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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남아메리카에서의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에 대해서는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태평양 전쟁 | ||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300px 개전 당시 일본 제국의 최대 판도. 서쪽으로는 영국 치하의 인도 제국을, 남쪽으로는 다윈 등 호주 북부 도시를, 동쪽으로 미드웨이 및 알류샨 열도를 위협했다. 종전 직전의 판도. 일본의 전선은 이미 산산조각난 지 오래였고, 제해권 및 제공권의 괴멸로 인해 일본 본토와 남방 점령지는 완전히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 ||
날짜 | ||
1941년 12월 7일[1] ~ 1945년 9월 2일[2] | ||
장소 | ||
태평양 전역, 동아시아와 동남아 일대 | ||
이유 | ||
일본 제국의 침탈 야욕 (상세 내용은 아래 배경 문단과 태평양 전쟁/배경 참조.) | ||
교전국 | 미국 필리핀 연방 중화민국 영국 인도 제국 네덜란드 네덜란드령 동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소련(1945.8.8~) 대한민국 임시 정부[3] 비엣민[4] | 일본 제국 만주국 왕징웨이 정권 몽강자치연합정부 필리핀 제2공화국 베트남 제국 라오스 왕국 버마국 자유 인도 임시정부 캄보디아 왕국 태국 비시 프랑스[5](해군 파견) 나치 독일(해군 파견) 이탈리아 왕국(~43)(해군 파견) |
지휘관 |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더글라스 맥아더 체스터 니미츠 조지 마셜 어니스트 킹 장제스 윈스턴 처칠 존 커틴 윌리엄 매켄지 킹 피터 프레이저 헤인 터르 포르턴 이오시프 스탈린 김구 호찌민 | 히로히토 스기야마 하지메 도조 히데키 야마모토 이소로쿠 무타구치 렌야 도미나가 교지 우메즈 요시지로 나가노 오사미 시마다 시게타로 오이카와 고시로 아이신기오로 푸이 데므치그돈로브 찬드라 보세 쁠랙 피분송크람 |
결과 | ||
연합군의 승리 | ||
영향 | ||
일제의 패망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일제에 의해 점령된 각 아시아 식민지들의 독립 | ||
병력 | 10,000,000명 이상 | 4,800,000명 |
피해규모 | 미국 106,207명 전사 248,316명 부상 및 실종 중화민국 280만 명 가량 사상 1500만 명 가량 민간인 사망 소련 12,031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영국 86,838명 전사(인도 식민지 포함) 오스트레일리아 17,501명 전사 | 약 3,100,000명 사상 393,000명 가량 민간인 사망 |
목차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NHK 라디오 방송.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에 일본 함대(제국함대)가 영국,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선언을 한 후 결사의 대공습을 실시한다고 알리고 있다.
1 개요
일본어 : 太平洋戦争たいへいようせんそう, 大東亜戦争だいとうあせんそう
영어 : The Pacific War, Asia-Pacific War
일본 제국 군국주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벌인, 중립이라는 잠에 빠져들어 있던 미국을 깨어나게 만들고[6]스스로를 자멸로 초래하고 만 전쟁.
엄청난 전술의 차이가 전쟁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해주는 전쟁.[7]
단일 전쟁으로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 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중국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버마-인도 전선[8], 호주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9]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노년 세대들은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10]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전쟁의 시작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태평양함대 기지 진주만을 전격 기습한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완전히 박살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코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비합리적/광신적인 자살돌격, 카미카제 등의 정신나간 만행과 기행을 거듭한 결과 결국 막판에는 인류 최초 원자폭탄 실전투입 대상이 되어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11]을 선언한다.
독일은 일본이 소련의 뒷통수를 때려주기를 기대했으나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한테 박살난 이후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으니 기대할 수 없는 이야기였고 정작 미국이 일본과 전쟁에 들어가자 기뻐하면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때렸다. 그리고 미국의 물자도 랜드리스로 일본을 제외한 추축국에게 전달될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대서양의 제해권이 영국에게 있는 이상은 어림없는 소리고 랜드리스 자체가 루스벨트가 주장한 민주주의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정책의 일환인만큼 어림없는 소리다. 어쨌든 일본은 현재까지 인류가 일으킨 전쟁 중 가장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벌이게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다른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였으며 전후 미 해군과 미 해병대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미국의 쇼미더머니를 보여주는 대표적 전쟁이다.
이쪽도 유럽쪽의 전선 못지 않게 엄청난 인명이 죽어나갔다. 일본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는 2천 5백만이 넘어가고[12] 전사자는 연합군 4백만 이상, 상당수는 중국군이다. 미군은 약 10만정도. 일본군은 2백만 이상이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쟁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들이 펼쳐진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13] 나아가 상륙전, 보급전 등 육/해/공을 아우르는 유기적인 대규모 합동작전의 경험은 전쟁 사상 엄청나게 큰 변화.
오늘날 미국과 일본의 SF 전쟁물에서 흔히 보이는, 탄막이 우주를 가득 메우고 수십~수백기 편대의 격렬한 도그파이트가 벌어지며 함선끼리 함대를 짜서 대단위로 포화를 주고받고 행성을 향해 상륙정이 비처럼 쏟아지는 이런 전쟁의 이미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주로 형성된 것이다.
2 배경
-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 참조.
3 여러가지 모습들
독소전쟁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태평양 전쟁에서 기인한다. 잔혹함의 수준은 독소전쟁과 비등한데, 일부 분야는 이쪽이 더 심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치치지마 식인 사건같은 식인 사건인데 이는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14] 그러나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태는 동시기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고[15]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기는 하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 소련군 포로는 30~57.5%이상이 사망했고[16]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17]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18] 물론 국가 주도로 학살을 자행하고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그 놈이 그 놈이긴 하다.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과의 큰 국력 차이를 정신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전투에서 패배해도 진 것은 아니며, 근성으로 버티면 언젠가는 나약한 귀축영미가 지쳐 나가떨어지리라는 믿음이었다.[19] 물론 일본군은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미군에게 대타격을 줄 수 있는 자원도, 기술력도 없었으므로 병사 개개인에게 자폭과 희생을 강요했고, 전쟁 중 일본이 보인 무개념 닥돌 반자이 어택, 인명경시의 극치인 카미카제 전술, 유인어뢰 가이텐, 유인유도미사일 MXY-7 오카, 종이장갑 97식 전차 등 엽기의 극을 달린 전쟁수행과 집단자살, 인육섭취 등의 막장행태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정신론의 말로로 설명이 가능하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렇게 인명을 갈아넣어 강요한 피해도 미국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죽창에 야마토혼의 정신을 가득 담아도 원폭을 달고 오는 B-29를 격추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이 때 당시의 일본제국은 가히 짐승의 나라로 봐도 될 정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성하기는 고사하고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한 인물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 '백인 압제-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맨 성전'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웃긴 것은 가끔 저걸 진짜로 믿고있는 사람도 있다는 거다. 덧붙이자면 한 대 남은 가이텐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그리고, 이 때의 전범들을 일본에서는 영령이나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을 사실 역시 문제.[20]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과 험악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낙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던 거래를 하던 해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벌이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건 진흙과 말라리아 뿐이었다.[21]
그리고 현지 장기거주자나 원주민이 아닌 이상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당장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그리고 모기, 거머리 등의 독충 뿐.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자살해 버리는 병사가 나오며,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1942, 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특히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 지원까지도 일본군따위가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22] 그나마 전쟁 초에는 동남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게다가 인종주의에 찌들었기는 하지만 일단 영국과 미국 사람은 열등인종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며(유대계는 당연히 제외) 그래도 비슷한 문화권이니 비슷한 상식이라도 통하는 서부전선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지도부의 무능에다가 16세기식 전쟁 문화가 자리잡아 하라는 전쟁은 안하고 이상한 짓만 하는 별종이었다. 또 오랜 전쟁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데다 애시당초 서부 전선에서는 가급적 정상적인 전쟁을 치르려 해서 SS를 제외하면 싸워도 어차피 개죽음에다 적이 항복을 정식으로 권고[23]하면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도록 세뇌되어 있어서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24] 게다가 포로 항목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겠지만, 일본군에게 잡히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처럼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정식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해낸 작자들이 일본군이다.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고...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휴지 한 통이라도 일일히 배로 실어 날라야 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징발이라도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 섬에 그런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25]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했다.[26]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는데[27],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한 일본군은 그저(…).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지나친 섬에 남겨진,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둔전(…)과 사냥,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Rabaul)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링크 참조.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겐빌(Bougainville) 섬처럼[28] 전 병력의 1/3이상이 굶어 죽어버린 곳이 대부분(…).
전쟁 후반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섬을 철저하게 요새화했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한 채 옥쇄하거나 아예 카미카제 같은 야만스러운 전술까지 구사하면서 끝까지 버티려 했다. 그리고 미군은 이런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출혈을 각오하고 더 높은 강도의 무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병사들의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워낙에 돈이 없어서 철 갖고 엿이라도 바꿔먹으려고 했는지 경북선 등 한반도에서 장사 안 되는 철도를 죄다 뜯어가버리지를 않나, 통영대전고속도로의 모체가 된 대전-삼천포 철도 노선 공사를 중단시키지를 않나... 이런 막장스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돈 없어서 철도의 레일을 엿바꿔 먹는다는 것 자체가 패전확률 90%에 수렴하는, 사람으로 따지면 항암치료 포기하고 모르핀만 계속 공급하는 형상이다.
이런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전투는 언제나 독소전쟁 못지 않게 참혹하게 진행되었고, 고대의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별의 별 마경이 펼쳐졌다. 몇몇 맛이 간 미군 병사들 중에는 일본군의 시체에서 안경,시계,금니 등을 빼가거나 죽은 일본군의 해골을 수집하거나 탱크에 장식으로 매다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엄연한 전시 국제법 위반이다.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고. 물론 대부분은 전쟁 끝나고 제정신 차린 뒤 부끄러워하며 슬그머니 처분했지만 몇몇 정신 못차리던 미군들이나 가져온 사실 자체를 까먹은 미군은 그냥 창고 한구석에 방치했고, 유산을 정리하던 후손들이 이 해골을 발견하는 바람에 식겁하고 경찰이 출동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도 이어졌다.
물론 포로학대나 조직적인 포로학살 같은 행위를 당연한 듯이 자행하고, 심지어 포로를 잡아먹거나 산 채로 해부하는 등의 생체실험 행위까지 저지르고 이걸 미화하거나 은폐하려던 일본군에 비하면 충분히 양반이다. 일본군은 군대 자체가 미쳐돌아가고 일부 개개인이 그나마 정상이었다면 미군은 군대는 정상이고 일부 개개인이 미쳐서 일을 저지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집단자살하게 만들고,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인간성을 유린당한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 식량이 떨어진 일본군에게 잡아먹히는 등(…) 살해당하고 착취당한 원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나이 지긋한 원주민들은 JAP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하기 바쁘다. 오죽하면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으로 도왔다. 예를 들어서 과달카날에서 해안 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 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 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 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
게다가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당시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은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측을 지원한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당연히 같은 추축국인 일본과도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1945년 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이에 앞서 1944년 3월에는 카비앵 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독일인 목사들을 학살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미쳐서 아군도 못알아본 모양이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씬 레드 라인>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 전쟁 미군 전사자 10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 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 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섬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라 불렸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육군은 이건 미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야!라고 까고 미육군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쨋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히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에…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애초에 방어요새의 전략적인 목적도 여기에 있다. 공격자 측에선 일정 규모 이상의 적을 남기고 우회하는 것 자체가 보급로 유지에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미군이니까 그리고 상대가 일본군이어서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3.1 일본군의 한심함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일본군의 온갖 병크와 삽질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웃음과 대한독립에 기여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29]. 대표적인 예로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서로 다른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본적인 협력조차 안 되었다. 참고로 독일도 비슷했던지 히틀러의 수기에도 나온다. 독일도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30]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존재하는 등 개판이었으며 미군도 육군과 해군의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의 반목/대립은 정말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육군과 해군이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따로 놀았을 정도니...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구리바야시 중장[31]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 하는 장면이 있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의 피해도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심각했던 것은 사실[32]이었고 43~44년 이전에는 미국도 결정적으로 전시경제체제가 돌아서 쇼미더머니를 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이전 개전 초기에는 미 해군도 상당히 전력이 핍진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거하게 선빵을 얻어맞은 탓에 함대 전력이 일본군에 비해 결코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알아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 니미츠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당장 종이 비행기 취급받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그렇게 나쁜 비행기가 아니었다.나중에 핼캣 전투기 이후로 망하지만하여간 '내가 맛깔나게 싸대기를 때리면 미국이 협상하겠지?'라는 일본의 방침은 오늘날에는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병력을 증강시키기 전에 한번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우리가 선점하면 미국 역시 협상에 나설수 밖에 없을 것이다'는, 꽤나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대활약을 하면서 태평양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전설의 배가 된 화려한 이면에는 진주만 공습 이후 여러 격전을 거치며 손상을 입은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수리를 위해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믿을만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서 얼마 되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그 정도로 미국에서도 격전을 치룬 전역이다.
그러나 일본 군부와 정치계는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물자와 병력을 반자이 어택으로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미국을 상대로 아껴서 싸워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마당인데 말이다.[33] 이놈들은 그저 반자이만 외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전쟁에 임했다. 당장 중일전쟁에서 5년째 들이붓고 있는 주제에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하면서 양면전선을 만드는 패기를 보이더니 이후 식민지를 두고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에 싸움을 걸어서 싸울 상대를 하염없이 늘렸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인 한국 광복군 소속 무다구치 렌야가 활약한 전선도 영국과의 전선이었다.[34] 사방에 적을 두고 전쟁하는 것도 문제인데 여기에 더해서 미국 상대로 뒤통수를 치고 자기들이 유리한 국면을 취할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종국에는 개전초기 유리한 점조차도 알아서 까먹고 항복한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4 기타
4.1 생산력 비교, 1939-1945
출처: John Ellis, World War II: A Statistical Survey (New York: Facts on File, 1993), 277-80.
미합중국 | 일본 제국 | |
전차 및 자주포 | 88,410 | 2,515 |
야포 | 257,390 | 13,350 |
박격포 | 105,054 | 알려지지 않음 |
기관총 | 2,679,840 | 380,000 |
트럭 | 2,382,311 | 165,945 |
전투기 | 99,950 | 76,320 |
폭격기 | 97,810 | 15,117 |
수송기 | 23,929 | 2,110 |
항공모함[35] | 141(...) | 18 |
전함[36] | 8 | 2 |
순양함 | 48 | 9 |
구축함 | 349 | 63 |
잠수함 | 203 | 167 |
그나마 일본측의 무기생산량이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라도 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 물론, 이는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능력을 배분한 미국과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몰빵한 일본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된다.(...) 더구나 미국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같은 명전투기들이었고, 일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한 날 거의 제로센.(...)
이처럼 일본이 그나마 몰빵을 하는 분야에서조차 양적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그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고,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Aㅏ...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의 무책임한 징병정책으로 숙련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산업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더해 일본이 상대하는 적은 미국만이 아니었다는 것. 일본은 동남아에서 영국군, 중국 전선에서 중국군, 남태평양에서 호주군을 상대했다. 이들 나라들이 생산한 물자는 아예 저 위의 수치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전쟁 종료 1주일 전 참전한 소련을 제외해도 이렇다. 이러한 점을 총합하여 보면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자폭 전쟁이었다는 본문의 묘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물론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랜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분명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게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그 얼마 되지 않는 셔먼으로도 충분하긴 했지 이는 트럭이나 야포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은 바다였고, 최소한 해군함정만큼은 구축함을 빼면 생산량의 대부분이 태평양에 투입된 게 맞다![37]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는 아주 안드로메다 행으로 봐도 될 지경이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능력 격감과 전투력 유지 불능에 직면했다. 본토 방위를 위한 전투기들이 소나무에서 긁어낸 송진유로 출격을 하는 형편이었고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의 유전은 본토에 원유를 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그것마저도 용납 못해서 전쟁 막바지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한다.(...)
그 밖에도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기술력을 갖고 있었으니 설사 자원이 넉넉했더라도 제대로 써먹을 지는 의문이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널리 쓰이는 전략자원인데 일본은 텅스텐 가공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38]
반대로,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월한 산업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가지 천연자원들 특히 천연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거나 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그냥 합성고무를 만들어서 천연고무를 완전히 대체시켜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 등이야 미국 및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 쏟아지는 것들(...)이었고.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그냥 산업능력으로 찍어낸 화학 살충제였다.
4.2 인명 피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2만 여명에 불과하다.
전투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06,207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총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39]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피해는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츠지 曰 : 이게 다 근성이 부족해서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6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3년 동안 태평양과 중국 전선을 합하여 24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석기시대로 돌아가버리며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그래도 동원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40]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고, 그 와중에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폭격 등으로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3,5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중 90%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독일의 홀로코스트처럼 계획을 짜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그냥 임진왜란할 때처럼 점령지에서 죽이고, 뺏고, 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의 극히 원시적인 행태를 보여서 일본 스스로조차 전쟁 범죄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및 베트남 전쟁 등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이들 지역에 대한 정확한 피해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드는 요인이다.
4.3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
전후 GHQ는 "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금지하였다. 미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 이라던가 "제2차 세계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흔해빠진 주장부터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 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여기에서도 일본이 동남아와 인도의 독립 운동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대동아 공영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도 있다.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이 외에도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사상적인 의미가 아닌 단순히 전쟁이 일어난 지역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GHQ가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폐지한 것은 단순히 위처럼 사상적인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인 이들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 일본 정부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령적 근거가 없다라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상황이다.
일단 현재 한자 문화권이든 어디든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고있는 국가는 일본 뿐이며 당연하게도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5 관련 문서
5.1 전투
- 개전 이전
- 1942년
- 1944년
- 1945년
5.2 교리
5.3 사건, 사고
- 파나이 호 사건
- 설리번 5형제
- 코브라(태풍)
-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
- 어뢰 스캔들-미국 잠수함대와 뇌격기 비행대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린 사건.
5.4 전쟁 범죄
5.5 나무위키에 개설된 관련 작품
- 남자들의 야마토
- 더 퍼시픽
- 도라 도라 도라
- 레드 오케스트라 2 : 라이징스톰
-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
- 반딧불의 묘
- 배틀스테이션 시리즈
- 씬 레드 라인
- 아버지의 깃발
- 월드 오브 워쉽 - 정확히는 타 국가 트리보다 미국, 일본 함선 트리가 먼저 개설되었다.
- 애니멘터리 결단
- 영원의 제로 - 일본의 가미카제 강요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제독의 결단
- 진주만
- uncommon valor
- 엠파이어 어스 아트 오브 컨퀘스트
-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콜 오브 듀티 시리즈들의 미군 미션들이 유럽의 서부전선을 배경으로 하는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의 미군 미션은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태평양의 지옥 - 실제 펠레리우 전투의 폐허가 등장한다.
- 함대 컬렉션 - 칸무스의 프로필이나 서버 이름에서만 실존에서 빌려온것. 그나마도 공략 해역같은 경우 실제 전역과 이름이 살짝 바뀌어서 나온다.
- 전함소녀 -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일본, 영국, 미국 함선들이 등장하며 역사전투에 산호해 해전이 있다. 함대컬렉션과는 다르게 실명을 쓴다.
- 언브로큰
6 관련 인용구
1억의 일본인들[41] 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근거 없는 허세선전포고 중제 딴에는 어디 날 죽여봐라겠지만 나 좀 제발 죽여주세여 연합국 님들아
우리의 근성은 대단하고, 적의 정신력은 나약하므로, 우리는 백전백승이다.- 츠지 마사노부
"드디어 우리 황국이 백인놈들을 지배하겠구나!"그리고 전쟁 후 그 백인놈들이 오히려 일본을 지배했지...
이쯤되면 옥시덴탈리즘 냄새가 짙다.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 있다."―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제독,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것 같은데?"― 노부히토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6개월정도는 승산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일본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기름 때문에 전쟁하는 병신들도 있냐?"그런 병신들이 있었습니다. 유럽에도 있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사이온지 긴모치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서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며 한 연설,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 서두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다시 돌아오겠다."― 더글라스 맥아더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라는 언어는 이제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아깝다...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것입니다."
―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46년에는 오지에서 벗어나기, 47년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48년에는 골든 게이트로.너무 멀리갔다"[43]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나와 함께있었던 해병대원들은 18~22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것임을."―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7 참조
태평양전쟁의 지상/해상/공중전의 공간전사를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 미국 등 외국의 전문웹문서/서적을 번역하여 전투/전역 별로 연재한다.
각 전투에서 의미있는 움직임이라면 소대 단위까지(!) 서술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더욱이 함대구성/군수보급/야전건설/민사전 등 군사행정과 전투를 전후한 배경 설명(장군들의 정치적 갈등 등)까지 대단히 꼼꼼하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주 2~3회) 이런 연재를 해 온 터라 나이도 적지 않고 내공이 풍부한 밀덕 단골이웃들이 달아대는 부연설명 등 많은 댓글들도 볼 거리이자 주인장의 자랑거리. 한국어 웹문서 중 이 정도 퀄리티의 태평양전쟁사 포스팅은 매우 찾기 힘들 것이다.
블로그 주인장인 대사(PW)는 밀덕후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 듯, 오래 전부터 대구광역시에서 개인의원을 운영해 온 내과 의사(!)이다.아버지는 해군 참모차장이었다고 한다. 성골 밀덕후(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실 분)
- ↑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날. 미국은 다음날인 12월 8일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을 통해 대일 선전포고를 행했다.
- ↑ 시게미츠 마모루 대사가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한 날. 일본 제국의 공식적 항복 선언은 1945년 8월 15일의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이다.
- ↑ 임팔 작전 참조.
- ↑ 베트남 독립 동맹회. 베트콩과는 다른 조직이다. 보통 베트민, 월맹으로도 부른다.
- ↑ 당시 동남아시아에 있던 프랑스의 식민지들.
- ↑ 물론, 미국도 결국은 참전했겠지만 일본의 기습과 나치의 대미 선전포고로 그것을 대폭 앞당겼다. 게다가 반전 여론까지 순식간에 잠재웠으니 종판은 본문에 있는 그대로 빅 엿이 두 방. 이러고도 계속 버텼으면 그때는 윌리엄 홀시 제독의 말대로 일본어가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됐을지도.
- ↑ 당시 일본 제국의 군대는 자체적으로는 메이지 시대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역행해 있었으며 육군과 해군은 관계가 험악한 편이었다. 당장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 반자이 어택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미국과는 진짜 1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지는 것이 어찌보면 예정된 결과.
-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당시 버마에 파견된 중국군은 10만이 넘었으며 버마 탈환작전 역시 주공은 중국군이었다.
- ↑ 이 표현은 1945년 12월 GHQ의 "신도 지령"에 의해 사용 금지되었다가 1952년 해지된 바 있다, 덕분에 일본에서는 열심히 대동아전쟁이라는 용어를 주장중이다. 태평양 전쟁은 아시아 실정에 맞지 않는 서구 열강들이 일방적으로 지은 이름이라나 뭐라나. 참고로, 저 대동아전쟁이나 태평양전쟁 등으로도 모두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 ↑ 이것은 일제가 당시 한국인들에게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맥락으로 세뇌 공작을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이 무렵 일제가 쓰던 한국인에 대한 정책은 민족말살 정책.)
- ↑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낸 곳이 바로 아이오와급 전함 중 BB-63 미주리(MISSOURI) 전함이다.
- ↑ 중국 1천 7백만 이상, 인도네시아는 4백만 이상,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2백만명 이상 등.
- ↑ 문제는 미국이 이런 편제를 쓰게 된 이유로 진주만 공습이후 제대로 된 전함이 남아 있는 게 없어서 항공모함으로 땜질한 것인데 그게 먹힌 것이다. 진주만 공습때 미국이 진주만에 주둔시켰던 배들이 전함이 아닌 항공모함이었으면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이다.
- ↑ 물론 독소전쟁때의 독일군이나 소련군도 식인을 하긴 했지만, 그건 식량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정상참작의 여지도 존재한 반면에 치치시마의 경우에는 그런것도 없다. 그리고 치치지마 사건의 내막은 술자리에서 안주가 떨어지자 특별한 술안주라며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인육을 먹은 것이다.
- ↑ 어느 정도 충격이었는지 하면, 치치지마에서 저지른 일 떄문에 교도관을 맡고 있던 미 육군 헌병들에게는 물론, 같이 수감된 다른 일본군 장군들한테도 얻어터졌을 정도다.
- ↑ 70%까지 잡는 견해도 소수 있으나 러시아측 학자들도 대부분 57%이하로 본다. 70%까지 잡는 경우는 포로로 잡혔던 사람중 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 수용소로 갔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수가 포함되어서 나온 수치라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그것을 감안해도 일본보다 높은 수치인건 맞다.
- ↑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가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 ↑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
- ↑ 삼대오물 중 하나인 츠지 마사노부의 명언이다.
- ↑ 이런 신사나 사묘 같은 시설들은 일본 열도 내 각지에 퍼져 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다는 게 더 문제.
- ↑ 더 퍼시픽 마지막화에서 유진 슬레지와 유진 슬레지의 형이 나누는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유럽 전선에 투입된 형도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며 PTSD 증상을 호소하지만, 유진에게 전쟁 갔다 왔으면서 아직 총각딱지도 못뗏냐면서 놀라는 모습을 보면 유럽전선과 태평양 전쟁 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 ↑ 그나마 일본군이 워낙 개막장이라 원주민들이 연합국을 적극적으로 돕긴 했다. 물론 나중에 그 보답으로 다 독립시켜줘야 했다.
- ↑ 이렇게 하면 중대장, 대대장 등 상급 지휘관이 해당 적군의 항복을 직접 확인하기 때문에 개별 병사들이 밥 먹으려고 손 씻었대 라면서 포로를 쏴죽이는 짓을 할 수가 없다.
- ↑ 일본군 군부의 입장에서는 이래서 야스쿠니 신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 자세히는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에 가서 영령이 되지만, 항복하면 그는 죽고 가족은 검열삭제 당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 간단히 일본군 군가중 하나인 동기의 벚꽃(同期の桜 : 도키노 사쿠라)만 봐도 알 수 있다.
- ↑ 이런 동네에서 원주민과 척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워낙 멍청했기에 미군이 적당한 원조+일본군으로부터 보호만 약속해도 원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
- ↑ 그랬기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계획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부대의 규모도 유럽전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다. 말 그대로 보급이 곧 생명줄이었다.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쉽게 징발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도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 ↑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
- ↑ 이 섬은 호주군이 섬의 중앙 부분만 차지한 채 대치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 ↑ 일부 몰상식한 군 인사들에게만 해당되었다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군 수뇌부가 전부 이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식있는 몇몇 장성들이나 장교들보고 한심하다며 혀를 차는 모양새였고 군 수뇌부의 모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두뇌들이 집단가출한 듯한 병신짓을 연거푸 해댔고 그런만큼 일본군의 피해는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다.
- ↑ 여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언급된다.
- ↑ 배우 와타나베 켄이 연기히였다.
- ↑ 전함의 반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 ↑ 예를 들어 이오지마 전투의 경우 일본측 지휘관 쿠라야바시 중장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참호전, 지연전을 펼치면서 방어전을 펼친 결과 미군이 일본군과 맞먹을 정도로 병력손상을 입었다. 이런 전투가 계속되었다면 미국이라도 손해를 묵과할 순 없었겠지만 문제는 그나마 이 정도의 상식적인 전술을 가진 지휘관이 일본에 얼마 없었다는 것이다.
- ↑ 이때 무다구치 렌야가 이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지만 않았어도 버마-동남아 전선이 그렇게 무너지지 않았을거라는게 중론이다.
- ↑ 호위항모 포함. 그러나 호위항모를 빼도 정규 항공모함만 20척이 기본적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일본은 여객선으로 건조 중이던 배를 항모로 개조한 것도 있다. 물론 저 둘은 애초에 항모로 개조할것을 전제로 건조된 배이기는 하지만.
- ↑ 당연히 이 수치에는 진주만 공습 때 파괴되었다가 수리해 복귀시킨 전함들은 제외되어 있다.
- ↑ 구축함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해 상당수가 대서양에 투입되었다.
- ↑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독소전쟁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
- ↑ 참고로 더 많은 포로가 잡혔던 유럽전선에서 미군 포로 사망자는 1,124명에 불과하다. 이는 독일이 서방측 포로에 한정해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합당한 포로대우를 해준 덕분으로 사망자 대부분은 부상 악화, 질병, 아군 폭격에 의한 것으로 전쟁범죄에 의한 사망은 극히 드물다. 대신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인간 취급도 안했다.
- ↑ 더군더나 미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일본의 개전 결심은 그야말로 자살을 결심한셈. 애당초 병력 동원 측면에서 조선과 대만은 별로 도움이 안됐다.
- ↑ 순수 일본인 약 7천만과 나머지 조선인, 대만인, 만주, 류큐인 합쳐서 나왔다.
- ↑ 이 때 홀시 제독 휘하의 항공모함 중 하나가 후에 한 척의 배가 역사를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 USS 엔터프라이즈다.
- ↑ 그것도 그럴게 미군은 일본본토로의 진격을 사실상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48년까지 내다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