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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을 쌓아준 쌍방울 감독 시절 | 최고 전성기였던 SK 감독 시절 | 그동안의 명성을 완전히 무너뜨렸으며 대다수 야구팬의 분노, 경멸을 한몸에 받는 한화 감독 시절 |
OB 베어스 역대 감독 | |||||||
김영덕 (1982~1983) | → | 김성근 (1984~1988) | → | 이광환 (1989~1990) |
태평양 돌핀스 역대 감독 | |||||||
강태정[1] (1987~1988) | → | 김성근 (1989~1990) | → | 박영길 (1991) |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 |||||||
정동진 (1989~1990) | → | 김성근 (1991~1992) | → | 우용득 (1993~1995) |
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감독 | |||||||
한동화 (1994~1995) | → | 김성근[2] (1996~1999) | → | 김준환 (1999) |
LG 트윈스 역대 감독 | |||||||
이광은[3] (2000~2001) | → | 김성근[4] (2002) | → | 이광환 (2003) |
SK 와이번스 역대 감독 | |||||||
조범현 (2003~2006) | → | 김성근[5] (2007~2011) | → | 이만수 (2012~2014) |
고양 원더스 역대 감독 | |||||||||||
(신설) | → | 김성근 (2012~2014) | → | 팀 해체 |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 |||||||
김응용 (2013~2014) | → | 김성근 (2015~) | → |
한화 이글스 No.38 | |
김성근(金星根 / Sung-keun Kim) | |
생년월일 | 1942년 12월 13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일본 교토 부 |
본적지 | 경상남도 진주시(구 진양군)[6] |
가족 | 아들 김정준, 2명의 딸 |
종교 | 무종교[7] |
학력 | 교토 시조중 - 가쓰라고 - 동아대학교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소속팀 | 교통부 (1961) 기업은행 (1962~1969) |
지도자 | 마산상업고등학교 감독 (1969~1970) 중소기업은행 투수코치 (1970) 중소기업은행 감독 (1971~1975) 충암고등학교 감독 (1976~1979) 신일고등학교 감독 (1979~1981) OB 베어스 1군 투수코치 (1982~1983) OB 베어스 감독 (1984~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9~1990)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1~1992)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4~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6~1999)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1) LG 트윈스 감독 (2001~2002)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 (2006) SK 와이번스 감독 (2007~2011) 고양 원더스 감독 (2012~2014) 한화 이글스 감독 (2015~) |
응원가 | 라나 에 로스포 '사랑해'[8] [9] |
보유 기록 | |||||
한국시리즈 최초 퇴장 감독 | 2009 한국시리즈 5차전 | ||||
2007년, 2008년, 2010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
목차
1 개요
'김성근 야구'는 몰인간적이고 폭압적이다. 그리고 비민주적이다. 자율화와 인간 중심이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부정했다. … 그는 한국 야구를 황폐화시켰고, 리그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독단적이고 획일적이고 강압적이다.한국 야구에 더 이상의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된다.
[김대호의 야구생각 '김성근 야구'의 실패가 주는 교훈][10]
SK 감독 시절 세번의 우승으로 SK왕조를 세우며 한때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고 역사에 다시 없을 팬덤을 가진 감독이었으나, 감독 커리어 내내 비매너 플레이로 비난받았으며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선수들을 혹사시키고 팀의 미래를 앗아가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인물로, 지금은 성적조차 제대로 못내는 구시대의 퇴물이자 사상 최악의 야구 감독으로 평가되고 있다.[11]
KIA[12], 롯데, 넥센[13], NC, KT를 제외한 모든 구단의 지도자를 경험하였으며 2016년 현재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다.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부터 불펜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구사했고 이는 2000년대 후반 SK 감독시절 이른바 '벌떼야구'로 불리기도 했다. 감독 커리어 전반기에는 태평양, 쌍방울을 맡아 특유의 쥐어짜기식 혹사 운영으로 하위권이었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여 하위권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데 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OB, 삼성 등 강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다. 특히 쌍방울 시절은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하위권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팬들에 의해 '김성근의 쌍방울 신화'로 포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울이 무척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쌍방울이 선수 연봉 총액 1위 구단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도 했다. 재임 기간 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선수들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그가 퇴임한 후 예외없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2002년 LG가 포스트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을 거치는 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탈락했기[14] 때문에 단기전에 약한 감독,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투수 운영 방식과 단기전 승부사 기질을 가진 명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SK 시절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이면의 모든 부정적인 면들이 가려진채, '야신'이라고 불리며 야구계 안팎에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업과 대학을 비롯해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초청받아 리더십과 성공론, 인생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매너 플레이, 꼼수, 편법, 심리적 도발을 동원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야구[15], 팀을 철저하게 쥐어짜서 거덜내는 운영 스타일,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투수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자기합리화식 야구철학으로 인한 선수들의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의 언행으로 끊임없이 상대팀을 도발하고 흔들기, 프런트의 권한을 전부 가져가 자기 양껏 운용하면서도 항상 프런트와 마찰을 빚는 독선적이고 모난 성격, 심한 뒤끝으로 팀을 떠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팀을 극렬히 비난하는 행태 등으로 야구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항상 고집스러운 특유의 성격때문에, 전권을 요구해서 프런트와의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 구단에 못 머물고,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감독생활을 했다. 이후 21세기에서도. 2015년 현재 LG 트윈스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고, SK 와이번스에서도 3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이끌었으나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인해 2011 시즌 중에 쫓겨났다.
이런 갈등중에도 계속된 언플로 그는 항상 프런트라는 기득권에게 쫒겨나는 강직한 야구인으로 포장 되었고 혹사로 망가진 선수들과 끊임없이 밖에서 맹비난하는 김성근 감독 때문에 혹사당한 선수들과 리빌딩이 필요한 팀, 망가진 캐미스트리를 안고 가는 후임 감독만[16] 어려운 시즌을 풀어가게 되고 "거봐라 역시 김성근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플을 했다. 그러나 3회 우승이란 성적과 언론 플레이로 김성근에 대한 여론은 무척 호의적이었기에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쳐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직을 맡게 되었으나 부임 첫해인 2015 시즌에 그의 운영이 가진 단점인 구시대적 훈련 이론과 혹사가 한꺼번에 폭발하고 그의 가려운 민낯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2016년 현재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간 묻혀있던 구설수와 실책이 속속 발굴되고 그로 인해 저평가되어있던 지도자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2 학창 시절 및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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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고교 시절. 우측이 김성근. |
김성근은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야구 명문고들은 사립이었는데, 자신은 돈이 없어서 공립인 가쓰라고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력이 뛰어나면 형편에 관계없이 명문고에 스카웃되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했을 정도로 안습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가쓰라고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근 역시 고교 야구에서 야구 인생이 끝날 운명인 듯 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겼으니...
고교 졸업반 시절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었다. 당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야구 비명문고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야구 명문고 학생들은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선발에서 제외했다. 또한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인근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이 많이 포함되었다.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아대 재학 당시 김성근은 언어불통[18]에 기인한 부적응 등으로 1학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다. 김성근은 이때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분야는 재일교포가 거의 차별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많은 재일교포들이 그런 이유로 스포츠 분야에 진출하여 성공했기 때문에 김성근의 해명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19]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 실업팀에 취업하는데 성공했다. 훈련 환경은 열악하여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다.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다.
이처럼 김성근이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선수조차 갖춰어지지 않은 동아리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에서 야구를 배운 것이 거의 전부다. 고교 졸업 후에는 일본에서 대학진학이나 프로진출은 꿈도 못꿔보고, 한국 동아대에서 약 1년을 배웠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 며칠동안 참가한 후, 사회인야구팀 교토 상호차량에서 고작 몇 주 뛴 것이 일본에서 그의 야구 생활의 전부였다.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팀 교통부에 입단하게 되면서 한국 실업야구리그에서 본격적인 야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으로 팀을 옮겼다.
김성근의 커리어하이는 1964년으로 그해 페넌트레이스(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20]에 올랐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그러나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와[21]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22]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송구에 약점을 보여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다만 김성근 본인은 경기 전날까지 폭음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선수생활을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뭐 그때 당시 폭음등 몸관리 제데로 못하는 선수들이 절대다수였던 시대인지라...
1961년에는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이것의 그의 유일한 국가대표 경력이다. 1963년 일본대표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던 제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
현역시절 좌완 정통파 투수였다. 김성근 감독팬들에 따르면 완벽한 투구폼을 지닌 투수였다고 하는데,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3]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24]
김성근은 1964년 12월 일본으로부터 더이상 관광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거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가족과는 생이별을 하기로 결심했다.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를 모두 떠나 홀로 대한민국에 영구귀국할 때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그러나 불과 한달 후인 1965년 1월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족과 만나는데 전혀 문제가 없게 되었다. 다른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했다. 사실 이미 1964년에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되었기 때문에 김성근이 12월말에 영구귀국하면서 가족과 생이별했느니 하는 것은 거의 허풍에 가깝다.
3 지도자 생활
4 야인(野人) 김성근
4.1 아웃사이더 김성근?
2000년대 이전까지는 완벽한 아웃사이더 이미지였고 SK 감독시절까지도 야구계 주류와 거리가 있다는 인식이 강했다. 재일교포 2세로 별다른 연줄 없이 실력 하나로 팀을 올려놓으면 토사구팽당하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팀에서 또다시 기적을 만들어내며 재기하는 승부사. 이게 SK시절까지 따라다녔던 이미지였다.
그러나 김성근에게 이런 이미지는 의심스러울 뿐이다. 프로 1군 감독만 살펴봐도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다. 아마지도자, 2군 감독, 코치, 독립구단 합치면, 3년이상 현장을 떠났을 때가 없었다. 프로야구 태동기부터 201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감독직을 역임했다. 이중 소위 배고팠던 구단은 태평양과 쌍방울뿐이고, 나머지는 죄다 대기업 구단이다. 30년이나 대기업 구단 여러 곳을 다닐 만큼, 커리어가 화려한 사람은 절대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정말 실력은 있으나 뒷배 없는 사람이 찍히면 어떻게 되는지는 장호연이 잘 보여준다. 야구판은 배경 없는 사람이 (자기들 보기에)실력믿고 나댄다 싶으면 진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이다. 더구나 김성근처럼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던 사람이 아웃사이더였으면, 야구판은 진작에 아웃사이더 천지였다.
흔히 그의 출신을 들어 그가 설움을 당했고 주류가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한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이후 그를 끝없이 따라다니던 단어는 반쪽바리로,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들었고, 한국말이 어눌하다는 이유와 이런저런 차별로 인해 체육계에서 배척받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일감정이 강하고 냉전이란 극한 대립속에 재일교포가 군사정권때 반쪽바리, 간첩질이니 하는 국가반역자라는 인식이 있었던건 명백한 사실이다. 다큐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는 한일간의 야구격차가 크던 60년대 후반까지는 재일교포 야구인들의 한국 야구 발전 기여에 대해 국가적인 환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나, 문세광 사건 등으로 재일교포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나빠지면서 차별이 심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장효조의 증언 등에서 짐작해 볼때, 고교야구에서 재일교포 야구단에 대한 편파 판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는 점도 분명 볼 수 있다. 관련기사. 그러나 야구계가 재일교포를 차별만 한 것은 아니다.
김영덕, 송재박, 김일융, 장명부 모두가 재일교포 출신으로 한국야구 무대에서 뛰었지만 실력만 있으면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오히려 실력이 떨어지는 재일교포들이 선진야구를 습득했다는 이유 하나로 국내선수들을 제치고 주전을 꿰차는 경우도 있었으니, 우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게 될때도 재일교포인 장훈선생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 졌으며, 일본에서 기회를 받지 못하던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그리고 야구단 구축 당시 프런트에 일본통도 많았기에 재일동포라 선수단 내에서 차별만 당했다는 것은 억측에 가깝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건희사장이 일본통 이었으며, OB 베어스의 경우 박용곤 구단주가 일본통 이었다. 또한 기업인이자 한국야구계 행정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최인철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코시엔을 밟아본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56년부터 있었던 재일교포 야구단들과의 친선경기에선 재일교포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장비를 낙후된 장비를 쓰던 한국선수들에게 주고 오던 실정이었다. 현장이나 윗선이나 다 이러니 야구계는 전반적으로 재일동포에 대해 우호적이다. 까놓고 말해 안그랬으면 지도자 경력도 없이 프런트 경험만 가졌던 사람이 수도권 구단 감독자리를 꿰찰 수 있었겠는가?
일본 출신에 대한 팬들의 여론이 마냥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롯데에서 감독대행으로 있었던 도위창은 코칭스탭으로 재직 중 시즌 중에 감독이 경질당하자 감독대행으로 감독직을 수행해 호성적을 거두었지만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팬들의 비난을 받아 정식 감독계약에는 실패했다.
김성근이 배수찬(재일교포출신 야구인, 60년대 국가대표)과 함께 공안기관에 불려간 일도 있다곤 하니출처 문세광 사건[25] 등으로 재일교포들을 잠재적 간첩 정도로 보던 편견에 어느 정도 시달리긴 했을 것이다. 이때 한이 너무 많이 남아서 지금까지도 일종의 피해의식에 시달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야구 탄생 이후 김성근의 계속 되는 경질 사유를 보면, 두산(OB) 시절에는 프런트 무시하고 그룹 고위층과 독단적으로 운영하다 척을 지고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는다. 태평양 시절에는 애먼 임호균을 화살받이로 사용해 스스로 나갈 명분을 만들었고 삼성에서는 선수단과 반목하고 비밀번호 556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고 잘렸다. 쌍방울은 모기업이 부도나서 없어졌고 SK에선 팀이 내부적으로 곪아가는 가운데 프런트와 갈등이 최고조인 상황에서 선수쳐서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프런트와 이만수, 선수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선사했다. 프로야구 탄생 이후 김성근이 도위창처럼 일본 출신이라 불이익 받은적은 없다. LG 시절을 제외하면 물러난데 본인 지분이 적지 않으며 LG도 그가 일본 출신이라 잘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또 다른 경질 사유는 독고다이스러운 성격을 든다. 시청자들이 알지 못하는 규정 등에 대해 현장에서 항의하며 시간을 지체하는 모습이 자주 비쳤고[26]거침없는 독설들이 시시때때로 기사로 나오곤 했다. 더하여 늘 뚱한 표정으로 더그아웃에 앉아있는 모습에 어눌한 말투가 최소한 쌍방울 시절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보이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야구판에 자기 편 하나 없는 고집스러운 '야저씨'와 같은 이미지 였다는 것 이다.
이건 인터넷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던 쌍방울이나 시절이나 프로야구 전체의 암흑기였던 LG 시절에나 맞는 말이다. 자신을 철학을 4년간이나 밀어준 프런트가 있었고 중위권 전력에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SK에서 그는 4년간 눈부신 성적을 냈고 인터넷 팬덤과 언론의 발전을 등에 업고 그의 업적은 상당 부분 윤색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게다가 김성근 본인도 김성근의 말은 김성근의 말로 반박가능하다 할 정도로 많은 양의 언론플레이를 쏟아내고 자서전 출간, 강연등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 다큐멘터리 파울볼을 보면 언론 지원도 엄청나게 받았다. 2천년대 초반 야구계, 언론계와 적을 많이 만들고 본인도 언론플레이나 이미지메이킹에 관심이 없었다는걸 생각하면 김성근 안티들조차 의아할지경.
김성근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른 고양 원더스 시절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보도 마데이의 비극, 외인은 소모품이 아니다가 김성근의 혹사 야구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진 2015년 9월에서야 기사화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도 크다.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로 프로야구계에 다시 복귀한 2015, 2016년 KBO의 주요 감독과 심판들이 거의 다 본인의 제자 혹은 제자의 제자세대이고 구단주로부터 프런트의 권한으로 인식되던 선수 선발 등 전무후무하게 팀운영의 전권을 부여받은데다 비판의식없이 옹호하는 일부 기자, 칼럼니스트들과 커뮤니티, 댓글 등의 여론을 조작할 정도로 노리타란 멸칭으로 불릴 정도로 광적인 팬들을 거느린 2010년대 기준으로는 프로야구계의 갑 of 갑 이라고 볼 수도 있다.
SK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로도 하향평준화나 삼성 우승폄하 발언으로 이만수, 류중일등을 비난하며 야구계 어른 행세를 했다. 당사자들 포함, 일선 지도자들은 별 말을 못했다.[27]
이제는 2016년 4월 23일 친 김성근 기자로 유명한 박동희마저도 자신이 작성한 기사 '시대의 요구, 김성근 야구의 종언' 에서, 김성근을 야구계의 주류중 주류라고 표현했다.[28]
4.2 능숙한 처세술
4.2.1 구단 프런트와의 불화
여러 팀을 거치는 동안 항상 구단 프런트와 불화가 있었다. 구단 프런트에게 항상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것이 조금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프런트와 갈등을 벌였다. 구단에서 현장 감독과 프런트가 각각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등학교 야구부마냥 모든 것을 다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길 원했다. 한화 감독을 맡으면서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김성근이 말하는 전권부여는 야구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감독 영역을 간섭말라는 수준을 넘어서서, 감독이 뭘하던 프런트가 지지해줘야 하는 방식이다.
신임 감독 시절인 OB 베어스 감독 시절부터 김성근은 프런트와 엄청 싸웠다. 단 그룹 총수 일가 출신인 박용민 단장 겸 사장에게는 전혀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고 항상 그 밑선과 갈등을 벌였다고 한다.
태평양 돌핀스 시절부터는 단장, 사장급과 직접 싸웠다. 태평양 시절에도 첫해부터 프런트와 갈등을 일으켰고 급기야 두번째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에 신동관 사장에게 각서를 작성하여 파문을 일으키는 등(임호균 각서 파동) 고의로 프런트 갈등을 일으키다가 경질되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는 첫 시즌이 끝나고 성적을 내지 못한 김성근이 경질될 것이라고 언론들이 예측했지만 의외로 삼성은 김성근을 유임시켜 언론과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사실 삼성이 김성근을 영입한 것은 그룹 총수의 의중[29]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때문에 삼성 프런트도 한 시즌만에 김성근을 함부로 자르지는 못한 듯 하다. 그러나 삼성 시절에도 구단의 전통적인 야구관과 차이로 많은 갈등을 벌였는데, 메이저리그 야구를 표방하며 80년대 중반부터 미국 LA 다저스 캠프로 전지훈련을 가서 합동훈련을 하던 삼성의 훈련 스타일에 반기를 들고 삼성의 미국 스프링캠프 일정을 축소하자고 주장하는 등 프런트와 갈등을 벌였다. 수비 시스템 등으로 삼성의 코치 및 선수들이 김성근에 반발한 것도 유명하다.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는 한때 페이롤 1위를 찍을 정도로 구단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줬지만, IMF 이후 모기업이 어려움을 겪자 김성근은 모기업이 지원 안해준다면서 구단과 갈등을 벌였고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그리고 팀도 모기업 사정 어려운데도 페이롤 1위 찍어서 그런가 그 후유증으로 결국 해체크리
LG 트윈스 시절 감독 2년차인 2002년 페넌트레이스를 4위로 마친 후 포스트시즌에서 선전으로 준우승까지 거두었지만 프런트와 사사건건 불화를 일으켜 결국 경질되고 만다.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구단 사장인 신영철의 막걸리 야구 드립은 이러한 불화를 내포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SK 시절에는 이러한 상황은 고려않고 '월급 받아먹으면서 언론플레이도 못하고 언론으로부터 감독을 보호해 주지도 못 하는 능력 제로의 프런트라며 지탄하는 팬들이 다수였다.
언플과 팬들의 쉴드를 등에 업고 그가 팀에 끼친 악영향은 엄청났다. SK 경질 이후 그를 영입한 고양 원더스 프런트에서는 최대한 김성근의 요구에 맞춰 선수단 구성, 육성 전권을 부여하고 코칭스태프들을 김성근 사단으로 구성하면서 김성근을 지원했다. 그러나 고양 원더스는 김성근과 그 코치들, 김성근이 하루걸러 투입시킨 외국인 선수들 연봉 지불하다 해체되었다. 한화도 고액 FA 영입, 트레이드, 언론플레이, 외국인 선수 기용 등 무엇하나 발 맞춰주지 않는 감독 뒷바라지 하느라 15시즌 내내 고생하고 가볍게 페이롤 1위를 찍었다.
이래놓고 프런트를 대하는 태도는 평소에도 매우 좋지 않다. 김성근은 강연에서 구단 사장보다 현장 감독인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장을 무시하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심지어 태평양 감독 시절에는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 고의로 임호균 각서 파동 등을 일으켜 구단과 트러블을 일으켜 경질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1991년~2012년 사이 22년간 KBO에 8구단 체제가 확립되었고, 김성근은 이 가운데 8구단의 전신이 되는 팀까지 포함하여 7구단에 몸을 담았다. OB 베어스에서 시작하여, 삼청태현의 셋째인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해태 타이거즈(2군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와 그 선수단을 물려받아 재 창단한 SK 와이번스, LG 트윈스, 그리고 2015년 현임중인 한화 이글스까지, 1982년에 KBO리그가 창설된 이래 김성근은 지도자로서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데, 유일하게 제외된 구단이 롯데 자이언츠이다. 상술한 전력을 읽어봤다면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김성근이 프로팀 감독으로 부임할때마다 단서로 다는 전권부여에 대해 10개 구단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프런트가 롯데 프런트이기 때문이다. 유능하고 무능하고를 떠나서 감독에게 전권부여는 절대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독의 영역까지 침범하다가 망하는 일[30]이 잦았던지라 김성근과는 상극중의 상극이다.
4.2.2 총수들에게 깍듯한 태도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김성근은 평생 구단주인 대기업 총수에게 무척 깍듯했다. 공개적으로 구단주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성근이 불화를 일으키며 권력 투쟁을 했던 대상은, 어디까지나 중간관리자인 프런트였다. 김성근이 프런트와 극한의 대립을 일으켰을 때도 최고위층인 구단주를 언제나 두둔했다. 프런트에서는 '김성근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구단주와 직접 독대를 해서 일을 해결하려 한다'고 불만이 많았다. 김성근은 경질된 후 항상 자신이 몸담았던 팀의 프런트를 맹렬하게 비난했는데, 동시에 구단주들에 대해서는 훌륭하신 분들이라면서 고마움을 드러냈다. 현장과 감독들에 대해 온갖 쓴소리를 늘어놓던 원더스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최태원 회장이라든지 SK그룹에는 유감이 없어. 오히려 나를 키워준 거 고맙게 생각해. SK가 나를 다시 불러줬다는 자체가 그래. (…) 나는 어느 구단 가서도 오너는 참 좋은 분들 만났다고. (최태원 회장이랑 LG 계실 때 구본무 회장 말씀하시는 건가요? 또 지금 허민 대표랑…) 음. 그렇지. 두산 때 박용곤 회장님도 그랬고. 참 좋은 분들이었다고. 소탈하고. 야구 좋아하시고. SK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사장들이 문제다. 사장, 단장. 그들이 중간에서 장난한다고. 이거 문제야.
김은식과의 인터뷰 중
흔히 사람들은 김성근이 외곬이라서 11회나 감독 자리를 잃은 줄 알지만, 11회나 재취업한 까닭은 있다. 김성근은 과거나 지금이나 프런트가 꺼려하는 감독이지만, 삼성·한화 등에서 감독이 될 때 프런트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룹 총수의 지시로 그의 영입이 이루어진 바 있다. 김성근은 감독의 지위와 자존심 때문에 구단 사장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지론까지 펼치며, 감독으로 취임하자마자 스스로 프런트와 마찰을 일으켰지만, 그룹 총수 일가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했던 OB 감독 시절 김성근은 그룹 총수 일가의 총애로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장기집권했다. 박용곤은 그룹 중역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성근을 일컬어 '성근이'라고 부르며 "내가 가라고 하기 전에는 가서는 안 된다"하면서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준 바 있었다. 이에 그룹 총수 일가인 박용민 구단 대표이사·단장은 김성근이 몰수게임 파동 등 곤경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서 김성근을 보호해줬고, 덕분에 김성근은 사퇴 위기를 모면한 바 있었다. 구단 단장·사장들과 무수한 갈등을 일으켰던 김성근이었지만, OB 감독 시절에는 총수 일가 출신인 박용민과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대신 구단에 불만이 생기면 밑에 사람들하고 많이 싸웠다고. 그러나 OB 만년에 박용민이 김성근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둬들이고 김성근과 상의 없이 이광환, 김우열을 영입하는 등 대놓고 김성근을 압박해서 결국 김성근은 OB 감독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김성근은 이미지 관리력과 처세술에 능숙한 남자다. 원더스에서 보여준 처신들을 생각해보라. 그는 구단주를 완전히 매혹시켰고 끊임없이 언론에 자신을 노출시켰으며 선수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참스승, 그리고 정치 같은 거 모르는 야구바보의[31] 모습으로 자신을 미화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외국인 투수들을 인간 이하로 갈아가며 자신의 재취업 용도 이외엔 어떤 의미도 찾기 힘든 독립야구단의 2군 리그 성적을 철저하게 관리해왔다. 결국 구단주가 수십억의 손해를 보며 운영하고 유지한 원더스의 의의는 김성근의 화려한 컴백을 위한 토대로 전락했다.[32]
5 야구관
2015년 9월 투수진의 혹사 논란에 대해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성근 감독은 혹사가 아니라는 인터뷰를 했다. 2015년 9월 5일 네이버-중앙일보 [사람 속으로 ‘야신’ 김성근 한화 감독-상대가 질릴 만큼, 지더라도 끝까지 싸워야 다음엔 이긴다] 김성근의 저런 신념은 현재 한화 이글스 팀이 처한 상황과 대다수의 여론을 볼 때 비현실적이고, 납득하기 힘든 관점일 수 있다. 다른 팀의 지도자들과 선수, 그리고 구단 자체까지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있지만, 자신의 시계는 멈춘 채로 변화를 거부하며, 역량 역시 발전되는 것을 포기하는 자충수 같은 신념이자 자기 자신을 반박하는 모순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을 '야구는 감독이 한다'로 정의하고 이는 전형적인 동양식 야구관이라 하며 그 문제점을 분석한 기사도 나왔다. 2015년 9월 11일 오마이뉴스 '뒤로 가는 한화, 야신만 모르는 이유'
역시 2015년 9월 MBC 경제매거진M에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화면 9분경)가 나오는데 아직도 세간의 혹사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로 이 보도는 올 한화 이글스의 경제 효과[33] 및 김성근 리더십의 명과 암 등을 다룬 것이다. 2015년 9월 19일 MBC 경제매거진M '프로야구! '만년 꼴찌' 한화의 흥행 대박'
아직도 변하지 않는 김성근 감독의 야구관 및 이에 따른 한화 선수들의 불만을 나타낸 기사도 나왔다. 2015년 9월 22일 네이버-스포츠조선 '숱한 경고 흘려들은 한화야구, 더 참담하다'
시사인이 2015년 10월 16일에 3회에 걸친 김성근 감독 야구관을 비롯한 2015년 총정리 기사를 냈다. 시사인 원사이트가 네이버 링크보다 로딩 시간이 더 걸리지만 도표 등을 확대해서 볼 수 있다.
2015년 10월 16일 시사인 '팬들한테 외면 받은 김성근의 개입주의' 네이버 편집
2015년 10월 16일 시사인 '마리한화 김성근이 빠진 6가지 착각' 네이버 편집
2015년 10월 16일 시사인 '2016년 김성근, 몰락인가 반전인가' 네이버 편집
샤브샤브뉴스가 2015년 10월 5일과 10월 7일에 역시 김성근 감독 야구관 및 그에 따른 문제점 분석 기사를 올렸다. 10월 12일에는 팬심에 관한 내용도 실었다.
2015년 10월 5일 샤브샤브뉴스 "한화 김성근 감독의 '살려조'는 한국의 오래된 미래"
2015년 10월 7일 샤브샤브뉴스 "김성근 감독, '원 없이 돈 써봤다'던 강만수의 데자뷰"
2015년 10월 12일 샤브샤브뉴스 "우리들의 일그러진 인터넷, 김성근 열성팬은 거울이다"
6 각종 논란 및 구설
김성근/구설 문서를 참조.
7 발음/말투
김성근의 일본식 발음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이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다.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김영덕 전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34]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리다는 것이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래 김성근 본인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초부터 김성근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계속 일본어식 발음으로 한국말을 어눌하게 해왔던 것이라 보는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
1970년대 후반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다.[35]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동남 방언이 약간 남아있는 모습도 보인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마~아닌가 시포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패러디하곤 한다.
8 스타일
김성근 감독의 경기 스타일을 총정리한 기사 2015년 아주경제 (기획) 마음처럼 되지 않는 ‘김성근 야구’
8.1 철 지난 야구 이론 맹신
김성근 감독은 야구계에서 오래 활동한 원로 야구인이기 때문에 혹사와 잘못된 훈련 관행에 대한 비판은 90년대 까지의 모든 감독들에게 해당하는것이라 김성근 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이다. 그러나 야구인들이 2000년대와 2010년대 들어 선진 야구이론과 훈련법을 직접 접하면서 그동안 잘못된 야구 이론들에 대해 수정과 반성이 있는 반면 김성근은 LG 감독 경질 이후 일본에 직접 유학하여 발렌타인 감독에게 많이 배웠다곤 하는데 대체 뭘 배우고 왔는지 감이 안잡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웨이트 트레이닝 경시이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지양하는 것이다. 과거 일본에선 투수는 웨이트트레이닝에 극히 부정적 이었는데 쓸데 없는 근육이 붙으면 투구 밸런스가 망가진다.는 속설 때문 이었다. 작년 기사에선 유희관 빼면 배 나온 투수중에 잘 던지는 투수가 없다며 류현진이도 그렇고.... "투수는 배가 나오면 끝이다. 공을 던질 때 허리가 안 넘어와서 팔이 벌어지게 되어있다" 라며 뚱뚱한 메이저투수들을 직접본 전문가나 일반팬들을 갸웃하게 만드는 특유의 이론을 주장했다. 몸집이 넉넉한 투수들은 나이가 들어 무릎이 문제되는 경우는 잦아도 단순히 배 때문에 허리가 안넘어 간다고 한건데, 멀쩡히 공을 잘 던지는 투수들은 특유의 이론과 달리 왜 잘던지는지는 설명을 못 한다. 이런 특유 이론 고집 때문에 새로보는 투수마다 투구폼 수정을 시키는게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타자들의 웨이트 트레이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다. 2008년 이승엽에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자제할 것을 권유하는 인터뷰에 의하면 완벽하지 않은 몸상태로 무리하다가 더 큰 부상이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자제할 것을 권유했다. 또한 근육이 커지면 아무래도 그동안 쌓아왔던 스윙 궤적이나 중심이동, 허리회전 속도 등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웨이트트레이닝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해 체력과 파워를 올리는 것만 하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종합적인 밸런스지 파워 하나에만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늘 말해왔다. 작년 고치 캠프에선 지옥 펑고와 수비훈련 덕분에 웨이트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훈련법은 살려조와 시즌중 원정경기 특타와 야간훈련과 더불어 후반기 한화 이글스 성적이 급전직하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물론 2016년에는 말해왔듯이 웨이트조를 짜서 운영했다.
트레이드한 양훈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190이 넘는 장신에 110킬로의 거구의 양훈에게 20킬로가 넘는 다이어트를 지시하고 투구폼을 개조시켜 투구밸런스를 무너뜨리고 직구구속이 120킬로대로 망가지자 트레이드 해버리지만 넥센에 가서 한화에서와 달리 밸런스에 대해 편안하게 던지라 하고 몸무게를 일부 회복하자 구속이 살아나는 신기한일을 겪기도 했다. 비록 2016년의 성적은 그 전해에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문제는 김성근 감독이 배워왔다는 일본의 훈련 기법은 일본에서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일본서도 현재는 투수의 웨이트트레이닝을 더 이상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특히나 노장선수의 경우는 근력 유지와 부상 방지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야구와 스포츠의학의 본고장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다르빗슈 유가 메이저리그 와서 웨이트를 경험하고 했던 말이 "이 좋은 걸 왜 여태 안 했을까." 라며, 후회했을 정도. 또한, 오오타니 쇼헤이는 웨이트와 함께 먹는 양도 늘렸고, 구속을 더 증가(!!!)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을 정도.
8.2 투수 혹사
불펜 투수들을 가능한 한 많이 돌려가며 상대팀 타자들을 막는 스타일의 벌떼야구라고 쓰고 혹사라 읽는다로 유명하다. 김성근 본인은 정말 불펜야구를 선호해서라기보다는 제대로 긴 이닝을 소화하는 선발투수가 없고 구위 좋은 중계투수도 부족했던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삼성에서도 스몰볼을 했다. 종목을 불문하고 감독의 고유한 성향은 한번 굳어지면 변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보다 정교해질 순 있어도 스타일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종목은 다르지만 무리뉴가 팀 바뀌었다고 공격축구하던가? 펩 과르디올라가 팀 바뀌었다고 티키타카 버리던가? 단점을 보완해 갈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리뉴 휘하 첼시가 골 많이 넣었다고 공격축구 한다고 하는 사람있던가? 펩 휘하 뮌헨이 수비 탄탄히 했다고 수비축구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나? 야구라고 다르지 않다. 유능하고 무능하고를 떠나서 인간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생물이 아니다.
SBS에서 방영한 야구 프로그램인 야구본색에 따르면 그의 스몰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구질이 유리하고 어떤 투수가 그 구질을 잘 구사하는가를 철저하게 계산한 결과물이라고. SK의 예를 들면 처음 부임했을 당시 이승호와 채병용은 거듭된 혹사로 몸이 망가져 있었고 신승현, 엄정욱, 윤길현 등 젊은 투수들도 전임 조범현 감독의 관리 소홀로 구위를 상실한 상태였다. 반례로 태평양 돌핀스 시절에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3명의 선발투수를 확실한 주축으로 삼았으며 타자가 벌떼였다. 또한 2009년 SK 와이번스의 경기당 투입한 투수 수는 3.9명으로 8개팀 중 6위였고[36] 2010년에는 8개팀 중 7위였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성향은 선발이 길게 못 가더라도 불펜 투수 한사람 한사람의 이닝소화율을 높여 투수진 전체의 부담을 더는 것이었다. 잦은 등판과 불펜 투구 자체가 팔에 부담을 주는 만큼 혹사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최소한 한화에서처럼 투수를 쏟아붓는 운용은 아니였다. 허나 2009년과 2010년의 SK 와이번스의 선발진은 매우 풍족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2009년에는 송은범-카도쿠라-김광현-고효준-글로버로 방어율 1.97의 외국인투수가 5선발을 맡을 만큼 선발 자원이 풍부했고, 2010년에는 다승왕 김광현, 커리어 하이의 송은범, 카도쿠라, 글로버로 이어지는 막강한 선발진이었다. 그럼에도 2009년의 전병두는 11번의 선발 등판과 불펜 등판을 합쳐서 글로버의 105.2이닝보다 많은 133.2이닝을 던졌고, 2010년의 고효준은 10번의 선발 등판을 합쳐서 106이닝을 던졌다.
단순한 불펜 교체가 아닌 체계적인 관리를 더했는데, SK와이번스 재임시절 당시 더그아웃에서 김성근 감독의 가까운 자리에는 경기 내용을 기록하는 구단 기록원 안교훈씨가 함께 했는데 기본 임무는 경기 내용 기록과 야구규약의 확인, 투수교체와 관계 있는 타임의 횟수, 그리고 투구수의 확인이며, 투구수는 감독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표시되었다. 벽에 붙어 있는 양 팀 라인업 카드에 투수들의 최근 3경기 투구수가 색깔별로 다르게 적힌다. 2경기 전 투구수는 빨간색,직전 경기 투구수는 파란색이다.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은 감독이 투수 교체를 고려할 때 보다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경기 전 김성근 감독 자리에는 또 하나의 투구수표가 자리잡는데,투수들이 불펜에서 공을 던진 횟수와 투구수가 포함된 숫자가 경기별로 적혀 감독은 이들 숫자들을 바탕으로 마운드를 운용한다. 관련 기사
이렇게 KBO의 트렌드가 된 매우 타이트한 불펜 운용을 처음 시작했기에 혹사 논란이 무척 많은 감독이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의 김성길,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박정현,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의 박노준[37], LG 트윈스 시절의 이동현,장문석과 신윤호, SK 와이번스 시절 정우람, 전병두[38], 이승호, 고효준, 채병용 등등. 80~90년대 일본식 단련법[39]을 신봉하며 100년 역사의 MLB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확립된 투수 로테이션과 휴식일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본인의 부임시기에는 혹사로 부상당하지 않도록 나름 투수를 관리하는 노하우가 있다고 하지만 길지 않은 재임기간이 끝난 후에는 망가지는 투수도 많다.
김성근의 팬들은 그의 부임하는 동안 시즌아웃당하는 투수가 거의 없어 혹사가 아니라 주장하지만 실제로 김성길이나 전병두처럼 부임중에 망가진 투수도 많았으며 투수의 어깨는 쓸수록 소모된다는 초크 이론과 100년 이상 역사의 메이저리그에서 취하는 운영방식을 봤을 때 김성근의 불펜 운용은 충분히 혹사로 볼 수 있다. 또 혹사 후의 관리 노하우가 뛰어나다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 김성근이 맡았던 팀의 성적을 보면 SK 시절 딱 한번을 제외하고 그가 있던 모든 팀에서 첫해가 가장 성적이 좋고 둘째 해 셋째 해가 될수록 점점 성적이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데[40]이는 혹사와 무관하다고 볼 수가 없다. 선동렬과 마찬가지로 투수를 관리할 때 연습투구를 많이 시키는 편인데 견뎌내면 괜찮지만 못견디면 애먼 투수하나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한화에 오면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보직이 따로 없다. 선발로 등판했던 대부분의 선수들이 임시로라도 불펜 등판을 한 적이 있으며, 불펜을 뛰던 선수들이 땜빵 선발로 뛰기도 한다. 팀의 상황에 따라 투수의 보직이 일시적으로 바뀌는 것은 타팀에서도 일어나지만 김성근 감독의 한화는 유난히 이러한 현상이 심하다. 라루사리즘이 현대 야구의 대세가 된 건 이유가 있다. 선발 투수와 불펜 투수의 보직을 시즌 전 몸을 만들 때부터 미리 알려 투수가 자신의 보직에 맡게 몸을 만들게 하고, 시즌 중에는 투수의 보직을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아 몸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어느덧 당연시 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보직 파괴 역시 혹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다.
김성근 감독 본인이 비인간적이라 표현할 단계를 훌쩍 벗어난 잔인한 선수 혹사가 일반적이었던 시절 사람이라서 그런지 선수들을 빡세게 굴리는 데 별 문제점을 못 느낀다는 얘기도 된다. 특히 한화 이글스 부임 후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살려조로 대표되는 불펜 혹사와 2015년 하반기 시즌 선발, 불펜 투수의 보직 파괴와 투수들의 출장 후 일반적인 휴식일도 지켜주지 않는 변칙적인 투수 로테이션 운용을 하여 투수들의 부상 및 구위 저하에 DTD급 성적 급하락으로 김성근 감독의 경기운영 스타일이 10개구단 144경기의 장기 레이스를 펼치며 타자들의 벌크업과 타격기술 향상속도가 투수들의 구위 향상을 앞지르고 와일드카드로 인해 중위권팀들이 막판까지 이전투구하는 현 상황에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신, 본인의 투수조련법과 관리능력으로 오히려 무명선수들이나 노망주들에게 절실함을 부여해 S급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써먹을 만한 A급, B급 선까지 끌어올린 역사는 많다. 쌍방울로 트레이드 되고 야구 그만둘 생각을 했다가 김성근 감독 부임으로 1년만 더 노력해보자고 마음 바꾸고 이후 리그 최강 슈퍼 미들맨으로 바뀐 김현욱이나, 신나게 혹사당하고 끝나버리긴 했지만 그 혹사 이전에는 아예 멘탈이 막장이라 구단에서조차 포기했었던 신윤호가 그랬다. 하지만 고양 원더스 감독시절 외국인 선수였던 대럴 마데이의 상위리그로 올라가고자 하는 절실한 심리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한 혹사를 시켜 다음 해 부상을 당하게 한 반대 사례도 있다.관련 기사
김성근 본인은 혹사를 부인하고, 선수들도 혹사당했다고 분개하기보다는 중용해준 것을 고마워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그렇다고 혹사당한 선수가 이를 비판하고 지적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므로, 그 선수들이 감독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이를 순진하게 믿을 수만은 없다. 누구나 혹사라고 인정하는 최동원, 염종석에게 강병철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때도 이들은 감독에게 인정해줘서 고맙다는 똑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30년간 감독생활 하다보니 한가지로 정리하긴 힘들고 같은 선수에게도 전혀 다르게 대한 측면이 있는지라 이런걸로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41] 대체적으로 말하면 혹사를 많이 시키는 감독이 맞다.
공격시에는 주전경쟁을 만들기 위한 플래툰 기용을 즐겨 했고,[42] 번트를 자주 이용해 한 점씩 쌓아가는 스몰볼을 하였는데 이것도 처음 SK 감독 부임 당시 스타플레이어, 확실한 4번타자가 없고 전체적으로 타격이 약한 팀이었기 때문에 작전 야구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핑계다. 상술했듯 감독의 스타일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 김기태가 있던 쌍방울이나 이만수가 있던 삼성 호화타선을 거느리고도 작전야구 성향이었고 부임 당시의 SK 또한 수비의 약점을 무시하면 이호준, 김재현, 박재홍에 최정과 박정권이 더해져 약한 편이 아니었다.
야수들의 경우 시즌, 비시즌 구분없는 압도적인 강훈련을 실시하여 그가 맡은 팀의 수비력은 대체로 향상된다고 평가받는다. 수비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한 대표적인 사례는 정근우, 최정을 들 수 있고, 한화 이글스 또한 그가 부임한 2015 시즌 수비력은 권용관을 제외하고 이전 시즌에 비해서 향상됐다고 평가받는다.그때보다 못하기도 어렵지만
한편 선수의 정신력을 강조하는 편이라 태평양 감독 시절에는 겨울에 선수단을 이끌고 눈 덮힌 산에 올라가 얼음장을 깨고 찬물에 들어가게 하는 등 극기훈련을 실시한 적도 있다. 과거 학생들을 지도하던 시절에 썼던 방법이라고. 서로간에 감정이 있거나 친하지 않은 선수들도 흙밭에서 뒹굴며 훈련하거나 산에 올라가며 서로 손 잡아서 이끌어주는 등의 행동을 며칠 하면 자연스레 믿고 따라온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당시 선수들이 얼굴앞에 대놓고 "야 이 개새꺄", "이거 끝나면 죽여버리겠다" 욕을 했지만 그걸 들으면서도 얼굴 하나 안변했다 카더라.
지독할 만큼 노력을 중요하는 감독이라서 스타급 고참 선수나 재능을 과신하는 천재형 선수들도 본인이 보기에 게을리한다 싶으면 가차없이 라인업에서 빼버리는 등 엄하게 다루며, 결국 뒷끝이 좋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잦다.한대화 같은 케이스가 유명하다지만, 한대화는 간염 환자였기 때문에 체력문제가 있어서 김성근의 훈련량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 뿐이다. 그걸 게으르다고 까대기만 김성근이 잘못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찍힌 한대화는 김응용 감독의 요청으로 해태로 트레이드 되어 잘 관리 받아 레전드급 선수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김재현도 (지금은 평범한 사제지간이지만) 한때는 기용을 두고 마찰이 생겨 굉장히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하며, 김광현이나 최정같은 재능형 신예들에게도 굉장히 엄하게 대하는 편.
8.3 전권 행사
구단을 최대한 쥐어짜내는 스타일이다. 특히 타팀서 방출된 선수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영입에 적극적인 편. 반면 어린 선수들의 경우 본인 임기 내에 이용하기 위해 군입대를 최대한 자제시킨다. 이렇게 해서 선수단 내에 가용자원을 최대한 확보한 뒤 65인 엔트리를 최대한 활용하는 편. 당장 SK 시절만 해도 고효준, 이영욱, 조영민이 군 야구단 입단 가능 시기를 넘어서까지 남았다가 공익으로 병역을 해결했고, 모창민과 이재원도 계속해서 붙잡다가 결국 김성근 감독 동의 없이 상무에 지원하여 병역을 해결한 전적이 있다. 또한 즉전감을 확보하기 위해, 기량 발전이 더디다 싶은 유망주는 거침없이 트레이드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당장 15년에 즉전감 확보를 위해 유창식과 군필 외야수인 오준혁, 노수광을 트레이드했고 양훈도 과도한 체중 감량 후 회복이 더디자 트레이드했다. SK 시절에도 박현준의 1군 안착이 더디자 트레이드하기도 했고. 정리하자면, 팀 차원에서의 장기적인 플랜보다는 본인의 임기 내에 성적을 내기 위해 최대한 많은 자원을 갖춰놓으려는 스타일. 한화에서의 송신영, 이재우 등의 영입도 이러한 스타일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프런트에게 전권을 요구하는 스타일이다. 과거 발언
프런트는 견제만 하고,전권을 감독한테 맡기는 조직이 돼야지. 내 뜻이 그래요. 내 성격이 그러니까. 전권을 주고 3년이면 3년계약을 하고.목적 달성을 했느냐 못했느냐로 판단하면 돼요.
프런트는 감독의 요구하는 바를 무조건 수용하고, 현장은 감독이 모든 것을 총괄해서 성적을 낼 테니 이에 따르라는 방식. 예를 들자면 SK 시절, 선수가 부상을 입을 경우 타팀이 선수 치료비에 1~2천만원을 쓸 때 자신은 8~9천만원을 아낌없이 사용했다며, 그 돈을 이의 없이 지출해 준 것은 구단의 공로라고 언급한 적이 하지만 다만, 프런트의 견제, 프런트와의 파트너쉽을 철저히 거부하며 일방적인 종속을 요구하기 때문에 수없이 프런트와 갈등을 빚어왔다. 노리타들의 망상과 달리 김성근 감독이 여러 구단을 전전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프런트와 조화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독선적인 태도가 가장 크다. 당장 한화만봐도 전권을 쥐어주자 외국인 선수 선발, FA 영입, 심지어는 신인지명은 물론이고 프런트가 반대하는 선수의 트레이드까지도 거침없이 행했다.
게다가 이렇게 전권을 요구한 뒤 성과가 나오면 프런트의 공을 인정하면서 프런트의 지원 덕에 팀이 굴러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모든 공을 본인 덕으로 만들기 급급하다. 이 부분이 결국 기나긴 프런트와의 반목의 원인이다.
그는 가성비를 따지거나 구단사정 봐가며 지출하는 감독이 절대로 아니다. 그 가난한 쌍방울이 페이롤 1위를 찍게 만들었고[43]다른 대기업 구단에서도 말 그대로 엄청난 금액을 쓰면서 전권을 끌어간 뒤 프런트가 세우던 플랜을(그 플랜이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리고 실제로 장기적인 안목에서 세웠는가는 차치하고) 다 헝그러뜨리면서 전력을 짜냈다. 그럼에도 프런트에 대한 인정은 본인 세우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이에 프런트가 반발하면 본인이 비주류라 핍박받는다며 언플을 해온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김성근 감독에 대한 현장의 반감으로 이어졌고, 이는 NC가 SK 경질후 일부러 마산에 내려와 언플하던 김성근을 시원하게 무시하고 14시즌 후에 한화팬들의 선임운동으로 한화에 부임하기 전까지 프로구단 어느 곳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던 것으로 증명된다. 그나마도 한화 복귀 뒤 김성근 스타일이 어긋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은 평소처럼 오전에 감독실로 출근해 경기 구상을 한다. 최근엔 한 가지 일을 더 했다. 자신의 현재와 과거를 비판한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다. 구단 내부와 외부, 모두가 '위기'라고 우려하는 상황에서 개인 이미지 관리를 우선했다. 보도에 대한 항의는 때로 필요하지만, 구단 홍보팀이 해야 할 일을 감독이 나서서 하고 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은 언론을 매우 잘 다룬다. 당장 최민규 기자의 기사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김성근 감독이 기사를 일일이 검열하고 본인을 비판한 기자들에게 항의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SK에서 해임될 때 나온 과정, 09 WBC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 고양 원더스 시절을 보면 언론과 작가, 강연을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본인을 정당화했다. 그만큼 본인을 포장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과거 김성근 감독은 김은식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매스컴은 재벌이나 대기업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역할을 못한다고 디스한 적이 있는데, 해당자료 정작 본인 또한 기자들을 압박하는 인물인 것. 2016년 자료 라디오볼에서도 부정적인 기사에 대해 역정을 낸다는 폭로가 나올 정도로, 언론 통제에 대해서는 아주 심혈을 기울이는 스타일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동안 개인팬들과 성적이란 결과치로 합리화했던 전권 행사가 현재에는 결과치와 팬들도 떨어져 나가면서 프런트 몫까지 혼자 전권을 행사하는 방식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8.4 타자 용병 잔혹사
김성근이 외국인 선수와 불화를 일으킨거야 한두건이 아니지만 그래도 외국인 투수는 노쇠화로 결별하긴 했으나 성적 자체는 좋았던 카도쿠라 켄이나 2009년 후반기 연승행진의 주역이었던 게리 글로버 등 성공사례가 좀 있었다. 하지만 타자는 거의 대부분이 악연으로 끝났다. 투수력을 중시해 타자용병을 잘 안뽑기도 했고 특타, 펑고, 강훈련에 특유의 권위적인 성격이 골고루 버무려진 결과. 매일매일 이어지는 강훈련에 한국 선수들보다 적응이 훨씬 어렵다는 점도 부진의 원인.
댄 로마이어는 한화에서 2시즌동안 74홈런을 친 검증된 용병이였지만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퇴출된다. 당시 성적은 60경기 0.268에 11홈런 47타점으로 팀내 타점1위였다.
톰 퀸란은 KBO 역대급 공갈포로 2000년 현대 우승의 주역이었다. 뛰어난 3루수비에 2시즌간 65홈런을 친 장타력이 있었으나 점차 노쇠화가 진행되었고 선수 스스로도 은퇴를 고려하던 시점이었는데 대뜸 물어왔고 13경기 21타수 무안타로 퇴출된다. 이쪽은 그래도 김성근이 아니라 LG구단측 과실도 크다.
매니 마르티네스는 메이저리그 출신으로 2001년 삼성에서 이승엽과 마해영을 이기고 팀내 타점왕을 차지한 25홈런 28도루 호타준족이였다. 김성근과 함께하며 0.279 15홈런 69타점 22도루 무난한 성적을 기록해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로 남았다.
나이저 모건은 메이저 리그 출신이지만 지나치게 개성강한 성격때문에 시즌 개막 전부터 궁합을 놓고 걱정이 많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10경기 41타석 이후 2군에 내려간 후 허리부상을 이유로 태업을 하며, 퇴출된다. 다른 이유로는 실력 때문이라고 하는데 0.273에 출루율도 4할이었다. 특출나게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아니다. 특히 흑형들의 특성상 4월에 부진하다가 5월 이후 날이 풀림과 동시에 몸이 풀리는 흔한 경우를 생각한다면 좀더 두고 봤을 일이다. 더군다나 결과론 이지만 대체선수로 들어온 선수의 성적을 봤을 때...
제이크 폭스는 나이저 모건의 대체로 들어왔는데 KBO 스타일에 적응도 하기전에 특유의 강훈련으로 굴렸다. 아침부터 특타 30분간 156스윙을 시켰다고 한다. 부상 복귀 후 어찌어찌 적응이 되나 싶으니 어느새 시즌이 끝났다고...38경기 108타수 0.278 홈런7개 25타점 출루율 0.339를 기록했다.
윌린 로사리오는 포수와 1루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김성근은 그가 빅리그에서 3루수로 3경기 나선 것을 보고 3루수로 밀고나갈 계획이었으나 표본이 극히 적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고, 결국 1루수로 돌아왔다. 또 2016 시즌 초반 로사리오가 타격 슬럼프에 빠졌을 때 김성근의 지도 방법이 맞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다. 타격시 왼 디딤 발의 위치와 활용법을 놓고 드러나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는 것. 겉으로 쉽게 보이지 않는 반 족장 차이였지만 로사리오의 타격 밸런스가 깨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쇼다 고조 타격코치가 전담을 맡고 난 뒤 로사리오 본연의 타격 스타일을 존중하고 살리는 쪽으로 서포트하며 살아났다. 로사리오의 신뢰를 받은 쇼다 코치마저 시즌 후 한화를 떠나 KIA로 이적하면서 로사리오의 재계약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졌다.
9 야구계 인맥
9.1 좋은 관계
박철순, 양준혁, 이승엽, 이상훈, 김재현, 최동수, 이진영, 정대현, 윤재국[44], 류택현, 신윤호, 임창용, 배영수[45] 정우람 김광현 등이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는 선수로 꼽힌다. 심지어 김성근 감독 아래에서 선수생활을 한 적이 없는 마해영도 김성근을 존경한다고 공공연히 언급할 정도. 송은범은 이러한 감독의 제자 사랑을 이용해서 FA대박을 터뜨리며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여 먹튀가 되었고(2016년 시즌 현재 그저 그런 무난한 선발롤을 소화해주고 있다가 결국 실컷 굴려진 덕택에 후반에 폭망.), 특히 정우람은 서산에서 유병민 기자에게 "근우형은 감독님이 찾아왔지만 난 내발로 감독님 찾아왔다" 라는 말을 전하며 감독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또한 고양 원더스 출신의 송주호 와 LG 트윈스 , SK 와이번스 출신의 권용관이 한화 이글스에서 기량이 부족함에도 경쟁선수보다 많은 출장기회를 받는 것도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감독의 제자사랑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제자들이 존경하든 아니든 위에 적힌 대부분의 선수는 선수 생활동안 혹사에 시달렸고 몇몇은 그 때문에 은퇴하기도 했다. 그 후 2015년 한화 이글스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소위 제자 사랑이라는 것이 제자 편애로 드러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마해영도 2015년 시점에서는 지지를 철회했다.
박철순은 한참 부상에 시달리고 설상가상으로 사기를 당해 빛까지 진 상태에서 김성근 감독이 아무말없이 은행에 데려가 자기 명의로 2천만원을 대출받고 박철순에게 이걸로 빛을 갚으라고 건네줬었다. 당시 2천만원은 지금으로 치면 2억이상의 가치.
충암고 시절에는 제자의 타격을 봐 주다가 배트에 맞아서 이가 부러졌는데 제자가 부담을 가질까봐 재치를 발휘하여 '내가 집중을 안해서 이렇게 부상당했으니 너희도 조심해라'라고 말하며 오히려 부상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야인이었을 때도 전국 각지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인스트럭터 일을 하였고 한때는 박찬호와 김병현을 일대일로 지도한 적도 있다.
LG 트윈스 시절에는 이병규가 아주 호되게 혼나서 '넌 야구를 할 자격 없으니 집으로 가버려라!'라는 말까지 들었으나 그 이후로 김성근에게 깍듯하며 멀리서도 보고 달려와서 인사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 이병규가 김성근 감독을 보고 달려와 백허그를 한다고. 반면 이상훈의 트레이드 마크인 장발과 수염은 당시 김성근 감독이 매우 싫어하던 스타일이였으나 태도가 바르고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 주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은 장발, 수염 자르고 오라고 이상훈에게 명령했는데 이상훈은 아예 김성근 감독과 담판을 지어서 절대 못자르겠다라고 버티니까 "그럼 너 하나만 예외로 칠수는 없으니까 선수들 전원에게 두발자유를 주겠다."라고 쿨하게 넘어갔다. 혹사 논란이 있는 이동현 또한 인터뷰에서 수술 후 가장 걱정을 많이 해준 분이라며 고마움을 밝혔다. LG 이동현 ① "김성근 감독님께 고마운 마음 뿐"[46]
임창용 또한 19세 해태 신인 시절, 자율훈련을 하지 않고 놀러 다니자 불러 집에나 가라고 했다고 한다. 임창용이 찾아가 빌자 완고할 것만 같았던 김성근은 '나와 1년만 열심히 하자'며 자신을 만들어 줬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는 것.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에이전트를 통해 칭찬을 하자 과분한 말씀이라며 감사함을 표했다.
강동우도 의외로 김성근 감독을 은사로 꼽는데, 그 이유가 쌍방울 감독 때 언더핸드 선수를 자주 내주는 덕에 신인이었던 자신이 플래툰으로 나갈수 있었다고... 이후 강동우는 큰 부상을 당하고 재활 중 삼성 2군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과 재회하게 되며, 자신의 타구에 맞은 동료 선수를 본체만체했다는 이유로 김성근 감독에 불호령을 듣고 크게 반성했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47]
김재현은 LG 트윈스 시절의 관계도 있고 하여 표면적인 관계는 양호한 편이었으나 2007년에는 이재원과의 플래툰 기용에 대하여 다소 불만을 품고 부진까지 겹쳐서 은퇴까지 고려했다. 이는 은퇴 이후 2012년에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김성근 감독에게 직접 트레이드를 요청했을 정도로 심각한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본인이 확언한 이야기. 그러나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대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받고 2009년에는 주장도 맡고 하면서 김성근 감독의 조언으로 은퇴 후 진로를 변경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회복하며 2014년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 코치로 부임하였다.
이진영은 데뷔 시절 쌍방울에서 계약금이 없어 붕 뜰 뻔한 상황을 김성근 감독과 코칭스탭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계약금을 지급한 적도 있는 은사이며, FA이적 당일 밤에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해서 FA이적을 상담할 정도로 좋은 관계였다. 이진영의 말에 의하면 FA 우선협상 기간 내내 SK는 적은 금액을 제시하였으며 시장에 나가 평가받아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우선협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LG가 접근, 훨씬 많은 돈을 제시하였고 이에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보장액부터 10억 이상 차이 났으며, 김성근 감독은 그 말을 듣자 야구선수가 FA하기 얼마나 힘든지 안다며,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LG 이적이후 SK 시절 1루수로 나온것에 대한 불만으로 1루 글러브를 태워버렸다라고 당시 기용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했고, 김성근 감독에게 구타당한 이야기[48]도 직접 거론하는등 좋은 관계로만 보기 어렵다.
선수단 운영의 전권을 추구하는 인물이기에 구단에 의해 은퇴하려는 선수를 보호하다가 감독직에서 물러났던 적도 었고, 프런트와 신경전을 벌이다 짤린 적도 많다.[49] 또한 선수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서 선수협의 노조 전환을 긍정적으로 본 거의 유일한 현직 야구인이다. 임호균 각서 파동이 이렇게 미화되나요?
2010년 12월에는 인터뷰 선수협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통해 선수협에게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9.10구단 창설에 가장 긍정적이어야 할 선수협이 왜 아무 말도 안 하는가. 현행 FA제도는 강자들만을 위한 제도이다. 선수협에 이에 대해 이견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연봉 별로 못 받는 선수들에 대한 배려도 선수협의 몫인데 왜 아무 말도 안 하는가.' 등등... 선수 연합체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협의 비시즌 휴식기간 훈련금지 주장에 대해서도 훈련지상주의자라 마뜩찮은 감정을 보여왔으나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연봉 낮은 사람들과 높은 사람들 간 차별을 통해 낮은 사람들은 훈련하고 높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하게 하는 등의 자구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관심을 표했다.
2012년 6월 10구단 창단이 유보되자 '10구단 반대하려면 NC는 왜 승인했나'는 등의 발언도 하고 선수협 10구단 창단지지 서명운동을 할 때 직접 서명운동을 하는 등 선수협이나 선수 권익 활동에 협조하였다. 이런저런 구설이 많은 김성근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태클을 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50]
SBS 야구 프로그램 야구본색에서 나온 전 쌍방울 레이더스 외야수이자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감독 이연수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을 거쳐간 제자들이 한 명 한 명 무엇을 하고 사는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현직 원더스 선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제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회갑연을 열어 주었던 것으로 보아 많은 제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다. [51]
9.2 나쁜 관계
그와 대부분의 단점을 공유하는 김인식 감독이 무난한 성격에 뒤끝이 없어서 선수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유형은 아닌 반면 김성근은 한번 척지면 상당히 가혹하게 대해서 관계 개선이 쉽지 않다. 좀 심하면 후임처럼 언플로 작정하고 때리는 일도 있다.
배수찬 전 감독과는 같은 재일교포 선후배 출신이었다. 김성근보다 5년 선배였던 배수찬은 같은 재일교포 후배인 김성근이 한국에서 자리잡고 야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60년 김성근이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한 것도 먼저 교통부에서 선수로 활약하던 배수찬의 추천 덕분이었다. 또 2년 후 기업은행 야구팀으로 함께 팀을 옮기기도 했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했던 배수찬은 한국말이 어눌했던 김성근의 한국생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김성근이 결혼할 때 장인을 만나 “딸을 달라”고 설득하기 하기가 어렵자 함께 장인을 만나 2대1로 술을 마시면서 결혼 승낙을 얻어내기도 했다. 1970년 마산상고 감독으로 야구계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김성근을 기업은행 코치로 적극 추천한 것도 당시 기업은행 타격코치를 맡고 있던 배수찬이었다. 배수찬의 제안을 받은 김성근이 곧바로 마산상고 감독직을 그만두고 상경해 버린 바람에 마산상고 야구부는 졸지에 감독을 잃고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1년 김성근이 기업은행 감독이 되었을 때 배수찬과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만다. 배수찬은 김성근이 거짓 정보로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맡았어야할 기업은행 감독자리를 꿰찼다면서 김성근과 의절했다. 김성근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해명하려들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교토 동향 출신이다. 김영덕이 김성근의 6년 선배였다. 김영덕이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선수로 뛰고 있던 1961년 봄, 동아대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김성근이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팀 숙소에 와서 머물게 되었을 때, 김영덕이 후배 선수들에게 김성근을 잘 챙겨주라고 특별히 지시하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김영덕은 일본에서 은퇴한 후 뒤늦게 한국 실업야구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실력과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한국 야구계에서 지도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8년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영덕은 김성근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때도 김영덕이 김성근을 투수코치로 불러들이면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투수운용에 있어 김성근은 절대 감독 앞에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마찰이 계속 있었다. 김성근이 올린 선수를 김영덕이 다시 교체해버리면서 김성근이 경기 도중 가방을 싸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린 일은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은 두산 박용곤 회장과 박용민 단장이 직접 영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김영덕은 김성근을 내칠 수 없었다. 김영덕이 OB 감독을 사퇴하고 삼성 감독으로 가게 되자, 후임 감독이 된 김성근은 자신에게 먼저 제의가 온 삼성 감독 자리를 김영덕이 가로채갔다고 주장했고, 선수들에게 김영덕을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OB 선수들이 경기 중 김영덕에게 '변태'라고 말하자 김영덕이 OB 선수의 뺨을 때리면서 OB 삼성 간에 집단난투극이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김영덕은 자신이 예전에 김성근에게 잘해줬었는데 김성근이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모질게 하냐고 한탄하기도 했다.
김재박 전 감독과는 1996년 각각 현대와 쌍방울 사령탑으로 부임했을 때 부터 앙숙 관계였다. 박재홍 부정타격 시비, 마운드 높이 시비, 김원형 빈볼 사건 등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 현대 김재박 감독에게 일방적으로 도발하는 형태였다. 나중에 김성근 감독은 현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건 이유가 현대는 부자구단이었던 반면에 쌍방울은 가난한 구단이어서 오기가 생겨서 시비를 많이 걸었다고 해명하다시피 얘기했지만, 1997년 당시 쌍방울은 연봉 총액이 가장 높은 구단이었다(...) 2007년 김성근과 김재박이 각각 SK와 LG 감독에 부임한 이후에도 몇 차례 트러블이 있었다. 2009년 김성근 감독이 LG 봉중근 기용 문제를 놓고 참견하여 크게 논란이 된 바 있었다. 김재박이 당시 부상중이었던 봉중근을 기아와의 경기에서 내지 않겠다고 하자, 당시 기아와 순위 싸움을 벌이고 있던 SK의 김성근이 봉중근을 보러 온 팬을 위해 등판 시켜야 한다고 했던 것. 이에 김재박이 왜 남의 팀에 간섭이냐고 격노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자신이 이끄는 SK와의 경기에선 봉중근 등판이 예고되자 봉중근 같은 선수를 혹사시키는 것은 국가적 재원의 낭비이기 때문에 봉중근을 아껴야 한다며 콘적콘을 발동했었다.
로이스터 전 감독과도 3년 내내 앙숙 관계를 이어갔다. 김성근은 로이스터가 롯데 감독으로 선임된 직후부터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에 대해서 극도로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였다. 로이스터 감독이 김성근과 정반대 스타일의 선굵은 야구로 돌풍을 일으키자 김성근과 로이스터 두 감독을 비교하는 기사들이 자주 실리기도 했다. 이후 여러차례 빈볼 사건 등이 얽히면서 그때마다 김성근 감독의 적반하장식 발언과 로이스터의 대응이 이어졌다. 또 김성근은 모래알 발언, 롯데의 3중 사인훔치기 발언 등으로 롯데를 도발하였으며, 이에 로이스터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좀처럼 투수를 바꾸지 않는 성향의 로이스터가, 한번은 롯데가 SK를 크게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이례적으로 김성근 감독을 흉내내어 9회에 연달아 세명의 투수를 연달아 등판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대화는 OB 시절 개인훈련 중 약수터 바가지로 인해 간염에 걸려 팀 훈련을 체력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는데, 김성근 감독은 이를 태만이라고 판단하여 한대화를 팀에서 배제하다가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시켰다. 이 때 한대화는 해태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고향팀인 빙그레 이글스로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대둔산으로 잠적후 홀로 개인훈련을 하나, 임의탈퇴 단계로까지 몰리게 된다.[52] 이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1997년 해태에서 LG를 거쳐 쌍방울로 오게 된 한대화는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의 감독이던 김성근과 다시 만나게 된다. 김성근은 한대화에게 3루수 출장을 원했으나 한대화는 노쇠화에 따른 기량 저하와 체력 부담 등으로 고사, 김성근 감독이 바라는 포지션도 훈련량도 소화 할 수 없자 다시 눈 밖에 났고 결국 한대화는 벤치와 2군을 전전하다 그 해 그대로 은퇴한다. 쌍방울 구단에서는 한대화가 나름대로 대선수이고 스타였음을 감안하여 은퇴식을 치뤄주고자 했으나 감독인 김성근이 두 번이나 반대하여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히 악연이라 할 만하다. 나중에 각각 SK와 한화의 감독을 맡고 있던 시절에도 김성근이 부상당한 류현진에게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이 없다고 비판하고, 한화 2군 선수들이 SK에 오면 1군에 뛸 수 있다고 말하는 등 제자였던 한대화 감독을 자극하는 발언을 계속하면서 악연을 이어갔다.
사람 좋은 성격으로 유명한 김시진 전 감독이 현대 감독으로 있던 시절 김성근에게 주먹감자를 날린 적이 있다. 현대가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SK 김성근 감독이 9회 2사 풀카운트까지 계속 능욕하는 투수교체를 해댄 것이다. 현대 덕아웃에서 선수단이 모욕이라면서 크게 술렁이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감독으로서 액션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시점었다.
SK 와이번스 김경기 2군 감독과도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2011시즌 전지 훈련을 다녀온 귀국 다음날, 타격코치였던 김경기를 2군 주루코치로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코칭스태프의 보직 변경이 감독의 권한이라 하지만 전훈 동안 선수들에게 내내 타격을 지도했고 선수 시절에도 빠른 주루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었던 김경기를 2군 주루코치로 보낸 대목에서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고 당시 선수들의 동요도 컸다. 4년 뒤 김경기의 인터뷰에서 그 내막이 드러나게 되는데 김경기는 김성근의 지시사항을 군말없이 이행했고, 감독이 원하는 방식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고 말하면서도 당시 1군 감독 김성근의 야구관과는 다른 자신만의 지론을 명확하게 이야기했던 태도가 화근이 된 것 같다고 밝혔다.[53]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거나 타협을 하지 못한 김경기의 과가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야구관과 소신을 밝히는 것이 그릇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결정적으로 인천야구나 SK에서 김경기가 가진 상징성이나 입지, 그리고 타격 코치로서의 성과 등을 생각해봤을 때 당시의 보직 변경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김경기 자신도 4년이나 지난 인터뷰에서 관련 언급을 한 걸 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 한화 이글스의 유격수 이대수 또한 SK 와이번스 1기 시절 오버스로로 송구하지 않고 사이드암으로 송구한다는 이유로 찍혀[54]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키기도 했다.[55]
또한 특유의 플래툰 때문에 이닝/타석에 들어서고자 하는 선수들과 충돌하는 경우도 잦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에는 이만수, 김성래, 류중일, 강기웅 등 당시 삼성의 주축 선수들과 이런 이유로 갈등관계를 형성했다. SK 와이번스에서도 이진영, 김재현, 박재홍 등의 선수와 포지션 변경이나 플래툰 기용 때문에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박재홍은 김성근 감독 경질 직전에 '나는 땜빵'이라는 말을 덕아웃에서했다가 본보기로 2군행을 당했다.
외국인 선수들과도 자주 갈등이 있었다. 개성 강한 외국인 선수와 국내 지도자가 갈등을 빚는 경우는 많지만 김성근의 경우는 지나치게 권위적인 성격으로 무난한 성격의 외인들과도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2001년 LG 트윈스의 댄 로마이어는 선수들에게 조언을 자주 한다고 찍혀서 내쫒겼다.[56]
2007년 SK 와이번스의 마이크 로마노는 플래툰 불펜 대기 등 출전 방식의 갈등으로 2군에 갔다 왔고, 2007, 2008년 SK 와이번스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린 케니 레이번도 퀵후크 등에 예민한 반응으로 팀 분위기를 헤친다고 평가받아 재계약에 실패했다.
MLB 현지 해설위원으로 활동중인 크리스 니코스키도 훈련방식과 투구폼을 둘러싼 감독과의 갈등 끝에 일찍 퇴출됐다. 2015년 한화 이글스의 나이저 모건도 김성근 감독의 기량 미달보다 지나친 쇼맨쉽이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1군에서 몇 경기 뛰지 못하고 2군을 전전하다가 방출되었다. 한국 리그에 제대로 적응도 못했지만 2할 7푼대 타율에 4할 출루율을 기록했던 나이저 모건[57]에 비해 훨씬 부진했다가 중반기부터 맹활약한 넥센 히어로즈의 브래드 스나이더의 사례도 있고 나이저 모건의 빈 자리로 주전급 경기 출장을 보장 받은 송주호의 참담한 타격 성적을 고려하면 외국인 선수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감독의 조급증과 권위적인 성향이 어우러진 것 이다. #
시즌 초반 다른 선발들이 부진한 가운데 수차례 4일 휴식 후 등판하며 팀을 이끌었떤 미치 탈보트에겐 '실패한 선수' 란 폭언을 퍼부어 구설수에 올랐고[58] 에이스인 에스밀 로저스를 건방 지다고 2군에 내렸다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에는 로저스를 두고 아들 김정준까지 엮여서 아주 제대로 소동을 일으켰다.
9.3 프로팀 감독들과의 관계
2016년 프로야구팀 감독중에 7명(김경문(NC 다이노스), 조범현(kt wiz), 양상문(LG 트윈스), 김기태(KIA 타이거즈), 김태형(두산 베어스), 류중일(삼성 라이온즈), 조원우(롯데 자이언츠))이 프로 또는 아마추어 시절에 김성근 감독 밑에서 야구를 했다. 다만 단순히 "어! 밑에서 뛰었네? 사제관계!"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보기에는 서로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아래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현재 앙숙의 관계로 변한 경우도 많다.
- 조범현 감독과는 충암고 시절에 선수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다. 조범현은 대구의 야구명문 대건고 야구부 출신이었으나, 대건고가 야구부를 해체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김성근은 곧바로 대구로 내려가 대건고 야구부 18명 전원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충암고 야구부에 합류시켰다. 조범현은 1977년 봉황기에서 맹활약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를 수상했다. 이것은 김성근 감독이 마산상고, 충암고, 신일고 감독을 거치면서 고교 감독시절에 거둔 유일한 메이저대회 우승이었다.[59] 김성근 감독의 딸들도 조범현 감독을 오빠라고 부를 정도로 사이가 가까웠다. OB 베어스 감독 시절에 김경문보다 조범현을 포수로 기용하는 것을 선호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조범현은 1991 시즌을 앞두고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프런트에 현금 트레이드 등으로 영입해줄 것을 요청하여 영입된 15명의 선수 가운데 한명이 조범현었다. 김성근은 삼성 감독에 취임하면서 삼성의 약점으로 이만수를 거론하면서, 그 대체자로 조범현을 기용하려 했지만, 조범현의 기량이 쇠퇴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만수를 주전으로 기용했다. 이후 지도자 시절 서로 다른 팀에 몸담게 되면서 점차 멀어졌다. LG 감독과 삼성 코치로 맡붙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짜사인 사건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의 사인을 조범현 코치가 훔치는 것을 감지하여 이에 역으로 가짜 사인을 보내 삼성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후 SK 감독이 된 조범현은 2003년 한국시리즈, 2005년 시즌 막판까지 2위 후 4강 등으로 착실하게 유망주를 키우고 SK의 전력을 상승시켰는데, 후임 감독으로 온 김성근이 드디어 팀을 우승시키면서 더욱 묘한 관계가 되었다. 2008년~2011년 SK와 KIA 감독에 있으면서 대립하는 일이 잦아졌다. 김성근 감독이 KIA와 경기할 때마다 판정이 이상해진다고 주장하면서 커다란 파문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사인훔치기, 장외 수신호 파동 등을 겪으며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2015년 김성근이 한화 감독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재차 kt와 한화의 일정이 공평하지 못하다면서 kt를 자극하는 등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 김기태 감독과는 쌍방울 시절의 애제자로 98년 쌍방울이 주축 선수들의 거듭된 현금 트레이드에도 버티던 김성근 감독이 김기태의 트레이드 이후 '이젠 끝났구나...' 라고 생각했다던 일화가 전해질 정도의 제자이다.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과 함께 2002년 김성근 감독의 깜짝 회갑연을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기태 감독이 LG감독 재임 중 경기포기 논란에 휩싸였을때 드물게 김성근 감독이 두둔하는 언플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아 감독으로 부임후엔 부딪치는 일이 늘었다. 대표적으로 2015년 청주구장 CCTV 사건이있다. 애초 청주시에서 설치한 물건이었으니 서로 좋게좋게 가려는 크보 특성상 큰 구설수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상대 감독이 김성근이었고 지적한 김기태의 팀이 기아였기에 사건이 커졌다. 이 두 팀은 2009년에 이미 악연이 있었다. 김성근이 SK감독시절 전력분석원과 코치간의 금지된 사인을 거래했던 사실 역시 김성근 밑에서 코치로 있었던 김동재 KIA코치가 정확하게 캐치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사인거래는 화면으로도 포착되었으며, 이듬해부터 프로야구에서는 이에 대한 제한규정이 명문화되었다. 김성근은 CCTV 관련 언플을 통해 또 한번 구설수에 올랐다.
- 양상문 감독은 태평양 때부터 인연을 맺었으며, LG 시절에는 투수 코치로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신화를 일조하기도 하였다. 특히 김성근 감독이 LG감독에 있을 때 양상문에게 처음 코치직을 제안했을 때, 양상문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와서 롯데에서 지도자로 크고 싶다며 거절의 뜻을 전한 것을 두고 양상문의 인간됨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투수 기용은 양상문 코치에게 일임했고, LG 감독의 후계자로 밀어주려 했다고 하는 등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양상문의 감독재능과는 별개로 코치재능은 이 시기를 제외하면 절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후 같은 무대에서 활동은 하지만 이 둘은 다른 감독과의 관계에 비해서 별다른 일도없이 평온하게 지나가고 있다.
- 김경문 감독과는 악연이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이제는 기자들 보는 앞에선 서로 웃고 있다면서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진짜로 사이가 괜찮아졌을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김경문이 현역이었던 시절 당시 OB의 투수코치와 감독을 차례로 역임했던 김성근은 김경문보다 충암고 시절 제자였던 조범현을 포수로 기용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김경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나중에 김경문이 두산 감독이 된 후 같은 시기에 SK 감독이었던 김성근과 라이벌로 수많은 사건사고가 터지면서 앙숙 관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성근 SK 감독은 우승 경쟁자였던 두산에 대해 투구폼 지적, 약물 의혹 제기 등으로 끊임없이 도발했고, 이에 더해 SK 선수들의 거친 태글, 빈볼 등이 반복되며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하지만 김경문은 김성근의 제자였다는 이유 때문에 SK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거의 일방적으로 당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번은 김경문이 폭발하여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인터뷰했다가 스승에게 무례한 발언을 했다고 김성근 감독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결국 김경문이 삭발을 하고서야 사태가 무마되었다. 김성근이 2015년 한화 감독으로 복귀하면서 다시 악연이 이어지고 있다. 김경문 감독은 2015년 시즌 경기에서 9회 크게 앞서는 중 연달아 투수를 교체하는 김성근 감독의 운용법을 일부러 비꼬듯이 시전했다.[60] [61] 참고로 김경문 감독은 다른팀과의 경기에선 절대로 이런 투수운용을 하지 않는다.[62]
- 류중일 전 감독과는 명목상은 사제지간이지만 실제론 앙숙 관계다. 선수 시절 삼성의 수비 시스템과 관련하여 마찰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류중일로 추측되는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질색한다는 기사가 뜬 적도 있다. 또 선수시절 김성근 감독의 얼음물 입수 지옥 훈련이 아무 효과도 없었고 오히려 선수들 부상이 생길 뻔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류중일이 야구계 원로인 김성근을 공격한 적은 없다. 반대로 김성근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적의를 내세운다. 김성근이 SK에서 경질된 이후 삼성은 현대와 SK를 왕조명단에서 제외하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인 성적을 냈는데 류중일 감독이 삼성을 맡은 후 삼성의 성적이 잘 나오자 김성근은 툭하면 선동열이 삼성을 잘 꾸려놓고 나갔다느니, 배영수 같은 선수와 함께하니 우승은 당연하다느니, 리그가 하향평준화 되었다느니 언플을 날려 가만있는 류중일을 자극했다. 류중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언반구 없이 철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별로 대꾸할 가치를 못느끼는 것으로 보이며, 감독 생활 4년만에 김성근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어 김성근이 제자 운운하기도 엄한 꼴이 되었다. 정작 김성근은 류중일보다 더한 지원을 받고도 삼성에서 실패한 감독이었다. 그러던 10월 14일 # 기사가 떴는데, 내용을 보면 어째 누군가를 디스하는 내용이다 (...) 이 기사로 보아 류중일 감독도 김성근을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 김태형 감독은 신일중 시절에 김성근 감독이 신일고, 신일중 총감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이 신일고에 주력했기 때문에 별 다른 점접은 없다. 사실 이쯤되면 사제관계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프로시절에도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로 떠난 후 김태형이 OB에 입단했다. 참고로 신일고는 75년에 창단하여 76, 78 황금사자기를 우승한 신흥 강호였는데 김성근이 감독을 맡은 79~81년 간 우승은 커녕 준우승도 한 번 못했다. 이후 신일고는 쭉 4강권에서 헤매다가 조성민, 조인성, 백재호, 강혁 등 초호화라인업으로 무장한 90년대 초반에 부활한다.
- 그나마 염경엽 전 넥센 히어로즈 감독하고는 관계가 괜찮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염경엽 감독이 넥센 히어로즈 감독에 올라설때 롤모델이 김성근 감독이라고 했고 이후로도 김성근 감독에게 여러차례 조언을 부탁했으며 김성근 감독도 흔쾌히 허락했고 방송에서도 염경엽 감독에 대해서 "장차 위대한 감독이 될 인재"라고 후하게 평가했을정도. 이후에도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 왔을때 여러차례 인사가거나 조언을 받고 염경엽 감독이 자청해서 어깨 안마도 해주는 장면이 나오면서 유일하게 관계가 좋다고 볼수있다. 허나 2016년 8월 다시 혹사가 논란이 되자 넥센 히어로즈 투수운용을 걸고 나오는 바람에 관계에 살짝 금이 간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든다. 염경엽 감독이 여기에 대해선 별말없이 넘어갔고 이후 김성근 감독이 다시 염경엽 감독으로부터 많이 배우고있다는 칭찬성 언플을 하면서 약간이나마 관계가 개선되는듯 보였지만, 시즌끝나고 그나마 좋은관계인 염경엽 감독도 사퇴하고 나서 사실상 좋은 관계는 없다고 할 수있다.
10 별명들
10.1 야구의 신 = 야신(野神)
'야구의 신' 혹은 줄여서 '야신'이라는 별칭은 2002년 코리안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의 우승소감 중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라는 발언에서 유래. 김성근 감독 본인은 이 발언에 대해 '내가 신이면 나를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 것이냐'라며 웃어넘겼지만, 당시 삼성과 LG의 전력차는 그야말로 안드로메다급의 격차였으며 시리즈 스코어는 4:2였지만 마지막 6차전에서 시리즈 내내 삽을 푸던 이승엽이 동점 쓰리런 홈런을 작렬시키지 못했더라면 향후 분위기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응용 감독의 소감은 립서비스가 아닌 진심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김응용 감독이 이런 식의 언론 플레이의 대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김성근 감독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김응용의 말에는 항상 반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자기가 강하면 비하하고, 약하면 과장하는 등. 실제로 야신 발언은 우승한 다음에 나왔다는 것 때문에 상대를 띄워서 자신을 더 높인 화술이라고 보는 의견도 상당하다.
KBS N sports의 '한국야구 레전드'에서 김응용 감독이 회상하기를 '신도 여러가지 신이 있다'면서 장난을 쳤다. 링크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 김응용 감독과 맞붙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김성근이 97년까지 해태 감독이었으면 10번 넘게도 우승했을거다' 내지는 '우승 많이 했다고 뛰어난 감독이면 김재박이 김성근보다 뛰어난 감독이냐'아니 그쪽은 물리학자, 심지어는 '약팀에 간 적 없는 김재박에 불과한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등의 비아냥이 다수. 이러한 비아냥은 대개 김응용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는데다 모기업이 작살나고 선수들이 팔려가고 하는 꼴 보고 빡쳐서 감독부터 태업을 해버렸던 1998~2000년의 해태 성적에서 기인한다. 마침 김성근이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끌고 돌풍을 일으켜서 하위팀에 기적을 가져오는 명장 이미지를 굳힌 시기가 9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시기가 미묘하게 이어져서 대비된 효과도 있다.[64]
단기적으로는 선수를 만들어내는 김성근이 돋보일지는 모르나 그가 맡은 팀마다 혹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또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하기도 했으며(주로 불펜 투수들, 신윤호, 김현욱, 전병두, 이동현, 그외 SK 왕조가 끝난 후에 여러 투수들 등등) 그로 인해 SK시절을 제외하곤 오랫동안 왕조 건설을 못한 것을 생각한다면 긴 시간 동안의 리그 운용능력은 김성근보다 해태 왕조를 건설한 김응용 감독이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해태가 의외로 삼성정도로 지원을 잘 해주는 팀이 아니였음을 감안한다면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적어도 김응용의 전성기에는 김응용이 훨씬 뛰어난 감독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감독에서 은퇴하고 삼성구단 사장에 취임한 김응용은 인터뷰에서 아직 현역으로 2연패를 이룬 김성근과 김응용 본인의 감독 현역 시절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자신이 소속팀을 10번 우승시키는 동안 김성근은 우승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즉 야신 발언은 승자의 관용이자 호적수에 대한 립서비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김응용은 라이벌 의식이 있는 기업인 삼성그룹과 LG그룹의 한국시리즈에서 진 감독은 대부분 경질되는 것을 잘 알기에 김성근이 시리즈 후 경질될 것이고 나이가 60이 넘은 그가 다시 프로야구 1군 감독으로 복귀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65] 따라서 젊어서부터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경쟁해오며 40년 세월 야구계에서 함께 지냈었던 동년배 경쟁자에게 진심어린 마지막 예우를 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의 입에서도 적장을 '야구의 신'이라 부르는 최고의 예우가 나왔을 것이다. 보통 김성근을 지지하는 이들은 인천야구팬, 쌍방울, SK, LG 팬들인 경우가 많고 김응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해태팬, 삼성팬들이 많기 때문에 이 문서와 김응용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의 지지자들은 사이가 매우 나쁘지만, 정작 본인들의 사이는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며 프로야구판의 이슈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야신은 다시는 프로야구 감독을 못 맡으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2006년 SK와이번스 감독으로 복귀하고 야신의 명성을 굳혀나가게 된다.
야신이라는 명칭 때문에 야신상의 모델이자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과 헷갈려 하는 사람이 있다. 2회 WBC에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인식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김성근 감독과, 김인식 감독이 같이 인터뷰를 했었는데, 도중에 야신이 김인식을 도와준다면 두려울 게 없다는 프레이즈가 등장했었다. 그러자 왜 축구 선수가 우리 김인식 감독을 도와주냐는 질문이 나와서 인터뷰 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김성근도 웃으면서 이러니까 야신이라고 좀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 것. 그러나 SK를 맡은 뒤 보여준 엄청난 성과와 나이를 초월한 김성근의 언행 덕분에, 야신이라는 별명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김성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만큼 김성근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굳어졌다.
여담으로 야신의 유래를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백종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이 2014년 11월 3일 스포탈코리아에 쓴 '(야구는 구라다2) 야신의 평생 열등감 - 김응용'에 나와 있다. 기사 말미 '에필로그 - 야신의 유래'를 보면 김응룡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야신이라고 한 것은 김성근 감독이 하도 작전이 많고, 변화가 심하니까 못마땅해서 비꼬아 한 소리라고 한다. 다만 그 칼럼의 전반적 내용은 김성근 감독을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므로 백종인 칼럼니스트가 김성근 감독을 격하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스포탈코리아
참고로 백종인과 그가 쓰는 '야구는 구라다2' 자체도 2014년 잭 그레인키가 '개막전 호주에서 하기 싫다' 는 발언 이후 부상으로 가지 못하게 되자 잭 그레인키와 함께 커쇼를 묶어서 '야비한 놈들, 얍삽한 놈들' 이라 비하하고 류현진을 '우리 귀염둥이' '야비한 놈들이 꾀 쓰는 사이에 묵묵하게 일만하다 다칠까 걱정' 이라 하는 등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칼럼이다.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기 전에는 SK시절의 좋은 성적과 함께 언론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 이미지 매우 자주 불리던 별명이었고 2015시즌 중반까지도 자주 그렇게 불렸으나 시즌 후반부터 보여진 독선적 운영과 투수 혹사논란이 불거진 이후로는 거의 불리지 않는 별명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몇몇 팬들은 염경엽 감독이 야신 칭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쪽은 일단 우승이 한 번 필요하다. 그 전력 가지고 한국시리즈까지 간 게 어디냐 [66]
2016년도 야신이라고 쓰이긴 한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이 별명을 돌아보면 그저 허상일 뿐이었다. 비꼬는 말로 변질되었고, 야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야병의 뜻은 아시다시피...
10.2 인천예수
야신이라는 별명 외에도 김성근에게는 인천예수 마산예수와는 다르다 마산예수와는 라는 별명이 있는데, 사실 호의적인 뜻에서 시작된 별명은 아니다. SK갤러들이 김성근 감독에 대한 비판에 대해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자 이를 혐오하는 타팀 팬들이 SK 와이번스 갤러리를 중세갤이라 부르고 김성근 감독을 예수라며 비꼬면서 생긴 별명이었던 것. 애당초 인천예수라는 말을 처음 만든 것도 SK갤러들과 싸우던 두산 팬이다.
그러나 태평양 시절을 기억하는 올드 인천팬들에게는 김성근이라는 인물 자체의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별명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컸고, 최근에는 오히려 SK 팬들이 앞장서서 인천예수라는 말을 사용하며 김성근 감독 팬질부흥의 새 역사를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그 때문에 만수성님은 유다만수로...
그런데 올드 인천팬들에게 김성근의 이미지가 좋았다는 김성근 감독팬들의 주장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반론이 있다. 태평양 감독 시절 김성근이 태평양과 남아있는 계약을 파기하고 삼성으로 가기 위해 임호균 각서 파동 등을 일으키며 프런트와 마찰을 빚고 경질된지 며칠만에 삼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에 인천 올드팬인 도원아재들은 김성근에게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또 김광현의 결혼식 때 한 말이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가 한 말은 포기하지 마라. 이 위기를 넘겨야 진짜 강해지는 것이다. 괴로워하지 말라. 나중에 그들이 무릎꿇게 만들면 된다. 결혼은 위기 결혼식입니다 감독님
이러한 발언과 모순되게 김광현에게 147구 벌투를 시켰다(11년 6월 22일). 이 날 김광현의 성적은 8이닝 147구 13피안타 8실점. 팀 에이스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혹사도 마다하지 않는, 징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행위였다. 현대야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러한 지도방법에 힘입어 이 해 김광현은 74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쳤다. 물론 이 사건 이후에 상술된 주례사가 있었음으로 김광현 선수 개인에게 앙금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사례들이 야구팬들에게 모순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인천 예수란 별명은 더 이상 쓰지 않기 때문에 사장된 별명이라 봐도 무방하다.
10.3 가네바야시 세이콘
재일교포 시절 김성근 감독의 일본 이름.
세이콘 드립 문서 참조
10.4 킬성근
감독 생활중 하도 굴려 선수 생활이 힘들어지거나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선수가 많아 붙여진 별명이다, 살완마(殺腕魔) 다음은 그 동안 김성근 감독이 혹사 선수들 목록이다.
- 윤석환: 잘 알려지지 않은 최악의 피해자 중 하나. 84년도에 1군 데뷔를 했다. 김성근 감독이 OB감독을 맡은 84년부터 88년까지 5년간 마무리투수의 자리에서 540이닝 이상을 던졌다. 공교롭게도 김성근이 OB감독을 맡은 첫 해와 마지막 해에 각각 심한 혹사를 당했다. 데뷔 첫 해인 1984년에 57경기에 등판, 146이닝이나 던질 정도로 워낙 혹사당했기에 이후로는 신인 때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84년의 팀당 경기수는 100경기였다. 1988년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13승(모두 구원승), 14세이브을 올려 구원왕이 되었다. 이후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몇 년 못 가, 1991년에 8년간의 짧은 선수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된다. 다행히도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 김성길: 1991시즌 삼성에서 마무리로 전향한 후 김성근 감독을 만나 선발포함 52경기 188이닝을 던졌고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살벌하게 혹사당해 김성길 죽는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으며 밥숟가락 들 힘도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1992년에 당연히 부진했고 1993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 박정현: 김성근 감독 밑에서 89년도 242.2이닝을 던지고[67] 이듬해 191.1이닝을 던진 후 끝없는 재활을 반복하다가 1999년 다시 한번 김성근 밑에서 선발, 구원 다 나와서 124이닝씩 굴려졌고 결국 2000년 은퇴한다.
- 최창호: 박정현보다는 조금 못했지만 2년 연속 200이닝을 찍을 뻔했다.
- 김현욱 : 전무후무한 구원 20승. 이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후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2004년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후 재활에 실패.[69] 36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로 은퇴했다.[70][71]
- 데럴 마데이: 고양 원더스의 전 외국인 용병 투수로서 평균 휴식일을 2~3일 밖에 보장받지 못한데다가 평균 투구수도 100개가 넘는 엄청난 혹사에 시달리다 결국 어깨가 망가져 1년의 재활 끝에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들어갔다. 즉, 원더스 시절의 혹사로 선수생명이 그냥 끝났다. 링크 참조##
- 신윤호: 2001시즌 김성근 감독 대행의 지도 아래 70경기 144.1이닝을 던져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활약을 보였으나.[72] 다음해 바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명백한 혹사지만 본인은 어쨌든 자신을 주목받게, 돈 벌게 해준 스승으로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고 있으며 기량쇠퇴는 본인의 관리 책임이라 말했다.[73]
- 이동현: 2001시즌에 고졸로 입단해 선발 가능성을 보였지만 2002시즌 불펜으로 전향해 124.2이닝을 던지는 2015시즌 권혁을 뛰어넘는 혹사를 당했다. 물론 이동현의 경우는 이순철의 지분도 큰지라.[74] 순수하게 김성근이 박살냈다는 평은 적지만 당시의 등판기록을 보면 절대로 옹호할수 없는 지독한 혹사로 망가져 길고 긴 재활을 거쳐 2009 시즌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 장문석: 신윤호와 이동현의 압도적인 혹사포스에 짓눌리는 감은 있지만 장문석도 2002시즌에 101.2이닝을 던지는 범상치 않은 혹사를 당했다. 10승까지 한 것은 덤이다. 그 때문인지 2003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고, 2009년에 기아에서 은퇴한다.
- 김민기: 김민기름이라는 별명이 있던 방화신기의 일원으로 2001년에 45경기 108이닝 방어율 5.08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2002년에는 선발로 뛰며 99이닝을 던졌다.[75] 그렇게 거의 2년연속으로 100이닝씩 소화한 결과 제대하고 2005년에는 8점대 방어율을 찍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그나마 좋은 성과를 올렸다.[76]2007년에 69경기에 등판해서 88이닝을 소화한 결과 완전히 퍼져서 2010 시즌 중 은퇴하게 된다. 김성근과 김재박이 같이 말아먹었다는 것이 중론.
- 채병용: 2000년대 후반기에서 이승호를 이은 SK의 2대 에이스라고 찬양받을 정도로 리즈 시절을 보냈으나 2009년 팔꿈치 부상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리즈와 포스트 시즌에서 롱릴리프로 무리하게 던진 결과 아직까지도 예전 구위를 보여주지 못한채 현재까지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다.
- 이승호: 신인 시절부터 강병철 감독에게 미친듯이 굴려졌고,재기에 성공한 SK 왕조 시절 역시 김성근 감독에 의해 굴려졌다.결국 롯데를 거쳐 NC로 이적 후 1군에 거의 나오지 못하고 있다.
- 살려조 : 2015년 김성근 감독 휘하의 한화 이글스에서 나온 역대급 혹사 계투진. 흔히 알려진 5명의 투수를 포함[77], 번외까지 약 11명의 투수가 전천후로 굴려졌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 송창식 : 희대의 개막장 경기였던 두산과 한화의 2016년 경기에서 무려 4 1/3이닝 동안 90구 12실점을 했음에도 김성근은 송창식을 그대로 방치해 두었고, 자신은 허리 통을 핑계로 병원으로 갔다. 자세한 내용은 414 대첩 참조. 그리고 8월 29일자로 팔꿈치 통증으로 일본 갔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상 시즌 아웃 가능성이 매우 높다.[1]
- 김민우 : 2015년 한화에 입단한 뒤 마구 굴려지고[78] 그 다음 16시즌 제 상태의 몸이 아닌 상태로 5게임만 뛰고 2군에 내려간 후 7월까지 소식이 없다가 8월 22일 엠스플 뉴스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어깨 관절와순 손상'이 심각하다고 한다. 입단전 토미 존까지 받은 상태여서 잘 관리하며 등판시켰어야 했는데 감독의 그놈의 커리어 욕심으로 인해 망가져서 앞으로 제대로 회복할 기약이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민우 본인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현시점에선 매우 암울해 보인다
- 권혁 : 김성근의 최대 죄악 한화의 살림꾼이자 살려조 리더 권혁은 이적 후 거의 노예에 가까운 투구를 이어나갔다. 4연속 등판은 물론 지든 이기든 무조건 권혁이 올라왔다. 권혁은 지난해부터 최근 2년 사이 무려 144경기를 등판해 207⅓이닝 3752구를 던졌다. 왠만한 선발투수가 아닌 최정상급 투수도 기록하기 힘든 이닝과 투구수를 무려 불펜투수로 소화하였다. 그리고 금강불괴 같았던 권혁이 결국 무너졌다. 팔꿈치 통증으로 16시즌 8월 24일 1군 말소가 되어버렸다. 한화팬 포함 전구단 팬들이 김성근을 맹비난 하고있다.
- 곽동호 객원필진이 야구리포트(KBReport)에 기고한 글에 전반적인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는 정우람을 김성근에게 혹사당한 투수들 중 현재 제 기량을 발휘하며 금전적 성공을 거둔 유일한 케이스라고 하고 있다.(한화 투수들은 2016년이 되어야 기량 저하 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제외) 한편 이 기사는 SK 시절과 2015년 한화 시절의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내용이 앞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 2015년 12월 20일 네이버-케이비리포트 '(프로야구) 야신의 그림자 혹사논란 연대기'
여담으로 류중일하고 늘 비교되고 있다. 첫번째 베플을 보자.
10.5 그 외
- SK 왕조 시절, SK 갤러들은 송도큰형이라는 별명을 많이 썼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인천 할아버지'[79]는 별명이 어떠냐 묻자, '인천 사는 건 맞는데, 할아버지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본인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며 손자도 없는데 할아버지, 노인 이런 말 싫다고. 감독으로서의 자기 철학과도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오냐오냐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훈육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선수들은 자기 자식들과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할아버지가 아닌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80] 이에 이기광이 '인천 큰형'이라고 하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2군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81] |
- KBS에서 SK 2군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 예미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사적인 자리에서의 패션을 보면 일흔을 앞둔 나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젊은 패션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82]
- 한화에서 와서 100kg가 넘는 한화 선수들의 살을 엄청나게 뺐고 새로 트레이드한 허도환에 대해서도 곧바로 체중 감량을 지시해 야구계의 숀리, 긴숀근이라는 드립이 터져나왔다. 한때는 김태균이 살빼서 포텐이 다시 터진거라는 해석이 나왔으나 현재는 김태균이 늘 그렇듯이 후반기 체력이 부치는 모습을 보이고 넥센으로 이적한 양훈이 넥센 트레이닝의 수혜자가 되어 부활하면서 역시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 선수들의 복리후생에 앞장서는 감독이다. 넥센에서 혹시 포텐이 터질까하고 박병호 덤으로 데리고 왔던 심모씨. 결국 제 실력 남 못주니 보호선수 제외 시켰고 이후 롯데에서 혹시나 하고 데리고 갔으나 역시........그럼에도 자신만만하게 fa신청했다가 미아가 되었지만 우리 감독님께서 선수의 생계를 위해 13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데리고 왔다. 비슷한 예로 왕조 시절 애제자라고 하는 송모씨를 거금 34억을 주고 데려왔다. 이 선수들 fa가47억인데 한물 간 두 선수를 위해 거금을 한화라는 기업을 압박해 내놓게 하다니 선수 사랑은 정말 대단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박한이 의문의 1패 쪼잔한 S사그 외에도 2년 동안 김태균 조인성을 제외하고 자기가 원하는 선수를 거금을 주고 데려왔다. 정우람은 90억, 권혁은 32억, 배영수는 21억, 로저스는 22억 그러나 현재 정우람은 개점휴업상태이고 배영수는 삼성을 나오면서 멋지게 입을 털고 마운드에서도 탈탈 털렸다. 권혁은 김감독의 총알받이가 되고 휴식 대신 뺨 툭툭을 통해 힘을 얻고 있다. 로저스는.........
-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 야구 연구를 위해 해부학까지 공부하신 분이라는 언론과 노리타의 포장질에도 불구하고 실제 김성근은 미신을 아주 잘 믿고 따른다고 한다. 그것을 잘 나타낸 글이 있는데 이는 이종남 야구전문기자[83]가 쓴 기사를 배지헌 블로거가 발굴 해내어 옮겨 놓은 것이다. 김성근과 변도사 내용을 보면 도사에게 혹해 극기훈련을 가서 얼음물 입수를 했는데 그걸 지시한 김성근 본인은 쏙 빠져서 열외하다가 의사가 얼음물 찜질이 간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당연한 말이지만 아무 상관없다.) 해주니 김성근은 그날 이후 얼음물 입수 매니아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들어있다.
11 기타
- 선호하는 등번호 38번은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엽 감독의 번호이다. 김동엽은 지금 김성근 감독의 아내인 오효순 여사를 소개시켜 줬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다. 그래서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코치 생활을 하면서부터 특정 시기[84]를 제외하고는 줄곧 38번을 달고 있다.
- 야구에 김성근이 있다면 축구에는 주제 무리뉴가 있을 정도로 둘의 운영 스타일이라든가[85] 말하는 스타일이 닮은 편이다. 다만 무리뉴가 김성근보다는 좀 더 엘리트 코스였고 더 많은 클럽을 돌았으며 무엇보다 무리뉴는 선수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감독이다.
- 또한 전권을 요구하거나 엄청난 훈련량, 정신력을 중시하고 별의별 이상한 규칙을 만드는건 펠릭스 마가트와 공통점으로 꼽힌다.
- 일본에서 살던 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 항상 만취 상태로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쳐야 했던 넓은 기차 선로에서 그만 열차에 치이는 변을 당했고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이 중 1때의 일이었고 이걸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 2007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마치고 상대 선발투수였던 리오스에 대해 '정상이 아니다. 9회까지 150㎞/h의 공을 던진다는 게 믿을 수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기사를 읽은 두산 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야구 팬들은 노망이 났다는 둥 비난 일색이었고, 기자도 말하기가 껄끄러웠는지 단순한 흔들기 발언으로 치부하고 말았는데, 그 뒤 리오스는 일본으로 진출한 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금지약물인 스타노조롤을 복용한 것이 밝혀져 김성근의 눈이 정확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극성 안티세력들은 이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되었다. 스타노조롤은 비정상적인 근육회복을 가능케하여 근실패이후 초인적인 회복속도를 보여주며 덕분에 웨이트 증량, 파워 및 민첩성 향상에 틱월힌 효과를 가진 약물이며 이 약물이 성적형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빼박캔트. 사실 이미 시즌 중반, SK와의 경기에서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미국에 출국한 이후 당일 오전 바로 귀국해 완봉승을 거뒀기 때문에, 이 모습이 각인된 김성근 감독으로선 결국 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당시 야구 팬들은 장시간의 비행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은 리오스의 책임 정신과,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준 기량에 혀를 내둘렀다. 약물 의혹뿐만 아니라 시즌 중 리오스의 투구 폼에서도 보크 의혹을 제기한 적도 있다.
- 코나미컵, 아시안시리즈, 한일 프로야구 최강전 등을 출전하며 일본을 꺾고 우승해 아시아 최강팀이 되겠다고 우승 의지를 불태웠지만 3번 다 좌절됐다. 특히 2008년에는 대만의 퉁이 라이온스에게 홈런을 4방 맞고 10:4로 대패했다.#
-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덕에[86], 후배 지도자들에게 이런저런 지적질을 하고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인터뷰가 많다. 이 때문에 기자들에게는 꽤 좋은 소스 제공자. 은어로 '앵물'이다.
- 충암고 감독을 그만둔 후인 1979년에 동양방송에서 야구해설을 맡기도 했는데, 해설 중에 일본어가 튀어나온다는 이유로 바로 해직.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말했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몸쪽으로 꽉차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보고는 이빠이(가득 차서) 들어왔어요!라고 말하고 다음 날 잘렸다고 한다. 결국 그 빈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하일성. [87]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의 해설위원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칼같이 정확한 예상으로 또 화제가 되었다. 정확한 해설덕분인지 야구를 좀 좋아하는 사람들은 SBS로 놓고 보기도. 탁월한 야구 식견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 때문에 일반 시청자들은 그의 해설을 듣기 난감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간혹 여러 야구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말투인 '마, ~~~하면 되지 시프요...'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 2013년 5월 17일 SBS ESPN에서 아들인 김정준 해설위원과 함께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LG 경기에 대한 부자(父子) 해설을 진행하였다. 1년 뒤 6월 7일에도 똑같은 구장에서 동일한 팀의 경기의 객원 해설을 하기도 했다.[88]
- 2009년 10월 22일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5차전 때 경기 도중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감독 퇴장 1호라는 흑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은 2009시즌부터 신설된 '스피드업 규정'에 의한 것으로, 선수단 일부 혹은 전부 철수 시 감독은 즉시 퇴장당하게 되어 있다.
- 자서전도 있다. 《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9회말 리더십》,《김성근이다》《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자전적인 에세이. 중간중간 자기미화가 적지 않다.
- 2010년 10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무려 41년만의 등판. 포수석에서는
영혼의 호구 배터리김경문 두산 감독이 그의 공을 받아 줬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 타자만 잡고 안타 3개를 맞은 뒤[89] 2점을 주고 자진해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 출연, 그의 야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손님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하일성... 김성근 감독은 중간중간 '이 사람 왜 불렀어?'라고 농조로 툴툴거렸다. 한편 이날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한국 신문에 최초로 연속사진을 도입하게끔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으며, 선수시절로 돌아가면 이대호와 가장 붙어보고 싶다고도 밝혔다. 그 외 탐나는 선수로는 류현진과 봉중근을 꼽았다. 또한 자기가 이대호와 류현진을 맡게 되면 그들의 살을 뺄 것이라고(...).
- 2010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스포츠 부문을 수상하였다. 스포츠 지도자로서는 최초라고 한다.
- 2008년 9월 3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프로야구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5월 10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 프로야구 감독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뒤이어 2011년 5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7대 4로 이기면서 또 김응용에 이어 역대 감독 중 두 번째로 1,200승을 달성하였다.
- 2011년 8월 들어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2011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는 기습 인터뷰를 했다. 당시 SK 팬들은 한마디로 패닉에 빠졌다. 배은망덕은 프런트 종특이라느니, 인천예수를 골고다 언덕으로 내몰았다느니, 신생 NC 다이노스 1기 팬 모집이니 뭐니 하며 허탈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김성근 열풍이 식은 시점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이건 김성근이 조용히 떠나는 대신 작정하고 언플해서 구단과 이만수 감독을 한꺼번에 엿 먹인 것이었다. 제대로 엿을 먹은 SK 프런트는 인터뷰 발표 바로 다음날인 8월 18일자로 김성근을 경질했다.
- 야구계 기담으로 김성근의 저주 가 있다. 본래는 "김성근을 버리면 대가를 치른다(=김성근 없으면 안된다)"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김성근의 민폐질들로 구단과 후임 감독들이 고생한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 2011년 11월, 동서식품의 핫초코 미떼 CF에 출연했다. 야구시즌이 끝나 을씨년스러운 야구장[90] 관중석에서 보온병에 가져온 핫초코를 꼬마와 나누어 마시면서 '야구하고 싶다'는 꼬마의 말에 '나도요'라고 답하는 김성근 감독의 대사가 어째 서글프게 들린다는 평도 있었다. 이 때 꼬마가 "할아버지 야구 잘하세요?" 라고 묻자 김성근은 "쪼끔" 이라고 답했는데... 크리에이터가 솩빠여서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마자 가서 매달렸는데 계속 고사하는 것을 3달 동안 삼고초려해서 섭외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91]
- SK 감독 시절 올스타전에서 몸무게 순으로 라인업을 짜곤 했다. 그 결과 통산 도루 9개인 이대호가 1번 타자 출장... 그리고 이대호는 기대에 부응(?)하여 출루한 후 도루를 시도하다 도루사를 당했다.
- 2012년 11월 22일, MBC 새 프로그램인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에 첫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시작부터 예미넴 스타일로 등장. 초대 손님으로 장미란, 김재현, 마해영이 나왔으며 야구 시작할때부터 지금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고양 원더스의 구단주 허민이 김 감독의 생일선물로 S클래스를선물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원더스를 이끌어준 '전문가의 고마움과 함께 차 안에서 편안히 야구에 대해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근데 김성근 감독은 운전면허가 없다. 야구 외에 다른 일로는 시간을 좀처럼 쓰질 않아서 그렇다고.. LG 감독 시절에도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잠실을 오가는 모습이 지하철에서 자주 발견되었다.
- 2011 시즌 종료 후 스토브리그 때 한 LG 트윈스 팬이 김성근 감독의 LG 복귀한다고 터트린 거짓 루머 때문에 야구 팬덤 한정 '포도주스'라는 은어가 생겼다. 자세한 것은 포도주스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 징크스가 몇 가지 있는데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엔 팀 성적이 좋을 땐 속옷을 안 갈아 입었고, LG 트윈스 시절 연승 중에는 저녁식사를 꼭 삼각김밥으로 했다고 한다. 2008년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 때는 SK 와이번스의 원정 유니폼을 입었는데 두산과의 경기에선 원정 경기 승률이 좋았기 때문. 그리고 경기 중에는 화장실을 절대 안 가는데 화장실에 가는 순간 상대팀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92] 2010년 4월 14일 한화전부터는 '수염을 깎지 않으면 시합을 이긴다'는 징크스를 의식하기 시작해서 승리하는 동안 수염을 깎지 않고 있는데 2010년 5월 4일까지 SK가 16연승을 하는 바람에 무려 20일간 수염을 깎지 못했다. 이 수염을 깎게 만든 팀은 다름아닌 넥센 히어로즈. 또한 각 구장별로 가는 화장실 위치를 정해놓고 꼭 그 화장실만 갔다고 한다. 왜 이렇게 징크스를 지키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본인의 설명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만 지더라도 후회가 없다' 라는 것.
- 연습량이 어마어마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감독의 입에서 "너는 그만 연습해도 된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악바리였던 선수가 최동수였다. 일례로 최동수는 하룻밤에 스윙을 5,000개씩 했고, 스윙이 끝나고 나면 배트를 쥔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남이 손가락들을 펴 줘야 배트를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도 손수 최동수의 손을 펴 주었으며, 이에 최동수는 2001년부터 김성근 감독을 통해 프로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된다. 최동수 본인의 말에 의하면 매일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피를 토하던 시절이었다고. 2010년 최동수가 LG에서 SK에 트레이드되었을 때 오히려 최동수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기도 했다. 이진영 역시 신인 시절 너무 힘들어서 울면서 공을 받았다는 사례도 잘 알려져 있다. 류택현은 김성근 감독을 통해 커브를 전수받아 2001년부터 중간계투로 뒤늦게나마 두각을 드러냈다.
-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김정준에 대한 평가는 '아버지가 잘생겼다' 였으며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본인의 젊은 시절 외모가 상당했다는 내용이 꽤 자주 언급된다. 물론 젊은시절 사진이 꽤 남자다운 매력이 있는데다 당시에는 180cm가 넘는 장신은 드문 편이었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자서전에선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예쁘다고 언급하는데(과거 결혼사진을 보면 김성근 감독의 아내는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가족들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 [2] 이것이 김성근 감독의 신혼때 사진이라고 한다.
- 최훈이 한때 김성근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정우람 혹사 문제로 글과 카툰을 올렸다 논란이 된 적이 있었으나 논란의 발단이 된 카툰 1 2 카툰 2. 이쪽은 논란이 가라앉은 다음에 올라왔다. 경질사태 이후에는 삼국전투기와삼국전투기 외전에서 SK 프론트를 비꼬고 김성근 감독이 직언을 하나 쫒겨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3]~~
- 하지만 이는 한화 감독 부임전 이야기로 김성근이 쌍팔년도 야구를 시작한 2015년부터는 가장 앞장서서 김성근을 비판하고 있다. 2015년의 '이저씨'라는 만화와 2016년 414 대첩 이후 올라온 프로야구카툰은 이례적일 정도로 특정인을 비판하는 카툰이다.
-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사실상 최초로 팬들의 강력요구에 의해서 임명된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화 이글스 프런트는 김응용 감독과 계약이 끝난후 차기 감독에 김성근 감독을 임명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프런트의 의중을 알게 된 팬들은 이에 반발. 아고라에 청원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팬들이 단체로 한화 이글스 홍보팀에 수백통의 전화를 걸고, 심지어 한화 본사에까지 전화를 걸어 그 전화가 회장 비서실까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본사 1인 시위는 덤. 평소 신문을 보는 김승연 한화 구단주가 이를 모를리 없었고, 결국 구단 프런트에 김 감독 임명을 지시했다고 한다.
- 2004년 이치로를 예로 들며 이승엽 및 메이저리그 진출자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
- 김성근이 한미일 야구를 비교하는 인터뷰 #
- 2015년 4월 2일,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 선수들을 그린 파울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마지막에 하송 원더스 단장이 눈물의 해체 선언 때 등장하지만, 정작 구단주인 허민은 한 번도 안 나온다. 하지만 데럴 마데이의 혹사와 같은 어두운 면을 다루지 않는 등 논란이 좀 있는 영화이다. 설재훈과 안형권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원더스 해체 후 각각 SK와 롯데에 육성선수로 입단했지만 설재훈은 2015시즌 도중, 안형권은 시즌 종료 후 정리되었다.
- 2015년 5월 4일에는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 용병술을 주제로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비교한 야구병법 택재의 기술이 SBS 스포츠+에서 방영되었다.
- 유튜브 링크 *
- 한화 그룹 광고에 출연했다.
- 2015년의 신드롬으로 디시인사이드에 갤러리까지 생겼다. 주소
- 2012년 10월 14일 고양 원더스 감독 재직 중 같은 연고지를 쓰고 있는 농구단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홈 개막전에서 시투를 했던 적이 있다.
- 잘나가던 시절에는 그에 대한 책들이 많이도 나왔다. 2016년 기준 철지난 우상화 선전물이자 불쏘시개.
12 총평
자신이 성장한 1960년대의 일본야구를 2010년대인 현재까지 고수하는 시대착오적 지도자.
(부정적인 의미에서)언론플레이의 대가
KBO 리그판 지킬박사와 하이드
승리를 쟁취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명성을 높일 수만 있다면, 범죄 빼고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인물.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기에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려고 더더욱 성적에 집착한다.
하지만 오랜 감독 경력 동안 몇몇 팀에선 대단히 인상적인 성적을 올렸기에[93] 여전히 그를 명장으로 추켜세우는 측도 존재하는등.[94]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13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84 | OB 베어스 | 100 | 58 | 41 | 1 | 1위[95] | 3위[96] |
1985 | 110 | 51 | 57 | 2 | 4위[97] | 4위[98] | |
1986 | 108 | 56 | 48 | 4 | 4위[99] | 4위[100] | |
1987 | 108 | 55 | 52 | 1 | 4위[101] | 4위[102] | |
1988 | 108 | 54 | 52 | 2 | 5위[103] | 5위 | |
통산 | 534 | 274 | 250 | 10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89 | 태평양 돌핀스 | 120 | 62 | 54 | 4 | 3위 | 3위 |
1990 | 120 | 58 | 59 | 3 | 5위 | 5위 | |
통산 | 240 | 120 | 113 | 7 | | ||
연도 | 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91 | 삼성 라이온즈 | 126 | 70 | 55 | 1 | 3위 | 3위 |
1992 | 126 | 67 | 57 | 2 | 4위 | 4위 | |
통산 | 252 | 137 | 112 | 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1996 | 쌍방울 레이더스 | 126 | 70 | 54 | 2 | 2위 | 3위[104] |
1997 | 126 | 71 | 53 | 2 | 3위 | 3위[105] | |
1998 | 126 | 58 | 66 | 2 | 6위 | 6위 | |
1999 | 81 | 17 | 59 | 5 | 8위[106] | - | |
통산 | 459 | 216 | 232 | 11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2001 | LG 트윈스 | 98 | 49 | 42 | 7 | 6위 | 6위 |
2002 | 133 | 66 | 61 | 6 | 4위 | 준우승 | |
통산 | 231 | 115 | 103 | 13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최종순위 |
2007 | SK 와이번스 | 126 | 73 | 48 | 5 | 1위 | 우승 |
2008 | 126 | 83 | 43 | 0 | 1위 | 우승 | |
2009 | 133 | 80 | 47 | 6 | 2위 | 준우승 | |
2010 | 133 | 84 | 47 | 2 | 1위 | 우승 | |
2011 | 93 | 52 | 41 | 0 | 3위[107] | - | |
통산 | 611 | 372 | 232 | 13 |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시즌 | 최종순위 |
2015 | 한화 이글스 | 144 | 68 | 76 | 0 | 6위 | 6위 |
2016 | 144 | 66 | 75 | 3 | 7위 | 7위 | |
통산 | 288 | 134 | 151 | 3 | | ||
총계 | 2615 | 1368 | 1187 | 60 | |
14 관련 문서
- ↑ 1988년 4월 해임으로 임신근 코치가 잔여 경기 마무리.
- ↑ 시즌 도중 경질.
- ↑ 2001 시즌 초반 해임.
- ↑ 2001시즌 5월부터 감독대행으로 취임. 정식 감독은 2002년 부터.
- ↑ 시즌 도중 경질
- ↑ 부친의 출생지.
- ↑ #
- ↑ 홍창화 단장이 김성근 감독 부임 기념으로 만든 응원가로, 주로 심판 항의 등으로 그라운드에 오를 때 튼다.
- ↑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예예예 ×7
- ↑ 이 글을 쓴 김대호 기자는 불과 1년 전만 해도 김성근을 임권택과 비교하며 거장으로 칭송(!)했다. 이런 이들조차 멀리할 정도로 김성근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다.
- ↑ 김성근이 막 한화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의 문서와 대조해보자.
- ↑ 해태 시절 2군 감독을 맡았었으나 1군 감독이 아니라 제외하였다.
- ↑ 그가 감독을 맡은 태평양돌핀스가 포함된 삼청태현의 기록을 승계하지 않는다
- ↑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하여 최종 4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하여 최종 4위, 19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해태에 패하여 최종 3위,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빙그레에 패하여 최종 3위,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하여 최종 4위,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하여 최종 3위, 199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했으나,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지면서 최종 3위
- ↑ 과거 김성근의 야구는 야비하고 더러운 야구로 악명 높았다. 그러나 한화 감독 부임 직후인 2015년 황재균 빈볼 사건을 일으켜 여론의 엄청난 질타를 받고 벌금까지 물게 된 이후 특유의 더티 플레이는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다는 평이다.
- ↑ OB 베어스의 이광환, 삼성 라이온즈의 우용득, SK 와이번스 이만수
- ↑ 옆에 있는 사람은 동산고 출신의 故 최관수 감독.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를 당대 최강의 팀으로 만든 그 최관수 감독 맞다. 김성근 감독과는 기업은행 시절 원투펀치였으며 김성근 감독의 부인을 소개시켜 줬다.
- ↑ 당시 그는 한국어를 거의 못 했다. 프로 용병도 아니고 대학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지도 않았다는건...
- ↑ 구단 사장이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일본에서 교육받은 외국인 선수도 일본인 선수로 대우하도록 바꿨다)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 ↑ 그러나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린다.
- ↑ 나중에는 전등을 키는것조차 어깨가 안움직여서 힘들었다고 한다.
- ↑ 당시 투수들은 경기 후 아이싱은커녕 오히려 뜨거운 걸 어깨에 대고 있었다고 한다.
- ↑ 참고로 들고 온 사진은 대한민국 최초의 연속사진이라고 한다.
- ↑ 박영길은 재일동포 출신인 신용균이 최초로 싱커를 던졌다고 증언했고, 김영덕은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 본인이 한국에서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진 인물로 기록된 것을 스스로 부인하면서, 신용균이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졌으며, 김영덕 본인은 싱커를 처음으로 던졌다고 말했다.
- ↑ 문세광 사건 해당 문서 참조.
- ↑ 우습게도 그 항의하는것중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것도 많이 나온다. 이건 전에 김응용 감독이나, 같은 연배의 다른 노감독들에게도 규칙을 꿰뚫고 유리하게 이용하는 모습은 자주 볼수있는 특징이지만 김성근은 그들중에서도 거의 최상급이었고 자기 동년배들이 모두다 은퇴하고 야구인으로 남아있는 지금 현재 야구판에서는 김성근 만큼 규정을 꿰뚫는 감독은 거의 없다.
당장 2015년에 눕동님께서 규칙을 몰라 4루수를 만들어낸걸 보라.단 그 꿰뚫고있는 규정을 일일히 들어내 꼬장을 피우다시피 하는 모습은 보는 관중들이나 시청자들에게 짜증을 유발하는게 큰 문제(.....) - ↑ 한대화, 김기태(1969) ,선동열 ,김진욱(야구), 김시진, 양승호
- ↑ 그러나 이전에 김성근의 지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사퇴한 코바야시 세이지 前 코치에게 한국 야구를 무시한다는 투의 발언을 한 것과 에스밀 로저스의 의료기록을 봤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 때문에 위의 말을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태세전환 쩐다며 "박철새" 등으로 비판과 조롱을 받고 있다.
- ↑ 당시 삼성그룹 수뇌부는 삼성 라이온즈가 막강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우승에 실패한 이유가 정신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정신력을 강조하면서 오대산 혹한기훈련을 실시했던 김성근이 삼성 감독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 ↑ 미국 프런트와 달리 한국 프런트 야구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적부진에 대한 책임을 프런트가 지지 않으면서 감독 고유의 권한까지 간섭하기 때문이다.
- ↑ 파울볼 후반부에 원더스 해체가 결정된 후 술마시며 자긴 정치를 몰랐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사람 경력을 추적하면 이게 얼마나 치밀한 이미지 메이킹인지 알 수 있다.
- ↑ 물론 허민도 이득을 제법 봤다. 어차피 돈이야 썩어날 정도로 많아서 그 돈으로 인생을 즐기는 단계였기 때문. 허민은 야구선각자 김성근과 꿈을 쫒는 선수들의 든든한 후원자란 명예를 얻어갔다.
- ↑ 한편 방송 3분 30초경에 포브스가 산정한 2014년 한국 프로야구단 가치평가도 나오는데 1위 LG(1,265억 원)와 2위 두산(1,247억 원)이 유이하게 1,000억 원을 넘기고 있으며-3위 SK가 878억 원-, 한화는 꼴찌에서 두 번째인 8위(2014년 9구단 체제)로 653억 원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한화의 매출 및 인기도가 상승한 것이 나온다.
- ↑ 이때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가 한눈을 팔아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고 훈계를 한 뒤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 ↑ 이후 김성근의 후임 해설자는 바로 하일성
- ↑ 1위는 LG 트윈스, 2위는 두산 베어스
- ↑ 부상중 경기출전을 강행시켜 은퇴를 앞당겼다.
- ↑ 투수혹사가 얼마나 심했냐면 2016년 시즌 마지막 날 가진 은퇴경기에 등판했을 때 팔을 아예 아래로 내려야만 했다.
- ↑ NPB도 2000년대에 들어서 혹사를 당한 투수를 찾기가 매우 어렵고 투수 로테이션이 체계화 되었다. 또한 고시엔도 요즘 혹사당하는 투수들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 ↑ 정규시즌 기준 OB : 3->4->4->4->5, 태평양 : 3->5, 삼성 : 3->4, 쌍방울 : 2->3->6->17승 59패에서 경질, LG : 중도취임 49승 42패-> 66승 61패 4위로 SK시절 1->1->2->1->3에서 09년 2위 이후 10년 1위를 한 SK시절을 제외하고는 김성근은 단 한번도 첫째해 올린 성적 이상의 성적을 낸 적이 없다.
- ↑ 예를들어 09년 김현수의 타구에 맞아 부상당한 김광현을 빨리 올리자는 의견을 거부하고 김광현 없이 한국시리즈를 치뤘다. 그동안 김성근 감독 혹사 예를 생각하면 이례적이긴 해도 그 김광현은 바로 이듬해인 2010년 다소 무리하게 이닝먹고 2011년 147구 벌투 등 무리한 운용끝에 장기 부상당해 13년까지 고생했다.
- ↑ 바비 발렌타인이 치바 롯데시절 이걸 잘 써먹었고, 이때 치바 롯데에 같이 있었던 김성근 감독이 배운것.
- ↑ 타팀에서 방출된 연봉 높은 선수들을 수집해서 페이롤이 높았다.
- ↑ 김성근 감독은 2009년 윤재국이 부상 재발로 은퇴했을 때 크게 아쉬워하기도 했다. 쌍방울 시절부터 쭉 봐 온 선수였다.
- ↑ 2000년 김성근 감독이 2군 감독으로 있으면서 3억 신인인 배영수의 투구폼을 교정해 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5시즌 중 감독의 강판지시에 불응, 불펜에서 시위를 벌이다 선발자리를 박탈당하고 후반기에는 패전처리조로서만 등판하다
본인이 원하는 30경기를 넘게 뛰고시즌을 마무리하는 바람에 지금도 존경의사를 표할지는 미지수. 그런데 시즌이 끝나고 수술을 하기로 결심한 이야기가 실린 기사에서 김성근 감독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여전히 존경하고 있는 것 같다. - ↑ 일반적으로 선수들은 감독에게 혹사당해서 원망스럽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자신을 적극적으로 기용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 야구 특성상 어쩔수 없는 부분.
- ↑ 출처 : '리더 김성근의 9회말 리더십(정철우 저, 비전코리아)' 144페이지.
- ↑ 언론 인터뷰중이라 인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나중에 찾아와 귀싸대기를 때렸다고...
- ↑ 특히 이 점 때문에 어떤 팀을 가든지 해당 팀 프런트와 엄청난 갈등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SK 프런트는 팀을 황금기로 이끌었음에도 김성근 감독을 내심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 ↑ 그러나 2014년에는 자기 마음대로 훈련하려고 했다가 제지당하자 선수협을 디스했다.
- ↑ 회갑연의 주최를 주도했던 두 제자가 바로 김기태 KIA 타이거즈 감독과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이다. 특히 이연수 감독은 선수 시절에 김성근 감독이 두번씩이나 방출시켜서 인연이 좋지 못했지만 김성근이 이연수를 프런트로 거둬들였고 2000년대에 지도자로 전향하면서 김성근 감독과 사이가 좋아졌다고 한다.
- ↑ 결국 동국대 시절 은사이던 김인식 당시 해태 코치의 설득으로 해태로 갔다. 이외 자세한 내용은 한대화 문서 참조
- ↑ 당시 SK는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가 팀 전체를 휘감고 있을 때라, 코치들이 감독의 생각에 반하는 말은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본인에 말에 의하면 당시 부상때문에 오버로 던지기가 힘들었다고.
- ↑ 이대수의 경우 사인거래 때문에 트레이드 되었다는 의심도 있긴하다. http://www.mlbtour.re.kr/bbs/zboard.php?id=free&no=7867 #
- ↑ 한화시절에도 선수들에게 조언을 자주 해주다가 수석코치인 유승안에게 제대로 밉보였다고 한다. 얼마나 싫어했으면 "로마이어랑 재계약 할바에는 나를 자르라."라는 소리를 구단에 했을까...
- ↑ 4월에 잘하는 흑형은 사실상 거의 없다.
- ↑ 김성근/구설수 참조
- ↑ 김성근은 신일고 시절 화랑기 우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화랑기 우승은 고교야구 4대 메이저대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 9월 17일 경기에서 김경문 감독은 11-3으로 이기는 시점에 필승조 김진성, 필승조 최금강을 투입하였다. 이어 셋업맨 임정호가 9회 1사까지 1이닝 퍼펙트피칭을 했는데 아웃 2개 남기고 마무리 임창민으로 교체하였다. 그야말로 능욕교체. 정말 이 감독은 다른 대승하는 경기에선 이러지 않는다! 며칠 쉰 계투조의 경기감각 조절을 이유로 댈 수 있으니 겸사겸사의 마음으로 다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 ↑ 9월 18일에도 15-2로 대승하면서 필승조 이민호를 투입한 데 이어 선발타자 전원 교체라는 희대의 능욕을 선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전타자 9명 중 8명이 교체됐는데, 교체되지 않은 1명은 시즌 타율 0할대의 2군급 타자다. 정말 이 감독은 김성근 아니면 이러지 않는다!! 증거로 선발 9명이 규정타석을 채워줄만큼 왠만한 상황에선 교체를 안한다.
- ↑ 사람 좋다는 김경문 감독이 아예 이렇게 반응한 적도 있었다. # 이쯤 되면 완전히 악연인듯
- ↑ 김한수 감독의 경우 2000년에 김성근이 삼성 2군 감독으로 있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붙박이 주전이었는지라 별 인연은 없다.
- ↑ 다만, 1999~2000년의 해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1998년에는 피타고리안 승률로는 쌍방울(0.471)에게 뒤지던 해태(0.463)가 6위 쌍방울보다 4위 OB에 가까운 5위를 기록했다. 당시 해태는 이종범을 비롯하여 이순철, 조계현이 빠져나갔고 쌍방울은 박경완이 시즌 시작 전, 조규제가 7월에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었다.
- ↑ 실제로 김응용 본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
- ↑ 참고로, 넥센의 2016년 시즌 전까지의 투수진은 시망 그 이상이였다. 넥센이 2014년에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간 이유는 타격도 타격이지만, 외국인 투수였던 앤디 밴헤켄, 헨리 소사의 역할이 주효했을 정도.
- ↑ 데뷔 2년차이자 풀타임 1년차였다. 또한 아직 신인왕의 자격도 갖고 있었다. 이 시즌 혹사로 인해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고 신인상을 받았다.
- ↑ 사실 최창호, 정명원은 후임 감독 박영길의 책임도 있긴 하다.
- ↑ 97시즌이 끝나고 무릎 수술을 하였는데 재활이 되기도 전에 다음해부터 다시 굴려져, 이 무릎 부상은 김현욱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게 되었다.
- ↑ 김성근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서정환, 김응용도 무지막지하게 굴렸다. 세감독의 합작품이라고 보면 될듯.
- ↑ 밑에 신윤호항목과 비슷한 얘기로 김현욱은 김성근 감독 만나기전에는 아예 시즌 끝나고 야구를 그만두려고 작정했다가 김성근 감독 부임이후 1년만 더 노력해보자라고 바꾼게 대박난거라서 김현욱 개인적 생각은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는걸로 알려져있다.
- ↑ 2할7푼 대의 홈런왕인 이승엽을 누르고 정규시즌 MVP도 수상할 뻔했다.
- ↑ 사실 혹사에 둔감한 게 꼭 감독에게만 해당되는 법은 없다. 더군다나 신윤호는 김성근 감독을 만나기 이전엔 상황이 워낙 안 좋았고, 김성근 때 비로소 빛을 본 케이스다.
- ↑ 이 당시 순페가 남긴 명언이 '재활은 마운드에서 하면 된다'.이다 결국 이동현은 병역비라가 겹쳐서 재활기간도 길어지기 까지 했다. 그나마 이동현이 제 기량을 찾은 것은 2010년의 일이다.
- ↑ 방어율이 3.18이며 22경기 7승 5패
- ↑ 2006시즌은 김민기,진필중이 3점대 방어율을 찍고 심수창이 10승을 거두는 등 LG 투수진이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당시 LG 성적은 최하위.
- ↑ 권혁, 박정진, 윤규진, 송창식, 김민우
- ↑ 굴려진 걸로 끝이 아니라 그 사이에 특투까지 했다고 한다.
- ↑ 상술한 '인천예수'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만큼 방송용으로 순화한 것으로 보인다.
- ↑ 이 점에 있어서 또 정반대인게 김응용인데, 김응용은 기본적으로 훈육하는 아버지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선수들의 사생활은 앞가림만 잘한다면 적당히 못 본 체하면서 뒤에서 지켜보는 할아버지 타입이다. 각각 일장일단이 있는 타입.
- ↑ 2011년 5월 15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3일 <나는 프로다 - 프로야구 2군 선수단>에서의 한 장면. 이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던 야구 커뮤니티들은 저 장면에서 전부 다 빵 터졌다.
- ↑ 실제로는 60이 넘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중년 노년 아저씨들처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선수들이 훈련하러 올 때 사복으로 청바지를 입고 들어오는 것도 금지했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뒤에야 일상생활에서 청바지를 입어보고 편하다는 것을 느껴서 청바지를 자주 입게 되었다고 한다. 패션잡지도 틈틈히 보면서 연구도 했다고(....)
깨달음은 60부터다 - ↑ 1세대 야구 전문 기자. 아래 링크 기사의 본문 역시도 과거 김성근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기사를 그대로 퍼온 것이다.
- ↑ 쌍방울 감독 시절까지만 해도 91번 처럼 일반적으로 코치, 감독들이 달고 다니는 높은 번호를 달았었다.
- ↑ 무리뉴는 첼시 FC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전권을 요구했고 김성근 역시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할 때 전권을 요구했었다. 또한 주전 혹사도 심하다.
- ↑ KBS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피서를 갔냐는 질문에 1978년이라고 대답하면서 이제는 야구장이 피서지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 ↑ 1970년대와 2000년대의 반일감정 차이를 고려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왜색이 진하다는 이유로 모든 일본 매체의 수입이 금지되던 시절이었고, 백인천의 요시는 2000년대 이승엽이 출전하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중계방송에서 나온다. 이건 공중파와 케이블의 차이도 감안하여야 한다.
- ↑ 나지완 타석 때, 자신이 감독으로 있어서 통한의 준우승을 당했던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를 SBS Sports에서 틀어 버렸다. 중계를 보던 야구팬들은 단체로 빵 터졌다.
- ↑ 선두타자 김창렬에게 기습번트를 맞고 출루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다른 천무단 선수들은 김창렬에게 '왜 그랬냐'고 투정을 부렸다.(……)
- ↑ 수원야구장 으로 추정된다.
- ↑ 한때 음치가수 컨셉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재수가 이 광고를 패러디하였는데 패러디에서 나온 꼬마 이름에 이만수 감독의 이름을 갖다붙여서 디스하였다.
- ↑ 근데 이런 습관은 건강에 좋지 않다. 쌍방울 시절엔 이런 습관에 지나친 격무가 겹쳐서 신장암에 걸렸다.
- ↑ 1989년 태평양 돌핀스, 1990년대 중후반 쌍방울 레이더스, 2000년대 후반 SK 와이번스.
- ↑ 그나마 이런 평가도 2015~2016년 한화 감독 시절의 부진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 ↑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전·후기 리그 통합 승률 1위
- ↑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3위
- ↑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
- ↑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
- ↑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1위
- ↑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
- ↑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
- ↑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
- ↑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
- ↑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게 지면서 3위
- ↑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였던 삼성에게 졌으나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지면서 3위
- ↑ 김성근 경질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승률 0.224로 8위였으며,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 ↑ 경질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