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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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高(句)麗[1] | ||
[2] | ||
장수왕 64년(476년) 경 고구려 영역. 각 시대의 강역은 영역 항목 참조. | ||
공식명칭 | 고구려, 구려, 고리 → 고려 | |
위치 | 한반도 북부 · 중부, 만주[3] | |
수도 | 홀본→국내성→평양[4][5] | |
삼경 | 국내성, 평양성, 한성[6]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王)[7] | |
언어 | 고구려어 | |
민족 | 예맥, 한(韓)족, 말갈족, 거란족 등 | |
종교 | 불교, 도교[8], 샤머니즘, 기타[9] | |
존속기간 | 기원전 37년[10] ~ 668년 9월 21일 | |
주요사건 |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3년 낙랑군 축출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 천도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 |
성립 이전 | 원고구려 | |
멸망 이후 | 고구려부흥운동, 소고구려, 발해, 통일신라 |
목차
1 개요
역대 한반도 왕조 중 두 번째로 넓은 영역을 확보했던 국가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3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국가로, 오늘날 만주의 일부, 한반도 북부와 더불어 중부, 리즈 시절에는 남부의 일부까지 차지했던, 3국 중 단연 압도적인 통치영역을 확보했던 국가이자 한반도 역사상 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넓은 통치 영역을 자랑했던 국가이다. 더불어 역대 한반도 왕조 중에서도 대중적인 인식이 가장 좋은 국가로서, 전근대 한반도 역사의 리즈 시절을 꼽으라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국가이기도 하다.
기원전, 부여에서 남하한 일행이 부여 남쪽의 압록강 상류에 정착하여 세웠다고 전해진다. 건국후부터 일대의 국가를 잇달아 정복하는 등 상당히 호전적인 모습이 보이나, 당시 서쪽과 남쪽에는 중국 통일제국의 군현이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서남 두 방면으로 크게 팽창하진 못하였고 나중에 가서 약탈 내지 점진적인 압박 전략이 주를 이루었다. 대신 일찍부터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옥저, 동예 등 두만강 일대와 함경도, 강원도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복속시켰다. 이러한 정설이외에, 초기 고구려의 위치와 정복활동을 보다 동쪽으로 이동시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4세기 초, 미천왕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혼란에 편승해 낙랑군과 대방군을 마저 일소하고 현재의 북한 지역을 완전히 장악, 이로써 과거 위만조선에 속했던 모든 집단들을 통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령지방에서 발흥한 모용부 선비를 단, 우문 등 다른 선비족과 연합하여 저지하는데 실패한 뒤로 한동안 내우외환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때 모용부에 보다 가깝던 부여는 사실상 몰락했다.
5세기 초, 탁발부 선비가 강성해진 틈을 타 요동에서 모용부 선비 세력을 구축하였고, 중국의 통일제국이 개입하기 전까지 이백년 가량 요동을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나아가 부여 일대를 대부분 점유한다.
한때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몰아내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반세기가량 속국화하였으며, 북침해온 백제의 중앙정부를 군사로써 무너뜨리고 현재의 충청도 중원 일대까지 침략하는 등,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한 국가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한반도 남부와의 접점은, 위만조선 멸망 이래 흩어졌던 한반도 북부의 재통합과 더불어, 훗날 한국사에 고구려가 포함되고 고려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고구려의 성장에 자극받은 물길이 힘을 모아 고구려를 견제하나 6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구려에 의해 말갈 7부로 분할되고, 이는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를 건국하는 기반이 된다.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한 국가인 만큼 요서 일대의 거란족이나 동북 일대의 말갈족을 통제했으며 중국 바로 옆에 있는 만큼 한나라-북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2 국호
언어 | 명칭 및 해설 |
한국어 |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후기와 그 이후에는 대부분 고려(高麗)라는 말이 쓰였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 하기 위해 현대의 한국어로는 고구려라고만 불린다. |
중국어 | 가오리(高麗), 가오거우리(高句麗) 고구려의 경우도 그냥 가오리(高麗)라고 한다. 굳이 '고구려(高句麗: 중국에서는 高驪, 高句驪로 쓰기도 한다)'라고 쓸 때,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jú(쥐)가 아니라 gōu(거우)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각종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중국어 독음에서 유래한 것.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麗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나 현대 중국어 발음이다. 고대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재 중국어와 매우 다르고 오히려 한국식 발음이 더 가깝다. 결국 고구려를 가우리로 부르는 것은 그저 중국식 읽기에 불과하다. |
일본어 | 코쿠리(高句麗) 高句麗(고구려)로 쓸 때만 코쿠리라고 읽으며 高麗(고려)라고 써놓을 때는 코라이라고 읽는다. 간혹 高麗(고려), 狛(박), 駒(구) 등으로 써놓고 코마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
고대 티베트어 | 케우리(Ke'u-li)[11] |
페르시아어 (11세기) | 모크란(Mokraan)[12] |
터키어 (고대 돌궐어) | 뵈클리(Bökli)[13] |
그리스어 | 모클리(Mokli)[14] |
산스크리트어 | 무쿠리(Mukuri)[15],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16] |
희한하게도 동아시아쪽 언어들은 발음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서역쪽 언어들은 '말갈'과 비슷하다.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의 원음을 '맥구려'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로 보는 게 통설이다. 당나라때 편찬된 《범어잡명》에 의하면 고구려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Mukuri라 하고, 한자로는 무구리(畝俱理)라 명시해놨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는 고구려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초기의 공신인 마리를 인명이 아니라 부족명으로 보아 이러한 호칭과 통한다는 의견도 보인다. 한 편 막리지의 막리도 이러한 호칭과 같은 계통이고, 광개토왕비의 매구여라는 지명도 같은 계통이라고 한다.
티베트는 서역에 위치했지만 '고구려'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는 티베트인들이 고구려를 케우리라고 불렀다기 보다는 중국어 발음이 티베트에 전해저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의 중국어 발음은 현대 중국어 발음인 가우리가 아니다. Baxter-Sagart가 재구성한 발음에 의하면 껴까우(cə.kˤaw) 르에(rˤe)다. 이외에도 다른 재구성 방식도 있는데, 중국 고대발음은 현대중국어 발음과 많이 다르다.
초기에는 국명이 매우 여러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高句麗(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현재 역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변경,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바로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되고, 장수왕 때나 그 이후에 세워진 걸로 추정되는 충주고구려비(중원고구려비)에도 고려라고 표기돼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냥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700여년 내내 전부 고구려라고 부르는 관습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때 국호를 바꿨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高句麗의 高와 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高麗나 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句麗보다는 高麗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듯해 보여서 高麗로 변경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한자어 그대로 '높다', '숭고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한자문화권에서 정식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듯이), 또는 그것이 '고'와 발음이 비슷한 당시의 순우리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뜻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장수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 부른다"는 기록에 미루어 고려라는 국호가 성을 뜻하는 당시 순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명확한 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일본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건 발해가 실제 스스로를 고려라고 했는지는 이론이 분분함.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이고.
하지만 이후 고주몽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궁예가 세운 나라를 통째로 후고구려(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음),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건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태봉, 고려 문서 참고.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오대십국시대와 송나라를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상세히 조사하는 것도 아닌데 이름이 똑같은 고려니깐... 고씨고려, 대씨고려, 왕씨고려[17] 모두 고려였다면 10세기를 훨씬 뛰어넘는 국호가 된다.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왕망의 듣보잡 흑역사 신나라에서는 왕망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고구려가 무시한 것에 분노해서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불렀다고 하는건데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麗(려) 자가 나라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리'라고 읽힌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고구리, 고려를 고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최초로 음차표기된(전한시대의 서적인 '논형') 단어인 高離(고리)의 離(리)는 음차표기 되었던 전한시대 당시에는 rje(례)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한서'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烏弋山離(오익산리)라고 적혀있다. ria를 離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래서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단은 고려시대 후기, 조선시대에도 고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18]. 한국 한자음은 중국 중고음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 한자음은 수, 당 무렵에 불렀던 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발해학회에서 발표했던 서길수 교수의 高句麗 소리값 연구. 이 연구에 따르면 高句의 소리값은 '고구'가 맞지만 麗의 소리값은 '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려'를 '리' 라고 발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까지 '리' 라고 발음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려' 라고 발음한다. 고구려는 한국 발음으로 고구려라고 부르자. '麗'는 대체로 중고음에서는 '려'에 가까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다. 삼국시대에 무어라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6세기 조선의 훈몽자회에서는 고구려라고 발음하고 있다.
발음이야 당연히 현재에 재구성하기 힘들지만, 그냥 한자 공식표기는 몇몇 금석문에 남아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중원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있고, 요녕성 의현에서 발굴된 불상에는 대고구려라는 명칭이 적혀있다. 이 불상은 아직 시기나 국적 등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게 없는고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이나 망한 후에 대고구려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도 않았을테니 고구려 시기에 쓰인 불상임은 확실해보이고, 굳이 '대'고구려라고 주변국에서 높여줬을 리도 없으니 고구려에서 만든 불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좀더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아마 장수왕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꾼 게 사실이라면 국호 변경 이전 시기의 불상일 것이다.
발해의 국호로 널리 알려진 발해는 고구려기피증에 걸린 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설이 있다.[19] 이게 사실이면 고구려는 왕실만 갈린채 698년에 부활한 셈...
3 고구려의 역사
3.1 기원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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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중요한 제사처였던 국동대혈의 내부 모습.#
일반적으로 요하 상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의 송화강 유역에서 한반도 동부 삼림 일대에 퍼저있던 예인이 부여, 옥저로 발전하고 그 서쪽의 맥인은 고구려로 발전한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에서 고구려를 얕잡아 일컫는 뉘앙스에서 맥이라 칭한 흔적은 흔히 보이나 고구려인 스스로 맥인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맥이 단순히 북방민족에 대한 비칭이라는 설도 있으나 맥을 독자적인 세력으로 인식한 기록도 숱하다. 맥족은 초기에는 중국의 북방에 퍼저살다가 점차 요하 유역에 정착한 것으로 파악된다.
좀더 훗날 현도군을 몰아낸 것이 고구려현의 주민들이라는 기록이 있고, 고죽국이라는 국가가 고구려의 기원이라고 설명하는 사서가 존재하는 등, 주몽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 이전의 고구려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많다.[20]
그러나 고죽국-고구려설의 경우 일종의 수나라판 동북공정과도 연결되는데 고구려가 대릉하 유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을 고구려 이전에 대릉하 유역에 존재했던 고죽국을 끌어와서 고구려가 중국계 고죽국의 후손이니 수가 고구려를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죽인들이 고구려를 건설했다면 고죽국은 고구려계 아닌가? 사실 중국어는 단음절언어이고 나라 이름들이 모두 한 글자이기 때문에 '고죽'이란 2음절의 이름을 가진 나라가 중국계일까 하는 의문은 지속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현의 경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대에 보면 오이와 마리를 시켜 양맥과 현도군에 속한 고구려현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링크 현재는 추가적인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북부여 출신의 주몽(=추모왕)이 졸본을 중심으로 건국하였다. 그의 건국설화는 동한 초엽의 왕충이 지은 《논형》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동명성왕 참조.
3.2 성립과 발전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장보병.
고대 한반도의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외 사서에 나타나는 나라며, 초기 도읍지는 졸본(광개토대왕릉비에는 忽本.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시)의 오녀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2대 왕인 유리왕 때 위나암성에 도읍을 옮겨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안시 퉁거우현)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장수왕대까지 400여년을 도읍하였다.
다른 삼국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기의 왕 계보에는 의문점이 많으며, 특히 100살도 넘게 산 태조왕의 치세는 여러모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나, 중국사서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기에 무작정 부정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다. 대체적으로 태조왕의 초기치세가 늘려진것이며, 고구려에 모본왕부터 태조왕 사이에 수십년간의 권력공백이 있었다고 주류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모본왕의 사망 후 혼란에 빠진 고구려를 수습하고 이전 왕가와의 혈통을 이은게 지금의 삼국사기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건 백제도 비슷하다. 나라가 전쟁으로 망하지 않고[21], 새로운 세력에 합류한 신라만 왕계가 상세하다.
고국천왕(재위: 179년~197년) 즉위 이후로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었는데, 실상은 이때부터 부자상속제 확립에 반발하는 왕의 형제들의 반란이 끊임 없이 일어난다. 당장에 고국천왕대와 산상왕대 반란을 일으킨 두 고발기부터 시작해서, 중천왕의 동생들인 예물과 사구, 서천왕의 동생들인 일우와 소발이 있다. 봉상왕의 경우에는 반란을 두려워해서 숙부인 달가와 동생인 돌고를 죽이기까지 한다. 결국 이러한 혼란은 미천왕의 즉위와 함께 사라지게 되고 이 미천왕 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의 혼란상과 맞물리면서 팽창하게 된다.
초기의 고구려는 한 및 위와 진과 같은 중국 화북의 정권들과 상쟁하면서 성장했는데, 그 중에는 명림답부와 같이 침략자를 물리친 케이스가 있는가 하면, 비류수 전투에서 관구검의 침입에서 볼 수 있듯, 국토가 철저하게 짓밟히는 일도 벌어졌다. 낙랑·대방과 같은 중국의 군현들이 완전히 고구려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영가의 난 이후 중원이 아수라장이 된 4세기 초엽의 일이었다.
5호16국 시대가 오면서 세력을 급격히 키운 전연(선비족)은 고구려를 대거 침입하여 미천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가져가고, 태후와 왕후를 잡아가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이러면서 고구려는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킬 때까지 전연에게 쥐여잡히게 된다. 가까스로 전연이 멸망하자 숨통이 트인 고구려는, 낙랑·대방이 사라지면서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였던 백제와 격돌하게 된다. 하지만 그 마저도 순탄치 못했다. 먼저 공격한 나라는 고구려였으나 백제에게 역관광 당했다. 371년에는 국왕인 고국원왕이 평양까지 쳐들어온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까지 한다(…).
3.3 전성기
고구려의 전성기, 서울 구의동에 세워졌던 보루의 투시도.
하지만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대에 이르러 다시 국력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백제에 대해 공세로 전환하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
고국양왕의 아들 광개토대왕대에는 급격한 팽창을 하는데, 우선 남쪽에서 잦은 침공으로 성가시게 굴던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 위례성을 점령(396년)하여 아신왕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여러 왕족과 귀족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한성 이북의 58성 1400촌을 점령했다.
요서지방의 후연과는 적대적 관계였는데, 광개토대왕 시절 완벽히 무너뜨려 이후 후연은 몰락하고, 그 지역에 새롭게 생긴 북연의 경우 초기의 군주가 후연에 붙잡혀 온 고구려 왕족의 손자인 고운이었다. 당시 실권자였던 풍발이 고구려의 눈치를 봤다는 설이 존재한다. 한술 더떠서 아예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설도... 동군연합을 넘어선 동가연합?
399년에는 광개토대왕에 원한을 품고 있던 백제 아신왕이 주도하여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이 남해안 지역에서 신라를 침공하자, 우호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군을 파병해 낙동강 하구에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격파했고, 이후 한동안 신라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의 공업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있다.
장수왕은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그 왕인 개로왕을 죽여 일시적으로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북방에서는 유연과의 국경을 획정하고 북연의 잔당을 수습하는 등 남북조의 나라들도 무시하기 힘든 정도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양팔외교가 대표적.) 이후 장수왕의 손자 문자명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또한 이 시기에 마지막 수도가 될 평양으로 천도하여 한반도에 대한 진출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 장수왕의 보위를 손자인 문자명왕이 계승한 것은 장수왕의 아들인 고조다는 장수왕이 죽기 이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조다가 요절한 건 아니고 장수왕이 너무 오래 산 것 뿐이다... 왕위를 이어받지도 못하고 죽은 장수왕의 아들의 이름인 고조다(助多)로부터 '쪼다'가 기원했다는 속설이 있으나, 아무 근거도 없는 설이다. 부모보다 일찍 죽었다고 조롱하는 것부터가 상식적으로 용납이 안 될 패드립인데, 하물며 그 옛날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자의 죽음을 조롱한다는 건 아예 극형에 처하고도 남을 역적질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망한 한참 후대에 일반 백성들이 조다라는 고구려 왕자를 기억해서 조롱을 했을 리도 만무하고... 따라서 장수왕의 아들을 조롱하던 데에서 쪼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그냥 억측이다. 아마도 광복 이후에 누군가가 국사 교과서 부록에 붙은 역대 왕 계보의 조다를 본 학생들이 그냥 발음이 비슷한 속어 쪼다와 엮어서 억측 이라기엔 거의 개드립 수준이지만 하던 게 사회에 퍼졌을 가능성이 높다.
만주에서 물길(말갈)이 발흥하여 고구려의 속국인 부여를 쓸어버리는등 위력을 과시하고 나제동맹 또한 꽤 견고해저서 고구려의 진출을 막아냈으나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지위를 상실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것 같다.
3.4 쇠퇴기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정치적 고비를 맞게 된다.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던 황금기 이후 귀족들 간의 내전으로 얼룩지게 된다. 《주서》에는 대대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신들이 싸우는 가운데, 왕은 궁궐문을 닫고 칩거하는 사태가 묘사된다든지 뒤를 이었다는 나라가 비슷한 꼴을 겪게 된다 , 《일본서기》흠명기에는 고구려가 추군(麁群)과 세군(細群)의 대립으로 내전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며 《삼국사기》에는 안원왕때의 왕위계승 분쟁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것과 더불어 양원왕때 환도성의 간주리의 반란, 백제가 북위에 보낸 국서에 언급된 고구려의 이반 등과 관련하여 고구려 영토내의 귀족층간의 지역을 기반으로 둔 세력전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22]
대외적으로는 만주의 거란, 속말말갈, 실위등 여러 부족들을 사이에 두고 돌궐과 다투었다. 돌궐은 실위에 토둔을 설치했고 고구려는 실위가 돌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을 제공했다. 돌궐이 거란을 압박하자 거란이 고구려에 귀부하기도 했고, 돌궐은 속말말갈에 토둔을 설치해서 고구려를 괴롭혔다. 하지만 고구려는 속말말갈을 토벌하고 말갈의 대부분을 복속하여 만주에서 벌어진 돌궐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쟁취한다. 대신 한반도에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주도권을 잃어갔다.
3.5 중흥과 멸망
고구려는 만주를 놓고 벌인 돌궐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영토가 동서 6000리로[23] 늘어나는 등 평원왕-영양왕대에 이르러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런 고구려를 견제한 남북조의 통일왕조인 수와 당의 연이은 공세가 시작되었다. 전투원 100만 명에 수송대 200만을 앞세운 수양제의 공격은 을지문덕을 비롯한 명장들의 활약에 힘입어 격퇴한다.
수양제의 침입이 끝나고,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한 정권이 생겨나, 중국의 새 왕조 당과 화친을 꾀했던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앉혀 수를 뒤이어 일어난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당 태종의 침입은 수양제의 침입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으나, 수나라 때보다 침착하고 유연하게 고구려의 세력을 공략한다. 수나라 때와는 달리 10개의 성이 함락당하고 특히 주필산 전투라고 명명된 안시성 외곽 전투에서는 모처럼 모아놓는 15만 대군이 당군과의 회전에서 패배하고 3만명씩 피해를 입었는데 수나라와의 전쟁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큰 피해다.
결국 연개소문의 사후, 그의 아들들끼리 권력상쟁이 이어지다가, 권력자 연남생이 당나라에, 그리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격화되었다. 연남생은 당나라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요구해[24]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일어났고, 지난 전쟁과 달리 연남생의 협조까지 있었기에 하나하나 돌파되어 평양성까지 포위됐다. 연남산과 보장왕이 먼저 항복하고, 연남건은 마지막까지 싸우려고 했지만 내통자 '신성'이라는 승려에 의해 성문을 열고 보장왕 등이 당나라에 항복,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한다.
그리고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도달한 이적(李勣, 이세적)은 도서관인 장문고(藏文庫)를 보고 오랑캐 주제에 책이 너무 많다면서 이 책들을 그대로 놔두면 반란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하고는 궁궐과 함께 대부분 불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멸망 후 당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9도독 부 42현 100주를 성립시키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구려 멸망 때 당이 점령한 지역이라고는 평양 일대와 자발적으로 항복한 국내성일대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잔존세력들이 여전히 위세를 떨쳤고 특히 요동방어선 일대를 포함한 안시성, 요동성, 백암성, 오골성, 신성, 부여성 등의 11개의 성은 평양성이 함락되었음에도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이다. 설인귀가 지휘하는 2만명의 병력을 주둔시켰으나 고구려 유민들의 반발을 잡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안동도호부 평양에서 요동성, 이후 신성으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고구려 영토자체의 통제권을 행사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 고구려 부흥운동등으로 673년까지 고구려는 당에 저항을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당으로서는 안동도호부의 후퇴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673년까지 고구려의 저항세력을 상대로 승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671년에 안시성 등이 함락당했고 672~673년 백수산(白水山)-호로하(瓠瀘河) 전투에서도 고구려 잔존세력은 당과 싸웠지만 번번히 실패했다.[25]
결국 지속되는 저항으로 677년 당은 보장왕을 요동으로 물러난 안동도호부의 요동주도독 조선왕(遼東州都督 朝鮮王)으로 봉하여 고구려 저항세력을 달래보려고 했으나 당의 생각과 다르게 보장왕이 고구려 부흥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서 결국 유배를 보내게 된다. 참다못한 당나라는 결국 고구려 유민들을 대거 흩어지게 할 목적으로 이때부터 당나라의 비개발지역이자 고구려에서 한참이 떨어진 지역으로 고구려 유민들을 대거 이주하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결국 고구려 유민들은 대거 강제로 이주를 당하기 시작하는데 679년 고구려에 확실한 통제권이 미치는 지역에 해당하는 평양과 국내성의 인구 중 부유층과 지식층 3만 8300호 대략 20만이 조금 넘는 규모의 인구를 양자강 회수의 남쪽 및 산남(山南), 경서(京西), 제주(諸州)등로 대거 이주시키는 등 고구려의 인구를 최대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결국 이들 핵심계층은 미개발지역에서 혹사당하며 비참한 삶 속에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갔다고 한다. 당으로 끌려가서 이름을 남긴 유민은 대표적으로 고선지, 이정기, 왕모중(王毛仲), 왕사례(王思禮)등이 있다.
이들 말고도 영주로 대거 이주를 시킨 사례도 있다. 이 그나마 가깝고 신흥세력의 옆이었던 영주로 강제이주당한 유민들은 결국 나중에 발해를 건국하게 된다.
이들 말고도 669년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성읍 12개와 자신의 직할무리 4천여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으며 신라가 제후왕으로 삼은 보장왕의 서자 "보덕국왕 안승"이 4천호를 이끌고 투항하는 등 꽤 많은 인구가 신라로 유입되었다. 9서당에서 고구려계가 셋이나 되었고(신라인들과 동수), 백제와 달리 고구려 귀족은 좀 더 높은 진골~6두품으로 들어갈 정도였다.어차피 나중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지만 신라에서는 고구려계를 주로 남원경, 익산 등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에 주로 정착시켰는데 옛 고구려계를 고향과 먼 곳에 분산시켜 약화시킴과 동시에 옛 백제계를 제압하는데 이용하려는 이이제이의 의도로 보인다.
그 밖에도 돌궐이나 유목민 사회로 흘러가거나 일본으로 흘러가서 그 맥을 이어가다가 결국 그 지역의 문화에 동화, 사라지게 된다. 돌궐이나 유목계에서는 묵철가한의 딸과 혼인했던 고문간(高文簡), 고정부(高定傅), 고공의(高拱毅) 정도가 알려져있다.[26] 일본에서는 고구려 왕족이자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고약광(高若光)(왕약광(王若光))이 있다.
요동등 기존의 고구려의 영토와 영향력하에 있던 지역에 남아있다가 발해와 소고구려를 만들기도 했으나, 그 나라들마저 흩어지고 말았으며 심지어 한동안 무시당하기까지 했다.
3.6 멸망 이후
고구려가 망하고 일군의 고구려 유민들이 요서의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영주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걸걸중상, 대조영 등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동모산으로 도망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698년 발해를 세웠다. 동모산은 고구려의 세력권인데다가 초기 발해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었다. 이러한 배경때문에 발해는 고구려 계승의식을 갖고 있었다.
한 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당은 고구려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검모잠이 한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결국 안승, 고연무등은 신라에 항복했다. 신라는 이들을 금마저에 살게하고 보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신라의 부용국 노릇을 하게 했다.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때 보덕국 사신을 딸려 보내 보덕국이 신라의 부용국임을 분명히 했다.
신라 신문왕이 안승을 서라벌로 불러 경주 근방에 식읍을 내리며 살게 하자 보덕국이 없어질 걸 두려워한 고구려 유민들이 안승의 서자 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계백에게 죽었던 화랑인 반굴의 아들 영윤이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할 정도로 반란은 거셌지만 곧 진압되었다. 보덕국인들은 남쪽 군현에 사민되었고 9서당중 2개 서당인 벽금서당(보덕국인(보덕국에 살던 고구려 유민)+말갈인), 적금서당(보덕국인)을 이루었다. 보덕국인과 별개로 신라에 정복된 고구려인, 말갈인들을 각기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에 편재하기도 했다.
한편 삼국통일 후 신라 내에서 옛 고구려인들은 상대적으로 옛 백제인들에 비해 대우가 좋았다. 백제의 지배층을 5두품에 편제한 반면 고구려 지배층들은 6두품까지 쳐 주었고, 그 중 고구려 왕족인 안승은 명목상으로는 금관가야계 김유신 가문이나 신라 왕족들과 동급 골품인 진골까지 됐으니 백제에 비해 대우가 훨씬 좋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후 안승의 후손으로 보이는 진골 귀족이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구려계가 곧 내쳐졌다는 설도 있지만, 684년 안승의 조카였던 장군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관계자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상식적으로 우두머리인 안승에게도 모종의 페널티가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추정해 안승이 숙청당하거나 적어도 6두품으로 강등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추측에 불과하고 그냥 안승이 후손을 못 남기고 죽어서 대가 끊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별개로 요동에선 발해 이외에도 별도의 고구려 부흥노력이 계속 있었다. 옛 고구려인들을 위무할 필요성을 느낀 당은 보장왕을 조선군왕으로 봉해 요동을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보장왕도 생각보다 물은 아니라 나름대로 고구려 재건을 꿈꾸었다. 그러다 발각되어 유배되고 당은 다시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봉했고 고보원이 반당정책을 취하자 그를 폐하고 고덕무를 세웠다. 고덕무 이후 요동은 독자적으로 자치권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를 학자에 따라 소고구려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고구려는 동쪽의 발해와는 별개로 약 100년간 존속한 걸로 추정한다. 발해를 해동성국으로 만든 선왕이 요동을 차지한 점과 '고구려 승려'가 신라로 망명했다는 기사를 볼 때 발해 선왕시기 발해에게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인근의 요서에서 산동으로 강제 이주된 이정기와 고구려 유민들이 산동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나라를 건국했고 이는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까지 4대째 존속했다.[27] 아직까지 뚜렷한 고구려 계승의식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구려 유민들이 제의 건국에 참여한 흔적들이 확인되고 연구결과에 의하면 제의 제도가 고구려,발해의 것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9세기에는 통일신라에서 현재의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지방에 흩어저 살던 고구려 유민들이 궁예의 밑에서 규합되어 후고구려가 건국되고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 무신정권기 서경에서 무인집권층에 반발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이 벌어졌다. 고려가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데 어떻게 고구려 부흥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의문이 있지만, 후삼국시대보다는 약해졌으나 각 지방의 옛 삼국 유민의식은 여전히 잔존해 있었고, 당시 고려에서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가장 강한 지역은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 일대였다. 그러나 서경은 묘청 사건의 여파로 대단히 대우가 박해져 있었던 터라 개경에 대해 반항 의식이 강했고, 마침 무인 집권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정통성이 극히 약화되자 개경은 이제 자격이 없으니 자기네야말로 새로운 중심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던 것.(참고 자료: 고려 무인 이야기).
하지만 그냥 생각해봐도 알 수 있듯 이런 식의 부흥 운동은 비슷한 시기의 신라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에 비해 정권욕이 너무나도 강렬히 드러나 있는데다, 개경 자체는 그들이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관 별개로 고려(=고구려)의 수도라서 명분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4 사회
4.1 종족
주는 부여 계통의 예맥이었다. 예는 부여, 맥은 고구려라는 게 일단은 통론. 흥미로운 점은 광개토왕비문에 예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예 예인을 한반도 남부의 한인과 함께 이민족 취급한듯 하다. 이건 고구려만 그런게 아니라 백제, 신라 바다건너 일본까지 그런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광개토태왕 이후부터 완전히 확고해진 고구려의 천하관 사상등으로 점차적으로 백제/신라인과 같은 한(韓)인들등에 대해서도 같은 대우를 하게 된다.[28]
고구려는 정복한 지역의 지역민들이나 이민족을 집단 예민(集團隷民)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위치는 평민과 천민의 사이에 끼어있는 입장인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고구려는 이민족을 복속할때의 말갈, 신라 등에 대한 고구려의 복속지배 형태가 사료로 남아있다. 이러한 지배형태는 피정복지의 반발을 줄이고, 복속지로부터 고구려에게 필요한 것은 취하되 복속지에 대한 지배력을 투사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국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막고 점진적으로 고구려에 흡수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일례로 고구려에게 6세기 중반에 완전히 동화되는 말갈의 경우 고구려가 망하자 고구려의 계승을 내세우며 발해를 건국하는데 기여했다.
여러 종족이 교차하는 만주의 특성상 거란, 선비, 말갈, 돌궐 등 다양한 북방민족을 휘하에 복속했다. 특히 선비 같은 경우 초기 유리왕 대에 그 일부를 복속한 기록이 보이고 먼 훗날 5세기에도 선비계가 주류인 북연의 인구를 흡수했다. 또한 몽골의 유연족 역시 멸망후 일부가 고구려로 망명했다. 거란의 경우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으나 6세기말부터 7세기에 점차 중국이나 돌궐에게 붙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사실 거란은 완전한 동화를 하지는 못했으며 장기간의 복속으로 동화상태에 갔던 말갈 등과는 다르나 거란족 일부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말갈의 경우 대부분 고구려에 복속하여 동화되어졌다 여겨진다. 흑수말갈의 경우 동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속하여 고구려 멸망때까지 함께 한다. 돌궐 역시 유연과 마찬가지로 영양왕때 일부 부족이 복속되었다. 고구려 시기 상당기간 동안 중원이 혼란했던지라 중원에서 상당한 인구의 한(漢)족들도 고구려로 유입되기도 했다.
4.2 언어
- 고구려어 항목을 참조.
4.3 교육
전국의 지방에 경당을 설치하여 평민층을 대상으로 경전과 기마, 궁술을 교육했고 현대의 국립대학쯤 되는 태학도 존재했다.
태학은 수도에만 있었겠지만 경당은 각 거리마다 존재할 정도로 수가 많았다고 전한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남녀노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심지어 개까지도(...) 책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
4.4 경제
수렵과 목축을 농업과 병행하던 부여와 달리 고구려는 농업을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하는 농본국가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부터 요녕성,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대게 구릉이나, 산지, 고지대 등이 많고 평균 기온이 낮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지역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이당시의 농경방법은 휴경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므로 경작을 하고 난 뒤 땅을 묵혀두어야 하는 2~3년간 특별히 할 것이 없을때에는 식량과 자원의 확보를 위해 주변지역에 대해 약탈이나 전쟁 등을 벌이는 군사활동을 벌이며 농업과 약탈을 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는 성립초기부터 한사군과 주변세력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군사활동을 벌여오며 막대한 경제력과 부를 축적하고 확장시켰다.
이후 세력이 확대되어 말갈이나 거란 등의 유민들을 받아들인 후에는 돼지 등이 중시되는 등 목축의 성행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있다. 지리, 기후 여건상 밭농사가 주였으나, 요동에서 대방(황해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부분적으로 논농사가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원확보는 농업 이외에도 주변지역에 군사활동을 벌여 자원을 확보하거나(약탈?) 휘하 유목민들을 부려 수렵, 유목 등을 통해 가축을 얻는 등의 방법도 있었다.
또한 요동지방에는 현대에도 알아주는 대규모 철광이 존재했다. 고구려의 철은 북만주의 실위에 수출되기도 했었다. 도로망이 잘 발달되고 수레가 잘 활용되어 각종 천연자원을 원활히 수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평양에는 수레가 대량으로 다닐수 있는 고구려시기 다리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의 교역규모에 대한 것을 특별히 언급하는 기록은 없으나, 다른 기록등을 통하여 유추해볼 수 있는데, 2차 고수전쟁 개전초 당시 수나라가 돌궐기병 2만명을 앞세워서 거란을 기습했는데 그때 수나라 군대는 돌궐기병을 고구려로 가는 상단으로 위장해서 거란을 쳤다. 당시 거란은 쳐들어오는 돌궐기병이 상단이라 믿고 있다가 크게 당하여 성공한바 있다. 이는 고구려로 통하는 상단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적 사례이다.
일본에 '토산물'로 낙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휘하 거란족에게서 거둔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거란이 선물한 낙타를 만부교 밑에 매달아 굶어죽게 했던 사건도 유명하다. 참고로 그 낙타는 쌍봉낙타.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동북부 등에 분포해있었다. 혹이 큰 단봉낙타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분포해있던 종이다.
수도 평양의 경우 온달 설화에 의하면 상업도 고대국가 치고는 상당히 정교하게 발전했었다.
그리고 의외로 국가가 부유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645년 고구려-당 전쟁에서 개모성을 함락한 후 개모성에서 탈취한 곡식이 10만 석, 요동성을 함락한 후 요동성에서 탈취한 곡식이 50만 석이나 되는 점으로 보아 비축해둔 곡식의 양도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도 구당서의 기록을 인용하고나서부터는 유독 군사의 동원숫자나 사람의 숫자를 묘사하는 부분이 극도로 높아져서 수치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이 많기 때문에 실제의 식량비축량이나 생산량을 기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4.4.1 인구
사서에서 고구려의 인구에 대해 기재되어 있는 것은 아래와 같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 - 3만 호 / 15만인
<구당서> 동이전 고려 - 5부 176성 69만 7천호 / 384만 5천인
<구당서> 지리지 안동도호부 - 5부 176성 69만 7천호
<신당서> 동이전 고려 - 5부 176성 69만호 / 345만인
<삼국사기> 고구려 보장왕 27년 12월 - 5부 176성 69만여호
<당회요> 안동도호부 총장 원년 9월 14일 - 5부 176성 69만 7천호
<삼국유사> 기이편 고구려 - 고려 전성 시기에 21만 508호 / 105만 2540인
신,구당서 및 삼국사기에는 멸망 당시 집계된 인구가 69만호로 기재되어 있다. 1호당 4~6명 정도로 계산시 대략 276~414만 내외, 고대국가치고는 상당한 덩치에 해당한다. 같은 사서에서 백제의 인구가 76만 가구로 나오고 신라는 기록에 없으나, 당시 백제보다 더 많은 영토와 농경지를 지녔으므로 비슷하거나 그이상의 인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구당서의 가구수 기록을 근거로 계산하면 삼국의 인구는 일천만명이 넘어 고대치고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중국이 전한때 인구가 5천만 명, 당나라 이전 수나라때 인구가 5천만명 가량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삼국의 인구는 이 1/4~1/5수준이다.
구당서의 가구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도 그대로 인용하여 따르고 있는데,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더 후대에 작성된 삼국유사에서는 고구려의인구를 전성기에 21만 508호에 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쪽은 또 반대로 적다. 이에따라 인구 추산수치도 구당서와 삼국사기를 따를 것이냐, 삼국유사와, 삼국지를 따를 것이냐가 양분되어 있는데, 통상 학계의 학자들은 후자를 따르는 편이다. 그러나 학설만 분분할 뿐 자체적으로 실시한 통계조사자료나 인구호적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추정만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4.4.1.1 삼국유사 신뢰측
구당서의 기록을 호당 4명으로 계산해도 삼국을 다 합하면 1천 만 명에 가깝고, 6명으로 계산하면 1,200~1,400만명 정도로 1909년 통감부에서 실시한 조선의 인구 수치 1,800만 명과 아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수치는 수양제당시 중국인구 4,600만명의 1/4~1/3 수준이다. 즉, 후대인 고려나 조선의 인구 추정치보다도 많고, 중국 통일왕조 수나라의 인구수치와 비교해도 영토에 비해 너무 많은 수준이다. 예컨데 당시 삼국의 강역을 모두 합쳐도 수나라 영토의 1/4도 안되는데, 삼국의 인구는 수나라의 1/4을 넘으니 이수치로만 보면, 삼국의 인구밀도가 수나라보다 더 높다. 때문에 구당서의 기록을 부정하고 삼국유사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더 신뢰하여 고구려 인구를 100~200만 수준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당나라 측에서 전공을 과시했을 가능성 등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부터 요녕성, 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농사가 매우 어려운 구릉이나, 산지, 고지대 등이 많고 평균 기온이 낮아 주식이 되는 벼(열대작물)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온난한 지역이 아니었다. 그나마 추운지역에서 재배하기에 적합한 보리는 도정과 조리법이 벼보다 더 어려워 필요한 영양분을 얻기가 힘들다. 현재 만주 지역은 밭농사가 발달되어있지만, 이지역에서 밭농사가 급격히 발전하게 된 것은 신대륙으로 부터 옥수수와 사탕무등의 외래작물들이 들어오고나서 부터였다. 실제로 당시 이지역에서 거주하던 부여와 말갈은 농업만으로 생계유지가 안되, 수렵과 채집, 목축등을 겸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었다. 농업외에 인구부양을 위한 식량생산 방법으로 목축이나 축산업등을 예로 들 수도 있지만, 이 둘은 농경보다 면적대비 식량생산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비교적 농경지가 많이 포함되어있는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신라등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황하일대에 대규모 치수사업을 벌여 대량의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광범위한 농경지를 정비한 중국 통일왕조와 삼국이 비슷한 수준이거나 삼국 쪽이 더 높은 인구밀도를 지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설사 삼국시대의 기후가 조선조때나 현재에 비해 온난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온난한 기후를 이용할만한 농업이나 식량생산기술이 고구려나 삼국에게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당장 조선후기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모작의 경우 2년 3작이 가능하였지만, 이모작이 보급되기 전에 농민들이 실시하던 휴경농법은 수확 후 농경지를 2~3년 정도 묵혀두어야만 했다. 거기에 더해 1,800만명대의 인구를 보유했던 구한 말 당시 조선은 해마다 경작을 할 수 있어 농경지도 집약화되었고, 신대륙으로 부터 구황작물인 감자와 옥수수 그리고 고구마도 전래되었으며, 농경지도 확대되어 구릉이나 산간지역까지 논밭으로 개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삼국은 아니었다. 설사 영토의 절대면적이 넓다 할지라도, 식랭생산기술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많기 때문에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이 조선시대 후기와 얼마 차이 안나는 인구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낮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 학계의 학자들은 구당서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가구 기록을 거의 인용하지 않는편이다. 실제로 지금은 없어진 과거 국사편찬위원회 <묻고 답하기> 게시판에는 삼국의 인구에 대해 질문이 올라왔을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대제 교수가 삼국유사 기록을 토대로 답변을 한 바있다.
더불어 휴경의 존재는 고구려가 인구에 대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해명하는데, 한번 경작을 하고나서 3년간 해당경지를 묶혀두는 농법상 농민역시 2~3년동안 생산활동과 멀어진다. 도시국가시절 고대 로마의 경우도 이러한 이유로 잉여농민으로 병력을 구성하여 이웃 도시국가들을 약탈하면서 생활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인구대비 몇 %가 아니라 휴한기에 노는 인구를 죄다 병력으로 차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구에 비해 병력동원수가 많은 이유도 해명된다.
4.4.1.2 구당서와 삼국사기 신뢰측
반대로 인구 기록이 신뢰성이 높거나 오히려 축소되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영토의 절대면적이 매우 넓으며, 전쟁을 수행하면서 쏟아붓는 군사 동원능력은 인구수 기록을 낮춰보면서까지 부정하기에는 꾸준하고 상당한 수준이다. 가령 고려, 조선에 비해 영토의 절대면적이 2~3배이상 더 큰 삼국이 고려 인구 추정치 보다 많고 구한말 조선 인구자료와 인접하다고 해서 부자연스럽다고 보기는 어렵고, 근대적인 인구통계나 확실한 자료가 없는 고려와 조선시대 인구 수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수치에 오차범위도 매우 넓기 때문에 이것만을 근거로 과거의 인구수를 역산하기도 힘들다.
거기다가 집계 당시 고구려는 6세기 말부터 거의 70년간, 고구려-당나라 전쟁만 쳐도 25년을 총력전을 펼쳐 전쟁을 한 나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계된 70만 가구는 오히려 실제보다 적게 잡힌 수치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여말선초의 지옥을 거치고 조선 태조 때 한반도 집계인구가 30만이 되지 않았다거나[29], 중국도 수당 교체기를 거치면서 집계인구수가 5천만에서 1700만으로 6~7할이 줄어드는 등의 예가 있듯이, 오히려 5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했지만, 행정상의 누락으로 적게 표시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게다가 멸망 당시 집계된 인구는 69만호지만 그전에 먼저 10만호가 당으로 투항해버렸으니, 구당서에 입각하면 실제 호구수는 투항호를 감안하여 이것보다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삼국지나 한서 등에 나타난 고구려 영토의 중심지에 살았던, 각종 다른 세력과 고구려의 인구를 합산하면 동부여 지역을 제외하고도 기원 후 3세기경 120만명 정도가 중국의 시야에 들어와 있다고 추산된다. 고구려 인구의 규모를 가늠하는데에 보탬이 되는 정보지만, 후에 이정도의 인구수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는 쉽게 확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자연적인 인구증가나, 외부인구유입 그리고 질병이나 전쟁, 아사 등의 변수등이 수시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4.5 정치제도
4.5.1 초기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일종의 부족 연명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왕들도 사실상 다른 부족 연맹들을 아우르는 일종의 연맹장의 성격을 강하게 띄었다.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던 5개의 부족은 소노(消奴)(연노(涓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이었다. 이 다섯 부족의 부족장 간에 선출된 부족 연맹장이 곧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위는 점차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이어졌다.
초기는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소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또는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왕 이후부터라고도 한다.
또한,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여 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절노부는 곧 연나부로,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을 배출했던 소노부와 계루부, 왕비를 배출했던 절노부등은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고구려 초기의 관등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30] | 삼국지 위지동이전(三國志 魏書東夷傳) | ||||
1등 | 상가(相加) | 1등 | 상가(相加) | ||
2등 | 대로(對盧) | 2등 | 대로(對盧) | ||
3등 | 패자(沛者) | 3등 | 패자(沛者) | ||
4등 | 고추대가(古鄒對加) | 4등 | 고추가(古鄒加) | ||
5등 | 주부(主簿) | 5등 | 주부(主簿) | ||
6등 | 우태(優台) | 6등 | 우태(優台) | ||
7등 | 사자(使者) | 7등 | 승(丞) | ||
8등 | 선인(先人) | 8등 | 사자(使者) | ||
9등 | 조의(皁衣) | ||||
10등 | 선인(先人) |
상가는 원래 좌보-우보체제에 있었다가 나중에 신대왕때 국상제가 도입되면서 상가가 국상자리에 가게된다. 기존의 좌보-우보는 대로로 갔는지 아니면 그대로 상가에 존속하는지는 불명이다. 초기에는 8~10등 관등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고구려의 특징이다.
초기 지방행정으로는 성(城) -곡(谷) - 촌(村)으로 나뉘어졌으며 성(城)의 책임자는 태수(太守). 곡(谷)의 책임자는 재(宰)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태수(太守)->재(宰)
의 모습이 나오는데 미천왕때 압록곡의 관리를 압록재라고 불리웠던 언급과 고노자의 승진사례를 통하여 이러한 지방행정 관직이 있었음이 보인다.
4.5.2 후기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이였던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서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라고 하며, 그 관료 조직이 더 좋게 정비된 것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되어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 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 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정했으며,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파견된 행정관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했다.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회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소수림왕때부터 체제가 다시 재편정리가 되면서 고구려의 중기~후기의 관료체제도 각각 변화가 되어있는 것이 확인되나 중국측 기록에서는 당나라때 저술된 북주의 역사를 다룬 주서를 기준으로 중기 후기는 신당서와 수서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서(周書) | 수서(隋書) | 신당서(新唐書) | |||||||
1등 | 대대로(大對盧) | 1등 | 태대형(太大兄) | 1등 |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 ||||
2등 | 태대형(太大兄) | 2등 | 대형(大兄) | 2등 | 울절(鬱折) | ||||
3등 | 대형(大兄) | 3등 | 소형(小兄) | 3등 | 태대사자(太大使者) | ||||
4등 | 소형(小兄) | 4등 | 대로(對盧) | 4등 |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 ||||
5등 | 의후사(意候奢) | 5등 | 의후사(意候奢) | 5등 | 대사자(大使者) | ||||
6등 | 오졸(烏拙) | 6등 | 오졸(烏拙) | 6등 | 대형(大兄) | ||||
7등 | 태대사자(太大使者) | 7등 | 태대사자(太大使者) | 7등 | 상위사자(上位使者) | ||||
8등 | 대사자(大使者) | 8등 | 대사자(大使者) | 8등 | 제형(諸兄) | ||||
9등 | 소사자(小使者) | 9등 | 소사자(小使者) | 9등 | 소사자(小使者) | ||||
10등 | 욕사(褥奢) | 10등 | 욕사(褥奢) | 10등 | 과절(過節) | ||||
11등 | 예속(翳屬) | 11등 | 예속(翳屬) | 11등 | 선인(先人) | ||||
12등 | 선인(仙人) | 12등 | 선인(仙人) | 12등 | 고추대가(古鄒大加) | ||||
13등 | 욕살(褥薩) | 13등 | 없음 | 13등 | 없음 |
하지만 북송때 저술된 책부원귀와 청나라때 저술된 통전에는 유사하면서도 명칭이 다르게 저술되어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통전(通典) | ||||
1등 | 대대로(大對盧) | 1등 | 상가(相加)/토졸(吐捽)/대대로(大對盧) | ||
2등 | 태대형(太大兄) | 2등 | 대로(對盧)/태대형(太大兄) | ||
3등 | 대형(大兄) | 3등 | 패자(沛者)/울절(鬱折) | ||
4등 | 소형(小兄) | 4등 | 고추대가(古鄒大加)/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 ||
5등 | 의후사(意候奢) | 5등 | 주부(主簿)/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 ||
6등 | 오졸(烏拙) | 6등 | 우태(優台)/우태(于台)/대사자(大使者) | ||
7등 | 태대사자(太大使者) | 7등 | 사자(使者)/대형(大兄) | ||
8등 | 대사자(大使者) | 8등 | 조의(皁衣)/수위사자(收位使者) | ||
9등 | 소사자(小使者) | 9등 | 선인(先人)/상위사자(上位使者) | ||
10등 | 욕사(褥奢) | 10등 | 소형(小兄) | ||
11등 | 예속(翳屬) | 11등 | 제형(諸兄) | ||
12등 | 선인(仙人) | 12등 | 과절(過節) | ||
13등 | 욕살(褥薩) | 13등 | 부과절(不過節) | ||
14등 | 선인(先人) | 14등 | 없음 |
대체적으로 고구려 중기이후부터는 거의 13~14등급의 관등제의 운영을 확인할수 있다. 중앙관제를 기준으로 각 5부에 속한 신하들도 유사한 관등으로 나뉘어졌는데 앞에 소속된 부를 뜻하는 형태의 명칭으로 중리대형(中裏大兄)의 경우 중리부에 속한 부의 7등급 관리를 의미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즉 부족장의 가신체제(家臣體制)가 중앙 관료 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 체제로 정비되었다라고 볼 수 있겠다.
소수림왕때 재편이후로 지방행정은 기존과 크게 달라진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6세기부터 재편이 되었다.관련정보
욕살(褥薩)->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 -> 가라달(可邏達) -> 누초(婁肖)
의 체제의 직책을 두며 성(城)을 기준으로 대성(大城)이라 불리우는 큰 지역의 행정관은 5등급 이상의 욕살(褥薩)이 파견되었고 그 이하 소성(小城)들을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라고 불리우는 직책의 7등급 이상의 직책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개개별 소성(小城)들은 규모 혹은 관할에 따라서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각각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욕살이라는 명칭은 13등급의 하위등급에 있는 직책인 관계로 중앙관제의 명칭과 지방관제의 명칭의 음차는 같아도 차이는 있던것으로 보인다.
4.6 군사
고구려의 행렬도.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 고구려의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인 편제 구조로 국내성·평양·한성(漢城 :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었으며,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실시했다. 대모달의 관직은 5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었던 자리이며 말객의 경우 1000여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7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고대국가들처럼 5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의 계루부의 중앙군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국원왕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이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정예묘사가 덜하다는 점에서도 기인할수 있다.[31] 이것이 나중에 소수림왕때 국가적 율령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태왕때 관군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의 통제하의 지휘체계와 병력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시 상비군의 체제가 중앙의 군대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연히 고대의 중앙과 지역의 권력의 균형을 볼때나 그 이후에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보아 각 귀족마다 사병집단은 존속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예시로 보자면 미군처럼 연방군과 주방위군의 형태와 같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미군과 다른 점은 평시에는 중앙의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주방위군 형태의 각 5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의 사병집단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병종은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잘 알려진 중장기병과 중장기병보다 무장이 덜한 중기병(重機兵) 그리고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 과 기마궁수의 기병 병과가 존속했다. 크게 중장기병과 경마기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보병으로는 부월수(斧鉞手)/환도수(環刀手) /창수(槍手)/궁수(弓手)가 존재해 있다. 환도수(環刀手)/창수(槍手)는 중장보병에 속했으며 부월수(斧鉞手)는 경보병에 속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궁수(弓手)가 별도로 존속했다. 이외에 별도로 쇠뇌를 운영하는 병사나 공병과 같은 존재 그리고 취사집단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부분적 기록에서만 유추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32]
고구려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개인의 신분과 경제수준에 따라서 갑옷과 무장을 각자 갖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색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밀었다는 무사집단의 경우에는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용어나 조의(皁衣)라는 표현이 나오나 둘다 모두 관등의 문제이고 실존 기록에는 적시 돼 있지 않다. 위에 서술 되었듯, 경당(扃堂)이라는 청년단체가 그렇게 보인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경당(扃堂)은 오늘날 사관학교와 같은 군사학교의 역할을 하여 성인남성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고구려군에 즉각 편입시킬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당(扃堂) 이전에는 좌식자(坐食者)라는 약탈경제와 전투목적의 지배전사집단이 귀족층내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학설이 여러가지이므로 그 존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계속 존속하여 군사력의 한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의 병장기들은 중국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될만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군대가 입는 갑옷만 하더라도 높은 철생산력과 가공 운영능력을 바탕으로 비록 손질에 손은 많이 가지만 방어력을 확실히 보장하는 찰갑이 고구려 초기부터 보편화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맥궁(貊弓)/고시(楛矢)가 유명했고, 건국신화에서도 주몽이 활의 명수였던 점, 말을 수출하고 대량으로 운영하여 경당(扃堂)에서도 활쏘기과 말타기를 배우게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궁병과 기병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고구려는 중국왕조들의 병장기 수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특히 평원왕때는 고구려의 쇠뇌를 개량하기 위해 수나라의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웃해서 빼돌릴 정도였다.[33] 다만 수레는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지역의 전장 환경과 더불어 산성을 기반으로한 전투를 주 전략으로 펼친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차(戰車)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장기병의 존재가 전차의 충격력과 파괴력을 대신했기에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즉 개마무사(鎧馬武士)라 불리우는 중장기병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경기병과 중기병들이 고구려의 주력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 방어기지인 산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산성기병은 침공군에게는 매우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온 침공군의 배후와 보급로를 이들이 끊임없이 차단하여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방어전략에서 청야전술과 함께 산성들과 산성들에 주변에 있는 보루와 같은 군소기지들의 협력방어를 매우 중시했다. 덕분에 침공군은 장기주둔도 어려웠지만 점령한 고구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일도 상당히 어렵게 만드는 환경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고국원왕 시절에도 잘 나가던 전연이 국내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난 이유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고구려의 이 방어전략 체계의 우수함은 이후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에서 압도적인 적의 침공군에 맞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력으로 재차 증명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시 집단 예민(集團隷民)에 속하는 말갈-거란등과 같은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간접지배지역의 타종족들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처럼 이들이 보조병 역할을 했을지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도 이들을 동원하면서 로마와 유사한 인센티브를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호드? 실제 고구려가 거란-실위-말갈등을 동원했던 기록들과 거란-실위-말갈족 등이 고구려의 멸망시기까지 함께 했던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호드 맞네
4.7 형법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반역을 도모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으며, 그 가족들은 노비로 삼았다고 하며,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도 살인자를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굉장히 호전적이고 상무적인 일면이 있어서 적에게 항복한 사람이나 전쟁에서 패한 사람 역시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34]
절도죄를 저지른 도둑은 훔친 물건의 12배를 물게 하였다. 이는 일명 '1책 12법'으로 고조선대에 만들어졌다는 팔조법이나, 부여의 법에도 비슷한 법이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제도가 1책 12법인지는 명확하진 않다. 여러 기록들 중에서 《구당서》에서만 1책12법을 언급할 뿐 다른 기록들에서는 오히려 10배의 배상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북사, 수서, 신당서)그 외에 《주서》에서 10여배로 갚는다는 내용이 있다. 종합하자면 고구려는 1책 10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한다.
또한 남의 가축을 죽인 사람을 노비로 삼거나, 남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그 자식들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을 경우에는 제가들이 모여 논의하는 제가회의를 통해 처벌하였다. 이토록 고구려에서는 범죄자에 대해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고 전해진다.
4.8 신분제도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노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층은 상호(上戶), 평민층은 하호(下戶)라 불렸다고도 한다.
고구려의 정치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이였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으며, 전쟁이 나면 스스로 무장하여 앞장서서 적과 싸웠다.딱히 고구려만 그런 것은 아니다. 보통 타국 지배층들도 전쟁에 지면 자신들의 재산과 지위가 모조리 사라질 확률이 높으니 여간해서는 무장하고 싸웠다. 또한 각자 방대한 양의 토지를 소유했으며,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 휘하의 관리들은 왕이 거느리고 있는 관리들보다 급이 떨어져서 관직명이나 지위가 같아도 함께 서있거나 할때에는 같은 줄에 있지 못했다고 한다.
일반 백성은 평민으로 대부분 자영 농민이였고, 토지 경작을 하면서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며, 백성들은 토목공사에도 동원되었다. 또 일반 평민들 중에는 집단예민(集團隷民)이라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평민과 천민 사이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바로 고구려의 영토나 영향력(간접지배 포함)하에서 정복된 집단으로 점차적으로 고구려화를 하면서 일반 평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집단예민(集團隷民)때에는 고구려가 요구하는 병력차출에 동원되었을뿐만 아니라 공납을 바쳤다.[35]
고구려의 천민계층으로 노비(奴婢)가 있었다. 노비는 포로, 죄인, 채무자, 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신분 계급에 따라서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으며, 고구려의 신분에 따른 의관(衣冠)문화는 바로 그들이 착용하던 모자가 대표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백라관(白羅冠)-청라관(靑羅冠)-자라관(紫羅冠)- 조미관(鳥尾冠)-비라관(緋羅冠)-조우관(鳥羽冠)등이 대표적이었다.
흰색비단의 백라관은 왕만이 쓸수 있었으며 최고위 귀족들만이 쓴 청색 비단의 청라관(靑羅冠) 그 다음이 붉은 색 비단의 비라관(緋羅冠) 그리고 마지막이 자주색 비단의 자라관(紫羅冠)은 관등의 차이를 나타내며 신분의 입장을 보여준 대표적인 고구려의 관모이다. 물론 이것은 관등의 차이로서 볼수 있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관모 말고도 지배층의 다른 모자로 새의 깃털을 세 개 또는 네 개정도를 꽂은 조우관(鳥羽冠)이 존재하며 평민들은 새의 꼬리를 꽂은 조미관(鳥尾冠)을 쓰는등 대표적으로 이런차이들이 있었다. 물론 언급된 의관 말고도 다른 중국쪽에서 유행했던 남북조시기에 유행하였던 위모관(委貌冠)이나 통천관(通天冠)등도 나타나는등 계급에 맞는 각각의 의관이나 헤어스타일을 통하여 계급을 알아볼수 있었다.[36]
5 문화
5.1 미술
한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구려의 미술은 강건하고 웅장한 기품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강건하고 웅장하기 뿐만한게 아니라 섬세하기도했다. 근래에 들어선 귀족적인 섬세함도 있다는 것도 추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여러 표현들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구려의 미술로 남아있는 것은 고분벽화나 몇몇 공예품이 전부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강서대묘의 사신도. 사실 이 그림은 사신의 그림이 있는 걸로 유명하지만 중앙에 황룡도 또한 존재한다.
일본에는 담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호류지의 금당 벽화가 있었는데 1948년에 보수 공사중 일어난 누전 화재사고로 불타버렸다. 고구려의 미술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프레스코 기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벽화 제작 기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이 벽화가 그려진 시기가 담징의 생몰연대와 일치하지 않고, 고구려의 불교 미술과는 거의 판이하게 다른 작풍을 지니고 있어 고구려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게다가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나라 지방에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오는 말에 불과하다.
또한 산수화의 발전에도 아주 크게 기여했다. 불상 등의 공예품은 북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후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유행했던 미록보살 반가사유상 양식도 출현한다.
5.2 음악
고구려 음악의 흔적은 4~5세기의 재상 왕산악이 진나라에서 도입한 칠현금을 개조한 거문고의 연주를 위해 지은 100여곡이 유명하다. 물론 지금까지 전해지는건 한 곡도 없지만(…). 어쨌든 이때 발명된 거문고는 조선시대까지 대히트를 치게 된다.
한나라 때에 중국인들이 음악가들을 고구려에 보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또한 '고취'라는 악기도 함께 가져가 고구려에 전했다고 한다. 수서에서는 고구려의 노래로는 지서(芝栖)가 있고 춤곡으로는 가지서(歌芝栖)가 있었다고 한다. 또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악기가 총 21악기라고 전해지며 기타 다른 것들도 합치면 30악기 수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나라 때 고구려의 음악이 궁중음악으로 편입된 적이 있다. 측천무후는 고구려의 25곡을 때때로 즐겨 들었지만 중세 송나라때에 오면 1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흔적을 잃었고 살아남은 1곡도 의복을 포함한 본래의 기풍을 잃었다고 전해진다.[37]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한다.(조동일,'한국문학통사1',지식산업사,2005,p230-231). 전하는 노래로 유리왕의 황조가 등이 있다. 내원성, 연양, 명주는 고려사 악지에 근원설화만 전하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노래들이다.
5.3 문학
운문은 남아 있는게 황조가, 여수장우중문시, 인삼찬, 영고석 등의 소수의 시밖에 없다. 그 외에는 위에서 언급한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것들 정도. 인삼찬의 '인삼'은 그 인삼이 맞다. 인삼을 의인화하여 인삼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아래가 그 내용.
人蔘讚(인삼찬)三椏五葉(삼아오엽)
背陽向陰(배양향음)
欲來求我(욕래구아)
椴樹梢尋(가수상심)
세 가장귀에 다섯 모난 잎이
햇빛을 등지고 그늘을 향했네
와서 나를 찾고자 하거든
자작나무 숲으로 오시오
전설 혹은 설화는 동명성왕, 호동왕자, 산상왕, 미천왕, 온달 관련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구려인의 문학은 아니지만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이 지은 고려회고시(高麗懷古詩)가 있다. 고려시대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색이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며 지은 시인 부벽루에도 고구려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5.4 건축
고구려의 건축은 축성술, 분묘조영 위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남은게 다 무너진 성곽에 도굴당한 무덤밖에 없다. 지못미. 특히 한반도의 무덤은 도굴 상태가 매우 심각해 출토품이 거의 없다. 심지어 요즘은 벽화도 뜯어서 판다고 한다. 남은게 성곽과 무덤밖에 없다고 해도 남아있는 것들로 파악하건데 고구려의 성곽과 무덤은 높은 수준에 속한다. 두 쪽 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은 주로 산 위에 건축되었으나 평지성도 있었다 평지성같은 경우는 굉장히 높게 쌓아 자체의 약점을 보완했다. 외형으로는 단순해 보이나, 실제로는 삼각형 모양으로 돌을 깎아 교차시키면서 쌓은 것으로 돌끼리 서로 맞물려 붕괴가 어렵도록 되어 있다. 고구려 성곽의 치나 옹성은 고구려 고유의 것은 아니나 중국에 비해 먼저 출현하여 일반화되었을 뿐이다.
웅장한 규모에 人자형 동자주가 두드러지고, 여말선초에 푸른 청자 기와가 건축에서 쓰였다면 고구려에선 붉은 기와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온돌 또한 고구려 건축의 특징으로써 빼놓을 수 없다.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 발전했다.분묘로 가장 유명한 것은 장군총이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중 원형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어 규모가 가장 큰것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장군총보다 5배이상 큰 돌무지무덤도 존재한다. 보존상태는 안습이지만(...)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은 텔레토비동산 흙을 무시무시하게 쌓아올린 신라의 무덤과는 달리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친절하게(...) 완성되어 있어 여기만 찾아내면 도굴하기가 쉬운 편이다. 예전 나라가 건재했을 때는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 등을 두면 되었지만 망하고 나면 그런거 없기 때문에 차례차례 도굴꾼들에게 당하게 되었다. 백제 무령왕릉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입구가 잘 숨겨지고 무덤이 아예 묻혀버리는 바람에 무사한 케이스.
5.5 과학
독자적으로 천문학이 상당히 발전했다. 중국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별자리를 발견한 바 있으며 이중 일부는 중국으로 흘러갔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시대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원본 각석이 대동강물에 빠져 이미 소실된 가운데 한성에 운좋게 남아있던 고구려 천문도 인본(4~6세기 추정)을 발견해서 다시 새긴 것이라고 한다.고대국가의 위엄 오오 오파츠 STC발굴
또한, 일본의 벽화 고분(기토라 고분)중에는 고구려시기 평양의 하늘을 그린 것으로 파악되는 벽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고구려의 단위로써 주로 건축에 사용된 고려자, 즉 고구려척은 한반도, 일본열도에서 통용되었다.
또 막대한 철 생산과 가공운영능력등을 증명하는것답게 중공업도 우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6 종교
http://www.gnedu.net/php-bin/swebdata/%C1%DF%C7%D0%B1%B3/2%C7%D0%B3%E2/%BB%E7%C8%B8/1%C7%D0%B1%E2/ms20030108150559/web/E$$00024.jpg
기본적으로 국교라는 개념은 없어도 다신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 동명성왕과 유화부인을 고등신(高登神)과 부여신이라는 이름으로서 신으로 숭배하였고[38] 수신(燧神), 소 머리를 한 농사의 신 달의 여신 해의 남신,쇠를 다루던 야철신(揶鐵神), 수레를 다루던 제륜신(提輪神)등을 섬겼다. 고구려인들 자체가 스스로를 천손이라 여기는 사상덕에 주몽이나 유화 같은 영웅적인 존재를 신으로 추앙하며 숭배하면서 천손사상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물론 이런 토속신앙 종교외에도 소수림왕때 본격적으로 들어온 불교 역시 고구려의 다신교의 종교중 하나로 들어왔고 나중에 도교 역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도교가 들어올때에는 불교의 정치적 탄압을 받아서 불교가 위축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6 인물
고구려/인물 항목 참조
7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영명 7년[39]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 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는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40]
《북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41]에 세종[42]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43]는 섭라[44]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 [45]
《위서》 열전 고구려
4세기까지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유력한 세력에 불과했지만, 광개토-장수 시절 전성기를 기점으로는 동아시아 전역을 기준으로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만큼 그 위상이 매우 강해진다.
군사적인 충돌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고구려 초창기에는 인접한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급 인사가 주장이 되어 대고구려 전선을 책임질 정도였다. 하지만 중기 이후로 이 정도 급은 대고구려 전선 부장 수준으로도 언급을 보기 힘들다. 북위는 비교적 서쪽에 해당하는 농우 지역을 징발하여 고구려를 상대한다는 안조차 부담스러워 기각하는 모습을 보이며 당나라의 경우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기도... 한마디로 고구려는 중국이 온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대가 된 것이다.[46] 이런 상황에서 전선이 많은 중국을 옆에 둔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꽤나 목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동북아 균형자?
옆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존재하고 또 그걸 위협하는 세력이 북방 몽골초원 일대에 떡하고 버티고 서있어서 그렇지 전세계로 시야를 넓혀도 중국은 군사력이나 인구로 세 손가락에 꼽히고 북방 제국도 판도나 군사력에서 중국과 옆치락 뒤치락하거는 세력들이다. 당시 전세계 통틀어도 인구수 400만 500만 이상을 말할 수 있거나 군사력 30만씩 보유한 국가가 대여섯개 남짓, 고구려가 멸망한 당시 집계된 인구가 70만 가구[47]에 70년간 전쟁의 인구유실과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인구를 감안하면 이를 상회했을 가능성도 존재하니 상당한 국력인 셈이다. [48] 물론 고구려 인구는 말기 인구에서 가져온 추정치에 불과하므로 확실히 말하긴 힘들다. 고구려 인구 부분 참조.
-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요동(만주)의 작은 소국으로 시작해 호전적이고 거친 유목민족들이 즐비한 요동지역을 차례로 제압하여 요동 내에 확고한 패권국의 지위를 구축한 강대국이었다. 요동 내의 유목민족들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위세에 눌려 별 힘을 쓰지 못했으며[49] 수, 당과 같은 중국의 통일왕조 역시 고구려를 위협적인 강적으로 보았고,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수 십 년간 전면전을 벌였으며, 결국 당 고종때 이르러 신라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멸망시킬 수 있었다.[50] 게다가 고구려가 멸망에도 연개소문의 세 아들 중 연남건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심각한 내부 분열이 큰 영향을 미쳤으니, 만약 내부 분열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그리 쉽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다.
8 영역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남만주와 함경도에 걸터있던 국가였으나 미천왕과 광개토왕을 걸처 요동과 서북한에 걸처있던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영역이 완성된다.
지도상의 영역은 고구려 본토(직접지배)에 가깝고 여기서 거란, 말갈, 지두우 등으로의 세력 확장(군사적인 영항력투사)이 있기 때문에 최대 판도(간접지배+영향력) 기준이라면 저 지도에서 요서 조양시와 난하 서쪽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부를 석권하는 것을 넘어 서북쪽의 내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도 이상의 방면으로 가면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고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표기가 상당히 애매한 것도 있다.
직할 통치구역 외에 간접 통치구역, 영향권까지 나타낸 지도는 다음과 같다.
직할 통치영역은 위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영역이다. 전성기때는 동서남북 6천리에 이른다라는 평가를 받을만큼 서쪽으로는 요서인 난하와 영주를 닿고 북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서북쪽의 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될 만큼 확장된 모습에서 직간접지배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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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간접 통치구역 및 영향권을 반영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있다. 혼슈는 둘째치고 홋카이도랑 사할린까지 왜 영토로 표기 된 건 무시하자[51]
출처 |
고구려말기의 영향력을 나타낸 지도로 이 지도는 직할령에 해당하는 영역이고 추가적으로 송화강 이북의 일부와 서쪽의 거란의 일부 부족과 동북의 흑수말갈도 고구려의 간접지배영역으로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위에 나온 영향력과 간접지배지역은 거의 대부분 존속 유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출처
출처 |
역시나 고구려 말기의 영향력을 그렸는데, 이 지도의 경우에는 말갈부의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있으며 고구려의 영향권 입장만 표기해놓았다.
고구려 영역들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고조선과 부여의 고대 영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영토에대한 정립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가 계승의지를 표방한 고조선과 부여의 의식과 함께 고구려의 천하관에 의해 그 영역의 한계와 확장에 대한 입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스스로가 직접+간접지배지역자체의 국경의 영역으로 서쪽으로는 난하와 영주를 기점으로 국경을 정립하려고 했고 북방은 대흥안령산맥일대의 기준을 잡으면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대한 자신의 영역입장을 갖춘 형태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고구려의 천하관에 입각하여 한반도와 같은 고구려와 동질적 문화와 의식을 갖고 있는 국가들인 백제-신라-가야-탐라와 같은 현재 우리민족의 영역 전체를 자국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꾸준한 노력을 한 모양새가 현존하는 고구려의 직접+간접지배지역의 영역의 확대와 한계를 구분짓는 형태로서 작용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이러한 천하관에 입각한 영역의식은 삼한일통과 같은 삼국통일에 신라가 내세운 슬로건과 같은 형태와 민족적 영역과 민족의 결속을 하는 역할도 한 영역적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9 고구려가 남긴 것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은 당, 돌궐, 말갈, 왜, 발해, 신라로 뿔뿔히 흩어졌다.
당은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그 지역의 유민들은 퉁구스계의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한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발해인들은 보통 세갈래로 갈라져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의하거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갔으며,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냥 그 땅에 그대로 남아서 말갈의 후신인 여진에 동화되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은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에 기여하였고 이는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장수왕시기에 바뀐 고구려의 국명인데,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영문 국호 "Korea"의 어원이 되었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로서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요는 고려와의 분쟁에서 고려가 아닌 자신들이 고구려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고,[52] 금, 후금, 청으로 이어지는 여진, 만주족에게도 모델이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 그리고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KOREA라는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제사대상 가운데 하나였으며, 특히 민족주의 관학파의 주도 아래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좀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하는 요양 고씨. 한국에는 고주몽을 시조,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그것이다.
오늘날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명맥이 이어지는 곳은 의외로 일본에 있는데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구려 유민 마을이 그것이다.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 왕족 (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인임은 확실해보임)이라는 약광과 고구려 유민 수천이 정착하여 고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국호)군을 이루었는데 메이지 유신때 현재의 히다카(일고-일본고려의 준말..이 아니라 히와다 산+고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으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여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구려 유민 가운데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약광(若光)(일본명: 코마노코키시 쟛코(高麗王 若光, こまのこきし じゃっこう))이 유민들과 함께 지금의 사이타마현 근처에 세운 코마(高麗)군이 유명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론 없다.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코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다. 당시의 코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코마군민이 그 덕을 기려 코마신사(高麗神社, こま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코마명신(高麗明神, こま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이것이 코마신사가 창건된 경위이다.
고구려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코리아타운같은 형태로 사이타마 인근에 거주했는데 11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인끼리 통혼했다고 한다. 오늘날 중국 조선족이 급격히 중화사상에 동화된 것을 보면 굉장한 것이다. 고구려가 망한지 500여년 동안 고구려 혈통을 이어나간 셈. 하지만 500여년이 한계였는지(...) 이후 일본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실제로 코마신사와 그 일대를 가보면 산과 구릉 언덕이 꽤 많다. 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누볐던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와 유사한 지형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일본 여행기에서도 코마신사를 방문한 챕터가 나온다.
코마신사 주위에는 코마(高麗)역과 코마가와(高麗川)역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코마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 왕실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 무라카미 등 고구려계통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관동지방의 무사시국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지방에 대거 이주한게 원인이 아니냐는 근거가 제기되기도 한다.관련기사
신라, 조선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강하고 백제, 고려는 묻혀가는 데 반해, 고구려와 발해의 경우는 만주 근역을 아우른 영토와 중국과 싸워서 이긴 역사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중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표현되는 경우도 잦고 세간의 인식도 그러하다. 광개토대왕의 경우에도 우리나라 위인들 중 순위권에 들 정도로 많은 존경을 받는 편이다.[53] 다만 일부에서는 이 시각을 극대화하여 논란이 생길 정도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존재한다.
10 조선과의 공통점?
1.시조가 명궁!
2.한국사 위대한 대왕고구려:광개토대왕
조선:세종대왕
3.외적과의 큰 전쟁이 있었음고구려:고수전쟁,고당전쟁
조선: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신미양요,병인양요
4.외적에게 멸망함.고구려:당나라에게 멸망
조선(대한제국): 일본에게 멸망
5.불세출의 명장고구려: 을지문덕 장군
조선: 충무공 이순신 장군
6.세계사의 유래없는 큰 승리를 거둠.
그러나, 국가이념과 사상 등이 크게 다르다. 재미로만 볼 것.
11 사료
11.1 한국
11.2 일본
11.3 중국
11.4 금석문
- 광개토왕릉비
- 지안고구려비
- 중원고구려비
- 모두루 묘지명
- 묘지명/고구려 유민
12 연표
13 동북공정
해당 항목 참조
14 고구려를 소재로 하거나 등장하는 작품
- 강철의 열제 이후로
환빠물양판소(...)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 고구려
- 고구려의 젊은 무사들
- 광개토태왕
- 나에게 온 달
- 대조영 (초반부의 배경이 7세기의 고구려이다.)
- 모살기
- 만화 바람의 나라와 게임 바람의 나라
- 소년장수
- 연개소문
- 요하(소설)
- 자명고
- 주몽
- 천년의 신화[56]
- 태왕북벌기
- 태왕사신기
- 평양성
- 칼과 꽃
14.1 외국
15 하위항목
16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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