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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3일 (월) 00:09 기준 최신판
한국의 역사 | ||||||||||||
청동기 시대 |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 | |||||||
원삼국 시대 | 삼국 시대 | 남북국 시대 | 후삼국 시대 | 구한말 | 일제 강점기 | 미소 군정 | 분단 | |||||
고조선 | 고구려 부여 | 고구려 | 발해 | 고려 | 조선 | 대한 제국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 소련 군정 | 북한 | |||
한사군 옥저 동예 | 신라 | 태봉,후고구려 | ||||||||||
진 | 마한 | 백제 | 후백제 | 미군정 | 대한민국 | |||||||
진한 | 신라 | 신라 | ||||||||||
변한 | 가야 | |||||||||||
우산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탐라국 |
고려의 대항(반란) 국가 | ||||
대위국 |
고려 高麗 | |
의장기 | 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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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3년(1374년) 고려 영토. 각 시대의 강역은 아래 역사 단락 참고. | |
건국 | 918년 7월 25일 |
존속기간 | 918년[1]~ 1392년[2] (총 474년 11일, 17만 3137일.) |
영토 | 함경북도와 양강도와 평안북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3] |
수도 | 개경 만월대[4]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태조 (건국자) | 왕건(王建) |
국성 | 개성 왕씨 |
국가원수 | 왕(王)[5] |
언어 | 중세 한국어 |
종족 | 한민족, 말갈족[6], 여진족 등 |
종교 | 불교, 유교, 도교, 무교 |
주요 국왕 | 태조 왕건 (1대 918년~943년) 광종 왕소 (4대 949년~975년) 성종 왕치 (6대 981년~997년) 현종 왕순 (8대 1009년~1031년) 문종 왕휘 (11대 1046년~1083년) 공민왕 왕전 (31대 1351년~1374년) |
고려 代 주요사건 | 918년 태조 고려 건국 936년 후삼국통일 993년~1019년 여요전쟁 1108년 동북 9성 축조 1170년~1270년 무신정권 1231년~1259년 여몽전쟁 1388년 6월 26일 위화도 회군 1392년 8월 5일 고려 왕조 멸망 |
전신 흡수한 국가 | 태봉, 신라, 후백제, 우산, 탐라[7] |
후계 국가 | 조선 |
언어별 명칭 | |
한국어 | 고려(高麗)[9], 고려 왕조(高麗王朝), 왕씨고려(王氏高麗) |
중국어 | 高麗 / 高麗王朝(정체), 高丽 / 王氏高丽 (간체) |
일본어 | 高麗(こうらい、こま[10] ) |
베트남어 | Cao Ly |
몽골어 | Kuryo, |
러시아어 | Корё |
영어 | Goryeo, Koryŏ |
독일어 | Goryeo |
프랑스어 | Goryeo |
스페인어 | Goryeo |
이탈리아어 | Goryeo |
목차
1 소개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의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왕국. 통일신라의 분열 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을 다시 통일하였고, 이후 약 474년동안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하여 1392년까지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일찍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 같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것과 달리 왕건의 고려는 '한반도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역시 거란 등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의지가 없었기도 하지만, 당시 중국과 만주 역시 후삼국을 능가하는 난세에 일본도 덴노 권력의 약화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하다.[12]
고려는 지방의 무인 호적들이 건국 주체였기 때문에 초기엔 상무(尙武)적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무인 호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과제도를 신설하지 않는 등 전반부터 무신들의 지위를 낮추었다.[13] 이러한 무신에 대한 차별은 무신정변의 발발로 이어져 백여년 간 무신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열리게 됐다. 무인 세력을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무신을 천대하다가 이에 대한 반작용에 무신정권으로 치달았다는 것이 고려사의 아이러니. 또한 고려가 상무적인 문화를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전쟁이 조선보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려는 사상 연구에도 자유분방했다는 평가가 있다.
고려 전기 북방의 요나라와 중국의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는 고려가 자주성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형성해주었다.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을 막아내며, 군사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높인 것도 이러한 자주성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14]
그러다 중기 이후 금나라의 위협으로 책봉 질서의 사대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이후 몽골제국의 장기적인 침략에 굴복하여 원 간섭기엔 속국화되어 고려의 자주성은 한때 조선보다도 더 크게 침해를 받기도 했다. 거기다 고려에 쳐들어온 몽골군은 정예군이 아니었다. 정예군은 중국 쪽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은, 여진 장수로서 혼성 부대를 지휘한 오야르 등의 군대나, 예구 대왕의 동방 왕가 병력으로 볼 때, '타마(보조 경기병대)'로 추정되는데 타마의 주 역할은, 전장에서의 보조 지원 및 정복지에 대한 치안 관리 및 유지다. 또한 몽고군의 1차 침공 때 왕영조가 이끈 부대가 한군(漢軍)인데 한군의 주 역할은, 몽고군이 접수한 요새나 고을을 지키는 주둔병 성격을 띄었다.
국호는 고구려의 다른 이름인 고려에서 따왔다. 개성 왕씨의 고려 국명을 고구려에서 변형해서 새로 만든 국호로 생각하기 쉽지만 장수왕 이래 고구려는 사실 고려로 불렸다. 즉, 왕건의 고려 건국 당시 한반도인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말그대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라는 이름을 정한 것이다. 우리가 장수왕 이후 고려를 고구려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뒤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둘째로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한편 궁예도 왕건 이전 고려를 세웠다 이후 마진,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기도 했는데,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 칭하는 것일 뿐이다.[15]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이 중요 사료로 꼽힌다. 물론 세가지 사료 모두 편파성이 없지 않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써서 편파성을 줄인 고려사와 그런거 없는 고려사절요는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집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건국의 정당성 홍보 요소가 제외될 수가 없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여러 모로 비판을 받고있다. 거기다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는 고려가 겪었던 여러 전란이 원인이기도 하다.
고려도경의 경우는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성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로 송 황제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주마간산이라거나 수박 겉핥기 같다. 몇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항해기술이 뛰어났고(과선항목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이 세 사료 모두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2 간략한 역사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 ||||
호족연합 | 문벌귀족 | 무신정권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
350px |
고려의 영토 변화를 간략하게 나타낸 지도. |
서양의 역사학적 분류인 고대 - 중세 - 근대의 분류에서 중세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가는 논란거리이지만, 주류 학설에서 고려시대는 중세로 보고 있다.
북진을 표방한 탓에 요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했다. 요, 송, 금과 사대관계를 맺어도 주권국가로서 처신해 고려만의 독자적 천하관에 따라 내부에 번국을 설정하고 외왕내제체제를 유지했다. 이 시기는 북방 민족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여서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체적으로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고 각 국마다 황제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상대의 황제국체제를 인정한 탓이다. 이 탓에 거란과 여진을 한족과 다르게 여기는 몇몇 중국인들은 송나라 역사를 흑역사 취급하기도 한다. 수능에선 교육과정 개편으로 인해 근현대사 위주의 한국사교육이 이뤄진 탓에 분량이 안습이지만 공무원 시험에선 전체 문제중 20%가 고려와 관련된 문제다.
크게 고려전기/문벌귀족기/무신정권기/몽골침략기/고려말기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시대마다 지배계층은 호족/문벌귀족/무신/권문세족/신진사대부로 나누어진다. 즉, 지배계층의 교체가 활발했던 시기였다. 따져보면 문벌귀족은 호족 시기에 6두품 지식인 관료였고, 문벌귀족 시기 무신 역시 문벌귀족의 끄나풀 같은 기믹이었으며, 무신정권 때의 권문세족은 정권에 빌붙던 삼별초나 문신들에서 생성되었다. 신진사대부 역시 권문세족의 바로 밑에 있던 향리들로 고려 때의 중인과 비슷했다. 때문에 귀족적 성격과 역동적 성격이 공존하는 묘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아래의 내용을 보면 더 자세히 알겠지만, 국가의 시스템은 관료제 체제를 지향했으나 사회는 전대의 귀족사회 형태를 상당부분 유지한 게 크다 하겠다.
조선처럼 모두 조, 종으로 끝나지 않고 원 간섭기 시절이 워낙 개판이라 후반부에는 '충'자 돌림 왕들과 4대의 '왕'이 등장한다. 여기서 충(忠)자 돌림은 2등 시호고, 공(恭)자 돌림은 3등 시호다. 명나라가 고려/조선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우왕, 창왕은 폐위된 데다가 왕씨가 아닌 역적으로 몰려 "신우", "신창"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명나라가 책봉한 왕들이 공민왕 - 공양왕(양위의 의미) - 태조(강헌왕) - 공정왕(조선 정종) - 태종(역시 한자가 다른 공정왕)이 되는 것이다. 이후 명은 랜덤한 이름을 내려준 편이고, 청나라에서는 강자 돌림, 충자 돌림 위주의 시호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처럼 잘 외우지는 않는다. 할 수는 있다. 태혜정 광경성 목현덕 정문순 선헌숙예 인의종 명신희 강고원 충열선숙혜목정 공민 우창 공양 식으로 외우는 소수의 역사 매니아도 있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작정하고 외우려면 시대별로 구분하면 어려울것도 없다. 태혜정광경성목현(초기)/덕정문순선헌숙예인의(중기)/명신희강고원(무신기)/열선숙혜목정(원간섭기)/공우창공(말기). 그냥 어디에 써놓고 한번씩 중얼거리면 정치사 틀이 잡혀있는 사람은 금방 외워지는 편이다. 산토끼에 맞춰서 자르면 잘 외워진다고 전파한 모 공시 국사 강사도 있다.
고려의 경우 태혜정광경성목현이나 예인의명 정도까지는 도움이 되는데, 덕정문순선헌숙까지는 워낙 잘나가던 탓에 새로 한 일이 없어서 별 도움이 안되며, 명종 이후부터는 그냥 개판이고, 충자 붙은 왕들은 이미 연대순 개념이 파괴된다. 충렬왕부터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처럼 재위했다 내려오고 복위한 경우도 있으니…… 충렬 - 충선 - 충렬 - 충선 - 충숙 - 충혜 - 충숙 - 충혜로 요약된다. 그래서 별 도움이 안되고, 공민왕 이후는 하다보면 그냥 외워지는 식이다.
약사인 만큼 주석은 최대한 생략하고 핵심 명사 위주로 작성 바람.
2.1 건국과 태평성대
건국 초기의 영토. | 강동 6주를 서희덕분에 할양받고 난 직후. 이 강역이 외세와의 전쟁 때를 제외하고 고려 중기 쭉 유지된다. |
10세기 초반, 후기 신라(통일신라)가 중앙귀족들의 왕위다툼 속에 지방호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자 지방 군벌들이 난립하는 후삼국시대가 벌어진다. 918년, 송악(지금의 개성특급시)의 대호족(옛 고구려-패강진 지역인 패서호족) 출신인 왕건이 자신의 군주였던 태봉(후고구려)의 궁예를 제거하고 세운 것이 시초. 국호가 고려인 건 당연히 고구려 계승의식을 나타냄과 동시에, 궁예의 고려(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와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신라의 항복을 받고(935) 왕위 다툼으로 어지러워진(이때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백제 및 군벌들을 누르며(936) 다시 삼한을 재통일했다.
초창기에는 호족연합정권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왕권이 불안정했고, 이는 2대 혜종, 3대 정종의 몰락과 요절을 초래했다. 이에 4대 광종은 5대 10국 시대의 혼란하던 중원이나 발해 등지에서 온 귀화인(쌍기 등)들을 적극 등용하고 중국식 중앙집권화 관제(과거제도)를 도입하며 고려를 이전 신라보단 한층 발전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로 변모시켜 간다. 신라 하대의 첫 임금인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기 했으나 하급관리에만 제한이 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그 의미가 크다. 이렇듯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들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독자적 연호를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 북송과 수교(960)하면서 칭제건원을 폐기한다.
이 숙청의 휴유증 속에 중앙 내부의 권력다툼과 혼란[16] 그리고 발해를 멸하고 새로이 등장한 거란족이 건국한 요나라와의 전쟁까지 겁쳐 다소 혼란기를 거친다. 요가 연운 16주를 넘어 본격적으로 중원을 노리기 전에 뒷통수 정리를 한답시고 고려를 세 차례에 걸쳐 침공했다가 매번 패배한 여요전쟁이다. (2차침입 때는 수도 개경이 함락당해서 현종이 나주로 피난했다.) 다행히 요는 유목민족 특유의 폭발적인 초기 성장동력을 가지고있던 시기는 아니었다. 제대로 고려를 침략한 2차전쟁 당시의 요 황제 역시 요성종이다. 성종 Vs 성종 성종이란 묘호는 나라의 체제가 정비되고 안정된 시기에 붙여진다. 그리고 고려가 이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의 군사적 최강대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결과, 요의 연호를 쓰는 선에서 타협하여 실질적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있었던 대표적 전투가 그 유명한 귀주대첩.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무신의 힘이 증가하면서 고려 최초의 무신란인 김훈, 최질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무신한테 권력을 주면 안 된다는 인식을 왕과 문신들에게 강하게 심어줬고, 이 일 이후로 군사권(지휘권)을 문신에게 일임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서희나 강감찬도 문신이다.
6대 성종과 8대 현종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유교와 불교를 혼합한 중앙집권 시스템이 안정화 되고 요나라와의 전쟁도 종결되었다. 이후 고려는 16대 예종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전성기를 누리게 되며, 그 중에서도 11대 문종 시기를 고려의 국력이 가장 정점이었던 시기로 보고 있다. 동북아에서의 세력균형으로 상대적 국력으로는 거의 고구려 전성기 이후와 현대 한국 이전의 최고를 자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건국 초와 전성기의 고려는 동북아의 무게추로서 국시인 북진정책도 써가면서 중국 왕조와 북방민족 사이에서 적절하게 줄타기를 한 나름대로 강국이었다. 송은 서쪽의 서하와 동쪽의 고려를 이용해 요나라를 압박하려 했고, 요는 이것을 막으려 했다. 이런 까닭에 요나 송이나 둘다 고려를 우습게 볼수 없었고 고려가 요 사신을 접견할때 제후국으로서 신하의 예인 북면(北面)이 아닌 주인으로서 사신을 받는 서면(西面)을 하였고 그것을 요에게 인정받았다.
국서에 송나라(북송)의 연호를 쓰지 않고 거란의 연호를 쓰는 것을 못마땅해 한 소식(=소동파)이 고려에 서책 등을 보내지 말라고 상소까지 올린 적도 있지만, 송나라는 고려가 행여 북방민족에 붙어서 무게추가 기울까봐 고려 우대 정책을 지속해야만 했다.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서 패악을 부리고 직접 하사품을 골라가도 뭐라고 못했을 정도다. 훗날 소식은 고려 승려 의천이 송에 오자 내내 싫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그를 위한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 송나라가 얼마나 고려에 쩔쩔맸는지는... #, ## 참고.
한편 이에 대해서는 좀 과장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2.2 문벌귀족 시대
전성기를 거쳐가며 고려 건국 초 가장 위협이 됐던 요나라가 내리막을 걷자, 천리장성 너머 성장하던 여진족이 새로운 위험요소로 떠올랐다. 이에 고려 16대 예종은 국경 안정과 농토의 추가적 확보 등을 위해 윤관에게 여진 정벌을 명하였고 소드마스터 척준경 등의 활약과 더불어 동북 9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나(1107) 여진의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다음 해 돌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여진 정벌 직후 흩어진 부족들이 완안아골타 아래 통합된 여진은 금나라를 세운다(1115). 금은 북송과 연합작전을 벌여 요를 멸망시킨 뒤 다시 북송의 수도 개봉을 공략하고 황제와 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포로롤 잡아갔다(1126년의 정강의 변). 고려는 그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군신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위신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는 외교로서 정리가 됐기에 전쟁은 없었다. 이자겸이 안정된 반란정권유지를 위해 그렇게 했지만 금나라의 고려침공 명분 을 제거하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금나라는 고려가 칭신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고려의 군사력을 우려하고 있었기에 상국이었음에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한편, 고려의 중앙정치는 전성기를 거치며 과거제로 중앙권력에 진출한 관료들이 공음전, 음서, 사학 등을 기반으로 자신의 가문을 귀족화하는 문벌귀족의 시대가 갖춰지면서 모순이 쌓이기 시작한다. 문종 때 임금의 장인이었던 외척 이자연을 시작으로 경원 이씨(인천 이씨)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 이렇게 보면 문벌 귀족사회는 건국 130~150년만에 첫 출연한 셈이지만, 문종 이후로 숙종, 예종 등 왕권이 강한 왕들이 많았으며, 숙종은 경원 이씨를 물리치고 왕위를 얻었고, 예종은 경원 이씨와의 결혼을 강행할 만큼 권세가 강했다. 결국 이 50~70년의 태평성세를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문벌귀족사회의 폐해, 정점이라 할만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건국 200여년 즈음인 인종 때다.
17대 인종 때인 이자겸의 난과 함께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폭발되었다. 이는 기존의 문벌귀족과 새로이 귀족가문이 되고자 하는 신진관료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인종 때 벌어진 이자겸의 난, 서경천도운동, 그리고 18대 의종 대의 정치 상황은 모두 이런 갈등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 등의 혼란상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기에 인종대와 그 이후 의종대의 사회는 표면적으로 50년간 다시 안정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문벌귀족의 집권기 동안엔 송나라를 본딴 문신 편애 및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어 갔다. 아예 원조 문신국가인 송나라는 이 정책으로 나라가 유목민의 조공 셔틀이 되었다. 그런데 송나라의 국방력 약화는 문치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시대 절도사의 발호를 반면교사 삼아 내부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만 짜인, 잘못된 군제의 탓이 컸다. 고려는 우선 국초부터 과거에 무과가 없었으며(예종 때 잠깐 실시되고 폐지), 무신은 승진에 제한이 있어서 높은 관직을 얻으려면 문신의 품계를 받아야했으며 전쟁에서 지휘권도 문신에게 있었다. 물론 이는 호족과 군벌의 성장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강감찬, 윤관 등 유능한 문관 지휘관도 많았지만 문벌귀족시대가 계속 지속되면서 중앙정치의 혼란과 함께 문관, 무관을 포함한 관료들 집단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자라난다.
2.3 무신정권 전기
이런 문무차별은 이에 따른 18대 의종대에 향락에 빠진 왕과 전통적 무인 차별 그리고 문신 귀족들에 대한 무신들의 분노 속에 무신정변(1170년, 고려건국 252년째)을 초래한다. 물론 무신의 정변자체는 대단히 우발적이었으며, 의종의 집권 초기 무신 우대 정책이 도리어 무신의 난의 힘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점에서 왕실과 귀족 대립사이 자연스레 무사들이 신분으로 부상한 일본의 막부와는 다르다. 이후 고려 왕은 실권은 없는 상정성만 있는 허수아비 존재로 전락하고, 실권은 무신 실권자들이 장악하는 무신정권이 열린다. 허나 무신들이라고 뭐 문신들하고 딱히 다를 바는 없어서, 그냥 지배세력 이름에서 ㄴ 받침 하나 빠진 격이었고, 무엇보다 '힘이 제일'이라 쿠데타 가능성이 높아져 나라꼴은 더더욱 막장이 되어 갔다.
초기엔 무신정변을 일으킨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3인방이 권력을 나눠 장악했으나, 다음해 이고가 역성을 일으키려 하자 이의방이 이고를 척살하고 이의방이 우세한 상황에서 정중부와 함께 권력을 장악한다. 그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보내는 등 본격적으로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으나 3년 뒤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정중부가 권력을 홀로 쥐어잡게 된다. 고려의 삼두정치??
그러나 5년 뒤 청년 장군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정균 등을 제거하며 권력을 틀어쥔다. 경대승은 특이하게도 무인 실권자들이 죄다 고려사 반역열전에 실린 데 비해 유일하게 거기에 실리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근왕적이었고, 또한 청렴하여 측근들의 부패를 단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신협의체인 중방을 닫고 자신의 사병인 도방을 활성화시키면서 무신정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경대승이 4년만에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정중부의 잔당으로 살아남아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이 실권을 잡게 된다. 이의민은 동경(지금의 경주시)의 천출 출신으로 무신정변에 직접 가담했으며, 당시 폐위되어 거제도에 유배가 있던 의종을 직접 시해까지 한 인물. 이의민은 무려 13년동안 집권했는데 십팔자위왕설을 믿고 왕위에 대한 야심을 품었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김사미 · 효심의 난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등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그의 아들들 역시 권세를 믿고 오만해져 남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인사권을 통한 전횡을 부리는등 만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거병한 최충헌 형제로 인해 미타산에서 이의민은 살해당하고,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일가는 멸족당하고 만다.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경대승이 취했던 권력 정책을 계승했다. 즉, 중방을 더욱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조직인 '교정도감'을 새로이 권력기구로 만들고 도방을 부활시켜 사병을 기르는 등 이전 무인들보다 더욱 강력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이런 안정된 권력은 최씨 세습정권으로 이어진다. 이전 집권자들이 당시의 고려 왕 명종과 함께 공존을 했다면, 최충헌에겐 그런 건 없었다. 최충헌 시대 25년간 왕은 무려 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은 최충헌이 폐위한 것(명종, 희종)이었고, 거꾸로 두명(신종, 강종)은 옹립했다. 그는 독재체제를 구축한 이후 권력을 자신의 아들 최우(혹은 최이)에게 물려줬으나 때마침 몽골 제국이 고려로 쳐들어 오면서 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건국 313년 만이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반란과 민중봉기가 중점적으로 폭발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수탈로 인한 민생고와 자연재해에 백성들의 생활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벌귀족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푼다는 듯 더욱더 착취와 폭정을 일삼게 되었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던 중 1173년에 문신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의 반란에 절령 이북의 40여개 성이 호응하는 등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반란은 민중들에게도 번져나가 특별행정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 형제가 그리고 최충헌의 사노출신으로 신분해방을 꿈꾸던 만적의 난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 옛 삼국의 땅에서 삼국부흥을 기지로 내세우며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경에서는 최광수가 고구려 부흥을 명분으로 거사했고 1193년에는 경상도의 운문과 초전지방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결탁, 거대한 규모의 신라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심지어 여몽전쟁 도중에는 담양지역에서 백제부흥을 명분으로 이연년 형제가 난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삼국부흥운동은 당시 고려 조정과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심과 착취, 폭정 속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농민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때까지도 삼국 분립 의식이 각 지역에 남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계속된 민란은 결국 무신집권기 고려의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2.4 대몽항쟁 - 무신정권 후기
몽골은 고려에 칩입한 거란의 잔당을 함께 물리친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 만행을 일삼았고 고려는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사신 저구유가 국경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교는 단절되었고 결국 몽골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에 최우를 필두로 하는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전면전은 어렵다고 보았으나, 문신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화친책도 거부하고 입도정책을 구사한다. 이는 강화도(강도)에 짱박혀 수전에 극도로 취약한 몽골군이 제풀에 물러가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최우는 스스로도 뛰어난 명필이자 문사로 문신들을 중용하면서 성공적으로 고려의 체제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중용이지 이럴 땐 그런거 없었다. 최우는 입도정책을 반대한다면 심복 장군들도 여럿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본토 침략이 가시화된 3차칩임 이후 육지의 민중들은 전란의 참화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초기에는 처인성 전투 등으로 소규모 몽골군이 쉽게 물러갔지만, 금나라가 멸망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몽골이 파병하는 군대의 규모가 증가하였고, 이 병력이 충주 이남으로 진격하면서 백성들은 진짜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무신정권과 그 사병 삼별초는 몽골군에 제대로 항거하지도 않았고 조운으로 세금만 걷을 뿐이었다.
각지에선 민중들을 중심으로 전장에 내몰린 힘없는 장수들과 승려, 천민들이 합심하여 죽기살기로 몽골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토호를 주축으로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서경(평양-동녕부) 주변과 동북면(상성총관부)이 그렇게 넘어가면서 고려의 강역은 사실상 철령, 자비령 이남의 통일신라 영역 정도로 내려앉았다. 무신정변이 터진 이후 60년의 무신 정권도 그랬지만, 40년 가까운 대몽항쟁 동안 고려라는 왕조국가는 정말로 없는 거라 다름없었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결국 오랜 전란을 버티기 힘들게 되자 최항 - 최의를 거쳐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뒤이어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마저 살해당하고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왕실과 조정은 몽골에 항복해버렸다. 이 직후 일어난 삼별초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제주는 탐라총관부로 원에 넘어갔다가 돌아왔다. 삼별초는 자주정신의 발로라는 측면도 분명하지만 무신정권의 핵심이었던 친위세력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다는 한계가 있었다.
고려는 국체를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국왕이던 원종의 적절한 외교정책(거래)과 오랜 저항의 결과였다. 특히 원종이 세자시절 입조하여 직접 교섭한 원나라의 창시자 쿠빌라이 칸(원세조)은 세조구제(世祖舊制)안에 '불개토풍(不改土風)', 즉 고려의 풍습과 제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외왕내제는 끝났다. 고려는 이후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몽골 문화가 점점 퍼져갔고(몽골풍) 고려의 풍습도 몽골에 전달되었다(고려양). 공물에 시달리고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카다안의 침입 같은 사건도 있었다. 그래도 전쟁 자체가 종식된 건 다행이었다.
2.5 원 간섭기 - 권문세족 시대
원나라의 간섭과 함께 원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성 충(忠)자로 시작하는 왕들의 "원의 부마국 시대가 열린다. 여기서 (몽골에 항복한 원종은 첫 왕이어서인지 그대로 종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공민왕이 이 왕들에게 새 시호를 바치지만, 아들 대부터 그런 거 없었다.
원의 부마국 시대에 고려국왕은 모두 몽골의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왕실은 절반이상 몽골의 피가 섞였다. 당장 충선왕만 해도 칭기즈 칸의 피가 흘렀고, 반원 자주정책을 펼쳤다는 공민왕도 왕비는 원의 노국대장공주(자녀 없음)였다.
때문에 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지도를 그릴 때 고려를 포함시켜서 그리기도 한다. 킵차크 한국에 점령되거나 공물을 바쳤던 러시아 공국들과 같은 취급이다. 앞서 나왔듯이 원나라 간섭의 단적인 예가 첫 충자 돌림 왕인 충렬왕 때인 두차례의 걸친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과 공녀, 그리고 외왕내제 폐지다.
이름뿐이었던 고려 왕실은 황제국의 부마로서 예전의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심지어 충선왕 때는 원나라의 황위 계승 분쟁에 한몫을 거들어 상실된 영토와 요동지역을 포괄한 심양왕(후에 더 높아진 심왕)을 받아서 고려왕 겸 심양왕으로 두배의 강역을 다스리던 시절도 있었다. 탐라총관부와 동녕부 같은 다른 지역은 이미 충렬왕 때인 1290년에 돌려받았다. 한편 심양왕은 충선왕의 관직으로, 이후 고려 왕에게 세습되지 않으면서 (조카 연안군 왕고에게 세습) 5년간의 (명목적) 영광에 그쳤다. 그러나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이문소(원래 일본 정벌용 임시기관. 차츰 원나라의 고려 통감부가 됨)등 원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당시 고려국왕은 명목은 왕이지만 사실은 원 제국의 서열 n위 황족이기도 했다. 이 왕들은 고려사 최고의 막장 왕들이 된다. 충선왕은 개혁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에 권세를 얻은 뒤에는 고려에 돌아오지 않고 원의 수도 연경에서 학문과 수도 생활에만 몰두했으며, 양위를 받아 뒤를 이은 충숙왕도 좀 나았지만 비슷한 템포를 겪다가 결국 역시 양위, 그의 아들 충혜왕은 아예 향음에 빠져 몽골 공주까지 겁탈한 막장왕이 되어 몽골 사신에게 잡혀가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좌를 차지하였다가 사망한 이후에 복위했다가 다시 폐위당했다. 결국 이 시대 왕들의 모순, 즉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졌지만 정작 고려 내에서 그 권한을 이용할 수 없는 지점(밉보이면 폐위되었다가 빌고 빌어 복위)이 왕들의 막장화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날뛰는 권문세족(부원배)의 횡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각해져갔다.
이러한 고려왕들의 행동은 몽골제국의 일부로 포함시켜도 할말이 없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몇 차례 명목상으로도 완전히 고려를 원에 합병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원 내부적으로도 반대여론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이때마다 이를 막은 것이 쿠빌라이 칸의 세조구제다.
이러한 행동의 이유는 충선왕부터 충혜왕까지 자신을 고려의 왕이 아닌 칭기스칸의 황금혈족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원나라 황위 계승 분쟁에 참여한 것도 그런 생각의 일환이었고 당시 고려왕에게 고려는 그저 자신의 영지였을 뿐이었다. 원간섭 이전시대에 비하면 국가인식이 오히려 퇴화된 중세 유럽에서 볼법한 국가관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정통성을 고려의 왕건이 아닌 황금씨족에서 찾으려는 점 때문에 몽고풍이 왕실 중심으로 유행되었다. 이런 정통성 인식이 다시 태조 왕건에 맞춰지는 것은 원나라 공주 소생이 아닌 고려인 소생의 공민왕이 즉위하면서다. 그러나 공민왕조차 황금씨족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들 우왕 때는 부원배들에 의해 친원정책으로 선회한다.
- 여몽 관계항목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확인가능.
2.6 고려 말기
고려 말엽의 영토. 공민왕 때 동북면(쌍성총관부)을 수복한 이후의 강역이다. 위키피디아에는 1374년의 고려 영토라고 기재되어 있다. | 공민왕이 수복한 동북면(쌍성총관부) 영토 지도. |
충혜왕의 사후, 충혜왕의 어린 아들인 충목왕과 충정왕이 뒤를 이었으나 둘다 얼마 안 가 요절했으며, 홍건적의 난 등의 반란 크리가 터지며 원 제국은 70년만에 몰락의 조짐을 보였다. 뒤를이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충혜왕의 동복 아우)은 무너져가는 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반원정책을 펼쳤다. 고려는 다시 부흥하는 듯 보였다.
공민왕은 대표적 권문세가였던 기씨 일족을 숙청하고 몽골풍의 양식과 변발을 금지시켰으며, 정동행성(특히 이문소)를 폐지한 뒤 군대를 동원해 쌍성총관부를 점령하여 옛 강역을 회복했다. 심지어 일시적이나마 요동을 공격하는 모습에서 정점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가 압록강을 오녀산성(졸본)은 물론 요동의 중심부인 요양을 점령한 적이 있으나 군량부족과 나하추의 게릴라전 때문에 결국 요래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한 사례. 이 사실 덕분에 위화도 회군에 대한 떡밥이 더욱 풍부해진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 속에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개경까지 쳐들어와 공민왕이 안동까지 몽진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큐슈의 왜구가 삼남 지방은 물론 서해도 (황해도), 수도인 개경 부근과 지금의 함경도까지 터는 안습한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 숙청 이후 초심을 잃고 혼군이 되어 횡음에 빠졌고, 결국 시해까지 당하면서 고려왕조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다만 공민왕의 말년 행보에 대해선 조선왕조의 개국 당위성을 위한 왜곡이 어느정도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17]
어쨌든 공민왕의 치세를 기반으로 하여 향리 계급에서 비롯된 신진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원명교체기로 외적이 침입이 끊이지 않은 혼란 속에 신흥무인(최영, 이성계)세력들이 성장한다. 원명교체기의 혼란 속에 일어난 원나라와의 전쟁, 홍건적의 침입,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은 탄탄한 사병을 가진 이들이 성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공민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공민왕 시대의 권신 이인임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우왕대에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고 어느정도 국가체제를 재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요동정벌을 실현하려는 듯하였으나 당시는 고려 멸망이 4년 전이었다.
황산 대첩 등으로 고려의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성계가 (지금까지 역사 속의 가장 큰 떡밥이 되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다.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쪽에선, 실제로도 나중에 조선대에 들어서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는 것과 명 태조 주원장이 고려와 조선의 강병이 요동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반대측에서는 성공했다 할지언정 과연 그것이 국가가 재정비되는 시기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을 제기한다. 새로 일어나는 명과 맞서야 했으니 당연히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었을 터라는 것. 앞서 보았듯이 고려는 압록강을 한번 넘었으나 곧바로 회군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 우왕을 폐위하고 잠시 그의 아들 창왕을 옹립했다가, 그들이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선전으로 쫓아낸 뒤, 그 다음 공양왕을 세워 몇가지 개혁안을 수행시켰다. 그리고 이때 정몽주가 이성계를 궁지로 몰며 저항했으나 결국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살해했고, 4개월 뒤(음력 7월 16일)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왕)사"로 선양찬탈을 받았다.
고려는 역성혁명의 반발을 우려한 이성계의 조치로 6개월간 이름만 존속되다 1393년 음력 2월 15일 명의 승인으로 조선으로 이름이 바꾸면서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했다. 보통 1392년을 조선 개국으로 보아 474년만에 멸망했다고 본다. 1403년에야 태종 이방원이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아 왕호를 쓰기 시작했다.
무려 5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존속했으나 1170년 무신정변 이후에는 이미 멸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도 천운인지, 아니면 뒷감당할 수단이 있었는지 꽤 오랫동안 버텨왔다는게 놀라운 역사라 하겠다. 뒤의 조선 또한 양란 이후 200년 넘는 시간을 버티긴 했지만, 조선에 경우 중앙집권체제로 고려보다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한데다, 양란 이후 외세의 침입 이전까지 대체적으로 고려보단 안정적이었다.
3 황제국 논란
먼저 '황제란 무엇인가' 라는 것부터 따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황제라 함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 세계를 통제하는 군주를 말한다. 고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하늘의 법칙을 담은 역법을 제정, 연호를 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받든 군주와 국가라 주변 국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한테서 조공도 받을 수 있고 주변 제후국들에게 자신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할 수 있고 사후 종, 조와 같은 묘호를 갖는다.
또한 주변에 제후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는데 황제, 폐하, 태자, 짐, 칙령, 만세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제후국의 용어인 왕, 전하, 세자, 과인(또는 고), 왕명, 천세 등의 용어와 대응한다. 그리고 그 밑의 관료기구 역시 황제국에 맞게 2성 6부제를 이용하기도 한다.
고려의 경우는 황제국, 제후국체제 양자를 모두 채택한 외왕내제라고 할 수 있다. 안에서는 황제라 칭하고 밖에서는 왕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 말부터 몽골의 간섭을 크게 받으면서 안에서도 황제라 칭하기 어렵게 됐지만... 이는 국내 사학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 것은 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드러난다. 고려사엔 고려 태조가 천수란 연호를 사용했고 광종때 광덕이란 연호를 사용했다고 나온다. 고려 경종 때 만들어진 하남 교산동 약사여래상엔 황제만세원이란 표현이 있다. 고려사에서는 현종때의 장군이 현종에게 폐하라고 칭하는 부분이있고 인종때에는 왕에게 표문을 올릴때에는 '성상폐하', 태자한테는 '태자전하'라고 임금과 태자를 부르는 경칭을 통일하자는 상소가 있었다. 이 예로 삼국사기 서문에서 김부식은 인종의 경칭을 '성상폐하'라고 쓰고 있다.
이 밖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가졌으며 도성 성문도 5문으로 황제국과 그 격이 같다. 황제만이 입을 수 있다는 황색 의복들을 고려 초기부터 원간섭기 이전까지 입었으며 종, 조와 같은 묘호도 사용했고 공, 후, 백, 자, 남과 같은 오등작도 시행했다. 또 고려왕은 팔관회를 통해 여진, 일본, 송, 탐라사신과 상인을 불러들여 조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놓고 황제국이었냐면 그건 무리가 있다. 우선 고려는 후주, 송, 요, 금, 원에 조공을 바치고 그들의 연호를 쓴 제후국이다. 칭제건원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기간은 광종대만이며, 그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이후 인종 때 묘청 일파가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고 서경, 즉 지금의 평양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진공대사탑비같은 금석문에서는 황제가 아닌 왕이란 표현이 나온다. 봉작제도 철저히 시행하지 못하고 봉군제를 고려하여 나름대로 고친 뒤 같이 사용했다. 성종때는 제후국 태묘방식인 오묘제를 확립하기도 한다. 다만 고려의 태묘는 지속적으로 개수돼다가 의종때 황제국의 체제로 바뀌게 된다.
이렇듯 고려는 황제국과 제후국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중간 형식을 취한다.
이렇게 된 이유엔 다음과 같다. 우선 고려가 3성6부제(정확히는 2성6부제)를 시행한 이유 굳이 황제국을 지향해서라기 보다는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 크다. 왜냐하면 3성6부보다 격이 낮은 제후국의 예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필요) 그렇기때문에 전 한국의 왕조들의 예를 따르다가 자연스럽게 당나라의 제도 역시 받아 들인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기엔 주변에 강국들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는 외부 과시보다는 본래 전 왕조들이 쓰던것들을 계속 쓰거나, 내부의 왕권 강화를 위해 외왕내제(外王內帝)의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의종을 일본에서 황제라고 부른 기록이 있긴 한데, 그건 조선 성종에게도 그랬다. 물론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4년조(1080년)에 '고려국 황제' 라고 분명하게 언급해서 의종 관련 기록이 단순 립서비스에 불과했다고 보긴 무리이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그렇다.
또한 고려 지배층의 천하관이 대체로 일치하지 않고 나뉘어 있었던 것도 고려가 외왕내제를 취하는 원인이 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대체로 국수주의적 천하관, 다원적 천하관, 화이론을 들 수 있다. 국수주의적 천하관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최고'라는 천하관으로, 그렇기에 대외적인 칭제건원에도 긍정적이었다. 이러한 천하관을 지녔던 유명한 세력으로는 묘청 일파를 들 수 있다. 다원적 천하관은 각 국가마다 자신의 천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말하자면 송에는 송의 천하가 있고, 요에는 요의 천하가 있으며, 금에는 금의 천하가 있고, 고려 역시 고려의 천하가 있다는 것으로, 고려의 왕(황제)은 고려의 천하 안에서 해동천자라는 것이다. 화이론은 말 그대로 중국의 중화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천하관으로, 고려 역시 오랑캐이기 때문에 고려는 제후국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려에서 유명한 화이론자로는 시무 28조를 올렸던 최승로,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을 들 수 있다. 원 간섭기 이전까지 고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이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최승로가 활약했던 성종 대나 김부식이 활약했던 인종 대에 고려는 외왕내제를 잠시 접고 대내적으로도 제후국을 자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의 지배층 다수는 다원적 천하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는 데 거부감은 없었으나, 대외적으로도 황제국을 자칭하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변에 강국들이 너무 많았기에 외왕내제 체제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고려 현종이 북송 황제에게 황제 존호를 내려달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권지고려국사 왕순(현종)이 고주사 윤증고 및 여진장군 대천범 이하 무릇 78인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순이 표하여 말하기를 "거란이 도로를 막아 오랫동안 통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황제 존호와 정삭을 내려주십시요" 조하여 청을 따랐다. -속자치통감 대중상부 7년 (1014년)
이 기록이 고려가 칭제했다는 것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기록에서 '황제'는 고려 황제가 아니라 북송 황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고려는 거란 때문에 송나라와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고 그래서 당시의 송나라 황제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의 존호를 알려달라고 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다른 나라 황제에게 자기 황제의 존호를 내려달라고 하는건 모순적이다. 저 기록에서도 고려는 송나라에게 제후국의 예를 갖추었고, 방물을 바치면서 저런 말을 했다는데 조공을 바치면서 자기 왕을 황제로 인정해달라는 건 이상하다. 그런데 다만 동아시아사에서 한 나라의 황제가 다른 나라의 황제를 책봉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다. 금나라와 남송이 1141년에 체결한 소흥의 강화에서는 금 황제가 (남)송 황제를 책봉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이며 고려 현종의 사례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말하자면 고려는 명분이 있는 중화권 국가인 북송, 그리고 무력이 강한 요 및 금에게 한 수 접어서 제후의 예를 표했으며, 이외에 탐라, 금 건국 이전의 여진, 일본 등에게는 황제국 행세를 했다. 고려 초기의 제주도는 탐라라는 이름으로 명목상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고려 영토나 다름없었으며, 탐라는 고려에게 조공을 바치고 제후국처럼 행동했다.
즉, 고려의 왕이 실제로 내부적으로 황제를 간간이 칭한 것은 사실이 맞고 왕이라 한 경우에도 내부 격식을 황제급으로 한 경우가 많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중화권 국가를 상대로 황제국이라고 공표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칭제했던 것은 아니었고, 이는 역시 황제국 체제라기보가는 외왕내제 체제라고 보아야 한다. 비슷한 사례로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이 있다. 이들도 베트남 내부에서는 스스로 황제라 칭했지만 중국 청나라에게는 제후왕을 자칭했다.
종합하자면, 고려는 원나라 간섭 이전까지 일종의 외왕내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원나라 간섭 이후에는 그 유명한 "~종"을 "충○왕"으로, "짐"은 "고"나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낮춰부르게 된다. 오등봉작 역시 폐지되었다. 관제의 변화는 후술한다.
3.1 황제 칭호에 대한 금석문, 외교문서 종합
- 금석문
황제(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965년)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우리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 (977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 (979년)
임금(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 (981년)
광종대왕(光宗大王)이 황(皇)위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 (1025년)
엎드려 황제폐하(皇帝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 (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 『융국사비』 (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 (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 (1061년)
무릇 우리 황(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 (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 (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식묘지명』 (1156년)
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 (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 (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지명』 (1219년)
거란의 천자는 공이 우리 임금(皇)의 친족이고...
『최의묘지명』 (1223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 (1257년)
- 대외 관련 내용
-금나라(여진) 관련 기록
신은 일찌기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의 문서를 보다가, 우연히 금나라 조서 두 통을 얻었다. 그 서문에 대금황제(大金皇帝)는 고려국황제(高麗國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등등 으로 이르고 있으니, 이는 형제를 맺은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제왕운기》 (1287년)
-일본측 기록
'고려국 황제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승력 4년 (1080년)'
4 후대 왕조 조선과의 비교?
대중적으로는 후대 왕조인 조선에 비해서 높은 평가를 받고 대중매체에서 흔히 꼰대같은 나라로 묘사되는 조선을 까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칭송하며 내세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과연 고려가 조선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는 일이 타당한지 혹은 조선의 일부 취약점을 고려로 보완할수 있는지 곱씹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 세율이 무려 3배 가량 높았으며 기타 잡세나 부담 또한 과중했던데다가 중앙집권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토지를 하사받은 관료와 지방관 및 지방 토호들의 수탈 역시 극심하여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삶이 훨씬 어려웠을 것임은 자명하다.
고려는 농업기술의 미비와 빈약한 시설로 인한 저조한 농업생산량, 잦은 자연재해(중앙집권화의 미비와 정부의 방치 및 의욕 부족으로 심화)와 귀족들의 고삐 풀린 수탈이라는 삼중고가 중첩되었다. 거기에 더해 높은 세율까지 가중되어 토지의 생산량을 훌쩍 넘어서는 가혹한 조세 부담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귀족들의 노비로 전락하는 극빈층과 스스로 자신들의 토지를 버리고 떠도는 도망하는 유랑민의 비율이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산속 오지로 숨어들어 화전을 개간하는 화전민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마저도 국가의 손길이 닿으면 다시 도망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고려의 꽃이라는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던 극소수 지배층은 몰라도 적어도 일반 백성들의 생활 수준에 관한 한, 고려는 조선에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거기다가 건국 이래 만성적으로 고려를 괴롭혔던 빈번한 전란과 혼란한 정치 상황,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 전역을 전쟁의 참화로 불태우며 헬게이트를 연 몽골의 침략과 혹심한 수탈과 권문세족의 득세가 동반되었던 원 간섭기의 제반 상황이 있었다. 거기다가 거란과 여진에서 홍건적과 왜구에 이르는 크고 작은 외세의 파괴적인 침탈까지 고려한다면 고려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조선과 애써 견주는 것은 가히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고려에서 민란과 봉기가 일상다반사였던 데에는 전부 그에 걸맞는 합당한 이유와 사정이 있는 것이다.
또 고려가 상업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실상 극소수 지배층들의 사치품을 대기 위한 관무역이 발달했던 것일 뿐이지 조선의 상업 발달과 비교하면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고려를 칭송하며 조선을 까는 분위기 때문에 역으로 조선을 칭송하며 고려를 까는 행위도 지양되어야 한다. 조선은 고려보다 수백년이 흐른다음에 존재한 왕조며, 그 수백년 동안 한반도의 인구는 몇배로 늘었고 수많은 제도들은 하나하나 끊임없이 정비되고 사회가 발전해왔다. 그 과정을 모두 무시하고 단순히 일대일로 비교하면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고려시대가 뒤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역으로 조선과 그 후대 시대인 대한민국을 비교하면서 조선이 뒤떨어진 사회였다고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물론 현대국가인 대한민국과 전근대 국가인 고려 및 조선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근대라 해도 그 사회의 제도나 구조는 분명 조금씩이나마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이니만큼.
이와는 별도로 조선의 역량이 명백히 우위라고 인정하는 쪽에서도 더러 조선의 관직명(의정부-영의정-육조판서-승정원-성균관-대군-왕자군)을 못마땅해하고 문하성-문하시중-육부상서-중추원-국자감-공-후 명칭을 동경하는 경우가 있다. 폐하, 문하시중 채제공, 판중추원사 이가환, 이부상서 정약용 입시옵니다.
고려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다. 사서 내에 짐, 외왕내재 등 조선시대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단어가 가감없이 들어갔다곤 하지만 고려 사람의 시각에서 고려시대를 기술한 것은 아니다. 고려도경은 중국의 입장에서 고려를 바라본 사서고 그 시기 또한 한정적이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이 있지만 고려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시대 관직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사 연구자 대부분은 한문을 기본소양으로 장착하고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5 정치/사회상
5.1 중앙 행정
고려는 전기에는 당나라부터 이어져 북송에서 쓰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을 그대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하여 중서문하성(문종 15년)으로 하고 따로 상서성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2성6부.
이는 국사교과서 등에서 고려의 독자성의 예로서 흔히 드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 반론이 있다. 중국에서도 이미 당조 시기부터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중서문하성 역할을 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견도 있고, 나라가 작아 2성으로 고친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태봉도 이미 2성 6부체제였고, 내의성과 광평성은 이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결국 3성6부제를 그대로 쓰지 않고 2성을 사용한 것은 강역이 작기 때문에 3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의 경우 6부에 각기 4사의 속사가 딸려 모두 24사사지만 고려는 이부의 고공사와 형부의 도관 두 속사만 있을 뿐 단사제를 원칙으로 하는 단순한 체제에서 알 수 있다. 이와 별도로 고려에선 3성이 따로 존재했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중서문하성의 변동은 (개국 당시) 내의성(내사성), 문하성 - 성종 1년 : 내사문사성 - 문종 15년 : 중서문하성이다.
중서문하성은 문하시중(종1품, 이전의 시중, 성종 1년 이후)을 최고 책임자로 하였으며 국정 최고기구인 동시에 감찰 기능을 가졌다. 앞의 표현은 문종 때 중서문하성으로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사실 문하시랑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틀린 것이나 이후 공민왕 때 (문하)시중으로 부활하면서, 보통 문하시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하시중보다는 낮지만 종1품인 내하성에서 내려온 그 내의령(내사령)이 중서령으로 이어졌으며, 그 아래에는 네 명의 평장사(정2품)가 있었다. 부수상인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와 부부수상격인 중서평장사, 문하평장사이다. 그 밑으로 참지정사(종2품), 좌우상시(정3품), 직문하(종3품), 좌우간의대부(정4품)이 있었다.
상서성은 6부(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지휘하며 실질적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고려의 경우는 상서성이 중서문하성 아래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상서성의 최고 관직인 상서령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왕족에게 주는 자리이거나 지방과의 연락 혹은 개성인근지방을 다스리는 한직에 불과했다. 역사로 치면 (개국 당시) 광평성 - 성종 1년 : 어사도성 - 성종 14년 : 상서(도)성이다. 상서성에는 상서령(尙書令 : 종1품) 1명, 좌우복야(左右僕射 : 정2품) 각 1명, 지성사(知省事 : 종2품) 1명, 좌우승(左右丞 : 종3품) 각 1명,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 종5품) 각 1명,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 정6품) 각 1명, 도사(都事 : 종7품) 2명,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4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6명, 기관(記官) 20명, 산사(算士) 1명, 직성(直省) 2명이 있었다.
그 외에 (북송의 추밀원을 모방한) 왕명의 출납과 궁궐 경비를 담당하는 중추원(헌종 이후 추밀원),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고 백관을 규찰하던 어사대(현종 이후 금오대),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을 받았음. 원간섭기에도 변동 없음),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원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 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공민왕 5년(1356) 반원 자주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때 시중인 최영이 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화우시중이 된 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
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 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5.2 지방 행정과 군사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이라기엔 너무 큰데),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이었다. 정말 중국 지명같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州가 붙은 도시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를 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 및 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양주, 광주. 오늘날의 경기, 충청), 교주(오늘날의 강원 영서), 서해(오늘날의 황해도)이며 양계는 북계(오늘날의 평안)와 동계(오늘날의 강원 영동과 함남)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했으나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특별시)을 설치했다. 그러나 동경이 잦은 반란으로 강등되어 실제로는 그대로 3경 체제였다.
재미있는 것이 서경, 남경, 동경은 각각 삼국시대 삼국의 수도였던 곳과 대략 일치한다(서경-고구려, 남경-백제, 동경-신라). 애초에 동·서경은 각각 신라와 고구려를 염두에 두고 지정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남경은 백제와 무관하게 터가 좋아 나중에 지정한 것이지만... 어차피 서울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던 건 개로왕 때까지만이었으니 백제를 고려해서 현재의 서울 일대를 남경으로 지정할 리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제의 위례성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밖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고려시대 남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조왕이 초기에 수도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 지었다가(이것을 일명 하북위례성이라고 함)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다시 한강 이남으로 완전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이것을 일명 하남위례성이라고 함). 보통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 일대로 보고, 하북 위례성은 유적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도봉구에 있었다는 추정이 있다. 이 추정이 맞다고 치면 위례성 일대가 현재의 서울로 편입된 건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고려 남경=백제 위례성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집권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행정구역은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 ~ 3년 전까지의 국사교과서에서 말해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소,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지식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수도들이 존재했다.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부수도 두 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고려 초기의 행정구역. 성종 때의 10도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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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행정구역.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파일:Attachment/고려/여말 행정구역.png
고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과 주진군 체제였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이었는데 국왕 직할 친위 부대였으며 6위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로 경기 지방 방위를 담당했다. 평상시는 외적 침입보단 중앙의 치안과 내부 반란 억제의 의미가 컸다. 이는 이후 조선의 5위 혹은 5군영 체제도 마찬가지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군사집단이 이 중에서도 국왕 직할 친위인 2군이었다. 군인 주체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군반씨족설, 부병제설, 절충설 등이 나오고있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188-189)
지방군은 5도 지역의 군대는 주현군, 양계 지역의 군대는 주진군으로 분리 운영되었다. 양계 지역은 북쪽 지방의 북계와 동계로써, 여진족이나 거란족(요)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른 주현군은 군역보단 요역이 주였던데 반해, 주진군은 군역이 당연히 주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다가 퇴색되고, 도방, 삼별초 등의 사병집단이 생겨나 이들이 실질적인 군사 집단이 됐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는 정예군인 사병과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을 주축으로 운영됐다.
거함거포(?)에 심취해서 고려의 대포와 배는 높게 평가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원정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수 있다"고 평가했으며, 일본은 몽골군을 몰아낸뒤 설욕을 위해 고려를 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배로는 상륙하기도 전에 고려 해군에 다 박살날 처지라 포기했다고 한다. [1]
5.3 용맹한 무장의 나라
외부 세력의 침입과 내전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군인의 수요가 컸고, 후대 조선시대에 비해 문치주의 성향이 약한 편이었기에 격구나 수박(무술)과 같은 실전성 높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나 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띈 것이 출세의 시작이었을 정도. 무신정권까지 있던 나라라 그런지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보인 전설적인 무인들이 꽤나 많다. 그 많은 굴욕은 단지 국력이 문제였다.고려는 요나라를 역관광 보내기라도 했지 조선은...그래도 조선도 초기엔 4군6진이나 대마도정벌등많이 했지않았나?
- 개국공신 중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는 활약을 보였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전쟁 때 활약한 무인으로 방에 자객이 난입하자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
- 여요전쟁 때 양규는 1천여명의 병력으로 6천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이말은 즉 6배가 넘는 적을 공성전(!!!)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기습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히며 3만의 포로를 구출해 냈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있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당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여진인들은 도망쳐 버렸다. 출처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
- 여진전쟁 때 활약한 한국사 최강의 소드 마스터 척준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과 두경승은 수박의 고수였으며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조위총을 토벌하던 전투 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적진으로 돌진해 적군을 물리쳤다.
- 김경손은 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고 돌아왔다.
- 승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몽골 장군 살리타이를
저격사살했다. 후에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쏜게 아니며,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는데 손을 다쳤으나 그 부상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적들을 베었다. 합단이 침임했을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자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렸고, 그 적장을 움켜잡아 베어 죽이고 장창에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 최영은 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때 적들에게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고 국내에선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전투를 벌여 그대로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 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 정도.
- 이성계의 궁술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며, 활만 잘 쏜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무예에도 뛰어났고, 훌륭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약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조선 태조인 이성계를 띄워주기 위한 기록일 수도 있기 때문.
5.4 신분제도, 무역
신분 제도에 관한 내용은 계급 참조. 고려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별되고, 다시 양인을 왕족-귀족, 중간계층(남반, 향리, 서리, 하급장교), 양인(백정, 양수척, 향 소 부곡민)로 3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천인(공노비, 사노비)과 더불어 4계층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왕족 - 귀족 - 향리 - 평민 - 천민으로 천민의 구분이 향/소/부곡으로 엄격하였으나 신분 상승(특히, 향/소/부곡의 현 승격에 따른 공동 신분상승)은 가능했다.
무역은 공무역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고려에 어느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이슬람 상인들까지 거쳐갔다고 한다.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Korea가 된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다.
여기에는 이설이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리스 전투 때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그 줄임말이 '려'다.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 뿐이다. 물론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대의 신라에 비해 최소한 사서에서 나타날 정도로 공사에 중시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특히 원나라 때에 와서는 공무역적인 사례는 아예 없어지고 사무역이나 외국인 거주 역시 사실상 없어지는 수준이 되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제 2계급으로 광저우 등 황해지방 도시의 지방관으로 자주 임명되었음에도 원의 시박사에서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가 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왕건때부터 전해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해서 홍보도 해보았지만 결국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5.5 문화
고려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화려한 귀족 문화'다. 앞서간 기술력과 지극히 아름다운 예술품을 남겼으며, 이러한 문화 발달은 문벌귀족의 집권 시기에 가장 번영하였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문화는 귀족과 상류층에만 제한됐으며, 반면에 민간 문화는 대체적으로 투박하고 토속적인 면이 많았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등에서 찾아볼수 있다.
신라 계승 의식과 고구려 계승 의식은 균형을 이루면서 공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국가 이념적이나 문인의 의식적으로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제법 유행하였으나 12세기를 제외하면 세기마다 국가 단위의 외세와 맞서야 했던 고려에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대신 외세가 지나치게 강하면 고구려 계승 의식이 상승한다. 주도세력이 초기 : 고구려->금(상대적으로 약한 외세) : 신라 -> 대몽항쟁기 :고구려 -> 원간섭기 : 신라로 이동했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이다. 현재까지도 이때의 이념에 대한 평가로 대립각을 세우는 경우가 있는데 양쪽 모두 무작정 깎아내리기는 힘들다. 이 정도야 현대 국가에서도 이념과 현실의 차이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계승 이념과 관력해 구체적인 파당을 형성하여 대립을 보인적은 없다.[18]
단, 계승의식과는 별개로 지정학적 조건 자체는 지배영토가 유사한 신라보단 오히려 고구려와 유사해지게 되면서 문화적, 환경적 조건이 크게 변화하게 된다. 삼국전쟁 이후 세워진 발해는 북방민족들을 안정적으로 통제했고 패서지역을 신라와의 완충지대로 두면서 당-발해-신라 사이에 미묘하면서도 안정적인 균형관계가 성립하게 되기 때문에 신라는 마치 섬나라와 같은 지정학적 조건을 가지게 되어 해양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말갈을 비롯한 북방민족과는 당연히 이렇다할 교류가 없었고, 신라의 주요 외교상대는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에게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국가였던 당과 중심지의 위치상으로도 가장 가깝고 국가 초창기 때부터 좋든 싫든 항상 투닥거려 왔으며 사회문화적 조건이 타국에 비해 비교적 유사한 일본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 중심지가 일본보단 대륙과 교통상으로 훨씬 가까운 패서지역이었고 북진정책으로 인해 거란, 여진 등의 북방민족들과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대게 되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는 거의 끊어져나가게 되면서 대면대면한 관계가 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고려는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대륙세력과의 영원히 고통받는 항쟁의 무대에 들어서게 되고, 북방민족계통의 문화 또한 크게 유입되게 된다. 거란 잔당과의 전투인 강동성 전투 때 고려 영토 내에 직접적으로 들어와 항쟁한 거란인들만 해도 8만 명이었다. 거란의 전성기 때 벌어졌던 전쟁(여요전쟁)에서는 너무 많은 거란인들이 포로로 잡혀 남경(서울)에 포로수용소를 따로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 원간섭기에는 격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식, 언어, 음식 등에서 북방민족의 문화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역사의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패서지역 기반의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단군, 기자를 삼한 전체의 시조급으로 섬기고 그들이 통치한 고조선을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들과 더불어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위상 또한 급부상하여 삼한 전체까지는 아니지만 고려의 시조급으로 모셔지게 되어 부벽루, 동명왕편 등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위 3명에 대한 숭배는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다.
이는 신라의 역사인식 하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신라에서는 처음에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김씨가 왕조를 독점한 후부터는 김알지 혹은 성한왕을 시조급으로 섬기게 된다.[19]
즉, 이렇게 고려시대에 형성된 역사의식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새로운 역사의식 형성'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불교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해동 천태종을 일으킨 의천과 조계종을 세운 지눌의 사상은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신 현재의 천태종과 태고종, 천태종은 사상적 시조를 고려~여말선초기로 잡고는 있지만 고려시대의 같은 이름의 종파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는 종파주의를 유지할 수 없어 종파보다 승려간 사제관계를 중시하는 문중불교 형태로 변했고, 종파적 특성도 약해져 다양한 종파가 혼재되어 있는 통불교 형태로 변했다. 물로 한국이 이게 좀 심해서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내세울 정도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똑같이 근세로 오면서 불교가 약세에 들어간 중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현상은 있다.
불교 문화가 발전하면서 경전이 집대성되었는데 이에 따라 출판 기술도 발달하여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가 개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234년 상정고금예문의 재인쇄를 주자(鑄字)로 한 자료가 있으며 남아있는 출판물로는 1377년의 직지심체요절이 최고(最古)의 것이다. 활자는 14세기 후반의 고려활자 복(復) 자 한 글자가 남아있었으나 2010년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하는 증도가자 24자의 떡밥이 생겼다.
삼국사기가 편찬되어 (화랑세기 필사본 떡밥을 빼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사의 사서로 남아 있으며, 13세기 이후에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 지식인의 역사서 편찬이 이루어졌다. 이외에 단군과 관련된 고기(古記), 구삼국사, 고려 실록 등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전하지 않는다.
은입사 기법, 칠기 제작 등이 번영하였으며, 이는 상감법으로 이어져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려청자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청자의 유래는 중국이었으나 고려는 독창적인 기술과 장식으로 청자 문화를 더욱 진보시켰다. 청자 문화 중에서도 특히나 주목할 만한 것은 상감청자로 이는 순전히 고려의 기술로만 이룩한 것이다.
회화 분야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수월관음도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불교 회화 이외의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천산대렵도가 남아있으며, 비교적 최근 고려시대 봉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관제와 문인화로의 계승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고려시대 고분은 고구려 고분의 전통을 이어받아 프레스코 기법으로 사신도와 별자리 그림, 풍속화가 그려졌으나 화풍에 있어서는 고구려 당대의 것보다는 고려 당시에 유행하던 화풍을 따랐으며, 신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십이지신이 같이 그려진다. 별자리 그림도 거창 둔마리 고려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 시절처럼 천문도 전체를 그리기보단 북두칠성과 삼태성 등 중요하게 여긴 별자리 일부만 그렸다. 이미 고구려 중후기 때부터 고분벽화의 양식이 변화하여 풍속화보다는 도교, 불교 계통 위주의 벽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고려시대 장례문화는 불교에 많이 영향을 받아 화장이 많이 퍼졌고, 사람이 죽은 후 제사를 지낼 때는 아들/딸들이 돌아가며 지냈고, 재산도 균분 상속되었다. 일일히 제사를 챙기기 힘들 때는 절이나 신당에 노비나 토지 등 재산을 주고 제사를 대리하였는데, 이는 유교 사상을 근간으로 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에 들어 금지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 2000년대인 현재에 들어 다시 퍼지고 있다. 또한 불교의 영향으로 제사상에 고기류를 올리는 대신 한과 중 고기와 과일을 대신하는 유밀과를 올리는 게 일반화되어 많이 유행하였다. 고려의 유밀과는 원 간섭기 원나라에도 전해졌는데, 맛이 좋아 원나라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한다. 유밀과는 크게 유행하던 고려 당시에도 상당히 귀한 음식이라 나라에서 사치 금지령이 내릴 때마다 항상 지적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불교 억제정책과 더불어 사치스럽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으나 제삿상의 필수 음식으로 계속 사랑받았다.
식문화의 경우, 국수를 식용했던 게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이 고려시대다. 그런데 고려시대 기록들이 "국수란 음식이 새로 들어왔다"가 아니라 "국수를 먹는다/팔았다"식이라 국수 자체는 그 이전에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대표적으로는 <고려도경>과 <고려사>에 고려에 국수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당시 고려에서 밀이 귀하다 보니 국수도 귀한 음식으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주로 먹는 음식이었으며, <고려사>에서는 사찰에서 면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나 <고려도경>의 기록이나 훨씬 뒤인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국수를 만들 때 메밀가루를 주로 썼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귀한 음식이었던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또한 이때 만두가 전래되었고 만두를 파는 쌍화점이란 것도 생겼다. 이때 전래된 만두는 속에 고기와 야채 등을 다져넣은 우리가 아는 형태의 교자만두가 아니라 쌍화(雙花)/상화(霜花)라 부르던 것으로, 밀가루에 삭임(밀기울죽에 가루누룩을 섞어 하룻밤 발효시킨 다음 거른 발효용의 매우 도수가 낮은 술)이나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뒤 빚어서 쪄낸 것으로 오히려 외형으로는 지금의 만터우나 호빵, 만드는 방법 기준으론 지금의 술떡에 가까운 것이었다. 언제 상화가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고려사>에 쌍화에 대한 기록이 나와 일단 고려시대 전래된 것으로 보고있다. 문제의 기록 역시 만두가 들어왔다 이런 게 아니라, 충혜왕 때 어떤 사람이 궁중 부엌에 만두 훔쳐먹으려고 들어와 훔쳐먹다 걸려서 처벌받았다는 기록이다.
고려의 식문화 중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이전/이후 시대에 비해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많이 쇠퇴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종종 동물을 방생하거나 도살을 금하고 사냥/낚시도구를 국가 차원에서 폐기하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이때는 어디까지나 왕이 보여주기식 성격이 강했다면 고려시대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육식문화가 많이 쇠퇴하였고, 이러다 보니 도축기술도 쇠퇴하였는지 도축시에 가축의 네발을 묶어 불속에 던져 죽이고, 그래도 살아 있으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다고 나온다. 도축시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것은 아주 원시적인 도축법으로, 다른 걸 떠나 일단 고기의 맛을 보장할 수 없다. 도축 항목 참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료가 바로 <고려도경>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 육식문화가 쇠퇴했다는 것이지 고기를 아주 안 먹은 건 아니다라는 것이다. 몇몇 교조주의적 채식주의자 단체에서 고려시대에는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채식주의가 일반화된 청정시대로 보고 이상향으로 여기는 일이 종종 있지만 현실은 그런 거 없다. <고려사>에도 나라에서 도살을 금하면서도 제수용 고기를 시장에서 사서 올렸다고 나온다. 심지어 고려에서 "고려 사람들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한다"고 기록한 <고려도경>에도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양과 돼지를 먹지 못하고, 백성들은 물고기, 조개, 새우 등 해산물을 많이 먹었다", "국왕이나 상신이 아니면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못한다"(다시 말해 지배층은 먹었다는 소리다.),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젓갈을 좋아한다(참조)" 등의 기록이 나오고, 술안주로 어포, 육포, 생선과 채소를 내왔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한 고려시대 양수척(조선시대의 백정들은 유기)은 (고리짝) 제작/판매 외에 사냥과 도축업 등을 생업으로 삼으며 살았으며, 고려사에도 광종 19년에 도살을 금지하자 왕이 반찬으로 쓸 고기를 시장에서 사서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더욱이 2011년 발굴된 고려시대 침몰선 마도 3호선에서 다양한 해산물 가공품과 젓갈, 개고기 육포 등이 발견되어(참조1/참조2) 고려도경의 기록을 증명해 주고 있다. 참고로 마도 3호선의 침몰연대는 같이 발굴된 죽간에 따르면 무신정권 말 김준이 집권한 시대로, 몽골의 식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이다.
그리고 원 간섭기가 되면서부터 육식문화가 발달한 원의 영향으로 고기요리가 다시 성행하였고, 이 시기에 아랍 지역의 증류주가 몽골을 통해 건너와 지금의 증류식 소주가 나타났다.
국문학으로는 고려장가나 시조가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다. 청산별곡, 가시리 등의 고려가요는 특히 후렴구가 특징인데, 현대인 입장에서 보기에는 알아듣기도 힘든 내용인데 뭔가 있는 듯해 보인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등이 유명하다. 2연부터는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주도적인 견해는 악기의 소리를 본 뜬 음차로 보는 견해다. 현대적으로 보자면 아카펠라? 현대에서도 여기서 따온 곡 제목이 있다.
성적으로는 조선시대에 비해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가족 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고려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래의 통설은 일처다부제 사회였다는 설이었으나 고려 말의 특수 상황을 고려 시대 전체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현재는 일부일처제 설이 통설이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대표적으로 고려 태조는 무려 29명의 부인을 두었다. 고려시대에 원칙적으로 일부일처제를 해도 왕은 예외였다. 왕가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왕까지 일부일처제를 고집했다간 현대 일본 왕실처럼 대 끊길 위험에 처하기 쉽다. 원칙은 일부일처제였지만 고위층을 중심으로 이미 처가 있는데도 또 첩을 들이는 중혼이 고려시대 동안에 횡행했다. [2]
그 외에 경국대전에서 재혼 금지를 성문화한 조선시대에 비하면 여성의 이혼 및 재가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과부의 재혼이나 처녀성 유무에도 별로 거리낌이 없었던 점에서 조선은 물론 부분적으로는 현대 대한민국 기준의 시각으로도 개방적인 부분이 있었다. [3]
당대의 시대상을 감안하여 관직 등 지배층으로 진출하는데 제약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여성의 지위는 아주 낮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관직 제도를 제대로 갖춘 나라에서 여성이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 중국이 있지만 거긴 원래 문화상 예외가 많은 나라라 기상천외한 일이 많았다.
대신 이혼 및 재가는 여성의 정절보다 가문 이익을 중시한 성향 탓도 있어서 많은 여성들이 가문을 위해 강제로 이혼당하거나 재가하는 일도 많았고 고려도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지위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처가나 외가를 중시했다지만 어디까지나 가부장 권위 내에서의 일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런 고려의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 이어졌다.
고려가 여성의 권한 높은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여성이 사채를 놓거나 재산을 불리는 행위는 조선 때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었다. 강혜선, (조선후기 사족 여성의 경제활동과 문학적 형상화 양상),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24, 2012 참조). 또한 고려후기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사법적 보호장치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김남옥, (고려후기 여성의 법적 지위-범죄와 형벌을 중심으로-),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19, 2009 참조.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이혼이 자유로웠지만 아무도 여권이 높은 시대라고 보지 않은 것처럼, 단순히 사채를 놓거나 재산을 불리거나 하는 경제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여권이 높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건 신중히 생각해야하지 않나 한다. 고려시대에 여권이 높았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은 논문, 저술을 참조. 권순형, (고려시대 여성의 규범과 삶), ((유교사상문화연구))14, 2000; 권순형, ((고려의 혼인제와 여성의 삶)), 서울:혜안, 2006.
하여튼 고려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사채를 놓거나 장사를 해서 재산을 불리는 여성들도 있었거니와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던 대신이 저자거리에서 분노한 여성들에 의해 봉변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대보다 나은 점도 있긴 했는데 얼마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된 호주제의 경우 고려에선 여성도 호주가 될수 있었다는 점을 들수가 있으며 제사의 경우에도 현재 우리가 제사 하면 떠올리는 조선 후기의 유교적인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지내거나 지금처럼 아예 깔끔하게 절이나 무속인들에게 돈을 내고 조상님 제사를 위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세 시기까지 불교가 국교였던 일본은 지금도 이렇게 절에 위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서 없어졌다가 근현대에 들어 다시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때문에 고려는 아들이 없으면 딸이나 사위 집안에서 제사를 이어갔다. 지금의 명절, 제사 풍토를 생각하면 확실히 흥미로운 대목. 이건 당시 불교가 사실상 국교였던 것의 영향이다. 그리고 여자가 제사를 맡아서 지낼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절에 돈만 주면 제사의 의무가 끝나고, 여자도 재산 상속을 받으니 재산에 여유가 된다면 스스로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리고 여성호주 자체는 구한말까지도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4]
쌍화점, 만전춘등을 비롯한 고려가요들은 훗날 조선의 보수적 성리학자들에게 음란, 퇴폐가요로 낙인찍혀 대부분 검열삭제당하는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한다. 쌍화점 정도는 그나마 덜 야해서 남아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의 멸망을 안타까워 하며 지은 학자이자 시인인 이색의 부벽루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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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왕사
7.1 왕족들의 후일담(야사)
조선의 반체제인사(?) 남효온의 <추강냉화>나 야사수집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 각종 야사에 의하면,고려가 망하자 왕씨들이 다시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까봐 겁먹은 이성계가 왕씨들을 불러 섬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구라친 뒤 배에 구멍을 뚫어 몰살시킨다. 하지만 일부 약삭빠른 왕씨들은 아시다시피 전씨(全, 田)나 옥씨(玉), 아니면 왕을 상징하는 용씨(龍), 심지어는 심문을 받게 되자 당황해서 "네?"라고 반문하여 내씨(乃) 등으로 성을 고쳤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야사다.
물론 왕씨들을 대거 몰살시킨 것은 맞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3년에 왕씨 중 한명이 연루된 반역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때 사헌부와 형조 등에서 왕씨들을 몰살하여 화근을 제거하자고 거듭 상소를 올리자 고려의 왕족이 불안했던 태조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명을 내려 그해 3월에 강화도와 거제도에 귀양가 있던 왕씨들을 죄다 물에 던져 죽이게 하였다. 대신 한 집안만은 남겨서 제사를 이어가게했다. 그것도 자기 사돈 집안. 우왕과 동명이인인 왕우 집안으로 조선초기 잘먹고 잘살다가 왕자의 난에 휘말려 멸문 당했으며 이후 조선은 고려왕의 제사를 위해 방계왕씨를 찾아야 했다 이렇게 남겨서 왕씨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재를 봄과 가을마다 지내게 하였다.
이성계가 왕씨를 멸족시킨 그날 밤, 태조 왕건의 귀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 "왜 죄없는 내 후손까지 죽이느냐? 너도 죽을래?"라는 협박에 혼난 이성계가 왕씨 족보에서 한 장을 찢어 그 왕씨들은 무죄방면(?) 해주었다는 야사도 있다. 이 일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출세한 왕씨가 드물었다. 아예 없는것은 아니어서 고등학교 때 왕방연이란 금부도사가 지은 시조를 배운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이후의 고려 왕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개성 왕씨 항목 참조.
8 고려/인물
9 관련용어
9.1 건축물
9.2 고려를 다룬 사서
9.3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
10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
- 가장 왼쪽에 표시된 것이 원작, 오른쪽이 파생 작품으로 원작보다 유명한 경우에는 굵은 표시를 한다.
10.1 영화
10.2 게임
10.3 드라마
어째 망해가는 시점이 주로 드라마화 된다
- 개국, 조선왕조 5백년 추동궁마마 (1983)
- 이 두 드라마의 초반부는 고려말인 우왕~공양왕 시대를 다루었다. 다루는 시기가 여말선초고 조선개국 세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온전한 고려사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개국의 경우 신군부옹호 논란이 있기도 했다.
- 여말선초를 다룬 작품이라 엄밀하게 말하면 온전한 고려사라 볼 수 없으며, 원작은 박종화의 양녕대군, 세종대왕으로 두 작품을 합친 작품으로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태조 왕건 (2000)
-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을 주인공으로 후삼국시대를 주된 배경으로 삼는 드라마. 그 이전까지 조선이나 삼국시대만을 줄곧 다룬 KBS 대하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대히트를 친 고려 시대 사극이다. 문제는 후삼국시대 종결과 함께 막을 내려 실질적인 통일 고려의 비중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 그래도 인기는 많아서 이 사극을 토대로 소설이나 게임 등이 나오기도 했다.
- 제국의 아침 (2002)
-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까지의 시대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같은 방영 시기 같은 작가가 집필했던 야인시대가 대박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제국의 아침은 워낙 전개가 느리고 극적 흥미도가 떨어져서 인기가 낮았다. 결정적으로 성격 자체가 히스테릭했던 그 광종이 주인공이었는지라 시청층이 감정을 이입하기 힘든 것이 문제였던 듯.
- 무인시대 (2003)
- 18대 의종의 폐위부터 23대 고종의 재위 초까지 무려 50년에 걸친 무신정권기를 조명했다. 단일 사극으로는 꽤나 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 등장 군주가 6명이나 되는데 이 기록은 왕과 비에 이어 2위이다. 무신시대 전반기의 집권자들(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이 순차적으로 주연을 맡았다. 역대 사극 중 반란 묘사가 가장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신정권 초기 시대상이 고려 뿐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내홍이 심한 편이었기때문이다.
- 신돈 (2005)
- 30대 충정왕에서 31대 공민왕에 이르는 고려 말 권문세족 집권기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에 속하는 요승 신돈과 공민왕을 주제삼아 상당히 퓨전사극적인 면을 띠었다. 이미 줄거리부터가 개혁가의 흑화 탓에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심히 충공깽한 내용으로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 결말도 완전히 비극으로 끝나버렸기에 지금도 괴작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 천추태후 (2009)
- 5대 경종부터 8대 현종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사학계에서 대체로 악녀로 평가되는 천추태후를
천사태후영웅적 주인공으로 각색하여 만든 작품. 역사적 사실들을 지나치게 각본가의 입맛에 맞춰 각색해버린 바람에 시청률도 망하고 작품성도 망해서 사극계의 괴작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고려사는 아니지만 연이어 더 요상한 대하드라마들이 출현하면서…
- 무신 (2012)
- 23대 고종부터 24대 원종까지의 최씨 정권과 몽골 침입기를 배경으로 삼는 작품. 역사상 난신적자로 유명한 무신집권자 김준의 일대기를 그린다. 그런데 역시 고려판 트론소리를 듣고 최씨 가문 띄워주기에 바쁜 졸작이다.
- 신의 (2012)
- 현대의 의사가 과거로 간다는 내용으로 배경은 공민왕시기.
- 대풍수 (2012)
- 정도전 (2014)
-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을 다루는 사극, 과거 태종 이방원 역을 맡은 배우 유동근이 이성계역으로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 육룡이 나르샤 (2015)
- 정도전과 같은 소재, 같은 시대를 다룬 퓨전 사극
리메이크??조선 건국을 다루고 있지만 시대 배경은 대부분 고려.
- 빛나거나 미치거나 (2015)
- 고려시대 저주받은 황자와 버려진 공주가 궁궐 안에서 펼치는 로맨스를 담은 드라마
-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2016)
- 원작은 중국의 소설인 보보경심으로 국적이 다른 작품이라 원작은 배경이 청나라, 한국에서 하는 드라마는 배경이 고려이다.
10.4 만화
- 더칸
- 무장
- 문아
- 살례탑
- 패왕 - 처음에는 이 제목으로 나와서 연재하다가 중단되었지만 드라마 태조 왕건이 방영되면서 그 인기에 힘입어 태조 왕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연재된 것으로 보인다.
- 푸른바람 척준경
10.5 소설
- 고려태조 왕건(김성한 저)
- 바비도로 유명한 김성한 작가의 역사소설. 고려 이전 신라 말기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절판과 재출간을 반복하다가 절판된 상태였는데 최근 2016년 2월 고려태조 왕건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 기황후(소설) - 기황후(드라마)(2013)
- 원작은 소설이지만 드라마가 더 유명하며, 드라마 소개를 하자면 고려 공녀 출신으로 몽골의 황후가 된 기황후와 가상의 고려임금 왕유를 다루는 사극... 아니 대체역사물. 방영전부터 기황후, 충혜왕 미화 논란으로 말이 많았다.
- 다정불심
- 만전춘별사
- 빛나거나 미치거나 - 빛나거나 미치거나(드라마)(2015)
- 원작은 로맨스 소설로 드라마가 더 유명하며, 드라마 소개를 하자면 고려 초 태조부터 광종까지를 다룬 사극으로 정확히는 3대 정종 시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주인공은 왕소(광종)로 원작의 장르로 인해 왕소(광종)와 신율의 로맨스가 중심 이야기를 차지하고 있다. 4대 광종의 왕자시절을 배경으로 한 퓨전 사극으로 광종의 '광'자를 여러 면모로 해석한 작품.
- 아아, 삼별초
- 왕건(신봉승 저)
10.6 연극
- 파몽기
11 후대 사람들의 인식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 그런데 신라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당시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신라를 역적이라고 한다면 백제는 당시에 왜를 끌어들였으니 백제를 친일 국가라고 매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신라의 그런 복잡한 상황과 달리 왕건의 고려는 '한국사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삼국을 처음으로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었으나 결국 신라는 완벽하게 삼국을 통합하지 못해서 결국 후삼국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고 후삼국시대가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이루어냈고 고려 때부터 완전히 통일되었다는 점을 보면 한국사에 고려가 끼친 영향력이 후대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웠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요시했다는 점과 서희이 담판으로 인해 고려가 고구려와 한국사를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고려 때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가 편찬되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한국사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존재가 그나마 역사학계에서 큰 도움이 되고있는 셈이다.
후대의 국가인 조선에서는 성리학에 기반하여 건국된 국가인 만큼 이 나라의 멸망원인을 조선시대에는 전적으로 불교에서 찾았으며 경연에서 국왕에게 고려사를 강독할 때면 거의 모든 결론이 '고려는 바로 이 불교 때문에 망했습니다'식의 기승전불로 끝났다. 당시 불교는 성리학자 입장에선 타파해야 할 것, 낡은 시대의 유물 같은 것으로 느껴졌으니 그에 기반한 고려도 낡은 국가, 개혁해야할 국가로 여겼던 것이다. 즉 유교(성리학)을 현대의 관점에서 타파해야할 것으로 여기듯이, 당대의 불교는 현대인이 유교를 보는 시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볼수있다... 예외로 조선 7대 왕인 세조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지은 절이 지금은 터만 남은 원각사. 한편 광해군은 '고려처럼 하는 것만이 나라를 보전하는 길이다'라며 고려의 외교방식을 따르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이 철저히 구시대의 잔재로 취급되어 현대 사상과 과학으로 대체된 현대 대한민국에선 오히려 불교는 조선시대에 승려가 노예 취급당하던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복권되어 대한민국 주요 종교의 위상을 되찾았기에 대다수 한국인들이 바로 전 왕조인 조선보다 전전왕조였던 고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 물론 위에서도 보듯이 고려가 조선보다 높은 평가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지만 말이다.
- ↑ 태봉국의 궁예를 왕건이 쿠테타로 축출한 후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겨 고려를 건국했다.
- ↑ 음력 : 918년 6월 15일(고려사절요에는 6월 병진일이라고 되어있다.) ~ 1392년 7월 17일, 양력 : 918년 7월 25일 ~ 1392년 8월 5일
- ↑ 단, 공민왕 때는 제1차 요동정벌을 통해 요동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다만 당시 국력등을 이유로 포기했기에 점령기간은 단 하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부 역사서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학계가 설정한것도 있다.
- ↑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
- ↑ 외왕내제 격으로 황상(皇上)이라고 불렸기도 했지만 이를 보고 고려 군주의 칭호가 황제였다고 볼 순 없다. 皇은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왕과 관련된 것을 나타내는 용어에 쓸 수 있는 글자로 봐야 한다. 조선시대에 국왕을 '주상(主上)'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국왕의 칭호에 '주'가 들어가는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고려 왕에게 皇 자가 들어간 표현을 쓴다는 것은 적어도 국내적으로 제후보다는 황제와 비슷한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다. 신라의 금석문들에도 비슷한 용례들이 보인다. 국왕 본인은 대왕이나 태왕이라고 적어 놨지만 부인은 황후, 모친은 황태후로 적어 놓는 식.
- ↑ 대부분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을때 들어왔다.
- ↑ 숙종 시기에 행정구역화되었으나 얼마 간의 자치권을 누리는 세습 '군주'가 존속되긴 했다. 이마저도 완전히 없어지는 건 조선 때.
- ↑ [5], [6]
- ↑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른다. 실제로 중국사서에는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하기도 했다.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졌다.
- ↑ 코마, 고구려 역시 코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마 신사, 코마가와역 등
- ↑ 고려시대나 21세기나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라고 부르지만 현대 몽골어에서는 현대 한국과 구별된 고려시대의 고려를 Kuryo라고 부른다. Solongos는 몽골어로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인데 몽골국립할하몽골어학회에 따르면 몽골어로 한국을 이르는 말인 Solongos가 해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근거없는 낭설이다.
- ↑ 당장 고려와 겨루던 후백제는 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고려를 쌈싸먹으려고 열심히 해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고려 해역을 피해 먼 바다로 다니다보니 풍랑을 만나 적국에 표착해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 ↑ 절도사 출신인 송 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한을 철저히 약화한 것과 흡사하다.
- ↑ 물론 이때도 형식상 이들 나라에 대한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 ↑ 때문에 한국의 외국이름인 'K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언급했듯이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 ↑ 호족들의 발언권 강화와 천추태후, 김치양 등의 전횡, 강조의 정변과 왕위교체 등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 ↑ 영화 쌍화점에서 주진모의 모태가 된 왕이 바로 공민왕으로, 실제로 '자제위'라는 미소년 부대를 만들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대신 영화엔 모티브만 주었을 뿐, 공민왕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 ↑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청나라의 금나라 계승과 좋은 비교사례가 될 수 있다.
- ↑ 신라의 시조의식은 여러 세력이 난립했던 초기 역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