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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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의 고대 왕조 백제

한국의 역사
청동기
시대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후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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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기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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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고구려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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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소련
군정
북한
한사군
옥저
동예
신라태봉,후고구려
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백제
百濟
[1]
[2]
공식명칭백제(百濟)[3]
위치황해남도 동남부, 경기도, 영서 일부,
충청도, 전라도 일대[4]
인구380만명 (76만호)?[5]
수도위례성[6]웅진[7]사비[8]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어라하(於羅瑕) / 건길지(鞬吉支) / (王)
언어백제어, 마한어 등
민족예맥, (韓)족 등
종교불교,도교,토착신앙 등
존속기간기원전 18년[9] ~ 660년 7월 18일 (678년)
주요사건기원전 6년 하남위례성 천도
260년 관등 제정
330년 벽골제 축조
384년 불교 전래
433년 나제동맹 체결
529년 오곡원 전투
538년 국호 남부여 명명
554년 관산성 전투
660년 황산벌 전투
성립 이전마한
멸망 이후통일신라/백제부흥운동

1.1 역사

1.1.1 건국

貴須王者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귀수왕(근귀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세(16대) 왕[10]입니다.
- 『속일본기』 연력 9년 7월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아들온조왕이라 하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의 건국 전설에 의하면 온조가 비류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인천)과 위례(경기도 하남)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나라를 동생인 온조에게 내주었다고 한다.[11] 또는 신채호의《조선상고사》에 보면, 소서노가 건국했다고도 한다. 《주서》를 비롯한 중국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12]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계층이 그 지역 토착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향후 백제가 보여주는 국제적인 감각과 한때 고구려를 압도할 정도의 국력을 보면, 이 지배계층이 단순한 이주세력이 아닌 국제적인 커넥션이 있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건길지 항목 참조.

고려시대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이름을 바꾼다.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 호칭은 성왕 시절에만 잠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백제를 부흥한답시고 국명을 백제(후백제)로 지었고, 이 지역을 계속 백제로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13]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국의 나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기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있다. 그리고 웅진(熊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얼추 쿠다라와 곰나루의 발음이 비스무리한 거 같기도 하다.[14] 한편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해당 지역의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구드래[15][16]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외한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사서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여기서는 "백제(伯濟)"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명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0년에 최초로 중국동진왕조 및 열도와 수교를 맺었다고 하며,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이왕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한국사학계에서는 풍납과 몽촌 양 토성의 발굴로 인해 고이왕 이전의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17]

1.1.2 발전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는 아니었다.[18]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유역을 포함한 곳은 마한의 영향권이고, 마한지역에서 목지국[19]이 그 패권을 쥐고 있었는데, 목지국의 왕은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20]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백제는 마한과의 대립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초기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고이왕(재위 234년~286년) 때 율령반포 및 중앙집권이 이루어졌고, 침류왕(재위 384년~385년) 때 불교를 수용한다.

백제의 최대전성기는 근초고왕(재위 346년~375년) 시대다. 근초고왕은 목지국을 공격(366년)하는 등 마한 세력을 정벌하여 남쪽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21] 이전까지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으나 근초고왕대인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2년 후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황해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371년)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22]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초고왕 만년에는 국력의 쇠퇴가 시작되어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던(369년) 수곡성[23]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다시 빼앗겼고(375년), 신라의 국력이 점점 강해져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373년)도 바라만 볼 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1.3 위기 및 혼란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재위 375년~384년), 진사왕(재위 385년~392년), 아신왕(재위 392년~405년)대를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었다. 근성의 사나이 아신왕(재위 392년~405년)은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먼저 싸움을 걸었다가 도리어 한강 이북의 58성 1400촌을 비롯하여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고 결국 아신왕은 광개토대왕 앞에 항복하여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를 맺었다(396년).[24] 하지만 이후에도 아신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위한 전쟁 준비를 계속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징접을 피해 왜, 신라 등으로 대규모로 도망가서[25] 군대를 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결국 고구려 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제 자체 국력으로 전쟁을 벌이기 힘든 상황에 처하자 아신왕은 우호관계에 있던 를 끌여들여 군을 주력으로 하여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던 신라(399년)와 고구려(403년)를 침공했으나, 역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에게 모두 참패했다. 아신왕의 무모하고 편집증적인 전쟁 도발이 번번히 실패하면서 백제는 전성기의 위세가 순식간에 꺽이고 국력이 급격히 기울었다.[26] 이후 백제는 멸망할 때까지 아신왕대에 기울어진 국력을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아신왕은 과 교류를 적극 지원해서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해졌는데, 태자(전지왕(재위 405년~420년))를 일본으로 보내 장기체류시키기도 했다. 전지왕의 경우 일본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 국제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유학보낸 것과 비슷한 거랄까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왕과 일왕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도 알 수 있다. 물론 백제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볼모라고 생각될 정도로 안습한 상황이었으니.

이후 장수왕(재위 412년~491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의 고구려의 전성기 동안 백제는 계속해서 어린왕이 즉위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는 일이 반복되면서[27] 잦은 섭정과 이를 둘러싼 권력 암투 등으로 왕권이 약해지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21대 개로왕(재위 455년~475년) 때,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다시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족들이 고구려군에게 처형되는 등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475년).[28]

나제동맹 관계에 있던 신라가 보낸 지원군과 백제귀족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이 함략되었기 때문에[29] 신라에서 지원군을 얻어 돌아오던 문주[30]는 한성이 함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길로 신라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웅진(공주)에 새로 도읍을 정하고 문주왕(재위 475년~477년)에 즉위한 후 즉각 고구려에 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한편 고구려 장수왕은 한성을 초토화 시킨 후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충청도에 남성골산성[31]을 구축하고 대전 월평산성을 점령하여 주둔하였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웅진을 치지 않고 일부 병력만 주둔시킨채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다.

하지만 이미 왕권이 크게 실추되어 좌평 곤지, 해구 등의 권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고,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문주왕은 재위 2년 만에 해구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 이어 13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한 삼근왕(재위 477년~479년)역시 권신 해구, 진로 등에게 섭정을 위임해야 했으며, 즉위 2년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1.3.1 왕권과 지방 세력의 대립

백제는 삼국 중에서 전통적으로 국왕의 힘이 제일 약했던 국가로 추측된다. 전반적으로 고대 삼국의 왕권은 고려나 조선과 같은 전제왕권만큼 강하지 못했는데, 특히 백제는 왕권과 귀족 및 지방 세력의 대결이 끝이 없었던 국가였다. 백제 건국 세력은 북방에서 내려온 유이민 세력이었고, 이후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기존 마한지역을 차례로 정벌하면서 국가의 확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백제 지방 세력은 잘나갈 때 발목 잡는 것은 기본이고, 나라가 망할 지경일 때도 대립 양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개로왕 때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도 백제의 귀족지원군은 늦장을 부리다 출동해 신라지원군보다도 늦게 한성에 도착했다. 장수왕에게 한성을 함락 당한 후 천도한 웅진시대에도 반란이 잦아서 "문주왕-삼근왕-동성왕"의 초기 왕들이 모조리 변란으로 사망했고, 멸망 시기에도 이 대립이 결정타가 되었다.[32] 때문에 국왕들은 조금만 국력이 회복되면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33], 지방 세력 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몰아내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 그래도 백제 부흥 운동이 신라에 큰 위협이 될정도로 크게 벌어지는 데는, 지방에서 백제의 여력이 상당부분 남아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단순히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콩가루 집안이었으면 백제는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도 백제가 끝까지 잘나갔다는 것은, 단순히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기보다는 그만큼 지배계층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 중에서 토착민중들의 참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피지배층들은 외지에서 건너온 지배층들이 지들끼리 뭔짓을 하든 신경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34]

1.1.4 중흥기

백제의 상징 칠지도

백제의 중흥기는 동성왕(재위 479년~501년), 무령왕(재위 501년~523년)과 성왕(재위 523년 ~ 554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 말 ~ 6세기 중반기 시기였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즉위한 동성왕(재위 479년~501년)[35]은 실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고 시도하고 국가의 재건에 나섰다. 동성왕은 북쪽으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의 일부를 다시 수복하고 남쪽으로는 마한 세력을 정벌하여 전라남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 신라 소지왕과 혼인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하는 등 국가 중흥에 힘을 썼다. 그러나 지나친 토목공사와 만년으로 갈수록 향락으로 인한 불만이 커지는 와중에 동성왕은 좌평이었던 백가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어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의 이복형제가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에 즉위했다.[36] 무령왕은 다시 한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37][38]. 또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마한 세력을 정벌했다.

1.1.4.1 북위와의 전투

삼국사기, 자치통감, 건강실록, 남제서를 보면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484년, 488년, 490년에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다만 전투가 중국연안지대에서 일어난 것인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난다.[39] 이 전투가 성립하려면 한쪽이 바다를 건너서 병력을 보내야 하는데, 북위 쪽에서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기도 힘들고, 백제가 중국으로 병력을 보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연안항로로 이동한다면 북위가 고구려를 지나 백제를 공격했다고 보는 쪽으로 약간 기울겠지만, 연안항로가 아니라 쌩으로 바다를 건너게 된다면 양쪽 다 무리수가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아진다.

백제는 동성왕 때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다가 고구려에게 저지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연안항로를 타고 가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고구려의 해역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백제의 제해권을 의심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번번이 저지 당한 게 아니라면 그냥 예외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전공중에서는 큰 배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게 북위의 도해공격으로 이해하는 큰 근거가 된다.[40]

그냥 아예 위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공격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굳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라는 명칭을 안 쓰고 특별히 "위로"라는 표현을 써서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도 좀 이상해서 확답이 되기 힘들다.[41][42]

1.1.5 나제동맹의 결렬과 대신라 전쟁

성왕(재위 523년 ~ 554년)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현 부여)로 옮겨 왕권 강화와 수도의 방어력 강화를 꾀하였다. 또 동쪽의 신라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가야연맹의 재건을 꿈꾸었으나, 결국 신라의 대가야 유화정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550년에는 신라 진흥왕과 협력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되찾았으나 한강 하류 지역 세력의 반발, 고구려 및 신라의 군사적 압박 등으로 한강 유역에서 철군했고,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신라 진흥왕이 접수하고 말았다.[43] 이에 성왕은 한강 하류 수복을 위해 귀족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제동맹을 깨고 관산성 전투(554년)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신라군[44]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는다.[45] 결국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해 3만명의 군사가 전멸[46]하고, "말 한마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국왕이 전사하고 주력부대가 전멸한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한 위덕왕(재위 554년~598년) 대에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병했다가 패한 관산성 전투에 대한 책임으로 왕권이 크게 축소되고 귀족 세력이 강해지는 등 내정이 상당히 혼란했다.[47] 그러나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기도 전에 고구려와 신라의 잇따른 침공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신라가 가야를 완전히 병합하게 된다(562년). 위덕왕은 거듭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오랜 재위 기간 내내 끈질기게 신라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으나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하였다. 위덕왕 말기에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위덕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함께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마침내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위덕왕은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여 수나라를 도왔다. 그러나 수나라는 패퇴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고구려가 보복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는7세기 초반의 무왕(재위 600년~641년)대에 이르러 회복되었다. 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왕은 재위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한편 무왕은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하며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무왕은 수도를 익산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자왕(재위 641~660년)은 즉위 이듬 해인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전략요충지인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는 것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략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신라의 대한 공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외교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선대 무왕 시절부터 우호관계를 유지해 왔던 당나라에 대한 의리를 깨버렸고, 그 결과 당태종의 분노를 사서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48]

1.1.6 멸망

7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 영토를 적극적으로 침공했으나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왜와 연계한 최종적인 저항도 모두 수포로 돌아간 뒤 신라에 완전히 복속된다.

멸망 직전 백제는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과 향락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심각한 와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향락에 대해서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된 삼국사기에서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애써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 입장에서 굳이 백제 의자왕을 폄하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49] 뿐만 아니라 신라와는 독자적인 견지에 있던 일본서기도 의자왕의 과도한 향락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의자왕의 향락 자체는 사실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의자왕 향락 기록은 656년, 657년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친위쿠데타(655년)가 일어난 직후이기 때문에, 역사적 정황과도 부합되는 측면이 있다.

또 백제 지배층의 분열도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사료가 정확치 않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백제는 멸망을 하기 불과 5년 전인 655년에도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여 33개 성을 함락한 바 있고, 멸망하기 직전인 659년에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50] 그러나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 집착은 많은 내부 불만을 야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655년 친위쿠데타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의자왕은 숙청을 통해 내부 반대세력들을 제거해 갔다. 이 과정에서 의자왕의 성충, 흥수 등 신망을 얻고 있던 충신들까지 제거하였고, 이러한 공포정치로 인해 백제 귀족층의 민심이 급격하게 이반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가 오늘날의 미국처럼 워낙 강력했고, [51] 또한 당나라와 신라의 기습에 당한 것이 크다. 백제 멸망의 원인을 지배층의 분열 때문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무엇보다 백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기 때문에, 딱히 백제 내부가 멸망을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리고 의자왕이 패배한 후로도 백제에서 지속적으로 저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의자왕만 제거한다고 백제라는 나라가 한방에 무너지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백제상태가 여러 지배계층의 연합세력이기 때문에 그 중 가장 큰 백제왕을 제거했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닌 것이다.[52] 사실 백제는 2백년 전에도 이 때와 비슷하게 국왕이 전사하고 수도가 털린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 백제가 망하지는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1.1.6.1 멸망과정

흔히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백제의 계백장군은 남은 군사 5천명을 전부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백제 전군이 5천명이 다였던 것은 아니다. 구당서 등을 참고할 때 기벌포에서 당나라군을 방어한 병력과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존재한다. 5천명이라는 수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고한 것인데 사실 신라본기에도 5천명이 백제군의 전부였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신라본기 태종무열왕편에는 의자왕계백에게 5천명의 군사로 신라군과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그 후 사비성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군의 저항과 병력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으로 볼 때도 계백의 신라군 방어 병력 이외에 최소한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한편 구당서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가 몇만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53]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구당서의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에 대한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기록이 우리의 기록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4]

문제는 이런 전투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마지막 전투 당시의 백제군의 작전에 대한 설명은 남아있지 않으며,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세울 때의 논의 내용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때 흥수는 당군과 신라군을 각각 좁은 길목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의자왕 및 백제수뇌부는 당군과 신라군이 좁은 길목을 통과한 직후에 공격해서 섬멸시키자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는 신하들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소로를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당 중에서 어느쪽과 먼저 싸울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작전내용과 실제로 요격하는데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면 두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그 이외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첫번째는 백제군은 내선의 이점을 살려 먼저 계백이 소수의 군사로 신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전력을 기울여 당군을 격파하고 군을 돌려 다시 신라군을 격파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군을 요격한 백제군의 숫자가 신라군을 저지한 계백의 부대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단, 이 해석대로라면 수도 가까이에서 결전이 벌어진 것은 백제의 작전대로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계백이 출전할 때는 아직 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처자식을 죽여야 할 정도로 비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두번째는 반대로 백제군이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먼저 신라군부터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라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탄현을 넘은 것과는 달리 당군은 강어귀에서부터 백제군의 요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백제군은 강어귀에서 당군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던 것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당군이 백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히려 신라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에 백제군의 작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다가, 신라군의 위협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당군과의 갑작스러운 전투에 휘말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본기 의자왕편에 의자왕이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과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 중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된 점도 설명가능하며, 계백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이미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벨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과도 부합된다.

또다른 의문점은 당군이 어느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의자왕과 신하들이 작전을 논의할 때는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벌포를 막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벌포에서 백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및 백제본기에는 '웅진강' 입구에서 상륙작전으로 백제군을 격파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오며, 상륙한 곳은 강의 동안(東岸. 신당서에는 좌안(左岸)으로 표기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웅진강과 백강이 같은 강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강인가 하는 점이다. 강 이름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웅진강과 백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생각한다면, 백제측은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을 예상했는데 당군이 실제로는 웅진강을 선택함으로써 백제군의 의표를 찔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설은 백강과 웅진강은 모두 같은 금강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신라본기에서 기벌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장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55] 그런데 통설을 따르는 경우 금강 하구에서 강의 동안은 기벌포와는 반대편인 군산 방면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아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백강이나 웅진강을 금강이 아닌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참고로 일본서기 제명기에는 당군의 상륙지점이 미자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자진이 곧 기벌포인지 혹은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

당군이 신라군과 합류한 시점도 논란의 대상이다. 구당서나 삼국사기는 신라군이 합류한 것이 백제와의 결전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한 다음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산벌 전투 이후 사비성 함락까지는 백제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백제군과의 결전 부분에 당군만이 언급될 뿐 신라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신라군의 합류는 백제군과의 결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전이 벌어진 곳이 사비성에서 불과 20~30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당군이 후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해서 곧 사비성에 입성했다고 기술된 점에서 신라군이 그 전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군의 합류시점이 백제와의 결전 이후라면, 당군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약속한 날짜에 도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의 별동대의 저항을 처리하지 못해서 날짜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므로 소정방이 격분해서 신라 독군의 목을 베겠다며 날뛴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백제 멸망 과정과 관련하여 2007년 새로운 유적의 발굴로 새로운 떡밥이 투척되었다. 예식진 항목 참조. 예군 항목도 보면 알겠지만 예씨 일족은 백제 멸망 때 당에 빌붙어 크게 출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1.1.6.2 백제 유민의 집단 일본 이주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의 여러 유력씨족들은 신라 밑에 있기보다는 우호가 깊던 일본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하여 양잠기술 등 고급기술을 지닌 씨족이나 학문, 과학 분야의 씨족 등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떠났고, 야마토 조정은 이 횡재를 맞아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그 능력을 흡수하여 국력과 왕권을 강화했다. 고구려 유민 일부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56]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은 일본 고대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백제 멸망 직후인 671년 갑자기 국호를 바꾸고 이어 수도를 새로 짓고 율령을 만드는 등 급작스런 변화와 발전을 이룩한 것이 백제 유민들이 몰려온 충격파의 영향인 것으로 보고 있다.

1.1.6.3 백제 유민의 신라 편입

많은 귀족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백제의 지리적 위치[57], 백제의 땅에 모든 기반을 가지고 있었을 지배층들의 경제적 입장[58], 백제 내의 모든 세력들이 외국과의 대규모 왕래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정도의 선단을 보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음을 감안할 때[59]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보다는 당연히 남은 백제인이 훨씬 많았을 것이며, 이들이 후에 후백제까지 이어지는 유민의식의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0]

신라 또한 당장 초강대국 당나라와 전쟁을 수행했어야 했던 입장이었던 것을 따져볼 때 무리해서 기존 백제 지배층들을 몽땅 축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들의 기존 지배권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포섭하여 당과의 전쟁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서로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61]

그런 배경에 의해 백제의 유민들은 천민으로 강등당하지 않고 신라의 전통적인 포용정책[62]에 의해 신라 5두품 귀족에 편입되었다. 고구려계 유민의 경우 왕족이 진골, 귀족은 6두품으로 대우 받았던 것에 비하면 백제계는 낮은 대우이며 차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고구려계는 사실상 대부분이 안승이 이끌고 온 군사들과 백성들인데, 이들은 신라의 경계선 바깥 즉 대동강 이북 지역에 거주했던 자들로서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놓인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남하하여 신라 영토로 들어와 귀순한 경우이다. 게다가 안승이 이끌고 온 고구려계 병사들은 귀순 직후에 벌어진 나당전쟁에서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여 진골 및 6두품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1.1.6.4 백제 부흥 운동

사비성과 웅진성이 차례로 함략되어 백제가 멸망(660년 7월 18일)한 후, 당나라는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63]을 비롯하여 약 1만명의 백제인을 당나라로 압송했다(660년).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백제의 장수 출신인 귀실복신, 도침 등이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왕에게 요청하여 일본에 볼모로 있던[64] 왕자 부여풍을 귀국(662년 5월)시켜 풍왕으로 추대했다. 이 와중에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백제 태자 부여융은 당으로 귀화하여 당나라 장수 신분으로 돌아와 당군을 이끌고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부흥운동을 토벌했다. 한편 백제부흥군 지도부 내에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663년 9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유인궤, 부여융 등이 이끄는 당군이 백제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포위했고, 당군의 170여척의 배가 주류성 입구인 백강을 둘러쌌다. 백제부흥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가 2만 7천 대군과 1000척의 함대를 파병하여 백강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나당연합국에 궤멸됐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어 주류성이 함략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사실상 멸망하고 말았다.

본진인 주류성이 함략된 후 아직 임존성에 백제부흥군 잔여세력이 있었지만, 그간 부흥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가 돌연 부흥군을 배반하고 당나라군에 투항한 후 당군을 이끌고 나타나 임존성을 공격했다. 결국 임존성의 지수신이 패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664년). 임존성 함략 직후 664년 4월 사비성 봉기가 일어났지만 진압당했다.

백제 멸망 직후의 부흥운동은 아니지만 견훤후백제의 경우도 백제 유민 의식이 기반이 되었다는 것에서 부흥운동의 연장선으로 볼 순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고려시대 무신정권기에 있었던 이연년 형제의 난 때 백제 부흥을 주창하기도 하였으나 여몽전쟁 이후로는 삼국 유민 의식이 완전히 소멸하면서 삼국 모두 더 이상의 부흥운동은 없어졌다.

1.1.6.5 소백제

사비성과 웅진성의 함략되면서 생포되어 당나라로 압송(660년)된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군의 장수가 되어 당군을 이끌고 돌아와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부흥군을 토벌했다(...). 부여융은 663년 백강 전투에도 참전하여 백제부흥군과 왜군을 궤멸시키고 주류성을 함략했다.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기본 백제 영토의 많은 부분이 직접 신라에 귀속되었고, 이에 당나라는 기존의 5도독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한 후 나머지 네개의 도독부를 폐지했다. 부여융은 665년 웅진도독부 도독에 임명되어 괴뢰국 백제 왕을 자처했다.그러나 곧 나당전쟁이 발발했고(669년), 전세가 신라쪽으로 기울자 결국 당나라의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백제 전역을 완전히 편입했다.

당으로 돌아간 부여융은 나당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676년 요동의 건안성에 웅진도독부를 세우고, 백제 멸망(660년) 당시 당나라로 압송된 약 1만명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 지배했다. 이를 소백제라고 부른다. 당나라에서 부여융에게 내린 작위는 대방군왕, 옛 백제왕들과 같은 동일한 직위였다.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측천무후 대에 대방군왕으로 임명된 것을 끝으로 작위 세습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을 보면 8세기 초에 소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의 역사서 구당서는 이 건안성이 발해에게 흡수된 것을 백제의 멸망이라고 보고있는데, 이는 건안성으로 이주한 백제유민들을 염두한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리고 2009년 괵왕 이옹과 그의 부인 합장묘가 발굴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화제의 이유는 그녀의 성이 '부여' 백제 왕족이라 멸망한 이후의 백제에 새로운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1.2 일본과의 관계

4세기 이후까지 일본 열도는 아직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기나이의 야마토 정권을 주축으로 하여 호족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백제가 왜에 전해준 문물은 건축, 토목, 제철, 목마, 양초, 직조, 양응, 의약, 음악 등 매우 다앙했는데, 생활에 필요한 분야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왜 사회가 일상생활에 필요하면서도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문물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왜는 또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이념으로 기능하는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였다. 백제가 유교를 왜에 전수해 주었다는 것은 근초고왕이 아직기와 박사 왕인을 왜에 파견하고 또 논어와 천자문을 보내주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후 백제는 오경박사 등을 왜에 파견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불교는 사비도읍기에 성왕이 왜에 전해주었다. 이후 백제는 많은 승려와 사찰 건립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계율을 가르치고, 사찰 건립을 도왔다. 한편 승려 관륵은 승관 조직을 정비하여 교단의 기율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천문지리, 둔갑, 방술 등 도교 사상도 전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왜가 유교, 불교, 도교 등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백제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백제가 왜에 선진 문물을 전수하는 방법은 기술자들이 도왜[65]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들 도왜인들은 자신의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바탕으로 왜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들어갔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백제와 왜의 관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1.3 백제의 문물, 제도, 사회

1.3.1 사회

백제의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 전쟁터에서 도주한 군사, 살인자는 참수에 처했다. 도둑귀양을 보내고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게 하였다. 관리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때는 종신형에 처하고, 3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도록 했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대성팔족이라 불리는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성팔족은 왕실과의 혼인이 허락되어 외척이 될 수 있는 왕비족이다. 당대의 왕비를 배출하면 '길사'라고 하며,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이 된다. 신분제는 관등,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관직, 복색,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신분층 가운데 제1층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제2층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제3층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백제의 귀족층은 중국과 교류가 빨랐으며,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투호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

1.3.2 관직

제1품좌평(佐平)내신좌평(內臣佐平) / 내두좌평(內頭佐平) / 내법좌평(內法佐平) /
위사좌평(衛士佐平) / 조정좌평(朝廷佐平) / 병관좌평(兵官佐平)
제2품달솔(達率)북사에 따르면 정원은 총 30명이었다고 한다.
제3품은솔
제4품덕솔(德率)
제5품한솔(扞率)
제6품나솔(奈率)나솔까지가 관(冠)을 은화장식했다고 한다.
제7품장덕(將德)
제8품시덕(施德)
제9품고덕(固德)
제10품계덕 (季德)
제11품대덕(對德)
제12품문독(文督)
제13품무독(武督)
제14품좌군(佐軍)
제15품진무(振武)
제16품극우(克虞)

1.3.3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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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행정구역이 바로 군사제도의 형태의 군사 행정제도 체제였다. 따라서 행정체제가 군사 편제라고 볼수 있다. 중앙은 달솔이 지휘하고 지방인 방은 방령이 지휘관을 맡았다. 즉 좌평 혹은 지휘관->달솔->방령체제였는지는 애매한 편이다.

백제에 싸울아비-무절이라는 조직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싸울아비라는 말 자체가 20세기에 튀어나온 용어이며 무절이라는 용어도 위서의 용어이기에 백제에 고구려와 같은 경당(扃堂)체제가 있었는가 여부는 불분명 하다. 백제도 고대국가들처럼 기병-보병-궁수의 병과 체제로 있었고 주력이자 정예병은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나 상대적으로 영토가 목축지대가 아닌 지역인 경기-충청-전라도에 분포해 있었기에 기병보다는 보병이 주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이는 훗날 후백제의 사례에서도 유사하게 볼수 있다. 백제도 북방에서 내려와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찰갑을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형태였다. 물론 한반도 남부의 보편화된 갑옷이었던 판갑도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와 다르게 혼용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군은 최대 3만명 규모까지 원정시에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과 중흥을 이끈 백제 성왕시절의 동원능력을 보면 3만명 규모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군의 총 병력이 어느규모인지는 불분명하다.

백제의 수군 역시 백제가 제해권을 강력하게 잡았다라는 주장이 나돌지만... 백제가 그렇게 강력한 해상통제력을 발휘했다라고 뒷받침할만한 사료는 부족한 편이다. 하지만 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일본과의 적극적인 교역을 해왔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의 해상력을 확보하는 수준의 수군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이나 점차 쇠퇴한 형태가 된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고구려에 의해 서해의 해상통제권의 영향을 받았던 점이나 백제 멸망 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점을 기인해본다면 그러할 것이다.[66]

1.3.4 언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고구려계 유이민들의 영향으로 부여계 언어를 썼을 것이고, 후대로 갈수록 마한계 언어적 성향이 짙어졌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일단 백제 존속 시기에 성립한 중국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언어와 복장이 고구려와 대략 같다.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梁書』 卷54 「列傳」48 '諸夷'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의 귀족들은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 등을 이유로 백제의 지배층들은 부여계 언어를 사용했고 백성들은 한(韓)계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백제는 지배층들과 백성들의 언어가 서로 다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신하들은 왕을 주상, 전하로 불렀고 백성들은 나랏님, 임금님으로 불렀으므로 왕을 일컫는 어휘로 다르다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백제인들의 인명, 백제의 지명을 통해 백제어를 유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명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67]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백제 목간이 발견되어 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중 향찰 표기가 눈에 띄는데 백제의 향찰 표기가 신라보다도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3.5 연도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를 써서 년도를 표기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60갑자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百濟)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에도 "甲寅年正月"로 60갑자가 사용되었다. 일본서기이주갑인상을 미리 내다보고 대비하신 현명한 조상님들

1.3.6 종교, 문화, 역사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유학이 발전하였으며 고흥이《서기》를 편찬했다. 또한《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등의 역사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거라는 설이 있으며 이 서적들은 현재는 현존하지 않는다.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천자문논어를 전수했고,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대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시기인 384년에 서역승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성왕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불교 사상에 심취한 법왕은 불교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민간에서 기르던 매를 야생에 풀어주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는 도구들을 불태우도록 했다.

백제불교는 계율 연구가 활발했다. 백제 승려 겸익은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도교는 사비 도읍기에 성하여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나라 고유의 산악숭배와 더불어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1.3.7 건축

일본의 나라, 아스카 시기 건축물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을수 있으며 현대 한국에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분묘나 석탑 종류에 불과하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68]등이 있다.

한성 백제시대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돌무지 무덤이 대표적이다.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초기 고분(졸본 부여 시기)과 유사한 양식이다. 웅진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여러 고분들[69]은 백제 중기를 대표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후기의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백제 건축물들의 남은 터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부분 상당히 장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주로 백제의 옛 도읍지였던 공주시, 부여군 일대에서 그나마 백제의 옛 흔적을 찾을수 있다. 무령왕릉이나 미륵사지가 대표적인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1.3.8 시가

작자·연대가 미상인, 현존 유일의 백제 노래 정읍사악학궤범에 전해지며, 고려사 <악지>에 제목만 등장하는 《지리산가》《무등산가》《방등산가》《선운산가》 등이 있다.

1.3.9 예술

백제 시기의 그림 예술 역시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관계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다행히 백제 역시 고구려와 비슷하게 고분에 벽화를 그리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70] 천마도와 나머지 몇몇이 고작인 신라보다 남아있는 회화는 오히려 더 많다. 능산리 고분에는 연화문(연꽃 무늬), 운문(구름 무늬),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이 있다. 백제 시기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는 아좌태자, 하성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는 고·각·공후·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하며, 5∼6세기에 중국 남송(남조 조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의 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악사가 일본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7세기 초 백제 사람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음악을 배워서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서예 작품으로는 사륙변려문으로 쓰여진 사택지적비, 남조대 전형적 해서체로 쓰여진 무령왕릉 지석 등이 있다.

조경 면에서는 도교식 인공 정원을 당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왕궁남지를 만들고,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안압지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4 평가

삼국 중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졌고 군사적으로 대단한 면모를 보인 고구려, 삼국 통일을 이루었던 신라에 비해 관심도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며, 사료마저도 삼국 중 가장 부족하다.

고구려에 비해 작은 영토로 상당한 국력을 보여준 것을 단순히 충청·전라도 지방의 비옥한 평야의 힘으로만 볼 수는 없다.[71] 전라도 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백제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도 호남 지방에는 독자적인 마한 호족의 힘이 강했다. 백제가 전라도 지방과 강하게 유착되는 것은 고구려에 밀려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 후다.[72]

백제의 국력은 바다의 세력이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료가 너무 없어서 이것을 정확하게 재구하기는 힘들지만,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신라나 가야, 왜에 전파하는 대신 외교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은[73]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백제가 '해상 무역' 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추측한다.[74] 도대체 백제가 뭘 사고 팔았는지에 대한 사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거나 하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중국측 사서에 많이 보이지만, 그것도 그냥 '조공을 바쳤다' 라는 식이지 뭘 얼마나 바쳤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 또한 한반도 내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돌로 포장된 도로. 즉 상업용 도로가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백제의 경제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있었으며, 백제문화제 같은 데에 가면 볼 수 있는 '해상왕국' 이라는 말도 중국의 문화를 바다를 통해 받아들이고 일본 등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에서라면 맞는 말이지만 '활발한 해상 교역' 어쩌고는 무리수.

생산력면에서 고구려와 비교할 경우 백제 당시 전라도 지방의 호남평야가 농경지로 개발되었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고구려의 송화강 유역(부여),두만강 유역(옥저)이 농경지로 괜찮았다는 기록에다 고구려와 중국의 농경 수준이 비슷했다는 기록(생산력이 비슷했다는게 아니라 농업기술)이 있다. 고구려에는 송화강 유역,두만강 유역만 있는것도 아니고 요하 유역과 대동강 유역의 농경지까지 있다. 인구면에서 알려진 백제 인구는 76만호, 고구려는 69만 호(당사의 기록)[75] 그러나 당나라가 집계한 고구려,백제 멸망당시 호구 기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만은 어렵다고 할 것이다. 남아있는 유민 기록을 보면(출처요망) 당나라가 고구려에서 긁어간 평양 인구가 중산층 이상만 20만인데 반해 백제 사비에서 긁어간 인구는 백성 1만2천 87명이 있고, 여기에 대신과 병사 88명과 왕자 3명에 의자왕과 태자 2명이다. 물론 고구려와 백제 멸망 당시의 지리적인 위치나 상황 등이 다르므로 유민 등만으로 인구문제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보다 더 나아간 논의를 위해서는 우선, 역사적`고고학적 연구성과에 기반한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이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떡밥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두었다는 요서경략설이 있는데, 이는 송서 등 중국 사서의 기록을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당시 요서를 관장하던 북조계 사서에 전혀 기록이 없고, 이 지역에서 백제 계통이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가 아닌 어떤 세력(그러니까 낙랑이나 부여)의 진출 내지 다른 세력을 백제로 오기하며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76] 경략이라기 보다는 후대의 청해진의 활동에 더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백제는 국왕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 등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잃은 시기 전후로 이런 현상이 유난히 심했다. (물론 가야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이것을 단순히 국론분열로만 보면 안된다. 어차피 과거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죄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고, 그 연합도 매우 느슨했다. 그니까 원래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들인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 왕이 시해되는 것은 세력 간이 조율이 잘 안 된 결과인 것이지, 단순히 신하가 왕을 시해했다고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시대의 왕들은, 조선왕조의 왕 같은 게 아니라, 여러 세력집단의 대표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낫다.[77] 따라서 각 세력은 자신의 세력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것이 당연했다. 오늘날과 같은 민족국가 개념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백제에 있던 세력이 백제가 마음에 안 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중국으로 건너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걸 오늘날 감각으로 반역이나 배신 같은 걸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의자왕이 패배한 후에도 백제 전토가 제압되지 않고 계속 당과 신라와 전쟁을 벌인 것도 의자왕이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더이상 백제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각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이나 신라로 소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일본과는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니라 혈맹관계로 역사 관련 창작물 등에 떡밥을 많이 뿌린 국가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부흥운동세력 지원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했는데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 태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일본이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병력의 규모는 자그마치 400척(!!)[78]에 4만2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79] 다만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깡촌이였던 일본의 400척 대함대가 당시 전세계 최강이였던 당나라 군대 170척에게 백강 전투에서 궤멸당했다는 것... 전투경과는 비록 일본함대의 참패로 끝났지만 이런 파격적인 지원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려준다. 오늘날의 한일관계와 비교해본다면 천지차이. 이게 왜곡되어서 일본은 백제 꼬봉이라서 일본이 그렇게 정성껏 지원해준거라거나, 일본이 백제 정권을 막후에서 주도하던 종주국이었다는 일본서기 식의 과장된 주장이 보이기도 한다.

어쨋든간에 백제와 일본의 혈맹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관서 지역-특히 오사카-에는 지명 이름부터 해서 백제라는 이름이 정말 많이 남아 있으며 잘 찾아보면 그 외에도 백제에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문물이 매우 많다.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은 백제의 목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서 학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고침> 문화(<"가장 오랜 향찰표기는 백제의 '돼지'">)

"백제 향찰표기 신라보다 한세기 앞서"

"계양산성 논어 목간은 400년대 백제 작품"

나주 복암리 목간, 백제 지방관 동향보고 문서?

7세기 백제시대 목간 28점 공개

백제에 일반 쌀 아닌 특정 품종 있었다… 부여 구아리 유적터 발굴 목간 내용 공개

일본, 신라 금속공예술의 기원이 백제라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60년만에 나온 답은 백제였다.

예전부터 지역주의자들이 경상도 신라놈, 전라도 백제놈 운운하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심지어 경상도 내에선 경상남도를 보고 가야놈이라고 하고 경상북도 보고 신라놈이라고 나눠서 서로 지역 드립치기도 한다. 특히 김해쪽 경우 건국설화까지 얽혀있다 보니 더 가야색이 짙다. 다만 이 드립 경우 백제 드립만큼 험악하게 심하지는 않고 웃자는 것에 가까운 드립이다. 경상북도 고령군 : 어리둥절[80] 게다가 요즘에는 사실 삼국시대 때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없었다. 즉 고대국가를 현대의 행정구역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금산논산의 행정구역 일부도 따지고 보면 1963년의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전라북도 소속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백제의 수도는 서울 - 공주 - 부여로, 서울특별시 - 충청남도 중부 - 충청남도 남부였다. 물론 충남 부여군은 옛 전라북도 권할이며 현재는 전라북도 익산시와 맞닿아 있긴 하다. 또한 충남 남부와 전북은 백두대간으로 막힌 영호남과는 달리 평지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방언도 같은 권역이다. 어쨌든 백제 역사의 시작점인 초중기에는 마한 일부 지방인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 북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충남 지역과 전라도 지역에는 4세기 넘게 목지국을 비롯한 다른 마한 세력들이 공존했다. 백제국이 전라남도 지역까지 완전히 통일하는 데는 오랜 전투를 통한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걸렸고 통일 후에도 전남의 지방 세력은 백제에 상당히 배타적인 지역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전라도가 백제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81][82] 마한 통일을 기반으로 한 백제의 영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위까지 뻗어있다. 오히려 후백제 쪽이 현재의 전라도 지방에 기반을 두었다. (수도인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다.)

즉, 백제=전라도 인식은 전라도에 거점을 둔 후백제에 의해 생긴 것. 애초에 백제의 남진 이전에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가 변한-임나, 가야의 영역으로 서로 같은 공동체였다! 백제의 영역은 700여년이라는 세월에서 500여년간 마한의 일부 지역인 경기도+충청도+전라도 북부(익산 등)에 머물렀고 나머지 마한지역인 전라남도까지 완전히 통합시킨건 200여년 남짓. 그러니까 지역감정을 머나먼 고대까지 끌어올리는건 무리수. 사실 고려 이전에는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아예 없었다. 통일신라 행정구역만 봐도 전라도 경상도는 없다. 차라리 남북갈등이라면 모를까.(지역감정의 경우 '만들어진 현실'을 비롯한 사회학적 연구성과들이 나와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1.5 백제의 인물들(시대순)

이름순에 따른 일람은 백제/인물 문서 참고.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다루왕 때의 대신.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眞)씨 출신. 진씨 중 가장 처음 나오는 인물. 흘우가 좌보가 되자 그가 우보를 이어받든다.
왕족. 기루왕의 아들.
신라 귀족으로, 아찬을 지냈다. 1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을 개루왕이 받아줘 대접해줬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받은 개루왕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다음 백제왕인 초고왕 시기에는 길선의 송환 문제로 신라와 백제는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고, 신라가 백제를 쳐서 많은 인명피해가 나기도 했다.
  • 3세기
    • 보과부인 ( ? ~ ? )
책계왕의 왕비.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딸.
비류왕의 배다른 동생. 321년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327년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371년에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등장. 백제에 패배한 고구려 고국원왕이 도망가자 "뒤쫓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며 돌아가죠"라는 뜻으로 도덕경을 인용한다. 백제가 도교가 전파되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근거 중 하나.
학자. 일본에 처음 말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다. 후에 왕인을 추천하여 왕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다.
도미설화의 주인공.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고구려에 망명을 했다. 장수왕의 명령으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잡은 뒤 먼저 절을 한 후 다시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배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재증걸루와 같이 행동했다.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이 죽은 뒤 조미걸취와 함께 태자 문주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간다. 그리고는 문주를 문주왕으로 옹립하여 웅진 시대를 연다. 그리고는 기록이 없다.
문신. 병관좌평.(최고위 관직인 좌평의 하나로, 군사업무 관장) 해(解)씨는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 해구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권력자였다. 왕이었던 문주왕을 살해했을 정도. 이후 삼근왕을 옹립하였고, 훗날 478년에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관광 당해 처형당했다.
왕족. 문주왕의 동생이며, 내신좌평(왕명의 출납을 관장)이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좌평. 진로와 함께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 진로와 함께 대성팔족 하나인 진(眞)씨 출신 귀족.
병관좌평. 진남이 왕명으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진압하려 갔지만 이기지 못하자 진로가 5백명으로 해구를 제압한다. 원래 덕솔(4등급)이었으나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482년에 병관좌평까지 올라갔다.
은솔(3등급).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연(燕)씨.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한 이후부터 쭉 국정을 맡다가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구가 잡혀 죽자 혼자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잡혀서 웅진 시장에서 처형당했다.
승려. 성왕 시기인 531년에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
달솔. 승려. 백제 성왕 시기인 552년에 일본에 불교 전파해준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57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593년에 시텐노지를 세운 세 명의 목수 중 하나. 그의 자손들은 곤고구미를 세워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한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서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좌평. 사택왕후의 아버지.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사택적덕의 딸로, 무왕의 왕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642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택왕후가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가정을 하면 642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 관련 기록 때문에 선화공주에 이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택왕후가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대좌평. 642년 일본에 갔다 왔으며, 654년에 은퇴. 642년의 일본 방문이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쫓아낸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존재.관련링크. 말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인물.
의자왕의 동생. 642년에 (누군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아버지 무왕의 왕비가 죽자 의자왕은 부여교기와 그를 따르던 신하 40여명을 일본으로 추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흥군의 풍왕이 이 부여교기였다는 말이 있다.
문신. 상좌평. 성은 부여. 일명 정충. 백제 3충신.
장군. 642년 신라의 대야성등을 빼앗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살해. 그가 부여씨이며, 성충의 동생이라는 것과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건축 엔지니어. 645년에 신라로 건너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다.
백제의 장군. 의자왕 시기인 647년에 신라를 쳐서 전공을 세우다가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과 붙어서 패배한다. 이듬해인 648년에 신라를 쳐서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으나 옥문곡으로 진격하다가 김유신에게 또 걸려서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이들과 자신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교환하였다. 훗날 좌평이 되어 660년에 나당연합군과 기벌포에서 2만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소정방의 13만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운이 좀 부족했던 인물...(...)
문신. 성충과 함께 의자왕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다가 유배. 백제 3충신.
장군. 의자왕을 당나라에 바친 매국노.
승려. 부흥군이었으나 복신에게 제거당했다.
왕족. 성은 부여. 부흥군으로 유명하나, 도침과 반목하다가 도침을 죽인다. 결국은 풍왕까지 제거하려다 역관광당하고 잡혀서 목이 베인다. 의외로 풍왕이 믿고 의지했었는지 복신의 처형을 망서렸다는 기록이 있다.
달솔. 풍왕을 모시는 부흥군의 한 명.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잡혔는데, 풍왕이 마음이 약해서 복신을 죽일지 망설이자 덕집득이 죽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좌평. 김유신 열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20여명의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후에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길앞잡이 노릇을 하며 출전하였다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문책을 받았다.
왕족. 성은 부여. 웅진도독으로 왕을 자처하나 실패로 끝났다.
임존성의 부흥군. 배신한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편에 붙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갔다.
백제부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흑치상지와 함께 부흥군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당나라에 붙었다.

1.6 참고 문서

1.7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

1.8 백제 관련 인물

백제/인물 참조.

2 충칭 시에 위치한 옛 지명이자 공손술의 자칭

충칭 시 펑제 현(봉절현)에 위치한다.

신나라 시기 군벌 공손술이 스스로를 백제라 칭하며 백제성을 지었다. 공손술이 광무제에게 토벌된 후 사람들이 사당을 지었다.

이후 삼국시대 유비가 세상을 떠나며 제갈량이엄에게 탁고한 곳이기도 하다. 유비는 이 곳을 영안궁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냥 백제성(바이디 성)이라 불린다.

촉한 멸망 이후 나헌보협에 대항해 이 곳을 수비한다.

싼샤 댐(삼협 댐)이 있는 장강삼협 안에 포함되는 지역인 만큼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쓸데없는 뻥카도 많고 바가지 요금도 많다 용팔이들이 다 그렇지 뭐 원래 백제성이 있는 곳은 3면이 강과 맞닿는 육지의 반도였으나, 싼샤 댐 때문에 주위가 수몰지구가 되면서 섬이 되었다. 당연히 절경이지만 삼협 댐 건설 전에는 더더욱 웅장했단다. 사람과 자동차를 실어나르는 대형 크루즈가 운행 중이다.

이백, 두보 등 명문장가들이 이곳을 들러 시를 지었다.

  1. 링크 참조. "근초고왕 24년(서기 369)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했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했다." 물론 여기서 황색 깃발이 단순 군 내부에서 구분을 위한 깃발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백제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오방색 중 중앙을 나타내는 황제의 색으로 당시 근초고왕의 강성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했다.
  2. 사실 이 지도는 약간 오류가 있다. 이 지도에는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차지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절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요서의 전연에 밀리고 있었다.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광개토대왕 시기다. 이외에도 호남까지 완전히 백제가 통일한 것으로 나온 것과 달리 실제로는 호남 지방에 여전히 마한 잔존세력이 존재했고 무령왕대에 완전히 복속된다는 것 등 여러 오류를 찾아볼 수 있다.
  3. 건국 초기엔 '십제'라 불렸다. 사비 천도 후엔 '남부여(南扶餘)'로 국호를 변경했으나 이 명칭은 성왕대에 잠시 사용했기 때문에 공식명칭으로 좀 애매하다. 더구나 보통 제대로된 국호에는 방위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 부여와 백제의 연계성, 외교활동에서의 사용 빈도 등으로 미루어, 공식 국호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일시적인 이벤트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4. 5세기 후반에 황해남도 동남부와 한강 유역, 영서 지역 등을 상실한다.
  5. 인구에 관한 기록이 없는건 아닌데 전성기 호수가 15만 2300호(약 75만 명) 남짓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부터 멸망했을때 호수가 76만호(약 380만 명)에 이른다는 서의 기록, 백제의 멸망시기에 기록된 대당평백제비는 아예 한 텍스트에 호수는 25만(약 125만 명)이면서 인구수는 620만이라고 스스로 헷갈리고 있는 지경이다. 이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의 사례를 감안해 호당 10명으로 계산해도 약 250만명. 인구수가 620만 명 이라는 이어지는 기록에 맞추기 위해 124만호의 오기라는 주장도 있다. 인구에 대한 기록이 적게는 70만부터 많게는 600만까지 일관성이 전혀 없고 하나같이 들쑥날쑥해서 세밀한 추정이 어렵다.
  6. ~475년. 하남 위례성에 해당하는 지역이 서울 동남부의 풍납토성 일대인 건 분명한데 처음에 온조가 자리잡은 지역은 여기서 동북으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7. 475~538년
  8. 538~660년.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난 후의 반격에 대비하여 '한산'으로 옮기기도 했다. 현재의 경기도 광주 일대가 한성백제의 수도 중 하나인 한산으로 유력시된다. 고려 시기에도 이 지역을 한산이라고 부른 기록이 나온다.
  9. 다만 건국년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항목 참조.
  10. 삼국사기 백제본기 기준으로는 14대왕, 속일본기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근구수왕 이전의 백제의 왕계가 2대가 누락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제왕운기,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누락된 왕 2명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아버지 주몽과 온조의 형 비류일 가능성이 높다.
  11. 인천광역시의 수돗물은 미추홀 참물이란 이름을 공식 브랜드로 달고있다.
  12.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13.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ひゃくさい/はくさい(햐쿠사이/하쿠사이)등으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くだら 쪽이 옛날부터 써 오기도 했고 지금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오사카쪽 지명에 百濟(쿠다라)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오사카지역엔 12세기경까지 백제군(百濟)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4. 일본어로 곰을 쿠마라고 부르고, 나루의 옛 발음은 나와 루 둘 다 똑같이 아래아로 되어 있다.
  15. 종래까지 '구드레'라고 적혀 있었는데, 오기다. 충남 부여(옛 전라북도) 일원에서는 명확히 '구드래'라고 쓴다. 물론 현지 군민들도 자주 틀린다는 게 문제
  16. 현재도 구교리 금강 유역(충남 방언으로는 '백마강')에 구드래 조각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군에서 출하하는 농산품의 브랜드 '굿뜨래(Good+뜰에)'의 유래가 바로 이 구드래다. 최근까지가 아니라 현재도 백제 마지막 도읍으로써 부여를 대변하는 고어(古語, 비정) 중 하나.
  17. 그렇지만 아직까지 고이왕 이전시기에 대한 백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발굴결과도 중국계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건국년도는 약간의 오차가 있는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는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에 의존할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발굴결과들은 백제의 기원전 건국설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18.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다.
  19. 현재 충청남도 천안에서 전라북도 익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
  20.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21. 그러나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은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명확치 않은 점이 많다. 심지어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과거에는 정황상 근초고왕 시기에 목지국 등 마한의 전지역 내지는 상당부분이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추론하는 시각이 우세했다. 하지만 근래의 여러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6세기까지 전라남도 전역에 다양한 독자 세력이 존재했음이 확인되면서 과거의 학설이 부정되고 있다. 일부 견해는 근초고왕 대에 마한 세력을 거의 병합했으나, 근초고왕 사후 백제가 쇠퇴하면서 마한 세력이 다시 부흥했다고 보기도 한다.
  22. 근초고왕 시절 중국의 요서와 산동에 진출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는 불확실하며 산동 운운하는 부분은 완전한 오류다.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
  23. 현재 서울과 평양 사이 지역으로 추정
  24. 이때 한성 이북의 58성 1400촌을 고구려에 빼앗겨 고구려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었으며, 결국 장수왕이 아무런 장애물없이 바로 한성을 재점령하게 된다.
  25. 무려 '120현'의 인구가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26. 아신왕대에 백제가 망하지 않은 것이 용하다고 말할 정도. 아신왕 직전까지 백제가 전성기에 있었던 만큼 백제 국력의 기본 베이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버틴 것이라 볼 수 있다.
  27. 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412년 ~ 491년) 동안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을 거쳤다.
  28. 일본서기에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29. 백제귀족지원군보다 신라지원군이 먼저 도착하는 안습한 상황이 벌어졌다.
  30. 개로왕의 동생 또는 아들로 추정된다.
  31.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32. 계백에게 주어진 군대 숫자가 5천명밖에 안된 이유로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대다수 군대를 당군과 싸우게 하다보니 남은 군대가 5천명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백제가 왕과 지방 세력간의 대립이 이 당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높다.
  33. 단적으로,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을 때, 문주왕이 이끌고 온 군대의 주력은 백제 귀족들의 군대가 아닌 신라군이었다. 다시 말해 신라로부터 원군 1만을 거느리고 한성 위례성에 도착하였으나 백제 귀족의 응원군은 오지 않은 채 수도가 점령되고 부왕은 시해 크리. 흠좀무. 웅진시대에 국력 회복이 어느 정도 된 동성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결국 측근세력으로 보았던 백가를 중심으로 한 세족들의 반란으로 사망. 의자왕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백제 귀족들의 지원은 뜨뜻미지근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의자왕의 사망 역시 그 짧은 시간에 배반에 의한 것이 었으니.
  34. 그런데 고대 권력다툼에 민중이 참여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원래 왕과 귀족은 크고 작은 부족장에서 시작하고,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의 탈을 쓴 부족장들은 말이 좋아 귀족이지 사병을 거느린 봉건제후나 마찬가지고, 왕비를 독점한 대성8족 정도 되면 거의 왕족에 근접한다. 이들을 얼마나 빨리 때려잡느냐가 진정한 왕권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된다. 참고로 왕권 버금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시기는 되어야 한다.
  35. 문주왕의 형제인 곤지의 아들 모대
  36.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연대착오가 생기기 때문에 다른 사서에 기록된 동성왕의 이복형제라는 설이 지금은 유력하다.
  37.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때의 전장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북한강 중상류, 예성강 유역까지 뻗어있다. 무령왕이 한성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이때 고구려가 북위에 보낸 사신에 의하면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는 말이 있다.
  38.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것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된지 오래되었다. 일단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대전 인근에도 고구려 요새와 토기들이 발견 된 상황이다. 참고로 고구려 토기와 백제 토기는 상당히 달라서 원저계가 주류인 백제와 달리 고구려 토기는 평저가 주류를 이루며 대상파수 또는 교상파수라고 불리는 손잡이는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다. (이 파수는 지금의 항아리에도 남아있다.) 다만 사비기 백제토기의 경우 4~5세기 고구려계 토기가 갑자기 6세기 백제 수도에 등장하는데, 이는 최근 들어 무령왕 또는 성왕대의 영토회복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백성들을 사비 건설을 위해 사민정책을 펴면서 이런 토기들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남부여라고 국명을 고친 것도 사실 이런 주민들을 흡수하기 위한 성왕의 계책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39. 초기 일본 학자들은 백제가 워낙 몰렸기 때문에 동성왕이 남조에 사기친 것이라는 주장까지 존재했다. 현재 국내 학자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40. 위로=고구려설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수륙합동작전을 예로 들 수도 있지만, 수륙양동은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어서 유리한 입장의 고구려가 일부러 도박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박이 가능하다.
  41. 이에 대해서 고구려와의 전투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남조 측의 지지와 지원을 얻기 위해서 굳이 '위'를 강조했다고 본다.
  42. 이 시기 고구려는 말 그대로 전성기였기 때문에 남북조가 서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해석이 엇갈리는데, 위로=고구려설 입장에서는 그래서 고구려 디스하려고가 되고, 위로=북위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깬 것으로는 남조에 대해서 자랑거리가 못된다는 반박이 나온다.
  43. 임용한 등의 해석에 따르면 백제 왕실과 지방세력 간의 분열로 인해 지방 세력이 왕권을 강화해줄 것이 뻔한 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왕이 철군하자, 신라 진흥왕이 '잘 먹겠습니다'하고 한강 유역을 접수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백제가 한강 유역을 정말로 '포기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44. 성왕의 목을 벤 자는 삼국사기에는 비장 고간 도도라고 되어 있다. 도도가 노비라는 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으로, 정확하게는 도도가 노비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성왕이 도도를 꾸짖으면서 천한 노비라고 부른 것이므로, 노비라는 표현이 꼭 도도의 실제 신분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45. 참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군의 패배의 결과로 성왕이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왕이 사로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백제군이 무너진 것이다.
  46. 정확히는 2만 9천 6백명. 같은 신라의 자료를 인용한 김유신 열전에는 1만의 목을 베었다고 썼다. 김유신 열전부터도 과장이 심하다고 김부식부터 깠던 것을 고려하면, 본기의 과장이 의심되는 부분.
  47. 성왕과 태자 창(위덕왕)은 일부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군사를 일으켜 관산성 전투를 치루었으나 전멸했기 때문에 귀족들은 그 책임을 물어 위덕왕의 왕권을 크게 압박했다.
  48. 선왕인 무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겠다면 백제와 도와주겠다고 약조했으나 정작 당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의자왕은 약속을 깨고 당나라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에 당태종이 분노하여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와 관계 개선을 위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당고종 역시 냉담했고, 결국 652년 이후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49. 김응용 감독이 자신에게 패한 김성근 감독을 야신으로 추켜 세웠던 것 처럼 자신이 이긴 상대를 높여주는 것이 본인의 평판에 더 유리한 것은 당연지사다.
  50. 사실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의자왕은 전혀 무능한 군주가 아니며, 오히려 삼국시대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정복군주였다.
  51. 이 시기가 바로 당태종-당고종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전성기로서, 비단 당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전성기 중 하나다. 또한 백제는 국가총동원 해도 병력 10만이 넘을 가능성이 희박한데 비해, 당은 여러 국가와 전쟁을 하면서 한 전선의 원정에만 적어도 수만명 이상의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낼 수 있는 국가였으며 백제 원정 당시 병력은 13만에 달했다. 기본 체급이 다른 국가와의 싸움이었다.
  52. 사실 이 점은 백제 안의 여러 세력들이 제대로 단결하지 못해서 중요한 순간마다 백제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으나 사비성 함락 시기에는 예외였다. 왜냐하면 나.당 연합군이 지방의 세력들은 무시하고 사비성만 집중 공격했는데 이런 전술은 중앙에서나 통할 전술이지 위에서 말한 대로 독자성 강한 백제의 지방 세력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아서 사비성의 방어 문제(웅진성과 달리 방어에는 용이하지 않았다.)와 보급 문제가 겹쳐서 오히려 나.당 연합군이 포위되는 결과를 불러들였고 의자왕은 이를 이용해 지방군을 전부 동원해 나.당 연합군을 궤멸시키려는 치명적인 작전을 구사한다. 다만 이 작전은 예식진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그 계획은 복신과 도침, 그리고 부여풍의 백제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53. 왕의 정예군을 모았다는 시각도 있으니 판단은 제각기 알아서 할 것.
  54. 반면 중국기록만 있을 경우에는 거리낌없이 취했다. 피휘의 문제로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기록된 당나라 기록을 취한 결과 연개소문은 삼국사기에 천개소문으로 등장한다.
  55. 백제 부흥 운동 과정에서 마지막 결전이 이루어진 곳은 백강이며, 역시 기벌포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백강=금강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백강'이라는 이름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동진강과 금강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견해는 있다.
  56. 이렇게 조정에서 대우를 받은 부류는 유용한 기술을 갖고있던 운이 좋은 집단이었고, 굴러들어온 돌을 위해 이미 기반을 잡고 있던 기존 기득권의 세력을 떼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을 불문하고 애매한 부류는 대부분 당시로선 미개척지였던 관동지방 개척을 위해 이주된다. 지금은 관동이 중심지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57. 당시는 해양기술의 부족 때문에, 특히 대규모 항해는 풍랑을 피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이 주된 방식이었는데, 일본으로의 연안항해를 위한 최고의 루트인 가야 지방은 이미 신라에게 막혀있었다.
  58. 농업에 기득권과 재산의 기반이 있음은 물론이고 농사를 통해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땅을 떠난다는 것은 정말로 온 가족과 사용인이 길거리 한복판에서 아사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전근대농경시대에는 국가멸망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있더라도 재산문제 때문에 이동성이 극히 제한된다.
  59. 특히 내륙으로 갈 수록 바다와는 인연이 없는 세력이 많았을 것이다.
  60.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있었던 가장 대규모의 이주는 광개토대왕의 남정 시에 발생한 가야의 보트피플(...)로 추정된다.
  61.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조지아(를 비롯한 캅카스 산맥 일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몽땅 장악하거나 축출하는 것의 난이도는 천지차이다. 현지인과 타협하지 않고 그 지역을 장악한다는 건 압도적인 국력차가 배경에 있다고 해도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62. 신라는 가야를 차례로 정복하면서 정복한 가야 귀족들을 신라 골품제로 편입시켰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진골 귀족인 김유신이다.
  63. 삼국사기를 제외하고 중국의 모든 사서와 삼국유사는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부여융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나중에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단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는 만큼 이쪽의 신빙성을 높게 보고 있으며,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면 이는 655년 정월에 발생한 친위쿠데타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64.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부여풍뿐만 아니라 백제 중기 이후 일본에 장기간 있었던 왕자들 대부분이 일본서기나 삼국사기 등에서 볼모로 기록하고 있다.
  65. 일본열도를 중심에 두면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도래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맞지만, 한반도를 중심에 두면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은 도왜인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66. 물론 사료 부족이 커서 명확하지는 않다.
  67. 지명이 가진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런던(London)은 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중동 지역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이 옛날 지명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 지명들은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
  68. 백제의 장례 양식은 독특한 측면이 있는데, 시체를 한 번 가매장한 다음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파내며, 그 를 깨끗하게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뒤 다시 매장하는 복장 형식이었다.
  69. 무령왕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도굴됐다.
  70. 그러나 고구려에 비해 벽화의 수는 훨씬 적다.
  71. 하지만 삼국 중 백제의 국력을 가장 높게 보았던 다산선생의 평가 -지리적 조건에 기반한-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워낙 땅이 땅이다 보니 비옥하면서도 광활한 경작지가 별로 없었고, 신라 역시 경상도 일대 만을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낙동강 중상류의 분지 및 하류의 김해평야를 제외하고는 산투성이였으니...
  72. 정확하게는 동성왕 시기다. 동성왕은 제주도까지 통일했다는 학설이 존재할 정도로 남부지역의 정리에 성공한다. 무령왕 시기의 중흥은 이런 바탕속에서 가능했다. 중국으로 치자면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장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으로 그외에는 오랑캐 취급받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오, 월, 초가 괜히 촌놈 소리 들은 것이 아니다. 물론 계속 조용했던건 아니고 동성왕 이후에도 자잘한 충돌이 있었다.
  73. '선진 문물 줄 테니 군사를 빌려다오' 하는 식. 특히나 왜와 이런 거래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74. 물론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겠지만, 공주대학교의 정재윤 교수와 이남석 교수 등 현재 국내에서 백제사 연구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고있다.
  75. 보통 1호를 5인으로 계산하므로 멸망당시 백제의 인구는 대략 380만, 고구려는 350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학자들이 추산하길 조선초의 인구가 적게잡으면 600만 많이 잡아도 1000만이 넘지 않는거 보면 이기록은 너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왜냐하면 이 기록대로 하자면 벌써 7세기에 그 좁은 한반도에 인구가 800-1000만이나 되었다는 것. 그말은 700년동안이나 한반도의 농업생산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는 소리나 똑같다. 그리고 그당시 중국과 일본의 인구밀도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나라만 비정상적으로 인구밀도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3배나 높았다는것도 말이안된다.
  76. 이런 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시기정도 되면 낙랑이고 부여고 다 망한 이후라는 것이지만...
  77. 참고지만 한민족이 세운 국가는 보통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때가 꽤 적은 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 고서에 서술이 아주 안 좋은 왕이 그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왕이다.
  78. 기록에서는 1000척이라고 하지만 1000척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400척이라고 한다.
  79. 시대와 총인구의 차이를 감안해보면 훗날 임진왜란과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의 대병력이라고 볼 수 있다.
  80. 고령군이 2015년 고령군청 소재지인 고령읍의 명칭을 대가야읍으로 변경했을 만큼 고령군은 대가야의 중심지다.
  81. 그 증거로, 옛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 왕궁 근처에는 백제 시대의 유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왕궁(王宮)은 아예 지명이 백제가 있던 시절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82. 근데 또 이거 가지고 또 트집잡아서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만해 미친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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