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

Maintenance script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2월 3일 (금) 07:24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1 개요

 My Top 30 Favourite Hong Kong Movies of all Time

홍콩영화 산업. 영국 식민지 시절인 20세기 초부터 태동하여, 1980년대 엄청나게 발전하여 아시아권의 영화를 견인하였다. 마! 내가 홍콩 영화 한두 편 본 줄 아냐! 장르는 무협, 쿵후 등의 액션 장르, 멜로, 강시 시리즈를 중심으로 한 호러 장르, 홍콩 느와르, 도박물 등 폭이 넓다. 중국 본토와 할리우드, 영국, 일본 문화가 뒤섞인 국제 도시답게 홍콩 영화는 다양한 문화적 색깔이 뒤섞인 혼성의 성격이 짙다. 홍콩 영화는 세계적으로 꽤 주목받아서 화교 문화권과 같은 유교적 정서를 공유하는 아시아권 뿐만 아니라 서양의 영화인 중에도 홍콩 영화에 푹 빠진 사람이 많았다. 당시 홍콩 영화를 감명깊게 보고 자란 아이들이 영화계에 입문하면서 헐리우드 영화에는 홍콩 영화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2 역사

2.1 20세기 전반기

대부분의 중화권 영화산업과 마찬가지로 홍콩 영화산업의 태동기에도 경극이 큰 영향을 끼쳤다. [1] 이것은 경극이 중국의 수백년간 중국의 무대 산업에 영향을 끼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초기 홍콩 영화들은 대부분 경극의 무대를 그대로 촬영하거나 경극 배우들을 고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초기작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13년작 <장자시처(莊子試妻)>라는 무성영화였다.

1차대전때는 유럽(독일)으로부터의 필름공급이 끊겨 제작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잠시 영화제작이 중단되지만, 1차대전 후 다시 영화제작붐이 일었다. 1차대전 후의 영화는 유성영화로서, 홍콩 영화는 베이징 표준어의 보급을 강하게 추진하는 중화민국 정부와는 정치적으로 단절되었기 때문에 광동어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동어 영화에 대해 적대적이었지만, 홍콩의 무협영화가 워낙 대륙에서 인기있었기 때문에 막기가 불가능했다. (20년대 초반에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홍콩과 같은 언어를 쓰는 광저우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 더빙 없이도 관객의 청해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

이 당시 홍콩영화계는 상하이와 함께 중화권 양대 영화산업계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홍콩은 영국 식민지임에도 불구하고 항일 애국 영화들이 다수 제작된다. 이미 중화권 영화의 다른 한 축인 상하이는 개전하자마자 일본에 넘어갔기 때문에 영화제작이 중단되지만, 홍콩은 일본에 점령되는 1941년까지 계속 항일 영화가 제작된다. [2]

2.2 1950-60년대

중국 대륙이 공산화가 되자, 상하이는 영화 산업이 완전히 쇠퇴하였고, 홍콩은 중화권 영화계의 중심이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만의 장제스 또한 공산당에 질세라 현실 비판을 엄금하는 억압적인 문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창작 및 언론의 자유를 찾아서 많은 영화인들이 홍콩으로 망명해 온 것이다. 영화인 뿐만 아니라 많은 대륙인들이 홍콩에 도피함에 따라서 홍콩에서는 대륙인들이 많이 쓰는 표준중국어 (대륙은 보통화, 대만은 국어라고 한다) 와 홍콩 토박이말인 광동어가 영화 언어로 경쟁했다. 이 때문에 홍콩 영화는 자막을 꼭 붙였다. [3] 이런 한자 자막은 현재도 대부분의 홍콩 영화에 들어가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만이나 홍콩의 TV 프로그램에도 대부분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배우들 또한 광동어나 보통화의 둘중 하나만 유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빙도 필수적이었다. [4]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영국의 법률에 의해 다스려졌기 때문에, 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본과 함께 서방 수준의 창작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홍콩 영화인들은 금기 없이 수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당시 특기할 만한 작품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웅본색의 오리지널인 동명의 작품(1967)이 있다.[5]

1950년대 중반 부터 화교 자본인 소씨(쇼브라더스, Shaw Brothers), 전무 두 회사가 홍콩에 진출하였고, 이 두 영화사는 홍콩 영화 시장을 쟁패하기 위해 거의 전쟁 수준의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이 경쟁은 전무의 회장이었던 육운도가 1964년 대만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전무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쇼브라더스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전무는 70년대에는 촬영 장비와 스튜디오를 쇼브라더스에서 갈라져 나온 후발 제작사인 골든하베스트에 넘겨주고, 영화 제작을 접고 영화 배급에만 치중하게 된다.

쇼브라더스와 전무는 주로 만다린으로만 영화를 제작하였고, 소방방(蕭芳芳)과 진보주(陳寶珠)라는 두 아역배우 출신의 아이돌 스타 여배우의 인기로 인해 절정이었던 광동어 영화의 위세는 1960년 후반에는 쇼브라더스의 물량공세에 밀려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광동어 영화의 거장인 초원은 쇼브라더스에 입사하여 만다린 영화를 만들어야 했고[6], 진보주는 영화를 그만 두고 말았다.

2.3 1970년대

흔히 80년대를 홍콩 영화의 최전성기라고 꼽는데 흥행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지만, 홍콩 영화인이나 평론가들은 6~70년대 홍콩 영화를 최전성기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

영웅본색 같은 느와르 액션물을 알린 장철(1923~2002) 감독이나 검술무협영화의 선구자인 호금전(1931~1997) 감독, 홍콩액션스타의 시발점이 되는 그 유명한 이소룡 같은 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특히 70년대는 홍콩 영화의 고유장르였던 무협영화가 현대 무술물로 진화하기도 하고, 무술물에서 벗어난 여러가지 장르도 나오기 시작한다.

쇼브라더스의 맹위 때문에 1960년대 후반 부터 몰락하였던 광동어 영화의 인기는 이소롱허관문, 허관걸, 등의 슈퍼 스타의 등장으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이소룡은 원래 쇼브라더스와 합작을 하려 했었지만, 돈문제로 인해 쇼브라더스에서 갈라져 나온 골든하베스트와 협력하게 되었고, 이는 허관문도 마찬가지였다.

광동어 영화 시장은 성룡, 홍금보 등의 스타 배우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였고, 광동어 텔레비전 방송국 TVB 연기반에서 키워낸 연기력이 출중한 광동어 연기자들이 영화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흥하게 된다. [7] 이당시는 천편일률적인 무협영화를 벗어나서 코메디극도 나오기 시작한다. 허관문-허관걸-허관영 형제들의 막가파 개그물의 효시인 귀마쌍성(鬼馬雙星) 도 이당시 (1974) 에 나왔다.

이와 함께 천편일률적인 무협영화에서 벗어나서 현대적인 무술영화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주도한 영화사가 바로 1970년에 설립된 골든 하베스트사이다. 골든 하베스트사는 할리우드에서 단역이나 조연만을 맡으며 푸대접을 받던 이소룡을 홍콩으로 불러 주연으로 삼은 여러 현대 쿵후물을 제작하며 대스타로 만들었고, 그런 와중에 골든 하베스트사도 홍콩의 거대 영화사가 된다. 1973년 이소룡이 요절하자 잠시 주춤하긴 했으나, 성룡을 발굴하여 1980년대 대성공을 거둔다.

이와 함께 한국에 잘 안알려진 에로물 (속칭 3급편)도 이당시부터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정용 비디오가 보급되기 전이기 떄문에 이런 영화도 극장에 걸렸기 때문이다.

2.4 1980년대

홍콩 영화의 최전성기

80년대 홍콩영화는 찬란한 백화만발의 시대였다. 그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토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증지위, 2005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링크

홍콩영화는 1980년대 커다란 전성기를 맞는다. 이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는데, 1960-70년대부터 쌓여온 노하우나 인력, 인프라가 1970년대 선진국의 영화학교서 유학하고 돌아온 감독들과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이당시 홍콩 영화는 원래부터 강세였던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게 된다.

쇼브라더스와 무협영화는 70년대 이후 계속 침체였지만, 이소룡 사후 한동안 주춤했던 골든 하베스트가 성룡을 내세운 코믹쿵후영화로 두각을 나타내며 아시아를 넘어 세계 시장을 주름잡게 된다. 이렇게 영화가 돈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홍콩 영화판에는 자본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홍콩 영화는 무술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가지 장르가 나왔다. 칼대신 권총을 잡은 현대무협인 홍콩 느와르, 사극과 특수효과를 버무린 중국 고전판타지 장르 (대표작 천녀유혼), 그리고 최가박당과 같은 개그물 등등이 있다.

당시에 얼마나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유행이었냐면, 성룡, 주윤발, 유덕화 , 장국영, 왕조현 등 홍콩 스타들이 내한하거나 국내 CF에도 다수 출연했다. 심지어 한국에선 '누구야?' 소리 듣던 등광영이나 서소강까지 한국에 왔었다. [8] 뭐 정확히는 유덕화와 같이 왔던 것이지만. 이 당시에는 조연급 홍콩 스타도 한국에 오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맞았던 홍콩 영화는 아래 여러 이유로 사그라들게 된다.

2.5 1990년대 이후

홍콩 영화는 1990년대 초반 이미 쇠퇴기를 맞이했고, 이는 아래에 든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천안문 사태의 여파로 많은 홍콩인들이 중국의 억압통치가 시작될까봐 캐나다나 호주로 이민가곤 했고, 장국영 같은 이들도 캐나다로 국적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동양인인 이들이 서방권에서 홍콩에서의 영화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주윤발은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계속 겉돌았고, 성룡은 좀 더 성공했지만, 끝내 안착하지는 못했다. 서극이나 오우삼 같은 연출자들은 이들보다는 진출이 더 쉬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도 할리우드 주류로 자리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9]결국 이렇게 1990년대 중반 홍콩을 떠났던 배우나 스탭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 홍콩이나 대륙으로 다시 돌아와서 영화를 찍게 된다.

2000년대 무간도 (2002)라는 걸작 느와르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 이후의 영화들은 예전처럼 폭발적인 흥행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으며, 특히 자국산 영화가 성장하고, 할리우드 직배가 대세가 된 한국에는 이제 홍콩영화는 거의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다. 광동어로 제작되는 영화는 세대교체도 잘 안되고 있어서, 20대 홍콩 배우중에서 장국영이나 주윤발처럼 폭발적인 주목을 끄는 배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50대 중반인 유덕화, 양조위나 50에 가까운 여명이 30대 역을 맡고 있는 형편이다.

이 시기에 주목해야 할 배우 겸 제작자는 바로 주성치이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지난 다음에 뜨기 시작한 주성치 는 전반적으로 홍콩영화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홍콩 특유의 막가파 개그를 계승 발전시켜 중화권 전체에 어필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출연한 모든 여자 연예인과 스캔들이 난 지저분한 사생활이나 절친에게까지도 공개디스를 당하는 더러운 인성, 그리고 암흑가와의 커넥션 [10] 등등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유머 코드와 특수효과, 적절한 멜로를 버무려 팔릴만한 작품을 만드는 영화적 재능으로 암흑기를 맞은 홍콩영화에서 홀로 빛나고 있다. 2010년대부터는 보통화 영화만 만드는 등, 대륙 시장을 겨냥한 영화만을 만들고 있는데 그의 영화를 80년대 홍콩영화 전성기의 연장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전적으로 주성치 개인기로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할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11]

이렇게 홍콩영화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중화권 영화의 중심은 홍콩이 아니라 대륙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딱히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12]

3 침체의 원인

CTSZyXQVEAEvCrX.jpg
CTSZxybUwAAeG9S.jpg

홍콩 영화는 1980년대 중후반에 정점을 찍었으나, 1980년대 후반부터 기나긴 침체기에 들어섰다. 1992년 홍콩영화의 매출은 15억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듬해는 11억달러로 폭락했다.

일부 논평가들은 위의 문장처럼 중국 반환을 그 원인으로 들기는 하지만, 이미 중국반환 몇 년 전인 1980년대 후반부터 홍콩 영화는 아류작이나 도박물이 계속 나오면서 망해가고 있었다. 즉, 중국 반환이 홍콩 영화의 관에 못을 박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에 이미 홍콩 영화는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는 것이다. 홍콩 영화는 그 정점일 때조차 아래 든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리즈시절을 길게 가져가지 못하고 못하고 망해버린 것이다. 그 반대로 한국영화는 1980-90년대 내내 침체기였다가 1999년 쉬리의 성공으로 2000년대 초반에 투자금이 몰리는 등, 르네상스기를 맞게 되었는데,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 한국 영화판에서 격언처럼 나돌았던 말이 "내부적 문제로 망해 버린 홍콩 영화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라는 말이었다. 그만큼 홍콩 영화계에 문제가 많았다. [13]

홍콩 영화 침체의 대략적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꼽을 수 있다.

  • 건전하지 못했던 제작환경 - 홍콩 영화가 전성기였을 1980년대 후반 당시에도, 당시 주연급 (주윤발, 장국영, 장만옥 등등)은 일년에 4-5편, 많게는 10여편 가까히 다작하고 있었다.[14]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 암흑기였던 한국 영화판에서조차 주연급이 1년에 한 두편 출연하는 정도였으니, 홍콩배우들의 이미지 소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15] 이러다 보니 작품성은 고사하고 연기조차 성의없는 졸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런 졸작들이 해외에 배포되면서 한때 홍콩 영화에 열광했던 해외관객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홍콩은 시장이 좁기 때문에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무덤을 판 것.
  • 아류작 난립 - 영웅본색이 히트하자 비슷한 홍콩 느와르물이 쏟아져 나왔고, 천녀유혼이 성공하자 역시 이와 흡사한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기다가 이런 아류작에도 주윤발, 왕조현 등 원조격 영화에 출연한 스타들이 나오면서 단기적으론 볼거리가 풍성해진 면이 있으나 장기적으론 배우의 이미지를 고정화시켜 버렸다. 황혼기에는 아예 도박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강간물(예를 들어 적나고양 시리즈)들이 시리즈로 계속 나왔다. 이런 아류작 난립의 원인 중 하나론 위 투자 감소와도 연관이 있는데 투자가 감소하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거나 제작비를 많이 투입하여 볼거리를 만들려는 시도 없이, 그저 과거에 히트했던 작품의 후광에 기대어 아류작이나 찍어냈던 것.
  • 삼합회 및 조직폭력배 개입 - 임화수를 비롯한 여러 조폭들이 영화계에 입김을 행사하던 한국 상황과 유사하게 홍콩 영화판도 삼합회를 비롯한 여러 조직들이 잡고 있었다고 한다. 주성치, 홍금보, 왕우 등등의 홍콩의 중견 배우들은 삼합회 간부설 혹은 영화계와 삼합회를 잇는 다리 역할이라는 설이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배우들에게 폭력으로 영화 출연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여배우들에게는 성상납을 요구하거나 혹은 (노출 때문에 출연을 꺼리는 에로 영화에) 영화에 출연을 강요했다는 설도 많았다. [16] 이런 상황이 되니까 유명 연예인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폭력조직과의 연줄이 있어야 했다. 한국에는 잘 안 알려진 사건이지만, 1992년 매염방은 한 폭력조직으로부터 출연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구타를 당했는데, 매염방의 뒤에 있던 다른 조직이 보복으로 폭행 조직원을 살해한 바 있다. 이렇게 1960-70년대의 한국 연예계 [17]와 마찬가지로, 홍콩 영화의 정점기에서도 홍콩 배우들의 매니지먼트는 대부분 조폭이 담당하고 있었고, 홍콩 영화 자본은 대부분 조폭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돈이었다. 위에서 나온 잦은 겹치기 출연이나 아류작 남발도 사실 조폭 탓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폭들은 연예 매니지먼트에 합리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이미지 소모나 피로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그저 영화계에 투자한 금액을 빨리 회수하기 위해 아류작을 계속 만들고 여기에 연예인들을 계속 출연시킨 것이다.
  • 홍콩 반환을 둘러싸고 투자 감소 - 80년대 초에서 후반까지 홍콩 영화 개봉작을 보면 시네마 시티 영화사나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 로고는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하지만 90년대로 들어가면서 반환에 의한 불안 심리로 이들 개봉작도 급격히 줄게 되는데, 이러한 투자 감소는 시장 자체를 줄였고 또 삼합회가 제작에 간섭하는 원인을 제공해 돈벌이를 위한 아류작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 유명 영화인들의 해외진출/이민 -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주도하던 주윤발, 성룡, 오우삼, 이연걸 등은 할리우드로 떠났고,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던 왕가위 감독은 홍콩 영화 산업에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홍콩 반환과 맞물려 장국영 등은 아예 국적까지 바꿨다. 반환 이후 표현의 자유 등에 간섭할 것이 뻔하다 보니 홍콩을 떠난 것. 다만 홍콩 영화인들의 해외 진출은 홍콩 영화가 위의 이유로 몰락한 이후인 1990년대 이후 발생한 일이다. 투자가 저조하고, 작품 활동이 원할치 못하니 해외로 진출한 것. 이들 대부분은 2000년대 중반에 다시 홍콩에 돌아왔지만, 이미 홍콩 영화계는 대륙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한 주성치를 제외하면 해외에 영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 시장의 협소함 - 홍콩의 인구는 약 700만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은 서방 문화를 들여오는 창문으로서 아시아 문화를 선도했다. 하지만 아시아 각국의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홍콩을 거치지 않고 서방 문화를 직도입하기 시작했고(이 같은 점은 한국이 두드러졌다.), 홍콩은 독자문화를 배양하기는 시장이 너무 좁아서 자생력이 적을 수 밖에 없었다. 홍콩 문화의 기반인 광동어는 대륙은 물론, 대만에서도 규제를 받기 때문에 더 클 수가 없었던 것. 이렇게 시장이 좁기 때문에, 위와 같은 문제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홍콩인의 해외이주 붐은 처음에는 중국 지배의 공포 때문에, 나중에는 더욱 큰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 때문으로, 이는 근본적으로는 홍콩 시장의 한계 때문이다.
  • 한국 영화계의 변화 - 중국에서 홍콩을 포함한 서방영화가 수입금지되던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시장은 홍콩영화의 최대시장이었다. [18] 당연히 홍콩영화계는 한국을 굉장히 의식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한국 시장에서 홍콩영화의 위상이 퇴색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개발도상국 취급을 받아 헐리우드 영화를 싸게 수입해 왔으나 한국시장을 제대로 안 미국 영화계가 영화 수입가격을 크게 올렸고 이후 직배급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는데 이 때문에 한국의 영화 수입 배급사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홍콩 영화를 다량 수입해서 극장에 내걸게 되었고 이는 8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홍콩 영화 붐에 일조했다.[19] 하지만 9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성장으로 상품성 좋은 헐리우드 영화를 제 값 주고 사올수 있게 되고, 충분한 제작비를 투입하여 한국 영화의 질적 향상이 이루어지게 되자 아류작이 난립하는 홍콩 영화에 식상해진 한국에서 홍콩 영화의 유행이 식었다. 홍콩 영화계 입장에서는 큰 시장이 하나 죽은 것.
  • 중국 본토 영화 성장 - 2010년대 두드러진 경향으로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 대륙 영화계로 진출하는 것이다. 물론 본토 영화는 여러가지 소재 제약도 있고 검열도 심하여 홍콩만큼 자유로운 창작이 불가능한 단점도 있지만 [20] , 무협, 사극이나 로맨틱 코메디물은 검열 당국의 가위질을 피해갈 수 있는데다가, 대륙 영화에 들어가는 영화 자본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홍콩 영화계의 인재들을 거의 진공 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스탭들은 물론이고, 광동어로 연기를 하던 주윤발, 유덕화와 같은 여러 홍콩 배우들도 현재는 보통화로 연기를 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 대륙시장을 의식해야 하는 홍콩에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혐중이 대세인 나무위키의 일부 유저들이나 엠팍같은 혐중사이트에서 검열제도 때문에 영화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늘어 놓고 있지만, 현실은 정 반대. [21] 검열이 극심할 때인 1990년대조차 장이모나 첸카이거 같은 거장들이 패왕별희나 인생같은 걸작을 내놓았고, 현재는 사극 같은 경우는 거의 할리우드급으로 돈을 투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중국 영화시장은 2015년 세계 2위가 되어 있으며, 이렇게 대자본이 굴러가자 검열제도를 피할 수 있는 주제에서는 괜찮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제 중국 영화시장의 규모때문에 홍콩뿐만 아니라 헐리우드까지 중국 눈치를 보는 형편이다. [22] 이렇게 중국 시장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홍콩 영화는 헐리우드 때문에 성장이 어려운 거의 캐나다나 호주영화 정도로 전락하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이후 2002년 무간도를 시작으로 8~90년대의 홍콩영화스러움이 조금 부활하긴 했지만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 초까지 유달리 열광[23]했으나 이후 몰락하면서 한국 관객의 외면을 받고 있다. 심지어 왕가위 감독에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 주연의 2013년 영화 '일대종사'의 경우 CJ 무비꼴라쥬 배급을 통해 다양성 영화 취급(...)을 받으며 개봉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근데 이건 왕가위가 퇴물이 된 점도 있다. 참고로 다양성 영화란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저예산 비주류 영화를 말한다. 사실 예술영화, 다큐영화 역시 독립영화의 범주안에 들어가는 것이기는 하나, 정치적 논리가 들어가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다.

그래도 무간도나 뉴 폴리스 스토리 같은 범죄물이나 구화영웅(救火英雄) 같은 재난물로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이 중 무간도는 2016년 봄 재상영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장르인 홍콩식 호러에도 도전, 디 아이즈(The eyes)나 이도공간 등이 나왔다.[24]

4 홍콩 영화의 대표적 장르들

1. 신이 내린 무술 실력, 액션 영화
호금전 감독, 정철 감독 등의 전통 무협 영화와 이소룡, 이연걸, 견자단 등을 주연으로 한 쿵후 영화. 이 장르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는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장르다. 무술가겸 배우인 스티븐 시걸이나 척 노리스를 앞세운 할리우드식 무술영화가 있긴 하지만, 홍콩영화의 포스를 당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이동준클레멘타인(영화)으로 신기원을 썼다

2. 멜로와 로맨스 드라마
'첨밀밀', '중경삼림', '유리의 성' 등. 홍콩 멜로 영화의 대표적인 스타로는 임청하, 장만옥, 종초홍 등이 있다. 90년대 말부터는 곽부성진혜림, 금성무가 두각을 나타냈다.

3. 서민적인 일상과 막가파 개그. 코미디 영화
70년대 허관문, 허관영, 허관걸로 이루어진 허씨 3형제 [25] 가 주축이 되어 촬영한 여러 개그영화 [26] 를 시작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최가박당 시리즈' 등이 유행하다가 90년대 들어서 주성치 주연의 영화로 부활한 장르이다.

4.미스터리한 중국 전설의 공포. 강시 공포물 및 환타지
'귀타귀', '강시선생' 등 강시가 등장하는 코믹 공포물. 당시 아이들 사이에선 부적과 강시놀이가 유행하기도 했다. 서유기나 그밖의 중국식 고전 환타지도 비슷한 종류. 대륙에서 몽키킹 시리즈로 이어가고 있다.

5. 모든 액션이 폭력적인 것은 아니다. 코믹 쿵후
이소룡 사후 침체되어 있던 홍콩 액션 영화의 새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홍콩 느와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홍콩 영화하면 가장 떠오르는 장르였다. 이 분야의 대가로는 홍금보, 성룡, 원표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취권', '오복성 시리즈', '프로젝트A', '용형호제' 등이 있다. 이 분야도 성룡과 홍금보가 나이를 먹은 이후 더 이상 나오기가 힘들어졌다.

6. 액션은 성인 남자만 하는 건 아니다.
'예스마담' 등의 여성 액션물. '호소자' 등의 어린이 액션물. 이 분야에서 유명한 배우들로는 양자경과 대만배우 양려청(양리칭), '나부락'으로 음차된 신시아 로스록, 엽천문, 그리고 호혜중이 있다.

7. 바바리에 성냥 그리고 쌍권총. 홍콩 느와르
대표작으로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천장지구' 등이 있다. 사실상 한국에서 대대적인 홍콩영화 붐이 일게 된 계기를 연 장르로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등 많은 홍콩 스타를 배출해냈다. 사실 도검이 총으로 바뀌었을 뿐 화려한 액션, 권선징악, 의리 등 구조가 무협 영화와 흡사하다. 일종의 현대판 무협 장르.

8. 인생은 도박이다, 도박물
이 장르의 영화는 1974년에 허씨 형제가 출연한 <귀마쌍성>을 효시로 볼 수 있겠다. 한동안 나오지 않다가, 1990년대 초반 홍콩이 중국에 귀속되기 직전까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국으로 귀속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표적인 영화로 '정전자(도신)', '도성', '도협' 등이 있다. 이러한 장르의 영화에서는 유덕화주윤발, 양가휘가 자주 나왔다.

9.고전 무협 시대극과 sf, 코믹, 판타지, 멜로가 절묘하게 결합한 홍콩 영화의 마지막 불꽃, 퓨전 영화
'천녀유혼', '공작왕', '동방불패', '동사서독', '서유기' 등. 주로 남자 스타들이 많이 부각되던 홍콩 영화에서 왕조현, 이가흔 등의 여자 스타들을 배출한 장르이다.

10. 범죄와 공포, 에로가 혼합된 퓨전 공포 영화
1992년 구예도 감독의 '언톨드 스토리[27]'가 대박을 친 이후, 비슷한 유형의 공포 영화들이 홍콩에서 유행했다. 범죄물과 공포물, 에로물을 조금씩 섞어 놓은 듯한 내용이 특징. 주로 살인마 또는 경찰, 형사가 주인공이나 핵심 인물로 등장하며, 폭력적인 살인 장면을 등장시켜 긴장감과 공포감을 유발한다. 뭔가 좀 뜬금없이(...) 등장하는 수위 높은 에로 장면은 덤. 실제 살인사건을 재구성해서 만드는 경우[28]도 있고, 이따금씩 사회 비판적이거나 풍자적인 내용이 들어가기도 한다[29]. 이러한 장르의 영화에서는 황추생이 주연으로 많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영화로 '어둠의 딸(滅門慘案之孼殺)', '고양의생(羔羊醫生)', '팽부(烹夫)' 등이 있다.

11. 1990년대 홍콩 반환 이후 새로 등장한 장르인 홍콩식 호러와 재난물
1995년 반환 2년 전 만든 '십만화급(十萬火急)'의 경우 홍콩식 재난물의 시초로 홍콩 판 분노의 역류이다. 구룡반도 신구룡에 소재한 소방서 대원들의 고군분투를 그렸으며, 영국 식민지 시절이라서 현재의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있는 자리에 유니언 잭이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30] 그리고 반환 후인 2002년 '디 아이(The eyes)'라는 태국과의 합작 공포영화가 만들어졌으며[31] 장국영의 유작 '이도공간'도 2002년에 제작되었다.[32] 그리고 2013년에는 홍콩에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 블랙아웃이 닥친다는, 상상도 하기 싫은 내용의 재난 영화인 '구화영웅(救火英雄)'이 만들어졌다.

12. 에로 영화
한국에서는 엄격한 검열 때문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로영화도 대표적인 홍콩 영화 장르의 하나였다. 홍콩 현지에서는 삼급편(三級片)이라고 부른다.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홍콩 검열 등급에서 제3등급은 미성년자(18세 미만) 관람불가이기 때문. 1990년대 씨네21에서 홍콩 박스 오피스를 소개할 때, 이런 종류의 작품은 포르노에 대한 정보제공으로 악용될까봐 제목을 그대로 소개하지 않고 그냥 포르노 영화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33], 5위권의 3개 영화가 그냥 포르노라고 표기된 적도 있다. 한국에서 알려진 대표적인 홍콩 에로 영화가 바로 옥보단. 금병매도 나름 유명하다. 이 장르로 유명한 사람은 이여진, 에이미 입(Amy Yip)으로 알려진 엽자미, 대만 배우 서기[34], 엽옥경 등이 있다.

13. SF물
홍콩영화의 대부 서극이 SF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세계에서는 일본의 특촬물과 함께 SF영화가 나오는 몇안되는 산지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로보캅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고, 엽천문이 주연으로 나오는 철갑무적 (1987), 환영특공 (1998) [35],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주성치의 장강7호가 있다. 한국 관객들은 할리우드의 입맛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이것보다 기술적으로 떨어지는 홍콩 SF물은 거의 개봉되고 있지 않지만, 홍콩에서는 나름 계속 나오고 있다. 이 밖에도 유덕화가 나오는 미래경찰 X(2010), 양자경이 나오는 실버호크(2004)도 있다.

5 배우들

5.1 주연급 남자배우

1950년생. 배우 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한데, 우리 나라로 치자면 조용필 수준의 위상을 가진 전설적인 대가수다. 국내에서는 느와르 강호정(1986, 주윤발과 공동 주연), 용형호제 (1987, 성룡과 공동주연), 지존무상 등의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강호정에서는 긴장하며 재채기를 참지 못하는 허당 캐릭터였으며 용형호제에선 과거 재키와 함께 그룹 활동을 하다가 솔로로 독립한 스타 역할로 출연했다. 카지노 무비 지존무상에 유덕화, 진옥련, 관지림과 함께 출연했는데 친구(알란탐)를 구하려다가 손을 다치고, 친구의 아내(진옥련)를 구하기 위해 독주를 마시고도 안 마신 척 걸어나가는 유덕화의 임팩트에 묻혀버렸다. 한국 가수 김완선과 1993년 듀엣곡을 부르기도 했으며 김완선의 대만 활동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2016년 한국에 방한해서 김완선이 출연 중인 예능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팍스뮤지카 등의 공연을 통해 한국가수 조용필과 친분을 쌓았으며 조용필의 히트곡 '친구여'를 광동어로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었고, '친구여' 외에도 조용필의 노래를 몇 곡 더 번안해 불렀다. 성룡의 말에 의하면, 용형호제 1편 촬영 중 사고로 뇌수술을 받고 죽느냐 사느냐 고비에 있을 때 병실에서 알란탐이 부르던 '친구여' 노래가 귀에 들려 깨어났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담강백은 1930년대 유명했던 축구 선수로, 1936 베를린 올림픽중화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 때 히틀러에게 회중시계를 수여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담영린은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며 홍콩 2부리그의 Sun Hei SC 라는 구단의 명예회장으로[36] 이 팀의 응원가를 부르기도 했으며 홍콩 연예인 축구단의 주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도 한국의 연예인 축구단과 친선 경기를 갖기 위해 여러 차례 방한했었다. 지한파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냉정히 말해서 안습하게도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이연걸, 임청하, 양조위 등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 사정봉 ( 謝霆鋒, Nicolas Tse)
홍콩의 원로 배우인 사현의 아들로서, 많은 홍콩 배우들이 그렇듯이 가수를 겸업하고 있다. 캐나다로 조기유학했으며, 이 당시 타블로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에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배우와 가수를 겸업한다. 장백지와 결혼했으나 진관희 사건이 터진 후 아내를 두둔했으나 결국 이혼했다. 최근에는 왕비와 동거중이라고 하며 2015년 현재 홍콩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남자 연예인이다.
  • 성룡
  • 양가휘 (梁家輝, Tony Leung , 1958 ~) [37]
대부분의 홍콩 주연급 배우와 마찬가지로 TVB 연기반 출신. 하지만 홍콩 이공대학을 졸업했으며, 홍콩배우로서는 보기드물게 대졸자이다. [38]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영어 연기가 되는지라 [39] 제인 마치와 함께 프랑스에서 만든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연인(L'amant, 1992)에 출연했다. 가수도 겸엽했으며 책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동사서독에서 인상적 연기를 펼쳤다.
본명은 왕정권 (王正權). 대만 출신이다. 원래 수영선수로서 엄청난 운동신경을 가졌고, 이것을 바탕으로 액션배우가 된다. 1963년 홍콩의 쇼브라더스에서 데뷔했는데, 외팔이 검객 기믹으로 무협영화에 출연해 큰 인기를 모았다. 이소룡과 동시대인으로서, 이소룡 사후 무술영화의 슈퍼스타로 군림할 뻔 했지만 쇼브라더스와의 계약 문제로 법적 소송 끝에 홍콩 영화에 출연이 금지되자 1970년대부터는 대만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70년작 용호투는 도검류를 휘두르는 무협 영화에서 이소룡이나 성룡식의 맨손액션 영화로 넘어가는 전기를 만든 영화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부터는 사업으로 영화출연이 뜸해졌고, 2011년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2013년 방한해서 한국 올드팬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했다.
영화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하다. CF모델 출신이며, 1991년 3인조 그룹으로 데뷔했다. 홍콩 영화가 쇠퇴해가는 와중에서도 2010년대까지 꿋꿋하게 계속 주연급으로 출연하고 있다.
가수 겸 배우. 홍콩 막가파 개그의 효시인 허씨 3형제(허관문, 허관영, 허관걸)의 막내동생이다. 그 시대 홍콩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한 보기 드문 고학력 배우이다. 1970년대에는 주로 형들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최가박당 시리즈에 나오면서부터 형들과는 별도로 활동하기 시작. 한국에서는 최가박당의 주연 '금강' 역할과 함께 영화 소오강호(1990)의 주연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에 나온 <대영가>를 끝으로 연예계에서 은퇴했다. 배우로도 유명하지만 가수로는 대만의 표준중국어 노래가 유행하던 홍콩 가요계에 광동어 가요를 정착시킨 최대 공헌자로서, 홍콩 가요계의 위상은 한국의 조용필이나 서태지급이다. 여담이지만 보통화를 거의 못하는 듯, 중국 공연이나 중국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광동어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40]

5.2 악역: 눈물나는 악당들의 사연

대개 액션 영화에서 악당들은 오만가지 방법으로 격퇴당한다. 문제는 여기에 코믹성이 들어가면 악당은 얻어맞는 것도 모자라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게다가 액션 영화 특성상 일반 악당이 아닌 두목급의 역할은 아무나 맡는 게 아니게 된다. 그러다 보니 여러가지 의미로 얼굴을 자주 비추게 되었고, 관객은 "어?! 쟤 XX에서도 악당 아니었나?"라는 궁금증과 "또 당하는 역할이냐..."라는 연민을 자아내게 되었다(…).

대체로 홍콩 4대 악역은 성규안, 하가구, 이조기, 황광량 (또는 장요양(1963)이 들어가기도 한다)로 알려져 있다. 주윤발, 양가휘가 나온 감옥풍운(1987)에서 이 5명을 모두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상당한 명작인데도, 같은 해 나온 영웅본색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인물과 일화 추가바람.

  • 노혜광(盧惠光, Ken Lo)
성룡의 개인 경호원 출신으로 무에타이 챔피언. 취권 2에서 화려한 발차기 기술을 선보였다가 공업용 알콜에 취권 포텐이 터져 역관광 당하고 기절 크리. 초급학교패왕에서는 빈슨 장군으로 나오는데 미사일을 얻어맞고 몸에 큰 구멍이 나서 이미 죽었는데도 가일한테 또다시 확인사살 당한다(...).
  • 성규안(成奎安, Fui-on Shing)
얼굴만으로 악당이라고 지적받는 사람. 유명 출연 작품은 영웅본색, 영웅본색 2, 첩혈쌍웅 등. 원래 조직에서 일했고, 조직 관련 범죄로 징역까지 살았으나, 석방 후 개과천선을 다짐해서 영화사의 잡역부로 들어갔고, 그 험악한 인상 때문에 단역으로 캐스팅되어 악역 전문배우로 활동하게 되었다. 2004년에 비인암을 선고받았고, 안타깝게도 2009년 8월 28일에 작고했다. 첩혈쌍웅에서 주윤발과 함께 공동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이수현이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 양사(揚斯, Bolo Yeung)
장 끌로드 반담영화의 단골 악역으로 나오는 홍콩 배우. 홍콩에 건너온 이소룡과 광고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용쟁호투에서 악역을 시작했다.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가장 유명한건 장끌로드 반담의 bloodsport (한국제목은투혼(미국 영화)), double impact (한국 제목은 더블반담)의 근육질 악역.
  • 예성(倪星) 또는 추조룡(鄒兆龍. Collin Chou)
홍가반 출신의 액션 배우. 주요 작품은 '이연걸의 보디가드'와 도화선으로, 주로 무술이 뛰어난 악당 두목을 맡았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매트릭스 3 - 레볼루션에서는 오라클의 보디가드 세라프 역을 맡아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41]
  • 우영광(于榮光, Rongguang Yu)
유명 출연 작품은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정우성이 나오는 한국영화 무사(한국 영화)의 몽골군 장수, 베스트 키드, 이연걸의 영웅, 삼국(드라마) 등.
위에 언급된 악당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인데, 삼국의 관우 역할 등 선한 역할도 골고루 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연걸의 영웅에서는 얼굴을 맞아도 절대 벗겨지지 않는 선글라스라는 최종보스 보정을 자랑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의 두 부하도 신나게 두들겨 맞는데, 그 두 부하란 사람이 바로 위 목록에 있는 노혜광과 예성이다(…).
  • 원화(元華, Yuen Wah, 1952~)
본명은 용지(容志)이다. 우점원 경극학원에서 가르침을 받은 홍금보, 성룡, 원표 등으로 이루어진 칠소복 중 최연장자이자 칠소북의 유일한 여자 멤버 원추의 남편이다. 원표와 더불어 족(足) 기술이 아주 날카로워 찌르는 느낌을 주고 이소룡의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의 덤블링 대역을 맡았을 정도로 아크로바틱 모션의 최강자라고 한다.[42] 사형제들이 성공가도를 달렸던 반면, 원화는 주로 스턴트나 무술 감독으로 활약했다. 동료들이 연출한 영화에서 악역 출연이 잦았는데, 강시선생에서는 두목 강시 역할을 맡았고 동방독응, 비룡맹장, 급동기협(한국 개봉명 '청옥불') 등에서는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기른 비열한 악당으로 출연했다. 물로 던져지거나 유리에 허리가 꽂혀죽거나 양철 지붕으로 내던져지는 등 온갖 안습한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 이조기(李兆基, Keith Lee Siu Kei)[43]
주로 중후한 마피아 보스로 나온 배우. 성룡의 홍번구에도 나왔다.
  • 임세관(任世官, Shi-Kwan Yen, 1947~)
1970년대 무협영화의 단골악역이었는데, 2000년대까지 계속 무협영화의 악역으로 출연했다. 인상은 포악스럽지 않고 위압감을 주는 카리스마형. [44] 악역 아닌 선역으로도 출연할만 한데도 기억나는 배역은 죄다 악역이다. 동방불패의 일월신교 교주, 황비홍2의 양광총독으로 주로 카리스마 있는 최종보스 역을 자주 맡았다. 참고로 황비홍 1편에는 돈에 눈이 멀어 악당들과 손을 잡고 황비홍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죽는 무술고수 역할을 맡았으며 황비홍 2편에는 총독으로 등장한다.
  • 장요양(張耀揚, Roy Cheung)
무간도, 대행동에서 악역이 유명하며, 주윤발, 종초홍이 주연한 타이거맨(원제: <반아틈천애(伴我闖天涯)>)에서도 인상적인 악역 연기를 보여주었다. 임영동 감독의 "풍운" 시리즈인 감옥풍운에서의 악역 교도관 역할과 용호풍운에서의 악역 경찰 역으로도 유명하다. 2014년 이 분은 영화 속의 악역에 그치지 않고 겁도 없이 중국 베이징의 호텔에서 성매매녀와 함께 대마초를 피우다가 걸리기도 했다. 마약 범죄지만 단순 흡입자이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고 구류 20일로 석방되었다.
  • 적위(狄威, Dick Wei)
80년대 홍콩 영화의 단골 악역. 주로 성룡홍금보가 감독을 맡는 영화에 자주 출연하는데 악역임에도 주인공과 거의 대등하게 싸울 정도로 악역의 포스가 넘친다. 프로젝트A에서는 해적 두목 라삼포로 나와서 홍금보, 성룡, 원표와 함께 3:1로 싸우다가 폭사당한다. 원표 주연의 파우에서는 재수없는 축구왕으로 나오나 두 다리가 잘려나가 거지가 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다. 본인도 악역 이미지가 붙어버린 것에 고민이 많았다고 하며, 이로 인해 홍콩 영화계를 잠시 떠나서 대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만영화 호소자 2에서도 악역을 비롯하여 거기서도 악역으로 종종 나왔다(...).
  • 주비리(周比利, Billy Chow)
인간 샌드백. 유명 출연작은 정무문 이연걸 버전, 초급학교패왕.
1984~1986년 동안 세계 킥복싱 대회 챔피언이어서 그런지, 정무문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마치 터미네이터 같은 액션을 보여준다. 초급학교패왕에서는 사가트로 나오지만 춘리한테 리타이어 당한다.
  • 진지휘(陳志輝, Chi Fai Chan)
영웅본색에서 송자호(적룡)를 함정에 빠드렸다가 마크(주윤발)에게 얼굴에 총맞아 죽는 대만인 배신자 역이 가장 유명하다. 1981년 데뷔했으나, 이후 악역 전문배우로 전업해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1에서부터 악역으로 나왔고, 이후 대부분의 출연 작품이 악역이다. 성규안, 하가구, 장요양과 같은 악역전문배우들과는 달리 악역임에도 포스있는 보스가 아니라 중간보스거나 똘마니 역으로 나오다가 허망하게 죽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바이두나 구글로 검색해보면 2006년에 마지막으로 <타작영웅전>에 출연했으며, 이후 영화계를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 하가구(何家鷗, Ka-Kui Ho)
100여편에 출연했으나 대부분 악역이다. 감옥풍운에서 주윤발, 양가휘, 성규안과 함께 출연. 2000년을 끝으로 영화계에 출연이 뜸해졌다. 2015년 중국 선전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 황광량(黃光亮, Tommy Wong Kwong Leung)
감옥풍운과 용호풍운, 첩혈쌍웅을 비롯한 많은 영화에 악역 및 조연으로 등장했다. 첩혈쌍웅 초반부에서, 이수현에게 쫓기면서 트램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사살당하는 악당이 바로 그다.

5.3 여배우: 아시아를 흔들었던 미녀들

(대만출신은 ★)

  • 구숙정 (Chingmay Yau, 1968)
1987년 미스 홍콩에 뽑혀 연예계 데뷔. 깜찍한 얼굴로 한국에도 인기가 많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보일 듯 말 듯 하면서 결정적인(..) 부위는 안 보여주는 배우로 유명했다. 퓨전 혼합 에로물 <적나고양> 시리즈, <외전 혜옥란>에서 선정적인 모습으로 포스터를 찍었는데, 피시통신 시절에는 여기에 낚여서 본편을 대여해 보고 노출이 없어서(어깨와 허벅지까지가 한계..) 실망했다는 한국 남성 네티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어쨌든 이분은 결정적인 노출을 극히 자제한 보람이 있는 듯, 재벌 패션 디자이너와 결혼 후 은퇴해 사모님으로 잘 살고 계신다고..
  • 막문위 (Karen Mok, 1970)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1995)로 한국에 알려졌지만, 데뷔는 1993년이다. 주성치의 과거 연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주성치와 헤어진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가수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가수 출신으로 장국영, 알란탐과 함께 1980년대 홍콩에서 무적 3인방으로 불렸다. 대부분의 홍콩 가수들이 그렇듯이 배우를 겸업했고, 가창력도 뛰어나지만 연기력도 뛰어나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한국에 개봉된 것중에 유명한 것은 영웅본색 3, 성룡의 미라클 (1989), 91 신조협려(1991), 홍번구(1995), 이연걸의 영웅이다. 자궁경부암으로 안타깝게 4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 양자경 (Michelle Yeoh, 말레이시아 출신)
  • 양려청(양리칭) (Cynthia Khan, 1967)★
원래 무용을 전공하다가 후에 무술을 연마하고 액션배우로 전업하였다. 예스마담3에서 전작들 주연인 양자경 대신 출연하여 액션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어명 Cynthia는 신시아 로스록에서 따왔다고 한다. 현재는 피트니스 사업을 하신다고.
  • 양채니 (Charlie Young, 1974)★
1992년에 가수로 데뷔했다.1994년의 서극의 양축(梁祝)에 출연해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1994-97년 사이 홍콩의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나 갑자기 은퇴. 하지만 2004년 복귀해서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5에 출연했다. 현재도 활동중이다.
  • 양천화 (楊千嬅, Miriam Yeung, 1974~)
가수 겸 배우. 한국에서는 흥행한 영화가 없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광동어 가수로는 전설급이며 홍콩에서는 "가요의 여왕"(歌后)이라고 불린다. 한국에서 그나마 알려진 작품으로는 옴니버스영화 <쓰리 몬스터> (2004)의 "만두"편이다. 간호학교를 졸업한 정규 간호사(RN)이기도 하며, 책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 엽옥경 (Veronica Yip, 1966)
1985년 미스 아시아 대회에서 2등을 하여 데뷔. 데뷔 초반 aTV전속 탤런트로 계약했으나 잘 풀리지 않았다. aTV와의 계약 종료 후, 1991년 정불자금 (情不自禁)을 시작으로 한 에로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돌파구를 뚫는다.1995년까지 여러 편의 에로 영화에 출연했다. 이후 슈퍼마켓 체인을 경영하는 부유한 미국계 중국인 사업가와 결혼하고 연예계를 은퇴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 엽온의 (글로리아 입) (Gloria Yip, 1973)
전성기에 주로 일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일본 활동명인 "글로리아 입"으로 알려져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역배우로 데뷔했는데, 특유의 깜찍한 모습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활동했으며, 원표의 공작왕, 성룡의 용형호제에 나온다. 홍콩재벌과 결혼을 비교적 일찍(1995)하고 은퇴를 했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워 글로리아 입같은 미녀를 와이프로 두고 바람을 피울 수 있나? 이혼 하면서 상당히 힘든 세월을 보냈다. (아이 둘은 글로리아가 맡았다고 한다) 동료 배우 증지위가 연예계 복귀를 도와주었지만, 청순깜찍 이미지를 이혼녀가 써먹을 수는 없는데다가, 이미 이혼하면서 3류찌라시들의 단골소재가 되었기 때문에 연기복귀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현재는 연기학원을 경영한다고 하며, 최근에 보도되는 사진은 세월과 풍파를 겪은 미중년의 모습이다.
여담이지만 리키오의 향일합작 실사영화판에도 얼굴을 내민적이 있었다.[45] 주인공의 연인 캐릭터정도의 위치로 회상씬에서 나오는 정도의 카메오 출연이었지만. 물론 그 장면은 작중에서 얼마 안되는 평화로운(?) 장면이다.
  • 오천련 (Jacklyn Wu, 1968) ★
천장지구[47]에 유덕화와 함께 공연해 유명해졌고, 1997년에는 언픽스라는 망작 한국영화에 한재석과 나오기도 했다. 대만 국립예술학원에서 연기를 정통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연기력도 탄탄하며,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에서도 열연을 펼쳤다.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활동이 없다. 결혼도 2007년 일반인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왕비 (왕정문) (Faye Wong, 1969)
대륙 출신. 가수로는 전설급이지만, 배우로 뜬 것은 중경삼림의 식당 종업원 역 때문이었다. 연기력이 매우 좋음에도 불구하고 출연한 영화는 5편에 불과한데, 모두 홍콩 영화이다.
  • 원결영 (원영) [48] (Fennie Yuen, 1969)
1985년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했는데, 무려 "개심소녀조(開心少女组)" [49] 라고 불리던 걸그룹출신이다. 드라마 소오강호동방불패에도 출연해서 무협팬들에게는 특히 인기가 있지만. 첩혈가두에서는 신혼에 남편이 실종된 와중에서도 임신했던 아이를 낳아 홀로 키우던 양조위의 조강지처로 나온다. 동방불패에선 남봉황 역할을 맡아 관지림과 함께 출연했다. 외모는 매우 청순하고 고전적인데, 사생활은 이래저래 스캔들이 많았으며, 아시아 여배우로서는 보기드문 양성애자.
  • 원영의 (Anita Yuen, 1971)
1990년 미스 홍콩 출신. 1991년에 TV데뷔를 했고, 1994년 금지옥엽으로 금마장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성룡의 썬더볼트에도 나온다. 최근에 이민호와 배수지가 사귄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SNS에 남겨 화제가 된 바 있다. 물론 이 분은 유부녀다.
  • 이가흔 (李嘉欣, Michelle Reis, 1970 ~)
마카오 출신으로, 아버지가 포르투갈계인 혼혈이다. 영화 동방불패에 영호충의 사매로 출연했다. 동방불패와 타락천사 등 인지도를 높인 작품은 몇 안되지만 화려한 미모가 화제가 되어 많은 CF를 찍었다. 한류 배우로 비유하면 한채영 정도 위치였던 여배우. 2008년 재벌과 결혼하면서 은퇴했다.
  • 이여진 (이려진) (Loletta Lee, 1966)
1980년대 중반에 데뷔. 원래는 아역배우부터 시작했고, 1985년에 장국영과 로맨틱코메디물 위니종정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뜨지 못하자 1987년부터는 생활고 때문인지 에로물에 주연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에로 배우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알려진 것은 1994년에 비디오로 출시된 밀도성숙시. 베이글형 스타일인데다가 연기력도 뛰어나다. 이어 서기와 함께 옥보단2(1996)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에로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지만, 결혼(1996년, 2000년 이혼) 후 에로물에서 손을 씻고, 다시 주류 영화계로 돌아와 1999년 출연한 사회물 천언만어에서는 금마장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 이새봉 (李賽鳳, Moon Lee, 1965 ~ )
양자경, 호혜중과 함께 액션 여배우로 유명지만 이들보다는 약간 유명세가 떨어진다. 원래 홍콩 출신이지만 대만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서극감독의 무협 촉산 (1983) 으로 데뷔. 이어 일본에서 CF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주로 TV 무협극에 자주 출연했지만, 간간히 강시물이나 리스 마담 (원제 <천사행동>) 같은 여형사물에도 나와 한국에 알려졌다. 1989년 <엽마군영> 촬영중 폭파 촬영신에서 타이밍이 어긋나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으나 회복된듯 이후 계속 촬영했다. 대다수의 홍콩 배우처럼 결혼하고 은퇴했으나, 2007년 근친상간성 [50] 불륜 사건으로 이혼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장백지 (Cecilia Cheung, 1980)
초기에 장만옥을 닮은 걸로 유명했고, 신인 시절 최민식과 함께 한국영화 파이란의 여주인공을 했다. 아버지가 삼합회의 간부급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런 아버지의 비호를 받아 그런대로 홍콩의 주연급 여배우로 뜨나 했더니, 결혼전에 호색한 진관희와 사귄게 문제. 결국은 동료배우 사정봉과 결혼했지만, 진관희와의 사생활을 담은 사진 유출로 이혼했고, 그 다음은 작품 활동이 매우 드물어졌다. 오랜만에 2016년작 out of control에 빅뱅의 탑(빅뱅)과 동시 출연했다.
  • 장애가 (張艾嘉, Sylvia Chang, 1953 ~ )★
대만 출신으로, 홍콩에서 가수, 배우로 활동했다. 현재도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으로도 활발히 활동중. 16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DJ를 하다가 홍콩으로 건너가 영화계에 데뷔했다. 처음작품은 왕우와 허관걸이 주연한 용호금강 (1973). 1970년대는 주로 무협물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미국의 한국전쟁 시트콤 M.A.S.H.에도 한국인(...) "순이"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1983년 최가박당에 왈가닥 여형사로 출연하여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이어 감독으로 데뷔하여 <최애>(1986) 로 큰 호평을 받고 중화권의 여러 영화상을 받았는데, 이후 도래한 홍콩 영화의 전성기인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배우보다는 감독 또는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13년 추자현이 출연한 중국 드라마 <화려상반족>(화려한 샐러리맨)의 각본을 맡기도 했고, 이것이 영화화된 2015년 두기봉 감독의 동명의 영화에는 주윤발, 탕웨이와 직접 출연. [51] 주연급 홍콩 여배우들은 대부분 재벌과 결혼해서 은퇴하거나 스캔들로 커리어를 접곤 하는데, 그 와중에서 모범적인 자기관리와 노력으로 끊임없이 커리어를 쌓아올려 홍콩 여배우중에서는 영화계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한국 팬들에겐 주윤발이 비운의 모터사이클 레이스로 출연했던 영화 우견아랑 속 여주인공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 종려시 (Christy Chung, 1970) [52]
캐나다 출생의 중국-베트남 혼혈. 캐나다 화교 미녀 대회에서 우승 후, 1991년 홍콩에서 열린 미스 차이니스 인터네셔널에 참가했다. 이것으로 홍콩 연예계에 데뷔해서 이연걸이 나오는 보디가드(1994)에 출연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누드집을 내는 등, 섹시 컨셉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태국영화 잔다라에서 엄청난 노출 연기를 했다. 2003년 결혼했다가 2010년 이혼했으나, 한때 신현준과 열애중이라는 뜬소문이 돌기도 했다. 2016년 12살 연하인 중국 가수 장륜석과 재혼했다.
  • 종초홍 (Cherie Chung, 1960)
1979년 미스 홍콩 대회에서 3등을 하여 연예계로 데뷔했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장만옥, 임청하와 함께 3대 배우로 꼽혔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된 작품은 은퇴작인 오우삼의 종횡사해 (1991)가 유일해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홍콩 광고재벌 주가정과 결혼하면서 은퇴했는데, 안타깝게도 2007년 남편이 암으로 사망해서 과부가 되었다. 은퇴 후 언론에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으로 알려지는 동정을 보면 역시 미중년으로 살고 있으며, 간간히 주윤발, 장만옥과 같은 과거 동료배우와 만난다고 한다. 주윤발과 함께했던 작품 중에 가을날의 동화첨밀밀과 더불어 홍콩 멜로영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가을날의 동화란 영화 제목음은 한류 드라마 가을동화의 제목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 주인 (Athena Chu, 1971)
홍콩예술학원(단과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학생시절에는 아동용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데뷔했고, 대학을 졸업한 후, 주성치 영화(서유기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영화계로 진입했다. 그리고 TVB 방송국의 드라마에도 여러 편 출연했다. 막문위와 염문을 뿌리던 주성치와 갈라진 후, 주성치를 공개적으로 디스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남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홍콩가수 황관중과 사귀며 혼전 임신을 했고, 그 길로 결혼을 해서 출산했다.
  • 진혜림 (Kelly Chen, 1972)
아시아의 디바(중국어로 亞洲天后)로 불리는 진혜림은 파슨스 디자인 학교 출신으로, 홍콩에서는 영화 배우보다는 정수문과 함께 여가수로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지한파 연예인이다. (댄스가수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여러 장르에 출연했지만, 친니친니와 같은 주로 로맨틱 영화로 인기를 끌었다.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무간도와 무간도 3에서 정신과 의사 이심아 역으로 출연했으며, 동경공략과 같은 액션물에도 간간히 출연한 바 있다. 대장금의 ost 오나라의 중국어 버전인 희망(希望)을 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연의 왕후 등에서 주연으로도 출연하면서 가수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2008년에 결혼하였다.
  • 혜영홍 (Kara Hui, 1960)
액션물에서 주로 활약했다. 관지림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이며, 산동성이 본적인데, 유아일 때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피해 홍콩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았으나, 장철 감독과 유가량 감독에 의해 픽업되어 액션물에 주로 출연했다. 견자단, 금성무, 탕웨이, 왕우가 출연하고 진가신 감독이 연출한 영화 무협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1년 유역비와 함께 출연한 천녀유혼의 프로모션을 위해 방한한 바 있다. 제1회, 16회 금마장 여우주연상 수상.
  • 호혜중 (Sibelle Hu, 1958)★
대만의 서울대라고 할 수 있는 국립타이완대학을 졸업한 고학력 여배우이다. 하지만 지적인 역보다는 무술이나 액션물을 주로 출연. 한국에는 복성고조로 알려졌다. 1988년 예스마담류의 액션물 패왕화 (한국 제목 <땡큐마담>) [53] 촬영중 큰 화상을 입었고 회복은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인상적인 활약을 못했다. 1990년대 안과의사 출신 정치인 (홍콩 내무장관 역임) 하지평과 결혼 후에 연예계를 은퇴했다.

5.4 조연 및 감초 연기자

  • 동표 (董驃, Bill Tung, 1934-2006)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에서 반장, 홍번구에서 삼촌 역을 맡았다. 이분은 연기자로도 유명하지만, 경마 해설자로도 더 유명하다고 한다.
  • 등광영 (鄧光榮, Alan Tang, 1946-2011) [54]
위에서 듣보잡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배우나 제작자로 홍콩에서 손꼽을 만큼 유명했다. 어렸을 때, 모델과 영어 번역자로 일하다가 1963년 배우로 데뷔했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았으며, 감독도 잠시 했으나, 19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제작자로 일하면서 가끔씩 제작 영화에 조연으로 나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본의 아니게 듣보잡이 되었다. 왕조현, 주윤발 제작의 의개운천도 제작했고, 1987년 <강호용호투> (주윤발 출연, 한국개봉명 영웅투혼) 를 제작하면서 왕가위감독을 픽업했고, 자신도 이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어 다시 왕가위 감독 유덕화 장만옥의 <몽콕하문> (한국 개봉명 열혈남아)도 그가 제작했다. 몽콕하문이 성공하자 왕가위와 다시 손잡고 아비정전도 제작했으나 왕가위가 등광영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찍다가 흥행에 참패했고 [55] , 둘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아비정전이 흥행에도 불구하고 여러 상을 타자, 등광영은 수상 소감에서 "왕가위를 그만 용서하겠다"고 밝혔다는 후문이 있다.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후 중국에서 검거 열풍이 벌어지자, 홍콩인들은 민주화 운동 수배자들을 해외로 도피시키기 위한 운동(황작작전이라고 한다)을 벌였는데, 등광영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암흑가와의 커넥션을 이용해 이 운동을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맥가 (麥嘉, Karl Maka, 1944 ~)
최가박당의 대머리 형사인 앨버트 역로 유명. 하지만 제작자로는 더 유명하다. 중국 출생이지만, 브루클린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뉴저지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뒤늦게 뉴욕대학교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1970년대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계에 투신했다.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서소강 (徐少强, Norman Chui, 1950~ )
젊을 적에는 증권회사에서 회계사를 하다가 쇼브라더스에 입사했다. 1970년대 여러 무협영화에 출연했으며, 1980년대는 주로 무협에서 사파(악역)로 주로 활동하였다. 가장 유명한 악역은 1993년 주성치의 <무장원소걸아>의 악역. 최근까지도 홍콩과 대륙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석천 (石天, Dean Shek, 1950 ~)
중국 베이징 출신. 배우보다 제작자로 더 유명하고 성공했다. 본명은 유위성(劉衛成). 어렸을 때, 홍콩으로 이주하여, 1969년 쇼브라더스의 연기 연습생으로 입사하여 배우생활을 시작한다. 이어 수많은 조연으로 출연했다. 1973년 쇼브라더스를 퇴사하고, 골든 하베스트의 개그 영화인 귀마쌍성에 허관문 3형제와 주연을 맡았다. 1975년부터는 연출에도 손을 댔고, 1980년대 시네마 시티를 맥가, 황백명과 공동으로 설립하여 홍콩영화의 80년대 황금기를 열었다. 영웅본색 2에는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원로배우 오현경 선생과 매우 닮았다.
  • 오맹달
  • 오요한 (吳耀漢, Yiu-Hon Ng, 1932~)
홍콩 영화 코믹 연기의 대부. 주성치와 은근히 이미지가 겹치는 면이 있다. 쾌찬차에서 정신병 환자 역을 맡았고, 복성 시리즈에도 매번 나온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귀속된 이후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내는 영국인으로, 아들 오가룡도 배우인데, 2004년 하리수와 같이 영화 <도색>에 출연한 바 있다.
  • 임달화 (任達華, Simon Yam)
1975년부터 연기를 시작한 중견 배우지만, 한국에는악역 전문배우처럼 이미지가 굳어진 채 잊혀지다가 도둑들에서 홍콩팀 보스역으로 재발견되었다. 재전강호 등의 영화에서 악역을 자주 맡기도 했었으나 오우삼의 첩혈가두에서 사이공에서 활약하는 멋쟁이 킬러로 열연했다. 밤무대 여가수를 돕기 위해 조직과 싸우는 캐릭터. 최근에는 흑사회, 익사일 등 두기봉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연하고 있다. 영어를 상당히 잘하는 듯, 2012년 도둑들 개봉에 앞서 방한했을 때, 백지연의 INSIDE에 출연했을 때 통역없이 영어로 장시간의 인터뷰를 한 바 있다.
  • 임정영 (林正英, Lam Ching-ying 1952-1997)
  • 증지위 (曾志衛, Eric Tsang)
홍콩 영화의 히든 보스. 여러 영화에 주연 아닌 조연으로 많이 출연했지만, 영화 배우라기보다는 영화 제작자와 감독, 그리고 만능 연예인으로 더 유명하다.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연 1982년작 최가박당의 감독을 맡았던 나이가 일약 29세였고, 홍콩 영화계, 아니 홍콩 연예계에서의 영향력은 거의 수위를 다투고 있다. 진행자로서도 유명하며, 홍콩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주요 행사의 진행자는 증지위가 맡을 정도. 친한파 연예인이기도 하며, 한국 드라마 (<홍콩 익스프레스>(2005))에 출연하거나 한국 영화 리메이크나 한국과 합작 영화를 찍는데도 적극적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있으며 이중 큰 딸 증보의와 큰 아들 증국상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연예인으로 활동 중이다. 증국상은 도둑들에도 출연했으며, 그래서 마카오에서 촬영 당시 증지위의 도움을 얻어 순조롭게 현지 촬영이 진행될 수 있었다고 한다.
  • 화성 (火星, Mars) 혹은 장영발(蔣榮發, Cheung Wing Fat)
홍금보의 사단인 홍가반 출신이며, 스턴트 및 무술 연기자이다. 성룡과 절친이며, 성룡의 스턴트 연기 대역을 많이 했다. 프로젝트A에서 지휘관 원표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가 총살당할 뻔 한 쫄병 역을 맡았고, 폴리스 스토리 등 초기 성룡 작품에서는 감초처럼 등장한다.

5.5 외국인 배우

한국인. 사망유희에서 이소룡 사후 대역을 맡았다.
  • 리처드 노튼 (Richard Norton)
호주 출신. 무술연기자와 스턴트를 겸업했다. 주로 1980년대의 성룡 영화에 출연했으며, 하일복성과 부귀열차, 나이스가이의 서양인 악당 역이다.
  • 니시와키 미치코 (西脇美智子. 1957~)
1980년대 흔치 않던 여성 보디빌더로 스턴트와 무술연기를 겸엽했다. [56]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홍콩 데뷔작인 복성고조에서 여형사 패왕화(호혜중)과 마주치자 갑자기 기모노를 벗어던지고 수영복 차림으로 호혜중을 때려눕히는 장면. 이후 도신, 러시아워2 에도 출연했다. 홍콩 영화 진출 초기에는 광동어에 서툴렀기 때문에 홍콩 영화에 나올 땐 거의 대사가 없다. 결혼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스턴트 연기를 계속했으며, 톰 크루즈의 콜래트럴에도 잠시 나온다. 미녀 삼총사에서 동양계인 루시 리우의 스턴트 연기를 대신했다고 한다.
  • 구라타 야스아키 (倉田保昭, 1946)
유도 (3단)와 가라데(7단), 아이키도 (2단) 총합 12단을 가진 고수이다. 일찌기 홍콩 영화계로 진출하여 광동어를 익혀 더빙없는 무술 연기가 가능했다. 하일복성, 동방독응에 출연했으며, 미시마 유키오의 생애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 <미시마>에서도 작은 역할로 나온다. 현재는 오사카와 홍콩에 가라데 도장을 운영한다고.
  • 브래드 앨런 (Brad Allen)
성룡의 빅타임(원제 <玻璃樽> 또는 <Gorgeous>)에서 대결하는 서양인 무술가로 나온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여러 홍콩 영화에 스턴트나 무술 연기자로 출연했다.
  • 로라 포너 (Lola Forner)
스페인 여배우. 미스 스페인 출신으로, 홍콩 영화계로 진출하여 프로젝트A에서의 단역(영국 제독의 딸), 쾌찬차에서 성룡의 여자친구 실비아 역을 맡았고, 용형호제에도 출연했다.
  • 왕호
한국인으로, 본명은 김용호. 남원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에 대단한 재능을 보여 1970년대 변웅전이 사회를 보던 MBC <묘기대행진>에 출연했다고 한다. 해병대 태권도 대표선수로 활동하다가, <밀명객> 등의 한국 액션영화에 얼굴을 내밀었고, 홍콩 영화에 픽업되어 황풍 감독의 <사대문파>(1977) 에 출연하였다. 이후 여러 편의 홍콩 무술 영화에 출연했다고 한다.
  • 토르스텐 닉켈 (Thorsten Nickel, 1966~)
독일계 배우로, 가라데 2단이다. [57] 이후 영국에 진출하는 동시에 무에타이 및 각종무술을 섭렵하여 무술연기자-스턴트맨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성룡의 썬더볼트에 악역으로 출연한 외국인 배우다. 1995년 일본 가네코에서 만든 "Kung Fu master Jackie Chan"라는 게임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국 배우. 1970년대에 주로 활약했다.
  • 황인식 (1940~ )
한국인. 합기도의 달인으로 맹룡과강에서 하얀 도복을 입은 일본인 가라데 고수 역을 맡아 이소룡과 대결했다. 이후 한국-홍콩 합작영화에 다수 출연했고, 1988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것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6 영화제작자 및 회사

6.1 주요 감독

  • 관금붕 (關錦鵬, Stanley Kwan, 1957 ~)
홍콩 뉴웨이브의 일원. TVB의 스탭으로 일하다가 허안화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1985년 주윤발 주연의 여인심을 처음으로 감독하면서 주목을 받게 된다. 주로 여성이 주연인 영화를 찍었으며, 한국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작가주의, 여성주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 담가명 (譚家明, Patrick Tam, 1948~)
홍콩시립대학교수를 맡았기 때문에 작품 편수는 매우 적지만 1970년대 홍콩 뉴웨이브의 기수중의 하나이다. 1967년 TVB에 입사하여 스탭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감독보다는 편집으로 유명하며, 왕가위 감독의 명작인 동사서독과 아비정전, 그리고 두기봉 감독의 흑사회의 편집을 맡았다.
  • 당계례 (唐季禮, Stanley Tong, 1960~ )
홍콩인이지만, 캐나다에서 교육을 받았다. 주로 액션물을 감독했으며, 1990년대 성룡 작품인 폴리스 스토리 3,4 와 홍번구가 유명. 최근에는 중국에서 TV극 제작자로 활발히 활동하는 듯, 이분이 제작한 TV극은 판빙빙이 투자하고 스티브 유금나라 장수로 나오는 <정충악비>가 유명. 한국 영화 관련 행사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친한파 감독이다.
  • 맥당걸 (麥當傑, Michael Mak, 1958~ )
옥보단으로 유명한 감독. 형 맥당웅(麥當雄, 1949~)은 홍콩의 유명한 제작자이자 감독이며, 홍콩 현지에서는 맥당걸보다 훨씬 더 유명하다. 그리하여 형 아래서 주로 감독을 했다. 옥보단 이외에는 형이 감독한 성항기병(1984)의 후속작 성항기병2, 3, 4나 유덕화, 양가휘가 주연한 흑금(1997)이 한국에서 알려졌다.
  • 왕정 (王晶, 1945)
감독 겸 제작자. 1980년대부터 무수히 많은 TV극 및 영화를 제작했다. 스타 다이내스티 영화사의 사장이기도 하다. 한국에 알려진 유명한 작품으로는 도신, 도협 등의 도박물, 신시아 로스록이 나온 마비취(摩翡翠)와 같은 액션물, <경천 12시>의 코믹 액션물 등이 있다. 명작, 범작과 졸작이 섞여 있는 다작감독이다.
  • 우인태 (于仁泰, Ronny Yu, 1950 ~ )
홍콩 출신으로 미국의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는 경영학, USC에서는 영화를 전공하고 미국 ABC 방송에서 일하다가 홍콩으로 돌아와 감독을 맡았다.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가 주연한 <용재강호 > (1986)를 감독하고, 장국영 임청하의 백발마녀전 (1993)으로 주목을 받아 서방에 컬트층을 발생시킬 정도였다. 특히 장국영, 오천련 주연의 <야반가성>은 큰 호평을 받았다. 이어 홍쿵의 중국 귀속을 앞두고 홍콩영화인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 마찬가지로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여러 B급 작품을 감독했으나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나마 어느정도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처키의 신부>..그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영화계에서 활약하게 된다. 2006년 이연걸과 내놓은 <무인 곽원갑> . 하지만 전지현이 나오는 희대의 망작인 <블러드(영화)> (2008)의 감독을 맡을 뻔 했으나, 크리스 니흔에게 감독을 물려주고 주고 제작자로만 참여했다. 그래도 망작 가장 최근 작품은 <천하칠검 양가장> (2013).
  • 유위강 (劉衛强, 1960~)
무간도의 감독. 원래는 촬영사로 영화계에 입문했으나, 이후 감독으로 전직하였다. 느와르나 액션물만 다룬 것은 아니고 홍콩 감독들이 그렇듯이, 이니셜 D와 같은 청춘물, 강시물이나, <외전 혜옥란> 같은 에로물, 소살리토와 같은 멜로물도 찍은 다작감독이다. 21세기에 80년대 홍콩 영화의 전성기 색깔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감독.
  • 유위환 (劉衛桓, Benny Lau, 1975 ~ )
주로 TV극을 만드는 감독인데, 이 항목에서 소개되는 이유는 감독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라 홍콩에서 이름난 합한족(즉 한국빠)이기 때문이다. 홍콩에서 한류를 소개하는 책을 여러 권 펴냈다. 홍콩의 이규형?
  • 임영동 (林嶺東, Ringo Lam , 1955 ~)
홍콩 출생. 캐나다에서 교육받았다. TVB 연예인 훈련반 3기 출신으로 동기로 주윤발, 두기봉, 오맹달, 임달화 가 있다. 이들은 TVB 연예인 훈련반에 있을 시절 부터 친분을 쌓았었다. 1983년 최가박당 4를 감독,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용호풍운, 감옥풍운으로 홍콩 느와르의 전성기를 열었다. 오우삼에 가렸지만, 홍콩 느와르의 창시자 중 한명이다. 1996년에는 중국 귀속을 앞두고 많은 홍콩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홍콩을 떠나 장 클로드 반담 주연의 맥시멈 리스크를 내놓았고, 이것은 본전치기 (예산 2500만달러, 흥행 5000만달러)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홍콩 감독들이 그렇듯이 할리우드에 안착하는 것은 실패하고, 다시 홍콩으로 귀환. 2007년 두기봉, 서극 감독과 함께 옴니버스 형식의 <철삼각> (한국 개봉명 트라이앵글, 임달화 주연) 을 감독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감독을 은퇴했다.
  • 장완정 (張婉婷, Mabel Cheung, 1950~)
허안화 감독과 함께 홍콩에서 잘 알려진 여성 감독. '가을날의 동화', '유리의 성' 등의 멜로 영화로 유명하다.
  • 진가상 ( 陈嘉上, Gordon Chan, 1960 ~)
홍콩 출신. 캐나다에서 공부한 후, 홍콩에 돌아와 1980년 (이미 몰락해가던) 쇼브라더스에 입사해서 스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한국에 가장 알려진 작품으로는 성룡의 썬더볼트, 이연걸의 정무문이 있다. 제작자로도 유명하며 제작으로는 이연걸의 보디가드가 있다.
  • 진가신 (陳可辛, 1962~)
태국 화교출신. 홍콩에서 태어났으나, 성장기를 태국에서 보냈다. 이어 UCLA영화과를 졸업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광동어 영화를 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1991년 쌍성고사로 데뷔하여 여러 상을 받았다. 1994년 장국영, 원영의가 주연한 금지옥엽으로 한국에 알려다졌다. 1997년에 여명, 장만옥 주연의 첨밀밀을 만들어 대히트를 쳤다. 현재는 제작자로서도 유명하다.
  • 풍쉬범 (冯淬帆, Stanley Fung 또는 펑추이판) [58]
성룡과 손잡고 복성 시리즈 (오복성, 복성고조 등등)을 만들었다.
  • 허안화 (許鞍華, Ann Hui, 1947~)
홍콩에서 보기 드문 여성 감독.1970-80년대 홍콩 뉴웨이브 (신랑조)의 중심이었다.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다. 장위안과 같은 랴오닝 성 안산 출신이지만, 중국이 공산화가 되자 1952년 부모가 홍콩으로 이주했다. [59] 이어 홍콩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런던 영화학교(London Film School)에서 수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홍콩에 돌아와 호금전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어 TVB에서 경찰극을 연출했다. 이어 베트남 삼부작인 <내객> (<사자산하>라는 TV시리즈의 단막극) , <호월적고사>, <투분노해> (1983) 으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주의 감독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홍콩영화사에서 빼놓을 수없는 명감독이다. 최근에 알려진 작품은 탕웨이 주연의 황금시대(2014)가 있다.

6.2 주요 제작사 및 방송사

  • 쇼 브라더스 스튜디오 (Shaw Brothers Studio, 邵氏兄弟公司)
1925년 싱가포르 화교인 소씨 3형제 소인걸(邵仁傑), 소인매(邵仁枚), 소일부(邵逸夫)이 만들었다. 홍콩 지사는 1958년에 만들어졌고, 1960년대 전통 무협영화로 전성기를 맞는다. 이 영화사는 표준중국어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1970년대 광동어로 영화를 찍던 골든 하베스트의 현대 무술영화가 나오면서 몰락을 맞는다. 1980년대 부터는 영화는 손을 떼고 TV극에만 집중했으나, 쇠퇴를 돌리지는 못하고, 2011년 결국 도산했다.
  • 시네마 시티 컴퍼니 (新藝城影業公司: 신예성영업공사)
홍콩 영화 황금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회사. 1980년에 배우 황백명, 맥가, 석천[60] 세명의 합작으로 설립되었다. 최가박당 시리즈와 개심귀동( 開心鬼撞) 시리즈가 대성공을 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이어 영웅본색, 용호풍운, 감옥풍운, 대행동 등등의 히트작으로 홍콩 느와르의 시대를 열었다. 1991년 동업자 세명이 각각 독립하면서 해체되었다.
영화사는 아니지만, 이 방송사의 연기반에서 양성된 탤런트들은 방송사 전속기간이 끝난 후 영화계에 진출, 홍콩영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주로 무협물들을 제작했으며, 2000년대 두드러진 중국 사극의 질적 향상도 사실 TVB 등의 홍콩 방송사들의 오랜 사극 전통과 노하우가 중국에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7 다른 중화권 영화와의 관계

위에서 말했듯이, 홍콩 영화는 1990년대까지 중화권의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입장이었다. 이는 중화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창작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데다가, 영화계로 흘러드는 자본이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홍콩보다 시장이 훨씬 큰 대륙 영화는 1980년대까지는 거의 배달의 기수식의 관제-선전영화만 제작되었고, 대만 영화도 대륙보다는 어느 정도 자유는 있었지만, 장징궈 집권 말기까지는 검열이 악명 높았다. [61] 중화권이라고도 볼 수 있는 싱가포르는 대만과 유사한 상황으로, 중국어 영화가 제작되기는 했어도 검열이 심한데다가, 중국어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에 [62] 영어 직감이 가능한 싱가포르 관객은 헐리우드 영화를 더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다수의 대만 영화인들이 창작의 자유와 더 나은 대우를 찾아 홍콩에 와서 영화에 참여하였다. 홍콩 영화의 특징인 더빙 또한 광동어에 익숙하지 않은 대만 배우들을 다수 출연시키다보니 더욱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만의 인력을 빨아들이던 홍콩 영화는 1990년대 이후 개혁개방된 중국 영화계가 거대한 시장과 자본을 바탕으로 성장하자 도리어 대륙시장의 인력 공급처가 된다. 이미 1994년에 장국영패왕별희에 출연한 바가 있었고 [63], 이제 홍콩의 주요 스타나 스탭들은 너도나도 중국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64]이는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홍콩 영화의 쇠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8 홍콩달러 기준 역대 흥행 순위

아래 기록은 2010년 이전 자료이다. 하지만 2010년대 홍콩 영화의 흥행이 극히 부진했으므로, 아래 순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2016년 주성치 신작인 <미인어>가 미화 5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정도면 웬만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뺨치는 수준. 아래 홍콩달러로 표시된 박스오피스와 비교를 위해 환산해보자면, 쿵푸허슬이 미화로 계산하면 1억달러 언저리로 벌어들였으니, 주성치가 얼마나 대성공을 했는지 알 수 있다. [65]

1~5위
01위 쿵푸허슬 $61,320,000 주성치/주성치/2004
02위 소림축구 $61,260,000 주성치/주성치/2001
03위 폴리스 스토리 4 $57,518,794 당계례/성룡/1996
04위 홍번구 $56,911,136 당계례/성룡/1995
05위 무간도 $55,030,000 유위강,맥조휘/유덕화,양조위/2002

6~10위
06위 도신 2 $52,529,768 왕정/주윤발,양가휘/1994
07위 심사관 $49,884,734 두기봉/주성치,매염방/1992
08위 가유희사 $48,992,200 고지삼/주성치,장국영/1992
09위 썬더볼트 $45,647,210 진가상/성룡/1995
10위 나이스가이 $45,420,457 홍금보/성룡/1997

11~15위
11위 도학위룡 $43,829,449 진가상/주성치/1991
12위 풍운 $41,532,235 유위강/곽부성,정이건/1998
13위 도성 $41,326,250 원규,유진위/주성치/1990
14위 취권2 $40,971,484 유가량/성룡,매염방/1994
15위 녹정기 $40,862,830 왕정,정소동/주성치/1992

16~40위
16위 식신 $40,861,655 주성치,이력지/주성치/1996
17위 수신남녀 $40,400,000 두기봉/유덕화/2001(국내명 러브온 다이어트)
18위 도협 $40,342,800 왕정/주성치,유덕화/1990
19위 당백호점추향 $40,171,033 이력지/주성치/1993
20위 가유희사97 $40,162,050 장견정/주성치,오천련/1997
21위 용형호제2 $39,048,711 성룡/성룡/1991
22위 CIA $38,852,845 진목승/성룡/1998
23위 파호 $38,703,363 반문걸/성룡/1998
24위 이니셜D $37,580,000 유위강,맥조휘/진관희,여문락/2005
25위 007북경특급 $37,523,850 이력지,주성치/주성치,원영의/1994
26위 무장원소걸아 $37,416,607 진가상/주성치/1992
27위 대부지가 $37,367,669 고지삼/장국영,양가휘/1994
28위 팔성보희 $37,090,776 두기봉/주윤발,장학우/1988
29위 화기소림 $37,033,685 유진위/주윤발,오천련/1994
30위 파괴지왕 $36,906,730 이력지/주성치/1994
31위 녹정기2 $36,583,964 왕정/주성치,임청하/1992
32위 아애오문자 $36,475,536 나계례/주윤발/1992(국내명 사랑이야기)
33위 신산 $36,399,307 허관문/허관문,여명/1992
34위 도신 $36,294,209 왕정/주윤발,유덕화
35위 주성치의 007 $36,051,899 주성치,곡덕소/주성치/1996
36위 화전희사 $35,481,478 고지삼/허관걸,장국영/1993
37위 용형호제 $35,469,408 성룡/성룡/1987
38위 홍콩마스크 $35,234,481 엽위민/주성치/1995
39위 고남과녀 $35,214,661 두기봉/유덕화/2000(국내명 니딩유)
40위 영웅본색 $34,651,324 오우삼/주윤발,장국영/1986

9 영화목록

★ 느와르
♡ 로맨틱 코메디 혹은 멜로
史 사극 혹은 시대극
武 무협 또는 무술
S SF
F 판타지
色 에로물

10 관련 항목

  1. 홍콩 영화의 주류였던 무협영화는 물론, 코믹 쿵후영화도 모두 그 뿌리는 경극에 맞닿아 있을 정도로, 경극이 중화권 공연예술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중국 영화 패왕별희를 보면 거의 아동학대 수준으로 볼 수 있는 혹독한 경극 학교의 수련 과정 (경극배우는 연기력 뿐만 아니라, 가창력, 기예에 가까운 액션 모두 겸비해야 한다) 이 묘사되는데, 홍금보, 성룡을 비롯한 홍콩 액션배우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중년까지도 아크로바틱한 액션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재는 아동 인권이 향상되어 저런식의 교육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룡과 같이 연기력과 무술실력 모두 출중한 액션배우는 나오기가 힘들 듯.
  2. 일부에서는 홍콩인과 중국인이 별개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중국에 넘어가기 전인 1960-80년대 제작된 홍콩영화를 봐도 홍콩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중국과 별개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어 베트남이 배경인 영웅본색3나 첩혈가두에서 모두 주인공 홍콩인들은 베트남 화교에게 너희도 중국인이냐고 묻고, 우리는 다같은 중국인이라고 이야기 한다.
  3. 중국어의 방언들이 서로 외국어 수준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유럽의 로망스어 기준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런 방언들을 한자로 써놓으면 문맹이 아닌 한에야 대체로 다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한자로 쓰면 아무리 심각한 방언들도 뜻이 통하기 떄문에 중국은 한동안 근대화 지체의 원흉으로 불렸던 한자를 폐지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자라는 글자 때문에 중국어의 방언이 모두 중국어라는 하나의 틀로 묶일 수 있는 것이다.
  4. 이러한 더빙 전통은 중국이 개방된 이후에도 계속 내려왔고, 중국어를 잘 모르는 한국의 배우들이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 문제없이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중국 드라마에 출연한 바 있는 추자현, 임윤아는 중국어를 꽤 잘 한다.
  5. 주인공(그러니까 리메이크의 적룡에 대응되는 역)은 장백지의 전남편으로 더 유명한 사정봉의 아버지인 사현(謝賢) (최근에 알려진 작품은 소림축구에서의 악당팀 감독) 리메이크의 이자웅역은 영웅본색 3에 마크의 이모부로 나왔던 석견, , 그리고 장국영에 해당한는 역은 왕위(王衛)가 맡았다.
  6. 물론 초원이 쇼브라더스서 만다린 영화만 만들었던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1972년에 TVB와 쇼브라더스의 스타 배우들을 총동원하여 만든 광동어 코미디 영화 <72가방객>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였고, 그 해 개봉한 홍콩 영화들 중 가장 높은 수익을 올렸다. <72가방객>은 유명한 광동어 연극이 원작으로 과거에도 영화화 된적이 있다. 주성치의 <쿵푸 허슬>의 돼지촌 세트는 이 영화의 세트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7. 이렇게 TVB 연기반 출신 배우들은 홍콩 영화계의 뼈대이다. 주윤발, 주성치, 양가휘 , 등등등.. 남자 배우들은 무술계 액션배우나 가수가 아니면 대체로 십중팔구는 TVB 탤런트 출신이다.
  8. 이 두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참조 바람.
  9.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의 경우는 할리우드 주류감독이 되었지만, 홍콩영화계 출신도 아니고, 원래부터 미국 대학원에서 공부한 유학생 출신이기 때문에 이들과 전혀 사정이 다르다.
  10. 주성치가 삼합회와 연줄이 있다는 것은 홍콩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11. 그런데 2010년대 주성치 영화 (서유기, 장강7호, 미인어 등등) 의 특수효과는 대부분 한국 CG업체가 수주했다. 영어판 크레딧을 보면 한국 스탭의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12. 중국의 검열 때문에 홍콩 영화가 쇠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실 왜곡이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넘어갔어도 홍콩 귀속 협정 때문에 홍콩 자치는 보장되고 있고, 홍콩의 심의 기준은 딱히 중국이 명시적으로 강요한 바 없다. 현재 홍콩에서 나오는 영화만 보더라도 중국 검열 기준으로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에로영화나 귀신물, 범죄물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홍콩영화인들이 중국 시장을 고려해 (또는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중국 당국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맞지만 홍콩에 자치를 보장한 중국이 현지에서 홍콩영화를 검열 통제한 바는 없다.
  13.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판에는 이런 저런 자본이 흘러들어 1980-90년대 긴 침체를 딛고 중흥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있었으나,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친구가 성공하자 여러 조폭물( 조폭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등등.. )이 유행하면서 홍콩 느와르의 아류작만 만들다가 망해버린 홍콩 영화계의 전철을 밟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상당히 많았다. 이는 2003년에 박찬욱의 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 등의 "웰메이드" 작품이 나오면서 나오면서 우려가 불식된다. 이후 한국영화에서 조폭물은 비열한 거리 (2006)을 끝으로 거의 사라졌다.
  14. 주윤발이 전성기였던 1987년과 1988년에 출연한 영화는 각각 8편이다.
  15. 여기에 홍콩 배우들은 만능 엔터테이너 노릇을 했고 (원래 가수 출신도 많았지만) 가수나 예능 진행자, CF모델로 계속 나왔다. 가창력이 의문인 성룡이나 주윤발조차도 음반을 냈을 정도이니... 이렇게 TV를 틀면 365일 24시간 계속 나오는 홍콩 배우들은 결과적으로 영화배우로서의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킨 셈이 되었다.
  16. 이런 설들은 다 카더라고 속성상 진위를 밝히기가 쉽지 않지만, 실제로 불거진 사건도 있다. 양조위의 아내(당시 연인) 유가령이 삼합회에 납치되었다가 영화 출연을 강요하기 위해 협박성 누드사진을 찍힌 후 풀려난 사건으로, 2014년 이 사진은 삼류 찌라시에 공개되었고 그사이 양조위와 결혼한 유가령은 진상을 밝히는 고통스러운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17. 일본 연예계도 홍콩 못지 않게 조폭의 입김이 강한 곳이다. 다만 홍콩처럼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을 뿐.
  18. 이소룡이나 성룡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에서 홍콩영화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일본은 찬바라 영화라고 불리던 고유의 사무라이 칼싸움 영화가 있기 때문에 중국식 무협영화는 발을 붙일 수 없었고, 일본 영화 자체도 1960-80년대 황금기였기 때문에 홍콩영화가 힘을 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시장은 1980년대 홍콩의 제1 해외시장이었다.
  19. 가격문제도 있지만 직배영화에 대한 반발로 인한 영화계의 갈등으로 헐리우드 영화 수입 및 상영에 일종의 공백이 생겼었다. 유명 영화의 수입이 늦어지고, 수입된 이후에도 직배사와 기존 수입사와의 갈등으로 상영 시기가 늦어지고 영화관에서도 국내 영화계나 반미 시위대 눈치를 봐 상영을 꺼렸다. 이 공백을 홍콩 영화가 파고든 것.
  20. 예를 들어 영웅본색 같은 작품은 범죄 조직원들의 우정을 의리로 미화했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본토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밖에도 에로물인 옥보단이나 초자연적 존재(유령)를 다루는 천녀유혼 같은 작품, 그밖에 항일조직을 찌질하게 묘사한 색계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
  21. 일반적으로 검열제도가 창작의욕이나 영화산업을 억누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견강부회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현대 영화 기법의 여럿을 창시했고, 소련 영화의 황금기를 만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스탈린 시절에 활동하던 사람이다. 그의 작품 여럿이 상영금지를 맞곤 했지만, 스탈린 시절 및 그 이후 소련영화계가 인프라가 튼실해지고 여러 걸작을 내놓은 것도 사실이다. 한국영화는 군사독재 시절인 1960년대 반짝 황금기를 맞기도 했고, 중국의 5세대 거장 감독들은 문화대혁명시절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며 이들이 만든 명작들은 대부분 지금보다 검열이 극심했을 때인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나왔다.
  22. 예를 들어 월드워Z에서 발병지를 중국으로 했다가 수출금지 맞을까봐 급하게 한국으로 변경했고, 그래비티에서는 중국의 위성파괴 때문에 재난이 벌어진다는 설정을 러시아로 바꾸었다.
  23. 오죽하면 왕가위 감독이 홍콩 느와르란 말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1990년 영화지 로드쇼 인터뷰에서 한국 시장이 중요하다보니 홍콩 영화가 한국인 관객 눈치를 본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황비홍은 1편이 대박을 치자 수입사들끼리 2편 경쟁이 붙어 수입가가 4배 가까이 오르는 등 언론에서도 비판할 정도였다.
  24. 장국영의 유작이 이도공간이다.
  25. 사실은 4남 1녀로, 둘째 허관무는 다른 형제와는 달리 배우가 아니라 스탭으로만 영화계에 참가했다. 막내 허주적(여자)도 평범하게 살고 있다.
  26. 일본에서는 이들을 모두 시리즈로 묶어 '미스터 부 시리즈' 라고 알려졌다. 예를 들어 허씨 3형제의 출세작인 <귀마쌍성>은 Mr.Boo!ギャンブル大将 (미스터부 갬블대장)으로 개칭되었다. 이렇게 일본에서 홍콩 영화의 제목을 바꾸는 일이 잦았던 이유는 한국어나 중국어에서와는 달리, 중국어의 4자 제목이 일본어의 특성상 일본에서는 꼭 4음절로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웅본색도 男たちの挽歌(사나이들의 만가)로 번역.
  27. '팔선반점의 인육만두(八仙飯店之人肉叉燒飽)'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홍콩 고어물의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으로, 황추생이수현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3편까지 만들어졌지만 1편을 제외하고는 흥행은 영 별로였다.
  28. '언톨드 스토리'도 1985년에 마카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후술할 '고양의생'과 '팽부'도 실제 살인 사건이 모티브. 다만 '고양의생'은 '언톨드 스토리'가 개봉하기 이전에 제작된 작품이다.
  29. 순진하고 착한 어린이가 부모나 친척의 학대로 인해 성격이 비뚤어져 성인이 되어 살인마가 되었다든지, 선량했던 사람이 주위 사람들의 멸시와 폭력으로 인해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다든지 하는 식으로. 원래부터 맛이 간 상태인 경우도 있긴 있다.
  30.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왕실 직할 식민지라고 해서 국기 대용으로 영국의 유니언 잭이나 식민지 홍콩기를 걸었는데 대외 행사땐 유니언 잭에 문장을 추가한 식민지기가 나오고 관공서 등에는 유니언 잭만 게양했다. 현재는 오성홍기와 홍콩 특별행정구기가 동시 계양되고 직급 낮은 관공서는 특별행정구기만 건다. 대외 행사땐 당연히 특별행정구기가 나온다.
  31. 2년 뒤 나온 속편은 주연이 무려 서기였으나 폭망. 되려 동갑인 말레이시아 출신 화교배우인 이심결 (李心潔) ( 1976년생 영어 이름은 Angelica Lee, 도둑들의 홍콩 여형사로 출연해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출연한 1편이 더 흥행했다. 주인공 외모도 1편의 이심결이 더 나았다. 이심결은 서기와 동갑이지만 훨씬 어려보인다. 서기는 이미 90년대 후반부터 이미지 소비가 너무 많이 되어서..
  32. 장국영은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우울증으로 투신자살했다.
  33. 하지만 홍콩의 소위 "3급편"은 성기노출이 있는 일본 AV와는 달리 하드코어가 아니라, 일본의 로망 포르노와 같은 스토리 있는 소프트코어이다. 노출도나 스토리는 한국의 에로 영화와 비슷하다.
  34. 서기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에로물이었다.
  35. 이 영화는 매트릭스보다 늦게 개봉해서 한국에서는 모방 아류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매트릭스보다 먼저 나왔다.
  36. 담영린 외에 진백상, 임달화, 증지위, 묘교위 등의 유명 연예인이 명예 회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37. 공교롭게도 양조위와 영어 이름이 같다.
  38. 현재는 홍콩에 대학이 5개가 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에는 대학이 2개밖에 없었으며, 당시 홍콩에서 대졸자는 엄청난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 한마디로 그는 한국에서 서울대 출신 연기자와 비슷한 대접을 받은 셈. 참고로 홍콩의 대학들은 광동어나 보통화가 아니라 영어로 강의를 한다.
  39. 주윤발이나 성룡같은 경우는 홍콩이 중국에 넘어간 이후인 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영어 영화에 출연했다. 다만 장국영은 영국 유학생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에 꽤 능통했다. 1989년 한국에 와서 자니 윤쇼에 출연했을 때, 자니 윤과 영어로 대담하기도.
  40. 사실 홍콩인이 보통화를 배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아예 안 배웠다는 것은 중국 활동에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인 듯 하다. 2000년대 초반 배우 활동은 접었기 때문에 배울 필요도 없고, 현재 가수 활동도 자신이 불렀던 흘러간 광동어 가요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니 보통화 신작을 낼 것도 아니기 때문에.
  41. 당시 이 역할은 이연걸에게 먼저 주어졌었는데, 이연걸은 이를 고사하고 《더 원》에 출연했다.
  42. 원화의 얼굴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무술가 중의 한명으로 연회장 신에서 잠깐 등장한다.
  43. 동명의 홍콩재벌이 있는데, 홍콩 자산 2위로 250억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44.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김봉연과 매우 닮았다. 젊었을 때는 박명수를 연상시킨다.
  45. 참고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굉장히 피터지는 영화다.(...)
  46. 사실 성에 쓰이는 葉은 섭으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홍콩 배우에서는 이런 오독이 한국에서 굳어졌으므로 여기선 모두 "엽"으로 쓴다.
  47. 원제는 천약유정(天若有情)이다.
  48. 2007년 개명하여 가운데 결자를 뺴고 원영으로 바꾸었다
  49. 한국말로 바꾸면 명랑소녀대 정도.. 입학-졸업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 활동했으며, 그룹을 거쳐한 가수나 여배우들이 좀 있다. 아래 설명할 이여진도 여기 출신.
  50. 정확히는 20세 연하의 수양아들과의 관계... 당사자들은 극구 부인했다.
  51. 1980년대 초반의 홍콩 영화계 여주로서는 같은 대만 출신인 임청하의 대항마였다.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한창이던 80년대는 이미 30대 중반이었고, 연기보다는 연출이나 각본쪽으로 돌았기 때문에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한국에서 가장 히트를 친 최가박당에서도 터프한 모습으로 일관하여 팬이 생길 여지는 거의 없었다. (70년대 출연한 영화를 보면 묘하게 I.O.I김세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닮았다.). 최근 출연 작품을 보면 중후한 카리스마의 미노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2. 한국 한자음으로 종려시가 아니라 종려제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緹(붉은비단 제)는 한국에서 잘 안쓰이는 글자이기 때문에 처음에 번역을 잘못한 듯 하다.
  53. 이 영화는 복성고조의 스핀오프격 작품이다. 복성고조의 조연중의 하나인 여형사 패왕화를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만든 영화.
  54. 홍콩에서의 별명은 이름이 삼국지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코에이사의 한자와 같은것을 이용한 鄧KOEI였다.
  55. 벌어들인 액수가 제작비의 1/4에 불과한 전설적인 망작이다. 카더라에 의하면, 이 영화에 투자했던 삼합회측이 왕가위를 죽이려고 했다고. 왕가위는 이때문에 동사서독 촬영을 핑계로 몇년간 삼합회의 입김이 없는 중국에 도피생활을 했고.. 삼합회와 커넥션이 있던 등광영도 삼합회를 말리느라고 진땀뺐다고 한다.
  56. 홍콩에서 활동하기 전에는 일본 특촬물에 자주 나왔고, 1984년 누드 사진집(...) 을 펴낸 적이 있다.
  57. 태권도 2단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라데는 일반적으로 승단 심사가 매우 까다롭다.
  58. 淬 "쉬"는 중국음이 아니라 한국한자음 이다. 병음으로는 cuì (추이)
  59. 홍콩 영화 강호정의 나레이션에 따르면, 1953년까지 중국은 홍콩-중국 국경을 폐쇄하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고..
  60. 영웅본색2의 용사역.
  61. 이 당시 대만 영화는 경요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멜로물, 홍콩보다 질이 떨어지던 무협 영화나, 에로 영화가 유명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 암흑기였던 1970-80년대와 비슷한 상황.
  62. 싱가포르에서 중국어는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지만, 상당히 안습한 처지이다. 중국어와 영어를 모두 할 줄 알면 현지에 가서 두 가지 언어를 각각 써보기 바란다. 청자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체감할 수 있을 정도.
  63. 장국영은 이 영화 출연 전까지 보통화를 전혀 못했다고 하나, 이 영화를 앞두고 엄청나게 보통화를 연습했다고 한다.
  64. 체계적인 연예인력의 배줄이 아직까지 미흡한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화권뿐만 인력 공급원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한국배우나 스탭들(특히 TV PD들) 들도 점점 중국에 진출하고 있는 형편이다. 다만, 이는 경제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인력을 막을 수도 없다.
  65. 다만 미인어를 홍콩 영화로 보기에는 미묘한 점이 있는데, 이 영화는 보통화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배우들도 대부분 대륙인들이다. 하지만 제작자 주성치가 홍콩인이므로 홍콩 영화라고 보는게 합리적일듯.
  66. 홍콩, 미국 합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