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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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한복(삼국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중국(한족)의 전통 복식에 대해서는 한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북한의 리팔찬 화백이 그린 조선시대 아동복. 여자아이는 조바위를 쓰고 당혜를 신었다. 남자아이는 복건을 쓰고 전복을 입었다.
현대감각으로 디자인된 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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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한복. 치마 위에 긴 저고리(장유)를 입고 허리띠를 둘렀다.도식화
타국어 표기
한자韓服(정체) / 韩服(간체)
영어Hanbok
중국어韩服(hánfú)
일본어ハンボク
韓国服(かんこくふく)
朝鮮服(ちょうせんふく)
チマチョゴリ

1 개요

한민족전통의상.

2 구조

저고리, 허리띠, 고름, 바지, 모자류(건이나 갓 등), 귀고리 등이 기본 구성이다.

기본적으로 상유하고(上襦下袴)[1] 양식을 띠고 있다. 북방(알타이)계 호복을 근간으로 상의와 하의가 나누어져 있어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로 구성된 활동적인 복식이다.[2] 또한 아한대성 기후조건 탓에 몸을 감싸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한푸와 달리 치마 속에도 반드시 바지를 입는다.

원래 성별과 상관없이 귀고리까지 착용하는 것이 기본 착장이었다.[3] 고분 발굴을 통해 신라삼국시대 때부터 그랬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초기(임진왜란 이전)에도 성별 불문하고 귀를 뚫고 귀고리를 착용했다.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1월 6일 신해 4번째기사를 봐도 알 수 있는데, 사대부 자손들이 귀고리를 착용했으며, 금이나 은을 써도 법에 저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선조 5년(1572)에 젊은 남자에 한해 귀고리를 금지시킨다. 선조실록 6권, 선조 5년 9월 28일 신해 두 번째기사 조선 대에 들어 귀를 뚫는 귀고리가 아닌, 귓바퀴에 거는 귀걸이가 등장했다.[4] 선조실록 186권, 선조 38년 4월 19일 계해 두 번째기사에 '귀고리를 건 노파'가 언급되므로 여자까지 귀고리를 금지당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선조 30년(1597)에 남자의 귀 뚫은 자국을 보고 조선인인지 왜적인지 구분한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5년에 남자들의 귀고리를 금지시켰음에도 오랜 풍습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흰옷처럼 아니면 법으로 금지되기 전에 귀를 뚫었던 사람이거나.선조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4일 신유 여섯 번째기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복은 속바지건 겉바지건 간에 바지를 포함하고 있고, 여러 겹을 껴입어 풍성하다는 특징이 있다. 복식사에서 한민족만큼 끈질기게 동형성을 지킨 민족도 드물다고 한다. 다만 광복 이후는 제외.

3 역사

한복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구려의 벽화에서였다. 기본적인 형태는 상의와 끈, 하의, 그리고 모자에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에 매는 끈이 고름으로 간소화되었으며 두건이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되었다. 이후 만주족의 복식에 영향을 받은 마고자와 서양 복식에 영향을 받은 조끼가 추가되어 현대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들어 일상생활에도 입기 편하게 만든 형태이다.

여성용 저고리는 그림에서 보다시피 미친듯이 짧아지고, 심지어 조선 말기에는 젖가슴이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될 정도로 짧아졌다.[5][6] 치마는 반대로 무지막지하게 길어져서 가슴 바로 아래까지 치고 올라갔다.

평복은 고유의 형태를, 관복 및 공복은 중국의 복식을 받아들인 이분적 복식제도였으나 상류층도 일상에서는 고유의 한복을 입었다.

제주도(탐라국) 지역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으로 인해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이고 원시적인 복식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국(제주의 옛 명칭)이 있는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와 돼지를 기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제주 전통 모피·피혁류 복식 연구라는 논문에서는 '제주 중간 산간지역에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1900년대 출생 제주도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최근까지도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이전 등의 기록을 통해 남방계의 영향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한반도에서 북방계 복식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일본 복식과도 유사성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호복, 한푸의 영향을 받기 이전 한국의 원시 복식의 형태를 제주도 복식을 통해 추론하기도 한다.

3.1 시대별 변천사

  • 삼국시대에 입었던 고대 여성용 한복. 우리가 아는 보통의 한복보다 상의가 훨씬 길다. 사진의 한복의 출전은 가야 지방. 고구려는 평상시에도 전투복과 같이 활동성이 좋은 옷을 입어 전쟁(혹은 비상시)을 대비했다고도 한다. 신분이 높을수록 바지와 치마의 폭이 넓어진다. 이 시대의 치마는 세로로 여러 색을 넣거나 치마 전체에 주름을 잡기도 했다.

  • 양직공도 속 삼국의 사신. 왼쪽부터 순서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다.

  • 삼국시대(고구려 고분벽화) 한복 재현. 바로 아래에 있는 벽화 속 한복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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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고분 벽화 속 한복들. 당나라의 홍장분식(紅粧粉飾)[7]과 다른 연지 화장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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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시대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복식들의 도식화 출처는 천손의 시대 (#). 데포르메가 되긴 했지만, 현존하는 자료들 중에는 삼국시대 복식과 악세서리를 한눈에 보기에 가장 좋다. 의복은 저고리, 두루마기, 바지, 치마, 가늘거나 넓은 허리띠(조대, 대대)를 기조로 하며, 관모(절풍, 조우관, 조미관, 갓, 책 등) 신발(짚신, 갖신, 나막신) 등의 완전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녀노소 귀고리를 필수적으로 착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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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귀족 여성의 한복.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상의로 소매가 넓은 포를 입었고, 그 위에 반소매 끝에 장식선이 달린 반비를 입었다. 상의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긴 경우도 있다. 마무리로 목도리에 해당하는 표를 둘렀는데, 이 역시 보온보다는 장식성이 강하다. 또 가슴 아래에서 끈을 묶고 그 끝을 길게 아래로 늘어뜨렸다. 당의 문물을 들여온 후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저고리를 먼저 입고 치마를 저고리 위에 입는 방식이 유행했다. 귀족 여성과 달리 서민 여성은 고대 한복의 기본 복장인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고, 예복으로는 포를 착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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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주 LA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한복 패션쇼에 오른 삼국시대 한복

출처

  • 고려시대의 여성용 한복. 고대의 한복과 기본 형태는 비슷하다. 고려 여성들은 노란색 치마를 즐겨 입었으며 치마가 길고 풍성할수록 좋게 여겼다고 한다. 중국풍 의상일 경우 치마는 저고리 위에다 입으며(참조자료)[8][9] 가장 위에는 포를 둘렀다.(참조자료) 허리에는 금방울이나 향낭을 차 장식하기도 하였다. 머리에는 몽수라는 일종의 베일을 썼는데(#) 이 역시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저고리 길이가 점차 짧아짐에 따라 허리띠 대신 옷고름의 원형이 되는 여밈끈을 달기도 했다. 고려 복식은 불화 덕분에 이전 시대에 비해 복식 재현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다. 문화컨텐츠닷컴에서는 고려 복식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그래픽 재현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고려대의 복식은 고려 초는 삼국시대와 유사하며, 원 간섭기에는 상류층(관리나 귀족)은 원의 복식을 따르게 된다. 옷에 고름이 생기고 저고리와 치마를 연결하여 철릭이 만들어졌다. 고려 말의 복식은 조선 초기 복식을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기존 통일신라시대 말에 전통 한복은 평민의 옷이자 귀족의 일상복으로, 중국 복식은 공복이자 예복으로 쓰였다면, 고려는 여기에서 상류층 예복조차 시대에 따라 중국의 장복과 적의, 혹은 몽골 복식으로 나뉜다. 왕조차 일상에선 평민들과 같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포가 변형되었다는 백저포를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즐겨 입었다.

고려도경에는 상류층 부녀자들의 의복이 서민과 다를 바 없었으며, 어떤 사람에게 '왕이 올 때에야 비로소 왕족들이 비단 옷을 입는다'고 들었다 언급된다. 출처

  • 조선 후기의 여성용 한복. 임진왜란 이후부터 저고리 길이가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한복 이미지에 근접하게 되었고 옷고름이 부각되면서 노리개가 애용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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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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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창의

16세기 후에는 남자 바지의 형태가 지금의 사폭바지로 달라졌다. 이전에는 여자 속바지와 같은 형태였다. 위의 조선 이전 한복들을 봐도 사폭바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별 복식을 복원한 것을 보고 싶다면 이 링크를 참조하자

4 타국 전통복식과의 비교

일본기모노중국한푸와 만주의 치파오, 한국의 한복 중에 가장 만들기 어려운 것은 한복이다. 그중에서도 조선시대의 한복이 가장 어렵다. 일단 치파오는 서양복식에 가까운 형태, 한푸와 기모노는 재단을 하지 않고 옷감의 폭을 그대로 사용하여 봉제만을 하지만 한복은 안감과 겉감을 '창구멍' 이란 구멍을 통해 뒤집기 때문에 바느질이 어렵고 재단도 복잡하다.

하지만 입는 절차와 활동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복이 가장 간편하다. 특히 여성 복장의 경우 활동성은 한푸, 기모노와 차이가 크다. 또 한가지 큰 차이는 호복의 영향을 받기 전의 한푸와, 12~13세기부터 한복에서 분화된 기모노가 한 벌 통옷으로 되어있는 반면, 알타이계 호복이 기초가 된 한복은 상의와 하의가 나뉘어져 있으며 여성도 치마 안에 반드시 속바지를 착용한다 .

현대 들어서는 각종 사극 등에서 활발하게 복원과 재창작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삼국시대 한복의 경우 기모노, 한푸(정확히는 호복의 영항을 받은 한푸)와 상당히 많은 접점을 지니고 있다. 한복, 한푸, 기모노의 기본 형태는 일반인의 눈으로는 거의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슷하며, 백제, 가야 쪽 한복의 경우 기모노의 형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여담으로 기모노와 한복의 차이를 이야기할때 옷깃이 목을 감싸느냐 감싸지 않느냐로 구분하려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의미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 깃이 섶과 구분되도록 재단하는 형태가 유행하긴 했지만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은 깃의 형태에서 기모노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있다.

이는 2000년대 '쌍화차 코코아'라는 여초카페의 모 유저가 한복과 기모노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한 글(스크랩본 링크)에서도 언급되었는데, 옷깃이 목을 바싹 감싸고 동정이 있는 것이 조선시대 한복의 특징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기모노와 구분하긴 어렵다. 해당 글은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기모노를 낮잡아 보면서 한복을 띄우는 한편, 한국 만화의 한복 왜곡 사례로 동양 판타지하백의 신부를 들거나, 허리띠를 뒤에 묶는 방식은 일본이 유일하다거나[10], 쾌자를 도포라고 하는 등, 한복에 대해 극히 한정적이면서 편향된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졌지만, 당시에는 꽤 화제가 되었고 엽혹진, 오늘의 유머 등 각종 커뮤니티에 여러 차례 퍼지면서 한복의 특징에 대해 알리는데에 공헌하는 한편 '한복=조선시대 한복'이라는 선입견을 고착시키는데에도 일조했다. 심지어 2010년도인 현재에도 여기저기 스크랩되면서 한복과 기모노의 차이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절찬리에 알리는 중이다.

그 외의 내용에 대해 첨언을 하자면, 명나라 대의 고려양 한푸가 조선시대 한복의 원형이라 주장하는 무식한 국까들이 있는데, 이는 원나라 때에 고려의 풍속이 당시 갔던 환관, 공녀들의 영향으로 중국으로 대거 넘어가면서 한복과 유사해진 것이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복식은 옷 폭이 넓지 않고 통이 좁은데 반해 한복은 고대부터 꾸준히 속옷을 여러 겹으로 받쳐 입어 풍성한 모습을 보인다. 옷 자체도 한푸는 통옷에서 출발해 하의에 치마를 입었고, 한복은 설령 치마를 입더라도 바지를 필수적으로 입는다. 각국의 복식은 전체적인 실루엣 자체가 다르다. 이후 명나라에서는 고려양이 요사스럽다는 이유로 전면 금지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이를 부정하며 고려양 한푸는 오군(袄裙) 혹은 유군(襦裙)이라는 복식으로, 삼황오제 때부터 전국시대까지 입었던 복식이라 날조하고 있다고 한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한푸 문서에도 고려양 한푸가 오군(袄裙)이라 소개되어 있다. 유군은 원래 이렇게 생긴 옷으로, 짧은 윗옷에 긴 치마를 입는 복식을 뜻한다. 한복과는 전혀 다른 복식이다. 참조 참조

4.1 서양권의 인식

이렇게 아름다운 한복이라는 의상을 입게 되어서 매우 행복하다. 기모노는 알지만 한국 사람들이 한복을 입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이런 훌륭한 의상이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New York's Village Halloween Parade에 참가한 어느 외국인-

현대에 들어 한복이 한국적인 대표 문화 요소로 자리잡았다고는 하나, 아직 갈 길이 먼 듯 하다.

서구권에서는 y자 모양 옷깃의 동아시아 전통의상을 싸잡아서 기모노로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거의 동양의 전통의상이라는 뜻으로 고유명사화 했을 정도이다. 이에 의해 한복이 기모노(그들이 생각하기에 동양 의상을 총칭하는)의 하위개념이라고 아는 이들도 많다.[11] 2008년 캐나다의 모 잡지에서 셀린 디옹이 내한해서 한국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한복을 기모노로 표기했다(…) 다행히 국내의 모 블로거가 그에 대해 정정요청을 했지만, 아직 해외에서 한복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Google에 Korean Kimono라고 쳐보면 한이 나온다.

이미 패션 용어에서는 넓은 소매y자 옷깃, 허리띠 같은 부분을 통틀어 기모노 스타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만큼 서구에서도 기모노가 대중화돼서 그 이미지가 정형화되어 고대~근대를 아우르는 한복의 형태까지도 기모노로 인식하게 만들어 주객이 전도되는 안습한 상황이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 다른 예로, 미국 할로윈 축제 한국팀 참가 후기 포스팅에도 현재 서구권 일반인들의 한복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시궁창인지 적나라하게 나온다. 목가리개까지 상당히 적절하게 고증된 고구려 갑옷을 사무라이라고 하거나… 한복전문가 자문 아래 철저히 고증하여 사극에서 사용됐던 한복을 게이샤 의상으로 부르는 등.

외국 특히 문화가 다른 지역의 전통의상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12] 가장 인지도 있는 아시아 국가인 일본의 의상으로 부르는 것이겠지만, 올바른 명칭은 아니다. 어디 옷인지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던가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 한류로 인해 한국이 아시아권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해지고, 늘 생소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패션산업의 특성에 따라 패션디자이너들의 주목을 많이 받고 있고, 이에 따라 "한복 Hanbok"에 대한 인식 역시 높아지고 있다. 한복을 알리는데 가장 공헌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는 1993년 처음으로 파리 컬렉션을 시작한 이래 13년간이나 꾸준히 컬렉션을 해오며 서양 패션계에 한복을 알려왔다. 그녀의 컬렉션에 영감을 받은 프라다미우치아 프라다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방한시 그녀의 가게를 찾고 직접 한복을 입기도 했다.#

tumblr_inline_n1spiaymmg1s9sdxc.jpg 이영희의 작품

아르마니미우치아 프라다

2011SS 뉴욕컬렉션에서 카롤리나 헤레라는 컬렉션 전체를 한복 모티브로 선보였는데, 여성한복만 아니라 갓을 비롯하여 다양한 요소들에서 모티브를 따와 한복에 대한 많은 연구를 했음을 보여준다.

카롤리나 헤레라 2011SS 컬렉션

디올의 수석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 역시 2011SS 파리 컬렉션에서 한복 모티브의 드레스를 선보였다.

그리고 2015년 5월, 패션계의 제왕 칼 라거펠트가 이끄는 샤넬은 아시아에서는 세번째로[13] 한국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열어 한복의 강한 색감에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였다.

미국에는 김미희(Kim MeHee) 한복디자이너가 활약하고 있는데, 그레이 아나토미에 출연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며 유명한 한국계 캐나다인 배우 산드라 오가 여러 행사와 화보에서 착장하였고, 제시카 알바패리스 힐튼의 여동생 니키 힐튼 등은 내한할 때 김미희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었다.

물론, 이런 해외 디자이너들과의 콜라보레이션 등을 통한 새로운 디자인 시도들은 상당수가 오뜨꾸뛰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며, 서구권은 물론, 한국에서 입는 여타 브랜드들의 기성복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중국, 일본의 복식과 비교해보면 아직 많은 부분이 뒤쳐져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복의 고유의 패턴이나 실루엣이 패션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만큼 향후 인식의 변화와 한복의 새로운 재해석을 볼 수 있을 날이 올 것은 분명하다.

네덜란드의 축구 감독 딕 아드보카트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에도 한복을 입었는데 저고리와 마고자를 바꿔 입었다고 한다(...).

5 한복에 대한 인식

전통복식을 입으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변 인식과[14][15], 한복이라는 복식 자체를 일종의 성역으로 만드려는 인식도 존재하는지 다른 해외의 복식에는 유난히도 관대하면서 자국의 복식의 개량화에는 유난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16] 물론 대부분 나라에서 고유 의상(custom clothing)은 특별하게만 입고, 구별시켜 부르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전통 의상을 구분 없이 전부 뭉뚱그려 '한복'이라 부르는 용법부터 이분법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있으며 순우리말 표현 없이 그냥 한복이라고 부르는 점에 대한 비판도 있다.[17] 현대에는 디자이너들이 여러 형태로 어레인지하는 동시에 한복 고유의 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리고 신라호텔에서 이혜순 한복 디자이너가 한복을 입고 식당에 들어가려는 것을 두고 "한복은 위험한 옷(...)이다"라는 병맛 넘치는 개드립을 치며 식당 출입을 금지시켰으면서 정작 객실에 유카타를 비치해 놓아서 국민들의 엄청난 공분을 산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기본적으로 한복에 가지고 있는 인식 자체가 마냥 부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한국인들의 인식에서 한복은 특별한 순간에만 입는 웨딩드레스 같은 옷이지 일상복으로는 생각치 않는 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국 대중들이 알고 있는 한복의 모습은 상당히 조선시대 위주로 편향된 것으로,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시대를 불문하고 한복에는 매우 많은 변형이 존재한다. 하긴 애초에 모든 사람들이 한가지 옷만 입고 살았을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고려 이전의 고대 한복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하다보니 고대 한복을 표현한 그림이나 재현품을 보면 '기모노 아니냐'는 말이 꼭 나온다. 삼국시대를 다룬 사극에 등장하는 복식들도 고증이 제대로 된 경우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접하기 쉬운 조선의 한복만이 한복으로 인식되어 고대 한복에 대한 인식이 사실상 단절된 상태에서 일본의 기모노가 만화나 게임 등의 매체에서 적극적인 대외 홍보를 통해 기모노와 디자인적 접점이 큰 고대 한복까지 이미지 잠식이 일어나버린 것.[18] 대중들이 한복에 대해 편향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현상의 대표적인 예로 네이버에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웹툰 문아를 연재하고 있는 팬마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옷이 일본 옷같다"는 댓글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것에 분노하여 트위터에 '둥근 소매와 옷깃의 동정이 달린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라는 설명이 달린 고려 복식에 대한 간단한 도식화와 함께 "고중세 배경에 흔히 알고있는 한복이 나오면 그건 틀린 고증이다. 작품에 나오는 한복은 일본옷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복 연구가 주로 근대 위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과거의 복식 연구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19] 직물로 만든 옷은 삭아버리거나 색이 바래서 오래 못 가므로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 여담이지만 일본 기모노 또한 대외에 알려진 것은 매우 정형화 된 이미지이다. 사실 어느 나라인들 의상 전문가가 아닌 이상 한두가지 이미지로 기억하지만...[20]

5.1 현대의 한복

근래의 한복들의 경우 전통한복과 달리 입고 벗기에 편리하도록 재래식 한복의 옷고름 대신 단추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물론 재래식 한복에서 단추를 안 쓴 것은 아니지만,[21] 재래식 한복은 깊이 여며서 입은 상태에서 고름을 묶는 게 일반적이라 단추의 사용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현대 개량한복은 활동의 편리함을 강조하다 보니 쉽게 벗을 수 있도록 예전보다 여밈이 줄고 고름은 전통적인 디자인인 맺음단추나 그 외 적절한 단추로 대체하고, 추가로 장식성을 강조하기 위해 단추가 만나는 가슴부위에 화려한 자수를 놓은 천을 덮기도 한다. 왕의 곤룡포나 관리들의 관복 단령에 있는 흉배에서 모티브를 얻은 사각형의 화려한 금실자수판을 쓰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22] 이때 마과처럼 단추끈이 긴 것보다는 가사나 면제배갑의 단추처럼 단추끈을 짧게 하고, 단추끈과 옷의 연결부위에 자수 등으로 장식하는 게 일반적이다.


무복으로 입는 쾌자.(출처)복잡한 옷고름을 자수와 맺은단추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조선 순사의 모습. 1890년 5월 10일자 <런던뉴스>에 실린 삽화라고 한다.* 옷고름을 단추로 대체한 모습이 눈이 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후까지만 해도 시골만 가도 대다수 민중의 옷은 흰 한복이었고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도시에서도 [23] 갓과 도포를 입은 어르신들이 많았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골만 내려가면 양반가 어르신네들은 갓과 도포를 차려입고 계셨고 지금도 가끔 그런 분들이 계시다. 하지만 이젠 제사 때조차 도포를 잘 안 입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여대생들은 졸업식에서 한복을 입고 참석하는 경우도 많았다.

전국노래자랑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1980년대만 해도 방송 속에 여성들이 한복 차림으로 많이 나왔던 시절이 있다. 이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이 방송에서 제발 한복 좀 입고 나와달라고 하며 어쩌다가 한복 차림으로 나온다면 카메라가 더 일부러 그 사람을 방송한다고 할 정도...

원더풀 금요일에는 한복 전도사 남녀가 나왔다. 직업은 둘 다 회사원이라고.

우리나라의 한 젊은 여성이 한복을 입고 유럽일주를 해 화제가 되었다.# 이외에도 한복을 입고 세계일주를 한 남성도 있었다. [24]

중학교고등학교에서 한복을 입은 선생님들은 거의 한문 아니면 국사 선생님이다. 아니다 가끔 국어 선생님이나 일반사회 선생님들도 입으신다 다만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 미술 선생님도 계신다 아니다 영어선생님이 입으시는 것도 봤다 아니다 기술선생님도 입으시는것을 보았다 다 입으시네 또한 전교조 소속 교사들도 한복을 많이 입는다. 대학에서 한복을 입은 교수님들은 거의 국어국문학과, 사학과, 한문학과 교수님이다. 그리고 뭔가 또라이 스타일이다
대학의 국악과에서는 실기 시험을 한복 차림으로 치르는 경우가 있으며 모든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시험을 치르게 하는 곳도 있다. 대개는 학교에 비치된 한복을 입고 실기 시험을 치르지만, 만약 개인 한복이 있을 경우에는 개인 한복을 입고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명절이거나 특별히 민족정신을 고취해야 할 이유가 없는 한 한국인들은 입지 않는다. 다만,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의 경우 생일잔치에서 한복을 입기도 한다. [25] 과거 개량한복이 일부 유행하긴 했지만 요즘은 그닥.[26] 다른 많은 한국의 문화 요소가 그렇듯 실생활에 자리잡고 있는 역동적인 문화라기보다는 그저 대외에 한국을 드러낼 때만 쓰이는 일종의 상징적인 박제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옆나라 일본이 기모노를 하나의 패션으로 재해석해서 상품화한다거나, 유카타를 젊은이들의 새로운 트렌드로 만든 것을 볼 때 지금 한국의 현실은 굉장히 안타까운 이야기이며, 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전통복식을 섹시하게 개량하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이미 널리 행해지고 있다. 만주족의 창파오의 바지를 없애서(말 그대로 하의실종 패션이다) 옆의 트인 부분을 통해 드러나는 맨다리에 포인트를 주는 중국의 차이나 드레스나, 길이를 극단적으로 줄여서 미니스커트로 만드는 일본의 유카타 등등... 솔직히 한복만 그렇게 만들지 말란 법이 없다. 실제로 한복 패션쇼에서는 그런 시도가 이뤄지고 있으며, 한복을 다룬 보그지에서도 그런 스타일을 보여준 바 있다. (관련 포스팅)

그래도 드라마 《》을 계기로 퓨전한복 열풍이 시작되고 이후 걸그룹들이 명절이면 무대에 퓨전한복을 입고 나온다거나,# 많은 디자이너들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일상에서도 어색하지 않게 충분히 입을 수 있는 한복들을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등 지금도 꾸준히 현대적인 재해석과 어레인지가 시도되고 있으며, 민족사관고를 비롯한 일부 학교에서 개량한 한복을 교복으로 채택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특히 2000년도 들어 나오는 생활한복들은 1980~1990년대의 칙칙한 개량한복들과 달리 많이 세련된 편. 거기다 한복 자체에 대한 젊은 층의 인식도 상당히 양호해져서 일본의 젊은 층이 기모노를 입는 수준으로 퍼진 것은 아니지만 명동이나 홍대를 위시한 서울 번화가에서 한복을 입은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설날이나 추석 연휴에 이걸 입고 롯데월드 등의 놀이공원에 가면 자유이용권 가격이 할인된다!

2015년 현재 한복을 배울 수 있는 교육과정이 있는곳은 배화여자대학교 전통의상과, 원광디지털대학교 한국복식과학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등이 있다. 추가바람.

2010년대에 들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젊은세대들의 한복사랑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특히 한복입기 좋은날, 한복 세상을 꿈꾸다 라는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한복을 즐겨입는 젊은세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2015년 8월 9일 시사매거진2580 '나는 '덕후'입니다' 편에서도 등장하는데 한복놀이단 단장인 권미루씨와 운영위원들은 디자인을 현대화시켜 소매가 시스루인 한복과 도드무늬/꽃무늬 한복 등을 입고 등장했다. 한 외국인은 한복 스타일과 무늬 신발의 매칭이 상당히 보기 좋다고 칭찬했다. 그 외에도 지나가는 모습으로 티셔츠같은 느낌의 한복이 등장했는데 금색으로 무늬를 넣은 저고리이지만 부담스럽기보다 고급스럽고 예쁘다. 참조할만한 기사, ## 예복용 한복의 틀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하여 기성복으로 쓰기에도 충분히 손색없는 여러 디자인의 한복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적인 어레인지를 통해 일상에서도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웨이유차이킴[27]리슬 등을 들 수 있다. 가격은 예식용 정장 한복에 비해 저렴하긴 해도 백화점 브랜드 기성복 수준으로 만만치 않은 편.

물론, 이런 긍정적인 변화는 여성용 한복에 국한된 부분이 크다. '왜 한복은 사랑받지 못할까? '라는 통계청 기사에서 나온 한복을 선호하지 읺는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 현대 남성용 한복은 매우 촌스럽다. 예식용도 잘 해봐야 알록달록한 저고리와 조끼, 마고자 정도이고, 생활한복은 나이 지긋하신 국사선생님이나 스님이 입을 법한 전형적인 형태를 지닌 칙칙한 개량한복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참조: 네이버 쇼핑에 '남성 생활한복'을 검색해 본 결과)[28] 각종 드라마나 만화 등에서 도포쾌자, 철릭을 휘날리는 모습 등, 남성 한복이 사실상 모에 요소로 취급되는 것과는 정 반대인 상황. 물론, 예시로 든 외투까지 가게 되면 가격이 만만치 않게 되겠지만 여성용도 상황은 별반 다를 바 없고, 굳이 도포 같은 것을 고집하지 않아도 여성용 한복은 계속해서 현대적으로 재 창조되는 데에 반해 남성용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상기한 브랜드 리슬에서 저고리를 응용한 셔츠나 도포를 응용한 코트 등 남성용 한복 디자인도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디자이너 한 두 명이 제작하는 것으로는 여성용 한복과 같은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또한 현대에 들어 만들어지고 입는 대부분의 한복들이 기껏해야 구한말 스타일이고, 잘 해봐야 조선시대 스타일이라는 것도 지적할만한 사항. 물론, 가장 최근의 복식을 재현하기가 수월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점도 있으며, 중국의 한푸 입기 운동처럼 조선 한복을 배제하고 "우리도 고구려 한복을 입자!"는 식의 주장까지 갈 필요는 없고 그런 아집도 위험하지만, 한복의 정의를 굳이 축소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한복이라는 복식 자체가 조선시대 한복에 한정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짙고, 기술자들이나 디자이너들 역시 조선시대 한복을 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고려 이전의 한복은 사극이나 행사 재현용으로나 만들어질 뿐이고 그조차도 당시의 형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 이 문제는 한복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중들이 고대 복식을 왜색으로 치부하는 부끄러운 현상에는 이런 편향성도 한 몫 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

6 대량생산의 어려움

전통 한복은 옷본이 입체패턴인 양장과 다른데다 재단이 복잡하며,[29][30] 만드는 방식이 손이 많이 가고[31] 만드는 법 자체가 어렵다. 의외일지 모르나 반드시 치수에 맞게 만들어야 제대로 태가 나는 옷이기까지 한지라 여러모로 대량생산이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를 통해 양산되는 한복은 백이면 백 양장식이다. 얼마든지 대량생산 할 수 있는 양장 옷본을 바탕으로 한복처럼 보이게 디자인해서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한복을 입으려면 사람이 직접 만들 수밖에 없다.남자 저고리 옷본 그리기 여자 저고리 옷본 그리기 치마 옷본 그리기 여자 저고리 옷본 그리기(다른 링크)

7 신체 노출

흔히 한복 하면 모에화 등, 매체의 창작물에 도입하기 부적절한 옷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치파오, 아오자이 같은 경우는 몸의 태를 드러내고, 기모노는 선이 딱 떨어져서 한복보다는 상대적으로 그리기 수월한 편이지만, 한복은 몸의 태를 전혀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한복의 의상 패턴을 파악하지 않으면 특유의 선을 살릴 수 없다는 주장이 있으며,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복장이라 천을 줄이지 않으면 섹시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크나큰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건 한복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위에서 언급한 '몸의 태를 드러내지 않는 형태'는 수많은 이들이 한복 고유의 특징으로 인식하고, 한복은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현재 알고 있는 포대자루같이 펑퍼짐한 치마저고리의 실루엣은 기껏해야 구한말에 정립된 형태이며, 한민족은 여태껏 옷을 입은 이래 삼국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까지 한복은 남녀를 불문하고 허리 선이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 특히 조선시대 한복은 흔한 인식과는 정 반대로 조선 초부터 시대가 흘러갈수록 점차 몸매를 드러내는 형태로 바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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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저고리의 변천사

위 자료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상의 저고리가 점점 타이트해지며 짧아지더니 가슴 윗부분까지 올라가 버려서 가슴가리개라는 것을 허리에 두르지 않으면 가슴 아래 선이 전부 노출돼 버렸다. 패션쇼에서는 이를 노리고 아예 모델의 가슴 아래의 둥근 선이 완전히 노출되게 디자인된 무지 야한 한복도 있었다(…) 사실 가슴가리개를 해도 저고리가 극단적으로 짧은 경우 겨드랑이가 노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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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풍속화 연소답청에 표현된 가슴가리개. 허리에 넓은 천을 두르고 띠로 고정시킨 것이다. 초기의 브래지어처럼 가슴을 가리고 조이는 역할을 하는, 상의의 맨 아래에 착장하는 속옷이다. 저고리가 너무 짧아져 이 속옷이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자[32] 여기에 색색의 자수를 장식해 놓아서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가슴가리개는 가슴부터 허리까지 꽁꽁 가리고 조이는, 맨 아래에 착장한 한복 속옷이다. 현대에 들어 만들어지고 있는 퓨전 한복이나 한복 드레스에서 오픈숄더처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부분은 치마의 말기 부분이다. 한 무식한 사람은 이를 기모노의 오비(허리띠)라며 까는 개드립을 날리기도. 이뭐병..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한복은 구한말에 유행하던 스타일인데, 가슴가리개를 생략하고 허리에서 여며지던 치마를 길게 만들어 가슴 위 겨드랑이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는 구한말의 여성해방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가슴가리개와 말기치마는 일단 조인다. 기능만 보자면 가슴조이개에 더 가깝다. 코르셋이 허리를 조인다면, 이건 가슴에서 허리까지 꽉꽉 다 조인다. 애들도 얄짤없어서, 이제 겨우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는 10대 초반 소녀의 가슴을 바싹 조여놓으니 지금 생각하면 성장에도 방해가 되었을 듯. 그래서인지 현대에 들어 가슴가리개&치마말기를 유지하고 있는 퓨전한복은 가슴둘레에 맟춰 제작함으로써 가슴부분을 조이지 않는 형태로 나오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는 저고리가 남성의 것처럼 길고 한복 치마는 허리에 둘렀다. 인체구조상, 치마가 허리부터면 대강 둘레만 맞으면 적어도 밑으로 내려가진 않는다. 그런데 저고리가 짧아지고 가슴가리개와 말기치마가 생기니, 이젠 죄지 않으면 그대로 치마가 밑으로 훌러덩(…) 그러니 목숨 걸고 조여야 한다.

구한말부터 유행한 치마는 치마에 어깨끈이란 안전장치를 달아, 짧은 저고리는 유지하면서도 여자들이 마음놓고 좀 뛰어도 괜찮게 한 거다. 조끼허리 혹은 어깨허리 [33]라 하여, 점퍼스커트처럼 어깨에 걸쳐서 입어 여민다. 이 형태는 개화기 때 이화학당미국인 여교장 J.월터가 위의 가슴조이개(…)가 청소년기 소녀들의 건강상 좋지 못하다 하여 보급한 것이다.

저고리를 다시 늘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한복 치마 형태에서 활동성을 극대화하려면 이렇게 가슴가리개를 생략하고 어깨끈을 달며, 통치마로 만들어 여밀 필요가 없게 하고, 치마 길이는 땅에 쓸리지 않게 짤막히 하는 게 최고다. 즉 현재 북한의 한복 치마 형태나, 유관순이 입은 한복 치마를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이화학당 등 구한말 여학교들 중심으로 활동성 높은 통치마 입기를 권장했고, 이렇게 몸매를 드러내는 가슴가리개 한복에서 몸매를 드러내는 펑펑한 한복 형태로 바뀌는 과정 중 기존 어른들의 반응은 당연히 '쯧쯧, 요즘 애들은 발랑 까져서…'

묘하게도 현대에 들어서 만들어지고 있는(더욱이 일반 대중들에게 인식되는) 한복은 대다수가 이렇게 상하의 구분선을 생략하고 치마가 겨드랑이까지 올라가는 형태이다. 물론 이런 디자인도 충분히 매력이 있으며, 한복의 절제되면서도 가리는 멋과 치마의 풍성한 선을 높이 사기도 하지만 일부 젊은 한복 디자이너들은 이 디자인을 '포대자루같다'면서 경계하며 대차게 까기도 한다. 흠좀무

그래도 이러한 긴 치마[34]를 응용한 한복 원피스나 한복 드레스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최근 2010년대 들어 만들어지고 있는 생활한복이나 개량한복의 치마가 허리에서 여며지도록 짧아지고, 저고리 길이도 점차 길어지는 추세이니 구한말의 이러한 디자인 변화를 마냥 비난하기보다는 현대의 한복 디자인에 다양성을 부가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8 한복의 구성

8.1 일상복

기본적인 한복의 형태는 상유하고上襦下袴이다.

  • 저고리 - 한자로 유襦라고 한다. 삼衫이라 하는 것은 홑저고리다. 엉덩이를 덮는 길이부터 무릎 아래로 긴 것까지 다양했으나 조선 시대가 되면서 선이 동정이 되고, 허리띠가 고름으로 옮겨가면서 길이가 짧아졌다. 좌임, 우임, 합임 모두 상관 없었다. 그저 자기 편한대로 여미면 그만이었다. 여자는 속옷을 많이 껴입는 반면 남자는 겉옷을 많이 껴입었기 때문에 남자 저고리는 속옷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원래 속적삼-속저고리-저고리를 한데 묶어 세는 단위로 '작'이 있다. '저고리 한 작'이라고 한다. 속적삼과 속저고리, 저고리를 항상 같이 입었기 때문. 현대에는 삼작저고리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다.
  • 덧저고리 - 저고리 위에 겹쳐 입는 저고리.
  • 적삼 - 단삼(單衫)이라고도 하며 저고리하고 모양은 비슷하나 겹으로 제작하는 일반적인 저고리하고는 다르게 홑으로 만들며 여름에 저고리 대용이나 속옷으로 쓴다. 속옷일 경우 속적삼이라 하며, 고름이 아닌 매듭단추로 여민다.
  • 치마 - 한자로 상裳과 군裙으로 구분한다. 상은 풍성하고 길이가 길어 화려하였으며, 군은 상에 비해 풍성하지 않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지 않아 일상용에 적합하여 서민들이 많이 입었다. 치맛허리 부분을 말기라 하며, 원래는 허리에 둘러서 입는게 정석이다. 주름이 자잘하든 큼지막하든 그것 역시 상관 없다. 고대 한복을 보면 전체적으로 주름이 잡힌 치마도 있다.
  • 바지 - 한자로 고袴라고 한다. 폭이 넓은 관고와 좁은 세고를 비롯해 여러 종류가 있었다. 대님이 필수 요소도 아니었다. 오늘날 한복 바지 하면 떠오르는 패턴은 조선 중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이전의 바지하고는 세부적인 모양이 다르다. 임진왜란 전에는 전통적인 여자 속바지류와 같은 형태였으나, 옷감이 너무 많이 소비되며[35] 바지통이 너무 넓다는 이유로 지금의 사폭바지로 변했다. 즉, 16세기 이전을 배경으로 하는 창작물에 현대에 흔히 아는 남자 한복 바지(사폭바지)가 나오는 것은 고증 오류다. 전통 여자 속바지류와 유사해야 한다.
  • 행전 -넓은 바짓자락을 묶는 것. 무릎 정도에서 발목까지 오거나 그보다 짧은 길이이다.
  • 대님
  • 토시
  • 완대 -활을 쏠 때 거추장스러운 도포자락을 고정시키는 장구. 우리말로는 팔찌라고 하나, 현대에는 장신구인 그 팔찌와 혼동될 가능성이 높다. '활팔찌'라고도 했다. 사극에서 넓은 소맷부리를 모아 묶는 그것. 습(拾)과 구(構)로 나뉘는데, 습(拾)은 부드러운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고급스러운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았고, 고리 부분은 상아나 대모같은 고급스러운 재료를 사용하여 줄을 엇십자로 잡아매어 거추장스럽거나 활을 쏠 때 시위가 줌손의 팔목을 치지 않게 했다. 구(構)는 가죽이나 천 혹은 광다회처럼 만드는데, 폭과 길이는 팔목에 세 번 정도 두를 수 있어야 하며 끼우는 부분은 대모 등의 단단한 재질로 만들었다. 사극에 나오는 것은 습을 변형시킨 것이라 보면 된다. 구 형태의 완대 습 형태의 완대
  • 버선 - 솜버선의 경우 닳아서 터질 것을 대비해 속버선과 겉버선 두 겹을 신었다.
  • 타래버선
  • 야장의(夜長衣) - 궁중에서 잠옷을 일컫는 말. 이름대로 밤에 입는 긴 옷이다.
  • 침의(寢衣) - 겉감을 홍황색으로 하고 흰 모시로 안감을 댄 옷으로, 안감이 겉감보다 크고 네 변두리가 각각 1척이 넘는다고 고려도경 29권에 언급되어 있다. 번역본
  • 등거리 적삼 : 서민층에서 입은 소매가 짧은 상의. 소매가 짧고 진동밑 옆선을 터 활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솜을 두어 방한복으로 입기도 했으며, 적삼 밑에 받쳐입기도 했다. 농민들은 노동복으로 많이 입었다.
  • 등거리 : 등나무의 가는 가지를 엮어 조끼 형태로 만들어 성글게 엮어 조끼형으로 만든 것. 상류층에서 여름에 적삼 밑에 받쳐입었다.
  • 잠방이 :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게 만든 짧은 홑고의.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며, 여름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많이 입었다. 속고의 밑에 받쳐입거나 농민들의 노동복이었다.
  • 목도리 : 한자어로 표(裱)라고 한다. 도입될 당시(삼국시대)에는 방한보다는 멋내기용에 가까웠다.

허리띠

  • 허리띠 - 한자로 대帶. 대구帶鉤(띠고리, 교구. 일종의 버클)가 달린 것도 있었다. 교구는 버클과 마찬가지로 허리띠를 잇는 역할을 하는데, 종류에 따라 화려한 교구와 밋밋한 교구가 같이 있는 허리띠도 있다. 이 경우는 화려한 교구를 앞에 둔다. 신분에 따라 옷감과 색이 정해지기도 하였으며, 폭이 넓거나 금속으로 만들고 화려한 장식을 드리운 장식성 허리띠가 있는가 하면 폭이 좁아 가느다란 허리띠도 있었고, 실을 엮어서 만든 사대絲帶(실띠)도 있었다. 고분벽화를 보면 묶는 위치가 앞이든 옆이든 뒤든, 어떻게 묶든 그런 건 상관 없었다. 당연하지만 고름이 생기기 전에는 상의 속옷을 허리띠로 여몄다. 행여나 허리띠로 속옷을 여미는 것을 보고 왜색으로 치부하지는 말자.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도 한복이다.
  • 세조대 - 허리띠의 일종. 가느다란 끈에 술이 달려있다. 도포나 답호 위에 묶는다.
  • 광대 - 철릭이나 구군복 위에 착용한 폭 넓은 허리띠. 가느다란 고름이 달려있다.
  • 전대
  • 각대
  • 옥대
  • 서대
  • 조아
  • 전대(戰帶) - 전대띠라고도 한다. 철릭이나 구군복 위에 착용한다.
  • 대대 - 폭이 넓은 허리띠. 복식에 따라 묶는 법이 다른데, 쌍고름으로 묶기도 했다.[36]
  • 요대
  • 도포끈
  • 광다회
  • 동다회
  • 금제 허리띠 - 삼국시대에 상류층이 사용했던 금제 장식 허리띠.
  • 포백대
  • 과대
  • 금은과대
  • 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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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겉옷/외출복

민소매/반팔 계열


포袍 계열 : 고대 한복은 겉에 걸치는 소매가 있는 겉옷을 모조리 포袍라고 한다.

  •  : 고대 한복(조선 이전)의 겉옷. 흔히 두루마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의 두루마기와는 엄연히 다른 종류이다.
  • 심의(深衣)2
  • 도포  : 겨드랑이 부분에 길게 옆트임이 있고 길 아래에 무[37]를 덧대었다. 대창의와 달리 뒷중심선을 트지 않는다.
  • 백저포 : 고려 원 간섭기 이전에 유행한 겉옷으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많이 입었다. 고구려의 포가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링크
  • 두루마기 : 두루 막혀있다 하여 두루마기다. 흔히 생각하는 두루마기는 조선 후기에서 말기에 도포는 옷감이 많이 들어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파생된 것으로, 상당히 늦게 생긴 옷이다. 다만 트임이 없는 포를 두루마기라 총칭한다면 당연히 고대부터 시작된다.
  • 창의 : 도포와 두루마기의 중간적 성격을 띈다. 뒷중심선 혹은 겨드랑이가 트여있다.
    • 소창의 : 길이가 짧고 소매가 좁으며, 양 겨드랑이부터 길게 트여있어 옷이 세 자락으로 나뉜다. 크게 만들지 않아 활동성이 좋았다. 양반의 시중이나 하급 관리들이 주로 입어 이러한 이들을 ‘창옷짜리’라 비하하기도 했다. 양반들은 활을 쏘거나 말을 타는 등의 활동적인 일을 할 때에 입었다.
    • 중치막 : 명나라 중단이 유입되어 변형된 옷으로, 조복이나 겉옷에 받쳐 입었다.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 소매가 넓고 양 겨드랑이가 길게 트여있으나, 무는 없다. 소창의보다 컸다. 소매가 넓다는 점은 대창의와 비슷하지만 뒷중심선이 트여있지 않고 무가 없으며, 양 겨드랑이만 트여있어 옷이 세 자락이라는 점은 소창의와 같지만 소매가 넓고 옷이 더 컸다.
    • 대창의 : 길이가 길고 소매가 넓다. 양 겨드랑이와 뒷중심선이 트여있으며, 소창의나 중치막과 달리 뒷길 아래에 무가 있다. 관복 아래에 입거나 평민들의 외출복이었다.
    • 학창의 : 대창의의 깃, 도련, 수구 등에 검은 가선을 두른 옷.
  • 동달이 : 음차하여 동다리(同多里)라고도 한다. 융복의 겉옷 안에 입는 옷으로, 소매가 좁아 움직이기 편하다. 길과 소매의 색이 다른 직령포다. 겉고름은 겉길과 같은 색으로 하고 속고름은 홑일 때는 남색, 겹일 경우는 안길과 같은 색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주황색 길에 대홍색 소매를 달지만 마병(馬兵)은 소매의 색을 다르게 해서 소속이나 직무를 나타내기도 했다.
  • 반수포 : 이중깃에 겨드랑이선이 트여있는 포. 해인사 소장 반수포
  • 철릭
  • 요선철릭(要線帖裏) : 일반 철릭과 달리 허리에 요선(腰線)을 둘렀다. 깃은 몽골식으로 가운데 줄이 있고 여밈이 깊다. 속고름이 있다. 해인사 소장 요선철릭

여성들의 내외용 겉옷

  • 쓰개치마 : 조선 중기 이후 양반층 부녀자가 사용했다. 형태는 보통 치마와 같다. 치마허리는 얼굴 둘레를 감싸고 턱 아래에서 겹쳐잡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이다.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는데, 계절에 따라 겹으로 만들거나 솜을 넣었다. 머리에 쓴 뒤 치마허리로 얼굴을 감싸고 속에서 턱 아래를 여며 잡는다.
  • 장옷 : 여성들이 외출할 때 머리에 쓰는 옷. 두루마기 형태로 서민 층 여성들이 주로 입었다.
  • 머리처네 : 주로 시골 여자가 나들이를 할 때 머리에 쓰던 쓰개로, 두렁이와 비슷하지만 장옷보다는 짧고 소매가 없다.
  • 면사 : 면사포. 홑 혹은 겹으로 된 정사각형의 천으로, 한 변의 길이가 140~150cm 정도라 한다. 궁중에서도 사용하였으나 일반 궁녀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 말군(襪裙) : 여자가 말을 탈 때 입는 통이 넓은 바지. 세종실록에 말군 없이 말을 탔다가 기녀로 오해받아 봉변당한 양반집 부인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악학궤범에도 말군에 대한 내용과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 백제금동대향로에는 마치 망토같은 겉옷을 걸친 사람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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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관복

  • 구군복
  • 강사포
  • 제복(祭服)
  • 단령 - 관리가 주로 조복 이외에 평상시에 입었던 근무복. 직급마다 색이 달랐으며,[38] 어떤 관직이나 신분이냐에 따라서 가슴과 등에 붙이는 흉배에 수놓아져 있던 동물이 달랐다. 왕족은 기린, 문관은 , 무관은 백호를 수놓는데, 당상관(정 3품 이상)은 2마리가 그려져 있고, 당하관(그 이하)쪽은 1마리. 관복 착용 시에는 사모를 모자로 쓴다.
  • 철릭
  • 포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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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궁중복식/고급복/귀족복식

  • 청금복 - 성균관교복. 중국 시경의 '靑靑子衿 悠悠我心(청청자금 유유아심, 푸르고 푸른 임의 옷깃, 기나긴 것은 이내 마음이로다)'이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태종11년(1411년)에 처음 제정되었고, 성종 8년(1477년)에는 경국대전에 명시된다. 처음 태종 때에는 '청금난삼'이었으나 세종 때에는 '진사들이 모두 흑령을 입고 유건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 때에는 '청금단령'으로, 명종 때에는 '청색 옷에 검은 금을 단 유복'으로, 선조 때에는 벽색 옷으로(처음과 유사한 청금난삼으로 돌아갔다는 추측이 지배적이다) 바뀌었다. 임진왜란 이후 기강이 문란해져 유생들의 복식마저 개판이 되었고, 영조가 가벼운 일에는 '홍단령'을, 성균관의 공식 행사나 재례에는 '청단령'을, 더욱 중요한 일에는 '흑단령'을 입도록 했다.참조 참조 참조 청금복을 입는 것은 왕세자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 곤복
  • 조복 - 주로 왕실의 생일이나 경축일 외에도 정월 초하루와 동지 그리고 조칙 등을 반포할 때 입던 행사용 관복. 조선시대 관련 사극에서 가끔 보이기도. 금관이라는 모자와 세트로 착용하기 때문에 "금관조복"이라는 관용구로 흔히 불린다.
  • 곤룡포
  • 단삼 - 고려말에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비가 입었던 예복이자 일상복. 노의라고도 부르며 대왕세종에서 단삼을 잘 고증했다.
  • 적의 - 왕비의 예복. 상당히 복잡한 구조로서 조선시대 왕비옷을 검색해보면 감상할 수 있다.속옷을 대슘치마까지 모두 착장한 뒤 저고리, 남대스란치마, 당의, 전행웃치마, 중단, 적의를 입고 후수, 대대, 폐슬, 하피, 옥대, 패옥을 착용했다. 청석을 신고 손에 옥곡규를 들었다. 흔히 아는 심청색 적의순정효황후의 12등 적의출처는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중국의 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꿩무늬에 따라 12등 적의와 9등 적의로 나뉜다. 12등은 황후의 것이라 용을, 9등은 태자비의 것이므로 봉황을 수놓는다.관련 조선 왕비의 적의는 원적문 51개를 배치한 대홍색 치적의(대홍적의)사진☜출처사진다. 대비는 구성이 왕비와 같은 자적색 치적의를, 세자빈은 원적문 36개를 배치한 아청색(검은색이 도는 청색. 검은파랑.) 치적의를 입었다. 중전은 백옥규를, 세자빈과 세손빈은 청옥규를 들었다.재현한 인형을 볼 수 있는 곳 관련 관련 적의에 하는 대수머리사진☜출처는 원래 턱 밑에서 묶는 것이 아니다. 왕비의 치적의와 대수머리. 대수머리에 끈이 달린 것과 후궁의 자적원삼 색이 틀렸다는 것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 원삼 - 왕비, 후궁들, 공주, 옹주들이 입는 예복. 평민층은 일생에 한 번 혼례 때 입을 수 있었다. 왕비, 세자빈, 세손빈은 소례복으로, 부부인(대군의 부인) 이하 외명부궁녀 및 관료들의 처 등 후궁을 포함한 왕족 이하 신분은 대례복으로 입었다. 황후의 황원삼, 왕비의 홍원삼, 공주와 옹주, 세자빈, 세손빈, 궁녀, 반가 부녀자의 녹원삼, 비빈(후궁)[39]자적원삼 출처이 있다. 궁중 왕녀의 녹원삼과 그 이하 신분의 녹원삼은 당연히 차이가 있었다. 사극에서 자적원삼이 연보라색이나 일반 보라색으로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런 색이다. 대한제국 이후에는 호칭과 함께 예복도 격상하여 태자비가 홍원삼을 입게 된다. 상궁의 녹원삼
  • 대삼 - 명이 조선에 사여한 왕비의 대례복. 조선 초기 왕비와 세자빈의 대례복이었다.
  • 친잠례복
  • 장삼 - 길이가 길고 품과 소매가 넓은 상의. 여인의 예복이자 승려의 겉옷이다. 대왕세종에서 [(000043)13-03-41.jpg 잘 고증했다.]
  • 당의 - 평복을 모두 착장한 위에 입었다. 소례복이자 궁중의 일상복.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때 장저고리를 리폼한게 이것이다.
  • 활옷 - 결혼식 복장이기도 하다.
  • 고려도경 20권 귀부(貴婦)조에 고려 왕비와 귀부인들이 홍색을 숭상하여 그림을 수놓아 입었는데, 관리나 서민의 부인은 입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읽어보기
  • 폐슬 - 무릎가리개.
  • 운견 - 한자로는 雲肩.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본래 여인들이 방한용으로 목깃 근처에 망토처럼 두르던 것으로 서양옷의 숄과 유사한 용도의 옷이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이후 형성된 이래로 크게 유행하여 청나라 때는 민간에까지 퍼졌고, 한국에서는 발해시대 귀족 여성 조각상이나 고려시대 노국공주 초상화(그래픽 복원)에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쇠퇴하여 중국에서 보내는 의례복 관련 기록이나 불교미술품인 동자상에서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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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한국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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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속옷

여성용 속옷.

[40]

남자는 속고의와 속적삼이 전부라 여자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간소한데, 대신 겉옷을 많이 껴입으니 피장파장.

  • 가슴가리개 - 가슴부터 허리 부분을 가리고 조이는 여성 속옷. 한자로는 대자帶子라고 한다. 기능은 초기의 브래지어와 유사하다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저고리가 짧아지자 탄생한 상의 속옷. 원래 치마를 비롯한 하의류는 허리에 입는데, 저고리가 짧아지자 이로 인한 노출을 방지하고 가슴선을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저고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지면서 팔을 들면 아예 겨드랑이가 노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생들은 여기에 자수를 놓는 등의 장식을 하기도 했다. 정숙한 반가의 여인들은 당연히 이러한 것을 지양했다.조선 시대에는 가슴이 큰 여자를 영 좋지 않게 인식했기 때문에 왜?![41]가슴가리개로 꽉꽉 조였다. 한복은 가슴이 작아야 입었을 때 더 멋나기 때문에 현대에도 가슴이 큰 여자들이 한복을 입을 때 가슴을 조이기 위해 입는 경우가 있다. 치맛말기와 자주 혼동되는데, 치맛말기는 치마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치맛허리 부분을 말한다. 치마는 원래 허리에 둘렀다. 그러니 말기는 당연히 허리에 위치하며, 폭 역시 가슴가리개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좁다. 가슴가리개는 실제로 보면 가슴뿐 아니라 배허리까지 가릴 정도로 넓다.[42]출처 영친왕비의 가슴가리개 현대에는 가슴둘레를 감안하여 조이지 않게 만들거나, 두를 때 안조이게 입는 경우가 많다. 가슴가리개는 영친왕비 유물만 봐도 길이 110cm, 너비 30cm에 이를 정도로 길고 넓다.
  • 적삼 - 속적삼이라고도 한다. 매듭단추로 여민다. 남자와 여자 공통적으로 입는 상의 속옷이다. 모시 속적삼(여자)
  • 속저고리 - 저고리보다 약간 작고 짧게 만들었다. 겉에 입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목판깃, 칼깃 등 옷깃이 다양했으며, 곁마기가 달려있다. 속저고리 조선 중기의 속저고리 설명
  • 다리속곳 - 가장 안쪽에 입는 여성 속옷. 속속곳이나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홑으로 된 긴 천에 띠를 달아 착용했다. 흰 무명이나 모시, 베 등을 사용해서 흡습성이 좋도록 만들었다. 생리대(개짐)고정용이라는 추측이 있다. 다리속곳이 생리대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말도 안되는 소리다. 생리는 이런 작고 앏은 천쪼가리로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생리할 때 팬티 한 장으로 버틸 수 있다면 애초에 생리대가 발명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리속곳은 개짐 위에 덧입는 식으로 착용했다는 것이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생리대팬티에 붙이잖아 설명 설명2 다리속곳 다리속곳
    • 개짐 - 상술했듯 다리속곳 안쪽에 덧입는 생리대로, 천기저귀와 비슷하게 광목천을 접어 사용했는데, 형태는 약간 달랐다. 개짐만 입는 것은 여러모로 어렵기 때문에 고정을 위해 다리속곳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개짐의 형태)
  • 속속곳 속속곳
  • 속바지 속바지
  • 단속곳 - 속속곳과 형태는 같지만 가랑이가 넓고 치마보다 짧다. 양반들처럼 너른바지와 무지기치마를 지어입을 여력이 안되는 평민들의 경우 이 위에 치마를 입었다. 단속곳
  • 고쟁이 - 여름용 여자용 속옷. 속바지를 입는 차례에 입었다. 고쟁이
  • 살창고쟁이 - 여름에 입었던 여자 속옷 중 하나로, 바지에 길게 창이 나있다. 뒤여밈 살창고쟁이
  • 너른바지 너른바지
  • 무지기치마 - 열두 폭의 모시를 각각 길이가 다르게 하여 한 허리에 달아 만든 속치마. 단 수에 따라 3합, 5합, 7합이 있었으며, 단은 홀수로 달았다. 젊은 여자들은 각 단을 색색깔로 염색하였지만 나이든 여자들은 단색으로 염색했다. 삼합무지기치마
  • 대슘치마 - 궁중에서 무지기치마 위에 착장하는 속치마였다. 일반적으로 치마를 풍성하게 지을 때 12폭으로 만드는데, 대슘치마는 속치마임에도 12폭~14폭을 사용하고 아랫단에 4cm 가량의 빳빳한 백비[43]나 창호지를 덧대어 만들었다.[44] 안에서 양반다리를 해도 모를 정도로 풍성하다고 한다. 빳빳한 아랫단은 치마가 자연스럽게 퍼지게 만든다. 대슘치마
  • 속고의 - 남자의 하의 속옷.
  • 마미군(馬尾裙) - 고려시대에 존재한 속치마로, 말총을 솜처럼 넣어 부풀렸다. 말총을 엮어서 넣었다는 설명도 있다. [45] [46] 치마를 더욱 부풀리기 위해 마미군을 두 겹 이상 껴입기도 했다. 고려양으로 인해 원나라로 건너가기도 했다. 물론 이후에 중국에서 고려양이 까이면서 마미군도 싸잡아 디스당한다.
  • 선군(旋裙) : 고려 시대의 속치마로, 치마폭을 넓게 하기 위해 착용했다. 길이가 다른 치마를 겹겹이 이은 것으로, 이것이 발전하여 무지기치마가 된다. 선군 위에 입는 겉치마는 8폭인데다 길이도 길어서 걸을 때 겨드랑이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의 상류층은 7~8필 가량의 옷감을 들여서 지어 입었다.
  • 내의(內衣) : 삼국시대의 속저고리.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에 흥덕왕 대의 복식금제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표의(表衣)’·‘단의(短衣)’·‘내의(內衣)’라는 명칭이 언급된다. 표의가 겉에 입는 겉옷인 포를, 단의는 저고리를 뜻한다고 해석되기 때문에 자연히 내의는 속저고리 종류를 의미하게 된다.
  • 내상(內裳) : 삼국시대의 속치마. 내의와 마친가지로 삼국사기 색복조 흥덕왕 대의 복식금제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표상(表裳)’이 겉치마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내상은 속치마가 된다.
  • 문릉관고(文綾寬袴) : 고려시대의 속바지. 생초(生綃)로 안을 받쳐서 넉넉하게 만든 것으로, 조선시대의 너른바지같은 역할을 한다.
  • 저의(紵衣) : 고려시대의 속옷. 속에 입는 홑옷인 중단(中單)이며, 목욕할 때에도 입었다. 가장자리에 선을 두르지 않고, 옷깃도 없다고 한다.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저의를 입었다고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속적삼과 비슷한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도경 29권에 언급된다. 번역본
  • 저상(紵裳) : 고려시대의 속옷. 저의와 함께 입는 치마로, 겉과 안이 여섯 폭, 한 가랑이는 세 폭이며, 말기는 없고 끈을 두 개 달아서 입었다. 저의와 마찬가지로 목욕할 때에 입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처럼 옷을 입고 목욕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목욕가운처럼 입은 것이다. 개천에서 옷 다 벗고 혼욕을 했을 정도로 개방적이었으며[47], 평범하게 옷을 벗고 씻었다. 고려도경 29권에 언급된다. 번역본
  • 등거리적삼 : 소매가 짧고 진동밑 옆선을 터놓은 적삼. 겨울에는 솜을 두어 방한복으로 입기도 했다. 적삼 밑에 속옷으로 입기도 했다.
  • 잠방이 : 길이가 짧은 홑고의. 속고의 밑에 입는 속옷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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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용 속옷의 경우 상의는 가슴가리개→속적삼→속저고리. 하의는 다리속곳→속속곳→속바지→단속곳→너른바지→무지기치마→대슘치마 순으로, 치마의 볼륨을 위해 바지형 속옷을 여러 벌 겹쳐 입은 것이 특징적이다.[48] 위는 기본적인 순서로, 속바지 대신 고쟁이를 입기도 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저렇게 껴입는 것은 여전하다. 하의 속옷은 밑이 뚫려있는 바지인 개당고와 막혀있는 바지인 합당고로 나뉜다. 우측의 다리속곳처럼 굉장히 앞서간 형태도 보인다(…)[49] 당연한 얘기지만 평민이나 천민들이 저 많은 속옷을 일일이 챙겨입기는 힘들었다. 속옷 역시 값비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평민층은 속바지나 단속곳까지, 양반들은 너른바지나 무지기치마까지 입었으며, 대슘치마는 위에 서술했듯 궁중에서만 입었다. 속바지들의 경우 형편에 따라 간혹 치마 아래로 보여지는 아랫단만 좋은 옷감으로 만들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바지와 저고리도 사실상 속옷 취급을 받는다. 남자 한복도 여자 못지않게 상당히 많이 껴입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고분벽화 속 한복의 모양새와 발달 과정상 삼국시대에도 속옷을 여러 겹으로 입었을 거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당연히 여러 겹으로 입었다. 한복 특유의 풍성한 모양새를 내려면 많이 껴입어야 한다.

조선시대 속바지류의 유물을 보면 간혹 어깨끈이 가운데에 하나만 덜렁 달린 것이 있는데,예시출처 전통적인 한복 속바지는 뒤가 완전히 트여 벌어지는 구조가 아닌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쪽이 맞다. 끈이 양쪽에 달리면 입다가 골반에 걸려 불편하게 된다. 만일 현대인들이 전통 속옷을 자주 입었다면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을 부분.

8.7 특수복

  • 사규삼 : 남자 어린이가 관례 전에 입던 평상복이다. 땋은 머리에 복건을 쓰고 사규삼을 입으며 조대를 띤다.


영친왕 이은이 입던 사규삼.*

  • 기녀복 : 기생만 입는 옷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다. 흔히 말하는 작고 좁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역시 한 시대의 유행이었을 뿐 기생만의 복식은 아니었다. 기생이란 일종의 트랜드세터이기도 했던지라 그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장신구, 화장은 곧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온갖 사소한 것까지 사치스럽다며 [50] 법으로 규정할 정도로 사치를 엄격하게 규제했던 조선에서[51] 몇 안되는 특별 예외대상이 바로 기생었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에 그대로 퍼지지는 못했다. 조선시대의 복식금제를 보면 기생에 대한 특별대우가 굉장히 파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옷의 재질이나 장신구 관련 규정은 종친양반조차 예외가 아님에도 기생[52]은 예외 대상이었다. 가체조차 자신의 재력에 따라 마음대로 올렸다고 하니….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입는 옷. 각 굿거리마다 중심이 되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입는 무복도 달라진다. 다만 충청도 무속의 법사의 경우 강신이나 선굿보다는 독경과 앉은굿, 설위설경(設位設經)[53]이 중시되어 특별히 정해진 무복은 발전하지 않았고, 보통 두루마기나 개량한복에 모자를 쓸 경우 갓이나 고깔을 쓴다.

재래식 해녀복을 말한다. 1970년대부터는 고무로 된 해녀복을 입는다. 엄밀하게는 물소중이만을 말하며, 넓게는 물소중이 위에 덧입는 물적삼, 머리를 감싸는 물수건, 헝겊모자인 까부리를 포함한다.

물옷의 이름들.* 자세한 사항은 해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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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복 : 이미지관련 장례시 유족이 입는 옷. 삼베는 흉복(凶服)의 소재로 쓰였기 때문에 상을 당한 죄인이라 하여 삼베로 지은 한복을 입었다.
  • 습의(襲衣) : 망자에게 입히는 평상복. 세상을 떠날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습의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 염의(殮衣) : 망자의 습의 위에 덮거나 감싸는 여러 벌의 옷. 임금이 하사한 옷이나 귀인이 선물한 옷,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염의로 삼았다. 선비는 심의를, 관리는 관복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원래 수의란 명칭과 이를 흉복인 삼베로 짓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전통 장례 예법과 전혀 맞지 않는다. 삼베옷은 죄인의 상징이기 때문에 망자를 죄인으로 만드는 셈이다.
  • 처네 : 어린애를 업을 때 두르는 끈이 달린 포대기[54]. 혹은 이불 밑에 덧덮는 작은 이불. 머리처네도 줄여서 처네라 불렀다.
  • 배냇저고리 : 깃과 섶을 달지 않은 아기 옷. 배내옷, 깃저고리라고도 한다. 희고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로 만드는데, 등에 솔기를 하지 않고 배와 손을 덮을 정도로 길게 만들었다.
  • 도롱이 : 이나 를 엮어 만든 비옷. 주로 농촌에서 사용했다. 안쪽은 엮고 겉은 줄거리를 드리웠다. 당연하지만 어느정도 재력이 받쳐주면 우산을 사용했다. 폭이 넓은 삿갓을 비를 막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용의 눈물에서 잘 고증되었다.

8.8 모자

8.8.1 관(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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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북방계 방한모에서 비롯된 관모. 고구려에서는 절풍으로 불렀으며 소골[55]도 변형모로 보는 것이 대세.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고깔모자. 한마디로 한국 관모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머리둘레에 맞춰 쓰기도 하고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을 정도로 작게 만들기도 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새의 깃털을 꽂았다.(조미관, 조우관) 변형모는 일본의 관모 에보시(烏帽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보통 식물의 섬유나 비단, 말총 등으로 만들지만, 현재는 금 또는 금동으로 만든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다.
  • 백라관 - 고구려의 왕이 쓰던 관모. 백라, 즉 희고 얇은 비단으로 만든 관이라는 것 외에 확정된 것이 없다. 백라관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안악 3호분의 정체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안악 3호분을 왕릉으로 보는 견해는 무덤 주인이 쓰고 있는, 내부에 책(幘)을 쓰고 흰 비단을 덮은 관모를 백라관으로 보며 근초고왕(드라마)에서는 이 설을 토대로 백라관을 재현해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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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 3호분에 묘사된 추정 백라관
반면 안악 3호분을 동수묘라고 보는 견해는 이 관모는 백라관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행한 농관(籠冠)류의 관모로 보며[56] 백라관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절풍 등 고구려의 전통적인 관모와 같이 변형모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 금관(왕관) - 신라, 가야, 마한 등의 왕, 왕족들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금으로 만든 관모, 단 실제 착용 용도가 아닌 무덤 부장품이라는 의견도 있다.
  • 익선관 - 임금이 정무를 볼때 쓰던 모자. 중국 송나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한국은 조선 세종때 들어와 정착. 곤룡포와 세트로 착용한다.
  • 원유관 - 임금이 공식 행사에 참석할때 쓰던 모자, 황제의 것은 통천관, 왕의 것은 원유관이라 하며, 강사포라는 옷과 세트로 착용한다.
  • 면류관 - 우리가 흔히 황제의 모자라고 알고있는 모자. 그 시기마다 전부 다 달랐지만, 조선시대에는 1층짜리를 주로 사용. 즉위식이나 책봉식, 종묘 제례 의식 등 국가의 중요 의례시에 입는 왕의 최고 정장이다. 곤복이라는 복장과 세트로 착용한다.
  • 주취칠적관 - 고려말에서 임진왜란 이전까지 썼던 왕족 여인의 모자. 홍무제의 정실 효자황후 마씨가 하사한것을 시작으로 매번 새로운 왕과 왕비가 즉위할때 명나라에서 보내준것을 썼다.[57]
  • 사모 - 문무백관이 단령 등 관복을 입고 쓰던 모자. 고려 말기에 들어와 조선시대 정립. 지금도 전통 혼례식때 신랑쪽이 쓰기도 한다.
  • 통천관 - 황제가 정무를 볼때 쓰는 관. 본래 중국에서 많이 쓰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쓰던 모자가 아니지만 황제를 표방하던 고려 시대에는 종종 썼으며 고종대한제국 황제가 된 후 통천관을 썼다.
  • 승관 - 한자로는 僧冠. 승려가 쓰는 둥근 관으로, 두툼한 털로 만든 방한용은 원정관이라 하여 현재도 종종 착용한다.
  • 금관 - 조선시대 관리가 조복 착용시 쓰던 금박으로 장식된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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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

갓(모자) 항목참조. 엄밀히 말하면, 갓 종류는 관이면서도 평상적인 복식에 들어간다. 초립, 패랭이도 마찬가지. 즉 갓은 관(冠):예식모자과 건(巾):두건 사이에서 생겨난 한국전통의 고유한 형태의 복식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 전통 의상에서 남성전용 모자라고 하면 대부분이 갓을 연상하거나, 여기에서 파생된 모자들이 많다. 한국에서 자생한 대표적인 전통모자는 대부분 갓(립)에 속한다!

이런 형성사유에 걸맞게, 흔히 갓 종류로 분류하는 이런 고려중기-조선시대에 들어서, 몽고의 영향으로 목장이 늘어나고 말들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대부분의 모자들의 재료가 말총으로 만들어진다. 이전에는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너울.

  • 흑립, 백립, 주립 등. (갓(모자) 항목 참조)
  • 초립
  • 패랭이
  • 탕건 - 사대부 계층에서 주로 쓰던 관. 지금도 무형문화재로써 제작되어지고 있다. 왠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나올때 초시들이 자주쓰는 모자로 나온다.
  • 망건 - 상투를 튼 머리가 흘러내리지 마라고 쓴 그물망 같은 머리끈. 물론 양반들만 그랬고 평민들은 그런거 없었다. 그냥 수건이나 천을 두를 뿐. 하지만 중인들도 갓을 쓰기 위해서 망건을 두르는 경우가 잦았다.
  • 정자관 - 흔히 훈장님모자라고 알고있는 모자. 이것 자체만 쓰는것이 아니고 망건위에 탕건을 쓰고 이것을 덧쓰는 방식이다. 5000원 지폐의 주인공이신 율곡 이이 선생이 쓰고 있는 것이 정자관이다.
  • 사방관 - 정자관의 일종. 네모난 원통모양. 정약용 초상화의 모자가 이것.
  • 전립 - 가죽으로 만든 갓으로서, 포졸들이나 구군복에서 쓰는 가죽제 갓. 전투용갓이라는 뜻으로서, 현재의 군용모자와 비슷한 역할이다.
  • 삿갓
  • 전모
  • 너울
  • 몽수
  • 갈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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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 건(巾)

건은 삼국시대부터 동아시아에서 남녀 보편적으로 두르던 복식이다. 한마디로 두건이라고 보면 되는데, 우리 조상들도 두건형태를 즐겨 썼다. 갓이 우리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모자형을 이른다면, 건류(두건)은 조상들이 가장 일상적으로 두르고 다녔던 모자류에 속한다. 즉, 일상적인 머릿수건.

  • (幘) - 건의 일종으로 머리 둘레에 맞게 두르며, 머리 뒷부분이 두 갈래 혹은 한 갈래로 솟아오른 형태를 하고 있다.참조 그런데 고분 벽화에서 발견되는 책은 중국에서도 발견되는 관모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책은 중국의 책과는 형태가 다르다고 하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는 중국에서 수입한 관모이지 고구려식 책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복건 - 흔히 도련님모자 라고 부르는 모자. 유학자들이 쓰고 다니기도 했다. 1000원권 지폐의 주인공이신 퇴계 이황 선생이 쓰고 있는 것이 복건이다. 하지만 정작 퇴계선생은 복건이 스님들이 쓰는 모자와 비슷해서 싫어했고 대신 정자관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 유건 - 유생들이 주로 쓰고다니던 모자. 정자관과 유사하나 전혀 다른 모자이다. 자세한 모양은 신윤복의 그림에 나와있다. 성균관 스캔들에 나오는 유생들이 쓰고 다니는 것이 다 유건이다.
  • 건귁 - 여성용 전통두건류를 이르는 말. 현대에도 여성들이 목욕 후에(또는 시골의 경우 밭일할 때) 타월 등을 머리에 감은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런 형태를 바로 건귁이라고 한다. 당연히 두건류답게 일상적으로 두루 썼다.
  • 이엄(耳掩) : 모피로 만든 귀덮개. 겨울에 사모 밑에 착용하기도 했다. 설명
  • 아얌 : 이엄의 한 종류로, 귀는 덮지 않고 이마만 덮는다. 조선 초의 기록에 의하면 이서(吏胥)들이 착용했다고 한다. 즉, 남여 공용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아얌이 지금의 아얌과 같은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 휘양 : 휘항(揮項)이라고도 한다.
  • 만선두리(滿縇頭里)
  • 조바위
  • 볼끼
  • 남바위
  • 굴레
  • 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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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 기타

  • 가리마 - 차액이라고도 한다. 기녀, 의녀, 부녀자들이 사용했다.
  • 갈모

9 전통 신발

신목의 유무에 따라 화靴와 이履로 나뉜다. 화는 북방계에서 유래되었고 이는 남방계에서 유래되었다.
참조
화(靴)를 만드는 장인은 화장(靴匠), 혜(鞋)를 만드는 장인은 혜장(鞋匠)이라 하며, 화와 혜를 모두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靴鞋匠)이라 한다. 주피장, 갖바치라고도 일컫는다.

  • 짚신
    • 단총박이 - 짚의 속대로 꼰 총을 박아 삼은 짚신.
    • 왕얽이짚신 - 볼품없이 마구 삼은 짚신.
    • 꽃짚신 - 신총이나 신 바닥을 여러 빛깔로 꾸미어 만든 짚신.
    • 세코짚신 - 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앞의 양편에 약간씩 총을 터서 코를 낸 짚신.
    • 석새짚신 - 총이 매우 성글고 굵은 짚신.
    • 피초혜(皮草鞋) - 가죽을 대어 삼은 짚신.
  • 미투리 - 날을 여섯 개로 하여 삼, 왕골, 면사 등을 이용하여 짚신처럼 삼은 신.
    • 지혜(紙鞋) - 종이를 꼬아 삼은 미투리.
  • 나막신 - 나무를 ㅠ자 모양으로 깎거나 파서 만든 신으로, 우천시 신었다. 격자, 삽자, 극자(極子), 목극(木極)[58], 목리(木履)[59]라고도 한다.
  • 피결신 - 피나무 껍질로 삼은 신.
  • 갖신 -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뜻한다. 장화처럼 목이 긴 신발과 짧은 신발이 있다.
  • 꽃신 - 여성들이 주로 신었다. 이름대로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다.
  • 당혜(唐鞋) - 말이나 소가죽에 비단을 감싸고 신코와 뒤축에 눈을 새겨붙여 신울을 마름질한 뒤 안쪽에 백마피를 대어 둘레를 친 다음 신울과 밑창을 꿰어 신 골을 넣고 형태를 잡아가며 만들었다. 태사(太史), 완자(卍), 당초문을 수놓거나 무늬가 있었고, 신울과 눈의 배색은 다양했다.
  • 운혜(雲鞋) - 앞코가 제비부리 모양이라고 하여 제비부리신이라고도 불렀다. 바닥에 가죽을 대어 징을 박고 겉은 화려한 비단으로, 안은 융을 대었으며 신코에는 앞 머구리를 대어 죽엽을 새겨 붙였으며, 뒤꿈치에는 뒷 머루기를 대고 굼벵이를 틀에 끼워 붙였다. 조선 여인들의 가장 아름다운 신이었다. 신울 윗변과 아랫변에 앞 머구리와 같은 색의 비단을 둘렀다. 붉은 바탕에 청문을 놓은 것을 홍록댕기라 하였다. 혼례 시 어염집 여인들도 신을 수 있었다.
  • 태사혜
  • 적석/청석 - 예장(면류관, 곤복, 적의 착용)시 왕과 왕비가 신던 신발. 왕은 적석, 왕비는 청석을 신었다.
  • 건혜(乾鞋) - 우리말로 마른신이다. 기름으로 겯지 않은 가죽신을 뜻한다. 마른 땅에서만 신는 신도 이렇게 칭한다.
  • 진신 : 바닥에 징을 박았기 때문에 징신이라고도 한다. 유혜(油鞋)라고도 한다. 진날에 신었으며,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기름에 결고 바닥에는 둥글납작한 징을 박았다.
  • 유혜(鍮鞋) - 놋쇠로 만든 신으로, 놋신이라고도 한다.
  • 기혜(妓鞋) - 기생이 주로 신던, 검은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외줄무늬 코의 외코신. 급이 높은 기생은 당연히 화려한 당혜나 운혜를 신었다.
  • 계혜 - 볼이 넓은 어염집 여인용 신발.
  • 조락신 - 조라기(삼 껍질 부스러기)로 만든 신.
  • 궁혜(宮鞋) - 궁중 여인들이 신던 신. 왼궁혜[60]와 반궁혜[61]가 있다. 청옥당혜나 홍옥당혜를 신었다.
  • 다로기 - 가죽의 털이 안으로 가게 하여 만든 방한용 긴 버선. 신발 대용으로도 신었다.
  • 노파리 - 융단으로 만든 방한용 신. 일반인은 천 사이에 솜을 넣었다.
  • 목화(木靴) - 나무나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고 까맣거나 흰 사슴 가죽으로 목을 만들어 장화와 비슷한 형태를 띄었다. 관복이나 혼례시 신었다. 흔히 관리들이 신는 신발이 바로 흑목화. 물론 백목화도 있다.
  • 설피(雪皮) - 살피라고도 한다. 눈이 많이 오는 경우에 신 아래에 덧신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한다. 설명
  • 흑혜(黑鞋) - 흑피혜라도고 한다. 모양은 태사혜와 같지만 태사문이 없다. 검은 가죽으로 신울을 대고 신코 중앙에 붉거나 흰 선을 대었다. 남자용은 신코가 넓고 뒷축이 높은데 반해 여자용은 신코가 뾰족하고 높다.
  • 투혜(套鞋) - 방한, 방습을 위한 덧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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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신구

  • 가체
  • 노리개 - 보석이 달린 것은 유사시 으깨서 지혈을 하는데 썼고, 향낭이나 향갑이 달린 것은 안에 든 향료나 식물(약초)을 유사시 꺼내어 썼다. 은장도 역시 자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 반지
  • 가락지
  • 띠돈
  • 귀고리 - 조선시대까지도 의복에 기본적으로 착용했다. [62]조선시대에 유교 사회가 되면서 꼼수로 귀를 뚫지 않고 귓바퀴에 걸치는 귀걸이를 착용했다.[63] 조선 이전에는 귀고리 뿐만 아니라 목걸이, 가락지, 팔찌 등 온갖 장신구를 기본적으로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삼국시대에는 귀걸이를 허리띠나 팔찌, 발찌, 목걸이, 띠드리개, 금관 등의 장식으로도 사용했다. 그 시대의 크고 아름다운 귀고리는 귀에 착용한 것이 맞다. 자세한 것은 귀고리 참조.
  • 장도
  • 풍잠
  • 향낭
  • 빗치개
  • 동곳
  • 옥로 - 갓 위에 얹는 장신구. 정자라고도 한다.
  • 상투관
  • 입영 - 갓끈.
  • 어사화
  • 비녀(채/잠) - 채는 U자 모양인 비녀를, 잠은 일자인 비녀를 뜻한다.
  • 떨잠
  • 뒤꽂이
  • 댕기 - 삼국시대에도 사용된 예가 나타난다. 한자 표기로는 당계(唐紒), 당지(唐只), 단계(檀戒), 단기(檀祺), 단성(澶誠) 등이 있었고, 한글 표기로는 당게, 당귀, 단기, 당기, 대이, 댕기, 머리띠, 멀때 등 다양한 방언이 있었다. 주로 천으로 만들었으나, 상중에는 한지로 만들어 탈상 때까지 남녀노소 모두가 조심스레 사용했다.
현대에는 야매로 두 번 접어 고무줄로 묶는 경우가 많다. 사극에서조차 제대로 드리지 않는다. 귀밑머리에 드릴 때에는 제대로 드리면 이런 모습이 된다 댕기 위치를 알아서 잘 조절하고(...) 고를 만든 뒤 댕기와 머리를 합쳐 땋는 횟수를 줄이고 잘 묶어 늘어뜨리면 두 번 접어 묶은 그 모습과 유사하게 나온다. 위 사진은 이 방식에서 합쳐 땋은게 고 아래로 보일 정도로 많이 땋은 것이다. 새앙머리에 드릴 땐 당연히 방식이 다르다. 빠지지 않게 여러 번 둘둘 감아 묶는데, 묶었을 때 길이를 다르게 하여 긴 쪽을 위로 가도록 한 뒤 앞쪽에 고를 남기고 매듭 뒤쪽으로 넘겨서 아래로 빼낸다. 댕기를 드릴 때 길이를 조절하면 삼단으로 차곡차곡 늘어진 모습이 나오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뒤로 넘어가는 가닥을 확실히 길게 해야 한다. 최근에는 두 번 접어서 묶는 사람이 많아 댕기가 그리 길지 않지만 원래는 1m 이상은 되었다. 저렇게 묶고도 길게 늘어뜨리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 제비부리댕기 - 끝을 제비부리처럼 뾰족하게 접어 만든 댕기.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 큰댕기 - 혼례시 뒤게 길게 늘이는 댕기. 도투락댕기, 뒷댕기, 주렴(朱簾)이라고도 한다.
  • 앞댕기 - 혼례시 큰댕기와 짝을 이루어 어깨 앞으로 늘이는 댕기.
  • 고이댕기 - 서북 지방에서 혼례나 의식, 기녀들의 공연 때 사용된 댕기로, 큰댕기의 일종이다. 홍색이나 적색 비단 바탕의 두 가닥 댕기에 오른쪽 가닥은 모란꽃 세 송이, 왼쪽 가닥은 십장생을 수놓고 댕기 끝부분을 둥글게 말아 능형문양을 화려하게 수놓고 양 끝에 진주꾸러미를 꿰메 붙였다. 큰 비녀를 꽂은 오른편에 두 가닥을 한두 번 감아 앞으로 늘어뜨렸다.
  • 도투락댕기 - 큰댕기와 형태가 같은 소형의 어린이용 댕기. 큰댕기를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 말뚝댕기 - 어린이용 댕기. 도투락댕기를 맬 시기는 지났지만 제비부리댕기를 매기에는 이른 때에 사용했다.
  • 굴레댕기 - 여자아이가 사용한 댕기. 중앙에 둥근 굴레 장식을 얹고 양 옆으로 끈이 달려있다. 중앙 아래로 댕기를 늘어뜨린다.
  • 배씨댕기 - 원래 머리숱이 적은 3~4세 전후의 어린 아이들이 사용하던 장식. 그런데 2000년대에는 각종 사극의 영향 혹은 배씨댕기 자체의 예쁜 모양새 때문인지 성인 여성들도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중, 고등학생 정도의 여학생들까지는 그나마 조금 나은데, 성인 여성들이 착용할 경우 호불호가 갈리는 경향이 있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배씨댕기를 한 성인 여성을 보고 어른이 젖병 물고 있는 걸 보는 기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할 정도(...). 문제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사극에서 아래에 나오는 첩지와 혼동되어 왕실 성인 여성들이 첩지와 배씨댕기가 혼합된 정체불명의 머리장식을 하고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 쪽댕기 - 쪽을 찔 때 드리는 댕기. 일반적으로 붉은색을 사용하며, 나이가 많으면 자주색, 과부는 검은색, 상중에는 흰색을 사용했다.
  • 떠구지댕기 - 떠구지머리를 할 때 사용한 댕기.
  • 자적댕기 - 얹은머리를 할 때 사용한 댕기.
  • 매개댕기 - 자줏빛 명주에 솜을 넣어 길고 통통한 끈처럼 만든 댕기. 큰머리나 어여머리를 할 때 연결부분에 사용한 속댕기이다.
  • 드림댕기 - 예장용 댕기. 혼례복에서는 큰댕기와 짝을 이루는 앞댕기이나, 다른 예복에서는 큰댕기 없이 사용하였다.
  • 네가닥댕기·두가닥댕기 - 궁중 나인들이 무늬가 있는 자주색 사(紗)로 만들어 새앙머리에 드렸다.
  • 새앙머리댕기 - 긴 봉잠(鳳簪)을 꽂은 후 그 좌우에 둘러 앞쪽으로 늘어뜨려 사용하는 예장용 댕기.
  • 팥잎댕기 - 팥잎처럼 가장자리가 말리는 댕기. 무수리나 세수간 나인들이 사용했다. 처소나인이 쪽머리에 홑댕기를 두 가닥으로 매는 것도 팥잎댕기라 불렀다.
  • 관자
  • 목걸이 - 조선시대에도 목걸이 유물이 있다. 조선 말기의 유물 조선시대의 유물 다만, 고려시대부터 목걸이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유물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가장 활발히 출토되고 있다. 가야 목걸이 천마총 목걸이
  • 팔찌
  • 첩지 - 족두리나 화관을 고정하는 역할도 했다.
  • 두레첩지
  • 부채집
  • 선추
  • 주머니 - 복주머니, 귀주머니 등.
  • 떠구지 - 궁중에서 예장시 떠구지머리를 할 때 어여머리 위에 얹은 나비모양의 가체 대용 나무틀.
  • 어염족두리 - 어여머리를 할 때 사용하는 솜을 넣은 족두리. 양쪽에 끈이 달려있다.
  • 띠고리 - 한자로는 대구帶鉤. 교구라고도 한다. 허리띠에 달려있던 고정용 장식으로, 서양 벨트의 버클과 유사하다.
  • 관 장식 - 삼국시대에는 관모에 금속 장식을 하여 직위나 권위 등을 나타내었다.
  • 관 - 금관, 동관 등. 삼국시대에는 오로지 왕만 쓰는 것이 아니었다.
  • 띠드리개 - 요패라고도 한다. 과판을 대어 장식한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 곡옥, 금판 등의 화려한 장식뿐만 아니라 손칼, 약통, 족집게같은 일상적인 물건도 달았다.
  • 귀이개 - 귀이개에 장식을 달기나 뒤꽂이 끝을 귀이개로 만들어 평상시에는 뒤꽂이처럼 머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복상사 등의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침처럼 사용했다.
  • - 빗을 머리에 꽂아 장식했다.
  • 빗치개 - 빗살에 낀 때를 제거하는 도구. 귀이개와 마찬가지로 뒤꽂이와 합쳐진 형태로 쓰이기도 했다.
  • 흉배(胸背) - 왕족과 문무백관의 의복을 장식하는 표장(表章). 조선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중국에서 넘어왔다. 옷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수놓아 의상을 장식하고 상하 계급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왕족이 사용하는 것은 특별히 보(補)라 한다. 왕과 왕비, 세자, 세자빈, 세손, 세손빈의 옷에는 둥근 용 흉배를 가슴과 등, 양 어깨에 달았고, 문무백관은 네모난 흉배를 달았다. 용의 발톱 수에 따라 왕비는 오조룡보, 세자세자빈은 사조룡보, 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룡보를 달았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왕은 칠조룡보, 태자는 오조룡보, 태손은 사조룡보를 다는 것으로 상향된다. 원래 곤룡포는 일회용이라 옷을 태울 때 같이 소각되었지만(…)[64] 막대한 비용과 실용성 문제로 이것만은 재활용하도록 개정되었다. 품계를 나타내는 주 도안을 중심으로 구름, 파도, 해, 달, 바위, 여의주, 칠보, 불로초, 물결, 물방울, 꽃, 모란, 보전, 당초, 완자, 서각, 물고기, 불수, 장생, 지초, 산 등을 수놓았다. 세밀한 자수를 단시간에 완성할 수 없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인해 주 도안을 따로 만든 뒤 동물만 바꿔 해당 품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세종 대에 영의정 황희의 강한 반대로[65] 흉배를 사용하지 않다가 단종 2년에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따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常服)에도 흉배를 달게 되었는데, 대군기린, (왕자)군은 백택, 도통사는 사자, 대사헌은 해치,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 3품은 백한, 무관 1, 2품은 호표, 3품은 웅비를 달도록 규정했다. 명나라 사신과 구별이 힘드니 개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연산군 대에 모든 품계의 관원들이 흉배를 달게 되었는데, 사용된 동물도 기러기, 돼지, 사슴, 거위 등 명나라와 다른 자주성을 보이게 된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무신의 흉배에 비금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를,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달도록 했다. 그러다 고종 대에 문관 당상관은 쌍학(학 두 마리), 당하관은 단학(학 한 마리)을 달고, 무관 당상관은 쌍호(호랑이 두 마리), 당하관은 단호(호랑이 한 마리)를 달도록 했다. 흉배와 유사한 무릎장식을 단 명나라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마가 조선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11 머리

전통머리, 가체, 댕기머리, 상투, 생머리 항목 참조

12 소매 종류

한복 소매는 크게 좁은소매(직배래), 넓은소매(대수, 활수), 두리소매(콩태소매), 둥근소매(붕어배래)로 나뉜다. 한복은 알타이계 호복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좁은소매가 주류였다가 한나라 계통 복식인 한푸(漢服) 상의의 활수(闊袖)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어 좁은 소매와 넓은 소매가 공존하게 된다. 활수형 복식의 대표적인 예가 원삼이다. 좁은소매 또는 직배래는 말 그대로 현대 기성복 소매처럼 좁은 직선 형태 혹은 소매 부분으로 좁아지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넓은소매는 사각형 혹은 겨드랑이 부분에서 소매 부분으로 사다리꼴을 그리는 사각형을 하고 있다. 두리소매는 넓은소매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는데, 소매 아래로 늘어진 부분이 막혀있는 형태로 간단한 소지품을 담을 수 있다. 둥근소매 혹은 붕어배래는 소매가 붕어의 배처럼 아래로 처진 곡선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흔히 한복의 곡선미를 강조하면서 한복 특유의 둥근 소매를 한복만의 것이자 모든 한복의 특징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경우가 잦으나 이는 심각한 오류이다. 조선 이전의 한복은 직선 소매와 넓은 소매만이 나타나며, 붕어배래는 조선시대 17세기 철릭에 관한 연구에서는 임진왜란 전후로 나타났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복식 섹션에서는 붕어배래가 1910년대에 정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밖에 붕어배래가 1900년대에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기사도 있다. 두 의견의 연대가 상당히 차이가 나는 편인데, 그렇다 해도 한국 복식사에서 붕어배래가 나온 시기가 조선시대 이후라는 것은 분명하다. 1900년대에 등장했다는 주장은 붕어배래가 널리 유행했던 시기를 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붕어배래가 유행한 것은 사실이다. 이후 점차 활동성을 중시하게 되며 한복업계에서도 직선형의 배래로 한복을 제작하는 예가 많아졌다.

  • 소매 넓이에 따라
    • 착수(窄袖)/첨수(尖袖)/통수(筒袖) : 좁은 소매. 북방계 호복에서 유래되었다. 한복은 호복의 영향을 받은 복식이므로 기본적으로 좁은 소매다.
    • 광수(廣袖)/활수(闊袖)/대수(大袖) : 넓은 소매. 남방계 복식에서 유래되었으며, 한푸의 영향으로 도입되었다.
      • 넓은 소매의 차이
        • 대수(大袖) : 소맷부리가 막힌 부분 없이 트여있다.
        • 두리소매 : 위에서 18~22cm 가량만 터지고 나머지는 막혀있다.
  • 길이에 따라
    • 단수(短袖) : 손이 보일 정도의 길이
    • 장수(長袖) : 손 끝이 가려지는 길이로, 여러 종류가 있다.
  • 배래 : 저고리 소매의 밑 부분.
    • 직배래 : 직선인 배래.
    • 붕어배래 : 둥근 배래.
  • 서서히 넓어지는 나팔형 소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13 옷깃 종류

  • 직령(直領) : 일자 옷깃. 전통적인 한복 저고리는 직령이며, 여밀 때는 양쪽 섶이 겹쳐지기 때문에 직령 교임이라고 부른다. 고려 시대에 들어 저고리가 짧아짐에 따라 본래 앞길 도련선까지 쭉 이어지는 형태였던 옷깃이 여밈이 깊어지고 가슴선에서 끊어져 자연히 목판깃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66] 조선시대의 저고리는 크게 목판깃에서 칼깃으로 변화한다.
    • 목판깃 : 깃 모양이 나무판처럼 사각형이며 직선인 깃.
    • 칼깃(반달깃) : 깃 끝부분(깃 궁둥이)이 칼처럼 좁고 날카로운 깃. 반달깃과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칼깃은 곡선이 없이 좁고 날카로워지는 반면 반달깃은 반달처럼 곡선을 그리며 좁아진다.
    • 당코깃 : 깃 끝을 버선코가 올라간 것처럼 마무리한 깃.
    • 돌림깃 : 둥글게 돌아가 깊이 여며지는 깃.
    • 이중깃 : 깃을 이중으로 만든 것. 종류에 따라 이중 목판깃, 이중 칼깃 등으로 분류된다.
    • 맞깃 : 여며지지 않고 서로 맞닿는 깃.
    • 동그래깃/둥그래깃 : 깃 궁둥이 부분의 모양이 둥근 깃.
    • 칼깃, 목판깃, 당코깃은 서로 섞인 형태도 많다. 조선 중기에 흔했다.
    • 삽화를 볼 수 있는 곳. 칼깃과 반달깃이 따로 분류되어 있다.

14 입는 순서

14.1 전통 방식

  • 양반 남자
    • 기본 : 속적삼ㆍ속고의 → 저고리ㆍ바지 → 버선ㆍ대님 → 행전 → 중치막 → 대창의 → 도포 (→쾌자/전복/답호 등) → 허리띠
    • 관복 착용시 : 중치막이나 대창의 위에 관복을 착용했다. 중치막은 조복이나 겉옷의 아래에 받쳐입었고, 대창의는 관복 아래에 받쳐 입었다. 소창의는 중치막이나 대창의를 겉옷으로 입을 때에 그 아래에 입었다.
  • 양반 여자
    • 기본 : 다리속곳ㆍ가슴가리개 → 속속곳ㆍ속적삼 → 속바지ㆍ속저고리 → 단속곳 → 너른바지 → 무지기치마 → 겉치마 → 저고리
    • 궁중 : 다리속곳ㆍ가슴가리개 → 속속곳ㆍ속적삼 → 속바지ㆍ속저고리 → 단속곳 → 너른바지 → 무지기치마 → 대슘치마→ 겉치마 → 저고리 → 당의

여자는 바짓부리를 정돈하여 고정시키지 않기 때문에 버선을 언제 신어야 한다고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가난한 평민들이 저걸 다 챙겨입기에는 무리가 컸던데다 복식금제로 인한 제약 역시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계층이나 직업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입는 옷에 따른 변화도 당연히 있었다.

  • 고름 매는 법[67]
    • 긴 고름 위로 짧은 고름을 교차시킨 뒤 위쪽으로 통과시킨다
    • 위쪽에 놓인 짧은 고름을 (자신 기준)왼쪽으로 둥글게 돌려잡아 매듭고를 만든다.[68]
    • 긴 고름을 매듭고 속으로 넣어 왼쪽 고대 끝까지 잡아 빼면서 짧은 고름을 아래로 당겨 고정시킨다. [69]
    • 고름을 아래쪽으로 늘어뜨리고 예쁘게 정돈한다.

14.2 현대

  • 나비고름 매는 법
    • 외고름(일반 고름)을 맨다.
    • 늘어진 고름 중 위에 있는 것을 나비(리본)모양으로 차곡차곡 접는다. 취향에 따라 각 단의 너비를 같게 하거나 점점 작아지게 한다.
    • 나비 모양으로 접어둔 고름을 남은 고름으로 감싸맨다.
    • 한 번 더, 혹은 여러 번 돌려매어 튼튼하게 고정한다.

15 관리하는 법

  • 원단에 따라 보관법과 세탁법, 다리는 법 등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반드시 원단별 특징 및 주의사항을 숙지해야 한다.
  • 한복은 평면재단이기 때문에 절대 옷걸이에 걸면 안된다. 물론 양장식 한복은 옷걸이에 걸어도 된다.
  • 깨끼바느질로 지었을 경우, 절대 세탁기로 빨거나 비틀어 짜면 안된다.
  • 보관할 때 빛에 노출되지 않는 것이 좋다. 원단은 빛에 노출되면 색이 변하는데, 한복 옷감은 빛에 의한 변색이 심한 편이다.
  • 개는 법
    • 조선시대의 한복인 경우 저고리에서 동정이 가장 중요하다. 동정이 꺾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여자 저고리 : 저고리를 펼친 뒤 고름을 가지런히 모아 서너 번 접는다. 소매는 옆선에 맞춰 깃 방항으로 접는데, 소매가 어깨폭보다 길면 두 번 접는다.
    • 남자 저고리 : 저고리를 펼친 뒤 아랫길을 몸통의 3분의 2 지점까지 접어올린 뒤 소매를 옷깃 쪽으로(안쪽으로) 접는다.
    • 치마 : 가운데가 겹치지 않게 세로 방향으로 3등분을 한 뒤 다시 3등분 해서 접고 가로로 반 접는다. 가능하면 말기 부분의 주름이 접히지 않게 한다.
    • 바지 : 밑위선을 중심으로 세로로 반 접고 가로로 반씩 두 번 접는다.
  • 보관
    • 한복은 평면 재단이기 때문에 옷걸이에 걸면 모양이 변형될 수 있다. 옷함이 없다면 상자에 잘 개서 빛에 노출되지 않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한다. 방충제나 제습제를 넣으면 좋다.
    • 가장 무거운 옷을 아래에 넣고 그 위로 가벼운 옷을 차례차례 쌓는다. 여자 한복의 경우 치마가, 남자 한복의 경우 도포같은 포 종류가 맨 아래에 놓인다. 많은 옷에 눌리면 모양이 변할 수 있으니 주의한다.
    • 박으로 장식된 부분은 흰 종이로 보호한다.
  • 다림질
    • 반드시 다림천을 덧댄다. 스팀 다리미인 경우 스팀을 끄고 다린다.
    • 다림천 : 한복과 소재와 색이 같은 것으로 한다. 여의치 않다면 거즈도 괜찮다.
    • 저고리 : 뒤집어서 안감부터 다린다. 도련이 밀려 겉으로 나오지 않게 정리한 뒤 한 번 더 다린다. 곡선 부분이 늘어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겨드랑이 부분은 물수건을 대고 두세 번 다린다.
    • 치마 : 안자락 단을 먼저 다리고 치마폭을 아래쪽부터 다린다. 너무 누르면서 다리면 치마의 풍성함이 손상될 수 있으니 주의한다. 주름이 있는 경우 주름을 세워 다리지 않는다.
    • 바지 : 뒤집어서 허리와 부리가 밀려나오지 않게 넣어가며 다린다. 다시 뒤집어 허리와 부리, 솔기를 다린다. 솔기는 누리지 않고 살짝 잡아서 다려야 한다. 그 뒤 대님과 허리띠를 다린다.
    • 자수 : 세탁 후 마르면서 수축할 수 있어 반 정도 말랐을 때 다림질해서 말린다.
    • 박 : 다림천을 대고 낮은 온도에서 다린다. 열에 매우 약해서 고온일 경우 녹는다.
  • 빨래
    • 설령 드라이클리닝이라 해도 세탁을 자주 하는 것이 좋지 않다. 그 어떤 소재든 물빠짐은 필수 불가결하니, 한복을 빨 생각이라면 물빠짐 현상을 막는 것은 일찌감치 마음 접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괜히 옛 선조들이 빨래 한 번 할 때마다 옷 염색과 바느질을 다시 한 것이 아니다.
    • 두세 번 깨끗하게 입고 동정만 바꾸는 것이 좋다.
    • 전체 세탁 시에는 드라이클리닝을 한다.
    •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서 말린다.
    • 박이 찍힌 한복을 드라이클리닝 하면 박이 녹아내린다.
  • 원단에 따라
    • 비단 : 열에 약하고, 물에 닿으면 얼룩이 생긴다.
    •  : 물빨래 가능. 다릴 땐 원단 뒷면을 가볍게 다린다.
    • 화학섬유 : 약칭 화섬. 열에 약해 드라이 다림질을 해야 한다. 물에 닿아도 줄어들지 않는다.
추가 바람

16 말기와 가슴가리개

치마의 말기 부분과 가슴가리개를 구분하지 못하고 항목을 수정하거나 작성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 부득이하게 본 단락을 추가하게 되었다.

말기는 치마나 바지의 맨 위에 둘러서 댄 부분(국어사전)이다. 즉, 치맛허리나 바짓허리. 별개의 의복이 아니다.

말기는 저고리에 동정, 길, 섶 등이 있는 것처럼 하의 속옷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 치마에서는 한복 치마를 허리에 두르는 부분이다. 조끼허리풀치마의 경우 어깨끈이 달린 그 부위. 이 경우 말기 부분이 가슴에 온다. 이 조끼허리풀치마가 혼동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다. 원래 전통적인 치마는 띠허리풀치마라 치마를 허리에 둘렀으며, 어깨끈은 달려있지 않았다. 당연히 말기는 허리에 위치했다. 말기에 두르고 남는 치맛고름[70]을 길게 늘어뜨려 장식성을 보이기도 했다.[71] 한복드레스에서 상의 부분으로 활발히 개량되는 것은 이 말기 부분을 가슴가리개처럼 보기도록 굉장히 넓게 개량한 말기치마를 다시 개량한 것이다.

가슴가리개는 가장 안쪽에 착장하는 상의 속옷이다. '대자'라고도 부르는 그것. 위의 속옷 단락이나 항목 참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친왕비 이방자여사의 가슴가리개

가슴가리개가 말기에 흡수되었다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전혀 없다.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저고리가 극단적으로 짧아져 가슴가리개가 더욱 중요해졌으며, 치맛말기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애초에 치마는 허리에 두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말기는 가슴가리개의 아래쪽 절반 가량과 겹치게 된다. 게다가 말기는 원래 딱 고름 정도의 넓이로, 속옷 역할을 할 정도로 넓지 않다. 다시 한 번 작성하지만, 말기는 바지나 치마의 허리 부분에 천을 다시 덧대어 허리에 두르기 편하게 만든 것이다. 따로 분리되거나 속옷과 흡수된 적 자체가 없다.저고리에서 동정이 별개의 존재라는 것과 같은 소리다 [72] [73]

예로부터 입어온 전통적인 한복 치마는 띠허리풀치마로, 허리에 두르는 랩스커트 형식이었다.[74] 현대에 주로 입는 가슴 위로 올라오고 어깨끈이 달린 것은 조끼허리풀치마로, 띠허리풀치마에 비하면 비교적 현대에 생긴 것이다.[75] 그러므로 원래 말기 부분은 허리에 오게 된다. 한복은 전통 의상이고, 가슴가리개는 전통 속옷이기 때문에 현대에 입는 한복이 아닌 전통적인 한복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요즘에는 한복을 입더라도 가슴가리개를 비롯한 전통 속옷을 거의 입지 않는다. 조끼허리풀치마형으로 나온 샤 등의 재질로 만든 속치마를 많아봐야 두 겹 입는게 전부다. 저고리도 전통식과 양장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 그러니 한복에 관심이 있더라도 전통 한복을 따로 공부하지 않는 이상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한복은 원래 하의는 허리에 둘러서 입지, 가슴 부근이나 그 위로 올라오지 않는 복식이다.

말기는 애초에 섶, 길, 고름, 동정, 화장, 선처럼 의복을 구성하는 부분요소의 이름이기 때문에 독립된 별개의 속옷과 혼동되거나 합쳐질 이유가 없다.

치맛말기는 엄연히 치마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고, 가슴가리개는 전통 속옷이므로 구분이 필요하다. 쉽게 말하면 가슴가리개는 브래지어, 말기는 바지나 치마의 허리 부분이다. 벨트나 단추가 있는 그 부분.[76]

17 현대에 들어 생긴 것

전통 한복은 아니지만, 최근 퓨전한복 업체나 동호인들에 의해 생겨나는 복식과 부속품들이 있다.

  • 향대 - 눈속임용 치맛고름. 말기끈에 걸쳐서 늘어뜨리는 장식이다. 새색시가 시집갈 때 눈물을 훔쳤다고 해서 눈물고름이라는 설도 떠도는데, 이는 근거가 없으며 반대로 일제가 조선 여성들의 나약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라는 설도 있지만 이 역시 근거가 없다.[77] 띠허리풀치마에서 말기에 고름(치맛고름)을 둘러매고 늘어뜨린 것을 따라하기 위해 생겼다.
  • 말기대 - 말기나 가슴 장식용, 혹은 눈속임용 허리띠. 가슴가리개를 입은 듯한 눈속임을 위해 착용하거나 치마가 가슴 위로 올라오는 경우 말기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착용한다. 자수 등으로 장식된 경우 화려한 가슴가리개를 착용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치맛허리를 둘러맨 고름이 없어 전통 한복의 모양새를 따라했다 하기에는 허전하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가슴가리개는 원래 속옷인지라 어지간해선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전통적인 한복 치마는 가슴가리개를 착용한 뒤 허리에 두르기 때문에 말기(치맛허리)에 의해 허리가 강조되지만 현대에 주로 입는 것은 가슴 위로 올라오는 조끼허리풀치마이기 때문에 전통 한복처럼 허리를 강조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조끼허리풀치마 위에 대어 띠허리풀치마를 입은 것 같은 눈속임을 하기도 한다. 이것도 가슴가리개와 혼동하는데, 그건 전통 속옷이고, 이건 현대에 들어 생긴 장식 허리띠다.브래지어를 겉옷 위에 입지는 않잖아
  • 말기치마 - 전통적인 가슴가리개를 하는 것이 번거롭기 때문에 고안된 것으로 치마말기를 넓혀서 가슴가리개를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치마이다. 말기 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한다.
  • 공갈 속고름(?) - 속고름도 눈속임용으로 따로 만들어 단추로 달기도 한다. 정확한 명칭을 아는 위키러가 명칭 수정바람.

어째 죄다 눈속임을 위한 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사극들은 부정확하고 이상한 고증으로 인해 다 큰 성인이 배씨댕기를 하고 나오더니[78] 이젠 아예 배씨댕기도 뭣도 아닌 고급 화과자같은 것을 머리에 얹고 나온다. 이것도 모자라 앞의 고급 빵떡과 첩지를 합치더니 여기에 가체까지 합쳐버렸다. 이 정체불명의 가체빵떡첩지배씨댕기는 날이 갈수록 화려하고 거대해지는 실정이다(...). 상투같은 경우, 상투관을 쓰고 나올 때에는 안채에서 몰래 꺼내온 듯한 화려한 비녀(...)로 장식하는 것은 기본에[79] 아예 쌍상투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상투는 중국 상투와 달리 단단한 매듭이라 어지간히 머리숱이 적지 않고서는 가운데에 비녀를 가로지르기 어렵다. 더군다나 상투를 틀면 고정시킬 목적으로 동곳이라는 일종의 상투용 비녀를 세로로 꽂는다. 원래 머리숱 많으면 상투를 두 개 틀었다. 젊은 사람은 특히 쌍상투가 흔했다. 신체발부수지부모와 미적인 이유로 인해 배코치는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댕기 역시 정석으로 드리지 않으며, 두 번 접어 고무줄로 고정시키는 게 전부다. 옛 복식과 두식 이미 고증들과 함께 오래다. 현대에 만들어진 말기치마가 사극에 등장하는 실정인데다 한복 속옷도 특별히 속옷이 등장하는 장면이 아닌 이상 재질의 패티코트같은 현대의 한복 속치마를 입고 나온다. 고려나 삼국시대가 배경인 경우는 더욱 심각해서 아예 중국의 한푸시대를 초월한 국적 불명의 판타지 의상이 버젓이 등장한다. 2000년대 이후의 사극은 복식과 건물, 음식, 채소 고증조차 당당히 씹어먹으며 현대에 생긴 어휘가 사극에 등장하는 판국이다. 사극과 역사가 별개라는 주장은 덤이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옛 복식이나 두식사실 역사 전반을 공부한다고 사극을 보면 정말 낭패다. 대왕세종이나 용의 눈물은 예외지만 부정확한 정보를 얻기 쉽다. 커뮤니티에서도 잘못된 지식이나 정보가 상당히 퍼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을 읽자.[80]책도 양질의 책을 선별해서 읽자 이외에도 여기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필요하다면 참고하자.[81] 또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발간한 왕실문화도감- 조선의 왕실복식이라는 책도 좋은 자료로 참고할만 하다. 왕실 복식이긴 하지만 왕족들도 일과가 끝나면 평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 양반계층 일반 복식 참고용도로도 사용할만 하다.

18 대중문화 속의 한복

  •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성인영화에서는 벗기면 또 나오고 벗기면 또 나오고 벗기면 또 나오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고증이 맞는게, 상류층은 치마를 부풀리기 위해서 안에 입는 속치마와 속바지를 몇겹씩 덧입기도 했다.
  • MMORPG마비노기》에는 남녀 각각 4종류의 한복 세트가 있다. 구군복/기녀복을 제외하면 정확한 명칭은 없고 처음 나온 년도를 붙여서 부른다.
    • 05한복의 경우 조선시대 이후의 복식을 토대로 디자인 되어 있다. 여성복은 당의를 기반으로 한 치마저고리이며, 남성복은 마고자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다.
    • 06한복은 2005년도 한복에 군데군데 포인트를 주었다. 여성복은 밑동과 곁마기, 소맷부리의 색을 달리하여 포인트를 주었으며, 남성복은 쾌자를 입고 있다. 염색을 잘 하면 예쁘지만 어울리는 복장과 캐릭터가 한정되는지라 인기는 비교적 적다.
    • 07한복은 고구려를 위시한 삼국시대의 한복을 토대로 만들어져 있다. 여성복은 고유의 주름잡힌 치마에 무릎 위까지 오는 긴 저고리를 대(허리띠)로 여민 형태이며, 남성복은 반비(조끼)를 입고 역시 대로 앞섶을 여민 형태를 하고 있으며, 관모도 있다. 이 의상은 북미 서버에도 2011년 추가되었다. 깔끔한 디자인으로 단순한 이벤트 의상을 너머 평소에 입고다니는 유저도 많았던 복장이다. 또한 일본 유저가 디자인한 양 로브의 디자인도 07한복을 베이스로한 디자인이다. 다른 외국 서버는 추가바람
    • 2011년엔 한복이란 이름이 아닌 구군복과 기녀복이 이벤트로 등장했다. 마비노기 특성상 남성 한복의 인기는 여성 한복에 비하면 안습한 수준이었으나 구군복은 마비노기 역사상 여캐 의류에게 비교당해 까이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옷 중 하나다. 특히 남성 자이언트가 염색 잘 된 구군복을 입으면 포풍패기가 느껴지므로 여성유저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다. 기녀복도 한복 이벤트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의류로 손꼽히며 특히 반투명 처리된 무릎 아래 부분에서 나오는 묘한 색기로 큰 인기를 얻었다. 뽑기형 상자에서 나오는 의상이지만 확률도 높은 편이라 구하기도 쉽고 입고다니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던전 앤 파이터에는 몹시 많이 개량된 한복이 나온다.
  • 사이퍼즈에서는 미국인이 개량 한복을 입고 나온다.한복이라고 말해도 이게 한복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신비의 린신령의 하랑의 추석 스페셜 코스튬은 한복이다. 코스튬 중에 ‘강강수월래’라는 한복 코스튬이 있고, 2015년 10월 24일에 공개된 ‘극.한.알.바’ 코스튬을 두 벌 구매하면 한복 코스튬을 한 벌 준다.하지만 대부분 서양인이라 한복을 입은 외국인 사위같다
  • 세계관에 한국적인 소재를 많이 넣은 블레이드 앤 소울에서도 한복 형태의 옷이 많이 등장한다.
  • 네이버 웹툰 '까치 우는 날'은 한복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지만 웹툰 자체는 그냥 묻혔다(...)
  • 네이버 웹툰 별의 유언의 캐릭터들은 전부 한복을 입고 있다. 고증은 조금 미흡한 편이나[82] 캐릭터성에 있어서는 성공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한복모에는 쇼타의 충분조건이라는 선례를 남겼다
  • 네이버 웹툰 둥굴레차!에서 한복을 상당히 정밀하게 표현하는 등 퀄리티가 높다. 참조
  • 리그 오브 레전드의 한국 런칭기념 챔피언으로 아리가 추가되어 한복을 입고 나왔다.
  • 2014년 EBS수학 교사 세미가 한복을 입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 비주얼 노벨 작가 지나가던개가 한복에 모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스토리를 담당한 무인세계, 방구석에 인어아가씨, 데드엔드 99%의 등장 여캐들 중엔 꼭 한명 이상은 한복이나 개량한복을 입고 있다.
  • 비주얼 노벨 아날로그 어 헤이트 스토리의 등장인물인 *뮤트가 한복을 입는다. *현애의 경우는 오버라이드 터미널에서 change_outfit 명령어를 입력해서 한복으로 바꿀 수 있다.
  • 라이트노벨 포목점 은여우의 연애기담은 외세의 간섭 없이 개화를 이룬 가상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한복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변화해가는지에 대한 내용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한복 덕후 흑요석의 수려한 일러스트로 재현된 현대적인 한복이 특징으로 2015년 5~6월에 한복 전문 업체인 온지음 옷공방과 협업하여 소설 속 한복을 실제로 제작하여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참조
  •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리 리(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의 스킨중 달의 축제 리 리 스킨이 색동저고리 형태의 모습으로 나왔다. 무과금 유저도 한번쯤 질러볼까 고민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 라이트노벨 요희전기에서는 동양적인 세계관과 그에 걸맞는 판타지스럽게 개량된 한복이 등장하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은 편.
  • 라이트노벨 나와 호랑이님에서 랑이, 세희, 치이, 등등 많은 여자 등장인물들이 개량된 한복을 입고있다.
  • 고대 한국사 의인화 만화인 천손의 시대에 고대 한복과 관모 등이 상당히 자세한 고증으로 표현되어 있다. 물론, 하의를 배제하고 저고리만 입고 있는 고구려나 속바지를 없애고 주름치마를 미니스커트로 입고 있는 신라, 가야 등 퓨전을 가한 형태도 공존하고 있다.
  • 한국 애니메이션 플라워링 하트에서 마법계에서 입는 옷이 한복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5화에서는 슈엘잠시 입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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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한복을 입은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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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한복 일러스트

  • 한복을 자주 사용하는 일러스트레이터김형태, 이명진, 흑요석이 있다.
  • 일본인임에도 한복에 모에하는 작가로는 스메라기 나츠키(블로그)가 있다. 아니, 모에하는 정도가 아니라 작품중 하나인 '이조암행기' 등을 보면 한복의 '선'과 '태'를 너무나도 잘 살려놓았다.
  • 국내외 몇몇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한복을 그렸을 때, "이건 한복이 아니라 기모노다"란 소리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섶을 안 그린다거나, 동정 부분을 속옷을 겹쳐 입은 것으로 그린다거나 하는 식이 대표적인데 한복을 많이 접해보지 못해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인 듯. 물론,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을 보고 기모노라고 착각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장 상당수의 한국인이 접하는 한복은 사극 등에서 등장하는 일부 양식일 뿐. 고대 시절의 한복이 정확히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복에 대해 잘 알고 잘 그리는 작가들도 많다.
  • pixiv에서 韓服으로 검색하면 이거저거 많이 나온다.
  • 데비앙아트에도 검색하면 그럭저럭 많이 나온다. 그룹도 생성했다.
  • 북한 모에화(...) 서적에 나오는 한복
  • 아야나미 레이치요짱의 한복 일러스트가 업계에서는 나름 유명하다.
  • 최근엔 일러들이 다 여캐밖에 없어서 여자한복은 잘아는데 남자한복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사극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을 쓰고 도포나, 쾌자 등을 입은 선비는 선호도가 상당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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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관련 항목

  1. 위에는 저고리, 밑에는 바지. 중국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위아래 한 벌인 통옷이지만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 탓에 대체로 상의하상(上衣下裳)이라 한다.
  2. 고구려의 벽화를 보면 여자 한복은 치마 안에 바지를 입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3. 부수적으로 목걸이, 팔찌, 가락지, 반지 등의 장신구도 착용했다. 이 역시 남녀불문이었다.
  4. 맞춤법 상으로는 귀고리와 귀걸이를 같게 볼 수도 있지만, 역사 쪽에서는 귀고리는 귀를 뚫고 착용하는 장신구를, 귀걸이는 귀를 뚫지 않고 귓바퀴에 거는 장신구를 뜻한다.
  5. 조선 말기까지 하층민들 사이에는 아들을 낳은 여자는 가슴을 드러내고 젖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아들을 낳은 것을 과시하는 행동이었다. 다만 상류층 여성들까지 거리낌없이 유방을 노출하고 생활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정반대로 여자아이 때부터 두꺼운 가슴가리개로 꽉 조이는것이 관습이었다.
  6. 다음의 젖가슴을 드러낸 조선 여인의 흑백사진이 널리 알려져있는데, 이 사진은 단적으로 일제가 조선을 미개한 민족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쓰인 연출된 사진의 일환이다.관련기사-SBS 스페셜 '일제 사진, 그 비밀과 거짓말'
  7. 백분을 바르고 붉게 화장한다는 뜻으로, 검은 눈썹 화장인 미대(眉黛)(눈썹 화장을 중시해서 십미도(十眉圖)도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그림 그리는 화전(花鈿),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을 황색으로 염색하는 액황(額黃), 볼을 붉게 칠하는 홍장(紅粉), 보조개가 있는 것처럼 그리는 면엽(面靨), 볼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그리는 사홍(斜紅), 이마, 콧등, 턱을 하얗게 칠하는 삼백(三白) 등이 있었다. 사진 사진2 사진3 중국 시대별 입술 중국 시대별 눈썹 당나라 시대별 눈썹1 당나라 시대별 눈썹2(앞과 이어짐) 당나라 눈썹 화전 화장 순서 홍장 재현
  8. 고려는 중국의 영향으로 왕족의 복식도 몽골풍과 고려풍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는 귀족들도 마찬가지라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분적 복식제를 유지하면서도 귀족복식 내부에서는 고려식과 몽골식 등으로 나뉘었다.
  9. 또한 통일신라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는 이름은 고구려에서 따왔지만 정작 신라를 계승하는 국가였다. 통일신라는 김춘추가 당의 복식, 제도 등을 긁어오다시피 들여온 국가였다.
  10. 한국 내에 매우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인식이다. 다음 웹툰의 '환상스케치'라는 작품에서 비슷한 이유로 왜색이라는 비난을 받다가 그것을 보다못한 어떤 유저가 직접 자료를 조사해 비난에 대해 일일이 반박한 사례가 있다. 실제 한복에서 허리띠를 뒤에 묶는 경우는 흔한데, 삼국시대 복식은 허리띠를 앞이나 뒤에서 매듭짓는 게 일반적이었고, 링크에도 나와있듯 정재복(呈才服)의 대대 역시 뒤로 묶는다.
  11. 단 어디까지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뿐이지, 학술적으로 동양의 전통의상이란 개념이 기모노로 고유명사화가 된 것은 아니다.
  12. 한국인 중에서 유럽의 각각 서로 다른 전통 의상들을 잘 구분해내고 해당 국가와 지역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3. 싱가포르와 두바이에서 각각 2013년, 2014년에 열렸다. 이 두 나라의 국제적인 면모를 고려하면 한국이 세번째로 지목됐다는 것은 그만큼 아시아 지역에서의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높게 친다는 것.
  14. 국수주의자나 사이비 종교 소속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또 급진적 민족주의로 악명높은 NL 운동권이 대학교에 단체로 이걸 입고 다니기도 했으니. 요즘 세대에서는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이 자주 입고 오는 옷으로 보기도 한다. 전교조가 막 생긴 80년대 후반, 문교부에서 일선 학교에 공문으로 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에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가 있었다.
  15. 게다가 한복이라는건 특수한 상황, 결혼식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정도에 입는다고 생각하는게 보통이기에. 물론 요즘은 명절에도 안입는 경우가 많고, 결혼식도 정장을 입는게 흔하지만...
  16.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은 사라진 K-1에서 짧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라운드걸이 등장한 것에 다수의 네티즌들이 발끈한 사건(관련기사)이다. 물론, 이는 복잡한 문제로써 디자인 문제가 아닌 일본에서 그런 기획을 잡은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당시에도 "당장 일본에서도 기모노를 마개조하는 사례가 넘쳐나는데, 그렇게 과민반응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반대의견이 있었다.
  17.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한'은 한자어라기보단 순우리말을 한자로 가차해서 적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서 그런지 이젠 한이 한자어 같이 여겨져서 '한' 뒤에 순우리말 '옷' 같은 게 아니라 한자어 '복'과 합성된 꼴이다. 한옷이라고 해도 되긴 하지만, 민족주의 의식 이전에 대화 소통이 되지 않는다.
  18. 이건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재현된 고대의 한푸를 보고 상당수 중국인들이 한복이나 기모노 아니냐며 불편해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 우리나라 전통 복식학자 중에는 석주선이 가장 유명한데 소장품은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있다. 안타까운 건 1.4 후퇴 때 피난하면서 서울 수복 직후 살해당한 오빠 석주명이 평생 모은 나비 표본을 가지고 피난 하느라 복식유물을 집에 남기고 갔는데 피난 후 돌아오니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20. 특히 동아시아 나라들의 복식이 현대의 개성 있는 전통복식 이미지로 고착된 것은 기껏해야 수백 년 전이지 그 이전엔 정말 비슷비슷하게 생겨 먹었었다. 애초에 서로 교류를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해온 옷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한복 인식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도 천 년 전 복식은 자기 나라 것인지 이웃 나라 것인지 구별을 못한다.
  21.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근대에 등장한 마고자 단추를 떠올리지만 조계종 스님들의 가사(태고종 가사는 전통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에 맺은단추가 없다)에서 볼 수 있는 매듭으로 만든 맺은단추(이건 삼국시대 단령과 같이 들어왔다고 추정된다), 원삼에서 사용한 원삼단추(암단추와 수단추로 나뉘어 있으며, 수단추로 암단추를 이어 고정한다. 고정이 끝나면 단순한 고정장치가 아닌 하나의 예쁜 장식이 된다.), 그 외에 수많은 단추 유물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단추 자체는 예전부터 존재하였다.
  22. 단추 한두 개 만으로 잘 여며지지 않을 때는 재래 한복처럼 허리띠를 두르거나 단추를 더 단다. 다만 맺음단추를 더 다는 옷들의 경우 차이나 칼라에 맺음단추를 죽 달아 마과랑 구별이 안 가는 것도 있다.아예 제작 자체를 중국에서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건 함정
  23. 지금은 드물지만 과거에는 서울의 대치동이나 잠실, 홍대앞에서까지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24. 그가 갔던 나라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페루, 미국, 체코, 이집트, 이스라엘 등지였다.
  25. 다만, 이는 유치원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서 생일잔치를 2~3개월에 한 번씩 할 경우 생일이 훨씬 지난 사람이 한복을 입고 생일잔치를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6월생이 8월에 하는 6,7,8월 생일잔치 때 한복을 입고 한다든가(...)
  26. 절에 템플스테이시 일반인이 입는 경우로는 지금도 많이 쓰인다. 혹은 무속인들이나 나이든 불자들이 종종 입기도 한다.
  27. 허리치마와 철릭원피스로 유명한 곳인데, 상당히 많은 한복 업체에서 이곳의 디자인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28. 그리고 이러한 디자인은 더더욱 한복을 기피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29. 서양 복식처럼 다트(평면인 천을 입체적인 몸에 맞추기 위해 일정 부분을 긴 삼각형으로 주름 잡아 꿰매어 줄이는 것.가슴 다트)를 넣어 곡선을 만들지 않으며, 평면재단이다. 당연히 겨드랑이의 암홀이 없다. 평면 재단이기 때문에 바닥에 놓으면 납작하게 붙는다. 시접을 모두 안감 안으로 넣는다는 점 역시 큰 차이다. 재단의 차이로 인해 옷 주름의 차이도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입었을 때 어깨와 겨드랑이, 팔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복은 겨드랑이에서 어깨까지 八자 모양의 주름이 생기며, 어깨 부분이 뾰족하게 각지지 않는다. 팔 부분에도 여러 주름이 생긴다. 이는 전통 저고리와 양장 저고리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30. 여자 민저고리 기준으로 양쪽 소매와 뒷길 두 장, 앞길 두 장, 깃, 안섶, 겉섶, 고름이 필요하다. 회장저고리인 경우 그 부분을 따로 재단한다. 색동저고리 역시 색동을 각각 재단하기 때문에 조각이 더 늘어난다. 치마의 경우 몇 폭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바지는 허리, 마루폭 두 장, 작은사폭 두 장, 큰사폭 두 장이 필요하다. 하의의 경우 말기를 덧대고 고름을 달기도 한다. 여자 속바지류는 말기와 고름을 달지만 남자 바지는 허리끈으로 여민다. 허리에 고리를 달아놓고 허리띠를 끼우는 것은 서양의 벨트를 차용한 개량식이다.해평윤씨 묘역 출토 사폭바지. 염의로 쓰였다. 해평 윤씨 묘역 출토 남자아이 바지
  31. 도저히 기계로 하기 어려운 작업이 많다.
  32. 원래 치마는 허리에 둘렀다.
  33. 어깨치마라는 명칭은 현대 동호인들이 간편히 부르는 명칭이다. 말기 부분을 조끼로 만든 치마는 구한말에 생겨난 조끼허리 풀치마와 어린 아이들이 입는 조끼허리 통치마로 나뉜다.
  34. 어깨끈도 있겠다. 원피스 형태겠다. 저고리만 제거하면 그야말로 우아한 드레스가 된다.
  35. 조선인 바지 한 벌 만들 옷감으로 명나라 바지 두 벌을 만든다는 비판이 있었다.
  36. 쌍고름을 기모노에서 오비를 묶는 방식 중 하나인 '분코무스비(文庫結び/서고매듭)'나 '쵸우무스비(蝶結び/나비매듭)'와 혼동하나, 한복 고름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비는 묶는 방법이 어려워 관련 직업과 자격증이 따로 있는데 반해 한복 고름은 묶는 법이 오비에 비하면 훨씬 간단하다. 더군다나 대대의 경우, 실물을 보면 묶기 편하게 가느다란 끈이 같이 있다. 이 얇은 끈으로 먼저 묶은 뒤 대대를 보기좋게 묶어 늘어뜨리는 등의 장식성을 더하는 것. 대대는 의복에 따라 허리에서 한 번 묶은 뒤 아래쪽에서 느슨하게 한 번 묶거나 쌍고름을 매는 등의 차이가 있으며, 특별히 매듭법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쌍고름은 기본적인 외고름에서 그냥 빼내는 고름도 고를 만들면 된다. 리본 묶을 때에도 많이 애용되는 방식이다. 대대를 묶는 법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이는 다른 허리띠도 마찬가지다. 조선 이전의 벽화 등을 보면, 매듭짓는 위치도, 방식도 모두 자유롭게 나타난다. 자국 전통 문화에 대한 무지를 왜색으로 치부해서는 안되는 노릇이니 알아두자. 애초에 오비는 굉장히 폭이 넓고 길었다. 일상적으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 유카타에 어울린다는 나고야오비가 폭 34cm, 길이 356cm 이상이었으며, 한하바오비는 폭 15cm에 길이가 450cm에 육박했다.(묶는 법이 간편해 여행할 때에도 큰 불편함이 없었던 '츠쿠리오비'도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활동성이 필요할 때에 사용했다.) 오비 위에 '오비다메, 오비지메, 오비아게'라는 장식끈을 매고 이를 고정하는 장신구인 오비도메를 착용하기도 했다. 이런 마당에 오비와 고름의 매듭법이 같을 수가 없다. 기모노의 오비를 매는 법은 여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37. 활동적인 활동을 할 때 속에 입은 옷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길(섶과 무 사이에 있는 넓고 긴 폭.) 아래에 덧댄 천.
  38. 당상관은 홍색, 당하관은 청색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조선 후기에는 간소화를 위해 직급의 관계 없이 검은색으로 통일되는 경향이 있다.
  39. 비빈(妃嬪)은 후궁을 뜻한다. 명칭은 같은 빈이라 해도, 무품이며 왕의 며느리이자 세자의 정실로서 차기 왕비인 세자빈이 가장 높아봤자 정1품인 왕의 후궁보다 높다.
  40. 위의 사진은 속치마와 개량바지, 허리띠(가슴가리개) 등 전통속옷과 거리가 먼 부분이 있으니 유념해서 봐야 한다.
  41. 가슴이 크면 무식하다고 여겼다. 추가로 주걱턱은 심성이 착하고 입술을 적시면 욕구불만이며, 양 미간이 좁으면 색녀일 수 있고, 목이 두꺼우면 처녀가 아니며 입술이 자색이면 건강하지 못해 자식을 낳는 데에 부적합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말도 안되는 조건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왕비나 세자빈 간택할 때 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퍼져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키가 크지 않고 머리선(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의 선)이 둥근 모양이며, 쌍꺼풀이 없고 눈꼬리가 처진 눈에 끝이 뾰족하지 않은 둥근 코와 얇은 입술, 길지 않은 목, 작은 손과 발, 큰 엉덩이, 희고 고운 피부라는 조건까지 붙었다.조선 왕비들의 외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앵무새 피를 떨어뜨려 처녀성을 판별하기도 했다.
  42. 해당 사진은 속옷 순서를 바꾸어 가슴가리개를 맨 위에 입은 것으로, 원래 가슴가리개는 다리속곳과 마찬가지로 맨 아래에 입는 속옷이다.
  43. 전통 심지
  44. 대나무에 창호지를 감싸서 덧댄 유물도 있다.
  45. 《寓圃笔记》:"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중국어 능력자의 해석 추가 요망.
  46. 국어사전에는 말총으로 만든 바지라고 서술되지만 사료에는 말총을 넣어 만든 속치마라 나온다. 애초에 裙은 치마 군이다.
  47. 고구려도 이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 변소에 갈 때 상당히 불편했을 것 같지만, 폭이 넓기 때문에 옷을 입은 채로 옷자락만 걷어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개당고인 경우 가랑이가 트여있어 큰 문제가 없다.
  49. 물론 반쯤은 농담. 겹쳐입은 속옷 수만 보더라도...
  50. 서민은 스무 명 이상 모여 술을 마시지 못했으며, 요와 이불은 면포만을 사용하고 능금단자를 쓸 수 없었다. 결혼식조차 옷과 장식은 집에 있는 것을 사용하고 사리능단을 절대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그래서 대대로 물려주거나 마을 단위로 한두 벌 장만해놓고 빌려서 사용했다.) 의복 관련해서는 형태, 재료, 종류 뿐만 아니라 허리띠, 머리 장식, 선, 단, 직물의 승수까지도 규제 대상이었다. 태조 3년에는 양부의 관원 외에는 사라능기로 된 의복을 입을 수 없고, 서인, 공상천례는 직품이 있더라도 은과 명주, 사피를 사용할 수 없는데 혼인할 때에도 직품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세종 11년에는 은 허리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혼인할 때에도 시관(時散)의 직품에 따라 각대와 실띠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으며, 대소 부녀를 수종하는 여종은 말군을 입지 못하고 입모도 모시만 허용되며, 모첨의 길이도 주부의 것보다 절반이 되도록 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금제가 있다. 규제가 정말 많다. 참조
  51. 이전 시대에도 사치 금지법이 존재했다.
  52. 의녀 포함인 규정도 있지만 그 의녀들이 기생 노릇을 하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53. 충청도 무속에서 쓰는 무구. 종이를 오려 무속신이나 부적, 진법 등을 나타낸 것으로 설경(設經)이라고도 한다.
  54. 어린 아이의 작은 이불. 덮고 깔거나 업을 때 썼다. 한자로 강보(襁褓)라 한다. 흔히들 말하는 '강보에 싸인 아기'에서 아기를 감싸는 강보가 바로 포대기다.
  55. 자주색에 금은 장식이 되어 있다는 것 외에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오른쪽 그림의 맨 왼쪽에 있는 인물이 쓴 모자를 그 색깔로 보아 소골이라 추정한다.
  56. 실제로 중국 고분 벽화에서 안악 3호분의 주인공이 쓴 관모와 거의 유사한 관모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57. 병자호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칠적관을 만드는 장인이 없는데다 기술을 전수해줄 사람도 없는지라 인조이후부터는 우리가 아는 대수머리를 제작해서 쓰기 시작했다.
  58. 굽이 있는 것
  59. 굽이 없는 것
  60. 솜을 두둑히 두어 버선과 같이 만든 신으로, 울타리가 높다. 노인용이다.
  61. 앞코가 왼궁혜의 반이며 볼이 좁고 울타리가 낮아 맵시 있다.
  62. 선조 대에 금지되었다.
  63. 국어사전에서는 귀고리와 귀걸이를 같게 보지만, 사학계에서는 귀고리는 귀를 뚫고 착용하는 장신구라 하고, 귀걸이는 귓바퀴에 걸치는 장신구를 가리킨다.
  64. 원래 옷에 금실을ㅈ직접 수놓았다.
  65.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 폐가 있는 듯 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 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 나라의 것이 아니며, 존비등위는 금은각대(金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굳이 흉배를 하여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66. 채금석 『전통한복과 한스타일』-p.200 '유물·문헌을 통해 본 고려시대 저고리' 중에서.
  67. 일반적인 고름은 외고름이었다.
  68. 천민은 치맛자락을 오른쪽으로 여미고, 고름도 오른쪽으로 고를 만들었다.
  69. 여기서 그냥 잡아빼지 않고 고를 만들면 쌍고름이 된다.
  70. 말기끈이라고도 한다. 흔히 가슴가리개를 치맛말기로 서술하며 가슴가리개의 고름을 말기끈으로 서술하곤 하는데,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말기끈은 치맛고름 혹은 바짓고름과 같다.
  71. 치맛고름은 1960년대 이후 향대, 혹은 눈물고름이라는 이름의 장식용 고름으로 갑툭튀했다. 시집가며 이걸로 눈물을 훔쳤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허구. 현대에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다. 원래는 치맛고름이 맞다. 요샌 저고리의 속고름도 단추로 다는 장식이 되었다
  72. 말기가 가슴 위로 올라오는 경우는 아이들이 입는 조끼허리통치마의 경우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가슴가리개를 매지 않으면 가슴팍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에 이르러 필사적으로 가슴가리개로 꽁꽁 가려야만 했다. 그러다 이를 본 선교사에 의해 애들이나 입던 조끼허리와 풀치마(자락치마)를 결합시켜 치마가 가슴 위로 올라오는(=말기가 가슴에 위치하는) 조끼허리풀치마가 형성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데, 조끼허리풀치마로 인해 가슴가리개를 착용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 말기는 가슴에 위치한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현대까지도 이런 조끼허리풀치마를 주로 착용하는데다 옛 복식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슴가리개를 한 것처럼 흉내내겠다며 말기의 폭을 대폭 늘린 말기치마나 치마 위에 두르는 말기대같은 것들이 새롭게 탄생하니 이런 혼란과 착오가 생기게 된다. 더군다나 말기치마와 말기대는 전통적인 가슴가리개를 착용한 것을 흉내내려는 목적에서 탄생되었으나, 한복 하의류의 허리 부분을 칭하는 말기가 버젓이 이름으로 붙어버렸다.
  73. 말기는 치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 치마를 보면 속옷 겸용이라 하기에는 말기 부분의 폭이 매우 좁다. 딱 치맛고름 정도의 폭.
  74. 어린 아이들은 실용성을 이유로 조끼허리통치마를 입었다.
  75. 개화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에 의해 생겼다
  76. 말기 부분에 고름을 둘러매서 치마나 바지를 입는다.
  77. 애초에 눈물고름의 어원 자체에 대한 논문 등의 자료가 없다. 이에 대한 정확한 어원을 아는 위키러가 참고자료 추가바람.
  78. 배씨댕기는 원래 서너 살 짜리 아이들이 착용하는 장신구다.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성인이 젖병 들고 삑삑이 신발을 신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자(...).
  79. 상투관은 상류층의 전유물인데, 특히 머리숱이 적은 노인들이 사용했다.
  80. 한복에 대한 최초의 책은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이다. 현대에 출간된 대다수의 한복 서적 역시 제작 관련이 아닌 이상 조선복식고를 참고하였다. 그러나 조선복식고 역시 일부 전문가들에 의해 오류가 지적되는 상황이므로 폭 넓고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간혹 일부 서적은 학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서술을 싣는 경우도 있어 역사와 고고학 및 복식(한복, 한푸, 북방계 호복, 남방계 복식, 기모노 등 복식 전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다소 곤란할 수 있다. 애초에 이러한 책은 대부분 전문도서라 관련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술술 읽을 난이도가 아니긴 하지만.
  81. 다만 병자호란 이후에서 조선 말기 의상들이 대부분이라 조선초기 및 중기의 궁중복식을 찾아보는건 불가능하다. 깨알 디스 대왕세종이나 용의눈물을 보자
  82. 배경이 한반도가 아니니 별 상관 없을 수도...?
  83. 취미가 개량한복 만들기이며, 명아연납작이에게 한복을 입힌 것도 그녀다.
  84. 한복만 입고 다닌다. 변장할 때에나 사복으로 갈아 입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