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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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프랑스어: Jeanne d'Arc[1]
라틴어: Ioanna Arcensis / Ioanna de Arc
영어: Joan of Arc
중국어: 聖女貞德

1412년 1월 6일[2] ~ 1431년 5월 30일

상상화.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다. 살아있을 때 그려진 스케치도 적진인 파리에서 남장을 한 처녀가 군대를 이끌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 상상화라고 한다. 생전에 스코틀랜드인 용병이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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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5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 그림.[3]1505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 그림.
기도하는 잔 다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20년
샤를 7세의 대관식의 잔 다르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54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 잔 다르크, 재판관에게 -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

문맹이었던 시골 소녀가 구국의 전설이 된 이야기.[4]

프랑스의 구국 영웅, 가톨릭 성인. 축일은 화형이 집행된 5월 30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9세, 리지외의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5]와 더불어 프랑스수호성인이며, 여군걸스카우트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미군 군종교구도 미군 병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잔 다르크를 지정했다. 그리고 가톨릭의 종교재판에서 파문과 사형을 당하고 성인으로 인정받은 보기 드문 사례다.

흔히 알려진 'Jeanne d'Arc'는 현대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중세 프랑스어로는 'Jehanne Darc(주안 다르크)'라 썼다.[6] 영어로는 조앤 오브 아크(Joan of Arc)라고 쓴다. 잔(Jeanne)은 라틴어 이름인 요안나의 프랑스어식 표기. 이외에 패색이 짙던 프랑스군에게 전환점이 된 오를레앙에서의 첫 승리를 기려 '라 퓌셀 도를레앙(la Pucelle d'Orléans, 오를레앙의 처녀)'이라고도 불린다. 어린 시절에는 잔이 아니라 자네트(Jeannette)라고 불렸다고 한다. 다르크 외에도 타르트(Tart), 다르트(Dart), 데이(Day) 등 다른 성씨를 썼다는 말도 있다.[7]#

한국에서는 구한말에 약안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는 '잔닥크', '짠닥크', '짠다크'로 불리었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잔 다크'라는 표기가 많이 쓰여졌다. 이 당시를 경험한 어르신들은 주로 이 쪽으로 쓰거나 부른다[8].

1990년대 이후로도 '쟌 다르크', '잔느 다르크' 등 다양한 표기가 있지만 현대 국어 표준어 표기로는 '잔 다르크'로 통일.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톨릭 세례명으로 쓰일 땐 '요안나'.

생몰년은 1412년 1월 6일(추정) ~ 1431년 5월 30일. 생일로 알려진 1월 6일은 주님 공현 축일인데, 그녀에 대해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날짜와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9] 그녀의 탄생 당시 밤에 들이 몇 시간 동안 날개를 퍼덕이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1412년이라는 생년도 종종 의심을 받고 있는데, 1407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녀 스스로 재판정에서 19살쯤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1411년에서 1412년쯤에 태어난 것은 확실해보인다. 1407년 설의 경우 후술되어 있는 공주 설과 얽히기도 한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당시 시대 배경과 읽기 전 요약

잔 다르크는 알자스-로렌 지방에 속한 동레미(Domrémy)라는 프랑스 동쪽의 시골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양치기 아버지 자크 다르크[10]와 어머니 이사벨 로메[11]의 5남매 중 4번째 딸[12]로 태어났다. 집안에 대한 묘사가 서로 엇갈리는데, 가난한 소작농 집안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학습만화 및 위인전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부농이며 동레미의 말단 관리[13]였다는 설이 유력하다.[14] 물론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정도. 집안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그녀가 위인전에 나오는것 처럼 시골 출신의 평범한 소작농 출신이 맞다면 대다수의 농부 아이들이 그랬듯이, 잔 역시도 부모의 농사일과 가축 돌보기, 바느질요리 등의 집안일을 돕는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아주 독실했다는 점. 그리고 대다수의 농부들이 문맹이었고 잔 다르크 또한 문맹이었다. 이 문맹이었다는 점 때문에 이후 잔 다르크의 업적이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심증의 근거로 채택되고 있다.

한편 그녀가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게 대단히 불리했으며[15], 왕이 되어야 할 도팽(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왕세자라 자칭하기는 했지만, 트루아 조약에 따라 아버지인 샤를 6세 사후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며 섭정을 맡기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16]

하지만 헨리 5세와 왕비인 프랑스 공주가 요절하여,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왕실은 현실성이 없다며 조약을 씹어버렸고, 이에 이전부터 프랑스 왕실과 대립관계에 있던 부르고뉴의 귀족들이 조약 위반을 비난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태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작이 회의를 하지만, 왕실지지파인 아르마냑 파가 아르마냑 공작의 암살에 대한 복수를 한답시고 부르고뉴 공작[17]을 암살하는 병크를 저질러 결국 부르고뉴 파는 잉글랜드 편에 붙어 버렸다. 즉,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의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잉글랜드 + 프랑스 부르고뉴파 vs 프랑스 아르마냐크 파'의 싸움이 되었다.[18]

한편 전쟁의 여파는 잔 다르크가 살던 동레미 마을에도 들이닥쳐 영국군과 부르고뉴군이 동레미 마을에 쳐들어와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일들이 발생하였고, 잔 다르크의 가족을 포함한 동레미 주민들은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인근 마을 뇌샤토로 피난을 해야 했다. 그리고 동레미는 샤를 7세의 아르마냑파를 지지하는 마을인데 비해 영국과 부르고뉴파를 지지하는 마을이 근처에 있어 동레미와 그 인근 마을 청년들이 서로 패싸움을 벌이는 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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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19]

참고로 이건 여담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부분은 역사가들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물론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쪽에서는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끝내버릴 수 있지만,[20] 하느님이 없다고 믿거나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역사가로서는 난처한 일이기 때문. 따라서 이 일화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져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실은 잔 다르크는 정신병자였다.'라거나 '살균되지 않은 우유를 오랫동안 마셔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샤를 6세가 정신병자였는데, 그의 아들인 샤를 7세가 잔이 정신병자인지 아닌지 모르고 중용했을 리가 없다.'라는 등의 반박을 받아, 오늘날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사실 오늘날 이 일화에 대해 논리적으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운데, 일단 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재판 자료밖에 없는데다 그나마도 '잔이 정직하게 말한 거냐, 국가 기밀을 위해 적당히 거짓말도 했느냐.'라든가 '잉글랜드 측이 잔의 발언을 얼마나 위조했느냐.'라는 문제도 명확히 밝혀낼 수 없다. 이러니, '논리니 뭐니 하는 건 됐고, 암튼 잔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 OK?' 하고 넘어가는 역사가도 있다.

현대 역사학의 관점은 이렇다. 위의 주장들은 현대의 입장에서 중세를 해석하려 시도한 일종의 시대착오적 개념들이다. 중세인들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현대인들과 다르다. 이들은 기적이나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민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현상도 이들에겐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 실제로 중세인들은 모든 사물에서 기적을 보았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을 때, 샤를의 궁정과 이후 그녀가 당한 종교재판은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악마의 음성인지 여부를 검증하려 했을 뿐, 음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 잔의 체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시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 애초에 과학적 언어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종교적, 신화적 언어를 구사한 중세인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다.

2.2 잔 다르크의 활약

결심을 굳힌 잔은 곧바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찾아가서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고,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그녀를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구마 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오히려 잔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여 고해성사를 하며 그 의심을 풀게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끈질긴 요청에 장 드 메스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를 비롯한 기사들은 잔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으로 가려면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한 지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농까지의 거리는 무려 435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325km보다도 더 먼 것이다. 시작부터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었으나,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도착한다.

그러나 샤를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자신의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자기의 자리에 가게 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불러냈다. 그런데 변장한 시종을 한번 보고 곧바로 외면한 다음 샤를을 찾아내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녀의 속임수라는 주장이 측근들에게서 계속해서 나오자, 다시 푸아티에로 보내서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물론 잔은 거짓없는 언변으로 이 심문에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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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잔 다르크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은 잔 다르크에게 일군을 주고 질 드 레, 라 이르, 장 돌롱 등의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주었다. 출발 전에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는데, 잔은 천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며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교회의 제단을 파보면 검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 곳에서 검을 찾아내 그것을 자신이 지휘할 검으로 썼다. 오래되어 녹슬은 검이었지만 한 번 닦아내자 새 검처럼 되었다고. 곧바로 오를레앙을 탈환하러 간 잔 다르크는, 현지 사령관 장 드 뒤노아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설득해 군대를 조직하여 싸웠다.

한편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도 기적같은 일화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 성으로 입성하려면 성 앞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바람이 잔의 군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거나 또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기도를 올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잔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오를레앙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21]

떠도는 말 중에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엔 참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영어, 프랑스어 위키디피아에서 오를레앙 전투 항목이나 잔 다르크 항목 어디를 봐도 잔 다르크가 참전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22]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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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23][24]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 이어서 파타이 전투에서 숫적 열세에도 적장 탈보트[25]를 포로로 잡으며 잉글랜드군을 무찔렀고, 루아르 전역[26]을 이끌며 루아르 강변에 주둔하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연달아 격퇴했고, 여러 교량[27]을 확보하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지만, 이때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른 것도 아니고 잔 다르크 위인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잔 다르크 본인이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어서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켰고,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잉글랜드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기도 했다. 보장시 성에서는 패잔병들을 보자, 각자 소지품을 챙기고 가도록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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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프랑스 군의 미친 진격로.jpg>[28]
위 지도만으로 잔의 군사적 능력(이라고 쓰고 도박력이라 읽는다)을 알 수 있는데, 딱봐도 알겠지만 저 진격로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협공을 받기 정말로 좋은 루트다. 때문에 샤를의 측근을 비롯해 잔의 동료들도 이 계획을 뜯어 말렸는데 , 놀라운건 정작 가보니 행군내내 눈을 씻고 봐도 잔의 말대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29] [30]

저 말도 안되는 잔의 대우회기동이 절묘하게 먹혀는 이유는 간단하다. 잉글랜드 군과 부르고뉴군은 잔이 파리로 올거라 예상했기 때문. 때문에 잉글랜드-부르고뉴 군대의 대부분은 저 당시 파리인근에 모여 있었다. 그런 예상을 한 이유도 정말 간단한데, 지도를 보면 딱 봐도 오를레랑 바로 북쪽에 위치한게 파리다. 그런 파리를 잔이 가지 않은 이유도 더더욱 간단한데, 애당초 파리는 센강에 위치한 생루이섬-시테섬을 중심으로 발달한 요새 도시다. 손쉽게 함락시킬 턱이 없다는 거.. 하지만 잔이 랭스를 함락시킨다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연결이 차단되는 것은 물론, 측면을 빼앗긴 잉글랜드 군은 파리에 묶일 수 밖에 없다. 그 경우, 인적 물적자원이 월등한 프랑스로서는 말그대로 물량어택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오를레앙과 랭스, 트루아가 잉글랜드로서 공격하기 만만한 도시냐고 물으면 당연히 대답은 no. 사실 저 계획이 성공한 시점부터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의 패배로 결정된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31] [32]

어쨋든 5차례의 거듭된 승리[33]로 랭스[34]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샤를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어[35] 그를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의 소원대로 고향 마을 동레미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동레미는 조세 면제구역이 되었다.

2.3 시련기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소(小)영주나 국민들이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먹혔으나, 이는 왕실에 양날의 칼로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황태자 파를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크리의 난처럼 농민반란이 일어날 경우 농민 출신인 잔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게다가 왕실로부터 의심받는 리슈몽 백작을 잔이 신뢰하고 있었음은 샤를 7세 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조건 및 설정이었다. 게다가 잔 다르크가 이전에 보드리쿠르에게 프랑스 왕국은 왕세자의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속하며 왕에게 맡긴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해석방식에 따라 샤를과 그 측근들에게 있어서는 대놓고 표현은 못하더라도 내심 불편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즈음 샤를 7세 파의 주교 등이 잔 다르크가 갑옷 위에 입은 금실로 짠 옷과 말 안장 밑을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을 가지고 사치[36][37][38]를 문제삼기도 하는 등, 서서히 잔 다르크와 프랑스 왕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게다가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은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을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39]에 마침내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주리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40]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 불과 이틀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음모론도 있다.

부르고뉴인이 쓴 연대기 <파리의 부르주아의 저널>에 따르면, 파리 시민들은 당시 잔 다르크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로 가 기도를 올리거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거나 무기를 나르는 등 잔 다르크와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도 이러한 파리 시민의 반응에 열받아서 "저녁 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힘으로 들어가서 인정사정 안 보고 모조리 다 죽인다."라고 윽박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부르고뉴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 적대감을 가져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썼을 수도 있고, 설령 파리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 연대기는 잔 다르크의 화형 모습도 묘사했는데 딱히 적대감을 드러낸 건 아니지만 다른 증언들과 달리 잔 다르크의 화형대 위에서 십자가를 찾는 등 경건한 모습은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생략했기 때문에 명예회복 재판 당시의 기록과 증언처럼 교차검증 하거나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잔 다르크에 대해 그녀의 업적이 그리 큰 영향력이 지속되지 못했으며 그녀를 이단자로 몰아넣은 재판이 합법적이었고 공정하다가 얘기하는 등 그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영국의 역사가 줄리엣 바커조차도 자기 저서에 화형 당시 모습에 대해선 십자가를 손에 쥐고[41]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화형 당시에 십자가를 쥐고 예수의 이름을 외친 일화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이후 잔 다르크를 반대하는 국왕 측근 조르주 라 트레무유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라샤리테 전투에 나섰다가 물자 지원을 못 받으며 또 실패,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부르고뉴의 기사 강도들을 토벌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승전을 올리지 못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잔 다르크의 성녀 역할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일단 겉으로는 그녀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녀와 가족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긴 했지만, 그리 큰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도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를 주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게나마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황만이 신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한 영국과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생피에르 르무티에를 함락시켰을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약탈을 하려고 하자 엄하게 이를 금지시키고 주민들을 지켜주었으며, # 스코틀랜드인 병사가 약탈한 송아지 요리를 자신에게 내놓자(또는 그가 약탈한 식품을 먹은 걸 알게 되자) 먹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때렸다는 설도 있다.) 1 2 또한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다만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시켰고 포로를 보호했다고 하는 등 선행 사례 대부분은 그녀의 사후 명예회복 재판 당시 증언이나 그 이후 전설에서 미담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 잔 다르크가 참여한 전투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이 발생한 적이 있기는 하다. 잔 다르크가 자르조라는 마을을 함락시킨 다음에 포로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마을과 교회까지 약탈 당했다는 사례인데, # 일부 경우는 심지어 잔 다르크의 위인전에도 내용이 실렸다.물론 그녀가 관여되지 않은 투로 말하지만. #

일단은 잔 다르크가 이걸 지시했거나 직접 약탈에 참여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잔 다르크 스스로는 약탈 자체에는 찬성하지 않은 듯. 다만 이게 사실일 경우라도 잔 다르크의 군사들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던 듯 보인다. 즉 약탈과 학살에 잔 다르크가 관여하지 않았을 경우 잔 다르크의 지휘력 등 그녀의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의 논란이 빚어질 수 밖에 없어 진퇴양난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민간인들이 죽은 경우 해당 웹사이트에도 간접적으로 표현되었듯이 당연히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하라고 명령 내린 게 아니라 대포로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빚어진 참사로 보인다.

만약 잔 다르크가 직접 학살과 약탈에 관여했다면 훗날 그녀가 재판을 받을 때 언급 되었거나 피해자나 관련된 민간인 증인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우선시 되긴 하지만 그녀를 재판하는 측에서 결정적인 도덕적인, 법적인 약점으로 물고 늘어졌을 찬스였는데도 거의 얘기가 나오지 않고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쳤다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추궁 받은 걸로 보아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은 적은 듯.

어쨌거나 잔 다르크도 프랑스군의 간부에 속한 이상 군사들의 약탈과 학살 등 민간인과 포로들이 비극적인 운명을 맞은 일에 대한 책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중세시대에 인권이 현대보다도 훨씬 부족할 수 밖에 없고, 현지에서 보급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 당연시 된 상태이긴 했지만. 재판에서 언급이 거의 없던 이유도 영국군조차도 약탈을 당연시 여겨서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웹사이트에 따르면 잔 다르크가 민간인 약탈에 관여한 사례는 없고, 약탈한 물건을 쓴 사례는 적이 쓰던 검을 빼앗아 쓴 거라고 하는데, 이건 현대 전쟁에서도 당연히 여기는 전리품 획득이다. 일단 역사가 스티븐 웨슬리 리치, 레진 페르노드, 낸시 골드스톤 등은 잔 다르크가 약탈을 금지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밝히고 있다. 1 2 3

2.4 체포와 재판, 죽음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리프[42]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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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잔은 자신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자신의 병사들을 최대한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43] 리니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리니 백작은 포로로 잡은 잔이 탈출을 시도하자[44]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도 했다. 이때 잔 다르크와 가까이 지내던 리니 백작의 이모 '잔'(샤를 7세의 대모이기도 하다.)은 잔 다르크에게 친절했는데,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말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으나 불행히도 그해 9월에 사망했다.

한편 리니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갈 것을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리니 백작은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45]에 넘겨버린다.[46]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 이단 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흔히 잔 다르크가 마녀 재판을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단 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위하여 코숑 주교[47]가 이끄는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졌으나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다.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명이 달려들었지만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시골 소녀 한 사람에게 말빨로 발린 셈이다. 1대 70이라는 수적인 열세, 재판 성립부터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게 잔 다르크에게 불공평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물론,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인 등 모든 면에서 그녀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이 재판의 특이한 부분은 바로 첫번째 재판은 공개재판으로 했었는데, 해당 재판에서 얼마나 심하게 잔 다르크에게 발렸는지, 다음 재판부터는 비공개 재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재판과정의 자세한 기록들이 현대에 남아있으며, 논리정연하고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서 해당 내용에 의거해서 잔 다르크가 정신병을 가지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로서 사용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은총을 받았다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이 없다고 말하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었지만 도리어 종교재판관을 데꿀멍하게 만든 것이다.[48]

결국 이럴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죄라고 하기엔 괴이한 이유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다.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잔의 재판 이전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었으므로, 잔의 주장은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재판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먼저 종교재판의 판사 노릇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런 거 없었다.[49]

또한 잔 다르크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면 재판을 열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측은 일단 재판부터 열고 보라는 지령을 내려보냈고,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판에 임했지만 잔 다르크 측에 유리한 증인이 1명도 없었다. 잔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 또한 교회법을 어기는 일이었음은 당연.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지만,[50] 재판정에서는 이를 저지했다. 게다가 잔에 대해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잔의 고향 동레미로 조사관으로 니콜라 바이이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잔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증거를 전혀 얻지 못하고 바이이가 돌아오자[51] 코숑은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여행 경비(정확히 말하면 수고비)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잔이 이미 푸아티에의 종교심문에서 문제없음을 환기킨 성직자 니콜라 드 우프빌은 감옥에 갇혔다가 영향력 있는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고, 잔의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장 로이에라는 성직자도 나타나자 그를 살해하려는 위협을 가해서 그 성직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국 로마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잔의 고향 사람으로 꾸민 사람을 독방에 보내어 위로해주면서 대화하는 척하면서, 엿보기 구멍을 통해 잔에게서 이단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얻어내려는 수작까지 부렸다.

그나마 잔이 이단자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녀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감옥에 여러번 찾아와서 그녀에게 회개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던 이상베르 드 라 피에르와 마르탱 라드브뉘가 있었는데, 코숑은 그 소식을 듣고 해명을 요구하며 닥달했고, 심지어 워릭 백작은 드 라 피에르에게 센 강에다 던져버리겠다고 말했다. 즉 잔을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의도가 보이면 죽여버리겠다는 뜻.

다만 이러한 행위로 잔 다르크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재판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실재로 잔 다르크의 재판은 처음에는 공개재판을 통해서 잔 다르크에게 엄청난 망신을 주고 그 권위를 깍아내리려고 하는등 사실 잔 다르크를 농락해서 무력화 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 것이며, 아무리 중세시대라고해도 잔 다르크에게 줄 수 있는 범죄혐의들로 일반적으로 사형을 언도할 수는 없었다. 실재로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에게 무관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잔 다르크를 별 것 아닌 일로 사형할 수 없다고 본 것도 있으며, 잔 다르크의 사형소식에 온 프랑스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사실 어처구니 없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기 때문으로 영국도 이걸 모르지는 않았다.
문제는 공개재판에서 오히려 영국측이 개박살나서 첫번째 공개재판이후 모든 재판이 비공개 재판으로 이루어졌을 지경이고, 재판 내용을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보면 잔 다르크가 굉장히 논리 정연하고 좋은 대응을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죽일 생각이 없이 모욕하고 권위를 떨어트릴 생각이었지만 재판이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영국에 협력하거나 죽음 둘 중 하나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만 남게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당연히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 파의 시각에서 진행된 재판이 공정하기는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당파도, 잔 다르크의 요청으로 당시 재판관이 프랑스 왕실에 그녀가 바라는 증거물들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구할 만한 문헌 기록 및 증거자료들을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이미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인 탈보트를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은 탈보트와 잔 다르크를 교환할 의사도 있었지만 당시 관례였던 포로교환 제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잔 다르크의 부하이기도 했던 프랑스 장군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붙잡히자 바로 포로교환을 제의해 성사시켰다.[52] 이걸 봐도 사실상 샤를 7세는 아무 것도 안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를레앙 시민들이 자신들을 구한 잔 다르크를 구해내기 위한 몸값을 자발적으로 모금하자 그걸 몰수해버렸다.[53] 다만 영국이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혹은 1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대려온 포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는 영국인 포로 중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포로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잉글랜드 지배하의 노르망디에서도 잔 다르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여튼 이리하여 샤를 7세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확정. 그 어머니 이자보 드 바비에르 태후는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잔 다르크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이자보 태후는 트루아 조약 이후 부르고뉴 파를 지지하며 아들과 적대적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가 줄리엣 바커는 잔 다르크의 재판은 공정하고 합법적이었으며 잔은 이단의 혐의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잔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이 잉글랜드 출신이고 자신의 저서에서 아쟁쿠르 전투 등 영국의 승리를 강하게 묘사하고 잔 다르크가 나오는 책 제목도 "정복(Conquest)"으로 다분히 영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 있는 언급처럼 그 당시에 내부에서조차도 공정하지 않다고 비판이 있었던 재판이었고, 아래 언급처럼 잉글랜드 출신 변호사 브라이언 해리스도 자신의 저서 인저스티스에서 잔 다르크의 재판을 두고 사법살인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프랑스 왕당파 학자들은 이 재판을 맹렬히 비난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잔은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더 큰 재앙이 영국에 닥친다고 경고 혹은 예언을 했는데, 단순히 전투에서의 참패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잔의 죽음 몇년 안에 영국 왕의 섭정 베드퍼드 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아라스 조약에 의해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면서 파리까지 잃게 된다.

결국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54]그러나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55] 서명하면 수녀원[56]에 감금시킨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히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어차피 가혹한 감옥 생활로 병에 걸린 잔은 화형 선고가 아니더라도 감옥에 계속 갇히면 병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고, 종교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어도 영국에게는 군사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통해 포로나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는 방법, 또는 독살이나 암살 등의 방법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녀를 이단자이며 마녀로 몰려는 종교재판을 고집한 이유는, 잔이 감옥에서 자연사하거나 다른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하면 오히려 영웅의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샤를 7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단자나 마녀로 몰아서 죽이면 샤를 7세의 위신 실추가 제대로 될 것이고 다른 처형 방법에 비해서 민중들의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계산한 일.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소용없게 되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제대로 불렀을 뿐.[57]

이로써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소원대로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루앙 시민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몇몇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고, 자신을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장작에 불이 붙기 전까지 잔 다르크는 하느님을 계속해서 부르짖었지만, 불이 붙고 불길이 강해지자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걸 본 군중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재판관들 대다수, 심지어 헨리 6세의 비서까지도 눈물을 흘렸고, 성녀를 죽였다고 탄식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은 물론이고 이미 처형집행을 많이 한 베테랑 사형 집행인인 조프리는, 훗날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결국 불길의 열기와 연기에 질식한 잔 다르크가 사망하자, 잉글랜드 측은 일단 불을 끄고 그녀의 알몸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에게 내보였다. 이는 잔 다르크가 성녀도 마녀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죽어서까지도 극도의 수치와 굴욕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잔 다르크가 죽는 순간 비둘기가 몸속에서 나타나 날아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해(聖骸)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 다르크의 몸이 3번씩이나 태워졌고, 그 재는 세느강에 흘려보내졌다는 것뿐이다. 19세기 무렵에 잔 다르크의 화형 장소에서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갈비뼈가 발견되었다며 보관했으나 2006년 조사결과 이집트 미이라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젠 저게 잔 다르크의 뼈였다는 게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 아마도 프랑스 국민, 신자들의 자작극이나 착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루앙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다고 한다. 루앙이 친영파 도시였음에도 잔 다르크를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영국 정부가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잔의 재판과 화형 때문에 책임질 일이 없으리라고 보증서를 발급해줬는데, 이게 잔의 재판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적인 말이 많았고 민간 여론도 그리 좋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피에르 보스키에라는 수도자는 잔의 화형 당일날 "악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가 처벌 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을 주도한 파리대학교가 잔 다르크를 화형한 후 교황과 교황청에 보낸 서한의 한글 번역문 마치 잔 다르크를 배려하면서 공정하게 재판을 하고 자신들은 원래 잔 다르크를 살리고 싶어했는데 잔 다르크가 이단이 재발한 탓에 할 수 없이 화형을 판결하고 집행해서 괴로워한 것인 양 교황과 교황청에 사기를 치고 있다.(...) 글 작성자의 머릿말과 댓글을 보면 뭔가 심각한 상황과 연관된 거 같지만 번역문만 읽고 나머지에 대해선 신경쓰지 말자. 번역한 글 자체는 이 항목 문서에 유용해서 어쩔 수가 없다.

2.5 명예회복

샤를 7세는 25년이나 지나서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잔 다르크의 명예 복권을 선언[58]하였고,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59]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지시했다.

장기간에 걸쳐 파리, 루앙, 오를레앙, 동레미 등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을 초청해서 재판에 참여시키고 주민들에게 증언을 듣는 등의 조사를 한 다음, 잔 다르크 생존 당시 휘하에 있던 병사들과 관련지역 주민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증인들을 불러모아서 재판을 실시한다. 이 재판에서 이단자이자 마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을 무효화하였으며,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이단, 마녀 혐의 및 파문 조치를 철회해 그녀가 무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판결내렸던 피에르 코숑을 이단자로 선언한다.

그런데 이건 이단자이자 마녀로 판결받은 잔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꺼림칙한 샤를 7세와 유족들의 이해관계가 합일된 면도 있다. 정작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코숑을 포함한 이미 죽은 관계자들이나 영국인들에게 죄를 떠넘기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등 얼버무리며[60]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청문회라든가 처벌을 피한다. 이 때 잔에 생전의 모습과 행동이나 화형 당시에 대한 증언은 분위기상 찬양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차검증해서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잔이 당하던 종교재판보다는 공정했지만.

사실 재심 요청에서 실제로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몇년 걸렸다. 이유는 그 전에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당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 중 핵심 인물 대다수는 죽은 사람들이어서 증언이나 증거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으며, 그나마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이나 증거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으니깐. 게다가 교황청에서도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침입을 막는 데에 지원해준 영국의 눈치를 보느라 재판을 여는 것이 늦어졌다. 사실 영국측의 인물도 거의 파문 당하지 않았다. 헨리 6세와 베드포드 공, 워릭 백작은 그렇다고 쳐도, 피에르 코숑이 재판을 맡긴 했지만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관여한 종교인은 영국 왕실 인사이기도 한 윈체스터 추기경인 헨리 보퍼트였는데 이 사람은 화형 당시에도 잔의 알몸을 보이라고 지시하고 재를 센 강에 버리라고 지시까지 한 인물이다. 일부 기록에선 화형이 정해진 잔에게 잘 가라며 교회는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녀의 죽음을 보고 울었다고 하지만..... 연기가 눈에 들어가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추기경 명단에 당당히 있고 심지어 윈체스터에는 이 사람 이름을 딴 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참고로 헨리 보퍼트는 잔 다르크 재판에 관여한 것 뿐만 아니라 사생아인 딸까지 둬 위선적인 종교인, 아니 사실상 천하의 개쌍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에르 코숑이 잔 다르크에게서 반지를 빼앗아 헨리 보퍼트에게 바쳤는데, 이 반지는 이후로도 영국에서 쭉 소유하고 있다가 2016년 2월 프랑스측에서 경매로 약 24만 파운드(한화 4억원 가량)에 구입하여 반환되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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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출처를 기록한 문서가 있으나 이것이 진품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했는데, 어쨌거나 프랑스에서는 잔다르크 반지의 귀환을 성대하게 축하하는 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사악한 영국 정부가 행사에 찬물을 뿌릴 뻔했는데, 영국 법률상 문화재를 국외로 반출하기 위한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반지를 반환하라는 명령을 할 수 있다면서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에 발끈한 반지의 구매자가 군중에게 "여러분 이 반지가 영국의 것입니까! (군중 야유) 아니면 프랑스의 유산입니까! (군중 환호) 야이 영국놈들아 갖고싶으면 와서 가져가봐라! 이미 늦었다[61] 이건 우리거다!!!배째라" 하고 공개적으로 어그로를 끌었다고 한다.(...)훗 이래야 프랑스답지

3 사후의 평판과 영웅화, 시성

잔 다르크의 프랑스 내 이미지는 그 후에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62], 공식적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은 그저 오를레앙 일대의 주민들과 스코틀랜드[63]에 그쳤다.

교회나 왕실에서는 시골출신 평민 처녀가 왕국을 구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했고, 위그노 전쟁 때 신교도들은 오를레앙에 있는 잔의 기념물을 부수기까지 했다. 계몽사상이 보편화된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잔의 행동 자체를 광신도의 전형으로 보았는데, 몽테스키외, 볼테르[64] 같은 학자들로부터 '까놓고 말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딱 잔 다르크 가리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전방위로 까이는 처지로 전락한다. 프랑스 혁명 때 혁명공화파들은 한술 더 떠 그녀를 왕당파이자 가톨릭의 끄나풀로 규정짓고 오를레앙에서 그녀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폐지하는 한편, 위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기념물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병크를 저질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을 거치며 사실상 전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자,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한 떡밥으로 잔 다르크를 다시 들고 나와 그녀에 대한 저작들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가 프랑스 본토 출신이 아니면서도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것, 시민군을 주력으로 쓴 것 등등 닮은 점이 많아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는 듣보잡에 영웅이 아니라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나폴레옹이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여 조작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일단 과대포장 되었다는 그녀의 모습은 전술했던 그녀의 활약상 부분과 후술할 전쟁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분만 읽어봐도 충분히 반박되는 주장이며, 나폴레옹이 그녀를 부각시키긴 했지만 그 전에도 영웅으로 알려져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인물이었다. 일단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여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12 그리고 오를레앙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지방의 수호성인 취급을 했으며, 생전에 베드포드공이 쓴 그녀를 비난하는 내용의 문서와 16세기의 영국에서 쓰여진 연대기와 아래에 언급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쁘게 묘사되어 오히려 영국에게 커다란 치명타를 줬음이 확실해지며, 주로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에서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항목 상단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65]

게다가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숭배하면서 그녀를 기리는 일을 추진한 게 1803년경인데,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그 전에 이미 프랑스의 적대국이었던 영국의 로버트 사우디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이보다 조금 앞서 그녀를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쓴 <영국의 역사>라는 책에도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흄은 1711년에서 1776년까지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1769년에서 1821년까지 살았다. 흄이 프랑스에 체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벽지인 코르시카에 살던 어린 나폴레옹이 늙은 흄을 만나 잔 다르크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흄이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언급을 처음 듣고 그렇게 썼다면 오히려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서도 듣보잡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무색해진다.[66]

한국에서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띄웠다는 주장은 모 일간지에 실린 칼럼과 그걸 바탕으로 하여 실은 역사서적에 의해 널리 퍼졌는데, 이 책 자체가 읽어보면 알지만 가십성 역사내 용을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정론을 쓴 책이라고 읽고 믿으면 곤란하다.[67] 그리고 위에 이미 언급된 영국이 지불한 잔 다르크의 몸값을 보자.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소녀를 가지고 단지 이단자로 처벌하겠다고 왕자의 몸값 정도 되는 그런 엄청난 금액을 지불한 걸까? 진짜로 그랬다면 영국 고위층이 멍청했고 이는 곧 잔 다르크에게 왜 졌는지 설명이 된다. 결국 잔 다르크가 공적에 비해 부각되지 못한 건 위에도 살짝 언급된 것처럼 평민 소녀의 도움을 받았고 구해주지 않은 것이 꺼림칙한 왕실과 나중에 복권시키긴 했지만 이단자로 몰아 죽인 잘못을 굳이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은 가톨릭 탓이 크다.

19세기 중반에는 좌우파 모두가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앙드레 모로아의 언급에 따르면 좌파는 그녀가 하층민 출신임을 내세우고, 우파는 그녀가 왕권의 회복을 위해 싸웠음을 내세웠다고. 한편 전 프랑스 및 프랑스령 식민지에 걸쳐 그녀의 동상이 2만기 가까이 세워졌는데, 그 중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있던 동상알제리 전쟁 당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 세워진 지배국의 여성 우상이지만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그대로 있었으나, 프랑스의 몇 년째 계속되는,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무자비한 진압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을 반달리즘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보쿨뢰르로 옮겨진 동상 모습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있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크게 보기

잔 다르크의 시성 움직임 역시 국가적인 지원하에 일어나, 1910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여성참정권자 잡지 표지의 잔 다르크[68]1911년 조지 5세의 대관식날에 잔 다르크로 분장하며 행진하는 여성참정권자

20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자들은 자신들의 상징 및 단체의 수호성녀로 잔 다르크를 내세워서 잔 다르크로 분장해서 행진을 하기도 했다. 1913년 경마 경기장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영국의 여성 참정권자 에밀리 데이비슨은 사고 하루 전날 그녀의 조각상에 헌화하기도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는 없고,(당시 그런 개념도 전무했으니까.)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을 딱히 한 적도 없지만,[69] 그녀가 활약하던 당시 시대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여성상이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심볼로서의 이미지는 강하다.

어느 날 카트린 드 로셀이라는 여자가 잔 다르크를 만나 자신이 만난 성인이 밤마다 나타나 금은보화를 놓는다는 주장을 해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잔이 집안일이나 돌보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했고, 잔도 궁금해져서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첫째 날 잔이 그만 피곤해 잠이 들어서 확인하지 못했고, 카트린은 그 날 성인이 왔다갔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잔이 둘째 날엔 중간에 잠들지 않고 끝까지 확인했으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카트린 드 로셀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 잔은 어리석은 일 하지 말라고 무안만 준 다음 그녀와 헤어졌다. 사실 카트린 드 로셀의 행위는 미신이나 사기꾼에 가까운 행태라서 강력히 처벌해도 모자라지 않은 지경이었으나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잔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때 카트린 드 로셀은 증인으로 나와서 오히려 잔을 고발했다. 그 때 살려둔 게 화근. 이단자를 심판한다더니 오히려 이단자를 자기네 증인으로 부르는 재판정.

물론 잔 다르크를 따르던 여인들이 없던 건 아니었는데, 브르타뉴 출신의 피에론(Pierronne)이라는 여인은 신비체험을 주장하고 잔 다르크를 추종하며 다니다가 잔 다르크가 붙잡히기 전인 1430년 3월에 친잉글랜드파에게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거쳐 같은 해 9월에 화형당했다. 천사들의 차림새에 대한 질문에 지혜롭게 돌려말하며 대처한 잔 다르크와 달리[70] 천사들의 옷차림을 자세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이단으로 신속하게 판정되어 화형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잔 다르크를 동경하고 따른 것에 대한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랭스에서의 대관식 때 그녀를 동경하고 성녀로 보며 숭배하는 여인들이 성화와 기도서를 들고 잔이 그걸 만져주길 바랐는데, 잔은 웃으면서 "자기 손으로 쓰다듬으세요, 여러분들 손이나 내 손이나 마찬가지인 걸요."라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엔 잔 다르크를 앞세운 포스터가 나오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연간에 패텡 정권하에서는 반영[71]/반유태[72] 및 프랑스 통합의 상징으로 잔 다르크가 이용되기도 했다. 나치와 페텡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인 자유 프랑스 역시 국기에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로렌의 십자가를 넣어 잔 다르크를 추종했다. 특히 샤를 드 골이 잔 다르크를 무척 찬양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극우파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이 높은 정치인 장 마리 르펜은 종종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를 하고, 잔 다르크를 자신의 정치이념 아이콘으로 이용하여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잔 다르크가 영국인을 추방한 것처럼 지금 프랑스인들도 쳐들어온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병맛스러운 논리. 하지만 우습게도 잔 다르크가 이끌던 병사들 전부가 프랑스인은 아니었고, 외국인 용병들도 상당했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로서 존경받았는데, 극우파가 하도 설쳐서 좌파 진영에서는 혁명 정신을 형성화한 '마리안느'라는 가상의 여성 캐릭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잘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분. 그 뒤로는 잔 다르크가 우파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몇몇 잔 다르크 동상들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부 프랑스 좌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심할 경우 잔 다르크를 왕당파와 파시즘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월 6일 탄생 600주년을 맞아 역시나 르펜 부녀가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도 잔 다르크의 고향을 방문하여 극우만의 아이콘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물론 둘 다 잔 다르크를 기리기보다는 대선에 이용하려 했던 것 같지만. 이런 프랑스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잔 다르크는 외국인 혐오의 상징도 아니고, 정치적 이용의 도구도 아닌 모두의 인물이라고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지적했다. 해당 신문은 그녀가 전장에서 진두지휘한 것이 아니라 군량미를 나른 수준이었다는 등 직책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또 당시 프랑스인들이 그녀를 배신한 것(…)을 강조해서 언급했다.[73] 선거를 앞둔 노동절을 맞아 또 르펜 부녀가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하기로 하자 보다못한 좌파진영에서는 하루 먼저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어 잔 다르크의 우파만의 독점을 반대하기도 했다.

앙드레 모로아는 잔 다르크를 가리켜서 "프랑스인이 진지하게 행동할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찬양했다.

4 군인으로서의 잔 다르크

4.1 잔 다르크에 대한 논란, 그녀는 군사적 천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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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매우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어떻게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지 않은 17세 문맹 소녀가 단 1년 만에 멸망의 기로에 선 한 나라를 극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따져 봐야 하는 점은 그녀가 실제로 총 지휘를 맡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이 그동안 가장 논란이 큰 문제였는데, 사실 그녀에 대한 기록과 주변 인물의 기록등을 참고해 봤을때 그녀가 실제로 총사령관의 직위를 행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74] 그렇다면 그 명령의 질은 어떨까? 이점이 매우 흥미로운데, 그녀가 내린 지시 중 90%이상이 공격 또는 공세적 지시라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보급이나 상세한 포위작전 등 세부적인 명령은 내린 기록이 드물다는 것. 대신 알랑송이나 뒤노아, 또는 질드레에게 이러한 지시를 일임하는 내용이 더 많았다. 이는 좋게 말하면 그녀가 매우 공격적인 지휘관, 나쁘게 말하면 단순 자살성 공격[75]만 하는 무식한 지휘관이라는 것. 이는 그녀가 추상적인 목표(공세)를 잡고 세부사항을 휘하 장수들에게 맡겼다는 뜻이 된다. CEO로 비유한다면 큰 그림은 그리고 세부사항은 담당자에게 맡기는 정도일 것이다. 그녀는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항상 존중했고, 비록 그녀의 의견에 반하더라도 항상 그들의 말은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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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적 능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활약 챕터에서 소개된 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전쟁을 보는 잔의 큰 시각, 즉 전략적 식견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장급이다.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사이를 지나가는 대우회기동을 성공시킨거나, 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 포위망을 완성시킨 점이나... 더군다나 저 행군로는 철저하게 잔의 고집을 따른 것이다. 그러면 저 계획에 실효성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상기했듯 어느정도의 도박을 걸기는 했다지만) 당연히 YES. 실제로 랭스 함락이후 전투는 파리와 그를 위시한 센강 이북-노르망디 지역에 국한된다.

허면 그녀는 어떻게 그녀보다 짬밥 높은 장수들에게 명령을 순순히 내릴 수 있었을까? 이는 철저하게 중세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그녀가 바로 성녀였기 때문이다. 중세에 왕은 교황보다 아래였는데, 그런 교황보다 높은 하느님이 직접 선택한 성녀. 그것도 왕이 직접 인증(?)한 성녀의 지시를 장수들이 무시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즉 잔 다르크는 성녀 타이틀과 그것에 동반된 총 지휘관의 직책을 이용, 소위 닥치고 돌격을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 몇번은 회의적이었던 프랑스 장수들은, 잔의 이 방식이 의외의 성과를 거두자 곧 그녀를 인정하고 그녀의 지시를 따른다.

또 성녀라는 타이틀은 병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당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제대로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중세사회에서, 둘 다 그리스도교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받은 성녀가 프랑스에 출현해 군을 지휘한다는 건, 하느님이 프랑스 편을 든다는 의미로 받아져서 마치 하느님이 지원군을 보낸 듯이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영국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프랑스가 연패를 끊고 승리를 하자 과장된 신앙적 열정이나 공포가 잔 다르크의 하느님이 내린 군사적 능력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나 심지어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낳았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 역전이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전투의 승패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잔 다르크가 성녀를 자처한 건 역사상 최고의 성공적 심리전인 것이었던 것이다.

헌데, 잔의 이런 공세적 전략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물론 공세적 전략을 통해 전쟁의 주도권을 뺏는다는 것은 좋았지만, 이런 전술에는 기본적으로 공세 한계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어느 시점이 되면 병사들도 지치고 보급이 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잔은 초기 1년 동안 미친 듯이 공세를 펼친다. 그것도 쉼없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바로 샤를 7세의 무제한적인 지원때문이었다. 그러면 샤를 7세는 왜 그랬을까? 단순하다. 그녀를 직접 인증하고 사령관의 자리에 앉힌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 쉽게 말해서 본인이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즉 랭스 점령까지는 그녀와 샤를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 했기 때문에 왕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잔에게 무제한적인 지원을 퍼부은것. 이를 이해한다면 랭스 점령 이후 잔과 샤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이해가 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 동안의 지원으로 인해 왕실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었기 때문.[76]

그리고 잔은 엄밀히 보자면 외부인사였다. 축구로 따지면 외국인 감독을 국가대표 자리에 앉힌 셈. 덕분에 잔은 선입견 없이 능력에 따라 인사를 배치할 수 있었다. 100년 전쟁 내내 보여준 잔의 합리적인 군사 행동은 여기서 도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녀는 귀족, 평민, 용병을 가리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적(부르고뉴 파)과의 합작 또한 꺼리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이단 심문 과정에서 확인되는 그녀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영국의 상태 또한 환상적이었다. 군대는 오를레앙만 함락시키면 전쟁은 끝이라는 낙관적 태도에 빠져 방심했고, 내부는 젖먹이 헨리 6세가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귀족간 치열한 권력다툼이 진행중이었다. 때문에 영국은 잔의 미칠듯한 공세에 효과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아니, 지역적 방어는 가능했을 지라도 이전처럼 국가적인 반격을 펼치는 것은 버거웠을 것이다. 여기에 부르고뉴파와의 동맹은 매일이 위태로웠고, 아무리 때려도 무너지지 않는 프랑스 때문에 국고는 바닥을 찍고 있었다. 때문에 백년전쟁에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은 장미전쟁이라는 내전에 돌입한다.

즉 종합적으로 보자면, 성녀 타이틀 + 잔의 공세적 전략 + 휘하 장수들의 뛰어난 보조 + 왕의 무제한적 지원 + 합리적인 사고방식+ 적국의 혼란으로 희대의 역사가 터졌다고 볼 수 있다. 무명의 소녀였던 잔 다르크가 중세 유럽에 갑자기 나타나 성녀를 자처하며 프랑스를 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처럼 상황과 행운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4.2 전쟁에 끼친 영향

잔 다르크가 활약한 기간은 길게 잡아 2년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영국군 200명만 만나도 도망칠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즉, 적을 보면 등을 보이기 바쁘던 병사들이 드디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

사실 프랑스 군의 군사적 역량은 잉글랜드가 미칠바가 되지 못했다. 잉글랜드군은 다른것은 몰라도 병력 동원능력과 그 병력을 유지할수 있는 경제력에서 프랑스군의 한수 아래였다. 다만 오랜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병사들이 사실상 허수아비보다 못한 존재가 된점과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라는 극단성으로 프랑스군이 소극적으로 움직인점이 잉글랜드군에게 버프를 달아준 셈이었다. 하지만 갑툭튀한 성처녀로 인해 본래의 역량을 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장군들이 구사할수 있는 전략적ㆍ전술적 선택폭은 크게 넓어지고 이는 전술적 유연성이 구현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기존 프랑스군은 그냥 닥치고 돌격의 기사중심의 전술을 고수해왔다. 그도 그럴게 중세의 시작이라 불리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게 프랑스인데다가, 당시 프랑스는 자국 내의 평원 지대에서 품질이 좋은 군마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즉 오랫동안 쌓여온 기병 양성 체제 + 훌륭한 자원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발달했던 강력한 중기병 전술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던 것. 또한 당시 기사들의 기득권 때문에 기사 중심의 전술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측면도 있다[77]. 이를 바꾸려면 공동체적 합의와 이를 추진할만한 강력한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데, 크레시, 아쟁쿠르 전투의 참패로 공동체적 합의는 끝났다 쳐도 백년전쟁 기간의 프랑스에는 추진력 있는 인물이 부재했다. 당장 왕이 중심이 되자니 대관식도 못한 존재였고, 그렇다고 달리 구심점이 될만한 영주나 귀족도 없었기 때문. 그런데 이 모든 장애요소가 잔 다르크가 등장하며 해소되어버렸다. 애초에 기사 계급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잔 다르크는 중기병 돌격 전술에 연연할 까닭이 없었고,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름 당대 프랑스군의 구심점까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

물론 기사중심의 중기병 돌격전술을 아예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좋은 기병 놔두고 왜 안쓰겠어?. 다만 중기병에 대한 의존을 떨쳐내고 상황에 따라 적시적소에 쓸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위에서 서술된 파타이 전투인데, 잉글랜드 군이 전방에 목책과 말뚝을 설치하자 전면돌격이 아닌 측면으로 우회하여 돌격한 것이었다. 또한 대포의 사용도 등장한다. 물론 당시에 대포는 정확도나 연사력이 크게 낮아 효과적인 타격수단이 아니었지만 알랑송 공작을 위시한 프랑스 장군들이 전투에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 부터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잔의 등장이후 실로 오랜만에 프랑스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는 매우 의의가 큰데, 잔의 사후 프랑스가 백년 전쟁을 이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잔의 행보에서 얻는 군사적 자신감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잔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멸망, 또는 최소 루아르강 이남으로 밀려 났을 것이란 것. 대표적인 증거로 잔 이전 프랑스군은 전투에 패배하면 바로 성으로 퇴각했지만 잔 이후에는 전투에 패배해도 좀비마냥 쉬지 않고 영국군을 몰아치기 시작한 것. 전체 인구수에서 크게 뒤지는 영국은 결국 질적 물량적으로 월등히 앞서는 이런 프랑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다. 그 결과 영국은 대륙의 모든 영토를 상실한다.

5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전설

  • 잔 다르크 생존설: 당연히 이런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에게는 생존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특히 잔 다르크의 경우 화형 직후 잔 다르크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났으며, 최소 1명 이상은 잔 다르크의 가족조차 본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잔 다르크의 가족들에게 가짜로 판명되어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고 한다. 혹은 잔 다르크의 오빠들이 돈을 벌기 위해[78] 용병 여기사와 짜고 잔 다르크가 부활했다는 사기를 쳤다가 발각되어,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 당시부터 그녀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부분에 주목하여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하여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민중들이 많았다는 추측을 하는데 쓰이기도 하는 설.
  • 잔 다르크 공주설: 생존설에서 파생된 것으로, 잔 다르크는 샤를 6세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79]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설이다. 이 경우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남매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공주설을 더 파고 들어가면 잔 다르크가 공주임을 알아차린 영국 측에서 비밀리에 가짜를 내세워 화형에 처하고 잔 다르크는 풀어주었으며, 잔 다르크는 나중에 지방 영주와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다가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잔 다르크의 묘가 프랑스에 몇 개 존재한다고 한다.
  • 잔 다르크 용병설: 잔 다르크가 단순한 시골 소녀가 아니라 여성 용병대장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백년전쟁 직후의 어떤 문서에 의하면 잔 다르크는 '포술에 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높지 않고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에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대포가 전술적으로 의미있게 사용된 기록은 잔 다르크 사후인 포미니 전투(1450)에서부터 나타난다.
  • 잔 다르크 예비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갑툭튀한 성녀가 아니라, 친왕파 귀족들에 의해 프랑스의 구국 영웅으로 미리 엄선되어 준비과정을 거친 뒤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는 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주장을 따르자면 한낱 시골 처녀에 불과한 잔 다르크가 생전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던 왕세자를 쉽게 알아보았던 것, 프랑스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녀로 손쉽게 인정받았던 것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비록 왕세자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그의 측근들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것. 사실 이 주장도 역시 잔 다르크와 친밀한 귀족은 그녀와 전장에서 함께 한 기사들 정도에만 해당되고, 그들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의 구출 시도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된다. 샤를 7세의 최측근인 조르주 라 트레무유는 심지어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에 대해 "미친 여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순 없습니다!"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드가 잔 다르크를 카드로 써서 이용하고 조종했다가,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자 토사구팽으로 내쳤다는 주장이 있는데…[80] 결국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서 있을 법한 주장 정도로 여겨진다.
또다른 예비설은, 진짜 잔 다르크가 등장했으나 전장에서 사망하거나 큰 부상으로 이탈하자 이를 다른 사람으로 메꾸었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당시 잔 다르크의 목격담이 다른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덩치가 큰 여성이었다는 것과 덩치가 작은 여성이라는 목격담이 있으며, 잔 다르크의 성품에 대해서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해 혼이 난 적이 있다거나 하는 등 알려진 잔 다르크와는 상당히 다른 기록들도 존재한다. 또한 위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처형 당시 본인은 잔 다르크가 아니라며 살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있을 법한 주장인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잔 다르크의 처형 이후 잔 다르크라 주장하는 여인들 중 하나가 샤를 7세를 만났고 그가 그녀를 진짜 잔 다르크라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후에 그녀를 돌려보내며 후한 포상을 쥐어 돌려보냈기 때문에 생존설과 엮어지는 가설이다.
  • 잔 다르크 강간설: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 근거는 약하지만, 실제로 처음 포로로 잡힐 때 귀족 기사들이 잔 다르크가 여자인 걸 알고 유혹 및 성폭행을 시도하려 해서,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이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풍기문란 죄목을 구실로 화형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바가 있는데, 애초에 영국군은 어차피 몸값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고, 아군의 명분과 사기를 높이고 프랑스군의 명분과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떻게든 잔 다르크를 이단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했지, 단순히 바지를 입었다고 화형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81]
여하간 그래서 잔 다르크가 처녀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영국군이 잔 다르크의 처녀성을 검사했을 때 처녀막이 훼손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걸로 추측된다. 이는 <발가벗은 역사>라는 책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고 몸 아랫부분에 말을 타서 생긴 상처라고 언급되었다. 사실 이 설은 여전히 프랑스를 제외한 전세계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으며, 구글로 검색하면 'Was Joan of Arc raped?', 'Did Joan of Arc die a virgin?' 등의 질문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역사학자들까지도 진지하게 연구했다.
이 외에도 적군인 영국군과 부르고뉴군 측에서는 전장에서 지휘하던 잔 다르크를 보고 샤를 7세의 정부라고 욕하기도 했고, 이런 비난 외에도 마녀라고 욕설을 들은 잔 다르크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있다. 이건 그냥 억지스러운 비난에 가깝지만. 신풍괴도 잔느에서는 이 설을 채택해,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뒤 악마에게 씌인 간수에게 강간당해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나온다. Fate/Apocrypha의 <타케보우키 일기>에서도 간접적으로 가능성을 언급했고, <댄스 마카브르>라는 만화에서는 대놓고 영국군에게 범해졌다고 묘사한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영국 섭정공 베드포드 공작의 부인이 그녀의 처녀성을 검사해보고 처녀가 맞다고 인정했으며 절대로 잔을 괴롭히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고 되어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 잔 다르크 간질설: 잔 다르크의 언행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발작증상을 동반하지 않고, 환각증상만을 일으키는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경우도 있다. 잔 다르크는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며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때때로 공격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점이 전형적인 간질의 증상이라는 것이며, 이 부분이 간질설을 지지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1991년의 국제간질협회 논문에서도, 당시의 증언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간질증상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 잔 다르크 외계인큐베 접촉설: 20세기 들어 UFO와 외계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온 주장으로, 제니 렌들즈(Jenny Randles)의 <외계인 납치(Alien Abduction)>라는 책에서 언급되었다.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하느님의 음성, 혹은 천사를 본 것이 사실은 외계인과 접촉한 것이라는 주장. 좋은 닥터 드립이다!
  • 잔 다르크 진짜 마녀설: 현대에 들어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들었다는 주장보다도 더 어이없게 들리는 얘기지만, 마가렛 머레이(Margaret Murray)라는 학자[82]는 실제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 영어가 된다면 원문을 한번 읽어보자. 요정 숭배,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토속신앙 의식, 재판정에서의 이상 행동과 발언, 질 드 레와 연관시켜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논리와 설득력이 없어 묻혀버린 주장이다. 애초에 타당하고 납득이 가는 이론과 연구 결과였으면 잔 다르크를 설명하는데 지금도 자주 언급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물론 가톨릭과 프랑스에서 불만과 유감을 제기했을 가능성은 있었겠지만. 아무튼 토속신앙 문제는 푸아티에에서의 심사 통과와 명예회복 재판에서 고향 사람들의 증언 사실만 살펴봐도 논파되며, 재판정에서 '하늘의 왕' 등의 발언 문제는 잔 다르크가 분명히 예수임을 밝히고 있고,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문맹인 그녀를 노린 데다가, 부당하게 성립된 재판에 호락호락 승복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뜻이었다. 그 때 잔 다르크는 재판정을 향해 오히려 "당신이 주님의 기도를 외울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증명하시오."라고 일갈하며 반격했을 정도다.
질 드 레와의 연관성은 질 드 레의 타락 자체가 창작물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입증할 자료가 없으며, 그의 범죄 사실조차도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현대에 나오고 있어 얼마나 신뢰성 있을지가 의문. 결국 머레이의 의견을 항상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 주장을 듣자 상당수가 지지를 철회했다고 한다.[83] 머레이가 활동하던 시기가 잔 다르크의 시성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시성에 방해할 수 있는 이론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잔 다르크가 마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 이 외에도 재판 과정에서 지혜롭게 대처했다고 사이코패스라고 주장하는 논문까지 있으나 이것 역시 신뢰할 만한 주장은 아니다. <UFO 신드롬>이라는 책에서는 위에 언급된 잔 다르크의 UFO 접촉설을 머레이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주장했다.(…)
다만 머레이는 잔 다르크를 비롯해서 마녀라고 불린 여성들을 부정적인 의미의 마녀로 본 건 아니고 일종의 토속종교나 여성 중심의 종교를 연구하면서 그녀들을 마녀라고 언급한 것이었다. 실제로 머레이는 영국 최초의 여성 고고학 강사이며 공공장소에서 미이라의 붕대를 해체한 최초의 여성의 경력이 있는 등 진취적인 여성에 속했으며 역시 여성참정권을 지지했다. 실제로 몇몇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잔 다르크 마녀설을 포함한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머레이의 잔 다르크 연구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책도 있다.[84] 아무튼 머레이의 잔 다르크를 포함한 마녀로 몰린 여인들이 정말로 마녀였다는 연구는 페미니즘에 기반을 둔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허점이 굉장히 많았다. 마녀사냥 당시 마녀로 몰린 여인들이 고문과 협박에 견디지 못하고 억지 자백을 받은 걸 유일한 근거로 하여 마녀가 진짜로 있다는 식으로 발표를 했으니.(...)[85] 결국 잠깐 동안만 반응이 있었을 뿐 시간이 지나자 묻혀버렸다.(...) 결정적으로 머레이는 역사학자이긴 하지만 유럽사가 아니라 이집트사 전공을 한 분.(...) 유럽인이 유럽사 전공이 아니다.
개신교에서도 잔 다르크는 성녀는 아닐지언정 독실하고 참다운 신자로 인정되는 편이 강한 편. 물론 잔 다르크의 화형을 천주교의 잘못으로 여기며 공격하곤 한다. 교황무오설의 비판 요소 중 하나. 하지만 일부 성경 근본주의적 기독교에서는 그녀가 사실은 악마나 악령과 접촉했다고 주장한다.
  • 후스파 협박편지 사건: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는 위클리프의 사상에 따라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잔 다르크가 3살 때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가 있었다. 그의 사상을 따르는 후스파 신도들과 농민들이 귀족들과 가톨릭 세력에 맞서 1419년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스전쟁이라고 기록될 만큼 커다란 규모의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430년 3월, 잔 다르크는 뜬금없이 이들의 본거지인 프라하 대학에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의 내용은 대략 '얼른 회개해서 이단 그만 믿고 전쟁 그만두고 가톨릭으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내가 십자군 끌고 와서 응징한다.' 잔 다르크의 흑역사로 분류할 수 있을 내용. 영국군 부상병을 위로하기도 한 잔 다르크의 모습과 대조되는 내용이기에 충공깽할 내용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많이 있다. 먼저 잔 다르크는 문맹이라 장문의 편지를 쓸 수 있었을 리 없다. 대필하는 사람이 잔 다르크가 불러주는 내용을 대신 썼을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이 편지보다 더 심했는지 대필한 사람이 부풀려 썼을지는 알 수 없다. 또 당시 후스파는 결과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던 것이 사실이기에 그런 소문을 듣고 잔 다르크가 편견을 가질 여지가 충분했다. 아무튼 이 편지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 아닌 정통교회를 따른다는 명확한 증거인데, 종교 재판에서나 명예회복 재판에서나 이 편지의 언급은 전혀 없다. 가짜일 확률이 높겠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 흔히 중세시대 시대 인물로 인식이 강한 편이고, 실제로도 활동하던 시대가 그렇긴 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활약하고 세상을 떠나서 그렇지, 자기 어머니처럼 오래 살았으면 르네상스 때 인물이 되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생)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년생)와 같은 시대 사람이 되어 그들의 활약을 어느 정도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지금처럼 그들과 같이 유명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5.1 대한민국에서의 잔 다르크

대한민국에서는 영국과 싸운 잔 다르크의 모습이 구국 영웅의 모습으로 비춰진 듯, 잔 다르크를 '성녀'라기보다는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에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구한말 개화기 때였다. 경술국치 3년 전인 1907년, 장지연은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 《애국부인전》을 발표했다.근데 결혼도 안한 여자에게 부인이라니 애국부인이 아니라 애국처녀라고 해야하는거 아닌가... 제목 그대로 조선 내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자는 취지인 듯하지만 현실은… 이때 잔 다르크를 그린 삽화는 갑옷을 입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당시 선교사 부인들 차림새이다. 이 작품이 잔 다르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인데, 사실 그보다 먼저 잔 다르크를 처음 알게 된 한국인은 프랑스에 다녀온 민영익과 그 일행이거나 아니면 홍종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들이 잔 다르크에 대해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추측에 그칠 뿐이다. 일단 최소한 파리를 다녀온 이상 잔 다르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그녀의 동상 자체는 봤을 것으로 추정된다. 웬 갑옷 입은 황금빛 아가씨 동상이 도시 한복판에 있어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유관순 열사가 잔 다르크에 대한 위인전(아마도 애국부인전)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확실하게 기록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겹치는 면이 많아 평행이론, 환생 등의 이야기에 종종 언급된다. 이웃 섬나라에 침범당한 조국을 위해 깃발을 들고 일어서다가 10대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공통점. 굳이 더 들자면 잔 다르크의 탄생 590주년 되는 해에 유관순이 태어났고, 유관순이 순국한 해는 잔 다르크가 시성된 해이다.

어린이들 위인전 시리즈에 높은 확률로 포함되기도 한다. 설령 빠진 경우라도 유관순의 위인전에 곁다리로 소개되기도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지 1930년 1월, 8권 1호에 실은 위인 이야기가 그녀의 이야기였는데, 그의 성향 상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였던 듯. 그 밖에도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시 이별 마지막행에 잔 다르크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등, 당시 잔 다르크는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많이 여겨졌다.

한편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김우진의 산돼지에서 최영순을, 박경리토지에서도 유인실을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여성 개혁가나 운동가, 지도자 등에게 'XX계의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개그 코너어떤 여배우, 학력위조범, 그리고 영 좋지 못한 정치인처럼 자기들 혹은 그 주변만 잔 다르크라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리 잡스에서는 잔 다르크를 신으로 모시는 이단 무당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처녀장군신

세계사 과목 교과서나 참고서에 적어도 이름이 한 번이라도 꼭 나오는 인물이다. 삼국지유비 조조 손권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구품관인법진군은 나오는 책은 종종 있지만. 반면 백년전쟁의 최대의 격전인 아쟁쿠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헨리 5세는 이름이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품종은 아니지만 무궁화 중에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품종이 있다. #

종교적인 성녀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듯 싶지만 의외로 그녀의 삽화가 있는 우표가 발매된 적이 있다. 물론 찰스 왕세자다이애나비의 결혼기념 우표를 내놓은 경우처럼 외화벌이를 위해서지만.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과장된 선전용 소개일 수 있겠으나 그 소개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그녀를 민족적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6 대중문화와 잔 다르크

잔 다르크의 생애는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작품들을 낳았고, 아나톨 프랑스와 같은 프랑스 문호는 잔 다르크의 성인 활동을 일종의 간질병의 일환으로 보고 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생전 유럽 최초의 여성 문학가로 여겨지는 크리스틴 드 피잔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시를 썼고, 잔 다르크가 죽은 해에 파리에서 태어난 시인 프랑수아 비용은 <왕년의 미녀가>라는 시에서 그녀를 영국인이 루앙에서 불태워 죽인 로렌의 착한 처녀라고 언급한다.

비용이 어린 시절에 잔 다르크에 맞서 싸우거나 욕한 파리 시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자랐을 텐데도 이런 시를 쓴 것으로 보아,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나 부르고뉴파가 샤를 7세에 협력한 이후로는 파리 시민들도 잔 다르크를 조국의 영웅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파리 시민들이 계속 반감을 갖고 있었다면 잔 다르크의 죽음 25년 뒤의 명예회복재판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처음엔 잔 다르크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가 만연했으며,[86]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헨리 6세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아래 '셰익스피어와 잔 다르크'를 참조.

그러나 계몽시기 이후에는 잔 다르크가 아니었다면 강력한 왕정국가가 이룩되어 영국에 민주주의가 도입이 안 되었을 거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늘었고, 프랑스에 의해 성역화까지 되며 부정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다. 18세기 이후에 나온 영국의 역사책에서는 잔 다르크를 적어도 마녀라고 못박아 묘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활동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잔 다르크에 대한 무언극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헨리 6세 1부처럼 악역으로 나오고 화형당하면서 악마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걸 본 영국인 관객들이 분노하며 썩은 채소 등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극단 쪽에서는 황급히 천사에 의해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고 한다.(…) 물론 조지 고든 바이런처럼 잔 다르크를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라고 비난한 영국인들도 없지는 않았다.[87]

한편, 윈스턴 처칠제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 골에게서 잔 다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는지 자신의 저서 《영국의 탄생》에서 "잔 다르크는 범상한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뛰어났기에 한 세기가 지나도 그녀에게 필적한 인물은 없다."며 칭송했으며 작가로서 잔 다르크 위인전을 쓰기도 했다. 또한 공리주의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은 그녀를 엘리자베스 1세와 더불어 여성도 능력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예시에 해당하는 인물로 들었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 그러니깐 영국 왕족인 빅토리아 멜리타 공주는 잔 다르크로 분장을 해서 자매들과 연기를 하기까지 했다. 당시 사진 성녀 카타리나를 만나 계시를 받는 장면이나, 화형 장면에서 십자가를 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잔 다르크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출시한 잔 다르크 위인전의 집필도 영국인이 했고, 영국 출신 변호사가 쓴 인저스티스라는 저서에서는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해서 부당한 재판에 의한 사법살인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현대 영국에서는 적일지라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잔 다르크 성상과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는 성당과 잔 다르크의 이름을 붙인 학교까지 영국에 있을 정도. 그리고 잔 다르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윈체스터 추기경과 베드포드 공이 묻힌 윈체스터 대성당에는 잔 다르크의 동상을 설치하여 사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잔 다르크를 다룬 희곡인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작품을 썼는데, 성녀 이미지로 나오긴 하지만 전장에서 만난 영국군 청년 장교인 라이오넬과 사랑에 빠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독일에서 나온 이 작품에 프랑스가 자극을 받아 뒤늦게 잔 다르크를 찬양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후대의 주세페 베르디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이 작품을 각색하여 오페라를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88]은 본명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쓴 채, 화자로서 잔 다르크의 생애에 대해 읊어주는 작품인 《잔 다르크의 생애》란 작품을 썼다. 제3자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는 잔 다르크의 소녀로서의 삶과 고뇌가 잘 표현되어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잔 다르크의 시성을 보고 영감을 얻어 《세인트 조운》이라는 희곡을 집필했다. 여기에서 그녀는 신교도의 유형으로 묘사되었으며, 쇼는 이 작품에 힘입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실 이 작품에서의 잔은 단순히 용감하고 청순한 처녀 용사로만은 나오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고집이 무척 강하고 당돌한 성격으로 나오며 죽음 이후 나오는 에필로그에서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과 현실, 그리고 미래(20세기 초반)에 자신의 시성 모습에 대해 빈정대고 냉소적인 모습으로도 나온다.

영국의 뮤지션 엘튼 존은 2000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노래 Did Anybody Sleep With Joan Of Arc을 작곡했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32년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발표했는데, 대공황 시기의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구세군 요한나 다크는 영락없는 잔 다르크를 모티브로 해서 쓰여진 캐릭터다. 주인공 요한나는 노동자들을 돌봐주고 파업에 나선 그들의 편이 되면서도 파업 과정에서 생기는 폭력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혼란을 우려하여 상황이 커지지 않게 안정시키려다가 뜻하지 않게 파업이 실패하는 파국을 보며 노동자들의 질타를 받고 충격을 받아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비극으로 마무리되는데, 죽음을 맞는 부분에선 실러의 오를레앙의 처녀를 오마주했다. 작품이 쓰여진 당시의 사회상에 잔 다르크라는 인물을 넣어 풍자한 작품. 한국에서도 연극이 공연된 바 있는데 그 때 공연한 배우 중 한 사람이 악역 전문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안길강.

잔 다르크를 다룬 영화 및 드라마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1900년에 간략하게 그녀의 일생을 다룬 10분 짜리 프랑스 영화가 있고, 1차 세계대전이었던 1916년 당시 프로파간다로 미국에서 만든 〈그 여자 잔〉[89]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작품은 1928년에 제작된 무성영화의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90]으로, 실제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을 그대로 옮겼으며 고문 장면과 삭발 장면시 표정연기가 극단적이고 촬영 기법에서도 당시 영화에서 굉장히 혁신적이다. 영화 역사상 명작들을 꼽을 때 거의 높은 확률로 들어가는 작품. 상업적으로는 잉그리드 버그만[91] 주연, 빅터 플레밍 감독[92]의 1948년 스튜디오 촬영 작품[93]이 유명하고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을 그대로 옮긴 작품이 있으나,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원작 연극과 달리 영화에 대한 평은 좋지 못했고 잔 다르크 역[94] '진 세버그(Jean Seberg 1938~1979)'의 운명은 처참했다.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쪽에 가담해서 남편인 로맹 가리의 아이가 이니라 흑인 민권 운동가와 검열삭제 후 임신했다는 소문을 FBI에서 고의로 내었는데, 이게 신문 기사화 되고 결국 충격으로 유산 후 사망한 것[95]

한편 뤽 베송 감독과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1999년 작품은 광신도의 의미로서 파악했는데 꽤 유명하다. 어떻게 보면 종교 비판 영화인데 어째 성당과 교회에서 단체 관람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이 많이 봤다. 물론 잔 다르크를 긍정적으로 보고 가련하게 여기는 감상문들도 있지만 영화 속 잔 다르크가 어딘가 이상하게 나온 탓인지 어째 잔 다르크가 자기 뜻을 하느님의 뜻을 빙자하며 하느님의 뜻을 거슬렀다면서 그녀를 종교적으로 비판하고 교훈으로 삼는 듯한 개신교 계열 신자들의 감상문들도 종종 올라온다. 흠좀무. 물론 화형 장면 직전의 마지막 모습의 경우엔 잔 다르크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감상으로 쓰곤 한다. 같은 해에 캐나다에서 TV 시리즈로 나온 릴리 소비에스키[96] 주연의 작품은 이와 반대로 순수한 소녀의 모습으로 그렸다.[97]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5년 프랑스와 불편한 관계였던 독일에서도 잔 다르크를 다룬 작품이 만들어졌는데, 보불전쟁[98]으로 알자스-로렌 지방을 차지한 독일에서는 잔 다르크를 독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927년에 만들어진 SF영화 〈메트로폴리스〉에 나오는 여성형 로봇의 모델도 잔 다르크.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질 드 레와의 로맨스도 전해진다. 물론 실제로 증명된 일은 아니고 창작에 그치고 있다.

6.1 셰익스피어와 잔 다르크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초창기에 쓴 희곡 헨리 6세 1부에도 등장하는데, 세익스피어는 적장인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녀 이미지로 나가다가 몰락할 즈음에 악마와 결탁한 마녀악녀흑화되는 것으로 묘사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대놓고 잔 다르크라고 하진 않고 돌려서 잔 라퓌셀이라고 하지만, 당시 잔 다르크에 대한 17세기까지의 당시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어땠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극중 흑화한 잔 라퓌셀은 악마와 결탁[99]은 기본에, 자기가 샤를 7세, 나폴리 왕, 백년전쟁 이후의 인물인 마키아벨리[100] 등 유명인들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질 않나, 심지어 양치기 아버지에게 천하다고 패드립까지(…) 시전한다.

또, 영국의 기사 워릭이라는 등장인물은 잔 다르크의 화형을 지시할 때, 잔이 어린 소녀라도 상관하지 말고 기름을 더 붓고 장작을 쌓아 불을 강하게 해서 빨리 죽여 고통받는 시간을 줄이라는 드립을 친다. 상대방의 내세를 위해 사람들을 죽인다는 깨달음을 얻어 그걸 행한 누군가 같다. 앞뒤가 맞지 않는 유머성 대사로 볼 수도 있지만, 프랑스의 성녀를 깎아내리는 한편 관대하고 신사적인 영국 기사를 부각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후 2부와 3부에는 영국의 기사들도 선역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잔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묘사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연극을 프랑스에서도 공연했다.(…) 프랑스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아무튼 셰익스피어에게 흑역사인 작품인지 4대 비극, 5대 희극과 달리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되었는데,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 4대 비극, 5대 희극 등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들에 비해서 셰익스피어의 사극들은 리처드 3세헨리 5세를 제외하면 영미권을 제외한 곳에서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2011년에는 한국에서도 공연했는데, 원작과 달리 다소 순화해서 표현했으며[101] 사랑과 전쟁으로 유명한 민지영이 잔 다르크 역을 맡았다. 작품 속 잔 다르크의 모습과 해당배우가 주로 출연한 작품과 주로 연기한 캐릭터를 생각하면 의도가 의심 받을 수도 있는 캐스팅.[102]

일본에서 했던 해당 작품의 공연의 경우 재일교포 소닌이 잔 다르크 역을 맡은 적도 있는데, 일본에서의 재일교포에 대한 대우나 인식을 생각하면 이 또한 여러모로 묘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이 작품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아닌 다른 작가가 썼다는 주장도 나왔었는데, 이건 그 무렵 잔 다르크의 시성이 추진되고 영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기 때문에 책임회피라는 분석도 있다.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가 굉장히 잔혹하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필력과 묘사 때문에 다른 작가가 썼다고 주장한 것과도 비슷했던 양상.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그가 전부 혼자 쓴 것은 아니고, 이 작품 또한 여러 작가들이 공동집필 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일부 셰익스피어의 추종자들은 두 작품 모두 셰익스피어의 초창기 작품이라며 내용의 문제를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냥 대필설만 부정한다면 그리 문제될 건 없지만,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극단, 극장, 단체인 셰익스피어 글로브의 트위터에는 잔 다르크의 기일에 '오늘은 잔 다르크가 파문되고 이단자로 선언되어 화형된 날'(…)이라는 고인드립까지 친다는 게 문제다. 한 개인이 아닌 공식단체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했으니 문제가 될 만하다. 반대로 잔 다르크가 명예회복된 날과 시성된 날은 관련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이 극장이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을 상영하기도 한 것으로 볼 때 딱히 잔 다르크에 대한 비하의 의도라고 하기 힘들긴 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극중에서의 잔 다르크 캐릭터는 막판 마녀로 돌변하는 모습 이전엔 오히려 셰익스피어가 잉글랜드 입장에서 썼을지라도 그녀를 적일지라도 괜찮은 캐릭터로 만든 편이다. 샤를 7세[103]의 대사를 통해서 생드니한테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말고, 잔이 프랑스 성인이 될 거라는 대사를 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물론 프랑스까진 몰라도 전세계의 성인이 될 것까지는 예상을 못했겠지만 후반부 문제의 장면들도 해석에 따라선 참작의 여지가 있는데, 먼저 잔 다르크가 악마를 불러 도와달라고 하다가 거절 당하는 부분은 멘탈붕괴 상태에 빠져 일시적으로 하지 않은 짓까지 하면서까지 영국군을 물리치려는 무리수를 두다가 혼자서 환상을 보고 헛소리를 읊은 것일 수도 있고, 부친을 향해 패드립을 치는 장면[104]과 잔 다르크가 스스로 외치는 임신 드립[105]도 잔 다르크를 화형시키기 위해 잉글랜드 측이 변명을 하거나 어설프게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애초에 캐릭터가 후다닥 악역으로 돌변하는 것부터가 뜬금없다. 당시 잉글랜드인 입장에서 썼다는 걸 가정하면 그 당시의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잉글랜드인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시대적 한계로 충분히 여길 수 있다. 애초에 이 작품을 쓰던 때가 셰익스피어가 작가 생활 초창기라서 이후에 쓴 작품들에 비해서 부족한 게 당연하다. 문제는 역시 이 작품을 가지고 그 당시도 아닌 현대에서 잔 다르크에 대해 고인드립을 치거나 마녀나 악녀로 여기는 걸 당연히 여기는 걸 정당화할 여지가 있다는 것.

어쨌거나 근현대에 들어서는 잔 다르크에 대해 원작처럼 직접 마녀나 악녀로 묘사하는 게 부담되는 일인지 이미 20세기 때부터 해당 작품의 무대화에서 잔 다르크의 부정적인 묘사를 지우기도 했으며, 위에도 언급된 2011년 한국에서의 공연도 그랬고, 2016년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드라마화 한 할로우 크라운 시리즈에서도 잔 다르크의 묘사에 대해 원작과 달리 부정적인 묘사를 지우고 각색해서 연출했다.

페미니즘 성향의 여성 셰익스피어 전문 학자나 영문학자들 중에선 이 작품의 잔 다르크의 묘사에 대해 당시의 여성차별과 편견의 사례로 연구하기도 한다.
한편 경악스러운 분석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를 잔 다르크로 빗대서 풍자 혹은 조롱했다는 주장.(...) # 다만 이 주장을 하는 글쓴이가 전문 연구가라기 보다는 셰익스피어 덕후나 역덕후로 추정되므로 독자연구에 의한 추측이므로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이면 용자 셰익스피어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프랑스와 잔 다르크를 욕하는 줄 알고 좋아했을지도 몰랐는데 하지만 잔 다르크를 왜곡한 건 변하지 않는다. 블로그 본문 사진에 엘리자베스 1세 역할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잔 다르크다.(...)

6.2 현대 서브컬처의 잔 다르크

갑옷을 입고 싸우는 투희, 소녀 콘셉트 등 여러가지 배경으로 보아 오덕계에서 환장할 만하다.[106] 실제로 모티브가 차용되는 경우는 많은데 비해서 본인을 직접 모에화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역시나 모에선의 마수를 피해 갈 수는 없어서 Fate/Zero에 나오는가 하면, 위인전이나 학습만화를 중심으로 종종 나온다. #1#2#3 내 성녀가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1980년대에 슈에이샤에서 출판된 《세계의 역사 '카를 대제와 잔 다르크 중세유럽'편》은 대략 150쪽 짜리인데, 잔 다르크는 카를 대제와 더불어 주인공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표지에서 카를 대제는 왼쪽 구석 뒤에 있고 잔 다르크는 중심에 서서 제일 크게 나왔다. 그러나 카를 대제는 40쪽 가까이 등장하는데 비해 잔 다르크는 미소녀로 묘사되기는 했으나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5쪽 정도만 나온다. 물론 카를 대제는 70살 넘게 살았고 잔 다르크는 겨우 19살까지 밖에 못살았기 때문에 비중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표지 모습 그대로 잔 다르크가 미소녀로 나오는데, 일본웹에선 잔 다르크의 외모를 미화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유명출판사인 금성출판사를 비롯한 한국의 몇몇 출판사들은 이 만화를 해적판으로 들여오거나 베껴서 그렸다. 하지만 베껴서 그린 만화의 잔 다르크는 미소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카를 대제와 더불어 중세의 대표인물로 선정될 정도의 위상이라 여겨진다.
2011년 9월에는 대놓고 모에화를 노린 《미소녀 전사 잔 다르크 이야기》(…)도 출간되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한국에서도 학습만화를 중심으로 모에화가 시도되고 있다. 댓글에도 주목하자. 저 시대에 삼색기유니언 잭을 들고 나온다

잔 다르크 자체가 주인공이 아닌 이상, 주로 용감한 모습이나 미형 단역의 위치로 등장한다. 세계사에서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인만큼, 용감한 소녀라는 이미지에 더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이 많은 듯.

다음은 기타 많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잔 다르크의 수많은 모습들이다. 가나다순.

  • 갓 오브 하이스쿨: 234화에 프랑스 출신의 앙드레가 쓰는 차력 기술 중 하나가 잔 다르크다. 이 때 나오는 잔 다르크의 모습이 그의 약혼녀인 쥬히와 닮았는데 문제는 그녀는 살인을 저저르고 앙드레를 배신했었다. 게다가 불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나오는 걸 봐서는 마녀사냥과 화형을 빗댄 듯 하다. 고인드립! 가톨릭과 프랑스에서 항의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 거울전쟁 시리즈: 벨리프 쇼링이라는 영웅이 여러모로 잔 다르크랑 판박이. 정확히는 시리즈 2편이었던 '은의 여인' 때의 모습이 잔 다르크다. 악령군에 대항하는 부대의 리더로 성녀 이미지에 승승장구 하다가 배신으로 붙잡혀서 화형당하는 것까지 똑같다. 제작사 공식 유즈맵 히든 미션에서 몰래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 겨울왕국: 그림 속 모습으로 잠깐 등장. 드디어 디즈니 시리즈에서 등장했다. 뮬란처럼 장편 주인공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마지막엔 화형으로 동심파괴
  • 내일의 나쟈: 12화에 잔 다르크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에피소드 후반부에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짧막하게 등장. 그녀가 숨겨 놓은 보물은 사실 전쟁이 끝나길 빌며 심은 백합의 씨앗이었다.
  • 드리프터즈: 악랄한 악당으로 등장. 여기서 등장하는 악역들은 다 현실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영웅들이 무언가의 악영향으로 정신줄을 놓은 상태로 등장한다.
  • 마계왕자: 질 드 레가 만나고 싶어했던 성녀. 화안 속성. 미카엘의 지시를 받고 천계에서 선봉이 되어 마계를 침공한다.
  • 문명 5: 위대한 장군으로 나온다. 그런데 조금 특이하게도 남자의 모습으로 나온다. 락밴드 베토벤이나 영화감독 미켈란젤로는 안 이상하고? 닌자 안중근은 어떻고 물론 여성장군 이미지가 없어서 그렇지만 수염기르고 말위에 오른 잔다르크의 모습은 가히 충공깽 남장을 그렇게 했다면 들켰을 리 없을텐데. 그나마 현대로 오면 군용 차량을 탄 지긋한 중년 아저씨가 나온다. 이게 다행인 건지
  • 모두의 마블 : 30일간 세계여행을 돌면 경우에 따라서 얻을 수 있는 캐릭터로 나왔었다. 흑화 잔 다르크도 나온다.
  • 밀리언아서 시리즈 : 기사 카드 '특이형 잔다르크'로 등장. 확밀아에서는 심히 골룸한 스펙 탓에 거의 쓰이지 않았고, 괴밀아에서는 고위력의 전체공격기를 사용하는데다 고HP를 보유하여 전작에 비해선 비교적 나은 평가를 받았으나 사용하기 심히 난감한 고코스트에 별다른 부가효과도 붙어있지 않아 결국 확밀아 때처럼 함정카드 취급을 받게 된다. 확밀아와 괴밀아 양쪽 모두 성녀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괴밀아의 괴리진화 형태는 잔다르크 마녀설을 반영한 것인지 암속성에 다크 포스를 풍기는 요염한 느낌의 모습으로 변하며 칭호 역시 '민중을 인도하는 성녀'에서 '순교의 말로'로 바뀐다.
  • 벼리의 시간여행: 악역 캐릭터인 도도에게 홀려서 자기가 여왕이 되라는 신탁을 받았다며 프랑스 왕에게 요구하더니 분노해서 괴물로 변한다.(...) 물론 마지막엔 정신 차려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 비탄의 아리아: 잔 다르크가 생존하여 남긴 후손인 잔 다르크 30세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런데 헨리 6세 1부에서처럼 주인공들의 적이자 악녀로 나온다.(…) 물론 곧 주인공들의 편이 되지만. 프랑스에서 알면 고소미를 먹일지도 모른다.
  • 세인트☆영멘: 제대로 순교했는데 자기보다 나중에 순교한 사람이 성인품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500년 가까이 성인품에 오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보다 못한 베드로가 성인상(聖人賞)을 만들어서 건네줬다고 하는데…
  • 신격의 바하무트: 게임판에서는 청순하고 용감한 모습 버젼과 흑화한 모습 버젼이 담긴 카드로 나오며 애니판에서는 원작 게임처럼 용맹하고 과묵한 성격을 지닌 여전사로 나온다. 같은 게임 제작사에서 만든 게임 그랑블루 판타지에서도 등장. 관련 항목 참고.
  • 식극의 소마: 만화판 177화 주제가 '일어서는 여기사 잔 다르크'이며, 여주인공 나키리 에리나가 잔 다르크처럼 갑옷을 입은 모습이 나온다.
  • 아즈키쨩: 65화(투니버스판 기준으로는 2기 25화, 전체로는 64화)에서 노야마 아즈사(아즈키)와 운동회에 함께 참여하는 사카키바라 요코가 코스프레할 대상으로 고르고 그걸 들은 아즈키와 친구 니시노 카오루가 도서관에서 보는 위인전 속 모습으로 등장. 요코는 진짜 잔 다르크처럼 분장하기 위해(물론 갑옷은 진짜 잔 다르크처럼 플레이트 아머는 아니고 골판지로 만든 갑옷이다.) 말까지 타지만 들뜬 나머지 깃발로 말의 엉덩이를 건드려서 말이 날뛰게 되고 위기에 처하다가 아즈키의 아버지가 말을 진정시켜서 겨우 무사하게 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선 캠페인에서 직접 조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영웅 중 하나로 나온다. 1번 미션에선 일반 주민보다 조금 강한 유닛으로, 2번~5번 미션까진 기병으로 출전한다. 다른 캠페인의 주인공들보다 자주 게임 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 미션인 6번 미션에선 5번 미션이었던 파리 공성전 이후 부르고뉴에 체포된 것으로 처리되어 탈출했는데 어째서 시나리오 상에서 화형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잔다르크의 역사적 의의를 상징하는 명언이 나온다
떄떄로 역사의 결과는 군대의 힘으로 결정 나기도 하고 우연한 사건으로 결정나기도 한다 그러나 15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어린 소녀의 의지로 결정되었다 이소녀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전 군을 통솔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 엑설런트 어드벤처: 키아누 리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88년작 영화로, 주인공이 역사과목 숙제를 위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위인들을 데려온다는 설정으로 칭기즈 칸,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등장. 처음 등장할 때는 교회에서 기도하는 터에 나타난 주인공 둘을 보고 하느님이 보낸 사자로 알고 순순히 따라가며 조신하게 나왔지만 호기심에 현대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현대 미국의 백화점에서 사람들이 에어로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신이 나서 강사를 밀치고 자신이 그 자리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신나게 활약한다.
  • 요괴 오토기 판타지아: 신령 5성으로 나온다.
  • 잔(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단편): 잔 사후 잔과 비슷하게 남장을 하고 잔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게 되는 귀족 가문의 소녀 '에밀리 드 로렌느'가, 모험을 겪으며 잔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잔의 죽음에 절망해 연쇄살인을 하고 있는 질 드 레등을 만나기도 하고, 잉글랜드 출신의 아내를 거칠게 대하거나 성적으로 농락하고, 부왕의 첩을 강간하는 등 가혹한 성격을 가지고 겁쟁이 부왕에 맞서 싸우고 있는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게 잡히게 된다. 결국 옷이 찢겨져 여자임이 드러나며, 여자 옷을 입으면 살려주겠다고 하는 왕세자를 뿌리치고 결국 요망한 자라고 화형당할 뻔하는데, 그 순간 번개가 내리쳐 화형대가 쪼개지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화형대에서 잔의 환상을 보고 그 덕에 왕세자의 기가 죽어 살아난다. 이후 성인이 된 주인공이 잔의 시복식에 참석하면서 만화는 끝난다. 독특하게도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예언자 역할을 해야 했던 잔 다르크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한 만화이며, 파리에서 다시 열린 잔의 종교재판에서 잔의 어머니가 "다른 건 필요없으니 딸을 돌려달라"라고 호소하는 장면 등을 삽입해, 정치적으로 이런저런 상징이 되어 죽어서도 남성들에게 이용당하는 잔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부왕과 갈등하고 아내를 학대한 왕세자 루이의 인물상 등은 의외로 역사적 고증에도 충실했다. 덤으로, 아무리 봐도 버락 오바마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제(신부)가 3권에 나온다(…) 한국에서도 출시되었는데, 사실 출시된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는 작품이란 게 더 문제(…). 더 안습인 것은 학습만화로 잘못 전해져 1편은 그냥 '잔 다르크'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2편과 3편엔 '새로운 잔 다르크'로 이름을 바꿔서 출시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번역은 발번역.
  • 장미왕의 장례행렬: 칸노 아야의 작품. 주인공 리처드를 조롱하며 괴롭히는 악령으로 등장하는데 사실 과거에 리처드의 아버지에게 잡혀서 화형에 처해진 프랑스군의 마녀라는 설정이다.(...) 애초에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리처드 3세를 각색해서 만든 작품이라.....
  • 코드 기아스 나이트메어 오브 나나리: 짧막하게 등장하는데, 보이시하게 생겼으면서도 굉장히 냉혹한 외모를 가졌다. 프랑스군을 이끄는 여전사라는 설정은 역사와 똑같지만 잉글랜드 편에 있던 C.C.와 대립하는 인물로 아예 오를레앙의 마녀라고 등장. 그것도 그냥 마녀가 아니라 C.C의 대사에 의하면 무고한 어린 아이까지 학살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C.C를 띄워주려고 과한 무리수를 던졌다. 프랑스 내 잔 다르크의 위상을 염두해 본다면 프랑스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C.C를 마녀라고 부르며 몸에 검으로 잔인하게 흉터를 남기며 치욕을 주었다. 하지만 결국 훗날 C.C의 마법에 처참하게 복수를 당하며 패배, 포로가 되어서 결국 화형당한다. 그 때 사악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C.C에게 불로불사의 저주를 내린다. 이건 역사왜곡의 도가 지나치잖아. 고인드립!
  • 쿠마미코: 애니메이션 8화에서 아마야도리 마치가 피해망상에 빠질 때 배경의 모습으로 화형 당하는 잔 다르크의 그림이 나온다.
  • 크루세이더 킹즈 2: Sons of Abraham DLC에서 추가된 이벤트로 등장한다. 순결파로 개종하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 여성이 군대를 이끌 수 없지만 예외적으로 군대를 이끌 수 있다. 33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무력을 들고 나온다. 참고로 이 게임에서 무력 20 이상이면 당대 최고의 장수로 볼 수 있다. 그 예로 칭기스 칸의 무력이 26이고, 리처드 1세의 무력이 20대 초반이다... 역사인물 중 무력이 가장 높은 인물은 27의 무력을 가진 엘 시드수부타이. 사실상 게임상 최고 무력 캐릭터. 특성도 Inspiring Leader, Aggressive Leader(이건 항상 좋은 트레잇은 아니지만) 등 강력한 트레잇을 들고 있다. 다만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이 계속해서 불만을 표출하기 때문에 계속 쓰고 싶으면 군주가 이들을 달랠 만한 외교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군주가 사망하면 바로 이벤트 종료로 잔 다르크도 증발(...) 또한 기독교 계통 군주면 이벤트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흑인 잔다르크를 볼 수도 있다. 프랑스인 문화권이면 잔 다르크로 나오고 그 외의 기독교 국가에서는 그 문화권의 여성 이름 중 랜덤하게 등장한다. 선택지를 잘 골라서 최종 이벤트까지 보면 무력이 50을 넘는다(...). 역시나 선택지를 잘 고르면 결혼도 가능하지만, 그 대신 장군으로는 쓸 수 없게 되므로 참고. 역사대로 이단 재판 후 화형 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 하마사키 아유미: Free & Easy: 싱글의 테마가 21세기의 잔 다르크이다. 재킷은 잔 다르크로 분장한 하마사키의 그림이고, PV도 잔 다르크의 처형 장면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것, 가사의 주제도 그 테마에 걸맞게 스스로 강해져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혈계전선: 애니메이션 마지막화에서 절망왕이 로마부터 현재까지 과거 역사를 관망했다는 언급에서 등장. 그런데 이 항목에도 나와 있는 앵그르의 그림 속 모습과 콩피에뉴 전투에서 붙잡힐 때의 모습의 그림을 그대로 덧칠해서 썼다. 게다가 잔이 들고 있는 깃발은 프랑스 공화국의 삼색기.(...)
  • Fate 시리즈: 하단 이름이나 모티브를 차용한 캐릭터 부분에 있듯이 Fate/Apocrypha에서 룰러 역할로 나온다. 사실 그 이전의 Fate/Zero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며 나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가면라이더 고스트: 21화에서 잔 다르크로 추정되는 안마가 나온다. 허나 기사도로 무장한 것이 맘에 안들었던지 이고르에 의해 조종을 당해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다가 주인공과 싸우다 상황에서 공격당해 다시 원래 성격으로 돌아오고 다음에는 찾을때는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하며 사라진다.

6.3 잔 다르크 신드롬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젊은 세대가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100년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의 전투는 석궁과 기사로 대표되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서 대포의 화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높으신 분들요태까지 그래왔코 아프로도 꼐속 그랬듯이 여전히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100년 전쟁 말미에 등장한 잔 다르크는 대포 위주의 공격적인 전투를 통해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기마충격술에 대한 인상도 옅은데다 귀족계급도 아닌 잔 다르크가 기사는 장식입니다를 외치며 위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신기술에 대해 신세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을 '잔 다르크 신드롬'이라 말하게 되었다. 이전 기술에 대한 경험이 고정관념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로운 기술에 노출되고 이전 산업에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은 초보자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현실의 대표적 예시인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인 상품으로 인식하여 운영체제 개발사로서의 강점을 이용, 로터스나 넷스케이프 등의 유망회사를 밀어내 MS의 급성 성장을 이루어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6.4 게임 〈JEANNE D'ARC〉

2006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가 PSP로 발매한 게임. 게임 제작은 레벨 5. 장르는 SRPG - 턴제 택틱스 RPG.

웃기는 CM으로 유명한 것 같다(…). 곳곳에 애니메이션이 삽입되어 있고, 원래 역사에는 없었을 괴물들도 등장한다. 잔 다르크의 수난이 모두 표현되진 않았다.

한국에서 정식 발매되었는데, 일본판 기반에 매뉴얼만 한글화되어 발매되었다.한글날 팀이 완벽 한글화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당연히 정식 펌웨어에서는 구동할 수 없다는 애로사항이 있다.

일본 RPG임에도 북미에서도 호평. 패미통점수는 33/40이었으나 IGN에선 평점 9.0을 찍었다. 실제로도 게임성의 평이 좋아서 PSP 유저들 사이에서 추천목록에 올리는 편.

제나 헤이즈(Jenna Haze)라는 포르노 배우가 이 게임을 매우 즐겨한다는 인터뷰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제작사에서 하지 않은 것인지 영국에서 거부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에서는 출시되지 않았다. 실제로 게임상의 캐릭터들이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고 영국에 아주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긴 하지만, 이것이 이유라면 프랑스에서도 출시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유럽쪽에서는 JRPG가 별로 인기가 없을 뿐이며, 유럽 전역에 출시되지 않은 것뿐이다. 대신, 북미판을 구해서 즐기면 된다.

6.4.1 특성

  • 전투마다 턴 제한이 있어 턴 안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게임오버가 되는데 스토리 진행에 있어 전투 당 제한턴이 매우 빡빡하다. 12턴이나 15턴안에 맵 끝까지 이동하거나 넓게 퍼진 적들을 전멸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동선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턴이 모잘라 게임 오버 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레벨 노가다를 안하고 적정 레벨에서 플레이 하기 위해선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한다.
  • 스토리상 한 번 클리어한 맵을 프리맵으로 다시 진출해서 전투가 가능한데 이를 이용해 렙업 노가다나 스킬 노가다를 시행할 수 있다. 적들의 배치나 출전하는 적의 부대가 스토리 진행때와는 달라진다.
  • 1회차를 클리어한 이후 다시 시작하여 클리어한 세이브 파일을 불러올 경우 프리맵 2회차를 진행할 수 있다. 1회차의 프리맵과는 다르게 적군의 레벨이 상당히 올라가 있기 때문에 난이도가 올라가지만 클리어 이후 보상 스킬이나 아이템이 상당히 좋고 클리어 할 때마다 계속 주기 때문에 템세팅을 위해선 지속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 캐리와 로즈는 분기점에 따라 둘 중 하나만 파티에 들어올 수 있다. 둘 다 좋은 캐릭은 아니여서 그냥 취향껏 고르면 된다.
  • 스토리 진행 분기에 있어 아를롱 숲으로 가느냐 그라이곤 갱도로 가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약간을 달라지지만 결국은 같은 스토리로 이어진다. 아를롱 숲으로 가면 베아트리스가 엘프 마을에서 쫓겨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라이곤 갱도로 가면 설레발 치다 일을 꼬이게 만드는 오베르탕의 스토리를 볼 수 있다.

6.4.2 시스템

기본적으로 적의 후방이나 측면에서 공격할 때 적중률이나 공격력이 정면에서 공격할 때보다 유리하다.

  • 속성

태양,별,달 세 가지 속성이 있으며 이 세 가지 속성이 가위바위보식으로 상성을 갖는다. 해당 속성을 얻는 법은 해당 속성을 지닌 정령이라는 스킬을 착용하고 있으면 된다. 당연히 약점 스킬로 맞으면 엄청 많이 달고 강한 스킬로 맞으면 별로 아프지 않다. 이걸 이용해서 엄청 다양한 전략이 가능할 것 같지만 사실 무속성이 제일 좋다. 전투 때 마다 일일이 악점 속성을 파악에 정령 스킬을 바꾸어 다는 것이 귀찮을 뿐더러 적들의 배치가 세 속성을 조합한 유닛들이 출전하기 때문에 그냥 무난하게 때리고 맞아도 무난하게 다는 무속성이 제일 편하다. 결정적으로 최종보스를 포함해 보스급 적들이 죄다 무속성이라 속성으로 약점을 찌르고 들어가는 걸 막아버렸기 때문에 더욱 쓸모 없다.

  • 버닝사이트(burning site)

전투중 아군이 적캐릭을 직접타격으로 공격을 하면 공격을 당한 적캐릭 뒤편에 버닝사이트라고 뜨며 동그란 원이 뜨는데 턴이 바뀌기 전에 아군의 다른 캐릭이 그 원안에 들어가 공격을 하면 버닝사이트 효과로 인해 공격력과 명중률이 매우 높아진다. 이 버닝사이트는 중첩이 가능해 2번 연속으로 공격이 가능하다면 버닝사이트가 2개가 쌓이기 때문에 효과도 그만큼 좋아진다. 랩업노가다를 하지 않는다면 이 버닝사이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게임이 향방이 결정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 커낵션가드(connection guard)

아군이 상대의 공격을 받았을 시 아군의 유닛들이 서로 모여있다면 커낵션가드가 발동되어 가드나 회피 확률이 크게 올라간다. 아군 캐릭을 중심으로 8방향 중 한 곳에만 아군이 위치해도 발동되기 때문에 억지로 아군 유닛을 옹기종기 붙여 놓을 필요는 없다. 역시 힐링이 상당히 까다로워 HP를 회복하는 것을 어렵게 하여 밸런스를 맞춘 게임 시스템상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 합성

두 개의 스킬 스톤을 활용해 하나의 스킬 스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단순히 하위 스킬을 두 개 합성하여 상위 스킬을 하나 만들어 낼 수도 있지만 스킬의 속성을 바꾸거나 다른 종류의 무기에서 사용되는 스킬로 바꾸거나 할 경우는 잘 안 쓰는 스킬로 합성될 경우도 있기 때문에 미리 인터넷에서 조합법을 찾아보고 필요한 스킬만 합성하자.

  • 공작

성벽에 사다리를 놓거나 건너갈 수 없는 낭떠러지 지형 등에 임시부교를 설치하여 통행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 아군 유닛 중 코레만 활성화 되어 있다. 사다리를 놓거나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위치는 노란색으로 미리 표시가 되어 있어 그 자리에 코레를 갖다 놓는 것으로 공작을 시행할 수 있다. 공작 자체의 활용성이 다양해서라기 보다는 일부 맵의 경우 코레가 공작으로 길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클리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코레를 무조건 키워야 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유일한 여도적인 로즈도 가능은 하다. 코레가 별로이면 로즈를 이용해도 상관없다.

  • 변신

잔느를 비롯한 5명의 팔찌 보유자는 팔찌에 있는 보옥의 힘을 이용하여 변신을 할 수 있다. 변신의 효과는 우선 기본 스탯이 꽤 올라가며 그때까지 남은 HP와 상관없이 HP가 만피가 된다. 그리고 패시브로 신수라는 스킬과 보옥 특유의 필살기 스킬이 하나씩 추가 된다. 필살기 스킬은 보옥에 따라 유용성이 크게 다르지만 공통으로 주어지는 패시브인 신수는 적을 쓰러트리면 그 턴에 행동력을 다시 회복시켜 주기 때문에 쓸모가 많다. 물론 처음부터 다짜고짜 변신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일정 턴을 넘기며 보옥의 힘을 모아야 변신이 가능하다. 그리고 보옥 당 변신 획수는 전투 당 한번만 가능하기 때문에 언제 변신을 활용할 것인지는 생각하면서 플레이할 필요가 있다.

6.4.3 등장인물

6.4.3.1 주인공 파티

초반엔 동레미 마을의 평범한 소녀로 리안과 함께 마을축제에서 참가하고 있었으나 로제를 찾아오라는 아버지를 부탁을 받고 마을 뒤편 교회로 찾아간다. 그러나 로제는 보이지 않고 탈진한 상태로 말 등 위에 쓰려져 있던 기사를 만나는데 순간 기사의 팔에 감겨 있던 팔찌가 강렬한 빛을 내며 잔느의 손으로 옮겨온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나타난 마물들이 잔느와 리안을 공격하고 잔느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디선가 무기를 잡고 맞서 싸우라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잔느는 의문의 목소리의 말대로 칼을 잡고 마물들을 물리치고 숲에서 마물들의 공격을 피해 겨우 도망친 로제와도 합류하여 동래미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마을은 영국군과 마물들의 습격으로 불바다가 되어 있고 주민들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리안이 영국군에 발각되어 목숨이 위태로워 진다. 이때 또 다시 맞서 싸우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보옥의 힘을 사용한 잔느는 리안, 로제와 함께 영국군 지휘관을 물리친다. 싸움이 끝난 뒤 잔느는 보옥의 힘을 깨닫고 자신에게 프랑스를 지키라는 하늘의 계시가 내렸다고 믿고 마을 사람들의 복수와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 영국군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여행에서 잔느는 점차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점점 강해지고 성녀라는 소문을 듣고 모인 동료들과 함께 활약하고 왕세자인 샤를 7세를 만난 자리에서 한 눈에 대중들 속에 숨어있던 샤를 7세를 찾아냄으로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게 된다. 귀족들의 무시와 독단적이 행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잔느는 크게 활약하여 주변 3개의 요새를 함락하고 그라스텔과 탈보트를 무찌르고 영국군의 거점인 토렐 성채를 탈환하여 자신의 성녀임을 입증한다.
잔느의 활약에 용기를 얻은 샤를 7세는 랭스로 진격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하고 잔느 일행을 앞세워 전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방해하려는 영국군의 행동도 만만치 않고 결국 잔느는 샤론 마을에서 함정에 빠져 팔찌의 힘을 잃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만다.
눈을 뜬 잔느 앞에 보인 것은 베드포드에게 패해 나무화 된 루서. 루서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잔느는 비로소 하늘의 계시라고 믿었던 목소리는 사실은 루서의 목소리 였음을 깨닫고 흔적을 쫓아 따라온 질을 만나 리안이 자신 대신 마녀로 잡혀 화형당할 위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서는 잔느를 위해 자신의 가지고 있던 팔찌의 힘을 넘겨주고 소멸하고 잔느는 다시 동료들과 합류하여 리안을 구하기 위해 전진하지만 이미 리안의 화형식은 진행 된 뒤였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리안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사신을 개방하여 사신화 되어버린 로제였다.
이일로 인해 자신들이 마주하고 있는 적이 단순이 영국과 프랑스와의 싸움이 아닌 마왕 갈바로스임을 깨닫게 된 잔느는 롯슈몬의 부탁을 받고 여러가지 일들을 수행하면서 조르슈와 브르고뉴공, 이자보 왕비 역시 사신의 숙주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결국 싸움 끝에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지만 헨리 6세는 잔느가 물리친 사신들의 혼을 흡수하여 오히려 점점 강해진다.
잔느는 일행들과 함께 갈바로스의 대항할 힘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해답을 찾지 못하고 오히려 복수귀가 된 로제의 습격할 받아 고생한다. 산전수전 끝에 결국 파리의 비밀 실험실에서 로제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게된 잔느는 그곳에서 만난 리안의 영혼의 도움을 받아 사신을 물리치고 로제를 구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로제를 구했다는 안심도 잠시 헨리 6세가 기디렸다는 듯이 다시 나타나 사신의 영혼을 흡수하고 결국 마왕 갈바로스로 각성하여 완전체가 되어버린다.
각성한 헨리 6세는 힘을 개방하여 파리 인근을 마음껏 파괴하고 잔느 일행이 좌절하는데 뜻밖에 정신이 돌아온 로제가 갈라로스와 결합된 사신들의 혼을 다시 분리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사신들의 혼을 불러내어 숙주로 삼으려했던 실험의 실험체 였던 로제는 그 기술을 역으로 활용해 사신들을 갈바로스로부터 분리해낼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헨리 6세의 본거지로 쳐들어간 잔느는 앞을 가로막는 베드포드를 쓰러트리고 헨리 6세의 옥좌에 도달한다. 자신은 무적이라며 잔느 일행의 공격을 가볍게 무시하는 헨리 6세였지만 로제의 활약 덕분에 사신들을 분리해내자 공격이 가능하게 되었고 결국 헨리 6세는 쓰러지고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던 갈바로스는 팔찌의 힘에 의해 봉인당한다.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갈바로스는 팔찌의 힘은 이미 뛰어넘었다며 봉인을 깨고 나와 최후의 발악으로 잔느를 자신의 본거지로 끌고 가 버리고 잔느를 구하러 뒤를 쫓아온 일행과 합류한 잔느는 결국 최후의 싸움을 벌여 갈바로스의 본거지에서 갈바로스를 물리치는데 성공하고 다시 현실 세례로 돌아온다.
헨리 6세가 몸을 되찾자 프랑스와 영국과의 싸움은 끝이 나고 잔느와 로제는 일행과 헤어져 동레미 마을에 돌아온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동네 주민들은 집시들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고 이미 마을을 재건하고 있었던 것.

게임 내에서 잔다르크의 성능은 사기캐는 아니더라도 강캐 이상은 된다. 검사는 방패를 착용하여 방어력을 높일 수 있고 변신으로 HP회복을 기대할 수 있기에 공격면에서는 몰라도 방어면에서는 확실이 단단하다. 스탯 분배 상으로는 검 클래스 계열의 4명의 캐릭 중 밸런스형에 가깝다. 덕분에 마방도 어느 정도돼 마법 공격에 대한 몸빵도 가능하지만 검사 상 쓸 일이 적은 마공 같은 스탯까지 골고로 밸런스가 잡혀 있기 때문에 단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변신에 의한 스탯 상승효과가 변신 캐릭 중에서도 최고로 좋기 때문에 잔느는 무조건 키워야 하는 캐릭이 된다. 스토리상으로도 중반 잠깐 파티에서 이탈한 것을 빼면 잔느의 출전이 강제된 전투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다. 공격기인 헤븐즈 게이트의 성능이 탁월하고 시스템상 안정적이면서 높은 딜량을 기대할 수 있는 클래스가 검사이기 때문에 필히 키우는 게 좋다. 순수 데미지 딜량만으로는 도끼 계열이 더 강하지만 도끼류는 일정 부분까지 랩업이 되지 않으면 적중률이 형편 없기에 안정적이지 못하고 무엇보다 잔느의 변신 스킬을 사용하면 스탯도 잔느가 월등해 진다. 안키웠다가는 잔느가 전투불능이 되면 패배하는 조건이 걸린 전투나 잔느만 출전하는 전투 등에서 낭패를 볼수도 있다.

잔느의 고향 친구이며 스타팅 동료이다. 당돌하고 거친 모습이 있는 잔느와 달리 마음 약한 동네 처녀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다. 영국군과 싸우게 된 계기도 잔느가 영국군과 싸우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친구로서 옆에 있고 싶어서이다. 작중에서 로제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은 없어 보이는 잔느와 달리 로제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다. 로제의 사신의 영향을 받아 점점 변하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잔느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리안은 걱정할 정도. 덕분에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갈등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초반부엔 이러한 성격의 잔느의 동료로 잔느 곁을 지키고 있었으나 잔느가 샤론 마을에서 습격을 받아 실종 된 이후 운명이 크게 바뀌고 만다.
리샬은 왕위대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잔느의 실종 사실이 알려지면 황태자를 비롯한 프랑스군 사기에 악영향을 준다고 판단하여 잔느의 팔찌를 이어받은 리안에게 잔느의 대역을 맡겨 버린 것이다. 리샬의 설득에 대역을 맡게 된 리안은 처음에는 덤벙 거렸으나 결국 팔찌의 힘을 잘 활용하게 되었고 결국 랜스까지 진격하여 자신의 힘으로 샤를 7세를 프랑스의 왕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이 때를 기준으로 연약하면서도 사려가 깊었던 본래의 성격이 점차 줄어들고 독선적이고 자만한 모습으로 변해 간다. 이로 인해 조르슈의 도발에 넘어가 무리하게 파리 공격을 실행하다 실패하고 그 와중에 로제는 변해가는 리안의 모습을 견디다 못해 파티를 이탈하게 된다. 배후에서 이 모든 것을 조종하던 조르슈는 리안의 고립의 확실시 되자 그레로와에서 한창 전투 중에 리안만을 남기고 성문을 닫아 버리는 계획을 세웠고 결국 리안은 이 계획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영국군에 사로 잡히고 만다. 뒤늦게 이러한 계획을 알게 된 로제가 몇 번이나 구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샤를 7세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 잔느가 뒤늦게 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리안은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만다.[108]
이렇게 스토리에서 퇴장하는 가 싶었지만 최종보스 전에 리제의 마음속에 나타나 잔느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싸워 로제를 사신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조하기도 한다.[109] 스토리 상으로는 그것이 마지막 등장이지만 2회차 플레이를 하며 콜로세움을 2번 클리어 했을 경우 공동묘지에 가서 가마르를 희생하여 리안을 부활시키는 방법이 있다.

게임 내에서 리안은 검사 계열 중에서 마법과 관련된 능력치에 특화되어 있다. 초반부에 마력 적성을 가진 캐릭이 없기 때문에 마법이나 힐을 담당하는 위주로 키우게 된다. 스토리상 퇴장이 분명하지만 4장에서는 파티를 이탈한 잔느를 대신해 주인공 격으로 활약해야 하기 때문에 키워야 한다. 사실은 스토리상 퇴장 당하더라도 팔찌 전사라는 매리트가 있고 그때까지 키워둔 리안의 스탯이 그대로 가마르에게 전수되기 때문에 키워서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후반부에 가면 마력 특화 동료들이 생겨 마력도 어중간 하고 공격도 어중간한 캐릭이라 좀 써먹기 난감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저들은 여캐인 리안이 충격적으로 퇴장하고 못생긴 개구리인 가마르가 대신한다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경향도 있다.

6.4.3.2 영국군

로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 안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리안의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한 로제가 술집에서 혼자 취해 있을 때 나타나 아는 척을 하면서 좋은 일거리가 생겼으니 같이 일하자고 제안한다. 그 일이라는 것이 조르슈의 부탁을 받고 한참 교전 중일 때 리안을 남겨두고 성문을 닫아걸어 리안을 영국군에 넘겨버리는 것이었으나 로제는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을 다 듣고도 술김에 승락을 해버리고 만다. 이튿날 성문 앞에 나타난 로제에게 큰 소리로 아는 척을 하는 바람에 라 이르를 비롯한 잔느의 동료들이 로제를 배신자로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6.4.3.3 프랑스군

6.5 골판지 전기 W에 등장하는 LBX

제시카 카이오스의 LBX로 이름은 잔 다르크를 줄여서 잔느 D. 전체적으로 여성형에 카우보이 이미지를 하고 있으며, 무기는 쌍권총이다.

골판지 전기 W 주인공들의 LBX들중에서 유일하게 프라모델로 상품화되지 않았다. 작중에서 필살 펑션도 한두 번 쓸까말까 할 정도로 취급이 안습.

6.6 사운드 볼텍스의 수록곡 JEHANNEDARC

6.7 이름이나 모티브를 차용한 캐릭터

  1. 여기저기서 잔다르크라 부르지만 실제 원어에는 존 드 아(르)크 가 훨씬 더 현실적이다
  2. 정확한 것은 아니다. 잔 다르크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412년이라는 것도, 훗날 재판을 받을 때 '나이는 몇인가'라는 질문에 '아마 19살쯤?'이라고 대답한 것을 근거로 잡은 것. 프랑스어판 위키백과에도 '1412년 무렵 출생(née vers 1412)'이라 되어있다. 동시대 역사가들이 기록해두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개 농민의 딸 따위가 태어난 것에 관심을 갖는 연대기 작가는 없었다.
  3. 제일 오래된 그림은 1451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이 그림과 달리 그다지 유명하지 않고 잔 다르크임을 얼른 알아보기는 힘들다. #
  4. 잔 다르크 이전이나 이후나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선 여걸들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가 왕족이나 귀족, 토호 등 상위계층의 여성이었다. 잔 다르크처럼 비주류에 해당되는 시골 농민 소녀가 주도적인 위치에서 군사를 이끈 일은 거의 전무후무하다.
  5. 잔 다르크를 무척 존경했다고 하며 잔 다르크로 분장한 모습도 있다. 그래서인지 잔 다르크와 그녀를 엮는 가톨릭 교회와 신자들도 꽤 있는 듯.
  6. 현대에 전해지는 잔의 친필 서명은 Jehamme로 잘못 적혀 있어서 그녀가 문맹이었으리란 유력한 증거로 꼽힌다. 잠 다르크
  7.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다룬 만화인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에서는 잔 다르크가 Tart라는 이름을 쓴다..하지만 일본어 표기 문제로 작중에서는 "타루토"라고 나온다.자세한 건 타루토 항목 참조.
  8. 잔다르크란 표기가 언제 정착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미 80년대에 각종 위인전이나 전기문학에서 잔다르크란 표현은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그러기에 잔 다크란 표현이 80년대까지 존재했다는 기술은 재고해봐야한다.
  9. 후술했다시피 평범한 농민 출신인 그녀는 자신의 나이조차 정확히는 모르는 상태였다. 하물며 귀족도 아닌, 그 시대의 농민 소녀의 생일을 알 수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10. 딸의 화형으로 슬픔을 겪다가 2개월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440년 무렵까지 살았다. 잔이 계시를 받아 집을 떠나겠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아들한테 잔을 돌에 묶어놓고 물에 던져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만 랭스의 대관식 때 재회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다 풀렸던 듯. 애초에 그런 말을 한 것도 자신의 딸이 전쟁에 나가 위험하고 끔찍한 일을 당할까봐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을테니깐. 사실이 아니긴 했지만 딸의 죽음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이 난 것 자체만으로도 딸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아버지라는 얘기다.
  11. 잔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딸 잔에게 가톨릭 교리와 신앙을 가르쳤는데, 결혼 전에 로마성지순례까지 갈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성씨 '로메'는 '로마'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중세 시대인 당시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고 도로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았고(로렌에서 로마까지 지름길로 가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아니면 멀리 돌아서 가야 한다.) 좋은 길은 통행료가 비쌌으며, 도적, 사나운 짐승 등의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는 먼 길을 보통 남자도 쉽게 지나가기 힘든데, 여자가 성지순례할 정도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딸이 순교한 이후엔 오를레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살았다. 여담으로 남편(1380년생)보다 3년 가량 일찍 태어난 1377년생으로 추정된다. 1457년까지 살았는데 당시는 물론 지금 기준으로도 꽤나 오래인 여든 넘게 살아서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딸을 죽인 원수인 영국군이 프랑스 땅에서 칼레에서만 빼고 완전히 쫓겨나고 딸이 명예회복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12. 5남매는 자크, 피에르, 장, 잔, 카트린(언니라는 말도 있고 동생이라는 말도 있다. 잔이 활약할 당시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는 것만 확실하다.) 순이다. 피에르는 잔을 따라 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여동생의 마지막 전투에도 동행해서 같이 붙잡혔는데 여동생과 달리 어떻게 무사히 풀려났다. 사실 잔과 달리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굳이 심문해서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서 무사히 풀려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13. 세금을 거둬들이고 영주와 마을 사람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높게 봐야 동네 이장 정도.
  14. 동레미에는 잔 다르크의 생가라는 곳이 있다.
  15. 1422년까지 헨리 5세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그후로도 접전이 계속되었다. 큰 것만 해도 크라방 전투(1423.7.31)와 베르뇌유 전투(1424.8.17)를 들 수 있고,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서 샤를 7세를 만난 것이 1429년 3월, 오를레앙 입성은 같은 해 4월의 일.
  16. 백년전쟁 이전까지 잉글랜드 왕실의 인사들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에 건너와 지배층을 형성한 노르망디인이었고 잉글랜드 상류층의 언어는 오직 프랑스어 뿐이었다.
  17. 부르고뉴 가문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왕조인 카페 가문의 방계이며, 부르고뉴 방계는 포르투갈의 왕좌를 상속받았다.
  18. 해롤드 고드윈 이후 스튜어트 가 사이의 영국의 왕들은 프랑스 왕가의 방계다.
  19. 참고로 이 때 잔에게서 결혼 약속을 받았다는 청년이 법정에 나타나 주장을 하는 바람에 잔이 그걸 해명하고 반박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로 보아 사귀는 남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20. '그럼 하느님은 어째서 프랑스의 편을 들었나?'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신학에서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하느님은 인간보다 우월하므로, 마치 애완동물이 주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유가 있겠거니 해야 한다.
  21. 사실 잉글랜드군은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사가 오를레앙에 입성하도록 놔뒀다. 원군으로 와봤자 이미 바닥나고 있던 성 안의 식량만 축내서 잉글랜드에게 더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여겼고, 게다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소녀 따위가 이끄는 군대가 뭘 할 수 있냐고 비웃고 만만히 본 모양.
  22. 특히 투렐 요새 전투에서는 갑옷 이음새 사이를 정확히 파고들어 목과 어깨사이에 석궁을 맞아 엄청난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근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깊은 중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응급처치만 하고 얼마 후 전장에 돌아와 전투를 지휘했다는 점.
  23. 사실 오를레앙 해방 과정이 참으로 먼치킨스러운데, 오를레앙 공방전은 1428년 10월 12일부터 1429년 5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잔이 참전한 날은 1429년 4월 29일이었다. 즉 잔 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반년 넘게 계속되었던 공방전이, 소녀 한 명의 등장으로 열흘도 채 되지 않아 결말이 난 것.
  24. 그리스도교가 현대의 과학 상식과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유닛의 등장은 아군에게 실로 엄청난 사기 버프를 주었을 것이다.
  25. 공교롭게도 탈보트에게는 잔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26. 오를레앙 공방전 이후 잔은 곧바로 랭스로 진격하여 샤를 왕자를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샤를의 측근들은 노르망디 탈환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이에 논의를 거듭하던 끝에 랭스로 진군은 하겠는데, 먼저 루아르 강 연안부터 탈환한다는 대안이 나온 것.
  27.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에게 털리고 털린 끝에, 루아르 강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랭스와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루아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오를레앙 공방전 당시 오를레앙이 중요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루아르 강에 면한 도시로 아직껏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도시이며 교량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교량은 공방전 도중에 파괴되고 말았고, 루아르 강 연안부터 차지한다는 것도 교량부터 확보해야 랭스고 파리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28. 설명을 덧붙이자면 빨간 화살표가 6월 26일부터 7월 17일까지, 오를레랑 전투이후 랭스(Reims)까지의 잔의 진격로다.
  29. 물론 전투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그들이 우려했던 대규모 야전은 오를레앙 전투 직후 벌어진 파타이 전투를 제외하곤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소소한 공성전이 대부분. 그마저도 잔의 활약(으로 읽고 기행이라 부른다)으로 대부분 무혈점령
  30. 이는 잔이 마녀라는 잉글랜드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은 결과 벌어진 일인데, 대부분의 병사들이 잔이 등장하자 마자 마녀의 등장이라 겁을 먹고 도망갔다.. 그 결과 무혈 점령.
  31. 실제로 프랑스군은 잔의 사망이후 부르고뉴파를 다시 포섭한 다음, 무한 물량을 바탕으로 잉글랜드를 밀어붙인다. 반면 방어를 강요당한 잉글랜드는 내부사정이 겹쳐 제대로된 반격도 못해보고 쭉 밀린다.
  32. 반론으로 당시 남서 프랑스, 즉 보르도 지역과 부르고뉴로부터 프랑스가 협공을 수 있지 않는냐는 의견이 있는데 애당초 부르고뉴는 양 전쟁에서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고, 남프랑스와 북프랑스, 즉 잉글랜드의 오랜 금밭이었던 노르망디 지역의 중요성을 저울질 해봤을 때 어디가 더 중요한지는 명확한 문제다.
  33. 이 승리들은 오를레앙과 루아르 강 원정도 포함된 수치이며, 샤를의 측근들이 가장 걱정했을 랭스 진군은 거의 무혈행군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 길목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곳은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트루아였는데, 잔이 편지를 보내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하기를 권유했음에도 트루아 시민들은 잔과 샤를의 입성을 거부하고 성문을 닫고 신부 리샤르를 잔에게 보낸다. 리샤르가 마녀를 퇴치하기 위해 잔에게 성수를 뿌렸지만 잔은 화내거나 겁에 질리지도 않고 경건하게 리샤르를 만났다. 이후 성문을 계속 열지 않자 잔이 할 수 없이 공격 개시를 알리자 트루아 시민들은 알아서 성문을 열고 잔과 샤를을 맞아들였다.
  34. 서프랑크 이래로 프랑스 왕이 대대로 대관식을 한 도시다.
  35. 왕관이나 왕홀 등 국왕의 상징물은 없었지만,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왕 대관식의 핵심은 주교가 축성하는 기름으로 도유(기름 바름)를 받는 것이다. 도유를 받아야만 비로소 합법적인 국왕이 되는 것이다.
  36.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가 자신이 진짜로 공을 세우게 되자 들뜨게 되고, 화려하고 비싼 물품 등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대관식 이후 샤를 7세의 측근 귀족들과 마찰이 더욱 본격화되면서 그들에게 시골소녀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그런 듯. 소녀다운 일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7. 다만 전쟁에서 갑주를 화려하게 치장하는것은 단순한 데코레이션 이상의 위력을 지닌다. 이걸 대표적으로 사용한것이 나폴레옹 휘하 기병지휘관인 조아생 뮈라. 임진왜란의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있다. 연전연승하는 잔 다르크의 네임드는 실로 강력한것으로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치장은 적이 잔 다르크를 알아보고 공포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뮈라 말고도 전투기나 갑옷을 화려하게 치장해 자신을 돋보임으로서 적에 공포를 심어준 사례는 제법 된다. 특히 대단히 공격적인 지휘관인 잔 다르크에곈 필요한 행동이었을것이다. 아래부분의 " 잔 다르크가 묑에 다가가지만 하자 수비군이 일제히 도망쳤다" 는등의 일은 자신을 상징하는 치장을 함으로서 "잔 다르크가 여기있다" 는것을 시각화 시켜줌으로서 사기를 폭락시킨것으로 당시 이러한 활약상은 소문을타고 뻥튀기가 되기 때문에 잔 다르크의 존재만으로 당시 영국군 눈에는 무적 불패를 자랑하는 공포의 상징으로 보였을것이다.
  38. 그러나 반대로, 대관식 이후 파리 탈환이 성공하지 못한 이후 적군에게는 잔 다르크가 눈에 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두려운 상대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신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하단에 있는 언급처럼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이 화려한 옷을 입은 잔 다르크를 쉽게 알아보고 옷 끝자락을 잡아당겨 사로 잡을 수 있었다. 차라리 화려한 옷을 걸치지 않고 그냥 갑옷을 입고 나섰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비싼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잔 다르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적군이 그냥 평범한 기사인 줄 알고 공격해서 전사했을 수도 있긴 하다. 물론 잔 다르크가 실제로 들떠서 부린 사치였던 목적이 있었던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39. 원래 이런 날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재판에서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잔은 "그 날의 전투는 하느님의 뜻으로 한 게 아니라 나의 의지로 한 것이며, 그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40. 중세 시대, 서양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하여 살 곳을 잃은 민간인들 중에서 일부 여성들은 전쟁하는 부대를 따라다니며 몸을 팔았다. 따라서 잔 다르크도 창녀로 오인받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죽은 뒤에도 여러 창녀들이 잔 다르크 행세를 하면서 군 부대 내에서 매춘을 벌였다.
  41. 그런데 동정심 많은 영국 병사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오히려 영국의 관대함과 자비심을 강조했을 의도도 있다.
  42. 선량공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용담공 샤를인데 샤를 7세의 뒤를 이은 루이 11세 때 자신의 서로 떨어진 영지인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사이를 가로지르는 땅을 차지함과 더불어 아예 그 정복을 통해 부르고뉴 왕국의 왕이 될 것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잔 다르크를 재판에서 몰아넣은 주교 코숑의 관할 구역이었던 보베를 공격하던 중,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이 된 해인 1456년에 태어난 '잔'이라는 소녀가 농성하는 도중 도끼를 들고 닥돌해서 부르고뉴군의 깃발을 빼앗아버리는 믿기지 않는 일로 인해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 보베 점령에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로렌의 낭시라는 지방에서 로렌공의 군대를 상대로 직접 전투에 나섰는데 스위스 용병이 휘두른 무기에 얼굴이 쪼개져 전사하고 시체가 늑대와 까마귀에게 뜯어먹히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낭시는 잔 다르크의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고, 용담공이 전사한 날은 잔 다르크의 생일 하루 전날인 1월 5일. 결국 이 일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과 그 가문은 쇠락해졌고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상속자인 공녀 마리와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에 흡수당해 독립된 부르고뉴 가문의 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43. 이거에 대해 국왕과 그 측근이 잔이 적에게 잡히게 만들어서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이 많았다. 게다가 성주 입장에서도 잔이 입성하면 지휘 체계가 복잡하게 돌아갈 수도 있을테니깐. 물론 현실적으로는 잔까지 들여보내다가 적군까지 같이 휩쓸려서 성이 함락 당할까봐 그런 거라고 봐야할 듯 하다. 아무튼 하필이면 잔이 입성하려고 할 때 다리가 올려지고 성문이 닫혀졌다는 것이 절묘하다.
  44. 높은 탑에서 뛰어내렸는데, 외상은 없었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결국 다시 붙잡혔다. 나중에 재판에서 이걸 자살시도로 규정짓고 몰아붙였다. 참고로 이 때 언급된 다른 죄는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친 혐의와 부르고뉴의 도적 기사들을 토벌할 때 포로를 처형한 것이었는데, 잔은 상리스 주교의 말은 자신이 타기에 적합하지 않아 값을 지불하고 돌려줬다고 해명했으며 도적 기사 포로 처형은 적군에 붙잡힌 아군 포로와 교환을 시도했으나 아군 포로가 죽자 재판에 넘겨서 합법적으로 처리된 거라고 해명했다.
  45.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1262년 정해진 도량형으로는 고순도 은 80.88g이거나 금화 6.74g으로 정해져 있는 화폐다. 프랑스 위키를 보면 1549년부터 해당 화폐의 도량형 수정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 당시에도 은화 80.88g이거나 혹은 금화 6.74g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은화로 따지자면 은 808.8kg이 잔 다르크의 가치가 되며, 금으로 따지자면 금화 67.4kg로 잔 다르크의 몸무게보다도 더 나가는 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단 프랑스 위키피디아는 리브르로 표기하는데, 이게 도량형 리브르인지 혹은 영국 파운드화와 같은 가치를 지니는 리브르인지 리브르 트르누아인지 은화의 하위 단위인 리브르인지 제대로된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일(독일 위키피디아는 프랑으로 표기하며 당시 프랑은 리브르 트르누아와 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고 평가받는다), 영국 위키피디아에 나온 리브르 트르누아로 대체한다. 만약 파운드와 같은 가치를 지닌 샤를마뉴 대제시절의 리브르를 뜻한다면 잔 다르크의 몸값은 1만 파운드 무게의 은으로 4톤에 달하는 무게이다. 아무튼 굉장한 양의 액수로, 이 정도 몸값이면 적국의 왕자를 포로로 잡았을 때 몸값 수준이다. 그런데 영국의 대우는 시궁창
  46. 뒤노아, 라히르 등 잔의 장교들이 잔을 무력으로 구출하려고 4차례나 시도했고, 이 때문에 부르고뉴측에서 프랑스에 넘기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7. 근현대의 창작물에선 같은 프랑스인이고 주교라는 신분으로 잔 다르크를 동정하고 목숨을 살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긴 하나, 애초에 영국군에게 잔 다르크의 종교재판을 주선하도록 제일 먼저 요청하고 몸값을 모으느라 안달이었던 이 인간이 잔 다르크를 배려했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코숑은 잔 다르크의 랭스 입성으로 인해 랭스 주교가 되지 못해 잔 다르크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참고로 잔 다르크가 죽은 이후 코숑도 곧바로 죽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급사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중인 1442년까지 71살로 살만큼 살다 죽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죽음을 만든 재판 이후 출세하고 한창 잘 나갈 때 면도 도중 뇌졸중으로 급사해서 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코숑 외에도 재판을 주도한 장 르메트르는 루앙 시외의 외딴집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또다른 주도인 장 데스티베는 루앙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48. 글을 전혀 모르는 상태, 즉 수사학에 대한 지식을 구하기 매우 힘든 어린 소녀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던 신부들과 추기경들의 악의적인 추궁을 물리친 것이다. 비유하자면 평범한 여고생 1명이 한국 최고의 로펌과 재판을 대등하게 벌이는 정도.
  49. 한 예로 잔 다르크가 붙잡힌 곳은 콩피에뉴고, 코숑의 관할 구역 보베는 그 콩피에뉴와 인접한 곳이기에 명목상 그가 자기 관할 구역 가까에에서 체포된 잔 다르크를 재판했다. 그러나 재판은 보베가 아니라 루앙에서 열렸는데, 물론 루앙이 프랑스 내 영국 점령지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탓도 있지만 보베는 이미 잔 다르크의 활약 때 영국과 부르고뉴가 아니라 프랑스의 관할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칙대로 보베에서 재판을 하면 코숑이 오히려 체포당할 판국이었다. 그래서 보베의 주교가 자기 관할 구역이 아닌 루앙에서 재판을 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
  50. 당시는 교황들이 분열되어 있던 시대인데, 잔 다르크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 잔 다르크의 재판이 있었을 당시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종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을 때고, 그래서 윈체스터 추기경과 친영파 프랑스인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이 정치적으로 제멋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항소 시도 자체가 막혔고, 로마 교황청에 전달이 되었다고 한들 잔 다르크의 운명이 크게 바뀌었으리라 장담하기는 힘들었지만. 아래에서 언급된 것처럼 나중에 그녀의 명예회복 재판은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열었다.
  51.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조사관이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건, 잔과 그녀의 집안이 신앙적으로나 평소에나 마을에서 꽤나 평판이 좋았다는 얘기다. 평소에 부농이라고 제멋대로 하고 다녔으면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도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러 그 틈에 나쁘게 말했을테고 동네 교회 사람들도 뭔가 한몫하고 싶어서 잔이 이단이라고 말했을테니깐.
  52. 풀려난 탈보트는 이후 뛰어난 지휘로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물리치며 백년전쟁의 조기종결을 막다가 마지막 카스티용 전투에서 전사한다. 헨리 6세 1부와 오를레앙의 처녀 등의 작품에서는 잔 다르크의 강력한 맞수로 나온다. 이렇게 적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인상을 크게 남겼는지, 그가 주둔했던 보르도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샤또 딸보라는 와인이 있는데, 거스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한다.
  53. 이 외에도 구출시도가 없던 건 아니어서 잔 다르크의 전우 라 이르가 잔 다르크가 갇혀 있는 루앙으로 군사를 이끌고 닥돌했지만 실패하고 포로가 되고 만다. 한편 이 구출대의 배후에 질 드 레가 있다는 설이 있다. 라 이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잔 다르크는 끝내 구출되지 못했다.
  54. 사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점점 그녀의 총명함이 사라지고 증언이 오락가락하고 빌미를 잡힐만한 말이 나오는 등 약간 실수를 범하기도 했는데, 나이 어린 소녀를 험악한 감옥에 가두고선 심심할 때마다 재판에 관련된 사람들이 고문 위협을 비롯한 협박 등 고통을 주니깐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다.
  55. 이 때 잔이 살짝 웃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알 수 없다. 일단은 살아났다는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다는 허탈함과 멘탈붕괴로 쓴 웃음을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56. 원래 잔처럼 종교재판을 받는 여성은 수녀들이 관리하는 수녀원에 수감시켜야 한다. 그러나 잔은 영국에 넘겨지고 나서 처음부터 남자 간수들이 관리하는 군사 감옥에 갇힌다. 이 또한 공평하지 못한 일. 물론 수녀원에 수감되어도 엄격하거나 종교적으로 강한 신념을 가진 수녀들이 있으면 잔 다르크를 호의적으로 대했을지 아니면 그녀를 괴롭혔을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군사 감옥보다는 대우가 나았을 것이다.
  57. 만약 잔 다르크가 화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확실하게 인정한 수감자로 계속 남았으면,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더니 목숨을 위협받고 바로 포기하고 죄를 인정한 어리석은 소녀"라고 조롱거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질 때 오히려 경건한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기존에 영국에 반대하던 프랑스인들의 반영 감정만 제대로 불러일으키고 영국은 어린 소녀를 석연찮은 재판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58. 사실 이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는 없으니.
  59. 프랑스 왕실도 움직였겠지만, 그보다는 잔의 어머니인 이사벨 로메가 교황청에 직접 호소한 것도 한 몫 했다. 이에 교황은 파리에 조사단을 보냈는데, 이 때도 이사벨은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파리로 향해 조사위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했고. 그것이 끝내 받아들여진 것. 이를 기리기 위함인지, 오늘날 잔 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 로메의 동상도 서 있다.
  60. 뻔뻔하게도 잔의 종교재판 당시에 잔을 고문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도 그 중에 있었다.
  61. 위 영상 8분 경부터. 이미 늦었다를 'It's too late'라고 친절하게(...) 영어로 말해주는 걸 볼 수 있다.
  62. 요한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서는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쟌느 편에서 혹은 쟌느에 대항해서 싸운 모든 류의 장수들이 동레미의 작은 처녀 농부보다 더 크고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했다.'라고 하며, 뒤노아, 쟝 뒤 붸이유, 생트라이유, 라 이르 등과 그보다 덜 유명한 사람들이 연대기에 등장하더라도 쟌 다르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63. 스코틀랜드는 1295년에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에 맞서 동맹(Auld Alliance, 스코틀랜드어인데, 'Auld'는 오늘날 영어의 'Old'라는 단어다.)을 맺었으며 이는 156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도 헨리 5세의 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요청해 스코틀랜드군이 샤를 왕자를 돕게 되었는데, 이때 샤를이 지원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편성한 것이 1830년에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존속한 스코틀랜드 근위군(미디블: 토탈 워에 등장하는 그 친구들 맞다)이다. 이후 위그노 전쟁 때에도 2백명의 스코틀랜드군이 위그노 편에 서서 싸웠으며, 2차 대전 때는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이 영국에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기리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는, 동맹 7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열리기도.
  64. 아이러니하게도 볼테르는 잔 다르크와 똑같은 5월 30일에 사망했다. 1878년에 볼테르 사망 100주년에 프랑스 좌파 인사들이 볼테르 추모 행사를 하려고 하자 프랑스 우파 인사들은 잔 다르크를 모욕한 사람을 그녀와 같은 날에 추모할 수 없다며 비난하자 좌파는 우파에 속하는 왕정과 교회야말로 민중인 그녀를 탄압하고 화형시켰다고 반박했다.
  65. 플랑드르 지방은 잔 다르크의 적이었던 부르고뉴파가 다스리던 영토였다. 따라서 그 지방에선 잔 다르크를 좋게 볼 이유가 없는데도 루벤스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
  66. 근데 어째 흄의 책에서는 오타인지 몰라도 잔의 나이가 20대 중후반 쯤 나이로 나온다.(...)
  67. 해당 책의 저자는 조선 역사에 대한 책도 썼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왕조 이전에는 금씨로 불리던 김씨가 음향오행설을 믿어 금씨가 나무를 뜻하는 이씨를 누를 것이라고 두려워한 이성계의 명령으로 김씨로 바뀐 사연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야사의 내용을 실제로 기록된 역사의 뉘앙스로 묘사하기도 했다. 꼭 잘못되거나 나쁜 책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비판의 눈으로 보기 바란다.
  68. 표지에 나온 이름인 편집자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유명한 여성참정권자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딸이다. 동생들인 실비아와 아델라도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
  69. 군사들을 따라다니는 매춘부들을 비롯한 여성 장사꾼들을 쫓아냈다. 그 중 한 명이 생계를 보장해달라고 매달리자 열받아서 칼등으로 뒷목을 때려 기절시켜서 내보냈다고 한다. 물론 독실한 신자인 잔에게 자신의 병사들이 매춘부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강력한 폭력을 쓰지 않고 가능하면 말로 그녀들을 내보낸 편이다.
  70. 잔 다르크는 미카엘의 차림새를 묻는 종교재판관들의 질문에 하느님이 그 분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냐고 대답했고 머리카락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머리카락이 없어야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71. 어차피 페탱 정권이나 나치 독일 모두 영국과 전쟁중이었다.
  72. 종교재판관 중 하나가 유태인이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73. 영국인이 쓴 역사서에는 자신들이 아니라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죽였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책임 떠넘기기. 게다가 영국 왕의 섭정인 베드포드 공이 잔 다르크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도 한다. 잘못한 일인 줄은 아는 모양
  74. 적군 잉글랜드군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베드포드 공작이 자신의 조카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6세에게 오를레앙에서의 패배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말서 비슷하게 쓴 편지와 샤를 7세에게 적법한 헨리 6세를 두고 프랑스 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샤를이라며 가짜 왕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는데 이 두 편지 모두 잔 다르크(사탄의 추종자이자 끄나풀인 남장한 퓌셀-처녀라는 뜻, 잔의 별명이기도 하다.-이라는 여인이 백성들을 홀리고 있다라는 식으로 표현)를 비난하는 언급했음을 볼 때 적군에서도 잔 다르크를 단순히 얼굴마담 수준으로 본 게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을 주는 적장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75. 잔다르크 참전 직전 프랑스군의 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그녀의 작전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76. 때문에 랭스 함락 직후 왕이 대관식을 성대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재정적 압박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77. 달리 말하자면: 기사 중심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기사의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에 위협을 받게 된다. 이 기사 기득권의 몰락은 결과적으로 백년전쟁 당시와 그 직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후 파비아 전투를 통해 너무 확실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78. 잔 다르크가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한 시점에서 그녀의 가족들의 재산도 강제로 동결당했다.
  79. 그런데 바로 위에 언급한 잔 다르크를 죽이라고 영국에다가 사주한 왕비다.(...)
  80. 참고로 조르주 라 트레무유도 욜란드와 불화를 빚다가 쫓겨났다.
  81. 하지만 바지를 입은 것은 재판과정에서 큰 문제이긴 했다. 잔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중 갖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결국 5월 24일 남장을 버리고 여자 옷을 입을 것을 승낙했다. 그 결과 종신형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틀후인 5월 26일 다시 남장을 하였고(영국 병사들이 추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를 이유로 재차 재판을 연 후 '또다시 이단의 죄에 빠졌다'는 이유로 화형이 선고되었다.
  82. 1863년에서 1963년까지 무려 100살까지 살았다. 흠좀무.
  83. 다만 그 전에는 마녀에 대해 진지하고 깊숙하게 연구한 역사학자가 없었기에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흥미를 끌 수 있었고, 실제로 제랄드 가드너라는 사람이 머레이의 마녀 얘기를 듣고 빠져들어서 위카(Wicca)라는 마녀에 관련된 신흥 종교를 창시했다고 한다.(...)
  84. 참고로 머레이의 연구를 인용한 이 책의 저자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잔 다르크에서 이름을 따온 페미니스트 가톨릭 단체인 성녀 잔 다르크의 동맹의 일원이기도 하다.(...)
  85. 머레이는 그 당시에도 고문은 불법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당연히 실제 마녀사냥 때는 그런 거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86. 다만 1896년에 나온 이 책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고 불리운 윌리엄 캑스턴이 백년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80년에 잉글랜드 연대기를 냈는데, 캑스턴은 잔 다르크의 용기를 찬양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87. 보물섬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유명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 발언에 대해 바이런이 하나는 그가 위대한 시인으로, 2번째는 귀족으로 부끄러운 일이라며 깠다. #
  88. 마크 트웨인은 가톨릭과 프랑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잔 다르크는 무척 좋아했다. 어린 시절 밖에 나가다가 바람에 날리는 종이 한 장을 잡았는데 잔 다르크의 위인전의 한 부분이었다는 말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하던 에밀 졸라를 향해서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라고 극찬했다.
  89. 잔 다르크가 자기 마을을 약탈하러온 영국군 기사를 보고 반해서 그가 위험할 때 숨겨준다.(...) 나중에 잔 다르크가 전투에 참여하면서 그를 사로 잡았는데 풀어주고 자신을 잊으라고 한다. 근데 그 기사는 결국에 잔을 붙잡고 만다.(...)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괴로워하지만. 결국 잔은 화형에 처해지고 나중에 1차 세계대전 때 기사는 영국군 장교로 환생해서 잔 다르크의 영혼의 부탁을 받아 자신이 전생에 잔에게 빚을 진 영국 기사라는 걸 깨닫고 목숨울 바쳐서 독일군을 물리치고 전사하며 잔 다르크의 곁으로 간다는 내용.
  90. passion을 열정으로 해석하기도 해서 <잔 다르크의 열정>이라고 옮긴 경우도 있다.(...) 물론 잔 다르크의 신앙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영화 내용을 볼 때 수난이 더 정확한 번역일 듯.
  91. 이 때 잉그리드 버그만이 나온 잔 다르크 영화를 바탕으로 한 만화책도 있다. # 그리고 연극 2편과 2번째 남편인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맡은 다른 영화(두 영화 모두 잉그리드 버그만이 연기한 잔 다르크 연극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에서도 잔 다르크를 맡아 네번이나 잔 다르크를 연기했다. 잔 다르크 전문배우라고 할 만하다.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 개인적으로도 어릴 때부터 잔 다르크를 사랑했다고 하며 잔 다르크를 연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헐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잔 다르크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되었으며(역대 잔 다르크 역할을 한 여배우들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 잉그리드 버그만의 위상을 능가하는 배우는 없다)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인 동레미, 오를레앙, 랭스와 루앙을 방문했으며 동레미의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잔 다르크의 환생처럼 여겨서 당황했다고. 그만큼 열광적인 반응이었다는 소리. 또한 잔 다르크의 고향 동레미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한다. 다만 이 영화를 찍을 때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미 30대를 넘어서 10대 소녀인 잔 다르크를 연기한 게 어색하다는 평도 있다.(...) 그리고 묘하게도 잉그리드 버그만은 영국의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92.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오즈의 마법사의 감독이다.
  93.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 상과 의상 상을 수상. 잉그리드 버그만은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흥행은 적자를 본 편. 사실 영화 내용은 그 당시가 아닌 지금 보면 그냥 우리가 흔히 아는 잔 다르크의 인생이나 위인전 내용(앞서 언급한대로 연극을 바탕으로 각색한 영화다.)을 영화로 옮겼다고 느낄 수도 있다.
  94. 오드리 헵번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으나 무산되었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물망에 올랐으나 너무 어리다고 캐스팅이 무산된 후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는데, 참가자가 무려 1만 8천명에 달했으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유명한 배우 집안이었고 그녀 자신도 유명한 배우이며 리암 니슨의 장모였기도 하다. 그와 결혼한 딸이 사별하긴 했지만. 영국인인데도 잔 다르크 역할을 맡으려고 오디션을 봤다. 근데 애초에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오드리 헵번도 영국인이잖아. 공교롭게도 그녀의 여동생인 린 레드그레이브는 이후 이 영화의 원작 연극에서 잔 다르크로 캐스팅 된다. 정작 잔 다르크를 직접 연기한 여동생은 자기 언니가 항상 스스로 잔 다르크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인권운동에 활발히 참여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겠지만. 바네사 본인도 인권운동에 대해 얘기하면서 잔 다르크에 대해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 등 훗날 유명배우가 되는 배우지망생들도 참가했다. 진 세버그와 마지막까지 경합한 참가자는 대배우 헨리 폰다의 딸 제인 폰다였다.
  95. 그녀와 염문설이 있던 프랑스 작가 로멩 가리는 그녀가 죽고 1년 만인 1980년 자살했다. 이 사람 작품으로 유명한게 마견(영화적으로 각색이 되긴 했지만).
  96. 딥 임팩트에서 일라이저 우드의 여자친구로 나왔던 배우다.
  97. 그런데 잔 다르크가 활약한 오를레앙 전투와 마지막 모습인 화형식은 모두 봄에 있었는데 겨울에 촬영한 탓에 눈이 내리고 있다.(...) 참고로 이 영화 조연들의 캐스팅이 더 화려한데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초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했던 한국 영화 그리고 최악의 평을 받으며 망했던 오! 인천에서도 나왔던 재클린 비셋(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나오는데 얄궂게도 정작 재클린 비셋은 영국, 그것도 잉글랜드 출신이다. 그래도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로 짧막하게 나오는 듯), 붙잡혀 있는 잔 다르크를 친손녀처럼 잘 대우해주던 부르고뉴 집안의 부인 역할의 셜리 맥클레인(아카데미 시상식, 베를린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가혹하게 재판하면서도 그녀가 죽을 때 동정하면서 후회하는 피에르 코숑 역할의 피터 오툴(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주인공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맡았다.).
  98. 이 전쟁으로 오를레앙도 함락당하고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 당시 로렌 출신이고 오를레앙을 지켜냈었던 그녀를 더욱 국가적인 영웅으로 숭배했다.
  99. 그런데 이 부분의 대사를 미루어 볼 때 원래부터 마녀였는데 프랑스인들 앞에서는 성녀로 둔갑했다가 본색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100. 알랑송을 빗대어 작중에서 마키아벨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101. 적개심 섞인 원본 대사의 강도가 낮혀졌을 뿐 기본적인 내용과 흐름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물론 이 평에 따르면 부정적인 모습을 상당 부분 뜯어내서 고쳐내기는 했다. 극에 쓰여지고 공연되던 과거의 당시와 달리 현대에서는 긍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인 잔을 원작에 충실해서 부정적인 인물로의 표현에 극단이 꺼려했거나, 또는 관객들로부터 오히려 혹평을 받을 수 있고, 원작가인 셰익스피어에게도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끼칠 수 있기에 그렇게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102.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 본인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맡은 잔 다르크 캐릭터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을 주로 했으며, 연출자(인터뷰에서 잔 다르크도 피해자라고 말하긴 했다. 병주고 약주고)와는 원작 표현에 대해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 역사와 달리 작품 후반부에서 악하게 묘사된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고민이 있었거나 복잡한 심경이었던 듯 보인다.
  103. 이 작품에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은근히 의심하고 이용만 해먹고 버릴 궁리를 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기도 한다. 이건 고증을 잘 했네. 잔 다르크도 붙잡히고 나서 샤를을 저주하는 대사를 퍼붓기도 한다. 물론 실제 잔 다르크는 붙잡히고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재판관들에게 샤를에 대해 원망의 말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하는 말을 했다.
  104. 작중에서 잉글랜드 측이 대동하고 나타난 그 부친이 진짜 잔 다르크의 부친인지 입증이 된 건 아닌 투로 표현된다. 패드립을 들었다고 부친이 그녀에게 맞패드립을 치는데, 진짜 친부라면 친딸이 죽게 생겼는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즉, 군중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가짜를 데리고 왔을 수도 있다는 말.
  105. 이것 역시 작품을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있다.
  106. 2007년 3월 30일 니혼 TV에서 방송된 '일본인이 좋아하는 위인 베스트 100 - 영웅편'에서 잔 다르크는 6위를 차지했다. 잔 다르크보다 높은 표를 얻은 인물들은 2위에 선정된 같은 프랑스인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빼면 전부 일본 인물들이었다.(1위는 사카모토 료마, 3위는 오다 노부나가, 4위는 사이고 다카모리, 5위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107. 후에 타입문이 노린건지 Fate/Grand Order에서도 잔 다르크를 맡았다.
  108. 여담으로 이때 리안은 팔찌의 용사임에도 불구하고 변신 스킬을 전혀 활용하지 않고 로제에게만 의지하다 잡히고 영국측에서도 팔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팔찌를 따로 수거하지 않고 화형을 쳐해 나중에 잔느 일행이 도착했을 때 팔찌가 가마르에게 넘어 가버리게 만들었다. 팔찌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이전가지 스토리를 본다면 약한은 설정 오류 같은 부분이다. 물론 유저들은 스토리 상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리안이 화형 당했다는 충격 때문에 이 점을 잘 지적하지는 않는다.
  109. 스토리 상으로 도움을 주지만 게임 내에서는 약해서 몸빵으로도 쓰기 힘든 상태도 나온다.
  110. 다만 이 경우는 동명이인이 아닌 잔 다르크 본인이다. 위에 언급된 잔의 이름에 대한 설 중 타르트라는 이름을 일본 발음으로 하면 타루토가 되는데 일단 작품 내에서는 문맹인 잔이 이름을 잘못 써서 타루토가 된 것으로 나온다.
  111. 잔 다르크의 일본식 발음이 잔느 다르크라서 국내에는 '잔느'라고 많이 알려져있다.
  112. 얼터는 잔 다르크 본인이 아닌 짝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