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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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던 동명이인에 대해서는 김봉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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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북한의 국가원수
대수이름직책임기기간비고
1대김두봉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2대최용건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1957년 9월 20일 ~ 1972년 12월 28일1962년 재선
1967년 3선
3대김일성국가주석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1977년 재선
1982년 3선
1986년 4선
1990년 5선
권한대행김정일국방위원장1994년 7월 8일 ~ 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 권한대행
4대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1998년 9월 5일 ~ 2009년 4월 9일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5대김정일국방위원장2009년 4월 9일 ~ 2011년 12월 17일
권한대행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2011년 12월 18일 ~ 2012년 4월 12일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은 현직
6대김정은국방위원회 제1위원장2012년 4월 13일 ~ 2016년 6월 29일직책 폐지
국무위원회 위원장2016년 6월 29일 ~ 현직
조선로동당 최고책임자
김일성김정일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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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일성(金日成)
생몰년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사망지평양 묘향산
본관전주 김씨
본명김성주(金成柱 or 金聖柱)
정당조선노동당
종교개신교(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 없음
배우자한성희[1]
김정숙
김성애
신체175cm, 90kg, AB형
재임 기간양력1948. 9. 9.~1994. 7. 8. (45년 9개월 29일)
음력1948. 8. 7. ~1994. 5. 30. (45년 9개월 23일)[2]

1 개요

북한의 초대 최고권력자이자 세계사에서도 손꼽히는 악명 높은 독재자이자 전범.

김일성 사망 후 김일성의 주석 칭호는 영구동결 되었으며, 이 전통은 김정일 등 2대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직함 명칭만 다를 뿐 실제로는 별 다를 게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서로 죽고 죽이게 하고, 수많은 가족들을 한순간에 영영 헤어지게 만들었으며, 또한 이 나라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만들게 했고 같은 민족이지만 지금도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만든 원흉이다. 남북한을 동시에 말아먹은 데다가, 미군정에 의해 중급 농업 국가로 전락할 뻔 했던 일본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 데에 아주 크게 기여했다.[3] 사실 한국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의 국력이 한국보다 컸다. 사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공업시설을 거의 북한에 세웠다. 물론 그 좋은 조건(공업능력에 월북 인재 등등...)을 갖고서도 말아먹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남한은 출발조건이 북한보다 훨씬 열악했는데도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는데 반해, 북한은 시작조건이 남한보다 훨씬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씨 왕조의 실정으로 다 말아먹었다[4] 거기다가 더불어 북한은 당시 공산권 형제 국가들인 소련, 중국, 동독, 북베트남 및 기타 동유럽 국가들에게 온갖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유리한 점까지 있었다. 산업기반 역시 소련과 중국이 지원하고 전쟁 피해도 신속히 복구했다. 남한은 처음에 기습당한데다 중공군의 기습 이후로 주 전장이 되어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던 산업기반도 다 날아갔고 북한이 받는 도움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도움을 미국이나 서유럽, 일본에게 받아가며 스스로 일어나야 했다[5].

한국전쟁을 일으켜 김씨 왕조만을 위한 사회 시스템을 확립하고 숱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게 정치범수용소연좌제. 그야말로 인외마경을 현실에 구현했다. 더불어서, 그 후로도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한국군이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로 바뀌게 만들고 예비군민방위까지 도입시키게 만들어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법적인 의무를 더하는 데 일조했다.[6]

50년대 소련이 세워 둔 꼭두각시 지도자[7]에서 70년대 사이비 종교 교주 & 희대의 독재자로 거듭나 지금의 가난하고 폐쇄적인 북한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한 원흉이자 절대로 인간으로 봐서는 안 되고 그렇게 볼 수도 없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 북한 주민들의 삶의 비참함과 막장성은 인류 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처참한 상황인데다, 들도 하나같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만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니 북한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한편, 대한민국 시인이 김일성 만세란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 생애 주요 행적

2.1 출생과 어린 시절

1912년, 김형직과 강반석[8]장남으로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에서 출생했다. 초명은 김성주로 소학교 때부터 중국인학교를 다녔고 지금의 지린성 쑹화강 강변에 있는 위원중학교를 다녔다. 1929년경에 반일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어 위원 중학교에서 퇴학 당했다. 1930년경 출소해서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꾼 뒤 계속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만주의 항일 운동에 동참하는 척했다.

2.2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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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 계청, 최현, 안길

1937년 6월 4일, 박달과 박금철 등의 동지들과 잠깐동안 보천보 마을 점령(보천보 전투)으로 갑자기 유명세를 탔었는데, 100여명의 습격대를 침투시켜서 함경도의 보천보 마을을 1시간동안 점령했다.

하지만, 실제 보천보 마을의 일본 순사는 단 5명 진화타겁, 정확히 말해 일본 출신 3명과 조선인 2명. 게다가 그들 중 아무도 죽지 않았고, 마을 현장에서 실제 죽은 사람은 유탄에 맞은 갓난아기와 상황 판단을 못하고 저항하다가 당한 일본인 요리사 등 둘 뿐이다. 김일성의 군사 능력을 보여주거나 한다는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김일성이 지시한 것도 아니고, 지휘자가 아닌 단순 참가자로 후방에서 보천보 전투를 지켜봤던 방관자 역할에 가까웠다.

사실 전과가 좀 부풀려진 까닭에, 냉전기간 티토체 게바라같은 세계의 유명 게릴라 지도자와 비슷한 취급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두 게릴라 지도자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티토는 영국과 소련을 오가면서 줄타기 외교를 벌인 덕에 끝까지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9] 체 게바라는 막장 수준이었던 쿠바를 체계가 잡힌 국가로 거듭나게 한 인물이다. 가만히 서있다가 날로 먹은 김일성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더구나 독립운동 경력이 있다는 것 하나로 8.15 광복 이후에 저지른 온갖 악행들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거기다 이 제대로 항쟁한거에 비하면 애들 장난감으로 보일 정도다.

그렇지만 북한이 소말리아아프가니스탄 부럽지 않은 국가 막장 테크를 밟게 된 것은 김일성의 독재병크 정책이 최우선 원인이며, 김일성의 무모한 군사적 대결주의는 매카시즘과 함께 한반도를 전화에 휩싸이게 하여 분단을 고착화시키게 되었다. 가식적으로라도 제대로 된 지도자나 정치가라고는 부를 수 없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김정일의 사치만 생각하지만 김일성도 김정일만큼 개막장으로 사치를 즐겼던 인물이며 애초에 기쁨조 아이디어도 김일성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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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잡지사 '선구'에서 서울 시민 2000명에게 여론조사한 자료.

광복 직후 '선구'의 설문조사에서 김일성이 군무부장 부문에 조사된 이유로 해방정국 당시 유명세가 있었다고 한홍구(성공회대교수) 등 일부 측에서 주장하고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냈던 정상진은 단연 거짓이라고 폭로했다.[10] 해방 이후 소련정치부의 지시로 원산항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마중했는데, '김성주입니다'라고 인사하는 김일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뒤에 소련정치부에 보고하면서 김일성을 알았다고 한다. 정상진은 1945년 10월 14일에 있었던 "소련군 환영대회"는 소련의 각본이었으며,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한 모든 연설문은 소련에서 작성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기사 즉 관제데모의 결과로 지지율 운운하는 꼴.

그런 주제에 나무 수천 그루를 훼손하여 자연 파괴를 일삼은 짓거리를 항일운동의 증거랍시고 날조해 자랑질이나 하고 있다.

2.3 한국전쟁의 만행

해방 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당시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민심을 잃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석권하자 김일성은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고 자신도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국민 학살적인 면에서는 제대로 본받는데 성공하긴 했다 여기에 박헌영의 '남로당원 20만 봉기설' 주장으로 하루에 10km씩 진격하면 50일 안에 대한민국을 정복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김일성은 1950년까지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소련에게 끈질기게 들이댔다. 소련은 2차대전 이후 미국과의 대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요청을 묵살했지만, 미국이 애치슨 라인[11]을 설정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등 호재가 발생하자 스탈린이 이를 승낙했다. 김일성은 승낙받자마자 빠르게 남침 작전계획을 구상한 뒤 스탈린에게 비밀문서로 전달했다.

김일성은 개전 초기 빠르게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내 엄청난 혼란이 생겨 대한민국의 숨은 공산세력이 후방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자연스럽게 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서울을 점령해도 대한민국의 후방은 잠잠했고 미군의 참전이 빠르게 결정되는 등 악재가 생겼다. 이 때문에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3일간 서울에 머무르는 작전상 엄청난 실수를 하였고,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어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은 인민군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학살과 인민재판, 약탈을 실시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안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승리하기 위해서 민심을 얻어야 하는데 바보같은 짓만 하고 있다면서 진심으로 화를 내었다.

  • 대한민국 내 공산주의 세력은 이승만 정부의 강력한 탄압 때문에 한국전쟁 직전즘에는 세력이 많이 약해진 때였다. 그러나 남로당의 박헌영은 전쟁을 일으키면 대한민국에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했고, 김일성은 이를 그대로 믿어버린 것이다. 또한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자 김일성도 이에 자극받아서 자신도 업적을 쌓고자하는 욕심으로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파악도 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한다.(김일성도 게릴라로 활동한 전력은 있지만 실제로 군사적 능력은 파멸적으로 없었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한 이유는 모택동이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해도 적어도 당시 중국에 있던 토지개혁과 봉건악습 철폐,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소련에 아부한 대가로 북한 지도자가 된 김일성은 이런 능력은 전무하였다.)결국 그리고 반대파 제거를 위해 김일성은 전쟁 후 박헌영을 숙청한다.

한국전쟁 초반 인민군은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데 이어 7월 13일에는 한강을 건너 20일 대전까지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때에는 지방을 돌면서 인민군을 독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한국군과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에게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을 떠나 덕천으로 피난했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을 떠나 강계를 평양 대신의 임시 수도로 정한다. 그런 뒤 임시수도 강계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군과 UN군이 11월 후순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오자 마오쩌둥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의 기치 아래 총 60만 명의 의용군을 북한에 파견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한국군과 UN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좀 바깥을 돌아다니며 한숨을 돌렸고, 한국군과 UN군이 12월 2일~4일 평양을 철수하자[12] 12월 6일 다시 평양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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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휴전일이자 북한에서 전승절이라고 정신승리하는 1953년 7월 27일에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유엔 측과 체결한 휴전 협정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위 사진은 김일성 집무실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김일성.
한마디로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을 뿐이었다. 즉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은 한 것이 없다. 초반 선전은 방호산 등의 활약과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쑹스룬이 지휘한 중공군이 주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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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중국에서 덩샤오핑(왼쪽)과 만난 김일성. 이 둘은 38년 후에야 공식 석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2.3.1 일본을 부활시키다

김일성은 미국의 참전이 없다는 가정하에 50일 안에 대한민국을 박살내고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망상을 실천하였으나, 예상외로 국군의 반격과 빠른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다. 문제는 당시 한반도에 군수산업기반이 없었던 탓에 미국은 한반도에 가까운 일본에 군수산업기반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패전 이후 중소 농업국이 될 뻔한 진정한 철전지 원수인 일본이 빠르게 부흥하여 산업국이 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도쿄 대폭격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등으로 군수산업 시설이 위치했던 도시들이 쑥대밭이 되어있었고 반면 폭격받지 않은 한반도에는 공장 및 발전소 시설이 멀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재한 일본인 중 다수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일본 귀국을 망설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은 역대 그 어떤 친일파들보다 일본을 이롭게 하였고 일본전범과 전범기업들이 처벌을 받지 않게 한 민족의 비극을 만들었다.日자 돌림이라 그런가?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못 사는 서민은 그저 보리밥을 먹어야 한다."라고 한 이케다 하야토의 그 유명한 망언으로 지지율이 폭락해 정치인생 개발살날 뻔했던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제 일본은 살았다!" 라고 외쳤다는 야사도 있다. 그의 말대로, 일본은 비록 자기들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13]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경제 회복을 완수할 수 있었고, 요시다 시게루 역시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이후 최장수 총리에 등극하였다. 이후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고도 경제성장을 하며, 선진국 진입에 성공하였다.

반면 북한은 1940년대 말 폭격맞은 일본보다 우수한 공업시설을 전쟁을 통해 자폭을 하고, 1950년대 공산권의 막대한 지원을 얻었음에도 이 쓰레기 때문에 최빈국이 되었다. 즉 한국전쟁 일으켜서 진정한 철천지 원수인 일본을 살려줬단 소리 그러고선 일본을 실컷 욕하는 걸 보고 있자면 참 웃기다.

몰론 한국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 생산된 군수품들은 다 남측으로 갔지, 북측으로 가지는 않았단 점에서는 김일성을 옹호 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일본 부흥의 원인이 된 한국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인 건 앞에서 다 말했다.

2.4 봉건 왕조 체제의 수립

비록 소련의 필요와 스탈린에 대한 충성과 아부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은 김일성이었지만 수십년동안 한반도와 만주에서 독립활동을 한 연안파와 국내파에 비해 정통성이 부족하였기에 김일성의 절대적 독재체제는 절대로 공짜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통치 반세기사를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숙청의 연속. 수십년간이나 나라 하나를 황제처럼 통치한 것은 김일성이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대파 제거를 통한 권력장악에는 정말로 능수능란했다. 권력장악만 따지면 호부견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북한 초기 김일성의 권력은 그다지 확고하지 못했다. 김일성이 최고 지도자이긴 했지만 그의 만주빨치산 파벌(갑산파)[14]허가이의 소련파, 김무정과 박일우의 연안파, 박헌영리승엽남로당파 등 수많은 파벌의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15] 이게 지속되었으면 북한도 나름대로 괜찮은 국가가 되었을지도[16]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이후의 군사적 대참사로 평양의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되었는데,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반대파에게 모조리 뒤집어씌워 버리면서 정치적 위기를 탈출했다. 연안파의 리더 김무정은 평양 함락 당시 김일성이 반 강제로(…) 평양 수비를 명령했는데, 정작 평양이 함락되자 평양 함락의 책임을 지고(…) 지위를 박탈당했다. 북한 초기 김일성과의 명목상의 공동정권을 구성할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박헌영은 남한 내부 호응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제거되었다. 사실 이건 박헌영도 할 말이 없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헌영은 전쟁 전에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인민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지만...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뭐 해방 초기에는 한국전쟁 이후에 비해 남한이 좌파적 성향이 깊었고 북한이 우파적 성향이 강했었는데 이건 당시 평양의 별명이 '동양의 예루살렘'일 정도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우파의 입김이 셌던 까닭도 있다. 반면 남한의 대구는 '동양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파적 성향이 깊었는데 현재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참으로 얄궂은 역사. 물론 이것도 얼마 못 가 여순 사건으로 남쪽이 다 숙청됐다.

전쟁 이후에는 1956년의 8월 종파사건과 1958년의 "최창익 그룹 국가전복음모" 사건을 통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궤멸시켰다. 당시 300명의 장성 중 숙청당하지 않은 사람은 김일성의 최측근 15명, 그리고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연안파와 소련파 장교들 몇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김정일로 승계 과정에서 갑산파들도 다 숙청시켰다. 한국전쟁 직후의 군사적 열세에서 불구하고 두 동맹국이 후원하는 두 파벌을 기어코 제거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정치적 수완(혹은 독재에의 집착)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무자비함은 어찌보면 독재체제 성립 이후에 절정에 달했는데, 1960년대에는 당내의 "군사만능주의"를 비판하며(…) 평생 동지였던 김광협과 최광 등을 가차없이 숙청한다. [17] 이 숙청은 군부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방지하고 김일성 자신이 군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김광협의 몰락 이후 군을 장악한 것이 그 유명한 오진우다.

권력을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계승함으로써 북한이 사실상 전제주의국가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전설로 자신에 대한 숭배도를 높이는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봉건 국가라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독재정권이 들어선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도 권력 계승을 자기 자식에게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어지간한 나라는 총애하는 부하에게 넘겨주긴 할 지언정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넘겨주지는 않았으며, 그나마 국가 원수 자리를 형제에게 넘겨준 쿠바조차도 원수 자리를 계승받은 동생 역시 과 함께 혁명 투쟁에 참가한 서열 2위 원로였기에 계승한 것이지, 동생이라는 이유 만으로 후계자가 된게 아니다.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을 존경해 그를 벤치마킹하려다가 벌집이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나 하는 건 아닌 모양...[18] 물론 김일성은 제 딴에는 합법적이라는걸 강조하려고 선거 쑈를 벌였지만 이건 말 그대로 쑈일 뿐[19]이라...

또한 홍길동이 썼다는 축지법쓸 줄 안다고 한다. 축지법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기행이 있는데... 예를 들면,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는 낙엽을 타고 두만강에서 일본군 함대를 격침시켰다던지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바꾸어서 싸웠다고 한다. 간달프?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100% 거짓말. 다만 이건 보천보 전투 이후 한반도 민중 내에서 퍼진 소문들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박완서의 어머니가 김일성이 축지법을 쓴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요즘 북한 어린이들은 믿...으려나? 그리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을 때(아마 1920 - 30년대쯤) 웃통을 벗고 모래밭을 구르니 모래가 로 변했다고 한다. 근데 진짜 90년대에 들어 북한에 기아가 왔을 때 그런 액션을 전혀 취하진 않았고 그냥 죽어 버렸다. 여기에는 김정일이 죽였다는 카더라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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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가부장주의, 종교적 개인숭배, 경찰국가 등, 전근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권력 장악도는 매우 높고, 이런 모습이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주화입마를 당한 독재자들로는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등이 있다.

3 사망

[20]
1994년 7월 8일 82살로 심근경색으로 뒈졌다고 한다. 북한측은 표면상으로는 과로로 인해 심장병이 발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의 말년에 모든 권한은 김정일에게 쥐어진지 오래였고 김일성이 하는 일이라곤 주석궁의 자기 사무실에 앉아 혁명열사릉을 감상하고 잘먹고 똥잘싸고 매일 여자와 XX하는것이였으니 과로보다는 그냥 나이탓으로 여겨진다.

생전의 김일성은 사후 혁명열사릉에 자신의 시신을 안치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를 신격화시켜 권력 이양을 정당화하고자 한 김정일은 시원하게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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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속에 놓여 있는 돼지고기

김일성이 죽고 나자 당연히 세뇌된 북한 주민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등 북한의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에서 “심장혈관과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 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됐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되어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에 방송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말했다. 물론 김일성이 죽어서 휴가도 못 나가게 된 남한 장병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이후에 김정일은 1994년 7월 20일에 금수산태양궁전(당시 이름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어 있는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안치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어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북한의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 또는 개별적으로 TV를 시청해야만 했고 김일성의 장례식을 봐야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장례식을 치루고 현재 김일성의 시신은 미라화되어서 그의 사무실이였던 주석궁을 개조한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이후 북한 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1년에 한번씩 정기 참배를 받고 있다. 하마터면 故 김대중 前 대한민국 대통령도 남북회담 당시 북한측의 회담 참가 조건으로 이 시체에 대고 참배를 할 뻔 했다고.

참고로 김일성을 미라화하는데는 예전에 레닌을 미라시켜서 지금도 보존중인 러시아 기술진들이 투입되었다. 참배 받을 때 모양이 찌그러지면 안된다고 보존제를 비싼 재료를 쓰는 등, 경제사정도 안 좋은 주제에 이 시체 유지시킨다고 100만 달러 이상을 퍼부었으며, 지금도 1달에 2~3번씩 방부처리, 2~3년에 1번씩 재보존처리 등 돈지랄을 하고있다. 추정치로 만들때 100만 달러 이상이 들었으며 지금도 연간 그에 준하는 돈을 퍼붓고 있다고 한다. 저 시체 보존만 안해도 아사자가 몇만명은 줄어들거라고 하니 말 다했다.

미라 제조에 쓰인 기술은 엠버밍이라고 하여 시체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게 하는 것인데, 한참 전에 개발된 기술이지만 지금도 이 방법이 최상이라고 표현될 만큼 정교한 기술이나 그 대신 유지비가 미친듯이 깨지는 기술. 사실 엠버밍 기술도 고대 미라 제작 방법과 마찬가지로 썩기 쉬운 내장과 뇌는 제거하므로 그냥 껍데기만 남겨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후 아들 김정일도 사후에 박제를 하였다.

4 지적능력

김일성은 비교적 무식하며 능력이 부족했다. 이는 그의 학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21] 이는 한 나라를 끌어갈 지도자로서의 김일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 부분에서 그는 극도로 무지했다.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런 그의 "무식함"은 마오쩌둥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22],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공산주의 자체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 괜히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전제왕정국가가 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장시성 소비에트로 수차례의 초공을 격퇴해냈으며 불가능할것같았던 대장정을 성공하고 끝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였다. 사실 집권 이후에 병크가 워낙 커서 그렇지, 지도자로써 가져야할 사람 보는 눈은 가졌으며, 전략•전술가, 특히 게릴라전은 거의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그리고 중국은 농민의 나라이므로 혁명은 농민들의 지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마오이즘"을 기반으로 혁명을 성공시켰고[23] 실제로 대부분의 공산권의 국가에서는 소련처럼 노동자가 주축이 된 게 아니라 농민들의 지지로 공산혁명을 성공시켰다.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국과 베트남이다.

일례로 김일성의 이 무식함을 증명하는 일례가 바로 한국전쟁이다. 애초에 이오시프 스탈린미국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미국과 직접 맞붙기를 꺼려해서 남침을 반대했지만 김일성은 국제정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라서 닥치고 쳐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스탈린에게 48번이나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24] 그 결과 김일성은 인천상륙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그마저도 쑹스룬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

게다가 김일성의 정책은 주체사상을 선포하면서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를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공산주의 사상을 만들어낸 것도 이 때문으로 보고있다.

사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이기는 하다. 아주 나쁜 의미로. 결국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전체주의+군국주의+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나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은 일개 개똥철학이자 그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4.1 전쟁광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사탕연필대신 총알과 총을 쥐어주어야 한다. - 김일성

위의 말은 김일성이 강계 군수산업공장을 방문하면서 직접 한 말이다. 이때 김일성은 간부들에게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하냐? 아니면 총알을 주어야 하냐?" 라고 묻자 의견이 반반씩 갈렸는데 김일성은 위의 말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간부들을 모두 반동으로 숙청시켰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북한은 지금도 남한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때부터 아이들에게 전쟁교육을 시켜 유사시 소년병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소년병제도가 얼마나 국가를 막장으로 만드는지 안다면 김일성이 독재와 적화통일을 위해 얼마나 전쟁에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마시게 하는 것이다."[25]라는 말을 했던 영국의 명 정치가 윈스턴 처칠넘사벽으로 여러 모로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26]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질래야 질 수 없는 압도적인 물량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나[27] 한국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한국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으로 인민군과 중공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때렸고 나이스샷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해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28]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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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조부: 김계상
8대 조모: 불명

7대 조부: 김차형 (1699년 ~ 1768년)
7대 조모: 나씨 (1703년 ~ 1744년)

6대 조부: 김욱 (1728년 ~ 1813년)
6대 조모: 도민숙 (1735년 ~ 1811년)

현조부: 김민수 (1770년 ~ 1854년)
현조모: 고송희 (1772년 ~ 1832년)

고조부 : 김송령 (1810년 ~1899년)
고조모 : 나현직 (1811년~ 1897년)

증조부 : 김응우 (1845년 ~1930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만든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다...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2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증조모 : 리씨 생몰년 미상

조부 : 김보현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조모 : 리보익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두 사람 다 북한 정권이 세워지고 나서 사망했다. 한민족을 막장으로 몰아넣은 손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부친: 김형직[29] (1894년 7월 10일~1926년 6월 5일)
모친: 강반석[30] (1892년 4월 2일~1932년 7월 31일)

처: 정실 김정숙 (1917년 12월 24일 ~1949년 9월 22일)

후처 김성애 (1928년 ~ 2014년)(추정)
첩실 제갈 아무개[31]
김송죽기사[32]
김순희기사[33]

형제


자식

의형제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로버트 무가베 믿지 못하겠지만 정말이다. 형식상 외교 의례긴 했어도 좌우간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고, 그 중 김일성이 큰 형을 맡았다고(...)

의외로 사람들을 충공깽하게 만드는 사실은 김일성 집안이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강반석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김일성 본인도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고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예수쟁이들의 광신적 전도술을 그대로 배워 써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럴 듯하다.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도 유년기에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을 죽을때까지 써먹었다고 하니까. 김일성이 다니던 교회중 하나의 담임목사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인데 이분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되는 분이다.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김일성과 의형제처럼 지냈고 김일성 사망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지금은 읽고 싶다면 평양 인민대학습당 비공개 열람실에 꿍쳐져 있는 정로 신문을 뒤져봐야한다. 하지만 위키러 중에 평양에 가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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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에는 크고 아름다운 혹이 있었으며, 이 꽤나 쪄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3대까지 세습 되었다. 빨갱이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을 코스프레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만약에 논할 경우엔 아주 무시무시한 아저씨한테 끌려가서 코로 평양랭면 원샷을 하거나 아주 무시무시한 곳으로 끌려간다 카더라.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뒤에서 찍은 동영상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 도 있었으나, 치료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뒤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 그냥 방치해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고... [37]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38]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는데, [39]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완벽하게 정반대로 가는 인물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벽하게 개무시한 인물이다. 지도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최대한 누린 반면 자도자로서의 책무는 하나도 이행하지 않은 악질 독재자다. 특히 하나의 국가를 자기 집안 똥구멍 치닥거리하게 만든 원흉이다.
  • 백괴사전의 김일성 항목은 모든걸 왜곡하는 동네답지 않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놈으로 분류를 하는 등 가루가 되도록 깐다. 하긴 그의 살아생전 해놓은 짓들을 약간만 봐도 천당이나 극락에 갈 놈은 아니다. 당장 6.25 전쟁이나 주체사상만 해도…
  • 한국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끈질기게 아양떨고 지랄부리고 하여튼 스탈린에게 허락 받으려고 별짓을 다했다.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한국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뒤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 북한에서는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 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얼굴이 공개되는건 남한에서는 코렁탕의 지름길이었다(…). 대부분 캐리캐처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다. 해외제작 6.25다큐의 경우는 김일성의 육성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시기는 88올림픽 전후.
  • 미국 시사만화가 래넌 루리는 김일성을 살인 로봇처럼 풍자한 그림을 그렸는데, 1970년대 한국에선 좋아라 자주 소개했다. 그런데 루리는 박정희는 거만떠는 독재자로 풍자하여 그렸기에 이것이 반대로 북한에서 종종 소개되었고, 박정희 살아생전 남한에선 이 그림은 공개불가였다.
  •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아깝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다. 그 대신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그덕에 이승만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이 장교가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외국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신격화의 정도가 나오는데, 평양의 웬만한 공원에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인 벤치가 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수령님께서 앉으셨던 의자'라서 길이 보존해야 한단다(…).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영구 사유화라니. 이건 뭐…
  • 북한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에서 김일성[40] 역할을 한 배우는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준다. 일명 1호 공훈 배우.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
  • 작명법의 관점에서 그 후손들의 작명은 상당히 희한하다. 본래 부자간에는 같은 한자를 피휘하여 작명하는 것이 원칙인데, 아들 김정일과 손자들[41] 모두 각각 그 아버지의 한자를 차용해서 이름을 지었다. 김정일의 경우, 김정일(金正)에서 김정일(金正)로 일부러 개명까지 거친 이름인데 이는 아버지의 이름자인 '日(날 일)' 자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김일성의 정통 후계자임을 내세우기 위함이었다고. 본래는 그의 형제들인 김평일, 김영일, 김만일과 함께 '一(한 일)' 자 돌림자를 썼다.
  •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사람(과 국가)를 살리기도 했다.[42]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43], 장제스[44], 요시다 시게루[45] 등이 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인간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의 스위스가 아닌경제 강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 해방 이후에는 남한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수류탄 투척을 받아서 겨우 살아난 적도 있다고. 소련군정문서 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 전에 북조선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교부한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만식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같은 책을 집필했다. 하지만 저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밖에서는 양판소불쏘시개로 취급된다.
  • 김일성은 평소에는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하며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하며 김일성이 좋아해서 자주 읽은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라고 한다. 198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했을 정도다.
  • 죽기 불과 한달 남짓 전이었던 1994년 6월 10일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와 회동해 북미관계의 개선을 꾀하기도 했고, 당시 한국 대통령이던 김영삼과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서는 온갖 설이 나돌고 있는데, 김일성의 이러한 외교 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긴 김정일이 몰래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밑의 '김일성 암살설' 참조).'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고 김일성을 설명하고 있다. 개소리 집어쳐! 북한에서 김일성이 어떤 사람인지를 감안한다면 이 돈은 쓰일 일이 거의 없으며 북한의 경제상태가 어떤지를 감안한다면 이 돈은 그냥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쓸모가 아주 없는 건 아니고 불쏘시개 용으로는 상당히 쓸만하다 카더라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참가안하면 코렁탕을 먹을 게 무서워서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작곡가 김형석이 닮은 꼴로 각종 종북 드립의 희생양이 된 피해자가 되었다

6.1 용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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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했을 당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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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의 김일성과 아내 김정숙. 앞의 아이는 3살 때의 김유라(김정일) 체형은 부계지만 이목구비는 모계 유전자가 강한 것 같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나름대로 젊었을 때는 그런대로 얼굴이 잘 생겼고, 꽤나 날씬한 체격에 웃는 모습도 제법 시원시원했고, 목소리도 듣기 좋게 아주 우렁차서 그가 연설을 한번 하면 반해버린 여자들이 꽤 되었다 카더라. 가 무려 193cm나 되는 사람이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탈북자들이 이 설을 신봉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흠좀무. 그러나 현재 추정되는 실제 키는 177cm이였다.[46][47][48] 사실 21세기 남한 기준으로도 이 정도 키는 평균 이상이고,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꽤나 큰 편에 가깝기 때문에 두둑한 덩치까지 맞물려서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덕스런 얼굴이 북한 기준으론 좋은 외모. 사실 장군님 킹왕짱, 희망 어쩌고 세뇌되어 자라니 미학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김정일에 비하면 김일성 쪽이 외모가 좋긴 하다. 게다가 북한에 막 도착했을 당시, 그러니까 아직 마르고 샤프했던 시절 사진을 보면 우리가 아는 그 독재자가 맞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참 카리스마있게 잘생겼다. 게다가 자기 자신은 이러한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꽤나 대조적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70년대 이후 살이 찌기 전 이야기. [49]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때 까진 저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때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1년 10월에 마지막으로 중국 방문을 했을 때 촬영된 사진들. 38년 만에 덩샤오핑과 공식 석상에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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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와 협상하던 중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김일성. 그리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황천으로 갔다. [50]

왠지 대두가 됐다(...).

6.2 김일성 가짜설

해당 항목 참조.

6.3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해당 항목 참고.

6.4 김일성 암살설 등

김정일이 김일성을 암살했다는 설.

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 즉 남북간 지도자들의 만남이 최초로 성사될 뻔 했는데, 김일성의 사망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성사되었다.

이 급작스러운 사망은 아직까지도 떠도는 김정일의 의한 김일성 독살설의 배경이 된다. 이미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을 원치않아 아버지 김일성을 독살했다는 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 일을 두고 "내 기에 눌려 죽은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 그 와중에 드립치는 YS 그런데 국가 원수가 이런 농을 칠 정도로 김일성 사망 전후 남북간 분위기가 꽤 부드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김일성의 급사 후에 남한내에서 냉전 세력들이 북한의 체제붕괴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초강경발언을 쏟아내고 조문논쟁[51]까지 불거지자 분위기는 급작스레 긴장으로 치닫는다. [52]

독살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원체 떠받들고 악화되는 경제상황을 왜곡해서 보고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왕이면 김 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경의선 철도 보서 작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냐고 철도상에게 물었는데, 철도상은 대답을 못하고 쭈뼛거리기만 한다.

이에 김일성이 담배곽으로 책상을 툭툭 치면서 "아니 배짱 좋던 사람이 왜 그래? 김영삼이가 오는게 마음에 안 들어?"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이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는데, 철도상이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폭탄 발언을 하면서 삽시간에 공기가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아니, 자금이라든가 물자가 부족한건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반문했고, 철도상은 마침내 배급이 중단된지 3개월이 지나 동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한다.[53]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일성은 즉시 김정일에게 전화해서 "이 김일성이가 이팝과 고깃국을 약속하며 정권을 잡았는데 배급조차 못 준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 그따위로 일할 거면 당장 당 조직비서를 그만두라" 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설마 김일성이 그런 개념 발언을?[54]

김일성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유가 철도상 때문임을 파악한 김정일은, 관련 장관을 호출하여 마구 혼을 냈고 후술할 "통일을 주장하는 자들은 다 반동"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 직후의 행동이 의미심장하다. 이미 묘향산초대소에 있던 김일성에게 의료진들이 매우 과로하여 쉬게 해야겠다고 진언하여 승낙을 받아 의료진이 잠시 철수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김일성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

이것은 북한에서 떠도는 상당한 괴담이고, 월간 신동아에서는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조합하여 김정일의 고의적 의료진 철수와 김일성 방치로 결론을 내리고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실제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일성 경호를 담당하던 호위총국 제1국의 요원이 김정일을 향해 총질을 했다는 괴담, 호위총국이 숙청 재개편된데에는 김일성 암살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 김정일이 주역할을 했다는 괴담도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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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의 김일성과 김정일. 지 애비 꼬라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실제로 말년에는 김정일의 권력이 매우 강하여 김일성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증언이 적지 않기는 하다. 심지어 말기에는 김일성이 김정일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바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권력을 어느정도 유지하려면 통일 문제를 진전시켜야 한다는 계산을 해 남북 고위급 회담 등을 전격 추진하는가 하면 김달현 부총리를 비롯한 개혁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직접 서울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당시 김정일은 "통일, 통일하는 것들은 다 노망난 것들이야!"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 [55] 김일성이 주재한 회의에서 김달현이 "더 이상 공산주의로는 안됩니다. 경제개방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김정일이 화를 내며 제지하다가 김일성이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라고 말한 일화까지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공교롭게도 남북정상회담 바로 직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이후 김정일은 후계자를 논하는 것 자체를 반역이라 간주하고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김정일을 너무 일찍 후계자로 내세우는 바람에 권력을 모두 빼앗기다시피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전철을 밟기 싫었다는 설이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은의 후계체계는 빠르고 급작스럽게 진행되었고, 이것 역시 김정일이 권력을 빼앗기는 것을 매우 두려워 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차피 1980년대, 90년대 들어 7~80대에 접어든 김일성이 죽는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리가 없었고 실제로 1990년대 초반 남북 고위급 회담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김일성의 건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었다. 특히 황장엽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 김일성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노인이었으며, 그해 5월에도 눈 수술을 받아 휴식이 필요했는데 지미 카터 전 대통령를 만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황 비서는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남한 주민들이 항일영웅을 만세로 맞이할 것이고, 김일성이 통일의 주도자가 될 것인 양 아첨보고를 올리는 바람에 크게 들떠서 무리하게 정상회담을 진두 지휘하다 과로가 겹쳐 사망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서 김정일 암살설이 정말 신빙성이 커보이는 이유는 바로 김정일의 후임인 김정은이 자기 고모부이자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일성의 사위인 장성택을 정말로, 그것도 아예 대놓고 살해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김정일의 아들이 이런 패륜을 보여줬으니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를 암살해도 정말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사실처럼 보여지는 근거인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 암살설이 나도는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김정일 통치기의 북한에 실망한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김일성 시절을 낙원으로 여기는 심리가 생겼고(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으니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에는 김정일 탓으로 생각하다 보니, 김정일에 대한 분노가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명확한 증거를 내놓을 수 없는 그냥 떡밥일 뿐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파일:충격 북한 패륜사건[이만갑].mp4_20160428_162347.156.jpg]][56]
그리그 그 후 김일성이 사망한 장소인 특각을 철거 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일성이 잠시 앉았다는 벤치를 사적지라고 보존하는데 그가 있었던 별장을 치워버린다는건 암살설에 힘을 주고 있다.

6.5 족보 집착증

묘하게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 33세손(시조로부터 32대손)으로서 6.25전쟁 중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 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또한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57]인 김태서[58][59]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 [60].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쪽으로 닿는다. [61]경주시야말로 진짜 그의 뿌리인 셈.

참고로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7 어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 인민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며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업적을 옹호 고수하고 계승 발전시켜 주체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하여 나갈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서문 中.

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62]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생활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63]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장거리 미사일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1. 본처, 1914년 강원도 출생.
  2. 이 기간중 1974년부터 94년 까지는 김정일의 실권 장악 기간으로 보기도 한다.
  3. 농담이나 구라같이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미군정은 일본이 패망 후 다시는 전쟁을 발발하지 못하도록 농업국으로 전락시켜 놓으려고 했었다. 당장 미군정이 일본에 시행하려 했었던 것이 기업집단군 해산이었다.
  4. 북한/경제 문서 참고.
  5. 그나마 미국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원조를 줄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 원조를 계속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결국 독일로 가서 원조를 청했고 이때 독일에 광부, 간호사 등으로 인력을 파견하는 것으로 외화를 벌어들인 것이다.
  6. 사실 대한민국 건국에 있어서 징병제가 검토되었긴 했지만 이걸 가속화시킨 게 바로 6.25다. 만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징병제를 시행했어도 서독처럼 융통성있게 시행했을 것이다.
  7. 이로 인해 생긴 별칭이 북측 공산권 괴뢰정부를 뜻하는 북괴다.
  8. 독실한 개신교도로 김일성도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고 한다. 반석이란 이름도 베드로의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9. 무엇보다 티토는 소련의 도움없이 자체적인 세력으로 유고슬라비아를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시켰고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시킨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10. 정상진은 제2차세계대전 당시 소련 해군 중위로 태평양함대 예하 해군보병연대에 소속되어 한반도 상륙작전에서 활약해 적기훈장을 수여받았고, 청진시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11. 공산주의에 대한 극동 최종방어선은 필리핀-일본으로 정하는 애치슨 국방장관의 선언이다.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는데 이는 6.25전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12. 이를 가리켜 평양 철수라고 한다.
  13. 일본의 입장에서는 사실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알려져있다 싶이 일본은 전후 군대가 사라지고 자기 방위만 가능한 자위대만 남았기 때문.
  14. 그나마 갑산파들도 김정일의 승계 과정에서 숙청된다. 지금 남은건 이른바 '백두파'라 하는데 한마디로 그냥 김씨 왕가 후빨러들이다.
  15. 그렇다고 김일성이 오늘내일 하는 수준이였다고 보면 곤란하다. 정당성이 어찌되었든 제일 힘 쎈 놈이 짱이라고,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어 마냥 무시할수는 없는 존재였다. 박헌영만 해도 본인의 실질적 기반은 죄다 남쪽에 남겨진채로 자기 몸만 북쪽에 온 케이스라 불안하긴 매한가지였고 실제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
  16. 정치학자 서동만은 다양한 정파가 공존하고 있던 1950년대의 북한을 지금의 북한과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 시기로 보았다. (서동만, 1950년대 북한의 정치갈등과 이데올로기 상황)
  17. 다만 최광은 김일성 통치 말기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해 죽을 때까지 유임했다. 물론 군 상층부에서는 그냥 늙다리 바지사장이라고 뒷담화를 깠다지만.
  18. 등소평이 뒤에서 도와줬기에 가능했지 김일성이 매우 잘나서가 아니다. 등소평이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준건 물론 아니지만.
  19. 북한에도 선거 제도가 있긴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김정일도, 김정은도, 그 외 여러 권력자들도 전부 다 투표로 뽑힌거다. 다만 후보는 단 한명 뿐이며, 투표소에 보위부 요원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어서 반대표를 행사하면 누가 썼는지 다 보이니까... 그 외 다른 투표라고 해봐야 조선로동당에서 하는 거수 투표 정도가 있지만 주체가 그 조선로동당이니 결과가 너무 뻔하다. 사실상 말 그대로 그냥 쑈일 뿐이다.
  20. 제목은 7월 4일이지만 실제로는 7월 9일자 뉴스이다. 3분 40초에 운지천이 나온다
  21. 김일성은 중졸이다. 그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중졸 학력이면 상당한 근대식 교육을 받은 것이다.
  22. 사실 마오쩌둥은 후난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베이징 대학에서 약 10개월 사서로 근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공 수립 후 저지른 일들이 워낙 병크가 커서 학교도 제대로 안다닌 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마오쩌둥의 문제는 그가 꽤 박식한 사람이었지만 학식과 감성의 조화가 없어서 마치 현실의 일을 역사책 안의 일처럼 아무런 감정없이 처리하여 생명을 경시했고 일부 분야에 있어서 심각할 정도로 무지하여 지식의 균형이 없었다는 것이다.
  23. 실제로 마오쩌둥이 이끄는 군대의 규율을 보면 농민들에게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정당하게 교역하며, 힘든일이 있으면 도와줄 것 등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민심을 얻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고, 군기가 매우 엄하여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 약탈, 강간 등을 저지를 시에는 그 날 부로 처형할 정도였다. 그 반대로 국민당은 온갖 부정부패와 수탈로 민심을 잃어 끝내 국공내전에서 패하게 된다.
  24. 스탈린이 특히나 미국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무서워했던게 바로 핵무기다.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게 모스크바에도 투하될까봐 엄청나게 무서워했다.
  25. 굳이 안써도 되는 말을 다는것같지만 세상에 어떤투자든 미약하게 나마 리스크가 있다. 금 수백톤 갖고있어도 금값이 폭락하면 손해이지만 아이들에 대한 교육복지는 다른 투자와 달리 당장은 손해일지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가장 효율적인 투자다. 그 아이들이 잘배우고 잘커서 인재가 되어 나라를 훌륭하게 이끌면 교육비용과 복지비용에 수백배는 뽑아낸거나 마찬가지 이기때문.그리고 다른 투자들은 원금을 까먹을수도 있으나 교육은 최소한 원금은 까먹지 않는다.(매년 불의의 사고로 죽고 잘못된 길로 빠진 학생이 매년 꾸준히 나와도 사회로 진출해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것이 훨씬 많다는걸 생각하면...)매년 대한민국의 교육비로 지출한 것과 미래에 나라를 이끌 인재가 없는것중 어느게 리스크가 큰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며, 괜히 국가백년대계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복지는 그 나라의 흥망이 달린 투자이며, 결론적으로 보면 본전이면 본전이지 결코 손해를 볼수없는 투자이기에 윈스턴 처칠이 가장 안전한 투자라고 한거다.
  26. 사실 애초에 기본적인 군사적 식견이라도 있었다면 저 위의 발언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7. 약 170명이 동원된 반면 보천보에 있던 일본 병력은 군도 아닌 순사 5명이 전부였다.
  28. 당시 중공군은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엄한 군기를 유지하여 약탈이나 민간인 학살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그 날로 처형할 정도로 군기가 엄하였고 대민지원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풍조가 강했다. 실제로 한국군이나 UN군 포로에 대한 처우도 중공군이 개입한 다음에야 좋아졌다고 한다.
  29. 개신교 미션스쿨인 숭실학교(지금의 숭실대학교 맞다.)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30. 베드로의 그 반석 맞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장로 강돈욱의 딸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31. 김일성의 주석궁 안마사 내지는 간호사. 김일성의 많은 자식중 한명인 김현의 모친으로 이외의 알려진 것은 없다.
  32. 기쁨조 출신이라고 한다.
  33. 김일성 말년에 전담 간호장교 였다고 한다.
  34. 1993년~1989년 9월까지 부주석, 2003년부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
  35. 김일성과 제갈씨에서 나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36. 1987년생.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다.
  37. 출처
  38.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39. 1966년과 1970년에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40. 가장 유명한 작품이 조선의 별 연작영화이다. 의외로 김정일이나 김정은과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온다.
  41.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등. '正(바를 정)' 자 돌림.
  42. 물론 죽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북한에서 숙청된 사람 vs 대만 함락되면 숙청되었을 사람+일본 안 일어났으면 죽었을 사람+기타 친일파들+소위 빨갱이 사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
  43. 6.25 전쟁 안 일어났으면 남로당 가담 혐의로 그대로 나가리.
  44. 한국전쟁 안 일어났으면 중공군이 침공해서 멸망.
  45. 전쟁 특수 없었으면 이케다 하야토의 망언으로 실각.
  46. 늘그막에는 173cm까지 줄었다.
  47.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였음을 감안(지역차가 좀 큰 편이라, 전라도 지방은 161~162cm, 함경도 지방은 167~168cm이였다.), 현재 대한민국 평균키로 환산하면 187~188cm이 된다.
  48. 1970년대에 김일성과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 티토의 추청키는 대략 172cm정도.
  49. 참고로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얼굴이나 성격 등.
  50. 참고로, 지미 카터가 만난 독재자 중 가장 빨리 죽었다. 남한의 박정희도 4개월은 버텼건만... 만나지도 않았는데 단지 지미 카터의 방북만으로 죽은 아들내미보다는 나을지도?
  51. 민주당 이부영 의원이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북에 공식적인 조문단을 파견것인가?'는 질문을 하는데, 이에 조선일보를 선두로 우파언론들이 친북행위라면서 대대적인 색깔론 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엄청난 논쟁끝에 정부는 조문거부 결정을 내리고, 이후 김영삼 정부 내내 더이상의 남북대화는 없었고, 국제적인 북핵협상에서도 완전히 배제된다. 반면에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애도성명을 발표하고, 제네바에서 북과 핵문제를 협상하고 있던 갈루치 차관보가 직접 북한 대사관에 찾아가서 조문을 했다. 일본은 자민당(보수)과 사회당(진보) 모두 당대표급들이 조총련 본부를 찾아가서 직접 조문하고, 합동조문단 파견까지 결정하였다.
  52. 당시 한총련을 장악한 주사파 그룹들이 비밀리에 김일성 분향소를 차렸다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에 PD계열들이 대자보를 통해서 김일성 분향소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도 논쟁이 격화되었다. 이 외에도 PC통신 하이텔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약칭 전대기련) 동호회에서 한 회원이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게시글을 올리자 전대기련 대표 김모씨가 구속된 사례도 있었다.
  53. 사실 누가 됐든간에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게 맞다. 자금 및 물자를 조달하는건 사정에 따라 유동적이지만 사람을 동원할 수 없다는건 정말로 사람이 없는 등의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 애초에 북한에서 자금이나 물자가 부족한 건 그냥 늘 있는 일 아냐?
  54. 아무래도 김일성은 나름 고생해서 건국해서 그런지, 국가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긴 했다. 결과가 시망이라 그렇지. (...)『평양은 서울을 꿈꾼다』를 보면 김일성은 매일 아침 일어나서 공장이나 발전소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거 보고는 "오늘 공장이 잘 돌아가는구만" 하면서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는데, 어느날 흰 연기만 뽈뽈나는거 보고는 기분이 나빠서 빨리 발전소를 돌리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계속 차질이 빚어지자 이유가 석탄공급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이유를 파악하고자 개인비서를 노동자로 위장시켜서 탄광에 보냈다. 거기서 비서가 배급이 안 나와서 광산이 정지상태라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직통보고, 당연히 김일성은 노발대발했고 업무담당자들은 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구하느라 죽어나갔다고.
  55. 하지만 정작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처음으로 남한 대통령들과 정상 회담을 그것도 두 번이나 가진 최고 권력자는 2011년 현재까지도 김정일뿐이다. 게다가 당시는 아니었지만 후에 남한 대통령이 되는 또 다른 사람과도 회담을 했다. 뭐야 이거 츤데레???
  56. 출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
  57. 라고 했지만 경주 김씨가 인구가 많아 그렇게 표현했을 뿐, 전주 김씨가 장손(長孫) 집안이다.
  58. 그런데 이 인물, 백과사전을 보면 알겠지만 권세를 믿고 탐욕스럽게 전횡을 휘둘렀던 상당히 평이 나쁜 인물이다.
  59. 그런데 셋째아들 김경손이 굉장히 충직한 무신이고 최씨 무인정권에도 협조하지 않은 것은 아이러니... 견부호자의 실례로 들 수 있겠다. 참고로 전주김씨 대부분이 이 김경손의 후손이니 김일성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60. 17세기, 김일성의 8대조인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61. 이러거나 저러거나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 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전주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더더욱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쉽게 말하자면 지역감정으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62.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이다. 전쟁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듯
  63. 결정적으로 북한이 먹일게 있어도 평양한테만 올인하고 일부러 안먹여주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배불려주었다간 천안문 6.4 항쟁 같은 일을 벌일거라 생각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