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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서는 조선의 역대 국왕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역대 국왕 | ||||||
13대 명종 이환 | ← | 14대 선조 이연 | → | 15대 광해군 이혼 |
묘호 | 선종(宣宗) → 선조(宣祖) | |
시호 | 조 선 |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 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 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
명 | 소경(昭敬)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목릉(穆陵) | |
휘 | 이균(李鈞)[1]/이연(李昖)[2] | |
자 | ||
출생지 | 한성 인달방 도정궁(都正宮)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7길 부근)[3] | |
사망장소 | 한성 정릉동 행궁(덕수궁 석어당)[4] | |
배우자 | 의인왕후(懿仁王后), 인목왕후(仁穆王后) | |
양아버지 | 조선 명종 | |
양어머니 | 인순왕후 심씨 | |
아버지 | 덕흥대원군 이초(李岧) | |
어머니 |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 |
생몰 기간 | 음력 | 1552년 11월 11일 ~ 1608년 2월 1일 |
양력 | 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55년 3개월 20일, 2만 199일.) | |
재위 기간 | 음력 | 1567년 7월 4일 ~ 1608년 2월 1일 |
양력 | 1567년 7월 4일 ~ 1608년 3월 16일. (40년 8개월 12일, 1만 4,866일.) |
목차
1 개요
전란기와 비전란기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전란기에 때의 온갖 병크들의 인상[6]이 강렬해 대중들에게 이미지는 시궁창에 가깝다.[7]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행적을 보면 나름 나라를 잘 이끌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정국은 시끄러웠으나 나라는 중종, 명종 때에 비해 잘 돌아갔다. 전반기 25년은 의외로 중흥군주 기믹[8]. 정국이 시끄러웠던 것도 선조가 각 당파간의 갈등을 조장하되 그 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사실 이게 당쟁의 의의이기도 하고... 인재풀도 이원익, 류성룡, 이순신, 이항복, 이이, 이황, 정철, 이덕형, 이산해, 윤두수, 권율, 정인홍, 한석봉 등 엄청난데 이와 비견될 만한 인재풀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던 것은 세종대왕 정도다[9]. 한 무명장수를 사간원의 반대에도 임진왜란 1년전에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라며 하루만에 8계급 특진을 시킨 것도 바로 선조. 이처럼 사람을 보는 눈이나 왕권을 강화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했던 왕이었다.[10]
2 잠저(하성군) 시절
선조는 1552년 11월 11일 서울 인달방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11]의 3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균이었고 이후 하성군으로 봉해졌다.
이 시기 큰아버지 명종은 그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조카들과 자주 교류했는데 이때 두각을 드러낸 것이 이균 하성군이었다. 선조실록에 있는 선조의 묘지문에 따르면 선조가 아직 하성군이던 시절의 어느 날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린, 하성군 이균(선조)을 대전으로 불렀다. 명종은 대뜸 머리에 쓰는 익선관을 벗어 이들에게 이걸 한 번씩 써보라고 시켰다.
하원군과 하평군은 별 생각 없이 써보았지만 하성군은 "군왕께서 쓰시는 것을 어찌 신하된 자가 쓸 수 있겠사옵니까?" 라며 사양했다. 이에 명종이 "그렇다면 너는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묻자 하성군은 "임금과 어버이는 비록 같지 않사오나 충과 효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 라고 대답해서 명종이 크게 칭찬했다. 선조 행장에는 이때 명종이 선조를 칭찬하며 "그래, 이 관을 마땅히 너에게 주겠다" 라 했다고 쓰여있다. 비록 과장과 미화가 심한 묘지문이지만 무려 전대왕을 끌어와서 쓴 기록임으로 무작정 거짓이라 부정하기도 힘들다.
비록 위의 익선관 이야기의 신빙성은 둘째치더라도 하성군이 다른 왕족들보다 두각을 드러낸 것은 사실로, 1565년(명종 20년) 9월에 명종이 의식이 없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던 일이 있었다. 이때 신하들 사이에서는 명종이 사망할 것을 대비해서 후계자 지정에 대한 여론이 있었고 이런 여론을 의식했는지 명종은 9월 15일 사람을 구분 못할 정도로 아픈 상황인데도 신하들을 부른다. 여기서 영의정 이준경등은 계사(繼嗣-양자 들이는 것)에 대해 말을 꺼냈다. 당시 명종은 병때문에 지쳐서 대답없이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이틀뒤인 9월 17일에는 의식이 없을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지자 신하들은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계자 문제를 논의했고, 이때 하성군에게 병간호를 시키면서 간접적으로 후계자로 낙점한다. 이에 신하들은 바로 공식적인 후계자 선정을 왕후에게 요구했지만 명종의 반대(로 추정되는 행동)으로 후계자 선정은 일단 미루어졌다.
이후 명종이 다시 회복하면서 하성군을 특별대우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플때 신하와 중전이 어찌보면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벌였음에도 따로 처벌한 일이 없었고, 나중에 후사문제를 논하는 영의정 이준경의 건의를 큰 지지나 책망없이 넘어간 점(명종실록 1565년 윤10월 15일)이나 양자를 들일 것을 건의한 선비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을(명종실록 1565년 11월 16일) 생각해보면 추정컨데 명종은 일단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자녀를 왕으로 만들되, 혹시나 유사시에는 하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어느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명종이 1567년 6월 28일 새벽에 의식이 없을 정도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 심씨는 을축년의 일[12]을 들어가며 하성군을 후계자로 세웠고, 그렇게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하성군 이균은 14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명종이 갑자기 승하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계승 문제가 생길 뻔했으나 당시 영의정 이준경의 기지로 (이미 시체가 된) 명종에게 다가가 평소 명종이 하성군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고 "신이 귀가 잘 들리지 않사온데 하성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오리까?" 라고 말했고 다행히도 그게 잘 먹혀 하성군이 왕이 된다. 다른 야사에 따르면 이때 덕흥군의 셋째 아들, 즉 "덕흥군 제삼자"라고 조서를 쓰는데, 이를 쓰던 한림 윤탁연이 고치기 불가능하도록 어음같은 곳에서 쓰던 방식으로 제삼자(第參子)라고 받아적으니 이준경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13] 왕위에 오르게 됐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혼수상태에 빠진 명종을 대신하여 명종비 심씨(인순왕후 仁順王后)가 하성군의 계승을 결정했다. 야사가 사실이라 치더라도 결국 명종이 직접 내리지 않았다는 것에선 같다.
선조는 조선의 첫번째 "서자 계통" 임금으로, 비록 조선이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하는 경우가 극히 적었지만 이때까지는 모두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들이 왕위를 승계했는데, 성종도 세조의 적장자였던 아버지 의경세자(덕종)와 세자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조의 적손이었다.[14] 반정으로 즉위한 태종과 세조, 중종도 각각 신의왕후 한씨, 소헌왕후 심씨,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였기 때문에 서자계통이 아니다.[15]
3 재위기간
3.1 즉위와 목릉성세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9남이고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익선관 건은 명종이 잘하던 놀이였고 으레 체면치레하는 걸 선조가 왕이 된 이후 확대해석한 걸로 보이며 위의 기록도 애초에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행장이다. 물론 선조는 명종 승하 2년 전에 명종이 크게 앓았을 때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오른 왕족 중 하나였지만 물망에 올랐던 왕족 중에는 선조보다 항렬이 높은 왕족들도 많아봤자 왕의 아랫항렬에서 양자를 뽑기 때문에 원칙상 제외 되며 명종은 한 항렬 아래의 조카들에서 후계자를 뽑아야만 했다. 명종이 말년에 자리에서 일어난 후 이준경이 만일의 경우 후사를 묻자 명종이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한 일이 실록에 실려있다. 덕흥대원군 항목을 참조하면 덕흥군 부부는 일찍 죽은데다가 덕흥군의 외가도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에게 20년간 시달린 조선 신료들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선택된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있긴 했지만 왕실에선 사대부들과 달리 그렇게 심한 차별이 있진 않았다. 적자가 있으면 당연히 승계할 수 없지만 적자가 없거나 양자로 들이는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고 할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세우고 또한 명종 치세 때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종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정치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하동부대부인은 선조의 즉위 1달 전에 사거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하여 무산되었다.[16]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절을 할 수도 없었다.[17]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추숭 떡밥이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세자로서 제대로 된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이 강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나설수가 없었다. 즉위 직후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18]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붕당이 대두되면서 파당 갈등 문제도 새롭게 부각되었다.
3.2 권력강화와 기축옥사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써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여파로 여러 인사들을 줄줄이 엮어 천여 명 이상이나 죽이고 쫓아내고 하면서도 이 일의 실질적 배후인 선조는 까이기는 커녕 오히려 방관하거나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 붙는 등의 제스처로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다.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억울하게 무고를 뒤집어 쓴 경우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 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 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정치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축옥사로 인해 전라도 지역은 '반역향' 이라는 낙인이 붙는다. 또한 정여립 등 혐의가 덧씌워진 주요 인물들은 사지가 찢겨 전국 팔도에 조리돌림당해 역적의 말로가 어떤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이용됐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반역향 지정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은 바로 호남에 근거지를 둔 정철 본인이었다. 때문에 당시 호남 계열 동인은 타 지방 동인에 비해 높은 비율로 쓸려나갔다.
그렇다고 영남의 피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 임란 당시 김성일의 막료로 영남 일대에서 종사했던 이로의 <용사일기>[19]에 따르면 진주성 주변 사람들은 기축년 변고(기축옥사)에 의해 최징사(곧 최영경)가 원통하게 죽고 유종지가 무함되며 이에 지방 선비였던 하향 같은 이가 분통이 터져 목 매어 죽었다는 것 때문에 고을 사람들의 원한이 극도에 달하여 있었다고 하며 이를 위로하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진주성은 경상우도지역, 즉 영남이다. 이때 좌우도는 왕, 즉 한성에서 바라본 기준이므로 낙동강 이서지역이다.
정철이 이렇게 영남측 동인까지 잡아가면서도 동인 중에서도 유독 호남쪽 동인들을 집요하게 숙청한 이유는 그의 최대 정적 이발이 호남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란 설이 지지를 얻고 있으나 지금도 논란이 분분하다.
임진왜란이 터진 이후 호남의 차별은 전보다 잦아들었지만, 반역향의 이미지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재 풀이 크게 훼손되어 이전처럼 조선 사림계를 주도하는 명망 있는 산림 및 관료 배출이 급락. 이와 관련해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선조 30년(정유년) 2월 22일자에 정유재란을 맞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조 본인이 호남 탄압 사실을 직접 시인했으며 전쟁이 났으니 도와달라고 다시 호남에 러브콜을 보내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
이는 이 시기까지 호남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근거이며 이 이후 차별이 완화 혹은 없어졌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다. 실록과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한계가 있지만 많은 공문서를 베낀 난중잡록의 특성과 수정실록의 사료로 쓰인 것을 생각하면 사료성은 있으므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탄압이 확실했던 시기는 정여립의 난 이후 10여년 정도로 볼 수 있다. 다만 반란 주동자들로 찍힌 인물들의 복권은 훨씬 더딘 편이었고 특히 정여립 본인은 당파와 관계 없이 끝끝내 역적 괴수로 남았다. 당장 인조반정 이후에 기술되어 서인 중심의 당파적 서술이 많다고 추정되는 수정실록은 물론이고 기축옥사의 피해자인 북인들 위주로 지나치게 편향되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 선조실록 또한 정여립에 대한 평은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딱히 인과성이 있다기보다는 억울하게 호남계 동인이 타겟으로 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기존의 반역향들은 대체로 고을 단위로 지정된 것에 비해 기축옥사로는 호남 전체가 반역향으로 몰렸다. 그리고 후대에는 이 전례로 인해 반역향을 지정할 때마다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진다. 참고로 두산 백과사전에 따르면 전라도 지방만은 정여립의 반란 이후에 비로소 차별대우를 받았을 뿐 그 전에는 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는 설명도 있다. 실제로 옥사 이전까지 호남은 반란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으니 당시 도민들의 낭패감은 실로 굉장했을 것이다.
옥사의 핵심 연루 인물들은 후대에도 괴로움을 겪었다. 가령 기축옥사의 주요 연루 인물이자 호남 사림을 이끌었던 곤재 정개청은 본인이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으나 모진 고문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자산서원은 추종자들에 의해 꾸준히 재건되었으나 효종과 숙종 때 서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훼철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우득록에 따르면 "남쪽 선비 중 곤재를 추종했다 하여 옥에 가둔 자가 50여 명, 귀양 보낸 자가 20여 명, 금고된 자가 400여 명이었다" 며 후폭풍이 굉장했음을 밝히는 내용도 있다. 자산서원의 훼철은 영조 때에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기축옥사는 선조 재위기 호남계 동인에 한동안 큰 타격을 주었던 사건이며 특히 핵심 연루자로 몰렸던 이들은 수대가 거듭되고도 서인의 경계대상으로 찍혀 누명이 벗겨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옥사를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한 정철 등 22명은 평난공신에 올라 권세를 떨쳤지만 송강연보에 따르면 정철은 오래지 않아 세자 책봉과 관련해 류성룡(유성룡),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건저하려다 제대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다. 선조는 정철에게 미운 털을 박기 무섭게 입장을 급선회하여 옥사 당시 희생된 최영경에 대해 "음흉한 성혼과 악독한 정철이 나의 어진 신하를 죽였다" 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정국도 반전되어 선조 후반기에는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집권당에 올라섰으며 이들은 서인의 처분 수위를 다루는 과정에서 남북으로 분당된다.
3.3 임진왜란기
많은 유림들이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더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1592)한다.
전쟁 발발 전까지 비변사는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발의를 냈으며 그대로 했다면 조선은 망했다.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이는 결국 개전 당시 해상에서 왜군의 차단이 이뤄지지 않은 실제 결과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일단 과거의 왜변 당시에도 해상에서 요격한 예는 없고[20] 상륙 후나 적을 확인한 후에야 요격이 가능했으므로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란 이전 일본이 저정도 규모의 전력을 대외로 투사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미리 아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반대로 수군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의 경상좌수군이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좌수사 박홍이 이천 병력으로 동래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 하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대규모 외침에 전면패주 상황이 연출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주리라 기대하고 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로 참패.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분조를 넘겨준다. 그리고 부랴부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자체는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선조의 파천이 욕을 먹는 이유는 전쟁수행 목적으로 파천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한양을 떠난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도주할 계획을 잡았는데(이른바 요동 귀부),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요동으로 튀니마니하는 소리(선조실록 1592년 5월 4일)가 나왔고, 평양에서 나온후 영변에서는 선조 본인이 대놓고 요동으로 튀겠다고 징징대기 시작하고 명나라에 망명하겠고 공식요청을 한다(선조실록 1592년 6월 13일). 명나라는 조선군을 통제해야 할 왕이 딴나라로 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겹쳐서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21] 압록강의 배를 요동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의사를 표했고 결국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무산되었다. 특히 왕실과 종묘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광해군에게 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사직과 왕실을 지키기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 왕이자 아버지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거기에 파천 이후 한성에서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궁궐이 손실되었다.[22] 그 외에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 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각지에서 온갖 민폐를 끼치고 다닌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들어다 바쳤을 정도.[23]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얼마나 실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조 본인도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우려했고[24] 임란말기 우려한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그 대용으로 뽑은 원균의 부대해체능력을 온전히 파악 못했다는 것. 이순신의 대체자로 지정한 원균이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초전박살나고 하삼도 백성들이 몽땅 왜구한테 고기육포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선 자신도 양심상 찔렸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자기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했다."고 말할 정도.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의 원인 자체가 선조다. 안나가려 핑계대는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25]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 있다능!"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3.4 후계문제
임진왜란-발발 후 의주까지 몽진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우선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광패한 악한이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다만, 너무 잦은 양위 소동으로 실록을 편집하던 사관조차 빡쳤는지 실록에서 디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26]
사신은 논한다. 상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하여 반드시 승락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중략)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선조실록 1593년 9월 7일
한 마디로 그냥 말리지 말고 양위하라고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이야기인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마치 선조의 결단을 칭찬하는 듯한 단어를 써서 무척이나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잦은 양위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영창대군 탄생까지 겹치면서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 중에서도 유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 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되었다.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다.
결국 이런 양위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소동을 두고 유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의 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소동은 권력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바꿔볼까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유영경에게 건넸으나 유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3.5 여진정책
가장 과소평가받는 선조의 치적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임진년 10년 전에 니탕개가 2~3만여 명의 여진족 기병으로 조선을 침공하자,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니탕개의 난).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굴을 초토화시켰다. 이어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머리 35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은[27],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젹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 4월 14일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28]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603년 누르하치의 만주 통일전쟁에 의한 여파로 누르하치와 그의 적대세력은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 부족들(번주)을 자기 세력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와중에 훌라온이 조선을 공격, 1605년엔 동광진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결국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의 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렸고,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선조는 이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주는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것이 아닌 방어해야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4 후대의 평가
치세의 명군, 난세의 암군
한마디로 요약하면 임진왜란 때문에 선조의 인생과 향후 조선의 역사가 제대로 꼬이게 되었다.[29]
4.1 호평
재위 직후 분열된 사림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등 출발은 나쁘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는 붕당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상호 견제(이간책)를 통한 신권 억제에 성공하여 상당히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그리고 이 출발기의 기간이 자그마치 조선왕 평균 재위를 상회하는 25년이다.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뚝 잘라서 생각해보면 선조와 이전, 이후의 왕들은 상당히 비교가 된다.
또한 선조가 통신사 파견 이후 대책 논의과정에서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평가는 사실이 아니다. 되려 1591년부터 축성 및 전력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등 여러 사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30] 오히려 안보불감증에 찌든 지방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방위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31]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 유생들까지 축성 작업에 동원시키는 등 전쟁준비에 열을 올리다 지역 사족층과 충돌하고 민심을 이반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전라감사 이광은 전쟁준비 과정에서 쌓인 불만이 전쟁 발발후 근왕병 모집 과정에서 폭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왜군이 쳐들어온 와중에 반란군 진압부터 해야했다. 선조 역시 과도한 전쟁준비가 민심을 이반케 한 점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외환外寇를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ㅡ 정만록. 이호응 역주.
(중략)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중략)ㅡ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무자) 기사.
전쟁 준비에 골몰했던 시기가 왜관에서 왜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래에도 거론되는 전시를 대비한 인재 채용이나 김수가 전쟁준비 심하게 한다고 욕 들어먹은 시점은 보다시피 임란 1년 전이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복귀한 시점을 고려하면 일단 전쟁준비를 하긴 했다. 다만 그해 11월 김성일이 일본 안온다니까 왜 불필요한 일을 해서 소요를 일으키느냐는 논지의 시폐 10조를 상소했고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그 후 축성건은 흐지부지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니 최소한 준비는 해놓자는식이었지 전쟁을 예견하고 전쟁준비를 제대로한게 아니었다. 정부는 큰 열의도 없이 일을 벌였고 필요한 노역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으니 방납의 폐단에 고통받던 백성입장에선 불만이 생기는게 당연했다. 임진왜란 준비의 미진함을 백성들의 안전불감증에서 찾는다는건 지배층편향적인 생각인 것이다.
의병장들을 숙청해 의병활동이 위축되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32] 이런 주장은 의병활동을 내세운 북인이 임진왜란 이후 집권당으로 확고히 지위를 굳혔다는 점을 무시한다. 의병활동이 줄어들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 부족으로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던 점이 크고 그 다음이 의병장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의병장들은 무관이든 문관이든 지역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재산을 소유하고 인맥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는데 계속된 전쟁으로 대장급 인물들이 대부분 전사(고경명, 조헌, 김천일, 원호 등) 혹은 병사(김면의 경우)하여 세상을 떠나거나 물자부족으로 사실상 와해되거나(김덕령) 관직 제수받아 관군에 편입되어(곽재우, 정문부, 권응수, 김덕령등) 의병부대가 아니게 되었다.[33] 의병활동이 소강상태에 빠진건 이때문이지 선조가 의병장을 숙청해서가 아니다. 선조가 죽인 의병장이라고 해봐야 이산겸, 김덕령 둘 뿐인데 이산겸은 군사를 모아 놓고 왜군을 토벌하러 움직이지 않아 송유진의 난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고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 가담자 다수로부터 공통적으로 이름이 거론되어 같은 당파인 서인에서조차 극형을 주장했다. 게다가 이산겸과 김덕령 이 둘은 의병이랍시고 세운 공도 없었다.[34]
의심 많은 성격과 별개로 머리 나쁘거나 안목 없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서 뛰어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가까이 두어 총애했다. 율곡 이이부터 이항복, 이덕형, 류성룡, 정탁 등 당시 임란 때 활약한 문신들 모두 선조가 아끼던 인재들이었다. 이순신의 임란 전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도 선조가 밀어붙여 나온 결과. 물론 임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반증이 될 수 있다.[35][36] 또한 아들 광해군처럼 특정 당파, 특정 인에게 힘을 지나치게 집중시키는 미숙함이 없었다. 필요할 때 힘을 실어주다가 효용이 다 되었다 싶으면 물 갈이하는 작업을 재위기간 내내 반복했다. 물갈이 한다고는 하지만 권력을 누구에게 쥐어주느냐였지 숙종처럼 환국을 한건 아니라서 기축옥사 때를 제외하면 유혈이 흘러넘치는 일은 없었다. 기축옥사때조차 자기가 원하는 부분까지만 옥사를 확대하고 목적을 이루자 바로 정철에게 뒤집어 씌우고 접는 기민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덕분에 광해군보다 왕권이 훨씬 위태로웠음에도 특정 당파에 끌려다니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선조는 조선 3대 명군급에 드는 국왕인데 임진왜란 덕에 바보짓만 부각되었다' 라는 주장까지 있다. 관련 글
확실히 명종조부터 채워진 우수한 인재들 덕에 선조 시기는 세종조와 정조조에 비견될 만큼 우수한 인재풀을 가지고 있었다. 류성룡, 이이,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윤두수, 이산해, 이순신, 권율, 정인홍, 정문부 등이 모두 선조시대의 인물이다. 허준의 경우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른 어의들은 명나라 유학 출신들도 많고 능력도 허준보다 딱히 뒤진다고 하기는 힘든 만큼 선조가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역사에 남기는 쉽지 않았다. 일개 서민 출신의 의사가 가진 잠재력을 알아보고 가까이서 중용하고 최신 의서들을 수집해 동의보감을 쓰도록 지원해준 것은 선조의 눈이 밝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37]
당대의 인선 사항과 관련해서 화담학파의 박순, 허엽, 퇴계학파의 류성룡, 김성일 등은 물론 서인인 정철 등이 명종 때에 출사한 점을 들어 명종대에 이미 사림계가 정국을 장악했고 선조는 그것을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윤씨척신을 쳐내고 또 다른 척신 이량 들여오던 명종의 정치를 생각하면 이들을 정치 전면에 나서고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논의될 수 있게된건 분명 선조의 공이 맞다. 선조가 역량을 발휘해서 급작스럽게 사림이 득세하고 인재들이 쏟아진건 아니지만 제대로 쓴건 분명 명종이 아니라 선조다.
그리고 가끔 선조가 단순히 도망쳤다고 해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라는 점이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일을 너무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도 왕정시대의 전쟁 논리에 들어맞지 않는다. 도망을 안 치고 왕이 사로 잡히면 그 전쟁은 진 거다. 실제로 이렇게 도망을 치려다 붙잡혀서 패전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왜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했으나 정작 목표였던 왕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오로지 한양만을 위해 진격하느라 외면했던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튀어나오며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왜란이 터지고 빠르게 명나라로 향해 원군을 요청한다는 선조의 선택지는 사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 선택지가 먹혀들었고, 명의 원군을 얻어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도 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침략을 당한 전쟁에서 승전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결론은 적어도 사실이다.
왜란 당시에 선조는 도망만 쳤고 이순신과 권율이 잘 해서 전쟁을 이긴 것이란 판단은 굉장히 짧은 이해다. 전술했듯이 우선 그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군주가 바로 선조이고, 도성까지 점령당한 판국에 국가 원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 외교적 방법으로 명군의 파병을 얻어낸 것도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오히려 명군이 주력이었고 병농일치제 국가인 조선이 군사 숫자를 줄여 전후처리에 나설 수 있게끔 국제 외교적 지형을 만든 것도 결국엔 선조다.[38] 다만 선조가 이 부분에서 비판을 가장 크게 받는 이유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명나라와 외교 중에 왕자들에게 왕의 자리를 넘기고 자신은 명나라로 망명할 생각을하러 의주까지 도망갔기 때문에 비판받는게 크다. 왕이 잡히면 게임이 끝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사실 실드치기는 어려운 셈.
왜란이 일어난 책임 자체를 선조에게 묻는 것도 어불성설인데, 왜란의 원인은 조선이 무언가 잘못을 해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임진왜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왜란은 조선의 문제보다는 일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난 전쟁이라고 봐야 한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무언가 외교적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조선이 빌미를 제공한 전쟁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왜란의 성격을 앞에 두고 왜란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주장은,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나 정복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 알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할 수 있는 것은 전쟁 준비밖에는 없다. 그리고 실제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양반들과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4.2 부정적인 평가
선조가 붕당의 상호견제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는 하나 숙종의 환국, 영조의 척신정치와 마찬가지로, 그가 택한 왕권 강화 시도의 방식이 장기적이고 국가적인 관점에서는 유익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받는다.[39] 그리고 가족관리 측면에서 평가가 좋지 못한데,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의 횡포가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에도 나타난다.
그리고 자식 농사도 영 좋진 않아서 장남인 임해군부터 시작해 순화군, 정원군 항목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당장 왕의 피난과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의 만행이 항전중인 백성들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40] 문제는 말썽을 피워도 처벌하지 않았고 신성군, 정원군을 호성공신에 책봉하는 등의 무개념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거다.
그나마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를 이끌며 활약하여 대신들의 인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둘째아들 광해군 조차도 의심이 많아서 정작 왕위에 오른 후에는 폭군으로 돌변했다. 조선 왕 가운데 친국[41] 실행 기록 2등이라는 업적을 세웠을 뿐 아니라[42] 재위 기간내내 궁궐공사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민생을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었고, 결국에는 의심병과 궁궐병 때문에 망했다. 선조의 아들들 가운데 인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왕자가 몇 안 된다.[43]
전쟁 기간중에 권위가 너무 떨어져서 평시라면 반역에 버금가는 하야 요구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반정 당한 왕들 급의 정치적 입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양위 비슷한 대리를 요구당한 경종의 입지를 생각해보자.
선조의 임진왜란 당시 행태는 안사의 난을 맞이한 당현종, 당숙종(태자)의 경우와 대단히 유사하다. 양위하고 안전한 곳에서 GG치는 선왕의 대표사례. 당시 조정은 이순신의 활약은 고려하지 못했고, 일본의 북진이 계속될 상황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몽학의 난을 계기로 인사적 파행이 일어났고 그에 의해 칠전량 해전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이후에 시정조치도 졸렬하기 짝이 없다. 근데 이걸 이순신이 응해줘서 다행이지 만약 이순신이 조금이라도 성질이 더러웠다면반정 또는 명량해전을 치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멸망 역사가 아예 뒤집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한국 사례를 들 때 이승만과 함께 부정적인 예시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디시위키에서는 선좆이라 불리며 능양군, 연산군에 이어 조선 임금 중 3위로 까이고 있다.
5 기타
- 원래는 선종으로 추증되었으나 광해군 9년 선조로 변경되었다. 그 사유로 든 것이 종계변무였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부친이 이자춘이 아닌 고려말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은 공로다.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부터 200여년 간 추진된 외교 정책이었다. 여기에 광해군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반대를 무릅쓰고 조를 붙인 것도 있다. 일단 조를 붙일 때 실록 보면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와 정응태의 무고를 해결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 선조 재위 시기에 민간에서의 조보 인쇄를 금지하기도 했다.# 조보란 오늘날의 관보를 말하는 것으로 왕의 하교 등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조보는 초서체로 필사하여 배포되었는데 당시 민간에서 활자 인쇄를 하여 배포하였는 바 이를 금지한 것. 명목상으로는 외국으로 국가 기밀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양반층의 정보 독점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 재미있는 기사가 실록에 있는데, 선조는 조총을 보고 자기가 새로운 총을 설계하기도 했다! 1593년의 기사다.
상이 유성룡에게 전교하였다.“조총(鳥銃)은 천하에 신기한 무기인데 다만 화약을 장진하기가 쉽지 않아서 혹시라도 선(線)이 끊어지면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과인이 이를 염려하다가 우연히 이런 총을 만들었는데, 한 사람은 조종하여 쏘고 한 사람은 화약을 장진하여 돌려가면서 다시 넣는다면 탄환이 한없이 나가게 될 것이다. 다만 처음 만든 것이라 제작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지금 경(卿)에게 보내니 비치해 놓고 한번 웃기 바란다.”【사관 : 옛부터 중흥(中興)한 임금들은 영웅(英雄)을 맞아 들이는 것과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고 무기를 정교하게 갖추기에는 구구히 마음쓰지 않았다. 조총이 적을 막는데 관계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 자신이 무기의 공졸(工拙)을 논하게 된다면 도리의 본말(本末)에 어두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은 병혁(兵革)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오늘의 급무는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않은데도 대신이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그대로 순응하느라 묵묵히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통탄스럽구나. 】원문[44]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1593년 11월 12일
기록이 저 것이 전부라 선조가 만든 총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수 없다. 이 와중에 사관은 임금이 전시에 직접 무기를 만들고 살펴보는 걸 왕이 쓸대없이 공졸을 논한다며 까고 있다.
- "선조=오다 노부나가"라는 개드립에 가까운 설이 DC 등지에서 떠돈적도 있었지만. 사실 이는 당시 일본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징기스칸"이라는 설이 유행하는 것을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5.1 창작물에서의 묘사
- 이우혁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선 임진왜란기 당시 선조의 부정적인 행동들을 놓고 선조의 몸에 마수가 처박혔다는 판타지적 해석을 소재삼아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사실 원균도 같은 케이스로 설정되었다.
- 김성한의 임진왜란 소설 7년전쟁에 당연히 등장하며 특유의 찌질함이 잘 묘사되었다. 임란도 임란이지만 정여립의 난 에피소드때 우의정 이양원이 이발의 팔십노모를 제대로 고문하지 않고 보고를 올리는데, 이때 이양원을 갈구는 모습은 가히 인상적. 임란 발발 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다.
- 40년 8개월이라는 긴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데다가 재위기간 중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 등 엄청나게 굵직굵직한 사건과 관련이 있는 군주라서 사극에도 대단히 자주 등장하는 왕이다.
-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대체로 전란과 당쟁 속에서 허둥대는 무능한 군주로 묘사되는 경향이 강한 편이나 광해군이나 이순신과 관련한 사극에 등장하면 이들을 의심하는 모습이 많이 드러나며 상대적으로 악역을 많이 맡는다. 단, 허준에서는 사람 좋은 임금님으로 묘사되어서 뭇 사극 매니아나 역덕후들이 충공깽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45][46][47]
- 칼의 노래에서는 무능하고 잔혹하게 표현되는 "칼로 벨 수 없는" 권력의 정점에서 정치로 전쟁을 수행하며 유능한 지휘관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악인으로 표현된다.
- 미국인 온리 콤판의 충무공 이순신 만화에서는 무능찌질한 임금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심하게 짜리몽땅하고 비만한 왕으로 나온다.
- 바로 이렇게…….
- 간혹 호랭총각에 나오는 왕의 모델이 선조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호랭총각의 배경이 임진왜란 직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 하지만 통신사 설정이라든가 박문수가 작중에 등장하는 등 호랭총각은 작가의 말 그대로 '조선시대 비슷한 시대'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즉, 나대용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대의 왕인 선조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왜구네이터편에서 나대용이 이순신의 부하 나대용과 동일인물이며 시대도 임란 직전임이 밝혀져 사실상 선조가 맞다는 것이 드러났다....
- 오성X한음에는 당연히 등장. 나름 명군처럼 보였으나 역시……. 두 얼굴의 왕이었다. # 최근 연재분에서는 율곡 이이에게 일부러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들었고, 정여립을 예의 주시하면서 한바탕 피바람을 예고하는 등, 이쯤되면 거의 악의 축…….
5.2 선조를 연기한 배우들
- 현석 - 1985년 《조선왕조 5백년:임진왜란》
- 김성옥 - 1995년 《서궁》
- 박찬환 - 2000년 《허준》 MBC
- 이호재 - 2000년 《천둥소리》KBS
- 임동진 - 2003년 《왕의 여자》 SBS
- 곽정욱(아역), 조민기/최철호[48](성인) - 2004년~2005년 《불멸의 이순신》 KBS
- 김창완 - 2010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49]
- 정보석 - 2013년 《불의 여신 정이》[50] MBC
- 전노민 - 2013년 《구암 허준》 MBC
- 이성재 - 2014년 《왕의 얼굴》 KBS
- 김태우 - 2015년 《징비록》 KBS. 항목 참조.[51]
- 박영규 - 2015년 《화정》 MBC
- 번외 : 김원해 - 2015년 <웹툰히어로 툰드라쇼> - 조선왕조실톡 7화 MBC
- 번외 : 이문수 - 2016년 <웹툰히어로 툰드라쇼2> - 조선왕조실톡 5화 MBC
- 이지훈 - 마녀보감
- 김광영 - 2016년 《임진왜란 1592》 KBS
5.3 목릉
선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 상술했다시피 원래는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이었다가 선조도 이곳으로 이장된 것이다. 의인왕후의 능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의인왕후의 장지를 찾던 도중 지관이 현대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명당을 꼽았다. 하지만 그 곳에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대부들이 특히 존경하던 인물인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선조도 차마 이곳에 의인왕후의 무덤을 쓰지 못하고 동구릉 경내에 모셨다는 야사이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도 죽어 여기 묻힘으로써 동역이강 형태로 묻혀 있다. 이 능은 1986년부터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6년 비공개가 해제되어 관람 가능하게 되었다. 다른 동구릉의 능들은 능침 앞까지 올라가볼 수 없고 왕릉 언덕 밑의 정자각 쪽에서 구경해야 하지만 선조의 목릉은 동구릉의 능들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인데, 2015년에 변경되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은 능침 앞까지 못 올라가게 막아 놓았고,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능은 인목왕후의 능 뿐이다. 목릉 능역 안으로 들어가면 능이 3개가 있는데 선조의 능은 능역 홍살문 기준으로 맨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능 뒤편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고 맨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위 사진에서는 왼쪽에 있는 게 선조의 능이고, 오른쪽에 있는 게 의인왕후의 능이다.
그런데 목릉의 석물들은 조선 왕릉 중 최악의 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현 목릉이 조성된 인조 때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피폐해진 데다가 우수한 석공들을 구할 수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실제로 다른 왕릉들과 비교해보면 목릉의 석물들은 크기만 컸지 다른 능들의 석물보다 균형이나 조형미 같은 게 훨씬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목릉의 석물에서는 총탄 자국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때의 흔적이라고. 살아서도 전란을 겪었는데 죽어서도 전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참고로 선조의 능인 목릉을 따서 '목릉성세(지치)' 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문학의 융성을 뜻하는 용어로 선조 이후 사림파가 대대적으로 흥기했다는 사실에 바탕해서 나온 표현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당대의 정치와 백성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선조 치세에 백성들의 삶이 마냥 어지러웠던건 아니고 선조대는 세조가 씨뿌리고 연산군과 중종이 키워놓은 조선 중기의 사회모순[52]에 대한 보완과 개선노력이 시작되는 굉장히 의미있는 시기이다.
5.4 선조 어필
위는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오언절구 중 첫 수로 '담장 가의 매화 한 가지가 / 추위에도 능히 홀로 피었네 / 멀리서도 눈송이가 아님을 알겠으니 / 은은한 향기가 나오고 있음이어라.'(墻角一枝梅 凌寒獨自開 遙知非是雪 爲有暗香來) 라고 쓴 것이다. 아래는 여동생 정안옹주의 병을 걱정하며 편지를 보낸 딸 정숙옹주에게 보낸 답장으로 한글 편지다. 만력 31년 계묘 복월 사시라 적혀 있는 것을 번역하면 복월(復月)은 음력 11월을 뜻하고 사시(巳時)는 대략 오전 9시 반~11시경이므로 1603년 음력 11월 19일 오전에 쓴 편지. 전문 현대어 해석은 여기를 참고하자.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선조는 글씨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글씨는 명나라 장군들이 얻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났으며 당대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에 대해서도 "석봉은 액자(현판등에 쓰는 큰 글씨)는 좋지만 초서와 해서는 좀..." 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 실제로도 조선 역대 국왕 중 명필의 하나로 꼽히며 후대 왕들의 서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인조와 효종이 선조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도 그의 친필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계비 인목왕후와 유일한 적녀(嫡女) 정명공주도 명필로 유명했다.
6 선조에 대한 음모론
6.1 선조와 이순신
임진왜란 전의 이순신을 선조가 어떻게 취급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로 여러 견해가 오가고 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 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 곤장)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ㅡ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과 동료 장수는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53]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ㅡ 선조실록 22년 7월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자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해 이순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론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어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워서 의뭉떠는거지 진짜 잘 몰라서 그런게 아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임란 중반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이 승리할 때마다 승진시켜주기 바빴고, 오히려 신하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반대할 정도였다.
단 이순신의 명성이 너무 올라가 버린 임진왜란 후반에 가면 이순신을 정말 싫어한 것이 확실하다. 파직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빤히 보이는데도 잡아온 후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고 고문[54]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백의종군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원익과 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는 상상에 맡긴다.[55] 선조는 실제로도 의병장 이산겸이 죄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산겸을 때려죽인 예가 있다.[56] 이순신이 전사했을 때 선조의 반응도 가관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명나라 군대를 통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으며 훗날 명나라 장수가 선조를 마주하여 이순신 장군의 명복을 기리는 언사를 하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 죽었는데 보인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차가운 반응이였다.
이것 때문에 이순신이 사실 전사한것이 아니라 자살 혹은 은둔했다는 루머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s-8 해당 항목 참조.
마지막으로 선조가 이순신장군에게 내린 제문을 보면, 본인이 이순신장군을 버렸음을 인정했다.
"易置失宜。是予之罪。將伯求助 何補輪載 .予實負卿。卿不負予。痛結幽明。云何其吁。
대장을 잘못 바꿈이 나의 허물이라, 장차 누가 구원한들 기울어진 짐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57]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으니 저승과 이승의 아픈 맺음을 말한들 그 탄식을 어찌 다 하리요!."
ㅡ 선조실록 31년 12월 4일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하고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으로 증직하였다.'
6.2 방계승통에 대한 열등감?
한마디로 그런 거 없었다.
선조 하면 자주 나오는 얘기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컴플렉스를 느꼈단 건데 선조의 정통성은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명종에게 정통성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선조가 왕이 된 이유가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서손이지만 대비가 직접 선택해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명분상 이를 시비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시대 예법을 지금 기준으로 해석하는건 대단히 무리한 일로 그 시절에는 혈연 관계보다 종법계통이 우선이었기에 법적인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가 덕흥대원군 제사에 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혈연관계로만 따져도 중종 7남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는 중종 아들 명종과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서자후손이라서, 혈통상 멀어서 열등감을 가져야한다면 숙종 서자 영조의 서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적자였던 철종이나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 따지만 인평대군 후손이었던 고종만 할까.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 책봉하는데 망설인건 광해군이 서자라서가 아니라 총애하던 인빈 김씨 소생 소생을 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가 마음에 둔 신성군도 서자다 덕흥대원군에서 서술했듯이 생부 덕흥군의 추숭은 한적도 없다. 즉위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한참지난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던게 다다. 서자를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두고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적자가 아니라서 열등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왕실은 사대부와 다른게 서자라도 승통이 가능했고[58]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게 가능했기 때문에 딱히 서자 서손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 어디 조선 후기의 서자 출신 왕들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가. 서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만 따져도 영조, 경종,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효명세자 등이 있다.[59]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을 총애한 걸 방계 콤플렉스의 증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래 링크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상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것이 당연했다.[60] 그리고 선조는 영창대군을 광해군 견제 이상으로 활용하진 않았으며(영창대군 항목 참조) 당대 종법 해석상 광해군의 정통성이 영창대군보다 훨씬 우월했다. 1 2 광해군을 박대한 것은 더도덜도 없이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란 초반부터 전위를 요구한 유생과 신하들이 누굴 보고 그런 요구를 했겠나?- ↑ 처음 이름.
- ↑ 개명 후.
- ↑ 조선시대에 사직단이 위치했었던 사직공원 근처다. 도정궁의 건물이었던 경원당은 오늘날 건국대학교 캠퍼스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 ↑ 이 이름은 선조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 ↑ 조선왕조 임금 계보상으로 딱 중간에 해당하는 왕이다.
- ↑ 거기다가 그 시기에는 왜란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한 불패의 성웅(聖雄)과 정작 재위 당시의 정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전란 시기에는 왕보다 나았던 세자가 있어서 더욱 찌질해보이는 상대효과도 있다. 하다 못해 그냥 비교만 되는거면 이들이 예외적으로 뛰어났다는 걸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 이후 열폭과 의심으로 나라를 구한 인물들을 시궁창 취급하고 트롤 짓한 것이 더해져 대중적인 이미지에 있어 인조와 투톱을 달린다.
- ↑ 한국 역사와 사회를 통틀어 위기가 닥쳤을 시 앞장서서 위기를 대처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 안위만 챙기려는 모습이 자주 있었고 이들의 태도 때문에 제대로 대처를 못하고 애꿎은 민중들이 죽어나간 적이 한둘이 아니다.
- ↑ 25년이 조선 임금 평균 재위기간을 넘긴다는 것도 흥미롭다.
- ↑ 이렇게 인재가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명종때까지 기 못펴고 살던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는데, 선조가 세력을 조절해서 한쪽 당파를 일방적으로 강화시키는 일을 피해 그 인재들을 무난히 수용해냈기 때문이다.
- ↑ 원균의 경우, 개전초 경상도 전역이 공황상태에 빠지면서 와해된 부대가 많았던지라 경상우수영 해체는 그렇게 큰 죄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순신과 함께 할 때는 그 특유의 묻어가는 능력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던 조정에선 그런대로 잘 싸우는 장수라고 평가를 했다. 게다가 칠천량 이전까지는
자국 백성들의 목을 베서 왜놈 수급이라고 사기치는 행동을 빼면크게 사고를 친 것이 없어서 당파 상관없이 조정 대신들과 선조에게 이미지가 좋았다. 조정에서 원균에게 가장 부정적이었던 이원익이나 이순신을 구명해 준 정탁조차도 원균을 용맹하여 전시에는 쓸만한 인물로 평할 정도였다. - ↑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였으며,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의 증손녀다.
- ↑ 2년 전에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한 일
- ↑ 이런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제 수단에 쓰인다. 석 삼(三. 3)을 쓰면 다섯 오(五, 5)나 심지어 만(萬, 10000), 억(億: 초기에는 10만의 표현이었으나 현재는 1,000,000,000!)으로 바꿔버리기 쉬우니까. 이것은 한 일(一, 1->壹)과 두 이(二, 2->貳)에도 적용된다.
- ↑ 이때 성종은 예종의 양자로 즉위했지만, 제안대군이 생존했기 때문에 다시 의경세자를 추존하고 인수대비를 예종비보다 높이는 약간의 억지를 쓴건 정치적 목적이었지 예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 ↑ 조선시대 의 여러 임금들 중 적장자는 7명(문종.단종.연산.인종.현종.숙종.순종)뿐이고 그것도 선조 이전까지 그 적장자들 중 연산군을 제외하면 재위기간이 다 합쳐도 10년이 안되고 7명 전체 를 따져도 숙종을 제외하면 다른 임금들 의 재위기간을 다 합쳐도 선조보다 짧다.
- ↑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일제합병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대 봉사손 이하전의 경우 안동김씨의 경계를 사 사사되기도 했다.
- ↑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 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
- ↑ 심의겸과 인순왕후의 작은 아버지
- ↑ 경상도 각 지방의 의병 및 관군과 의병의 연계활동, 의병 상호간의 교섭 등을 기술한 중요한 사료 중 하나
- ↑ 판옥선이 범선이 아니라 노선이란 점과 초석이 생산되지 않는 조선의 화약생산량을 생각하면 판옥선에 화포달아서 다해먹겠다는건 어이없는 소리다.
- ↑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
- ↑ 노비들을 혹독하게 추쇄한 것으로 유명한 장례원에 난민들이 방화했고 이것이 경복궁으로 번져 궁궐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왜군의 한양입성 후 경복궁을 묘사한듯한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때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 ↑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제거된다.
- ↑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
- ↑ 하지만 이건 원균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기도하다. 왜냐하면 원균이 통제사의 자리에 오른 이유는 선조의 총애도 있었지만 원균 스스로가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장계를 올렸기때문이다.
- ↑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양위파동을 일으킨 왕이다, 그것도 전란 도중에 이런 쇼를 계속 벌이니 사관이 화내는것도 이해는 간다.
- ↑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 ↑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종군했다.
- ↑ 사실 임진왜란 자체부터 조선과 동아시아 일대를 바꿔놓은 대격변의 분기점이 되어버렸으니 쉽게 말하자면 동아시아 전체 가 왕조교체 및 정권교체 가 이루어졌다.
- ↑ 다만 읍성위주로 수용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축성했기에 국가간 전면전 상황에서 효율이 떨어졌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1592년 4월 이전까지 10만 이상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 ↑ 징비록을 비롯한 현대 사극의 문제점은 조정이 했던 전쟁준비는 무시하면서 백성들과 지역 양반들의 안보불감증에는 너무 쉽게 면죄부를 준다는 점이다.
- ↑ 애초에 실록의 해당 구절은 선조수정실록에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죽은 김덕령의 죽음을 동정적으로 서술하며 나온 구절이다. 김덕령 항목에 나와있듯 김덕령의 죽음은 선조탓이 아니었다. 차라리 이귀나 김덕령 본인탓이 더 크면 컸지.
- ↑ 특히 계사년에 거병한 김덕령 부대는 거병 시점부터 이귀, 이정암 등 관리들의 권유를 받았고 조정에서 인증을 해줬다. 즉 처음부터 관군에 가까웠다. 그러다 갑오년에 군량부족으로 3천의 병력 중 호남출신 500여명만 남기고 해산시킨다. 정문부는 의병장이 함경도 관군을 지휘한 케이스고 권응수는 의병부대가 관군지휘관(경상좌병사 박진)의 지휘를 받아 싸운 케이스다.
- ↑ 그렇지만 김덕령은 늦게 일어난 점도 컸다.
- ↑ 흔히 여기다 류성룡을 거론하는데 실록에서 이순신을 파격승진을 결정하고 대간의 반대에도 이를 강행한 사람은 엄연히 선조다. 류성룡은 이 과정에서 뭐했는지 기록이 없다.
- ↑ 자꾸 원균을 가져다 붙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원균에 대한 평가는 '거칠고 행실에 문제는 있어도 용맹해 전시에 쓸만한 인재'였다. 선조뿐 아니라 서인, 남인, 북인이 전부 그런 평가를 내렸다. 원균에 대한 인상이 가장 안좋은 축이었던 이원익조차 용맹해 전시에는 쓸만하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원균의 처세술과 이미지 메이킹은 기가 막혔다.
- ↑ 다만 동의보감은 허준 혼자 쓴 게 아니다. 선조의 지원 아래 추진된 공동작업이었고 당대의 여러 명의들이 왕실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한 것이다. 허준의 단독저작인 냥 취급받는 건 전란으로 어의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란한 가운데 마무리 작업을 한 덕이다. 물론 허준이 저술에 가장 핵심적인 기여를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 ↑ 사실 명군이 별 활약도 없이 민폐만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명군은 존재 자체도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적이 둘이나 그것도 한꺼번에 상대해야하니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더 컸을수 있다.
- ↑ 그래도 숙종의 환국처럼 무자비하리만큼 피가 흐르지 않았고 영조의 척신정치처럼 몇명이 독식하게 하지는 않았다. 되려 정치력은 꽤나 괜찮았다.
- ↑ 다만 임진왜란 당시 순화군은 13세였다. 문제는 그 후에도 말썽을 더욱더 피워댔다는 것.
- ↑ 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
- ↑ 친국 실행 횟수 1위는 영조. 그러나 영조는 재위기간이 조선 최장이었다는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1위는 광해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그나마 이걸 온전히 광해군의 성품탓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광해군을 그렇게 내몬 당사자가 선조다. 광해군은 이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왕 즉위 후 흑화했을지도 모른다.
- ↑ 쉽게 말하면 왕이 직접 신무기를 만들어 유성룡에게 베타테스터를 권하고 있다!
- ↑ 아플 때 약을 주는 의원에게는 잘 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실제로 기록상에 선조는 허준에게 중인이라는 신분임에도 정1품 보국숭록대부라는 작위를 내리려다 실패하는 등의 허준을 총애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후 허준이 사망했을 때 광해군은 비로소 정1품 작위를 추증하였다.
- ↑ 물론 허준이 정1품 작위를 받을 만큼 충분한 공적을 세운 것은 명약관화지만, 이순신이 당시 정2품 정헌대부에 불과했던 것을 볼 때 신하를 대함에 있어 편차가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 허준에서 선조 역을 맡은 박찬환 씨는 후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순천부사 겸 이순신의 심복인 권준 역을 맡았는데, 수시로 상관에게 왕은 절대 믿을 것이 못된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 ↑ 당초 조민기가 선조 역이었으나 제작진과의 마찰로 하차 최철호로 변경되었다. 배우가 교체되면서 캐릭터의 성격도 꽤 달라졌는데 조민기의 선조는 의심이 많고 음험한 군주의 인상이라면 최철호의 선조는 말 그대로 찌질이.
- ↑ 재미있게도(?) SBS 일지매에서는 인조를 연기했다. 전란으로 욕 먹는 조선의 두 임금을 모두 연기한 셈.
- ↑ 여기서도 권력욕에 불타는 암군으로 묘사. 정보석의 전작인 자이언트의 조필연 역과 비슷한 느낌이다.
- ↑ 관상에서 문종을 연기한 배우다.
- ↑ 지배층의 모랄 해저드, 노비인구 증가, 토지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 ↑ 단 극형만은 피했으나 중징계를 하긴 했다는 점에서는 조금 애매하다는 주장도 있다.
- ↑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출소후 멀쩡히 말도 타고 대신들과 술을 마신 걸 보면 고문은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곤장 몇대 맞은 원균도 며칠을 누워 있었는데 고문을 당한 이순신이 그리 멀쩡할 수 있었겠는가? 투옥 당했을 때도 대신들이 면회를 오고 그런거 보면 가벼운 심문 정도만 받았다고 봐야 한다.
- ↑ 정유년 3월 13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선조는 죽어야 마땅하다며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 ↑ 물론 이산겸은 북인의 수장 이산해의 사촌이므로 북인에 대한 견제조치로서 죽였다는 시각이 많다. 비슷한 예로 거론되는 김덕령의 경우 류성룡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도 '혐의가 너무 짙어서 살리지 못한다' 는 말을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소지가 있다.선조실록 29년 8월 4일자 기사, 수정실록 29년 8월 1일자 기사를 참조할 것.
- ↑ 이 부분 때문에 위의 "선조가 이순신 버린 것을 인정했다"고 해석한 모양인데, 제문 첫 줄인 '대장을 잘못 바꿈이 나의 허물(임난 중의 관직삭탈)'에 대한 수사로 해석해야지 '정치적으로 내가 너를 팽했다'는 고백으로 보기엔 뜬금없다. 어떤 의미로 위와 같이 해석하여 썼는지 모르겠다.
- ↑ 사대부조차도 정말 사정이 궁하면 서자도 제사를 받드는게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가 박원종의 서자 박운
- ↑ 다만 경종의 경우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시에는 소의라 서자라서 송시열이 태클 걸기도 했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상 '왕위계승=대종(왕가)계승'을 통해 왕위계승자=왕실적장자 되게하는 것이 왕가의 종법이였는데 송시열은 여기에 반대하는 '왕위계승≠대종계승인 특수한 주장을 펼쳤고 이는 전임 왕때 예송논쟁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는 왕위와 종통의 계승 절차가 엉망진창이 되버리므로 아무리 대유학자 송시열의 주장이라 해도 이런 왕가의 특수성을 무시한 주장을 공식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기에 장(옥정) 소의 어머니의 옥교사건으로 뿔이 나있던 숙종입장에서는 자신의 (당시에는) 외아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결국 사약을 마시게 된다.
- ↑ 영조도 66세 때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