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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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성립전 막부 시절 군대에 대해서는 일본/군사사 문서를, 일본 제국 패망후 일본의 국방을 맡는 준군사조직에 대해서는 자위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본군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는 일본군/인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본 육군 보병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 육군 97식 전차
1942년 10월 쇼카쿠에서 발진 대기 중인 제로센후소급 전함 1번함 후소

1 개요

일본어 : 日本軍にほんぐん, 日本軍にっぽんぐん
영어 : Imperial Japan Army, IJA(일본 제국 육군) / Imperial Japan Navy, IJN(일본 제국 해군)

일본의 일본 제국시절의 군대이자 현 일본 자위대의 (실질적인) 전신.
동아시아에서 무차별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역사상 최악의 군대 중 하나

말 그대로 일본의 군대를 의미하지만, 현대 일본의 국가 방위를 책임지는 단체인 자위대는 비록 조직도 역할도 사실상 군대이지만 법적으로는 군대가 아니라 준군사조직이기 때문에 이 '일본군'이란 칭호는 자위대가 아니라 그 이전,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여 완전히 해산하기 이전의 일본 제국의 군대를 의미한다. 종종 그 일제의 군대는 옛 일본의 군대라 해서 구 일본군이라고도 하지만, 상기한대로 자위대는 군대로 취급받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일본군"이라고 해도 구 일본군을 지칭하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따라서 일제의 군대는 보통은 그냥 '일본군'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그들이 자칭하던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육군"과 "대일본제국해군"이었지만 보통 칭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게 부르지 않는다.

아니면 황군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천황의 군대"라는 뜻이다. 그 앞에 '무적'이라는 수식어는 꼭 붙였는데, 참고로 황군이라는 표현은 30년대 초에도 생소했다. 하지만 이들의 패악질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륙을 점령한 일본 육군의 신멸작전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약탈 행위를 보며 누리 황(蝗)자를 써서 황군"", 즉 메뚜기 같은 군대라고 비난하고 치를 떨었다고 한다.

2 역사

해당 항목 참조.

3 편제

해당 문서 참고.

4 문제점

해당 항목 참조.

5 전쟁 범죄

6 보급

6.1 외양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본군은 서류상에서는 제대로인 주둔지에 있다면 보급과 복지 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채소, 생선, 간식 등이 매 끼에 있었고 그 양도 결코 적지 않았다. 간식으로는 사이다양갱, 찹쌀떡 등이 나왔다. 또한 서양의 커다란 건빵을 현재 한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먹고 보관하기 좋은 모양으로 개량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 그리고 일부 건빵에 별사탕이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도 일본 육군이다.

최정예라 불리며 일본의 수도인 도쿄일본 왕궁을 지키는 근위사단의 시설은 준수한 편에 속했다. 내무실은 전부 침대형에 2층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28년에 준공한 보병 제3연대의 병사가 대표적으로,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당시로는 최신식 엘리베이터 4대와 리프트 2개가 있었고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난방은 모두 증기 난방을 채용하고 있다. 다만 입대해서 사용하는 병사들은 시골 출신자가 많고 수세식 화장실의 고장이나 엘리베이터의 고장이 속출하여 속을 썩었다"고 한다(<陸軍建立史>, <<銀星>>, 제6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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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반합을 당시 일본군도 사용하고 있었다. 32년에 제정된 92식 반합을 주로 사용했다. 이 반합은 M31로도 불린, 독일이 31년에 제정한 코흐게쉬어 31형 반합(Kochgeschirr 31)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마토급 전함의 경우 아직까지 해먹을 쓰던 당대의 함선에 비교할 때 초호화급인 침대를 두어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야마토와 무사시의 사관 식당은 전쟁 전 일본의 해운회사들이 운영하던 호화여객선의 식당에서 일하던 실력좋은 요리사들을 장교들이 급여를 십시일반해 고용해서 운영했다.

게다가 공간 절약이 생명인 잠수함도 승조원 대비 침상 비율이 1:1이었을 정도다. 미 해군 잠수함이 1.5~1.75:1 정도였으며 소형 잠수정크릭스마리네U보트는 2:1의 비율을 보인 것에 비해 엄청난 비율이다. 대신 반대급부로 일본 해군 잠수함들이 싣고 다닌 어뢰는 1척당 6~10발이 다였다. 그것도 수상배수량 3천 톤이 넘는 이호형 잠수함들이 그랬다. 2천 톤 대의 미국 잠수함들이 어뢰를 24발씩 탑재했고 배수량이 1천 톤도 안되는 독일 해군의 7형 유보트들도 14발의 어뢰를 챙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급선이 닿는 한 본토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군인부터 먹이고 봤다. 대신 태평양 전쟁 후기 일본 민간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는데, 당시 일본 민간인들의 1인당 하루 식량 배급량은 약 300g 정도였는데 보통 사람은 하루에 600g 정도의 식량을 필요로 한다. 확 와닿게 설명하자면, 하루하루 밥조차 제대로 못 먹고 산다는 현대 북한 주민들이 하루의 300g 정도의 식량을 배급받고 있다. 즉, 필요량의 절반밖에 배급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양조차도 모자란 배급 식량에는 쌀이 나오기는 커녕 이나 고구마조차도 없었고 전쟁 이전 돼지들 사료로나 주던 콩껍질이나 고구마 줄기 같은 게 잔뜩 섞여있었다. 여기에 4인 가족 기준으로 단백질을 공급해줄 정어리가 2마리 배급[1]되었고, 규정상 15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노인에 한해 1달에 딱 1번 과자가 배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어린 시절 태평양 전쟁을 체험한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그런 거 없다.

양도 질도 엉망인 무언가를 배급 식량이랍시고 받은 당시 일본인들은 소위 '천장죽'이라 부르는 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이 어찌나 맹물처럼 맑은지 천장이 다 비쳐보인다는 씁쓸한 농담에서 '천장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면 패전 직전의 야마토 승조원의 증언 중에는 "매운 카레라이스사과바나나, 마카로니가 들어간 샐러드가 맛있었으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그나마 상식적인데다 전시 이전엔 지원으로만 수병을 뽑았기에 보급에 좀 더 신경 쓴 점도 있다. 그러나 육군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주둔지에서는 해군보단 좀 떨어지지만 민간 서민 식사 이상으로 좋은 급식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급에서 좋은 점은 딱 여기까지라서 문제다.

6.2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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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보급이 정상적이었을 때에 잡힌 일본 육군 포로일본군의 보급이 끊어진 후에 라바울에서 잡힌 기아 상태의 일본 해군 포로들

일본군이 잘 나갔던 시절에도 일본군은 야전취사 장비를 구비하는 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 밥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던가 민가에서 징발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없어 개개인이 문자 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까지는 모든 군대가 비슷했다. 1차대전 초반 이전의 모든 군대는 식량을 던져주면 사병 개개인이 알아서 조리해먹는, 즉 재료만 던져주는 식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당번을 정하든 혼자 해먹든 알아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던 것이 1차대전 초반 이후 참호전으로 인하여 대군이 좁은 전역에 고착되어 연료가 부족하고[2] 더구나 연료가 있어도 조리 과정에서 발생한 연기로 인해 포격받기 일쑤인 상황이 되자[3] 후방에서 조리하여 전방으로 추진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전에는 취사병이라는 병과 자체가 군의 정식 편제에 없었다. 취사병과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른 야전취사 장비를 적절히 보급하는 게 일반화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저 모양이었다는 것은 일본군의 수준을 바닥까지 보이는 것이다. '군대는 먹어야 진군한다' 말을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사방팔방에서 다수의 인원이 불을 피우고 조리를 하였기 때문에 대량의 연기와 불꽃으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더더욱 쉽게 노출되었고, 덕분에 나무가 무성한 정글에서조차 미군의 정찰에 쉽게 발각되어 탈탈 털리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구나 전문적으로 조리를 익힌 취사병들이 소량의 연료만 써서 대량으로 취사하는 것과, 소규모 단위로 전투병들이 사방팔방에 불을 피우고 찔끔찔끔 조리하는 것은 시간의 활용과 연료 소모와 음식의 품질 면에서 효율성의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전문 취사병들에게 맡기면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 임무에 더 효율적으로 투입되며 조리 시간의 제약과 취사의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재료만 던져준 것은 바보짓 그 자체였다.

더구나 다수의 인원이 연료를 구해 조리하는 과정은 주변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결국 군인들이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 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 같은 것도 거뒀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탈을 했고, 이는 반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약탈만 한 게 아니라 미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이나 기타 대단하지 않은 명목으로 수시로 민간인살해하거나 혐의자가 1명만 있어도 해당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식으로 잔혹한 지배 정책을 펴서 태평양 전쟁 전역에 미군과 협력하는 수많은 게릴라가 나오게 된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병사의 수가 급속히 팽창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되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 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게다가 배고파서 먹은 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지 그냥 재미로 먹은 막장스런 경우도 존재하는데 조지 워커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치치지마 식인 사건 항목 참조).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현지의 민간인에게서 식량을 얻는 것은 유럽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이 경우는 약탈이 아닌 '구입'을 통해 얻은 것이였다. 똑같은 현지 징발이라고 해도 구입과 약탈 사이에는 당연하게도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정부와 같은 행정기관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것도 아니고 군인들이 직접 빼앗아왔기 때문에 더 비효율적이면서도 더 폭력적인 양상이 되기 쉬웠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은 커녕 중세시대 이전부터도 약탈로 보급하는걸 꺼려했고, 하다못해 같은 동아시아에서 중국도 오래전부터 현지에서 은전으로 식량을 구입했다. 즉 일본군은 중세시대만도 못한 야만적인 징발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탈로 일관했다.

장교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줬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이러한 탓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결국 반찬 없이 백미로만 밥을 먹으니 영양 불균형으로 각기병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장교들은 다른 반찬들이 잘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 없었다. 또 장교가 사병의 식단을 착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사병들의 식단은 장교들의 식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영양 문제는 위에서 나온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빼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고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은 편이지만 쌀과 밀 둘 다 필수 아미노산이 적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 식단에서 이걸 보완해주는 게 , 그 가운데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 각기병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을 했더라면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나마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당시 육군 군의총감(軍醫總監)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 때문인데, 그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지만,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다만 당시에는 각기병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라지만 그 이전에 이미 실증적으로 검증된 민간요법을 단순히 독일 의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시행하지 않은 모리 오가이의 병크는 크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일본군 육군한 상비사단 분의 해당하는 병력인 1만여 명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일본군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보리 혼식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4]는 의견이 컸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군 역시 한국전쟁 당시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집단 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안 나온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말은 그냥 만 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양학적 문제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급 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 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고,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미군으로부터 입수한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미군영국이나 독일 시민보다 잘 먹던 사람들이지만 노획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보급이 빈약한지 짐작이 불가능할 정도다. 다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보급은 매우 풍족한 편이었다. <영웅 김영옥>에서 김영옥의 회고에 따르면 유럽 전장에서 식량 배급은 말할 것도 없이 초콜렛,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조차 중분히 보급되었고, 미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스크림과 같은 특식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태평양 함대는 한 때 보급 받은 전투식량이 너무 많아 고생한(...) 적도 있을 정도.

사실 처음부터 일본군의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 나라와 크게 차이가 났다. 주적인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를 지원받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0.9kg(2파운드) 정도만 받았다. 0.9톤을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0.9kg이다.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물론 미군이 제법 많이 받는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보급량은 독보적으로 처절하다.

6.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군으로 수프만 쑤어먹어서 각기병으로 고생할 때 일본군은 콩을 키워 콩나물을 만들어 먹어서 각기병을 예방한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알고 먹은 게 아니고. "콩이 자랐네. 버리긴 아까우니 그냥 먹지 뭐"였다.

사실 러시아에서도 콩나물이 나오기는 했으나 식용인 줄 몰랐기에 먹지 않았다.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포로로 잡혔을 때 배식으로 나온 콩을 먹을 줄 몰라서 그냥 굶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콩으로 가득한 러시아군의 식료품 창고를 보고 콩나물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식문화의 차이가 전투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문제는 콩나물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콩나물이 자라고 적군이 각기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 전장이 고착 상태에 빠진 전선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전선이 어디냐고? 바로 그 유명한 전설203고지다.

7 각종 부조리 및 악행

대표적으로 일본군의 똥군기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프러시아식의 엄격한 내무규율과 강한 군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당시 농민과 구 사무라이 출신이 대부분이던 일본군을 단기간에 근대화한 군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프러시아식 군제를 도입했고, 그 전의 프랑스식의 자율적인 군사 제도보다는 일본 무가 사회의 분위기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지라 일본군 안에 급격히 퍼져 단기간에 근대화한 일본군의 모체로 거듭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

단, 프러시아 등의 18세기 당시 엄격한 군기의식은 전열보병을 이용한 당시 전투방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면서 구 시대의 이런 측면은 독이 되기 시작한다. 전열보병 항목 참조.

여기까지면 참 좋았는데, 이것이 변질되어 창의성을 말살한 간부 육성교육, 군 내 고위층 인사들의 교류와 토론 차단으로 인한 질적 저하, 폭력을 통한 강압적 통제가 합쳐져 일본군의 암덩어리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점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 대한민국 국군에 잔존하는 부조리의 상당수가 일본군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7.1 구타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에 더 가까웠다."
― 모리가네 센슈, 중국 전선에서 5년간 종군했던 일본군 병사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창설기에는 천황 숭배 교육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군기가 세워지지 않았다. 만세일계인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황에게 위대한 권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신화가 천황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겠어? 그래서 군 지휘부는 폭력으로 철저한 군기 확립을 하려고 한 거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납득시키는 방법으로는 폭력이 제일 쉽지."
카리야 테츠일본인과 천황

아래 만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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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에서 묘사된 일본군의 폭력. 이것 뿐만이 아니라 1권의 나카오카 고오지의 훈련소 생활에서도 나온다. 만화적 과장이 다소 들어있지만 저런 일들이 실존했고 비일비재했다.

사실 군대 내의 가혹행위구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가령 어 퓨 굿 맨, 풀 메탈 자켓미국 해병대를 다룬 영화에서도 가혹행위로 인한 사고나 자살 사례가 나오고, 현대 러시아군에서도 데도브쉬나라고 불리는 선임병들에 의한 가혹 행위로 불구가 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이런 것들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하다못해 일본군의 영향을 짙게 받은 한국군(특히 육군과 해병대)조차도 이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인식하고, 아직까지 미흡한 면은 많고 또 그로 인한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지만 어떻게든 구타와 가혹행위만큼은 철저하게 단속하려고 노력하고 있다.[5]

그러나 일본군은 아예 조직을 굴리는 기본적인 논리가 바로 이런 구타와 가혹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일본군은 단기간에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구타를 묵인했다. 카리야 테츠일본인과 천황에 따르면, 일본군 창설 당시, 각 군은 번주(藩主)에 충성하는 체제에서 국왕에게 충성하는 체제로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구타를 묵인했다. 실제로 이러한 구타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 중 하나가 메이지 덴노가 내렸다는 군인칙유로 일본의 근대화는 껍데기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하급 장교는 상급 장교에게 맞고, 상급 장교에게 맞은 하급 장교는 상급 부사관들을 때렸다. 하급 장교에게 맞은 상급 부사관은 하급 부사관을 때리고, 상급 부사관에게 맞은 하급 부사관들이 상급 병사를 때리며 그 상급 병사가 하급 병사를 때리고 하급 병사도 자기들끼리 만만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구타의 쉼 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고 한다.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회고에 의하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군 경리장교로 배치받은 직후 고참이라는 놈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그의 동기를 한 줄로 세운 다음 차례로 주먹으로 뺨을 갈기면서 이것이 하급자를 다루는 법이라고 가르쳐 줬단다. 이게 그 놈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심지어 가혹한 체벌이 성행하던 수백년 전 전열보병 시대에 비교하더라도 일본군의 구타는 후진적이다. 우선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은 어디까지나 군형법상의 처벌이지 비합법적인 구타가 아니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아무런 권한 없는 고참병 따위가 아니라 장교가 직접 선고하고 공개적으로 집행하며, 심지어 이 행위엔 집행 도구나 횟수도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이러한 체벌의 강도 자체는 채찍질 수십에서 수백 대 수준이라 한 번 당하고 나면 초주검이 될 정도라 구타보다 낫다고 할 것이 없었지만, 적어도 군법의 테두리 안에서 집행되는 것이므로 이후 이런 태형에 관한 사항을 군법에서 없애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유럽군의 간부 사이에 구타는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우선 장교끼리는 계급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를 귀족이나 신사로서 존중하는 유럽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결투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하급자라 해도 장교 계급인 부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악에 받친 부하에게 결투 신청을 받고 사이좋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장교끼리 막 대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투에서 지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할 수도 있고, 이겨도 군법에 따라 처벌이나 좌천을 면키 어려우며, 거부하면 겁쟁이로 몰려 상류 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사실 이것은 일본군의 문제만은 아니며 폭력적인 일본 조직 사회의 문제이다. 90년대 일본 프로리그에 용병으로 왔던 한 미국 여자 농구 선수는, 자신은 맞지 않았음에도 일본 선수들에 가해지는 체벌에 충격을 받아 계약 기간도 채우지 않고 미국에 돌아가 일본 체육계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연 일이 있다. 체육 만화에 묘사되는 것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일본 학원 체육에서는 이런 악습이 근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기에는 좀 더 깊게 따지자면 일본식 선(禪)불교가 원조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인 <팬시 댄스>똥군기가 여기서 유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고, 영화와 만화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에이헤이지(永平寺)라는 절에서는 실제로 승려가 행자[6]를 구타한다거나 하는 일이 태연했다고 한다. 참고. 물론 만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만큼 과장이 상당수 있지만, 인터넷으로 이쪽 바닥에 있었다가 환속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몇몇 땡중들은 전시에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병크를 태연하게 저지르기도 했다. 참고, 참고 2.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7]가 1997년에 내놓은 <불교 파시즘(원제: Zen at War)>이라는 책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2013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설명할 정신주입봉도 사실은 다른 것도 아닌 일본죽비에서 변형된 것. 일본죽비는 거의 몽둥이에 가까운 수준으로, 타악기에 가까운 한국 죽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와 별개로 일본군의 구타 자체가 최소 전국시대부터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악습 중 하나라는 설도 있다. 애초에 센고쿠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를 폭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시선도 있다. 사실 그 시대에 구타만으로 끝나면 정말로 크게 봐주는 거고 대부분 그냥 즉결 처분하기 일쑤여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다시피 일본군은 센코쿠 시대부터 시작해서 세이난 전쟁에 이르기까지 하도 서로 치고 박기만 해서 전쟁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느끼는 데다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으로 보이는 인명 경시가 만연했기 때문에 일본군 내에서는 즉결 처분이나 구타가 일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강한 군기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 정도도 못 견디는 약골이 실전 상황은 어떻게 견뎌내겠냐는 정신 나간 논리 아래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 강력한 폭력을 행사했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했고, 수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며 암기를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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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해군의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

일본 해군은 아예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이라는 구타 전용 몽둥이까지 애용했다. 사랑의 매 이쯤되면 완전 곤장, 태형이다. 군인정신주입봉에 맞을 때 하급병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다리 가랑이를 벌리고 양손으로 발목을 잡아 엉덩이를 내미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럼 상급병이 온 힘을 다해 군인정신주입봉을 후려갈기는데, 하급병은 앞으로 쓰러지자마자 즉시 일어나 다시 자기가 맞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서 보면, 햇치를 안 닫은 주범이 누군지 추궁하다가 일반 사병을 때리려고 하는데 그것을 후임에게 시킨다. 그러자 그 후임이 "싫습니다" 하고 하자 "뭐 임마?" 하면서 "모범을 보여주지" 하고서 만세정신주입봉이 부러지자 나중에는 쇠파이프로 때리려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후임이 "아놔 뼈 부러지잖아" 하며 그 상관을 구타한다.

이 외에도 차렷 자세로 세워 놓고 명치를 위로 올려치기, 엎드려 뼏쳐 시켜놓고 다리 차서 넘어뜨리기, 아예 날을 잡아 손을 보기로 작정하고 상급병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주먹과 발로 뭇매 때리기 등이 난무했으니, 일본군 내에서 구타로 인한 의문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직접적인 구타 외에도 구보나 각개전투를 몇 시간씩 쉬지 않고 시킨다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몇십 분씩 세워놓는 식의 가혹행위 또한 일상이었다. 이 지경이다 보니 하급병들은 차라리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을 이전처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어 구타는 그나마 후방에 있을 때보다 좀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도 행군 중에 무거운 것은 무조건 하급병들이 들어야 한다거나, 식량이 떨어지면 아사자 비율은 하급병으로 내려올수록 급증하는 등의 부조리는 어김없이 나왔다. 1900년대 초반 일본군의 신병 훈련을 참관한 서양인은, 행군 훈련에서 탈진으로 사망자가 여러 명 나왔는 데도 부대가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심지어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이것과 비슷한 벌을 자주 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단편소설 <사선>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과 평생을 악연으로 얽히고 결국은 사형수와 집행자 관계로 만나는 친구가 어릴 때 주인공과 수업 종료 몇 분 전에 떠들다 걸렸는데, 선생이 이 짓을 시켰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맞을수록 오기가 생겨서 결국은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위의 사례들은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일본군부의 영향이 유독 강했다. 이것도 일본군에서 하던 원조 뺨 때리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순화된 것이다! 원조는 병사들끼리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봐주려고 하면 바로 고참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주먹으로 죽빵을 날리거나 슬리퍼로 얼굴을 사정없이 갈겨대기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걸 면하려면 서로 죽기 살기로 때려야 했다. 그 결과 전쟁 후의 일본에서는 아직 젊은데도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뺨은 보통 오른손으로 때리니까.

이렇게 해서 그 군기를 잡는 효과가 있었냐 하면,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일본군 병사들은 판단 능력과 이성을 상실했고, 겉보기에는 상부에서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신건강에 크나큰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발성이 없는 이러한 외형적인 군기는 병사들의 무단 이탈, 탈영, 명령 불복종, 심지어 상관폭행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의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군기와 정신력을 보이는 듯하나, 실상은 가혹 행위로 정신병적인 기질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점령지에서 한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가혹 행위 등을 살펴보면 그 정도가 인종차별에 눈이 먼 나치 독일군유럽의 동부전선에서 벌인 만행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 중 일부가 민간인에게 강간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평가했을 지경이다. 자세히 풀이하자면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세뇌시켜놓아서 오키나와 전투 중 많은 주민들이 미군을 피해 동굴 등지로 숨었지만 전투 후 주민들을 구호하는 미군들에게 놀랐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이 증언자는 물과 식량도 없이 며칠을 동굴 속에 숨어있다가 미군들에게 구조되었는데 한 미군이 자기 수통을 꺼내 자기가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건네주어서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때서야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군이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허위로 세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언 중엔 일본군의 만행도 나오는데 동굴 속에 숨어있는 동안 아기가 울어대자 조용히 시키라고 다그치던 일본 장교가 아기를 죽였다고 한다. 이것은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온다. 피난용 민간인 방공호에서 주인공 가족의 갓난아기인 막내가 울자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강제로 빼앗으려 했고, 어머니와 현지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 놈들이 나약하다는 거다. 이 전투에서 지면 다 오키나와 놈들 책임이다"며 막말을 쏟아냈고, 이에 격분한 교사가 "당신들은 오키나와를 지키러 온게 아닌가요. 근데 왜 우리를 이렇게 박대합니까"고 정곡을 찌르자 쏴 죽이려 한다.[8] 비록 당시에 일본이 오키나와 주민을 식민지가 아닌 점령지 주민 취급했다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일본 국민인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이랬으니 중국인, 한국인, 동남아인들에게 잔혹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셈이다.

이런 구타는 사병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난징 대학살의 주범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수석참모로 사실상 전투를 지휘한 전쟁 범죄자 조 이사무(長勇) 중장은 연대장이나 여단장급(영관급) 장교들까지도 전 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먹으로 뺨을 갈겼다. 이 때문에 사실은 자살한 게 아니라 분노한 부하들의 원한을 얻어 살해당하고 자살로 위장당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지휘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부하 병사들에게 우습게 보이게 만들어서 각급 지휘관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전시에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고, 일본군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본군의 구타와 병영부조리의 실태는 이미 당시 일본 사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당연히 일본 청년들이 군 복무를 기피하는 주요한 까닭이었다. 도망쳐 숨어버려 실종자로 처리되거나, 도피성 유학과 해외이민, 심지어 고의로 자해하거나 범죄자가 되어서까지 징병을 모면하려는 청년들이 속출했다.

당연히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맛이 갈 대로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구타가 너무 빈번했고 이 시점에는 군인들의 자질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이 강제 해산되어 더 이상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소련군도 원한 문제를 제외하면 대민 사고를 많이 친 건 주로 후방에서 뒤늦게 징집한 보충병들이었고 이들의 상당수는 살인 같은 중범죄만 저지르지 않았다 뿐, 살면서 무수한 문제를 일으켜 온 양아치, 갱스터들이었다.

게다가 전투 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 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기에 전투 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 때에는 병사들에 건 통제력도 느슨해진다는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때도 일어났다. 후임이 원한이 있던 선임을 전쟁 중에 쏴 죽이고 적에게 죽은 걸로 은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실 이보다 더욱더 심각한 건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그 부하를 구타하는 짓을 했다는 거다. 사실 학살과 민간인 강간이 익숙한 일본군으로서 학살에 가담하지 않는 부하들에게 명령 불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구타와 폭행을 저질렀다. 자세한 건 기무라 헤이타로타치바나 요시오를 참고.

그리고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 사회가 상당수 물려받았으니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완전히 물려받았다는 소리는 과장에 가깝지만 일본군이 '기반'을 깔아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장교, 정확히는 구 일본군 식으로 양성된 한국인 장교가 대량으로 들어오기도 했으니 20세기 후반까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가혹행위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21세기로 넘어갈 즈음에는 많이 사라졌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530GP 사건이었다. 항목 참고.

그러나 잊을 만하면 여전히 구타 사고와, 또 다른 사고가 나곤 한다. 대표적으로 2014년 발생한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12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일부 일본군 관련 단어를 공식적으로 순화시켰다. 예를 들면 "구보"라는 용어가 "뜀걸음"으로 바뀌었다.

조선인민군도 창설 당시에 구 일본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을 뿐이지 일본군 식으로 양성된 인재들이 모여들어 간접적으로 일본군의 악습을 물려받았다. 거기다 소련식 위계질서가 섞이고 거기다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교리가 섞여들어가서 오늘날은 과거의 대한민국 국군 보다 더한 부조리 투성이가 되어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군의 일부 영향을 없애는데 성공했고 지금도 꾸준히 개선하고자 노력하지만, 북한군은 오히려 일본군과 똑같아지고 있다! 당연하지만 얘네들은 사실상 군국주의인 만큼[9] 군대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까지 일본군 식의, 아니 일본군보다 더한 사회 부조리가 일어나고 있다.

솔직히 이런 악폐습이 100% 일본산이라고하기 힘든게 사실 이것의 시작은 근대 러시아군의 고문 기술을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고 한다.[10] 다만 이게 일본군만의 악습이라 할 만큼 하필이면 이런 걸 군사 문화랍시고 들여와서 최강체로 만든것 자체가 일본군만의 문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7.2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

일본군도 규정상으로는 1년에 20일 정도의 정기휴가를 분명히 보장했다. 비교를 위해 설명하면, 한국군의 경우 육군 병은 8박 9일간의 정기휴가 3번, 해군은 육상 근무자 기준 기본 연가[11]에 8주당 2박 3일, 공군은 6주당 2박 3일 + 근무시간에 따라 추가되는 외박이 보장된다. 간부의 경우 공무원에 준하여 1년에 연가 21일을, 병가와 공가는 별도로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부대가 전장에 한 번 나가면 그 부대에서는 본토로 다시 철수할 때까지 휴가가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태평양에서 휴가 나와봤자 갈 곳도 없는 코딱지만한 섬들에 주둔했던 부대들이야 그랬다 치더라도, 사이판처럼 비교적 크고 일본 민간인들도 꽤 거주하는 섬에서도, 심지어 대륙인 중국 전선이나 버마 전선에서도 어디를 막론하고 휴가가 일체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방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를 후방으로 빼내서 휴식을 취하게 해주고 재충전을 시킨다는 개념도 거의 없었다.

"전쟁 중인데 휴식이라니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쉴 때는 쉬어야 된다. 심지어 기계도 재정비 없이 계속 돌리면 망가진다. 평시보다 극심한 피로를 겪는 군인들은 비전시일 때보다 전시에 휴식을 잘 취해야 한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강대국 군대들은 장병을 전쟁터에서 휴식 없이 몰아세우면 어느 순간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극한에 몰려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휴식, 휴가 등의 재충전 과정도 매우 중요시했다. 미국 같은 경우 훈련도가 높고 중요한 전력이 되는 인원, 부대일수록 더욱 휴식에 신경 썼고, 대표적인 정예부대인 육군 공수부대의 경우 작전이 끝나면 다른 부대와 교대하여 후방으로 빠진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음 작전에 최상의 상태로 투입되도록 하고 있었다. 해병대의 경우도 태평양에서 극심한 전투가 끝나면 역시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빠져서 충분히 쉬게 하였고, 조종사 같이 임무 수행에 최상의 컨디션이 보장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몇 시간 실전 임무 뒤에는 휴식 기간을 가지도록 배려가 되어 있다. 근무환경이 열악한 잠수함 승조원들은 1개월 작전하고 돌아오면 몇 주간 순번을 나눠 휴가를 보내다가 복귀 후에도 근 2달 정도는 출동 준비 명목으로 편한 일을 하며 보내게 해줬다.

이런 특수병종이 아니더라도, 일선에서 피해가 심한 해당 제대(대대 - 사단) 전체를 상급 부대의 예비 부대로 지명, 후방으로 빼내어 수 일에서 수 주동안 쉬게 해줬다. 전투가 급하더라도 재충전을 위한 휴식은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게르만과 슬라브 중 어느 민족이 절멸되느냐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던 동부 전선의 독일군도 1944년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동부 전선 자체가 사실상 붕괴를 맞기 전까지는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후방으로 빼서 재보충과 휴식을 주거나, 일정 기간 전선에서 복무한 군인에게는 휴가를 챙겨주도록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전황이 막장이 되어 충분한 휴식과 재편성 없이 마구 밀어붙이긴 했다.

참고로 태평양 전구는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휴식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어느 섬을 점령한 다음 차기 목표의 섬을 공략하는데는 육, 해, 공군을 융합한 정교한 입체계획이 필요했고 보통 수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유럽 전선과는 다르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섬을 점령하는데 투입된 부대는 작전이 끝나고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같은 후방지역, 마리아나 제도, 그게 안된다면 기존에 확보한 전진기지가 있는 섬 중에 괜찮은 곳에서 몇 달간 주둔하면서 병력 보충[12]과 재훈련을 실시했다.

프랑스-독일 혼혈 독일군 병사인 기 사예르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잊혀진 병사>에서도 화자가 정식으로 허락받은 휴가가 전선이 악화되어 취소되자 장교에게 조용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옆의 친위대 장교가 주인공 분대의 활약을 보고 전송한 추천서를 들먹이며 진급으로 퉁치면서전선에 복귀한다. 이전에도 휴가를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열차를 타고 본토의 고향이나 안정적이고 기후도 좋은 프랑스 등 후방 점령지에서 몇주씩 휴가를 보내다 역순행 열차편으로 복귀했다.

하다못해 그때까지 총력전을 수행할 기반이 못된 중국조차도 1년 중 4개월은 전면 대치, 4개월은 적군 후방 유격, 4개월은 아군 후방기지에서 재훈련이라는 개념을 두어서 일정한 기간마다 군인들을 순환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예비 부대를 만들어 작전 도중에 군대를 교체하려고 노력하였다. 다시 말해서 근대화를 수행하지 못한 중국조차 알았던 것이 바로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적절한 휴식이었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 군대 중 오직 일본군만 일단 한 번 전선에 나오면 휴가가 절대 없었다. 휴가는 고사하고 현지에서의 외박이나 외출도 도저히 더는 영내에 병사들과 수병들을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해이해진 막장스런 상황 같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사실 일본군의 경우에는 휴가를 '안' 보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못' 보내주는 면도 있었다. 잔혹한 구타와 상급병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하급병이나 조선 출신 병사나 수병을 휴가라고 내보내줬다간 십중팔구 그대로 멀리멀리 도망쳐 일본이 패망할 그 날까지 나타나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하고, 상급병이라도 휴가다! 하고 비무장 상태로 영외에 나가 쏘다니다간 일본군의 학살, 강간, 약탈에 원한이 골수에 맺혀있는 현지 저항 세력이나 현지인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끔살 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일본군은 고급 장교들을 위한 클럽이나 기생집은 전선 코 앞에까지 줄줄이 들어서는, 제정신이 있는 군대라면 상상도 못할 짓은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으니, 병영 안에 통조림처럼 갇혀서 이 기막힌 꼬라지를 지켜봐야 했을 병사들과 하사관, 하급 장교들이 무엇을 느꼈을 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일례로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 중에 사령부 옆에 기생집 차려놓고 5시면 기생집으로 칼퇴근했다거나, 필리핀에서 타이완으로 적전도주해온 도미나가 교지가 자기 차에까지 기생을 태우고 다녔다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도 이런 불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평소에야 가혹행위를 통한 억압적인 분위기로 병사들의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그 통제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전장에서는 부대가 일시에 붕괴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그랬다간 자기들 목숨부터 위험해질 게 뻔하기에 휴가를 못 보내주는 대신 영내에서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방안을 강구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악랄했다.

7.2.1 휴식과 재충전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 음주, 약물, 일본군 위안부, 가혹행위

쉬지 못하는 대신 사기 증진을 명목으로 정상적인 군대에선 있지도 못할 별의별 건전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행위를 장려했다.

일본군과 사회 전반에 걸쳐 피로 회복제로 다량 지급된 히로뽕은 전시에 수많은 중독자들을 낳은 뒤 전후에도 사회 문제가 되었고, 술에 관대한 문화 역시도 군인들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 일본군 위안부도 강제로 끌려나온 점령지 여성들에게서 강제로 성을 착취하여 스트레스를 풀라는 말이니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일본군이 병사들의 불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중국인 등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가혹 행위를 적극적으로 명령하거나 또는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일본군 장교들의 회고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의 총부리를 언제 자기가 속한 일본군 자체로 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본군의 악행을 한층 더 부추겼던 것이다.

7.3 부정부패 및

"군대는 잔인해, 이젠 내가 자네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내지의 군대는 뼛속까지 속속들이 썩었어. 해외에서 근무했을 때, 난 내지의 군대만큼은 명예와 위엄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지키는 줄 알았었지. 불행히도 귀국 후 나는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사실을,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처음엔 나도 장교로서 할 수 있는 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 몰락을 초래했다네. 난 내 마음을 다해 군을 사랑했네. 그래서 군대를 조롱하거나 좀먹는 놈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소령들과 대령들, 연대장과 사단장 같은 커다란 장애물들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네. 오직 상관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최우선이었어. 장교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도 기쁘게 해주어야만 했지... 나는 부대 하사관들 중 최선임자였던 보급계 하사관과 아는 사이였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대대장의 집에서 떠날 수 있는 날이 없었지. 왜냐면 그녀가 거기 들락날락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봐주지 않으면 남편이 결코 진급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모습들이 날 너무나 부끄럽게 했네... 배급받은 보급품들은 곧바로 사령관에게 직행했고 그는 그것들을 사적인 선물용으로 다 써버리곤 했지... 자네도 시모라이 중위를 알고 있겠지? 그놈은 자기 부대원들한테 자기 집을 짓게 하고는 지금 거기서 살고 있어. 난 이런 부패를 참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뭔가를 해보려고 애썼지만, 난 곧 지칠 대로 지쳐버렸어. 그건 한 사람이 하기엔 너무나도 큰 일이었지... 난 결국 해임당하고 병들어버렸네. 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지.
― 노마 히로시, <진공지대> 中

참고로 노마 히로시는 일본의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징집되어 필리핀중국 북부 전선에 참전했으며 반체제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사카 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1943~44). 전후 군대에서 자신이 겪었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2차 대전 후 쓰여진 전쟁소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진공지대>를 집필하였다.

일본군은 외형적 군기의 확립에는 변태적으로 집착했음에도, 정작 정말로 군기가 엄히 선 군대라면 가장 먼저 근절시켰을 부패와 비리가 내부에서 범람했다. 장교들은 사병들의 식단부터 시작해 뜯어먹을 수 있는 모든 군수품을 중간에서 착복했고, 장교의 계급은 곧 그 장교 가족의 계급이었으며, 하급 장교의 가족들과 사병들은 상급 장교들의 사적인 일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부려졌다.

안 그래도 일본 제국의 국력 자체가 부실한 데다, 중요한 건 물자가 아니라 정신력이라는 병맛나는 생각이 충만한 군대가 일본군인데, 그나마 쥐꼬리만한 군수품도 중간에서 사정 없이 여기저기서 뜯어먹히니, 근위사단이나 전함 야마토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군수품이 모자라지 않을 날이 없었다.

그리고 하사관이나 상급병들은 하급병들에게 다른 중대에 몰래 들어가서 모자라는 보급품을 구해올 것을 묵시적으로 강요했다. 도둑질할 배짱이 없거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보급품을 훔쳐오지 못한 병사병신 취급을 받고 구타를 당했으며, 약삭빠르고 뻔뻔하게 보급품을 슬쩍해와 중대에 나눠 준 병사는 큰 칭찬을 듣고 똘똘한 병사로 대우받았다. 일단 한 번 보급품이 없어지면 도둑맞은 병사 역시 좋건 싫건 도둑질로 숫자를 채워 놓아야 했다. 간단히 말해 군대에서 도둑질을 배운 격이라 보면 된다.

일본군에서 모든 보급품은 국가의 재산이기도 했으나 명목상으로는 덴노의 하사품이었기 때문에, 일개 병사가 덴노의 하사품을 잃어버린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장교는 거의 없었다. 정말로 보급품을 덴노의 하사품이라 여겼다면, 감히 어떻게 그 하사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내부 사정 때문에 일본군 부대 간에는 서로 훔치고 도둑맞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일본군의 성전이자 모든 병영부조리의 근거였던 군인칙유에는 "군인은 충절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적혀있었지만, 병사들은 상급자가 없을 때마다 "군인은 요령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라고 자기들끼리 비웃곤 했다.

이렇게 군인정신주입봉은 군법보다 가깝고, 비열한 놈일수록 이득을 보며, 선랑한 이는 짓밟히고, 약한 자는 먹잇감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군인정신주입봉으로 맞아가며 문자 그대로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은 먹은 짬밥에 정비례해 양심이 메말라갔다. 결국 그들은 자기나 자기가 속한 부대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불이익과 고통을 주는 행동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8 한반도의 일본군

8.1 개관

1910~1945년 사이의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일본 제국) 항목을 참조할 것.

8.2 조선 군인

조선 군인이란 신분도 있었는데 이들은 1907년에 해산당한 대한제국군 가운데 잔류해 일본군에 편입된 자들이다.

그 밖에 일본군에 편입이 아니라 입대한 인원은 조선인 일본군을 참고할 것.

8.3 한반도와 남만주[13]의 일본군 만행

  • 1894년 6월에 전주화약으로 이미 동학농민운동이 해산되었는데도 억지로 군대를 보내어 한성에 눌러앉았다. 6월 21일에는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면서 경복궁을 기습으로 점거했고 동시에 여타 조선군 군영을 공략하여 한성을 장악, 흥선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김홍집을 시켜 갑오개혁에 들어갔다. 이어서 7월 25일과 28일에 각기 해상과 육상에서 청군에게 선전포고 없이 선빵을 날리며 청일전쟁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동학농민운동도 다시 봉기했다.
  •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으로 체결 장소인 덕수궁을 대거 점령하고 고종황제와 관료들이 체결을 거부하게 될 때 언제든지 공격할 태세를 취하면서 대기하였으나 체결이 성사되면서 덕수궁에서 철군하였다.
  •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때 해산에 분개하여 교전을 벌였던 대한제국 군인들을 제압하고 대거 사살 및 체포하며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만악과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에도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대거 합류한 의병이나 독립군과 연이은 교전을 벌였고, 급기야 호남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서 이들을 말 그대로 쓸어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벌인 만행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必要韓紙?
  • 1919년 3.1 운동 때는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합동 소탕작전을 벌인 끝에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와 조선의 양민들을 대거 학살하였고, 육군이나 헌병은 물론 해군 병력까지 출동시켜서 만세운동을 저지하며 진압하는 강경책을 일삼았다. 이후에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질렀고, 그 외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 및 만세운동을 하는 자들은 모조리 집단학살을 하였다.
  • 1920년에 참전한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에서는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끌었던 조선 독립군에게 대거 병력이 전사하는 참사를 낳았다. 일본군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무단탈영까지 하였으며 일부는 그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 있는 조선 양민들을 모조리 잡아서 학살하였다. 1940년 한중 연합군 때에도 기습 작전에 휘말려서 대거 전사하였고,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탈영하는 사태를 빚었다.
  •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무고한 청년 및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일본군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연합국과의 교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에 따라 35년 만에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하였다.

9 결론

"일본군의 행동과 전술은 잡병 수준이다. 단체로 모여서 돌격밖에 할 줄 모르며 제대로 된 중화기도 없었다. 악에 받쳐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력이라는 말도 안되는 힘으로 화력 차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존 바실론
"장군님. 저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스스로 자결을 기도합니다."
미 해병대 제1사단 밴더크리프트 소장이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뒤 해병대 사령관 홀컴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 中.
"일본군한테 중화기란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그들은 정신력의 일본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체이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멸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번 전쟁으로 그들도 무엇인가를 깨닫겠지만 그러기까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클 것이 두렵다."
― 미국 해군, 과달카날 전투보고서.
"모두들 안심하라. 저들은 헛된 망상에 빠져 온갖 병영부조리로 인해서 내부로나 외부로나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의 승리가 눈 앞에 있다!"
장제스맞는 말이긴 한데 왠지 이 양반이 말하니까 영...

일본은 당시 아시아 최강이라는 수식어구가 있었으며 세계 최강 미국에게 직접 대적하기까지도 해본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그 화력으로 아시아 지역을 침략하며 뻗어갔지만, 결국 연합군에게 응징받았다. 전적을 본다면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은 손실교환 비율이 컸고, 팔로군이든 국민당군이든 그 약함에 큰 차이는 없었다. 독립군은 '비정규군'이라는 태성적 한계상 병력과 물자의 수에서부터 열세였고, 외의 요소들 역시 '정규군' 일본군에 비해 너무 불리해 청산리 대첩 이후에는 별다른 큰 전과를 보이지 못하고 국토가 완전히 유린당한 이후 보급 등 기본적인 문제를 풀려면 중국군이나 소련군 등 다른 군대와 연합해야 했다.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 식민지는 전투 의지가 중국군만도 못했고, 말도 제대로 안 통했으며, 당시엔 그럴싸한 공조도 안 되었다. 또한 소의 꼬리이탈리아보단 닭의 머리인 일본이기에, 더 주목을 받기 쉬운 이유도 있었다.

반자이 어택으로 비웃음을 받는 일본군이지만, 모든 일본군이 다 무개념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런 사단도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제4사단은 그 유명한 오사카 고스톱 사건을 일으킨 부대다. 다만 일본에서 관서 지역은 다소 지역드립에 시달리는 편이다. 실제로 제4사단은 다른 일본군 사단에 비해 다소 지능적인 활약을 벌였다는 증언도 보인다.

사실 일본군은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선구자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 육군스페인 내전과 더불어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도 해봤는데, 이는 일본군의 대표적 전쟁범죄로도 거론된다. 충칭 대공습이라든가. 도쿄 대공습에서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게 바로 충칭 대공습이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전차의 집단운용을 통한 기동작전[14]을 시도했다. 다만 자기네들은 그닥 인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적국이 더 써먹었다는 점이 문제다. 할힌골 전투에서의 전훈은 그냥 무시하고 해당 전투를 패배한 전투라 하여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은폐하기에 바빴다. 그 뒤로도 전차는 물론 기본적인 대전차 수단에조차 딱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은 덤이다. 전략폭격을 수행하는 역량도 연합군이 압도적이었고.

이 외에도 일본의 산업 기술력은 전반적으로 영미에 비해 굉장히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강이라고 광학 관련 분야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발전도를 보였고 항공기 기술의 경우도 영국과 미국은 못따라가도 소련보다는 우수했으며 공랭식 기체에 한해서는 독일과 비슷한 수준까지는 갔다. 물론 독일과 영국은 공랭식 엔진보다 액랭식 엔진을 더 선호하기는 했지만 저 두 나라가 공랭식 엔진이 형편없는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15] 육군이 최약체라고 비웃음을 사지만 그래도 일본 해군은 세계 3위권 수준이었다.

군축조약에서의 기준으로 보나 실제 총 톤수 기준으로 보나 3위 정도를 유지했으며, 영국은 대서양과 지중해에 대부분의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태평양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미 해군진주만에서 큰 타격을 입으며 총 톤수 기준으로도 41년 시점에서 일본군 해군은 18만 톤을 기록, 13만 톤 정도까지 내려간 미국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태평양에서는 한동안 연합군을 상대로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상대가 상대여서 그렇지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우수한 하드웨어를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애당초 군축 조약의 한도 설정이 그 모양이라 그랬다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애초에 군축 조약에서 한도를 설정할 때 당시 보유한 함대 규모를 감안해서 설정한 제약이라는걸로 반론이 가능하다.

이 외에도 거함거포주의 운운하지만 사실 그런 문제는 영국 해군을 위시한 다른 해군도 비슷하게 겪었던 문제였다. 오히려 일본 정도면 항공모함을 적극적으로 운용한 편에 속한다. 그 미국조차도 항공모함을 그토록 적극적으로 활용한 데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게 크다. 물론 일본도 전함을 그런 임무에 투입할 수 없어서 항모를 보냈던 거지만, 그게 의외로 대박을 쳤고 의도하지 않게 항공모함을 제법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 외에 제로센도 여러 외부적 요인이 겹친 덕에 태평양 전쟁 초반 한정으로는 괜찮은 기체이기도 했고, 항모 관련 기술력 역시 독일에 한 수 가르쳐 줄 정도였다. 양국이 전쟁에 투입한 장비들의 수준 차이를 보면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겠지만, 베르사유 조약 체제하의 독일에서는 군사기술 습득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육군이야 소련과의 비밀 조약을 통해 어떻게든 연구가 이어질 수 있었다지만 군함 정도 되는 물건은 그게 어려우니까...

그리고 산소어뢰 정도면 비밀병기라 칭해도 좋을 만큼 위력 하나는 괜찮기도 했다. 당장 대전기 관련 문서들을 봐도 숱하게 나오는 기록들이 '화력만 충분하면 나머지는 전장에서 알아서 운용할 테니 제발 쓸 만한 무기를 보내달라'는 요청 내지 호소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보면 산소어뢰의 화력 자체는 최초 등장 시점에서 확실히 좋은 축에 들었다. 문제는 지지부진한 개선과 제공권의 상실로 갈수록 써먹기 어려워졌다는 것이지만.

전쟁 말기의 카미카제, 가이텐 등의 삽질은 논외로 하고 따져본다면 군사적 측면에서 일본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기를 직접 운용하는 일선부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전략의 결함이었다. 여기에 육해군 간의 대립, 각 군 내에서 다시 벌어진 각 파벌 간의 대립, 대미 개전을 위시한 전략적 삽질이라는 오판, 경직된 연공서열 체계, 총력전에 대한 무지, 민간 경제 등에 대한 지식 결여가 합쳐져 총체적 난국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런 소프트웨어도 따지고 본다면 그만큼 돈을 발라야 한다는 반론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다못해 일본 이상으로 막장이라는 중국군충칭에서 농성해서 지구전을 펼치면 어떻게 될 거라는 상황 판단하나는 잘한 점, 아니면 유고나 이후의 베트남 같은 나라들도 전략적 판단 하나는 잘한 점을 감안할 때 그토록 거대한 규모로 운용되었던 일본군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또한 일본군의 똥군기 등 뿌리 깊은 악습은 전후 대한민국 군대대한민국 사회에 스며들었다. 물론 이와 같은 상명하복은 조직 유지를 위해서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상명하복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사건 중 물리적 충돌, 심하면 아랫사람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사건에 과거 일본군의 영향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본시 상명하복이란 건 합리적인 명령하라는 전제조건 하에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이 모리배들을 훌륭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군의 각종 병폐 및 악행으로 인해서 수많은 아시아인들 및 일본인들, 그리고 절대 다수의 일본군 구성원들이 크나큰 고통을 받았고, 이는 일본 그 자신에게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니, 오늘의 일본 역시 일본군의 행태를 절대로 본받아선 안 될 것이다.

10 대중 매체

10.1 한국

일제강점기를 겪어왔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주로 구한말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및 드라마 등에서 빠짐없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한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조선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하며, 그 밖에도 소녀들을 선동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끌어가는 만행도 저지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며 포악한 존재로 나온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특성상 현재의 일본 자위대는 주요 소재로 안 다루는 편이라 현대가 배경이던 한국 드라마에는 자위대가 없지만, 한국 영화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해군해상자위대가 대치하는 장면이 나온 적은 있으나 마지막에 아무 일 없이 서로 철수하였다.

문학 역시 예외 없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면 글귀에 일본군의 악행과 만행이 나오고, 조선왕조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에도 임진왜란을 거쳐서 일본군이 자주 등장한다. 구한말 및 근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에는 운요호 사건강화도 불평등조약, 동학농민운동을미사변 등을 거쳐 자주 그리는 편.

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연극 배우들이 일본군 연기를 맡으며 일본군의 만행과 악행을 재현한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관객이 현장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특성을 보면 일본군의 모습이나 만행 등을 생생히 재현하는 셈이다.

그 밖에도 일부 3.1절 만세운동 재현행사 때 일본군으로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나와서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재현을 거쳐서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일본군은 악질적이고 살인마와도 같은 존재로 나온다.

다만 영화 놈놈놈이나 마이웨이와 같이 악랄한 측면보다도 일본군의 멍청함과 병신스러움이 더 드러나는 특이한 때도 있다. 특히 영화 <암살>의 경우 그냥 스톰트루퍼(...)

10.2 중국

중국의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중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한 존재이며, 그 밖에도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는 만행도 저질렀으니 한국과 같이 중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고 포악한 존재인 편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각종 만행들이 워낙 많고 잔혹하다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중국의 악역(일본병사) 전문 배우는 "악당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군의 역할을 표현한 바 있다. 애초에 중국에도 '쪽바리'와 비슷한 어감의 '워누'(倭奴)라는 욕이 있으니 일본군을 미화시킬 수가 없는 환경이다.

다만 홍군(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하드라마라면 악랄한데 엄청 잘 싸우는 것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2011년 방영한 <상해, 상해> 같은 드라마에서는 팔로군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 트럭 속 소년병 엑스트라가 머리에 총알 관통상을 입는데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팔로군 게릴라의 공세가 멈추자마자 트럭의 포장을 걷고 압도적인 기관총 화력으로 팔로군 게릴라를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 물론 일본군이 잘싸웠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홍군의 뻥튀기된영웅적인 투쟁을 강조하려면 적이 그만큼 강력하다고 보여줘야 하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실제로는 국민당이 주력이었고 공산당은 항일보다 세력확장에 더 치중하고 팀킬까지 저지르고 다녔지만.[16]

중국 온라인 FPS 광영사명 온라인에서는 중일전쟁 배경의 코옵 모드[17]에서 일본군이 적으로 등장하는데 사살해 보면 소속이 "일본군" 이 아니라 대놓고 그냥 "鬼子" 라고 표시되고 적들 중에서 상하이 맵의 상급 장교는 사살시 "전범(战犯) xx 사살" 이란 메시지가 뜨는 등 센카쿠 열도맵의 자위대[18]와 달리 게임 내 취급부터 경멸과 혐오가 가득 들어있다.

10.3 서방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일본군은 당연히 악역으로 나온다. 미국 쪽 매체에서는 특히 태평양 전쟁의 지옥 같았던 경험담이 들어가 인간미를 찾아보기 힘든 미치광이 집단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다. 다만 이따금 '그들도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동정적인 묘사를 하는 매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린호넷케이토 같은 경우 일본군이었지만 난징 대학살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같은 부대원들을 죽이고 탈영했다는 식의 뒷설정도 들어갔다. 다만 작품의 기초적인 설정 자체가 각이 딱 잡혀 있지 않아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설정이 바뀌는 때가 있다. 심지어 코믹스 중 가장 후기 시간대를 다루는 코믹스에서 케이토는 히로인 포지션의 여성이다.

한때 한국에서 친일 논란이 일었던 더 퍼시픽은 의외로 무미건조하게 일본군을 조명한 편이다. 옹호의 시선 그런 것도 없이 일본 극우들이 보면 뒷목 잡고 쓰러질 연출을 가감없이 집어넣었다. 특히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인간 폭탄으로 미군들에게 내보내 그 자리에서 폭사시켜 버리는 장면 등 일본군 막장 전설의 고증이 리얼하기에 한 화에서만 "Kill Japs"와 "Fucking yellow monkeys" 같은 과격한 대사가 쉴 새 없이 남발되고, 상술한 묘사를 포함하여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와 병신스러움이 아주 정확하게 보여지고 있다.

한편으로 현대 일본의 위상이 한때 세계경제 2위까지 했고 지금도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데다 잘 나갈 당시 적극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미화, 포장하여 수출하여 서구에서 상당한 숫자의 와패니즈들, 즉 서양 일빠들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뭐든지 신비주의적으로 보며 동경하는 이들에게 있어 총 들고 빵빵 쏴대는 적군을 앞에 두고 군도를 들어 "반자이!"라 외치며 돌격하는 일본군은 마치 무슨 판타지 군대를 보는 듯해 신선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물론 와패니즈들을 서방권 전체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절대적으로 소수인 것이 현실. 미국 등지에 오타쿠 정보 전문 사이트에서 일본군이 사무라이들의 군대로 미화되는 경우도 종종 보이거나 이것 때문에 키배가 벌어지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장비의 참신성(?) 때문인지 의외로 콜렉터에게 각광 받고 있으며 특히 헬멧과 군모의 조합 때문인지 디자인상으로는 관심을 가지는 서양 밀덕들이 많으나 어디까지나 콜렉션을 위한 것 뿐이지 실용성이나 여러 면에서 서양 밀덕들에게 까이는 쓰레기 장비들로 이루어진 군대다. 오히려 밀리터리 계열 서브컬쳐에 프로토타입 드립과 스토리가 진행되기 위한 과도한 정신력 드립에도 일조한 면이 있어서 개연성 있는 전쟁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도 대대손손 까이는 하등 도움이 안되는 군대.

그나마 '보기에는 거대하고 위압적이지만 정작 싸워보면 쉽게 쓰러지는 악의 군대' 클리셰를 현실에서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악역으로서는 쓸모가 있다는 것 정도? 공교롭게도 재패니메이션에 제법 흔하게 나오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일본의 일부 상위 1% 바보 성향의 사람들이 현대 러시아군, 중국군, 한국군 상대로 바라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10.4 일본

사실 일본군의 막장스런 실태는 일본인들도 꽤 잘, 아니 주로 반전(反戰)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일본군 내부의 부조리나 병크가 곧잘 나온다. 반면 유명한 사카이 사부로를 비롯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며 좋은 성과를 거둔 몇몇 인물들을 영웅담의 소재로 곧잘 쓴다. 물론 한편으로는 상당히 미화시켜 보여주거나 하는 때도 있지만 의외로 이쪽이 더 마이너하며 크게 인기도 없다. 애초에 보통 과거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다.

일반적으로 일본 매체 내에서 일본군 내의 가혹행위나 부조리는 반전소설에서도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독일과 매우 대조적인데, 독일의 여러 영화들은 2차대전을 묘사할 때,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클리셰처럼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들, 즉 슈츠슈타펠 뿐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까지도 각종 만행이나 사악함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독일에서 만든 영화 특전 유보트(Das Boot)는 잠수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면이 잘 안 나타났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 나치 시절의 군인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촬영된 TV시리즈를 보면 역시 사람 살기 힘든 곳임이 잘 나타난다

문제는 일본 영화에서는 아예 그런 거 없다는 점. 그러니 일본의 2차대전 영화들은 1950년대부터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일본군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미화하며, 스스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버마의 하프>나 <호타루> 같이 극우와 거리가 먼 반전 영화도 마찬가지며, 전쟁의 비극은 그리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잠시 구타나 일본군의 육해군 갈등이 묘사되긴 하는데, 아마 일본인 감독이라면 이런 장면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공통적으로 일본 군부가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막장 군대다운 면모는 보통 안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자국민에게 "자국군이 악당이었다"라고 생으로 들이밀면 당연히 기분 나빠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얘기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본 사회가 과거사의 반성을 제대로 안했다는 뜻이다. 몇몇 부분 한정으로는 나타내기도 한다.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의 경우 방공호에서 아기가 울자 뺏으려는 일본군 본토 병사를 오키나와인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 인이 나약하다고 소리 듣는 거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너희 오키나와 놈들 때문이다"라면서 총으로 사살하려고 하거나 오키나와인 출신으로 징집된 아버지가 찾아낸 부상당한 미군 파일럿을 포로 대우고 뭐고 사살하려고 하는 일본군 장교가 나온다. 다만 이 경우는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 우익들도 빼도 박도 못하게 일본군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막장짓도 있고 오키나와 도민들도 기억하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전적인 미화가 힘들다.

현대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군의 만행을 부정도, 미화도 않는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군의 만행을 미화하거나 전범들을 영웅시까지 하니, 독일과는 참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독일도 과거를 곱씹으며 반성하기보다는 '흑역사니까 잘 수습하고 덮어버리자'에 가깝기 때문에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아주 깨끗한 건 결코 아니지만[19] 일본은 그것을 2차 창작으로 이어 상품화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문제다.

가끔 가공전기 등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도 있다. 그래서 가공전기지만. 게다가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해군만큼은 미국과 동급으로 나온다.

그러나 모든 일본 매체가 일본군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화들이 있는데,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가 나오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작가 미즈키는 지옥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갔었고 왼팔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일품이다.

오시이 마모루 작품에서는 일본군은 그리 안 나오지만 군대가 되려는 자위대가 자주 나오는 편으로 일단 작품상의 자위대는 까이는지 안 까이는 건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세력으로 나오는데 일단은 전반적으로는 약해보이게 나온다. 일설에 따르자면, 오시이는 운동권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계엄령이 떨어져서 자위대 소속 치안군이 도쿄에 주둔하게 되는 패트레이버 2번째 극장판에서 여러가지 추태를 보이는데, 그 중 걸작인 것이 비행선이 추락하면서 가스가 누출되자 집단으로 패닉에 빠져서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다가 전부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추태를 보인다. 이 가스는 후에 착색가스로 밝혀졌다.

11 기타 관련 항목

11.1 참고 서적

  • 《미완의 파시즘》
  •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 《대본영의 참모들》
  • 《일본의 군대》
  • 《일본군사사》
  • 《왜 일본 제국은 실패하였는가》
  • 이노세 나오키 저《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한도 가즈토시 저《쇼와사》
  • 니얼 퍼거슨 저《제국》, 《증오의 세기》

11.2 조직체계, 계급체계, 주요 인물, 무기체계

11.3 관련 학설

11.4 관련 전투 및 사건

11.5 연관 항목

  1. 정어리는 그리 큰 생선이 아니다. 정어리 2마리 정도면 현재 대형마트 등지에서 파는 통조림 한 캔 정도의 분량인데 이게 80g 정도이다. 80g의 생선으로 하루 4인 가족의 단백질을 보충하라는 것이다.
  2.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곳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보라. 더욱이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죽치고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는데 연료가 남아나겠는가?
  3. 이러한 이유때문에 병사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중에는 고체 알코올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다. 연기가 나지않기에 포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나마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수 있으니까.
  4. 지금은 쌀밥이 흔한 밥 취급받고 콩밥 등의 혼식이 신경 쓴 건강식이라며 주목받지만, 쌀 생산량이 떨어졌던 전근대까지만 해도 100% 쌀로만 지은 쌀밥은 부의 상징이였고 혼식은 가난의 상징이였다. 오죽하면 윗 동네의 목표인 지상락원이 '이팝(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일 정도. 문제는 거긴 원래 목표에서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고 있지만.
  5. 단, 국군도 1980년대까지는 가혹 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가혹 행위로 야기된 자살도 언론 검열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덮어졌다. 당시에는 가혹 행위가 군인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이 만연했으며 지금처럼 가혹 행위가 지탄받게 된 것은 다소 최근의 일이다.
  6. 갓 출가한 사람. 승려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단계이다.
  7. 작가 본인도 에이헤이지에서 수행하고 고마자와 대학을 나온 미국인 불교 승려였지만 일본 불교사를 공부하는 와중에 이런 더러운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8. 참고로 이후 전개는 미군 전차의 포격으로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려 그 일본군은 사망한다.
  9. 대한민국에서 1987년 이후로 군사주의적 분위기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10. 현대 러시아군에서 엽기적인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보면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1. 육군과 달리 해군은 부대 내규로 규제하지 않는 한 개인이 알아서 쪼개 쓸 수 있다.
  12. 육군과 전쟁 후반기의 해병부대에는 전투일선으로 보충병의 수시증원이 이루어졌다.
  13. 독립군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세력권이었다.
  14. 전차의 집단운용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7년에 벌어진 캉브레 전투에서의 연합군으로 전투용 전차 378대를 포함하여 무려 476대의 전차를 동원한 바 있다.
  15. FW190이 처음 나왔을때 영국군이 느낀 충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상당히 잘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6. 아예 마오는 지금이 세력을 불릴 기회라고 세력을 불리는데 집중했고 심지어는 일본에게 중국을 침략해줘서 감사하다고 하기까지 했다.마오쩌둥 '일제 침략에 감사' 발언은 사실
  17. 상하이 사변, 루거우차오 사건
  18. 물론 공식 사이트에서는 "침략자 일본 도적떼(日寇)" 로 칭해지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 직접적으로 자위대를 멸칭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19. 냉전 시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재무장을 하면서 최소한의 표시를 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유태인 학살을 제외하면 소련 내에서의 슬라브인 학살, 집시 학살 등은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