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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2일 (목) 23:58 기준 최신판
{{틀:집단연구}}
편견 및 고정관념 | ||
인류 | 사회 | 과학 |
역사 | 문화 | 예술 |
종교 | 애호 | 성(性) |
목차
1 개요
아래는 편견 및 고정관념의 예시 목록. 예시들 중에는 완전히 틀린 새빨간 거짓말도 있지만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실제로 편견 및 고정관념에 해당하는 것도 있지만 단순 루머도 포함되어 있고, "오해와 진실" 류의 흔한 잘못된 통념을 반박하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실제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어라, 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싶은 항목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든, 나무위키는 개인의 주관이 반영될 수 있으며 온전히 전문적이지 못한 위키다. 이하의 목록은 단지 새로운 지적 탐구의 동기부여가 되어야 할 뿐이다. 더불어, 전문적이지 못하거나 도리어 엉터리에 가까운 거짓 해명이 실제 정확한 사실들 사이에 뒤섞여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항목은 되도록이면 시대순으로 정리 바람. 그리고 적어도 20년 이전 일에 한정해서 서술하기 바람.
2 세계사
2.1 전근대
- 세상에 1,000년을 간 왕조는 신라와 로마 제국, 고대 이집트밖에 없다.
- 한국사에 대한 오해와 세계사에 대한 오해 둘 다 있다. 고대 왕국은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고,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또 아니다. 다만 신라와 로마는 저걸로 볼 수가 없으니 결국 저 명제는 오류. 로마 제국 같은 경우 천 년은 고사하고 백 년 넘게 유지된 황조만 해도 거의 몇 없고, 신라 같은 경우 애초에 박석김이 돌아가면서 임금을 한데다 천 년이란 근거는 삼국사기에 연대적인 오류가 없다는 걸 전제로 하기에 영 무리수다.
- 또한 이런 구분이 의미가 없는 게,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국가는 유지하되 왕가가 교체되어 사실상의 국가 교체급 사건을 겪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덴노 혈통은 형식적으로는 기원전부터, 실질적으로는 한국사의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나 집권층과 통치 체제는 몇 번씩 바뀐 일본. 베트남의 대월도 있다. 단순히 ‘왕조’만 따진다면 일본은 2000년 이상 이어오는 왕조를 지닌 국가이며
물론 《일본서기》의 구라 때문에 역사가 연장된 측면이 있지만이집트의 파라오 왕조 역시 5,000년 넘게 이어오는 왕조다.
- 옛날 옛적에는 전쟁을 벌일때 그냥 인해전술로 닥치는대로 내보냈다.
- 어디든, 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진열을 갖추고 싸웠다. 다들 각개로 흩어져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는 온갖 사극 매체의 무성의하고 무식한 묘사 탓에, 때문에 이런 편견이 더욱 굳어지기도 한다. 당장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장사진을 치다" 라는 표현 자체부터가 이미 고대 중국의 군사 용어다. 장사(長蛇), 즉 긴 뱀 형태로 병사들이 한 줄로 늘어선 진형을 장사진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
- 당장 이런 항목들만 봐도 이 편견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각각 전쟁 역사상 가장 완벽한 매복 전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2.1.1 고대
- 피라미드는 노예들을 채찍질하면서 지어졌다.
- 항목 참조. 보통 일반 노동자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직업이었다.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휴가도 신청할 수 있고, 심지어는 파업권에 무료 의료 서비스에, 죽은 뒤 자기가 지은 피라미드 근처에 안장될 권리도 보장되었다.
- 고대 갤리선은 노예들을 동원해서 노를 저었다.
- 고대 갤리선의 노를 젓는 방식은 센 사일 방식이라 불리는 한 노에 1명씩 붙는 방식이라 노 젓다가 조금만 방심하면 노가 다 엉켜 난리법석이 일어남으로 갤리선의 노잡이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전문직이였고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철저하게 자유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드물게 노예들을 사용할 때도 자유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거나 약속 후 사용하였다. 오히려 근세 이후로 스칼로치오 노젓기 방식이 발명된 이후에 노예가 노를 젓기 시작했고 이 경우에도 적어도 노하나당 한명의 자유민 숙련공이 필요했다.
- 고대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한번 싸울 때마다 마지막 1명만 남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또는,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신분상 노예였다.
- 초기의 경우 실제로 죽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유명 검투사의 경우 스타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 노예 출신들도 있었지만 전쟁 포로나 범죄자들도 있었고, 나중에 인기가 좋아지면서부터는 일반인들도 서약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
- 로마 시대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에 설치된 기둥에 묶인 상태로 맹수들에게 뜯어먹혀서 죽었다.
-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두고 "순교자의 성소" 로 선포하면서 발생한 오해.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며 그 이전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콜로세움을 성소로 취급한 경우도 없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도 이런 장면이 그려져서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 다만 사형의 의미로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베스티아리(bestiari)[1]가 되게 하여 맹수들과 싸우게 한 적은 많다. 이는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형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사자들은 갑옷이나 무장도 없이 방치되고 맹수들은 한도 끝도 없이 투입되었다. 이런 형벌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폐지되었다.
- 네로 황제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경기를 즐겨 관람했다.
- 네로 황제 재위 당시에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당시 그곳에는 네로 거상이 있었고(…)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그걸 밀어버리고 거기에 원형 경기장을 지은 뒤 그 이름을 "콜로세움" 이라고 한 것.
- 검투사 경기에서 관중들은 패자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1693년판 번역본에 따르면,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 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 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 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 라고 쓰고 있다.
- 18로 제후는 조조의 격문으로 전체가 참가했으나, 화웅과 여포의 용맹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하고 유비군 혼자 분투하고, 조조가 서영에게 패배하고, 동탁이 완전히 낙양성를 버리고 빈 낙양성를 먼저 차지한 손견이 옥새를 발견한다.
- 삼국지연의에서 창작된 것이다. 18로 제후는 전체 중 일부가 참가안했고[2] 교모의 격문으로 일어났고, 적극적으로 활동못한 이유가 동탁의 군세가 강하고, 제후 중의 한명인 한복이 맹주인 원소에게 군량을 안주어서[3]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한다. 또한 연의와 달리 유비군은 이때 당시 화웅, 여포과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조조와 같이[4] 서영에게 패퇴당하고 화웅, 여포는 이전에 서영에게 패퇴한 손견이 양인 전투에서 각각 화웅은 참했고,[5] 여포는 패배를 당한다. 더블어 동탁도 손견에게 패배를 당해 손견자체가 무섭다고 말하고, 천도하고, 남아있던 여포가 손견에게 패배하고 낙양성를 내어주었다. 옥새는 원술이 차지했다.
- 헌제는 조비에게 반강제로 선양한뒤 그 직후 암살당했다.
- 헌제는 제갈량과 태어난 해(181년)와 사망한 해(234년)가 동일하다. 또한 조비는 226년에 사망했으므로 헌제보다 8년이나 일찍 죽었다.
- 흉노와 훈족은 동일한 민족이다.
- 발음유사성에서 나온 주장일 뿐 흉노와 훈족의 관계는 확히 알려진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한나라의 이간질로 분열되어진 북흉노 남흉노도 서로 다르다시피하다.
- 포청천이 쓰는 작두들은 목을 치기 위함이다.
- 오히려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쓰였다.
2.1.2 중세
- 유럽의 중세시대는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인외마경의 암흑시대였다.
- 고대 로마의 뛰어난 문물들이 상당수 실전되고, 반달리즘의 어원이 된 반달족의 침입을 감안할 때, 당시 서구 유럽은 동시대의 이슬람 중국 문화권보다 확실히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긴 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사가[7]들은 중세시대가 그렇게까지 문명이 심각하게 퇴보한 시대가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세 항목 참고. 그 시기에도 문명과 기술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으며, 중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의식 수준이나 생활 여건이 딱히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고대 로마 시대보다 문명적으로 더 발전된 측면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동로마 제국은 나름대로 발전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암흑시대라는 표현이 유럽 외의 다른 지역들의 발전은 무시한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이런 주장은 학계의 보편적인 학설이 아니라 화이트나 드레이퍼 등의 극단적인 몇몇 역사가들이 펼친 주장에 가깝다.
- 암흑 시대라는 개념도 유럽에서 먼저나온 것인데, 이는 중세기 전체가 아닌 바이킹 시대를 가리키곤 한다. 대략 8세기 전후다
- 기독교가 중세시대에 고대 로마 시대에서 기껏 발전시켜왔던 유럽의 문명을 지체시키고 퇴보시켰다.
- 반기독교쪽에서 지겹도록 써먹는 떡밥인데 마찬가지로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식은 떡밥이다. 일단 위에도 적혀있듯이 중세가 과연 퇴보였을까라는 것도 요즘은 회의적이다. 오히려 지식 보존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교회였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알면 알수록 좋다고 지식 발전을 권장했다. 다만 이 경우는 위에서 언급한 중세 시대 하면 뭔가 로마 시대보다 더 뒤떨어 졌을 것이다라는 편견 때문에 생긴것이 1차 원인이기는 하다.
- 교회 건축의 역사와 함께 발달한 고딕 양식만 봐도 기독교가 문명을 퇴보시켰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불과 2~3세기 전 로마네스크 양식보다 기술적으로도 미적으로도 훨씬 더 발전한 양식이다.
- 이러한 관점은 대략 18세기 즈음 유럽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지만 정작 유럽에서는 이 시대에 관한 담론이 활성화 되고 재평가가 활발히 이뤄져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런 주장은 찾기 힘든 상황 .
- 중세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40살밖에 살지 못했다.
- 평균 수명이 40세였던건 맞다. 하지만 이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평균이 확 내려간 것으로, 일단 어른이 되면 60-70살까지도 살았다..
- 바이킹들은 투구에 뿔 1쌍을 달았다.
- 이러한 투구들이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히 발견되기는 하나,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인 수준의 그 크기나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다고 생각되며 후대의 미술작품 때문에 더해진 오해로 보인다.
- 몽골 제국은 무식한 야만인들이 숫자만 믿고 닥치는대로 정복했다.
- 이슬람은 칼, 즉 정복을 통해 퍼진 종교다.
- 초창기에는 대부분이 정복이었고 반은 맞다고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평화로운 교역을 통해 퍼졌다. 아랍 지역과 한참 떨어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중아시아,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이 대부분인 국가들이 꽤 많은 것은 이때문이다.
-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은 일방적인(혹은 먼저 침공한) 침략자였다.
- 이슬람 세력 측도 만만찮게 기독교 세력에 대한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다. 남유럽을 약탈하고 시칠리아와 바리를 위시로 남이탈리아에 에미르국을 세우기까지 했고, 이슬람 본류는 서고트 왕국을 일방적으로 쳐들어가서 점령한 후 서고트족을 노예로 판 일도 있었으며, 동로마와 전쟁을 할 때에 약탈, 학살 등을 상시적으로 행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십자군 전쟁 이전의 영역을 기준으로 하여'라고 하면 위 언급이 사실이 된다. 전쟁터가 모조리 기존 이슬람 세력권이었기 때문이다. 침략의 대상이 된 곳들은 비잔틴 제국[8]을 제외하면 십자군 전쟁과정에서 성립한 공국, 백국들이 태반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1차 십자군 전쟁으로 성립한 예루살렘 왕국.
또는 이 부분을 먼저 선빵을 친 쪽이 누구냐로 봐도 위 언급은 사실이 된다. 만약 정 반대로 이슬람 세력이 먼저 기존의 기독교 세력(당시 유럽)이 차지하던 영토를 점령하려 쳐들어왔다면거나 이슬람, 기독교(당시 유럽) 두 세력이 서로 동시 충돌했다면 무조건 유럽만이 일방적 침략자다! 라고 볼 수 없었겠지만 십자군 전쟁의 원인 발발은 당시 유럽측에서 이슬람이 차지하던 영토를 먼저 쳐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분쟁을 시작한 침략자이다 이렇게 볼 수 있기 때문.
2.1.3 근세
- 마녀사냥은 중세와 근세에 행해진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여성차별적 사회 현상이다.
- 일부는 거짓이다. 물론 마((녀)) 사냥이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여성들, 특히 전 남편이 재산을 많이 남겨주고 죽은 과부들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 남성도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전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령 십자군 전쟁 당시 활약했던 기독교계 기사단인 성전 기사단의 경우도 당연히 당시 기사단이다 보니 남성들이 주 구성원이었는데 성전 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을 탐낸 프랑스 필립 4세에게 마녀사냥의 일환으로(이 경우는 남자니까 마(남)사냥으로 봐야겠군) 악마 바포메트와 공작을 했다는 억울한 말도 안되는 누명으로 결국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종교 재판 후 목이 잘려나갔다. 그 외에도 개개인적으로도 일부 극소수 남성들도 악마[9]와 쿵짝(?)한 죄로 사형당하는 경우도 드물기는 하지만 있었다. 더 자세한 것은 마녀사냥 항목에 들어가서 1.4 문항을 참조할 것.
- 마녀사냥은 중세에 마귀를 숭배한 사람들을 주로 처형했다.
- 물론 저 중에서 정말 신비주의적 이교도나 미신 같은 일환으로 마귀나 악마를 숭배했던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테니(지금도 그렇고 가령 사탄교나 일부 좀비약먹이고 하는 등의 문제가 되는 부두교 같은 경우) 그런 경우에 딱 걸려서 마녀사냥을 당했다면 정말 원 의도대로인 마녀사냥에 부합하는 개념이긴 하다만 역사가 늘 그렇듯 (의도는 좋았다, 아니 의도<만>좋았다')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처음부터 순수한 마녀사냥이라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것이 더 맞을것이다. 물론 당시 성직자 중 진실된 순수한 의미의 교리에 입각한 마녀를 사냥하자는 성직자들도 있었을진 모르겠다. 하여간 오히려 마녀사업/돈벌이이라고 봐야 옳을 지경이었는데 실상 알고 보면 정말 마녀가 아니면서 음해성 공작과 모략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 물론 이유는 당시 교황청이 심각하게 부패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금전적으로) 그러다 보니 당연히 주 사냥대상은 뜯을 거 많고 만만한
금수저부잣집 과부였다. 돈도 많겠다 거기에 기존 남편이 죽은 과부기 때문에 "너 남편 죽고 나서 외로워하다 결국 악마랑 그 짓 했지" 라고 누명씌우기 딱이기 때문. 역시나 부잣집 과부에게 악마와 검열삭제했다는 자기들 마음대로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온갖 고문변태적 성향 표출을 해 죽였는데 더 어이없고 황당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마녀 혐의자에게 온갖 구실로 요금을 징수했다는 점이다. 고문도구 사용료, 고문기술자 급여, 고통세(…),할말이 없다고문 장소 임대료, 화형에 처할 때 사용하는 장작요금 등등 갖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요금을 부과했고 마녀혐의자에게 맨 마지막으로 가해진 처벌이 전재산 몰수형이였다. 이 마녀사냥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녀사냥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사죄했다.
- 물론 저 중에서 정말 신비주의적 이교도나 미신 같은 일환으로 마귀나 악마를 숭배했던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테니(지금도 그렇고 가령 사탄교나 일부 좀비약먹이고 하는 등의 문제가 되는 부두교 같은 경우) 그런 경우에 딱 걸려서 마녀사냥을 당했다면 정말 원 의도대로인 마녀사냥에 부합하는 개념이긴 하다만 역사가 늘 그렇듯 (의도는 좋았다, 아니 의도<만>좋았다')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처음부터 순수한 마녀사냥이라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것이 더 맞을것이다. 물론 당시 성직자 중 진실된 순수한 의미의 교리에 입각한 마녀를 사냥하자는 성직자들도 있었을진 모르겠다. 하여간 오히려 마녀사업/돈벌이이라고 봐야 옳을 지경이었는데 실상 알고 보면 정말 마녀가 아니면서 음해성 공작과 모략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 물론 이유는 당시 교황청이 심각하게 부패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금전적으로) 그러다 보니 당연히 주 사냥대상은 뜯을 거 많고 만만한
- 마녀사냥의 광기가 유럽 전역에서 휘몰아친 결과 800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 오늘날까지 무비판적으로 인용되는 저 800만이라는 수치는 아무 근거가 없는 유사역사학적인 수치놀음이다. 도대체 당시 유럽 인구가 몇인 줄로 생각하고 800만을 주장하는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이와 같은 선동적인 가짜 데이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의 잔인한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반기독교 심리, 그리고 중세 마녀사냥이 여성차별의 역사라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당한 차별에 대한 수치를 더 과장시켜 여성차별에 근거로 잘 써먹으려는[10] 꼴페미 여성 집단의 부풀리기식 조작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는 6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확인되는데, 물론 이 역시 결코 적은 수가 아님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800만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드립보다는 훨씬 신뢰할 만하다.
-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이뤄졌는데 도미니코회 수도자의 1485년 마녀재판책이 그당시 20쇄나 찍을정도로 팔려서 성행했다. 대부분 종교를 빌미로 한 돈 많은 과부를 노린 경제적 이유였다. 남유럽의 경우 마녀사냥할 겨를이 없었는데 마녀사냥보다 더 극악한 종교재판이 성행했기 때문이다.[11] 이들에게는 마녀보다 무서웠던 것이 이단이었던 거다.(...) 종교면에서 남유럽보다 북유럽이 더 관용적이어서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살아남은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북독일 한자도시로 많이 정착했다.
- 개신교의 뿌리가 된 종교개혁가들은 마녀사냥을 비판하고 단호히 거부하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도리어 더 가담하였다.
- 반 이상은 거짓. 물론 제목에 나온 "단호히 거부하지는 않고"란 부분만 놓고 보면 맞는 부분도 있긴 하다. 실제로 마르틴 루터는 구약성서 출애굽기(탈출기)를 근거로 '무당과 어린이들에게 마술을 거는 자와 점치는 자'들을 살려둬선 안된다는 근거로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한 경우가 있다. 다만 그렇다고 마르틴 루터가 마녀사냥을 주도한 것은 아니고, 그 당시 마르틴 루터 말고도 중세,근세 유럽 사람 대중 전체적으로 만연한 풍습이었을 뿐이다.(즉 루터만 그런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더 가담하였다, 개신교가 더 심했다 라는 것은 억측. 당시 부패한 가톨릭계의 잘못을 물타기하려는 의도도 있다.
따지고 보면 마르틴 루터 생애 당시 초창기는 도미니코회가 진행하였다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예수회가 종교재판을 주도했지, 개신교 지역에선 물론 이전의 풍습으로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직 (신약)성경을 주장하고 기존 가톨릭을 비판하던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선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실제 사례를 들자면 마르틴 루터가 살던 비텐베르크에서 1517년 종교개혁을 하고 첫 마녀사냥이 열린게 1540년이다. 첨언하자면 당시 독일에서는 구교도 지역 신교도지역에서 서로 종교가 다르면 박해하기 바뻤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이미 종교재판과 결합되어 주로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을 쥔 황제와 가톨릭교회 세력이 주도했다. 결국 엄밀히 따지면 루터나 칼뱅은 물론 마녀의 존재나 마녀사냥 자체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보편적인 정말 악마숭배(남녀를 가리지 않고)를 하였는가 라든지 기독교 종파 중에서 다른 종파, 즉 수많은 이단 종파에 관심이 많았고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니 마니 이렇게 종파 정당성 싸움에 치중했지 마녀를 고문해서 무슨 털이 나오는지는 그딴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마녀사냥 담당 분야는 정치적 사냥이나 재산 뺴앗기(부잣집 과부녀들) 식으로 유리하게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것은 권력을 쥐고 있던 교황청이었으므로...[12]
- 조르다노 브루노는 이성을 탄압한 종교권력에 대항하여 과학을 수호한 과학자였으며, 과학적 지식의 전파를 두려워한 성직자들에 의해 10년 동안 투옥당했다.
- 어설픈 계몽주의의 또 다른 잔재. 브루노는 애초에 과학자가 아니었고, 과학을 수호하지도 않았으며, 과학을 위해 순교(?)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동설을 신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적 관찰에 입각한 신뢰가 절대 아니었다. 그는 토트를 비롯한 이집트 신화에 푹 빠져 있었으며, 이런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태양
느님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이 양반은 그리스 신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연금술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의 팬이었다.(…) 이게 과도한 나머지 브루노는 신비주의의 한 분파인 헤르메티즘(Hermetism)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독자연구급 신학을 두려워한 교회가 그를 잡아넣었던 것. - 브루노에 대한 이상한 환상 덧씌우기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에서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여 브루노를 과학의 영웅으로 포장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는 도리어 과학자들이 역사학이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무지한 모습을 보임을 입증할 뿐이다. 결국, "칼 세이건이 그렇게 말했대!" 와 같은 주장은, 흔히 말하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다. 가디언 지의 평론 (뉴스 페퍼민트 한글 번역)
- 어설픈 계몽주의의 또 다른 잔재. 브루노는 애초에 과학자가 아니었고, 과학을 수호하지도 않았으며, 과학을 위해 순교(?)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동설을 신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적 관찰에 입각한 신뢰가 절대 아니었다. 그는 토트를 비롯한 이집트 신화에 푹 빠져 있었으며, 이런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태양
-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종교재판소에서 물러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독백했다.
- 중세 교회에서 판매했던 면죄부는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 선전되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최초로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하였다.
- 오다 노부나가는 삼단철포의 발명자 / 3단철포는 에도시대의 소설에서 창작된 것
- 일본의 군사사 연구가인 스즈키 마사야는 오다 노부나가의 3단 철포가 허구라는 주장을 폈으며, 그의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삼단철포는 에도시대 소설에서 창작된 것이다"라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중에도 선조가 "일본이 만약 조총을 3단으로 연속사격할 경우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若分三運, 次次放砲, 迭爲先後, 則何敢當哉)"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전투대형인 삼첩진에서도 조총의 연속 사격 개념에 대해 완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이같은 조총의 연속사격 시스템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오다 노부나가가 발명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삼단철포가 완성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케다 신겐은 기마병 전술의 달인.
- 기마병이 아니라 기마보병이었다. 말은 이동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전투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전투했다는 것. 말안장에 앉아서 싸운게 아니라 말 등위에 서서 달리다가 싸울 때는 말에서 뛰어내려 싸우는 게 기마보병이다.
-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의 침략을 받은 아즈텍 제국은 짱짱 센 정복자들에게 제대로 상대조차 되지 못하고 연전연패하여 멸망하였다.
- 정복에는 3년 이상 걸렸으며, 아즈텍 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또한 실제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슬픔의 밤.
- 명나라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게 망했다.
- 명나라의 멸망을 언제로 기준잡는가에 따라 다르다. 전통적인 관점을 따를 경우 명은 이자성, 장헌충 등이 주도한 농민 봉기로 멸망했다. 이후 입성한 청은 형식상 숭정제를 추숭하는 등 명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애초에 청의 홍보용 역사서인 만주 원류고만 보더라도 청의 건국명분은 명을 멸망시킨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삼번의 난 이후 남명과 복명운동을 진압한건 청이 맞는데 남명까지 명나라로 인정할 경우 청이 멸망시킨 것으로 된다. 또한 명의 멸망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만력제의 쓰레기같은 치세이며 "명은 만력제 때에 실질적으로 망했다"는 평가도 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출신이다.
- 스페인 출신이 아닌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사람이다. 이름도 본래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15]였는데, 스페인식으로 크리스토발 콜론, 영어식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퍼지게 되었다.
2.2 근대
2.2.1 18세기
-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자 자유, 평등, 박애의 물결이 온 유럽에 파급효과를 일으켜서 자유주의의 시대를 열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선진 서구문화가 만들어졌다.
- 반발심으로 인한 일부 맹목적 국까들이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서, "서양은 정조 시대에 이미 자유혁명을 일으켰는데 멍청한 조선은 유학에나 빠져서 일제가 침략할 때까지 손이나 빨고 있었다!" 와 같은 선전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했을 때 온 유럽인들이 일치단결하여 "오오, 새로운 사상이다! 우리 모두를 더욱 선진화시키고 발전시킬 아이디어야!" 하며 잽싸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까워서, 그들의 왕인 루이 16세를 "감히" 처형한 프랑스를 그냥 냅뒀다간 큰일날 거라면서 온 유럽이 프랑스 하나 조지려고 동맹을 맺었을 정도였다. 즉 프랑스 국민공회 vs.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영국 + 네덜란드 + 스페인 + 나폴리 + 교황청. 이 때문에 큰 반동을 경험한 유럽사회는 1830년대부터 18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혁명을 반복해야 했다.
- 단두대는 기요틴이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결국 그 자신도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았다.
- 단두대의 발명가는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이며, 기요틴은 단두대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단두대의 초기명칭은 앙투안 루이를 따서 louisette로 불렸다. 앙투안 루이는 69세때, 기요틴은 75세때 사망했으며 둘 다 단두대랑 상관없이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단두대 항목 참조.
-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여러 오해가 중첩되어 만들어진 통념이라 볼 수 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문서 참조.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독살당했다.
-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 연출된 부분. 안토니오 살리에리 문서 참고.
2.2.2 19세기
- 에드워드 제너가 고안한 최초의 천연두 예방접종을 받은 제임스라는 소년은 도리어 20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
- 반백신 운동가들이 열심히 설파하는 이 거짓말은 실제 "제임스" 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 턱이 없는 일반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문제의 주인공 제임스 피프스(James Phipps)(1788~1853)는 65세까지 살았다. 개중에는 제너의 아들이 21세에 천연두에 걸려 숨졌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맞지만 사실 병명은 폐결핵이다. 그리고 이 폐결핵은 제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로베르트 코흐가 발견했다.
- 다윈은 죽기 전에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인들은 거의 다 유럽인들이 납치해서 끌려왔다.
- 물론 납치당해서 끌려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에게서 팔아넘겨졌다. 참고로 당시 아프리카에는 부족들만 있던게 아니라 도시국가들과 왕국과 제국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아프리카인" 이라는 동질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서로 싸우면서 상대편 국민들을 사로잡아 유럽인 무역상들에게 팔아넘기고 돈을 벌었다.
- 남북전쟁 직전의 미국 남부에는 아프리카계 노예가 흔했으며 누구나 대농장에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 실제로는 대다수 미국 남부의 유럽계 농민들은 아프리카계 노예 자체가 없었으며, 일부만이 1~2명 정도의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부렸고, 극소수의 대농장주가 아프리카계 노예들을 대규모로 관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민들은 노예제도의 존치에 찬성했다. 연구자들은 그들이 노예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제적, 일상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예의 존재가 그들의 자존감을 채워주고 그들의 상대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최하층 계급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찬성한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다.
-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침탈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 전혀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대표적 고정관념. 경제적 실익을 원했다면 식민지로 만드는게 아니라 교역을 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뿐더러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원정비용도 안나오는 애물단지들이었다. 식민지 경영 자체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측면에서 내부불만 분산용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스마르크 같은 경우는 식민지 획득만큼 병신짓이 없다고 까다가 베를린 회의에서 마지못해 토고와 카메룬 등을 식민지로 삼기도 했다.
- 식민지는 시장과 원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메리트가 거의 없었다. 식민지는 채산성이 없어서 투자기피 대상이었던 것은 둘째치고 수익 창출 하부구조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프랑스의 예를 들자면 무역의 대부분을 유럽열강과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교역량을 다 합쳐도 유럽과의 교역의 반의 반도 안됐다. 원료도 무역으로 얻으면 더 싼데다 산업 혁명의 원료인 철과 석탄은 정작 유럽이 주원산지…
- 정말로 이 오해가 옳았다면 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많은 열강들이 자기네 식민지들을 선뜻 포기할 수 있었는지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가뜩이나 식민지 경영은 득보다는 실이 큰 실패한 사업이었는데, 식민지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평등하게 운영하라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예외적으로 프랑스가 알제리와 베트남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는데 이는 100년 넘게 동화주의를 적용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애착이 커졌기 때문.
- 그 외에도 제국주의 열강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을 "인간으로 교화시키거나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식민지를 확장시켰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 식민지 확대 자체가 경쟁국들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용도로 쓰였다는 해석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16세기의 저 악명 높았던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 논쟁도 교화나 개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짐승인가 인간인가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논쟁의 근본적인 이유는 원주민들을 가축과 같은 부류로 봄으로써 정복자들의 수익과 이로 인해 발생할 세금에 따른 에스파냐 왕국 예산의 문제가 얽혀있었기 때문.
- 제멜바이스가 최초로 손씻기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 카를 본 로키탄스키(Carl von Rokitansky)가 먼저 주장한 것이고 제멜바이스의 독창적 내용은 별로 없다.
2.2.3 20세기
- 20세기 일본 제국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 대만에서 돈 좀 만진 것과는 별개로[16] 조선은 막대한 적자 식민지였다. 당장 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총독부에 부임하면서 내건 공약이 총독부 재정독립 건인데, 그 뒤를 이어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야마나시 한조,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까지 같은 소릴 똑같이 읊었으니... 게다가 식민지 시혜론을 내세운답시고 이런저런 불필요한 지출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일본은 돈만 더 버렸다. 조선을 경제적으로 예속된 보호국으로만 남겼다면 이권을 빼앗는 방식으로만 빨아먹는(?) 것이 가능했겠지만, 아예 직접 식민지화를 해 버렸으니 모든 관리비 등의 지출을 총독부가 부담하게 되었던 것.
- 조선에서 쌀을 수탈한 것도 일본 입장에서는 크게 좋을 것이 없었다. 조선 쌀을 풀자니 일본 농민들이 통곡하고 중공업을 육성하자니 일본 재벌들 심기가 뒤틀리고 그렇다고 특산물 조금 가지고는 2천만 인구 부양이 안되고, 게다가 1930년대 이후에는 대풍년이 드는 바람에 일본 농민들의 쌀값이 똥값이 되어 버렸다. 1930년경 조선 쌀 1섬의 값은 36원이었는데, 5~6년 후에는 한일 양쪽 모두 풍년으로 인해 겨우 16원이라는 반값도 안 되는 수준으로 대폭락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 를 시전하는 일본 농민들의 항의가 굉장한 이슈가 되어서, 모토미야 히로시의 만화 《나라가 불탄다》에서도 당대의 시대상으로 조선 쌀과 만주 쌀로 인해 농민들의 가계가 궁핍해졌다는 묘사가 나왔을 정도. 당시 일본이 산업화가 고도로 진행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실로 국가적 위기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런 얘기는 안 배운다[17] - 사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당초 일제로서도 무조건 닥치고 식민지! 같은 주장이 환영받았던 건 아니었다. 합병의 형태만 해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장은 걍 식민지화였지만 일본-조선 2중제국 수립부터 독일 제국 내부의 영방 국가들 수준, 영국-스코틀랜드 형태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일진회만 해도 뷔르템베르크 공국과 독일제국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일본제국 내부의 자치국을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일진회는 일본에 대해 굉장히 나이브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어떤 인간은 죽을 때 "일본한테 속았다!" 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도리어 위정척사파가 일본의 침략의지를 간파한 것이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
- 다만 이러한 주장과 별개로 일본 제국은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조선에 대한 동화주의 원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일본 제국의 위정자들은 일본의 진정한 이익은 중국 대륙에 있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조선을 확보한다는 것은 대륙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함과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완충지를 마련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에 대해 근대 문명의 혜택을 주고, 일본은 그 대가로 안보를 보장받는다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식민지 시기를 관통한 논리다. 물론 실제 식민지 통치에서 내지와 외지의 경제적 격차와 민족차별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했고, 그 결과 식민지 말기까지 조선을 동화시키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리고 애초에 파시즘이 판치고 있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병사들은 오물과 흙탕물로 가득한 참호에서 서로를 총검으로 찌르고 육편이 튀기는 끔찍한 참호전을 벌여야 했다.
- 참호전의 본질 자체는 끔찍하긴 하지만, 실제 전투의 양상은 훨씬 온건하게 흘러갔다. 당시 참전 장병들의 일기, 편지, 회고, 그리고 군사 보고서 등을 토대로 할 때, 당시 전선에서는 뜻밖의 호혜성의 논리가 작동했다. 야간에 군수물자가 완충지역에 뿌려지면 피아를 막론하고 전투 식량을 나르기 위해 참호에서 나섰다가 웃고 떠들면서 그것들을 가져왔고, 어떤 전장에서는 오전 8시~9시 사이는 자체 휴전시간을 정해놓기도 했으며, 저격수에게서 안전한 지역을 만들어 깃발을 꽂아 표시했고, 서로 참호 밖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발포하는 것은 예의 없는 일로 여겨졌고, 심지어 양측 휴식 중에 눈치 없는(?) 포병대가 포격을 퍼붓자, 그쪽 부대에서 "빌어먹을 우리 포병대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길 바란다. 미안하다!"(...)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자신들의 의례적인 공격의 규모와 종류, 강도, 시간, 목표를 예측 가능하도록 일정하게 하고, 심지어 이런 암묵의 룰은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퍼져나가서 높으신 분들이 "싸워 이기라고 기껏 총 쥐어 보내 놨더니 친목질이나 하고 있냐!" 같은 훈령을 시시각각 내려보냈을 정도였다.
가만보면 얘네들은 전쟁을 로맨틱하게 한다 - 게임 이론의 권위자 로버트 액설로드(R.Axelrod)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두고 "목숨을 걸고 벌이는 죄수의 딜레마" 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일단 평화를 지향하되, 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면 즉시 확실하고 단호하게 보복하는 패턴을 보였는데, 이는 팃포탯(Tit-for-tat) 전략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각지의 전장 상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병사들이 죽음의 공포와 불확실한 미래에 시달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 평화는 훗날 상관들이 상대편 참호를 대규모로 야습하는 명령을 반복적으로 내리면서 깨어졌지만, 정작 상관들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 참호전의 본질 자체는 끔찍하긴 하지만, 실제 전투의 양상은 훨씬 온건하게 흘러갔다. 당시 참전 장병들의 일기, 편지, 회고, 그리고 군사 보고서 등을 토대로 할 때, 당시 전선에서는 뜻밖의 호혜성의 논리가 작동했다. 야간에 군수물자가 완충지역에 뿌려지면 피아를 막론하고 전투 식량을 나르기 위해 참호에서 나섰다가 웃고 떠들면서 그것들을 가져왔고, 어떤 전장에서는 오전 8시~9시 사이는 자체 휴전시간을 정해놓기도 했으며, 저격수에게서 안전한 지역을 만들어 깃발을 꽂아 표시했고, 서로 참호 밖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발포하는 것은 예의 없는 일로 여겨졌고, 심지어 양측 휴식 중에 눈치 없는(?) 포병대가 포격을 퍼붓자, 그쪽 부대에서 "빌어먹을 우리 포병대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길 바란다. 미안하다!"(...)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자신들의 의례적인 공격의 규모와 종류, 강도, 시간, 목표를 예측 가능하도록 일정하게 하고, 심지어 이런 암묵의 룰은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퍼져나가서 높으신 분들이 "싸워 이기라고 기껏 총 쥐어 보내 놨더니 친목질이나 하고 있냐!" 같은 훈령을 시시각각 내려보냈을 정도였다.
- 1918년 10월 러시아 혁명 때 분노한 민중들이 군인들과 합세해 몰아닥쳐 피로 혁명을 일구어냈다.
- 실제로 당시 사망한 사람은 3명밖에 안된다. 거기다가 지키는쪽도 대충 싸워서 점심 먹다가 돌아와보니 일이 끝나있더라는 이들도 있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고 항복하였다.
- 틀린 사실. 유럽전선은 독소전쟁을 빼놓으면 이야기 자체가 안된다. 실제로 유럽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것도 쿠르스크 전투나 바그라티온 작전이 더 크다. 당장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도 몽고메리의 삽질때문에 네덜란드에서 아주 죽을 쑨다. 러시아인들은 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간다고. 애초에 독일군은 사망자 중 80% 가량이 러시아와 싸우며 전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에서도 서방권 연합국(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 등)들만이 조명받는 편인데, 2차대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사망자 절반 가량은 국민당이 낸 성과이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중일전쟁을 제외하고도 중국군은 태평양 전선까지 내려오며 일본과 싸웠다. 2차대전 후 냉전 하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공산주의 진영에 서게 되고, 한국인들에게 끔찍하게 남아 있는 한국전쟁의 원흉인 북한을 그들(중국/러시아)이 지원하고 도와주었기에, 전후 한국에선 반공/친미 분위기가 도사리며 중국과 소련의 업적은 과소평가되는 면이 컸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수학 성적이 뒤떨어졌다.
- 아인슈타인이 1935년 프린스턴에 있을 때에도 그런 소문이 있어서 아니라고 직접 인증했다.
-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긴 했지만, 애초에 김나지움 자체는 웬만한 독일 도시라면 도시마다 한개, 뮌헨이나 베를린 같은 큰 도시에도 2~3개 밖에 없는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 현대 대한민국의 중학교 같은 것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그곳에서 탁월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또한 그가 김나지움을 그만둔 이유는 학업 부적응 때문이 아니라[18] 그의 부모가 경영하던 가업이 망하는 바람에 이탈리아로 부모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끝내 김나지움 졸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부득이 외가 쪽으로 인맥이 있었던 헤어초크가 학장으로 있는 ETH에 수리물리교육과로 입학하게 된다. 처음에는 입학조건이 안 되어 낙방했다가, 1년간 스위스에서 남은 공부를 마친 후에 다시 도전하여 손쉽게 합격한다. 이곳에서 전자기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루머도 있지만 이는 아인슈타인이 그곳의 물리학 교수 웨버에 대하여 "저 인간은 남의 험담만 하고 강의는 불성실하게 함" 이라며 까대던 것이 와전된 것이다. 정작 웨버는 ETH에 아인슈타인이 처음 낙방했을 때 그의 천재성을 강조하며 그가 자신의 강의를 청강해도 좋다고 배려해 주기도 했었다. 나중에는 서로 갈라서게 됐지만... 또한 아인슈타인은 거기 그대로 머무르며 차후 독일군에 징집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 1886년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에 입학했을때 아인슈타인이 반에서 제일 성적이 좋았다고 그의 어머니는 기록했다. 수학 성적은 아니지만 김나지움 교장이었던 H. Wieleitner는 아인슈타인의 라틴어 성적은 적어도 2등급, 그리스어 최종 성적은 2등급이라고 증언했다. 아인슈타인이 다닌 김나지움이 제 2차 세계대전때 폭격당하면서 관련자료가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김나지움때의 수학 성적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ETH에 낙방하고 아라우 주립학교를 다닌 시절의 아인슈타인의 수학 성적은 최고등급이었다. [1]
-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세상과 담 쌓고 사회성이 부족한 부적응자였으며, 이는 어릴 때부터 보였던 자폐증 증세 때문이다.
- 사회 부적응자라기보다는 그냥 괴짜에 가까웠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Geek 같은 인상으로 보면 대충 비슷하다.(…) 그냥 이공계에 종종 보이는 특이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 대학교에서는 종종 교수에게 피곤한 질문을 던져서 미운 털이 박히기도 했지만, 김나지움에서는 수학 교사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하숙집 주인 가족들과도 원만히 잘 어울렸고, 가는 곳마다 친구를 만들어서 즐겨 어울렸으며, 평생 자신의 가족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그는 까다로운 구석이 분명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 아인슈타인이 유년 시절에 말이 늦게 트인 것은 맞지만, 소년기 이후로는 자폐증 증세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유전적으로 보아도 아인슈타인의 가계에는 비슷한 정신질환을 앓은 선례가 전혀 없었다. 그의 차남 에두아르트는 실제로 조현병 환자였는데, 이는 부인 밀레바 쪽의 가계에서 정신적 병력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다.
-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그전의 신화들이 많이 깨진 이유는 과거에는 비공개로 전해지던 그의 개인 편지들이 90년대 무렵부터 공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과 맞서던 미국에서 "독일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육 시스템에 저항하여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었던 천재" 의 이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덧씌웠기 때문에 이런 신화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다는 자성도 있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은 전쟁범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
- 추축국이 정책적으로 저지르긴 했지만 구성원 중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없는 국가는 이 세상에 없다. 특히 수많은 독일 및 점령지 여자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일이 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독일의 침공 때문에 소련의 나라 상황이 개판이 되여 도둑과 양아치가 들끓었고 이렇게 자질이 떨어지는 인원들이 소련군에 입대한 것이니 독일의 자업자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드레스덴 폭격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대규모 폭격작전도 전쟁범죄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연합국 역시 전쟁범죄가 다소 존재했지만, 먼저 전쟁을 일으킨 쪽이 추축국이었고, 추축국은 연합국과 달리 정책적으로 이런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개별 인원의 잘못인 연합군의 범죄가 크게 주목받지 않는것에 가깝다. 독일과 일본이 지구상에서 죽인 사람들만 4~5천만을 넘어가는데 이는 국가 주도로 저지른 일이다. 반면에 연합군은 일단 전쟁범죄행위를 금지시켰고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했어도 이를 단속, 처벌했다.
- 제2차 세계대전 때 추축국 소속 병사들은 전부 양민학살을 저지른 천하의 개쌍놈들이다.
- 추축군이 끔찍한 전쟁범죄들을 많이 저지른건 사실이지만 전부 그랬을 리는 없다. 애초에 무슨 ISIL처럼 국가의 탈을 쓴 테러 연합도 아니고, 파시즘에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가의 정규군들인데 전원 미치광이로만 이루어져있다는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단지 국가가 정책적으로 학살을 일으켰는 데다가 미치광이들이 주목을 받아 유명해지고, 개념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안 미친 게 당연한 거라서 그렇다어찌되었든 결국 추축국들 자체가 군국주의/파시즘 체제를 띄고 있어서 독일인, 이탈리아인, 일본인들도 다들 국가의 전쟁에 반강제적으로 협력하던 중이었다. 공장에 끌려가거나, 노동자로 끌려가거나 등 그랬기에 연합국이 본토 침공/공습을 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해도, 국제사회에서 그들을 민간인으로 보는 시각은 약했다. 어쨌든 다들 군수물품/물자 생산에 동원되는 판이었고.
- 추축군이 끔찍한 전쟁범죄들을 많이 저지른건 사실이지만 전부 그랬을 리는 없다. 애초에 무슨 ISIL처럼 국가의 탈을 쓴 테러 연합도 아니고, 파시즘에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가의 정규군들인데 전원 미치광이로만 이루어져있다는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단지 국가가 정책적으로 학살을 일으켰는 데다가 미치광이들이 주목을 받아 유명해지고, 개념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 독일 국방군은 일본군과 자국 무장친위대와는 달리 똘끼도 없고 기행도 없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군에서 미친놈들은 무장친위대 뿐이였다.
- 독소전쟁에서 제대로 광기가 폭발한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만행들을 보면 절대로 그런 소리가 나올 수가 없다. 나무위키나 한국 위키피디아에는 독소전쟁의 참상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모자라므로 외국 자료에서 찾아보는게 좋다. 왜 독소전쟁이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SS에 속해 있었다고 전부 히틀러 광신도에 양민학살자는 아니었고 전쟁범죄에 대놓고 반기를 든 인물들도 있었다. 일단 ss라는 특성상 국방군보다도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파울 하우서나 빌헬름 비트리히같은 경우를 보면 저 소리 안나온다.
-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숫자는 크게 과장되었다.
- 유대인 절멸을 향한 나치 독일의 광기와 비합리성이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다.
- 도리어 유럽의 많은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극도로 근대적이고 체계화된 시스템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다" 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풍조도 바로 홀로코스트라는 된서리를 맞아 수그러들었고, 또한 "Anything goes!" 로 흔히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도 홀로코스트와 무관하게 일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독일 학자들은 유대인의 객관적 열등함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고 연구했으며, 현대적 관료 시스템이 천만에 달하는 유대인들과 집시, 성 소수자들을 추적, 분류, 등록하게 했고, 소위 "컨베이어 벨트" 에 비견될 만한 체계적인 절멸 작업이 착착 진행된 것 역시 지나칠 정도의 냉정한 합리성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참고자료
- 나치는 아리아인/게르만족 외의 모든 민족을 열등하게 여겼다.
- 명예 아리아인이라고 협조적인 몇몇 민족들은 (예: 아시아인, 라틴족, 아랍인) 자기들과 동등하게 취급해줬다. 물론 명예 아리아인이 아니면 얄짤없었다.
- 진주만 공습 이후 열받은 미국은 대규모의 군수산업을 풀가동하여 함선들을 미친듯이 찍어내기 시작했고, 그 첫 결과물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을 통한 전세역전이다.
- 미드웨이 해전 당시 참여했던 함선들은 진주만 공습 당시 요행히 살아남은 소수였으며 새로 진수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서는 반쯤 못쓰게 된 것을 어찌어찌 수리해서 전쟁터로 다시 등 떠밀어 보낸(…) "요크타운" 같은 케이스도 있었다. 미군의 분노의 쇼미더머니가 그 결실을 맺은 것은 적어도 과달카날 전투 이후부터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이 가장 취약하던 위기의 순간에 벌어진 해전이었으나, 그들이 (그나마의 남은 함대만을 가지고) 승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자원을 동원한, 필사의 총력을 다해 준비한 해전에 가까웠다. 전투에 임하는 양과 질이 달랐던 게 아니라,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던 것.
- 과달카날 전투 당시에는 전황이 더욱 기울어서, 전투 초기 사보섬 해전에서는 미 해군이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발렸고, 심지어 산타크루즈 해전을 치른 뒤에는 일시적으로나마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운용 가능한 항모가 한 대도 없던 순간도 있었다. 당시 그나마 운용 가능하면서 일시 수리를 받고 있던 항모가 바로 그 유명한 "엔터프라이즈" 다. 직후 미군은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순양함 함대가 물자를 수송중인 구축함에게 역으로 털리는 망신을 당한다. 단, 이 해전 이전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로 과달카날 지역의 제해권 자체는 미군에게 넘어온 상황이기는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이 그 이후로는 미군의 물량공세를 도저히 당해내지 못했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이 진주만에서 기습을 당한 후, 미드웨이 해전부터 줄곧 멍청한 일본군을 떡실신시키며 승승장구했다" 의 상황까지는 아니었다는 것. 이 시기 일본은 중국과 끝없고 부질없는 전쟁을 한 지 몇 년이 되었기에 나름대로 단련되어있던 시기고, 미국은 전면전 경험이 없어서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했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물량/공업능력/인력 자원 면에서 미국/소련/중국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2차대전 중후반에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 애치슨 선언을 통해 미국은 일본만을 지킬 것이며 나머지는 미군이 안 지키는 지역이니 아시아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국제사회에 신호를 보냈다.
- 애치슨 라인은 추후의 국제분쟁 발생시 미 육군이 투입되는 한계를 설정한 것이며, 애치슨 라인 밖의 비공산권 국가들이 군사적 위협을 받을 경우 지상군 투입을 제외한 다른 방식으로 돕겠다는 의지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군비축소를 위해 고심하고 있었고, 향후의 국제분쟁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낙관적이었다고. 자세한 내용은 애치슨 라인 참고.
-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계속된 사죄로 모든 피해국들이 깔끔히 독일을 용서하고 지난일을 완전히 잊었다.
- 세계대전 전후 유럽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에는 무관심했다.
- 그렇지 않다. 지난 1971년 일본 쇼와 덴노와 고준황후 부부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일왕을 잡아다가 전범재판에 넘기라!!" 는 격렬한 시위를 한 적도 있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고. 애초에 미국 국민들이 일본에 증오를 품게 된 이유도 노골적인 포로학대 등 때문이었다. 다만 도쿄 전범 재판이 뉘른베르크에 비해 훨씬 느슨하게 진행되었고 나치에 대해선 발악을 하면서도 일본의 욱일기에 대해선 심드렁한 모습을 많이 보이긴 해서 완전히 틀리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하다.
- 독일에서는 개막장 극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 아돌프 히틀러를 악마 취급하지만, 일본에서는 도조 히데키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 일본이 독일에 비해서 극우 세력의 깽판이 좀더 노골적이고 공개적이다 보니 이런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개막장 극우들을 제외하면 도조는 좌우를 막론하고 악마 취급받고 인간 쓰레기 취급받는, 히틀러와 별 다를바 없는 처지다. 실제로 도조는 연합군의 간섭 없이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했어도 십중팔구 처형당했을거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의 전반적인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나마 베니토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도조에 비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인식이 긍정적인 편. 이탈리아도 엄연히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 2차대전을 일으키긴 했지만 전쟁범죄 부분에선 독일/일본뿐 아니라 헝가리 등보다도 훨씬 미미했다. 연합국의 2차대전 프로파간다 포스터에서도 처음엔 히틀러, 도조와 함께 악마 3인방으로 나왔으나, 나머지 둘에 비해 악명도 덜했고 큰 악행을 벌인 일이 없고, 이탈리아 자체가 빨리 항복하였다.
- 독일에서는 하켄크로이츠를 법적으로 금지한 반면에, 일본에서는 욱일기를 법적으로 금지하지 않고 계속 사용 중이다. 이것은 일본이 독일과는 달리 과거사 반성을 제대로 안했다는 대표적 증거이다.
- 국내 방송에까지 나올만큼 널리 퍼져있는 이야기인데, 사실 이건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만한 일이 아니고 나름 복잡한 사정이 있다. 추축국의 패전 후에 연합국에서는 추축국들의 전범들을 처벌하고 전후 수습 작업을 진행 중이였는데, 우선 독일에서 전후 수습 작업 중이던 연합국은 일당독재 체제로 나치 독일을 지배하고 있던 나치당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하켄크로이츠를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헌데 나치 놈들이 국기나 군기 등등 여기저기에 하켄크로이츠를 박아놓은 탓에 독일은 국기를 새롭게 바꾸고, 재무장 후에도 하켄크로이츠가 들어가지 않은 독일 제국군(...) 깃발을 재탕했다. 그리고 연합국은 일본에서도 독일에서의 사례를 토대로 전후 수습 작업을 진행했는데, 마침 일본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대정익찬회'의 일당독재 체제였기 때문에 연합국에서는 대정익찬회의 깃발인 대정익찬기를 법적으로 금지시켰다. 실제로 대정익찬기는 오늘날까지도 일본에서 전혀 쓰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정익찬회가 일당독재를 하고있던건 사실이였지만 이전부터 대정익찬회의 통제를 거부하며 그보다 강했으면 강했지 결코 약하지 않은 권력을 지닌 집단인 군부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군부의 수장이였던 도조 히데키가 내각총리대신까지 해먹은 이후로는 대정익찬회는 아예 군부의 보조 기관 정도로 전락해있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대정익찬회보다는 군부가 독일의 나치당과 같은 포지션에 가깝다고 보았고, 대정익찬기가 아닌 욱일기가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전범기로 분류되어야한다고 본 것이다.
- 흔히들 독일의 전쟁범죄 반성에 대해서 일본이 본받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는데, 정작 독일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전쟁범죄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사죄했지만 집시나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사죄는 하지 않았다. 게다가 독일 제국 당시의 식민지에 대한 사죄는커녕 도리어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 독일이 유대인 학살에 비하여 타 민족에 대한 전쟁범죄는 반성하지 않았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일단 2000년 대에 들어서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과거 식민지에 저지른 잔혹행위들을 사과하는 움직임이 생겨나자 독일 정부 역시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다만 독일을 무작정 모범적인 사례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집시 학살에 관해서는 거의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언급을 할 때도 집시는 명확한 언급 없이 '그외 기타 등등' 정도로 언급된다. 그리고 동방 정책을 언급하며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한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동방 정책의 주된 목적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냉전을 극복하고 동독을 비롯한 공산권과 교류하는 것이였다. 결과적으로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소련의 보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소련과도 교류를 했으나 이건 양국의 높으신 분들끼리 정치적으로 합의한 결과였지 절대로 동유럽권에게 빈틈없고 깨끗하며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하여 이뤄낸 결과는 아니였다. 오히려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동방 정책은 독일이 동유럽을 침략하여 큰 상처와 피해를 준 국가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날먹 독일
- 독일이 유대인 학살에 비하여 타 민족에 대한 전쟁범죄는 반성하지 않았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일단 2000년 대에 들어서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과거 식민지에 저지른 잔혹행위들을 사과하는 움직임이 생겨나자 독일 정부 역시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다만 독일을 무작정 모범적인 사례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집시 학살에 관해서는 거의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언급을 할 때도 집시는 명확한 언급 없이 '그외 기타 등등' 정도로 언급된다. 그리고 동방 정책을 언급하며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한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동방 정책의 주된 목적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냉전을 극복하고 동독을 비롯한 공산권과 교류하는 것이였다. 결과적으로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소련의 보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소련과도 교류를 했으나 이건 양국의 높으신 분들끼리 정치적으로 합의한 결과였지 절대로 동유럽권에게 빈틈없고 깨끗하며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하여 이뤄낸 결과는 아니였다. 오히려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동방 정책은 독일이 동유럽을 침략하여 큰 상처와 피해를 준 국가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프랑스는 전후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단죄했고 이는 한국도 본받았어야 한다.
-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거의 학살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모습이 좋지 않았다. 비시 정부 수뇌부의 일부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처벌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독일군을 애인으로 둔 여자들, 정치적 노선이 다른 레지스탕스(!)들, 저항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들로, 만만한 놈들 잡아다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봐도 될 정도. 비시 정부 당시 85만 명의 공무원들이 있었지만 징계조치를 받은 사람들은 3천 명에 불과했으며, 거꾸로 레지스탕스들이 부역자 처벌을 요구하며 봉기했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고. 관련 포스트
- 공식적으로 처벌된 인원은 총 4만 명인데, 이들조차도 1951년에 국가재건을 명목으로 국민투표(!)를 거쳐서 대부분 사면했다고 한다.
- 미국은 쿠르트 발트하임과 같은 국제인사라도 나치와 관련되면 얄짤없이 대했다.
- 미국은 쿠르트 발트하임이 과거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국방군 장교란 이유로 입국을 불허했지만 우습게도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나치 과학자들을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빼돌려 집도 주고 차도 주고 극진히 대접했다. 순전히 쿠르트만 저렇게 대우한 것은 단지 보여주기란 냉소적인 비판도 상당하다. 오히려 이러한 점을 들어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의 이중성을 논하는 경우도 많다.
-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다.
- 이스라엘인들 중 골다 메이어 싫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 무엇보다도 골다는 히틀러 못지 않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만약 충분한 지원과 국제사회의 침묵이 있었다면 아랍인들을 상대로 홀로코스트를 실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아랍인 학자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그-년-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항목 참조.
- 중국이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사해 운동 때문이다.
- 단정짓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제사해 운동보다 토법고로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일부러 자국의 구축함을 격침시킨 후 북베트남 소행으로 덮어씌운 사건이다.
- 음모론자들의 흔한 개소리. 교전 자체는 있었다. 미국 정부가 이걸 적당히 포장하고 과장해서 베트남 전쟁의 빌미로 삼았기에 문제가 되는 것.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 패전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안보의식과 반공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당시 남베트남은 심각할 정도의 도덕적 부패를 보였으며, 이는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사건에 대해 통칭 "마담뉴" 라고 불리는 쩐레쑤언(Trần Lệ Xuân, 陳麗春)이 망언한 저 유명한 바베큐드립으로 적나라하게 대표된다. 나라가 부패하자 사회 각계각층이 썩어가기 시작했고 이런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들의 사기가 높을 리 없었다. 애초에 남베트남은 그 잘난 반공정신 말고는 국가로서 제대로 된 행정력, 공권력 등을 처음부터 보여주지 못했다. 와중에 소위 핑퐁 외교라고 불리는 친중국 노선으로 미국이 갈아타고, 일단 미국이 파리협정을 통해 손 털고 나가자 그간 미국만 믿고 버티던 남베트남 군대는 졸지에 당나라 군대가 되어버려서 온 사방에서 명령거부와 전장이탈, 자멸, 지휘계통 붕괴 등이 벌어지면서 한순간에 폭삭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한국군이 작전하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한국군이 철수한 뒤 곧바로 밀려버렸다.(…) 그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난무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남베트남의 사례는 무너질 만한 나라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가 남베트남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반공정신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 남베트남 사람들의 반공의식이 정말로 부족했다면, 이 사람들은 대체 뭐 때문에 대책도 없이 바다로 뛰쳐나왔던 걸까?
- 일본은 아직까지도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자고 한국 측에 지속적으로 제안해 오고 있지만, 한국은 지금껏 그 셀 수 없이 많은 요구들을 모두 묵살해 왔다.
- 독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 상당수까지도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이 한국에 정식으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요청한 건 아직까지 딱 3번 뿐이다. 그것도 최근의 일이 아니라 1952년, 1962년, 1965년밖에 없다.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후로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은 단 한 차례도 더는 회부를 요청할 수 없었다. 당시 조약 내용 중에 "한일 간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외교상의 조정 또는 제3국에 의한 조정을 통하기로 한다" 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 일본 외무성 발간 자료 등에는 마치 "1952년, 1962년, 1965년 이래로 일본은 계속..." 과 같이 요청이 많이 뒤이어 온 것처럼 쓰이긴 했지만, 자기네들도 대국민용으로 "회부를 검토하겠다, 회부 요청을 고려중이다" 식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즉 한국은 이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고, 독도에 군대를 주둔한다거나 분쟁지역화를 한다거나 하면 도리어 유리한 위치를 잃게 될 위험이 있다.
- 2차대전 당시 생체실험은 추축국만 했으며 연합국은 생체실험을 하지않았다 그리고 생체실험대상은 식민지인이나 전쟁포로들에게만 행해졌다.
- 2차대전 당시 추축국 국민들은 매우 잘 살았으며 대우도 아주 좋았다.
- 추축국 국가들이 하나같이 파시즘, 군국주의 국가여서 국민들이 죄다 군대로 끌려갔다. 독일이나 일본을 예로 들면, 40년대에는 남자란 남자는 모두 군대로 끌려가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고, 군대로 끌려가는 게 아니면 군수공장에서 착취 수준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일본이 조선인을 징용하고, 노동력으로 끌고가고, 금품이나 금속 등을 뺏어간 건 이미 자국에서 일본인들에게 털어먹을 대로 털어먹은 후여서 엄청 쪼들리는 상황이었던 것도 있다. 이 시기엔 분명히 동남아, 태평양, 중국 대륙에서 시작한 전쟁이었는데 연합군 공군이 일본 본토에 심심하면 폭격을 할 정도로 전황이 최악이었다. 이런 오해가 나오는 것도 사실 틀린 건 아닌게, 독일이나 일본 등은 자신들이 지배/점거한 국가에서 현지 국민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차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들이 들고 나온 논리 자체가 민족주의, 우월주의이기도 했고. 즉, 2차대전 시기 독일인, 이탈리아인, 일본인들의 삶은 시궁창 수준[20]이긴 했지만, 그들이 침략하여 지배한 국가의 국민들에 비하면 나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았던 건 아니었다.
- 일본과 독일은 2차대전 당시 식민지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생체실험으로 의학을 발전시켜왔다.
3 한국사
3.1 전근대
- 우리 민족은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으며, 수천 년간 침략만 당해온 평화적 민족이다.
- 이게 별로 좋은 것도 아닌데 많이 믿고 있는 편견. 아마 국사에서 타민족 국가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적이 없어 보이는 점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이 말을 우리 민족은 수천 년간 두들겨 맞았으며 머리도 나쁜 호구 민족이라는 소리로 보인다라는 소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다.
- 사실 실제 한국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두들겨 맞은 적도 많지만 먼저 선빵을 때리거나 신나게 두들겨 팬 경우도 꽤 있다. 고대에는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의 한족 군현인 낙랑군 등을 축출해버리고,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등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가장 온건한 대외정책을 갖고 있던 조선 조차 여진족이 강성해질 조짐이 보이면 가차없이 밀어 붙였다. UN에 따른 현대의 국제적 가치관이 아닌 과거의 가치관에 가까운 사람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현대에서는 전혀 부끄러운 문장이 아니다.
꽤 최근 역사에서는, 한국 정부가 선전하던 이 말을 믿고 한국을 빨던 사람들도 있었다.오히려 우리나라에 꽤 많이 퍼진 악성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보고, 분명하게 저 선전이 거짓으로 증명되고 있는 현실이 더 부끄러울 수도 있다. - 합당한 명분이나 이유가 있다면 먼저 선수를 치는 것도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미국 역시 선수를 쳐서 막장 국가들을 해방시키기도 했다. 가끔 오해나 삽질 때문에 망한 적도 있지만 어쨌거나 제국주의 시대 이후 미국은 결과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가끔 독재자 지원이니 하며 미국도 다를 바가 없는 나쁜 놈이라는 인식도 있는데 이건 국력의 한계란 현실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문제다.
미국도 막장 국정 운영을 해도 되는 무한한 파워를 가진 것이 아니다.까놓고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무작정 독재자를 끝까지 지원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많은 독재자들이 결국 토사구팽을 당했으며 간단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대만 해도 외적으로는 대한민국을 도와주고 있어서 다른 국가들이 보기에는 독재를 옹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독재 상태를 끊임없이 견제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는 배후에 미국[21]이 있었다. - 하지만 정성적으로 보나 정량적으로 보나 이웃한 중국, 일본, 북방민족에 비해 침략을 덜 한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좀 있었던 침략도 대부분 상대방이 먼저 원인 제공을 한 경우이다.
-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속국을 자처한 한국의 역사는 굴욕적이다.
- 우리 민족은 동이족(東夷族)이다.
- 동이족은 단순히 ‘중국’에서 보기에 동쪽에 존재했던 민족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한민족’은 거기에 속했던 것뿐이기에 우리 민족 = 동이족 식의 사고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나마 동이족이란 단어는 본래 은주 시대에는 산둥 지방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후대에는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동이 항목 참고.
-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갖고 있다.
- 사실상 세계에서 반만년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밖에 없다. 신화상 연대인 기원전 2333년[22]으로 따져도 5000년보다 4000년에 가까우며
2167년 이후에는 이 문구 수정바람실제 고조선이 역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높이 쳐서 기원전 7 ~ 8세기부터[23]이니 5000년의 3분의 2밖에 안 된다. 청동기시대를 기준으로 삼아도 무리수이기는 마찬가지. 덧띠무늬새김토기 등의 발굴 이후로 기원전 20~15세기를 청동기에 편입하려는 학자들도 있지만 토기가 바뀌었다고 청동기가 열리는 게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현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청동기가 발굴되는 것은 실제 ‘청동기 시대’로 불리는 시대 중에서도 후반부이며 이 때문에 ‘한국사에서 청동기시대를 굳이 산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식민사관의 청동기 부재론과는 다른 문제이다. 가뜩이나 세계사에서 청동기시대의 비중이 줄어가는 추세라……
- 사실상 세계에서 반만년 역사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밖에 없다. 신화상 연대인 기원전 2333년[22]으로 따져도 5000년보다 4000년에 가까우며
- 개마무사는 허구이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 과장되게 그려진 산물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말이 갑옷 무게를 버티지 못한다.
- 북한 지역은 아니지만 1992년 6월6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해동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실제로 마갑이 출토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처럼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을지는 미지수.
- 서동요의 내용은 사실이다.
-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금판에는 서동요 내용과 상반되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때문에 현재 논란중인 상황. 부인이 여러명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고, 완전히 설화라는 주장도 있다.
- 의자왕의 삼천궁녀 설화는 의자왕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일본에서 지어낸 것이다.
- 국내에 생각보다 정말 많이 퍼져있는 편견. 헌데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딱 봐도 말이 안된다는걸 알 것이다. 애초에 백제와 가장 친한 국가가 일본이였으니 말이다. 간혹 일본이 아니라 신라에서 지어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아무도 지어낸적 없다.(...) 조선 시대 문인들이 의자왕 관련 소설을 집필할때 사용한 표현을 현대의 우리나라가 잘못 해석하여 생겨난 오해다. 자세한 것은 의자왕 항목 참조.
-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반역자다.
- 현대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보니 생기는 오류. 사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어느정도 동질성이 있긴 했지만 같은 민족이나 운명공동체로서의 의식은 대단히 희박했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민족공동체 의식이 있었다면, 이 세 나라와 "고대 일본" 도 거의 민족공동체 의식을 공유했다고 봐야 한다. 김춘추가 당나라와 연합한 이유는 단순이 신라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 아무리 일찍이라도 몽골 침략기 늦으면 근대 이후에나 정착된 민족이란 개념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무시한 채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분명한 논리적 오류다. 이런 논리로라면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존속한 남한은 민족 반역자들의 국가라는 소리가 된다.
- 좀더 간단한 예로, 우리나라가 미국과 힘을 합쳐 북한을 멸망시켰을 때 후대의 역사가들이 우리를 외세를 끌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민족반역자로 그린다면 대충 우리 기분이 어떨까? 북한은 개막장 국가라 경우가 다르다고? 수십년간 치고받고 싸운 나라끼리의 이미지가 과연 북한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나을까?
- 삼국사기는 사대적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이다.
- 애초에 삼국사기는 설화집이 아니고 삼국유사는 정사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무리지만, 삼국사기 자체로도 사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고려사가 고려의 왕들을 세가에 기술한 데 반해 삼국사기는 삼국의 왕들을 본기에 기술에 놓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24] 다만 김부식의 혈통 때문인지 신라를 띄웠다는 소리는 듣는다. 삼국유사에서도 자주적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내용이 자주 나온다. 승려였던 일연은 대놓고 연개소문을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 멸망을 위해 환생한 존재라며 디스하기까지 한다. 두 역사서 모두 고구려나 발해 등의 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긴 하지만……
-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국가다.
- 정확히 말하면 말갈계와 혼합된 국가다. 삼국사기에서는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보았을 정도. 삼국사기 이전의 구삼국사와 13세기 저작인 제왕운기에서는 발해를 고려의 선대 역사로 보기는 했다. 조선 초기인 세조 시기에도 발해를 조선의 선대 역사로 인식하는 견해가 있긴 했는데 이게 공식화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실학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조선의 역사로 인식하는 견해가 생긴다.
-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이라서 흰 옷을 입었던 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 흰 옷을 입었다.
- 고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흰 옷 좋아했다는 기록이 멀쩡히 남아 있고, 정부에서는 ‘동방이니 청색 입어야 안 되냐’고 하면서 청색을 입히려고 자주 시도했지만 실패.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의금지령까지 내린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 섬유 제조 기술 및 양, 세탁 기술을 감안해서 때 타기 쉬운 흰 옷이 얼마나 번거로웠을지 생각해 보자. 게다가 백색 안료는 원래 귀한 탓에 염색 비용도 비쌌다.
즉 예나 지금이나 비싼거 좋아하는건 사람의 본능적인 심리라는 것이런 옷을 좋아한 게 아니면 왜 굳이 입었을까? 애당초 삼베, 모시를 뽑으면 상아색 가까운 색이 나오지 순백색이 나오지 않는다. 누가 염색 기술이 없어서 흰 옷을 입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삼베,모시나 이후 면화 등 천연섬유의 색상은 원래 백색이 아니다. 베이지색 정도가 원래 색이다.당장 기능성 속옷 매장에서 유기농 무표백 내의 찾아봐라, 무슨색인가즉 백색 직물은 염색한 것이라는 것.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흰색 셔츠 등은 표백제 등을 이용해서 표백한 것이며 형광 물질이 없을 수 없다. 흰옷의 경제적 문제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의 식민사관론자들의 헛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 고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흰 옷 좋아했다는 기록이 멀쩡히 남아 있고, 정부에서는 ‘동방이니 청색 입어야 안 되냐’고 하면서 청색을 입히려고 자주 시도했지만 실패.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의금지령까지 내린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 섬유 제조 기술 및 양, 세탁 기술을 감안해서 때 타기 쉬운 흰 옷이 얼마나 번거로웠을지 생각해 보자. 게다가 백색 안료는 원래 귀한 탓에 염색 비용도 비쌌다.
上曰:“玉色, 國初所尙, 然高麗人好着白衣之言, 見於中國史傳。……” 임금이 말하기를, “옥색은 국초(國初)에 숭상하던 것이나, 그러나 고려(高麗) 사람이 흰옷을 입기 좋아한다는 말이 중국의 사전(史傳)에 보이고……” - 세종실록 91권 |
令朝官士人, 着黑色衣, 禁白色衣。 東方之人, 自古尙白, 國典雖有白色之禁, 而因仍成習, 莫之變, 上思以易之, 遂定是制。 조정의 관리와 사인(士人)으로 하여금 검은 옷을 입게 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하였다. 동방 사람은 예로부터 흰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기는 하나 그대로 습속이 이루어져서 바꾸지 못하였는데, 상이 바꾸고자 하여 이에 제도를 정한 것이다. - 현종실록 19권 |
- 성리학자들이 세운 조선은 사대주의에 쩌들어 옛 한민족의 자주적인 기풍을 말살한 수구 꼴통, 유교 탈레반 국가이다. 적어도 후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 위에 중세는 기독교에 찌들어 로마의 기풍을 말살한 암흑시대였다는 것과 비슷한 헛소리다. 조선 개국으로부터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유학자들이 매우 수구적이고 뜬구름만 잡는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반도의 성리학자들이 등장한 고려 말에는 기존 고려 지배층이나 거기에 빌붙어 살던 구 유학 세력, 불교 세력보다 훨씬 개혁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세력으로, 여말에 가장 성공적인 개혁을 완수한 것도, 종국엔 500년 간 존속하던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도 이들이였다. 당시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자로 자타공인되고, 그 문화는 동아시아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시기로, 개혁 세력이 적극적으로 중국 문화를 수용한 것은 요즘 한국에서 구미 선진국들의 사례를 참고하고, 적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조선은 태생부터 성리학 국가였던 탓에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을 억제하고, 이 과정에서 몇몇 큰 사건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단순히 사상의 충돌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 겹쳐 있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숭유억불의 경우 고려 말기 사찰의 타락이 영향을 미쳤고[25], 가장 큰 가톨릭 박해였던 병인박해의 경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상황과 큰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덤으로 여기서 불교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인식이 나아져[26] 조선 후기 사찰 건립에 관과 지방 사족들의 협조도 찾아 볼 수 있다.
- 우리나라가 일본에 뒤쳐진 것은 조선의 책임이다.
- 일본의 혼슈지방만 해도 단순한 면적 뿐만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연속적인 평지, 습지 면적 또한 한반도와 비교해 넓고, 기후대 또한 농사에 더욱 유리하다. 이런 요인들이 점점 누적되면서 근세에 결국 일본 열도의 경제력이 한반도를 추월한 것이지 조선 위정자들의 실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의 통일된 정권이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오래 간 정권이 없었기에 섬 안에서 싸우기 바빠 생산성이 충분히 발휘 되지 못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고 260년 동안 평화가 지속 되어 인구가 크게 늘고 한반도보다 넓은 땅과 좋은 기후의 진가가 발휘 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일본 열도의 경제 생산력 자체는 이미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한반도를 넘어섰다는 연구도 적잖게 등장하고 있다. 다만 이를 하나의 국가로 묶을 구심점이 없었을 뿐.
- 언문(諺文)은 양반층이 훈민정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 그저 한문을 그 이상으로 중히 여겼을 뿐 언문이란 말 자체에 비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여기긴 힘들다. 세종부터 훈민정음을 언문으로 지칭했으며 양반층이 훈민정음을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참고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의 '한글' 문서 공식 항목명이 언문이다. 바로가기
- 조선시대 양반은 죽을 때까지 양반 계급일 것이다.
- 조선시대는 이론적으로는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등한 양천제였다. 애당초 양반이란 말 자체도 원래는 과거에 합격해서 문반이나 무반이 된 관리들에게만 붙은 칭호였다. 즉, 근원적인 의미는 문무양반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평민도 과거에 급제를 해서 관직에 오르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대역죄 등으로 몰락한 경우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후손도 천민 계급으로 격하되는 건 물론이고,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사람이 없거나, 돈 없으면 평민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았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자. 괜히 족보를 샀을까?
- 양반 가문에서 3대째까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단 1명도 없으면 양반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래서 양반들이 과거에 목숨을 건 것이다. 초시라도 붙어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양반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 냈다. 학생들과 관료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다는 사실이 와전된 사례. 흥선대원군의 개혁책 중 하나인 호포제 또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징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 양반들의 경우는 저 법률을 악용해서 세금을 안내려고 하기는 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긴 했다. 단적인 예가 서원과 향교에 학생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원래 과거 응시생 보호책이지만, 나이 80에도 과거 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죽을 때까지 향교와 서원의 학생으로 지내곤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위패 대신에 쓰는 지방을 보면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현고 학생부군 신위 顯考 學生父君 神位'라고 적히는데[27], 저기서 학생이 바로 향교의 학생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만일 벼슬을 했다면 관직명이 적힌다. 만일 영의정을 지냈다면 현고영의정부군신위가 된다. 현대에는 공무원에 해당하는 직책을 역임한 경우에는 그 직책명이 적힌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면 현고서울대학교교수부군신위가 되고, 공무원이면 '사무관', '서기관', '주사보'처럼 직급명으로 적는다.
공무원 기준이기 때문에 '현고삼성회장신위' 같은 건 못 적는다.
- 조선시대 평민이나 천민들은 모두 문맹자(文盲者)들이다.
- 조선시대 암행어사들은 한번 출도하면 대규모 병력이 들이닥치며 "암행어사 출도요!" 를 요란하게 외쳤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게 조총은 본 적도 없는 신무기였다.
- 16세기 중반부터 조총으로 추정되는 총포를 접한 기록이 나온다. 물론, 반짝 관심 정도로 지나갔기에 임진왜란 초기에 그렇게 고생한 것은 맞다. 여진족이 자주 사용해서 신립 장군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의 패배는 여러 삽질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과부적의 영향이 크다. 아니, 그러기보다도 임진왜란 직전 서애 류성룡과 신립의 회견에서 류성룡은 ‘우리도 조총을 쓰자’고 말하지만 신립은 ‘그거 쏘면 맞는다요?’라면서 조총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 사실, 조선이 조총을 쓰지 않은 이유는 조총보다 더 화력이 강한 승자총통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다만, 단발 화력은 강해도 실용성에서 현저히 뒤쳐져 나중에는 조선도 조총으로 전부 갈아탔다.
- 북인들은 중립 외교 정책에 찬성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본사 여러 신하들의 헌의를 보니, 상경(常經)을 지키고 권도를 행하는 것과 붙들어 두고 단절하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는 대체로 동일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의 헌의는 ‘명나라에 품윤을 하지 않고 대국의 원수와 사사로이 서로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고 하였고, 유희분(柳希奮)의 헌의 또한 ‘너희들이 만약 지난 일을 깊이 사과하고 명나라로 귀순한다면 양국의 옛 호의를 서로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변방 장수에게 글을 만들게 하소서.’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의 헌의가 서로 다른데 저희로서는 감히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라 주상의 재가를 여쭙니다.” - 광해군일기 139권 |
- 사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광해군 중립외교의 구체적 구상안과, 효용 여부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다.
- 홍길동, 임꺽정은 의적이다.
- 홍길동은 연산군 때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를 의적으로 볼 어떤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절대 의적이 아니다. 하지만 홍길동이 도적질을 하던 시기의 임금이 하필이면 그 연산군이라서 폭군 시대에 활약한 의적이라 하여 오히려 홍길동전에서 버프를 받게 되었고 그런 홍길동전의 영향으로 현재와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임꺽정 또한 홍명희의 소설에서 의적으로 각색되지만, 기록상으로 보이는 행동은 방해가 되면 민간인도 쉽게 쳐죽이거나 권력자에 간접적으로 빌붙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임꺽정이 홍길동과는 달리 백성들을 생각하는 면모를 약간 보인 것은 사실. 홍길동은 자신을 숨겨준 백성조차 기밀 유지라는 이유로 얼굴가죽을 벗겨 죽였고 당대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이 홍길동 같은 놈아!"였다.
- 조선 500년은 허송세월이였다.
문참극- 대표적인 식민사관이다. 동시대 서구국가들의 눈부신 발전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겠지만, 전근대 한민족 국가 중 가장 발전된 형태의 나라였을 뿐더러, 내부적으로도 많은 변혁이 있던 시기다. 지금 이 위키를 무슨 문자로 작성하는지 생각해보자. 삼국시대를 다룬다는 사극들이 시대를 초월하는 고증을 보여주는 것도 영향을 끼쳤을 듯.
-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국가였으며, 다만 일부일처제와 처첩제가 공존한 것일 뿐이다. 즉, 양반들은 다른 양반 집의 자녀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정식으로 혼인 시켰으며, 이후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보인다면 그녀를 첩으로 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지나친 문자적인 해석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부다처제'의 사전적 정의는 "한 남편이 동시에 여러 아내를 두는 혼인 제도"이므로 여기서의 '처'는 신분으로서 '첩'과 구별되는 정실이 아닌, 단순한 여성 배우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즉 처첩제는 일부다처제 중에서 여러 아내들의 권리와 지위가 다른 하위 종류일 뿐이며 엄연한 일부다처제의 일종이다.
- 천방지축마골피는 조선시대 천민들의 성씨다.
3.2 근대
- 갑오개혁와 동시에 신분의식도 완벽히 철폐되었다.
-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위해 노력했다.
- 해당 항목 참조. 확실한 건 2000년대 일반인들의 시각에는 판타지가 많이 덧씌워져 있다는 것이다. 대중 매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보여주는 사례.
- 구한말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과 의사들은 한국을 사랑했으며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 위의 고종과 다소 비슷한 사례. 게다가 이쪽은 특히나 개신교계에서 밀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사실 호러스 뉴턴 알렌 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이 사람들도 직간접적으로 제국주의적 침탈에 함께한 바가 있다.
- 흥미롭게도 무슬림의 시각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을 바라보고 평가한 글이 발견되었다. 이희수 교수가 쓴 책 《이슬람과 한국 문화》 에 한 무슬림이 쓴 조선 여행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1913년 투르키스탄 출신의 압둘라쉬드 이브라힘(Abdul-Rashid Ibrahim)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던 한국을 방문하고 그의 여행기 《이슬람세계》(Alem-i Islam)에 적은 내용에서는 '...기독교의 만연도 국민의식의 마취에 일익을 담당하는것 같다. 사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무기는 주류인것 같다. 평생 술을 입에 대보지도 않은 사람도 기독교인이 됨과 동시에 적어도 한 차례는 성 예수의 신성한 피가 담긴 포도주라 하여 의무적으로 음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의 피니, 성령이 담겨 있는 것이니 하여, 인간의 참다운 이성의 힘과 판단력을 종교의 힘으로 상실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학자들이 한 국가의 도덕관을 자기네들의 종교적 신조에만 의거해서 판단하고, 유도하는 이상, 참다운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종 주류의 범람과 그들의 과도한 음주 기질이 도덕성의 파괴를 촉진시키고 있다...전국 어디를 가도 술병을 손에 든채 취기에 빠져 있는 한국인을 볼 수 있다...어느날 저녁, 한 선교사는 한국인 남녀를 한 장소에 모아 놓고는 우선 술잔부터 돌리면서 선심을 쓴다. 원하는 대로 술을 마시게 한다. 모두가 취기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에는 또다른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줄을 선다. 한 잔의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입교한 자는 등록 카드에 기록이 되고 곧 바로 술이 나온다. 이 보다 더 입교에 쉬운 종교가 어디 있으랴...한국인의 경우는...(기독교로의)개종에 비례해서 악행의 만연도 심해지고 있다...'# 라며 선교사들이 성찬식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고 쓰기도 했다. 구체적인 종파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술을 예수의 피라고 믿으며 의무적으로 마신다는 점에서 정교회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톨릭은 성체성사 때 성체(빵)만 받아먹는 경우가 많고,[30] 개신교는 술이 예수의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다만 이브라힘이 기독교 종파의 차이에 대해서 무지하여 개신교의 성찬식을 '아 저놈들 예수의 피라고 믿고 마시는 구만'이라고 오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개신교 자체가 수많은 종파들의 통칭이다. 즉 종파마다 신학적 스팩트럼이 다양하며 한국에는 음주를 허용하는 종파 역시 당연히 있다.
- 방곡령을 선포한 조병식은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인물이었다.
- 오히려 이런 탐관오리였다. 사실 그의 행적에서 방곡령이 오히려 뜬금없어 보일 정도. 본인이 수탈할 곡식을 일제가 가져가서 그런 게 아니냐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 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 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
-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가 개통된 도시는 다름아닌 서울(1899)이다.
- 3.1 운동은 종료 시까지 비폭력 무저항 평화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 폭력 시위의 양상도 확인되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난 시위인 데다가, 일본 헌병의 강경 진압도 있었는데 비폭력 일관으로 진행되었다는 말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이 한국 입장에서도 별로 바람직한 역사 인식은 아니다.
- 시위가 무르익고 각 농촌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시위는 더욱더 과격해졌다. 또한 일제의 학살에 가까운 진압에 의한 반작용 역시 원인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린치를 당하고, 경찰서, 관공서 등이 불타는 등의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 3.1 운동 때 구호는 ‘대한 독립 만세’였다.
- 해당 항목 참고. 오히려 ‘조선 독립 만세’가 더 많이 쓰였다.
-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는 탑골공원에서 낭독되었다.
-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려 하였으나, 이후 태화관으로 장소가 변경되어 그곳에서 낭독되었다. 그러나 33인 민족대표가 오지 않는다는걸 확인한 후에는 탑골공원에서도 학생 주도로 자체 낭독식을 갖기는 하였다.
-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투척했다.
- 지금까지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쇼와 일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장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KBS 스펀지 197회 방송분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을 던졌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도시락 폭탄은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따로 제작한 자폭용 폭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이전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사(爆死) 미수 때도 폭탄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왕이 살아남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 폭탄은 물통으로 개조하고 도시락 폭탄은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자폭을 하도록 따로 제작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불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제는 서울에 건물을 지으면서 하늘에서 봐야만 '大日本'(대일본)이라는 글자가 보이는 구조로 만들었다.
- 해당 문서 참고.
- 일제는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풍수지리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백두대간에 박아놓았다.
- 역시 해당 문서 참고.
- 일제는 원래 Corea로 표기하던 우리나라 영문 이름을 Korea로 바꾸어 놓았다.
- 이 역시 해당 문서 참고.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에 겨운 국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며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흔들었다.
-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8월 16일의 얘기다(…). 8월 15일 당일에는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전해 줄 라디오 설비 자체가 열악했기에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지 못했으며, 항복 직후 곧바로 그날 중으로 군대가 다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온했다. 일본군이 빠져나가고 일제 패망의 소식이 전해져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 지나서였다.
- 경상도, 특히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은 원래부터 반공, 우익 성향이 강했다. 그리고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은 원래부터 공산주의,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
- 요즘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1940년대까지만 해도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고,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다고 한다. 즉, 평양은 일제강점기 때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대구는 일제강점기 때 공산주의‧사회주의 활동이 왕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별칭들이 붙여졌다. 그러나 현재 두 도시들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래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자세한 것은 대구 10.1사건 참고.
- 영남권에 속하는 부산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야당 지지 성향이 꽤 강했던 곳이었다. 현재는 새누리당 텃밭인 대구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는야당 후보가 절반 가까이는 당선되었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 전후 일본은 한국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일체의 보상금/배상금을 오늘날까지도 지급하지 않았다.
- 한일기본조약 문서 참고. 보상/배상 자체는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사죄도 수차례 있었으나, 거의 한국을 멸시하는 우파 성향의 정권이 50년을 넘게 독점을 해서 계속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본은 정권이 그다지 바뀌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제대로 사과를 하려는 정권이 나왔다.그런데 그 보상/배상이라는 것도 독립축하금으로 받긴 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국제법상 '식민지배 배상금'이라는걸 받아낸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웃국가의 독립을 축하하는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를 내걸고 배상금을 받아낸 것이다.[31] 한마디로 현재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더 이상 공식적인 금전적 보상/배상을 할 책임이 전혀 없다.
- 한일기본조약 문서 참고. 보상/배상 자체는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사죄도 수차례 있었으나, 거의 한국을 멸시하는 우파 성향의 정권이 50년을 넘게 독점을 해서 계속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 측 혹은 진보 측이 만든 편향적인 단어다.
- 원래 광주 측은 민중항쟁, 의거 라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쓴 적도 없다. 실은 저 단어는 노태우 정권이 만든 것이다.[34]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의 안전과 존립을 위협할 폭력을 벌인 과격 봉기(uprising)이다.
- 여기에는 5.18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5.18은 공수부대의 살육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를 무장하고 저항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저항권" 을 이유로 폭력을 쓴 것. 관련 내용은 김영택 문서도 같이 참고.
- 이러한 혼동이 악의적이지 않을 경우, 거의 대부분은 "전두환 정권은 헌정사적 정당성이 확보된 정권이다" 라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국민의 대표로서(?) 정당하게 선출된 신군부 세력에게, 일부 내란세력이 반발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는 설명밖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도리어 전두환 정권은 부당한 폭력적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국민의 민주적 정치참여를 또 다시 유보시킨, 정당성을 얻기 힘든 내란세력이며, 이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은 반헌법적 내란세력에 대항하여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함으로써 헌법정신의 회복을 도모한 시민 무장투쟁이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위의 정리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면 이하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어볼 것. 이미 역사의 판단은 내려진 상태이고 더 이상 재론의 여지 자체가 없다. 전두환이 일체의 대통령 예우에서 제외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법 1997.0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문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 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35]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36] 그 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37]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38] |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재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다.
- 우리나라 역사에서 5.18만큼 조사를 많이 한 사건도 없다. 1980년 계엄사, 1982년 국방부, 1985년 안기부, 1988년 정부, 1988년 국회, 1995년 검찰, 1996년~1997년 사법부, 2005년~2007년 국방부, 2012년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에서 9번이나 조사했다. 33년 동안 매 정권마다 조사 안 한 적이 없는 사건이다. 제5공화국 시절의 조사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사태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했다.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그 민주사적 가치를 공인한 바 있으며, 각 정권에 걸쳐서 33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막과 전말이 충분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5.18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제기하거나 뜬소문을 신봉하는 것은 대한민국 3부의 판단과 역대 각 정권들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대한민국 정부의 합당한 권위와 정당한 판단을 위협하는 언행이 될 수 있다.
- 외환위기(IMF)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사치스러운 풍조와 흥청망청 돈을 낭비하던 허랑방탕한 소비생활의 결과물이다. 대한민국은 번영에 눈이 멀어 함부로 샴페인을 터뜨리고 근검절약을 하지 않은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들, 심지어 당시의 일부 만평들도 그런 식으로 묘사하곤 했다. 집집마다 밍크코트가 한 벌씩은 있었다느니, 서민들이 분수에 안 맞게 백화점에서 돈을 펑펑 써댔다느니, 일용직 노동자들이 큼지막한 세단을 굴렸다느니 등등... 물론 그런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중산층의 소비생활에 익숙하지 않던 관점에서 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중산층들은 먹고사는 문제나 미래에 대한 대비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헬스, 문화, 여가, 스포츠, 레저, 자기개발, 자기실현 등의 새로운 소비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소비활동은 가히 대한민국 역사상, 아니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위와 같은 편견대로라면 그런 탐욕스러운 국민들이 어떻게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일부 교과서, 참고서에선 외환위기의 주된 이유 중 하나를 "국민들의 과소비" 로 서술하여 사실상 경제위기의 책임이 국민에게도 있다고 한 반면, 교과서에서 국민들이 단합하여 사회를 구하는 모습에 대한 서술을 "금모으기 운동" 이라 함으로써, 탐욕스러운 국민에 의해 벌어진 위기를 그 원인인 탐욕스러운 국민이 금고를 털어 해결한다는 굉장히 기형적이고 모순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대조적으로,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에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200여 톤이 넘는 금을 모으는 동안, 높으신 분들은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거나 국적포기를 하는 등 추태를 보였다. 또한 국민들이 기부한 금조차도 대기업 탈세에 이용되었는데, LG상사, 삼성물산, SK상사, 현대종합상사, 한화 등의 재벌그룹은 종합상사를 통해 금을 헐값에 판뒤 10%의 부가세를 환급받는 형식으로 약 2조 원 가량의 탈세를 저질렀다.
-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 주장학자다.
- 오히려 반대이다. 김현구 교수는 임나일본부설 비판에 평생을 바친 학자다. 유사역사학자 이덕일의 택도없는 모함에 불과하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 주장 학자는 오히려 이덕일이다!!
- 이 주장에 대한 자세한 반론은 김현구 임나일본부학자설을 보면 알 것이다.
- 대한민국이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했더라면 사회의 부조리함과 악습이 없고 국민들이 살기 좋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 사람은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주도했고, 오히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이 빨치산 토벌 때 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사과했고 주민의 안전을 우선시했다. 또한 일본군 소위 출신이였던 김익렬은 제주 4.3사건 당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협상을 했지만, 조병옥은 협상을 깨고 강경진압을 명령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이와 같은 예시를 봐도 이제껏 사회정의를 어지럽히는 대상들은 단순히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만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이런 사건들이 독립운동가 출신들의 손으로 저질러졌으면 용서할 것인가? 이 사람은 독립운동 조금 했다고 면죄될 것인가? 단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생겨났던 기득권들[40]을 모두 절대악 취급하면서 생긴 편견일 뿐이다.
4 문헌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 정확한 표현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다. 해당 항목 참고.
- 병법 36계, 즉 ‘36계 줄행랑’이란 말은 손자병법에 나온다.
- 적어도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란 말이 남북조시대 단도제가 한 말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누가 처음 제안한 말인지도 불분명하고,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도 아니다.
-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등갑군은 등나무를 활용해 만든 갑옷을 입었다.
- 오늘날 알려진 등(藤)과는 달리, 여기서 말하는 등나무는 외떡잎식물 계열의 끈 같은 나무를 말한다. 대나무 이상으로 질겨서 생필품을 제작하는 데 이용되는 식물로, 원래 藤은 이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등나무는 多花紫藤.
- 《촉왕본기》 에 따르면, 소쩍새의 수많은 이름들 중 하나인 귀촉도(歸蜀途)는 촉한의 망국의 황제 유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소쩍새는 유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촉 지역의 고대 국가를 통치했던 "두우" 라는 인물과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귀촉도 이야기가 나오는 《촉왕본기》 는 전한 시대의 책이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은 성경에 나온다.
- 베트남의 호치민은 과거 박헌영에게서 받은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으며 그의 묘소에도 목민심서가 남아 있다.
- 90년대 TV프로그램에서 언급한 것으로 시작되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가 생전에 목민심서를 읽고 감명을 받았는지도 불분명하며, 그의 시신 머리맡에 목민심서가 놓여 있지도 않고, 그의 묘소에 남아있는 12만 권의 유품들 중에서도 목민심서는 없다.#
- ↑ 구경거리라는 의미도 있다.
- ↑ 마등은 한수의 난에 한수의 편에 들어가서 동탁 이하급의 역적이고, 공융, 도겸, 장양, 공손찬이 참가를 하지않았다. 손견은 독립군벌이 아니라 원술의 소속으로 참가했다.
- ↑ 이일로 인해 한복은 동탁급의 평가를 받았다.
- ↑ 영웅기 주석 출처
- ↑ 여기서 이전 문서에서 편견의 오류가 있는데 손견이 화웅을 죽였다고 하지만 참했다는 기록은 직접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휘하가 베었다는 뜻이다. 자세히 한것은 일기토 항목 참고.
- ↑ 정확히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축일. 이 날은 당시 달력으로 볼 때 동지에 해당했는데, 이 날을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점차 길어졌디에 이 날이 태양신의 축일이 된 것으로 보인다
- ↑ 국제 과학사학회 회장 로널드 넘버스 등
- ↑ 여기는 유럽과 이슬람이 모두 공격했다.
- ↑ 특히 여자 몽마인 서큐버스와 교제했다는 등의 이유
- ↑ 최대한 학살당한 숫자를 늘릴수록 여성들이 더 많이 차별, 학살당했다는 유리한 근거가 되기 때문.
- ↑ 중세 왈도파 사냥으로 100만명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개종한 무어인과 유대인까지 씨를 말렸다.
- ↑ 출처는 《유럽의 마녀사냥》 텍사스 주립대 역사학 교수 브라이언 P. 르박(Brian P. Levack)著
- ↑ 실제로 적지 않은 유명인들의 어록들이 그런 식이다. 목격자가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했던 말이 현대까지 이어졌다면 (본인이 "나 이렇게 간지나게 한 말씀 했다" 고 자랑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어떻게 검증될 수 있겠는가?
- ↑ 바로 이 때문에 유럽 지식인들은 종교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미권 지식인들에 대해 "너네는 아직도 19세기를 살고 있냐?" 고 까기도 한다. 어찌보면 세속 국가임에도 종교의 영향력이 상당한 미국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 ↑ 제노바에는 이 이름의 공항과, 호텔이 존재한다.
- ↑ 대만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었던 데다 일제가 사탕수수 농장 경영으로 재미를 봤다.
- ↑ 다만 산미증식계획에서 볼 수 있듯이 산업화 초기 일본에서 도시화로 인한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에서 값싼 쌀을 들여오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30년대 쌀값 폭락 이후 일본 정부의 지시만 듣고 생산량 증가에 올인했던 조선인 농민들은.... 학교에서 당시 일본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배우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배운 것이 일본사가 아니라 한국사이기 때문이다.
- ↑ 애초에 그는 김나지움 9년 생활 중 8년을 별탈없이 잘 이수했다.
- ↑ 뭐 사실 팔레스타인 문제 등 때문에 독일 내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
- ↑ 연합군이 폭격하고 본토로 쳐들어오고, 국가는 국민들 끌고 가고, 식량/돈/생필품 징발에다 군수품을 위해 열악한 노동력으로 끌려가니
- ↑ 미국 정부는 4월 19일 이후 이승만 정부에게 타협을 촉구하였고 후에 대규모 시위가 재발하자 한국 정부요인을 압박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승만 정부의 비상계엄령을 발동과 군을 투입을 막은 것도 미국이다. 당시 주한미군 지도자들은 시위 진압을 위해 이승만 정부가 한국군을 동원하는 것을 승인하였지만, 군이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요구하였다. 현재까지 공개된 미국 외교문서들을 분석하면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흔히 그리고 과도하게' 압력을 행사했다. 나중에 더 공개가 된다면 박정희나 전두환 당시 미국의 개입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사실 박정희의 쿠데타도 막으려고 했으나 윤보선이 우유부단해서 실패했다.
- ↑ 애초에 이 년도가 단순히 ‘요 임금 즉위 50주년에…’라는 문구를 억지로 계산해 넣은 것이다.
- ↑ 최근에는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상향해서 본다
- ↑ 세가는 제후들의 기록이고 본기는 천자의 기록이다.
- ↑ 정도전이 불씨잡변에서 신랄하게 비판
- ↑ 물론, 승려들의 노동 가치도 동시에 깨달아 여러 국가사업에 부려 먹히던 것도, 그럼에도 유학자들이 멸시를 거두지 않은 것도 사실.
- ↑ 현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고, 고는 위패와 제주의 관계를 의미하고(고는 죽은 아버지의 경우 부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부는 조고, 증조부는 증조고라고 적는다), 신위는 말 그대로 혼령의 자리라는 의미.
- ↑ 이 문단에서 말하는 왜구는 일본의 정규군이 아니라 13~16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일본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을 말한다.
- ↑ 평양에서 있었던 사건은 신미양요가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신미양요는 강화도에서 일어났다.
- ↑ 양형영성체라고 하여서 성혈(포도주)까지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게다가 20세기초에는 더더욱 드물었다. 설령 양형영성체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체를 포도주 찍어서 먹는 것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고 싶어서 들어가기에는 가톨릭은 영 좋지 않은 종교다.
- ↑ 실제로 당시에는 끼리끼리 뭉치느라 미국 같은 경우는 공산권에 대한 일체의 경제적 지원과 학문적 지원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었고 그걸 자기 진영의 나라들에게 강요했다. 식민지와 식민 지배국과의 관계도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진영 자체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오히려 과거 식민지로부터 '역청구권'을 주장하며 역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 경우도 있었다. 냉전이 끝난 시대가 되어서야 과거 식민지들에게 사죄하는 움직임이 생기고있는 것. 단, 1세계와 2세계의 경우는 자기 진영의 국가들에게는 사과와 배상이 많이 이루어 졌다.3세계는 사실 자기 진영과도 따로 노는 국가들이 많아서 - ↑ 전투기 조종사를 비밀리에 파견했는데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러시아어로 교신하는것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미국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소련과 마찮가지로 3차 대전으로 번지는걸 막기 위해서 모른척 했다.
- ↑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 ↑ 자세한 건 김영택 박사가 쓴 박사학위논문 내용의 일부 참고.#
- ↑ 즉 우발적이거나 마지못해 군사력이 투입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는 뜻.
- ↑ 즉 계엄군 측이 먼저 발포했다고 대법원이 인정했다는 뜻.
- ↑ 즉 북한군의 개입이나 다른 안보위협 정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대법원이 부정했다는 뜻.
- ↑ 즉 광주에서의 학살이 국익이나 안보와 같은 대승적 차원에서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도리어 전두환 개인의 권력욕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잔혹하게 제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는 뜻.
- ↑ 해군 비리의 규모가 유달리 큰 것은 해군장비가 워낙 비싼 경우도 있어서 그렇다. 그렇지만 거기서 거기.
- ↑ 특히 친일파들 중 처벌받지 않고 살아남은 부류들