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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1일 (화) 22:40 기준 최신판


조선의 역대 국왕
6대 단종 이홍위7대 세조 이유8대 예종 이황
합천군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세조 어진(1458년)[1]
묘호세조(世祖)
시호조선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혜장(惠莊)
존호승천체도열문영무
(承天體道烈文英武)[2]
능묘광릉(光陵)
본관전주(全州)
이유(李瑈)
수지(粹之)
출생지한성 본궁
사망지한성 수강궁 정침
배우자정희왕후(貞熹王后)
아버지조선 세종
어머니소헌왕후(昭憲王后)
생몰
기간
음력1417년 9월 24일[3] ~ 1468년 9월 8일
양력1417년 11월 2일 ~ 1468년 9월 23일 (50년 10개월 21일, 1만 8588일.)
재위
기간
음력1455년6월 11일 ~ 1468년 9월 7일
양력1455년 6월 25일 ~ 1468년 9월 22일 (13년 2개월 27일, 4838일.)
상왕음력1468년 9월 7일 ~ 1468년 9월 8일
양력1468년 9월 22일 ~ 1468년 9월 23일(1일.)
종교유교불교

틀:조선의 태상왕

조선의 역대 영의정
황보인이유정인지

1 개요

조선의 제7대 임금. 묘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임금이 되기 전 군호인 수양대군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어떻게보면 조선 막장테크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왕.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조선 왕조의 기반을 완성한 군주. 그동안 평가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점에 집중할 것인가에 따라 폭군에서 군주권의 강화에 노력한 노련한 군주까지 평가가 다양하다. 정권과 정치색에 따라서도 평가가 갈리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례가 차례나 있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관련하여 그래도 알고보면 꽤 좋은 놈이라는 평가를 현대사에서 오랫동안 받았었다. 때문에 1970~80년대 평가와 1990년대 이후의 평가가 상반되게 다르다. 다만, 대체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지나치게 고평가를 받고 있는 군주란 점은 분명하다. 온갖 무리와 잔혹한 숙청, 심각한 패륜을 저지른 군주는 세계사는 물론이고 한국사에서 이 임금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치세의 내용이 그걸 무마할 정도로 좋지가 못한 건 결코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는 '쿠데타 리'로 나온다.

2 출생과 대군 시절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해인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5세 무렵까지 사저에서 자랐다. 이유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세종의 즉위 이후 잇따른 국상 등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인 문종은 일찍이 입궐했고, 바로 밑의 동생인 안평대군부터는 세종의 즉위 이후 출생하여 태어날 때부터 궐에서 자랐기에 그와 형제들의 가장 큰 차이를 사저에서 지낸 기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 곁에서 떨어져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탁월한 체력과 운동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입궐한 후 1428년 대군에 봉작되었고, 진평대군(晉平大君)[4] → 함평대군[5] → 진양대군[6]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7]. 그래서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수양대군이라 흔히 불리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 이래 12년간으로 제일 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세종 27년). 그리고 왕위에 오를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휘보다도 왕자 시절의 군호가 더 유명한 임금.

2.1 모범생 형예술가 동생 사이에서

문인 기질의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문인 아들. 그렇지만 세조는 문(文)에도 뛰어났다. 활쏘기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활을 잡지 않겠다'라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이 워낙 걸출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세종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무인적인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6남 금성대군도 무인 기질의 인물이었으며, 특히 금성대군은 수양대군과 함께 마상 무예를 시연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문무 겸전의 인물이었던 건 분명하다.

그러나 능력 측면에서는 동생 안평대군도 재주가 뛰어나서 수양대군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고,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를 설계한데다, 화포 전문가이고 세종대왕이 와병 중일 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했을 뿐 아니라 세종대왕 사후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글씨도 컴퓨터로 프린트한 듯 정갈하지만 문종과 안평대군이 워낙 잘 써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여러 면에서 뛰어났지만 무예 외에는 뭘 하든 형과 동생이 한 수 위에서 놀고 있었던 안습한 둘째.

그런데도 결국은 이 사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꽤 존재감이 있는 입지를 굳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극찬하는 이상적인 군주형에는 크게 미달했던 게 사실.

태종과 같은 반열에 놓는 견해가 있으나, 몇 가지 면만 봐도 이런 견해는 설 자리가 없다. 최측근조차 가차없었던 이방원과는 달리 수양대군은 일방적으로 자기 최측근 사람을 감싸고 도는 경향이 몹시 강했다. 할아버지의 방식이나 한고조 유방토사구팽에 대해 몹시도 큰 반감을 품었던 게 원인이었다지만, 바로 이런 점이 그가 큰 차원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식견은 태종보다 훨씬 떨어졌음을 엿보게 하는 면. 빈틈없이 숙청을 해대서 깔끔하게 후환을 제거해버렸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공신 숙청에 실패해서 연산군이 나타나는 단초를 제공하고야 만다. 공신 숙청에 머뭇거릴 만한 사정[8]은 있었다지만, 그러한 상황은 다름아닌 그가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게 견제를 당하게되는 큰 빌미를 제공해준 실책을 범하게 된다. 본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후대에 소위 군약신강의 상황을 연출한 것.

2.2 야심만만한 왕자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왕자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석보상절>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대왕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적게 되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무예에 좀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자면, 겨울날에 사냥을 갈 때 가벼운 여름옷 차림으로 사냥을 했다고 하며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묘기를 부왕 앞에서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소맷자락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양팔을 크게 휘둘러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어다녔다고 한다. 부왕 세종대왕은 이를 두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런 옷을 입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걸 두고 '너는 힘이 세니까, 이런 행동에 불편한 옷을 입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문무겸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문약한 문종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문종도 문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 면에서 세조보다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개인적 무력만 보고 말한 것이지, 군사적 측면에서는 뛰어났다. 병법서인 '동국병감'이 쓰여진 건 문종의 지시였으며, 문종화차라 불리는 화차의 개량도 문종이 이룩한 것이며 당시 중구난방이던 환도의 규격을 법으로 제정한 것 또한 문종이었다. 또한 진법에도 조예가 깊어서 고려때의 진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오위진법 또한 문종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학 기술과 화약에 박식하여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천문 기기도 제작해 보는 등 성리학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문종이 세종대왕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 3년만에 사망한 것은, 당뇨가 심각하여 몸이 너무 쇠한 아버지 세종대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 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았던 데다,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대왕대비, 대비)이 없는 상태인데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게다가, 세종대왕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장유유서의 순서를 거슬러 왕이 된 자신에 이르기까지 왕위계승의 정통성이 약한 것을 매우 걱정하여, 장자계승을 통해서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를 절실하게 원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에서 적장자 계승 원칙이 초반부터 그것도 왕실에서부터 계속 지켜지지 않는다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명분과 건국 철학은 흐지부지되며 싸그리 무너지는 것이다. 세종은 왕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회 질서를 우려하여 문종에게 왕위를 승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문종은 아버지의 생각을 단지 자기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 말고도 조선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종도 병치레가 잦았던 것 이외에는 국왕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고, 세종의 치세 마지막은 사실상 문종의 치세에 가까울 정도로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경험도 풍부했다. 의외로 간과하는게 대리청정은 단순히 업무대행정도가 아니라 세자를 사실상 다음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종이고 사도세자의 경우는 예외에 가깝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입장에서는 명분뿐만이 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사극에서와는 다르게 문종이 살아있었던 시절에는 거의 존재감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정말 사극에서처럼 만만해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인 단종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심지어 단종 즉위 때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올 정도로 저자세였다. 영화관상이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오만 방자하게 굴었다면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살려둘리는 없었다. 다만, 아주 찍소리를 못낸 것은 아니어서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 차례 말했던 바도 있고,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큰형인 문종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 짓은 절대로 하지 못했다. 적어도 절대 남한테 자기 속을 보이다가 화를 자초할만큼 어리석지도 않았고, 반대로 교활하고 음흉했다고 봐야한다.

앞에 언급한 사건들 역시 문종이 "형으로서 야심 많은 동생의 신세 한탄 한번 들어주지 뭐..."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이 컸다. 이때 문종이 작정하고 끝장 낼려 했으면 수양대군은 얄짤없이 숙청 당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돌발행동들은 자신의 세력 과시나 야심표출보다는 적당히 사고를 쳐서 자신이 문종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다는 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인 양녕대군의 사례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문종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있다.

그리고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우국충정의 절대충신인양 온갖 위선과 가식을 다 떨었는데 사실 수양대군의 충신 코스프레는 실제로 저렇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높다. 문종이 오래 살아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은 자신과 형 사이의 관계만 생각했으면 됐다. 말하자면 자기가 계속 나대고 다녀도 형인 문종이 오케이 하고 넘어가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는 뜻, 이는 바로 아버지 항렬대였던 세종과 양녕대군간의 관계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져버렸다. 가시적으로 어린 조카와 야심만만한 삼촌이라는 관계로 설정될 수 있었고 여기서 수양대군이 조금만 야심을 보여도 바로 중신들의 견제를 받는 형국으로 발전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다.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첫째아들, 즉 장자이기 때문에 세종이 장자계승을 바랬던것과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그 이전에 단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함부로 야심을 드러내는것 자체가 왕에 대한 역모인것이다.

2.3 문종 독살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종의 종기 또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말이 있다. 전순의라는 문종의 어의가 종기 치료법과는 정반대의 치료법을 쓰고, 활쏘기 등 혈기가 들끓는 활동을 삼가지 않게 하는 등으로 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의가 무능했냐고? 전혀 아니다. 그 유명한 <의방유취>의 공저자이며, 그가 지은 <식료찬요>[9]에서는 지금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온실을 설명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문종 독살설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신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 ‘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도 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고, 효종(1619~59)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규는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년(1453) 1월4일 전순의, 조경지, 전인귀 등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내린 처벌은 ‘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으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년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 1년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1등에 녹훈(상호군(上護君)으로 제수)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 3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 7년에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10년에는 종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10]

반면, 여기에 반론이 존재한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 없고, 본인의 스트레스 +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훙하여 다시 삼년상[11]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누구라도 몸에 무리가 갈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양자(전순의등의 잘못된 처방+6년상의 강행군)가 모두 결합한 결과일 수 있다.

2.4 조카쫓아내고 즉위하다

(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 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김종서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대 1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주류파와 대항할 종친세력이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12]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근거 없는 얘기다.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궁지에 몰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이복 형제들과 조카는 물론 동복형제까지도 죽였다.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했다고 인조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 공신으로 3등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 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 공신 12명, 2등 공신 11명, 3등 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 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 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박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모두들 아는대로...

3 국왕 세조

즉위했을 때 의외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39세 때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는 건국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던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3번째로 고령이다. 4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경종(33세)이 뒤따른다.

3.1 주요 치적

조선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 치세에 호전과 형전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성종 즉위 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가 될 수 있었다. 전 왕조 고려가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바가 한번도 없음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 왕조 최초의 국가 공인 성문법전인 경국대전 편찬은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13]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도 문을 닫아버렸는데, 이는 단종 복위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집현전의 기능은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대에 그 기능을 부활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이다. 삼사 중 하나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쪽도 언론기관인 동시에 왕권의 견제기관이었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좋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그 공신이란 것들이 엄청난 부정부패와 온갖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감싸고 도니... 이것은 어떻게 보자면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 강력한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니까 오히려 친위세력들이 권신이 되어버린 경우인데, 다만 정조는 저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암군 항목을 참조하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깊었다. 세자 신분이 아닌 상황에서 왕이 된 경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왕이 된 후 백성들의 삶에 보다 주의를 기울인 경우가 많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 때였다. 다만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데에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을 시행하려는 의도가 존재하였다. 심지어는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존재했던 모양.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으흑흑..." 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신원설화는 이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으므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 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 때였다. 스스로 롤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이 시기부터 세조가 임명한 공신들의 횡포가 매우 심각했던 것을 생각해보면(가령 홍윤성이라든가...)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의도는 좋았고 마음가짐은 훌륭했던 건 사실이지만, 정치는 그런 의도나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어쨌든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경진북정庚辰北征)[14],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세종대왕 때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정해서정丁亥西征) 이 과정이 골때리는데, 세조는 이만주는 지금쯤 숨었을 건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 놈들에게 "니들이 실수해서 놓쳤으니 어쩔거임?"이라는 개소리를 들을 바에야 그냥 아예 처음부터 늦게 갈 것을 명했는데, 느릿느릿 이만주의 소굴로 들어가자, 이만주는 자기 병사들은 죄다 원정을 보내놓고 참모 이하 일족들과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조선의 군대는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분탕질을 했었던 이만주를 잡아죽이는 통쾌한 공을 매우 손쉽게 거두게 되었다.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자의식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을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 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후궁은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와 소용 박씨 둘 뿐이다. 근빈(謹嬪) 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하니 박팽년의 누이일 가능성은 없다. 후일 근빈 박씨는 오래 산 덕분에 춤에 능하다는 이유로 팔순의 나이에 연산군 앞에서 춤을 춰야만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세조는 연산군의 증조부이니, 근빈 박씨는 증손자뻘인 연산군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춤을 췄던 것이다.

소용(昭容) 박씨는 덕중이라는 이름의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외로워진 그녀는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연달아 구애를 하다 사단을 낸다. 임금의 후궁이 보낸 구애편지[15]에 기겁한 구성군이 두번 다 바로 달려가서 세조한테 보고하였고, 분노한 세조에 의해 편지를 배달한 내시 둘과 소용 박씨 모두 죽임을 당한다.[16]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교과서나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에 나오는 공식적인 주요 치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특히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6조의 권한이 세조 이후 크게 상승하였고, 귀신도 부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던 삼정승의 위세를 경계하여 도승지와 삼정승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처럼 왕까지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권신이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 이시애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戶籍), 호패제(戶牌制)를 강화하고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軍制)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 북방개척에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北征)을 단행, 신숙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 남이, 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 강원,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 세조 12년 경제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와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제를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에게도 현직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고 심지어 그의 자식들이 음사로 이 혜택을 받아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으며 국가재정을 축내는, 지금 보면 완전 미친 상황이었는데 이전까지의 왕들은 문제의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별 문제 없으니 뭐.. 하고 그냥 방치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수십년에 거쳐 조선 정부의 재정에 악화가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세조 12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제를 밀어붙였으며, 자신이 아끼고 비호하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관료를 토지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의 명목도 폐지하였다.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성종대에 또다시 직전법의 문제점을 시정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고 이 두번의 개혁과정을 거치며 조선의 재정이 크게 안정화되었다. 기타 수령 고소 금지 같은 여러 악법들도 이시기에 모두 사라진다.
  •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 개인적으론 즉위 전에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을 편찬했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를 개혁했다.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시행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번역 활동에도 전념하여 여러 불경과 운회(韻會)를 직접 번역했다.
  •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기존 관습법을 주로 사용하던 전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조선이 중세국가를 넘어 근세국가로 평가받는 중요한 도약점이다.
  •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 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이후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각사신륵사, 수종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파주의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의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금강산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 한국의 불교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체계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 시기를 거쳐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주요 행정구역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 규형(窺衡), 인지의(印地儀)라는 토지측량기구를 직접 발명,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빛나는 종묘제례악의 개념이 이때 바로잡히고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기보법인 오음약보(五音略譜) 등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대악후보와 같은 책을 통해 세조의 높은 음악적 치적을 살펴볼 수 있다.
  •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대군시절 세종대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제조에 참여하였고, 이후 세조시기에 정축자(丁丑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중 갑인자와 을해자는 조선 초중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서적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특히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정비 등 일련의 편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밖에도 오륜록(五倫錄),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동국지도(東國地圖),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전국에 유통되었고 세조가 직접 불경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3.2 철권통치

하지만 왕권만은 확실하게 철권통치였다. 앞의 불교만 해도 그렇고, 황제들만 할 수 있는 원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지내는 행위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명나라 놈들 몰래하던 제사를 대놓고 했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만들어서 원각사를 지었을 때도 신하들의 반대 의견은 커녕 좋은 기운이 감돌았다는 칭찬만 나왔다.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대신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과 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겁니다."이라고 말했다가 "원로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취해서 그런거니 한 번 봐준다."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 소헌왕후, 문종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프라이드가 높은 수양에게 "너 이거 모르지? "라고 했으니 눈이 돌아가 버린 것.

정인지 외에도 병조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 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격분하며 병조판서의 머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곤장을 친뒤, 애정을 담은 행동이였다라는 식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않았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라며 다독이자, 이계전은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 세조 1년(1455) 8월 16일 기사 참고.

그의 철권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례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때는 한여름이었다.

이 외에도 신하들을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이였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만에 다시 원상복귀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통치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무제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세조의 아버지는 한무제를 좋게 보지 않았다.)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고,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그래서 조광윤이 도끼자루로 신하의 옥수수를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양반 재위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이 발언만 보더라도 그의 체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세종과 문종에게 크게 미치지 못함을 잘 알 수 있다.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폐단으로 남은 것을 잘 생각해보자.

아버지인 세종은 고려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부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부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같은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재정을 따로 안챙기고 전부 중앙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조 산하에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황제 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해서 결론적으로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던 조선의 재정제도는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이러한 분할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3 공신 우대 정책

신하들을 죽이는 것만은 피하자는 생각이었던 듯 하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 이상 죽였다간 능력있는 정치할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세조앞에서 세조를 '너'나 '상왕'으로 부르는 말실수를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모드였던데다 한명회, 신숙주을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를 마구 퍼주는 바람에 예종, 성종 때 신권이 무척 강해지게 되는데, 이는 핵심 공신들을 몰아내고 공신세력들의 힘을 억눌러서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공신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양정인데, 왜 죽었는지는 항목 참조.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 잦은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에는 숙취.

기존 항목에서 빠진 것이 있는데 세조의 공신 우대 정책은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 바로 공신 우대 정책을 통해 힘을 가진 훈구파를 생성한것.

3.4 호불(好佛) 군주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종 때는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아예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와 말년의 세종 이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마지막 조선의 왕이다. 참고로, 이 때 간행된 월인석보 같은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이 좀 있다. 다만,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왕자 시절부터 호감을 나타냈었고 왕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외톨이 조카에겐... 그런 거 없었다. 적어도 실록 속에 나타나는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이자 야심가' 유형의 인물됨됨이를 생각하면 그가 과연 죄의식으로 고통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꽤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개지랄을 해댔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교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추락시킨 왕도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 세종이나 문종이나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교가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무시했다는 말이다.

3.5 한계와 비판

재위 내 보인 다소 많은 큰 업적만 보면 나름대로 정치를 괜찮게 한 임금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그렇게 평가받을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과오들이 존재한다. 사실 세조의 명성이 깎이는 이유는, 찬탈도 찬탈이지만 장기적인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데 대단히 부족했던 나머지 큰 부작용이 따르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그것이 민생에 큰 피해를 준 데 있다. 게다가 세종이 힘써서 만들어놨던 정치문화와 제도, 정책 여러가지를 일거에 날려버린 게 결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심각한 과오들 중 하나. 세종대왕문종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군주들이었다. 집현전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좋은 쪽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독불장군 스타일로 밀어붙였다. 주변 권신들의 보조가 있긴 하지만, 이 권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이었다. 권신들을 철저히 관리 감독이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그조차 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기 시작했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권력의 정점에 있는 폭군 유형들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할 정도를 낳은 것이다.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열을 올렸던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보고 아마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아버지와 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과 김종서를 척살할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정작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그 이후의 역대 군주들이 두고두고 신권에 의해 목숨마저 위태롭게 될 정도로 신권의 영향력이 왕권을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발빠른 추진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치명적으로 발목을 잡는 위험도 있었고, 난세에서는 일일이 토론하고 연구할 여유 없이 시시각각 급변해가는 현실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지만, 세종-문종 연간이 과연 난세였나 생각해보면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였는지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고,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겐 아직까지도 이런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계유정난 당시의 시대 배경에 난세란 건 근거 없는 주장이다. 섭정인 김종서 등의 선대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없었다. 안평대군이 야심가란 주장은 수양대군 측의 날조에 가까우며, 안평대군의 권력이란 건 무력에 기초하지 않은, 김종서 등의 문종의 충신들과의 연합을 통해 성립하고 있었기에 어불성설이다. 단종 시절에 왕권이 미약하므로 난세였다는 건, 그냥 수양대군측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대군의 탁월한 순단 판단력과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힘들다.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는데, 태종의 경우 그러한 사례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특히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핑계를 붙여 친족을 죽인 것은 큰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있었겠지만,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다.

과거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제5공화국 시절에는 그를 국가의 백년대계를 염려한 나머지, 악역을 자처한 구국의 혁명가로서 해석하는 시각이 득세하기도 했다. 목적은 당연히 정권 찬탈의 정당화. 이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강력한 군주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조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과잉 집착한 성격 탓에 행한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도 넘칠 정도로 심각함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 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현대 관점으로는 물론이고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나타난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끔찍하게 죽여 버리거나,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낸 반면 세조는 공신인 한명회를 외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래도 태종과 세조의 차이를 느끼지 못 한다면 태종의 후계자가 다름 아닌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이라는 걸 생각해 보자.

이성계가 세웠던 세자 방석은 막내아들인지라 쟁쟁한 형들에 비해 정통성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태종이 방석을 죽일 때 대다수의 대신들도 이에 대해 반발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세조는 정통성이 확고한 단종과 그 대신들을 몰아냈기에 이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등을 겪었으며 그중에서도 중간파들이 일으킨 사육신 사건은 자칫 정권이 다시 전복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심에 기대야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물론 그 결과는 문종까지 꽤 안정적으로 굴러가던 조선의 막장화를 여는 첫 단추가 되었다.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사망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쉽게 소멸이 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된다. 또한 지방 유학자 출신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사림이라 명명하며 공신그룹과 대립하게 되었다.[17] 덕분에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이라는 아쉬움이 생길 법하다.

주목할것은 그나마 구 공신을 견제한답시고 한 짓거리가 새로운 공신세력을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성 부족을 자력으로 메울 수 없었다는(혹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 왕들에게까지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예종은 그래도 나름 강한 군주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 공신 세력의 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요절해 버렸고, 사실상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성종은 그야말로 제대로 시달렸다. 성종이 세조와는 정반대로 유달리 유교적 도학 정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세조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 연산군의 폭정이 성종대 왕권 약화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고려해 보자.

게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은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언제 왕 자리가 내부의 배신으로 찬탈당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통치보다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정치적 경향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훗날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하거나 부조리로 고통받는 상황을 만든 원인들의 상당수는 멀리 가면 세조가 귀찮다고 없애버린 시스템의 부재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바꿔버린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정책 등이 원인으로 나온다. 한 마디로 조선왕조 체제의 문제점 상당수를 본인이 만들어버린 셈.

3.6 사후 간접 디스

당시 조선사람들에게도 잘못된 것으로 받아들여진 찬탈

이후 숙종집권기때 묘호가 없던 정종에게 묘호를 추존함과 더불어 단종까지 복위 시키면서 간접적으로 디스당했다. 이때까지 단종을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대군"으로 승격 하였다가 이후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이후 덤으로 세조가 처벌하였던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숙종 혼자의 뜻이 아니였으며 조선 팔도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더 의의가 큰것,

단종, 사육신, 혜빈 양씨관련 처벌은 세조가 직접 행한것이기 때문에 이를 복권, 복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세조가 잘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위되어 버리면 세조는... 조선시대는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대해 예송논쟁이란 아주 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예법과 정통성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숙종 또한 정통성의 화신이기에 대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일부 부정할수도 있음에도 이를 거리낌없이 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세조 사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조선시대에서 세조를 찬탈이며 단종이 억울하게 왕위를 뺏긴것이였다는 여론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단종이 복위되면서 이를 기념하여 조선에서는 과거시험까지 열렸을 정도였다.

4 인간 세조

4.1 희대의 패륜아 임금

세조의 패륜행위는 어지간한 폭군들의 뺨을 연속으로 후려치고도 남는다.[18] 이 점에서도 같은 과정으로 집권한 할아버지와 많이 비교된다.

우선, 형제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에게는 형수님이었던 현덕왕후의 일가가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문종의 왕릉)에서 파헤쳐 시신을 토막내서 불태워 뼛가루 동강에 뿌려버렸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형인 문종과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데다, 애꿏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짓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게다가 계유정난 당시 형의 무덤의 비석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 역시 형의 무덤인 현릉에서 참살해 버렸다.

거기에 현덕왕후의 무덤 장소를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에 이장을 해버렸다. 이 때문에 현덕왕후의 관은 강에 버려졌다. 강에 버린 이유가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현덕왕후의 혼령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덕종(원래는 의경세자, 세조의 아들, 추존돼서 왕)이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덕종은 단종보다 일찍 죽었기에 사실과 맞지 않는다.

태종의 경우 신덕왕후의 묘를 이장하기는 했으나, 신덕왕후는 태종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성계의 첫째부인 한씨는 이방원이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 있었다. 또 당시 이성계는 살아있었고, 아버지 때문에 신덕왕후를 폐서인 시키지는 않고 후궁으로만 격하시켰다. 거기에 태종 입장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가 신덕왕후의 배겟머리 송사로 인한 세자책봉 문제였다. 방석은 태조의 아들중 막내였고 아무런 공도 없었으므로 당위성이 부족한 세자책봉인 것은 명백했다. 그러므로 이방원 측 입장에서는 명분수립을 위해 그녀를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형인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고 아버지인 태조에게도 신덕왕후와 그 자녀 일가에게 한 것 외에는 큰 패륜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기 위해 조사의를 시켜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나마 태종을 싫어하던 이들까지 모두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게 했다. 비속 살해 역시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전제 하에서는 명백한 패륜이었다.

게다가 태종이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은 죽였지만 동복형인 방간은 살려준 것과 달리, 세조는 동복동생(안평대군, 금성대군)까지 죽여버렸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모의와 관련해서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 관련없는 일반 백성까지 포함해 엄청난 수를 학살했다는 야사도 있다. 더욱이 태종의 경우,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일으킨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동생 둘을 죽여버렸다.

이복동생들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렸으며,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던 것을 막으려고 했다가 그녀 또한 죽였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죽인 것이다. 잘 아는 대로 친조카인 단종까지 죽였다.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켜버렸다. 성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친동생으로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막내아들인데, 다른 형제들과도 나이차가 많이나는 막둥이라서 그런지 태종과 원경왕후도 끔찍히 귀여워해서 결혼 후에도 궁궐에서 끼고 살았을 정도다. 병약해서 14살에 죽고 말았는데 죽을 즈음에 당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이 동생을 살리려고 어의들과 함께 의서를 연구하고 곁에서 밤낮으로 간호를 할 정도로 세종대왕도 몹시 아꼈던 동생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 안평대군을 자식없이 죽은 동생 양자로 보낼 정도였는데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적극 지지했던 또 다른 패륜아 양녕대군은 자기 막내동생이 죽을 때 활쏘기를 하고 술마시고 놀았다. 오죽하면 참고 참던 태종조차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할 정도.

한마디로 친족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없이 태종조차 하길 꺼려한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서모,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존재는 송두리째 뽑아버린다라는 방침 때문이라 단 한치의 빈 틈도 없이 철저하게 말살을 해버린 것이다. 어차피 권력이라는 비열한 속성상 부자지간에도 권력을 공유할 수 없는 법이라지만...

그리고 세조가 가장 욕을 먹는 부분은 단종관련 문제이다. 하다못해 암군이라는 인조도 전왕 광해군을 죽이지 않았는데[19] 세조는 조카를 자기 손으로 죽여놓고 시체 수습도 안해서 엄흥도라는 인물이 대신 수습해 장례를 치뤄줄 정도다. 하지만 정작 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적어놓는 조작까지 해놨다. 정작, 단종 사후 시신의 행방은 중종대가 되어서야 밝혀지는데, 후대에 사람들이 봐도 기가 찼는지, 뒤의 기록에는 "단종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는 글이 있었을 정도다.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주공단에 비유했었다.

심지어, 단종을 왕실족보인 선원록에서 파버렸다. 바로 단종을 문종의 서자 어쩌면 그 아래인 사생아로 격하시켜 버린 것. 단종은 왕위에서 쫒겨난 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는데 문종의 적자였으니 대군(大君)이 되어야 맞지만 서자가 받던 군(君)이 되었다. 이 후 1681년 숙종에 의해 노산대군으로 높여졌는데 문종의 적자로 인정함과 동시에 왕으로 추존하기 위한 예비단계였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죽인 것도 있다. 단종의 장인인, 정순왕후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는 단종 복위 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친구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큰건데 송현수 입장에선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를 시켜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다 남아있다.

웃긴것은 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친인척들은 다 작살 내놓고 나라를 갉아 먹는 공신들은 우대해줬다. 한명회같이 비리만 저지르면 양반이고 홍윤성같은 인간백정도 손대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성만 평가하자면 조선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망나니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인물.[20]

4.2 나는 잔혹한 조선의 군주. 하지만 내 가족에게만은 따뜻하겠지

어린 조카인 단종과 안평대군 등 동복동생마저도 경쟁자로 보고 제거했던 패륜 행적에 비해, 본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잘해줬거나 가까웠던 가족들에게는 잘해줬던 것 같다. 우선 친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겐 매우 극진히 효를 다하였다.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세조의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서,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신빈의 아들 계양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했다. 이 외 세조는 즉위한 이후에도 신빈의 아들들은 극진히 대해 주었다. 신빈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

대단한 애처가이기도 했다. 위에 기술했듯 후궁도 둘 뿐이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도 "우리 집사람이 말야..."라면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다.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워낙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말리기도 했다.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하면서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4.3 찬탈의 업보

한편, 문종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식복이 없었는데, 장남 의경세자는 세조가 왕이 되고 3년만에 죽고, 차남 예종은 즉위 13개월 만에 죽었는데 둘다 20세를 못 넘기고 모두 요절했다. 의숙공주는 향년 35세로 그나마 남자 형제들에 비하면 오래 살았지만 자식을 두지 못했다. 야사에 존재하는 맏딸 이세희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것. 그리고 손자들도 그리 오래 살지 못했는데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성종은 모두 30대에 죽었고, 증손자인 연산군도 폐위당해 30살에 비참하게 병사한다. 그나마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장수했으나 금치산자에 가까울 정도로 바보로 살았다. 다만 진짜 바보인지는 성종때부터 지금까지 수백년 간의 논쟁거리이다. 이후 다른 증손자인 중종은 단종의 장례를 치르어 준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장수했지만 고손자인 인종과 명종도 각각 20대와 30대에 자식도 못남겨서 결국 배다른 조카한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조선 왕들의 장자들 중에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을 제외한 나머지 조선 왕들의 장자들은 모두 세조때문에 수난을 겪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세종의 장자 문종은 세조에게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고 문종의 장자 단종은 세조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이러한 세조의 패륜행위 때문에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는 세조의 아들이라서 세조가 지은 죄 때문에 업보를 받아서 일찍 요절했다는 얘기가 있고 의경세자가 요절한 다음에 일어난 왕의 장자들의 수난 또한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후손이니까 세조가 지은 죄에 대한 업보를 받아서 수난을 겪은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당시 백성들은 어린 나이에 살해당한 단종에 대한 연민과 세조 공신들의 악행으로 세조를 천하의 개쌍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권력을 이용한 재산강탈이나 만행은 기본이고, 홍윤성 같은 살인마도 있으니... 이 때문에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소문으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는데 그 자리에 욕창이 생겼다, 단종이 죽자 분노한 현덕왕후의 귀신이 의경세자를 죽였다(위에서 언급한대로 의경세자는 사실 단종 이전에 사망한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다에 버렸다는 등 세조에는 달갑지 않은 소문들이 쌓여 갔다. 현덕왕후를 격하시키면서 문종의 능에서 파낸후 툭하면 물난리가 나는 곳에 이장해 버린 사실이 낳은 소문이다.

세조에 관한 안좋은 소문은 수십년 뒤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낸다. 성종때 사관인 김일손이 위에서 언급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닷가에 버렸다', '세조 자신의 아들인 덕종의 후궁 권 귀인을 세조가 찝적댔다', '사육신의 난 직후 세조가 신숙주를 통해 사육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역으로 면박을 줬다'는 소문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아울러 김일손은 세조실록의 공식기록엔 '단종은 자결했고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러줬다' 고 조작해놨지만 중종 때까지는 소문이어야 했던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 후 짐승이 뜯어먹게 방치했고 이후 어느 사람(고을향리 엄흥도)이 몰래 묻어 주었다.'라는 기록까지도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성종실록 집필과정에서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일손의 스승이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무오사화라는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버렸다

다만 불교 쪽에서는 숭불정책 때문인지 세조에게 긍정적인 야사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등에 종기가 난 세조가 온천을 찾아가 어떤 동자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한 후 동자에게 "내가 왕이니 등을 밀어줬다는 것을 비밀로 해라."라고 하니 그 동자도 "너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줬다고 알리지 말거라."라는 말을 해 사라져버렸고 깜짝 놀란 세조가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겨 상원사에 맡겼다던지, 불당에 절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자객을 알려줘서 그 보답으로 상원사에 양묘전을 내렸다던지, 속리산 법주사로 갈 때 가마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다 준 소나무가 기특하다며 정2품의 품계를 내려줬다던지 하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 야사도 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의 야사들이 보여주는 세조의 나쁜 면모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세조의 후원을 받는 불교로서는 이런 인식을 좋든 싫든 널리 퍼트려야만 했을 것이다.

또다른 야사에서는 라이벌 김종서와 엮어서 (현덕왕후의 저주로 생긴)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갔더니 거기의 아낙네가 사실 아버지를 비난하다 궁을 떠나버린 세조의 딸이었던데다 그 남편이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김종서의 손자였더라"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야사의 끝에 따르면 세조는 그 사실을 알고 너그러워져서 자신이 죽인 김종서에 대한 속죄같은 의미로 그 김종서의 손자를 정식으로 부마로 맞으려고 했지만, 딸 부부는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이 야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공주의 남자다.

어쨌든, 많은 야사에 등장하는 왕이기도 한데 그 야사의 대부분이 그의 왕위찬탈과 그로써 비롯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위의 문수보살 이야기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내용도 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다가 그의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를 다룬 내용이며, 그 중에는 그의 추악한 인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4.4 종합

조카을 저버린 패륜아에 앞서서 할아버지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조선 전기의 번영에 암운을 드리운 암군이라는 평도 있는데, 사실 '암군'이라고 보기엔, 어찌 됐든 간에 조선의 법제를 정비한 것이나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를 거의 완성시킨 업적이 있고 그외 여러가지 공적이 있기에 암군이라고 할수는 없다. 그렇다고 '명군'이라고 볼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지나친 공신 우대정책으로 인해 훗날 훈구파라고 명명되는 공신집단을 창출한 것이나 집현전을 폐지하여 건전한 관학파를 양성하는 인재 집합소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 당대에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집현전이 활성화 된 것은 어디까지나 세종시절 한정으로 문종대만 되어도 활력이 떨어졌다지만, 그렇다고 이걸 아주 없애버린다? 성종대에 사실상 집현전의 부활 개념으로 설치한 홍문관이 결국 언론 삼사중 하나로 머문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관학파 육성이란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세종대에 육성된 인재들을 세조가 대거 도륙함으로써 인재풀을 일거에 박살냈고, 결국 이것이 그나마 있는 능력있는 공신들을 숙청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된다.

그리고 결국 손자 성종 대에 훈구세력의 건재와 사림의 정계 진출로 인해서 도리어 왕권을 약화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 특히, 관학의 훈구화가 진행된 것은 공신을 주로 등용했던 세조 때라는 말도 있다. 왕권강화를 찬탈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오히려 세조 스스로가 결국에는 카리스마가 없는 후대 왕권을 약화시킨 것이다. 또 할아버지 태종은 숱한 대간들의 공격을 받으며 불같이 화를 낸 적도 더러 있었으나 사냥 나갈 때에조차 그들을 동행하며 언론 활동을 권장한데 반해, 세조는 대간들의 언론 활동을 탄압해서 유교정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는 점도 세조의 평가를 크게 떨어뜨린다.

이 왕권약화가 두드러지는 대표적 예가 성종의 즉위인데, 원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이 있음에도 성종이 즉위한 것은 그가 권신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명백한 왕위계승자인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차기 왕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권신에게 휘둘린 것이다. 한마디로 권신의 뜻에 따라 다음 왕이 바뀌는 이상한 사태가 생겨버린 것이다. 세조 본인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라는 사례와 이러한 왕권 추락의 세태로 초래된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이후 대부분의 조선의 왕들은, 그나마 좀더 백성들을 생각한 성종, 영조, 정조 등의 개념군주 옥의 티는 넘어가자 이외에는 대체적으로 자신의 권력 보전 및 일신의 안위만을 살피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이러한 추세는 결국

을 만들어냈다는 의견이 많다.

또한, 군사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군사 면에서 실책 역시 벌이고 마는데 형 문종이 화차를 개발하는 등의 조선 전기까지의 무기체계 발전을 멈춰버린 왕도 바로 세조다. 총통위의 폐지로 화포 개발이 멈춰진 것은 물론 세조 때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운용이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조선군의 화력 뿐만 아니라 백병전 능력까지 떨어뜨려 버린 셈이다. 다만 화력은 당대 여러 기록들이나 군사 무기 분야 편제를 봐서 당시까지는 그렇게까진 멸시되진 않은 듯 하다. 그러나 백병전 능력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근접 전투 기술 자체가 거의 실전되어버리고 명군이 주력이 되어야 했다.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법이다. 이전에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보인(봉족 -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이들)이 3명씩 배정되었다. 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보인 수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액의 숫자를 크게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커진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보인들은 이전보다 훨씬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졌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고려시대에 비유해 보면 군인에게 지급되는 군인전이 복무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군역의 폐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보법을 계기로 군인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가 점차 강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점에서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층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총평하자면, 나름의 능력이나 업적은 있었지만 단종, 금성대군 등 개인적인 패륜짓 뿐만 아니라 피끝마을 같은 학살을 자행하는 등 전형적인 폭군이며,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귀에 거슬리는 쓴소리를 싫어하여 직접 선대왕이 남겨놓은 업적을 죄다 개판으로 망쳐놓아 훗날 조선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이 단점이 찬탈자라는 오명과 함께 군주로서의 그의 평가를 떨어뜨린다.[21]

'오명을 감수한 구국의 결단자'란 식의 평가는 세조 즉위 이후 김동인의 대수양 같은 평가의 흔적이긴 한데, 쿠데타 미화를 위해 군사정권기에 연계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사실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있는게 사실이라 민주화 이후에도 세조 미화 사극이 종종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실록들은 편찬 주체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실록이다. 이는 '덮어놓고 그냥 믿지 말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정황은 없는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른 기록과 정황증거들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실록의 기록은 한 기록만 뚝 떼어놓고 봐서는 안 되고 다른 관련 기사들과 함께 비교 분석하면서 읽어야 한다.

특히나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이 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 역모 -> 숙청' 루트일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22]

심지어는 사관이 있었을 리가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실록을 배제하면 남는 기록이 없으므로 역사 인물 세조의 평가는 근거가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 다음은 추측과 예상 등이 이를 메워야하는 지난한 과정. 이걸 메우는 과정에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하다면 흔히 동원되는 것이 야사나 소설 등의 또 다른 편견들이다.

4.5 비슷한 사람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악한 숙부'의 대표적인 인물로 유명세가 높지만 그의 선배격으로 신라 헌덕왕이 있다. 이 쪽은 크게 뚜렷한 업적도 없고 자연재해와 기근에 속수무책이었을 뿐더러 그로 인해 백성들이 심하게 고생하는 판에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고려숙종이 있다. 고려의 숙종과 비슷한 점이 특히 많다. 수명도 52세였고, 후계자가 둘 다 예종이다. [23] 또한 이웃 명나라영락제와도 상당한 유사한 면목을 보여주는 인물. 영락제가 환관을 중용해서 폐단이 커졌다면, 세조는 공신을 중용해서 폐단이 커졌다. 세조에게는 그를 '나으리'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 성삼문이 있었고 영락제에게는 '연적찬위'[24]라는 말을 남긴 방효유가 있었다는 것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나름 명의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업적이 많았던 영락제와 달리 세조는 오히려 그걸 무너뜨린 인물이라는 점에서 평가가 더욱 떨어진다.

흔히, 라이온 킹스카에 비유되기도 한다. 정말 비슷하다. 능력있는 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지 못한 것하며 왕위찬탈의 과정도 비슷했다. 물론 형 문종에 비하면 세조가 세자 책봉이 못된 것은 당연하다. 또한 먼치킨 아버지에 재능이 있는 형제들이 있었던 점, 신하들 함부로 대하는 거나, 우애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낸 인물이라거나, 나름대로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자뻑이 꽤 심했다는 점 등에서 여러 가지로 삼국지조비와도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묘호까지도 똑같다. [25]

4.5.1 태종과의 비교

세조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과 정말 많이 닮았다. 자신의 반대파의 를 죽이고, 죽이고 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무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에도 능통한 능력자란 점이고 강력한 왕권확립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세조의 행보는 태종의 격세유전이라기 보다 사실상 태종의 능력이 대거 너프되고 폭력성이 대폭 강화된 열화판 카피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하다.

4.5.1.1 쿠데타의 명분의 차이

우선 태종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항거한 이유는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다. 조선 왕국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후계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통성임에도 태조 이성계는 태종의 첫째 형인 진안대군도 둘째형 정종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막내 아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린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도 유일한 적통이라는 식의 정통성이 있다면 이 책봉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이방석은 유교왕국 조선에서 보더라도 정통성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고 태조 이성계의 일방적인 독단으로 세자에 책봉된 것에 불과했다. 결국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가졌던 이방원이 크게 반발한 것.

반면 세조는 나이는 어리나 정당하고도 확고한 왕위계승 자격[26]을 가진 조카 단종을 강압적으로 몰아내고 개인의 욕심으로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전혀 없는 찬탈이였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해 세조 사후 시간이 흘러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에 즉위한 후에도 세조의 찬탈에 대해 조선에서 계속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기까지 하였다

거기에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동복형제만큼은 어떻게든 살려주려고 했으며 정도전의 자녀는 살려주는 관대함을 보였지만 세조는 동복형제부터 본보기로 죽였으며 이미 죽은 의 묘까지 능욕한다. 똑같은 패륜이라고 보더라도,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

4.5.1.2 왕으로서의 그릇의 차이

태종은 이후 왕이 되면서도 조선의 기반을 굳히는데 밑거름을 한다. 우선 왕권강화를 위해 자기 아내 민씨의 권력남용이 발생하자 민씨 가문을 싸그리 숙청했으며 세종의 장인까지도 왕권강화에 걸림돌이 되자 핑계를 삼아 죽일 정도였다. 물론 이는 도덕적으로는 큰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후에 세종과 문종이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큰 이바지가 된다. 하지만 세조는 한명회와 사돈까지 맺어가며 공신들을 방치하고 큰 권력을 줘서 훗날 후대에 훈구세력이 형성이 되어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종은 대신들의 횡포와 부패를 견제할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관을 싫어함에도 사관의 권한을 인정하고 대신들이 사관을 압박하는 것을 막아준 왕이 바로 태종이다. '(태종 본인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걸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발언을 그대로 사관이 실록에 남긴 유명한 사례도 바로 태종 시기의 일이다. 반면 사관의 활동이 가장 위축된 시기가 바로 세조이다. 찬탈 이후 조선을 어떻게 이끌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세조만 눈치 보면 나머진 꺼릴게 없었던 훈구파 권신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조 사후 예종을 거쳐 성종조차도 왕위서열에서 밑이였음에도 장인어른이 한명회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태종은 왕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반면 세조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5 세조의 능

광릉 항목으로.

6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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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초상화. 어진을 보고 베낀 선원보감(왕실 족보) 속 그림이다. 관상학에선 하관이 넓은 것을 좋은 관상으로 여긴다. 왕의 어진을 보고 베낀 것이니 실제 어진도 하관이 넓게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진이나 초상화가 남아 있으면 그것대로 캐릭터를 그려내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세조에 대해서는 하관도 비범하고 수염도 파워풀한 이런 개성 있는 생김새를 고증하지 않았다. 도리어 조금 왜소하고 광대뼈가 드러나는 얇은 수염의 소유자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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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에 모셔져 동제를 받았던 전(傳)세조 존영도. 신수동 복개당은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고 전 세조존영도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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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28년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김은호가 그때껏 궁에 보존되어 오던 세조의 어진을 이왕직의 주문으로 새로 이모해 그려내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 출처 하지만 사진 자체가 원래 원본과 모사본 자체를 찍으려고 촬영한 게 아니라 모사본을 만드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것이라 어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69년 5월 14일경향신문에 의하면 1928년 원종과 세조의 어진을 모사했던 김은호가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새로 건립된 김경승 作 세종대왕 동상의 고증에 대해 지적하면서 '1928년 당시 작업했었던 세조의 어진에 거의 수염이 없었다', '아들인 세조의 얼굴과 역시 수염이 성근 편인 태조의 얼굴처럼 세종의 얼굴도 그닥 수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어진을 보면 순하고 착하게 생겼다. 사람은 얼굴로 판단하면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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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신문에는 세조 어진의 초본이라고 하는 사진도 실려 있었는데 선원보감본 어진과는 전혀 다른, 전체적으로 둥근 얼굴형에 광대뼈가 드러나고 수염이 거의 안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 초본의 행방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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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세조 어진의 초본을 바탕으로 하여 청강문화산업대학 안태성 교수가 복원한 세조의 어진이다. 안태성 교수가 세조 어진의 초본의 모습을 복원하는 과정을 담은 링크를 참조. 이 항목 맨 위에 있는 해인사 어진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증조할아버지 태조의 어진과 같이 보면 아버지 세종대왕의 용안을 어느정도 유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7 사극

계유정난과 관련한 사극이 워낙 많아서,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 중 한 명. 이 시대를 다룬 사극이 대부분이 그렇듯 누구를 주인공으로 보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극과 극을 달린다. 세조를 주인공으로 하면 '고뇌하는 인간적인 군주', '구국을 위해 오명을 감수한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단종의 비극이나 사육신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에서는 권력욕에 광분해서 조카(단종)를 몰아내 죽이고 친동생들(안평대군, 금성대군)마저도 죽이는 등의 패륜도 서슴치않는 폭군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왕과 비에서는 임동진씨가 세조를 맡았다, 여기서는 형인 문종과의 약속을 두고 단종을 몰아내고도 그 처우에 대해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졌으며, 말년에는 죄의식으로 고뇌하고 고통받는 군주로 그려진다, 말년에 그가 묻힌 무덤 앞에서 단종의 혼령이 춥다고 꺼내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홍위야! 내가 꺼내주마! 조금만 기다리거라!"하며 울면서 무덤을 파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파천무-1990에서는 왕 역활을 주로맡는 유동근 이 수양대군시절부터 세조의 즉위후 얼마간의 치세까지 연기했는데, 다른 사극에서와 달리 왕위찬탈과정과 유지에서 심적으로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섬세한 지식인의 모습을 연출했다. 정적에게는 잔인할정도로 차가운, 수하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남자다운 캐릭터로 그려냈는데 해석은 연출자와 작가의 몫인만큼 다른작품들과 비교해보는것은 시청자의 몫으로 남는다.

흔히들 공주의 남자 에서의 김영철 이 분했던 세조가 '역대급' 이라고 불리나 파천무 에서의 유동근이 세조의 대군시절의 모습에 나이나 분위기로 보아서는 더 가까웠다고 보인다. 훗날 즉위후에 그려진 캐릭터에서는 김영철씨의 세조가 더 유사했다고 보는사람들이 많다.

퓨전 사극이 아닌 의외로 한명회(서인석 분)나 왕과 비(임동진 분)같은 정통 사극들에서 인간적이고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곤 하는데 사실 이는 미화가 매우 지나친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곧대로 해석한 데서 나오는 현상으로 실록의 기록을 그대로 보면 김종서나 안평대군, 혜빈 양씨가 역적이고 오히려 수양대군의 위기 상황이나 그 속에서의 호탕함이나 대인배스러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해석이 그대로 사극에 녹아들어 수양의 영웅성과 고뇌만을 강조하는 캐릭터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다루는 방송매체를 볼때에는 비판적 시각에서 내용을 해석할 줄 아는 신중함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순재파천무에 이어 공주의 남자에서도 김종서 역을 맡아 세조에게 참살을 당한다. 군사정권 시절에 쿠데타를 미화하려고 했다는 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당장 2010년대만 해도 세조미화물인 인수대비 같은 드라마가 나오는걸로 봐선 그냥 작가가 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작품들이 나온다고 봐야 한다. 당장 박정희때만 해도 이예춘[27]이 인간쓰레기 수양대군으로 나온 단종애사가 인기를 끌 정도였다고 하니...

퓨전사극인 공주의 남자에서는 김영철씨가 세조 역할을 맡았다.아이러니컬하게도 정통 사극이 아닌 이 극이 묘사하는 세조가 역대 최고의 세조 캐릭터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공교롭게도 파천무에서 세조 역이었던 유동근씨는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을 맡았고, 김영철씨는 대왕 세종에서 태종 역을 맡았다. 김영철의 세조는 엄청난 아우라를 뿜어내는데 6회에서 김종서를 생각하며 가만히 "이 손으로 죽여 드리리다."라고 말할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 역대 세조 캐릭터 중 가장 미화가 덜하고 실제 세조와 가장 가까운 인물로 평한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넘치며 정적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것. 특히나 정적이나 친족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역대 사극들의 세조와 가장 다른 점이다.

심지어 딸이 김종서의 아들을 좋아한다는 것마저도 이용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한편 엔딩에서 딸 세령이가 자결한 줄 알고 크게 상심하는 모습과 수 년이 흐른 뒤 그 세령이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은은한 미소를 날리는 모습에서 인간미 또한 넘쳐난다.

대왕 세종에서는 아역은 최민호, 성인은 서준영이 연기하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진양대군으로 나온다. 성인으로 첫 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최대의 정적이 되는 김종서와 나란히 나오는 장면. 세종을 도우면서 문자 창제에도 참여하지만, 시체 해부까지 하려는 일에는 반감을 가지고, 반정을 권하는 최만리의 충동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마지막회에서 세종이 모든 걸 알고도 "한 때 그런 마음을 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하진 마라."라고 다독이자 결국 뜻을 접고 수양대군이란 군호를 받는다.

인수대비(드라마)에서는 김영호가 연기를 펼쳤으나 앞서 김영철의 연기가 너무 후덜덜했을 뿐더러, 인상이나 성품이 순하게 나와서 야인시대 이정재 시절 만큼의 위엄이 나오지 않았다. 비중이 정희왕후(김미숙 분)나 인수대비(채시라 분)에 밀린 것도 한몫했다.# 결국 스스로 저지른 업보 탓인지 문종, 단종에 대한 악몽에 떨다가 절규하며 퇴장. 왕과 나김병세도 비교적 선이 가늘게 나온 세조로 꼽힌다.

북한에서 남한의 장비를 빌려 합작제작한 사육신에서는 최봉식이란 배우가 수양대군 역을 맡았다.

2013년 9월 개봉영화 관상에서는 이정재가 수양대군 역할을 맡았다.[28]

이정재는 이 작품에서 수양대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제로 치밀하게 관찰한것처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수양대군의 성격과 강한 권력에 대한 집착을 확실하게 소화해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김내경의 아들을 활로 저격해 죽이고나서 "저 자는 자기 아들 놈이 저렇게 절명할 것을 알고나 있었으려나? 난 몰랐네만..." 이라는 말 한마디로 뻔뻔하면서도 냉혹의 최절정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어, 얼마나 확실하게 수양대군 역을 소화해냈는지 보여준 절묘한 대목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함께 출연한 배우 김혜수가 관상의 시나리오를 읽고 수양대군 역이 탐났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그러면서 수양이 실존인물이 아니었더라면 수양을 남장여자로 설정해 달라고 감독에게 조르고 싶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만큼 악역이지만 영화 속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으로 뽑혔다는 의미.

영화 제목처럼 관상이 주 소재인 영화다보니 수양의 관상도 표현하는데 수양의 상은 이리의 상. 물론 여기서도 보고 있노라면 왕이고 뭐고 간에 천하의 개쌍놈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 이정재의 연기와 맞물려 호쾌하면서도 간악하고 잔인한 세조의 면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수양대군의 첫 등장씬인 사냥을 마치고 걸어들어오는 장면은 BGM과 맞물려 엄청난 포스를 뿜어낸다...

8 안습한 일

사육신이 남긴 시조들 때문에 국어 관련해서는 늘 세조로 불리지 못하고 수양대군이라 불린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하는 시조 때문에 더더욱 세조라고 못 불린다. 물론 그렇게 불리게 된 이유를 생각하면 사실 안습하다곤 할 수 없지만.

9 기타 관련 문서

  1. 별도로 전주이씨 덕원군파에서 그린 세조 어진이 있지만 상상도라 별 가치가 없다. 해인사 어진은 아래 어진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둥그런 얼굴형, 숱이 적은 수염 등이 왕실 공식 어진과 비슷하여 상상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2. 출처.
  3. 실록에 매년 탄일하례 기록을 보면 9월 24일로 되어 있다.
  4. 경남 진주(晉州)에서 따왔다
  5. 전남 함평에서 따왔다
  6. 역시 경남 진주에서 따왔다
  7. 황해도 해주의 옛지명이 수양부(首陽府)이다
  8. 후계자들이 죄다 어렸기 때문에 제2의 단종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 외척을 경계한 태종에게는 "형제와 자식들"이라는 대안이 있었는데, 세조는 사실 그 모든 대안을 박살내고 진행했기 때문에 정난의 공신들과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한명회한확을 외척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런 이유다.
  9. 식이요법으로 여러가지 질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개나 호랑이에게 물렸을때의 식이요법도 있다.
  10.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3409/4
  11. 영화감독 이해영은 이 사실에 대해 '군대를 연이어 두 번 다녀온 셈'이라고 표현했다.
  12. 그 후폭풍으로, 이징옥의 발악적인 반란도 겪었다. 이 사건이 이징옥의 난이다.
  13. 사실 성문법 편찬은 자칫하면 왕권을 제약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후대의 왕들은 종종 신하들한테 "대전에 나와 있으니 명을 거두어주소서"라는 태클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성문법 편찬을 주도했다는 것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세조 역시 유학에 기반한 시스템 구축이 국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14. 이 과정에서 명나라 측의 화해 주선도 거의 묵살하다시피하는 패기를 보였다. 앞뒤 안따지는 세조의 강한 성격이 조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드문 예시.
  15. 그것도 두번이나 보냈다!
  1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내시만 죽이고 끝났다고 나와있는데, 세조실록에 보면 "덕중(德中)을 내치어 밖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최호와 김중호(편지를 배달한 환관들)를 때려죽이고 나인(소용 박씨)도 또한 율(律)로 처단하였다."라고 분명히 나온다.(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9월 5일(기유) 2번째기사)
  17. 다만 이른바 4대"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때문에 생겨났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18. 패륜이란 면에선 차라리 연산군이 더 나은편이다.
  19. 사실 인조는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비로워서 그런게 아니라 죽일 명분이 없어서지만...
  20. 한명회는 그래도 비인륜적인 짓은 안저질렀지만 홍윤성은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투덜댄 삼촌을 때려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라서 '살인마 정승'이라고 야사에 기록되었다.
  21. 그래서인지 이덕일이 노론벽파과 송시열 만큼 증오하는 인물이 바로 세조라는 것이다.
  22. 물론 이러한 실록을 칼을 든 채로 대놓고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세조 본인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흔드는 행위이므로 눈에 띄게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목에 칼 들이대면 장사없다는 사실만 명심해두자.
  23. 하지만 고려의 숙종이 처한 상황을 오면 오히려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에 더 비슷해보인다.
  24. 연나라 적이 제위를 찬탈했다는 뜻이다. 성삼문은 그나마 나으리라 하여 군주로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방효유는 아예 역적취급을 했다. 죽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 영락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도 숙청 범위를 갖고 까지, 방효유를 죽인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다면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 그런데 조비의 묘호는 두 개이다. 고조세조. 진수삼국지는 고조로, 사마광자치통감은 세조라는 묘호로 기록되어 있다.
  26. 세종 - 문종 - 단종 라인은 왕위계승서열 순도 100%를 자랑한다. 나이가 어렸으며 어린 왕을 지켜줄 세력이나 왕실 웃어른이 없었던 것이 화근이었을 뿐이다.
  27. 이덕화의 아버지.
  28. 재밌게도 이정재 본인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22대손으로, 어쩌고 보면 먼 항렬의 조상님을 연기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