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행정구역(延山郡)에 대해서는 연산군(황해북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914년까지 존재했던 충청남도의 행정구역(連山郡)에 대해서는 논산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조선의 역대 국왕 | ||||||
9대 성종 이혈 | ← | 10대 연산군 이융 | → | 11대 중종 이역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존호 |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1] | |
본관 | 전주(全州) | |
군호 | 연산군(燕山君) | |
능묘 | 연산군묘(燕山君墓) | |
휘 | 이융(李漋) | |
자 | ||
출생지 | 한성 경복궁 자선당 | |
사망장소 | 교동현(喬桐縣) | |
배우자 | 폐비 신씨(廢妃愼氏) | |
아버지 | 조선 성종 | |
어머니 | 폐비 윤씨(廢妃尹氏) | |
생몰 기간 | 음력 | 1476년 11월 6일[2] ~ 1506년 11월 6일[3] |
양력 | 1476년 11월 22일 ~ 1506년 11월 20일(29년 11개월 28일, 1만 954일.) | |
재위 기간 | 음력 | 1494년 12월 25일 ~ 1506년 9월 2일 |
양력 | 1495년 1월 21일 ~ 1506년 9월 18일(11년 7개월 28일, 4,257일.) |
조선의 역대 왕세자 | ||||||
예종 이황 | ← | 연산군 이융 | → | 이황 |
1 설명
人君所畏者, 史而已
조선의 10대 왕. 성종의 장남, 어머니는 폐비 윤씨다. 본관은 전주 이씨.
충혜왕과 더불어 암군의 끝판왕이기도 하다. 충혜왕을 비롯한 조선 이전의 일부 연산군을 초월한 막장 오브 막장 임금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이 그나마 괜찮은 편인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실 그런 임금이 많은 편도 아니다. 게다가 충혜왕은 누구라고 콕 집을 것 없이 그냥 다같이 미쳐 돌아가는 막장 분위기 속의 막장 임금이었던 반면, 연산군은 잡다한 문제가 있긴 했어도 어느 정도 균형에 맞춰 멀쩡하게 돌아가던 정치판에서 뜬금깽판을 쳐버렸으니 더욱 막장일 수밖에… [4]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을 기점으로 조선이 이전의 건강함을 점점 잃어갔으며, 이후 즉위하는 조선 왕의 능력 부재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문정왕후의 외척 세도를 거쳐, 결국에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평가한다. 문제점도 있었고 뻘짓도 있었지만, 아직 망할 나라는 아니었다. 실제로 임란 이후로도 300년을 더 갔고. 연산군의 막장짓에 비례해서 조선왕조상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는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2년간일지도...
조선 역사 중에서 묘호[5]를 받지 못한 4명의 왕들 중 하나이나, 본인에게 딱히 별다른 권력이 없던 정종(공정왕), 성인도 되기 전에 작은아버지에게 강제로 내몰린 단종(노산군),[6] 실리외교와 분조 지휘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더 빛나 보이는 등의 재조명으로 인해 현대에 긍정적으로 재평가된 광해군[7]과는 반대로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막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8] 물론 나라에 해를 끼친 왕이야 조선 시대에도 꽤나 많았지만, 그 왕들이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최소한의 업적은 있거나, [[고종(조선)|무능했으나 일제와의 타협을 끝까지 거부하여 독립운동을 이끈 공이 있거나]] 등의 최소한의 실드 칠 거리라도 있는데, 연산군은 그조차도 없다. 즉위 초기에는 일을 좀 잘했다는 정도가 있으나, 그 뒤에 저지른 행동들이 너무나도 잔혹하다.
다만 연산군이 본격 막장 놀자판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 건 재위 10년째의 갑자사화 이후로, 그 이전까지는 무오사화의 피바람이 있긴 했지만 행정적으로 국가는 그럭저럭 운영해 나아갔다. 재위 후반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전체 재위기간 중에는 오히려 평타 이상으로 집무했던 시기가 더 길었다는 것.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반정세력이 편찬한 《연산군일기》에는 약간 의심되는 내용도 있는데, 가령 연산군에게 엿 먹은 대비가 다음날 태연히 연화대에 구경을 한다는 내용이 있다. 방구석에 처박혀 떨어야 할 사람이 저러는 둥 정상적 심리상태의 정황과 어긋나는 이상한 점이란 것인데, 전문이 이러한지라 반대로 연산군이 둘러댔다고 보기도 한다.
"대비께서 연화대를 구경하려 하시니, 놀이하는 사람을 급히 대궐로 들여보내라. 옛 사람이 온실의 나무조차 말하지 않은 것[9]이 정말 이유가 있는 것이니, 이런 일들은 외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말라."
게다가 설령 왜곡된 부분이 있다 해도, "알고 보니 연산군도 착했다"고 봐서도 안 된다는 것에 주의하자.
연산군이 시도한 무리한 왕권의 강화는 신하들이 후대 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빌미[10]가 되었고, 무엇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이러한 신권(臣權)의 압박에 제대로 시달려야 했다.[11] 중종의 경우, 형처럼 처용무라는 춤을 좋아해서 즐겨 추었는데, 신하들이 처용무(處容舞)가 연산군이 즐겨 추던 춤이라고 간언해 중종이 춤도 못 추게 만들었다.
2 행적
2.1 초기 생애부터 즉위 초반까지
적어도, 적어도 아주아주 극초반에는 나름 괜찮은 왕이였다.
맹꽁이 서당 같은 학습만화에서는 연산군이 세자 시절 때 아버지 성종이 아껴 기르던 사슴이 자신의 손을 핥은 데에 화가 나 사슴을 폭행하자 이를 안 성종의 꾸지람을 받아 앙심을 품고 있다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즉시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각종 사이코 짓을 했다는 등의 야사가 있다. 그런데 이는 근거가 불확실한 이야기이며,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양녕대군 같은 불량아도 아니었지만, 아버지 성종처럼 대단한 모범생도 아닌 그저 평범한 세자였다.[12]
즉위 초에는 빈민을 구제하였다.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을 완성시켰으며, 국방도 튼튼히 했다. 왜구를 격퇴했으며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회유, 토벌하기도 했다. 신하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고 하는 특이한 존호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물리친 적이 있었다. 성종 말기의 느슨함을 휘어잡을 만큼 정치에 의욕도 있었고, 3명의 대비[13]들을 극진히 모셨으며,[14]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몇몇 주장에 의하면, 이 시절부터 이미 연산군에겐 폭군의 자질이 싹트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조 내내 군왕의 공식 업무들 중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했던 '경연(經筵)'을 점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주요 근거이다. 당시 '경연'은 사전적 의미대로면 능력/덕망 있는 관리나 선비를 모시고 스승으로 삼아, 왕과 신료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종의 과외수업이었는데, 실제로는 일종의 '국무회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즉위 초부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으니, 이미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만으로 연산군이 폭군의 기미를 보였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부터 시작해서 조선 후반기까지의 왕들이 모두 경연을 선호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종대왕 같은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싫어했다. 물론 세종대왕은 경연에서 자기가 신하들을 역과외시켜 준 희대의 먼치킨이니 제외한다 쳐도 대표적으로 태종과 세조가 있다. 태종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세조는 아예 폐지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 광해군은 정말로 경연을 싫어했다. 정말로 열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한편 정조는 경연장을 자신이 배우는 자리가 아닌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변화시켜버렸고,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군주들이 권력이 안정되면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연산군이 경연을 자주 하지 않은 게 결코 잘한 일은 아니긴 해도, 그렇게까지 유난하게 여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애초에 태조 이성계부터가 경연을 싫어했다. 즉위 1년차부터 "내가 나이도 많으니 경연을 들을 필요는 없겠구나!!" 하다가 신하들에게 까이고 경연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세금과 노역을 피해 도첩도 없이 무단으로 승려가 되려 하는 자들을 공역에 배치해 정리하면서 "백성들이 중이 되는게 어찌 그들이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기기 때문이겠는가? 나라에서 1명도 빠짐없이 노역을 시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출가하는 것이니,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 방법을 찾으라"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백성들의 삶에 아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일본에서 원숭이를 선물로 보낸 일에 대해서도 '선왕(성종) 때 앵무새를 보낸 적이 있는데, 비용만 많이 들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구리나 철과 같이 꼭 필요한 물건도 값을 대기 힘들어서 무역을 금지했는데 하물며 이런 동물은 오죽하겠는가? 도로 돌려보내고 잘 타이르도록 하라.'라는 개념 있는 발언을 남긴 적도 있다.(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14일 계미 1번째기사)
단순히 개념 있고 정상적인 것을 넘어 비범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연산군 2년, 초계군수 유인홍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전처 소생의 딸에게 발각되고 그래서 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연산군은 직접 딸의 죽음을 자살이라 주장하는 유인홍에 대한 취조를 지시하고 심문내용을 하달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심문 내용을 전해듣고선 단박에 헛점을 찾아내는 등의 예리함을 보이며,#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명백한 타살이라는 점과 유인홍이 첩을 보호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입을 맞추고 위증을 하려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참고로 여기서 유인홍과 그 첩이 입을 맞추기 위해 언문편지로 소통하기도 했는데, 이는 연산군이 능상, 즉 '위를 능멸하는 행위'라는 구실을 붙여서 언문사용을 금지하는 명을 내리는 구실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 횟수로만 따지면, 연산군은 조선 왕의 필수 덕목(?)이라 할 만한 경연을 갑자사화 바로 전 해인 연산 9년에 자그마치 122회나 열기도 했다. 물론 갑자사화 후로는 폐지해 버렸지만. # 다만 칭병(稱病)으로 경연을 안 했던 적이 많았다는 것일 뿐, 일단 나오면 열심이었다. 실제 연산군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 아파서 경연을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자 시절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병으로 인해 경연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 100% 거짓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물론 꾀병을 부리고 놀자판을 벌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연산 3년에는 사간원에서 "아니, 눈병이 나셨다며 경연 빼먹으신 분이 왜 연회에는 나가서 즐기십니까?" 라고 아뢰자, "연회에 나가서 눈으로 먹냐?" 라고 받아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연산군일기》 22권, 연산 3년 3월 9일 신해 3번째 기사 , 《연산군일기》 권22 3년 3월 11일 계축 2번째 기사
그러니 대체적으로 여기까지는 좋았다. 연산군은 즉위 후 4년까지는 정말 큰 문제는 없었다. 사가독서(賜暇讀書)[15]를 실시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왜구와 야인의 침략에 대비해 병기를 증축하며, 악한 관리들을 색출해 벌주는 등 초기엔 그래도 좋았다. 다만, 어전회의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쳐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 이때부터 슬슬 싹수가 보이긴 했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의 이 발언이 언급되는데, 훗날 피바람의 복선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연산군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1번째 기사, 《연산군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3번째 기사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이때를 생략하나, 《왕과 나》에서 나온 연산군은 이 시기를 조명해 주긴 한다. 덕분에, 연산군을 즉위 12년 내내 막장 짓을 한 왕으로 알고 있다가, 초반의 4년, 길게는 10년 동안 제법 정상적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역덕후들과 전공자들이 그의 이러한 행적 때문에 연산군을 많이 아쉬워하는 편. 초기 치세만 괜찮게 유지했으면, 탕아적 기질이 있긴 했지만 정국을 균형 있게 잘 운영한 유능한 군주로 사서에 남았을 것이고, 이후의 조선이 가는 방향 역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성종과 비교했을 때, 성종이 너무 대간에 잡혀서 왕 스스로의 결정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 때의 연산군은 젊어서 거칠기는 했으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름의 자질도 있었고, 왕 스스로의 결정을 밀고가는 뚝심도 있었기에 성종과 차별화된 또 다른 임금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
2.2 사화의 연속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치세 동안 조선의 국정운영은 왕과 대신, 대간(臺諫)[16]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이뤄졌다.
이런 상태에서 연산군은 대신들인[17] 이극돈,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 사초(史草)를 보고 문제 삼아 김종직의 제자 등의 대간들을 죽이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화이다. 무오사화는 선비 士자 대신 역사 史자를 쓰기도 하는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사초 중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전제적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성종이 균형을 애써 유교적인 방식으로 맞추려했다면, 연산군은 그냥 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는 성공을 거둬, 성종 말기 사적인 주관을 개입시켜 대신들을 탄핵하는 폐단이 드러나며 왕의 인사권마저 간섭하기에 이른 대간들을 찍어 누른다. 그 덕에 대신과 왕의 권세는 강해졌으나 성종 시대의 유교적 유산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얼마 후엔 사림에게도 온건하게 대하고,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새 깃털, 산호나 후추와 같은 진귀한 물품을 들일 것을 명하는 등 이때부터 낭비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연산 9년, 대신들이 씀씀이를 줄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대응하지 않고 넘어갔다.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훈구파, 사림파를 막론하고 모두 억누르고, 수많은 대신들을 숙청한 갑자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어쨌거나,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므로 왕으로서 어머니를 신원(伸冤)시킬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처벌이 유례가 없을 만큼 잔인하고 과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초기처럼 선정을 베풀었다면, 홍무제처럼 강한 왕권으로 신하들을 조져버리기는 했을지언정, 백성들에게는 성군이었다는 소리는 들었을지도 모른다. 훈구권신들과 간관(諫官)들이 왕권을 제약했던 성종 대의 단점을 보완한 왕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허나 여기서 연산군의 성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연산군은 죽어도 권력을 추구한 왕이었는데, 무오사화로 대간들을 엿 먹인 후 견제세력이 사라진 대신들이 권세가 강해지니, 이제는 이들도 토사구팽하면서 밟아놓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게 갑자사화다.
하지만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문제있는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방탕한 기질이 더욱 심해졌다. 원래 처용무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해서 사람들을 울릴 정도였으며, 시가문학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
그런데 《조의제문》으로 사림 대간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훈구 대신들을 모두 날려버린 이후 절대권력을 손아귀에 쥔 연산군. 그는 더욱 막강해진 절대권력으로 하라는 나랏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와 경제는 그 후 2년간 막장일로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의 즉위 초반부터 성종을 섬겨온 노신 표연말에게 함부로 태형을 때린 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보냈는데, 표연말은 장독을 견뎌내며 유배지로 가던 도중 그 장독으로 죽었다. 한마디로 연산군이 표연말을 패죽여버린 셈이다. 그렇다고 표연말이 무슨 송시열급으로 드센 인물인 것도 아니고 타고난 공부벌레일 뿐이라 성정도 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그놈의 학문에 몰두했다는 죄로 연산군에게 맞아죽은 것이다.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연산군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연산군이 표연말을 관복도 안 벗기고 그냥 기둥에 묶어놓은 뒤 연산군 본인이 직접 작대기로 때려서 죽여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2.3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昨趨思廟拜慈親 작추사묘배자친)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奠爵難收淚滿茵 전작난수루만인)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懇迫情懷難紀極 간박정회난기극)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英靈應有顧誠眞 영령응유고성진).
ㅡ 연산군이 쓴 "所懷(소회)"라는 시 #연산군의 다른 시
연산군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바로 폐비 윤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뒤에 나오는 피 묻은 적삼 이야기도 얽혀 아주 요지경이다.
연산군은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미복을 입고 임사홍의 집에 들려 친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의 기록은 없으나, 임사홍은 성종 대에 윤씨의 폐비 조치에 열렬히 반대했던 인물인 만큼, 임사홍의 설명은 주로 자신과 윤씨의 변호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연산군은 이를 알게 된 날, 바로 자기 손으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살해하여 산야에 버렸다. 또한 폐비 윤씨가 폐비되는 데에 일조한 조모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 결국 쇼크사 하도록 한다.
박치기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이다. 처용탈을 쓰고 칼을 휘둘렀다는 설도 있지만, 실록의 기록에는 그런 것 없이 칼을 들고 와서 인수대비더러,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물어, 인수대비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한다.[19]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에게 뛰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때는 중전 신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2.3.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사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에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아무리 "백 년 동안 이 일을 입에도 꺼내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연산군이 세자로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에 참여할 때, 간간히 폐비 윤씨의 이야기가 낮게나마 거론된 적이 있었으며, 윤씨가 사사당했을 시 만 7세였으니, 어쩌면 어렸을 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록에 의하면, 즉위 후 성종의 《행장록(行狀錄)》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왕이 승하하면, 왕의 삶과 가족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행장을 명나라로 보내야 했다. 당연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문서이자,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므로 연산군은 이를 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장인 중 한명으로 윤기견이란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윤호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신하 중 한 명이 "윤기견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 답하자 폐비 윤씨에 대해 어찌되었냐 되물었다. 이때 사사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 걸 들으려고 질문했거나, 혹은 사사당했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설령 폐비 윤씨와의 추억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어머니가 사사당했단 말을 들은 연산군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기록에 보면 왕이 그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굶은 것이지, 왕이 굶은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실제로 많은 왕들이 굶는 것을 내세워 시위하곤 했는데, 이는 조정을 크게 뒤흔드는 무기였다.[20]
며칠 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초라한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이나 세워주라 말한다. 이것이 회묘(懷墓)다. 그리고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유배지에서 풀어준다. 나중에 추숭(追崇)을 하려 하자 대간들이 많이 반대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가 오히려 무덤 복원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까진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죄를 지어 사사당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연산군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생모를 추숭(追崇)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어머니의 폐위가 부당하다는 걸 안 후 태도가 변했다고 한다. 사실 실록에서는 그 당시 윤씨의 폐위 정당화를 위한 여러 부정적인 기사들을 적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단 상황을 보면, 인수대비와 성종의 후궁들은 폐비 윤씨에게 적대적이었던 게 분명하므로…
2.3.2 패륜(悖倫)
기일(忌日)에 검열삭제를 한다든가 말들이 검열삭제를 하는 걸 보고 즐겼다는 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연산군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몬 것은 바로 적삼사건 이후에 벌인 행각이다.
사실 효자 연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패악질에 대해서는 그냥 복수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조선시대의 윤리로는 아버지와 결혼한 서모(庶母), 즉 계모에 대해서도 친모와 동일한 기준으로 대한 것을 보면, 연산군의 경우는 존속살해에 해당하는 패륜을 벌였다. 물론 계모가 연산군을 사람 취급 안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나쁜 인간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랬으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 더군다나 조모인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일단 야밤에 폐비 윤씨를 모함했던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잡아서 고문한 후, 그들의 소생, 즉 연산군 자신의 이복동생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와서,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어머니라는 것은 숨긴 채 '죄인을 매질하라'고 명했다[21]. 그리고 다시 두 귀인을 매질로 살해하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서 유명한 패륜의 구절을 했다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번 맛보시오." 대사만 보면 별반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문제는 연산군이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저런 말을 한 것이다.
이후 안양군에게 독촉을 해서 대비에게 권하니 대비가 부득이 허락을 해주었고, 이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것은 없습니까?"라고 말하니 대비가 놀라서 베 2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참으로 불손한 말을 하게 되는데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그 뒤,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서 산야(山野)에 버렸다고 한다.[22] 어미를 친 왕자는 말을 선물로 주었고, 둘 다 귀양을 보내어 사사했다. 하나는 패륜아니까 사형당하는 게 당연하고, 하나는 왕의 명을 거역했으니 역시 입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 그럴 듯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보통 패륜의 극단이자 동생들에 대한 친모 폭행 강요라는 측면에서 아예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고우영의 만화, 영화 《왕의 남자》나 이대근 주연작 《연산군》,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분노한 연산군이 "손수 철퇴를 휘둘러 두 후궁을 박살내었다"고 처리하는데, 위의 이야기 자체가 실록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성인대상 극화라도, 수위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유인촌이 나온 《연산일기》에서는 곤장 강요로 대신하고 있고,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불을 끄고 마구 치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그래도 장면이 장면인지라, 나중에 다른 군졸의 고문으로 사망한 걸로 그렸다.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원작에서는 두 아들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그나마 한 아들은 직접 살해한다. 그리고 바로 연산이 손수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나체로 만들게 하고는, 시체를 갈기갈기 형체도 없게 찢어 발겨버린다. 드라마판에서는 차마 표현하기가 난감했는지, 그냥 잡혀가는 장면과 사망했다는 대사로만 처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요로 한 대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은 명백한 야사이다. 인수대비는 실제 그 일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지나친 충격으로 인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보통 극화에서는, 머리로 받는 장면보다는, 두 후궁의 아들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든가,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항의한다든가, 다들 보는 앞에서 후궁들을 손수 때려잡는다든가, 칼을 들고 대전에 난입한다든가 하는 장면 등으로 바꾸어서 나온다. 다만 2015년에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정말로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받아서 뒤쪽 벽에 처박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사실 연산군은 패륜짓을 한 적이 없었으며,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자결했고 인수대비는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견강부회에 가깝다. 심지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연산군의 사치는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애당초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굶주리면 식사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장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쓰레기가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500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큰어머니)를 범했고, 아이를 잉태하게 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건은 진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일단 정사엔 저 기록이 없다. 연산의 온갖 패드립을 다 적어놓은 《연산군일기》에는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덧붙여 놨다. 당시에도 일종의 카더라 취급을 받은 이야기인 듯. 아무튼 박씨가 연산군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치욕스럽게 여겨 자살했다거나 하는 것들도 야사 관련 문헌들에서만 전해온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누나이며, 사망할 당시 51세였다. 그 나이에 임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그녀는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었다. 지위뿐만 아니라, 나이로도 박씨가 연산군의 어머니뻘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연산군이 막장이었다고 해도,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큰어머니 박씨를 건드렸을 가능성은 낮다. 연산군이 박씨와 친하게 지냈을 뿐인데, 이것을 황색 선전한 것이 박씨 능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곡식과 면포 등의 물품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며, 이에 대해 신하들이 지나치게 후한 행위라고 지적한 적도 있다. 세자의 교육 또한 박씨에게 맡겼다는 기록들이 나온다.
그리고 박원종이 사실은 연산군과 친한 누이의 덕을 봐서 출세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누나의 명예를 위해 반정까지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연산군에 의해 출세하고,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던 박원종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실상은 연산군의 권력이 슬슬 무너져가는 조짐을 읽어내고, 미리 빠져나간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박원종뿐만 아니라, 중종반정을 일으킨 주요 공신들 중에는 본래 연산군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들이 많았다.[23]
다만 애초에 연산군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강요하는 정신 나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작 '사이가 좋은 정도'로 저런 소문이 나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그냥 눈에 띄는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범하는 행태를 보이다보니, 이걸 제대로 묘사하면, 아주 사극이 아니라 완전히 AV가 될 지경인데, 이런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있다면, 그것이 누가 되었건 연산군과 성추문이 나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연산군이 행실이 바른 왕이라면 저런 말이 나올 가능성 자체가 극히 낮다.
신봉승 씨가 쓴 소설판 《조선왕조 500년》에선 이런 야사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씨와 연산군 간의 검열삭제 묘사를 상세히 해놓았다. 원래 야사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는 연산군 연간에 박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라고 하는 오류[24]도 있는 등 그냥 소설적 각색으로 보는 게 좋다.
2.3.3 효자 연산?
애당초 연산군이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헤어졌을 때는 3살이었다.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군다나 왕실법도상 왕자는 왕비가 직접 안고 업고 기르지도 않고,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고 하는 유모에 의해 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잔병이 잦았던 연산군은 궁 밖 강희맹의 집에서 피접(避接) 생활을 했다.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밥을 굶는다든가, 묘를 복원한다든가, 어머니의 지위를 다시 복권시키는것을 볼때 어느정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사에는 어머니를 항상 그리워하여, 즉위 후 어느 날 자신의 어머니의 얼굴이 공민왕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고, 전국에 남아 있던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 기일에도 검열삭제를 하는 패륜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25] 이런 점에서, 연산에게 효심이 진짜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일관성 없이 즉흥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했던것을 보면, 진심으로 우러나온 효심이라기보다는 반대 신료들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과 어머니에 대한 일시적인 그리움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나타났다는 해석이 있다.[26]
2.3.4 최근의 가설
최근에는 대간과 대신 모두를 숙청하여 절대권력을 이루기 위해서,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 성종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신하들의 말에 꼼짝도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를 후계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리라는 것. 정사에서 실제로 폐비 윤씨에 대해 거론한 적은 많지 않으므로, 어디까지나 숙청의 빌미나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늘 자신과 성종을 쪼아댔던 삼사(三司)가 유독 그때만큼은 성종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던 것일 수도 있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 너무 세력이 커져 왕마저 괴롭히는 삼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즉위 직후부터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다. 실제 연산군은 미친 듯이 아무나 숙청한 게 아니라, 우선 사약을 직접 나른 이세좌를 숙청한 뒤, 그 후로 이세좌의 가문인 광주 이씨와 그와 연관 있는 대신 가문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 대간들을 찍어 누르면서, 조정의 세력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에 대한 긍정적 기사도 제법 있기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온갖 패륜이 모조리 거짓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다. 설령 연산군이 절대권력을 위해 저랬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보다시피 연산군이 벌인 수많은 행동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 절대권력을 쥐려고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당화할 건덕지가 없는 셈이다. 고로 연산군의 최후까지를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해석하면서 '연산군은 신권세력에게 왜곡되었다'고 떠드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게다가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임용한 교수도, 결과적으로 절대권력을 장악한 연산군이 이를 이용해 제멋대로 놀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2.3.5 연산군의 광증(狂症)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나머지, 폭정을 휘둘렀다는 말이 여러 번 제기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설이기도 하다.
왕자 시절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후일의 중종)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첫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홀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측이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연산군의 재능을 총애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특별한 나쁜 기사는 딱히 없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27]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 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로 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간다. 솔직히, 갑자사화 이후로는 강박관념 등에 시달린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기사도 많다.
여하간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 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나름대로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 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연산군의 행동을 어릴 적의 울분의 분출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 자체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던지라….
그러나 이러한 광증은 앞서말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때문에 일어난 산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피묻은 적삼이 등장하는 <금삼의 피>나 <장녹수>에서 볼 수 있듯이 극적재미를 위한 요소 중 하나로 연산군의 광증을 짐짓 지어냈다는 것. 사실 관객들에게 흥미를 돋우는 것 중 하나가 스토리의 급작스러운 전환이니만큼 역사소설가나 대하드라마 작가 같은 입장에서는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연출의 측면에 있어서도 엄한 아버지의 훈육 속에서 자라던 유년기에 대한 보상심리로 서서히 타락해가는 왕보다는 친모의 죽음으로 미쳐버리는 인물이 훨씬 매력 있어 보이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2.3.6 종합해서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이 유력한데, 폐비 윤씨의 일을 숙청을 단행하기 위한 하나의 빌미로 썼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아직 권력이 약했던 시기의 행동이라는 것이다.[28] 이렇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행동함 → 어머니를 추숭 → 날뛰는 대간 잡기[29] → 무오사화 → 수년간 눈치를 살핌 →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폭정이 실제보다 어느정도 과장 됐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 즉위기간 내내 폭정이 적힌 것도 아니며 즉위 초반 국정을 돌본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재위 후반 폭정을 저지른 건 엄연히 사실로 봐야 한다. 상식적으로 나라가 건국된 이후 최초로 신하들이 일으킨 쿠데타 였다는걸 생각해 보자(...)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이 오늘날까지도 폭군이라고 욕먹으면서 재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30]
2.4 그가 벌인 패악질
연산군은 황제급 권력을 얻었으나, 자신이 가진 권력에 걸맞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거나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 사화를 연속해서 벌인 후 나사가 빠져버린 연산군의 폭정으로, 백성들은 1년 내내 농사지은 수확물을 모두 착취당하는 식으로 빼앗겨 산에 있는 나물과 풀로 간신히 먹고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까지 위협당했다. 산나물이 몸에 좋다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전국에 있는 산나물까지 채취하도록 하였는데, 백성들이 산나물이나 풀로 연명하는 것도 중지시키면서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이 산나물을 다 먹은 것도 아니라서 궁으로 가는 산나물과 약초 수십 가마니가 사용되지도 못하고 썩는 동안, 많은 백성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굶어죽었다고 하니, 그 막장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런 군주이다보니 연산군은 백성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증오받았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몰락하여 폐위되고 유배길에 오를 때 백성들이 앞다투어 손가락질하고 욕까지 했다고 할 정도니.
2.4.1 흥청망청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해서 방탕한 향락에 빠졌다.[31]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하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이 "흥청망청"의 어원이 된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던 왕인지라 흥청의 규모는 2천명이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뽑으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에, 얼굴이 예쁘장하면 무조건 뽑았다.[32]
이 많은 흥청들에게는 모두 집이 제공될 뿐더러, 가족의 납세와 노역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흥청으로 사용된 건물은 놀랍게도 집현전이었다. 게다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다가 선왕인 세조가 중건한 절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절이 바로 증조부 세조시절 증건되었고, 현 국보 2호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던 원각사였다. 현재의 탑골공원이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33] 지금으로 치면, 헌법을 뒤엎고 독재자가 된 다음, 국립 연구소와 서울시 내의 유서깊은 종교시설을 점거하고, [[충혜왕|클럽이나 술집으로 만들어 버린 꼴이다.]] 그만큼 학자와 승려를 우습게 보았다는 증거이다.
또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선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는 간언을 올리자, 분노하여 김처선의 양 팔을 칼로 직접 베어 죽였다.[34]그 후 '처(處)'라는 글자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처서(處暑)'를 '조서'로, 처용무는 '풍두무(豊豆舞)'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2.4.2 성균관의 자리에 사냥터를 만들다
게다가 세종대왕이 즐겨 했던, 시국을 논하고 정쟁에 대한 토론도 하는 경연을 없애서 학문을 멀리 하고, 성균관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에, 그곳을 놀당, 즉 놀이터로 삼았다. 사간원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연산군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경기도 일대에 금산(禁山),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와 비슷한 것을 정한 후, 그 안에 있는 민가를 쓸어버리고 사냥터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은 연산군을 더욱 증오하였고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통쾌하게 여겼다.
물론, 조선시대 초기부터 금산은 자주 있었다. 개국 초기나 연산군 시절처럼, 왜구가 출몰하는 시기에는 배를 만드는 데 쓰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금산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벌목을 막았다. 연산군이 금산을 지정한 게 문제되는 건 이런 금산조치가 적어도 국방 등 국가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위해서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산군 개인의 유흥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산에 출입금지를 시키는 금산이 아닌 거주민을 전부 쫓아내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짓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막장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정작 사냥은 몇 번 나가지도 않았었다. 겁이 많아서 맹수들은 절대 사냥하지 않고, 잡아온 뒤에 우리 밖에서 쏘아 죽였다. 그가 사냥한 짐승은 노루나 토끼, 꿩 등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짐승들이다. 하지만, 한 번 사냥을 나가기만 해도, 몰이꾼들의 식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재정은 충분히 거덜 났다.
사실 조선의 왕들이 사냥을 나가고 싶어도, 이런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사냥을 좋아했지만, 신하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어서 눈치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여담으로,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의 태종은 죽을 날이 멀지 않았기에, 세종과 신하들이 눈감아준 것도 있었다.
2.4.3 돈 낭비
여기에다 서총대(瑞葱臺)를 비롯한 토목공사를 벌였고, 생일에는 '혀 요리' 같은 진미를 동원했으며, 주변 관료들과 백성들의 옷도 화려하게 입을 것을 명했다. 심지어 궁궐에서 일하는 공노비들도 옷을 화려하게 입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놀아 제끼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돈도 한 푼 안 주면서 뻔뻔하게 이런 무리한 명령을 했다는 것. 덕분에, 연산군 초기만 해도 살 만했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헬게이트가 열리면서 완전히 죽을 맛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서총대를 비롯한 연산의 토목공사는 사실 그리 큰 토목공사도 아니었고, 백성들에 대한 세수 증가는 이미 세조 이후 성종 치세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재정악화 역시 딱히 연산군이 막장으로 놀지 않았더라도, 훈구파들의 세력 확대로 인해 성종 때부터 진행되어왔다는 견해다.
또한 연산군은 금표(禁標)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뺏었는데, 이는 대부분 훈구 대신들의 사유지를 연산군 자신의 사유지로 만든 것이라 백성들의 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민생 자체에 딱히 심한 타격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막장이 된 뒤 2년 동안 연산군이 마음대로 놀아 제끼면서 재정을 악화시킨 점은 있었으나, 성종이나 중종과 비교해볼 때 딱히 심각한 지출이나 징세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왕실의 방만한 재정운용은 무오사화 이후 심화되어, 연산군 10년 내수사(內需司) 직계제를 통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수탈하는 제도가 확립된다. 애초 재정의 남용에 따른 부족분을 다음해, 그 다음해에 필요로 하는 공물을 앞당겨 조달하는 인납(引納), 무납(貿納) 등 공납제도가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연산군 때부터의 일이며, 연산군 7년에 이를 현실화한다는 미명 하에 실시된 공안 상정(신유공안)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부담되는 공납의 부담은 크게 증가했다.
이미 16세기 들어 조세제도에서 공납의 비중이 커져만 가던 시대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가 백성들에게 심각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1년에 진상해야 할 물고기 7,518마리 중 4,800마리가 이러한 별진상으로 늘어난 품목들이었다. 선조시대의 율곡 이이가 만언봉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공물 추가분정은 바로 연산군의 이러한 깽판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2.4.4 직언을 차단
신하들 단속에 매우 난리를 쳤는데,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35]를 차게 하고,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 데 신하들을 동원시켰다.[36] 폐위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사모 앞뒤로 "충", "성"을 수놓게 하였다.
그렇게 많이 죽이고도 겁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모양이다. 자기 권위를 살리는 데에도 열심이어서, 자신이 사냥을 나갈 때에는 백성들을 멀리 쫓아내버렸으며, 북악산 마루에서 궁궐을 내려다본 아이들의 부모를 잡아 족쳤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 이걸 보면 연산군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 절대로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4.5 언문사용 금지
연산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언문으로 써져 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산군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현실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상대로 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反)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고조부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었으니 까여도 할 말 없다.
2.4.6 섹스 중독자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가 아끼는 궁인에게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혹 4,5일이 지나도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서, 좌의정 박모의 아내, 남천군 이모의 아내, 봉사 변모의 아내 (중략) 같은 이들이 다 (왕과) 추문이 있었다.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1년(1505) 4월 12일.
왕이 박씨[37]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38]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39]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2년(1506) 6월 6일.
게다가 "색(色)을 밝혀서, 기생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히 불러다가 간음했다." 하며, 실록에는 연산군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40] 거기다가 이복누이들과 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런데 색욕에 비해 정력이 딸렸는지, 약을 엄청나게 복용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연산군의 건강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항상 잔병을 달고 살아서 본인이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다. 갑자사화 후 친모(폐비 윤씨)의 상중에도 성관계, 심심하면 말의 등에서도 성관계를 하는 등, 하드코어의 극치를 달린다.
이게 다 사실이라면, 연산군은 현대 정신의학적인 견지에서, 전형적인 섹스 중독증을 앓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육체적인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 정신적인 공허를 성적인 자극으로 채우려고 성에 탐닉하는 것인데, 결국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 시점에선 정신의학이란 개념 자체가 지구상에 없던 시기인 관계로, 후대의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를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연산군은, 궁녀들을 시도 때도 없이 너무 많이 뽑은 탓에, 연산군의 치세기간 동안이 조선왕조 전체를 통틀어서 궁녀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각 군주 당 평균 600~700명 가량 되던 궁녀의 수가, 이 시기에만 유일하게 1,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41] 물론, 궁녀들 대부분은 노비였으니[42] 궁녀를 뽑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궁녀 유지비는 그 자체로 백성들 등골을 빼먹는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2.5 중종반정. 폭군의 몰락
숙청할 대상이 전부 숙청되어 더 이상 숙청할 대상이 없어진 연산군은, 급기야 어느 정도는 자신의 향락을 말리던 박원종[43]과 서자 출신으로 연산군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유자광에게까지 이유 없는 짜증과 협박을 가했고, 토사구팽의 위험을 느낀 두 사람과 주위인물들이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44]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임사홍의 아들이 옥사한 후, 임사홍이 의도적으로 유자광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유가 되었다.
이후, 성희안[45], 박원종, 유순정, 신윤무, 유자광 등이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로 올렸다. 일반적으로 조야(朝野)는 중종반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반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성종 대부터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중종반정의 공신 중의 하나였고, 당시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이'라 칭해지면서 사림/훈구 가리지 않고 존경받던 채수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술했는데, 여기서는 중종반정을 가열차게 까고 있다. 때문에 채수는 탄핵당해 말년에 목이 날아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산군을 옹호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산군은 이미 그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써글놈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은, 연산군 본인에 대한 동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힘으로 군왕을 폐하는 반정 자체에 대한 반발이었다. 《설공찬전》을 통해 조선사회에 핵폭탄을 날린 채수만 해도, 연산군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성종의 유신(遺臣)으로서 연산군이 폐위당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46] 유배를 가서 몇 달 만에 그곳에서 병사한다. 사망 당시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독살설[47]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화병으로 죽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야말로 절대왕권으로 흥청망청 놀고먹으면서 제멋대로 즐기던 양반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초라한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얻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반정세력은 명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희대의 사기를 펼쳤다. 그 직후 연산군이 급사했기에 독살설이 나돈 것이다. 가끔씩 명나라 사신들이 "연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연산군이 사람 기척만 들려도 발작을 해서 도무지 뵐 수 없다"고 사기를 쳤다. 명을 끝까지 잘 속인 모양인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나 지난 중종 30년에도, "사신이 오면 '연산군이 지금은 창덕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기록이 나온다. 의심 한번 안한 명이나, 끝까지 속인 조정 모두 흠좀무. 어쩌면 그런 개막장 이미지의 왕이다 보니, 명 입장에선 까딱 잘못 건드렸다간 피를 볼 가능성이 있어서 알고도 모르는 척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현대인들에게는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중국의 실록인 명사(明史)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덕(正德) 2년 융(㦕)이 세자 황(𩔇)이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48]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를 아우인 이역(李懌)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懌, 중종의 휘)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 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 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알한 신하(陪臣, 가신) 노공필(盧公弼)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경사/京師)에 와서 역을 봉해 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母妃)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痼疾)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폐위된 군주라서, 능의 형식이 아니라 그냥 조촐한 묘로 되어있다. 살아서는 최강의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가장 초라한 묘에 안장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연산군묘 항목을 참조.
조선왕조 최초로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된 임금이었기 때문에, 재위를 했던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신위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모셔지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과 함께, 종묘 신위 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2명 뿐인 임금으로 남았다.
폐위되면서 왕자 시절 군호로 격하된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은 원자–세자의 정통을 밟아 왕위에 오른 경우이므로, 폐위 이전까지는 연산이라는 호칭 자체가 없었고, 폐위된 이후에야 연산군으로 봉해진다. 간혹 사극에서 폐위되기도 전에 연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고증 오류.
2.6 가족사와 편력
아내 폐비 신씨는 신수근의 여동생으로 후덕하고 엄정하기로 유명하였고, 남편의 폭주를 막아보려고 여러 번 간언하지만 실패했다. 그래도 조강지처인지 연산군은 그녀를 내치지도 않고, 그녀의 후덕함을 황금에 새겨 치하하기도 했다.
연산군과 신씨는 유배될 때 각각 다른 곳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연산군의 유언은 "중전이 보고 싶다"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나름대로 인간적인 유언이다. 원래 연산군의 묘는 강화도에 있었지만, 부인 신씨가 간청하여 몇 년 뒤 오늘의 위치로 이장했고, 신씨 역시 사망한 후 연산군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결국 유언은 이루어진 셈이다. 장례는 왕의 지위가 취소된 점을 들어 왕자의 예로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장녹수 쪽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검열삭제를 안하기로 유명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의 종이었던 장녹수는 당시 30대였고 유부녀였으나, 엄청난 동안과 애교로 연산군을 녹여서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의 후궁 노릇을 하면서 권세를 누리다가 중종반정 이후 처형당한다.
폐세자 이황을 포함한 연산군의 아들 4명은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반정공신들에게 부당한 죽임을 당했다. 반정당시 세자 이황은 10살이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외척 신수근[49]이 반정을 알고도, 임금이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다며 반대를 하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음을 당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작 10살짜리의 어린애가 어떻게 성장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고[50], 이황 본인 또한 어린애라서 그런지 개념이 없는 편이었는데, 중종반정 다음날 은둔지에서 먹는 식사에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꿩고기가 빠져있자, 상궁에게 "꿩고기는 어딨느냐?"며 반찬투정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궁녀들이 "불쌍하신 분… 앞으론 피죽도 못 드실 텐데…"라고 말하다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황은 연산군의 아들 중 최연장자였고, 창녕대군의 경우 겨우 5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연산군 폐위 이후 몇 달 만에 사사되었다. 연산군의 막장 포스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반정공신들의 조치 역시 16세 미만의 경우는 사형을 금하고, 노비로 만드는 것이 최고형이던 조선의 법도상 엄연한 불법이다. 중종은 자신의 조카들을 죽이라는 반정공신들의 요구에,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이 뭔 죽일 죄가 있겠으며 장차 위협이 될 가능성도 낮고 인정상으로도 못할 짓이다"라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요구가 계속되자[51] 결국 모두 사사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중종은 폐세자 이황의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라고 명령했지만, 이 또한 묵살 당했다.[52] 이때 실록 기록을 보면, 즉위 초기 중종이 얼마나 무력한 임금이었는지 제대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반정공신들이 반정명분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들 중 일부는 날조되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욱이 반정공신들 대부분은 연산군의 체제에서 이득을 누린 관료들이 대부분이다.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점을 보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산군이 막장테크를 탄 것은 사실이다.
비슷하게 정치적 다툼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성군이 된 정조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자세히 따지고 보면 둘의 상황은 상당히 다르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조는 연산군보다 나이가 많았고,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것처럼 립서비스를 하며[53]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정당성에 대해 여러 차례 훈계를 했다. 반면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해서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도, 어디까지나 대신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구실이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정조 역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아버지의 죽음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인물들은 연산군 정도는 아니더래도 나름대로 숙청하기도 했다.
3 이야깃거리
- 외모가 어머니 폐비 윤씨를 많이 닮아, 조선 왕실에서 처음으로 우람한 체형이 아닌 왕[54]이 나왔다는 약간 요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키가 큰 건 성종을 닮은 것이었다.[55] 신하들에게 "왕의 풍채가 없고 여자 같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 몇몇 책에서는 비운의 임금(...)이라고 언급하는 경우가 잇는데, '이는 엄연히 고증 오류나 다름없다. 아무릴 연산군이 그나마 한 업적이 몇몇 잇엇더라도 그가 한 패악질이 넘사벽으로 더 많기 때문에, 비운의 임금이라고 할 수 없다.
- 인조 때 이덕형[56]의《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이덕형이 100살이 된 노인[57]을 만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노인은 어린 시절 한양에 갔다가 연산군을 보았다고 한다. 그 노인의 회상에 의하면, "얼굴이 희고 마른 체형에 키가 컸으며, 눈에서는 붉은 빛이 돌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깡마른 체형이었는지, 실록에는 전라도 부안의 한 백성이, "우리 왕은 허리가 가늘어서 저 모양 저 꼴이다"란 식의 말을 한 게 들통나 잡혀간 이야기도 있다.
- 하지만 성격은 선조들을 닮아서 무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몸이 허약한 편이라 눈병을 자주 앓았고, 얼굴에 종기가 있어 떨어지지 않았으며 잔병치레도 심했다고 한다. 다만 경연 빠지려고 일부러 아픈 척한 적도 많았다. 상술했듯, 연산군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들 대부분은 경연에 나가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갖은 핑계를 대서 안 나가려고 하긴 했다.
- 위에서도 말했듯, 예술에 재능이 있었기에 직접 지은 시도 많이 남아 있으며[58], 춤도 잘 췄는데 특히 처용무가 주특기였다. 궁중에서 처용의 분장까지 하고 춤을 추었을 정도였으며, 말을 타고 마상에서 처용무를 추는 묘기를 부린 기록도 남아 있다. 또한 연기력도 뛰어나서 직접 죽은 사람이 통곡하는 모습을 연기하면, 주변의 흥청들이 모두 따라 울어 연회장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취미활동을 잘하기 전에 정치를 잘해야 했다는 것이다.
- 상당한 미식가로,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귀한 식재료를 수입하여 먹었다. 이 탓에 후대 왕들은 뭐 맛있는 것만 먹으려고 하면, 신하들에게 '연산이다! 연산이 했던 짓이다!' 하고 탄핵 받았다.
- 외모가 조선 왕들 중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 키가 컸고 어머니를 닮아 여자처럼 아름다웠다니, 미남에 위너였을 것이다. 예술적 감각도 뛰어났다고 하니 지금 시대에 태어났으면 연예인을 했을 듯.
그리고 얼마 안 가 논란이 터져 퇴물행 열차 타겠지
- 여러 매체에선 연산군이 희대의 싸이코 미치광이(...)로 그려내지만
어느 정도는 맞다.자세히 생각해보면 어떤 정신나간 신하들이 또라이같은 인간을 섬기겠는가? 연산군이 막장 짓거리를 하긴 했지만, 그 뒤에는 철저한 기다림과 엄청난 숙청이 있었다. 즉 머리가 막가파는 아니었고 오히려 치밀했던 셈. 오히려 이분의 성격일 듯. 그런데 영화 간신에서는 완전히 연산군을 무덤에서 유골까지 꺼내서 가지고 노는 싸이코로 그려냈다.(...) 즉 고증오류. - 연산군 집권 초중반기는 실존 인물인 홍길동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후 홍길동전 등 홍길동이 '의적'이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에는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도 작용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만, 홍길동이 활동하다가 잡혔을 때까지 연산군은 아직 그럭저럭 정치를 잘 하고 있을 시기였다.
수학을 잘했다고 한다
4 가족 관계
4남 2녀가 있었는데, 일단 큰아들 폐세자 황[59]과 차남으로 창녕대군으로 봉해졌다가 박탈된 인이 있다. 이들은 모두 폐비 신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로, 둘 다 유배 당시에 결혼을 하지 않았고 곧 사사되었다.[60] 알려지지 않은 첩에게서 2남 2녀를 낳았다. 이들 중 아들로는, 양평군으로 봉해졌다가 박탈된 성과 돈수가 있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사사되었다.
다만 시집간 딸들은 출가외인으로 간주, 손대지 않았다. 서인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어차피 공주는 출가외인인지라 신분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게다가 삼불거(三不去)라 하여 내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61] 큰딸 휘신공주(徽愼公主)는 구문경에게 시집가서 아들 구엄을 낳았는데, 구엄이 연산군을 시봉(侍奉)했고, 지금도 구엄의 후손들이 연산군의 묘를 돌보고 있다.[62] 둘째 딸은 신거흥에게 시집가서 4남 4녀를 낳았다.
5 《연산군일기》
조선왕조 건국 이래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되어 왕권을 상실했던 임금이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함께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행적기록을 담은 실록호칭도 실록이 아닌 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래서 연산군과 광해군의 행적기록은 역대 임금들과는 달리 실록이 아닌 일기로 부른다.[63]
6 사극 및 출판물
연산군은 주로 20대에 활동했고, 30살에 죽었지만 사극 및 출판물에서 묘사되는 연산군은 30대 중후반이나 40대로 묘사된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신동준 著, 지식산업사)에서 그에 대한 재조명을 추구했다지만, 실은 극단적은 옹호로 일관하고 역사학계의 연구는 거의 무시했다.(그래서 불쏘시개 목록에도 올랐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이 연산군의 면모를 아는 데에는 훨씬 낫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얼굴에 거의 항상 반창고를 붙이고 다닌다. 위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연산군은 얼굴에 자주 종기가 나는 등 잔병치례가 많은 편이었는데, 이걸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8권(중종), 15권(경종, 영조), 18권(헌종, 철종), 20권(망국)에서 엑스트라로 나왔을 때도 빼먹지 않고 붙이고 나왔다. 이 책에서는 이 항목에 적혀있는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즉위 4년까지 군주로서 견실하게 나라 일을 한 모습을 재조명했지만, 후에 왕권 강화 한답시고 연이은 사화를 일으켜 엄청나게 비대해진 대간과 훈구 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그 강해진 왕권으로 국가 업무에 대한 비전 없이, 그저 자기 맘대로 흥청망청 놀고먹고 백성들까지 괴롭힌 것을 비판하면서, 그저 폭군에 지나지 않았음을 피력하며, 그 후 조선에서 연산 같은 왕은 더 이상 나오지도, 나올 수도 없었다는 총평을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반면교사가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준 인물. 선조, 인조, 고종 등과 함께 가장 통렬한 비판을 받은 군주들 중 한 명이다.
(위는 《왕과 나》의 정태우, 아랫줄 왼쪽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 오른쪽은 《왕과 비》의 안재모)
희빈 장씨, 이순신, 사도세자 등과 더불어 잊을만하면 재탕, 삼탕해주는 사극의 주인공.
진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비중이 높은 경우도 많다. 1980년대 이전에도 미디어 믹스가 자주 이루어진 인물이었는데, 연산군의 유난한 막장 행보가 군사독재정권의 잔혹한 행위를 좀 더 나아보이게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는 다소 견강부회적인 분석도 존재한다.
신상옥 감독은 스스로 흑역사로 간주해서, 북한에 있을 때 인편을 통해서 남한의 필름을 파기해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신상옥이 감독한 《연산군》은 당대에 보기 힘든 해석으로 유명하다. 포인트는 연산군이 모든 잘못을 깨닫고 정치를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데… 다음 날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한국 영화로서는 정말 이례적으로 상영시간이 3시간을 넘긴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신봉승이 자주 다루는 시대가 세조~연산군까지이다.
즉 인수대비의 일생의 마침표를 찍는 비극으로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왕조 5백년》 최고의 인기작인 《설중매》의 후반부가 바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임영규–연산군, 이미숙–장녹수, 고두심–인수대비인데, 원작소설은 대단히 잔인하고 검열삭제가 난무하는 작품이지만[64] 드라마판은 가급적 수위를 낮추었다.
드라마적으로 해석하면, 출생의 비밀과 성격적 결함, 예술가적 기질과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사, 그리고 최후의 파멸 등을 겸비한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많은 사극에서 당대 유명 남자배우들이 연산군을 연기했는데, 그 중 유인촌, 유동근, 이민우의 포스가 절륜하다. 특히 유인촌은 연극인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햄릿 연기[65]와 칼리굴라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준다.[66] 그 외에 대부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현재까지 대중적인 연산군 연기의 최고봉은 《왕의 남자》의 정진영으로, 광기와 애정갈구가 혼재된 연산군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해 냈다. 임영규의 경우에는 현실에서도 약간 그런 성격이란 말이 있다. 아래는 정진영의 씨네21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나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라 영화를 찍으면서 눈치를 본다.달마야 놀자를 찍을 때는 스님들 눈치를 봤고
와일드 카드를 찍을 때는 형사들 눈치를 봤다.
황산벌은 김해 김씨 문중 눈치를 봤다.
그런데 연산군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더라.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거다."
ㅡ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으로 열연한 배우 정진영,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왕의 남자》의 원작인 연극 《이》에서는 공길에 의해 남색과 사디즘에 눈을 뜨는 것으로 그려진다. 폭정보다는 장녹수와 공길 사이에서의 삼각관계가 부각되는 게 특징.
한편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맡았던 안재모의 연기도 이들에 못지않게 뛰어났다.
당시 연산군에 캐스팅 될 때만 하더라도, 전작 《용의 눈물》의 반듯하고 어진 세종대왕(충녕) 이미지가 남아있던 터라, 미스캐스팅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폭군 역을 절륜하게 소화하여 큰 호평을 얻었다.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과 폭군을, 그것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모두 연기한 셈. 덕분에 중반까지 부진하던 《왕과 비》가 연산군의 등장으로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는 뒷심을 발휘하여 유종의 미를 거뒀다.
참고로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출연했던 4명이 연산군 출신이다.
태종(유동근분) = 《장녹수》의 연산군 역
양녕대군(이민우분) = 《한명회》의 연산군 역
충녕대군(세종, 안재모분) = 《왕과 비》의 연산군 역
방번(무안대군, 정태우분) = 《왕과 나》의 연산군 역
과거에 단종을 3번이나 맡았던 정태우는 처음으로 연산군 역에 도전하여, 당시 막장가도를 달리던 《왕과 나》를 연기력으로 살려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왕과 나》 후반부는 '왕과 나'가 아니고 '연산군'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덧붙여 신상옥판 《연산군》과 같은 결말을 맞는다. 김처선이 죽은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다음날부터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날 밤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처음에는 분노하였으나, 물려받을 사람이 진성대군이란 걸 알고는 그러면 양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순순히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민우는 《한명회》 끝부분에 잠깐 나와 비중은 적었지만, 한명회가 죽은 후 갑자사화를 벌여 부관참시를 하는 장면이 아주 강렬했다. 특히 북을 두들기며 ‘닥치시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인터넷이 발달한 현재라면 플짤감이다. 참고로 링크된 영상에서 노사신이 앉아 있는 건 노사신이 갑자사화 이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고증오류다. 또한 극중에서 홍귀달이 폐비 윤씨의 신원에 반대하다 유배간 걸로 묘사되었지만, 홍귀달은 갑자사화 당시 경기도 관찰사 자리에 있었으며, 손녀를 입궐 시키라는 명을 거역한 죄로 장형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 교살 되었기 때문에, 이 역시 고증오류다.
역대 연산군 배우들
- 신영균 : 영화 《금삼의 피》 (정확히는 2부작 영화)
- 임영규 : MBC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1985)
- 이대근 : 영화 《연산군》
- 이민우 : KBS 《한명회》(1994)
- 유동근 : KBS 《장녹수》(1995)
- 유인촌 : 영화 《연산일기》(1988년),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67]
- 안재모 : KBS 《왕과 비》(1998~2000)
- 정진영 : 영화 《왕의 남자》(2006)
- 정태우 : SBS 《왕과 나》(2008)
- 진태현 : JTBC 《인수대비》(2012)
- 김강우 : 영화 《간신》(2015)
- 김지석 : MBC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2017)
변강쇠로 유명한 배우 이대근도 연산군을 연기한 경력이 있다.
한국 사극의 연산군하면, 드라마 작가 정하연을 빼놓을 수 없다. 정하연 작가는 《장녹수》, 《왕과 비》, 《인수대비》의 집필을 맡아서, 연산군 시대를 다룬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 ↑ 폐위되었기 때문에 시호는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있을 때 받은 존호가 있다.
- ↑ 《성종실록》에는 11월 6일 밤 3경 5점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고, 《연산군일기 총서》에는 11월 7일에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
- ↑ 《성종실록》의 출생일 기록을 따른다면, 연산군은 자신의 생일에 유배지에서 사망한 것이다.
- ↑ 그런데 충혜왕 항목에 들어가면 정작 "연산군은 세자 시절에는 그냥 평범했을 뿐더러 즉위 초에는 나름대로 괜찮은 왕이었던 편이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졌거나 정신이상을 겪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지만, 충혜왕은 꼬꼬마 세자 시절부터 막장. 정말이지 답이 없다. 그야말로 막장 오브 막장. 반도의 귀축왕."이라고 적혀 있다(…). 굳이 따지자면 재위 10년째에 갑자사화를 일으키기 전까지 연산군은 나름의 정치적 감각과 국정 운영 능력으로 그럭저럭 조정을 잘 이끌었고, 다만 갑자사화 이후 절대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부터 급속도로 막장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위기간 온갖 패륜에 막장행각만 일삼은 충혜왕보다는 연산군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충혜왕보다 나은 점이 하등없다(…).
- ↑ ~조(祖) or ~종(宗)
- ↑ 정종과 단종은 그래도 숙종 대에 가서 묘호를 받았다.
- ↑ 심지어 (가상이긴 해도) 2002년에 사이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광해는 조선 혜종(惠宗)이라는 사시(私諡)까지 받는다!
- ↑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연산군일기》는 《광해군일기》하곤 차원이 다르게 잔인한 내용이 담겨 있다.
- ↑ 한무제 때의 고사. 당시의 명신(名臣) 공광(孔光)은 조정의 일을 누설하지 않아서 휴가 중에 형제나 처자와 한담할 때에도 끝내 조정의 정사(政事)를 말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공광에게 “온실성 (궁전) 중(溫室省中)의 나무는 다 무슨 나무인가?” 물었으나, 공광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로 돌렸다는 고사.
- ↑ 쉽게 말해서 "헐, 전하, 하시고 싶은 대로 다 하다 보면 연산군이 되옵니다."
- ↑ 왕이 되자마자 왕비는 강제로 폐비당했고,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도 반대했으나 신하들에게 거의 묵살당하는 등 중종은 즉위 초반에는 정말로 힘을 못썼다. 그런데 몇년 지나지 않아 반정의 주요 핵심인물들이 주르르 자연사해버리고 중종의 치세가 길어지면서 중종의 왕권은 차츰 강해진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도 중종 자신이 신하들의 눈치를 너무 보았고, 특정 인물에게 힘을 몰아주었다가 제거해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정치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자세한 사항은 중종 항목 참고.
- ↑ 세자 시절 대간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다지만, 성종 대 대간의 행태를 보면 솔직히 그럴 만 했다.
- ↑ 할머니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왕대비, 작은할머니이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계모인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 ↑ 심지어 불교식 의례도 인수대왕대비를 위해서 시행한 적도 있었다.
- ↑ 세종대왕 때 유명해졌는데, 장래가 유망하지만 나이가 어리거나 젊은 관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 등에서 학문을 닦게 해주는 것.
- ↑ 각각 훈구와 사림이라 하나, 훈구공신 가문 내에서도 대간인 이들이 같은 대신에 있는 훈구세력을 탄핵한 걸 보면, 훈구와 사림보단 대간과 대신의 싸움이 사화라고 보는 게 옳다. 물론 양쪽 세력의 주축에 특정 파벌이 있긴 했다.
- ↑ 이극돈은 훈구파가 아니고, 유자광은 훈구파에 끼워넣을 수는 있는데 훈구파 하면 생각할 '기존 정치권력'이라는 이미지와는 안드로메다 차이였다.
- ↑ 우연인지는 몰라도, 유명한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 역시 스스로를 예술가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스스로 작사, 작곡하여 노래까지 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 ↑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쪽이 박치기보다 더 공포스럽다. 왜? 박치기는 그냥 신체만 아프게 하지만, 이쪽은 정신적으로 매장해 버리는 짓이다. 생각해보시라. 손자가 할머니에게, 그것도 칼을 가지고 들어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제대로 패륜 짓을 한 것이다, 더구나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 ↑ 중대 단위의 인력이 이들의 식사를 준비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게다가 왕이 굶어서 건강이라도 나빠지면... 유교적으로 보면 왕의 심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 신하들로서는 당연한 도리이자 충성의 척도였고, 현실적으로 접근해도 최고권력자가 앓아 누으면 국정이 마비되거나 혼란이 올 수 있으므로 대략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위 형식의 단식투쟁(?)을 할 경우 신하들에게 '늬들이 이러이러하니까 내가 나라 앞날이 걱정돼서 밥이 안 넘어가서 굶는 거임'하는 식의 명분을 직,간접적으로 알리므로, 원인제공자로 지목당한 신하(들)는 역적으로 몰리기 싫다면 데꿀멍하며 제발 식사 좀 하시라고 빌 수 밖에 없었다..
- ↑ 연산군일기 52권(10년 3월 20일)에 의하면, 안양군은 사방이 어두워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매질했고, 봉안군은 어떻게 했는지 눈치를 채고, 차마 매질하지 못했다고 한다.
- ↑ 원문 王捽㤚、㦀髮、至仁粹大妃寢殿、開戶辱之曰: “此大妃愛孫、所進觴可一嘗。” 督㤚進爵、大妃不得已許之。王又曰: “愛孫其無賜乎?” 大妃驚、遽取布二匹賜之。王曰: “大妃何殺我母?” 多有不遜之辭。 後令內需司取嚴、鄭屍、裂而醢之、散棄山野。
- ↑ 이런 아이러니로 인한 정치적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박원종 등 공신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반정공신의 명단을 크게 확대한 것이었다. 그 결과, 연산군 시절, 연산군과 짝짜꿍했던 관료들 중 상당수가 반정공신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논란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기묘사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 연산군 즉위 때 박씨는 이미 40대였다.
- ↑ 《연산군일기》 12년 8월 15일 기사 - 왕이 후원에서 나인들을 거느리고 종일 희롱하고 놀며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이날은 바로 폐비 윤씨의 기일이었다. 왕은 또 발가벗고 교합하기를 즐겨, 비록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도 피하지 않았다.
-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 가설을 택했다.
- ↑ 백부의 부인이니 연산군에게는 어머니뻘이다.
- ↑ 허나 연산군의 왕권이 크게 약했다기보단(후대의 왕보다 훨씬 강했다. 일단 정통성이 확실한데…) 성종이 밀어준 대간의 세력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다.
- ↑ 실록을 보면, 대간 때문에 시달린 건 주로 대신들이었기에, 대신(재상들, 육조판서 등)들은 연산군의 숙청에 동참했다. 사실 성종 말-연산군 초 대간의 막나가는 행태는 정도를 한참 벗어났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여서, 연산군이 대간만 적당히 제압하고 즉위 초기의 모습을 견지했다면 현재의 평가도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 ↑ 광해군도 이런저런 과오(지나친 궁궐 증축, 옥사 남발, 패륜)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연산군만큼의 막장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자신의 계모인 인목왕후를 폐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 보낸 뒤 죽음에 이르게 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질렀지만, 연산군이 저지른 패륜과 비교하면, 적어도 최소한의 실드를 쳐줄 건덕지는 있는 편이다.
- ↑ 이때 미녀들 중에서 임신부도 섞여 들어왔는데, 그걸 보고 하는 짓이 정말 막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녀들이 아기를 낳으면, 당장 아기를 빼앗아서 아기를 몰래 생매장시켰다고 전해진다.
- ↑ 이 과정에서 자식이 있는 유부녀도 강제로 뽑았다는 말도 있다.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대장금에서 장금의 스승인 의녀 장덕의 어머니도 강제로 차출되어 끌려갔다고 하는 설정이 있다. 유부녀도 강제로 끌고 갔던 사실이 있었는지는 확인바람.
- ↑ 3.1운동이 일어난 그곳이다.
- ↑ 야사에는, 연산의 분노에도 눈물로 간언을 계속하는 김처선에게, 연산은 활을 가져오게 하여, 손수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꽤나 유명하다.
- ↑ 중국 5대10국시대의 정치인 풍도(馮道)의 설시(舌詩)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설시의 내용은 풍도 항목 참조.
- ↑ 이것을 보면 연산군이 신하들을 얼마나 막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 ↑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부인. 중종반정을 이끈 핵심인물인 박원종의 누나이기도 하다.
- ↑ 쉽게 말해 궁에 들이기 전에 세자를 보살피게하다가, 세자가 커서 경복궁에서 살게 되자 세자를 돌보라는 핑계로 궁에 들여왔다는 소리다.
- ↑ 야사에서는 강간당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다. 그 재취 부인 박씨를 세자를 보호한다고 핑계대고 궁중에 불러들여 강제로 더럽히고는 그 관복을 특별히 높이고, 은으로 도장을 만들어 비빈의 계급으로 대우하게 하고 또 사은하게 하니, 박씨가 부끄러워서 스스로 죽었다. ㅡ 《동각잡기》 본조선원보록 2"
- ↑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런 상황이 조용히 숨죽이던 신하들까지 등돌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패널인 신병주 건국대 교수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고, 참석하면 아내가 왕에게 범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숨죽이고 있던 신하들도 서서히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내 아내가 모욕을 당하면 참을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 ↑ 더 심각한 건, 원래 궁녀들은 왕의 승은을 입는 경우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처녀로 늙어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대의 폭군이신 연산군께서는, 그냥 예쁘면 유부녀건 미망인이건 닥치는 대로 뽑아버렸다.
- ↑ 서민이나 양반의 딸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나 고위직을 맡았다. 대체로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을 궁녀로 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왕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 ↑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무오사화와는 달리 무자비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 그 결과 박원종이 문제가 아니라, 박원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이거나 박원종에게 명함이라도 전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죽느냐, 서서 살 길을 찾느냐의 선택 외에는 없었다. 다만, 그럴 것을 염려했던 연산군은, 다른 일이 터졌을 때 단순 가담자는 매우 가벼운 처벌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당시 대신들은 그때 이후로 일이 터졌을 때, 전 단순 가담자일 뿐이고, 주동자는 (이미 사화로 인해 희생당한) 그 사람입니다라고 발뺌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내용 - 연산군도 한 번 지적은 했으나, 사실 자신이 의도한 바여서 그런지 언급만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박원종에 대해서도 몇 차례 말로 꾸짖었을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 ↑ 여진족 토벌과 이시애의 난 진압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의 반정합류는 반정 성공의 큰 힘이 되었다.
- ↑ 연산군에게 간언을 했다가 파면당해서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 ↑ 상세한 위치는 기록에 없으며, 현재 신골, 연산골, 읍내리 3곳이 연산군의 유배지로 추정되고 있다. 연산군 뿐 아니라 희종, 임해군, 영창대군, 광해군 등 많은 왕족들이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 ↑ 연산군 사망 원인이 말라리아라고 하는데, 연산군이 사망한 건 늦가을이다. 일반적으로 말라리아는 더울 때 걸리는 병이다. 다만 강화도는 기후가 온화하고 모기가 많기로 유명한 동네라 가을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고, 잠복 후 뒤늦게 발병하는 경우도 있다.
- ↑ 세자를 반정 공신들이 죽였으니 참 구실을 대도 그런 구실을 댄 셈이다...
- ↑ 연산군의 측근이자 처남인 신수근 역시,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연산군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물론 야사지만, 측근이 이렇게 진절머리를 낼 정도라면, 쫓겨나기 전의 연산군이 얼마나 답이 없는 막장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 ↑ 연산군 또한 어릴 때는 나름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 ↑ 삼정승을 비롯하여 반정공신이자 당시 조정의 1품 고관들이 모두 중종 앞으로 몰려가, 사실상 강제로 연산군의 아들들을 죽이라는 전교를 받아내었다.
- ↑ 중종이 "결국 니들 말대로 폐세자 이황이를 사사시켰는데, 장례나 제대로 치러주지?" 라고 하자, 신하들의 대답이 "서인(庶人)으로 죽은 죄인에게 장례는 무슨. 관곽이나 갖춰서 묻어 주는 것만으로도 후한 조치거든요?" 라는 식이었다. 신하들이 왕의 의견을 대놓고 쌩깐 셈이다.
- ↑ 영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그 과정이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안 그러고서야 7일이나 가둬놓고 사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무섭게 시호를 내렸겠나?
- ↑ 이전의 조선왕들은 대체로 체구가 우람했다. 요절한 단종은 제외하고라도, 이성계나 이방원은 물론이고, 재위기간이 짧았기에 병약한 이미지로 생각되곤 하는 문종도 실제로는 풍채가 당당하였다. 특히 이성계는 장군 출신인데다 체격이 큰 게 당연한 결과이다.
- ↑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보았다고 한다.
- ↑ '오성과 한음'의 이덕형과는 무관한 동명이인. 죽창 이덕형이 한음 이덕형보다 5살 어린 동시대 인물이긴 하다. 여담으로 인조반정 공신으로 80살까지 사는 등 굉장히 장수했다.
- ↑ 정확히는 97세의 노인.《죽창한화》는 이덕형이 젊어서부터 1645년에 졸하기까지 짬짬이 쓴 글이다. 연산군 내용이 실린 부분은 이덕형이 임진왜란 다음 해인 계사년에 피난지에서 만난 노인의 증언을 수록한 것이다. 연산군을 본 노인은, 13세의 어린 나이에 도성에서 연산군이 행차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 ↑ 인생여초로 회합불다시(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 인생은 풀잎 위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연산군이 폐위 직전에 쓴 시라고 하는데 상당한 수준의 시조다.
- ↑ 아버지와 달리 반듯하고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막장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했어요. 다만 연산군 폐위 시 나이가 10살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 ↑ 이들의 숙부인 중종은 죽이지는 않으려고 했으나, 정권을 잡은 반정파들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생을 마감해야 했다.
- ↑ 사실 조선 시대 아내가 실질적으로 쫓겨날 수 있는 사유는 직접적인 간통, 시부모에 대한 악질적인 불효, 치료 불가능한 전염병 등으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다만 여성 인권이 조선 후기 시궁창으로 변하면서, 적당한 돈만 쥐어 주고 합의(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는) 이혼당하는 일이 급증하게 된다.
- ↑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봉사를 하면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러도 연산군의 제사를 끊어지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감형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엄에게도 아들이 없었고, 구엄이 사망한 후 외손인 이안눌이 연산군의 제사를 계승했다. 이안눌은 구엄의 친외손자는 아니었는데, 이동의 아들로 태어나 아저씨뻘 되는 이필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이필의 부인이 바로 구엄의 딸이었다. 연산군의 제사는 부인 신씨가 시작하여 외손자인 구엄에게 이어졌고, 다시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과 그의 후예들에게로 이어졌다.
- ↑ 폭군은 아니지만, 계유정난으로 축출된 단종 역시 이전에는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불렸다가, 숙종이 추존(追尊)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에서 《단종실록》으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실록이 아닌 일기라는 호칭을 가진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뿐이다.
- ↑ 이를테면 검열삭제 묘사가 제대로 나오고,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를 처단하고 시체를 훼손하는 이야기 역시, 아들들에게 직접 때려 죽이게 하고, 완전히 나체로 만들어 현장에서 찢어버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 연극에서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비밀을 안 이후에, 햄릿의 아버지 유령과 같은 폐비의 유령 때문에 고뇌한다. 완전히 햄릿 짝퉁 연산군...
- ↑ 이 작품을 그대로 영화화한 것이 김진아와 공연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산일기》다. 유인촌 최고의 걸작이다.
- ↑ SBS의 《임꺽정》에도 나오는데, 《임꺽정》에서는 3화까지만 나오는 조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