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국의 최고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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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 화궈펑 | 덩샤오핑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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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 | |||||||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 → | 1대 | → | 2대 | |||
→ | 마오쩌둥 (1949 ~ 1959) | → | 류사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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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모습.[1] | 말년 모습. |
1981년 6월 27일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부터 당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몇 가지 성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비공개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천윈[2]이 이런 고백을 했다."만약 마오 주석이 1956년(대약진 운동 이전)에 서거했다면[3]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겁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이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퇴색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1 설명
이름 | 모택동 (毛泽东/毛澤東, Máo Zédōng) |
생몰년 |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 (83세) |
출생지 | 청나라 후난 성 샹탄 현 사오산 구 |
사망지 |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 |
신체 | 178cm, 110kg, AB형[5] |
정당 | 중국 공산당 |
종교 | 없음(무신론) |
배우자 | 뤄이슈 양카이후이 허쯔전 장칭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황제이자 창업군주 핵심적인 건국자이자 동시에 자국민만 죽음으로 몰고간 수치로 따져도 단일인물로는 인류 역사 공전절후 세계 최대의 학살자이자 독재자.[6][7]
일부의 찬사와 대다수의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는 20세기의 문제적 인물 중 하나.[8]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주석. 수백 명의 병력을 거느린 게릴라 부대 지도자로 시작해서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적을 격파하고 결국 천하를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집권 이후의 여러 실책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오늘날 서구권에서는 구 소련의 악명높은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와 더불어 냉전 시기의 냉혹한 공산주의 정치가로도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그는 그저 유명한 공산주의 정치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원수[9]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우리나라에 이로운 결과를 가져다 준 인물이기도 하다.[10] 또한 그는 현대 게릴라 전술의 완성자이기도 하며 저술가, 중국식 공산주의 사상가로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인생 역정 자체는 엄청나게 대단한 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라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선 일단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니 중국인들, 특히 중국 공산당 당원들 앞에서 깎아내릴 때는 굉장히 조심할 것… 드라마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나타낸다. 허나 아직도 굉장히 민감한 소재인 것은 사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제일 뛰어난 정치가가 누구에요?"라고 물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오쩌둥을 뽑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적을 모두 부정한 니키타 흐루쇼프와는 달리, 마오의 정책과 정반대 정책을 실시한 덩샤오핑도 "마오쩌둥의 공과는 7:3"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신화적 위치에서 끌어내리진 않았다. 소련에는 스탈린이 없어도 블라디미르 레닌이 있기 때문에 스탈린 비판이 가능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비판이 민감하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홍위병의 행패 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현대 중국인들도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존경과 애증이 섞인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맨몸을 일으켜서 아편전쟁 이래 100여년간 계속된 천하대란을 종식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면으로 보면 보면 유방이나 수문제, 주원장급의 인물이지만, 집권 이후에 과대망상적이고 급진적인 시책으로 국가에 재앙을 가져온 것을 보면 왕망이나 수양제 급. 중국 역사의 맥락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웅과 역적의 일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애증이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모택동에 비판적인 사람이라도 지폐에 모택동 초상화가 새겨져있기에 매일같이 모택동의 얼굴을 보고 살기는 하며, 특히 돈에 환장한 사람들은 모택동의 초상화가 새겨진 지폐를 굉장히 좋아하기는 한다. 모택동이라는 인물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모택동이 새겨진 돈을 좋아한다는것에 유의
'모택동'이라는 한국 한자음 표기 역시 널리 쓰이며, 연변 자치주와 북한의 경우에는 한국 한자음 쪽이 표준이다.[11] 한어병음 방안이 확립된 후에는 그의 이름을 일반적으로 Mao Zedong[12]으로 쓰는데, 과거에는 웨이드 자일스 표기법에 따라 Mao Tse-tung[13]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영미권의 문헌 중에는 Mao Tse-tung으로 표기된 문헌이 많다. 여담으로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도 이 표기를 쓰고 있다.
한어병음 철자 dong에 o가 들어가기에 '동(똥)'으로 적어야 옳지 않은가 하는 견해가 있지만, 해당 음절(ㄉㄨㄥ)의 발음은 [tʊŋ]이며 대략 '동(똥)'과 '둥(뚱)'의 중간발음이다. 이 [ʊ] 모음을 한어병음에서는 o로,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는 u로,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ㅜ'로 해석하여 표기할 뿐이다.[14] 즉 '마오쩌둥'이라는 표기는 잘못된 게 아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1893년 후난 성 샹탄에서 농민 마오순성(毛順生)과 그 부인 원(文)씨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부농으로 취급될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다. 객가인 집안이라고 한다. 14살 때 뤄씨 성을 가진 여인과 혼인하였으나 이 결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라서 결혼을 거부하고 가출하였다. 그 뒤 장사의 주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혁명군에 잠시 가담했다가 후난성 공립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후난 제1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스승이자 후의 장인이 된 양회중 교수를 따라 베이징대학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이때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 많은 독서와 토론, 강연 등을 통해 사상적 기초를 닦았다.
청년 시절에 마오쩌둥은 정식 학생이 아니었지만 베이징대학 철학과 수업에 들어와 계속 청강을 했다. 한 번은 정식 학생도 아니고 사투리를 쓰는 말단 직원이 자기 수업을 듣는 것을 고깝게 보던 후스(胡適)[15]라는 철학과 교수가, 수업시간에 들어온 마오쩌둥을 학생들 앞에서 "자네는 좀 나가주게."라고 모욕을 주어서 쫓아내었다. 이후 국공내전 당시 베이징대학 총장을 맡고 있던 후스는 공산군이 입성할 무렵 마오쩌둥으로부터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리를 보장할 테니, 대만에 가지 말고 남아달라"는 대인배적인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스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못 믿는다"며 이를 거절했고 미국으로 떠난 뒤, 1960년대 타이완으로 이주한다. 후스의 말처럼 17년 후에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붙은 교수를 비판하는 대자보로부터 시작했고[16], 당시 철학과 교수들은 홍위병 제자들에게 엄청나게 고초를 겪었다. 이들 중 슝스리 같은 일부는 박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후스도 아마 남았으면 비슷한 운명을 겪었을 것이다. 대륙에 남아있던 그의 차남 또한 1957년 반우파투쟁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이러니하게 후스의 실용주의 사상은 마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고향으로 온 이후에는 그동안 사망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학교 사업도 벌여서 교장이 되어 꽤 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그동안 사귀던 양 교수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계급으로 치면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2.2 청년 시절
1921년 중국 공산당 1차 전당대회에 후난 성 대표로 참석했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라는 이야기. 여담이지만 이때 창립 멤버 21명 중에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딱 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거나 혹은 국민당이나 일본 측으로 전향했다.
창립 멤버이기는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해서 문외한인 탓에 별다른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한편 창립 초기 공산당은 쑨원의 뜻에 따라 국민당과 연합(국공합작)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공산당적을 가지고 국민당에 가입했고,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후난성의 향촌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국민당은 쑨원의 본거지인 광둥성만 장악하고 있었고 북부는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북벌을 결심했고 국민당군은 1926년 광둥성을 출발하여 계속 북벌을 하여 1927년에는 상하이, 1928년에는 베이징을 장악했다. 그러나 북벌군을 이끌던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를 장악한 뒤 공산당원을 숙청했고 (4.12 상하이 쿠데타)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90%는 모두 살해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복수를 위해 봉기했으나 1927년 8월 1일에 봉기한 난창봉기는 국민당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9월 7일 마오쩌둥도 고향인 후난 성에서 추수철 폭동을 일으켰으나(추수봉기라고 한다.) 국민혁명군에게 완패하고 마오쩌둥도 사로잡혔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하여 후난성 남방에 있는 장시성으로 도피, 징강산(정강산)에서 세력을 규합한다. 이후 자신들을 중국공농홍군(홍군)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쫓겨온 주더가 이에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다. 1930년 아내인 양카이후이도 국민당군에 체포되었고 마오쩌둥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아들 마오안잉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군율을 만들었다. 삼대기율 팔항주의라고 불리는 이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즉시 사형이었다. 당시 중국의 군대란 국민당군이고 군벌군이고 완전히 무장한 떼강도나 다름없었고 이들이 마을을 지나가게 되면 강도는 물론이고 강간이나 살인도 벌어졌으나 마오쩌둥의 군대는 군율이 엄정했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병사의 충원도 용이하였다.[17]
이 당시 주창한 16자 전법은 굉장히 유명하며 유격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비즈니스 모델로 주창되기도 한다.
적진아퇴(敵進我退) - 적이 진군하면 아군은 물러나 피하고적주아요(敵駐我擾) - 적이 주둔하면 아군은 교란한다.
적피아타(敵疲我打) - 적이 피폐해지면 아군은 타격하고
적퇴아추(敵退我追) - 적이 물러나면 아군은 추격한다.
물론 국민정부도 이를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토벌을 맞이하여 수적으로 불리한 공산당의 게릴라, 매복 전술 등 유효한 전략을 제시했고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했던 주더는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엄청난 전과를 이루게 되었다. 마오쩌둥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으로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분산시켜 일시적으로 아군의 수적 우세를 확보하여 분산된 적을 각개격파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4번에 걸친 국민당군의 진압을 분쇄하고 국민당군은 참패할 때마다 엄청난 물자를 버리고 도주했고 이런 물자로 홍군은 대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우리 홍군의 보급부장은 장제스다!"라고 큰소리를 칠 정도였다.
2.3 대장정
이때 공산당의 잔존 지도부가 마오쩌둥이 있는 루이진(서금)으로 계속 오면서 마오쩌둥은 당권을 박탈당한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일개 상무위원에 불과했을뿐 당내 지위는 열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소련 유학파 출신 간부들로 구성된 28인의 볼셰비키[18]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전쟁에서 적에게 끌려다니게 되며 세력확장에 문제가 생긴다고 지적하며 게릴라전을 버리고 정규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4차 초공전은 저우언라이의 지휘아래 이러한 방식으로도 승리할 수 있었지만 자체적 역량문제라기보다는 만주사변덕분이었다.
이후 국민혁명군은 독일에서 한스 폰 젝트 장군을 초빙하여 벙커를 수백m마다 떡칠해 게릴라전을 원천봉쇄시키고, 주민들을 소개하고, 정치선전을 통해 주민과 공산당의 접촉을 차단시켰으며 경제봉쇄로 공산당 지배지구를 차단한다. 결국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공산당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에서 일시적으로 퇴각하기로 결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돌아가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서쪽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이게 유명한 대장정이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좌경 모험주의로 인해서 군사적으로 대실패했다.'라고 주장하면서 소련 유학파의 실각을 주장했다. 이에 유학파와 소련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이 '역량 차이가 너무 심하게 진 것이지, 홍군의 전략은 옳았다.'라고 주장하면서 맞섰으나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을 지지한데다가 일단 소련 유학파의 전략이 실패한 것이 사실이라 대다수의 간부들이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마오쩌둥은 다시 당 지도부로 올라섰다.
이후 산서성 옌안에서 토착 공산정권과 합류하는데 이 과정에서 토착 공산정권 지도부를 숙청했다는 음모론이 신빙성 있게 들려온다.
2.4 제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재개
옌안으로 퇴각하긴했으나 국민당은 공산당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토벌군을 보냈고 이 상황에서 몰락하기 직전에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강제로 제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는 서안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사회생했다.[19]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양측은 공식적으로 국민당에 공산당이 복종한다는 조건으로 합작에 합의한다.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 마오쩌둥은 세력의 7할을 세력확장에, 2할을 반장에, 1할을 항일에 쓰라고 지시하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고 도리어 국민당의 유격대와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지역의 국민당군을 뒤통수 까며 세력확장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중일전쟁 시작 당시에 4만명에 불과했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무렵 120만으로 불어났다. 당연히 전쟁 내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고 그것이 환남사변에서 폭발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마오쩌둥은 전후에 일본인들을 만나 일본의 침략 덕에 공산당이 이겼다고 감사를 표할 정도였다. 자세한 것은 중일전쟁 항목 참조.
파일:Attachment/마오쩌둥/234.jpg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미국의 중재로 평화회담을 위해 만난 장제스와 마오쩌둥.
항일전쟁 이후 1945년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을 중재하여 연립정부를 구성시키려고 했고 조지 마셜이 중국에 방문하여 장제스-마오쩌둥과 3자회담을 갖기도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 국민당은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을 공격한다. 국민당의 파상공세로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확산시키는 우를 범했고 공산군은 농촌을 휘젓고 다니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결국 상황은 국민당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지역의 중화민국 국군을 섬멸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당황한 국민당은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리쭝런이 대표로 재협상을 시도하지만 이미 승세를 잡은 공산당은 이를 사실상 무시한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중화민국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물론 이런 집권 후에 당연히 피의 숙청이 따랐다. 당장 국공내전 도중에 만주와 화북에서 50만~100만 단위의 숙청이 있었고 국공내전이 완료된 다음에 화중, 화남에서 다시 최소 70만, 최대 200만이 숙청되었는데 마오쩌둥은 전국민의 0.1%를 죽이면 좋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공하면서 이러한 학살 작업을 감독했다.[20] 이러한 학살은 1949년부터 1953년의 토지개혁 작업 동안 이뤄졌고 이후 합작사 운동을 하면서 더 죽였다.(...) 당연하지만 이때 쳐죽여댄 사람들 중에서 실제 지주는 얼마 없었고 죽은 지주들도 과연 죽을 죄를 졌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런거 없다.(...) 이 과정에서 전직 공무원들이나 같은 공산당원들도 부적절한 방침을 따랐다고 많이 숙청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시절의 실무공무원들은 상당수 신정부에서도 일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관료주의에 찌든 실무자들은 후에 대약진운동 때 허위보고나 생산량 조작 등의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2.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한국전쟁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선포를 하고 있는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마자 마오쩌둥에게 닥친 현안은 1950년의 한국전쟁이었다. 처음 중화인민공화국은 저우언라이의 담화형식으로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내전의 당사자인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지만, 미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춰야 하며 38선을 넘으면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미국의 책임이다"라고 미국에 대해서 경고한다. 그러나 미국은 38선을 넘었고 이는 마오쩌둥에게는 미국이 자신들을 치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21]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고, 마오가 참전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포기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대외관계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천조국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
6.25 전쟁도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이 소극적인 스탈린을 충동질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도 나오고 소련 붕괴 후 공개된 구소련 기밀문서에도 나온다. 스탈린은 그리하여 중국마저 북한을 돕지 않을 경우 북한 정부와 북한군을 중국 동북지방으로 철수시키려고 했다. 다만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 양국의 군사력만으로는 미군을 물리치는 것은 커녕 교착상태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고, 지원할 경우에도 중-북 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물론 결과는...
한반도 파병안을 놓고 중국 지도부는 갈라졌다. 저우언라이[22]와 린뱌오는 참전을 반대했는데 당시 국공내전이 끝난 지 1년도 안 되어 세계 최강 미국과 맞붙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인 주더는 중립을 지켰지만 펑더화이는 파병안에 찬성했다. 마오쩌둥도 북한이 망하면 미국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느니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순망치한"을 외치며 총 60만 대군을 파병했다.
고심 끝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 인민지원군'을 한반도에 대규모로 파병했다. 정규군인 중국 인민해방군을 투입했으면서도 '인민지원군'을 사칭한 것은 중국 정부가 유엔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피하고 이 '지원군'이 중국 정부와 아무 상관없고 이들이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을 불쌍히 여겨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산악지형을 이용한 보병 위주의 기동포위전을 펼쳐 한반도의 북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보급에 대한 깊은 생각도 없이 마구 돌격한 결과 유엔 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한반도 중부에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부지불식간에 중국군에게 반격을 받아 패퇴한 유엔군과 미국의 충격은 대단해서, 1.4 후퇴 당시 미국 정부와 유엔군사령부는 전선이 전라도의 금강에 설치된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축차적인 방어를 하면서 부산까지 후퇴한 뒤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일본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은 제주도로 철수한다는 한국 정부 망명계획을 극비리에 기획하고 있었다. 국부천대 시즌 2... 만약 이 계획이 시행되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독재에 시달렸을 것이다.
다행히도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공세 실시 전에 현지 사령관인 펑더화이가 무리한 진격임을 상기시키며 여러 차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지속적인 공세를 원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지속하도록 명령했고, 그 결과 인민지원군은 매튜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의 재반격을 받아 패퇴하여 한반도 중부에서 양군이 교착상태에 들어가 남한은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23]
한편 마오쩌둥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힌 큰아들 마오안잉을 한국전쟁에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전쟁 도중에 미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옮길지 여부를 묻는 참모진의 건의에 마오쩌둥은 시신을 북한에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여 마오안잉의 묘는 북한에 있으며, 이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2.6 반우파운동
한국전쟁 참전으로 막대한 전비를 쓰고[24] 수십 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그래도 중국은 아편전쟁 후 거의 100년만에 평온한 국가를 이루게 되자 1950년대 중반까지 견실하게 경제 성장을 한다. 후에 대약진 운동의 결과 농업집단화가 되자 대기근이 일어나지만 1950년대 중반 중화인민공화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은 한국보다 높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화를 추구하면서 지식인의 불만이 쌓여져 가고있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며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모든 정파의 의견이 개진되도록 하라!" 지식인들을 만나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세요"라고 말해서 이 시기에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 시위대는 "마오쩌둥 물러나라! 장제스가 더 좋다!"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판의 홍수가 계속되었는데 몇 달 후 마오쩌둥은 갑자기 "현재 우파반동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언하며 비판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이때문에 50~70만 명의 "우파"가 체포되고 일부는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를 반우파운동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이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가 갑자기 이렇게 방침을 바꾼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 어떤 설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정말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려고 했는데 내외적 환경이 너무 극단으로 흐르자 이에 놀라서 탄압책을 폈다고 한다. 이 설은 아래 설명할 "마오의 사생활"을 쓴 주치의 리즈수이의 견해다. 책 내용을 보면 리즈수이가 굳이 마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 설은 설득력이 있다. 당시 중국 국내에서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으며 헝가리에서는 반공봉기가 일어난 데다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위기감이 증폭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어떤 연구자는 마오쩌둥이 일부러 반대파를 지하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마오 자신도 "독사를 굴에서 나오게 하려면 미끼를 던져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은 이런 설을 뒷받침했다.[25]
2.7 중소분열
파일:Attachment/마오쩌둥/1949 Mao and Stalin.jpg |
1949년 스탈린의 생일파티에 참가한 사진. 왼쪽부터 마오쩌둥, 이오시프 스탈린, 발터 울브리히트. 그 오른쪽에는 몽골 총리 체덴발이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의 장군은 니콜라이 불가닌이다. 마오쩌둥 왼쪽의 인물은 마오쩌둥의 통역인 스저. |
스탈린 바로 옆에 선 것에서 보이듯 공산진영의 2인자 노릇을 했다. 국공합작 시절 장제스와 찍었던 사진보다 더 어색해[26]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은 전세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념의 조국"이라고 불렸다. 중국 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0년대 초까지 코민테른의 지시를 계속 받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무식한 농부"라고 무시했으며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을 "마가린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1949년 말에 장기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소련에 대해 여러 원조를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으로부터 수억 달러(현재 시세로는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내고 소련에 다수의 중국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마오쩌둥은 소련과 스탈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디스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붙어봐야 손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중국의 참전을 종용했고 이는 중국 참전의 한 이유가 된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이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망치한이라고 했다.
정작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사석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 놈은 사이비지? 정말 만나기 싫다"라고 했을 정도(...). 모스크바에 왔던 마오쩌둥이 얼마나 홀대받았는지 열받은 마오쩌둥은 난 여기에 먹고 똥이나 싸려고 온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어쨌든 동유럽의 잔챙이 국가에 비해 대국이었던 중국과 틀어지면 소련도 난처했으므로, 어느 정도 원조를 해주는 척은 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교황이나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소련의 국력은 세계 2위였기[27] 때문에, 어쨌든 중국인들은 소련을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여겼다.
그러나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가 1955년부터 서방과 평화공존을 외치며 스탈린을 디스하기 시작하자, 중국 지도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마오쩌둥은 "평화공존"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마오쩌둥과 흐루쇼프는 공개적으로 "저 새끼 트로츠키파다"며 욕을 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28]
뿐만 아니라 소련은 중국과의 여러 기술 거래에서 중국을 사회주의 우방이라기보다는 철저히 털어먹을 대상으로 여겼고, 소련이 자신들에게 판 여러 무기들이 다른 나라에 파는 국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것을 알자 중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사상면에서도 스탈린은 인간의 의지보다도 기술과 생산력을 중시했는데, 이는 의지나 정신을 중시한 마오쩌둥 사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글에는 오직 기술만 있고 인간은 없다"고 비판했다.
이때문에 1960년대 중순부터 중국은 소련을 추종하던 그 전의 방침에서 180도 돌려 스스로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게 된다. 한편 소련도 소련은 1960년 중국과 맺은 모든 기술 이전협정을 취소하고 기술고문단을 철수시켰으며, 중국과는 관계가 더욱 악화된다. 또한 동유럽 각국은 소련의 위성국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이들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당시에는 나빴으므로 1960년대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29] 고작 비슷하게 고립된 알바니아가 중국의 유일한 맹방이었다. 이때 소련과 중국 모두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북한도 상당히 난감한 처지였다. 북한 입장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분쟁에 일방적으로 소련편만 들 수도, 그렇다고 중국편만 들 수도 없었던 것이다. 소련과 중국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물음에 북한은 "소련과 중국 모두가 받드는 사회주의를 지지한다"라는 애매한 말로 빠져나와 소련 중국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지만, 실제적으론 중국편에 좀더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중소간의 관계가 악화됨을 감지한 미국은 중국에 접근했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핑퐁외교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저우언라이와 회담하고 미중간의 상호교류 확대와 평화 관계를 도모하는 상하이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당시 상하이 커뮤니케는 한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고, 박정희의 대미불신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지금까지 저질렀던 병크를 뛰어넘는 초특급 병크로 나아가게 된다.
2.8 대약진 운동
(이렇게 대약진 운동이 망하게 내버려둔다면)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것이다. 해방군 여러분이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는 홍군을 찾아가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군이 나를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마오쩌둥, 1959년 루산회의에 앞서 있었던 연설에서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평가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극좌적 태도(= 뻘짓)을 한것은 1957년 반우파시기로 간주한다. 즉 이 이후의 주요 행동은 지금 공산당으로서도 실드가 불가능하다는 것.
여하튼 소련과 점점 사이가 악화되자, 마오는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불안감을 느낀다. 남으로는 미국 세력에 봉쇄되어 있고 북으로는 소련까지 적으로 두게 되자, 마오쩌둥은 어떻게든 중국을 스스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나온 구호가 '자력갱생'.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고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모두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할 만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으니, 각 마당마다 재래식 고로를 설치해 수로 질을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공업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의 기치하에 농촌을 집단 농장 단위인 공사로 재편성하고 아무런 기술적ㆍ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사업에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사업은 인력 낭비[30]와 환경파괴, 그리고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탓에 현대 공업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똥철이 남조되었을 뿐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이렇게 만든 철 중에서 약 10%만이 다른 고철 또는 철광석과 함께 재활용이 가능하였고 나머지 90%는 이용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힘찬 첫 걸음을 내딛을 때의 징조는 보통 '산업에서 미국 따라잡기'와 '엉터리 통계'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은 이미 세계 최고 생산량의 공업국인데 현실은 시궁창이라, 윗놈들은 아랫놈들을 닦달하고 밑에서는 눈치 때문에 숫자를 속여서 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관료주의에 물들어 현장으로 나가보지도 않고 보고서의 숫자들만 믿고 있다간 그야말로 막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 테크를 그대로 밟았다.
마오가 정권을 잡은 초기에 공산당의 목표는 곡물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과 철강 생산량을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수치들은 정말로 "우리 이러다 10년 안에 미국 따라잡는 거 아닐까?"라고 착각할 수준이었다. 후에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오는 한참 동안이나 현실을 부정했다. 인지부조화?
이러한 수치 날조는 지방의 관리들이 실적을 보고하기 위해 사실을 허위날조하면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한 지방에서는 논농사에서 200배의 수확을 올렸다고 해서 덩샤오핑이 직접 확인하러 가 보니 다른 논에서 뽑아다 옮겨 심은 것이었다. 게다가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인력이 빠지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린 것만으로도 벌써 농업생산량은 상당히 저조해졌는데, 생태계에 대한 이해는 눈곱만큼도 없는 상태에서 마오쩌둥이 "저 새는 해로운 새다"란 교시를 내려서 단 1~2년 만에 전국에서 참새의 씨를 말려버리고 만다. 참새의 씨가 마르자 병해충이 폭증하였고, 이는 앞에 언급된 실정과 이후 발생한 자연재해 등의 수해로 인해 1957~1960년 사이에 1,000만 명(공식발표)~2,000만 명(평균), 또는 4,000만 명, 많게 잡아선 7,000만 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무참한 아사자가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31]
- 이 대기근은 훗날 옌벤의 조선족과 북한이탈주민 사이에 연대 의식이 생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북한은 당시 계획경제의 효과를 톡톡히 본 덕에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김일성이 주장한 대로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모든 인민이 사는 나라'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까지 북한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이때 굶주림에 허덕이던 수많은 조선족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왔고, 국경 지대의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받은 도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선족들은, 이제 역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다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들을 쉽게 내칠 수 없다고 한다.
이 사례의 최대 문제점은 이러하다. 중국의 최대 자원인 인력을 활용하자는 발상은 좋았지만, 정작 그걸 어떻게 해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데 있다. 여기에 사람들이 대약진 운동으로 지나친 광신의 상태로 빠져버렸고, 마오는 자연과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마오 본인이 인정했다. 사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이 무식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전직 MIT 교수였던 첸쉐썬 박사의 권유가 큰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이 아마 과학에 대한 지식이 좀 있었어도 아마 대과학자였던 첸박사가 그렇다고 하는데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도 이런 첸쉐썬의 가설을 성급하게 실험 없이 실시한 잘못은 피해나갈 수 없다.
물론 경제도 파탄이 났다. 이 때문에 마오는 일시적으로 실각하고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의 실용주의 성향의 인물이 등장하여 경제를 수습한다.
한편 마오쩌둥 시기가 기근이 일반적인 장제스 시절관 달리 정권 안정화가 이루어지면서 농촌의 생산량이 올라갔다는 둥 배급이 원활했다는 둥 하는 떡밥이 나무위키 곳곳에 돌곤 했는데 마오쩌둥의 토지개혁 결과로 중국의 농업 생산량은 국민당 시절의 삼분의 이로 감소했고 합작사 운동을 하면서 거기서 더 떨어졌다. 세금은 몇배로 올라갔고 영양섭취는 반타작이 되었다. 배급이 원할했니 어쩌니 하는 것도 그건 도시에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대다수 농촌지역은 3일치 이상의 식량을 가지면 반동으로 몰아서 때려잡는 등의 공산당의 탄압으로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굶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2.9 문화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결국 국가주석직을 사임했다. 다만 본인이 끝까지 본인 책임을 부정해 누군가는 이 실패를 책임져야하니까 형식으로 내려왔다. 이 탓에 공산당의 지도적인 위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마오가 실권에서 밀려난 동안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모조리 뒤집으며 실권을 장악해갔고, 마오쩌둥은 점점 상징적 위치로 밀려났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이를 뒤집기 위한 계책을 사용한다. 우선 자신을 우상화시켜 청소년들을 세뇌시키고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자신과 무관한 듯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적을 타도하고 자신에게 이용된 사람들마저 버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은 문예비평에서 비롯된 한 사건을 두고 언플을 실시한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이 자들은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주자파다.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이 나서자!"고 외쳤고 이에 선동된 젊은이들은 홍위병이 되어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 혼란 속에서 마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다시 정권과 당권을 장악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쫓겨났다.
마오쩌둥(왼편)과 류사오치 이렇게 화기애애한 한때도 있었으나(...) |
류사오치는 카이펑으로 귀양을 갔다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원래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홍위병의 위협을 받은 의사가 치료를 거부해서 죽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엔진공장으로 쫓겨났다.
이것이 바로 중국 현대사 최대의 병크인 문화대혁명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멀쩡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죽어나가거나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고 각종 서적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수업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렀고 탄압으로 인한 정신병자가 늘어나는 등 사회 전반이 개판이 되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문화대혁명, 홍위병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3년여에 걸친 문화대혁명 동안 저우언라이를 제외하면 중공정권을 성립시키는데 공을 세웠던 공신들은 대부분 귀양가거나 숙청당하고 마오쩌둥은 정부와 당을 모조리 장악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자 홍위병의 활약으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이제는 "홍위병이 너무 극좌적으로 행동한다"며 그동안 홍위병을 부추키던 것을 그만두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는가 하면, 농민에게 배우라면서 홍위병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냈다.[32] 결국 자신에게 이용된 자들도 헌신짝처럼 버려버렸다.[33] 이렇게 마오쩌둥은 정권을 되찾긴 했으나 혼란이 너무나 극심해서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이 시기에 중국은 10~20년 퇴보했고 많은 전통 문화들도 단절되거나 없어져버렸다고 평가한다.
중국에선 아직도 이러한 마오의 잘못에 대해 거론하기 꺼려하며, 건국의 공만은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금기시된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다들 잊고 싶어하는 듯하다...[34]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은 잘못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정부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
2.10 사망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선동에 적극 가담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린뱌오가 자신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낙인시키는 과정에서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 쿠데타를 준비하게 된다. 1971년 린뱌오 또는 린뱌오의 부하들은 마오쩌둥을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사전에 감지되어 실패하고 린뱌오는 소련으로 도망가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관련내용은 정부의 공식발표가 유일해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마오쩌둥은 수족 같았던 자기의 부하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문에 군부에서 린뱌오 세력의 숙청이 벌어졌으나 마오쩌둥은 충격 때문인지 피를 보지 말라고 지시하여 대부분의 린뱌오 부하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헬기로 몽골로 탈출하려던 린뱌오의 부관도 연료가 떨어져서 불시착해서 체포되었으나, 피를 보지 말라는 마오의 지시 덕에 처형되지 않고 감옥살이로 끝났다고 한다. 이런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마오쩌둥은 권력에 달관한 듯 했고,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이 이끈 사인방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1970년대부터 파킨슨씨병 혹은 운동뉴런 장애로 보이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72년 중국의 닉슨이 방중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식 석상에 나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모든 의전을 담당할 정도. 사실상 국정은 저우언라이가 맡아서 했으나 저우언라이도 곧 암이 발발하여 건강이 몹시 나빠졌다. 이를 기화로 정권을 노리고 있던 사인방은 마오 사후 국정장악을 노렸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불러들여 국정을 넘겨주기 시작했으나, 사인방은 덩샤오핑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다만 마오쩌둥은 후계자 자리를 장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후배였던 화궈펑으로 지명했다.[35] 마오쩌둥은 말년에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화궈펑이 병문안을 오자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메모를 건네 화궈펑에게 힘을 달아주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초에 사망했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모이자 사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마오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사망했고 중국은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지만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라가 되어 천안문광장에 있는 모주석기념관에 안치되었다. 그러고 보니 호찌민도 화장해달라고 했는데 북베트남 정부에서 씹었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6일, 후임 주석 화궈펑은 국정을 농단하던 사인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예전에는 이를 군부가 권유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화궈펑의 결단이었다고 한다. 사인방은 모두 감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하거나 출옥 후 사망했다.
2.11 가족
마오쩌둥은 생전 4명의 아내를 만났다.
- 첫번째 아내 뤄이씨우(羅一秀(라일수), 1889–1910)와는 1907년에 결혼해서 1910년까지 부부로 지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없었다.
- 두번째 아내 양카이후이(楊開慧(양개혜), 1901–1930)와는 1921년에 결혼했으나 1927년까지 부부로 지내가다 헤어져서 이후 양카이후이는 국민당에게 체포당했다. 그 후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에 의해 처형당했다. 둘 사이에서는 아들이 3명이 태어났는데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 1922년 ~ 1950년)은 한국전쟁에 중공군으로 참전했다가 미 공군의 폭격을 맞고 전사했다. 차남 마오안칭(毛岸靑(모안청),1923년 ~ 2007년)만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으며 3남 마오안롱(毛岸龍(모안룡), 1927년 ~ 1931년)은 어린 나이에 국공내전에 말려들어 사망했다.
- 세번째 아내 허쯔전 (賀子珍(하자진), 1910–1984)과는 1928년 5월에 결혼해서 1939년까지 부부로 지냈는데 사실상 양카이후이와 헤어지자마자 바로 결혼한 것이다. 허쯔전은 단순한 아내로만 끝난 게 아니라 마오쩌둥과 함께 대장정에도 참가한 전우이기도 했다. 둘 사이에서는 4남 마오안홍(毛岸紅(모안홍)1932년 ~ )과 장녀 양위에화(楊月花(양월화), 1929년 ~ 1973년), 이름을 알 수 없는 차녀, 3녀 리민 (李敏(이민), 1936년~)이 태어났다.
- 네번째 아내 장칭 (江靑(강청), 1914–1991)과는 1939년에 결혼했으며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마오쩌둥의 아내였다. 둘 사이에서는 4녀 리나 (李訥(이눌), 1940년~) 한 명만 태어났다.
마오쩌둥은 생에 초반에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아내가 자주 바뀌긴 했으나 1940년 이후부터 마오쩌둥이 자리가 잡혀서인지 마지막으로 결혼한 장칭과는 백년해로했다.[36] 슬하에는 총합 4남 4녀를 두었다.
2.12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마오가 처음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은 고향 후배 류사오치였다. 류사오치는 대장정 중의 쭌의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가 당권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류사오치는 점점 떠오르게 된다.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이에 책임지고 사임하고 1959년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직에 오르자 류는 마오쩌둥의 정책을 뒤집기 시작한다. 이때 마오쩌둥은 한때 자신이 후계자로 내세웠던 류사오치가 자신의 실권을 배제하려 하자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타도하려고 술책을 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류사오치는 실각하고 귀양 가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그 이후 떠오른 것은 린뱌오였다. 사실 린뱌오와 마오쩌둥은 그다지 연분이 깊지 않았다. 그럼에도 린뱌오가 펑더화이와 류사오치의 숙청을 도운 데다가 국방부장 재임시에 중인분쟁에서 인도군을 대파했기 때문에 린뱌오는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린뱌오는 마오쩌둥 사후 권력 후계 문제를 놓고 마오쩌둥과 대립하였고, 결국은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여 도망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이 사인방의 1명이던 왕훙원이다. 초등 중퇴인 일자무식이었던 왕훙원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에서 조반운동을 하며 떠오르고 곧 문화대혁명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중앙정계로 발돋음했고 마오쩌둥은 그를 눈여겨보다가 후계자로 삼으려고 여러 책임을 맡겼으나, 그릇이 아니었던 왕훙원은 마오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앙정계에서 권력에 탐닉하고 여러 실무에서 무능을 보이는 등의 실책을 보이다가 눈 밖에 났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이 선택한 사람은 후난성 고향 후배인 화궈펑이었다. 당시 후난성 당서기를 맡고 있었고 중앙정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마오쩌둥은 그가 문화대혁명을 계속하리라고 기대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오 사후에 화궈펑은 사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듯 했으나 결국 노회하고 당 커리어가 훨씬 높았던 덩샤오핑에게는 역부족이어서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결국 마오쩌둥이 점지한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실패한 셈.
3 평가
마오쩌둥이 생전에 말한 이 말과 이 말만 봐도 추후 그에 대판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3.1 긍정적 평가
청나라 멸망 이래 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대륙을 제패했다는 평가가 중국인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실제로 중국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자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군벌이 할거하던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웠고 장제스 치하에 비해서는 생활이 개선된 점이 높이 칭송되고 있다.[37]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그의 게릴라 전술은 게릴라 전사를 새로 쓰게 만들 수준으로 탁월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장제스가 공세해 왔을때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공산당이 그날로 멸망했으리란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후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에 대해서는 한국군도 크게 고평가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에 한국군의 기본 전략인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란 것이 채명신 장군이 마오쩌둥의 게릴라 병법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었다.[38]
3.2 부정적 평가
아시아 아니,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를 논할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39]
한때 서구권 진보 진영에서는 마오의 정책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40][41] 80년대 이후 죽의 장막이 열리면서 그의 정책이 벌여놓은 실정이 온 천하에 드러나 이런 평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배제하더라도 마오쩌둥 집권기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2000만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한다.[42][43]
2014년 삼국지연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실린 책을 내놓은 위안텅페이(袁騰飛/원등비)라는 학자는 2010년에 "마오쩌둥 주석은 독재자다. 1949년 이후 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은 죽은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기사 말미
최근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전, 국민혁명군이 목숨 결고 싸울 동안 대일 항전에 소극적이고 자기 세력 불리기에만 치중했다는 비판도 있다. 심지어 일본의 중국 침략에 감사한다고 한 적도 있다. 물론 이런 비판은 아직 인터넷 상의 키배틀에 국한될 뿐[44], 공식적으로 언급되진 않는데,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져 마오쩌둥의 권위가 추락한다면 그 권위에 기반한 중국 공산당의 정통성에까지 큰 타격이 갈 수 있어 중국 정부에서 언론통제를 통해 이런 사실을 부각시키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또한 마오쩌둥은 정통 공산주의적 측면에서 보아도 사실상 공산주의의 근간인 유물론을 버렸으며 대신 중국판 주체사상인 마오이즘을 주장하였다.[45] 오히려 소련식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중공이 공산주의를 말로만 주장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마오쩌둥의 자력갱생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 고집으로 인해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의 관계는 1950년대 말부터 파탄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는 서방과의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발전을 더욱 가로막게 되었다.
3.3 결론
요약하자면 공산주의 혁명가로는 최고의 인물 중 하나이고 정권을 획득하는 데는 천재였다. 어떤 중국인은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직후 사망하였다면 오늘날에도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가지도자로는 사상 최악의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과로 따지면 자신이 존경했던 진시황과 비슷하다. 군벌과 열강에 의해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시키고, 강력한 행정력을 갖춘 정부를 건설한 것은 큰 공이지만, 집권후 그런 강력한 행정력을 이용해 과대망상적인 정책을 강행했다가 국가와 민생을 도탄에 빠드린 것은 큰 과오다.
그러나 농촌 중심의 혁명전략을 세운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있다. 2012년 현재에도 마오주의자를 자처하는 게릴라가 남미와 같은 저개발국가에서 활약하고 있고 특히 네팔에서는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여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는 데 일조했으니.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들의 적인 네팔의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들을 마오주의자라고 보도하지 않고 '비적'이라고 보도했다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있다. '비적'은 국민당이 공산당을 부를 때 쓰던 말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모조리 뒤집으면서도 공7, 과3이라는 희대의 명언으로 마오쩌둥을 영웅의 위치에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격파하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마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마오를 지운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인들도 마오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공으로 치지만 문화대혁명이나 대약진운동의 병크는 당연히 과로써 비판하고 있다.
마오쩌둥과 다른 건국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중국의 한 사당. 왼쪽은 주더 원수, 오른쪽은 저우언라이 총리.
현대 중국인들의 마오쩌둥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하다. 호남성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생가에는 중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만큼 반감을 가진 중국인들 역시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냐 하면 중국 근대사를 배우는 도중 학교 커리큘럼상 마오쩌둥 생가를 방문해야 했을 당시 한 중국 출신 여학생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그 독재자의 집에 들여놓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며 강력히 반대했다고. 학교에서는 이걸 정당한 사유로 받아들여 그 학생은 결국 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중국의 빈부격차가 늘어나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늘어나고 있다. 개방 후 중국의 경제 발전은 여러 모로 대단한 업적임에 틀림없지만, 그로 인해 개발도상국,선진국을 능가하는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초래했기 때문에 2010년대 들어 차라리 문화대혁명 시절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신좌파(뉴레프트)가 중국에서 생겨난 것.
마오쩌둥의 여러 정책은 국가적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의 서브컬쳐에서는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병크로 가득한 지도자로 희화화되고는 있다.[46] 또한 마오가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건 실제로 오늘날 나치즘, 스탈린주의, 주체사상 등을 까는 주장의 핵심과 비슷한데, 그 몰윤리성은 둘째치더라도 미래에는 다시는 나치즘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가 분명한 인물의 공만 강조되다 보면 결국 과가 덮어지고 언젠간 비극적 역사가 반복되는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
대만에서는 통일파와 독립파를 막론하고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 리 없다. 중국 국민당을 위시한 통일파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 본토를 점거한 역적 도당의 수괴이고 독립파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호시탐탐 노리는 적성 국가의 수괴이니 당연할 수밖에. 장제스 집권 시기에는 모비(毛匪), 모적(毛賊), 주모한간(朱毛漢奸)등 온갖 멸칭을 갖다붙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대만인들도 이들이 역사적 위인이라는 것은 이제 인정하는 듯. 2014년, 대만의 한 웹사이트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국인은 누구냐"라는 설문조사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 1, 2, 3위를 하자 화급히 설문조사를 중지하기도 했다.
현재도 마오쩌둥의 평가에 관한 문제는 중국에서 극히 민감한 문제이며, 중국 정부는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국부로 대우하고 있지만, 이 문제가 이슈화되는 것을 극히 꺼린다. 그러니까 마오에 대한 비판에도 코렁탕을 먹이지만, 광적으로 찬양하는 것도 막고 있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될수록,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과 같은 흑역사도 부각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마오쩌둥이 주도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통성 자체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 (위에서 지적했듯이, 중국에서는 빠와 까가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중국사람 앞에서는 아예 마오쩌둥에 관한 이야기를 안하는게 좋다.) [47] 2016년 1월, 허난 성(하남성) 포청천의 고향 카이펑에서 한 사업가의 주도로 36m짜리 마오쩌둥 금박동상이 건설되었으나,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에서 수많은 인명이 아사한 허난성에서 이에 대한 비난여론이 증가하자, 중국 정부는 철거를 명령, 건립되자마자 철거되었다. 기사
철거된 마오쩌둥 동상 와 씨바 잠깐만 원근법 쌩까는 발합성...이 아니라고?
4 마오쩌둥의 성격
4.1 지도력
사람을 다루는데 능했고 지도력이 좋았다. 그리고 성격 자체는 매우 친화력이 뛰어났다고 한다.[48] 그의 지도력이나 인망이 그의 지도력이나 인망이 이렇게 대단했기 때문에, 건국 후 아무리 잘못된 정책을 들고 나와도 부하들이 반대하지 못해 오히려 참극을 빚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가족주의"라고 하면서 매우 깠다. 일단 그는 자신이 적으로 간주하면 그때는 인품이고 뭐고 없이 잔인하고 비정하게 숙청했다. 이런 성격적인 면이 후에 문화대혁명을 불러왔다고도 한다.
당내의 그의 전직 라이벌들(장궈타오, 왕밍 등)은 결국 모두 당이나 중국을 떠나 망명했고 그의 부하였으나 그에게 반대해 밉보였던 펑더화이나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은 모두 쫓겨났는데 펑이나 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4.2 군대식 사고
전문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바 없지만 게릴라 지도자로서 사고가 군대식으로 굳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실전에서 총을 쏴본 적이 거의 없으며 게릴라 시절의 사진 중에서도 군복 차림은 많지만 총을 차고 있거나 들고 있는 사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항상 정책이든 뭐든 간에 군대식으로 사고했으며 일단 적으로 간주되면 무조건 섬멸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것이 잘 나타난 일화가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마오의 사상에는 못지않은 "정신주의적" 일화가 많은데 마오주의가 뿌리는 정신주의에 맞닿아 있으므로 비슷한 병크가 나타났다. 대약진운동도 끝까지 "정책이 병크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신을 옹호했다고.
4.3 전략적 허세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
1957년 11월 러시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니키타 흐루쇼프의 도취감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최초의 ICBM과 스푸트니크 호가 막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새로운 지도자를 싫어했고 탈스탈린주의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감동적인 기술의 위업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동풍이 이제 서풍을 압도하고 있다"는 선언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무한한 인력과 "제3세계" 에서 솟아나는 혁명적 조류와 합쳐질 때 소련 군사력의 이 새로운 조짐은 "사회주의의 힘이 제국주의의 힘을 압도할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모인 동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단, 이것은 좀 더 당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모르면 뭔 대륙의 기상 내지 중2병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전략적인 계산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1950년대 후반은 중국은 핵무기가 없었지만 양대 핵강국인 미국과 소련 모두 적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양 강대국이 유사시 중국에 핵공격을 하려 할 때 한 번쯤 재고하도록 허풍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런 대외발언을 마오쩌둥의 성격이라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마오가 저런 말을 하면서 핵무기가 쓸모없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핵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말이 전략적인 처지를 고려한 허세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2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소련의 중국 지원 중단 이후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개발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사정거리 800km자리 둥팡로켓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발사하는 핵실험을 실시했다(참고로 이렇게 직접 미사일에 달아 핵실험을 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험한 실험이었다.).
이런 허세나 비이성을 내세우는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하며 국제정치학 용어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한 전략이다. 상호확증파괴가 국제정세의 지배적인 논리로 군림하던 시절에, 마오쩌뚱은 핵무기에 의한 완전한 파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미-소 양국과 나름 대등한 수준의 협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리적 우위로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는데 성공한 희귀한 사례. 물론 상호확증파괴 구도를 안정한 세계정세의 근본으로 여기고 있던 소련의 지도자들은, (비록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마오쩌뚱의 이러한 언행이 핵전쟁을 억지하려는 미소양국의 노력을 무위로 돌린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이에 대단히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평생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진영과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진영의 양극체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49], 스탈린을 제외한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 스스로가 이를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말을 듣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였던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 좋다. 당신네들은 3억이 죽어도 아기를 좀 더 낳으면 된다 치자.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1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정서에 공감했고 마오쩌둥의 태도가 아주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나중에 말하길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는 그가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50]
(박건영 역,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서울: 사회평론, 2002, pp.419-420)
그리고 마오쩌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원자탄이 아주 강력하여, 중국에 투하될 때 지구를 관통하는 구멍을 내거나 아니면 지구를 날려버릴지라도, 이것은 태양계에는 중요한 사건이겠지만 우주 전체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 1955년 1월, 마오쩌둥 -
이후 마오쩌둥은 중국을 찾은 네루나 소련의 미코얀에게도 비슷한 주장을 하여 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닉슨과 만난 브레즈네프가 이 일화를 들먹이며 마오를 천하의 미친놈이라고 까댄다.
4.4 대인배(?)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해서 그런지 호걸스러운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다. 예컨대 공산당 내에서 가장 큰 경쟁자였던 정적인 장궈타오는 후에 전향하여 국민당으로 도주했고 중국이 공산화 된 후 홍콩으로 도주했지만 마오쩌둥은 본토에 남겨져서 사로잡힌 장궈타오의 가족들을 그냥 홍콩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게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사실은 마오와 장은 엄청난 악연이 있다. 장궈타오는 한때 마오쩌둥보다 세력이 큰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의 경쟁자이기도 했다
엄연히 미국과 적성국인 처지였지만 미국과 영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을 크게 반겼고 에드거 스노를 비롯해서 옌안 시절에 친하게 지낸 미국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이 중일전쟁을 비롯해서 중국에 도움을 준 것이 많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칭찬하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이발사인 '털보 왕' 왕후쯔는 193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면도와 이발을 도맡아 했는데 1942년 정풍 운동 도중에 그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한 혐의로 기소된 일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자신을 수년간 옆에서 지킨 왕후쯔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순간이 많았음에도 그가 자신을 암살하려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겨 그를 따로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왕후쯔는 마오쩌둥에게 울면서 면도칼로 그를 죽이려 했었다고 실토했는데 마오쩌둥이 그간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묻자 왕후쯔는 국민당이 오면 그때 죽이려 했다고 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국민당이 옌안까지 오면 그들 손으로 자신을 죽이려 할건데 왜 이발사의 손을 빌리겠냐면서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하자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었다고 밝혔고 이에 마오쩌둥은 관계자들을 불러 사람에게 거짓말을 강요하지 말라고 질책했다. 이후 왕후쯔는 수십년을 더 마오쩌둥의 이발사로 일하게 되었다.
쉬스유와 관련된 일화도 있는데 원래 쉬스유는 마오쩌둥의 경쟁자인 장궈타오의 부하였지만 대장정 중에 마오쩌둥에게 붙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믿지 않고 갖은 핍박하였고 견디다 못한 쉬스유는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공산당을 배신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첩보를 들은 캉성 등은 쉬스유를 즉각 체포해 처벌해야 한다고 마오쩌둥에게 건의했으나 마오쩌둥은 이를 물리치고 직접 쉬스유를 불러 면담했다. 마오쩌둥이 쉬스유에게 자신을 믿느냐, 장궈타오를 믿느냐고 묻자 쉬스유는 당연히 마오쩌둥을 믿는다고 대답했고 마오쩌둥은 다시 옌안에 남고 싶은가 떠나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러자 쉬스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옌안에 남고 싶다고 했고 마오쩌둥은 그의 죄를 다신 묻지 않아서 쉬스유는 마오쩌둥이 죽은 후까지 그의 충실한 부하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어디까지나 치밀한 정치가였고 절대 자신에게 손해를 볼 일은 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전후처리를 위해 비행기를 보내 그를 충칭으로 초빙했으나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비행기 채로 자신을 날려버릴 것을 염려하여 미국 대사 패트릭 헐리가 직접 비행기에 동승하기 전까지 충칭에 가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패트릭 헐리가 옌안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마오쩌둥을 태우고 왔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겁쟁이라면서 조금 전까지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비난하던 마오쩌둥이 이젠 미국인의 보호를 구걸하고 있다면서 엄청나게 경멸했다. 물론 속으로만... 협상장에서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최대한 잘 대접해주었고 소련 대사관에 기거하면서 나름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여긴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비위를 맞춰주는 듯 하면서도 공산당이 원하던 독자적 무장과 화북의 지배권을 요구하여 장제스를 화나게 했다. 결국 쌍십협정이라 불리는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회담은 다소 두루뭉실한 결과만을 남겼는데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 격차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은 양자강 이남의 모든 해방구를 포기한다는 내용에 동의해야 했고 옌안에 돌아온 마오쩌둥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의 통역사는 마오쩌둥이 '침대에 엎드려 몸을 떨었으며 손과 다리는 발작적으로 경련을 일으켰고 온 몸에 식은땀을 흘려 수건을 이마에 얹어주었지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덕분에 며칠간 마오쩌둥은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했는데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는 마오쩌둥이 갑자기 앓아누은 이유가 '훨씬 더 드넓은 영토에 의지해야 할 그의 정당이 봉쇄된 세계에서 건립한 통치가 얼마나 협소하고 그의 맞수는 얼마나 견고한가를 깨달은 결과'라고 평가했다.
5 마오의 사생활
파일:Attachment/마오쩌둥/7.jpg
마오의 가족. 왼쪽이 막내딸 리나, 가운데 남자가 마오안잉, 그 옆이 며느리 류쓰치.
엄청난 골초였다. 하루 3갑 60개비씩 60년을 피웠다는데 83살까지 장수한 것을 보면 대단한 셈.[51]
상술한 아버지가 지정한 결혼에 반대하여 가출한 것을 제외하면 결혼은 총 3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스승 양창제 교수의 딸인 양카이휘(양개혜)였다. 둘은 호남사범의 동급생이었고 아이는 3명을 낳았다. 남편의 혁명운동 뒷바라지를 하다가 국민당군에 잡혔고 국민당은 전향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 총살당했다. 이 중 장남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하고 둘째 마오안칭은 2007년까지 살아남았다. 셋째 마오안룽은 양카이휘가 처형된 후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지 4살의 나이로 죽었다.
2번째 처 허쯔전(하자정)은 아직 첫번째 아내가 살아있던 때인 1928년 장시소비에트에서 결혼했다. 여성이지만 홍군의 명사수였다고 하며 장정도 같이 했다. 마오와의 사이에서 무려 6명의 아이들을 낳았으나, 너무 어렸던 4명은 장정 중 인근 농가에 맡겼는데 3명은 행방불명되었다. 이렇게 맡긴 아이들 중에서 리민이라는 자는 후에 천하를 통일한 아버지가 찾아내어 베이징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허쯔전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1937년 허쯔전은 모스크바로 갔고 이후 마오는 장칭과 결혼하기 위해 허쯔전과 이혼했다.
이후 심복이었던 캉성의 소개로 배우출신 이혼녀 장칭과 결혼했다. 여기에 대해서 말이 많고 허쯔전이 모스크바에 가있는 동안 바람피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오와 장칭은 1938년 결혼했고 둘은 딸 하나를 낳았다.
역대 중국 황제들처럼 마오쩌둥은 여자를 무척 밝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성인 여성이 아닌 10대의 소녀들을 좋아했다. 나이 든 여자들은 세상물정에 너무 밝은 데다 순진한 맛이 없다고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조조처럼 유부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지막 부인 장칭도 이혼녀 출신. 장칭은 이혼 후 마오의 심복이자 정보기관의 수장인 캉성의 정부였으나, 장칭이 워낙 잠자리를 밝혀 체력이 감당이 안되자 캉성은 마오에게 바쳤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순박한 시골 아낙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70대 늙으막에 현지지도 할 때 눈에 든 20대 초반의 유부녀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름을 물어본 후 수첩에 이름을 적으며 좋아했고 이를 본 심복 왕동싱이 그 유부녀 남편에게 이혼을 종용하고 마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 유부녀 사이에 사생아 몇 명을 낳았다고.
리즈수이가 쓴 "마오의 사생활"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평생 자신의 성기를 씻은 적이 없었다.(...) 한 번은 그의 주치의인 리즈수이가 위생 문제를 거론하자 "나는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다고!"라면서 거절했다. 흠좀무. 참고로 마오쩌둥은 특이하게도 몸을 잘 씻지 않았다. 몸을 샤워를 하거나 비누를 이용한 샤워를 잘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하인들이 수건을 물에 적셔서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양치를 하지 않고 차를 이용해서 가글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서 치아가 변색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차를 이용한 양치는 마오쩌둥의 특유한 습관이 아니라 당시 중국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양치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의 이가 깨끗했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져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고 치석과 음식물 찌꺼기가 많았고 잇몸에 고름이 차 있었으며 충치가 많았다 한다. 이 때문에 1955년에 리즈수이의 권고로 이를 하나 뽑아야 했다. 리즈수이와 장광옌이 마오쩌둥에게 양치를 권하자 호랑이는 양치를 하지 않고도 이가 날카로운데 양치할 이유가 어딨겠는가?라는 말로 거부하였다. 이를 하나 뽑은 후엔 양치를 잠깐 했지만 며칠 못가 그만두었다고. 결국 마오쩌둥의 치아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서 1970년대엔 이가 많이 빠져서 윗어금니는 하나도 남지 않았고 마오의 사진들은 마오의 치아가 보이지 않게 정교하게 찍혀야 했다. 오지나 사막 같은 곳에서 살다보니 안 씻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듯 하며, 마오쩌둥은 책을 많이 읽으면 해롭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책을 읽었던 것처럼, 자기는 씻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씻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덧붙여 마오쩌둥은 성병의 일종인 트리코모나스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성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모두 그 병에 걸렸다. 그러나 마오의 여자들은 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숭배되던 마오쩌둥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오히려 마오의 성병에 함께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졌다고 하니 안습. 마오에게 여자를 조달해 소개시켜주는 채홍사 역할은 그의 심복인 예쯔롱과 왕둥싱이 맡았다. 하지만 마오의 방탕한 성생활에 그들도 가끔씩 "우리가 이런 더러운 짓만 해야 하나?"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왕둥싱은 마오 사후에 4인방을 실각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 트리코모나스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트리코모나스는 현재도 일반인 감염율이 15%에 이를 정도로 매우 흔한 병이고, 남자한테는 거의 증상이 없고 여성한테도 25% 정도가 무증상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무좀과 같은 하찮은 질환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성병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1970년대 이후로 파킨슨병 혹은 루게릭병에 시달리면서 더 이상 여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다. 이에 비해서 저우언라이는 어렸을 때 첫사랑이었던 덩잉차오와 결혼해 한 아내만 보고 살았으니 참으로 대조적인 부분. 이러한 마오쩌둥의 바람끼는 부인들을 굉장히 불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장칭은 외도를 하는 남편을 보고 남 몰래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매우 잦아졌으며, 훗날 그녀가 문화대혁명에서 지독한 잔인성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개인사에서 훌륭한 일화도 있는데 바로 위에서 나온 아들 마오안잉의 전사에 관한 일화이다. 마오안잉은 한국전쟁 당시 전쟁에 참전했는데 마오쩌둥은 어쨌든 아들이 참전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주석이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보낼 것인가".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소대장이 될 경우 전선에 제일 앞정서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가장 위험한 위치에 노출이 되는데 이를 우려해서 일부러 마오안잉을 소대장이 아니라 통역장교로 배치했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독이 되었고 마오안잉은 펑더화이를 보좌하면서 참모부에 근무했는데 미군기의 공습으로 전사했다. 당시의 전선 상황이라는 게 연합군이건 공산군이건 간에 어느쪽 군대든 사령부에 직접 타격을 받을 정도로 많이 위태로웠다. 전선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어 전사 소식을 알린 뒤 시체를 후송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의 죽은 자식들을 후송해올 수 없는데 자기 자식만 후송할 수는 없다고 그 자리에 묘를 만들라고 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해주고 결혼식 때 거액의 축의금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오안잉의 영구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의 우호의 상징이 되었다.
고추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현대 중국의 건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영화 건국대업에서 마오의 전속 취사병이 매 끼니 고추를 준비해야 한다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는 영화 건당위업에서는 청년기의 마오가 춧고추 반찬을 허겁지겁 즐겨먹는 장면 등, 마오의 고추사랑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있는 듯 하다.
마오쩌둥을 탐구하는 서적 [후난, 마오로드-신이 된 마오쩌둥] 에서는 마오의 식생활을 소개할 때 “마오쩌둥에게 ‘붉고 매운 고추’는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뿐만 아니라 혁명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는 끼니때마다 고추를 먹었고 매운 고추를 잘 먹는 사람이 혁명적이라고 여겼다. 마오에게 고추는 붉은 욕망의 상징이었다.” 라는 표현으로 마오는 붉은 고추를 즐겨 먹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6 사상
6.1 마오이즘
일명 마오쩌둥주의(모택동주의)라고 평가되는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도시의 노동자들이 아닌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마오쩌둥 특유의 사상이다. 일명 농민들의 맑시즘으로 불리는 사상으로 한때는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 "빛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퇴조 때문에 거의 듣보잡 신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6.2 사상적 뿌리
마오쩌둥사상은 스스로는 유물변증법을 토대로 했다고 하나 객관적인 현실보다는 주관적인 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에 사실 관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중국의 전통 사상에 훨씬 더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 철학에서 대가들이 쏟아져나왔을 때 그 대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철학사적 면만 따져도 마오쩌둥은 주요인물에 들만한 인물이다. 중국 현대철학 교과서에는 꼭 마오쩌둥의 실천이론이 풍유란 웅십력과 하께 언급된다.
또한 마오이즘은 아나키즘 사상가인 크로포트킨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애초부터 모택동이 공산당에 가담하기 전에 크게 영향받은 것도 아나키즘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대약진운동 시대에 만든 인민공사같은 제도는 아나코 콜렉티비즘(무정부 집산주의)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한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소위 인간 중심, 수령론 같은 것은 마오주의의 주장과 판박이다.
6.3 혁명 이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는 소련식의 마르크스주의인 레닌주의(사실은 스탈린주의)와는 좀 다르다. 이는 당시 중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러시아는 농업 국가이기는 했어도 도시에는 충분한 수의 노동 계급이 형성되어 있었고 정부기관이 도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만 잘 조직해도 혁명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레닌주의에서는 도시의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뒤쳐진 농업 국가였고 노동자와 도시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적용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실제로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된 후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잡고 소련식의 전략을 차용했다가 모두 망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마오에게 자연스럽게 당권이 돌아왔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혁명 이론 대신 중국 고유의 농민 반란의 역사에 주목하여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삼는 전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도시의 직접 봉기 대신에 농촌에서 세력을 넓혀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략은 전근대적 사회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한동안 여러 제3세계의 혁명가들이 차용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주의를 "(비료로 쓸 수 있는) 똥보다도 못하다"고 경멸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오쩌둥은 서구의 사상을 도입한 인물이 아니라 장각이나 이자성처럼 중국의 전통역사 맥락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중국의 전통을 모조리 박살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마오쩌둥의 이론은 소련식의 사회주의와는 영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국공내전의 말기까지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주기도 했다. 소련측은 마오쩌둥을 "마가린(짜가) 사회주의자"로 공공연히 무시했는데 결국 이것은 후에 중소분쟁과 중국-소련 국경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6.4 군사 이론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중국의 고대 병법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결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중심의 유린"을 중시했지만 마오쩌둥은 일단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장악하면서 중심을 포위하여 고립시킨후 적의 역량이 감소하고 자신의 역량이 우월해졌을 때 적의 중심을 쳐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때문에 마오쩌둥은 전술 레벨에서든지 전략 레벨에서든지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적의 주력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고 결정적 순간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의 군사이론은 혁명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인데 마오는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물고기와 물의 관계, 수어지교라고 했다. 즉 게릴라는 농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마오의 군대는 삼대기율 팔항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군율이나 군기가 엄정했고 당시 떼강도나 다름 없었던 군벌군이나 국민당군과는 달리 농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농민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계화보다는 보병의 과감한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중시했고 무기의 성능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민중의 각성을 더욱 강조했다.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침략자가 중국에 쳐들어오면 중일전쟁처럼 대규모의 게릴라전을 펼쳐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킨다는 것. 이런 유격 전술을 마오쩌둥은 "인민전쟁"이라 불렀다. 이는 항일 게릴라전에서 효과적인 전술로 검증되었다. 일본군은 거점 점령에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팔로군은 거점과 거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두들기고 도망가는 전술로 일본군의 물자와 사기를 소모시켰고 인민들 속으로 쏙 숨어버림으로서 일본군이 찾을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버린 것.
이런 전술은 1930년대 이전의 아무것도 건설되지 않았던 중국에는 합당한 것이었지만 건국 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때에 건설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인민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고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지휘하여 미국의 힘을 겪어본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이런 마오쩌둥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 말 펑더화이는 이제 "우리도 미국이나 소련처럼 프로페셔널한 장교단이 지휘하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이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이것은 펑더화이 실각의 한 이유가 된다. 마치 1930년대 소련에서 당료들과 투하쳅스키의 충돌이 그의 숙청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마오의 군사이론은 정치이론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연구되는 분야이다. 이것은 경영전략에서도 꼭 한 번쯤은 이야기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월마트나 애플이 바로 마오쩌둥 이론을 경영면에서 제대로 응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6.5 여담
인도에서도 마오쩌둥주의자들이 정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워낙 지주세력의 힘이 세기 떄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선전히 잘 먹혀들혀가고 세력이 크다. 매번 경찰들이 마오주의자들과 교전하다 죽었단 뉴스가 왕왕 뜰 정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지로 관광 갔다가 마오이스트들에게 피랍당한 적도 있다.
근데 목표를 이루려면 도시로 진입을 해서 선동을 하고 그네들이 말하는 소위 혁명을 일으켜야 되는데 도시에 진입할 능력도 역량도 없다. 거기다 그나마 같은 공산당이라고 어느 정도 감싸주던 인도 공산당과 기타 좌파 정당들도 마오주의자들이 사상이 다르다고 자기네들까지 팀킬해대니[52][53] 원수지간으로 돌아서고 아예 정부랑 편 들고 같이 싸우고 있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인도에서는 완전히 불온단체로 찍힌 상태다.
마오쩌둥 주의자들이 인도 오지 전역에 넓게 산개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형편이라 정부도 마오주의자들을 억제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오이스트 입장에서 봐도 경찰도 버거운데(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도 정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보고 군대를 안 보내고 있다.)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건 불가능하고 도시민들이 선동될 가능성은 없고 결국 오지에서 교전하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 민심은 점점 멀어지고 목표하는 건 이루지도 못하고 망했어요.
7 어록
마오쩌둥은 시인과 문필가로 유명하다. 이 점에서 조조와 정말 비슷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조조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치하에서 조조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전술했다시피 사서로 일한 적도 있고, 독서를 엄청나게 한 걸로도 유명하며 게릴라 시절에도 공작원이 외부에서 구해주는 신간을 가져다주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련 서적보다는 중국의 여러 고전 역사책을 탐독했으며,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거의 예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했다고 한다. 다독(多讀)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은 많은 성공한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습관이기도 했고 마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오식 사회주의는 원산지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고 또 그랬기에 중국식 사회주의가 그럭저럭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자치통감을 17차례나 보고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들은 과거의 것을 모두 파괴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작 홍위병의 두목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은 옛날 역사책이나 제왕학 서적을 보고 어떻게 할 지 궁리하고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홍위병에게는 책을 너무 많이 보면 해롭다면서 정작 자신은 책에 묻혀 지냈으니. 이런 걸 보면 책이 해로운게 맞는것같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어록은 문명4 기술에서 강선을 개발하면 나오기도한다 [1]
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기록화. 그림에서도 보이지만 저렇게 서재의 책이나 그가 읽던 책들은 공산주의 관련 서적이 아니라 모두 왕조시대의 사서거나 혹은 그 사서를 읽기 위한 사전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책을 많이 읽으면 역시 해롭네요.
이렇듯 그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데 매우 능했다. 번역된 문구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원문을 보면 중국의 특유의 댓구를 잘 이용한 인상적인 문장이 많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54]"모든 저항에는 이유가 있고 혁명에는 죄가 없다."(조반유리, 혁명무죄 / 造反有理,革命无罪)
"가장 높은 곳에 뜻을 두어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날이 발전한다.(好好学习, 天天向上)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총을 드는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人不犯我,我不犯人;人若犯我,我必犯人)[55]
"당대의 인물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다." (数风流人物还看今朝)
"독서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적용한다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며, 보다 중요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말만 늘어놓지 말고, 실천가가 되어라."
"작은 불씨는 들판을 불사르고, 큰 불씨는 물에 기세를 그친다."
"스스로 노동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 (自己动手丰衣足食)
"인민, 오직 인민만이 세계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人民,只有人民才是推动历史发展的决定力量!)[56]
"모든 반동파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一切反动派都是纸老虎!) [57]
"이것은 단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这只是万里长城走完了第一步!)
"하늘은 곧 비가 오려 하고, 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게 해라!" (天要下雨, 娘要嫁人, 由它去吧!)[58]
"결심을 했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마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이기는데 집중해라 (下定决心,不怕牺牲, 排除万难, 去争取胜利)
"나의 영예가 내 자손들에 의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리가 없고 배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배우고 또 배워 앞으로 나아가라."
"아무리 큰 우물이라도 하늘보다는 작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평등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이나 인격의 우열이 있으니 자기보다 나은 자를 따라야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하여 일을 하라." (为人民服务)
"일이란 투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 百花齊放, 百家爭鳴)[59] [60]
"자기 만족은 학문의 적이다. 우리가 자기 만족을 면하기 전에는, 우리는 실제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정녕 할 수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라."
"정치가 유혈 없는 전쟁인 반면에 전쟁은 유혈 있는 정치이다.[61]
"법칙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군법과 군사 이론들은 전(前) 시대나 우리 자신의 시대에 산 사람들이 축적한 전쟁 체험의 총화이다. 우리는 피의 대가로 얻은 교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 교훈은 과거 여러 전쟁의 유산이다. 그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그런 유산들을 우리 자신의 체험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유용한 것은 소화시키고, 무용한 것은 버리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체험은 덧붙여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몹시 중요한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살았을 때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기 마련이다."그걸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지함이다."
"실수와 좌절을 겪고 지혜를 얻는다."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볍다." (人固有一死-惑重于泰山, 惑輕于鴻毛)[62]
"빛나는 날로 나아가는 길은 굽이굽이 사연도 많다."[63]
"힘든 일은 눈 앞에 놓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 움켜쥐고 내 것으로 만들어라."
"분열하지 말고 단결하라."
"세상에는 이유 없는 사랑 없고, 이유 없는 미움 없다."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냉정, 긴장감과 원칙이다."
"사상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적응해야 한다."
"한 번 실수는 실수지만, 두 번 실수는 음모다."
"제대로 가려면 멀리 보라."
"한 번 더 생각하라. 고민하고 예측할수록 지혜가 나온다."
"혁명(革命)은 만찬(晩餐)도, 수필(隨筆)도, 그림도, 한 폭의 자수(刺繡)도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앞뒤를 가리며 점잖게 순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미친
"행운에 기대고, 남의 도움으로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라."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맹목적으로 소련을 따를 수는 없소. 방귀를 뀌면 냄새가 나는 법인데, 소련이 뀌는 방귀가 모두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동지들! 여러분은 각자 책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오. 똥을 누고 싶다면 누시오! 방귀를 뀌고 싶다면 뀌시오!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오."
"먹은 다음에 똥을 눠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먹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문예는 국가에 봉사해야 하며, 문예는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의 대의에 입지해야 한다! 모든 예술과 표현은 낙관적이여야 하며 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폭로/비난도 엄격히 금한다!"
"우리는 전쟁의 승자다. 승리했는데 뭐하러 무슨 보상금을 받냐?"니가 이겼냐 장제스가 이겼지.
"책을 너무 많이 읽는것은 해롭다."
"부농들만 보아도,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알 수 있다."
"공산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적을 부수는 망치다."
8 한국에 알려진 마오쩌둥의 한국 관련 발언의 진상
일부 뉴라이트 쪽 블로거들은 마오쩌둥이 미국 기자이던 에드거 스노우에게 "일본이 억지로 빼앗아간 중국 땅인 한반도를 되찾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왜곡해서 주장한다. 그러나 에드거 스노우의 책 <중국의 붉은 별>을 읽어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티베트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옛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에드거 스노우 저, <중국의 붉은 별>, 두레, 1982년.) 마오의 이 말을 실으면서 님 웨일즈의 남편이었던 에드거 스노우는 "조선은 중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마오도 어쩔 수 없이 중화사상의 질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 책만 찾아봐도 바로 나오는 뻔한 이런 엉터리 같은 주장이 자꾸 웹을 돌아다닌다.
또 이들은 1961년 전당대회에서 마오쩌둥이 "부탄, 한국, 베트남, 대만를 비롯한 중국의 빼앗긴 땅들을 되찾아야 하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에 중국에서 '한국' 이라는 말은 쓰지도 않았으며 마오쩌둥이 그 발언을 했다는 당시에는 흐루쇼프의 소련과 마오쩌둥의 중국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에 관한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과 가까운 북한과 베트남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우방을 더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우방에게 허튼 소리를 해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리가 없지 않겠는가? 결정적으로 1961년에는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린 적이 없다. 제8차 대회가 1956년, 다음 제9차 대회가 1968년 열렸다. 영문 위키피디아.
9 관련 서적
워낙 다면적인 인물이기에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어느 한쪽만을 다룬 서적들이 많다. 그래서 한쪽만 보면 레전드 또는 천하의 개쌍놈이 된다. 개인적 성향이나 사생활을 다룬 책들은 대체로 야사(野史)인 책들이 많으며 검증도 어렵고 저자의 신뢰도도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가치를 두지 않는 책들이다. 문제는 이런 책들이 대중의 호기심에 잘 영합하기 때문에 이런 책들이 정말 정설인 양 알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비판적인 읽기와 균형 잡힌 독서가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무위키에도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이 진실인 것처럼 교묘하게 많이 작성되니 진지하게 읽지 않는 게 좋다.[64]
야사적인 책들에서 인간적인 마오의 모습을 보려면 24년 동안 마오의 주치의를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리즈수이가 펴낸 <마오쩌둥의 사생활>이라는 책이 있다. 다만 이 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다른 마오의 주치의(주치의가 여러 명이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이 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책을 홍콩에서 펴내기도 했다.
다른 야사적인 책으로는 마오쩌둥을 거짓말장이이자 마약왕, 그리고 무자비한 악당으로 묘사한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장융은 문화대혁명 직후 영국으로 간 망명객으로서 마오에 대한 논조는 매우 비판적이다. 읽다보면 개인적 증오심이 묻어날 정도다. 스스로도 마오쩌둥을 괴물(monster)로 묘사하려 했다고 한다. 원판으로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마오쩌둥의 신화를 완전히 부수고 일개 군벌에 지나지 않았으며 마오가 1941년 무렵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상대로 아편을 팔아 막대한 수익을 챙겼고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병크와 티베트 침공, 심복이었던 린뱌오의 아들이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몽골로 달아나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내용까지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대중역사서로는 서구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학계에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특히 사료의 검증 없이 결론을 내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선택된 사료만을 제시한 것은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측이나 중소결렬 후에 중국과 적대관계가 된 소련의 프로파간다를 사료검증으로 받아들여 쓴 부분이 상당수다. 게다가 일부 부분에 있어서는 심각한 오류도 있으니 상당히 가려 봐야 한다. 실제로 중화민국에서 해당 책을 출판준비하다가 XXX장군은 공산당 간첩이었다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그 장군의 아들에게서 우리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증거를 내놔!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결국 장융은 끝까지 증거를 못해 출판이 무산된 일도 있었다.
개인적 일면을 다룬 책은 마오쩌둥의 아들이 쓴 <나의 아버지 마오쩌둥>이라는 책이 있다.
객관적 시각으로 이 사람을 볼 수 있는 책은 로마인 이야기의 번역자 김석희가 번역한 앤 포크너의 <마오쩌둥>이 있다.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펴내고 한국에서 번역된 <마오쩌둥: 중국의 혁명을 이끈 반항아>라는 책과 로스테릴의 <마오쩌둥>이 있다. 셋 다 서양 주류학계가 보는 객관적인 마오관을 다루고 있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인 모주석어록. 총 2억부가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5억부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현재도 중국의 헌책방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최근에 인쇄된 중영 대역본도 존재한다.). 일설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만약에 이책의 인세를 챙겼다면 수백억대의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마오쩌둥 어록 항목 참조.
한국인이 펴낸 책으로는 2012년 11월에 나온 "중국지" 상하권이 있다. 이 책은 진보언론인 미디어 오늘에서 원로 언론인인 현이섭씨가 연재했던 글인데 삼국지연의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실제 역사를 각색한 것이다. 마오의 모습은 상권에서는 영웅적인 불굴의 혁명가로 나오지만 하권에서는 무지막지한 폭군의 모습으로 나온다.
정말 정말로 원전에 도달하고 싶은 사람은 홍위병의 필수요소였고 문화대혁명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모주석어록(일명 모택동어록, 영어로는 Little red book)을 읽어보는것도 괜찮다. 모택동이 스스로 한 이야기들을 쭉 적어놓은 책. 물론 한국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과거에는 이런 걸 읽었다간 코렁탕을 취식하게 되었고 게다가 민주화 된 이후에 정식 출간이 된 적이 없을 뿐더러 마오이즘 관련 서적이 출판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을 때는 이미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되고 동유럽이 무너지던 시대여서 마오이즘 자체가 이미 한물 간 사상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연구 차원에서 도서관이나 여타 정식 경로를 통해서 모주석어록을 읽어보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므로 괜찮다.
모주석어록을 거론하는 이유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이 국내에 출판되어있긴 한데 생각보다 내용이 길고 어렵기 때문. 괜히 홍위병들이 모주석어록을 하나씩 소지하고 다니면서 읽은 게 아니다. 일반 대중들이 다가가기 쉽게 잠언 형식으로 쉽게 써있기 때문. 다만 조선족 자치주에서 돌아다니던 번역본이 있다고 한다. 북경에는 민족출판사라는 북경 유일의 소수민족 관련 책을 출간하는 전국 규모의 출판사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이 민족출판사에서 1966년에 발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연변지역 헌책방에서는 간간히 구입할 수 있는 듯.
10 선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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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愛北京天安門(나는 베이징의 천안문을 사랑해)
중국어 원문 및 병음 가사(정자체 기준)我愛北京天安門 天安門上太陽升
Wǒ ài běijīng tiān'ānmén tiān'ānmén shàng tàiyáng shēng偉大領袖毛主席 指引我們向前進.
Wěidà lǐngxiù Máo zhǔxí, Zhǐyǐn wǒmen xiàngqián jìn.우리말 번역 가사
나는 베이징 천안문을 사랑해. 천안문엔 태양이 뜨네.
위대한 지도자 마오 주석께서 우리를 앞으로 이끄시네.
이 곡은 홍콩 97의 유일한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곡이다.
11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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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된 선통제와 찍은 사진. 바톤 터치 존나좋군과 묘하게 유사하다?
- 복거일의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제1차 국공내전 중이던 1935년에 옌안에서 벌인 전투에서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국민당군에게 끔살당했다. 대신에 국민당군의 포위망에서 겨우 살아남아 도망간 류샤오치가 1956년에 국민당을 박살내고 중국 대륙 북부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 노재성의 대체역사소설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스탈린의 계략에 빠져 무기 지원 약속만 믿고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관의 만찬에 참석했다가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 죽는다. 폭심이 바로 마오쩌둥이 있던 소련 대사관이었기에 시체조차 남지 않았고, 미군의 핵폭격 이후 중국에서 가장 높은 지도자가 된 펑더화이가 주도한 중앙위원회에서 영구제명 처분을 당한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뒤로 일반인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잊혀진 인물로 전락하고 만다.
- 해리 터틀도브의 <월드 워> 연작에서는 1942년에 지구에 날아온 파충류 외계인 집단과 영웅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 투쟁은 60년대까지 계속돼서 결국 중국에서 외계인을 몰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퍼즐을 풀면 이 양반이 암살단의 일원 내지는 협력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실은 그 내용은 기사단이 어쌔신의 심볼을 마오의 얼굴로 합성한 것으로 브라더후드의 각본가가 성전기사단원이라고 인증시켜줬다.
-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임에도 그의 저서는 성경의 판매 추정량과 맞먹는다. 최소 판매 추정량만 따지면 그의 저서들은 총 14억 5000만 부수, 성경은 25억 부수다.
- 그는 양치질 대신 중국 차의 한 종류인 고차(苦茶)라는 것을 수시로 마셨으며 양치질 대용으로 고차를 입에 머금고 가글하는 걸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것이 장기간에 걸치다 보니 치아의 색이 초록빛을 띈 채 색이 바뀌고 구강 상태가 염려됐지만 검진 결과 놀랍게도 치아 상태가 충치 하나 없이 매우 건강하고 양호했다고 하지만 위 문단에서 보듯 치아상태가 좋은건 아니었다.
- 중국인들이 도박인 마작을 금하려 했지만 마오쩌둥 본인은 마작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면서 포기했다. 비슷한 일화로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도 다른 건 다 금지해도 마작만큼은 어쩔 수 없더라고 GG 친 일도 있다.
- 미니어처 게임 DUST에서는 스탈린과 대동단결하여 중소 연방을 만든다. 더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마오쩌둥 대공전차를 만드는데 85mm 4연장 대공포로 무장하고 있다.
- KOEI의 노부나가의 야망 무장풍운록 오프닝을 패러디한 '마오쩌둥의 야망'도 있다.보러가기
- 1950년 마오쩌둥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자세한 건 문서 참고.
- 2015년 11월 29일에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박명수가 모택동 역을 맡았다. 찌푸린 얼굴이 의외로 싱크로율이 높다(...) 원래 정형돈 하차 이전에 정형돈을 출연시키려고 했다가 바뀌었다고.
- ↑ 원래 흑백인 이 사진에 색을 입힌 사진이 올라왔는데 그 때문에 사진이 조금 이상해보일 수도 있었다.
- ↑ 陈云/陳雲(1905~1995) 중국 공산당의 경제통이며 부총리와 상업부장을 역임했다. 대약진운동 수습을 하다가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지만 덩샤오핑 집권 후 다시 복권되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에는 비판적이으며, 덩샤오핑의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에 대해 사회주의의 틀을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조롱(鳥籠)론을 주장했다.
- ↑ 현재에도 중국에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마오쩌둥을 지칭할 때 꼭 마오 주석이라고 경칭을 쓴다. 그러나 북한과는 달리 친구끼리나 개인적으로 XX라고 비판하는 건 별 문제 없다.
- ↑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덩샤오핑은 마오가 스탈린을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회상했다. 마오는 스탈린이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했었다. 덩은 마오쩌둥의 행적도 대략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다분히 냉소적으로 말했다. 덩의 발언은 일종의 공식 판결이 되어 마오를 비판할 때마다 으레 나오는 말이 되었다. 덩은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탈마오주의' 선전은 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막줄.
- ↑ 마오쩌둥이 죽였다는 수천만의 인명중 대다수는 정책실패인 대약진 운동이 포함되있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책실패는 니키타 흐루쇼프도 저질렀지만 그는 학살자 취급받지는 않는다.
- ↑ 최소 880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서구권에서 학살자 순위를 랭크할 때는 빠짐없이 무조건 1위를 기록하는 분이시며 이오시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를 함친 것보다 갑절은 많다.
- ↑ 신격화 논조의 광신론을 제쳐두고라도, 마오에 대한 긍정론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
마오쩌둥의 중국은 가난했을지언정 적어도 덩샤오핑의 중국처럼 불평등하진 않았다."란 일각의 평가가 보여주 듯,다 같이 굶어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따위 소리를 하는것이야말로 개소리일뿐.. 현재의 중국은 상대적인 빈곤이지 마오쩌뚱 시절처럼 절대적인 빈곤은 아니다. - ↑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들어가자, 마오쩌둥이 한반도에 중국 인민지원군을 파견해 1.4 후퇴가 벌어졌다.
- ↑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및 문화 성장을 10년 넘게 후퇴시켰고, 그 사이 대한민국이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 ↑ 이두호 화백의 머털도사에서 요괴 대장 자리를 두고 경쟁벌이던 요괴 이름이 '못된동'으로 나오기도 했다(...).
- ↑ 성조 부호를 생략한 표기. 성조 부호까지 붙여서 제대로 표기하면 Máo Zédōng이다.
- ↑ 성조 번호와 diacritics를 생략한 표기. 성조 번호와 diacritics까지 포함해서 제대로 표기하면 Mao² Tsê²-tung¹이다.
- ↑ 사실 음절 구조만 놓고 보면 ㄨu(우)에 ㄥeng(엉)이 합쳐진 발음에서 e(어)가 약화된 발음이므로 '웅'이 오히려 정확하다.
- ↑ 베이징대학 총장을 역임한 컬럼비아대 철학박사이며 유명한 교육철학자 듀이의 제자다. 중국 철학계의 아버지 정도 된다. 천두슈(진독수)가 발행한 잡지 '신청년'에 기고하여 루쉰과 함께 백화어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다. 1940년대 말엽에서 일관적이다 싶을 정도로 친공적으로 흘러가던 중국 지식인계에서 정말 얼마 안되는 국민당과 장제스 지지자였다.
- ↑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에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 반론도 존재한다.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저서에 따르면 당시 마오쩌둥은 그야말로 독재자 그 자체였고 병사들의 군율도 문란해 오히려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날 정도라고 전한다.
- ↑ 다만 실제로 28인인지도 명확하지 않으며 명단도 통일되어있지 않다.
- ↑ 후일 장제스는 2주일만 더 있었으면 초공작전은 완수될수 있었다면서 평생동안 원한을 품었다.
- ↑ 당시 중국 인구가 5억 5천만인데 마오쩌둥과 류사오치가 인정한 71만이란 수치를 인용하면 마오쩌둥이 말한 수치에 근접한데 보이보가 언급한 200만 명설로 가면 뭐...
- ↑ 사실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게 만주지역에서 미군이 공격하고 타이완에서 중화민국이 반격을 가한다는 시나리오는 이론적으로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 문제에 대해서 초강경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때문.
- ↑ 사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참전 주장에 동의는 했으나, 한반도 파병을 위해 소집된 중국군의 상태가 전쟁을 새로 치르기에 영 좋지 않아서 당장 중국군이 참전한다 해도 미군에 승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비교적 소극적인 참전 지지를 표명했다.
- ↑ 여기에 대해서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당시 인민지원군의 다수는 국민당 출신이었는데 이들을 숙청시키기 위해 고의로 소모했다는 것. 진위여부는 차차하더라도 자신들을 다시 이역만리로 보낸 옛 국민혁명군 출신들은 공산당에 회의를 품어 인민지원군 포로의 80%는 타이완 행을 택했다.
- ↑ 당시 국가예산의 50% 이상을 소모했다.
- ↑ 그러나 이 설에 대해서는 재반론이 존재한다. 당시 공산당은 그딴 함정을 팔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 ↑ 저 사진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숨어있는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키가 비슷한데 실제 스탈린의 키는 163cm이지만 마오쩌둥의 키는 180cm였다 그러나 키가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마오쩌둥이 측근에게 웃으면서 설명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지기 싫어서 사진을 찍기 전에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나와 사진을 찍어서 그랬다고 한다.
- ↑ 독소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종전 3년 만에 회복했다.
- ↑ 그러나 실제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자신에 대해 확산될 것을 꺼려한 것.
- ↑ 게다가 당시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탓에 아직 서방으로부터 교역이 봉쇄된 상황이었다.
- ↑ 이게 얼마나 대강대강 진행된 방식이었냐하면 철광석 증산을 꾀하지 않아 막상 토법고로에 쏟아부으면서 국민정부 시기 창설된 대형 용광로는 놀고 있었다. 당연히 효율은 후자가 더 압도적인데도!
- ↑ 참고로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을때 사망자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합쳐서 3500만명 정도다!
- ↑ 이걸 하방이라고 하며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고향으로 오지 못했다. 문혁 말기 호적 이동을 동결시키면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주지 이동을 금지했기 때문.
- ↑ 아이러니하게도 대약진운동의 아사자의 절반은 10살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즉 홍위병의 대부분은 대약진운동시기 가장 고통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 ↑ 이런 배경 때문에 2012년 원자바오 총리의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제2의 문화대혁명이 올 수도 있다'는 발언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 ↑ 당시 화궈펑은 겨우 현 서기 정도였다.
- ↑ 다만 부부관계는 말 그대로 마오쩌둥이 일진이고 장칭이 빵셔틀이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이 장칭의 외모만 보고 결혼한 탓에 장칭의 인격도 영 좋지 않았다.
- ↑ 하지만 아래 부정적 평가를 보면 장제스 치하에 비해 생활수준이 개선된 게 맞는건지 의문스럽다. 자세한 것은 아래 부정적 평가 참고.
- ↑ [2]
- ↑ 중국인들 역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10년 퇴보하였고 그동안 서방 국가들이 10년 진보하여 중국의 발전이 도합 20년 가량 늦춰졌다고 평가한다.
- ↑ 근데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당시(1980년대 이전) 중국에 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국경일에 천안문에서 지난번에 봤던 특정인이 보이지 않으면 그 특정인이 숙청되었다고 추측했을 정도였다. 당시 구 공산권 국가들은 워낙 정보통제가 심각해서 어쩌다 나오는 뉴스 자료화면에 줄을 서있는 순서라든지 누가 먼저 악수를 하는지 누구 제스추어가 더 크다든지 이런 사소한 걸 가지고도 권력 관계를 추측했다.
- ↑ 현재의 북한을 보면 된다. 지금도 정부의 정보국이나 민간 언론에서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해서 추측하는 것도 이런 방식이다. 대체로 몇 달 동안 최고지도자의 현지지도 명단에 빠져있으면 사망 혹은 숙청으로 추정한다.
- ↑ 출처
- ↑ 이는 나치정권의 유대인 600만을 포함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총합을 합친거보다도 많은 숫자다!
- ↑ 진짜로 일본에 감격해서가 아닌, 단순한 외교적 드립을(당시는 중일관계 정상화 분위기였으므로 어느정도 가벼운 분위기가 필요하긴 했다.)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 ↑ 이 짝퉁 공산주의의 결과는 대약진 운동, 문혁만 봐도 알 수 있다.
- ↑ 이전에는 그래도 장제스보다 낫지 않았냐고 했는데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의 1950~1960년대 경제성장률은 세계 2위로 연 8%이하로 내려간 기록이 전혀 없다. 이러한 개혁은 토지개혁과 교육확대가 동반된 성과로 오늘날 타이완의 빈부격차와 물가는 한국보다 낮다.
- ↑ 여기에 현재 최고
존엄지도자인 시진핑도 마오시절 시골에 끌려가 삽질을 거하게 했고, 그 아버지 시중쉰도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고 귀양 갔었기 때문에, 마오가 아무리 국부라고 시진핑이 좋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 ↑ 다만 김일성이나 김정일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이들을 만나본 사람들, 심지어 서구권 인사들도 이 두 독재자들을 호평하기 때문에 이 평가는 조금 문제가 있다 일단 주위의 인망이 없이는 독재자를 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과 인품이 별개라는 것을 알려면 마피아 보스과 부하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 ↑ 마오쩌둥은 중국의 역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동시에 지난 세기동안 중국이 세계에서 누렸던 지위를 복권시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그의 모순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는 부분.
- ↑ Gaddis, John Lew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 ↑ 사실 특수한 유전자를 타고나면 흡연은 건강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될 수 있다. 아니 암 자체가 유전성을 무지 타는 질병이다. 주변에서도 평생 담배를 태웠는데 고령으로 편안히 자연사한 노인들이 있는 반면, 평생 술담배를 멀리했지만 환갑 겨우 넘어서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음을 보면 된다. 그러나 위의 예시는 꽤나 극단적인 경우고, 대부분의 사람은 피우면 걸리고 안 피우면 안걸리는 중간정도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자기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괜한 흡연으로 안 걸려도 될 암에 억지로 걸리는 뻘짓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 ↑ 위 항목에 나온 것처럼 마오쩌둥주의와 기타 다른 공산당 분파들의 사상이 다르니 서로 투닥댄다. 다른 분파들은 일단 농민들을 교육시키고 도움을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데 마오쩌둥 주의자들이 자꾸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자고 설쳐대니(...) 마오쩌둥 주의자들도 자기 계획에 걸리적거리니까 눈엣가시로 본다고. 그 예로 공산당이 힘이 있는 데에서는 마오이스트들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마오주의자들이 공산당 당사를 습격해서 당원들을 살해하거나 서로 교전하는 일이 잦다.
- ↑ 실제로 농민과 정부와의 토지 문제로 농민들을 공산당과 마오주의자들이 번갈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공산당은 일단 도와줄 테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해결하자고 하고, 마오주의자들은 총기를 줄 테니 싸우자고 했는데 농민들이 마오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나중에 경찰이 와서 마을 주민들을 전부 쓸어버렸다고.
- ↑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일반 국가주석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실세이다.
- ↑ 하지만 가만히 있는 티베트를 침략했다. 마오도 말과 행동의 일치가 되는 사람은 아니다.
- ↑ 다른 번역으로는 "인민,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힘이다."
- ↑ 원문은 1946년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미국 기자는 정말 미국이 종이 호랑이로 보이냐고 하니까 "처음에는 진짜 호랑이겠지만 결국 인민들이 미 제국주의를 약화시킬것이고 궁극적으로 그들은 종이호랑이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 ↑ 린뱌오(林彪)가 소련으로 도망친다는 보고를 듣고. 비와 과부가 된 어머니의 시집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 김태호(1962) 총리 서리가 총리 인준을 포기하면서 남긴 글이기도 하다. 뒷이야기를 말하자면 소련으로 도망가던 린뱌오의 비행기는 몽골 상공에서 폭발했다. 우연한 일인지 아니면 계획된 것이었는지는 추측만이 무성하다.
- ↑ 온갖 꽃이 함께 피고 온갖 새가 울어재낀다=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 ↑ 위에서 봤듯이 '백화제방, 백가쟁명' 선언 이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에 돌입했다. 물론 마오쩌둥 자체가 당시의 지식인층들의 불만을 과소평가하고 여유 있게 사상의 자유정책을 취했다가 호되게 데인 감도 있지만. 여하간 계획대로든 아니든 당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낚시 그 자체였을 것이다.
- ↑ 클라우제비츠도 비슷한 말을 했다.
- ↑ 사기(역사책) 태사공자서에서 가져온 말로 항일전쟁 도중 숯을 굽다가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편을 굽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 ↑ 페루의 마오이즘 반군조직 '빛나는 길'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
- ↑ 주류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주류 학계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면 세계적 보편성을 확인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