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국왕 | ||||||
20대 경종 이윤 | ← | 21대 영조 이금 | → | 22대 정조 이산 |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대왕 어진 | ||
묘호 | 영종(英宗) → 영조(英祖) | |
시호 | 조 선 |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 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 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 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 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1] |
청 | 장순(莊順)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원릉(元陵) | |
휘 | 이금(李昑) | |
자 | 광숙(光叔) | |
호 | 양성헌(養性軒)[2] | |
출생 | 한성 창덕궁 보경당 | |
사망장소 | 한성 경희궁 집경당 | |
배우자 |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 | |
아버지 | 조선 숙종 | |
어머니 | 숙빈 최씨(淑嬪 崔氏) | |
생몰기간 | 음력 | 1694년 9월 13일 ~ 1776년 3월 5일 |
양력 |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81년 5개월 22일.) | |
재위기간 | 음력 | 1724년 8월 30일 ~ 1776년 3월 5일 |
양력 |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51년 6개월 6일, 1만 8,816일.) |
조선의 역대 왕세제 | ||||||
경종 이윤 (왕세자) | ← | 영조 이금 | → | 진종 이행 (왕세자) |
목차
1 개요
손자인 정조와 함께 조선 후기 르네상스의 기틀을 마련한 명군.
조선의 제21대 국왕.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고, 결정적으로 경종 시대 신임옥사를 거치며 즉위 이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러 야사나 일화에서도 평생 컴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비록 31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에 즉위했지만, 조선 왕 재위기간 중 가장 긴 장장 52년[3]을 재위했고,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군주[4]다. 장기간 집권하면서 치적도 많이 남겼지만 말년에는 여러 비판점도 제기된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임오화변(사도세자가 숨진 사건)이다. 영조는 당시 69살(재위 38년째)로 역대 최고령으로 재위한 상태였으나, 그러고도 14년을 더 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중적으로는 탕평책과 사도세자의 아버지로 유명한 왕이다. 정책, 정치는 크게 성공했지만 사도세자는 패가망신했다.이때 영조도 무척 잘못을 했다. 이제는 손자인 정조에게도 평생 상처를 줬다. 과장을 좀 보태면 정조 이후 조선이 크게 흔들리는 씨앗을 남기고 죽었다.
왕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옷을 재활용한 왕이다. 이게 뭔 소리냐면 임오화변 후의 정조의 세손 책봉식 때 특별히 자신이 세제 책봉식때 썼던 것들을 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5]. 물론 중종도 옷을 아껴입기도 했다.
2 생애
2.1 왕자 시절, 세제 시절
연잉군 시절 영조의 풋풋한(?) 모습. 21세 때. |
숙종의 총애를 받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나 숙종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인 미운 경종을 몰아내고 연잉군을 세자로 삼기 위해 노론 대신 이이명과 독대를 하고 노론에게 세자를 물먹일 것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세자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노론 대신 김창집, 이이명 등이 숙종이 "아이고 내가 눈도 잘 안보이고 골골해서 왕 노릇 못하겠다. 대리청정 어떠냐?"라고 말을 꺼내자 대찬성하며 세자의 대리청정을 지지한 것도 수상한 정황이다. 이에 윤지완을 비롯한 소론 대신들이 도끼상소까지 하면서 격렬한 반대를 하지만 숙종은 말을 가려 하지 않았다고 혀를 찰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후일 경종이 되는 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공은 없어도 실책도 하지 않으며 세자 자리를 유지했고 독특한 처신으로 노론 대신들에게 꾸지람까지 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숙종의 병환이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세자가 승지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이 세자를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반발할 정도였다. 이는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 할 정도이었다.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왕 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어디서 감히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너무 병환이 심해져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결국,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경종이 승계한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초반부터 경종을 우습게 알면서 갖은 모욕적인 처사를 했으며 마침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강제로 세제로 삼게 했다. 경종이 아들이 없었으되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 것을 감안하면 "너 아들 못낳지? ㅋㅋ 동생이나 후계자 삼아?" 하고 왕을 능멸한 것이다. 선조 시절에는 정철이 아들을 세자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가 "내가 아직 젊은데 이게 장난하냐?"라고 개발살이 났고 후일 홍국영도 정조 시절에 양자를 멋대로 들이고 전횡을 하다가 끝장난다.
각설하고 세제가 된 연잉군은 공부에나 힘을 썼으나, 노론은 경종을 아예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완곡히 권했고 경종이 받아들이면서 신임옥사의 난리가 난다. 우여곡절 끝에 노론은 지네가 역당이라는 것을 인증한 꼴이 되었으나 세제 본인은 사양도 했었고 유일한 혈육이다 보니까 무사했었다. 오히려 경종에게 청해 자신을 음해하려는 궁인들이 있다고 아뢰어 박상검, 문유도 등을 지목하고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거부했고 세제는 경종에게 사악한 자들을 전하 곁에 두면 되겠다고 했다가 경종에게 쌍욕을 듣기도 했다.[6]
이에 세제는 "사악한 자들이 나를 해치려 하니 세제 노릇 못해먹겠다"며 세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포했다. 이에 놀라서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 신하들도 박상검, 문유도를 처벌한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경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나인 박상검, 문유도 등을 처형해야 했고 그들과 체결하여 웃전의 사정을 살핀 궁녀 석렬과 필정도 자결했다. 이렇게 세제는 정치적 위기를 정면승부로 돌파하는 듯했는데… 삼수의 옥이 터지면서 그는 반란수괴로 몰리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김일경 등은 김성궁인을 캐낼 것을 요구하며 세제를 공격했고, 세제는 "이런 죄인이 어찌 세제의 자리에 있겠냐"고 눈물로 호소하며 세제 자리를 벗게 해달라고 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경종이 세제를 보호한다. 결국 37세의 나이로 경종이 승하하면서 연잉군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2.2 재위 초반기,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20대와 50대 시절의 초상의 얼굴부분 확대 비교. 눈꼬리가 더 올라간 게 포인트. 매부리코 등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
왕이 된 영조가 가장 먼저 회를 치기 시작한 것은 소론, 그 중에서도 자신을 죽이려 든 소론 준론이었다. 갖은 핑계로 김일경과 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 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소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런데 윤휴의 손자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준론과 남인을 규합하여 초거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완론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어그로가 잔뜩 올라 있던 준론과 남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초거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진압되었고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박살났으며 전라도에선 태인 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감사 정사효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선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선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 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완론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자세한 것은 각각의 항목 참조.
2.3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이후 영조는 소론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등과 노론의 홍치중, 홍치중 사후엔 김재로 등을 중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맞추는 쌍거호대 정책을 유지한다. 하지만 깊어진 적대감으로 인해 유척기를 비롯해서 탕평에 응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완론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광좌는 노론의 공공의 적이었다.
결국 영조가 비오는 날 숙종의 진현 앞에서 절하면서 "왕 노릇 못해먹겠다!" 라고 선포하고 나서야 신하들이 몰려와 비를 맞으며 통곡하며 "다시는 당파 싸움 안할게요. 당파 싸움하면 신들을 죽여주세요!"라고 맹세를 하는 일이 벌어졌고 다음날 이광좌가 죽으면서 노, 소론 대립은 한풀꺾인다. 하지만 당파 싸움이 끝났냐면 그럴 리가 있나?
설상가상으로 남인과 소론 준론이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면서 영조는 싫어도 남인과 소론 준론을 계속 처형해야 했고 나주괘서사건에 이어 최후의 소론 준론들이 영조의 친림 시험장에 나타나서 영조에게 "야 이 찬탈자노무 새끼야!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내가 갑진년 이후로 네놈이 선왕을 독살한 게장을 다신 먹지 않았다고 말해서 네놈 머리통을 날리겠어!"라고 최후의 발악까지 하면서 살아남은 소론 완론은 반역 전문 집단 쯤으로 몰려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열받은 영조조차 조태구, 유봉휘 등을 역률로 추죄하고 이광좌도 직첩을 거두면서 소론을 박살내고 만다.
이쯤 되면 조정은 쌍거호대는 사라지고 노론 1당 독재가 되고 마는데 겉으론 그렇지만 실상은 또 그렇지 않았으니 바로 영조가 척신정치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명문가들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한미하지만 외척이면서 똑똑한 노론 가문인 풍산 홍씨를 중용한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은 말직에서 순식간에 훈련대장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된다.
덕분에 경주 김씨를 비롯한 전통적인 노론 명문가들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왕에게 아부하는 예스맨의 탕평파들이 조정을 채우면서 조정 자체는 조용해졌으나 그 탕평파는 소론, 남인의 멸족에 가까운 타격으로, 사실상 노론 1당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왕에게 아부하는 무리라서 당색이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2.4 임오화변
그러던 중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니… 자세한 사항은 임오화변 항목 참조.
2.5 오락가락한 집권 말기, 그래도 한결같은 세손 사랑
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세손을 동궁으로 삼았고 그를 후계자로 보호했다. 영조는 몇달마다 영의정을 갈아치우는 등[7] 더 외골수적이고 포악한 면모를 많이 보였으며 동시에 수천명의 백성을 만나보는 등 여러가지 행보를 이어갔으나 뚜렷한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재위 전반부에 몰려있다.
한편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소위 청명당이란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유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는 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마누라가 어질어서 안된다."[8]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이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영조 46년에 십수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빡친 홍봉한과 김귀주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삼왕손이 유배를 가는등 정국은 혼란해졌으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이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유배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이들은 영조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승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순왕후 김씨가 정조를 지원사격하고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등의 정조의 측근들이 홍인한을 탄핵하면서 정조는 무사히 대리청정 3달 후 영조가 승하하자 왕으로 즉위한다.
2.6 사후
본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9년)에 영조로 고쳤다. 때문에 영조실록의 표지엔 '영종대왕실록'이라 적혀있다.(선종 → 선조와 마찬가지)
수명과 재위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요(堯)와 순(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후덜덜.
영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의 원릉(元陵)이다. 늘그막에 맞이한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덧붙여 영조의 첫 왕비인 정성왕후는 영조와 완전 반대쪽인 서오릉에 묻혀 있으며[9]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 역시 서오릉에 묻혀 있다. 안습.
3 치적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파간 세력 불균형으로 직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 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이고 삼수의 옥을 계기로 노론을 압박한) 소론을 박살내려 했으나 영조의 반대 등으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경드라이브를 걸었고 영조는 이에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시켜버렸다. 물론 등용된 것은 온건파인 완론 소론이었지, 준론 소론은 아니었다. 이후 벌어진 준론 소론과 남인이 합세한 이인좌의 난에서 이 완론 소론은 난을 집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남은 준론 소론 잔당들의 난리법석에 서서히 소론의 세는 위축되었고 결국 노론이 집권하게 된다.
일부 드라마 등에서는 영조가 실권없이 노론에게 떠밀려다닌 군주로 묘사되긴 하지만 이는 실상과 정반대다. 민진원, 정호를 비롯한 강경파 대신들이 죽은 영조 10년 이후로 노론은 사실상 영조에게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했어야 할 만큼 영조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유척기를 비롯한 외골수들은 끝까지 토적을 외치면서 탕평을 무시했지만 그런 이들의 주장에 혹해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바로 조정에서 대숙청의 바람이 불곤 했다.
영조의 즉위 초반에는 노론이 탕평하자는 영조의 말도 듣지 않고 열받은 영조에게 정미환국 한방으로 날아가고 소론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으며 영조 즉위 중후반부에 《천의소감》이란 책을 지으면서 집권 노론이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이 미친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10]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란 일갈에 한방에 날아갈 뻔하자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결국 영조는 경주 김씨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들에게 지친 나머지 명문가들을 쩌리로 만들고 풍산 홍씨같은 한미한 가문을 순식간에 조정 영수로 만들어 놓았고 영조 말은 당파가 붕괴되고 척신 정치로 귀결된다.
통치기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의 재위기에 완전히 수습되어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이 있고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사치스런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한 것도 영조대 부터다.[11][12] 하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순조대쯤에야 사대부나 민가에까지 정착하게 된다.
또한 연과 여(왕과 왕비가 타는 가마)에 원래는 금으로 칠을 하던 것을 주석으로 대체하게 하기도 했다.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수십년 간 금주령[13]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조 본인도 술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 본인은 "오미자차였다"고 변명했다. 또한 말년에 다리병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송다(松茶)를 마셨다는 기록이 많은데 말이 좋아서 차였지. 이것도 솔잎과 누룩을 넣어 만들었으니 사실상 술이나 마찬가지였다.[14]
비록 영조가 술을 즐겨 마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83세까지 장수한 왕이었으며,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통치기간이 길었던 왕이었다. 영조가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젊었을 적부터 경종을 암살했다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반대세력으로부터 암살같은 위협이 있을까 염려하여 먹는 것을 조심하면서 경계했고, 스스로 음식조절을 잘 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선천적으로 건강한 체질이라서 잔병으로 고생하지도 않았고, 선대 왕들이 하루에 5번을 먹는 수랏상을 3회로 줄여서 쓸데없이 과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가 얼마나 소식했느냐 하면, 여름에는 그냥 물밥에 고추장 굴비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반적인 수랏상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수라를 먹을 때 현미와 콩을 섞은 잡곡밥을 즐겨 먹었으며, 평소에 주로 먹는 반찬으로 육식을 적게 하고 채식 위주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오히려 왕이 먹는 수랏상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닐까 항상 염려했다고 한다. 게다가, 운동을 좋아해서 승마, 달리기, 국궁 같은 거칠고 격한 운동들을 즐겼기 때문에 더욱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활쏘기 실력이 유전이 되었는지, 그의 손자 정조는 "이성계의 현신"이라 불릴 정도로 어려서부터 각종 무예와 활쏘기에 능하여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정조 역시 왕세손 시절부터 끊임없이 주변의 반대세력으로부터 암살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방어하고 스스로 무예를 연마하면서 힘을 기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4 가계
- 정비 : 정성왕후 달성 서씨
- 계비 : 정순왕후 경주 김씨
- 후궁 : 정빈 이씨
- 장남 : 효장세자 이행
- 딸 : 화억옹주, 화순옹주
- 후궁 : 영빈 이씨
- 후궁 : 귀인 조씨
- 딸 : 화유옹주
- 후궁 : 숙의 문씨
- 딸 : 화길옹주, 화령옹주
5 한계
그렇지만 아래에서도 보듯 아버지로서는 그다지 훌륭한 임금은 아니였다. 즉위 과정 자체도 불안했고 정적들인 소론 강경파들이 전부 소멸된 후에도 이에 관련된 컴플렉스가 매우 심해 아들인 사도세자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엄하게 키우다가 사이가 벌어져 뒤주에 아들을 가둬 죽이는 임오화변의 비극을 일으키며 이 때문에 후에 왕위를 잇는 정조에게도 정치적,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주게 된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물 수는 없는 노릇.
거기에 숙종 시절의 환국,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완전히 금이 간 노소론의 피터지는 싸움에서 민진원, 정호, 유척기 등의 노론 명문가 출신 거물들이 토적을 외치면서 소론을 모두 죽일 것을 요구하고 탕평을 단호히 거부하자 이들에게 완전히 질린 나머지 말끝마다 떽떽거리는 이들 대신에 말 잘듣는 이들로 조정을 교체하기 위해 유학에서 반드시 금지하는 척신들을 대거 등용한다. 그 시작이 홍봉한이었고 종9품 말직에 불과했던 홍봉한은 7년 만에 훈련대장에 임명될 정도로 커졌으며 영조 46년까지 조정을 지배하는 실세가 된다.
나중에는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떠올랐고 종국엔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과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이 손을 잡고 영조 말년을 지배했다. 이들의 권세가 매우 커서 당대에도 비판이 많았고 가장 강력하게 이들을 배척한 이들이 김종수를 비롯한 노론 청명당의 선비들이었다. 영조 사후 정조의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정후겸, 홍인한은 처형되었고 김귀주 등은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홍봉한은 이미 완전히 실각한 상태에서 목숨만은 보전했다. 그리고 이들을 대신하여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역시 정조에 의해 숙청됨에 따라 척신정치는 완전히 청산되었지만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척신정치를 청산했던 본인인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안동 김씨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영조의 단점은 주로 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편인데 사실 영조 치세의 업적도 대부분 재위 전반기의 젊었던 시절에 몰려 있으며[15] 노년에는 안 그래도 독선적인 모습이 더 강해지는 경향까지 보인다. 게다가 노환으로 고생하는데도 권력욕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된 것.
덕분에 영조에 대한 현대의 평가는 꽤 엇갈린다. 명군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평가와 비뚤어진 성격에 초점을 맞춘 평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쪽에서는 즉위 이전의 군호인 연잉군으로 부르면서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16]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사초를 폐기한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 연산군, 영조가 사초를 왜곡 혹은 폐기한 왕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0일, 영조는 새벽까지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다. 영조는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제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영조)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17]이 일어날 것이라는 별의별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도 어쩔 줄 몰라하는데 이 때 호조판서 이정제가 나서서 "이것은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이야기"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고 영조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영조는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모두 물러나자 "사초의 책자를 모두 가져와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시황의 분서와 다를 바 없는 사상초유의 '사초폐기' 사건이었다. 사초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자 극심한 부작용이 생겼다. 임금과 신하가 나눴던 '심야대화'가 무수한 억측을 낳은 것이다.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재위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만약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첫 황제는 고종황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됐을 것이지만 건재했던 청나라가 가만히 있었을지는…
또한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제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이에 대한 설명
6 여담
6.1 인물됨
손자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태종, 세종대왕, 정조와 같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 그리고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왕위에 올라 왠만큼 기반을 다진 후에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
이와 같이 학구적인 면과는 다르게 성격은 의외로 급하고 감정에 기복이 심했으며 눈물도 많은 타입이었다.[18] 입도 더러워 면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신료들에게 퍼붓기도 했다. 영조의 손자였던 정조 또한 매우 다혈질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니 할아버지의 이런 면을 매우 쏙 빼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성격은 영조의 형인 경종이나 아버지인 숙종,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집안 내력에 가깝다.
그러나 영조의 무서운 면은 이와 같이 격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할 때에는 끝간데 없을 만큼 냉혹한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는 영조시대의 정치사 전반에서 잘 드러나는 편인데, 특히 사도세자를 제거할 당시에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개선가를 울리며 환궁하고, 사도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며 후속조치를 내리는 모습은 대단히 치밀하고 신중한 모습이다.
정치스타일은 아주 철저한 정통파. 잔수 안 쓰고 정공법을 선호했기에 걸리게 되면 말 그대로 박살나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자료준비를 철저히 하고 명분도 다지고 최후수단도 강구해놓은 다음 정면돌격하는 스타일이라 막기도 힘들고 막아낸다고 해도 피해가 큰 경우. 이건 세제 시절인 경종 치세 때부터 확립된 경우다. 신축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개발살나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태롭게 되자 이런 정면 돌파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19] 군주까지 오른 사람이라 왕이라는 위치에서 정공법 펴면 당하는 신료나 당파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벽서 등으로 음해하거나 반란 같은 수밖에는 없었다.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밥도 안 먹고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 때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선왕조 국왕들 중 가장 통치기간이 길며(52년) 가장 장수한 왕(83세)이기도 하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육류 위주의 식단을 즐기고 장수하지 못한 세종대왕과 대비된다. 영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제력이 강했는데, 식단에서도 이런 면이 잘 드러난다. 또한 하루에 간식을 합쳐서 5끼 정도는 먹었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오직 하루에 3끼만 챙겨먹는 등 소식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에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이들을 압박하기 위해 일부러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제법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견뎌냈다. 대체로 기름진 음식보다는 담백한 맛의 음식을 좋아했던 것도 장수의 비결.[20] 뿐만 아니라 식사는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먹는 등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신하들과 중요한 이야기를 의논하거나 심지어 강연을 하던 중에도 밥 때가 되면 신하들을 내버려두고 식사를 하러 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나름대로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스포츠를 즐긴 탓인지 체력도 상당히 튼튼했던 것 같다. 이처럼 건강미를 뽐내던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샌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 환골탈태!?[21] 즉, 식단조절과 운동 등의 철저한 건강관리가 있었기에 그만큼 장수하는 게 가능했던 것.
아버지를 닮아 성격의 변덕이 심하고 강퍅하며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22]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23]과거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전하께서 궁녀를 너무 많이 뽑으시는 거 아니삼?"이라는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걸 본 영조가 "내가 임금인데 궁녀도 맘대로 못 뽑냐??"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4]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정조 왕위 계승시 보여준 모습은 충공깽 그 자체. 신료들을 모아놓고 세손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하자 홍인한이 반대하였는데, 이에 영조는 밖을 보라고 하니… 칼을 뽑아든 갑사들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다 데꿀멍하고 순식간에 세손의 왕위계승이 확정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영조는 꽤 꽃미남 임금이었다고 한다. 정작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아름답지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고. 여담으로 가슴이 큰 여자 역시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고 한다. 또한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은 탓에 로리콘이라는 농담도 있다. 물론 현대가 아닌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나이 많은 남성이 어린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금기시되거나 뒷말이 나오는 행위는 아니었다. 왕이 붕어하면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왕비가 사망할 경우에는 지존을 내조할 지존의 부인이자 내명부의 수장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반드시 정실을 새로 뽑았다(왕들은 즉 의무적으로 재혼했다).
그런데 왕이 늙었다고 왕비를 왕만큼 늙은 사람으로 뽑는 건, 나이 든 미혼의 여자가 양반 가문에 없으니 불가능하였으므로 15세 가량의 미혼 여자를 간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왕의 어머니 뻘인데 왕보다 어린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예컨대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나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 등. 후궁 들 중에 짬 좀 되고 출신 배경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는 이를 뽑아 승격시키면 안되는 거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영조가 숙종대 이전의 왕이었다면 (세자 시절의) 문종과 성종의 전례가 있어서 되었을지도 모르나, 영조 시기는 숙종이 후궁의 왕비 책봉을 금지한 이후였으므로 불가능했다.
정실인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잔치도 파토났고,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야사에는 결혼 첫날밤에 정성왕후가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25] 그 이후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만 봐서는 이게 대체 왜 소박맞을 일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마누라의 이 발언을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숙빈은 출신도 불분명한 일개 나인 출신으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외모와는 달리 손마디도 굵고 손이 참 거칠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연잉군(당시)으로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정성왕후의 남동생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 그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 두시라." 라고 발언하기도 했다.[26] 어쨌거나 영조는 덕분에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후술하겠지만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날에 사위가 세상을 떠난 것을 추모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보면 야사의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정성왕후는 영조에게 죽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담증 가지고 엄살부린다고 씹어버렸고 그녀의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하여 영조가 진찰내용을 간접적으로 보고받을 정도였다. 그녀가 죽은 후 영조가 죽은 마누라를 팽개치고 사위 문상을 가자 대간이 경악하여 결사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27] 해버리고 강행했다. 다만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의 눈치를 본 탓이다.[28][29] 영조는 오히려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려고 빈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30]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31]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 게 한이 맺혀 시름시름 앓다가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론 정성왕후도 나름 장수하신 분이다. 1757년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요즘 기준으로는 일찍 돌아가셨단 소리는 듣기 애매한 수준이다. 또한 1724년에 왕비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6.1.1 아버지 영조
왕으로서는 명군이지만 아버지로서는 0점.
유교 국가의 군주로서 가장 유교적이지 못했던 왕 중 하나.
평가에 앞서 유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삼강오륜'에 '부자유친'이 있다. 보통 유교는 '충', '효'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내용이지만, 부모로서 자식에게 마땅한 도리를 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 역시 있었고 매우 중요했다('애자, 교지이의방, 불납어사' - 사랑하는 자식을 의로운 방도를 가지고 가르쳐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가정 내의 당연한 도리에서 정당성을 찾아 국가 통치 이념의 근본으로 삼던 것이 유교이다(군사부일체).
조선 왕조에서 가장 패륜적인 왕이라고 할 수 있는 태종, 연산군도 각각 예상되는 숙청으로 인한 목숨의 위협, 아무리 어머니가 죽을 만한 짓을 했다지만 그 분노로 인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감안하면,[32] 그렇게 패륜적이라는 세조도 단종을 며칠동안 굶겨서 죽이진 않았다.
자기가 자식을 그렇게 키워놓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잔혹하게 살해한[33] 영조는 분명히 삼강오륜 하나 못 지킨 패륜군주이다. 정 죽여야 했다 쳐도 사약으로 사사하는 등 인간적으로 죽일 방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좀 더 상세히 기술하자면 대체로 아들은 미워했고, 딸에게는 죽고 못 살았다. 즉 희대의 딸바보. 《한중록》의 묘사에 따르면, 자녀들 중 몇몇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화협옹주)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고(ex. 화평옹주, 화완옹주). 또 영조가 화협옹주를 미워했다고 묘사하나, 저자가 시누이들을 싫어했던 혜경궁 홍씨다 보니 신뢰성이 의심되는 상황. 오히려 화협옹주가 위독했을 때 영조가 취한 행동이나 그녀 사후 영조가 보여준 반응을 볼 때, 한중록의 묘사는 더욱 앞뒤가 안 맞는다. 다만 영조가 편애했던 화평옹주나 화완옹주보다는 화협옹주를 덜 사랑했던 건 확실하다.
영조의 자식 차별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날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어 잠시 한방에 있었는데, 그걸 영조가 보고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서 사도세자를 죽이려 들었고, 사도세자가 기겁하여 창문을 통해 달아나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영조는 자신이 싫어하는 자식과 좋아하는 자식이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할 정도였던 것. 그렇다 하더라도 영조의 반응은 지나친 데가 있어, 사실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근친상간 관계였고 이를 영조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가 하는 썰이 제기되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들이자 자신에게는 친손자들인 의소세손과 정조는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의소세손은 첫 친손자다 보니 안 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의소세손을 가장 총애한 딸 화평옹주의 환생으로 여겼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다. 반면 정조는 처음에는 어리석은데다 상중에 잉태된 아이라고[34] 미워했으나 날이 갈수록 총명한 모습을 보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여워했다.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정조의 재능을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록과 한중록을 교차검증해 볼 때 아들에 비해 딸들을 지나치게 아낀 것은 사실이다.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에는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었는데, 이 날 신하들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다.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00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화순옹주가 남편이 죽고 따라 죽기 위해 곡기를 끊었을 때도 친히 행차해 말렸다. 이 때 영조가 미음을 먹으라고 명령하자, 억지로 마셨다가 곧 토해버려서 영조는 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탄식하며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화순옹주는 단식 14일 만에 죽었는데, 배신감을 느꼈는지 정려[35]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에 '불효요 불충이다'라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은 것도 비슷한 시기이다. 이 시점에서 화순옹주를 정려하면 화완옹주도 순사(殉死)를 하라는 뜻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화순옹주는 결국 정조 대에 정려된다. 화협옹주가 위독했을 때도 한걸음에 달려가 밤을 새워 딸의 곁을 지켰고, 결국 그녀가 죽은 뒤에도 밤늦게까지 환궁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는 시집 보내고 나서도 아예 궁에서 살게 했다. 그야말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강의 딸내미바보.
아무래도 아들에게만 가혹하고 모질었던 것은 그의 성장배경 탓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고, 다른 남자 혈족들은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이런 환경에서 조금만 삐뚤어지면 자기 자식, 특히 아들은 자신의 뒤를 물려 줄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로 보게 될 수도 있다.[36]
특히 경종 독살설이 야사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일이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될 만한 심리상태였다면 자기 아들, 특히 그 아들이 제법 무예에 능하고 영리해 보인다면 그 순간부터 아들은 자식이 아니라 자리보전을 위해 죽여야 하는 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있다. 물론 개연성과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도세자가 단순 무예에 능하고 영리해보인다는 이유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궜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선 무예에 능하다는 것에 대해 영조는 세자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여러차례 실망을 드러냈고 사도세자가 공부를 할때 영리한 면모를 보이면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양녕대군 급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꾸짖고 닦달하는 것도 사도세자가 공부에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서이다. 머리는 좋아보이지만 학업을 멀리하는 사람이 정적으로 보이긴 어렵고 그냥 사도세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영조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결부되면서 차차 발전하여 나중에는 죽일 정도로 미워진 것일 가능성도 크다.
영조가 아들 교육에 조급했던 것은 사도세자가 늦둥이 였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조선 왕들은 환갑(60세)을 넘기기 힘들었는데 사도세자는 영조가 40세가 넘어서야 태어났다. 영조가 다른 왕들처럼 50대에 죽으면 세자는 10대에 왕이 되는 것이니 영조는 세자가 공부에 흥미를 가지길 기다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몰아붙였으나 세자는 총명한 머리에 비해 공부에 대한 흥미는 모자랐고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일단 자기 아들을 미친 듯이 몰아붙여 광증을 앓게 만들고 뒤주에서 굶겨죽인 사람이니,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람이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마도 강박증이나 편집증 증세가 심각했을 듯 하다. 단 의심병 문제는 과거의 선조, 인조에 비하면 영조는 상당히 문제없는 편이다. 그가 의심병이 심했다면 이인좌의 난 이후로 완론 탕평책이 유지될 리가 없다. 의심병에 시달리는 양반이라면 준론이 난을 일으켰는데 완론이라고 역적이 아니라고 보일 리가 없고 훗날 영조 31년의 나주괘서사건, 신치운의 왕의 친림시험장 테러까지 이어지는 준론의 각종 역모와 발악에도 소론을 꾸준히 등용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직접 이름까지 거론되어 과거의 왕들같으면 진작에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는 박문수까지 보전해주었다.
만일 이 증세가 조금만 더 심했으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만약 정조가 처신을 개판으로 했으면 그랬을 수도 있다. 정조의 이복형제들이자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은언군, 은신군, 형제가 '추종을 외람되이 거느리고 방자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폭발한 영조에 의해 모조리 유배를 가서 죽는날까지 풀려나지 못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 이면에는 풍산 홍씨가와 경주 김씨가의 대립이 있었고 경주 김씨 측이 왕손들과 친한 풍산 홍씨를 공격하기 위해 벌인 일이지만서도 자기 친손자들이 처신을 엉망으로 했단 이유로 이렇게나 엄벌할 정도면 정조라고 예외일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학업에 열중하고 술과 여색을 멀리하는 등 영조의 마음에 쏙 들게 행동했고 훗날 영조가 죽기까지 십수년 간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꾸지람이나 질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야사에선 실제로 죽을 뻔한 적이 한 번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맹꽁이 서당》에서는 정조가 읽고있는 책 내용에 영조가 싫어하는 내용(첩의 아들이 왕이 되어서는 안된다.)이 있었는데 정조가 얼떨결에 거짓말로 그 부분만 가렸다고 말하자 영조가 확인차 가져와보라고 했다. 이를 가져다 주려던 홍국영이 무언가 이상한걸 느껴서 그 부분만 가리고 가져다 주어서 살았다는 내용이 있다.[37]
사도세자에게 시호를 내린 문제는 오히려 아주 냉정한 정치적 계산이 들어있었던 것이 맞을 것이다. 훗날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긴 해도 생부가 역적이자 서인으로 남을 순 없으니 죽기를 기다렸다가 즉각 사도란 시호를 내려서 사도세자가 미쳐서 그런 거지 역적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었고 사도세자의 죽음 자체도 단순히 폭발하여 날뛴 것 치곤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하고 냉정하게 이루어졌다.
아무튼 자기 아들에 한해서는 극심한 강박증세를 보였다는 건 확실하다. 지금까지도 현대 사람들에게 까이는 대표적인 흑역사인 이 사도세자 관련 사건 덕에 영조는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물로 여겨진다. 여러가지 업적이 많음에도 평가가 엇갈리는 건 이 탓인듯. 사실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음에도 그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 때 보인 태도는 상당히 완고했으나, 그에 반해 손자인 정조의 경우에는 사도세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어떻게든 왕위를 보장해주려 애를 써서 이후에는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그러나 실록을 보아도 과연 자기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말년까지 후회일랑 없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정조 보고도 사도세자의 이름을 한 글자라도 높이면 그건 날 잊고 종사의 대의명분도 잊은 것임을 명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죽었으니 왕위는 당연히 정조가 계승하는게 맞는데 정조를 보호해 준 것을 이상하게 해석하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거기에 정조는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도 영조가 거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식으로 예뻐했다. 다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 자체는 후회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를 잃은 정조에게 미안해하거나 안쓰러워하는 기색은 여러 번 보인 일이 있는데 영조는 '내가 대의를 위해 죽였다. 문제 있냐?'라고 대놓고 말하기가 그랬는지 홍계희, 김상로가 나쁜 놈이라고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도 했는데 문제는 정작 사도세자가 살아있던 시점에서는 영조가 홍계희, 김상로 보고 세자를 옹호한다고 벌을 주었고 실제로 그들이 사도세자를 압박한 정황은 없다. 게다가 그런 발언은 정조가 훗날 내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죄없이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나중에 남인이 이게 다 노론 때문이다!를 외치는 도화선이 되었고 훗날의 이덕일 음모론의 최고 떡밥이 되었다.
사도세자를 끝내 사사한 일로 아들을 미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빈 이씨 소생인 장남 효장세자는 총애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조숙하고 총명한 모습을 보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효장세자가 갑작스런 병으로 10세에 요절했을 때 몹시 애통해했다고.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 변화를 감안하면 효장세자 역시 사도세자처럼 장성했을 경우 영조의 그에 대한 총애가 한결같았을지는 미지수이다.
6.2 경종 독살설?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38][39],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또한 영조 31년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괘서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40]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41]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린 다 안다!" 등 대놓고 우릴 죽여라! 라고 개겼다.[42]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랏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43][44] ,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45] 사실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46]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확실히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긴 하다. 경종 독살건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 심지어 울다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고 말을 못한바람에 소론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실록에 기록이 되었다.
몇가지 덧붙이자면 당시에도 감과 게장이 상성이 최악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있었고, 영조가 읽었던 책들중에서 의학서적이 있었는데 그 의학서적에도 감과 게장의 관계는 아주 잘 나와있다.
6.3 영조의 노망?
아무래도 조선 왕조의 왕 중에 최장기 집권, 최장수 기록을 세운 왕인데다가 가뜩이나 성격이 왈가닥에 편집증적이고 결국 이후에는 노망이 나신 듯하였는데 이에 관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다.
조중회라는 신하가 영조가 종묘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들렀다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간언을 하여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이 있었다. 영조가 "그 신하를 당장 귀양보내라!"하고 노발대발하였는데, 하필 그 신하가 충신중의 충신이라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였고 영조가 "당장 귀양보내지 않으면 대신 네놈들을 귀양보내리라!"하고 역정을 내면서, 엉엉 울며 '내가 늙으니 저런것들이 내 말을 안듣지…' 하며 연못물에 빠져죽겠다 하여 발만 잠기는 웅덩이에 계속 서 있었다.[47] 그래서 결국 그 신하를 귀양보내기로 했는데… 영조가 그제서야 연못에서 걸어나오고 궁에 입궐하면서 껄껄 웃으며 "이제야 속이 후련하구나!"하고 그 신하를 다시 불러들였다. 귀양보낸 것까지 취소하고!
이 해프닝 이후로 사람들이 영조를 '노망났나?'하면서 수군댔다고 한다. 어머니 사당에 자주 간다고 간하는 신하도 유배, 마누라 죽은 것도 팽개치고 사위 보러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신하도 유배, 사도세자 운운한 신하는 사형. 사실 영조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난동을 부리면서 닥치는대로 신하를 벌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을 거두는 행위는 젊은 땐 좀 덜하긴 했어도 재위 기간 내내 이랬다. 말년에 영의정만 미친듯이 갈아치우기도 했다. 게다가 세손을 이미 후계자로 삼아 후계구도가 탄탄했고, 영조의 왕권 또한 오랜 세월끝에 굳게 다져졌기에 상왕으로 있던 태종처럼 거리낄 것이 없어 일부러 그런 점도 있다.
영조 노년에 신하로 생활하는 것은 매우 고달팠을 법 한데 생각해보자. 장유유서의 유교사회에서 임금이 환갑을 넘어 장수한 노인인데다가 둔하기는 커녕 머리회전과 눈치가 빠른 정치고수이다. 게다가 머리회전만 빠른게 아니라 툭하면 울고 툭하면 화내고 툭하면 짜증을 내며 자기 감정마저 수싸움에서 밀고 들어온다. 나이가 많으니 자연히 경험도 많고 수읽기에도 능한 정치괴물이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오죽했으면 임오화변 때도 '저 영감 또 시작이구나. 저러다 곧 풀어주겠지??' 하고 처음엔 궁인들이 뒤주를 열고 세자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영조는 결단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며, 사도세자가 숨진 까닭도 주도면밀한 계략 때문이었다.
7 창작물에서
7.1 사극
파일:Attachment/영조/info.jpg
좌측이 이산의 이순재, 우측이 대왕의 길의 박근형.
- 사극에서는 어째 본인이 주역이 되기보다는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정조에 관련해서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장희빈이 주인공인 사극에서 아역으로 등장하곤 한다. 많은 배우들이 영조를 맡았지만 그 중 《대왕의 길》의 박근형과 《이산》의 이순재 포스가 절륜. 특히 박근형 씨는 실제 영조의 어진과 거의 판박이의 얼굴이라 싱크로율이 높은 것도 특징. 박근형 씨는 영조의 세제 시절을 연기하기도 했다. 몇 분 정도만 등장했고, 바로 영조 시절로 넘어갔지만 대역 쓸 생각은 못했던 건가. 《동이》에서 아역배우 이형석이 어린 영조로 출연했는데 영특한 모습과 어린아이 특유의 귀여움으로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회에서는 청년 영조 역으로 《탐나는도다》의 얀으로 알려진 이선호가 잠깐 출연했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전국환씨가 출현했다.
- 유준상이 박문수로 등장했던 MBC의 《어사 박문수》에서는 조민기가 영조를 연기했는데,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여기서는 중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운동을 좋아했던 사실을 반영했는지 격구를 하는 장면도 있을 정도.
- SBS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한석규가 영조 배역을 맡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보여주었던 연기력과 아들 사도세자를 맡은 이제훈과의 파파로티 조합 때문에 많은 팬들이 기대를 하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강한 신권에 시달리는 불쌍한 왕으로 등장하여 역덕들은 이미 통곡할 지경. 배우의 연기력만은 역시 한석규란 말이 나오긴 했다.
- 대박에서는 여진구가 맡았다. 그리고 무려 주연이다.[48]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영조의 치세가 아닌 메인 주연인 대길이 이인좌에게 맞써 싸우는 스토리라 이인좌의 난을 진압할때까지만 진행된다.
사실 치세가 너무 길어서, 영조를 주인공으로는 사극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을 듯하다. 만약 만든다면 《야인시대》와 《연개소문》의 선례를 따라 젊은 시절과 늙은 모습을 각각 다른 배우가 맡는 게 좋을 듯.
7.2 만화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고종 때 묘호를 변경하면서 존호를 추가했다.
- ↑ 이 호는 영조가 재위 전에 살던 사가(잠저)인 창의궁의 한 누각 이름으로 부왕 숙종이 지어주었다. 영조는 이를 그대로 자기 호로 썼다.
- ↑ 평균 재위기간의 2배 하고도 14년, 조선왕조 519년 역사 중 영조 혼자서 무려 1/10을 차지한다.
- ↑ 숙종(46년), 고종(44년), 선조(41년), 중종(38년)이 뒤를 잇는다.
- ↑ 물론 애초에 옷이 떨어지면 기워 입을 만큼 아끼긴 했다.
- ↑ 실록에서는 세제에게 경종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렸다고 나온다. 이는 왕이 쌍욕을 했을 때 실록에서 쓰는 일종의 필터링이다.
- ↑ 1년에 3명을 10번이나 영의정에 제수했다.
- ↑ 경주 김씨 일파를 등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척을 중용하는 것이라며 정순왕후 김씨가 직접 반대했다.
- ↑ 사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묘를 만들 때 자신이 들어갈 자리도 만들어 뒀으나,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를 생각해서 결국 따로 묻히게 됐다.
- ↑ 둘 모두 소론의 초기 영수들이다.
- ↑ 그러니 사극에서 영조대 이전시대에 쪽진머리를 한 것은 모두 고증오류이다. 하지만 가체로 인한 여배우들의 목의 부담 때문에 그런것도 있다 하니 이제는 하나의 사극 트렌드가 된듯도 하다. (하긴 그 당시에도 가체가 무거워 목이 부러져 죽은 사례가 있었으니…)
- ↑ 다만 가체를 금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사치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공식행사 땐 가체를 착용하는 것이 맞다.
- ↑ 재위기간(1724~1776)을 포괄하였는데, 그 정도가 심하여 사형을 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다행히도 후에 권좌에 오른 정조는 이 부분에 대하여 깨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즉시 금주령을 해제하고, 금주령을 발포하라는 일부 신하들의 요구도 쿨하게 씹었다.
- ↑ 김관주의 상소에서 영조가 다리병으로 고생할때 송다를 써여했는데 홍봉한이 금주령 기간이라고 거부한것이 나오는데 차라면 왜 홍봉한이 금주령을 들먹여 막았겠는가
- ↑ 거기다 이때는 영조의 정통성 문제로 왕권도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들끓던 시기.
- ↑ 사육신이 세조를 수양대군이라는 군호로 낮추어서 불렀던 것과 폐위되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현대에도 평가가 나쁜 조선 임금들은 즉위 이전의 군호로 부르면서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 순서대로 하자면 수양대군, 하성군, 능양군, 연잉군. 이성계나 이방원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쪽은 쿠데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게다가 이 사람들이 태어날 당시에는 왕이나 왕족이 아니라 고려의 신하였을 뿐이기도 하고...
- ↑ 1689년의 기사환국 때 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
- ↑ 눈물을 무기로 삼기도 했다. 숙종, 경종과 관련된 곳만 갔다 하면 숙종과 경종이 그립다고 울었으니… 수신을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표현하는 건 매우 좋은 프로파간다였다.
- ↑ 다만 삼수의 옥이 터져 역적 수괴로 몰리자 그때는 그야말로 데꿀멍했다. 바로 거적을 깔고 "나같은 놈이 세제라니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페세제를 청했다. 경종의 보호로 왕위를 잇게 되긴 하지만.
- ↑ 역대 조선왕들은 기름기가 많고 맛이 풍성한 민어를 즐겼으나, 영조는 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 외에 즐겨찾는 별미로는 송이, 전복, 새끼 꿩, 고추장 등이 있었는데, 대체로 기름기가 적은 음식들이었다. 말년에는 특히 고추장 없이는 입맛이 돌지 않는다할 정도로 고추장 홀릭이 되었다.
- ↑ 실제로 오래 산 노인 중에는 검은 머리가 나거나 이가 다시 나는 사례가 드물지만 종종 보인다고 한다.
- ↑ 정확히는 무강(武講)
- ↑ 동시대 인물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당시 뜸을 들인 초관인 홍건이란 자가 몰라서 그런거다 지레짐작하고 볼기를 쳤는데, 후에 홍건이 넌지시 영조의 답이 진작에 틀렸으나 일부러 모른 척 했다고 일러주었다. 신하들 앞에서 망신살뻔한 영조는 그의 배려에 감동해 지방수령으로 올려주었다는 얘기다.
- ↑ 그런데 이현필 사건은 당대에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었다. 왕에 대한 직접적인 모욕으로 여겨질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영조 13년, 실록에는 한 신하가 이현필을 처벌하라고 간언하면서 "과거 급제에 눈이 멀어서 왕을 능멸한 역적을 처벌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몇 달을 끌다가 영조가 그냥 봐주고 합격시키는 선에서 끝났는데, 지방의 현감으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합격이 취소되다가 결국 이현필이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영조 40년) 벼슬이 다시 회복되었다.
- ↑ 첫날 밤 영조가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무심코 "힘든 일을 하지 않아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영조의 눈 밖에 났다고 한다.
- ↑ 이 말을 세상에 알린게 다름아닌 영조다! 즉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
- ↑ 다만 정순왕후의 눈치를 본 이유는 정조가 정순왕후를 두려워해서 그런 게 아니라 죽기 직전에 정순왕후를 찾을 정도로 정순왕후와 친밀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순왕후 항목 참조.
- ↑ 나중에 문정왕후도 중종이 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는 모양.
- ↑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
- ↑ 다만 그렇게 보기도 힘든게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 하나는 지극했다. 나중에 경종에게 신하노릇 하기 싫었다는 신하를 보며 "야 임마 선왕께서 경종께 한 우애가 얼만지 알어?" 하며 분노했다.
- ↑ 이들의 행동이 결코 정당화되진 못하지만 적어도 심정적, 상징적으로나마 근거가 있었고, 그 원인에서 자신의 의지 외에 상당한 압력(1차 왕자의 난의 경우 아무 공적도 없던 이방석이 후계자로 정해졌고 정도전의 움직임도 매우 불안했다, 2차 왕자의 난에선 태종은 방어자의 입장이었다. 연산군의 경우 폐비 윤씨의 사건을 숙청에 이용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높지만, 자신이 어릴 때 어머니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잃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이 가해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 ↑ 영조가 사도세자를 박대한 것은 실록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
- ↑ 정조의 친형 의소세손이 3세에 요절했을 때,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임신 중이었다.
- ↑ 효자나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 앞에 문을 세우는 것. 효자문이나 열녀문 등이 있다.
- ↑ 일본 센코쿠 시대 최강이라 불리우는 다케다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도 아들을 경계했다고 알려졌는데 후에 무혈쿠데타로 추방당하게 되는 사례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성장배경과는 상관없이 성격상 꽤나 거슬렸을수도...
- ↑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한층 더 과격한 연출을 했다. 해당 부분의 책장을 아예 찢어내 버린 것. 정조가 영조의 앞에서 무사히 살아나오자 홍국영은 죄를 청하기 위해 한나절 동안 정조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이후는 다 아시는 대로 정조와 홍국영의 약속이 오간다.
- ↑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
- ↑ 아래에 나오는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영조에게 친국을 당하던 소론 선비가 "너는 숙종대왕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영조(박근형 분)가 "그럼 내 얼굴을 자세히 봐라!"라고 하고, 영조의 얼굴을 본 선비가 울부짖으며 "참으로 숙종대왕의 용안과 똑같소이다. 신을 죽여주소서 흑흑." 하는 장면이 나온다.
- ↑ 경종이 죽은 해. 즉 네가 선왕에게 게장 먹여 독살한거 다 안다! 라는 조롱이다.
- ↑ 영조 31년 신치운의 심문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
- ↑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의 친국 정도를 빼면, 아니 실록에서는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31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릴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칭하면서 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
- ↑ 실록에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잘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먹은 후에 복통과 설사가 계속되었다고.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안 그래도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
- ↑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만드는 중간 중간 간장을 따라내 가열해서 염도를 최대한 올려 주는 작업을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그것도 가열되지 않아 소화에 더 큰 에너지가 드는),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중인 환자에게 먹일 만한 음식은 아니다.
- ↑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
- ↑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조는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즉 그 긴 통치기간 내내 시달린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황을 소론 측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인좌의 난.
- ↑ 참고로 이때가 한겨울이었다. 까딱하면 동상도 걸리는 날씨이니 신하들이 애가 탔을 것이다. 게다가 발만 잠긴다고 해도 노인이라면 자칫 사소한 감기로 인한 폐렴이나 동상 후유증으로 사망할 여지가 있다.
- ↑ 다만 메인 주인공은 본인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버려진 왕자인 대길(장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