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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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海軍 | |
Republic of Korea Navy, ROK Navy, ROKN | |
병력 | 69,000명(해병대 28,000명 포함) (2015년) |
잠수함 | 15척(+3척) |
핵심 수상함 | 22척(+5척) |
연안 수상함 | 104척 |
호버크래프트 | 5척(+5척) |
상륙함 | 15척(+1척) |
지휘체계 | 국방부 |
해군참모총장 | |
지휘본부 | 해군본부 |
참여한 전쟁 | 한국전쟁 |
베트남 전쟁 |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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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의 힘,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2]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의 방패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와 나라
바다를 지켜야만 강토가 있고
강토가 있는 곳에 조국이 있다
우리는 해군이다 바다가 고향
가슴속 끓는 피를 고이 바치자해군가
목차
1 개요
大韓民國 海軍 Republic of Korea Navy; ROKN.
대한민국 국군의 해군. 해병대(27,000여 명)까지 추가하면 총 69,000여 명이다. 주력 전투함으로 12척의 구축함[4]과 14척의 호위함(프리깃)을 보유하고 있다. 연안 방어용으로 23척의 초계함과 82척의 고속정을 보유하고 있으나 대부분 퇴역이 예정된 군함들이다. 12척의 구축함과 앞으로 추가 건조될 호위함을 제외하면 현재로는 대부분의 함정이 대공 방어를 MANPADS에 불과한 미스트랄이 책임지고 있어 대공능력이 매우 취약한 특징이 있다. 반면에 대간첩작전 같은 데 신경을 많이 썼던지라 대체로 함포는 튼실한 것을 싣는 편이다. 항공 전력으로는 헬기와 해상 초계기, 각종 훈련기 등 6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해군의 상륙 능력은 해병대를 주축으로 1척의 강습상륙함과 6척의 수송함, 5척의 공기부양정 등으로 1번 상륙에 여단급 정도의 제한적인 상륙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삼면이 바다임에도 군사적으로 지상군에 집중 투자하여 해군력은 고속정과 잠수함 및 반잠수정에 불과한 북한과 맞서는 관계로 한국 해군은 대간첩작전 및 해상 포격전을 중심으로 해군력을 육성해와 그동안 해상전 전력은 미 해군 7함대에 의존해 왔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의 독도 및 동해의 배타적 경제수역의 분쟁, 중국과의 서해 배타적 경제수역 및 불법 조업 어선 문제, 이어도 문제 등 해상 분쟁이 빈번해지자 해군력에 대한 투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7~80년대의 첫 국산 프리깃 및 초계함 전력인 울산급과 동해급, 포항급에 이어 90년대부터 KDX 프로젝트를 추진, 첫 VLS 탑재 군함이자 헬기탑재 전투함인 광개토대왕급과 더욱 진보된 충무공 이순신급을 건조했고 2007년에는 국내에서 건조한 첫 이지스함인 세종대왕급을 건조 및 진수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 건조경험과 북한에 의해 자행된 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사건을 바탕으로 윤영하급 및 인천급을 건조했고, 대잠능력과 대공능력이 향상된 대구급과 인천급 BATCH 3를 건조하거나 계획중이다. 또한 북한의 탄도미사일 탐지, 추적, 요격을 위한 세종대왕급 3척 건조 및 3척 추가 건조, BMD개수로 해군력의 질적 향상이 이뤄지는 중. 잠수함 및 대잠전력 역시 투자가 계속되어 해군은 209급을 자체 건조한 장보고급, 214급을 바탕으로 한 손원일급 잠수함을 16척 건조 및 취역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적어도 하드웨어에서는 소류급에 필적한다는 3000t급 중잠수함[5]의 건조가 시작되었다. 해군이 20년 이상 투자한 결실이 서서히 드러나는 중. 대잠전력 역시 P-3C 초계기를 추가 도입 및 개량하고, 논란이 있긴 하지만 p-3에 이은 차기 대잠 초계기 도입도 추진되고 있고, 세종대왕급 배치2와 kddx에 신형 멀티스테틱 소나 장착과 기존 함정도 개량사업시에 멀티스테틱 소나로의 업그레이드가 추진되고있는데 최종적으로는 상당수의 수중 음탐장비를 멀티스테틱으로 하여 대잠 네트워크망을 구축할 예정이다.그리고 와일드 캣 대잠헬기와 수리온 해상작전헬기 도입이 이뤄지면 대잠전력도 향상될 예정. 다만 대잠전력은 대잠전 특유의 어려움과 자금 및 여러 여건 상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2020년대에는 1990년대부터 지속된 해군력에 대한 투자가 가시화된다.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점을 드러낸 참수리급-포항급/울산급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윤영하급과 PKX-B, 인천급과 대구급 호위함, 인천급 BATCH 3로 해역함대가 재편된다. 특히 해군의 허리를 구성하는 호위함 전력의 향상이 두드러진다. 함대방공은커녕 자함방공조차 불가능했던 포항급 및 울산급이 퇴역하고 체급도 1000~2000t대 초반에서 3000t대 중후반으로 대형화되고 플랫폼의 확대 및 레이더 체계의 혁신으로 인한 자함방공과 개함방공, 그리고 BATCH 3에 가서는 준이지스급의 해역함대 함대방공까지 가능해지는 FFX사업으로 건조되는 전투함들이 주축을 이루게 되면 해역함대가 대북작전 뿐 아니라 주변 군사강국들과의 해상 분쟁에서도 유의미한 전력이 되는 것.
해역함대가 어느정도 제 역할을 하게 되면 해군의 주력인 7기동전단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게 된다. 7기동전단 또한 레이더와 전투체계의 성능이 떨어지는 이순신급을 전면 개량 예정이고 3척의 이지스함을 추가로 운용하며, 추가로 KDDX사업을 통해 신형 방공구축함들이 건조되면서 18척 규모의 전투력으로 대폭 확대되어 더욱 유연하고 위력적인 해군력 운용이 가능해진다. 군이 3~4개의 기동전단을 요구해온 만큼 18척 체계가 갖춰지면 1개기동전단을 넘어 3개 기동전단으로 구성된 기동함대로 확대개편될 가능성 또한 점쳐지는 중. 잠수함 전력 역시 3000t급의 중잠수함들이 활동하게 되면 주변국을 상대로 한 잠수함 운용이 원활해져 보다 적극적인 작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거기에 지금은 계획만 나온 줌왈트급 정도의 차기 중구축함 전력이 구성되면 주변국과의 분쟁에서 한국의 해군력이 영해와 EEZ를 제대로 지킬수있는 수준까지 올라온다.[6][7] 전투함 그 자체 말고도 무기체계의 진보 역시 이루어져 해궁 함대공 미사일과 차기 초음속 대함미사일, 함대지 전술미사일 등의 타격체계 말고도, 각종 전자장비와 레이더, 소나, 전투체계등의 국산화가 이루어져 그동안 이어져온 외국산 제품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기술적인 면에서도 한층 성장한다.
다만 해군의 질적 및 수적 성장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예산의 부족과 기술력의 부족 및 보수적인 건함사상으로 인한 설계의 미비함은 아쉬운 부분이며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방산비리다. 전직 해군참모총장까지 구속되는 통영함 비리에서 보듯이 폐쇄된 해군 장교단 특성상 지속되는 해군의 비리는 해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물론이고 해군력 자체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는 만큼 대한민국 영해를 수호하는 해군의 발전을 위해 해군의 자정 노력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나 여러가지로 노력이 필요할것이다. 또한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전투함에만 집중하다보니 여태까진 전투함들을 지원하는 군수보급함 및 훈련함, 소해 및 대잠전력이 주변국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문제 또한 가지고 있지만 현재 기동전단 작전에 충분한 만재25000톤 이상의 차기 군수지원함과 우리해군으로서 첨으로 건조하는 경하배수량 4500톤급의 전문훈련함과 소해모함으로서 충분히 활용될수있는 남포급 기뢰부설함과 소해함의 건조가 진행중이거나 확정,예정 되있으며 위에 쓴 내용대로 대잠전력도 강화될 계획이기 때문에 지원 전력 문제도 차이는 있어도 상당부분은 해소될것이다. 함정의 자동화 등으로 병력 효율을 강화 하고 있긴 하지만 저출산으로 인한 해군 병력 자원 부족은 덤.
대한민국 해군은 지원제로 지원 후 면접, 신체검사 등을 통과하면 해군 입영통지서를 받아 해군으로 복무할 수 있다.
2 현 수뇌부
2016년 9월 기준이다. 해군 참모총장이 최선임이다.
대통령 | 국방장관 | 해군참모총장 | 해군주임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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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 한민구 | 엄현성 대장 | 김천용 원사 |
3 해군의 역사
대한민국 이전의 해군에 대해서는 한국사/수군, 조선 수군 문서 참조.
정인귀 제독(예비역 소장, 전 방위산업진흥협회 진흥본부장)#의 증언
조국 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들을 구함
광복 직후 서울 거리에 내걸린 해사대 모집 벽보
초대 해군참모총장(당시에는 총참모장)을 역임하는 독립운동가 손원일의 해방병단(解放이 아니라 '海防'兵團, Marine Defense Group)이 대한민국 해군의 모태이다.
손원일은 1945년 8월 21일, 광복과 더불어 새롭게 창설될 해군에 뜻을 가진 협력자 정긍모·민병증·김영철·한갑수와 해사대(海事隊)를 결성, 80여명의 대원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모든 경비를 손원일을 포함한 간부들이 부담했고, 손원일은 자금 확보를 위해 9월 1일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여 해사과(海事課)를 설치했지만 여운형이 건준을 탈퇴하고, 건준이 극좌화됨에 따라 9월 30일에 손원일 역시 건준을 탈퇴한다.
같은 날 손원일은 자금 확보를 위해 일제강점기 때 조선해사보국단(朝鮮海事報國團)의 선원계장을 지낸 석은태를 만나 의논 끝에 두 조직을 합치기로 하여 위원장을 손원일, 부위원장을 석은태로 하여 조선해사협회(朝鮮海事協會, Marine Affairs Association)를 조직했다. 자금은 석은태가 지원하고, 사무소도 회현동의 해사보국단의 사무소로 옮겼다. 이후 11월 11일에 미군정청과 협의하여 장차 해군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받고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구 표훈전에서, 단장에 손원일, 일선행정에 민병증, 항해교육에 김영철, 기관교육에 정긍모·한갑수, 군사훈련에 변택주·김정주, 경리에 석은태 등 총 70명이 해방병단을 창설했다.[8] 결단식 직후 열차로 진해로 이동하여 11월 12일 진해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4일에 진해군항 항무청 건물(구 통제부 항무과)에 입주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첫 집무를 게시하였다. 이듬해 1월 14일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에 편입되었고, 1월 15일에 해방병단 총사령부를 창설했다.
1946년 1월 17일에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을 창설하여 생도들을 직접 교육시켰으며, 2월 15일에는 하사관 및 병 교육도 실시하였다. 2월 1일에는 해군에 있어 필수전력인 함정을 관리할 조함창(현 정비창)을 상급부대와의 협상끝에 창설한다. 조함창은 2월 27일 23명으로 업무를 개시하고, 6월 15일 T-3호정을 최초로 수리완료했다. 2월부터 손원일 총사령관은 국방사령부와 주요 항구도시에 기지를 창설하는 문제를 협상하였고, 2월 1일에 장교계급을 부여하고[9] 6월 1일에 하사관·병의 계급을 제정하였다. 가장 먼저 설치된 교육부대인 신병교육대는 2월 15일 창설되었으며, 250명의 신병들을 3개과(갑판과·기관과·통신과)로 나누어 3개월의 교육 뒤에 실무에 배치시켰고, 2월 21일에는 진해해군병원과 3월 11일에는 헌병대, 군악대, 갑판분대, 기관분대, 기술분대 위생학교의 전신인 위생분대를 발족시킨다. 1947년 9월 1일 교육체제를 개편하여 하사관 각 교육대를 7개 학교(항해·기관·공작·통신·주계·위생·표지학교)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예산이 편성되기 시작한 4월부터 주요 항구도시에 기지를 차례차례 창설하였다. 이때 창설된 기지로는 인천기지(1946.04.15.), 김포파견대(1946.08.16.), 목포기지(1946.08.18.), 묵호기지(1946.08.22.), 부산기지(1946.09.24.), 진해특설기지사령부(1946.10.01.), 군산기지(1947.01.06.), 포항기지(1947.02.08.), 주문진파견대(1947.03.26.), 제주수영(1947.06.21.), 여수수영(1947.07.01.)이 있다. 1947년 3월 28일에는 각 기지 사령관들이 모여 최초의 기지사령관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7일부터 진해근해를 중심으로 해상경비를 개시했으며, 1946년 6월 15일에는 미군청정이 군정법령 제86호를 공포하고, 그에 따라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Korean Coast Guard)[10]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손원일은 '총사령관' 직책을 받아 본격적인 해군 창설을 위해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하지만 보유한 전투함정이라고는 일본이 패전 후 완성하지 못하고 버리고 간 배를 1946년에 조함창에서 개조하여 완성시킨 287톤급 경비정 'PG-313 충무공정'이 유일했다. 그래서 1946년 9월 15일 미 군정청으로부터 387톤급 상륙정(LCI) 2척(서울정·진주정)을 부산에서 인수했고, 그 뒤 총 5척의 상륙정을 인수. 일본제 소해정(JMS) 11척, 미국제 소해정(YMS) 18척. YO-1을 인수하였고, 1947년 8월 17일에는 한국 해군 최초 편대훈련을 사고 없이 성공시켰고, 8월 30일에는 38선 이남의 해안경비임무를 미 해군으로부터 인수하였다.
1947년 10월 15일 부산에 4척으로 구성된 제1특무정대를 창설, 12월 19일에 여수에 5척으로 구성된 제2특무정대를 창설했다. 1948년 6월 29일, 해군사관학교 이외의 장교 인력을 확충하기 위해 해군사관후보생(OCS) 특별교육대를 설치했으며,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1948년 9월 5일 대한민국의 해군으로 발족하였다.
일본 해군이 조선인의 입대를 1943년까지 받지 않았고,[11] 받아도 지상에서 근무하는 해군 육전대나 육상근무,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에 가서는 가미카제로 활용할 해군 항공대에서만 일부 받아들였다.[12] 따라서 식민지 종주국이었음에도, 조선인으로서 옛 일본 해군 출신의 해상근무 경력자는 사실상 없었다. 그 때문에 상선에서 근무하던 상선사관들이 해군 창군의 주축이 되었다.
1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부터 차례로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박옥규, 정긍모, 이용운, 이성호 제독이 전원 상선사관 출신이었고,[13] 6대인 이맹기 제독부터 해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일찌감치 해군 수뇌부를 차지한 바람에 일본 해군 출신이 없었다. 앞서 설명한 듯 일본 해군이 조선인을 항해병과로 받아들이지 않은 탓에 사실상 경력자가 없기도 했다.[14] 과거 육상근무 경력자들은 여순사건 이후 상륙전 병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손원일 제독이 죄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창설멤버로 보내버렸다. 따라서 대한민국 해군 초창기에 해군에 있던 일본군, 만주군의 육군 경력자들은 해병대의 주축이 된다. 따라서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2대 사령관 김석범, 3대 사령관 김대식 등이 만주군 육군 출신인 것이 이런 이유에서였다.[15]
대한민국 육군의 경우, 역대 육군참모총장 1대부터 18대가 일본군 출신이다.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 공군참모총장은 1대 김정렬, 5대 김창규 등이 일본군 출신이다.[16]
즉 대한민국의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중에서 오직 해군만이 유일하게 최선임자 중 일본군 출신이 없었던 군이었다. 바꾸어 생각하면 만약 일본 해군이 조선인도 해상근무를 시켰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 수 있었단 말
지휘부에 일본군 경력자가 없었다지만, 하급장교 및 하사관, 병들의 경우 일본군 경력이 아니더라도 36년간 일제 식민지였던 만큼 일본군의 흔적이 타군보다 오히려 강하게 남아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군/해병에서만 쓰이던 병조(兵曹),[17] 오장(伍長)[18]은 일본군의 계급구조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1962년 군 계급체계 일원화 조치가 있기 전까지, 해군/해병에서는 육군, 공군과 달리 일본군식 계급이 여전히 사용되었다.[19] 뿐만 아니라 건군 초기, 각 지역의 해군부대의 경우 '경비부'의 명칭도 일본 해군의 기지 등급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일본 해군은 진수부-경비부-요항부의 3등급으로 기지를 구분했다.
해군은 육군/공군과는 달리 장관급 장교를 장군이 아닌, 제독으로 호칭한다. 본래 제독은 중국왕조에서 육해군을 가리지 않고 사용되던 명칭이었으나[20], 일본 해군은 Admiral을 번역하며 육군과 차별화된, 해군만의 독자적 명칭인 제독으로 명명하였다.. 일본 해군이 번역한 명칭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셈.[21] 물론 서구에서도 육군과 해군의 경우 계급명이 서로 다르지만, 일본 해군이 명명한 계급명을 고수하는 점은 약간 미묘하기도 하다. 참고로 현대 중국군에서 제독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다. 절도사처럼 옛날에 쓰인 계급명으로 취급하여, 지금은 육해공군 모두 '사령'으로 호칭한다.[22]
한편 손원일 제독은 중화민국 해군사관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였고 국부군 해군으로서 4년간 복무했으며, 초기 해군 지휘부 대부분이 과거 손원일 제독과 매부였던 윤치창이 운영하던 한-중-일 무역회사인 동화양행 출신이였다. 그들 모두 중화민국(과 국부천대 이후의 대만)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창군 뒤에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를 전후로 5월 7일, 소해정 JMS-311 통천정이 납북되고, 5월 15일에는 YMS-517 고원정이 납북되는 사건이 있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YMS-508 강화정의 부장이 정장과 정대사령(편대장)을 상관 살해를 한 뒤 월북했고, 1949년 5월에는 고성정의 승조원 일부가 함상반란을 일으킨 뒤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충무공정을 비롯한 9척의 함정이 납북될 뻔한 사건이 일어나는 등, 좋지 않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거기다 같은 해 8월 10일, 인천경비부에서 관리하고 있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로버트 장군의 요트가 사라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버트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대통령은 손원일 총사령관에게 책임을 물었다.[23] 해군본부 정보참모 함명수 소령이 손 사령관에게 응징작전을 제안했고,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24]의 정보활동으로 그 보트가 황해도 몽금포항에 계류되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응징작전 계획이 입안되었다. 이에 해군은 요트를 찾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여 기함인 PG-313 충무공정과 JMS-301 대전정, 302 통영정[25], 307 단천정, 309 대동강정, YMS-503 광주정 6척의 편대의 엄호로 함명수 소령 등 20여명의 정보부대 특공대원을 몽금포에 침투시켜 해당 보트를 탈환, 불가능할시 파괴하는 작전을 시행하였다.
관함식이 열린 8월 16일 새벽 2시경, 5척의 배는 인천경비부 제1정대사령 이용운 중령의 지휘아래 인천항을 떠나 8월 17일 몽금포 근해에 도착하였고, 새벽 06시경 포격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북한군 120여명을 사살, 인민군 군관을 포함한 북한 승조원 5명을 생포하고, 경비정 4척을 격침시키고 35톤급 18호 경비정 1척을 나포해 귀환했다. 이것이 '몽금포 작전'이다.[26] 하지만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John J. Muccio)가 이 사건을 일러 '남한 해군이 38선을 넘어간 것은 불법이므로 특공대 책임자 처벌할 것'을 한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무초 대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사과하고, 특공대 편대 지휘관을 여수기지사령관으로 좌천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사건도 있었다. 몽금포 작전으로 좋은 전공을 세웠으나 한국 정부는 김일성의 정치적 악용을 우려하여 몽금포작전에 대해 대외적으로 함구시켰고, 2015년 9월 15일에 인천 월미도에 전승비를 제막하여 공정식 당시 302정 정장 등 무공자에게 훈장을 수여 및 추서를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기념식이 끝난 뒤, 손원일 총사령관의 독자적인 제안으로 해안경비대 대원들이 하얀 정복에 '大韓民國海軍'이 쓰여진 정모를 쓰고 행진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몰랐던 이 행진을 보고 많은 관료와 외교단이 감탄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손원일 총사령관을 격려했다. 이날 국방부가 설치됨으로써 통위부의 모든 업무는 국방부로 이관되었으며, 8월 24일 군사안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해안경비대는 9월 1일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되었으며, 9월 5일에 '대한민국 해군'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로써 손원일 '해안경비대총사령관'에서 '해군총사령관'이 되었다. 그 뒤 국군조직법과 국방부 직제령으로 국군의 조직이 정비되었고, 12월 10일, 손원일 총사령관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제독이 되었다.
1948년 10월 20일 여순사건 때는 해군에서 임시정대(PG-313 충무공정·505·510·516·302·304·305·구룡정)을 편성하여 해안 봉쇄 및 함포사격을 수행했다. 이 때의 경험에서 상륙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손원일 제독의 의견으로, 1949년 4월 15일에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장교 26명, 하사관 54명, 수병 300명, 총 380명의 인원으로 해병대인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 편제는 사령관에 신현준 중령, 참모장에 김성은 중령, 본부에 15명, 경리대에 15명, 근무중대에 70명, 정보대에 10명, 소총중대에 270명이 편성되었다. 5월 5일에 대통령령 제88호로 해병대령이 공포되었고, 1949년 8월 1일 해병 2기 440명을 해군으로부터 인수하고 장교와 하사관 등이 전보되어 해병대는 2개 대대규모로 확충되었다.
1949년에도 부대를 더 창설·개편하였고, 4월 15일 해병대와 인천에 제2해군병원[27]을 창설하였고, 6월 1일 진해기지를 진해통제부로 개편하였고, 같은날 묵호·인천·목포경비부를 창설했다. 12월 14일 인천에 제1정대, 포항에 제2정대, 목포에 제3정대, 진해에 훈련정대를 창설하있으며, 1950년 4월 15일에 부산·포항경비부를 창설하였다.
소형 소해정과 경비정 뿐인 해군에서 제대로 된 전투함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계속되었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독자적인 군함 건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미국에 전투함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결국 손 제독은 함정건조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을 생각해내었다. 1949년 6월 1일 손 제독 자신을 위원장으로 하여 '함정건조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7%, 하사관과 수병은 5%씩 모았고, 손원일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해군부인회'가 바자회를 운영하여 그 수익금을 기금에 보태었다. 나중에는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모금운동이 확산되어 4개월만에 만5천 달러를 마련했다.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금 4만 5천달러가 합쳐졌고, 그 돈으로 함정구매를 위해 미국에 간 손 제독은 장면 주미대사의 도움으로 10월 17일,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PC-701 백두산함을 비롯하여 PC-702 금강산함, PC-703 삼각산함, PC-704 지리산함을 구입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한국전쟁 개전일에 해상경비작전을 수행하던 YMS-509 가평정이 옥계해전을 치뤘다. 동해 옥계해상에서 북한 인민군의 무장수송선 세 척과 조우, 50여분간의 포격전끝에 상륙정 한 척을 격침시키고, 발동선 한 척을 나포, 한 척을 후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삼군을 통틀어 국군 최초의 승전이기도 하다.
이어 26일 새벽, PC-701 백두산함은 대한해협 근해에서 부산으로 상륙하려던 북한의 무장수송선을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을 치뤘다. 무장수송선에는 특수부대원 600여명과 탄약, 식량등을 실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8] 비록 600명의 해군 육전대 병력은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후방이라 아군 병력이 적던 부산에 상륙해 항만 시설을 파괴하고 UN군의 병력과 물자 하역을 방해하는 일을 하기에는 충분한 숫자였다.
이 외에 전쟁 발발 직후 국방부 제3국장(관리담당) 김일환 대령과 정규섭 해군소령의 주도로, 구용섭 한국은행 총재, 최순주 재무장관과 협의하여 한국은행 지하에 보관되어있는 금괴 1.5톤, 은괴 2.5톤을 해군이 인계받아 충무공정[29]을 통해 부산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29일에는 해군의 JMS-305 두만강정이 동해 묵호 근해 미 해군 작전구역에서 에서 미 해군 경순양함 USS Juneau(CL-119)함의 오인 사격으로 격침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승조원 8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8월 17일 저녁 PC-703 삼각산함[30]을 기함으로 총 7척의 함정과 해병대의 김성은부대가 통영 장평리에 최초로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수복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사전의 정보수집을 위해, PC-702 금강산함을 기함으로 PC-701·704함, 513·301·307·309·313정의 승조장병으로 편성된 육전대가 아군의 함포지원 아래 상륙하여 8월 18일에 덕적도를, 20일에 영흥도를 수복하고 미 극동군 G-2소속 유진 클라크 대위팀과 함께 월미도·인천 등 상륙지점의 해안정보와 경인지구 정보를 수집하여 전달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이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시 제7합동기동부대에 국군은 15척의 함정, 해병대 3개 대대와 육군 제17연대가 참가하여 작전을 성공시켰다. 손원일 제독은 인천상륙작전의 국군 최고 지휘관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포고문을 남겼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상하는 지상군에 대한 보급·수송·해안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10월 9일 장전에, 18일에 원산에, 11월 4일 진남포에 각각 해군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부상병 치료를 위하여 11월 20일에 원산해군병원을 설치하였다.
북한은 기뢰를 부설하여 연합해군의 해상작전을 위협했고, 10월 18일에는 516 공주정이 원산 여도 근해에서 소해작전중 기뢰로 인해 침몰했다. 해군은 이에 10월 25일 제1소해정대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소해작전을 수행하였다.
전쟁발발 당시 해군의 편제는 해군본부 예하에 진해통제부, 인천경비부, 목포경비부, 묵호경비부, 부산기지, 군산기지, 포항기지, 인천의 제1정대, 포항의 제2정대, 목포의 제3정대, 진해의 훈련정대, 해군사관학교, 인천해군병원, 해병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함정들은 4개 정대에 예속되어 제1정대는 서해, 제2정대는 동해, 제3정대는 남해, 훈련정대는 여수시-진해구간 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전 9시 해군본부 작명갑 제48호로 전 해군부대에 전투준비 명령을 내리고, 해군본부 내에 '해군지휘부'를 설치하는 등 조직을 전시체제로 전환했다. 6월 27일 해군지휘부는 '전투사령부'로 변경되었고, 7월 1일 해군본부와 전투사령부를 통합하여 '해군작전본부'로 개편되었다. 한국 해군은 7월 10일부터 UN 해군 예하 구성원으로 편성되었고, 해군작전본부는 9월 5일 해군본부로 확대개편되었다.
해상봉쇄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해본작명갑 제91호에 따라 8월 16일 훈련정대 해체와 동시에 제1정대를 모체로 하여 제1함대를[31] 창설하고, 12월 9일에는 동해의 제2정대를, 1951년 1월 5일에는 남해의 제3정대를 제1함대에 통합시켰다. 1952년 8월 1일 진해에 함대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에 동해전대, 서해전대, 남해전대, 호송전대, 수송전대, 소해전대, PT편대, 함정교육단을 조직했다. 정전협정 당시 한국해군의 조직은 해군본부 예하에 제1함대, 진해통제부, 경비부, 진해공창, 시설창, 해군병원, 해군사관학교, 교육훈련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병력(해병대 제외)은 14862명, 개전 당시 1166명의 병력을 보유한 해병대는 정전협정 당시에는 사령부본부, 제1전투단, 도서부대, 해병막사, 교육단, 보급중대로 조직되어 있었고, 병력은 27500명이었다.
조함창은 1951년 8월 25일 수상정찰기 해취호와 PG-315 제2충무공정 명명식을 거행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 대통령령 제637호에 따라 조함창을 공창으로 개칭하고 장비 및 시설을 현대화하였다.
미국의 상호방위원조법에 의한 정상군원을 받아왔던 한국 해군은 개전과 함께 미군의 직접군원 방식에 따라 전쟁 기간중 PF(Patrol Frigate, 초계호위함) 등 30척의 함정을 무상으로 지원받았다. 따라서 전쟁발발 당시 '내해방어 해군력' 수준이었단 한국 해군은 정전 당시 '근해방어 해군력'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는 2300톤급 PF함이 5척(PF-61·62[32]·63·65·66)이나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우리 해군은 독자적인 영해방위와 북한의 해군력에 대응할 수 있는 해군력 건설에 목표를 두고 조직과 전력을 정비해 나갔다. 이에 9월 10일 제1함대를 모체로 '한국함대'를 창설하고 그 예하에 제1호송전대·제3경비전대·제5경비전대·제1소해전대·제7보급전대·함정교육단을 창설했으며, 11월 9일 통제부 군수부와 재무관실을 통합하여 보급창을 창설했다. 1955년 3월 1일에는 한국함대를 개편하여 호송 및 경비작전을 위한 제1전단, 상륙작전을 위한 제2전단, 소해작전 및 기뢰부설작전을 위한 제31전대, 해상군수지원을 위한 제51전대, 함대의 훈련 태세 유지를 위한 함대훈련단을 조직했다. 7월 1일에 해군대학을, 8월 16일 인천공창[33]을 창설하였고, 1956년 3월 21일 종합학교[34]와 신병훈련소[35]를 통합하여 교육단을, 7월 1일 진해 해군병원과 군의학교[36]를 통합하여 의무단을 창설했다.
독자적인 영해방위체제가 정비되자 해군참모총장은 1954년 9월 1일 남해 경비 및 봉쇄작전지휘권, 1955년 1월 1일 동해 경비 및 봉쇄작전지휘권을 미 해군의 제95기동함대사령부로부터 인수했다. 이듬해 4월 1일부터는 한국함대사령관이 동·서·남해 경비 및 봉쇄작전에 대한 책임을 맡게되었다.
조직 정비와 함께 해군은 1954년부터 해군력증강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함정 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1954년 11월 13일 공창에 3000톤급 건선거를 준공하여 최초로 PF급의 함정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1956년 2월 2일 호위구축함(DE) DE-71 경기함·DE-72 강원함에 이어 1959년 10월 15일 고속수송함(APD) 경남함, 1963년 5월 16일 구축함(DD) DD-91 충무함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했다. 구축함의 도입으로, 우리 해군력의 수준은 '근해방어 해군력'에서 '인접국전력투사 해군력'으로 한층 더 높아졌다.
1955년부터 도입한 함정들은 1955년 1월 29일 제정된 미국의 함정대여법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대여 형식으로 양도받은 것이다. 정전 이후부터 1963년 말까지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함정은 모두 54척, 총 함정척수는 67척, 해군 병력 정원은 16000명이었다.
1954년 해사9기 생도들이 PF-65 낙동함을 통해 최초로 순항훈련을 시작했으며, 14개국을 순항하였다. 이 순항훈련은 매년 해사생도를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1955년 4월 15일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해군본부를 서울 회현동 청사로, 1960년 9월 1일 서울 대방동 청사로 이전했고, 해병대사령부는 1955년 3월 26일 부산 용두동에서 서울 후암동의 임시 건물로 이전한 후 이듬해 6월 30일 후암동 신축청사로 이전했다.
해병대는 전쟁중 1952년 10월 1일 창설된 해병 제1전투단을 모체로 1954년 2월 1일 해병 제1여단으로, 1955년 1월 15일에는 해병 제1사단으로 승격·창설했다. 조직이 정비되자 3월 14일 미 해병대 제1사단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환수하여 독자적인 작전임무를 게시했다. 1959년 3월 16일에는 해병 제1임시여단을 창설했다. 1963년 말 기준 해병대 병력 전원은 25100명이었다.1
해군본부는 5차(1953.09.10., 1957.01.01., 1961.01.01., 1961.12.01., 1963.01.01.)의 조직개편을 통해 1964년 11월 1일 3개 참모부, 4개부, 9개감실, 해병보좌관실로 개편하였다. 해병대사령부는 2차(1955.06.01., 1959.03.01.)의 조직개편을 통해 1963년 12월 30일 5개국, 14개감실로 개편하였다.
1964년 베트남 파병 당시 해군의 함정 수는 67척이었다. 파월이 종료된 99척으로 증가했는데, 이러한 이유는 1970년에 MSB, LCU, PB, FB, SB 등 소형함정 24척이 함대세력(Fleet List)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파병기에 도입된 함정들도 대부분 미국으로부터 인수한 것인데, 5인치 포가 장착된 DD(구축함) 6척, APD 5척이 도입된 것이 큰 전력증강이었다. 1971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으로 우리 해군의 국산함정개발이 시작되었는데, 가장 먼저 국내 기술진에 의해 고속정 PK 두 척(학생호-1·2호, 후에 PK-151·152) 대한조선공사에 의해 건조되어 각각 1972년 12월 28일, 11월 30일에 해군에 인도되었다. 학생호는 전국 8백만 학생과 20만 교직자들의 애국방위성금으로 건조된 최초의 국산 고속정이다. 이어 PBK-10정(후에 PKM-271)과 PBK-11정(후에 PKM-272)이 해군공창에서 건조되어 각각 1973년 12월 20일, 1974년 4월 30일에 해군에 인도되었다.
PK, PKM에 이어 PGM(유도탄고속함)이 국내에서 건조되었는데, 처음 세척(PGM-351·352·353)은 1971~1975년간 미국으로 부터 인수되었고, PGM-355함부터는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서 건조되어 1975년 9월 27일 해군에 인도되었다. 최초의 호위함인 FF-951 울산함은 현대중공업에서, 최초의 초계함인 PCC-751 동해함은 대한조선공사에서 건조되어 각각 1980년 12월 30일, 1983년 11월 10일 해군에 인도되었다. 최초의 잠수정 SSM-051(돌고래급)은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서, 기뢰탐색함 MHC-561 강경함이 강남조선공업에서 건조되어 각각 1984년 12월 29일, 1986년 12월 19일 해군에 인도되었다. 그리고 고속상륙정 LSF-611(LSF-1)이 코리아타코마조선공업에서 건조되어 1989년 해군에 인도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는 한국형 구축함 KDX에 대한 기초연구가 시작되었다.
1965년 6월 2일에는 서해에서 한국의 어선 '미생'호가 북한 해군 PBL-571함에 의해 납북되다가, 기동단대 사령관 안교승 대령의 탈환명령을 받은 PC-708 금정산함(함장 엄영보 소령)이 NLL을 넘어가 납북되던 미생호를 옹진반도에서 700m 떨어진 곳에서 탈환한 뒤, PBL-571함, PBS-473·474함의 추격을 뿌리치고 남한 해역에서 대기하던 APD-81 경남함, DE-72 강원함의 호위를 받아 어선과 어부들을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
1967년 1월 14일 DE-73 충남함이 남해 가덕도 근해에서 여수-부산간 왕래하는 여객선 한일호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한일호는 침몰, 승객 133명중 96명이 사망했다. 5일 후 1월 19일에는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PCE-56 당포함이 북한 해안포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응했으나 침몰하여 79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으며, 1970년 6월 5일에는 연평도 근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해군방송선 I-2함이 납북되는 사건도 있었다.
1973년 10월 10일 기준 해군병력 정원은 19466명, 해병대병력은 21105명이었다.
이후 해군은 전력 증강과 독자적 작전수행체제를 위해 부대 전반을 정비해 나갔다. 1973년 5월 1일 함대항공대를 창설하였고, 작전기지를 경비부 체제에서 해역사령부 체제로의 정비로서 1973년 7월 1일에 묵호경비부를 제1해역사령부로, 부산경비부를 제2해역사령부로, 인천경비부를 제5해역사령부로 개편하고, 1974년 1월 28일에 목포경비부를 제3해역사령부로, 제주경비부를 제6해역사령부로 개편했다. 1975년 2월 1일에 해군제2사관학교를 설치했지만, 설치 8년 7개월만에 1983년 8월 31일 제7기생 졸업을 끝으로 해체되었다. 1976년 1월 15일, 공군의 제59해상초계기비행대대가 해체되어 운영하던 S-2 초계기와 조종사·승무원·정비사들이 해군으로 이전되었고, 1977년 함대항공대는 함대항공단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9월 1일 설치된 교육단은 이를 모체로 하여 1987년 7월 1일 교육사령부를 창설했다.
1986년 2월 1일에는 한국함대를 작전사령부로 승격시키고, 제1해역사를 제1함대사령부로, 제5해역사를 제2함대사령부로, 제2·3·6해역사를 통합하여 제3함대사령부로 개편했다. 같은 날 제5성분전단을 창설하고, 함대항공단을 제6항공전단으로, 진해통제부를 제7기지전단[37]으로, 함정교육단을 제8전비전단으로 개편하고, 정비창·인쇄창 등 4개 창을 총괄하는 군수사령부를 창설했다. 1973년 10월 10일 정부는 국가자립경제 도모와 효율적 군 운용을 명분으로 해병대사령부를 해체시키고, 예하 해병부대들을 해체하거나 해군에 통합시켰다. 1977년 1월 1일 제6해병여단이 창설되었고, 1981년 4월 16일 제2해병사단 창설에 이어 1987년 11월 1일에 해병대사령부가 재창설되었다.
해군은 1990년 환태평양 훈련에 처음 참가하였으며, 1992년 10월 14일 이때까지 축척한 기술을 토대로 209급 잠수함 장보고함을 독일로부터 인수하고, 이후 국내 기술진에 의해 이천함 등 후속함 8척을 건조했다. 2007년 12월 26일 214급 잠수함 손원일함에 이어 후속함 정지함과 안중근함을 국내에서 건조하여 인수했다. 1995년 4월 25일에는 해상초계기 P-3C를 미국으로부터 도입했고, 1998년 KDX-I급 광개토대왕함, 2003년 KDX-II급 충무공이순신함, 2007년 LPX급 독도함, 2008년 KDX-III급 세종대왕함 등 입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함정을 건조·인수했다. 이외에도 군수지원함·기뢰부설함·상륙함·잠수함구조함·소해함·정보함·고속함 등을 국내에서 건조하여 인수했다.
1992년에는 해사47기 생도들이 9월 14일부터 1993년 1월 21일까지 충남함과 마산함에 편승하여 세계일주 순항훈련을 실시했다. 1998년 10월 12일에는 제1회 대한민국 국제관함식을 거행했고, 2008년 10월 5일에 제2회 국제관함식을 거행했다.
아울러 해군은 1993년 6월 17일 해군본부를 서울시 대방동에서 계룡대로, 다음해 4월 6일에는 해병대사령부를 서울 신길동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전했다. 1995년 12월 1일에 교육사령부를 진해시 경화동에서 여좌동 구 육군대학으로, 해군대학을 진해시 충무동에서 대전시 자운대로 이전했다. 그리고 1999년 11월 13일에 제2함대사령부를 인천에서 평택으로, 2007년 11월 15일에 제3함대사령부를 부산에서 목포로, 12월 1일에 작전사령부를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전했다.
1995년 3월 2일 전투발전단을, 10월 1일 제9잠수함전단과 해양전술정보단을, 1999년 7월 1일 인천해역방어사령부를, 2000년 1월 1일 진해기지사령부와 특수전여단을 창설했다.
2015년 들어 군수비리, 군납비리 등의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해군 장교단은 인원이 적고 폐쇄적인 것으로 유명하며 기술군의 특성 상 장비 구입이 중요하다. 이런 해군의 특수성이 결합되어 군수 비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공군도 기술군이란 점에선 비슷하지만 해군은 조함단 등을 만들어 자신들이 배를 만드는 과정에 더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이 좀 다르다.[38] 더욱이 해군은 앞서 인원이 적고 폐쇄적이라는 이야기처럼 끈끈한 선후배 관계로 얽혀 있으며 이를 지적하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군납비리가 해군만의 문제도 아니고, 사람이 많으면서 출신도 비교적 다양한 육군이 비리가 없냐면 그건 또 아니기에 갖다 붙이기라는 해군 출신들의 반발에도 일리는 있다.[39]
4 현역함 수량
종류 | 운용 | 비축 | 건조 중 | 별도의 차기 계획 |
잠수함 | ||||
공격 재래식 잠수함 | 16 | 5[40] | 6[41] | |
잠수정 | ||||
합계 | 16 | 5 | 6 | |
대양 수상함 | ||||
이지스&이지스급 구축함 | 3 | 9[42] | ||
구축함 | 9 | |||
준이지스급 호위함 | 0 | 8[43] | ||
호위함 | 14 | 7[44], -7 | ||
합계 | 26 | 24, -7 | ||
연안 수상함 | ||||
초계함 | 18 | -18 | ||
미사일 고속함 | 17 | 1 | ||
미사일 고속정 | 1 | 15[45] | ||
고속정 | 50 | -50 | ||
합계 | 86 | 1 | 15, -68 | |
호버크래프트 | ||||
수송형 호버크래프트(LSF) | 5 | |||
합계 | 5 | |||
상륙함 | ||||
LPH(강습상륙함) | 1 | 1 | ||
LPD | 2 | 2 | ||
LST | 4 | |||
LCU | 10 | |||
합계 | 17 | 3 |
5 편제
6 한국 해군의 주요전력[46]
현대의 대한민국 해군 함선 | ||
잠수정/잠수함 | 코스모스급R 돌고래급R, 장보고급, 손원일급, (KSS-III) | |
고속정 | 백구급R, 참수리급, (PKX-B) | |
고속함 | 윤영하급 | |
경비함/정CG | P-정CG 해누리급CG,해우리급CG, 태극급CG, 한강급CG, 제민급CG, 태평양급CG, 삼봉급CG | |
초계함/정 | 백두산급R, 수성급R, 노량급R, 거진급R, 신성급R, 동해급R, 포항급 | |
호위함 | 두만급R, 울산급, 인천급, (대구급) | |
호위구축함 | 경기급R, 충남급R, 경북급R | |
구축함 | 해외도입 | 충무급R, 대구/인천R, 광주급R, 충북급R |
한국형 | 광개토대왕급, 충무공 이순신급, 세종대왕급, (KDDX) | |
상륙정 | 서울급R, LSF-1R, LSF-2, 무레나급, 물개급 | |
상륙함 | LPH | 독도급 |
LPD | 천왕봉급 | |
LST | 천안급R, 운봉급R, 고준봉급 | |
LSSL | 영흥만급R | |
LSM | 대초급R, 시흥R | |
항공모함 | ||
기뢰전함 | 기뢰부설함 | 풍도급R, 원산급, 남포급 |
기뢰소해함 | 금산급R, 남양급R, 강경급, 양양급 | |
구조함 | 창원급R, 청해진, 평택급R, 통영급 | |
군수지원함 | 소양급(초대)R, 천지급, (소양급(2대)) | |
※ 윗첨자R : 퇴역 함선 ※ 윗첨자CG : 해양경비안전본부 소속 함선 ※ ※ (괄호) : 도입 예정 함선 |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해당 문서 참조.
6.1 현역함 배수량 및 용도별 요약
함종 | 만재 배수량 | 보유 척수 | 추가 주문 | 최대 대공 방어망 | 기타 |
1만톤 이상 이지스 구축함 | 11,000톤 | 3척 | 3척 | SM-2Block IIIB: 167km | 세종대왕급. |
7천톤 이상 준이지스 구축함 | 7,000톤 이상 | 6척 | KDDX | ||
5천톤 이상 구축함 | 5,520톤 | 6척 | SM-2Block IIIA: 167km | 충무공 이순신급:[47] | |
3천5백톤 이상 ~ 4천5백톤 미만 (미니이지스) 호위함 | 3,600톤 이상 | 8척 | 미정[48] | 인천급 batch-3 | |
3천톤 이상 ~ 4천톤 미만 구축함, 호위함 | 3,900~4000톤 | 3척 | 시스패로우: 19km | 광개토대왕급:2019년 성능개량사업 예정. | |
3,593톤 | 1척 | 7척 | 해궁: 15~20km[49] | 대구급 | |
3,251톤 | 6척 | 램: 9 km | 인천급 | ||
2천톤 이상 ~ 3천톤 미만 호위함 | 2,180 ~ 2,300톤 | 7척 | 미스트랄: 6km[50] | 울산급: 7척 모두 퇴역예정, 미스트랄은 헬기에 대하여 6km까지 방어.[51] | |
1천톤 이상 ~ 1천5백톤 미만 초계함 | 1,200톤급 | 18척 | 미스트랄: 6km | 포항급: 대공망이 개인휴대 미사일인 미스트랄로 매우 취약, 퇴역예정. 침몰한 천안함이 포항급임. | |
미사일 고속함 | 570톤급 | 17척(1척 건조중) | 미정 | 윤영하급 | |
고속정 | 300톤급 | 1척 | 15척 | 미정 | PKX-B |
170톤급 | 50척 | 참수리급: 모두 퇴역예정 | |||
강습 상륙함 | 18,800톤급 | 1척 | 1척 | 램: 9 km | 독도함: 별도의 탑재 헬기는 없으나 상륙헬기부대가 존재하여 상륙시 독도함에 전개하는 식으로 운용[52] |
상륙함 | 7,000톤급 | 2척 | 2척 | 해궁: 15~20km | 천왕봉급: 2016년까지 완료예정. |
2,600톤급 | 4척 | 고준봉급 | |||
기뢰함 | 4,200톤급 | 1척 | ?척 | 남포급 | |
3,300톤급 | 1척 | 원산급 | |||
소해함 | 880톤급 | 3척 | 3척 | 양양급 | |
520톤급 | 6척 | 강경급 | |||
공기부양정 | 105톤급 | 3척 | 러시아 무레나급 | ||
95톤급 | 2척 | LSF-2: 마라도함 용으로 2척이 추가 건조될 예정 | |||
디젤 잠수함 | 3,700톤급 이상[53] | 9척 | KSS-III | ||
1,800톤급 | 7척 | 2척 | 손원일급 | ||
1,200톤급 | 9척 | 장보고급 | |||
400~500톤급 | ?척 | 차기 소형 잠수함 사업 |
6.2 현역 항공기, 헬리콥터 목록
함종 | 만재 배수량 | 보유 척수 | 추가 주문 | 최대 대공 방어망 | 기타 |
해상초계헬기 | 38기 | 대부분이 링스헬기 | |||
4기 | 4기 | 아구스타 웨스트랜드 AW159 | |||
해상상륙헬기 | 약20기 | UH-60 & UH-1H | |||
40기 | 수리온 상륙헬기형 | ||||
해상초계기 | 16기 | P-3C 8대, P-3CK 8대, (중고 S-3 12기 도입은 백지화 되었고 2016년10월18일 당정협의에서 대잠초계기 도입예산을 추가하면서 P-8 포세이돈의 도입이 거론됨으로서 현존 최고성능의 대잠초계기인 포세이돈의 도입될 가능성이 커졌다.) | |||
기타항공기 | 5기 | 표적예인용 CARV-ll |
7 퇴역 함정, 항공기, 헬리콥터 목록
- 한국 해군 퇴역 초계함 목록
- 타코마급 호위함
- 캐논급 호위구축함
- 루더로우급 호위구축함
- 버클리급 호위구축함
- 기어링급 구축함
-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 플레처급 구축함
- PT 보트
- 창원급 잠수함 구난함
- 돌고래급 잠수정
- S-2 해상초계기(2001년 퇴역)
8 상륙 및 지상 전력/특수부대
9 해군으로 현역살기
10 대한민국 해군의 문제점
대한민국 해군/문제점
가독성 문제로 항목을 분할한다. 위 항목 참조바람.
11 주변국과 해상 갈등/총 전력 비교
한국 해군 vs 해상자위대 |
일본은 계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과는 서해5도 인근의 NLL을 두고 대치한다. 물론 한국군의 공식적 주적은 북한이다.
중국은 자국 어부들의 불법조업을 방치하며 사실상의 해적들을 키우고 있다. 2011년 12월에는 중국의 선원이 한국의 해양경찰특공대원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경 살해 후에도 불법 조업은 계속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54] 중국이나 중국 국민들은 최근 항공모함(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2번함을 도입한 후 개조하는 동시에 수상함 및 잠수함 현대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자 주변국의 해양에 대해 패권국(패권주의) 행세를 하고 있는 실정인데, 한국은 어족보존을 위해 감척[55]을 하는 중이며 한국 이외에도 일본, 대만 등 중국과 접하는 모든 국가들이 중국과의 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이 어찌보면 더 나쁜 놈이라 중일분쟁은 중국 편을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양안분쟁의 경우 중국 역시 대놓고 대국굴기를 외치는 위협적인 나라인 것도 사실인지라 대만 편을 든다.
러시아는 현재 충돌할 건덕지는 없지만 한미동맹의 존재 때문에 잠재적으로 한러 양국이 충돌할 요소가 있다. 특히 해상 분쟁의 경우 딱히 한국군을 노리는 게 아닌 주한미군을 노리는 것일지라도 발생 가능성이 높다. 현재도 러시아의 전략폭격기나 잠수함 등이 이따금 월경하는 경우가 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이후 폭격기나 초계기의 영공 침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도 신경써야 하는 것이고 특히 유로마이단 후 일본, 유럽 등 서방이 대놓고 러시아의 적으로 선포되면서 한국에도 불똥이 얼마든지 튈 수 있다.
여담으로 유독 해군은 옆나라의 해상자위대에 비교당하면서 밀덕들에게 까이는 경우가 많은데, 독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 거의 예외없이 해상자위대와 비교당하면서 까이는 기사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 안습. 물론 이런 기사들 땜에 해군이 보여주기 식 대형함 건조에만 목 매고 그 결과 정작 진짜 주적인 조선인민군 해군의 잠수함대를 상대할 대잠 초계기 및 소나의 확보에 게을러서 천안함이 폭침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56] 한국 해군력이 자기 영해도 못 지킬 정도로 허약한것도 아닌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여 조회수를 늘리는 기레기들이 자극적 보도로 건수 올리는데만 치중하고 진짜 문제는 들춰내지도 않아서 한국 해군은 전력에 비해 대잠 능력이 취약해져 버렸다.[57] 그리고 일본에서는 넷 우익들이 포항의 제1해병사단이 일본 침공용 부대라며 악선전하며 해병대 상륙훈련 등을 보고 경기를 일으킨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셈이다.[58] 최근엔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할 경우 한국쪽에서 대마도로 맞대응하기에 이르러 과거처럼 사회적 이슈로까지 성장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참고로 2016년 현재 한일 양국의 해군력은 격차가 많이 줄었다.[59]. 더구나 대한민국 해군은 제7기동전단과 잠수함사령부에서 현무-3 순항 미사일을 운용하고 있다. 수틀리면 제주도에서 동해 상으로 발사 가능한 유도탄을 죄다 쏟아 부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사실 한국 해군은 10년 전만 해도 상당히 뒤떨어져 있었으나 충무공 이순신급, 세종대왕급같은 대형 구축함 및 장보고급, 손원일급 등 잠수함의 확보와 현무 순항미사일의 보유를 계기로 전력이 급 상승했다. 물론 문제는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을 의식한 대양함대 전력이나 해병대 위주로 전력이 증강되고 정작 현실의 적인 북한군의 잠수함 함대나 해안포에 맞서야 하는 해역함대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이 문제다. 물론 언제까지 한국군이 주적인 북한군만 바라보고 전력증강을 할 수는 없으며, 북한 뒤의 중국 인민해방군이나 러시아군은 엄연한 한국군의 가상적군으로 북한군 따위와는 비교가 안되는 첨단 장비로 무장한 정예군이라 이들에 대비한 첨단 대양함대 전력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맞다. 빈약한 대잠 능력 및 대공 능력은 북한과 대치하는 해역함대, 특히 2함대의 숙제이고, 현재로는 미해군이나 제6항공전단, 제7기동전단, 잠수함사령부 전력이 없으면 해역함대만으로는 북 잠수함대 상대는 버거울 정도이지만, 그래도 기존 호위함이나 초계함에 비해 대잠 능력이 향상된 인천급 호위함이 차례대로 해역함대에 배치되고 본격적인 주력함이라 할 수 있는 대구급 호위함이 계속 건조되고 본격 준이지스급 호위함인 인천급배치-3가 건조되면 해역함대의 부족했던 대잠,대공 전투력은 비약적인 발전이 기대된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은 비록 방산비리나 대잠전력 부족등의 문제등으로 내홍을 앓고 있지만 사업의 방향성이나 기간은 변경될지언정 기본적인 전력 확충 계획에는 큰 변함이 없다. 실제 한국 해군은 3천톤급 잠수함인 KSS-III사업이나, 대구급, 준이지스급 호위함인 인천급 Batch-3, 이지스함인 세종대왕급 Batch-2, 이지스급 구축함인 KDDX 등 주요한 신조함 획득 사업이 잡혀있고, 향후 그 함정들에서 쓰일 차기 초음속 대함 미사일, 신형 K-VLS, 해궁 미사일 개발, 신형 대잠초계기 도입, 각각 인천급 Batch-3용과 KDDX용 4면 위상배열레이더와 각각 수상함용과 KSS-III용인 신형 소나 개발, 수상함용 스텔스 마스트 개발, 레일건 함포 연구, CIWS용 레이저 무기 연구, 무인수상정 개발, 범상어 중어뢰 개발, 초공동 어뢰 연구, 대어뢰 요격 어뢰 연구, 등등 다방면에서 전력 증강을 꾀하고 있는중이다.
그래도 워낙에 세계의 화약고인 동아시아에 위치해서 그렇지 이 정도만으로도 유럽 주요 국가들의 해군력에 필적한 수준이며, 어지간한 오세아니아나 카리브해,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의 국가들의 해군력에 비해 월등히 우세한 전력은 맞다. 오세아니아나 동남아 지역에서 대한민국 해군에 필적할 수준의 해군은 호주 해군 뿐이다.[60] 단지 워낙 상대 전력이 너무 강해서 그런거다. 당장 왼쪽엔 세계 경제력 2위, 오른쪽엔 3위다.
11.1 참조 문서
12 출신 유명인들
12.1 장교 출신
- 김도현 : 함정장교. 김좌진 장군의 증손자. 육군 병장으로 전역한 뒤 공군 부사관이 되었다가 또 다시 해군 장교로 임관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증조부의 유지를 잇고 있다.#
- 김동환 : 군종관. 김수환 추기경의 넷째 형으로, 해군 중령까지 진급했다. 창군이래 최초의 천주교 출신 군종 병과장.
- 김성찬 : 해군참모총장, 국회의원. - 해사 30기
- 김영수 : 보급장교, 양심자. - 해사 45기
-
문창극 : 정훈장교 - 박인용: 전 합참차장[61], 초대 국민안전처 장관. - 해사28기
- 박진 : 통역장교 - 해군사관후보생 71기
- 손원일 : 초대 해군참모총장 겸 해군 출신 첫 국방장관(제5대).
- 손환철 : 군의관
- 신기남 : 교수사관
- 안철수 : 군의관
- 윤광웅 : 해군작전사령관, 청와대 국방비서관, 제39대 국방장관. - 해사 20기
- 윤영하 : 항해장교. 제2연평해전 참전자. - 해사 50기
- 이근 : 항해(특수전)장교.
- 이광수 : 정훈군무원
- 이희완 : 정훈장교. 제2연평해전 참전자. - 해사 54기
-
정옥근 : 해군참모총장- 해사 29기 - 조광현 : 항해(특수전)장교 - 해사 16기
- 최민정[62] : 함정장교 - 해군사관후보생 117기
- 최윤희 : 건군 이래 최초의 해군 출신 합참의장. - 해사 31기
- 홍혜걸 : 군의관. 심각한 허리디스크로 의병 전역.
- 황우여 : 법무관
12.2 부사관 출신
- |류진 : 하사 출신. 최종 근무지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
- 석해균 : 하사 출신. 삼호 주얼리 호 선장. 해군교육사령부 안보교육담당관 군무원(정훈부이사관).
- 오소리 : 의무부사관(전문하사). 마리얼레트리 저자.
- 전인석[63] : 하사 출신.
- 최순조 : 전기부사관.[64] 영화 연평해전의 원작 소설격인 서해해전의 저자.
- 한주호 : 특전준사관
12.3 수병 출신
- 김건모 : 연예병 - 해상병 304기
- 김경민 : 연예병 - 해상병 315기
- 김기리 : 연예병 - 해상병 532기
- 김수근[65] : 갑판병 - 동해함에서 근무. 해상병 427기.
- 김승현[66] : 연예병 - 해상병 202기
- 김용만 : 연예병 - 해상병 292기
- 김종국[67] : 연예병 - 해상병 262기
- 김종진(봄여름가을겨울) : 해상병 304기
- 김학순 : 병장 만기전역. 영화 연평해전 감독.
- 배두훈 : 연예병. 해군홍보단 복무당시 현역으로 일병 이정석과 엠넷 보이스 코리아 출연 세미파이널 진출, 전역 후 뮤지컬 배우로 활약중.
- 배진렬[68] : 해상병 485기
- 신준기(버즈) : 군악병(진기사)
- 심현섭 : 연예병 - 해상병 329기
- 엄홍길 : 특전병 - 해상병 224기
- 에코브릿지 : 연예병
- 유상무 : 전탐병 - 해상병 450기
- 유희열 : 군악병 - 해상병 362기군복무 시절 사진
- 윤명선[69] : 연예병 [70]
- 윤태규[71] : 해상병 271기
- 이국종 : 갑판병[72].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응급의학과 교수. 석해균 선장의 주치의였으며 한국 의료계에서 외상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꼽힌다.
- 이루마 : 연예병 - 해상병 521기[73]
- 이승훈[74] : 해상병 299기
- 이용진 : 연예병
- 이은결 : 연예병(마술병) - 해상병 532기
- 이재훈 : 해상병 397기
- 장용 : 연예병 - 해상병 262기
- 정엽 : 연예병
- 정진욱 : 연예병 - 해상병 506기
- 조인기[75] : 연예병 - 해상병 501기
- 지석진 : 연예병 - 해상병 292기
- 지누(롤러코스터의 멤버, 본명 김진우) : 해상병 362기
- 진구 : 헌병 - 해상병 444기
- 징고[76] : 연예병
- 추가열 : 연예병 - 해상병 314기
- 표인봉 : 통신병 - 해상병 287기
- 한무 : 연예병. 해군홍보단 1기. - 해상병 86기
- MC이슈 : 연예병(해군홍보단 사회자)
13 관련 문서
- ※ 직별 명칭 및 예하 부대 등은 상기 문서들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추가하지 말 것.
- 갑판병
- 군사 관련 정보
- 김일철
- 당가리
- 대한민국 국군/장비
- 대한해협 해전
- 마리얼레트리
- 백두산함
- 별황자총통 발굴조작 사건
- 블루
- 샘브레이
- 서해 수호자
- 수병
-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 연평도 포격 사건
- 연평해전
- 연평해전(영화)
- 전탐병
- 전투수영
- 제독
-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 직별장
- 천안함 피격사건
- 청년학파
- 청해부대
- 통제영학당
- 팔각모
- 한국군 vs 자위대
- 해군
- 해군력/동아시아
- 해병대
- 해군 동검도 제초제 사건
- 통역장교
- 해상 병기/현대전
- 호위함/비교
- CPO
- ↑ 해군이 디자인했는데 고증오류가 있다. 해군 수병과 부사관의 정복 계급장은 오른팔에만 달린다.
- ↑ 위의 '필승 해군, 명예 해군' 슬로건과 번갈아가며 사용하였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이 슬로건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 ↑ 제9잠수함전단은 현재 잠수함사령부로 승격되었다.
- ↑ 광개토대왕급3척은 사실상 호위함급이다. 실제로는 구축함은 사실상 9척인 상황.
- ↑ 배치2부터는 4000톤 급으로 배수량이 확대됨
- ↑ 이른바 주변국과 한번 해 볼만한 전력이 되는 것. 물론 전면전에서는 불리하지만, 적어도 적 해군에 유의미한 타격을 가할 수준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일본을 상대하는 경우 지금은 해역함대의 능력 부족으로 7기동전단이 일본의 1개 호위대군 정도만을 상대 가능하고 해역함대가 가세해도 2개 호위대군을 상대하기 벅찬 정도라면, 위에서 나온 전력이 갖춰지고 해역함대가 가세하게 되면 적어도 해상자위대의 3개 호위대군 정도 까지 대응이 가능해진다. 물론 해자대가 지금 수준에서 정체될 리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열세는 지속되겠지만...해자대는 현재 27DDG급,25DD급,DEX급 등 함정의 건조 계획이 예정되어있지만, 적어도 수상함대간 대결로 대등한 싸움을 펼쳐 볼 수준은 된다는 의미.
- ↑ 다만 이 정도로는 극복하기 쉽지 않은 커다란 격차가 존재하는 건 엄연한 사실. 방공전력이나 잠수함 전력도 격차가 많이 좁혀지긴해도 총전력이서는 조금이라도 밀릴 뿐만 아니라 대잠초계기 및 헬기 등에서 해자대가 훨씬 앞서기 때문. 한국 해군이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해군력의 격차가 꽤 많이 줄어든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 ↑ 해군의 창설기념일은 삼군 가운데 가장 빠르다. 안국역 쪽 북인사동 마당에 해방병단 결단식 표지석이 있으니 인사동에 가면 한번 가보자.
- ↑ 이때 최고 계급은 손원일 단장이 참령(소령)계급을 받았다. 그 다음은 초대 인천기지사령관 백진환 정위(대위)
- ↑ 참고로 현재 해양경찰은 Korea Coast Guard
- ↑ 일본으로서는 식민지 조선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상에서 근무하는 함정근무의 특성상, 선상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답이 없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볼 수 있겠다.
- ↑ 김재규가 바로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이다. 가미카제 훈련 중 광복을 맞이했고, 일본 패망 이후에야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
- ↑ 손원일 제독의 경우 순수 상선사관으로 보기에는 약간 미묘하다. 후술되지만 국부군 해군에서 교육받고 임관하여 복무했기 때문에, 사실 군경력자 출신이다. 군에 관련해 전혀 모르는 민간인 출신은 아니었단 뜻.
아무리 해군이 기술군이라지만, 순수 민간인이 군대 창설에 나섰을리가... - ↑ 이성호 제독이 일부 남아있던 비해사 출신의 제독들을 자신이 해사 1기를 밈으로써 다 전역시켜버린 영향도 있어 해사가 헤게모니를 잡기가 유리한 구조이기도 했다.
- ↑ 초대 신현준 사령관의 경우, 육군 출신임에도 당시 중령 계급으로 해군 통제부의 참모장이었다.
- ↑ 단,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용덕 장군의 경우 군 원로였기 때문에 초대 국방차관으로 임명되고, 이후 국방차관에서 물러난 뒤에 2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광복군 참모처장이었으며, 국부군 공군 창설멤버이기도 했다. 또한 김구의 아들인 김신 장군이 6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 ↑ 1등병조부터 3등병조까지 구분되어, 각각 상사~하사 계급이었다.
- ↑ 본래 일본군에선 하사였으나, 해군/해병에서는 병장에 준하는 계급이었다.
- ↑ 오장의 경우 일원화 조치 이후에도, 해병대에서는 병 계급 최선임자를 칭하는 관용어로 쓰인다. ex.일병 오장
- ↑ 임진왜란 당시 제독으로 호칭되던 이여송 등 명군 장수들을 떠올려보자.
- ↑ 육군의 경우 안중근 의사를 안중근 '장군'으로 부르는 것처럼, 해군은 이순신 장군을 이순신 '제독'으로 부르며 차별화를 고수하고 있다.
- ↑ 해군의 경우 앞에 함대를 붙여, 해군 장성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넬슨 제독의 경우 '尼尔逊 舰队司令'(넬슨 함대사령)으로 표기한다.
- ↑ 불과 3개월 전 육군 2개 대대가 대대장과 함께 월북한 사건으로 인해 민감한 시기였다.
- ↑ 해사1기. 1951년 12월 16일 원산항에서 전사. 당시 PC-704함장.
- ↑ 정장 공정식 소령
- ↑ 하지만 찾으러 간 요트는 그곳에 없었고, 평양으로 옮겨진 뒤였다.
- ↑ 동년 5월 15일 인천해군병원으로 개칭. 한국전쟁 발발시 목포로 이전한 뒤 1950년 7월 27일 목포에서 해체
- ↑ 다시 본 ‘6·25 첫 승전’ 대한해협 해전
- ↑ 정장 이종철 소령
- ↑ 함장 이성호 중령
- ↑ 현재의 제1함대와는 다른 부대다. 자세한 내용은 이하의 내용 참조.
- ↑ 1952년 5월 21일 울릉도 근해에서 미 해군 AO-3와의 충돌사고로 퇴역
- ↑ 1960년 12월 3일 해체
- ↑ 1950년 11월 9일 창설
- ↑ 1952년 8월 15일 창설
- ↑ 1952년 4월 12일 창설
- ↑ 현재 제7전단과는 다른 부대다.
- ↑ 방위사업청이 세워지면서 조함단은 해체되고 전투발전단으로 바뀌었다. 물론 방위사업청에 여전히 해군 조함 병과 장교들이 들어간다.
- ↑ 똥별은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포진해 있기 때문에 발사 안 되는 소총, 불타는 전투복과 전투화, 어군탐지기 구조함 등이 나오는 것이다. 군납비리를 저지른 똥별들은 감방에 처박아 마땅하나 이 땜에 해군 전체를 폄훼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 ↑ Type 214 submarine, 차기 3000톤급 잠수함batch-1 3척
- ↑ 차기 3000톤급 잠수함batch-2,3 6척
- ↑ 세종대왕급 batch-2 3척, KDDX 6척.
- ↑ 인천급 batch-3 8척 예정
- ↑ 대구급 7척
- ↑ PKX-B
- ↑ <영어>Republic of Korea Navy
- ↑ 2018년~2027년 개량 예정
- ↑ 현재로는 해궁이나 해궁 사거리 연장형이 장착될 가능성이 높음.
- ↑ 추정치.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사거리가 발표된적은 없다.
- ↑ 당연히 함포교전도 가능은 하며 이 경우 사거리는 더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명중률은 장담하기 힘들다.
- ↑ http://ko.wikipedia.org/wiki/%EB%AF%B8%EC%8A%A4%ED%8A%B8%EB%9E%84_%EB%AF%B8%EC%82%AC%EC%9D%BC
- ↑ 수리온이 독도함과 후속 마라도 함의 상륙기동헬기로 정해져 총32대가 탑재되게 되었다.
- ↑ 배치2 부터는 4000톤급으로 크기를 키울 예정
- ↑ 해경 희생 뒤에도 中어선 ‘깡패조업’ 여전
- ↑ 어족보존위해 국내어선 감척했는데… 中 어선이 다 쓸어가
- ↑ 물론 단순히 보여주기 식으로 해군이 대형함 건조에 열을 올린 건 아니다. 또한 대잠 전력에 마냥 손놓고 있던 건 아니고. 대한민국 해군/문제점의 반론 항목 참조.
- ↑ 강조하지만 한국 해군 자체는 대한민국 영해 및 해안선에 대해 충분한 방어력을 제공한다.
- ↑ 막말로 이 해병대 전력이 북한도 북한이지만 일본의 침공도 억제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한국이 허약한 나라였으면 일본이 재침공까진 아니더라도 상당히 종속시켜 갖고 놀았을 것인데 한국 해병대 및 해군이 상륙훈련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항시 전시 대비상태이니 건들지 마라" 며 작게나마 경고를 하는 셈이다.
- ↑ 총톤수가 1/3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차이가 준거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해군력은 단순히 총톤수로 따지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6000톤짜리 원양초계함과 5000톤짜리 이지스 호위함을 비교했을때, 원양초계함이 톤수가 더 크다고 그 함이 더 강한 건 아니니까. 해군력은 톤수도 중요기준중 하나지만, 실질적인 대공/대함/대잠 전투시스템, 화력 등 모든 요소를 평가해 산출한다.
- ↑ 사실 제7기동전단 전력 정도면 해상자위대 호위대군 하나 정도는 충분히 격파할 수 있으며, 2개 대군까지는 감당할 수 있다.
- ↑ 대장 계급으로 임명된 마지막 합참차장이다.
- ↑ 최태원 SK 회장의 딸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손녀로 정치가, 재벌가의 자녀가 자진해서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했다는 사실이 화제를 모았다.
- ↑ 전역 후 KBS 아나운서로 입사.
- ↑ 하사관으로 11년 2개월간 복무 후 중사 전역한 뒤 미국으로 이민, 자영업으로 자산을 모아 귀국 후 서해해전으로 소설가로 등단했다. 9.11 테러 때 현장에 있다 다행히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 ↑ 드라마 "나"의 남주 역을 맡았던 배우다. 대학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해서 연예인 치고는 상당히 빨리 입대를 했는데 전역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05년에 방영된 MBC 제5공화국에 출연했다.
- ↑ 머리가 큰 걸로 놀림받았던 MC
- ↑ 가수가 아닌 중견 개그맨이다. 정작 지명도가 높은 가수는 공익으로 복무한 상태.
- ↑ 작곡가. GOD의 '니가 있어야 할 곳'을 작곡했다.
- ↑ 장윤정의 '어머나', 이승철의 '서쪽 하늘', 이루의 '까만 안경'을 만든 작곡가
- ↑ 김용만이 선임병일 때 후임병들을 따뜻하게 챙겨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동갑인 김용만에게 아직도 존댓말을 쓴다고 언론 기사에서 밝힌 적이 있다.
- ↑ 'MY WAY'곡을 부른 가수
- ↑ 유공자자녀 특례로 군의관이 아닌 수병으로 입대해 조기 전역(최종 계급 일병.). 의대생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포기할 맘으로 해군에 입영했다 ,주변의 격려와 군에서 배운 뱃사람 정신으로 다시 학업을 지속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 ↑ "521기 아닙니다 532기 이후에 들어왔습니다."라고 설명이 적혀있었으나, 521기가 맞다. 본 편집자의 손자(24개월 후임)기수였다. 검색하면 521기 1중대 1소대 75번 훈련병이라고 나온다.
- ↑ '비 오는 거리'곡을 부른 가수
- ↑ 웃찾사에서 활약한 개그맨
- ↑ 슈퍼키드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