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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켈하우베를 착용한 모습.
탈모 임에도 불구하고 멋을 잃지않는 노익장의 모습
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
본명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비사맥(比斯麥)이라고 한다. 키도 커서 190cm(IMDb)에 달한 장신이었다.
비록 군비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몸에 지니는 정열을 지녀야 야 할 것이며, 또한 감히 그와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지금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연설 전문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좋다.[1]
모든 군인과 정치가들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 오토 폰 비스마르크[2]
철의 재상.[3] 천재적인 외교술과 정치력으로 19세기 말 유럽 전체와 전세계를 통제했던 인물. 독일 제국의 아버지.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재상이자 독일 제국의 재상. 대부분 그가 정확히 뭘 했던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어째 철혈 재상이란 별명만은 친숙하며, 대한민국 세계사 교과서 수준에서는 '독일 제국 건국의 주역'이라는 것 정도까지는 학습한다. Eiserner라는 단어는 철을 뜻하는 단어이고 피를 뜻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직역하면 철의 재상이라 불러야겠지만, 위의 연설과 피라는 단어가 가지는 냉혹한 이미지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철혈재상으로 의역되었다. Eiserner Kanzler를 영어로 쓰면 Iron Chancellor.
그러나 이렇게 독일 제국 건국기의 모습 정도만 다루는 것은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을 절반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시각이다. 적어도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을 주도했다.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기민한 회유책으로 국내의 불만을 완화했다. 이 정도는 짚어야 비스마르크의 상을 대략으로라도 그려낼 수 있다. 비록 국가주의적 정책의 성격으로 인해 보수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지기는 하나, 정치적인 이해를 떠나 실질적으로 19세기 후반의 독일을 유럽 대륙 최고의 주목 대상으로 만든 인물이자 19세기 후반의 유럽 외교를 틀어쥐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성격을 본받을 위인은 아니어도 그 기량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19세기 유럽 역사는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라는 두 거인을 중심으로 쓰여질 수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그리고 E. H. 카에게 줄기차게 까였다[4]
2 초반생
프로이센의 하급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 가문은 멀리가면 15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 시절 부터 브란덴부르크 지방에 정착했었고 지역의 통치자인 호엔촐레른 가문을 모셨다. 할아버지 대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봉사했고,[5] 큰아버지들은 나폴레옹을 독일에서 쫓아 낸 해방전쟁(러시아 원정) 때 군공을 세워서 육군 장군까지 지내는 제법 뼈대있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가문의 상속법 때문에 큰아버지들의 영지는 형제인 아버지가 아닌 비스마르크 가문의 먼 친척 연장자에게 넘어간다.[6] 큰아버지 중 한명은 전쟁중에 전사했고 한명은 육군 중장까지 오르는데, 평생 독신이었다. 아버지는 한편 지주이자 프로이센 육군 장교였지만 체면치레로 장교 지위만 획득한 듣보잡이었다.
반면 외가 멩켄 가는 귀족은 아니지만 부르주아 지식인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 외조부는 법대를 나와 외교관, 후에 관료 생활을 했는데 비스마르크의 젊은 시절 커리어는 외조부와 많이 닮았다. 젊은 시절 편견으로 관운이 신통치 않았던 것까지... 왜냐하면 비스마르크의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이면서 당시 불온 사상으로로 취급받던 급진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자식이었던 외조부는 위험 인물로 의심 받아 스웨덴 대사 이후 관운이 신통치 않았다.[7] 어머니는 원래 비스마르크의 큰아버지의 결혼 상대로 거론되었는데 나이차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외삼촌이 외할머니를 설득해서 동생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외교관 가문 출신에 베를린에서 관료 생활을 했고 어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빌헬름 1세랑 궁정에서 소꿉친구였기 때문에 자부심이 컸고, 베를린에서 곱게 자라고 화려한 성격이라 우유부단한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눌려 살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형제들의 진로와 학습에 일일히 간섭했고 귀족 출신들은 보통 군대로 빠지는데 비해 비스마르크는 부르주아들이 많이 가는 법대로 진학하는데 어머니의 치맛바람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정작 어머니는 가정적이지 않고 사교계를 좋아해서 가정은 뒷전이고 답답한 시골 생활에 질린 나머지 형제들을 기숙사에 처넣고 놀러 다니기 바빴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형제들은 어머니가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 바빠서 기숙사에서 명절 때도 나오지 못하고 공부만 강요 받았고 그 결과 가정적인 시골 지주인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해 훗날 언급조차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는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보내면 격한 성격의 비스마르크가 술 퍼먹고 싸움질할 게 우려되어 하노버의 괴팅엔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 시절은 술퍼먹고 싸움질에 결투에 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학창 시절 '10계명 중 어기지 않은 게 없는 망나니'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친구들이 자신만 빼놓고 파티장의 문을 잠그고 파티를 열자 권총으로 문을 쐈다(...)고 하니 성격 하나는 불같았던 것 같다. 괴팅엔 시절 25번이나 결투를 벌였다고 하고 대학 감옥의 단골 수감자였다고 전해진다. 대학 시절 처음 가입한 서클은 훗날 행적과 상반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자들 모임인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였다. 이후 이런 행적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별다른 변명없이 "호기심에 가입했지만 그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서 금방 탈퇴했다."며 수준드립으로 얼버무렸다. 아무튼 매우 운이 좋았던게 2년후 프로이센 정부에선 부르셴샤프트 가입자들에겐 공직 금지령을 내려버려서 하마터면 관운이 막힐 뻔했다.
괴팅엔 시절 방탕한 생활로 도박 빚까지 져서 괴팅엔에서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지자 자퇴를 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편입한다. 베를린에서도 그다지 학업에 열성적이진 않았으나 6세때부터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독일 내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기숙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과목엔 흥미가 없었지만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에 심취하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은 우수한 성적을 냈기 때문에 당시 현재보다 학업 부담이 매우 적은 대학을 졸업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의 회고로는 공부를 전혀 안 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중간 이하... 졸업 후 법원 서기 시험을 위해 일주일 정도 공부를 한 것 때문에 매우 억울해하고 다녔다고...
어쨌든 괴팅엔 대학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을 다니며 인맥을 많이 쌓았고, 이는 후에 유럽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또한 다양한 경험과 만남을 통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시골 융커식의 사고가 더욱 유연해지게 되었다. 대학 때 만난 미국인 친구와는 평생 서신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 미국인 친구는 이 당시에도 하버드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온 사람. 당시 미국에도 명문 학교가 있긴 했지만 유럽보다 학문 수준이 떨어져서 미국 상위층은 1차대전 시기 이전까지 유럽 유학이 많았다. 이 미국 친구는 역시 외교관이 되었고 네덜란드 역사에 정통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이름에 von 자를 넣고 다니는 촌스런 시골 귀족과 변방 출신(?) 유학생의 사이는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라고 하며, 이후 비스마르크가 새로운 세계에 안목을 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대를 나와서 법원에 들어가 처음에는 법관이 되려 판사 서기[8]가 되었다. 이 당시엔 법대를 나와 큰 결격이 없으면 법원서기가 되고 수습을 거쳐 법관이 되는 테크였다. 그러다 적성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1년만에 때려 치고 외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외교관 시험을 친다.[9] 막상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지만 외교관들의 세계는 귀족 출신인 그에게도 집안이 듣보잡이라 출세하기 어렵다는 데 잠시 실망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외국 강대국이 아닌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 외교관으로 발령이 난 게 결과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된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 기간은 아헨에서 하게 되는데 꽃뱀에게 낚여서 약혼까지 하고 빚을 지고 몇 주동안 결근했다가 면직 처벌되지만 외교관 시험 동기(그의 아버지가 매우 유명한 교수라서...)의 도움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여기에다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 다니며 스위스까지 무단 결근하고 넉 달동안 여행을 떠났고 당연히 짤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도박빚을 많이 지는바람에 아헨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25세 무렵 나이에 도피성으로 육군에 입대해 버린다.
육군 장교 군복을 입고 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 대학 시절 결투 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 정도였다. 병역은 외교관서 짤린 시기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소집 기간 1년을 채워야 되는데 귀찮아서 몇 달 다니다가 대충 다니고 땡땡이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게으른데 운이 좋아서 잘 풀렸다는 말이 몇 번째 나오는 건지 훗날 독일 통일 후에 땡땡이나 치던 이 예비역 육군 소위는 '육군 원수'를 수여받는다.
군대 생활은 프로이센 왕실의 거처 포츠담 부근의 근위 연대였는데 당연히 높으신 분들 자제들이 몰려있는 땡보직이었다. 이마저도 1년을 못채우고 땡땡이 치는데 뒤늦게 농사를 배우려고 농업 학교에 다녀서였다. 농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포메른 농장과 가까운 곳으로 도망가서 농장 일에 몰두했다. 이때 농업에 빠진 건 코스프레가 아니고 진짜였는데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를 주고 받을 정도로 농장 일에 깊이 빠졌고, 농업 학교 당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든 비료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공장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경영하여 대학 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얻은 도박 빚을 다 갚았다. 덕업일치
성공한 지주가 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고향 근처에 수재가 나자 제방 감독관을 탄핵하고 스스로 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무렵 막 수립된 의회에서 마침 보궐 선거 자리가 나자 본격적으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공직 생활 초기에는 튀어 보이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1848 혁명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기 영지의 농민 40명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쳐 들어 가려 했다.[10] 이후 베를린으로 잠입해서 왕실 인사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역쿠데타의 주역이 되려고 했는데 이 때 오해로 오히려 빌헬름 왕자의 부인이었던 작센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에게 역적 취급을 받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수십년간 비스마르크를 괴롭히게 된다.
어쨌든 혁명 진압 이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부르주아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 들여 납세액에 비례한 제한 선거를 허용해서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의회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자신들의 의회마저 없애달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때 국왕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시기 전후로 비스마르크를 매우 눈여겨 보았는데 혁명 후 비스마르크가 결혼을 하고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하자, 마침 우연히 그곳에 체류 중이던 국왕이 직접 비스마르크를 불러 독대하고[11]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듣보잡 비스마르크를 일약 독일 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런 벼락 출세 덕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의 예전 행적을 들어 술고래 대학생, 타락한 융커, 포메른의 돼지치기...는 안 된다는 여론의 반발이 있었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조차 "한낯 예비역 육군 소위 따위에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면 곤란하다."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 이후 1851년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
연방 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고작 담배 한 개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심지어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담배를 피워도 될 것인가'를 묻기까지 했고, 결국 바이에른 대사 카를 폰 슈렌크(Karl von Schrenck)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 작센 대표 율리우스 고틀롭 폰 노스티츠(Julius Gottlob von Nostitz)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하노버 대사가 피우는 것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 본인 말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사들까지 '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을 하였고, 마지막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남은 것은 단 한 명 헤센-다름슈타트 대표 뿐이었다.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담배 한 개피로 주장한 것이다.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임기가 끝나고 1858년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발령받았다. 이 때 알렉산드르 2세와 차르 가족까지 몰려 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기본 방침 중 하나인 대러 친선은 이 시기부터 이어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이 죽고 빌헬름 왕세자가 즉위한 후, 군비 확대와 징병제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수상에 임명된다.
3 총리
프로이센 왕국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맡은 난관은 징병제 기간 연장과 육군 조직 개편이었다. 명목은 세금 내는 부르주아들이 세금 내기 싫어서 빼애액거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 육군 편제는 1815년 해방 전쟁 시기 편제와 동일했는데, 19세기는 인구가 폭증한데다가 , 1848 혁명 진압 시 드러났듯이 군부에서 인원 부족을 호소했고, 군인을 늘릴 필요성은 부르주아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부르주아들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예비군[12] 지휘관을 현역 프로이센 육군 장교가 지휘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라 권위주의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것인데다가, 현역 장교가 유사 시 예비군을 지휘하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악용할 소지가 높아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타협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마지 못한 척 다른 요구를 일부 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상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예 의회라는 제도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면서 의회 예산권은 무시하고 국가는 항시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예산 승인이 없어도 세금 때려서 걷을 수 있다는 발상[13]으로 밀어 붙여 버린다.
보불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 원래 비스마르크도 검은색 육군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빌헬름 1세 황제의 특별 지시로 그림에서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흰색 예복을 입은 것으로 그려졌다.
빌헬름 1세를 도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헌법을 무시하며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딱히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가 유지되고 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가 독재를 하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트리긴 했지만... 그리고 그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 사형 남발 등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당나라 재상 이임보처럼 구밀복검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 시기 비스마르크의 외교 수완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프로이센 육군은 목표를 이룬 이후에는 적국에 머물지 않고 바로 철군했다. 즉 쓸데없는 약탈 등으로 타국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일을 최대한 줄였다는 이야기로 비스마르크의 혜안을 잘 보여주는 일화. 다만 프랑스에서는 원래 국민 감정이 안 좋은 탓에 반발도 심해서, 나폴레옹 3세의 항복 이후 파리에서 공화정부가 성립되어 들고 일어나자 4개월간 포위해서 저항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러고도 파리 코뮌이 들고 일어났지만...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 ~ 1870년대의 외교 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개입하지 못 하도록 애매모호한 보상책을 제시하며 프랑스를 묶어두고,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을 교묘히 조작해 전쟁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주고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시키고 독일 내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여론 조작을 통한 대중 통제의 선구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는 프랑스의 황제가 쫓겨난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건국되고 독일 황제가 즉위하는 초유의 결과로 나타났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의 전설이 될 만한 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주눅 들지 않고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온 것도, 그래서 알퐁스 도데가 마지막 수업을 쓰게 된 것도 당시의 일이다. 본래 유명한 광산 지대로 루이 14세 때 프랑스의 영토가 되고서 그 후 프랑스 혁명 전쟁을 같이 치렀고, 백년전쟁 때도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때 독일에 강탈당하면서 그 갈등이 심각해졌다.
3.1 비스마르크 체제
보불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한 시대의 프레임에 인명이 부여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메테르니히 체제의 사례도 있으니 유일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빈 체제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사적인 보수적인 가치관과는 별개로 재상으로서 활동한 공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비스마르크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을 멀리하는 황제에게 간언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 하는 등, 계속 업무를 유지했으면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뛰어난 외교관이 없어도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풍자한 그림. 고립되어 울상인 프랑스가 요점.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았다. 또 비스마르크가 평생 일관되게 관철한 외교 철칙은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고 전해지며,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유럽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을 잡는 동시에 친러시아 정책을 펴면서 프랑스의 우방국이 될 만한 강대국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 걔네, 우리랑 관계 끊어 봐야 손 잡을 데도 없음. 다시 우리한테 손 벌리러 올 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독일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주전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퇴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실제로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난제를 잘 다룬 것이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포함된다.
3.2 통일 이후의 내치
반면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로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제국 재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에게서는 국내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되었을 때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황녀는 비스마르크를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여겼다. 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보수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즉 현재 4대 사회보험 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4대보험중 하나인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 사회주의 견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871년 이후 "문화 투쟁(Kulturkampf)"이라고 불리는 반가톨릭 운동을 펼쳤지만 가톨릭 신자가 많은 바이에른과 라인란트 등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고, 1878년 이후에는 반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회, 조직, 출판물 등을 금지했지만 사회주의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4 퇴임과 사망
반가톨릭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가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14] 이 총선에서 親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친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새로 황제로 재임한 빌헬름 2세와는 광부 파업 문제로 충돌이 빚어지고,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쫓겨난다고 알려졌을 때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파들을 기만하는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죄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15]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와 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비스마르크의 수상 퇴임을 풍자한 만평. 배에서 떠나는 선장(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약 50년쯤 후,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총선거에 패배하여 퇴임할 때도 이를 패러디한 만평이 등장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 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가의 큰어른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조국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국가에 충성하며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그래도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묘비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 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사진을 찍어서 잡지에 돌렸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파파라치 사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연히 병에 찌들고 방은 엉망이 된 참혹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사진 수정으로 아주 온건한 임종모습이 유포되었다. 혐짤 가능성 있으니 주의.
4.1 군국주의자?
전투를 앞 둔 병사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하자는 말을 하지 못 할 것이다.- 비스마르크
보수적인 성격과 '철혈재상'이라는 말 때문에 한국에서는 군국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런 오해에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를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는 있으나 군국주의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외교관 출신 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게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군사적 수단의 사용은 최대한 억제하려고 노력했고 특히나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개인적인 면모
파일:Attachment/Otto.von.Bismarck.jpg
철혈 재상 등 전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인조차 과식이었다고 한다.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보불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비스마르크가 '내 말 안 들어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필요하다'면서 '그럼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어떻게든 설득하면 츤츤하면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갭 모에 쩌네
문제는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쌩까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카더라. 이는 당시 찌라시의 보도였고,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히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자식뻘 나이의 빌헬름 황제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진 않았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5.1 일화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대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늪에 친구가 빠졌는데 구해줄 자신이 없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 빠져죽으라고 돌을 던져 도발해서 스스로 빠져나오게 만든 일화가 유명하다. 혹은 총을 친구에게 겨누고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다'는 식의 말을 하니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자 친구를 안으면서 말하길, 내가 겨눈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일세라는 말도 전해진다. 빠져나와서 망정이지 못 빠져나왔으면 과연 철혈재상 소리나 들었을 일화 워낙 황당한(?) 일화라 일본이나 독재시절 한국에서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비스마르크 생전인 1882년에 나온 신문기사에도 이미 언급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다.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33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시절 47세의 나이에도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이다.
개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애견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스마르크에게 보이기 싫어 자취를 감추어버린 적이 있다.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개를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자기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자주 인용되는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가 있다.
훈장에 관련된 유명한 일화도 유명하다.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사병이 있었다. 원수인 비스마르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때 철혈재상이네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비스마르크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했다."내가 자네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우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자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 밖에 안 될 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하오면,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 있다가 껄껄 크게 웃으면서 사병이 원하던 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이기도 하며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탈무드에서 유머로 언급하기도 한다. 사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수랑 농담따먹는 저 사병의 패기다
6 여담
은퇴한 곳인 프리드리스루흐는 현재 당시 철도역 건물을 개조한 비스마르크 박물관이 있다. 비스마르크의 상징이 되는 레인코트, 베르사유 독일 황제 선포식 그림, 훈장 등 엄청난 레어템들이 가득하다(...) 다만 찾아가기는 조금 껄끄러운데, 함부르크에서 S반(전철 격)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역 다음 역(2km 상당)에 있다는게 문제. 이 구간(즉 한 정거장 구간)을 걸어가든가 아니면 2시간마다 한 번씩 오는 차 시간 맞춰서 맞는 승강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돈을 내야 하지만 말 그대로 한 정거장 구간에 열차표 검사는 거의 하지 않으므로 돈은 들지 않는다. 역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입장료는 저렴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와 아내의 묘지도 근처에 위치하니, 찾아간다면 참배도 할 수 있을 듯.
체제면에서 박정희와 비교되는 경우가 있다. 조희연 교수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가 소련의 스탈린 체제, 한국의 박정희 체제, 타이완의 장제스 체제,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체제와 같은 성격을 지닌 개발 동원 체제라고 평가했다.
당시 인물과 비교하면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 실제 사망년도도 1898년으로 같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흥선대원군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고, 흥선대원군이 비스마르크보다 5개월 정도 먼저 죽었다. 그러나 사상이 크게 다르다보니 둘이 잘 비교되지는 않는 편이다. 다만 8년 늦게 태어나 3년 늦게 죽은, 그리고 근대 국가의 건설을 위해 군수 산업 중심으로 발로 뛴 이홍장과는 가끔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둘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 서로 만나기도 했다. # 면담 내용을 수록한 동아일보 기사 둘 모두 '제국'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한 거구가 인상적이다. 두 제국 모두 두 사람이 마음먹은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이 기사를 패러디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BL 야설이 존재한다. OMG
악마의 사전에 따르면 한번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미 해군의 아이오와급 전함과 일본 해군의 야마토급 전함 이전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던 크릭스마리네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1번함 비스마르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인 비스마르크(Bismarck)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독일계 미국인이 이 주에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도시 자체는 전형적인 행정 중심 도시로, 노스 다코타 주 안에서는 파고(Fargo)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그러나 인구 적기로 유명한 노스 다코타답게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해 봤자 광역권 다 합쳐서 약 12만명밖에 안된다(…).
아돌프 히틀러 연간에 나온 2부작 영화에는 유태계 정치인들의 마수때문에 물러나고 독일은 또다른 제국을 세워야 한다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치의 선전과정에서 제대로 왜곡당한 피해자.
가끔 비스마르크 때의 독일을 제2제국, 히틀러 때의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해서 비스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에 가담한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1차 대전 전에 사망했다. '비스마르크 체제' 항목에 설명되어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와 세력 균형을 꾀했던 인물이다. 만일 비스마르크가 살아있었다면, 가담은 커녕 극구 반대했을 일.
2012년 2월 비스마르크의 육성이 발굴되었다. 1957년에 발견된 저장 장치가 있었는데 별 생각없이 방치했다가 2014년부터 미국 에디슨 연구소가 혹시 에디슨이 맨 처음 녹음한 동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분석해보니 123년 전(1889년) 비스마르크가 한 연설이 녹음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것. 원래 목표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꽤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참조 링크
1945년도때 미 육군성이 제작한 군사교육용 영상물('Your Job In Germany,' 1945)에서는 총리(Chancellor)가 아닌 '총통(Fuhrer)'으로 왜곡당했다. 본 영상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오직 '철과 피'만을 외치며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침략한 호전적인 군국주의자로 그려져있는데,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들이 다 그렇듯 정확한 역사적 분석은 배제한채 비스마르크를 전형적인 전쟁광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예 빌헬름 2세, 심지어는 진짜 '총통'과 동일선상에 놓이고 있으니 비스마르크로서는 억울한 일.
6.1 숫자 3
대중서적에서 막 갖다붙인 느낌이 있으나 이런 이야기도 있다.
- 학창 시절 3번 전학했다.
- 3국 대사로 일했다.(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의회는 외국으로 치기 어렵고, 파리 대사는 임명되자마자 베를린 복귀라 치기 미묘)
-
3명의 군주를 섬겼다4명이다.(처음 공직에 오른 시기까지 합치면 5명이다.) - 3번의 전쟁을 치루었다.
- 3마리의 말을 잃었다.
- 3번의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 3국 동맹을 결성했다.
-
이름이 3개(비스마르크, 쇤하우젠, 라우엔부르크)였다.쇤하우젠은 비스마르크 가문의 다른 분파 (브리트리)가문[16]과 구별하느라 쓴 것이고 지금은 압도적으로 유명하니 별 쓸모가 없다. 라우엔부르크(Herzog zu Lauenburg)는 작위 명인데 빌헬름 2세에게 쫓겨나면서 받은거라 거절하고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쓴적 없다. - 작위가 3개(백작, 후작,
공작)였다. 역시 앞서 서술한대로 빌헬름 2세에게 받은 라우엔부르크 공작(Herzog zu Lauenburg)은 쓰지 않고 죽을때 까지 그리고 묘비까지 빌헬름 1세에 수여받은 후작 작위(Fürst von Bismarck)만 썼다. - 암살 기도가 3번 있었다.
- 3번 사임했다.
- 자식이 3명이었다.
- 참나무 잎 3개와 세잎 클로버가 뒤엉킨 문장을 달고 다녔다.
- ↑ 지금이야 당연히 독일 본토에서 소시지를 만들 때는 엄격하게 칼같이 위생 규정을 지키도록 하지만, 이와는 달리 19세기까지만 해도 독일 소시지 제조 과정은 현대 중국처럼 개판이었다. 소시지 공장에서 언제 청소했는지도 모르는 바닥에 재료인 고기를 내팽개쳐 두고, 그 위를 마찬가지로 위생이 의심스런 장화를 신은 직원들이 걸어다녔다. 그리고 쥐가 들끓었기 때문에 아무데나 쥐약을 뿌려놨고, 소시지를 만들 때 재료를 아무렇게나 제조기계에 집어넣었다. 그 결과 소시지를 만들 때 위생이 대단히 의심스런 고기, 공장의 오물, 쥐약, 쥐약을 먹고 죽은 쥐가 다 들어갔다. 인기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 역시 이것을 인용했다. 비서실장 리오의 "제조공정을 알고 싶지 않은 두 가지가 있지, 법률과 소시지야."라는 대사가 그것이다.
- ↑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바보짓의 아주 간접적인 계기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죽을 때 까지 알지 못했다(...)
- ↑ Eiserner Kanzler. 국내에는 '철혈 재상'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 ↑ 비스마르크의 업적을 평가절하한 것은 아니다. 당시 E. H. 카는 몇 명의 유명인물들이 역사를 결정했다는 거인 사관(Great Man Theory) 자체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 ↑ 왕세자시절 아버지 몰래 도망갔다 대신 처형당한 카테 중위가 비스마르크 집안과 사돈이라 그 영향으로도 잘 챙겨주었다고 한다.
- ↑ 비스마르크가 70세 때 비스마르크 집안 땅 찾아주기 운동'(?)이 벌어져서 추종자들이 영지를 사서 갖다 바치는 훈훈한(?) 일이 벌어진다.
- ↑ 대사 역임 당시는 매우 혼란한 나폴레옹 전쟁 시기로, 대사관 직원들이 다 도망가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남아 있는 20대 직원인 비스마르크의 외할아버지를 덜컥 임명해 버렸다고 한다.
- ↑ Law clerk.
- ↑ 다만 이 당시 외교관 시험은 공채가 따로 있는건 아니고 모시고(?) 싶거나 연줄이 닿은 높으신 분에게 면접을 보고 논문 몇 편을 써오라고 하고 통과가 되면 수습으로 임명했다. 이때 비스마르크가 상관에게 제출한 논문 몇편은 훗날 명성에 비해 수준이 매우 평범(?)해서 연구가들을 실망(?)시킨다고.. 어쨌든 임용은 문제 없이 되었다.
- ↑ 옛 상관 포츠담 연대장에게 이를 알리자 연대장은 국왕의 진압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고 떨어진다고 해도 농부들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했다.
- ↑ 비스마르크의 베프인 육군 장교 폰 론(Von Roon) 장군이 국왕 무관이었다. 폰 론 장군은 보불전쟁 당시 국방장관으로도 활약한다.
- ↑ 현역 복무 후 4년간 예비군. 예비군 제대 후엔 란트베어(지역방위군)으로 5년간 편성됨.
- ↑ 의회 초창기라 제도적 미비 탓도 있었다.
- ↑ 독일 제2제국의 선거법이 복잡했기 때문에 최대 의석과 최다 득표가 불일치
- ↑ 함부르크 근교의 프리드리히스루흐(Friedrichsruh)
- ↑ 오토 폰 비스마르크 보다 먼저 정치인으로 활동한 먼 친척이 있다. 아주 먼 친척이라 교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