베일레르베이는 원정을 총지휘하는 황제 또는 재상의 지휘하에 들어가거나 원정의 규모가 작다면 베일레르베이가 총사령관을 맡는 체제였기 때문. 실제로 산작라는 말 자체가 터키어로 '군기' 라는 뜻이다.

1867년 이전까지의 최상위 행정구역이었던 에얄레트와 그를 대신하게 된 빌라예트의 가장 큰 차이는, 각 에얄레트(또는 빌라예트)의 크기가 대체로 일정한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그때그때 정복한 땅에 설치되었던 에얄레트는 크기가 완전히 제각각이어서 두어 개의 산작만을 거느린 에얄레트가 있는가 하면[67] 스무 개가 넘는 산작을 거느린 에야레트도 있을 정도였는데[68], 오스만 제국이 잘 나갈 때야 지방행정구역을 어떻게 짜든 상관이 없었지만 남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심심하면 러시아가 쳐들어오고 하는 상황[69]에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지방행정제도가 필요했던 것. 1878년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빌라예트 체제는 다음과 같다. (터키어)[70]

4 평가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400여년 가까이 지배하여 역사상 최장기간 지배한 기록을 세웠다.[71] 최전성기의 로마 제국부터 19세기의 슈퍼파워 영국, 20~21세기 슈퍼파워 미국조차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장기간, 그것도 완벽히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기록. 미마르 시난의 작품들로 대표 되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비잔티움 건축 양식을 계승한 돔형 지붕의 거대 모스크들은 북쪽으로는 헝가리로 부터 시작하여 유럽에서는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그리스,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에 걸쳐 남쪽으로는 이집트, 튀니지, 수단 해안 지대, 예멘까지 엄청나게 넒은 지역에 오랜 시간 동안 수난을 당하면서도 꿋꿋히 남아 있어 오스만 제국의 세계사적 위세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증언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오스만 제국 국력의 원천지이자 정치적, 경제적 핵심지였던 지방은 오랫동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반도 내지 등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해안 도시들과 '로마인들의 땅'이란 뜻인 루멜리아라고 불렸던 남동유럽의 현대 그리스,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지방 일대였는데, 이 동네가 19세기 이후 각각 민족 국가로 독립하면서 소위 과거사 청산을 위해 많은 수의 오스만 모스크들과 목욕탕, 정부 건물 등 사적들이 기독교 교회로 강제 개조하거나, 심한 경우 아예 국가 차원에서 무신론을 밀었던 공산 정권 시절 방기, 혹은 파괴당했다. 물론 독립 투쟁의 열풍이 지나간 이후 이 또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사적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 보존, 유지한 경우도 많다.

이에 덧붙여 추가로 설명하자면 학계 내부에서라도 민족주의적 앙금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최근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런 유럽쪽 과거 속주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자국 통치 시기를 무조건적인 암흑의 시대로만 규정하고, 오스만의 유산에 대해 호의적인 터키 쪽에서도 핀트가 심하게 어긋난 근대 민족국가적 관점이나, 이슬람주의적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을 평가하려는 경향이 강하여 현대적 의미의 동-서양 구분을 뛰어 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정체성이 왜곡 당한 면이 심했는데, 막상 오스만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했던 16~17세기 시절 오스만 제국의 핵심 알토란 땅은 우리가 생각하는 '중동'이 아니었다. 남동유럽, 아나톨리아 밖의 영토 중에서는 기껏해야 시리아의 알레포, 다마스쿠스 정도가 쓸만한 땅이었다 [72]. 이집트는 복속 이후로도 토착 맘루크 세력의 견제 때문에 제국 중앙의 권력이 잘 안 닫았으며,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두 성지가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빼면 쓸모 없는 사막이 대부분인 불모지, 튀니지, 알제리 등의 북아프리카 일대는 실질적으로는 제국의 직할지가 아니라 현지 사략 해적 군벌들의 영지에 가까웠고, 현대 이라크지방 또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의 접경 지대로서 안정적으로 개발하기 힘든 땅이었다. 험준한 산맥 지형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밀집 되어 있지 않고, 현지 토착 민족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중앙의 통제가 힘든 동부 아나톨리아캅카스 산맥이야 말 할것도 없고.

이 와중에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으로 운영하며 정치, 군사 엘리트들이 대거 배출 되었고, 인구 또한 가장 많았던 비옥하고 중요한 알토란 땅들은 당연히 코스탄티니예를 필두로, 셀라니크, 위스퀴프, 얀야, 이즈미르, 에디르네, 트라브존, 마나스티르, 필리베, 사라이보스나, 이슈코드라, 퓌르졘, 베오그라드, 테메슈바르 등의 현대 아나톨리아 해안가, 그리스, 남동유럽에 걸쳐져 있던 땅들인데, 이들은 로마 제국 동부의 요충지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을 통해 헬레니즘에 중점을 둔 동일한 문명권을 형성하던 지역들이다[73]. 오스만 제국의 술탄 파디샤들은 이러한 지정학적, 문명적 연속성을 근거로 제정 러시아 보다 백년 먼저, 그것도 상당한 세월 동안 더욱 설득력이 있게 로마의 카이사르 (Kayser-i Rum)를 자처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 지방 사람들이 보아왔으며 익숙했던 로마 제국의 일면은 게르만 족의 침공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300년 이상 제국의 단절을 겪었던 현대 서유럽 지역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끊임 없이 계속 이어져 왔던 그리스-오리엔트 쪽 측면이기도 했고.

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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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군사 조직은 크게 지방의 군사봉토를 받아서 그곳에 거주를 하면서 징세권을 행사를 하던 지방 상비군인 시피히와 중앙 상비군인 카프쿨루가 있었다. 카프쿨루의 인원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제국에 거주를 하는 그리스도인 자제들을 징집을 하는 것으로 충당을 했다. 카프쿨루 군단은 수행임무에 따라서 7대 단위 부대로 구성이 되었다. 부대의 구성은 아제미, 예니체리, 제베지, 톱추, 토파라바즈, 훔바라즈, 라음즈의 7개 단위로 구성을 했다. 그 중에서 최정예인 예니체리는 화기가 등장을 하던 16세기에 그 중요성이 부각이 되어서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독립된 공군을 창설, 운영한 나라다. 오스만제국에 비행기가 들어온건 1909년 11월에 벨기에인 파일럿 바롱 드 카테르(Baron de Catters)가 이스탄불에서 시연한 부아생(Voisin)형 비행기로 중량 500kg, 최대시속 76km로 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이를 본 술탄 메흐메트 5세가 앞으로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을거라고 판단하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청년 튀르크들과 함께 1911년에 공군을 창설했으며 초기에는 17기밖에 안되는 비행기를 가지고 정찰및 전령목적으로 운영했지만 1912년에 발발한 남동유럽 전쟁과 같은 해에 있었던 리비아 전쟁에서 대활약을 하고, 공화국 성립 이후 터키군이 이 부대를 인수받아서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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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남동유럽 전쟁당시 오스만 공군의 모습

한편, 오스만 제국은 인류 역사상, 적어도 유럽사상 최초로 군악대를 운용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고대부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한 용도로 나팔소리 같은 것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순수하게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목적만으로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오스만 제국의 정예군인 예니체리. 예니체리 내에 딸린 군악대를 메흐테르(Mehter)라고 하는데, 이는 해당 항목 참조.

6 국가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본격적으로 서구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마흐무트 2세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도 주된 국가행사때 예니체리에 속한 군악대인 메흐테르[74]가 행진곡을 연주하는 식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국가'라는 개념을 도입한건 그가 처음. 때문에 오스만 제국 멸망기까지 사용된 국가들은 전부 서구풍, 특히 고전주의적인 요소와 터키 음악의 음계를 가미한 형태를 갖고 있으며, 장엄하다. 한편 듣고있으면 왠지 음울해서 제국 말기의 느낌이 전해지기도 한다. 하미디예 행진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사가 없는것도 특징.

오스만 제국의 국가는 마흐무트 2세 이후 새로운 파디샤가 즉위할때마다 바뀌었으며, 마지막 파디샤인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자기만의 국가를 갖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국가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능한 것은 링크도 함께 첨부한다.

마흐무디예 행진곡(Mahmudiye Marşı): 사용시기는 마흐무트 2세 제위시기인 1808-1839년, 훗날 오스만 제국으로 귀화한 이탈리아인 주세페 도니체티(Guiseppe Donizetti)와 그의 형제인 가에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가 작곡했다.

마흐무디예 행진곡 듣기


메지디예 행진곡 긴 버전



짧은 버전

메지디예 행진곡(Mecidiye Marşı): 압뒬메지트 제위시기인 1839-1861년에 사용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주세페 도니체티가 작곡했다. 두 종류가 있는데, 긴 버전과 짧은 버전이 있다.

아지지예 행진곡(Aziziye Marşı): 압뒬아지즈 제위시기인 1861-1876년에 사용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인인 칼리스토 구아텔리(Callisto Guatelli)가 작곡했다.

메지디예 행진곡(Mecidiye Marşı): 1876년에만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 시기 파디샤인 무라트 5세가 즉위 93일만에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하미디예 행진곡(Hamidiye Marşı): 압뒬하미트 2세 제위시기인 1876-1909년에 사용되었으며, 터키인이고 메흐테르 대장(Mehterbaşı)인 네지프 파샤(Necip Paşa)가 작곡했다. 그 때문인지 유일하게 터키색이 강한 음악이다. 유일하게 가사가 있는 것도 특징. 언어개혁전이라 당연히 오스만 터키어로 되어있지만, 번역본도 함께 첨부한다. 오스만 터키어와 오늘날의 터키어가 어떻게 다른지는, 항목 참조. 다만 여기에서 간단히 말하자면, 오스만 터키어에 섞여있던 아랍어, 페르시아어에서 온 낱말들을 모조리 들어내고 사어나 사투리를 동원해서라도 순수 터키어로 그 자리를 메운 것이 오늘날의 터키어라고 보면 된다.

내용은 대략 오스만판 장공기념가 같다고도 하는데 전반부는 대충 맞지만, 후반부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안다면 웃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는 내용. 철도라든가 조선소라든가 하는 '근대화' 사업을 벌인 것은 그나마 맞다고 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탄압하지 않았다거나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후반부는 얼토당토 않다. 압뒬하미트 2세는 오스만 제국 최후의 전제군주로, 암살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은 별궁에 틀어박혀 외부와의 소통을 극도로 자제했으며 수많은 사진사와 비밀경찰, 언론 검열을 통해 제국을 통치했다. 그러니 탄지마트를 비롯하여 '근대화 개혁' 의 맛을 본 국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수밖에 없었고, 그런 나라 꼴을 보다못해 봉기를 일으킨 세력이 세계사 교과서에까지 나오는 청년 튀르크당.전후 맥락 따지면서 들으면 웃지 않을 수 없다는 점까지 장공기념가와 비슷하다. 하지만, 철도나 조선소 부분은 그냥저냥 들어줄만한 하마디예 행진곡과 달리 장공기념가는 초장부터 인류의 구원자 드립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네지프 파샤가 작곡한 서구적인 음악도 사용했다.

Döşetti Hicâz'a demir yolları
그 분은 히자즈에 철도를 놓았네
Kuruldu Hamidiye Alayları
하미디예 연대를 설립했네
Hudûdlara koştu onbinlerce cân
수만의 적들은 국경너머로 달아났다네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Haliç'te yeni bir tersane kurdu
그 분은 할리치에 새로운 조선소를 세웠네
Denizaltıları deryaya vurdu
그 분의 잠수함들이 대양을 누비네
Dar-ül aceze ve kuraba kurdu
다륄아제제와 구빈원을 세웠네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İlim, fende, teknikte kalmadı geri
그 분은 학문,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물러서지 않았네
Nice mektepler, yollar onun eseri
얼마나 많은 학교와, 길들이 그 분의 작품이던가
Devrinde olmuştuk cihan devleti
우리는 혁명을 통해 이루었네, 세계의 국가를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Ezmedi ezdirmedi hiçbir kimseyi
그 분은 어느 누구도 억누르지도, 억누르게하지도 않았네
Vermedi verdirmedi bir karış yeri
영토 일부도 내주지도, 내주게 하지도 않았네
Halkının hizmetinde hakk'ın bir eri
인민에 헌신하여 권리를 주셨네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İsterdi milleti hep yüce olsun
그 분의 신민들은 원했네, 그 분의 영광이 드높기를
Osmanlı'nın şanı dünyaya dolsun
오스만인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Huzurunda cihan selama dursun
안식 속에서 이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기를
Serdâr-ı Hakan Abdülhamîd Han
임금들의 사령관이신 압뒬하미트 한
Cennet-Mekân Sultan Abdülhamîd Han.
천국에 앉으신 술탄 압뒬하미트 한


같은 시기에 사용된 서구풍의 하미디예 행진곡



레샤디예 행진곡(Reşadiye Marşı): 메흐메트 5세 레샤트의 제위시기인 1909-1918년에 사용되었으며 이탈리아인인 이탈로 셀벨리(Italo Selvelli)가 작곡했다.

7 역대 황제[75] 목록

※ 참고로 여기 나온 황제 이름들은 터키식 발음이다. 아랍식 발음은 좀 다르다. 예를 들어 메흐메드 : 무함마드, 압뒬하미드 : 압둘하미드[76], 쉴레이만 : 술라이만 같은 식. 또한 현대 터키어에서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인명들 중에 끝이 'd'로 끝나는 것을 't'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이를테면 메흐메트(Mehmet), 무라트(Murat) 같은 이름들을 터키 공화국 이전에는 아랍 문자의 'd' 음가로 표기하여 메흐메드(Mehmed), 무라드(Murad)로 표기했다는 것이다. [77] 또한 오늘날에도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옛날식 표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이 d와 t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

대수이름즉위년일퇴위년일비고
00에르투으룰 가지(Ertuğrul Gazi)[78]12301281
01오스만 1세(Gazi Birinci Osman)(1281)12991324
02오르한(Orhan Gazi)1324?1360
03무라트 1세 휘다벤디갸르(Birinci Murat Hüdavendigâr)13601389.6.15
04바예지트 1세 '뇌제'(Yıldırım Sultan Bayezit)1389.6.151402.7.20
혼란기 (1402~1413)[79]
05메흐메트 1세(Birinci Mehmet)1413.7.51421.5.26
06무라트 2세(İkinci Murat)[80]1421.6.251444
07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Mehmet)[81]14441446
-무라트 2세(İkinci Murat)[82]14461451.2.3
-메흐메트 2세 '정복제'(Fatih sultan İkinci Mehmet)[83]1451.2.31481.5.3
08바예지트 2세 '정의제'(Veli İkinci Bayezit)1481.5.191512.4.25
09셀림 1세 '엄격제[84]'(Yavuz Sultan Selim Han)1512.4.251520.9.21
10쉴레이만 1세 '대제', '입법제'(Kanuni Sultan Süleyman)1520.9.221566.9.5최장 즉위(45년 359일)
11셀림 2세(İkinci Selim)1566.9.291574.12.21
12무라트 3세(Üçüncü Murat)1574.12.221595.1.16
13메흐메트 3세(Üçüncü Mehmet)1596.1.271603.12.20
14아흐메트 1세(Birinci Ahmet)1603.12.211617.11.22
15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85]1617.11.221618.2.26
16오스만 2세(İkinci Osman)1618.2.261622.5.19
-무스타파 1세(Birinci Mustafa)[86]1622.5.201623.9.10
17무라트 4세(Dördüncü Murat)1623.9.101640.2.8
18이브라힘(İbrahim)1640.2.91648.8.8
19메흐메트 4세(Dördüncü Mehmet)1648.8.81687.11.8
20쉴레이만 2세(İkinci Süleyman)1687.11.81691.6.22
21아흐메트 2세(İkinci Ahmet)1691.6.221695.2.6
22무스타파 2세(İkinci Mustafa)1695.2.61703.8.22
23아흐메트 3세(Üçüncü Ahmet)1703.8.221730.10.1
24마흐무트 1세(Birinci Mahmut)1730.10.21754.12.13
25오스만 3세(Üçüncü Osman)1754.12.131757.10.29
26무스타파 3세(Üçüncü Mustafa)1757.10.301774.1.21
27압뒬하미트 1세(Birinci Abdülhamit)1774.1.211789.4.6
28셀림 3세(Üçüncü Selim)17894.71807.5.29
29무스타파 4세(Dördüncü Mustafa)1807.5.291808.7.28
30마흐무트 2세(İkinci Mahmut Han)1808.7.281839.7.1
31압뒬메지트 1세(Birinci Abdülmecit Han)1839.7.11861.6.25
32압뒬아지즈(Abdülaziz Han)1861.6.251876.5.30
33무라트 5세(Beşinci Murat Han)1876.5.301876.8.31최단 즉위(93일)
34압뒬하미트 2세(İkinci Abdülhamit Han)1876.8.311909.4.27
35메흐메트 5세 레샤트(Beşinci Mehmet Reşat Han)1909.4.271918.7.3
36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Altıncı Mehmet Vahidettin Han)1918.7.31922.11.1최후의 술탄
37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1922.11.191924.3.3최후의 칼리파
폐위 이후 오스만 가의 수장[87]
-압뒬메지트 2세(Halife İkinci Abdülmecit)1924.3.31944.8.23
38아흐메트 니하트(Ahmet Nihat Osmanoğlu)1944.8.231954.6.4
39오스만 푸아트(Osman Fuat Osmanoğlu)1954.6.41973.5.19
40메흐메트 압뒬아지즈(Mehmet Abdülaziz Osmanoğlu)1973.5.191977.1.19
41알리 바스프(Ali Vâsıp Osmanoğlu)1977.1.191983.12.9
42메흐메트 오르한(Mehmet Orhan Osmanoğlu)1983.12.91994.3.12[88]
43에르투으룰 오스만(Ertuğrul Osman Osmanoğlu)1994.3.122009.9.23
44오스만 바예지트(Osman Bayezit Osmanoğlu)2009.9.23

8 오스만 제국에서 모티브를 따 온 나라가 등장하는 창작물들

  1. 후기에는 Osmanlı İmparatorluğu 라는 서구화된 명칭도 사용했다.
  2. 참고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등의 게임이나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오늘날의 터키 국기 등의 이유로 인해 오스만 튀르크의 국기라고 하면 무조건 붉은 바탕에 흰색 초승달 + 별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와 유사한 디자인의 깃발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오스만 튀르크 후기에 해당하는 1793년이다(게다가 초승달이 세로로 길쭉하고, 별의 모양도 다르다). 그 이전까지는 큰 초승달을 쓰지 않거나 붉은색 바탕에 노란 초승달을 사용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디자인을 사용했는데,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 참고.
  3. 1882년에 황제 압뒬하미트 2세가 채택.
  4.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정.
  5. Devlet-i Ebed Müddet
  6. 1299~1335
  7. 1335~1363
  8. 1363?~1453, 오스만 제국령 아나톨리아 반도와 남동유럽 사이에 동로마 제국이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에 소통이 어려워, 수도가 두 군데 필요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며 통합. 또한 에디르네가 정확히 몇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었으며 언제 수도가 되었는지는 사료에 따라 다르다.
  9. '황제(파디샤)' 대신 '술탄' 을 칭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스만 튀르크. 즉 제국 성립 이전의 술탄들은 재상 이하 여러 귀족 관료들의 눈치를 어느 정도 살펴야 했기에 '전제군주' 로서 군림하지는 못했다. 이 귀족 관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데브시르메 출신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전제군주정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메흐메트 2세.
  10. 1876~1878, 1908~1920년 간
  11. 1299~1383년. 베이(bey)는 본래 지방 태수라는 뜻으로, 오스만 제국이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나온 나라임을 잘 보여주는 용어라고 할 만 하다. 대략 왕 정도에 해당하는 술탄보다는 지위가 낮아서, 의역해서 생각하자면 '공작(公爵)'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12. 황제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인 파디샤(Padişah), '술탄 중의 술탄' 을 뜻하는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 es-Selatin)', '로마 황제' 라는 뜻의 '카이세리 룸(Kayser-i Rûm)' 등이 쓰였다. 이 밖에도 몽골어인 을 쓰기도 하고 셀림 1세칼리프를 칭하게 된 것을 계기로 제국 말기에는 칼리프를 칭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여전히 술탄이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동안 술탄이라 했던 것이 관습화된 것으로 러시아의 군주가 차르 에서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줄곧 차르라 했던 것과 비슷한 예.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서구권(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선 오스만 황제들을 '술탄'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다. 반면 터키에서는 오스만 황제들을 '파디샤'라고 부른다.
  13. 터키어를 쓰지 않는 지방에 칙령을 내리거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현지의 언어도 함께 썼다. 종교인들은 아랍어, 학자와 문필가들은 페르시아어를 쓰기도 했으며, 오스만 터키어는 이 두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4. 20세기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 내의 민족들은 언어와 종교에 관계없이 법적으로 모두 '오스만인'이었으며, 종교에 따라 무슬림과 즘미(Zımmi, 비무슬림이지만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를 믿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신앙을 믿을 권리를 보호받는 사람들)로 차이를 두었다. 19세기 이전 기록에도 튀르크멘, 룸, 보쉬낙, 아랍인, 유대인 같은 민족의 이름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는 출신지와 언어에 따라 구분을 둔 것으로 공식적인 구분은 아니다.
  15. 이 밖에 다수파는 아니지만 동유럽 일부까지 정복한 관계로 가톨릭이나 개신교도 있었고, 짐미. 즉 비(非)무슬림들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를 막지 말라는 포고를 내린 적도 있었다.
  16. 오스만 제국후기 리라화 개혁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이슬람세계와 마찬가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17세기 쿠루쉬화를 발행하기 이전까지 3악체=1파라 였으며, 쿠루쉬화 등장 이후 40파라=1쿠루쉬였다. 다만 은화로는 고액결제나 유럽과의 무역에서 불편함이 있었으므로 은본위제를 채택하되 고액권으로 금화를 발행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금본위제 개혁으로 발행된 터키 리라화 (100쿠루쉬=금화 1리라)이전에는 시기마다 다르지만 이스탄불 제리 마흐붑(Zer-i Mahbûb = 6.5쿠루쉬), 이집트 제리 마흐붑(Zer-i Mahbûb-î Mısıriye = 5.5쿠루쉬), 제디드 마흐무디예(Cedid Mahmudiye = 25쿠루쉬), 하이리예(Hayriye = 12쿠루쉬), 메지디예(Mecidiye = 20쿠루쉬), 루미(Rumî = 48쿠루쉬), 아딜리 알튼(Adlî Altın=660파라) 등의 금화들이 발행되었으며 플로린, 리브르, 파운드스털링 등 해외금화도 유통되었다. 한편 이 금화들은 시장가치에 따라 가치가 변동되었기 때문에 시대마다 그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
  17. 13~16세기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 병합, 1396년 불가리아 병합, 1453년 동로마 제국 병합, 1456년 세르비아 병합(이전 항목에는 1540년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1456년에 사실상 합병했다. 이후 세르비아 공작의 핏줄은 동맹국이었던 헝가리로 건너가 명목상 세르비아 공작에 임명되었으나, 1521년에 이르면 그마저도 단절되었다.), 1463년 보스니아 병합, 1517년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 시리아, 레반트, 아라비아 병합, , 1556년 알제리 병합, 1574년 튀니지 병합
  18. 1822년 그리스 독립, 1830년 프랑스알제리 병합, 1878년 루마니아 독립,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1878년 세르비아 독립, 1881년 프랑스튀니지 병합, 1908년 불가리아 독립, 1912년 알바니아 독립,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22년 오스만 제국 해체, 터키, 키프로스,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이집트, 예멘, 이라크, 쿠웨이트 분리
  19. 이전 항목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체제가 그대로 터키 공화국으로 이어졌으므로 제국의 역사가 연장되고 있는 것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당장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말리즘 또는 '여섯 개의 화살' 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 통제, 세속주의, 혁명인데, 이 가운데 공화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명백히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도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또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민주의도 무슬림과 무슬림이 아닌 자(짐미)를 차별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슬람을 국교로 삼은데다 황제가 곧 칼리프이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의 체제와 세속주의 역시 명백히 위배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터키 공화국의 전신인 것은 맞지만, 오스만 제국과 터키 공화국의 관계는 대한제국대한민국의 관계와 유사하다.터키와는 이래저래 인연이 깊다 대한민국이 대한제국을 계승한 것은 맞지만, 대한제국 체제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20. 우리나라에서 '튀르크'라고 하면 셀주크 아니면 오스만 밖에 모르던 예전에는 보통 오스만 튀르크 혹은 오스만 터키라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튀르크나 터키는 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사실 오스만 제국 본인들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기 전까지는 튀르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쪽이 더 사실에 가까운 호칭이다. 덧붙여 셀주크 제국도 비슷하게 튀르크라는 명칭을 굳이 붙이지 않는 편이다. 단, 이쪽은 오스만 조의 경우와 달리 스스로가 튀르크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편.
  21. 당시는 단지 베이. 최초의 술탄은 그의 손자 무라트 1세. 최초의 파디샤는 메흐메트 2세.
  22. 사실 '아타만(Ataman)'이 오스만의 진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오스만은 아타만의 후손들이 선조의 이름을 고풍스런 아랍식으로 만들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려고 붙인 이름이다.
  23. 유럽 국가 뿐 아니라, 카라만 공국, 백양 왕조, 사파비 왕조 등도 위아더월드를 외칠 기세로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에 대항하려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
  24. 튀니지, 리비아, 알제리, 이집트,
  25. 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26. 우마이야 왕조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점령해 3지역을 지배한 적이 있다.
  27.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무역루트를 둘러싼 이슬람-카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건 영문위키의 일련의 사건 참조. 영문위키
  28. 프랑스는 농토의 비율이 높아서 비슷한 면적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인구가 많은 편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사실 13세기 흑사병으로 1/3이 죽었는데도 1100만명 수준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최전성기인 카를 5세의 제국이 이탈리아, 스페인(당시 700만 조금 안 됨), 독일을 사실상 다 장악하고 있었는데도 유럽 내 영토의 인구만 놓고 보면 동시기 프랑스와 간신히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을 정도였고, 러시아조차도 프랑스에 크게 밀렸던 시절이다. 카를 5세가 괜히 프랑스를 경계한게 아니다. 현재의 프랑스 인구가 독일이나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한 터키에게도 밀리는 건, 이는 19세기 중반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시기까지 프랑스가 고령화 + 전쟁으로 인한 청년들의 대규모 전사 + 저출산 3대 크리로 인구증가테크를 제대로 타지 못한 게 크다. # (이 당시에는 이탈리아를 포함해 열강 가운데 가장 인구가 적었다.) 인구학자들이 만약 프랑스가 이 당시에 인구증가 테크를 제대로 탔으면 인구 1억을 넘는 인구대국이 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할 정도면 말 다한 셈. (물론 최근엔 출산율의 상승으로 다시 독일을 능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여담으로 16세기 초반의 영국 인구는 400만에 불과했다.
  29.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인구 850만과 에스파냐의 알 안달루스 인구 650만을 포함하면 1500만밖에 안된다. 동시대 유럽은 벌써 수천만이었는데!
  30. 사실 여기에는 로마노스 4세에 반대하여 5만명의 대군 중 2만명을 수도로 돌려버린 막강한 수도 관료귀족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공이 지대했다... 이후 로마노스 4세가 어찌어찌해서 풀려나오기는 했는데 황제를 갈아치우다가 망했어요.
  31. 당시 룸 술탄국의 종주국이던 일칸국의 지배자들이 최후의 술탄이 죽은 뒤에 후임 술탄을 임명하지 않아서 그냥 사라져버렸다. 비록 술탄이 주도하지는 않더라도 몽골에 맞선 반란에 참여는 하거나 그의 이름을 빌려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이 잦자, 술탄은 폐위되셨소이다를 계속 시전하느니 차라리 총독을 보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된 것.
  32. 때문에 쉴레이만 샤의 무덤은 시리아에 있다. 1970년대까지 이 무덤만큼은 터키의 월경지로 남아있다가 현재는 시리아로 귀속된 상태이며, 천하의 개쌍놈들 ISIS가 파괴하려고 노리고 있는 상황. 결국 터키가 군사를 보내 무덤을 터키로 이장해 왔다.기사
  33. 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르투으룰이 정착하여 기반을 다진 앙카라는 1290년에 에르투으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첫번째 수도는 오늘날 부르사 근처의 쇠위트(Söğüt)로 정해졌으며, 오스만 제국이 다시 앙카라를 차지한 것은 2대 군주 오르한 때인 1356년.
  34.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황제들이 무능했거나 폭군이었다기보다, 일이 제대로 꼬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4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은 팔레올로고스 황가의 초대 황제 미카일 8세는 수도를 복구하고 제국의 국방을 위해 국민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그 뒤를 이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국방력을 희생하더라도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여러 튀르크계 소국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는 남동유럽에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중심지는 바로 아나톨리아 반도였다. 결국 이후 동로마 제국은 만성적인 재정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뭘 하고 싶어도 병사가 부족하고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35. 사실 그 이후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조차 튀르크의 침공으로 아시아 영토를 잃을지언정 그럭저럭 싸우기도 했고, 그리스쪽 영토를 수복하기도 했으나 그의 죽음 이후 어린 나이의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하자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 섭정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를 불신하던 황후, 대주교, 그리고 그 수하였다 배신한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코스가 칸타쿠제노스가 아카이아 공국의 항복을 받으러 수도를 비우자 그를 반역자로 선포, 내전에 돌입한다. 세르비아와 교황과 튀르크 용병(이때 오스만의 술탄 오르한도 칸타쿠제노스 편에 참여했다.)들이 모두 참여한 오랜 내전으로 제국은 개판이 되었고 그 와중에 대지진이 갈리폴리 반도를 강타해 튀르크가 그를 통해 유럽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그리스를 집어삼키고 유일하게 발칸 반도에서 튀르크를 막아낼 능력을 지닌 세르비아 제국스테판 두샨은 제국을 안정시키기 전에 급사하는 바람에 결국 둘다 망했어요.
  36. 다만 '뇌제' 라는 말은 지휘력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성격이 불 같았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앙카라에서 탈탈 털린 것도, 여름의 더위가 걱정이니 장기전을 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을 무시하고 정면 승부를 한 탓이 크다.
  37. 대항하기는커녕 티무르군의 화살로도 뚫리지 않는 중갑 탓에 티무르군의 진형을 여러 차례 헤집어놓는 등 그나마 가장 크게 활약했으며, 티무르로부터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38. 유럽의 신하국들에게 다소 지나친 요구를 하며 제국의 위엄을 과시했던 바예지트와는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며 신하국으로서 붙잡아두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티무르 제국을 의식하여 대체로 현상유지정책을 폈다. 이후 아나톨리아에서 바예지트 시대의 영토는 메흐메트 2세 때에 들어서 모두 탈환하게 된다.
  39. 간단히 이야기해서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이라고 보면 된다.
  40. 이러한 사태에서 벗어나보고자 하는 술탄들의 노력의 결실이, 바로 예니체리와 예니체리 징집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다. 즉 군사적으로 '새로운 피' 를 수혈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되자 데브시르메로 관료 예비군도 징집하기 시작한 것. 이후 데브시르메 징집자들은 메흐메트 2세 시대에 이르러 일종의 여당으로서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41. 아닌 게 아니라 15, 16, 17세기 오스만 제국을 보면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을 철근처럼 씹어먹으며 땅을 넓혀나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렇듯 미친듯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아래의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문단에 소개되어 있지만, 각 지방의 총독이나 대총독은 각자 맡은 지방에 주둔하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관까지 겸했다. 즉 지방행정단위와 군대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고, 그런 만큼 총독이 근무를 얼마나 잘 했느냐를 평가해서 승진시킬 것이냐 강등시킬 것이냐를 따질 때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군공이었다. 이런 탓에 오스만 제국 궁정이나 지방관들 가운데에는 언제나 호전파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16세기 후반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부터는 이들이 아예 중앙 정부의 뜻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군사 원정을 단행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다른 이유로는, 바로 위에 소개했듯이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 1세는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가지(Gazi)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세웠는데,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오스만은 가지를 자칭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오르한 역시 가지를 칭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교도를 쳐 없애,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 라는 것은 마치 오스만 제국의 국시처럼 되어버렸다. 3대 군주인 무라트 1세 때부터는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힌 관계로 가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제국의 개국공신들로 자리를 잡은 가지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과 함께 공신 세력으로 자리잡은 성직자들도 가지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42. 가령 16세기 전반에 헝가리 영토를 두고 합스부르크 황가와 조약을 맺을 때에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당시 합스부르크의 황제였던 카를 5세는 나름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동시에 스페인의 왕이었고 그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황제 대리로서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우위에 서서 체결(헝가리 서부만 떼어주고 중부와 동부는 오스만이 먹은 데다, 서부를 떼어주는 대가로 연공을 요구했다)한 두 번의 조약에서 카를은 '로마의 황제' 가 아니라 '스페인 국왕' 으로만 표기되고, 페르디난트도 '로마의 황제 대리' 가 아니라 '독일 왕' 으로 표기되었다.
  43. 특히 콘스탄티노플 정복 직후 재상이자 튀르크멘 명문 출신인 할릴 파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후임 재상으로 데브시르메 출신인 자가노스 파샤를 임명했다. 이로써 튀르크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위는 크게 하락(역대 재상 가운데 처형된 건 그가 첫 번째.),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들을 이용한 중앙집권화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4. 이 관계는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에서 오스만 술탄과 크림 칸의 유대관계가 끊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크림 칸들이 오스만 황족들의 황통이 끊길 경우 오스만 술탄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헛소문이 현대까지 남아있을 정도이다. 크림 칸국 항목 참조.
  45. 본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쉴레이만 대제 이전까지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쉴레이만 대제가 그가 사랑했던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였던 휴렘 술탄을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하고 결혼하게 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하렘 출신 황후들이 생겨났다.
  46. 일례로 1주일에 4번있었던 국무회의를 쉴레이만 1세 이후의 술탄들은 1번만 참석하거나 나중엔 아예 참석안하고 재상보고 주재하며 다 알아서하라고 했다.
  47. 예외적으로 셀림 2세 제위기간에는 황후도, 태후도 아닌 셀림 2세의 누나 미흐리마흐 술탄이 정치에 개입했다. 태후 역할을 할 휘렘 술탄은 셀림 2세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48.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코프룰루 구역의 이름이 이 가문에서 따온 것.
  49. 직역하면 "여성들의 지배"
  50. 군세에서는 오스만이 압도적이지만 페르시아는 찰디란 전투의 패배 이후 전면전으로 나서지 않고 방어모드에 올인하고 게릴라전으로 괴롭히다보니 보급 능력 딸리고 유럽, 러시아와도 전쟁하던 오스만으로서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계속 할 수없었다.
  51. 베네치아가 수백 년에 걸쳐 영토를 상실하긴 했지만 당대의 최고 부국답게 국가의 모든 물량을 다 동원해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특히 크레타 섬을 두고 무려 2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의 휴전도 없이 계속 싸웠다. 17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던 와중에는 십수년에 불과하긴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집어먹기도 했다. 문제는 이로인해 베네치아도 망했어요
  52. 레판토 해전에서 패한 당시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은 "키프로스 장악이 유럽의 팔을 자른 것에 비할 수 있다면, 우리의 패배는 고작 수염을 자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평했고, 실제로 레판토에서 상실한 함대는 꼴랑 2년만에 3배의 규모로 재건한 뒤 스페인이 1535년 뺏은 튀니지를 탈환했다. 생산력이 가히 저그 수준. 물론 배는 그렇다 쳐도 경험 많은 해병들이 그렇게 죽어나갔으니 전투력은 많이 손실을 입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레판토 해전의 패배는 더이상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큰 위협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53. 3만의 사상자를 냈고 술탄의 하렘 궁녀들, 87문의 대포와 오스만 왕가의 보물, 오스만 제국의 국새까지 빼앗겼다. 무스타파 2세는 겨우 살아 돌아갔다. 반면에 오스트리아군 피해는 고작 500명의 사상자. 그러다보니 오스트리아도 놀랐을 정도였다.
  54. 거기다 이때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사부아 공작 외젠이 그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한마디로 상대를 잘못만난 셈.
  55. 다만 대포를 비롯한 화기의 발달로 기병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보병이 대두하기 시작하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시파히의 수를 줄이고 봉토를 중앙 정부가 몰수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상비군을 갖추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즉 시파히가 가지고 있던 봉토가 고스란히 제국 정부로 들어갔더라면 '재정적 출혈' 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맞지 않는 말이 되었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오는 예니체리들.
  56. 15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순은 100퍼센트였던 것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은 함유율 80퍼센트로 떨어졌고, 다시 백년이 지난 1600년에는 34퍼센트로 급락했다. 다시 백년이 지나 1700년이 되면 15퍼센트, 또 1800년에는 6퍼센트. 이러한 몰락은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를 보는 듯하다.
  57. 수치상 급료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악체화의 실질가치가 폭락하다 보니 실질적으로는 급료가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더러운 짓' 을 포함해 폭동도 자주 일으키게 되었고, 관료들도 어떻게든 승진하기 위해(승진해야 수치상 급료가 올라가므로) 뇌물을 바치는 등 불법적인 방법도 거리낌없이 동원했다.
  58. 세계사에서 무함마드 알리라고 알려져있는 인물이지만, 그는 알바니아출신 지배자였으며, 평생 알바니아어와 터키어만을 모국어로 사용했다. 이후 이집트를 통치한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터키인으로 갖고 있었다.
  59. 물론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법관을 파견하는 한편 각지의 주요 도시에 예니체리 군단을 주둔시킨 다음 예니체리가 주둔하는 도시는 그 지방을 관할하는 총독이라도 들어갈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예니체리가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등으로 변질되자 이들도 지방의 마피아 비슷한 조직으로 변화하여, 총독 견제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그틈을 탄 총독들이 힘을 길러 중앙을 무시하고 군벌로 성장한다.
  60. 참고로 당시 술탄이던 메흐메트 5세는 독일과 손을 잡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청년 튀르크당 출신의 국방장관으로 사실상의 주권자였던 이스마일 엔베르의 독단으로 결국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61. 여담으로 이때 메흐메트 5세는 이스마일 엔베르의 협박을 받았는지 칼리프로서 지하드(성전)를 선포했는데, 이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상 칼리프가 선포한 최후의 지하드다. 단, 이슬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아랍인들이 지하드에 맞서는 등, 뭔가 나사가 여럿 풀린 지하드.
  62. 참고로 오늘날까지도 터키 국회 역할을 맡고 있다.
  63. 당장에 중동전쟁만 봐도 이슬람 국가들의 단합력이 얼마나 저질인지를 알수 있다.
  64. 따라서 수도도 루멜리(루멜리아)에 하나, 아나돌루(아나톨리아)에 하나. 이렇게 두 군데 두어야 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수도가 두 군데 있어서는 효율적인 통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65. 장군중의 장군이라는 뜻으로 본래는 군대 총사령관이라는 뜻이지만, 에디르네를 중심으로 루멜리 에얄레트를 창설할 때에 에디르네 함락을 주도한 지휘관에게 베일레르베이라는 칭호가 하사된 이래로 지방 총독을 뜻하는 말로 바뀌기 사작한다.
  66. 다만 카디가 모두 카자를 통치한 것은 아니고, 베일레르베이나 산작베이의 측근으로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67. 이런 경우는 주로 국경 방어를 위한 경우였다.
  68. 가령 그리스를 제외한 남동유럽 거의 대부분을 관할하는 루멜리아 에얄레트가 대표적인 예. 루멜리아 에얄레트를 통치하는 베일레르베이는 모든 베일레르베이 가운데 가장 윗자리로 여겨졌으며, 때로는 재상 이하 고관들의 중앙회의기구인 디반(Divan)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69. 정말로 '심심하면' 쳐들어왔다고 믿으면 곤란.
  70. 자세히 보면 당시의 오스만 행정구역이 거의 정확하게 이라크(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이집트(므스르 헤디브령), 리비아(트라블루스가르프 빌라예트),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스나 빌라예트)의 전신임을 볼 수 있다.
  71. 그 뒤로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약 200여년 간 지배하였다. 로마 제국은 이집트와 레반트는 오래 지배했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잠시 차지했던 것 외에는 지배한 적이 없다.
  72. 다마스쿠스는 초기 칼리파 시절 부터 근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 지방 행정 수도였고, 알레포는 십자군 전쟁 이후 베네치아제노바, 라구사 공화국을 통한 대서방 교역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이 지방은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서부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일대에서는 그나마 짦은 시일 내에 군대와 관료를 파견할 수 있는 거리다
  73. 더불어 덧붙이면, 남동부 유럽이 터키 동부보다 백년 일찍 오스만에게 정복된 사실도 있다. 오스만이 남동부 유럽의 패자가 된 것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2차 불가리아 제국이 무너진 14세기 후반인데, 오늘날의 터키 중부 및 동부까지 오스만에 복속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중반인 메흐메트 2세 치세다. 오늘날 터키가 완전히 정복된 것은 셀림 1세 때.
  74. 이것이 세계 최초의 군악대다. 이전까지 군대에 나팔 같은 것이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음악소리를 신호용으로만 사용했던 다른 국가와는 달리 오스만 제국은 사상 처음으로 군사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데에도 음악을 사용했다.
  75. '술탄' 이 아니라 '황제' 로 되어있는 것은,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로마 황제' 를 자칭. 이것이 오스만 제국 군주의 공식 명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탄이라는 명칭도 관습상 계속해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차르와 비슷한 경우.
  76. 문자로 적으면 '압드 알하미드'이나, 실제로는 여러 법칙에 따라 줄여져 압둘하미드라 읽힌다.
  77. 그러나 터키어 발음에서 유성음이 끝에 위치하면 무성음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때문에 발음상으로는 끝에 d가 오든 t가 오든 둘다 무성음 t발음으로 나므로 의미가 없다.
  78. 에르투으룰 가지는 오스만 1세의 아버지로, 오우즈족에 속하는 카이으(kayı) 부족을 이끌던 지도자였다. 본래 몽골의 침입을 피해 그의 아버지대에 부족이 아나톨리아로 임시로 피난을 왔지만, 당시 룸셀주크와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셀주크를 지원하면서 오늘날 앙카라 인근에 위치한 카라자 다으(Karaca dağ) 일대를 봉토로 받고, 쇠위트(Söğüt)에 수도를 정해 공국을 세웠다. 그의 아들인 오스만 1세는 에르투으룰 가지가 죽고나서 이 공국을 상속받았고, 1299년에 독립해 오스만 제국을 세웠기 때문에 터키에서는 에르투으룰 가지의 공국도 오스만 역사로 포함시킨다.
  79. 바예지트 1세가 티무르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 이후, 그 아들 사형제가 황위를 두고 내전을 벌인 기간. 결국 셋째인 메흐메트 1세가 승리하여, 단독 술탄이 되었다.
  80. 1차 재위
  81. 1차 재위
  82. 2차 재위
  83. 2차 재위
  84. 괄호 안의 부분에서 '엄격제' 에 해당하는 부분은 'Yavuz' 인데, 이걸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해진 것이 없는 듯 하다. 터키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 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
  85. 1차 재위
  86. 2차 재위
  87.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터키 공화국 정부는 오스만 가문(Osmanoğlu)을 터키에서 추방해버렸다. 이 조치는 1974년에 해제.
  88. 이시형 교수의 에세이로 유명해진 인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과 좀 다른 면이 있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