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에 대해서는 독도(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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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獨島/Dokdo ' Liancourt Rocks/리앙쿠르 락스, 리앙쿠르 암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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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지도 | ||
영유 및 실효지배 | 대한민국 | |
행정 관할구역 | 경상북도 울릉군 | |
행정구역 지명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
위치 | 동경 131°52′ 북위 37°14′ | |
면적 | 187,453m2 | |
인구 | 약 50명[1] | |
주둔 부대 | 독도경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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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獨島 / Dokdo[2]
대한민국의 최동단에 위치한 섬.
다음지도와 네이버지도에서 각각 독도의 로드뷰를 제공하고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볼 수 있다.
독도 라이브 영상 링크 : KBS 제공. 청와대와 정부서울청사 구내 TV에 나오는 것과 동일한 영상이다.
울릉도 동남쪽 87.4㎞[3] 해상에 있는 바위섬들로, 울릉도의 고지대에서 맨눈으로 관측할 수 있는 대한민국 최동단의 섬이다. 일본에서는 시마네 현 오키 제도의 부속 섬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로 인한 외교 분쟁으로 유명하지만, 독도는 대한민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이다.
한자로는 홀로 독(獨)자를 쓴다. 하지만 독도의 한자표기는 이런 한자 뜻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한자의 소리를 빌려 쓴 음차로[4], 진짜 의미는 돌(石)의 서남 방언인 독이다. 돌로 된 섬이란 소리.[5] 독도는 실제로는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가운데 수로가 뚫려 있어서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그리고 크고작은 89개 부속도서로 나누어져 있으니, 노래 독도는 우리땅의 첫 소절인 '외로운 섬 하나'는 사실 잘못된 셈.
독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대한민국 실효지배의 지역은 전라남도 신안군 가거도이다. 직선거리로 706km를 넘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실효지배지역의 어느 두 지점 사이의 거리 중 가장 멀다. 헌법상의 영토로는 극서점인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직선거리로 725㎞이다. [6]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화산섬이다. 수백만년 전 신생대에 동해에서 분출한 화산이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풍화되어 화산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것. 마찬가지로 화산섬인 울릉도는 여전히 화산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그리고 수심이 깊은 동해바닥에서 수면까지 올라온 섬이기 때문에 해수면이 아닌 산뿌리부터의 높이로 따지면 한라산보다 높다. 물론 이건 에베레스트와 마우나케아(하와이)의 관계와 비슷하지만. 독도의 해저 지형
독도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식생들이 많이 서식한다. 무엇보다 본래 바다사자의 아종인 강치의 주 서식지였는데,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남획으로 멸종되었다. 애초에 일본에서 1905년 독도를 점거한 표면상의 이유가 강치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일본인들의 강치 사냥 장면이 흑백 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이 독도를 요새화했기 때문에 멸종했다는 개드립 주장을 내세운다. 아무런 이론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는 일본의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수산물과 조류는 풍부하지만, 바위산이 바다 한 가운데 솟아있는 거나 다름 없어서 지형이 가파르고 평지가 별로 없다. 게다가 식수가 꽤 부족한 편. 일단 샘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이걸로 다 충당할 수가 없는 듯하다. 면적이 그렇게 좁은 건 아닌데도 인구가 거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
연평도 포격 사태 이후, 긴급 상황 발발시 주민의 긴급한 후송 및 함정의 정박을 위해 국토해양부에서 독도를 포함한 전국 10개 섬을 국가 관리항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독도에는 기상악화에 대비한 방파제, 부두등을 신설하고 최대 5천톤 급 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독도경비대 및 1가구가 거주하며, 일대에 천연가스, 메탄 하이드레이트 등 자원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시설물로는 RKDD라는 ICAO 코드를 받은 헬리콥터 포트와 노무현 정부 시기 만들어진 접안시설, 어민숙소 등이 있다. 접안시설은 확장될 예정이다. 참고로 RK**는 대한민국의 공항을 의미하는 국가 코드이다. 일본은 RJ**.
독도에도 우체통이 있다. 중요한건, 투함된 우편물은 2개월에 한번 독도경비대함이 들어올 때 집배원이 수거한다. 서울 영등포구 기준으로 독도에서 투함한 우편물이 오는 경로는 독도⇨2개월 숙성⇨울릉우체국⇨포항우편집중국⇨대전교환센터⇨서서울우편집중국⇨영등포우체국⇨배달이다. 우편번호는 개정 전 6자리 번호가 799-805, 2015년 개정 후 5자리 번호는 40240이다.
2 교통
독도에서 외부와 연결되는 교통수단은 선박이 유일하다. 애초에 공식목적으로 사용되는 헬리포트를 제외한 다른 교통시설이 들어갈 만한 자리가 없기 때문. 울릉군/교통 문서 참조.
3 역사 및 명칭
- 더 상세한 역사는 독도/역사 참조.
독도는 역사속에서 언제나 울릉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인식되어 왔다.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인식되거나, 울릉도와 함께 한 쌍으로 다루어져 온 것이다.
- 삼국사기(1145년)에 지증왕이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독도 영유권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산국이 모섬(母島)인 울릉도 외에 독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산국의 영역에 모섬인 울릉도 밖의 영역과 부속섬이 존재했다는 가설에 의존한 해석.
- 이러한 이유로 일본은 우산국 정벌은 울릉도를 가리킬 뿐 독도 영유권과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 독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최초의 기록 문헌은 한국 측의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완성)로 우산-무릉이라 불린 두 섬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 일본 측의 독도에 관한 최초의 직접 기록은 은주시청합기(1667년)으로 죽도-송도를 "이 사람이 살지 않는 두 섬에서 고려를 바라보는 것은 운주(이즈모국)에서 은주(오키국)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雲州望隠州)"로 기술하여 울릉도-독도 두 섬을 조선과 일본 서북을 나누는 경계로 인식하였다.
- 일본은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소간의 울릉도-독도 간 명칭 혼란을 겪던 중, 과거 울릉도의 이름으로 사용한 다케시마(竹島)를 독도의 명칭으로 확정하고, 독도의 명칭이었던 마츠시마(松島)를 울릉도의 명칭으로 규정함으로서 두 섬이 부속관계임을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령인 울릉도 이름으로 독도 이름 지어넣은 것만 봐도 뻔하지.[7] - 현대에 이르러서도 한국의 독도 주소는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으며, 영유권을 보유하지 못한 일본 또한 그 주소를 오키섬에 부속(島根県 隠岐郡 隠岐の島町)시킴으로서 독도가 사람들의 인식속에서 자연스럽게 모섬의 부속섬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음을 자인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우산국에 관음도, 죽도, 독도 등의 부속섬이 포함되었다는 직접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18세기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그 영유 인식이 문헌상 확인된다.
근대의 국제법에 의해 판단해 보더라도, 맑은 날 울릉도에서 독도가 상시 육안관측된다는 물리적 사실[8]은 '지속적 발견'에 해당하는 영유권원으로 인정받고 있고, 따로 '실효지배' 한 근거를 갖추지 않더라도 6세기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가 130km(육지-울릉도 간 최소 거리) 이상 항해한 기록이 그보다 적은 90km(울릉도-독도 간 거리) 떨어진 섬에 대한 '실효지배'의 물리적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어, 만약에 있을지 모를 국제법정에서의 영유권 분쟁 시 '고대 우산국의 영유권에 독도가 포함되는가'의 사항에 대해 대한민국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상당하다.
한편 울릉도 동편 바로 옆에는 죽도(죽서도)라고 불리는 별개의 섬이 존재하여, 후에 우산도가 죽서도이냐 독도이냐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특히 '울릉도 옆에 있으면서 사람이 사는 섬'의 경우 죽서도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아, 혹여 고지도에 관련된 문제를 접한다면 이를 알아두는 편이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이후의 한국/일본 문헌에서 독도의 명칭은 다양하게 표기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도(于山島), 안용복 관련 기록의 자산도(子山島), 성종시대의 삼봉도(三峰島), 정조실록의 가지도(可支島), 에도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마츠시마/송도(松島), 때로는 다케시마(竹島), 조선 말 고종이 말한 송죽도(松竹島), 대한제국의 석도(石島) 등등... 이 때문에 한국 측이 '이 섬은 독도다'라고 하면 지칭하면, 일본 측에서는 '이 섬은 독도가 아니다.'라며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대개 죽서도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 근대까지만 해도 국가에서 영토로 파악하는 범위는 호구의 거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고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를 정부 차원에서 명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1876년까지는 다케시마(竹島)가 울릉도였다는 것이다. 정작 독도는 마츠시마(松島)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9]
울릉과 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왜에서 송도라 부른다. 《만기요람》, 조선
일본에서 1박 2일 거리에 송도가 있고 다시 거기서 1일 거리에 죽도가 있어 고려가 보인다. 《은주시청합기》, 일본
한국 측 사료상에서 독도로 추정되는 섬에 대한 기록은 15세기 초엽에 처음 나타난다. 특히 조선 태종 치세에 이루어진 일련의 울릉도 쇄출 과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더불어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그 외의 섬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 것인데, 우산도라는 이름이 본래 울릉도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다소간 울릉도와 우산도의 구분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일본 측 사료상에서 독도로 확증되는 섬에 대한 기록은 17세기 중반에 처음 나타난다. 이는 오오야·무라카와 양 가문의 다케시마 즉 울릉도 출어 과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과 더불어 '마쓰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에 대한 인지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 위치나 거리 등의 표현에 따라 이것이 독도임을 부동의 사실로 확증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한국의 '우산도'와 일본의 '마쓰시마'로 인식되었던 독도의 존재는 17세기 후반의 쟁계 사건으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울릉도의 영유권을 두고 한국의 조선 조정과 일본의 쓰시마 번이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이 사건을 통해 이전까지 모호한 면이 있던 한국과 일본의 울릉도 인식이 완전히 정립되었는데, 이로서 한국은 울릉도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져 독도의 존재를 다시금 인지하였고 일본은 '다케시마'와 그 부속 도서인 '마쓰시마'의 영유권이 조선 측에 있음을 명확히 규정하였던 것이다.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Le Liancourt)가 독도의 바위로 인해 난파당한 뒤로, 독도는 리앙쿠르 락스(Liancourt Rocks)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이 현재까지 서양권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름으로, 여기에서 rocks는 암초(岩礁), 그중에서 수상암으로 섬보다 작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해면 위로 튀어나온 바위를 의미한다.[10] 일본은 이러한 정보를 받아들여 'Liancourt Rocks'를 리앙꼬루도 열암(リヤンコルド 列岩)이라 번역해 사용하기도 하고, ‘리앙크루’의 일본화 된 발음으로 ‘량코’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의 아르고너트호가 울릉도 측량 과정에서 위도경도 표기를 잘못 기재하고, 서양에서는 이걸 다시 일본 명칭과 대조하는 과정에서 동쪽의 다줄레(울릉도)를 마츠시마, 서쪽의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이것이 일본 해군성에 역수입되었다. 그런데 해군성을 제외한 원래 메이지 정부와 육군성은 여전히 에도 막부의 인식을 이어받아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츠시마라 부르고 있었다. 때문에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일본은 1880년 군함 아마기호를 보내 울릉도 명칭 등의 정확한 정보 확인에 나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울릉도의 원래 명칭이 다케시마=죽도=竹島 였음을 확인하고, 인근에 따로 “竹島“(죽도) 라고 불리는 소도가 있음을 보고하게 된다. 이러한 정보 보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명확하게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을 바로잡지 않았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령이 아닌 타국(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 명칭의 역사성과 정당성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훗날 일본이 독도를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비밀 편입 시도하려던 때에 그 이름을 지어 넣으면서 ‘원래 조선의 동쪽 해상에 마쓰시마와 다케시마라는 두 섬이 존재하는 것은 구전되어 내려오는 바이며....(중략) 종래 잘못 불려지던 명칭을 전용해서 다케시마라는 통칭을 새로운 섬의 이름으로 하고자 합니다’라는 오키도사의 보고를 일본 내각이 받아 독도의 일본 명칭을 다케시마(竹島)로 결정한 것도 위와 같은 이유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시마네 현 고시의 '무주지' 주장과는 달리 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석도"라는 이름으로[11] 독도를 근대적 영토에 편입한 바 있었고, 앞서 일본 스스로 1879년 태정관에서 처리한 문서에서 울릉도와 그 외 1도(독도)를 일본령에서 제외한 바 있었다.
여기서 ‘독도’란 명칭은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행동일지에 “리앙코루도 암,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쓴다”는 기록이 있어 이것이 한국인들이 부르던 고유 명칭임이 한일간 교차 증명되며, 그 어원이 현재의 돌(石)에 있다는 것과 최소 1895년 이전부터 한국인들 사이에 사용되어 명칭임을 민국일보 1962년 3월 19일 김윤삼 翁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1899년 일본 해군 발행 조선수로지 전라남도 소안항 조에 석도(石島)의 발음을 トヽクソム(도토쿠소무=>독섬)로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현재의 ‘돌’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이전의 ‘돍’으로 지역차를 두고 발음되고 있었음당시엔 표준어라는 개념이 없었음으로 [독] 발음을 사투리로 비하해서는 곤란함을 알 수 있다. 이에 니타카 호와 조우한 한인이 이를 한자 獨으로 표기해 일본인들에게 알려 주었고, 이 표기를 1906년 오키섬의 일본 행정관리들이 울릉도에 방문하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사용하고, 심흥택이 일본인들이 사용한 명칭을 그대로 공식문서에 옮겨 적으면서 독도의 한자 표기로 굳어지게 된다. 다만 진정한 독도의 주인울릉도민들은 1950년이 넘어서까지 '독섬'이라는 한자표기 이전의 고유발음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대한제국은 1906년에 이르러서야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 시도를 뒤늦게 전해받고 독도 점거에 대해서도 항의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미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준 식민지로 접어든 상태에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간주하여 조선총독부 치하로 파악하였고, 그 이전부터 대한제국은 1901년 9월 내부대신 이건하의 울릉도 관할 문서, 1902년 4월 내부의 ‘울도군절목’[12] 문서 등을 통해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 즉 행정 관할을 구체적으로 실행했다. 울도군절목 내용 중 출입하는 화물은 독도에서 잡은 강치를 포함한 일본인의 수출화물에 일종의 세금을 부과하는 근거가 되었다.[13]
이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독도는 다시 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3.1 역사적 논쟁점
3.1.1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은 독도인가?
- 본문보다 주석이 문제가 되는 경우다.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세종실록지리지》
- 일본의 가와카미 겐조는 세종실록이 고려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울릉도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우산도를 착오로 집어넣었다고 주장했으나 이 주석으로 논파 끝. 애초에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편찬 책임자부터가 동일인이다. 울릉도에 파견되어 주민의 쇄출을 집행한 김인우의 직함 또한 1차 쇄출(1416년)에서는 '무릉등처안무사'였다가, 3차 쇄출(1423년)에서는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바뀐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두 개의 섬'을 인식했음은 분명하다.
- 그는 또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려면 130m 이상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울릉도는 안개가 잦고 삼림에 덮여 있으므로 오르기 곤란했다고 주장하였다. 근데 울릉도 성인봉의 높이는 무려 984m고, 나리분지만 해도 250m에 달한다. 게다가 『고려사』에는 1157년에 이미 명주도감창 김유립이 울릉도 정상에서 사방을 답사한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 이렇게 가와카미 겐조가 논파당한 뒤, 일본의
새로운 독도침탈땡강 전위대장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 다케시마문제연구회 좌장은 오히려 가와카미 겐조가 '울릉도와 독도가 서로 보인다'는 전제에 사로잡혀 잘못된 주장을 했다고 비판팀킬하고, '울진현에서 맑은 날에 울릉도와 죽서도의 두 섬을 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문장에 '相(서로)'이라고 하여 두 섬의 관계임을 명시한 데다가 죽서도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울릉도에 가려서 울진현에서 안 보인다.
또한 일본이 저 죽도는 울릉도 옆에 붙어있는 관음도나 죽도라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맑은날에만 보이지만 관음도나 죽도는 언제나 보인다. 생각해보면 정말 간단한 문제였던 셈이다
刷出空其也, 麟雨言, 土地沃饒, 竹大如柱, 鼠大如猫, 桃核大於升, 凡物稱是
사람들을 쓸어 내보내 비웠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토지는 비옥하고, 대나무는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만하고, 복숭아씨가 됫박만 한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세종실록 지리지
- 이것은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독도에서는 대나무가 자라지 않고 쥐는 살지 않으며, 복숭아가 자라기 힘들고 토지는 척박하기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3.1.2 은주시청합기 해석
- 은주시청합기는 1667년 은주(隱州) 지방 번사 사이토 호센이 남긴 책인데, 독도를 직접 기록한 일본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게 보낸 외교 공문에 이 저서를 언급하며 '17세기 부터 일본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자료로 사용하려 했으나 실제 내용을 살펴보면,
此二島無人之地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見高麗如 雲州望隱州
(이 두 섬에서) 고려[조선]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然則 日本之乾地 以 此州 爲限矣
그러한 즉 일본의 땅은 이 주(州, 앞 문단부터 언급된 은주)로 한계 삼는다.
- 로 오히려 '17세기 부터 일본은 독도를 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말았다.
- 현재 일본 외교부 독도 사이트에서 은주시청합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3.1.3 안용복 진술의 신빙성은?
안용복의 업적이 영유권 분쟁에 크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여긴 일본측은 다양한 방법으로 안용복의 진술과 행적을 부정해 왔다.
1. 안용복은 범죄자임으로 그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 論
안용복은 불법 도항과 관리 사칭의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울릉도 쟁계 이후 울릉도-독도의 영유권 확보에 공이 있음이 인정되어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 안용복을 범죄자로 취급한 바로 그 조선 정부에 의하여, 그의 진술은 신빙성 있음이 확인되었음으로, 안용복이 범죄자임을 탓하려면 '안용복은 범죄자이나, 진술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일관성 있는 논리이다.
2. 안용복은 막부의 서계를 받은 바 없다 論
안용복이 에도 막부로 부터 받았다가 대마도주에게 빼앗긴 '울릉도-독도는 조선령'이라는 서계는 안용복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유감스럽게도 안용복이 서계를 받았다는 이 주장은 어린이용 위인전 정도나 제외하고 한국측 연구자도 인정하지 않고있다. 사실 조선정부도 믿지 않았다.
안용복을 심문한 유일집(兪集一)은
"근년 동래에 봉사(奉使)했을 때 안용복을 추문(推問)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호키주에서 준 은화(銀貨)와 문서를 쓰시마 사람이 겁탈했다.” 했는데, 이번 그가 호키주에 정문(呈文)한 데에는, “쓰시마 사람이 2천 금(金)으로 나를 속(贖)바치고 본국(本國)에 내보낸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 은은 본국에서 받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전후에 한 말이 매우 어그러집니다. 또 쓰시마는 본디 속은(贖銀)을 와서 거둔 일이 없고, 임술 약조(壬戌約條)도 비밀에 관계되는데, 안용복이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왜인은 모두 죽도(竹島)가 호키주의 식읍(食邑)이라 하므로, 안용복이 한 번 말했다 해서 조선 땅이라 쾌히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안용복의 정문 가운데는 울릉도는 본국 땅이라고 여러 번 말했으나, 왜인이 문답한 문서와 안용복을 내보낸다는 문서에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들 은 매우 의심스러우니, 다시 핵사(覈査)해 실정을 알아 낸 뒤에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3. 안용복은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과 마주친 적 없다 論
안용복의 1696년 왜인을 만났다는 숙종실록의 기록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안용복의 신빙성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며 부정하였으나 1월 28일에 이미 막부가 도해금지령을 내렸음으로, 그 해 5월에 안용복 일행이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을 만났다는 진술은 허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어업 중이던 일본의 두 가문에게 도해금지명령이 전달된 것은 그 해 8월 1일의 일이라는 것을 나이토 세이츄 교수가 발견한 당시 돗토리번 공식일지인 히카에쵸(控帳)에 기록됨으로써 안용복의 진술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런데, 2005년 겐로쿠 각서에는 자산도=송도가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안용복이 송도에 오게 된 이유를 '영주에게 소송하기 위해서'라고만 쓰여있지, 왜인이 또 울릉도에 어업을 하고 있는걸 보았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이케우치 사토시를 비롯한 일본 학자 및 일부 한국 독도연구가들도 안용복의 진술에 회의적인 방응을 보이고 있다. [14] 이는 여전히 한,일간 논쟁중이다.
다만 안용복이 "일본의 마츠시마가 곧 자산도로 조선의 영토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실제 1696년 안용복이 울릉도에 가서 일본인을 만났냐와는 것과 별개로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고, 이것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자산도'를 일본인이 말하는 '송도'라고 명확히 기록했는 데다, 일본 문서(겐로쿠 각서)에서도 확인되었으므로 전근대 영유권 주장에서 한국 측이 한 발 앞서나가게 되었다.
겐로쿠9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에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언급이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江原道(カンヲンダウ) 此道ノ中ニ竹嶋松嶋有之.
* 강원도 안에 다케시마와 마츠시마가 있다安龍福申候ハ竹嶋ヲ竹ノ嶋と申朝鮮国江原道東莱府ノ内ニ欝陵嶋と申島御座候是ヲ竹ノ嶋と申由申候則八道ノ図ニ記之所持候
* 안용복이 말하길, 다케시마를 다케노시마라고도 한다. 조선국 강원도 동래부 안에 울릉도라고 하는 섬이 있으며, 이를 다케노시마라고 하는 까닭에라고 말해, 팔도지도에 기록해 이를 소지하고 있다.
松嶋ハ右同道之内子山と申嶋御座候是ヲ松嶋と申由是も八道之図ニ記申候
* 마츠시마는 상기한 도(道) 중에 자산이라고 하는 섬이며, 이를 마츠시마라고 하는 까닭에 이도 팔도지도에 기록했다고 말했다.
3.1.4 기타 쟁점
- 고지도상의 우산도는 독도인가?
- 조선시대 제작된 여러 고지도에 나오는 우산도가 현 독도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이는 위성, 사진 기술, 근대적 측량 기술이 부족하고, 현대인과 인식체계도 사뭇 달랐던 시대에 제작된 고지도를
구글 지도에 익숙해진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읽으려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논란이다. - 예를 들어 1530년에 제작된 「팔도총도」의 우산도는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졌기 때문에 독도가 아니라거나, 1711년 박석창이 보고한 「울릉도도형」 울릉도 바로 옆에 그려진 '소위 우산도(所謂 于山島)'는 해장죽전(海長竹田)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죽서도라는 식의 도맷금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이 보유한 수 많은 독도 관련 사료를 트집잡아 무용한 것인 양 만들려는 일본 측의 전략적 폄하에 기인한 면이 크다.
- 그러나 실제로 고지도의 해독은 매우 고차원적인 일로 「울릉도도형」 '소위 우산도'의 경우 죽서도보다 남쪽인 저전동(현 저동) 저동항보다 더 남쪽에 그려져 있고, 1937년 그보다도 더 남쪽인 도동에서 발견된 수토관 박석창의 묘방(정동쪽) 각석입표를 고려하면, '소위 우산도'는 현 울릉도 동남쪽의 독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참조
- 또한 「팔도총도」의 경우에도 지도를 실제 제작한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울진 정동쪽 바다에 우산-무릉 이라는 두 개의 섬이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문자 정보만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섬이 더 육지에 가까이 있는지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섬의 위치를 울진 동쪽 바다에 나란히 임의로 배치시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팔도총도」 이 후, 자료의 축적에 따라 우산도의 위치가 현 독도의 위치로 점차 이동하게 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 실제 고지도는 이러한 미비함과 난해함 때문에 국제법정에서도 판결에 직접 인용되는 경우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고지도를 직접 인용하여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그 고지도가 해당 분쟁에 직접 활용되는 경우[15] 등에 한한다. 또한 자국의 영토에서 누락시킨 지도의 증명력보다 타국의 영토로 표시한 지도의 증명력을 더 높이 평가[16]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 혹은 민간의 지도보다 정부 공인-공식 지도의 영향력을 더 높게 평가한다. 이러한 조건에 가장 잘 부합하는 고지도는 예는 태정관지령문에 첨부되었던 기죽도약도이다.
- 시마네현 고시는 없다?
- 일본은 독도의 영토편입을 시도했다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문서가 1945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며 원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서는 시마네현 청에서 지방 촌 사무소로 배부된 사본 중 남아 있는 것을 수거한 것으로 알려졌다.[17] 이에 대해 사본에 시마네현 지사의 날인이 없고, 내부용도로 사용되는 '회람' 도장이 찍혀있는 등의 근거로 애초에 고시문은 완료되지 못한 것이라는 추정과 고시(널리 알림)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했다는 반증이라는 의견이 있다.
- 하치에몬 사형 이후 설립된 도해금지 팻말
- 1837년 2월에 에도 바쿠후의 명령으로 다카다번이 니가타현 지역 해안가에 세운 도해금지령 팻말에 있는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독도 중 어느 섬을 지칭한 것인지 논쟁이 있다. 팻말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이번에 하치에몬이 다케시마(竹島)에 도해한 사건을 검토한 결과, 오른쪽의 섬(右島)은 겐로쿠 시대부터 도해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항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이 오른쪽 섬(右島)을 '죽도(당시 울릉도)', 독도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할 것인지 엇갈리는 것이다.
- '오른쪽 섬(右島)'이 울릉도를 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팻말의 왼쪽으로 문장을 연결하는 구조 상 최초 등장한 '죽도(竹島)'에 대한 지칭대명사로 '오른쪽 섬(右島)'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음으로, 이는 '오른쪽에 지칭 한 섬', 즉 죽도=울릉도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입장이다. 반면 독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向後 右島之儀も 同様相心得 渡海致間敷候(향후 오른쪽 섬도 같음을 명심해 도해하지 않도록)'의 문장을 근거로 여기에서 지칭된 오른쪽 섬은 'も(~도)'가 붙어있고, 바로 앞문장에 울릉도가 도해금지 된 이력을 말하고 있음으로 '울릉도의 오른쪽 섬', 즉 독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 이 팻말은 2010년에 한국인 사업가가 구입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 해당 문서 참조.
4 독도 관련 조약
4.1 울릉도 쟁계: 일명 안용복 사건
1693년부터 1697년까지 조선인 안용복(安龍福)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도항하여 울릉도-독도가 조선령이라 주장한 여파로 조선-일본 간 벌어진 외교전 끝에, 울릉도-독도에 대한 영유권이 조선에 있음을 양국 간 확인한 사건이다.
사건의 자세한 내역과 요지는 희생과 고난으로 독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안용복 에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과의 쟁계 내역이 명확함에도 일본측은 이 건을 덮고, 억지쓰고, 축소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유는,
첫째, 국제법상 영유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국가간 조약' 즉, 역사적 근거나 실효지배가 아무리 명확하다 할지라도 양국이 합의하에 영유권을 결정한 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울릉도 쟁계는 울릉도-독도의 영유권을 조선-일본 간 정식 협상을 통해 확인한 사건으로 그 국제법적 영향력이 매우 심대하기 때문에, 일본 측으로서는 어떻게해서라도 그 내역을 무마하고 잊혀지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요인으로 작용해 온 것.
둘째, 조선-일본 간 울릉도-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이 이미 숙종시대에 있었음을 인정한다면, 일본측이 주장하는 이른 바 '1952년 평화선 설정=결정적 기일'論 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국제법정이 울릉도 쟁계를 결정적 기일 사안으로 판단하면, 일본으로서는 쟁계의 결론인 울릉도-독도가 조선령으로 결정되었다는 결론을 다시금 받아들여야 하고, 일제시대 잠시 간의 독도 지배를 합법적 실효지배로 인정받아 독도의 영유권을 획책하려는 전략에 타격이 불가피해 지는 것.
셋째, 울릉도 쟁계 중 조선-일본 간 오갔던 서계 중엔 아직까지 독도(당시 일본명 송도)가 명시된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 측은 울릉도 쟁계는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포기였을 뿐, 독도는 무관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애초 울릉도 쟁계의 원인이 되었던 무라카미-오오타니 가문의 죽도-송도도해면허(송도 도해면허는 실물 미확인) 취득 과정을 보면[18] '竹島之內松島(울릉도 안의 독도)', '竹島近邊松島(울릉도 가까운 변두리의 독도), '竹島近所之小島(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로 표현하고 있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인식하였고, 도해면허는 외국에 도항하기 위한 용도로 발급하는 것으로 독도 또한 일본 입장에서 외국으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안용복 또한 "강원도 안에 죽도와 송도가 있다(江原道(カンヲンダウ) 此道ノ中ニ竹嶋松嶋有之)" 등을 명백히 고지한 사실이 있고, 에도 막부가 쟁계의 사실 확인을 위해 톳토리번에 보낸 질의서에 울릉도와 독도를 둘 다 언급하였으며, 톳토리번은 '죽도, 송도는 물론 그 밖에 부속된 섬은 없다'며 두 섬 모두 일본에 속한 적 없음을 답변하였다.
훗날 1869년 일본 외무성과 태정관은 '죽도와 송도가 조선부속이 된 시말' 보고를 명했으며, 1877년 태정관지령에서는
울릉도 외 1도(竹島外一嶋) 지적편찬건, 1692년(元禄五年) 조선인 입도 이래(朝鮮人入嶋以来) 조선과의 외교교섭 결과(政府該国ト往復之末), 울릉도 외 1도(竹島外一嶋)는 일본땅이 아님(本邦 關係無)을 유념할 것(心得事)
이라 하여 독도를 '외 1도'로 울릉도 부속섬 취급하고, 그렇게 된 사연의 유래가 안용복 사건임을 재확인하였음으로 울릉도 쟁계에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섬으로 자연 포함되어 있음이 명확하다 할 수 있다.
넷째, 울릉도 쟁계 이래로 조선-일본 양국이 울릉도-독도 두 섬을 인식하고, 그 영유권에 대해 다룬 것을 인정하면 현재까지 일본이 주장하고 있는 독도의 무주지론(無主地論)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울릉도 쟁계의 결론이자, 그 증거로 하치에몬 사형사건, 태정관지령문, 18~19세기 무수히 제작된 독도=조선령 지도 등이 존재했기 때문에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시도 근거인 무주지론은 영토 침탈을 위한 고의적인 기만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이를 회피하려면 일본은 울릉도 쟁계 자체를 덮고, 억지쓰고, 축소하고, 망각하게 노력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4.2 대일강화조약: 일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해당 문서 참조
4.3 독도 밀약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협정 전에 일본과 독도에 관한 비밀협정을 맺었다고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고 한다.
1. 독도(다케시마)는 앞으로 한일 양국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고, 동시에 이에 반론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2. 장래에 어업구역을 설정하는 경우 양국이 독도(다케시마)를 자국 영토로 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3. 현재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의 건축이나 증축은 하지 않는다.
4.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켜 나아간다.
다만 관련 당사자 모두는 밀약의 존재를 부정한다. 밀약이니까 일본 정부에서는 이 밀약의 존재를 부인으로 일축했고 영토문제를 밀약으로 거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발표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같이 과거에 행한 수많은 밀약은(...) 이 밀약은 증거가 남아있지 않고 증인들의 증언으로 재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밀약은 독도가 이미 완전히 한국 영토인데도 일본과의 영토 분쟁을 협정으로서 허용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있다. 후술하는 어업 협정과는 성격이 다른데, 이는 영토 주장을 묵인한 것이기 때문. 월간중앙에서 보도하였다.#
이후 김대중 정부 때 외환위기로 차관이 궁했던 것 처럼 당시 정권의 경제성장을 위해 차관 6,600만불을 일본으로부터 받아오기 위한 밀약이라고 주장되지만 같은 해 1965년 6월 경에 미국이 한-일 독도 공동 영유를 설득했다는 기밀 문서가 나온 것으로 보아 녹록치는 않았던 듯. 미국의 기밀 문서에 의하면 한-일 공동 등대를 건설하는 등 공동 영유권을 설득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축했다고 전해진다.
4.4 한일어업협정 논란
파일:Attachment/독도/a0041278 4dc3ed435b643.jpg
양국의 주장 EEZ가 겹친다
IMF 직후 급하게 국제사회에서 차관을 빌려야 하는 김대중 정부 하에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기존의 한일 어업 협정을 파기하자 동해에 해양 순시선을 배치하여 양측이 서로 상대방의 어선을 나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심지어 국내 어선이 일본 해양순시선에 그대로 들이받혀 침몰하기도 했다.
이 어업협정은 사실 김영삼, 김대중 두 정부에 걸친 산물이다. 1997년 7월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을 울릉도로 하겠다는 발표를 했고 1997년 10월 당시 김영삼 정부는 잠정공동수역안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하기로 일본과 합의했다. 잠정조치수역은 독도 중간수역이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이어받아 대화퇴 어장 등, 독도와 전혀 상관없는 쪽의 협상을 진행했다. 참고기사 참고기사2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이 문제가 되는 점은 독도가 일종의 "중간수역"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주장하는 독도 기점 EEZ와 일본에서 주장하는 독도 기점 EEZ에서 겹치는 부분이 중간수역으로 정해진 것. 이 협정에 대해 '독도는 명확한 한국령인데 무슨 조치이냐', '일부라도 독도 관련 권리를 내준다는 것이 향후 영유권 문제에 불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반응이 들끓었고, 어민들은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2001년과 2009년 두차례에 걸쳐서 "이 협약은 어업과 관련된 분야만을 정의하기 때문에 이 협약이 영토권을 침해한 것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실제로 1982년 해양법에 관한 UN 협약의 제58조 제3항을 보면, 배타적 경제수역은 경제 주권으로서의 영해적 수역이면서 공해적 수역이기도 하다.
다만, EEZ를 완전한 공해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서해, 동해에서 주변국과 EEZ로 관련되는 상황에서, 국가의 이익한계선을 단순히 공해로 생각한다면, 한 국가의 경제주권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영토는 12해리 영해를 가지지만, 모든 영토가 200해리 EEZ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EEZ 등을 표기한 지도를 보면 중간수역 가운데 울릉도 주변 12해리가 동그랗게 비어있다. 영해에서 해당 국가는 모든 활동의 독점권을 보유하며, EEZ에서는 해당 국가는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데, 보통은 어업권을 보유한다.
이에 관해서는 세계적으로 여러가지 분쟁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세기부터 지속된 영국과 아이슬란드 간의 대구 전쟁이 있다. 아이슬란드의 EEZ를 보면 그만한 섬들이 EEZ의 기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국제법상으로는 섬을 사람이 거주하며 경제활동이 가능한 섬(island)과 그렇지 못한 암초(rocks)로 구별하며, 전자에 대해서는 EEZ가 인정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EEZ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독도는 EEZ 기점'이라고 하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독도본부 등에서는 "독도는 사람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국제법상으로도 훌륭한 유인도이므로 울릉도와 같은 대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독도는 국제법상 섬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근데 여기 지금은 공무원 살고있음
현실적으로 볼 때는 만약 중간 수역을 정하지 않고 울릉도와 오키섬 기점으로 EEZ를 절반으로 분리 시 독도는 대한민국 단독의 EEZ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대화퇴 어장 등 수자원이 풍부한 독도 동쪽 지역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명분과 실리 중 한쪽은 잃을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IMF를 맞았던 당시 상황상 대외 차관 문제가 걸려 있어 강경 드라이브를 걸기 힘든 면도 없지 않았다. 결국 협상의 장기화를 막기위해 현재 독도의 국제법적 지위를 그대로 건드리지 않고 어업에만 협정의 효력을 한정하기로 했다.
- 제 15조 : 이 협정의 어떠한 규정도 어업에 관한 사항외의 국제법상 문제에 관한 각 체약국의 입장을 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된다.
또한 협정의 만료일을 3년으로 정하고, 그 이후에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넣었다.
- 제16조 2항 : 이 협정은 효력이 발생하는 날부터 3년간 효력을 가진다. 그 이후에는 어느 일방체약국도 이 협정을 종료시킬 의사를 타방체약국에 서면으로 통고할 수 있으며, 이 협정은 그러한 통고가 있는 날부터 6월후에 종료하며, 그와 같이 종료하지 아니하는 한 계속 효력을 가진다.
따라서 2016년 현재 일방의 의지만으로 어업협정은 파기가 가능하다.
5 독도 문제가 중요한 이유
이 작은 섬이 이렇게나 큰 논란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섬이 가지는 역사적 상징성이다.
일단, 한국에서는 독도를 제국주의 시절 일본에게 강탈당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제국주의 시절 점령했던 영토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역사 자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일본 제국주의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실제로 제국주의 마수를 처음으로 뻗치던 첫 땅, 러일전쟁 당시 첫 거점 바로 독도를 노린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본은 러일 전쟁 당시 독도를 임시등대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를 몸으로 겪어보지 못한 신세대들의 반일 감정은 많은 경우 이 문제에 기인한다. 한 설문 조사에선 과거사 문제와 근소한 차이로 2위를 했을 정도. 그만큼 한국인들이 독도 문제에 민감하다는 말이다. 일기 예보나 세계 지도에도 다른 자잘한 도서 지역들은 무시하면서 독도만은 표기 하는건 이것 때문이다. 한반도기도 다른 섬은 다 안그려놓으면서 울릉도와 독도 만큼은 그려놓는다(....) 그렇지만 사실 울릉도 독도보다 사람이 많이 살고 중요한 섬은 너무 많다!!
반면에, 일본에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독도와 제국주의 문제는 관련없는 것으로 본다. 일본 측의 입장은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기 전, 그리고 1905년 시마네 현에 편입되기 이전에 독도는 한국이 지배한 적 없는 무주지(無住地)였다고 본다. 또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러스크 서한에서 확인되었기에, 한국을 식민지화한 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독도는 무주지다 선포한게 아니다. 러스크 서한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그렇게 해석된다고 일본이 주장한 것.
전후, 러스크 서한에서 미국이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19] 이승만은 이승만 라인으로 알려진 평화선을 설치해 독도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의 사상자가 나왔고, 이로서 '한국의 독도 무력점거'의 근거가 생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 측은 한국이 독도와 연관되어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것을, 과거사를 아무런 관련 없는 쟁점에 이용해서 외교적 이득을 취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도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일본의 고의적인 오해에서 비롯된다.
즉,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제국주의 역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고, 독도 영유권과 제국주의 역사는 관련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인 일수록 제국주의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한국 입장에서는 독도는 1905년 이전에도 한국의 근대적인 지배권이 미치고 있던 땅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해야만 이러한 오해를 풀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우리 땅이니까 우리 땅이라는 단순한 주먹구구식 논리가 아니다. 실제로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열을 올리면서도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근거가 뒷받침하지 못하는 주장은 제 3자 입장에서는 선동일 뿐이고, 세계 무대에서 선동에 대놓고 넘어갈 만큼 녹록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행동은 오히려 역효과만 잔뜩 부채질할 뿐이다. 국내에서도 논리싸움에서 깨지고 일빠로 전향한 사람이 소수지만 존재한다. 인조이재팬이 존재했을 당시에 특히 두드러졌던 부류이고 지금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다.
독도는 분명 한국의 소중한 영토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큰 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강요하기만 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이든 일본을 비롯한 외국 사람이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것에 대해서 잘못된 사실을 알고 있거나 명확한 근거를 요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감정적으로 몰아붙이기보다는 제대로 된 근거를 통해 명확하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훨씬 이득이다. 어려울 것도 없다. 지금 보고 있는 나무위키의 독도 관련 문서에 수록되어 있는 정도만 대략적으로 알아놓아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해명하기에는 충분하니 참고하자.
요즘은 이에 발맞추에 논리적인 비판 내용을 담은 독도 대중서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호사카 유지 현 세종대 교수가 쓴 '우리역사 독도'. 김경진이 쓴 소설 <독도왜란>도 마지막권 후반부에서 상당한 쪽수를 소모하여 이 부분을 한일 양국의 네티즌들이 토론하는 모습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결과는 철저한 논리와 역사적 사료로 인해 일본 넷우익의 참패/자폭.
가수 김장훈과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문제를 일본에 제기했던 호사카 유지 교수가 함께 독도 전문 사이트를 개설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국어를 지원한다. www.truthoftakeshima.com라는 주소도 2012년 8월 확인 결과 http://www.truthofdokdo.com/ 로 리다이렉트 된다.
- 독도에 군대가 주둔하지 않는 이유
2011년 8월 14일,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가 울릉도에 해병대 1개 중대를 배치시키고 1달에 1개 소대씩 독도 순환 근무를 실시하자는 제안을 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군부대가 배치 되면 분쟁지역화를 공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지금껏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상 독도 문제는 국내 정치용 떡밥으로 위치가 커져있기도 하고. 다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꾸준히 근거자료는 확보하는 것이 좋다.
5.1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문제
일본 :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계속 우기는 거 보기 싫으면 국제사법재판소를 가자!한국 : 우리가 왜 가야 함? 우리 땅인데 왜 재판소를 가야 됨? 미쳤냐?
일본 : ICJ로 가서 재판 받으면 승패소 여부에 상관없이 승복할게!
한국 : 그럼 최근에 ICJ가 니네들 고래 잡아먹지 말라고 판결한 건 왜 항소했음?
일본 : 아몰랑 다께시마 우리땅!
일본은 계속해서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국제법으로 해결을 보자고 도발을 하고 있다. ICJ에 자국적 재판관이 있고 일본이 ICJ에 독도를 제소해서 최소한 손해볼 일이 없고 표면적인 명분상으로도 그럴듯 한 일이다. 물론 고유영토를 아무런 이익이 없는 ICJ 제소에 동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외교라는 게 무엇인가? 철저히 감정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국가의 실익을 위해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ICJ에서 승소하게 된다 쳐도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얻는건 실질적으로 일본의 도발차단[20]과 국민적 자존심 상승 뿐이다.
그러다 만약 "ICJ에 제소했다가 만에 하나 패소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후술될 홍승목 외교관의 사례를 봐도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ICJ 제소가 이득이 될 이유는 전혀 없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깟 로비 자금이 아까워서 우리의 영토를 판돈으로 거는 행태인 셈이다. 독도가 대한민국에서 가지는 지정학적, 상징적 가치를 생각해 보면, ICJ 제소를 추진하는 정치 세력에게는 대다수의 국민이 등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ICJ의 강제관할권을 유보했기 때문에 ICJ는 임의로 독도문제를 재판할 수 없으며 결론적으로 한국의 동의가 없는 이상 ICJ제소는 불가능하다. 독도를 ICJ 제소하기 이전에 센카쿠 열도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방침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ICJ 제소는 그냥 도발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단 대한민국이 독도를 실효지배 하는 이상 지나치게 민감하고 감정적인 대응으로 심한 분쟁화를 야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독도가 분쟁 지역이 되는 것 자체가 일본의 전략이기도 하거니와, 대한민국은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영토분쟁에 관한 국제 해양법 재판소에 강제관할을 유보하였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제소에 동의하지 않는 이상, 독도 문제는 국제 해양법 재판소에서 판단될 여지가 없다.
덧붙여 대한민국은 1991년 국제사법재판소 가입시 강제관할권을 유보해 우리가 소에 불응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도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이걸 유보하는 동안에는 다른 영토 분쟁에 대해서도 대한민국도 독자적으로 국제 해양법 재판소에 제소가 불가능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도 실효지배가 유지되고 현실적으로 독도를 능가하는 영토 분쟁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만약에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영토에 관한 문제일 가능성은 적다.
따라서 현재 당장 우리나라가 국제법을 활용해서 재판을 해야할 필요성은 최소한 2014년 현재 기준으로는 없다. 추후에 중국과는 간도, 일본과는 대마도가 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실익이 적거나 거의 없다.
다만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는 분쟁에 대해 UN은 국재사법재판소를 통해 해결할 것을 권고할 수 있는데 소설 「독도 인 더 헤이그」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일간에 무력충돌을 빚고 국재사법재판소로 가는 가정을 담고 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도 이러한 가능성을 제기한적이 있다.
적어도 현재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 독도의 영유권이 갑자기 일본에 넘어가는 일은 없으니 냉철한 사실관계에 근거한 주장, 홍보를 떠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으로 분쟁화를 유도하는건 삼가는 것이 좋다.
강제관할권을 인정하는 일본은 한국과 중국에게 강제관할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만에 하나 이를 한국 정부가 인정하더라도 일본이 강제관할권을 인정한 날짜 이전의 문제에 대해서는 강제관할권의 적용을 면피했기 때문에 독도문제의 강제관할권 역시 적용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뭐가 됐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의 일방적인 제소는 절대 불가능하다. 일본 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참고로 2015년 현재 국제사법재판소의 일본 국적 재판관은 나루히토의 장인 오와다 히사시로, 무려 일본 황실의 인척이다. 그리고 2015년 현재 중국과 러시아 국적 재판관도 실존한다.
5.2 홍승목 전 외교관의 독도영유권 대담
1996년 6월 14일 홍승목 前 외교관은 당시에는 외무부로 불렸던 부서인 외교부에 근무하던 중, Mr Thierry Mormanne(티에리 모르만)라는 프랑스 국제법 학자와 독도 문제에 대해서 대담을 나눈 적이 있다. 여기서는 독도가 1905년 이전 한국령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외한 주요 대담만 소개한다. 전문
단, 홍승목 전 외교관은 이것은 개인 입장일 뿐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내용을 보면 적절히 역지사지식으로 상대방을 압박하면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여담으로, 티에리 모르만은 타카다 마코토하고 아래의 대담을 했는데... 이 인간이 하도 아래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하는 등 설득력 없는 설득을 엄청나게 남발하자, "내가 사람이랑 말하는지, 돼지새끼랑 말하는 지 모르겠다."라고 비아냥댔다.
- 독도 관련 자료? 그런 거 없다
- 모르만: 일본에서 독도 영유권분쟁을 연구 중이다. 일본 측의 자료는 충분히 연구하여 그 입장을 잘 알고 있으나, 한국 측의 시각은 일본의 자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입장을 직접 듣고 싶어서 왔다. 학자들과도 대화를 나누었지만, 당신을 만나보라는 권고를 받았는데 시간을 내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가능하면 영문으로 정리된 자료를 구하고 싶다.
- 홍승목: 구하는 영문 자료는 없다. "독도문제는 일본의 주장에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입장이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외국인을 위한 홍보자료는 만들지 않은 것 같다.
- 모르만: 이해할 수 없다.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뜻인가? 한국의 입장을 구두로라도 설명해 줄 수 있는가?
- 홍승목: 1965년 한ㆍ일 기본협정 체결 회담 이래 지난 30여 년 간 한국 측의 입장은 "국제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너무나 당연히 한국의 영토이므로 사소한 트집에 대꾸하지 않는다."는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나는 사항에 대해 '개인적' 시각으로 답해 줄 수는 있다.
-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이유? 그런 거 없다
- 모르만: 일본은 독도분쟁을 재판으로 해결하자고 하는데 비해, 한국은 이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분쟁을 국제재판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일본의 입장을 한국은 왜 거부하나? 단적으로 한국이 법적으로는 자신이 없다는 증거가 아닌가?
- 홍승목: "일본은 재판에 의한 해결을 희망하는데 한국은 이를 반대한다."는 인식은 상당히 왜곡된 것이다. 일본 정부의 홍보를 듣는 기분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이하 ICJ)에 가자고 했고 한국은 이를 거부했을 뿐이다. 즉, ICJ라는 특정의 법정에 가는데 대해 이견이 있었을 뿐이다.
- 모르만: 한국은 ICJ에 가는 것을 거부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인가?
- 홍승목: 물론이다. 아마도 ICJ에 가더라도 한국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두 가지 특별한 이유로 ICJ에 가야만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승산이 있다고 보아 ICJ를 고집하는 것이고, 한국은 굳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면서 ICJ에 갈 이유는 없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선 일본은 "ICJ에 의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면서 중국과의 '댜오위다오 (釣魚島, 조어도) 분쟁', 즉 일본인들이 말하는 ‘센카쿠 열도 (尖閣列島, 첨각열도) 분쟁’은 ICJ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 일본의 이중잣대
- 모르만: 실효적으로 일본이 점유하고 있으니 반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 홍승목: 자기네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경우에는 재판에 갈 수 없고, 상대방이 실효적 점유를 하는 경우에만 재판에 가자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비슷한 문제를 두고 일관성이 없는 것이 좀 수상하지 않은가?
- 모르만: 일관성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상대방이 점유 중인 독도 문제는 ICJ에 가져가지 못하면서,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센카쿠 열도 (尖閣列島, 첨각열도) 문제만 ICJ에 가져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ICJ에 가지 않으려는 점에서 한국도 일본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 홍승목: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그렇다면 소위 러시아와의 북방 영토 문제에서는 러시아가 해당 섬들을 점유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적극적으로 ICJ에 가자고 해야 할 텐데, 오히려 러시아가 적극적이고 일본은 러시아의 제의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 모르만: 사실이다. 무슨 이유라고 보는가?
- 홍승목: 간단하다. 일본은 ICJ에 판사가 있는데 한국은 없으니, 한.일간 문제는 ICJ에 가는 것이 명백히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ICJ에 각각 판사를 두고 있으니 일본이 ICJ에서 아무런 이득을 기대할 수 없고, 이득 없이는 ICJ에 못 가겠다는 것이다. "ICJ에 가면 불공평하니까 못 가겠다"는 한국과, "이득 없이 공평한 조건으로는 ICJ에 못 가겠다"는 일본이 어떻게 같이 취급될 수 있는가?
- 모르만: 흥미 있는 관점이다. 일본이 ICJ를 고집하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했는데 나머지 한 가지는?
- 홍승목: ICJ의 보수적 성격상 ‘구시대의 악법’이라고 할지라도 명백히 무효화되지 않은 이상 그 타당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법’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독도편입 조치는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일환이며, 이는 당초부터 무효"라는 것이 한국의 입장이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를 영토로 편입한 조치는 식민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내심으로는 보수적인 ICJ가 적어도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 당시에는 식민주의에 의한 조치도 합법이라고 판단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은 ICJ가 "식민주의는 법적으로 무효"라는 확인을 받기 위해 독도를 판돈으로 내 걸 생각은 없다.
- 독도는 대한민국 영토니까 한국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 모르만: 조그만 섬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양국간에 독도문제가 돌출되면 일본의 언론은 비교적 냉정을 유지하는데 한국의 언론과 국민은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 홍승목: 일본의 언론이나 국민이 냉정할 수 있었던 것은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자기네 정부의 주장이 무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말하는 소위 북방 영토와 관련하여 유사한 상황이 벌어져도 일본의 언론이나 국민이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히려 러시아 국민이 냉정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 때 "러시아 국민은 점잖은데 일본국민은 왜 이렇게 신경질적이냐?"고 물어 볼 것인가? 일본이 3개 영토문제중 독도 문제에 한해서만 재판(ICJ)에 가자고 요구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당초부터 일본의 영토가 아니니까 패소해도 잃을 것은 없고 어쩌다가 이기면 순이익이라는 계산 때문이다. 한국을 식민 지배했으니 자료입증 측면에서도 월등 유리한 입장이고… 그러나 소위 북방 영토나 센카쿠 열도 (尖閣列島, 첨각열도) 문제에서는 패소하면 낭패라고 생각하여 감히 재판의 위험부담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도문제에 관한 한, 일본으로서는 일종의 부담없는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진정으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정신을 존중한다면 먼저 북방 영토 문제나 센카쿠 열도 문제를 ICJ에 가져가는 것을 보고 싶다. 일본이야말로 ICJ에 가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이유도 없는데…
- 모르만: 일본은 그렇다고 치고, 그래도 한국의 언론이나 국민이 그렇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제3자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솔직히 "자신이 없으니까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외부의 시각이 있는데…
- 홍승목: 독도문제를 단순한 영토분쟁으로 인식하면 그런 의아심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본다. 하나의 조그마한 무인도의 영유권 문제이니까… 실제로 일본국민 입장에서는 조그만 무인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비교적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고… 그러나 한국국민에게는 독도가 ‘주권과 독립의 상징’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20세기 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 때 제1단계로 1905년에 독도를 빼앗고, 그 5년 후에 제2단계로 나머지 전국토를 빼앗아 식민지화를 완성하였다. 일본이 "다케시마(竹島, 죽도)는 일본영토" 운운하는 것이 한국국민에게는 "너희는 아직 완전히 독립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우리의 식민지이다. 제2단계에서 식민지로 된 땅이 해방된 것은 인정하지만 이에 앞서 식민지가 된 독도를 언제 해방시켜 주었느냐. 아직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모욕을 받고 냉정해질 수 있겠는가? 독일이 지금 와서 프랑스더러 "파리가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것은 인정해 주겠지만, 알자스, 로렌은 돌려받아야 하겠어. 파리가 점령되기 전에 이미 독일이 점령한 것이잖아!" 한다면 프랑스 국민이 점잖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재판으로 해결하는 게 좋겠어" 라고 할 수 있을 지 궁금하다.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가 아니었다
- 모르만: 한국은 일본의 ‘1905년 영토편입조치’가 무효라고 주장하지만, 독도가 1905년 이전에 이미 한국의 영토라는 근거는 충분한가?
- 홍승목: 한 가지 물어보자. 일본의 주장대로 독도가 1905년까지는 주인 없는 땅이었을 가능성이 정말 있다고 보는가?
- 모르만: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 홍승목: 참으로 식민주의적인 발상이다. 20세기에 와서 태평양의 외떨어진 곳에서 "새로 발견된 땅"이라면 몰라도 한ㆍ일 두 인근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고 이미 수 세기 전부터 한ㆍ일 양국 국민이 그 섬의 존재를 잘 알면서 그 부근에서 어업을 해 왔다면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영토라고 보는 것이 상식 아닐까? 1905년에 정말 무주지였다면 영국이든 러시아든, 아니면 쿠바든 이디오피아든 아무 나라나 먼저 독도를 자기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다는 논리인데… 타당한가? 만약에 이러한 나라가 20세기에 독도를 무주지라고 선언하면서 ‘영토편입’ 조치를 했으면 과연 일본이 이를 인정하였을까?
- 모르만: 인정하기 어려웠겠다.
- 홍승목: 두 나라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일본의 입장은 "1905년에 독도는 ‘임자없는 땅’이었으므로 어느 나라든 선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한국의 입장은 "1905년에 이미 인근국가인 한․일 양국 가운데 한 나라가 영유권을 확보하였을 것이므로, 양국 중에서 과연 어느 나라의 영토였는지를 확인해 보면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입장은 서구의 식민주의 개념에 따른 것이고, 한국은 식민주의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독도의 지리적 위치와 규모를 감안할 때, 독도에 관한 기록이 한국이나 일본의 영토에 속하는 다른 유사한 섬에 대한 기록의 수준에 이르면 일단 독도는 무주지는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의 경우 영토에 속한 섬은 별도의 이름을 가진 것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른다. 그런데 독도는 조그마한 무인도로서 그 자체의 경제적 가치는 거의 없는데도 영유권을 입증할 역사적 기록은 다른 유사한 섬에 비해 비교적 풍부하다. 이것만으로도 무주지의 논리는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 1905년을 기준하여 일본이 한국보다 더 강하게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있는지를 한ㆍ일 양국의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판정하면 되는 것이다.
- 모르만: 1905년 일본의 영토편입 조치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 홍승목: 아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인데 "전혀 없었던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식민주의에 입각한 영토편입 조치에 대해 "법적 효과"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독도를 무주지라고 선언하여 "그 때까지는 자기네 영토가 아니었던" 점을 명백히 한 것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없었던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 모르만: "일본에게 유리한 것은 인정할 수 없고 한국에게 유리한 것만 인정해야 한다"는 뜻인가?
- 홍승목: 이상한 질문이다. 간단한 비유를 들겠다. 협박이나 사기로 남의 집을 뺏은 경우에 법적으로 소유권 취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당초부터 범죄행위도 없었던 것으로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범죄행위의 동기도 있을 것이고... 요컨대, 불법행위에 대해 법적 효과를 부여하지 않아야 하지만, 불법행위 자체나 그 동기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모르만: 결국 한국의 입장은 "독도는 1905년에 이미 일본이나 한국 중에서 한 나라의 영토라고 보아야 하는데, 일본은 무주지라고 하여 자기네 영토가 아니라고 인정했으니까, '반사적으로' 한국영토라야 한다."는 것인가? 1905년에 이미 한국영토였음을 한국이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일본의 고유영토설
- 모르만: 일본은 독도가 "1905년 편입조치 이전부터 일본의 고유의 영토이고 1905년에는 시마네 현에 편입시켰을 뿐" 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 '고유영토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홍승목: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자 더 큰 거짓말을 해서 어려움을 모면하려는 유치한 발상이다. 더욱이 그 거짓말끼리 서로 모순되니…
- 모르만: 매우 강한 어조인데 상세히 설명해 줄 수 있나?
- 홍승목: ‘고유영토설’이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과거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효력에 의문이 생기자 종래의 ‘영토편입설’을 보강하기 위해 갑자기 지어낸 것이다. 이웃사람이 어느 날 "고아를 발견하였기에 내가 데려다 키우기로 했다."고 하다가 나중에 강도유괴 행위가 발각되자 "그 아이는 전부터 내가 키우고 있던 아이"라고 떼를 쓴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어처구니는 없지만, "꼭 그렇다면 "전부터"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인가, 어떻게 입증되는가, 이미 키우고 있었다면서 왜 새로 데려왔다고 했나" 등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닌가? 일본이 1905년에는 독도가 '무주지'라고 하면서 영토편입을 했다가 이제 와서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언제부터' 일본 영토라는 말인지, 주장 근거는 무엇인지, 1905년에는 왜 '무주지'라고 선언했는지, 일본에 돌아가면 문의해 보라. 아마 아무런 입장조차 없을 것이다. 독도에 관한 일본측의 최초의 기록은 1667년의 '온슈시초고끼(隱州視聽合紀, 은주시청합기)'인데 "울릉도,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일본측의 사료에 울릉도ㆍ독도가 기록되었으니 자기네 영유권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프랑스도 미리부터 조심하는 게 좋겠다. 일본 책에 ‘프랑스의 파리(Paris)’라는 기록이 많을 텐데 언젠가 일본이 "파리가 일본 책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일본의 영토라는 증거"라고 우길 때가 올 지 모르니…
- 모르만: 1905년에 분명히 '무주지'라고 하면서 '영토편입' 조치를 했나?
- 홍승목: 1905년 일본내각이 독도에 관해 채택한 결정의 요지는 "영토편입을 하라는 어느 개인의 청원을 접수한 것을 계기로 … 검토한 결과 타국의 영토라고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되어 … 국제법에 영토편입으로 인정될 조치를 한다."는 것이다. 자기네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밝혔다. "영토편입 청원"이라든가 "타국의 영토라는 증거" 운운, 그리고 "국제법상 인정될 조치"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한국의 영토"인줄 너무나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무주지라는 표현조차 차마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던 한국의 영토를 강탈하면서 편법상 무주지 취급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정말로 무주지로 인식하여 영토편입을 하는 경우에는 이해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나라에 사전 통보한 후 편입하거나, 적어도 관보에 게재하여 나중에 문제가 대두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독도에 대해서는 가장 가까운 나라로서 긴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라인 줄 알면서도 한국에 대해 편입조치를 숨겼고, 한국이 알게 될까 불안하여 관보게재도 피하였다. 도둑이 물건을 훔쳐가면서 주인이 알지 못하도록 조심하는 것과 같다. 편입조치를 한국에 숨기려다 보니 일본국민조차 그 사실을 잘 몰라서 편입조치 후에도 독도를 계속 한국의 영토로 표시한 일본사료가 발견된다. 이제 와서 식민주의가 힘을 잃고 1905년의 영토편입 조치로는 통하기 어렵게 되고 오히려 "1905년까지 영유권이 없었다"는 불리한 증거가 되니까 '고유의 영토' 라고 한다. 자기 영토를 왜 새로이 자기 영토로 편입해야 하는지, 자기 영토를 처리하는데 왜 국제법이 거론되는지 도무지 설명을 하지 못한다. "고유" 라는 것이 언제부터인지도 말 못하고 … 입증할 수가 없으니 말할 수가 없지. 거짓말이 힘을 잃자 새로운 거짓말을 꾸몄는데, 앞의 거짓말과 모순되면 "먼저 한 말은 틀렸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텐데, 뒤에 한 말이 거짓인 줄 드러날 경우에 대비해 "어쩌면 앞에 한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라고 한다. 지난 40여 년 간 독도문제에 관해 국제적으로 일본이 자기의 일방적 주장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한국은 입다물고 조용하게 지켜보기만 했는데도 워낙 (일본의) 주장이 약하니까 국제적으로 수긍을 받지 못하고 있다.
- 다케시마와 마쯔시마
- 모르만: 변방 섬의 이름이나 크기, 위치가 정확하지 못한 것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다케시마(竹島)'와 '마쯔시마(松島)'가 가리키는 섬이 중도에 서로 바뀌었다는 이론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 홍승목: "러시아의 지도제작자가 착오로 이름을 서로 바꾸어 붙인 것이 계기가 되어 두 섬의 이름에 혼란이 왔고 궁극적으로는 이름을 서로 바꾸게 되었다."는 주장인데,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물론 독도가 자기네 영토가 아니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고...
- 모르만: 방금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고 설명하지 않았나?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는데...
- 홍승목: 바뀌는 배경이 전혀 다르다. 혹시 자녀가 있나?
- 모르만: 있는데...
- 홍승목: 만약 지나가는 사람이 착각하여 당신 아이와 옆집 아이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면 당신 아이의 이름을 버리고 옆집 아이의 이름을 쓰겠는가?
- 모르만: 아하,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러니까 일본이 "유럽의 지도제작자의 실수를 계기로 하여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두 섬이 모두 자기네 섬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뜻이 아닌가?
- 홍승목: 백 번 양보하여, 두 섬이 모두 자기네 섬이었다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약간은 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울릉도가 한국의 섬인 것을 명백히 인식하면서 독도와 그 이름을 서로 바꿔치기 한 것은 확실히 독도도 한국의 영토인 줄 알았거나, 적어도 자기네 영토는 아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것 아닌가? 자기네 섬의 이름과 외국 섬의 이름이 서로 바뀐 것을 보면 항의하거나 기껏 무시해 버리는 것이 상식일텐데... 일본은 왜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몰상식하여서..." 하면서 스스로를 폄하하는지 모르겠다.
- 모르만: 아무래도 일본이 영유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서양식 국제법이 도입되기 전에는 영유의식이 없이 한ㆍ일 양국 어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해 온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떤가?
- 홍승목: 개인이든 민족이든 심지어 야생 짐승도 경쟁자와 만날 때 본능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분명하게 하려고 한다. 이렇게 하여서 장차 일어날지도 모를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유독 독도에 대해서만 양국이 명시적인 합의도 없이 영유의식을 기피했다는 가정에는 찬성할 수 없다. 안용복 사건만 해도 영유권 침해를 느끼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의식의 자연적인 발로라고 본다.
- 모르만: 장시간 자세한 설명에 감사드린다. 이제 한국 측의 시각을 상당히 이해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 자신의 견해를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글로 발표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연구를 하다가 의문이 생기면 다시 찾아와도 좋은가?
- 홍승목: 솔직히 귀하의 전문성에 대단히 감명받았다. 제 3국의 학자한테서는 기대하지 않던 대단한 수준이다. 어쨌던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대화였다. 오늘처럼 예고없이 찾아오면 시간을 내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사전에 연락만 해주면 기꺼이 맞겠다. (대담 끝; 기록 - 1996년 6월말)
5.2.1 보론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이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열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자고 제안한 것을 계기로 독도와 센카쿠 문제를 혼동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칫하다간 일본의 독도 국제분쟁화 전략에 말릴 우려가 있다며 두 사안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인 오해는 '일본이 독도는 ICJ 제소를 추진하면서 센카쿠 열도의 경우에는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이 '독도를 둘러싼 영토 갈등이 없다'고 강조하듯 일본도 '센카쿠 열도에는 영토 갈등이 없다'고 비슷한 주장을 하는 걸 보고 일본도 센카쿠 제소를 거부하리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조차 최근까지 '일본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진실'이라는 인터넷 자료에서 '일본은 중국과 대만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 제도 등에 대해서는 ICJ 회부를 거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적어놓았을 정도로 이런 오해는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 러시아와 달리 1958년 ICJ의 강제관할권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ICJ 규정 36조 2항의 '선택조항 수락 선언'에 동의했기 때문에 이 조항에 동의한 국가가 제소하면 소송에 응할 의무가 있다. 다만 실효 지배 중인 센카쿠 열도에 대해 먼저 나서서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따름이다.
센카쿠 문제에서 소송을 꺼리는 쪽은 오히려 중국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섬의 영유권 갈등에 제3국이 개입하는 걸 우려해 영토 문제에서 철저히 양자간 해결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독도 문제에 끼어들지 않는 건 이 점과 관련이 있다.
마잉주 총통의 최근 주장은 실제로 제소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대만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일본은 쿠릴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에 대해서도 1970년대에 ICJ 제소를 제안한 적이 있다. 여러 차례 소송 경험도 있어서 ICJ 제소에 관한 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사실 일본은 1956년 유엔에 가입하기 2년 전인 1954년에 ICJ부터 가입했고, 그후 곧바로 한국에 독도 문제를 ICJ로 가져가자고 제안했을 만큼 집요하게 독도의 ICJ행을 추진해왔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지난 6일 '일본이 모르는 10가지 독도의 진실' 수정판을 올리면서 '일본이 센카쿠 제도 등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거부하고 있다'는 부분을 삭제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독도와 센카쿠 열도, 쿠릴 4개섬 문제는 역사적 배경이나 국제 정치적 맥락이 모두 다르다"며 "센카쿠 열도 사안을 참고할 수는 있지만 우리 입장이 중국이나 대만과 다르다는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리하자면, 일본은 강제관할권을 수락했기 때문에 상대국이 ICJ 제소를 하는 경우 반드시 재판에 회부되게끔 되어 있으므로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좋든 싫든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최소한 러시아나 중국이 ICJ제소에 일본보다 적극적이라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러시아가 ICJ제소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물론 현재 쿠릴 열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단락은 반론이라고 제목이 달려 있었으나, 이런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만약 홍승목 외교관이 일본이 표면적으로 주장하는 취지를 그대로 따라 저런 답변을 했다고 한다면, 일본이 ICJ 강제관할권을 수락하였고, 중국이 ICJ제소를 꺼리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 내용만으로는 반론이라고 보기 어렵게 된다. 이 기준이라면 일본이 센카쿠 열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과 무관하게, 중국이 수락하든 말든 중국에게도 ICJ제소를 주장하는게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잉주가 ICJ 제소를 주장했을 때, 일본이 이를 쉬쉬한 것을 현재 센카쿠 열도를 실효 지배 중이라서 그랬다고 해버린다면, 일본이 표면적으로 주장하는 "우리 영토임은 확실하나, 국제적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ICJ에 가자"라는 주장의 일관성은 반드시 깨지게 된다. 이런 모순점은 홍승목 외교관이 마잉주의 발언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음에도 정확하게 짚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소한 외교관쯤 되는 사람이 일본이 ICJ 강제관할권을 수락했는지 여부를 모를리가 없지 않는가
참고로, 2012년 현재 강제관할권을 수락한 국가는 유엔 가맹국 193개국 가운데 67개국이며,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네시아 등 126개국은 수락하지 않았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서도 영국만 수락했을 뿐 미국, 중국, 프랑스, 러시아는 수락하지 않았다.
6 일본인들의 독도 인식
한 미친 일본인의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것을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주장하는 한국어 블로그. 빡침주의. 이 블로거는 731 부대관련해서도 어그로를 끌고 있으며, 유튜브에서는 한국인과 키배를 벌이고 있다. 할짓이 그렇게 없나 보다.
비슷한 주장이 있는 페이스북 동영상.(삭제됨)
주로 일본에 갔다와서 일본인들과 대화한 사람들이 "어, 내가 독도에 대해서 물으니까 일본인들은 그게 뭔지도 모른다던데? 그러니까 공연히 독도 얘기 꺼내지 말고 가만히 있자."라고 인터넷에서 말한 내용이 일반 대중들에게 퍼졌다. 이 말은 2000년대 초반까지는 어느정도 맞는 말이었으나 2016년 현재, 지금은 결코 아니다.
우선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일본인들은 대체로 '조용한 일본인'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일뿐 모르는게 아니다. 즉 일본인 개개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적/외교적 이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특유의 사회상 때문이지, 일본인들이 무슨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바보들이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며, 따라서 일본 특유의 조용하고 침착한 사회상의 겉면만 보고, 무작정 일본인들이 독도나 쿠릴열도등 정치/외교적 이슈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건 너무 이르다는 것.
요즘의 일본인들은 독도에 대해서 결코 모르는 게 아니다. 그리고 독도(다케시마)는 엄연히 일본의 고유 영토이며, 한국이 이를 불법 점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특히 2011년부터 일본의 모든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내용이 들어간다.
쓰시마 섬에 한국인 자본이 들어와 토지 몇 곳을 사들이자, 화들짝 놀란 일본 정부는 한국과 중국 자본이 일본의 부동산을 쉽게 사들일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고 말았다. 일본에 대해서 흐리멍덩하고 안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가 공연히 뒤통수맞는 일은 없도록 하자.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후로 거의 모든 일본인이 독도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대통령 이름도 모르거나, 대서양이 캘리포니아 방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 성인들과 같이 정치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물론 과거에는 한일간의 독도에 대한 인식에는 온도차가 다소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일본 우익들의 떡밥 공작이 점차 결실을 거두고 있는 중. 장기 불황과 쇠락에 따른 우경화와 함께 일본인들의 독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달라져 있다는 점을 유념하자.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최소한 정신은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 일본 정치권의 입장
보수적인 자민당은 물론이고 아시아 외교를 중시한다는 일본 민주당도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다. 그나마 일본 내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일본 공산당조차, "독도(다케시마)는 일본의 고유한 영토지만, 한일 우호를 위해서 한국에 양보하자."라고 할 정도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게 대부분의 일본인들의 공통된 믿음이다. 그렇다고 독도가 한국영토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일부 소수의 시민들과 시민단체들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독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상당한 양의 공부가 필요하다. 당장 한국인들도 독도가 당연히 우리땅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역사적, 지리적, 법적 근거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평범한 일본인들은 독도 문제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이 일본 정부가 자기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니 그런가보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몇몇 일본인들이 공부를 충분히 해서 독도가 자기네들 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도 일본 내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양심이 필요할 것이다. 즉, 양심과 용기와 지식을 모두 가진 사람만이 독도는 한국땅임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다시 말해서, 일본 내에서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은 마치 한국에서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최근 일본 민주당의 도이 류이치 중의원이 독도는 한국의 영토라는 한일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가, 일본 내에서 빗발치는 혐한초딩들의 여론의 질타에 못 이겨 결국 사퇴한 일을 보면 지금의 일본인들이 독도에 관심이 없다거나 모른다는 생각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주한일본대사관 홈페이지엔 다케시마는 일본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점령했어요 X징징이라고 표기해놨고, 일본어 위키백과 대한민국 문서에도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표시되어 있다.
일본인들이 소위 다케시마 문제에 민감한 이유는 일본에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이 붙은 섬이 여러 개 있기 때문이다.[21] 일본 위키피디아에만 6개가 등재되어 있는데, 크기도 다양해서 독도보다 조금 더 큰 무인도가 있는가 하면 섬이 꽤 커서 주민도 여럿 살고 심지어 놀이 공원도 있는 섬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다케시마는 아이치현 가마고리시 다케시마초에 있으며 한국인들도 자주 관광을 가서 그런지 시 홈페이지에 한글 서비스도 된다. 때문에 다짜고짜 다케시마는 한국 땅이라고 하면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지는 것 같으니, 독도라는 섬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해주자.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 말하는 일본 소녀를 칭찬했던 이유
- 센카쿠 열도와 쿠릴 열도
재미(?)있게도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와 쿠릴 열도에 대한 일본 공산당의 입장은 여느 우익단체 이상으로 강경하다. 특히 북방 영토에 대해서는 이른바 4개 도서 뿐 아니라 쿠릴 열도의 모든 섬을 반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를 물러터졌다고 질타할 정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독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건… 자기들도 뭔가 찝찝하다는 생각을 하는 걸까?
실제로 그동안 방송된 일본의 국영 매체인 NHK 라디오 뉴스를 들어 보면, 대만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센카쿠 열도나 러시아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쿠릴 열도 문제에 비하면 독도 영유권 문제는 상대적으로 적은 비중으로 다뤄 왔었다. 그냥 지나가듯이 한 번 '다케시마'라고 한 마디 언급하는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나마 NHK한국어 뉴스가 좀 더 길게 다룬다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역시 짤막한 단신이었다. 더군다나 프로그램 전체의 길이는 일본어로 제공하는 뉴스 쪽이 더 길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로 존재감 없는 비중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만한 게 제대로 된 명분도 없고 실제로 얻을 가능성도 없으며, 현실적으로 한국이 실효 지배를 하고 있고 일본이 자국의 영토라고 제시할 만한 근거도 제대로 없는 독도보다는 일본이 실효지배하는 센카쿠 열도같은 쪽이 훨씬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 막장으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조차도 독도는 냅두고 센카쿠 열도에 올인하자는 말을 할 정도이니...
더군다나 뉴스 자체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면, 일본 고딩 사이에서 독도에 대한 인지도가 형편 없이 낮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듯하다. 그래서 산케이 신문에서 이걸 떡밥으로 삼는 것이고, 우익 단체에서 교과서를 통해 홍보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등으로 인해 독도가 일본 내에서 큰 이슈로 부상하면서 NHK 뉴스에서 다뤄지는 비중이 좀 더 높아졌다. 물론 전체 뉴스 중의 비중은 얼마 안 되기는 하지만...
6.1 독도 관련 최근 일본의 행보 (2008~ )
자세한 자료와 진행상황은 위키백과의 문서들을 참고하는 편이 낫다.독도 독도 분쟁
2008년 7월 14일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을 교과서에 명기하기로 하면서 정부의 대일외교 전략에 뒤통수를 쳤다.
2009년 12월 24일. "일본 정부는 25일 오전 독도 영유권을 명기한 고등학교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를 발표할 예정"이었는데, 하루도 안 돼서 독도 관련 부분을 빼버렸다. 그런데 은근히 말을 돌려서 자기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항목이 있다.
2010년 3월 30일, 일본이 초등학교의 모든 사회과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도록 한 사실이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링크 4월 8일엔 그 전까지 독도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히토야마 총리가, 갑자기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해 더 큰 논란이 발생할 듯하다.참고
2011년 3월 26일 일본 문부과학성에서는 다음날인 27일 오후 3시에 '교과용도서 검정조사심의회'를 열어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독도는 일본땅 이라는 항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2011년 3월 30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교과용 도서 검정조사 심의회를 열어 독도 영유권 주장을 기술한 중학교 사회교과서 12종의 검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일본의 대재앙으로 간만에 조성되었던 우호적 분위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1년 3월 31일 일본 외상 마쓰모토 다케아키는 독도가 미사일 공격을 받을 경우 일본 영토가 공격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서경덕 교수의 2011년 4월 9일 미투데이에 따르면 일본 학생들이 트위터와 미투데이를 동원해 '다케시마는 일본 땅' 주장을 더 알리려 한다고 한다.
2011년 4월 일본 극우들은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여 한국인들의 재해 성금 모금 열기가 식어버린 소식을 접하고는 "독도 실효지배를 강화하려는 한국에 맞서 국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한국의 일본 대지진 피해 복구 지원을 거부하거나, 권철현 주일 한국대사의 일본 정부요인 면담을 거부해야 한다"는 개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산케이 신문에서 국경선을 그려보게 하는 조사를 한 결과, 일본 고교생의 9.3% 정도 만이 독도와 울릉도 사이에 선을 그었다고 한다.
2011년 8월 1일, 일본 자민당 의원들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면서 입국을 시도했지만, 정부에서는 당연히 입국불허. 일본 정부에서는 입국불허 조치에 대해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식의 개소리를 했다.개의 입이 더 불쌍하다 자기네 땅인데 허가를 왜받아
2011년 8월 2일 일본은 방위백서에서 독도를 일본영토로 명기하고 관할하는 자위대는 해상자위대의 마이즈루 지방대라고 명시하였다. 이놈들이 진짜
2011년 8월 2일,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기하며 역사왜곡을 일삼던 일본 자유사의 역사교과서가 다른 교과서의 연표를 표절했음이 드러나 망신을 당했다. 참고로 이 교과서는 일본 정부의 검정을 통과했다. 교과서 검정을 발로 하나 보다
2011년 니코니코 동화에 日本の高校生が作った竹島問題検証動画が凄すぎる, 일본 고교생이 만든 다케시마 문제 검증 동영상이 굉장하다라는 영상이 정치 카테고리 1위를 달성했다. 물론 그 실체는 철저히 혐한적인 시각으로 작성된 넷 우익의 개드립.
2011년 유투브에 독도는 한국땅이란 홍보 영상을 올렸다가 엄청난 반대수를 얻은 영상이 있다고 한다.
2011년 대한항공이 A380 정식 투입에 앞서 독도에 시범비행을 했는데, 일본이 비난을 하면서 희대의 외교분쟁이 시작되었다. 이건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문서를 따로 만들 정도로 내용이 긴 편.
2012년 3월 26일 극우단체 회원으로 추정되는 자 3명이 주일 한국대사관에 몰래 '독도는 일본땅' 이라는 높이 90cm 말뚝을 박고 도망쳤다. 이 말뚝은 바로 뽑아 처분했다지만 이것을 세운 극우단체는 한국 대사관 앞에 '다케시마 비'가 설치됐다면서 사진 등을 인터넷에 유포시켰으며, 이것을 박는 동영상도 자기들이 찍어서 방송사에 보냈다.
2012년 4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집회가 열렸고 그 곳에는 일본 유력인사들이 참여를 해서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생떼를 쓰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평화헌법을 개정해서 한국과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발언했다. 아무래도 다시 전범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전쟁을 안 해서 몸이 근질거리는 건가?
2012년 9월에는 일본에서 '다케시마 쟁탈전'이라는 앱을 만들면서 엉뚱한 '다케시마'를 집어넣었다가 욕 먹고 내렸다.
그리고 2013년 2월 22일, 그 동안 시마네현 독립 행사였던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시마지리 아이코 해양정책·영토문제 담당 내각부 정무관을 참석시켜 국가 차원으로 인정한 공식 행사(또는 국경일)로 격상함과 동시에 국가적 영토분쟁으로서 정부와 국민 전체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 하여 한일간 독도 관련 외교분쟁이 재개되었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2013년 5월 21일, '다케시마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모임' 소속의 일본 학자들이 부산에서 회견을 갖고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독도 방문을 허가받았으나, 정확히 이틀 후인 23일에 울릉도 시동항 여객선대합실에서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사카모토 유이치라는 자가 갑자기 "독도는 한국땅이 아니다. 연구가 필요한 분쟁지역"이라고 개소리 발언했다가 경찰에 잡혔다. 사서 고생한다.
2013년 7월 일본 정부에서 독도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9할이 넘는 사람이 "독도를 알고 있다"고 답했고, 이들 중 6할이 넘는 사람이 독도를 일본 고유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고 답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2014년 1월 이젠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본격적으로 독도를 일본 고유 영토로 가르치시겠다고 한다. 교과서 지침으로 명기한다.
2014년 6월에는 사격훈련 해역에 독도 주변의 일본 영해가 포함됐다며 외교 루트를 통해 한국에 훈련 중지를 요구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상큼하게 씹어 주었다.
2014년 8월 24일, 일본 우익이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페이크고 사실 알고보니 일본영역참고도라는 일본 정부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인정하는 지도를 일본 우익이 알아서 발견해놓은 것. 이 지도에서 한국 땅이라고 명백히 표시해놓은 부분을 가지고 눈에 뭐가 씌였는지 일본땅이라고 하는 증거랍시고 내놓았다가 한국측 증거로 입수. 쉽게 말해 자폭했다.
2015년 1월 6일, 일본 정부에서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공식 쓰레기 홍보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왜저래 진짜 다음에는 일본해 홍보영상까지 올리겠다고 한다.
2016년 2월 22일, 일본 우익성향의 게임 개발팀이 제작한 '다케시마 탈환'이라는 게임도 출시되었다.쿠소게 확정
7 세계인들의 독도 인식
외국인들은 보통 "한국이랑 일본 사이에 무슨 섬이 있는데, 둘이 싸운다더라"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이 문제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며, 영토 분쟁 문제가 얽혀 있는 중국, 대만, 러시아 정도만이 암암리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CIA에서 발간하는 월드 팩트 북에서 독도는 '리앙쿠르 락스'로 실려 있으며, 한국에서 1954년부터 점유한 이래 영토 분쟁중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1900년대 이전의 한국의 독도 점유를 부정하므로 한국 측에 매우 불리한 의견이다. 미국에게 한국과 일본은 모두 중요한 동맹국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편만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관계를 중요시해야 하는 관계로 비겁한 대응인게 사실이지만.
한국 측 입장에서 감정적인 대응은 전혀 불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도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외국인들에게 알릴 필요도 분명히 있다.
한국은 보안상 이유로 서버가 국내에 있는 회사에만 지리 정보를 제공할 뿐 해외로는 지도 데이터를 반출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막고 있다. 이에 따라 구글, 애플 등의 외국 지도 제작회사들이 일본이나 중국의 지도 데이터를 따르기 때문에 동해를 일본해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는 일이 생긴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는 근시안적인 법 제도에 따른 폐해 중 하나.
2008년 7월 14일 미국에서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분쟁지역으로 표기를 바꾸었다. 이에 따라 표기를 리앙쿠르 암으로 바꾸려 했다. 사서 참고. 다행히 7월 31일, 놀랍게도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직접 지시해 1주일 만에 독도를 한국 영토로 교정했다. 그 전까지 한국과의 외교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던 거에 비해 너무 쉽게 해결되었고,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그리 나서서 일처리가 된 건 드물다고 한다. 저 건이 진행중일 때 한 개인이 나서서 움직이는데 정부는 뭐했냐며 크게 비난받았고, 해외에 자국을 알리는데 정부가 크게 원조를 하지 않는 부분도 비판받았다. 2ch와 인조이재팬의 혐한초딩들은 미국의 이 결정에 열폭.
다만 조지 워커 부시 전 대통령이 독도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 본인이 치르는 전쟁들도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모르는 판국에…. 사실 이런 류의 국제분쟁은 세계적으로 많고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이라도 다 알기에는 무리가 있다. 2008년 8월에 FTA관련으로 한국에 방한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상황이라 지시한 것을 가능성이 크다.
이 사건은 한국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독도 문제에 중립을 외치던 미국이 실제론 일본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라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22] 그러나 동시에 일본 역시 이 사건에 대해 패배감을 느낀 듯 하다. 일본은 일본대로 '한국이 반발한다고 그렇게 쉽게 한국 요구를 다 들어주냐?' 라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직 일본 외무성 관료 마고사키 우케루는 이 같은 미국의 조치에 일본 정부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던 것을 '다케시마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 역사적 실수 [1]라고 까지 규정하며 비판하고 있다.
2012년 3월 22일 NYT(뉴욕타임즈)에서는 독도와 관련된 광고를 싣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미 국립지리원은 독도에 대해서 한국 영토임을 표시하고 있으며 독도를 부르는 다양한 표기(리앙쿠르 락스, 다케시마 등)에 대해서도 한국 영토를 가리키는 표현임을 명시하였다. #
한편 위키백과도 살펴볼 만한데,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판 등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그들 입장에서) 중립성을 위해 문서 제목을 '리앙쿠르 암초'로 하고 있다. 반면 중국어, 광동어, 고전 중국어판에서는 문서 제목으로 '독도'를 쓰고 있다. 그리고 폴란드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판에서 역시 문서 제목을 '독도'로 해두고 있다.[23] 특히 폴란드어와 체코어판에서는 우측 정보표 중 영유국 항목에 오로지 한국만 적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라는 명칭은 오직 일본어판에서만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
8 한국 정부의 대응
8.1 현 대한민국 정부의 기본 입장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입니다.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 주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에 나가겠습니다.
당연한 내용이다. 한 줄 요약: 어차피 우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
이 부분은 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독도 관련 발언 내용을 다루고 있다.
8.2 참여정부 (2003~2008)
- 다케시마 발언
2004년 한일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다케시마 문제를 묻는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겠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독도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한국 정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런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재론하지 않겠다 이런 정도로 말씀을 드리겠다." 라고 언급하였다. 일본인 기자가 "다케시마"란 이름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한국의 대통령이 "다케시마"로 대답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 강경한 대응
노무현 대통령의 2006년 독도연설.
노무현 대통령의 2006년 실제 연설 장면.
2011년에 뒤늦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2006년 4월 "만약 일본 탐사선이 독도에 접근하게 되면 바로 공격하여 당파[24]시켜라!"라고 해양경찰청에 비밀지령을 내렸던 사실이 알려졌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사실상 전군을 지휘하는 통수권자이자 국토관리를 지휘하는 통수권자이니만큼 당시 현직 대통령이 이러한 비밀지령을 내린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에 해양경찰청도 비밀리에 이를 대비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및 각종 정부부처는 초긴장 사태였으며, 사고 직후 바로 구조를 위해 해양경비정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우리 어선과 경비정 그리고 일본측 쌍끌이어선과 경비정이 서로 배를 부딪히며 대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노무현재단에서 2006년 노무현 재임 당시 어록상에서 확인하였던 결과이며 당시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이 이같은 증언을 하게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노무현의 단호하고도 공격적인 입장에 일본 탐사선은 출발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한국령임을 확실히 했다, 독도 수호의 강경한 기조를 보여주었다며 호의적으로 보는 의견이 주류였으나, 일부는 대통령이 사적이 아닌 공적으로 그런 공격적인 발언을 하여서 외교관계에 마찰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 잘못하다간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불똥이 튈 위험도 있었다며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또한 2006년 7월 5일에 한국 정부가 독도 주변 해류 조사를 감행한 것이 한일 양국의 체면 살리기용 물밑외교였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2011년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주한 미국대사관발 전문에 그 당시 외교부장관이었던 반기문과 버시바우 전 주한 미국대사간의 대화가 나와 있다.
한편 2011년 9월 2일 위키리크스에서 미국외교문서가 공개되었는데, 2006년 4월20일 미국부 극비문서에서 밝혀진 미일 외교관 면담 내용에 따르면 미국 주일 미대사 시퍼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외무성 사무차관 아래와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일본은 국제법의 허용범위 내에서 권리행사(독도 영유권 주장)를 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 비합리적(irrational)으로 행동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미친 짓(do something crazy)을 하거나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까 우려하고 있다"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양측이 한발씩 물러나야 한다" |
하지만 2006년 7월 3일자 전문에서 일본의 독도문제에 대해 미국이 개입해주기를 원한다는 요구가 묵살당한 것도 드러났다. 일본 외무성의 겐이치로 국장이 한국과 일본의 독도 갈등에 대해 미국이 중립적인 것에 실망했다고 하며, 미국 정부가 나서서 한국을 설득해 독도 주변 해양조사를 단념케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무시당했다.
오히려 당시 주일 미국 대사관은 일본 외무성에 자제력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참고로, 위의 글은 미국 대사 개인의 발언이며 아래쪽은 미국 대사관의 공식적인 입장.
2007년에 건조된 대한민국 해군의 신형 강습상륙함의 1호함이 이 섬의 이름을 따서 독도함으로 명명되었다. 이때 일본에서 항의했으나 당연히 한국은 상큼하게 씹었다.
8.3 이명박정부 (2008~2013)
- 지곤조기 발언과 논란
일본 정부의 다케시마 교과서 명기 발표가 있은 지 하루 뒤인 2008년 7월 15일에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당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후쿠다 총리가 "다케시마(독도)를 (교과서 해설서)에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후술하겠지만,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고 답변했다는 기사가 요미우리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청와대와 일본 외무성은 이 보도가 사실무근이라고 발표했다.
청와대는 이명박 대통령은 후쿠다 총리에게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어나가는데 그런 일[25]은 벌어져선 안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청와대 측은 독도 문제가 국제영토분쟁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요미우리 신문에 대한 법적 조치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외무성은 두 정상이 요미우리 보도 내용과 같은 대화를 나눈적이 없으며, 다케시마 명기 문제는 요미우리가 보도한 9일(회담일)에 결정되지 않았으며, 15일날에 와서야 결정됐다고 요미우리 보도를 부정했다.
2009년 한국 시민 소송단 나라사랑 시민모임은 이에 요미우리 신문을 상대로 허위 사실 보도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아사히 신문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있었음을 들며 당시 보도 내용이 사실임을 주장하는 서면을 2010년 3월 법원에 제출했다. 이 서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후 네티즌들의 반응. 요미우리의 기사 원문과 이 기사의 신뢰성에 대한 자세한 해설.
이 소송은 원고인 시민단이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로 법적인 피해를 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에 2010년 4월 7일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또한 재판부는 청와대와 일본 정부의 발표를 근거로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소송단은 행정 소송을 포함한 추가적인 수단들을 강구해서 계속 보도의 진위 여부를 캐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2010년 10월 6일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국민 개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항소를 기각했다. 또, 재판부는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가 허위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정했다.
이 보도가 논란이 되었던 당시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앞 글자만 딴 지곤조기가 인터넷 상에서 유행어처럼 번져나갔다. 인터넷 쇼핑몰에 등장한 지곤조기 머그컵 초창기에는 反 MB정서나 민감한 독도 문제 때문에 논란거리로서 퍼졌지만, 사건이 발생된 후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적절하게 쓰일 수 있는 어감 때문에 널리 퍼진 듯하다.
이 문제는 2012년 2월 19일 경향신문은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미국외교문서를 통해 지곤조기 드립이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그 내용은 2008년 7월16일 강영훈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은 교과서 문제에 대해 이 대통령이 후쿠다 총리에게 hold back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또 2008년 한·일 정상회담 직후 외교전문을 인용해 주한 일본대사관의 정치참사관이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보다 '두꺼운 피부'를 가져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소한 트러블[26]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위키리크스 원문
위키리크스 한글 - hold back 부분은 원문과 병기했다.
(C) On July 16, ROK Embassy First Secretary Kang Young-hoon told Embassy Tokyo political officer that Tokyo's July 14 decision to include its claim to the disputed Liancourt Rocks (named Takeshima by Japan and Dokto by South Korea) in an educational manual used by junior high school students was "very, very serious," "enormous," and "explosive." Following efforts made by new ROK President Lee Myung-bak to put aside the contentious historical differences that have plagued ROK-Japan relations, Kang said Seoul officials felt a sense of "betrayal," particularly after Lee directly appealed to PM Fukuda to "hold back" on the textbook issue at their bilateral summit on the margins of the Hokkaido Lake Toya G8 meeting. (기밀) 7월 16일 주일 한국 대사관 강영훈 1등 서기관은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상에 분쟁이 있는 리앙쿠르 바위[27]를(일본은 다케시마로 칭하고, 남한은 독도라 부른다) 일본의 영유권으로 포함 시킨 일본 정부의 7월 14일 결정은 “매우, 매우 심각하며,” “엄청나고,” 또한 “폭발력”있다고 주일 미국 정치 담당관에게 말했다. 한·일 관계를 괴롭히던 논쟁있는 역사 인식의 차이를 제쳐놓으려는 한국의 새 대통령인 이명박의 노력이 이어진 후라, 한국 정부 관리들이 “배신감”을 느꼈다고 강 서기관은 말하면서, 특히 홋카이도(北海道) 도야코(洞爺湖) G8 정상회의 한켠에서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 후쿠다 야스오 총리에게 “hold back”해달라고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부탁을 한 이후라 더 그렇다. |
그러나 '기다려 달라'의 원문 표현인 hold back은 자제해 달라, 그만둬 달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과거 논란을 잠재우는 결과를 낳았다. 공개된 문서 상으로 볼 때, 이명박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진행하고 'hold back'해달라고 발언했음에도 일본이 교과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을 등재하기로 하여 한국 정부 관리들이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 주요 내용. 2008년 이명박 정권은 대북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 '실용 외교'를 제시하는 한편, 한-미-일의 공조에 더 노력하였다. 그러한 온풍 기조를 말하는 듯. 하지만 4 ~ 5월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방침을 놓고 이미 독도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도 했다. 경향신문 등의 보도와는 달리, '자제하다'로 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
"지금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독도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부적절하니 뒤로 미뤄달라"는 발언이었다고 본다면 이전의 '지곤조기' 논란과 같은 수위의 도마에 올릴 수 있겠지만,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면 독도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강경해지는 한일 정부의 입장을 볼 때 이 해석은 무리수에 가깝다.
일본의 독도 망언이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한국 정부의 정책 기조, 국민 교육, 국민적 감정 등이 강경해지는 것은 말 안 해도 잘 알 만한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은 2008년 4 ~ 5월 이미 독도 교과서 문제를 터뜨리기 시작해 논란이 되었고, 6월에는 센카쿠 열도 문제가 터지면서 간접적으로 외교적인 경각심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동기상으로 볼 때 한국 정부는 당연히 일본 정부에 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했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이 친일적이다'라는 이유로 '기다려 달라'라는 발언이었다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국의 대통령이 개인적 성향 때문에 양국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를 땡처리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애초에 '지곤조기' 발언이 퍼진 것도 '다른 건 몰라도 독도 문제만큼은 계속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발언했다'는 것 때문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즉 한국 정부의 입장과 국민적 정서가 독도 문제에 대해 굉장히 민감했고 강경 대응을 원했음을 생각해보면 자제하라라고 말했을 동기가 훨씬 강하다.
게다가 원문에는 Lee directly appealed to PM Fukuda to "hold back", 즉 직접적으로 hold back해달라는 의사를 표현했다고 나와 있다.
만약 hold back이 "기다려 달라"의 뜻이라면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은 사정상 안 되겠으니까 터뜨리더라도 나중에 터뜨려 달라"라는 의미로 "기다려 달라" 고 강하게 요구했다는 뜻이 된다. 한국 대통령이 일본 수상에게 독도 문제에 대해서 뭐가 불리하길래 공식 외교석상에서 이렇게까지 발언했겠는가?
하지만 이미 "지곤조기"는 퍼질대로 퍼져버렸고, 다음에서는 국민일보의 "지곤조기"보도 기사에 무려 39만 6천개의 댓글이 달리기까지 했다. 자세한 건 문예춘추 참고.
2010년, 정부는 독도 영유권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2007년 작고한 백충현 교수, 그리고 최서면 석좌 교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한편 임기 말년에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이 이루어졌다. 2012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이 울릉도를 방문할 것이며, 날씨가 좋으면 독도에 간다고 정부 관계자가 밝혔으며, 이날 오후 2시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유용한 외교 카드를 필요하지 않은 때 쓴 포퓰리즘적 사업', 친일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치적을 남기려 한 무리한 시도', '외교 분쟁화가 우려된다' 등의 부정적인 반응과, '독도가 우리 땅임을 명확히 알릴 필요가 있다', '대통령 개인의 성향에 대해 근거 없는 추측으로 대일 외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국내 보도에 앞서 방문 전날밤 일본 신문에서 일제히 보도되었는데, 마치 엠바고가 풀린 것처럼 일제히 같은 시각에 게재되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에서는 사전에 일본측에 통지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당연히 해당국 방문이나 통과도 아닌데 외국에 통지할 까닭이 없다). 이에 따르면 대외 통지한 적이 없는 대통령의 동선이 새어나간 보안사고가 일어난 것이 된다.간첩이 있는 건 사실인 듯
이명박 정권 말기인 2013년 1월 경 독도 관련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당연히 이뭐병. 독도 방문은 했지만 예산은 깎으니, 지곤조기라는 말도 나오는 게지.
8.4 박근혜정부 (2013~ )
2014년 11월에 2008년부터 계획중이던 독도 시설물 설치 계획을 일본과의 마찰 우려로 전면 백지화하기로 결정했다.(...) 뭐? 하지만 매년 해군/해병대/해경이 시행하는 독도방어훈련은 그대로 실시하고 있다.
9 북한의 대응(?)
북한은 우리나라와 일본 간에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은) 독도에 있는 풀 한 포기도 밟지 말라."는 공식논평을 내었다. 웬일로 정상적인 반응을 한국의 헌법으로 명시된 이북5도위원회처럼 북한도 헌법에 한반도 전체를 자기 나라의 영토라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북한 입장에서는 남한이 점거 중인 독도는 엄연히 자기네 영토이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보통 이런 논평이 나오면 일본 측의 "유감 표명"이 이어지고, 다시 정치인 및 외교부(혹은 상대국 대사 소환) 차원의 설전이 치열하게 일어나지만, 이때만큼은 일본에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후문.
- 구체적인 연도 및 기타 상세한 내막을 아시는 분들 꼭 추가바람
10 민간 차원의 대응
- 동해명칭 병기로 인한 역효과?
동해/일본해 병기를 위한 노력이 2014년 초에 접어들어 버지니아 주를 시작으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역으로 독도의 표기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바다 이름을 병기하고 있으니 독도도 병기해야 한다는 논리. 이미 2013년에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가 '독도'와 '다케시마'를 병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보기
- 삼성그룹에서는 독도 박물관을 지어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독도에 대한 정보와 삼국접양지도같은 유물로 반박자료 및 독도가 대한민국령이라는 증거를 자세히 소장하고 있다.
11 일본과의 군사분쟁 가능성
군사력 비교,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등은 한국군 vs 자위대 참조. |
결론부터 먼저 내자면 진짜 일본이 이런 일을 벌인다면 전쟁이 안 날 수가 없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일본은 전쟁을 절대 먼저 일으킬 수 없다. 집단자위권은 일본 영내를 방어하는 개념+ 해외에 미군을 따라 일본인 및 일본 이권을 보호하는 개념으로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나 서해5도는 해당 사항 없고, 북한이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따위가 대상이 될 법한데 이 북한도 한국정부가 반대하면 못 간다.
일본이 독도에 침공하면 어찌하냐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자위대가 독도를 공격해야 한다는 극우 세력의 주장이 있다. "평화헌법상 해외 파병은 금지되어 있지만, 다케시마는 자국 영토이므로 상관없다."는 논리. 이를 반영하여 각종 한일전쟁 소설에서 독도는 항상 전쟁의 스타트를 끊는 곳이다. 그와 더불어 독도경비대원들은 항상 전멸하는 걸로 시작한다. 안습
그러나 이런 논리는 일본 극우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자기방위를 위해서 다른 나라가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영토를 점령한다는 논리는 타국을 침략할때 자주 쓰인 변명이다. 크킹을 해 본 사람이라면 '날조된 데 유레'를 생각하면 쉽다.게다가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를 일으킨 전범국가고, 대한민국을 식민통치한 역사가 있는 나라다.
역사적으로 이런 국가간의 영토분쟁이 전쟁으로 발전하는 예는 많았다. 포클랜드 제도를 두고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이라든지 샤트 알 아랍강의 영유권을 놓고 이란과 이라크가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든지[28] 국경 지역의 카슈미르 땅을 놓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벌인 제1차,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든지... 하지만 포클랜드 전쟁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강제로 점거했다가 국제적으로 지탄받고 패전한 아르헨티나처럼, 일본이 국제적 지지를 받을 확률은 낮다. 일본이 겨우 바위 덩어리 섬 하나, 극우 세력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고 군사 활동을 벌여 독도를 점령한다면 이익보다 피해가 몇 백 배 더 많다.
당장 수십 년 동안 벗으려고 애썼고 아무튼 세월이 지나서 좀 흐려지기는 한 침략 국가의 이미지를 다시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군대 대신 자위대를 운용할 정도로 군사 활동이 제한되어 있는데 이런 대규모 군사행동을 일으키면 당시 일본과 싸웠던 다른 나라에서 가만히 있을까? 게다가 센카쿠 열도와 쿠릴 열도 분쟁 등 비슷한 분쟁이 주변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서로 싸우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잠재적인 라이벌인 중국과 호전적인 적성국가인 러시아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동맹국끼리 싸우면 미국의 힘을 깎아먹는 일이 될 뿐이며, 둘다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있어서 미국 입장에선 둘이 서로 영토 문제로 전쟁을 벌이는 걸 극력저지할 공산이 클 것이다.
물론 전술적으로 생각해보면, 물론 일본이 정말 마음먹고 자위대로 대거 기습 공격을 한다면 독도를 수비하는 소수의 독도경비대가 독도를 지켜내는 건 불가능하다. 상륙할 경우 자위대 서부방면대 보통과연대(수륙기동단)가 주축이 될 텐데 1개 소대 안팎에 불과한 독도경비대로는 함포지원까지 받는 자위대 1~2개 중대의 공세를 당해내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독도에서 전쟁이 터질 경우 독도경비대는 장렬하게 산화할 가능성이 높다. [29] [30] 실제 전투는 한국 제1함대 및 제7기동전단,잠수함사령부, 제1해병사단과 일본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이 각각의 항공전력의 엄호를 받으며 격돌한 뒤 이 과정에서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 물론 한국 해군의 주력은 당연히 7전단과 잠수함사령부이며 해역함대인 1함대는 지원 및 호위 역할, 해병대 병력 엄호 정도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해군은 힘들다고 했으나 세종대왕급 구축함 등이 들어오고 현무 크루즈 미사일이 공개된 지금은 전력이 제법 대등해졌다. 현무 미사일은 일본 본토 전역을 사정권에 넣고 있어 해자대 함정들은 당연히 가격권에 들어온다. 즉 함정 손실 없이 초창기에 내륙 기지에서 발사 가능한 유도탄을 죄다 동해로 쏟아부어도 해자대 함정은 줄줄이 격침 당하고 그 뒤 제7기동전단과 잠수함사령부가 마무리 쳐 주고 해병수색대는 해군 특수전전단과 함께 수륙기동단의 상륙을 저지하면 된다. 어차피 수륙기동단은 도서 방어 부대이지 공격 부대가 아니라서 허약해서 제1해병사단 신속대응부대가 제압 가능하다. 그리고 이 쯤 일이 벌어지면 포항에서 해병대 포병 전력이 긴급 전개된다.
여담으로, 독도경비대는 해경이 아니라 경찰이다. 의경 중 독도경비대로 따로 선발한다. 그 이유는 1982년 이전까지 전투경찰순경이 해안선에 들어갔는데 울릉도, 독도, 제주도는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며 딴 섬은 1982년 해군에 이관되었다. 함포 사격을 지원하는 해자대 함정은 포항에서 신속전개되는 해병대 포병전력으로 격파 가능하다. 최근 해병대도 북한과의 NLL 분쟁과 함께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을 의식, 이를 억제하고자 신속대응부대를 동,서해안에 배치하고 MLRS를 들여오는 등 전력을 늘리고 있다. 그간 주장으로만 그쳤던 울릉도 해병대 전투부대 배치가 서북도서방위사령부의 전략도서방위사령부로의 격상 차원에서 추진 중이다. 제9해병여단이 제주도에 들어간 것과 비슷하게 해병대 전투부대가 정식으로 울릉도에 들어가고 포병 및 기갑 전력이 전개되면 일본 입장에선 말 그대로 턱 밑의 비수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조선인민군 해군의 잠수함 이용 침투는 더더욱이 불가능해진다. 해군도 이 점을 인식하고 해병 전투부대를 집어넣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군 vs 자위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국민 감정상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얻을 만한 건수가 그다지 없다. 결론적으로 전쟁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31]
참고로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러한 독도 및 서북도서 기습강점 등 연안에서의 돌발사태에 대비, 동해와 서해에 신속대응부대를 배치했다. 해병대 항공단까지 창설되면 연안 신속대응부대의 대응력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김경진 공저의 독도왜란이라는 소설이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해당 문서 참고.아무리 그래도 이걸 참고하기는......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다. 만에 하나 일본이 독도를 점령하려고 전쟁을 걸었는데 이를 대한민국이 안보리에 올려버리면...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것보다 중국이 다오위다오(센카쿠)에 밀고 들어오면 어쩔? ㅈ되는 거지 뭐. 특히 지금은....
12 대중매체에서의 독도
-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독도경비대원들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다가 산화한다.
- 김경진의 독도왜란에선 한일전쟁 소설에서 독도경비대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클리셰를 정면으로 깨고 오히려 일본 특수부대원들을 쳐발랐다. 본문에서 실제로 사망 플래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두드리자의 장편소설 독도를 지켜라에서 한일전의 시작으로 나온다
근데 그 뒤는 좀비 아포칼립스 인게 함정
- 온라인 게임 세컨드 라이프에는 한국땅으로 되어있는 독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 불만을 품은 일본 유저가 독도에 폭탄을 떨구는 바람에 일본유저 상당수가 밴 먹은 사건이 있다.
- 넷 우익들에 의하면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생각하면 반일이라고 한다. 니코동 같은 곳에 일본에 진출한 한국인 연예인들이 독도관련 얘기를 하는 동영상을 올려서 반일이라고 까는 경우다.
- 2014년 1월에는 일본 프라모델 메이커 아오시마에서 해상자위대 아키즈키급 구축함 모형을 발매하면서 박스아트에 독도를 침공하는 해자대를 묘사하여 국내 프라모델러들의 어그로를 한몸에 받고 있다.
- 2013년부터 김단우 감독, 원기준,이원종 주연의 '놈이 온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중이다. 내용은 '독도를 무단 점거하는 일본 극우파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독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 그런지 독도 관련 단체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가끔 올라오기도 한다. 그러나 쌈마이스러운 영화 포스터 부터 해서, 무엇보다 감독의 정체가 한국 최악의 영화 주글래 살래와 클레멘타인을 찍은 김두영인지라 영화의 질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파일:Attachment/독도/michael phares 1.jpg
미국이 자국 군인을 통해 독도 영유권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32]
다케시마 홍보 게임이 나와 일본 내 관심이 매우 뜨거운 편이다. 기사 참조.그리고 빡침주의.
13 유사 사례
독도와 비슷해 보이는 문제가 있는 곳으로 간도가 있지만, 논란의 여지는 있어도 되찾을 확률이나 찾아서 얻는 득도 거진 없는 거나 마찬가지. 녹둔도가 비슷하다면 좀 비슷하긴 하다.
독도 운운하는거에 빡친 일부 한국인들은 대마도가 한국 땅이라며 역드립을 치기도 한다. 물론 진심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순수하게 맞불 용도. 이쪽도 간도와 마찬가지로 전혀 근거나 이득은 없다. 자세한 것은 대마도, 쓰시마 섬 문서 참고.
해외의 예를 들어보자면,
- 러시아과 일본 간의 쿠릴 열도 분쟁
일본 정부의 동북아 광역 어그로 3.: 쿠릴 열도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서 소련, 즉 러시아에 반환된 땅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언급이 안 된 섬들이라는 점에서 독도와 비슷하다. 사실은 일본 남쪽의 두 섬들도 쿠릴열도의 일부라 인정했는데 나중에 이걸 뒤집어 홋카이도의 일부라 주장한 경우.
- 1956년 일소공동선언에서 소련은 일본과 관계개선을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언급이 안 된 남쿠릴의 섬 두 개(독도와 비슷한 경우)의 반환을 일본에게 제의했으나, 1960년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자 빡쳐서 반환계획 자체를 취소했다. 일본은 이에 남쪽의 두 섬들만이 아니라 4개 섬을 다 달라고 배짱을 부렸다. 당연히 소련은 거절했고, 지금도 일본이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 그런데 이 때 이미 서방에서는 공산진영과 싸울 걸 염두에 두고, 일본을 끌여들이기 위해서 일본에게 비교적 후하게 조약을 맺었다. 중국은 둘로 티격태격하고 있어서 어느쪽도 중국의 대표로 참가를 할 수 없었으며, 소련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조약에 싸인하길 거부했다. 물론 한국은 초청도 못 받고, 참가도 못 하고, 싸인도 못 하고, 그냥 강대국들끼리 주물럭거리는 걸 바라만 봐야 했다. 이렇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정작 당사자들이 배제됐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고, 그게 오늘날 영토분쟁의 시작이다.
- 싱가포르-말레이시아 간의 페드라 브랑카 분쟁
- 스페인과 영국의 지브롤터 분쟁 : 원래는 스페인이 아프리카로 가는 관문으로써 중세시대에는 무슬림들이 여기를 거점으로 아베리아 반도를 침공했었다. 스페인이 간절히 원했던 곳이지만 점령이 미뤄지고 있는 와중에 영국이 1704년, 스페인 왕위전쟁 도중에 낼름해버렸다.
- 그 이후로 말이 많았지만, 일단 주민들이 영국으로 남는 쪽을 선택해서 일단락됐다. 그래도 스페인이 끈질기게 영토주장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스페인이 주장하는 우리 땅 안에 있는 땅이니 돌려달라는 것에 대하여 영국은 세우타와 멜리야가 모로코 땅 안에 있는데도 지들이 차지하는 건 당연하고 남이 지들 땅 차지하는 건 안 되느냐며 비웃는다.
- 결국 몇 차례 분쟁 끝에 지브롤터를 대상으로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 정권 시기이던 1960년대 후반 국경봉쇄를 발동시킨 적이 있었다. 일본이 한다는 그 해상봉쇄와 비슷한 성격의 이 봉쇄는 스페인이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서 풀었고, 완전히 푼 건 80년대다. 하지만 이러한 스페인의 국경봉쇄는 아무리 해가 저물었다고 해도 핵무장국에 영연방을 필두로 무시 못할 강대국인 영국은 그다지 개의치도 않았고, 스페인으로서도 영국에게 크게 대들지 못했기에 사실상 효과도 별로 없었다.
- 카타르와 바레인의 하와르 제도 분쟁 : 지리적으로 보면 바로 카타르 앞마당인 하와르 제도를 바레인이 선수를 쳐서 점유해버렸다. 경제적으로도 국방력으로도 더 앞선 카타르가 이의를 제기했으나 바레인은 일절 대응하지 않고 아예 하와르 제도에 다국적 관광시설을 만들어 해외 관광객들을 끌어들여 버려서 카타르는 함부로 무력을 행할 수도 없게 되었다. 카타르 알 자지라만 봐도 하와르 제도는 카타르 땅인데 바레인이 불법점거한다면서 비난할 정도이다.
- 스페인과 모로코의 해상영토 분쟁 :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나, 분쟁 지역 무인도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 지역에서 모로코 어선이 사고를 당하자 양 측이 구조선을 보내면서 서로가 자신들의 땅에서 사고를 당했으니 우리가 구해주는 게 당연하다며 서로 욕하고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경제적으로 앞서는 스페인이 유리하지만 모로코도 필사적이어서 국제 사법재판소나 여러 기관도 유보한 채로 계속 갈등 중이다.
14 관련 문서
- 러스크 서한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연합군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 (SCAPIN 제677호)
- Wiki Leaks/2차 외교문건 공개
- 독도의용수비대
- 독도경비대
- 독도급 강습상륙함
- 독도의 날
-
마이클 펠프스 - 반크
- 박기태
- 호사카 유지
- 대마도의 날
- 다케시마
- 다케시마의 날
-
다케시마 후원기업 - 다케시마 탈환!
- 대한항공 A380 독도 시범비행
-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
- 이어도
- 쓰시마 섬
- 백두산
- 간도
- 녹둔도
15 트리비아
대법원 인터넷등기소 사이트에서 프린터 출력 테스트를 하면 출력되는 부동산 등기사항증명서가 바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의 것이다.- ↑ 故 최종덕 씨가 1965년 3월부터 최초 거주한 이래, 현재 김성도씨 부부 및 독도경비대원 40명, 등대 관리원 5명, 울릉군청 독도관리 사무소 직원 2명 등 거주 중이다2013년 9월 기준
- ↑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르면 Tokto
- ↑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한국의 육지인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에서 217km. 일본에서의 거리는 오키 섬까지 157km, 일본 본토까지 최단거리 약 210km로, 주변의 큰 섬 기준으로는 한국(울릉도)에서 가깝고, 한일 양국의 본토 기준으로는 일본에서 가깝다.
- ↑ 물론 음차라고 해도 수많은 '독' 자 중에서 그나마 의미가 잘 들어맞는 글자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독도는 외따로 떨어져있는 절해고도니까.
- ↑ 왜 동해에 있는 섬에 전라도의 서남 방언으로 된 이름이 들어왔냐 하면, 울릉도와 독도의 방위를 위해 공도령(空島令)을 해제헸을 때 전라도 사람들이 건너와서 붙여준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 참고로 한반도 최서단은 압록강 하구의 마안도, 한반도 최동단은 함경북도 경흥군, 한반도 최북단은 함경북도 온성군, 한반도 최남단은 전라남도 해남군이다. 한편 남한 최서단은 황해도 해상의 백령도, 남한 최북단은 강원도 고성군, 남한 최남단은 마라도이다.
- ↑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놓고도 육군과 해군에서 울릉도, 독도를 부르는 이름이 다 달랐다는 것이다. 자세한 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참고할 것.
- ↑ https://www.taxtimes.co.kr/hous01.htm?r_id=122791
- ↑ 그런데 웃기는 건 당시 일본군 육군과 해군이 독도와 울릉도를 부르는 명칭이 각각 달랐다는 거다. 자세한 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s-3.7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서를 보자.
- ↑ 위키백과 기준으로 표기는 리앙쿠르 암초 >>> 독도 정도로 차이난다.
- ↑ "漢文으로 작성되어야 하는 敎書의 전통을 이은 勅令에 사용되는 어휘는 언제나 漢字語이어야 한다. 따라서 차자 표기인 ‘獨島’가 아닌 ‘石島’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반면, "吏讀로 작성되는 牒呈의 傳統을 이은 보고서 에 사용되는 어휘는 한자차용표기법에 따른 것이어야 하므로" "한자어(훈차 표기) ‘石島’가아닌 이두(음차 표기) ‘獨島’를 사용"한다. '獨島'․'石島'의 地名 表記에 관한 硏究
- ↑ 절목이란 시행세칙을 의미한다.
- ↑ "울릉도 수출품목에는 독도에서 잡은 강치가 포함되어 있고, 일본인들은 이 수출품에도 수출세를 납부했다. 일본인들이 수출세를 납부했다는 기록은 일본 외무성 기록에 보이며, 울릉도의 강치 수출통계 역시외무성 기록에 보인다. 울릉도의 일본인들이 독도 강치에 대한 세금을 울도군에 납부했다는 것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독도가 한국령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울릉도의 산물에 대해서만 세금을 냈을 것이다. 당시 수출세는 물품에 따라 세금을 내는 이른바 ‘종가세’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이 독도를 울릉도의 속도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竹島問題100問100答』에 대한비판적 검토,그리고 우리의 대응
- ↑ 안용복이 실제로 일본 어부를 만났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보는 일본 측 근거는 오오야, 무라카미 가문도 그 전 울릉도 쟁계로 조업이 막혀 손해만 보다, 출어를 위한 자금도 구하지 못해 출어할 상황도 아닌데다, 일본 어부를 정말 만났다면 그런 중요한 내용이 왜 겐로쿠 각서에는 쓰여지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도일 당시 일본 측은 '죽도일건(울릉도쟁계)는 끝났는데 왜 또 왔냐?'라는 어이없는 반응이었고, 이런 뜬금없는 도일에 명분을 가지려면 당연히 '여전히 남의 땅에 왜인들이 조업하고 있다'라고 해야 하는데, 도일의 이유가 대마번에게 당한 냉대를 호소,소송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다만, 재일 독도연구가 박병섭 선생은 안용복이 1695년에 만난것을 1696 년에 만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1695년 또 일본이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오는데 이미 울릉도에 조선인들이 철포와 칼로 무장하고(!) 그들이 오기를 벼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 해 울릉도 조업을 포기하고 돌아가야 했는데, 그 무장 조선인들이 안용복 일행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실제로 울릉도 쟁계는 이미 안용복의 1차 도일(실제로는 일본에 납치)로 조선 영토임이 일본의 인정으로 끝났는데, 새삼스레 왜 또 안용복이 2차 도일을 감행했느냐의 이유가 조금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은 단순히 안용복이 1차 도일 때 일본에게 받은 냉대에 대해 칭얼대기 위함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어차피 울릉도는 공도정책으로 조선인들도 도항할 수 없으므로 안용복은 또 울릉도에 불법(....) 조업을 하긴 했으나 1차 도일 때 당한 괴로운 기억과 울분으로 1695년 때는 자기들도 만일을 위해 무장하고 있던 판에 또 일본 어민들이 오자 참다못해 1차도일 때의 냉대에 대한 항의도 겸해서 철저한 준비(관직 사칭, 지도 준비, 소장 작성 등. 실제로 안용복의 독도(자산도)에 대한 지식은 2차 도일 때 훨씬 더 정교하게 된다.) 끝에 1년 후 2차 도일을 감행한 것이라는 가정이다. 다만 2차 도일 자체도 사형선고를 받을 정도로 중죄인데 1차 도일 때 사면 받고도 얼마 안 돼 또 울릉도로 갔다고 진술해 봤자 자신에게만 더 불리해지므로 1696년이라고 진술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어차피 2차 도일의 명분을 위해서는 울릉도에 또 갔다는 것을 시인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가정일 뿐이며, 1695년의 조선인들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 ↑ 예를 들어 안용복이 항의를 위해 일본에 가져간 조선팔도지도,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의 프레비 히어 사원 판결에서 언급된 지도 등
- ↑ '페드라 브랑카 사건(2008)'판결과 독도 영유권 https://www.lawtimes.co.kr/Legal-News/Print-News?serial=44832
-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44666 "'독도 편입' 시마네현 고시 제정은 거짓말"
- ↑ 독도,130문 130답 제5장 17세기 말 일본 도쿠가와 막부와 울릉도·독도 영유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106100069
- ↑ 사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본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 러스크 서한은 애초에 조약도 뭣도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에 대한 언급이 빠졌으므로 따라서 한국에 반환하지 않고 일본령이 된다는 건 무리수 많은 주장이다.
- ↑ 사실, 이마저도 정확히 확신할 수 없다. 위안부 협상 이후에도 계속 도발하는게 일본이다.
- ↑ 문제는 대한민국에도 일본의 다케시마와 한자 이름이 같은 죽도(竹島)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 여러 개라는 거다. 대표적으로 울릉도에 있는 죽도.
- ↑ 사실 일본의 독도 영유 논리를 자세히 보면 미국의 권위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및 러스크 서한.
- ↑ 폴란드어판은 Dokdo, 체코어판은 Tokdo, 슬로바키아어판은 Tokto라고 적고 있다.
- ↑ 배로 밀어 깨뜨리는 것
- ↑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
- ↑ 한·일 간 마찰
- ↑ 위키리크스 번역에는 '리앙크루 암도'라고 되어 있는데, 보편적인 독음은 '리앙쿠르'이며, '암도(島)'라는 표현과 달리 'Rocks'는 섬이 아님을 더 강조하는 표현이므로 일부 수정하였다.
- ↑ 단 이쪽은 영토분쟁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기에는 당시 중동 정세상 복잡한 원인들이 얽히고 섥켜서 터진 측면도 있었다.자세한건 이란-이라크 전쟁 항목 참조
- ↑ 그런데 독도경비대원들은 경찰, 즉 전시에도 민간인이다. 비전투원인 경찰들을 함포 사격에 수륙기동단까지 동원하여 학살할 경우 그 뒷감당을 일본이 할 수 있을런지는 각자 알아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
- ↑ 그리고 독도에 1개 중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을 뿐더러, 독도 선착장에서 독도경비대 막사까지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좁고 경사가 심한 계단이 전부이며, 이 계단으로 한참 올라가야 하는지라 많은 병력을 집중적으로 신속하게 투입하기도 어렵다. 정말로 일본측 병력이 독도에 상륙하여 독도경비대가 교전할 경우, 오히려 일본측 병력이 축차 투입되었다가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다.
- ↑ 한국의 피해가 클 거라는 것은 2010년 이전 이야기로 현재는 수비자인 한국측이 유리하다. 한국은 내륙에 육군미사일사령부를 창설, 발사 가능한 유도탄을 죄다 초기에 동해로 쏟아 부어 해자대 함정들에게 용왕 면담을 시켜줄 수 있다. 배수톤수 큰 함정들부터 집중 공략해 가라 앉히면 해자대 전력도 절반 이상이 손실되고 남는 건 연안전력 정도로 이 정도는 제7기동전단이 나가면 상대 가능하다. 반면 육자대나 해자대는 순항, 혹은 탄도미사일 전력의 부재로 내륙 깊숙한 비밀 장소의 한국군 미사일 기지들을 때릴 수 없다. 공자대는 대한민국 공군과 같은 지상타격력은 전혀 없는데다가 한국의 조밀한 방공망과 압도적인 지원력의 차이로 대한민국 공군에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현대적인 BVR 전투능력을 가진 전투기도 대한민국 공군이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현무 미사일의 사거리는 일본 열도 및 북한 전역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극동도 집어넣어서 중러 양국에게도 위협적이다. 물론 당연히 해자대가 한국의 임해 산업시설을 때릴 힘도 없고, 그런 짓을 할 경우 100% 전쟁 도발이 되어 국제 제재에 돌입하며 미국도 이렇게 된 이상은 일본을 버릴 것이다. 상륙하는 수륙기동단은 제1해병사단이 막으면 되고, 어차피 육상전력의 엄청난 차이로 육자대가 한국 상륙하는 것은 어렵다.
- ↑ 제 11회 주한미군 웅변대회 1위 수상자인 마이클 패레스 상병으로, 북한의 은하 2호 발사실패 당시 페이스북에 찰진 한국어를 보여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