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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 해체된 구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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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 현대 유니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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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엠블럼 | 팀 마스코트 코니[1] |
현대 유니콘스 | |
Hyundai Unicorns | |
창단 | 1982년 2월 5일[2] |
법인 설립 | 1987년 10월 14일[3] |
인수 | 1995년 9월 21일 |
팀명 변경 | 1996년 3월 11일[4][5] |
첫 경기 | 1996년 4월 13일 vs LG 트윈스 (인천) |
마지막 경기 | 2007년 10월 5일 vs 한화 이글스 (수원) |
해체 | 2008년 1월 7일 |
법인 해산 | 2008년 6월 4일 |
구단 법인명 | ㈜현대유니콘스 |
업종명 | 스포츠 클럽 운영업 |
상장유무 | 비상장기업 |
기업규모 | 대기업 |
연고지 | (사실상) 경기도 수원시 |
구단 연고지 변천 | 인천광역시 & 경기도 & 강원도 (1996~1999) 경기도 수원시 (2000~2007) |
구단명 변천 |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구단 해체[6] |
홈 구장 | 숭의야구장 (1982~1999) (12,000명) |
수원야구장 (2000~2007) (14,000명) | |
2군 구장 | 원당야구장[7] |
해체 당시의 구단프런트 (2007년) | |
구단주 | 공석[8][9] |
사장 | 김용휘 |
단장 | 정재호 |
감독 | 김시진 |
최종 우승 | |||
4회 (1998, 2000, 2003, 2004) | |||
역대 우승 엠블럼 | |||
파일:Attachment/hyundaiunicoks1998.png | 파일:Attachment/hyundaiunicoks2000.png | 파일:Attachment/hyundaiunicoks2003.png | 파일:Attachment/hyundaiunicoks2004.png |
1998년 | 2000년 | 2003년 | 2004년 |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 ||||
1997년 해태 타이거즈 | → | 현대 유니콘스 | → | 1999년 한화 이글스 |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 ||||
1999년 한화 이글스 | → | 현대 유니콘스 | → | 2001년 두산 베어스 |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 우승 팀 | ||||
2002년 삼성 라이온즈 | → | 현대 유니콘스 | → | 2005년 삼성 라이온즈 |
목차
- 1 개요
- 2 현대 유니콘스 연표
- 2.1 현대 유니콘스
- 2.2 전신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 2.3 1996년 이전: 현대그룹의 야구단 창단 시도
- 2.4 숭의야구장 시절
- 2.5 수원야구장 시대
- 3 유니폼
- 4 역대 등번호
- 5 해체 당시 선수단
- 6 역대 선수
- 7 역대 성적(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 포함)
- 8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전신 포함)
- 9 그 외 트리비아
- 10 응원가
- 11 역대 캐치프레이즈
1 개요
삼청태현 | ||||||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 → | 청보 핀토스 (1985~1987) | → |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 → |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
한국 프로야구에서 두 번째[10]로 왕조 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안타깝게 해체된 구단.
인천야구의 역사에 영광과 시련의 사건을 동시에 남긴 팀.
KBO 리그에 있었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 경기도 & 강원도 - (사실상)경기도 수원시.
창단연도는 1982년(삼미-청보-태평양 순으로 인수), 해체는 2008년이다. 연고지는 인천, 경기, 강원권역이었으나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하면서 임시 홈 구장으로는 수원 야구장을 썼다.
2 현대 유니콘스 연표
2.1 현대 유니콘스
현대그룹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여 프로팀에 뛰어들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재창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고 이렇게 현대 유니콘스가 탄생했다.
1996년 취임해 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한 김용휘 단장(2004년부터 사장으로 승진) 이하 구단 프런트가 개념이 넘친 현장 지원으로 명성을 떨쳤고, 역대 감독은 김재박-김시진이었다. 팀의 상징동물은 유니콘, 상징색은 녹색, 별명은 투수왕국. 태평양 돌핀스 후기시절부터 좋은 투수진을 여럿 배출하던 이 팀의 팀컬러는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된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져 내로라하는 투수들이 정말 많았다. 정민태, 정명원, 위재영, 김수경, 임선동, 조용준, 장원삼 등이 현대 유니콘스에서 활약한 투수들이며 무려 4명의 투수신인왕을 배출했다. 1998년 김수경,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재영[11][12]
역대 우승은 1998년(인천연고팀의 첫 우승), 2000년, 2003년, 2004년(수원 임시연고)으로 총 4회이며, 해태 타이거즈에 이어 두번째로 2년 연속우승에 성공했다.[13] 태평양 돌핀스에서 팀명이 변경되고 해체되기까지인 12년간 4회 우승을 거두며 짧고 굵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잘 보여줬다.[14] 하지만 관중 동원은 인천을 떠난 2000년 이후로는 기존의 팬들이 많이 떠나면서 경기당 평균 2,000명[15]이 채 안되는 등 최하 수준이었다.
2.2 전신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이 팀들은 현대 유니콘스의 전신이다. 현대 유니콘스는 공식적으로 이 팀들의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어가는 팀이며 이 팀들과 동일한 한팀이다. 이 팀들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의 역사에 포함되며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현대 유니콘스의 역사는 82년부터 작성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나 전신들까지 모두 다루기에는 가독성의 문제도 있고 여백이 부족하여 이 문서는 주로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 한정하여 작성된 부분이 많다. 현대 유니콘스 팀명 변경 전 역사에 대해서는 해당문서들을 참조 바람.
2.3 1996년 이전: 현대그룹의 야구단 창단 시도
현대는 프로야구 참여시에 현대 피닉스로 대표되는 아마추어-프로 간 대립을 이끌며 '제2리그' 창단을 공언하다가, 결국 태평양 돌핀스를 430억에 인수하여 프로야구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삼성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를 돈지랄판으로 만든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인천 지역 야구팬들은 이제야 가난한 팀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열광했고, 덕분에 아모레퍼시픽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야구로 돈을 번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원래 프로야구 출범 추진 과정에서 출범 추진 인사들이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 회장[16]에게 인천/경기/강원을 연고로 현대그룹 야구단의 창단을 제안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이었고 88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한 직후였기 때문에 올림픽에 전념하겠다고 하면서 거절했다.[17] 더구나 당시 현대그룹은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양궁과 수영 2개 종목을 맡고 있었다.[18] 하지만 올림픽 이후부터 프로야구 진출을 시도하면서 한 때 울산을 연고로 신생구단을 창단하고 야구장까지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무산되었다.[19] 결국 실업팀 현대 피닉스로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키다가 태평양 돌핀스 인수로 프로야구에 진출한 것이다.
태평양 입장에선 1987년에 50억에 청보에게서 구단을 사서 근 10년만에 9배의 값으로 팔았으니, 야구구단 운영비를 빼고 나서도 엄청난 대박이였다 할 수 있겠다. 당시 현대그룹의 돈빨이 얼마나 쌨냐면 고려대 진학을 원했던 박진만이 귀찮게 달라붙는 현대 구단 직원들을 떼어버리기 위해 계약금 4억원이라는 (당시로는) 터무니없는 큰 돈을 요구했더니(당시 최고 계약금은 위재영의 2억) 현대 직원이 알았다면서 자동차 트렁크에서 4억원을 꺼내오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20][21]
2.4 숭의야구장 시절
2.4.1 1996년: 창단 첫해부터 준우승
1996년 첫해 타석에선 최초 30-30을 기록한 괴물신인 박재홍과 '미스터 인천' 김경기의 활약, 마운드에선 정민태, 위재영, 정명원의 활약 등에 힘입어 4위를 기록, 2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재진입했다.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를 2전 전승으로 물리치고[22] 플레이오프 진출, 플레이오프 전주 1, 2차전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에 아쉽게 패하며 밀리는 듯했으나 인천 3차전부터 최창호의 호투로 극적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켜 3연승을 내리 거둬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창단 첫 해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한 것은 1990년 LG 트윈스에 이어 현대가 두 번째. 그러나 상대는 막강 해태 타이거즈. 이강철과 조계현, 이대진 등이 버틴 해태에게 2승 4패로 분패하고 준우승을 기록한다. 그나마 눈여겨 볼 것이 있다면 정명원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KS 4차전)이다.
1996년의 현대는 김경기나 박재홍을 제외하면 태평양 시절과 별 다름없는 물타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타격은 말 그대로 답이 없었다. 반면 투수진은 태평양 시절과 마찬가지로 정민태와 정명원, 위재영, 최창호, 조웅천 등 우수한 선수들이 많았다. 즉 타선의 힘보다는 투수진에 힘입어 겨우 4위를 하게 된 것. 특히 당시 프로 3년차였던 이숭용과 말년에 접어든 윤덕규를 빼고는 특출난 좌타자가 없었던 탓에 우완 잠수함 투수 상대로 고전하는 일이 많았다.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플레이오프 1, 2차전을 내준 것도 잠수함 원투펀치였던 성영재와 김기덕에게 당한 것이 컸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 이강철에게 2승 1세이브를 헌납하면서 무너진게 패인.
2.4.2 1997년: 2년차 징크스?
이듬해 1997년에는 시즌전에 아마추어팀 현대 피닉스의 문동환을 롯데로 풀어주면서 위약금을 전액 탕감하는 대신 전준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확실한 1번타자를 영입해 전력강화를 꾀했으나[23] 그 해 타선이 지독하게 부진했다. 타선에서는 입단 첫해인 전준호가 트레이드 충격을 털어내지 못하고 0.247라는 프로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팀내 핵심선수인 박재홍은 20-20을 달성하는 등 그래도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시즌 중후반에 부상으로 전력이탈했고, 4번타자 김경기는 프로데뷔 이래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역시 타선의 주축 역할을 해오던 윤덕규도 부진을 겪었고, 결국 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중간에 교타자인 김광림을 현금트레이드를 통해 쌍방울에서 영입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유일하게 시즌 끝까지 꾸준하게 활약했던 선수는 이숭용 정도였다.
투수면에서는 에이스 정민태가 건재했지만, 2선발 위재영은 시즌 도중 부상으로 드러눕고, 마무리 정명원은 갑자기 구위가 떨어지면서 난조를 자주 보였다. 1997년 시즌에는 내내 하위권 달리다가 롯데, 한화를 겨우 제끼고 6위 기록.
2.4.3 1998년: 인천야구, 첫 우승!
이듬해 1998년 시즌에는 현대그룹의 과감한 지원이 이어간다. 시즌 전에는 당시 구단 재정난을 겪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핵심선수였던 박경완을 현금트레이드로 영입하고, OB 베어스의 베테랑 2루수였던 이명수를 영입하는등 타선을 크게 보완했다. 거기에 이명수의 뒤를 이을 주전 2루수로 육성하기위해 박종호까지 영입했다. 이러한 구단의 과감한 지원 속에 1998년에는 투-타 완벽에 가까운 활약을 보였다.[24] 타선에서는 박재홍-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타선은 실로 위력적이었고, 97년 트레이드 충격으로 입단 첫해 부진했던 전준호는 트레이드 충격을 딛고 1998년 시즌에 확실한 1번타자로 활약한다. 투수면에서는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한 정명원의 화려한 부활등 힘입어 정민태-정명원-위재영-김수경-최원호 1~5선발 전원 10승 이상[25]이후 을 기록하는 등 1998년 정규시즌은 엄청났던 해였다. 무엇보다 쌍방울의 막장 투수진의 볼을 받다가 만개한 박경완 최고의 리드를 보였고 홈런도 19개나 쳐냈다. 1988,1991 해태나 1992 빙그레[26] 1994 LG 수준으로 투타가 완벽한 시즌이었다.
그리고 이 때도 어김없이 현질을 했는데, 시즌중 6억원에 쌍방울에서 조규제 투수를 영입했다는 것이다.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4승 2패를 거두며 창단 첫 우승[27]을 거두어 인천연고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냈다.
2.4.4 1999년: 타선이 붕괴
이듬해 1999년은 유례없는 타고투저 시즌이었다. 5선발 중 세 명이 이전같은 성적을 못 내었으나 압도적인 활약을 하였던 정민태와 2선발로 최선을 다한 김수경 덕에 팀 실점은 롯데에 이어 2위를 기록한다. 그러나 문제는 타선이었다. wOBA가 4할 이상인 선수가 15명이나 있었던 시즌이었으나 현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wOBA 순위를 상위 25위로 범위를 넓혀야 박재홍(19위)와 박종호(24위)만 이름을 보였다. 피어슨이 쿨바 수준의 활약은 하지 못했고 전준호, 김경기, 이명수가 동시에 성적이 하락하였다. 결국 팀 득점은 쌍방울 다음으로 낮은 7위에 그치고 만다. 그럼에도 정규시즌 5위(당시 양대리그 체제였으니 4팀 가운데 3위) 기록했다.
시즌 끝나고 그 시즌 부진했던 LG 외야수 심재학을 영입했으며, 허용투수 최원호가 LG로 이적했다. 또한 지명권트레이드로 2차 1픽으로 지명된 마일영 투수를 쌍방울에서 5억에 사왔다. 참고로 마일영을 끝으로 지명권 트레이드는 금지되었다.
2.5 수원야구장 시대
2.5.1 2000년: 뜬금없는 시즌전의 연고지 이전
비록 1997년과 1999년 시즌 그다지 썩 좋지는 못했지만, 기존의 삼미-청보-태평양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음에도 매년 눈에 띄게 줄어드는 관중 때문에 2000년 1월에 현대그룹에서 갑자기 돌연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을 서울로 연고이전 추진하겠다'고 선언을 하게 되었다.[28] 그후 인천-경기-강원권의 연고비용으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의 선수단을 기반으로 창단한 신생팀 SK로부터 54억 원을 받고, 연고이전을 추진하게 된다.
결국 현대그룹은 여러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연고이전을 강행, 여기서 많은 경인지역 팬들이 실망감에 빠지고 분열되면서 크게 갈라져버려 기존 팬 전체의 약 3분의 1 정도 규모까지 줄었다. 당시 많은 팬들이 그만큼 충격과 실망감이 얼마나 무척 컸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 기존의 인천 연고지역 팬들은 SK로 간 경우가 많고, 기존의 비인천권(주로 서울, 경기, 강원 지역) 팬들은 현대에 남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원래 이들 사이는 같은 한 지붕에서 응원하고 같이 웃고 울던 관계였는데, 지금은 서로 증오하고 이를 갈고 싸우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앞에서 서술했듯 현대 기업이 연고지 이전을 추진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9년 개막전. 전년도 우승까지 한 팀임에도 불구하고 개막전 관중석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파일:Attachment/현대 유니콘스/Example.png
파일:Attachment/현대 유니콘스/Example1.png
이 문제를 두고 일부에서는 1999 시즌 자체가 IMF의 여파로 야구인기가 사그라들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정작 위의 표와 그래프를 보면 99년은 95년 이래 처음으로 야구 관중 수가 상승세를 기록한 해였다. 실제로 1998-1999 사이 팀별 관중 보면 저 사이에 관중 수가 줄어든 구단은 오로지 현대와 쌍방울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대가 전년도 성적이 시망테크를 탄 것도 아니며 1998년은 현대가 인천야구 사상 처음으로 우승한 해였다. 1996년에도 현대는 정규리그&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이었고 그 이전인 94년에도 태평양으로 정규리그&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룩했다. 이쯤 되면 맨날 져서 안 간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다 보면 언젠가 이기겄쥬 실제로 태평양 준우승 다음해인 95년에는 여전히 40만 명대의 관중을 기록했고, 1996년에는 리그 전체 관중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현대 관중은 오히려 늘었다. 결국 1996년의 475,910명을 기점으로 현대그룹은 이미 인천에서 더 이상의 관중동원은 힘들다고 판단한 것. 1년에 많아야 12경기 정도였던 수원 홈 경기가 1999년에 21경기로 늘어난 것도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인천의 낮은 관중 동원 능력은 도원구장의 열악한 시설과 교통 때문이며 이는 최신 문학야구장이 들어서면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막말로 "우승을 해도 좁아터진 도원야구장조차 제대로 못 채우는" 도시에서 거대한 문학야구장을 채울 만한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까? 당장 동시기에 꼴데롯데 자이언츠는 그 거대한 사직야구장에 1997-1998년 연속 연간 고작 40만여 명밖에 동원하지 못하면서 텅 빈 큰 야구장의 공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몇 년 후엔 10만 명대까지 떨어졌지...., 광주, 대구 또한 열악한 야구장 상황에 불만만 많다가 연간 관중이 50만을 돌파한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신구장 건설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최신 문학구장조차 2006년까지도 도원구장과 비슷한 관중동원 능력을 보여준 것을 보면 단순히 야구장 문제가 아닌, 인천야구 차원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찾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도원구장 교통이 안 좋지도 않았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도원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면 5분 거리였다.
1999년이 인천 경제를 떠받치던 대우그룹의 몰락과 그로 인한 지역 내 기업들의 연쇄 부도로 인천 지역 관중 동원능력이 급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라고 하지만,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무리하게 출범한 프로야구의 흥행은 더더욱 바라기 힘들어진다. 어쨌거나 현대그룹은 현대 유니콘스의 성공을 위해 무려 470억이라는 거금을 쏟아부은 판이었고, 특히 야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는 1998년 LG전자 반도체사업부 인수 이후 경영 상황이 꾸준히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몇 년을 두고 길게 투자할 것을 바라는 것도 무리다. 오히려 야구단을 냉큼 팔아넘기지 않고 연고지를 옮겨서라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을 기특하게 생각해줘야 할 판이다. 인천 연고 팔아넘기고 무주지에 무료로 입성할게 아닌 이상 연고지 옮겨서 돈 벌어가며 유지할 꺼라고 생각한게 가능할리 없지만. 목표인 서울구단 드립해도 이미 연고구단이 2갠데? 더불어 서울은 현재 시점에서 프로야구팀 세 개 써도 잘 돌아간다. 다만, 서울은 수원 야구단 창단 이전까지 인천 및 경기 서부를 제외한 수도권 전역에서 야구팬들이 찾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그 시절 인천시청의 한심한 프로구단 지원은 인천 스포츠팬들 사이에선 악명이 자자했고, 실제로 인천 연고의 스포츠 구단들 치고 상태 좋은 구단 찾기가 힘들다.[29]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신구장이 건설된다 한들 현대가 인천에서 과연 비전을 찾을 수 있었을까? 오죽하면 이후 인천에 들어온 SK 와이번스가 인천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문학야구장을 마음껏 리모델링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이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으로 인천 민심이 한껏 격앙된 덕분이라는 분석까지 나올까.
2.5.1.1 연고지 이전은 과연 최선이었는가?
물론 1999 시즌 당시 관중수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1998 시즌에 가장 적은 관중 감소폭을 기록한 팀 또한 바로 현대 유니콘스였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외지인이 많은 인천 인구의 특성상, 이를 관중수 증감과 단순 대입하는 것이 크나큰 무리가 있다는 것 쯤은 인천 야구팬이 아니라 야구를 오래 본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도원구장은 광주구장보다도 더 오래되고 낡은 구장이었으며 무엇보다 무허가 건축 시설이었다. 실제로 현대 구단은 원래 도원구장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려 했으나 무허가 건축시설이라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다.
특히 1999년 관중 감소의 직접적 영향 중 하나였던 인천 지역의 경기침체는 요소는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한 요소였다. 비록 대우그룹은 부도를 맞았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인 자동차 부분은 매각이 될지언정 인천을 떠날 일은 없었고 이 부분이 정상화되면 인천 경제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다른 그룹도 아니고 현대그룹이 그걸 모를 리가! 게다가 문학야구장과 연계되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 연선에는 계산지구나 연수지구 등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인데다가 이런 아파트단지 주민들은 어느정도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들인 만큼 신규 수요를 창출할 여지도 많았다. 당장 송도국제도시부터가 이 시기에 이미 한창 추진 중이었다. 또한 2016년에야 인천역까지 개통되었지만 당시에는 1990년대에 개통될 예정인 수도권 전철 수인선이 인근 원인재역에서 인천 도시철도 1호선과 개통 예정이었기 때문에 연수구 전역, 경기도 시흥시, 안산시 일대의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2002년 문학야구장의 개장 당시 SK는 402,732명의 관중수를 기록하였고 2001 시즌의 178,645명보다 무려 2.3배나 증가한 관중수를 기록했다. 당시 2002 시즌 SK가 야구를 잘 하기나 했나? 이는 열악한 도원구장의 상황 역시 관중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데이터라고 볼 수 있다.[30] 또한 연고지 이전으로 상당수의 팬들이 이탈한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도 선방이다. 당시 인천의 야구팬들이 삼분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는데 기존 수준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수요가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신축하고 있던 문학야구장의 토대를 다진 건 다름아닌 현대 유니콘스였다. 그러나 지네가 안쓰고 RUN
사실 이 문서나 현대 피닉스 문서 등을 보면 현대그룹 자체가 야구판에서 여러번 근시안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빚은 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야구 원년에 야구판에 뛰어들 수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하여 삼미와 같은 듣보잡 기업에게 드넓은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내주었고, 이후 왕회장의 정치 놀음으로 그룹이 결딴날 위기에 처하자 부랴부랴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야구판에 뛰어들려다가 실패하자 현대 피닉스를 만들어 야구계 질서를 흐트려놓고 여러 선수 인생 조지는가 하면, 간신히 프로야구에 진입한 이후에도 엄청난 현질로 리그에 거품을 일으킨 주범이 바로 현대다. 현대가 분명 초기에 엄청난 자금을 야구단에 쏟아붓기는 했지만, 그 엄청난 돈을 아껴 눈앞의 성적 대신 긴 호흡으로 인천에서의 정착을 택한다는 선택지도 얼마든지 존재했다.
따지고 보면 급작스런 연고지 이전의 이면에는 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의 경영 악화가 있었고, 그 현대전자의 위기는 또한 현대그룹과 한국 재벌 대기업 특유의 문어발식 확장과 정경유착으로 인한 것이었다. 결국은 현대와 왕회장 특유의 근시안적인 조급증이 현대, 그리고 그 역사에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후대의 세 팀 팬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일 뿐. 실제로 SK 와이번스의 인천 연고와 현대 유니콘스의 수원 이전 결정이 있은 다음 날에 현대그룹 분열의 시발점이 된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났으니...
만일 이 때 연고이전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한 팀을 응원하던 팬들이 분열되어 싸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1차지명권을 잃은 후 경기•인천팜이 엄청나게 흥하였던 것도[31] 더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이다.[32][33]
2.5.2 2000년: 수원으로의 연고이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며 두번째 우승, 그러나 무너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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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는 시즌 전에 전문가들로부터 '중위권팀'으로 예상되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자 우승후보로 전문가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그 해 투-타 밸런스가 98년때보다 훨신 워낙 완벽한데다[34] 선수단 구성도 매우 우수한 선수들이 많아 그해 정규시즌 승률 0.695이라는 압도적인 기록[35]을 낸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4승3패로 우승.[36][37]
그러나, 2000년 현대는 최고의 한해를 보낸 동시에 가장 힘든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원래 현대그룹의 계획은 연고가 있었던 수원 야구장에서 대략 3~4시즌 정도를 치르면서 그 사이에 서울에 전용구장을 확보, 서울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목동 야구장의 증·개축을 시도하였으나 그 비용이 200억 이상으로 추산되자 신축으로 가닥을 잡았고 상암동에 25,000석 규모의 전용구장을 지어 이전하려 하였다.기사 그러나 이 직후 현대그룹의 분열과 정주영 명예회장의 타계 등 그룹에 악재가 줄줄이 겹쳤다.
게다가 모기업 하이닉스(구 현대전자)가 부도위기를 겪고 있다는 이유로 서울 입성 비용 54억을 가로채 써버렸다. 특히나 이 돈은 신생 인천 연고팀인 SK 와이번스가 기존 연고팀에 대한 연고침해 보상비로 건넨 비용[38]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임시연고지였던 수원은 명목상(왜 명목상인지는 아래 각주 참고) SK 와이번스의 연고지이자 제2구장이었으므로, SK 와이번스의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주고 연고지는 연고지대로 침해받는 뚜껑 열릴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39] 이후 모기업 하이닉스는 2001년부터 2007년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기까지 단 한 푼의 지원금도 주지 않았다.[40] 심지어 현대자동차그룹에서 2001년 인수를 제안했으나 인수금액 900억드립을 쳤고, 결국 제안을 철회하고 비교적 저렴한데다가[41], 연고지 조건[42]도 맞는 해태 타이거즈 인수로 방향을 돌렸다.
결국 모기업인 하이닉스가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에 지원금 없다'고 GG를 치게 되고, 2001년 이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범현대가의 지원금으로 근근히 버텨왔으나 2003년 구단주 정몽헌 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주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이후 정몽구 회장이 그룹 사정을 이유로 지원을 끊은 2007년부터는 선수들 연봉 지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KBO 기금으로 구단을 운영하게 되었다.[43][44]
이처럼 현대 유니콘스의 서울 연고이전은 대주주 하이닉스의 무책임한 행태로 인해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기존 팬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연고이전을 추진했던 현대그룹 고위간부들은 뒷날 2005년, 구단이 어렵게 되자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대거 빠져나가 버렸다(…). 이후 8개 구단 체제 유지와 현대 구단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등을 감안해 KBO는 2007년부터 도시연고제를 시행하였다.[45] 하지만 수원 연고로 전환해서 정착하기에도 이미 많이 늦은 상황이었다.
서울 입성 실패는 재정적인 문제 외에도 유니콘스를 괴롭혔는데, 현대는 수원구장을 잠시 임차점거[46]하는 상황이라 정식적인 연고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2003년 드래프트부터 1차 지명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유목민
이로 인한 팀 뎁스의 약화는 이후 현대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초창기의 히어로즈가 극심한 전력저하에 시달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위라운드도 아니고 무려 6시즌동안 1차지명을 못 뽑았으니....[47] 히어로즈 약체화의 1차적인 원인은 넥센마켓폭풍 선수매각이었지만, 사실 선수매각은 주로 투수진 쪽에 집중되어 있었고 야수진에서 넥센마켓이 판매한 사례라면 이택근과 황재균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도 한 명은 돌아왔고 조평호, 김민우, 신현철은 2차드래프트 40인 외 지명을 통해 이적, 지석훈과 차화준이 NC 다이노스로 트레이드[48], 김남형, 전민수가 부상으로 방출되면서 팀을 떠났으나 이들은 2군에만 있었던지라 사실상 유의미한 전력이라고 보기 힘들고, 이 정도의 전력이탈은 다른 팀들도 일상다반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 넥센 히어로즈는 눈뜨고 못 봐줄 물 빠따를 선보였고, 결국 그 공백은 트레이드와 자체육성을 통해 간신히 메울 수 있었다. 단적인 예로 2015년 현재 강정호의 미국 진출 이후로 내야진에 현대 출신 선수는 단 한 명도 남지 않았고, 유재신....이 내야수일까?, 이숭용의 후계자인 박병호는 그의 은퇴 직전에서야 트레이드를 통해 간신히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외야진은 현대 출신은 이택근과 유한준이 있지만, 그 다음 서열은 유틸리티 플레이어인 트레이드 출신의 서동욱과 이성열 정도를 제외하면 바로 박헌도까지 내려가 버린다. 그리고 이젠 박헌도 또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롯데로 이적...이종욱을 왜 내보내셨어요? 오히려 그나마 현대 출신들을 좀 찾아볼 수 있는 쪽이 싸융짱문오납의 투수진[49], 한화에서도 3번째 포수에 불과한 허도환에 열광해야 했던 포수진이니 말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등,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정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한 원동력이 된 바탕은 구단만의 특한 가족같은 분위기 형성이 가장 큰 밑바탕이 되었고, 이는 넥센 히어로즈에서도 이어진다.
그리고, 2016년 10월 4일 두산 베어스가 원정팀 롯데 자이언츠 상대로 드디어 현대가 했던 91승 뛰어넘어 92승을 달성했다.
2.5.3 2001년: 빈약해진 선수층에도 4강진출 성공.
2001년 시즌 전부터 투수진에서 이탈이 발생했다.
정명원이 은퇴했으며, 철벽계투 조웅천+조규제는 신생팀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15억원에 SK로 트레이드되어야했다. 또한 에이스 정민태가 해외 진출을 결심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임대되었다.
야수진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팀의 주포인 외야수 심재학이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상대는 외야수 심정수인데, 심정수가 심재학보다 더 좋은 성적을 올리며 활약하게 된다. 그 외에도 백업 포수인 장광호를 5천만원에 SK에서 트레이드해왔고, 백업 내야수인 염경엽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시즌 개막전에는 정명원과 염경엽[50]의 은퇴식이 수원 야구장에서 열렸다.
또한 시즌 초반에는 계투진에 자리가 없던 최영필+김홍집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면서 선발감으로 쓰기 위해 좌완 이상열을 한화에서 영입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구단이 돈이 없었던지라, 정민태의 임대료+조웅천, 조규제의 트레이드 머니를 털어서 구단을 운영했다.
이 시즌은 임선동이 선발진에서 분전했지만, 4점대 방어율을 찍어서 에이스라 보기엔 모자랐다. 특히 정민태의 공백이 너무나 컸고, 김수경은 부진했다. 그 외에도 마무리 위재영의 부상과 박종호의 타율이 2할 4푼으로 1할씩이나 추락하는 등의 악재가 있었다. 시즌은 정규리그 2위로 마감했지만, 그 해 두산에게 밀려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2군의 무명 투수 송신영이 발굴된 것과 셋업과 마무리를 오가던 신철인의 활약이 큰 소득이었다.
시즌 끝나고 김인호와 이명수가 현역에서 은퇴했으며, 백업포수인 이재주가 KIA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2.5.4 2002년: 또 4강만 가면 광탈
지난해에 비해 그나마 전력누수가 적은 시즌이었다. 여전히 몇몇 선수가 부상을 앓았지만 2001년 광대뼈 골절상을 당한 심정수가 부상을 떨쳐내고 팀 중심타선을 맡았다. 이밖에도 야수진에는 4박(박경완, 박종호, 박재홍, 박진만)과 이숭용, 전준호 역시 건재했으며 포수와 3루, 외야 한자리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강병식, 채종국 그리고 신인 포수 강귀태 등 한창의 선수들이 1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투수진도 전준호가 이탈했지만 임선동, 마일영, 송신영, 신철인 등이 건재했으며 데뷔이후 처음으로 죽을 쑨 김수경이 무사 복귀하면서 희망을 불어넣었다. 무엇보다도 대학최대어 중 한 명인 조용준의 가세가 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부상 중인 마무리 위재영의 복귀가 늦어지면서 시즌 시작은 용병+조용준의 더블스토퍼 체제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후에 위재영은 선발로 복귀했다.5승 10패 망했어요
외국인선수의 경우 삼진왕이지만 일발장타와 수비로 자기 몫을 하던 퀸란이 지난해에 비해 2/3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쫓겨났다. 투수인 테일러와 엔리케스[51] 역시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방출됐다. 이를 대신해 일본야구 2군을 폭격중인 폴과 영건 토레스 그리고 강속구 투수 베라스를 영입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팀 전체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팀 중심 타선과 하위타선의 괴리가 너무나도 심했다는 점이다. 이승엽의 새로운 라이벌로 급부상한 46홈런의 심정수와 3할을 친 전준호 등 1~6번 타선까지는 다른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않을 정도의 구색은 갖췄다. 문제는 7 8 9 멘도사라인인데 당시 박진만(0.219),박경완(0.203), 채종국(0.228)의 타격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특히 지난해 3할 22홈런으로 타격 커리어 하이를 찍은 박진만과 최초의 포수 20-20을 기록한 박경완의 부진은 크게 느껴졌다.
외국인선수인 폴과 토레스는 각각 초반과 후반에 고전했지만 시즌을 끝까지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강속구 마무리로 주목받던 베라스는 여름부터 난타당하다 결국 대체선수인 프랭클린으로 교체됐다.[52]
2002년은 정규리그 3위로 마감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에게 밀려 또 일찌감치 4강권에서 탈락했다.
한편 시즌 끝나고 주전포수인 박경완이 FA를 선언하면서 SK 와이번스로 이적했다. 또한 중심타자인 박재홍이 기아 타이거즈에 정성훈[53]+10억에 트레이드 되면서 팀 전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수공백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입단하는 이택근과 SK에서 방출되어 무적선수였던 김동수를 영입해 해결땜빵할 예정이었고, 중견수, 중심타자 자리는 이숭용이 맡게될 예정이었다.[54]
그리고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 해부터는 부상으로 추락한 위재영을 대신해 대졸신인 조용준이 마무리 투수로 뛰게된다는 것이었다. 조용준은 이 해부터 신인상을 받으면서 주전 마무리[55] 자리를 굳혔다.
2.5.5 2003년: 정민태의 투혼, 그리고 우승.
2003년에는 에이스 정민태와 4번타자 심정수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리그 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한국시리즈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올라온 SK 와이번스와 상대를 하게 된다. 7차전까지 가는[56]끝에 에이스 정민태의 활약[57]에 힘입어 3번째 우승을 하였다.
시즌 시작전에 박경완, 박재홍이라는 팀 핵심 선수가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수가 .319의 타율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팀을 이끌었고 포수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또한 현금과 함께 온 정성훈도 비록 규정타석에는 들어가지 못했으나 타율 .343에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3분의 2까지 타선 공백을 막아줬다. 오히려 전력누수가 심했던 것은 마운드였는데 임선동, 마일영, 위재영 등 로테이션을 지켜던 선발들이 몽땅 나가떨어지면서 선발전체에 구멍이 난 상태였다. 다행히 돌아온 정민태가 어김없이 타고투저에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1선발을 지켰고, 외국인 투수 바워스가 후반기에 잠시 이탈했지만 24경기에서 13승 평균자책점 3.01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올리며 팀을 구했다. 구원쪽은 선수에 변동사항은 없었지만 첫해에 힘을 다뺀 조용준이 시즌 내내 박살나면서 고전했으나 권준헌이 커리어 하이를 찍고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을 받쳤다. 이밖에 신철인 이상열 등 7~8회에 나와줄 수 있는 계투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한편 시즌 후 오프시즌에 주전 2루수인 박종호가 FA를 통해서 삼성으로 이적함에 따라, 김일경이나 서한규, 채종국같이 박종호에 비해서 뭔가 모자란 선수들이 센터라인을 지키게 되었다. 투수 권준헌이 한화 이글스로 가고, 외야수 송지만이 현대 유니콘스로 오는 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물론 현대가 압승을 거둔 트레이드였지만, 트레이드 초기에는 차라리 내야수를 받아왔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58]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송지만이 잘해주다보니 그런 의견들은 쑥 들어갔다.
2.5.6 2004년: 왕조의 마지막 우승
2004년에 두산,삼성과 같이 치열한 선두권경쟁을 하던 끝에 정규시즌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맞아 역사상 유례없는 명승부를 보였다. 4승 3무[59] 2패.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11월 1일 열린 9차전에서 극적으로 우승함으로써 4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3번의 무승부 가운데 4차전에서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 노런이 나오기도 했다. 자세히 적자면 8회 2사까지 퍼펙트였다. 하지만 2사 후에 박진만에서 풀 카운트 승부끝에 볼넷을 주면서 퍼펙트는 무산되었고, 무승부가 되면서 노히트 노런도 공식 인정받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2004년 우승이 현대의 마지막 우승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시즌이 끝난 뒤 주축선수 박진만과 심정수가 FA를 선언, 삼성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특히 박진만의 삼성 이적은 구단은 물론 팬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치명타였다. 그 후유증은 히어로즈로 바뀌고서도 강정호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계속되었으니 상당히 치명적인셈. 이 무렵 박진만이 현대공홈에 가서 글을 썼는데, 팬들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박진만이 영원히 현대맨으로 남아주길 바랬던 마음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시기에 위재영이 구단과의 불화를 통해 방출되었고, SK에 입단하여 현대팬들과 아예 등져버린 사건이 생겼다. 대충 쉽게 생각하면 이범호가 FA로 기아 이적했을때 한화 팬들이 뭘 느꼈나를 생각하면 된다. 위재영은 SK에서 부활에 성공해 FA 계약까지 이끌어냈지만 이후 다시 추락해버렸다. 자세한 항목은 위재영을 보면 된다.
그리고 2004년 이후로 매년 억대연봉을 수령하던 정민태가 1승도 못거두고 사라진걸 생각하면 악재가 한꺼번에 덮쳤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기에 조용준도 2005년 어깨부상이후로 폭망했으니.... 망했어요
돈지랄로 흥한자, 돈지랄로 망하리라
2.5.7 2005년: 진만이도 없고, 정수도 없고...
2년에 걸쳐 빠져나간 박종호, 박진만 키스톤 콤비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시작한 2005년 시즌은 내야진의 실책 연발[60]과 체력저하 등을 이유로 큰 부진에 빠졌다. 5월까지만 해도 4~5위를 하면서 나름대로 분전했으나, 후반으로 가면서 막장화, 특히 방출의 기로에서 후반기에 폭발한 리오스약쟁이에게 제대로 박살[61]나며 7위를 기록했다. 이는 97년 이후 최하위 성적이다.
타선은 그야말로 공갈 아니면 힘이었다. 우선 홈런과 타점 장타율 1위를 차지한 래리 서튼이 있었다. 서튼은 시즌 35개의 홈런과 102타점을 올렸고 타율도 0.292로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병살타가 단 3개 밖에 안되고 볼넷 삼진비도 크지않은 효자용병이었다. 다른 타자들도 파워면에서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송지만은 홈런 4위를 기록했고 정성훈도 수비에서는 엉망이었지만 타격면에서는 팀을 이끄는데 도움이 됐다. 채종국, 김동수도 시즌 절반 정도를 소화했음에도 9~10홈런을 기록했으며 이숭용은 전반기에 홈런왕 페이스로 승승장구하다가 허벅지 부상으로 무너졌다.[62] 그러나 단 한 명의 3할타자도 없이 시즌을 마감해야했다.
투수진에서는 서튼과 함께 입단한 미키 캘러웨이가 주목받을만했다. 평균자책점은 3.97로 다소 떨어졌지만 시즌 다승 2위에 해당하는 16승을 올렸고 이닝도 3위와 크게 차이나는 197이닝으로 2위[63]를 기록하며 분전했다. 또 포수에서 투수로 전환한 황두성[64]이 기어코 터지면서 평균자책점 2위와 탈삼진 2위(공동 1위이므로 사실상 3위)를 차지했다. 마무리 조용준도 지난해만큼은 아니지만 27세이브를 기록하며 시즌 2위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물론 아에 엉망이 된 부분도 있었다. 홀드왕 이상열과 신철인, 마일영 등 쓸만한 중간계투가 전부 사라지면서 홀드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중간계투가 두고두고 고생을 했으나 이 시절 5~8위팀은 모두 엘롯기였으니[65] 큰 굴욕이었다. 그나마 LG와는 1리차로 순위가 갈렸다.
2.5.8 2006년: 유니콘스 마지막 가을야구
그 다음해인 2006년, 현대는 전문가들 사이에 가장 유력한 꼴찌후보로 거론되었다. 시즌 개막전 이래 4연패하는 등 매우 부진했지만 5월달에 갑자기 치고올라와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와 삼성, 한화와 더불어 선두를 다퉜다. 결국에는 정규시즌 2위를 기록하고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 상대로 1승 3패로 패하고 3위로 마감하게 된다.
이 시기의 소득은 신인선수들 이었는데, 하위픽으로 점찍어 놓았던 투수 장원삼이 대학에서 에이스가 되어서 억대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이종범 이후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인 강정호가 이 시기에 입단했다. 또한, 황재균, 이현승이라는 준수한 선수들과 합법유망주 김영민이 입단한 것도 이 시기의 일. 그러나 이 시즌을 앞두고 전준호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외야수가 상무에서 전역하자마자 방출당했는데[66] 당시만 해도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2.5.9 2007년~2008년: 왕조의 멸망
화려했던 왕조의 쓸쓸한 최후
2006년 이후 그나마 지원을 해주던 현대가의 지원이 끊겼다. 이는 야구팬으로서 끊임없이 지원을 해주건 현대그룹의 정몽헌회장이 대북송금 특검 사건으로 조사를 받다가 자살(2003)한 것과 유니콘스의 당시 최대주주인 현대전자가 채권단 소유의 기업인 하이닉스가 되었고 채권단에서 "너네 돈도 없는데 야구단 운영을 왜함?"이라며 태클 걸기 시작한 것이 복합된 결과였다. 정몽헌에 이어 현대그룹을 책임지게 된 현정은은 2005년을 마지막으로 매년 주던 40억의 지원을 끊었고, 이전까지 80억을 지원하던 현대자동차그룹과 40억을 지원하던 현대해상 측에서도 현대그룹이 손을 턴 이상 그전부터 이런 지원에 항의하던 주주들을 납득시킬 명분이 없어서 유니콘스에게 보내던 사실상 모든 지원금이 끊어졌다. 그나마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 덕에 현대해상 브랜드의 헬멧광고를 통해 15억을 받을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당시 박용오 KBO 총재[67]가 2005년 5월 현정은 회장을 찾아가서 상황 타개를 시도했으나, 돌아온 것은 올해가 지원의 마지막아며 매각 추진을 해달라는 말 뿐. 채권단이 장악한 하이닉스는 이제나 저제나 매각은 누구에게든지 하겠으나 지원은 한푼 해줄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전까지 현대그룹의 사세가 기우는 것과 함께 삐걱거리면서도 어떻게 유지는 되어가던 현대 유니콘스 구단의 운영은 06년부터는 급격히 어려워졌다. KBO는 리그 전체의 규모 축소를 막기 위해 상황유지를 택했고, 매각이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모아온 야구발전기금을 담보하여 주거래 은행인 농협에서 받은 대출로 사실상 유니콘스를 위탁운영하면서 구매기업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2007년 시즌 끝까지 매각은 성사되지 않았고, 이때까지 KBO가 26년간 모아온 140억의 야구기금은 유니콘스 운영비에 전부 소진되어버렸다.
사족이지만 이 일로 인해 이 시점 이후로 KBO의 발언권은 현저히 약화되고 프로야구는 회원사들이 의사결정을 사실상 주도하게 된다.
첫번째 매각 시도는 농협중앙회와 있었다. 2007년 1월 16일, 언론은 "하이닉스의 경영 부진에 의해 농협중앙회에 야구단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일제히 보도하였다. 실제 하이닉스와 농협중앙회측은 유니콘스 주식과 부채를 134억에 인수하는것까지는 동의하였고, 보도자료로 '농촌사랑야구단(가칭)'을 이야기하고 목동구장을 홈으로 사용하기 위한 개보수 비용까지 산출하는 단계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유니콘스 프런트의 퇴직금 부담 문제와 농협중앙회 노동조합과 농민들의 반발이 이어지고, 무엇보다 주관부터인 농림부가 이 과정에서 어떠한 협의도 없었다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모든 임원진의 업무정지 가능성까지 제기하자 1월 19일, 농협 측은 농민 등 여론의 반발을 이유로 인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이 인수 시도는 비리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수뇌부가 정권의 비호를 받기 위해 무리하게 시도했다는 설이 계속 돌았다.
- KBO는 6월까지도 계속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흘렸지만, 7월 협상을 주도한 정대근 농협중앙회 회장이 구속됨으로서 판은 완전히 뒤엎어졌다.
예전에 마구마구 초기 시절에 유저들의 스크린샷 게시판에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들과 농협의 로고를 섞인 유니폼을 합성시켜 만든 사진이 있었는데 다들 우스꽝스러운건지 몰라도 현대가 농협이랑 너무 잘어울린다고 말설이 나왔다 안그래도 현대와 농협 두개의 기업 둘 다 색깔이 초록/노랑으로 일치하였기에 이런 드립이 나온지도 모른다.
이 이후 미국의 한인 부동산회사인 프로스테이트 홀딩스가 KBO에 유니콘스의 인수를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체가 불분명한 이 기업에 대해 KBO는 실무진이 오면 이야기는 해보겠지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대놓고 이야기했고, 이 기업은 알아서 인수 의향 타진을 철회한다.
결국 유니콘스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2007년 시즌을 치러나가게 되었다. 2007년 시즌 개막 3연전부터 3연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매우 심각한 부진에 빠지게 된다. 4월 말까지만 해도 7연패를 겪는 등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연패를 끊은 이후부터 5월과 6월에 치고 올라가 한때 4위권 내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시즌 중에 용병투수 미키 캘러웨이가 부상으로 이탈함으로써 선발 투수진에서 김수경, 황두성, 조용훈, 송신영이 주축이 되나 틈만 나면 타자쪽이 말썽을 부리고 타자들이 터지면 투수들이 붕괴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시즌 내내 투-타 불균형 엇박자가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단들은 포기하지 않고, 프런트의 지원과 열정속에 구단 특유의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끝까지 분전했다.당시의 분위기. 이숭용과 김수경의 인터뷰
하지만, 야구계 전체가 몇십년간 모아온 돈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바득바득 우겨서 플로리다 전지훈련을 떠나고[68], 인건비 절감 노력은 사실상 하나도 하지 않으며 성적에만 몰두하여 당시 야구계에서 큰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2007년 10월 5일 한화 이글스와의 고별경기를 0:2로 승리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며 페넌트레이스가 끝난 시점에서, 팀 내외적으로 '현대'라는 이름을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정규시즌 6위였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거둔 기적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하지만, 야구기금은 이제 완전히 소진되었고, 이에 따라 유니콘스의 운명은 그야말로 초읽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각이 되거나, 7개구단으로 축소되거나 길은 단지 두개뿐이었다.
두번째의 매각 시도는 한참 조선/해운계 대 호황으로 활말하게 성장하던 STX였다. 신상우 당시 KBO 총재가 9월 라디오 인터뷰에서 '뻗어나는 중견기업이 현대를 인수'할 것이라고 말한것에서 처음 알려진 이 매각 추진은, 10월초면 끝날거라는 총재의 말과는 다르게 통 소식이 없었다. STX의 산업스파이 적발등의 기업 내부의 문제가 겹쳐서 두달여를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결국, 11월말, 별 진전없이 흐지부지된 끝에 공식적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STX에는 메인스폰서였던 경남FC의 인수 제안[69], V리그 타이틀 스폰서 제안도 들어가있던 상황이었지만, 스포츠 마케팅 확대를 하지 않기로 함으로서 이뤄진 것은 없다[70]. 하지만 만약 STX가 인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 기업의 이후 상황을 생각한다면 제2의 유니콘스 사태가 몇년 뒤에 일어났을 것이다.
세번째 매각 시도는 KT였다. STX의 인수는 공식적으로 KBO가 협상결렬을 선언해서 좌절된 것이기에 다른 기업이 있는게 아니냐는 예측이 있었고, 그게 사실이었다. 당시 KT의 이석채 회장이 야심차게 시도한, 2007년 12월부터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 시도는, 해체 후 재창단으로 걸림돌이 되는 하이닉스와의 협상을 우회하는 걸로 규정되어있었다. 임시 구단 사무실이 꾸려지고, 엠블렘이나 유니폼 시안이 나오고 프런트 구조나 FA영입 명단이나 코칭스탭 명단까지 떠돌기 시작할 정도로 이 인수시도는 꽤나 심도있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KT가 요구한 년 12차례 잠실구장 사용 문제와 그것에 동의한 KBO의 합의안과 서울 연고권에 대한 보상으로 입성금을 내라면서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 구단이 공동성명을 내면서 반발하고 나서면서 일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모 스포츠언론의 기자[71]가 KT가 실무차원에서 고려하고 있던, 가입비로 야구기금 부채분과 서울입성금을 합쳐 185억을 투자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함으로서 60억만 내면 된다는 경영진측의 설명에도 통 탐탁치 않아하던 사외이사와 노조와 주주들의 큰 반발을 샀다. 여기에 다른 구단들은 유니콘스 운영비로 써버린 야구기금을 KT가 부채로 안을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성의를 더 보일것을 촉구하면서 KBO 이사회에서 KT와의 협상추진을 조건부로 통과시키자, KT는 공식적으로 인수를 포기한다.[72][73]
이 외에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와의 접촉설[74]도 있었고, KT가 발을 뺀 후 모 언론매체에 방송중계권리를 포함시켜 팔겠다는 시도도 했다고 하나 모두 좌절되었다.
이후 고양 원더스를 창단하는 허민의 네오플에서 인수 희망 타진도 있었으나, KBO 수뇌부의 IT업계에 대한 생소함[75]과 무엇보다 인수희망 타진 당시에는 KT와의 협상이 한참 순항중이었기에 이는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
새 시즌은 점점 다가오는데 모든 것이 좌절되고 결국 7개구단 체제로의 전환이 점쳐지던 1월 중순,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에서 창단 의사를 밝힌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네이밍 마케팅을 들고 온 수상쩍은 회사를 예전같으면 일언지하에 거부했겠지만, KBO나 유니콘스의 상황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닐 절박한 상황이었다. 결국 1월 30일, 가입금 120억을 내면서 현대 유니콘스를 대체할 새로운 8구단의 창단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히어로즈'란 구단명으로 새로 창단하면서, 공식적으로 삼미-청보-태평양-현대로 이어지는 계보와 우승기록 그리고 인천야구의 정체성은 영원히 사라졌다. 현대 유니콘스란 이름은 더 이상 볼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이 남긴 족적은 절대 작지 않았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1996년 창단 ~ 2007년 팀 해체 12시즌 동안 4회 우승 / 8회 가을야구를 하였으며, 특히, 논외로 2016년 10월 4일 두산 베어스에 의해 깨졌지만 한시즌 팀 최다승인 91승 을 만들었다. 어찌보면 현대가 돈대라고 비아낭을 듣긴해도 2000년도 까지는 현질로 해서 우승도 했고 2001년 이 후로는 돈이 없을때 우승을 2번 씩이나 한 신기한 팀이라고 듣는다.
3 유니폼
현대 유니콘스/유니폼 참조.
4 역대 등번호
현대 유니콘스/등번호 참조.
5 해체 당시 선수단
현대 유니콘스/선수단 참조
6 역대 선수
6.1 투수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
47 | 가내영 | 투수 | 1990(태평양) | 1990~1998 | 2003(KIA) | |
67 | 김민범 | 1992(태평양) | 1992~2007 | 2007(현대) | ||
45 | 김성태 | 2000(현대) | 2000~2007 | 2014(넥센) | ||
30 | 김수경 | 1998(현대) | 1998~2007 | 2014(고양) | NC 다이노스 스카우터 | |
11 | 김홍집 | 1993(태평양) | 1993~2001 | 2003(한화) | 부평구 리틀야구단 지도자 | |
50 | 노환수 | 2003(현대) | 2003~2007 | 2013(넥센) | ||
29 | 마일영 | 2000(현대) | 2000~2007 | 2015(한화) | 한화 이글스 육성군 투수코치 | |
60 | 박장희 | 1999(현대) | 1999~2007 | 2008(우리) | 두산 베어스 운영1팀 과장 | |
21 | 박정현 | 1998(현대) | 1996~1998 | 2000(SK) | ||
49-27 | 박준수 | 2000(현대) | 2000~2007 | 2012(KIA) | 넥센 히어로즈 1군 불펜코치 | |
23 | 신철인 | 2000(현대) | 2000~2007 | 2010(넥센) | 청원고등학교 야구부 | |
29 | 안병원 | 1992(태평양) | 1992~1998 | 2003(LG) | 원주고등학교 감독 | |
33-59-55 | 이대환 | 2002(태평양) | 2002~2007 | 2015(현대) | 상무 피닉스 투수코치 | |
65 | 이동학 | 2000(현대) | 2000~2007 | 2014(LG) | ||
11 | 이상열 | 1996(한화) | 2001~2007 | 2015(SK) | ||
18 | 위재영 | 1995(태평양) | 1995~2004 | 2007(SK) | 동산고등학교 투수코치 | |
54 | 임선동 | 1997(LG) | 1999~2007 | 2007(현대) | 연세대학교 투수코치 | |
61 | 전준호 | 1994(태평양) | 1994~2007 | 2011(SK) | 부천고등학교 코치 | |
28 | 정명원 | 1989(태평양) | 1989~2000 | 2000(현대) | kt 위즈 1군 투수코치 | |
10 | 정민태 | 1992(태평양) | 1992~2007 | 2008(KIA) |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 |
21-27 | 조규제 | 1991(쌍방울) | 1998~2000, 2003 | 2005(KIA) |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투수코치 | |
51 | 조용준 | 2002(현대) | 2002~2007 | 2010(넥센) |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 |
57 | 조용훈 | 2006(현대) | 2006~2007 | 2013(넥센) | ||
41 | 조웅천 | 1990(태평양) | 1989~2000 | 2009(SK) | 투수코치 | |
45 | 최원호 | 1996(현대) | 1996~1999 | 2010(LG) | SBS Sports 해설위원 | |
31 | 최창호 | 1987(청보) | 1987~1998 | 2002(LG) | SK 와이번스 루키군 재활코치 | |
45 | 황두성 | 1997(삼성) | 2001~2007 | 2011(넥센) | 삼성 라이온즈 2군 트레이닝 코치 |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현재 소속팀 | |
50 | 김영민 | 투수 | 2006(현대) | 2006~2007 | 넥센 히어로즈 |
21 | 배힘찬 | 2002(현대) | 2002~2007 | KIA 타이거즈 | |
21 | 손승락 | 2005(현대) | 2005~2007 | 롯데 자이언츠 | |
14-19 | 송신영 | 1999(현대) | 1999-2007 | 한화 이글스 | |
59 | 오재영 | 2004(현대) | 2004-2007 | 넥센 히어로즈 | |
42 | 이보근 | 2005(현대) | 2005-2007 | 넥센 히어로즈 | |
29 | 이현승 | 2006(현대) | 2006~2007 | 두산 베어스 | |
55 | 장원삼 | 2006(현대) | 2006~2007 | 삼성 라이온즈 | |
18 | 장효훈 | 2007(현대) | 2007 | kt 위즈 | |
18 | 최영필 | 1997(현대) | 1997~2001.6 | KIA 타이거즈 |
6.2 포수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
12 | 강귀태 | 포수 | 2002(현대) | 2002~2007 | 2003(KIA) | 동산고등학교 타격코치 |
35 | 김동기 | 1986(태평양) | 1986~1996 | 1996(현대) | ||
2 | 김상국 | 1986(빙그레) | 1996~1997 | 1997(현대) |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 |
2 | 김동수 | 1998(LG) | 2003~2007 | 2009(히어로즈) | LG 트윈스 2군감독 | |
2-56 | 김필중 | 1998(현대) | 1998~2004 | 2004(현대) | kt 위즈 2군 배터리코치 | |
26 | 박경완 | 1991(쌍방울) | 1997~2002 | 2013(SK) | SK 와이번스 1군 배터리코치 | |
12 | 강귀태 | 2002(현대) | 2002~2007 | 2003(KIA) | 동산고등학교 타격코치 | |
유선정 | 2005(현대) | 2006~2007 | 2016(넥센) | |||
24 | 임태준 | 2007(현대) | 2007 | 2016(넥센) | ||
25 | 장광호 | 1992(태평양) | 1992~1999,2001 | 2001(현대) | SK 와이번스 배터리코치 | |
허준 | 2005(현대) | 2005~2007 | 2014(NC) | 백송고등학교 코치 |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현재 소속팀 | |
24 | 허웅 | 포수 | 2002(현대) | 2002~2006 | SK 와이번스 |
6.3 내야수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
2루수 | 1989(삼성) | 1996 | 1996(현대) | 삼성 라이온즈 3군/BB Ark 타격코치 | ||
36 | 공의식 | 내야수 | 1993(태평양) | 1993, 1996~1997 | 1997(현대) | |
52 | 권도영 | 내야수 | 2003(현대) | 2003~2007 | 2011(넥센) | 스카우터 |
55 | 권준헌 | 3루수, 투수[77] | 1990(태평양) | 1990~2003 | 2008(한화) | |
00 | 김경기 | 1루수 | 1990(태평양) | 1990~2000 | 2001(SK) | |
14 | 김남형 | 내야수, 우익수 | 2007(현대) | 2007 | 2014(넥센) | NC 다이노스 전력분석 코치 |
14 | 김승권 | 내야수 | 1995(한화) | 2005~2006 | 2006(현대) | |
0-5 | 김일경 | 포수 | 1997(현대) | 1997~2007 | 2013(LG) | kt wiz 2군 작전코치 |
3 | 김민우 | 내야수, 좌익수 | 2002(현대) | 2002~2004 | 2016(KIA) | KIA 타이거즈 2군 수비코치 |
17 | 톰 퀸란 | 3루수 | 1987(토론토) | 2000~2001 | 2002(LG) | |
31 | 박종호 | 2루수 | 1992(LG) | 1998~2003 | 2010(LG) | LG 트윈스 1군 수비코치 |
7 | 박진만 | 유격수 | 1996(현대) | 1996~2004 | 2015(SK) | SK 와이번스 1군 수비코치 |
12 | 스캇 쿨바[78] | 3루수 | 1989(텍사스) | 1998 | 1999(투손) | 볼티모어 오리올스 타격코치 |
9 | 손차훈 | 1993(태평양) | 1993~1999 | 2001(SK) | ||
7 | 서한규 | 내야수 | 1998(롯데) | 2002~2007 | 2007(현대) | |
12-5 | 염경엽[79] | 유격수 | 1991(태평양) | 1991~2000 | 2000(현대) | |
이근엽 | 1991(태평양) | 1991~1997 | 1999(쌍방울) | |||
10 | 이숭용[80] | 1루수. 외야수 | 1994(태평양) | 1994~2007 | 2011(넥센) | kt wiz 타격코치 |
37 | 이재주 | 내야수 | 1992(태평양) | 1992~2001 | 2009(KIA) | |
4 | 이명수 | 1루수, 2루수 | 1989(OB) | 1998~2001 | 2001(현대) | |
조중근 | 1루수, 좌익수 | 2005(현대) | 2005~2007 | 2015(kt) | 경찰 야구단 코치 | |
15-9 | 채종국 | 유격수, 2루수 | 1998(현대) | 1998~2007 | 2008(LG) | 넥센 히어로즈 2군 수비코치 |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현재 소속팀 | |
25-17 | 강정호 | 유격수 | 2006(현대) | 2006~2007 | 피츠버그 파이리츠 |
16 | 정성훈 | 1루수 | 1999(해태) | 2003~2007 | LG 트윈스 |
정훈 | 2루수 | 2006(현대) | 2006~2007 | 롯데 자이언츠 | |
34 | 오재일 | 내야수 | 2005(현대) | 2005~2007 | 두산 베어스 |
유재신 | 내야수 | 2006(현대) | 2006~2007 | 넥센 히어로즈 | |
6 | 지석훈 | 2루수, 3루수, 유격수 | 2003(현대) | 2003~2007 | NC 다이노스 |
7 | 차화준 | 내야수 | 2005(현대) | 2005~2007 | 삼성 라이온즈 |
13 | 황재균 | 3루수, 유격수 | 2006(현대) | 2006~2007 | 롯데 자이언츠 |
3 | 신현철 | 유격수, 2루수, 3루수 | 2006(현대) | 2006~2007 | kt 위즈 |
6.4 외야수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은퇴년도 | 비고 | |
25-36 | 강병식 | 1루수, 우익수 | 2002(현대) | 2002~2007 | 2012(넥센) | 넥센 히어로즈 1군 타격 보조코치 |
44 | 강영수 | 외야수 | 1989(삼성) | 1995~1997 | 1998(쌍방울) | |
16-33 | 김광림 | 외야수 | 1984(OB) | 1997~1998 | 1998(쌍방울) | NC 다이노스 2군 타격코치 |
8 | 김인호 | 내야수, 외야수 | 1989(롯데) | 1990~2001 | 2001(현대) | SK 와이번스 1군 주루코치 |
33 | 래리 서튼 | 외야수 | 1992(캔자스) | 2005 | 2007(KIA) | 피츠버그 마이너 타격 코디네이터 |
62 | 박재홍 | 중견수, 우익수 | 1996(현대) | 1996~2002 | 2012(SK) | MBC SPORTS+ 해설 |
14 | 심재학 | 우익수 | 1995(LG) | 2000 | 2008(KIA) | 넥센 히어로즈 1군 수석코치 |
44-32 | 심정수 | 3루수, 좌익수, 우익수 | 1994(OB) | 2001~2004 | 2008(삼성) | |
17-25 | 송지만 | 외야수 | 1996(한화) | 2004~2007 | 2014(넥센) | 넥센 히어로즈 코치 |
3 | 윤덕규 | 외야수 | 1985(MBC) | 1992~1997 | 1997(현대) | |
32 | 오윤 | 외야수 | 2000(현대) | 2000~2007 | 2015(한화) | |
51 | 이희성 | 외야수 | 1989(태평양) | 1989~1996 | 1997(삼성) | |
이승주 | 외야수 | 2004(현대) | 2004~2007 | 2013(고양) | ||
장정석 | 외야수 | 1996(현대) | 1996~2002 | 2004(KIA) | 넥센 히어로즈 감독 | |
64 | 전근표 | 외야수 | 2000(현대) | 2000~2007 | 2010(한화) | |
1 | 전준호 | 좌익수, 중견수 | 1991(롯데) | 1997~2007 | 2009(히어로즈) | NC 다이노스 작전/주루코치 |
8 | 정수성 | 우익수 | 1997(현대) | 1997~2007 | 2013(넥센) | |
13 | 조재호 | 외야수 | 1998(현대) | 1998~2005 | 2012(SK) | |
24 | 최만호 | 외야수 | 1997(현대) | 1997~2000 | 2009(롯데) | 롯데 자이언츠 1군 작전코치 |
22-33 | 최익성 | 외야수 | 1994(삼성) | 2002~2003 | 2005(SK) | |
24 | 클리프 브룸바 | 3루수, 외야수 | 2001(텍사스) | 2003~2004, 2007 | 2009(히어로즈) |
이름 | 포지션 | 데뷔년도 | 삼청태현 소속기간 | 현재 소속팀 | |
39 | 유한준 | 유격수 | 2004(현대) | 2004~2007 | kt 위즈 |
39 | 이종욱 | 유격수 | 2003(현대) | 2003~2005 | NC 다이노스 |
42-31 | 이택근 | 포수, 1루수, 외야수 | 2003(현대) | 2003~2007 | 넥센 히어로즈 |
47 | 장기영 | 유격수 | 2001(현대) | 2001~2007 | 한화 이글스 |
6.5 역대 외국인 선수
- USA : 미국
- DOM : 도미니카 공화국
- VEN : 베네수엘라
년도 | 이름 | 국적 | 포지션 | |
1998 | 조 스트롱(Joe Strong) | USA | 투수 | |
스캇 쿨바(Scott Coolbaugh) | USA | 내야수 | ||
1999 | 에디 피어슨(Eddie Pearson) | USA | 내야수 | |
조지 카날리(George Canale) | USA | 내야수 | 시즌중 방출 | |
브렌트 바워스(Brent Bowers) | USA | 외야수 | ↖ 대체 영입 | |
2000 | 톰 퀸란(Tom Quinlan) | USA | 내야수 | |
에디 윌리엄스(Eddie Williams) | USA | 내야수 | 시즌중 방출 | |
대릴 브링클리(Darryl Brinkley) | USA | 외야수 | ↖ 대체 영입, 시즌중 방출 | |
찰스 카펜터(Charles Carpenter) | USA | 외야수 | ↖ 대체 영입 | |
2001 | 케리 테일러(Kerry Tayler) | USA | 투수 | |
톰 퀸란(Tom Quinlan) | USA | 내야수 | ||
J. R. 필립스(J. R. Philips) | USA | 내야수 | 시즌중 방출 | |
오스카 엔리케스(Oscar Henriquez) | VEN | 투수 | ↖ 대체 영입 | |
2002 | 멜키 토레스(Melqui Torres) | DOM | 투수 | |
코리 폴(Corey Paul) | USA | 내야수 | ||
다리오 베라스(Dario Veras) | DOM | 투수 | 시즌중 방출 | |
마이클 프랭클린(Michael Franklin) | USA | 내야수 | ↖ 대체 영입 | |
2003 | 셰인 바워스(Shane Bowers) | USA | 투수 | |
마이클 프랭클린(Michael Franklin) | USA | 내야수 | 시즌중 방출 | |
클리프 브룸바(Cliff Brumbaugh) | USA | 외야수 | ↖ 대체 영입 | |
2004 | 클리프 브룸바(Cliff Brumbaugh) | USA | 외야수 | |
마이클 피어리(Mike Fyhrie) | USA | 투수 | ||
2005 | 래리 서튼(Larry Sutton) | USA | 외야수 | |
미키 캘러웨이(Mickey Callaway) | USA | 투수 | ||
2006 | 래리 서튼(Larry Sutton) | USA | 외야수 | |
미키 캘러웨이(Mickey Callaway) | USA | 투수 | ||
2007 | 클리프 브룸바(Cliff Brumbaugh) | USA | 외야수 | |
미키 캘러웨이(Mickey Callaway) | USA | 투수 | 시즌중 방출 |
7 역대 성적(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 포함)
| 우승 |
| 준우승 |
| 포스트시즌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82 | 6위/6팀[81] | 6위 | 삼미 슈퍼스타즈 | 80 | 15 | 65 | 0 | 0.188 |
1983 | 3위/6팀[82] | 3위 | 100 | 52 | 47 | 1 | 0.525 | |
1984 | 6위/6팀[83] | 6위 | 100 | 38 | 59 | 3 | 0.392 | |
1985[84] | 6위/6팀[85] | 6위 | 삼미 / 청보 | 110 | 39 | 70 | 1 | 0.358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 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86 | 6위/7팀[86] | 6위 | 청보 핀토스 | 108 | 32 | 74 | 2 | 0.302 |
1987 | 7위/7팀[87] | 7위 | 108 | 41 | 65 | 2 | 0.389 |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 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88 | 7위/7팀[88] | 7위 | 태평양 돌핀스 | 108 | 34 | 73 | 1 | 0.319 |
1989 | 3위/7팀 | 3위 | 120 | 62 | 54 | 4 | 0.533 | |
1990 | 5위/7팀 | 5위 | 120 | 58 | 59 | 3 | 0.496 | |
1991 | 5위/8팀 | 5위 | 126 | 55 | 69 | 2 | 0.444 | |
1992 | 6위/8팀 | 6위 | 126 | 56 | 67 | 3 | 0.456 | |
1993 | 8위/8팀 | 8위 | 126 | 34 | 82 | 10 | 0.310 | |
1994 | 2위/8팀 | 준우승 | 126 | 68 | 55 | 3 | 0.552 | |
1995 | 7위/8팀 | 7위 | 126 | 48 | 73 | 5 | 0.401 | |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최종 순위 | 팀 이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1996 | 4위/8팀 | 준우승 | 현대 유니콘스 | 126 | 67 | 54 | 5 | 0.552 |
1997 | 6위/8팀 | 6위 | 126 | 51 | 71 | 4 | 0.421 | |
1998 | 1위/8팀 | 우승 | 126 | 81 | 45 | 0 | 0.643 | |
1999 | 드림 3위/4팀[89] | 3위 | 132 | 68 | 59 | 5 | 0.535 | |
2000 | 드림 1위/4팀 | 우승 | 133 | 91 | 40 | 2 | 0.695 | |
2001 | 2위/8팀 | 3위[90] | 133 | 72 | 57 | 4 | 0.558 | |
2002 | 3위/8팀 | 4위[91] | 133 | 70 | 58 | 5 | 0.547 | |
2003 | 1위/8팀 | 우승 | 133 | 80 | 51 | 2 | 0.611 | |
2004 | 1위/8팀 | 우승 | 133 | 75 | 53 | 5 | 0.586 | |
2005 | 7위/8팀 | 7위 | 126 | 53 | 70 | 3 | 0.431 | |
2006 | 2위/8팀 | 3위[92] | 126 | 70 | 55 | 1 | 0.560 | |
2007 | 6위/8팀 | 6위 | 126 | 56 | 69 | 1 | 0.448 | |
KBO 통산 26 시즌 | V4 | 3137 | 1466 | 1594 | 77 | 0.479 |
8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전신 포함)
삼성 라이온즈 | 89준PO : 2승 1패 00PO : 4승 04KS : 4승 3무 2패 | 준PO 1승, PO 1승,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10승 3무 3패 |
KIA 타이거즈 | 89PO : 3패 96KS : 2승 4패 | PO 1패, KS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2승 7패 |
한화 이글스 | 94PO : 3승 96준PO : 2승 06PO : 1승 3패 | 준PO 1승, PO 1승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6승 3패 |
LG 트윈스 | 94KS : 4패 98KS : 4승 2패 02준PO : 2패 | 준PO 1패, KS 1승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4승 8패 |
쌍방울 레이더스 | 96PO : 3승 2패 | PO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3승 2패 |
두산 베어스 | 00KS : 4승 3패 01PO : 1승 3패 | PO 1패,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5승 6패 |
SK 와이번스 | 03KS : 4승 3패 |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4승 3패 |
9 그 외 트리비아
- 야구계에서 2007년은 그야말로 통한의 한해라고 할 만하다.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와 동대문야구장의 철거라는 한국 야구의 양대 비극이 모두 2007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데, 바로 다음해인 2008년, 한국 야구는 베이징 올림픽 우승이라는 희대의 빅이벤트 속에 엄청난 팬덤 증가와 중흥을 맞이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니콘스 매각을 진행했다면 프로야구단 인수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과 여론의 추이는 2007년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을테고,[93] 동대문야구장의 대체구장으로 계획된 고척 스카이돔으로 인해 이런저런 고통을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유니콘스-히어로즈 팬들로서는 '1년만 더 버텼더라면...' 하는 소리가 나오는 천추의 한이 될만한 일.
- 하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KBO가 오랫동안 모아왔던 야구기금을 유니콘스를 대신 운영하는데 다 털어먹었기에 여력이 소진된 상황이었고[94], 여기에 발전기금으로 끌어다 쓰던 유니콘스 구단측은 끝끝내 플로리다 전지훈련을 가는등 말년의 쌍방울 레이더스나 해태 타이거즈처럼 뼈를 깎는 인건비 절감 노력을 하긴 커녕 기존에 쓰던 예산을 절감하려는 노력도 딱히 하지도 않았기에, 야구계 전체의 돈을 탕진해서 자기들 성적을 내려 한다는 인식이 박힌 다른 구단들로부터 시선이 싸늘해진 상황이었다. 2007년 시즌 말의 상황은 그야말로 급박했으며, 더이상 시간을 끄는건 그냥 불가능했다. 게다가 결국 유니콘스가 해체되어 7개구단 체제가 되면 추가로 해체를 검토하고 있다는 구단들이 있다는 루머는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그렇다면 리그는 순식간에 쪼그라들 상황이었다. KBO가 센테니얼의 창단 의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건 이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 사실, 2008년의 프로야구 인기의 부활[95]에는 오랫동안 야구계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유니콘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영향이 있었고, 만약은 모르는 것이지만 이 문제가 계속 되었다면 2008년 이후의 인기부활이 가능했을지는 불명확하다.[96] 이후 히어로즈 구단이 한 동안 메인스폰서를 구하는데 애를 먹은 것에서 볼 수있듯, 리그의 인기증가를 통한 경제적 효과가 기업에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이며, 기업이 이를 체감하고 투자를 결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 당시 KBO는 지나치게 일찍 협상사실을 공개하거나 기존 구단과의 물밑협상을 거치지 않는 등 매각 협상에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이미 야구계의 여력은 소진된 상태에서 언제 또 다시 온풍이 불지 알 수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다른 대기업들마저 듣도보도 못한 센테니얼에게 유니콘스를 넘기는 선택에 동의할 정도였던걸 생각한다면, KBO의 선택을 그저 매도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 최훈이 GM(웹툰)에서 수원 램스의 기본 컨셉을 이 팀에서 가져왔고, 램스라는 이름은 세인트루이스 램스에서 따왔다. 다만 후속작인 클로저 이상용에서는 넥센 히어로즈 쪽을 참고한 듯.
- 2015년 현재, 삼청태현의 구단역사에서 현대 유니콘스 시절만 따로 계산하면 KBO 리그에 존재했던 모든 구단 가운데 삼성 라이온즈에게 역대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는 유일한 구단이 된다[97][98] 특히 조용준과 미키 캘러웨이는 해체된 지 1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에도 삼성 팬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삼성 상대로 무시무시한 포스를 자랑했다. 거기다 배영수의 글러브 패대기 장면을 만들어 준 무명선수 급 전근표의 한 방까지... 정규 시즌 이외에도 2000년 플레이오프 현대 4전 전승, 2004년 한국시리즈 현대 4승 2패 등 삼성은 현대만 만나면 힘을 쓰지 못했다. 여기에는 당시 유니콘스의 프론트가 동종업계 라이벌이었던
물론 삼성은 그렇게 생각 안했겠지만삼성과의 승부결과에 굉장히 민감했고, 이에 따른 추가적인 인센티브까지 부여해서 따로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반대로 LG 트윈스에게는 삼청태 시절에도 약했고 현대 시절에도 약했다. LG가 비밀번호를 찍던 때에도 밀렸으며, 1994년 한국시리즈와 2002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스윕을 당했으며, 1998년 한국시리즈 에서는 우승했지만 상대전적에서 밀렸고(7승 11패) 유일하게 상대전적과 등수에서 우위를 점했던 시즌은 2000 시즌이다.
10 응원가
이 함성 모아서 너희에게 주리라 이루자 신화창조를 우리의 희망을 모두 다 모아서 힘차게 달려 보아라 최강의 유니콘스[99] 꿈의 구단 유니콘스 지칠줄 모르는 너희의 용기 최강의 유니콘스 꿈의 구단 유니콘스 패기와 정열의 너희의 이름 현대 유니콘스 우리들의 이상이다 현대 유니콘스 우리들의 친구다 현대 유니콘스 너희를 사랑하리라 우리의 현대 유니콘스 |
11 역대 캐치프레이즈
- 1996년 :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100]
- 1997년 :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1998년 : 도전! '98!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1999년 : 도전! 2연패!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0년 : 정상 새천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1년 : 정상 2001!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2년 : 도전 2002!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3년 : 새로운 도전! 승리의 이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4년 : 불패신화! 끝없는 도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5년 : 멋진 승리, 끝없는 도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6년 : 도전! 열정! 투혼!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7년 : 새로운 각오! 새로운 신화!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 유니와 짝을 이룬다.
- ↑ 전신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일이다.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는 삼청태의 역사를 고스란히 계승하였으며 삼청태와 동일한 팀이므로 1982년부터 시작된 원년 팀으로 분류할 수 있다.
- ↑ 전신팀 태평양 돌핀스의 법인 설립일로 추정된다. 당시 태평양화학은 1987년 10월 6일 풍한방직 측과 청보 핀토스 구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 ↑ 삼청태현으로 일컬어지는 네 팀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창단식을 치렀다. 정확한 창단식 장소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여담으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신포동 인천상공회의소 건물에서 창단식을 했고 시즌 도중에 창단된 청보 핀토스는 숭의야구장에서 후기리그 개막경기 직전에 창단식을 치렀으며 태평양 돌핀스는 주안 옛 시민회관에서 창단식을 진행했다.
- ↑ 훗날 인천의 새 주인이 된 SK 와이번스는 SK그룹 소유 호텔인 서울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창단식을 치렀다.
- ↑ 우리 히어로즈로 선수단과 프런트만 승계(해체)후 재창단. 우회상장 비스무리하게 재창단했다.
- ↑ 흔히 '원당 야구장'이라 불리긴 했는데, 정확히는 당시 현대전자 연수원 내에 있었던 야구장이었고 이름과 달리 소재지는 일산동구 설문동에 있다. 유니콘스 해체 이후에도 2008년부터 2009년까조 히어로즈 야구단이 강진으로 2군을 보내기 전까지 잠시 이 곳을 빌렸고, 연수원 자체는 하이닉스를 거쳐 현재는 NH투자증권 산하 NH인재원 소속이 되었다.
- ↑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공석. 구단주 대행은 강명구
- ↑ 본래는 현대 유니콘스의 사장이 강명구였고, 단장이 김용휘였다. 그러나, 2003년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뜨고서 강명구 사장이 구단주대행을 맡고, 김용휘 단장이 사장으로 승진했다.
- ↑ 첫 번째 왕조는 1983년부터 1997년까지 9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9번 모두 우승을 차지했던 해태 타이거즈
- ↑ 이동학의 사례에서 보듯 2003년은 두각을 나타낸 신인 자체가 보이지 않은 신인 흉년의 해였다. 또 다른 신인왕 후보라 해봐야 이택근이 있었는데 이택근도 신인왕을 받을 성적은 전혀 아니었다.
- ↑ 조용준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기도 했었고, 오재영은 싸융짱문오에 포함될 정도가 되긴했어도, 잘 활약해주고있다. 반면에 이동학은 2009년 방출되어, 한화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거기서도 방출되어서, LG에 입단, 결국 2014 시즌중 방출됐다.
- ↑ 현대의 2년연속 우승 직후 삼성 라이온즈가 2005~2006년에 연속우승한다.
- ↑ 물론 공식적으로는 현대가 삼청태의 역사를 계승했기 때문에 원년팀으로 분류되어 82년부터 2007년까지 26년간 4회우승이 된다.
- ↑ 사실 인천에서도 1996년을 제외하면 평관 4~5천명 정도로 관중 동원면에서 리그 중하위권 수준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 ↑ 정확히는 휴전선 이북의 강원도 통천군 출신. 인천과도 인연이 있던 것이 젊은 시절 인천항에서 부둣가 하역 노동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 그의 일대기 중 빈대와 연관된 스토리가 있는데 인천항 하역 노동자 시절의 이야기다.
- ↑ 하지만 1984년 울산 현대 축구단을 창단하면서 프로축구에는 참여했다.
- ↑ 1970년대부터 재벌들에게 스포츠 종목을 강제로 할당해서 협회 회장을 맡게했다. 이후 재벌들이 회삿돈으로 스포츠단체를 운영하면서 국제대회 성적을 책임지게 된다. 국가 예산으로 해야 할 스포츠 진흥을 재벌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 때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 - 대한수영연맹 회장, 정몽구 - 대한양궁협회 회장이었다. 양궁협회 회장은 현재 정몽구 회장의 큰아들 정의선 씨가 하고 있다. 삼성 - 레슬링, 두산 - 유도, 한화 - 복싱 등 지금도 대부분의 스포츠 종목이 이런 식이다.
- ↑ 이 와중에 울산 지역의 유일한 고교야구 팀으로 창단했던 현대공업고등학교 야구부가 지역 야구의 취약한 기반을 이겨내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 ↑ 다만 박진만은 공식적으로는 체육특기자 수능 점수 상한선인 40점을 넘지 못해 진학이 좌절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 ↑ 그러나 이때 시작부터 현대그룹은 판단착오를 하는데 대주주를 현대백화점이나 현대건설 혹은 현대증권이나 현대해상을 최대주주를 선정했어야 하나 적자 투성이인 현대전자를 대주주로 선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특히 지금도 생존한 현대백화점이나 현대건설, 현대해상이 대주주가 됐다면 현재까지 현대 유니콘스라는 이름은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 ↑ 태평양 돌핀스 시절인 1994년 플레이오프에서도 내리 3연승으로 한화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전례가 있다.
- ↑ 전준호 영입 이전만 해도 현대에서 1번타자는 김인호였다. 김인호는 근성하나는 강한 선수였지만(단적인 예로 1996년 포스트시즌 1차전 때 정민철의 볼에 일부러 맞다시피하며 출루하려 했다), 타율이나 장타면에서는 너무 떨어졌기 때문에 1번 타자로 활약하기에는 부족했다. 전준호 트레이드에 대해서 지금은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 1순위'로 꼽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롯데측 입장에서는 '전준호는 나이도 있고 기복이 심한 선수'라는 인식때문에 계륵같은 존재로 여겼고, 거기다 연봉협상에서 고작 몇백만원 더주기 싫은 것도 있었다(…). 당시 롯데는 전준호 대체로 젊은 유망주였던 김대익을 크게 기대했으나 주루가 시망.... 김주찬이 올 때까지 거의 5년 동안 제대로 된 리드오프가 존재하지 않았다.
- ↑ 하지만, 유일한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마무리투수 용병 조 스트롱. 6승 5패 27세이브로 스탯상으로만 보면 괜찮은 성적으로 보이지만 겨우겨우 세이브를 따는 모습을 보였으며 Whip(이닝당 출루허용))이 1.60이나 되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나올 때마다 맨날 불만 질렀다(…). 결국 한국시리즈에는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중에 메이저리그도 잠깐 밟기도 했다.
- ↑ 다만 이 때 최원호의 10승은 구원승 1승이 포함되어 있다. 이후 1선발부터 5선발까지 전원 선발 10승은 2015년 삼성 라이온즈(윤성환-알프레도 피가로-차우찬-타일러 클로이드-장원삼)이 달성하게 된다.
- ↑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패했다
- ↑ 당시 LG는 태평양-현대전에 특히 강했고, 현대 입장에서는 LG하고 상대하는걸 극히 꺼려했다. 플레이오프 LG-삼성전에서 현대팬들은 삼성이 이기길 내심 바랐다. 그러나 LG가 승리하고 한국시리즈 진출. 한국시리즈 시작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LG가 이길 거라고 예상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민태, 박재홍의 맹활약에 힘입어 4승 2패로 우승.
- ↑ 알려진 것과 다르게 구단에선 연고이전을 할 계획이 없었다. 문학야구장을 사용하려 했었고, 건설 당시 설계 변경을 요구하기도 했다..
- ↑ 1983년 창단한 유공 코끼리는 1984년 서울로, 1984년 창단한 현대 호랑이 축구단은 1990년 울산으로 연고를 이전했고, 대우 제우스에서 시작해 이어져오는
개그랜드인천 연고 농구단은 삼산체육관이 건설되기 전인 2006년까지 부천실내체육관을 홈구장으로 쓰는 판이었다. 남자배구의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도 도원체육관에서 어찌어찌 버티다가 계양체육관으로 이전, 여자농구 금호생명 팰컨스는 도원체육관 시설을 견디지 못해 아예 소도시인 구리로 이전해버릴 정도였다. 2014년 신한은행 에스버드가 안산을 떠나 인천으로 오면서 도원체육관을 다시 쓰고 있지만. - ↑ 다만 어디까지나 '전년 대비 늘었다'는 수준이지, 최신 문학야구장과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이라는 훌륭한 인프라, 게다가 2003년 준우승과 2005년 3위라는 호성적을 가지고도 여전히 도원야구장 시절처럼 30~40만 사이에서 널뛰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SK 와이번스가 마의 50만 벽을 돌파한 것은 문학야구장 입주 6년차인 2007년 '스포테인먼트'를 앞세워서야 가능했고, 그나마도 팬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무료표와 단체관람으로 출혈 마케팅을 감내해야 했다. 막말로 지금 야구 팬들이 괜히 연간 90만에 이르는 SK 와이번스의 관중 동원능력을 사상누각이라며 폄하하는 게 아니다. 물론 2014년 기준으로 객단가는 8천정도로 올랐고, 관중 동원력은 LG-두산-롯데 다음이다. 객단가*인원수 해도 평균~중상위권.
- ↑ 송은범, 윤석민, 최정, 류현진, 김광현등이 튀어나왔으니까. 그 뒤로 중3 이후의 유급생, 타 구단 연고지역 출신 전학생 1차지명 불가 및 전면 드래프트 시행으로 SK는 2013년 1차지명 부활 전까지 지역 팜에 거의 손을 놓다시피하지만.
- ↑ 연고이전 직전에는 고졸 우선지명으로 입단한 박진만을 제외하고는 희한하게 1차지명이 다 실패하였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현대는 3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하였다.
- ↑ 특히 06년 지명은 최고라는 평가가 있다.
- ↑ 포수 박경완, 1루수 이숭용, 2루수 박종호, 유격수 박진만, 3루수 퀸란, 좌익수 전준호, 중견수 박재홍, 우익수 심재학, 지명타자 윌리엄스(윌리엄스도 장타도 있고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잔병치레가 많아서 시즌 중 퇴출된다.) 내야 수비진이 ㄷㄷㄷ
- ↑ 0.695의 승률을 2015년 프로야구 경기수인 144경기에 대입해 보면 무려 100승 44패라는 성적이 나온다.
- ↑ 1차전~3차전까지 일방적으로 이겼으나, 4차전부터 6차전까지 두산의 극적인 추격으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사상 초유의 리버스 스윕이 나오는가 했으나, 7차전은 수원야구장을 가득 메운 두산 팬들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3루수 톰 퀸란의 활약에 힘입어 우승.
- ↑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때는 어느 누가 현대 감독으로 앉혀놔도 우승은 기본!' 이렇게 인지하는데, 당시 2000년 시즌 시작 전에만 해도 현대가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성적을 낼 것이라 기대했던 이는 보기 드물었다.
- ↑ KBO에서 책정한 SK 와이번스의 가입비는 250억원이었고, 이 중 쌍방울에 대한 선수보상비 70억을 제외한 180억 중에서 기존 연고지팀에 대한 보상비용으로 30%인 54억을 현대 유니콘스에게 지불했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경우 이 비율이 20%였는데, 현대는 이전 대상지인 서울에 2개 팀이 있어 30%로 상향했다.
- ↑ 그래서 일부 SK 팬들은 이 비용을 현대 야구단이 운영자금으로 썼다고 주장했지만 자금을 가로챈 것은 모기업인 하이닉스였고, 01년 당시 구단 운영금은 정민태의 요미우리 임대료였다.
- ↑ 자금난에 처한 현대전자는 대주주로 운영했던 현대 농구단을 방계회사인 KCC에 매각했고, 야구단은 거들떠볼 겨를도 없었다.
- ↑ 해태그룹의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은, 해태를 250억원에 팔았는데 현대 유니콘스 인수비의 1/3밖에 안되었다.
- ↑ 기아자동차 공장이 광주에 있음
- ↑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미 2001년에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같은 리그에 2개 팀을 지원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을 빼야만 했다. 포스코 역시 같은 리그에 2개 팀을 운영하는데, 이쪽은 그나마 포스코 아니면 투자할 기업도 없으니 리그 내에선 아무도 군말 안 하고 있는 거고 외국인 투자자들은 틈만 나면 한 팀
가능하면 두 팀 다없애라고 난리다. - ↑ 앞에서 나왔듯 원래는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 ↑ 광역연고제 하에서 현대 유니콘스는 남의 연고지에 더부살이하는 상황이라 SK 와이번스에게 돈을 물어줘야 할 판이었다.
- ↑ 하지만 SK는 오로지 인천 SK만 외쳤지 경기•강원지역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KT 위즈가 창단하기 전까지 수원구장은 명목상 SK의 제2구장이었을 뿐 홈 경기를 치를 수 없었다. 수원에서 홈경기를 하겠다며 인천 SK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SK가 수원 2구장 경기를 배정하는 순간 현대가 비켜줘야 했겠다는 사실도 있겠지만 - ↑ 기간은 6시즌이지만 2007 드래프트에서는 1차지명이 2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날려먹은 인원은 7명이다. 사실상 한 시즌 드래프트를 통째로 스킵해버린 꼴.
6라 이하 포기하는 걸 밥먹듯이 한 팀도 있는데 뭘 - ↑ 그나마도 조평호를 제외한 이적 인원들은 넥센 히어로즈가 리그 상위권 팀으로 도약한 2013년을 전후해 빠져나갔다.
- ↑ 그 싸융짱문오중에서 김세현, 오재영이 현대출신이다. 참고로 방화범 오재영은 원래 현대에서 신인왕을 받았던 선수였다.
- ↑ 이후 매니저 등을 거치면서 2012년 가을, 후신격 팀인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이 된다.
- ↑ 2001년과 2002년은 2015년 현재와 같은 3명 보유 2명 출전이 가능했다.
- ↑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 ↑ 당시 정성훈은 기아의 주전 3루수였는데, 1999년에 1차지명으로 데려온 선수였다. 2002년에 대학리그 최고의 내야수인 이현곤이 입단하자 이현곤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정성훈을 내보냈는데, 결국 정성훈을 버린 것이 잘못된 것임은 나중에 보여진다.
- ↑ 이숭용은 1루수 이미지가 강한 편이지만, 김경기나 쿨바, 이명수가 있을 때는 외야로도 나갔다.
- ↑ 말이 마무리지 사실상 7회와 8회에 등판해 끝까지 던지는 투수인 셈이었다.
- ↑ 특히 2, 3차전을 잡아낸 SK가 선 2승 그것도 2연승을 한 팀이 우승했다는 과거 기록을 감안했을 때 우승에 가깝지않냐는 말도 많았다.
- ↑ 1,4,7차전에 선발로 나와 승리를 얻어냈고, 특히 7차전에서는 허리 통증에도 불구하고 테이핑까지 감아가며 완봉승을 하였다. 정민태가 이렇게 활약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참고로 이 시기의 한화 센터라인 내야수는 전설의 임과장님부터 시작해서 원바운드 송구의 백재호, 3푼이 한상훈과 유격수 꽃범호 등으로 구성된 최악의 내야진이었다.
- ↑ 일정 시간 이후에는 새로운 이닝에 돌입할 수 없는 규칙으로 인해 무승부가 많이 나왔다.
- ↑ 특히 정성훈은 3루수임에도 18개 채종국은 2루수, 그것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절반이나 덜뛰었음에도 13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 ↑ 이 고통은 2007년에도 계속된다.
- ↑ 그 이후로 이숭용은 두자릿수 홈런을 못치게 된다.
- ↑ 1위는 205이닝의 리오스
- ↑ 1997년 삼성입단, 1999년 임창용 트레이드때 양준혁과 묶여서 해태로 갔으나, 2000년에 방출되고서 2001년 현대로 와서 2군에서만 던지고 있었다.
- ↑ 5위 롯데, 6위 LG, 7위 현대, 8위 기아
- ↑ 그나마 다행인건지 당해년도 바로 고교 동창 손시헌의 도움으로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다.
- ↑ 1937~2009.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정몽헌과 비슷하게 집안 권력 싸움에 밀리고, 실의에 빠져 자살해버린다. KBO 총재로서 선수협 창설에 결사반대하고 특히나 공중파 TV에 튀어나와서는 자꾸 이러면 프로야구를 아예 없애버린다고 하여 야구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 ↑ 이런 궁지에 몰렸던 말년의 레이더스나 해태 타이거즈는 국내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 ↑ 이에 대해 모 유명 해설가 출신 축구인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야구따위가 아닌 축구팀을 응당 인수해야 맞다고 훈수두기를 시도해서 인터넷에선 야구 vs 축구 키배가 불붙기도 했다
- ↑ V리그 타이틀 스폰서 제안에는 동의했지만 개막 열흘전 갑작스럽게 철회
- ↑ 익히 알려진것과 달리 박동희의 (협상 공개 이전에 나왔던) '오늘의 단어' 드립은 KT의 인수작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후로도 유니폼 디자인 시안 결정 등 인수작업이 계속 추진된게 그 증거.
- ↑ 이후 185억 투자 기사를 썼던 모 기자는 KT의 인수 포기 이후 야구팬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착잡하다'를 '찹찹하다'로 잘못 쓴데다가('찹찹하다'는 표준어이기는 하지만 '착잡하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이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비난을 자초하게 된다.이로 인해 이 기자는 야구계 뉴스에선 사실상 퇴출되고 만다.
- ↑ 결국 KT는 2014년 현대가 연고지로 삼던 수원에서 10번째 구단 kt wiz를 창단하여 2015년 정식으로 1군 무대에 데뷔했으며, 수원에서도 7년 6개월만에 프로야구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 ↑ KBO에서는 공식적으로 부인.
- ↑ 이런 인식은 NC가 9구단 창단에 뛰어들고 나서도 계속 있어왔고 실제 1군에 진입하고 나서야 조금 걷힌다.
- ↑ 본인이 영원한 삼성맨이라는 자부심이 강했기에 현대로 오자마자 은퇴를 선언해버렸다.
- ↑ 2000년 투수 전업
- ↑ 등록명은 스코트 쿨바였다. 다들 성만 등록명으로 쓰는걸 생각하면 특이 케이스.
- ↑ 2007년 당시 75번을 달고 수비코치를 맡았으며 후신격 팀인 넥센 히어로즈의 제3대 감독으로써 부임하여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다시 올려놨다.
- ↑ 히어로즈에서 은퇴. 정민태와 함께 팀의 프랜차이저 스타였던 인물이다.
- ↑ 전기 6위, 후기 6위
- ↑ 전기 2위, 후기 2위
- ↑ 전기 6위, 후기 6위
- ↑ 전기리그에서는 삼미 슈퍼스타즈로 활동.
- ↑ 전기 6위, 후기 6위
- ↑ 전기 6위, 후기 7위
- ↑ 전기 7위, 후기 6위
- ↑ 전기 6위, 후기 7위
- ↑ 전체 5위
- ↑ 페넌트레이스 2위였지만, 3위 팀 두산의 우승으로 최종 3위.
- ↑ 페넌트레이스 3위였지만, 4위 팀 LG의 한국 시리즈 진출로 최종 4위.
- ↑ 페넌트레이스 2위였지만, 3위 팀 한화의 한국시리즈 진출로 최종 3위.
- ↑ 다만 많은 유니콘스 팬들이 바라는 구단 역사의 공식적 승계는 해당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기업이 인수했다 해도 어려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7년간 구단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명목상의 모기업 하이닉스가 뜬금없이 나타나 인수대금을 내놓으라고 하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
- ↑ 야구계 인사 일부는 기존 구단들에게서 운영비를 추렴해서 현대가 1년만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KT의 인수시도가 사외이사들과 주주들에 의해서 엎어졌듯이 이미 적자투성이인 프로야구판에서 자신의 기업도 아닌 남의 회사인 현정은의 '현대그룹'를 홍보하는데 당연히 그 어느 기업도 자기 회사의 돈을 선뜻 내놓겠다고 나서는 이 하나 없었다.
- ↑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2008시즌 초부터 이미 프로야구의 인기는 관중수에서 입증되듯이 부활하고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그런 추세에서 부스터 역할을 했지 유일한 촉매 역할을 한게 아니다.
- ↑ 당장 이웃종목의 K리그만 봐도 2002년 FIFA 월드컵으로 조성된 리그 붐을 정말 빠르게, 어처구니없이 날려먹고 여전히 흥행에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실정이다. 국제대회의 호성적은 리그 붐에 기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리그의 앞날을 하루 아침에 밝게 비춰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 ↑ 121승 94패 6무
- ↑ 물론 삼청태현은 공식적으로 동일한 한팀이기 때문에 이 상대전적은 현대시절에 국한한 결과이며 당연히 통상적이며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삼청태현의 통합 전적은 삼성한테 일방적으로 (..) 뒤진다.
- ↑ 몬데그린 현상으로 인해 이 대목이 '최강희 눈이 커'(...)라고 들리기도 했다.
- ↑ 창단 첫 해부터 해체될 때까지 이 캐치프레이즈는 변하지 않았다. 일종의 구단 기본 슬로건이 된 셈. 기본형 문구 앞에 뭔가의 낱말이 붙는 형태로 캐치프레이즈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